65세의 초로 홍 선생의 피서법

기사입력 2017-08-09 10:50 기사수정 2017-08-09 10:50

폭염이 등에 달라붙는다. 장마철이라서 그런지 습도도 높다. 더위는 홍 선생의 숨을 아예 막아버릴 기세다. 홍 선생은 전기세 고지서를 들여다보다 한숨을 지으며 집을 나선다. 선풍기로는 해결되지 않을 한여름 폭염. 에어컨을 틀 여건은 되지 않으니 찬바람 이는 곳을 찾아야 한다. 안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집에서 한참 떨어진 은행 문을 열고 들어가 다짜고짜 소파에 앉는다. 은행 도우미가 다가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고 묻는다. 어물어물 눈치보고 있으려니 조금 식어가던 얼굴이 다시 화끈거린다. 계속 앉아 있을 자신도 용기도 없다. 불현듯 은행을 나온 홍 선생은 한참을 걸어 전철을 탔다. 4호선 오이도행이었다. 전철 무료승차권을 손에 쥔 초로의 홍 선생은 대한민국에서 노인으로 인정해주는 만 65세다. 전철은 돈을 내지 않고도 아무 때나 탈 수 있다. 시원하다. 목덜미에 돋았던 땀과 함께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사라졌다. 유일하게 나이 먹은 것이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 때가 바로 전철을 공짜로 이용할 때다. 지하철공사 사장은 노인의 무료승차로 인한 피해가 크다고 강변하지만 그럴수록 공짜 탑승은 달달하다. 전철 안에는 역시 노인들로 가득하다. 모두 더위를 피해 나온 것은 아니겠지만 유난히 노인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공짜 에어컨을 즐기러 온 노인이 꽤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홀 선생은 노약자석을 피해 섰다. 마치 누가 더 나이가 많은지 ‘민증을 까보자’는 듯 서릿발 같은 눈빛으로 서 있는 노인들을 보면 그곳에 서 있을 자신이 없다. 한참을 지나도 자리는 나지 않는다. 요즘은 젊은이들도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노인이 흔해 빠져 누가 노인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일까. 마침 휴대폰은 젊은이들에게 좋은 핑곗거리를 제공한다. 머리를 푹 숙이고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는 척할 필요도, 옆에 있는 노인에게 신경 쓸 필요도 전혀 없다. 한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일어선다. 홍 선생은 최대한 천천히 점잖은 모습으로 65세의 대한민국 노인답게 빈자리를 향해 걸었다. 아뿔사 그런데 옆에 서 있던 다른 젊은이가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앉아버린다. 그러고는 곧장 휴대폰 몰입 모드로 바뀐다.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다. 헛웃음이 실성한 사람처럼 새 나왔다. 하긴 경쟁시대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남 눈치 보지 않는 방법밖엔 없을 터. 이를테면 자리가 났을 때는 엉덩이를 먼저 들이 민다든지 가방을 집어던져 자리를 우선 차지하고 본다든지 하는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말이다. 그러니 자리가 나면 체통이고 염치고 벗어던지고 그야말로 번개처럼 행동에 나서야 한다. 아, 이게 무슨 꼴인가. 평생을 끝없는 경쟁 속에서 살았는데 이제는 전철에서도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해야 하다니 홍 선생은 목젖까지 올라오는 허탈감을 떨치기 어렵다.

홍 선생은 아예 출입문 근처로 자리를 옮긴다. 노인이 왜 노인석으로 가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부담을 주느냐는 비난의 눈빛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금정역쯤 당도하니 자리가 나 겨우 아픈 허리를 추스를 수 있게 됐다. 들고 온 신문을 펼쳐 편안한 자세로 읽는다. S대 사회학과 교수의 말이 눈에 띈다. 노인들의 전철 피서에 대해 교수는 “주위에선 65세가 젊다고 하지만 에어컨 사용료마저 부담될 정도로 경제활동을 못하고 있는 노인들의 빈곤을 드러내는 씁쓸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홍 선생은 빈곤한 노인을 되뇌다 깜빡 잠이 들었다.

그가 잠에서 깬 것은 승객과 잡상인의 말다툼 때문이었다. 복대를 파는 상인의 목소리가 시끄럽다며 중절모를 쓴 한 노인이 비난을 했고 상인이 대꾸를 하면서 말싸움이 촉발됐다. 싸움은 상인을 비난하는 중절모를 쓴 노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지만 오히려 그 노인의 거침없는 목소리가 더 시끄럽고 피곤했다. 홍 선생은 중절모를 쓴 노인에게 “그만큼 했으면 그만 좀 하시지요”라고 말했다. 자기편이 있다는 생각을 한 상인의 의기소침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싸움은 끝이 났고 홍 선생은 다시 깜박 잠이 들고 오이도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눈을 뜬다. 무릎 위에 낯익은 복대가 하나가 놓여 있다. 잡상인이 놓고 간 것이다. 실수로 빠뜨렸을 리는 없다. 잠깐이나마 자기편을 들어준 홍 선생에게 감사 표시를 한 모양이다. 홍 선생은 복대를 들고 서울행 전철을 갈아탔다. 횡재수가 있는 날인가보다. 전철에서 공짜 피서하고 선물로 복대까지 얻었으니 말이다. 이쯤 되면 더위도 한풀 꺾이지 않겠는가. 홍 선생의 입가에서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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