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전 영화① 몰락한 귀족 집안 이야기

기사입력 2018-07-06 09:49 기사수정 2018-07-09 15:01

'안조가의 무도회(A Ball at the Anjo House)'

▲‘안조가의 무도회’(요시무라 코사부로(吉村公三郎) 감독, 1947년 작, 89분)
▲‘안조가의 무도회’(요시무라 코사부로(吉村公三郎) 감독, 1947년 작, 89분)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부와 명예를 누려왔던 안조가(家)는 백작 지위는 물론, 빚에 몰려 저택마저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럼에도 파리 유학을 다녀온 화가 아버지 타다히코(타키자와 오사무), 이혼당해 집으로 온 맏딸 아키코(아이조메 유메코), 피아노나 두드리는 방관자 아들 마사히코(모리 마사유키) 모두 과거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보다 못한 차녀 아츠코(하라 세츠코)는 지난 시절과 결별하기 위한 마지막 무도회를 열자고 한다. 빚을 지게 획책했던 교활한 사업가 신카와 류자부로(시미즈 마사오)가 안조 집안을 삼키려는 걸 간파한 아츠코는 집안 운전사였던 건실한 사업가 토야마(간다 다카시)에게 도움을 청한다.

‘안조가의 무도회’(1947)는 몰락한 귀족 저택에서 열리는 마지막 무도회라는 연극적 설정 하에, 전후 일본 사회가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묻는 영화다. 신구세대를 대변하는 인물 간 갈등, 그리고 이들이 무너지고 반성하고 개안하는 과정을 통해 답을 구한다. 아츠코의 밝은 얼굴 위로 엔딩 자막을 흘리는 데서 답은 분명해지지만, 좋았던 시절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에게도 일말의 측은함을 싣는다.

아버지는 여전히 신카와를 믿으며, 그의 딸 요코(츠시마 케이코)와 아들이 결혼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하녀 치요(무라타 치에코)의 애정 어린 호소를 무시하던 아들은 신카와의 속내를 간파하고는 요코를 강간하려 든다. “마음은 아직 귀족”이라고 외치는 장녀는 자신을 사랑해온, 그리고 자신도 사랑하는 토야마를 차마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물의 성격과 내면은 그들 방에 걸린 서양화로도 읽을 수 있다. 아버지 방에는 조르주 루오 의 ‘늙은 왕’이, 하녀를 농락하는 아들 방에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 그림이 걸려 있는 식이다.

안주, 패배 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와 아들, 장녀. 군수 물자로 부를 축적한 기회주의 사업가 신카와와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으로 떠오른 건실한 토야마. 마지막까지 충심을 바치려는 집사장. 새로운 시대를 건강한 정신으로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는 유일한 인물 아츠코의 고군분투로 모든 인물과 관계가 바로 잡힌다. 심지어 아츠코는 홀아비인 아버지와 오래 정분을 나눠온 게이샤를 무도회에 초대해, 결혼 발표를 하게 만든다. 초대받은 이들 모두가 비아냥거리던 가운데 갈등이 봉합되는 대단원은 저택 입구를 지키던 사무라이 장수의 갑옷이 쓰러지는 것으로 상징된다.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에 영향 받은 신도 가네토의 오리지널 각본에 기초한 ‘안조가의 무도회’는 1947년 '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1위 선정 작이자, '키네마 준보 올타임 베스트 일본영화 100'에 꼽힌 일본 흑백 고전이다. 이러한 평가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은 2015년 세상을 떠난 배우 하라 세츠코(原節子)다.

하라 세츠코는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등의 거장 영화에 출연하며 1940~50년대 일본 영화 황금기를 대표했던 전설적 여배우다. 26년간 107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하라 세츠코는 미모와 연기력이 여전했던 42세가 되던 해 돌연 은퇴한다. 그레타 가르보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쇠락해가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죄송합니다"라며 영화 산업, 언론, 팬으로부터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1963년, 자신의 영화 스승 오즈 야스지로 장례식장이 마지막 공식 석상이었다. 이후 카마쿠라시에서 친지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소식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는데 2015년, 사망 뉴스가 뒤늦게 전해졌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고, 출연작 이미지와 완벽한 자기 관리 덕분에 하라 세츠코는 '영원한 성처녀'로 불리었다. 2000년 ‘키네마 순보’가 선정한 '20세기 영화 스타-일본 편'에서 여배우 부문 1위로 선정될 만큼, 현대에도 일본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사랑받았다. 자서전 ‘이대로의 삶의 방식으로’에서 밝혔듯, 나이 든 일본인에게 향수를 자아내는 전전(前戰)의 가치관, 즉 남편을 잃고도 홀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미망인의 의지가 읽혔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웃고 있어도 눈물을 머금고 있는 듯 아련한 분위기를 풍기는가 하면, 심신이 밝고 건강한 딸과 어머니를 모두 연기할 수 있었고, 기품 넘치는 기모노 차림과 단정한 신여성 차림도 잘 어울리는 정결한 미모로 인기를 얻었던 하라 세츠코. 그녀의 미모와 기품, 연기력을 꽃피운 감독은 오즈 야스지로다. ‘만춘‘과 ’맥추‘에서는 결혼을 마다하는 노처녀 마음을 섬세하게 연기했고, 오즈 야스지로의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동경이야기‘에서는 남편을 잃고도 시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젊고 아름다운 직장인 며느리로 분했다. 하라 세츠코의 이미지를 순종적이면서도 현명하고 건강하고 밝고 기품 있는 여성으로 그려낸 이 세 작품은 하라 세츠코의 극 중 이름을 딴 '노리코 삼부작'으로 불린다.

가족과 효, 결혼이 주제였던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서 하라 세츠코는 전통적 여성상으로 향수를 자극하는 한편 부드럽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은, 쾌활하면서도 의지 강한 여성상을 구축했다. ‘안조가의 무도회’ 역시 이러한 여성상을 십분 발휘한 초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염문설이 있기도 했던 오즈 야스지로 사망 이후 영화계에서 사라진 하라 세츠코. 1963년, 60세 생일에 암으로 사망한 오즈 야스지로 역시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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