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한가운데 있을 때 중년이던 엄마의 삶은 중요하지 않은 줄 알았다. 엄마는 그냥 그 이름으로 살아가는 줄 알았다. 당시 유행하던 꼬불꼬불 파마머리에 어디서나 흔한 비슷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늘 분주하던 엄마.
‘엄마는 세상살이에 무슨 재미가 있을까?’
6남매를 돌보느라 쉴 새 없이 바쁜 엄마의 인생을, 어쩌면 그런 생각조차 없이 무심하게 바라본 것 같다. 엄마는 그냥 엄마니까, 마치 내게는 영영 오지 않을 시간처럼.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때때로 엄마는 6남매를 어떻게 키웠을까 감탄하면서 딱 그 절반인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허둥지둥했다. 여전히 그 모습으로 진행 중이다. 아이들은 잘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잘 자라주는 거라는 말처럼 내 아이들도 시간과 햇볕과 비와 바람을 맞으며 잘 자라주었다. 그렇게 성장한 첫딸이 조막만 한 아이의 엄마가 되자 여전히 엄마가 서툰 필자는 할머니가 되었다. ‘엄마도 버거운 내가 할머니가 되다니!’
내 딸의 딸은 끊임없이 “암무니, 암무니” 하면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알고 보니 할머니란 이름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었다. 꼬맹이가 정하는 거였다. 정말 놀라운 깨달음이었다.
할머니가 된 어느 아침 거울 앞에 마주 섰을 때 거울 저편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있었다.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확인하니 흰 머리카락이었다. 혼자 늙어갔는지 유난히 굵고 구불거리는 흰 머리카락이 신경이 쓰여 단번에 뽑아버렸다. 내친김에 자세히 살펴보니 귀 언저리로 제법 넓은 부위가 희끗거렸다. 거울 속에 엄마를 닮은 중년 아줌마가 서 있다. 나이를 가만히 세어 본다. 중년이던 엄마의 나이를 지나는 중이었다.
엄마의 나이가 되어보니 알겠다. 엄마의 나이는 무료하지 않았다는 것을. 여전히 꿈이 있고 여전히 세상살이에 재미가 있다는 것을. 지나온 날이 많아지니 남아있는 날의 소중함을 더 잘 안다는 것을. 이마에는 켜켜이 주름이 쌓여가도 그 마음에는 아이가 하나 웅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겠다. 엄마를 바라보는 아이들이 있어 씩씩한 어른으로 살고 있었다는 것을.
내 아이들도 중년이 된 제 엄마를 무심히 보겠지. “엄마도 마음은 청춘이야!”라고 한들 예전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년의 딸은 안다. 지금은 팔십 넘어 노년의 삶으로 내달리고 있는 엄마의 마음 안에도 아이가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어른들도 바라봐 줄 어른이 있다면 그 안에 쉬고 있는 아이를 깨울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바라봐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스스로 아이가 되어버리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