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운명, 영화 ‘체실 비치에서’

기사입력 2018-09-25 08:19 기사수정 2018-09-25 08:19

▲사진은 본 영화 사이트 체실 비치에서(박미령 동년기자)
▲사진은 본 영화 사이트 체실 비치에서(박미령 동년기자)
흔히 과거를 회상하다 보면 어떤 운명적인 순간들과 마주친다. 그럴 때마다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당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선택들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떤 인생이 펼쳐졌을까? 작가 이언 매큐언은 자신의 소설 ‘체실 비치에서(On Chesil Beach)‘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우리는 이를 영화로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나무와 꽃과 새 이름을 무수히 많이 알고 자연을 사랑하는 역사학도 에드워드(빌리 하울)와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고 클래식을 전공한 옥스퍼드 출신의 재원 플로렌스(시얼샤 로넌)는 운명적인 만남의 결실로 결혼에 골인하여 지금 이곳 체실 비치에 있는 작은 호텔로 신혼여행을 왔다. 영화는 체실 비치의 아름다운 풍광과 끊임없이 흐르는 배경음악을 통해 이들의 운명을 암시한다.

신혼 첫날 호텔 방에 들어선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사랑해!”를 연발하지만, 내심 초조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다. 성이 조금씩 개방되기 시작한 1962년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섹스는 아직 서툴고 어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칠고 감정적인 에드워드는 무작정 서둘렀고 성에 엄격한 영국 사회의 문화에 익숙하며 어린 시절 성적 트라우마를 겪은 플로렌스에게 첫 경험은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둘의 합방은 실패로 끝나고 거친 언사를 주고받은 끝에 플로렌스는 방을 뛰쳐나간다. 바로 이 순간이 이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플로렌스는 밖으로 나가 체실 비치의 긴 조약돌 백사장을 걸어 낡은 나룻배에 앉아 있고 뒤를 따라 나간 에드워드는 그녀에게 모진 욕설을 퍼붓고 그녀는 마음의 결심을 그에게 토로한다. 가장 행복했던 날 그들은 헤어진 것이다.

물론 스토리는 간단하지만, 이 영화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영화는 사이사이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과거를 교차 편집한다. 그곳에서 그들의 만남과 연애 과정이 드러난다. 런던 변두리 지방대이긴 하지만, 역사학과를 수석 졸업한 에드워드는 자신의 기쁨을 함께 나눌 대상이 없다. 집을 뛰쳐나간 그가 어느 대학 반핵 행사장에서 플로렌스를 만나 한눈에 반한다.

아버지가 변두리 시골 초등학교 교장이고 어머니는 그림을 그리지만, 뇌 손상을 당한 사건으로 정상이 아닌 에드워드 가정에 비해 전기회사를 경영하는 중상층 가정으로 돈을 중시하는 플로렌스의 환경은 애초 어울리기 힘든 조건이다. 그럼에도 플로렌스는 에드워드의 부모를 존중하고 에드워드는 플로렌스 부모에게 무시당하고 멸시받지만, 참아내면서 사랑을 키운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히 키워왔던 사랑이 한순간에 허무하게 끝나버린 배경에는 이런 환경과 계층 간 보이지 않는 간격이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욱하는 성격으로 싸움을 즐기던 에드워드의 거친 감성이 플로렌스의 차분하고 예술적인 감성을 포용해내지 못한다. 어쩌면 이들의 헤어짐이 찰나의 행동에서 유발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런 감정의 누적이 원인이라는 말이다.

가지런하게 뻗어 있는 조약돌 해변도 자세히 보면 작은 돌 해변과 큰 돌 해변으로 구분되어 서로 섞이지 못한다. 배경으로 흐르는 음악도 플로렌스의 클래식과 에드워드가 좋아하는 로큰롤로 양분된다. 결국 이언 매큐언은 모든 운명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는 해석을 드러낸다.

영화 후반부 동료 첼리스트와 결혼한 플로렌스가 45년간의 연주 생활을 마감하는 고별 연주회에 서로 다른 삶을 살아낸 에드워드가 일찍이 그녀와 약속했던 C 5번 좌석에 앉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엇갈린 삶의 회한이 응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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