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화려한 등장이 또 있을까. 건강미 발산하는 젊음의 무대를 요즘 말로 제대로 씹어 먹었다. 그저 걷게만 해달라는 심정으로 체육관 문을 두드렸을 뿐인데, 효과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소박한 소망을 빌었을 그녀는 15cm 유리구두 위에서도 위풍당당했다. 제25회 WBC 피트니스 오픈 월드 챔피언십 피규어 38세 이상 부문에서 2위를 차지한 임종소(林鍾昭·75) 씨를 만났다.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시작하는 살맛나는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방송을 보면 유명인이 이미지 변신을 위해 살을 뺀다거나 피트니스대회에 나가 건강한 근육을 자랑하는 모습을 종종 접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그때 잠시뿐. 화제성은 쉽게 가라앉고 만다. 하지만 지난 5월 WBC 피트니스 오픈 월드 챔피언십(이하 WBC)에 출전했던 75세 보디빌더 임종소 씨의 인기는 각종 매체를 타고 꾸준하게 전파되고 있다. 환한 미소에서 건강한 에너지와 밝은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 제 모습이 저 처녀 때 성격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활달하고 똑 부러지는 성격이었거든요. 아버지가 부평에서 상업을 하셨는데 둘째 딸이었던 제가 장사를 거들었어요. 저 시집갈 때 친정에 가게를 사주고 온 사람이라니까요. 75세, 지금이 가장 행복한 것 같아요.”
싱그럽고 통통 튀는 목소리를 가진 매력녀가 불과 몇 달 전 관중들 앞에서 멋진 근육을 드러내며 완벽한 포즈를 취하던 임종소 씨다. 그녀를 만난 시간은 오후 3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하고 왔어요. 주중 3시간씩 오전 11시 40분부터 오후 2시 40분까지 식당에서 설거지를 해요. 그 이후에는 체육관에 와서 운동하거나, 오늘같이 인터뷰가 있으면 약속 잡거든요. 저는 하루에 딱 3시간만 일하면 됩니다. 별거 없어요. PT(개인강습) 비용 내려고 다니는 거니까요.”
1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딸네 집에서 생활한다는 임종소 씨는 자녀들에게 부담 주는 것이 싫어서 돈 쓸 데가 생기면 필요한 만큼 벌어서 쓴다.
“처음 일하러 갈 때 나이를 살짝(?) 속였어요. 한 달쯤 되어 세금 정산을 한다고 해서 신분증을 사장님께 보여드렸더니 당황하시더군요. 그래도 한 달 동안 좋게 봐주셨나봐요. 1년 넘게 다니고 있으니까요.”
될성부른 보디빌더 알아본 관장님
그녀가 피트니스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허리 협착증 때문이었다. 맷돌을 다리에 맨 것처럼 몸이 늘 무겁고 힘들었다.
“땅에 발을 디디면 미칠 듯이 아프더라고요. 뼈가 내려앉으니까 못 걷는 거예요. 제가 에어로빅을 35년 했어요. 강사증만 없을 뿐이지 안 해본 동작이 있겠어요? 그렇게 활동적인 사람이 잘 걷지 못해 집에서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봐요. 삶이 끝난 거잖아요. 진지하게 전동 휠체어를 사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병원을 다녀도 잠시만 반짝 좋아질 뿐이었어요.”
담당의는 근육이 약해졌으니 근육강화운동을 해보라며 권했다. 마침 에어로빅 학원에 가던 길에서 봤던 체육관 입간판이 떠올랐다.
“예사로 쳐다보고 다녔는데 그때 생각이 나더라고요. 맞춤운동, 재활운동이라는 문구가요. 곧장 체육관으로 가서 의사와 했던 얘기를 박용인 관장님께 했어요. 의사와 같은 생각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자리에서 등록했어요. 그날 오전 11시쯤 체육관으로 들어갔는데 PT 받을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더군요. 두 시간 기다려 바로 운동을 시작했어요. 정말 절실했어요. 이거 아니면 죽는다, 여기서 못 고치면 절름발이가 되거나 휠체어를 타야 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운동을 했어요.”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관장이 권하는 훈련을 믿고 했다. 협착 증세는 한 달 만에 좋아졌다.
“휠체어를 타는 상상까지 하며 막막했는데 좋아졌잖아요. 정말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운동했어요. 일주일에 3회 받던 코칭을 2회로 줄이고 한 3개월쯤 됐을 무렵, 관장님이 ‘보디빌더 한번 해보세요’ 하더라고요.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러냐며 웃어넘기려 했는데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작년 8월쯤이었어요.”
박용인 관장은 보디빌더 경력이 화려할 뿐만 아니라 각종 대회 심사위원 등으로 꾸준하게 활동해왔다. 임종소 씨가 임자를 제대로 만났다는 뜻이다.
“관장님이 저처럼 근육이 좋은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어요. 제 근육이 예쁘대요.(웃음) 저는 옆에서 부추기면 진짜 그런가 하고 또 따라요. 시니어 부문에 출전하면 무조건 입상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입상을 떠나 나이 먹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여러 사람들한테요. 나이 들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한테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관장님도 진짜 좋은 생각이라고 했어요.”
비키니는 잘못 없다
집중적으로 근육운동을 하면서 대회 준비를 하는데 비키니가 말썽이었다. 대회에 비키니를 입고 출전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비키니를 입어야 한다는 거야. 그런데 관장님이 부천시장기 제7회 부천보디빌딩 및 피트니스대회에 출전한다고 이미 등록을 해버렸더라고. 비키니 가격이 만만치 않았어요. 보석이 박혀서 그런지 50만 원에서 70만 원이나 해서 깜짝 놀랐어요. 그거 살 능력 안 된다고 대회 출전 못하겠다고 했더니 예전에 출전했던 분의 옷을 빌려오셨어요.”
살아생전 입어볼 거라고는 상상도 안 해본 비키니를 입고 사람들 앞에 서야 했다. 옷을 가져다 놓고 안 입겠다고 이틀을 실랑이했다.
“출전할 만큼 몸이 다져졌으니 나가보면 절대 후회 안 할 거라고 관장님이 그랬어요. 등록도 해버린 상태이고, 그 상황에서 안 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대신 15cm 유리구두는 제가 샀습니다. 집에서 비키니를 입고 연습했어요. 우리 손녀가 하나는 대학교 2학년이고 하나는 고등학교
2학년인데 ‘할머니 멋쟁이’라고 ‘예뻐 죽겠다’고 해요. 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빠가 계시면 어림도 없어’ 하더라고요. 그래도 어차피 시작했으니까 열심히 하라고 응원해줬어요.”
첫 대회는 자유포즈와 지정포즈를 도대체 어떻게 하고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떨리는 마음으로 치렀다.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가는데 사회자가 갑자기 인터뷰를 하자고 했어요. 어떻게 나오시게 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관장님이 권유해서 나왔고, 무엇보다 나이를 먹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입상은 못했는데 인기는 좋았어요. 그러고 나서 20일 후에 WBC대회에 또 참가했어요. 이미 벗은 거 한 번 더 못 벗겠느냐고 했죠.(웃음)”
규모가 큰 대회이기도 했고 첫 대회에서 아쉬웠던 것들을 만회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자유포즈는 인터넷을 검색해 참고하면서 자신만의 개성 있는 포즈로 만들었다. 자다가도 연습할 정도로 자세를 외우고 집중했다. 그 결과 한창 젊은 선수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2위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지금이 가장 화려한 시절
WBC대회 이후 각종 매체에서 임종소 씨를 주인공으로 하는 특집 다큐를 제작하고 보도를 이어갔다. 영국 BBC에서도 70대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건강한 한국 시니어 여성이라며 소개했다. 대회 이후 그녀는 또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매체와 만나 영상을 찍고 인터뷰에 응해주는 일이 많아졌다. 그 와중에도 식당에 잠깐 나가 용돈을 벌고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평일에는 관장님이랑 운동하고, 토요일에는 모델 워킹 연습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사실 좋아하는 취미가 하나 더 있어요.”
임종소 씨는 35년간 했던 에어로빅을 나이 더 먹으면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교댄스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4~5년 정도 됐어요. 에어로빅은 격렬하잖아요. 다리 아파서 못 뛰게 되면 찬찬히 할 수 있는 춤을 춰야지 싶어서 배우고 있습니다. 왈츠, 탱고, 자이브 등을 춥니다. 함께 배우는 친구들이랑 소셜 모임에도 가고요. 남녀가 함께 추는 거라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는데 우리들은 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니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노후를 즐겁게 보내자 했습니다. 저는 왈츠가 좋아요. 제일 멋있는 거 같아요. 매일이 즐겁고 바빠요.”
에어로빅과 사교댄스를 배웠다는 얘기에 어느 정도 궁금증이 풀렸다. WBC대회 영상 속 임종소 씨의 동작이 유연하게 리듬을 타면서 연결되는 점이 인상적이었기 때문. 그저 1년 준비해서 갑자기 등장한 반짝 스타가 아니라 꾸준하게 관리해온 자신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댄스를 위해 운동했지. 그래요, 맞아요. 건강을 잃으면 댄스고 뭐고 뒷방 늙은이 되는 거예요. 생각하면 기가 막혀요. 제가 좀 스타의식이 있나봐요. 많은 사람이 저한테 집중한다는 게 너무 기분이 좋은 거야.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즐겼습니다.”
임종소 씨는 결혼한 뒤 아이들과 남편, 가족만 생각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며 살고 있다.
“내 건강은 내가 지켜야지, 누가 대신 안 챙겨주잖아요. 효자, 효부가 있어도 대신 아파줄 수는 없어요. 그리고 나이 먹었다고 꿈을 접지 않았으면 해요. 자신감 잃지 말고, 뭐든 할 수 있으니 도전하자,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나이에도 열심히 사는 모습, 젊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됐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