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전 오늘인 1988년 9월 17일. 제24회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이날은 임시공휴일이었다. 오전 10시 30분에 시작하는 개막식을 보기 위해 온 가족이 둘러앉아 들뜬 마음으로 TV를 시청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올림픽 개회식이 보통 오후 3시경에 시작되던 것에 비하면 이례적이었다.
당시 개회식 시간을 조정한 이유로 국가 이미지인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맞춰 아침에 개막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후 미국 내 올림픽 방영권을 독점하고 있는 NBC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해서라는 가설도 힘을 얻었다.
이처럼 서울올림픽에는 여러 가지 일화가 있다. 사실 올림픽 서울 유치는 기적에 가까웠다.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올림픽을 치르려면 경비가 약 8000억 원 정도는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한국은 이를 감당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이 기적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집요하게 집행한 주역은 바로 현대그룹 총수였던 정주영 회장이다. 한국과 일본이 막판까지 신경전을 벌일 때, 정주영은 한국 IOC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대그룹의 해외 파견 직원 부인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꽃바구니를 하나씩 각국 IOC위원 방에 넣어 줬다. 이에 대한 반응은 의외로 대단했다. 다음날 각국 IOC위원들은 꽃을 보내준 데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러나 최고급 일본 손목시계를 선물했던 일본에는 감사 인사가 없었다. 결국 비싼 선물보다 ‘정성’을 택한 한국의 정주영은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개막식 성화 점화 때는 ‘비둘기 화형식 사건’이 있었다. 당시 성화가 점화되면서 평화의 상징으로 풀어놓은 비둘기들이 불길에 휩싸이는 것처럼 보였다. 크고 넓적한 원 모양의 성화대는 새들이 앉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성화 점화 순서가 됐는데도 비둘기들이 날아가지 않았다. 결국 올림픽 운영진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성화대에 불을 붙였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2012 런던올림픽 특집판에서 바로 이 비둘기들의 ‘화형식’을 거론하며 서울올림픽 개막식을 역대 최악의 개막 행사로 꼽았다. 당시 서울올림픽 조직위는 “실제로 불에 탄 비둘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날아갔다”고 공식 해명했다.
지난 2019년 유튜브 채널 ‘사소한 리뷰’에서 성화봉송식을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서울올림픽 다큐멘터리 ‘손에 손잡고’ 영상이 소개됐다. 영상에서 유튜버는 “우선 세계적으로 논란이 됐던 카메라 각도에서는 비둘기가 타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성화대에는 불이 닿지 않는 난간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수십 마리의 비둘기가 처참하게 화형당한 참사로 회자되지만 사실 희생 당한 비둘기는 거의 없었던 셈이다. 다만 불구멍 가까이에 있던 비둘기 한 마리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것으로 드러났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때를 교훈 삼아 1992 바르셀로나올림픽 이후 비둘기를 폐회식 때 풀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주로 밤에 개회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애틀랜타올림픽 조직위원회는 개막식 때 비둘기를 날리는 행사를 없애기로 하면서, IOC는 앞으로 모든 올림픽에서 비둘기를 행사에 활용하는 관행을 없애기로 했다.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 관련 이야기도 있다. 2008년 미국의 MSNBC는 베이징올림픽 특집 방송에서는 ‘역대 올림픽 최고의 마스코트’를 선정했는데, 여기서 호돌이가 3위를 차지했다. 이 방송은 정치성을 배제하고 외관으로만 평가했으며, 호돌이는 호랑이가 웃고 있는 모습이 친근감을 준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호돌이에 대해 “머리에 왜 화장실 청소 도구(뚫어뻥)를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농담을 덧붙였다. 국민체육진흥공단도 ‘몇몇 외국인들은 호돌이가 왜 뚫어뻥을 머리에 쓰고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고 관련 일화를 소개해 놓았다. 참고로 MSNBC가 뽑은 최고의 마스코트 1위는 미샤(1980 모스크바올림픽), 2위는 코비(1992 바르셀로나올림픽)였다.
또 1988년 오전 11시 30분경 조정 경기에서 1등을 기록하고 올림픽 2연패에 달성한 이탈리아 조정팀의 다비드 티자노 선수는 금메달의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드는 우승 세리머니를 펼쳤다. 그런데 타자노 선수는 헤엄치던 도중 금메달을 그만 한강에 빠뜨리고 말았다. 한강 바닥으로 가라앉은 티자노 선수의 금메달을 찾기 위해 미사리 경기장에 4명의 잠수 대원이 투입돼 수색을 펼쳤다. 하지만 물이 탁하고 수심이 3.4m나 되는 강 속에서 금메달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수색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고, 결국 수색을 펼친 잠수 대원이 메달을 분실한 위치인 선착장 부근에서 갯벌 바닥에 묻혀있던 금메달을 찾을 수 있었다.
한편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던 1988년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대륙에서 개최된 2번째 하계올림픽이다. 이 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종합 4위를 차지했다. 서울올림픽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코리아’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세계 각국에 우리 문화를 실시간으로 알린 최초의 국제 행사였다. 이는 올림픽에 참가한 세계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화려한 서울올림픽을 위한 숨은 희생도 많았다. 명과 암이 공존했지만 서울올림픽이 대한민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만은 분명하다.
대한민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이 지난 22일 뉴질랜드와 조별예선 1차전에서 0:1로 패했다. 전문가들은 선수단이 전체적으로 호흡이 맞지 않았고, 와일드카드로 데려온 대표팀 간판 공격수 황의조에게 패스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라도 패인을 찾았다.
경기가 끝난 뒤 작은 논란도 있었다. 미드필더 이동경이 상대팀 선수 크리스 우드의 악수를 거부하면서 경기에서도 지고 미성숙한 매너를 보여줬다고 비판받았다. 승자에 대한 존중을 표하지 않는 것은 올림픽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시니어들은 최근 올림픽 축구 경기에서 과거 올림픽과 같은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열린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억하는 시니어들일수록 더 이런 지적을 많이 한다. 왜 이렇게 느끼는 걸까.
이번 올림픽 참가 선수들이 앳돼 보인다. 대회 첫 경기에서 긴장하고 있는 모습은 물론이고, 상대팀의 거친 몸싸움에 경기가 끝나고도 분을 못 이기는 모습도 보였다.
실제로 지금 올림픽 축구에 출전하고 있는 선수들은 서울 올림픽 출전 당시 선수들보다 나이가 어리다. 1988년 당시에는 30세 골키퍼 조병득이 있었고, 최강희와 최윤겸 등 20대 중후반 선수들이 많았다. 국내 선수뿐 아니다. 브라질의 베베투, 서독의 위르겐 클린스만 같은 20대 중반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현재 올림픽 축구 대표팀은 23세 이하 선수들로만 선수단을 구성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 ‘와일드카드’ 제도라고 해서 24세 이상 선수 3명을 쓸 수 있다. 한국 대표팀은 와일드카드로 부른 황의조, 권창훈, 박지수를 제외하면 모두 만 23세 이하 선수들로 구성돼 있다. 다른 종목에는 없는 나이 제한이 왜 유독 축구에만 있을까.
올림픽 남자 축구 종목에 나이 제한이 처음 생긴 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다. 여자 축구는 23세 이상이어도 참가할 수 있다. 축구전문 미디어 풋볼리스트의 류청 취재팀장은 이에 대해 “국제축구연맹(FIFA)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오랜 다툼 때문”이라고 말한다. IOC는 206개 나라 올림픽위원회가 소속된 세계적인 기구다. 스포츠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FIFA의 위상은 IOC를 뛰어넘는다. FIFA 회원국은 211개로 IOC보다 많다.
FIFA가 4년마다 개최하는 월드컵은 단일 스포츠 대회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인기가 많다. 농구, 럭비, 아이스하키 등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 ‘월드컵’이라는 명칭으로 대회를 열지만 흔히 월드컵이라고 하면 축구를 떠올린다. 그만큼 FIFA가 개최하는 월드컵의 위상이 더 높다.
그런데 올림픽 축구에서 연령 제한 없이 모든 프로선수들이 참가하게 되면 FIFA 월드컵과 별 차이 없는 또 다른 대회가 만들어진다. 월드컵으로 막대한 수익을 내는 FIFA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FIFA는 나이 제한 카드를 빼들었다. IOC로서는 불쾌한 일이었지만 FIFA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다. 실제로 FIFA는 지속적으로 올림픽을 견제해왔다. FIFA는 프로 선수들도 본격적으로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던 1984년 LA 올림픽, 1988년 서울 올림픽에도 월드컵 경험이 없는 선수만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그래도 면면은 화려했다.
하지만 23세 이하 선수들로만 올림픽에 나갈 수 있게 되자, 올림픽은 설익은 유망주들의 대회가 됐다. 스타플레이어가 없어 대회 수준은 낮아졌고 흥행도 부진했다. 그러자 IOC는 전체 참가 선수 중 3명은 나이와 상관 없이 포함할 수 있도록 하자고 FIFA에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타협안이 바로 와일드카드 제도다. 와일드카드라는 용어는 한국에서만 쓰고 해외에서는 ‘오버에이지(Overage)’라고 부른다.
결국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부터 24세 이상 선수 3명이 함께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올림픽 메달을 따면 군 면제 혜택이 있어 황선홍과 하석주, 유상철 등 와일드카드로 성인 대표팀 주축 선수들을 투입했다. 가장 최근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는 손흥민과 장현수, 석현준이 와일드카드로 대회에 참여했다.
비록 불의의 1패를 떠안았지만 한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은 메달을 노리고 올림픽에 참가했다. 한국 대표팀은 25일 루마니아전, 28일 온두라스전을 치른다.
시니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이벤트는 단연 올림픽이다. 올림픽은 1896년부터 열린 전 세계 최대 규모의 종합 스포츠 축제다. 올림픽 여러 종목의 선수 중에는 올림픽 하나만을 위해 4년 동안 준비해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있다. 그만큼 깊은 역사와 이야기를 자랑하는 지구촌 대형 이벤트다.
하지만 최근에는 월드컵과 급격히 커진 e스포츠에 밀려 스포츠 이벤트로서 중요도가 점점 떨어지는 추세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겹쳐 개최 자체가 불투명했던 시기도 보냈다.
올림픽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을 경험한 시니어들에게 올림픽은 최고의 스포츠 제전이기도 하다. 이에 시니어들은 이번 도쿄 올림픽에 남다른 기대를 갖고 있을 것이다. 브라보는 올림픽을 즐길 시니어들을 위해 이번 올림픽이 기존 올림픽과 어떻게 다른지, 한국 대표팀 관전 포인트에 무엇이 있는지 정리했다.
도쿄 올림픽, 무엇이 다른가?
2020 도쿄 올림픽은 2021년 7월 23일부터 8월 8일까지 진행된다. 지난해 여름에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여름으로 연기됐다. 대회 명칭은 그대로 사용한다.
사상 첫 무관중 올림픽이다. 당초 일본인과 일본 거주자에 한해 관중을 받으려고 했지만 일본 내 코로나19 확산이 심각해지면서 논란이 커졌다. 결국 IOC와 합의해 일본인 관중도 입장하지 않는 걸로 결정했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근대 올림픽이 열린 이래 125년 역사상 최초다. 다만 상대적으로 코로나19 확산이 덜한 미야기현과 시즈오카현, 이바라키현 경기장에는 일부 관중 입장을 허용한다.
러시아 대표팀은 올림픽 참가가 금지됐다. 러시아 체육계 선수들이 금지약물을 복용하고 국가적으로 도핑테스트 샘플을 은폐하는 등 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포츠중재재판소가 2020년 12월 러시아의 도핑 샘플 조작을 인정했고, 러시아는 2년 동안 국가 자격으로 국제스포츠대회 참가가 제한됐다.
하지만 러시아 국적 선수가 올림픽에는 참여한다. 파견된 335명 선수들은 ‘러시아’라는 국가명 대신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라는 이름을 달고 뛴다. 메달을 따도 시상대에는 국기 대신 오륜기가 올라온다. 국가는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으로 대체한다.
경기 종목에도 변화가 많다. 레슬링과 야구가 다시 정식 종목이 됐다. 여성 선수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양궁과 수영, 탁구 등에서 혼성 종목이 대거 늘어났다. 사격에서는 진종오 선수의 주 종목인 50m 권총을 비롯한 3개 남자 종목이 폐지되고, 3개 혼성 종목이 신설됐다.
농구는 세부종목으로 남자 3대3 농구, 여자 3대3 농구가 추가됐다. 사이클은 남녀 BMX 프리스타일, 트랙 남녀 매디슨 종목이 추가됐다. 펜싱은 세부종목인 플뢰레, 사브르, 에페 중 남녀 단체전이 1개씩 번갈아가며 제외돼 총 10개 종목만 배정되던 관행이 있었다. 이번에는 관행이 깨지면서 12개 종목 모두 올림픽 세부종목으로 확정됐다.
야구 종목 부활, 한국야구도 부활할까
2008년 베이징에서 한국 야구 대표팀은 영광의 시간을 보냈다. 류현진, 김광현, 이대호, 이승엽 등 황금세대가 김경문 감독 지도로 9전 전승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야구 종목은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빠졌다. 2020 도쿄 올림픽에 한해 일본의 국기인 야구가 정식 종목에 포함됐다. 이런 이유로 한국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디펜딩 챔피언이다. 야구선수들은 다시 올림픽 무대를 밟을 좋은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국내 야구 상황은 좋지 않다. 10번째 구단까지 출범해 양적 성장은 이뤘지만 코로나 19여파와 e스포츠에 익숙한 젊은 팬의 선호가 떨어지며 야구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은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대표팀에 뽑혔던 일부 선수가 방역수칙을 위반해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리그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둬, 돌아선 야구팬들의 마음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다.
2024 파리 올림픽부터는 야구가 올림픽 종목에서 빠진다. 이번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야구선수들이 다시 올림픽 무대를 밟을 수 없을지 모른다. 베이징 황금 세대의 일원이었던 강민호, 오승환 등 베테랑들에 이정후, 강백호, 원태인 같은 새로운 세대가 수혈됐다. 영광의 세대와 영광의 순간을 보고 자란 세대가 다시 한번 김경문 감독과 함께 베이징의 감동을 재현할지가 주목된다.
사격의 전설 진종오, 새로운 도전
대한민국 사격의 전설 진종오는 한국뿐 아니라 올림픽을 통틀어 사격 역사에서 최고 선수다. 올림픽 개인 사격에서 금메달 4개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선수다. 이런 진종오가 이번 올림픽에서 큰 변화를 맞았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지난 2014년 IOC가 발표했던 ‘어젠다 2020’에 따라 남자 종목과 여자 종목의 메달 숫자를 맞췄다. 원래 사격은 남자 종목 9개, 여자 종목 6개였다. 하지만 어젠다 2020이 내건 ‘여성 참가 비율을 50%’ 방침에 따라 진종오의 주 종목인 50m 권총을 폐지됐다. 또 다른 남자 종목인 50m 소총 복사, 더블트랩까지 총 3개 남자 종목이 폐지됐다. 대신 10m 공기권총, 10m 공기소총, 트랩에서 3개의 혼성 종목이 신설됐다.
진종오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부터 13년 동안 50m 권총에서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 많은 선수가 그와 실력을 겨루었지만 2012 런던 올림픽에서도, 2016 리우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은 진종오의 몫이었다. 올림픽 3연속 금메달이라는 업적을 세우는 동안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주 종목이 아닌 10m 공기 권총 종목에서도 금메달을 추가했다.
4개의 금메달과 2개의 은메달. 진종오는 총 6개의 올림픽 메달을 따 ‘신궁’ 김수녕과 함께 한국 올림픽 역사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발자취 자체가 곧 역사인 진종오가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사격 역사에 또 다른 기록이 세워진다. 사격의 전설 진종오의 10m 공기권총 남자 개인전은 7월 24일, 10m 공기권총 혼성 단체전은 27일에 열린다.
한편 올림픽 중계는 KBS, MBC, SBS 채널에서 볼 수 있다. 3사 모두 개폐회식과 일부 종목을 4K UHD로 생중계한다고 밝혔다. 특히 KBS는 특설 홈페이지를 통해 TV로 중계되지 않는 종목도 생중계한다. 네이버와 웨이브, 아프리카TV와 LG 유플러스 모바일 TV를 통해 온라인으로도 올림픽 중계를 볼 수 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연기된 도쿄올림픽 개막일이 내년 7월 23일로 결정됐다.
일본 NHK 방송은 30일 복수의 도쿄도 관계자 말을 인용해 “도쿄올림픽은 2021년 7월23일, 도쿄패럴림픽은 같은 해 8월24일 개막하기로 도쿄도와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 일본 정부,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도쿄올림픽과 도쿄팰럴림픽은 각각 올해 7월24일과 8월25일 개막할 예정이었다. 날짜는 하루씩 당겼지만 원래 일정처럼 금요일이다. 일본 정부는 1년 뒤 거의 같은 일정으로 대회를 열어 기존 개최 계획을 유지할 방침이다.
당구가 2020년 도쿄올림픽 정식종목에 도전했으나 다른 종목에 밀려났지만, 2024년 파리하계올림픽에서 정식종목 채택에 재도전한다고 한다.
여러 보도에 따르면 당구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은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당구 동호인으로서도 반가운 일이다.
정식 종목 채택은 당구를 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달라져 당구의 위상도 높아진다. 당구 치러 간다고 하면 지금은 오락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앞으로는 운동하러 간다는 말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프로 당구 선수들의 위상도 높아질 것이며 당구를 즐기는 동호인들의 자부심도 커질 것이다. 그러면 저변인구는 더 폭넓게 늘어날 것이다.
정식 종목 채택 여부는 세계 몇 나라가 참여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당구는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유럽이 강하다. 유럽 외에는 남미, 이집트, 터키, 베트남, 중국, 일본, 우리나라도 저변 인구가 넓다. 저변 인구 면에서는 자격이 충분하다. IOC위원의 상당수가 유럽 사람들이라는 점도 긍정적으로 보인다.
아시안게임에서는 1998년 방콕 대회부터 2010년 광저우 대회까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었다. 2002년 부산 대회 3쿠션 결승에서 황득희 선수가 우승해서 금메달리스트로 남아 있다.
당구는 스누커, 캐롬, 풀(포켓볼)을 3대 큐 스포츠 종목으로 본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강세인 종목은 3쿠션 종목인 캐롬이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작년에 이어 올해 세계팀3쿠션대회에서 우승하는가 하면 김행직 선수는 2017년에 세계 대회에서 연속 2회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들 외에도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가 여럿 있고 자라나는 새싹들 중에도 세계정상을 노리는 선수들이 많다. 반면에 스누커와 풀 종목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대중화 되어 있지 않아 앞으로 국가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종목이다.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배출한 스켈레톤을 봐도 우리 선수들의 재능으로 볼 때 당구는 훨씬 성공 가능성이 더 높다.
3쿠션이 올림픽 종목에 채택된다면 개인전과 세계팀3쿠션대회처럼 단체전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작년에 이어 우리 선수가 연속 우승한 것을 보면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딸 가능성은 높다. 유럽 선수들 플레이를 보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공을 맞히기 위해서 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수들은 한 사람씩 교대로 치는 스카치 방식에서 다음 선수가 치기 좋은 공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이것이 우리의 강점이다.
댄스스포츠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게임에 시범 종목으로 채택된 바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저변인구가 북반구 몇 나라에 국한되어 있고 심판 기준도 애매해서 정식 종목 채택이 어려운 상태이다. 반면에 당구는 심판의 기준이 비교적 명확하다. 판정 시비가 생길 우려가 적다. 필요하다면 비디오 판독으로 더욱 명확한 판정을 볼 수도 있다.
눈보라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닦아야만 했으니까. 희망이 보이는가 싶더니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망연자실 고개를 떨어뜨렸지만 초석이 다져졌고 단단한 징검다리가 놓였다. 노력은, 꿈은, 그렇게 현실이 됐다. 한 달여 남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삼수(三修) 만에 이뤄낸 쾌거’라고 말한다. 세 번의 도전 동안 수많은 사람의 헌신과 노력,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올림픽 또한 없을 것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위해 발 벗고 나섰던 노장을 기억해냈다. 前 강원도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자 現 아라웰다잉연구회 회장인 박종흔(朴鍾昕·69) 씨. 꿈이 이뤄진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창동계올림픽의 백전노장을 만나다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박종흔 씨를 만났다. 이미 10년도 더 된 올림픽 유치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는 기자의 말에 해드릴 대단한 얘기가 없다며 멋쩍게 웃는다. 박종흔 씨는 올림픽 관련 업적 외에도 공직자로서 명망 높고 존경받던 인물. 지금도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삶을 살고 있다.
2009년 강원도청 지방부이사관으로 공직을 내려놓기 전까지 지방과 중앙정부 요직을 비롯해 2014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업무까지 두루 섭렵한 박종흔 씨는 나랏일(?) 전문가였다. 현역 시절 인생을 걸고 몰두했던 일은 단연 ‘올림픽’이었다. 평창동계올림픽 재수 시절인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머릿속에는 오로지 올림픽 유치 생각밖에 없었다.
“2004년도에 국무총리실에서 재난관리과장을 하고 있다가 강원도로 내려와서 받은 첫 보직이 ‘강원도 국제 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이었어요. 첫 번째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하고 난 뒤에도 강원도가 재도전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올림픽 유치에 관한 업무를 하는 조직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국제스포츠위원회가 구성되자마자 올림픽 유치를 위한 준비를 틈틈이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올림픽 유치 신청 뒤 후보 도시가 되기까지 각 도시 간 보이지 않는 경쟁은 치열하다. 홍보 담당자로서 어깨가 당연히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경쟁 도시와 비교해 최대한 좋은 인상과 올림픽 정신에 입각한 행동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밝힌 ‘드림프로그램’
국제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을 하면서 단연 보람되고 뿌듯했던 것이 드림프로그램이었다. 올림픽 유치활동을 하는 중 가장 정열적으로 힘을 다하고 관심을 가졌던 프로젝트였다.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고 있고, 성과가 이번 올림픽에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드림프로그램입니다. 제가 오기 전부터 기획된 것이었어요. 눈이 내리지 않고 얼음이 얼지 않는 나라의 청소년을 강원도로 초정해 동계스포츠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죠. 스노보드도 타고 스키도 가르쳐주고 스케이팅도 가르쳐줬습니다.”
한편으로는 IOC 위원에게 한 표를 호소하겠다는 전략도 깔려 있었다.
“아프리카 지역은 동계올림픽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동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왔던 참가자들을 통해 우리의 뜻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끊임없이 이어진 드림프로그램은 이번 평창올림픽에서 열매를 거두었다. 2009년 드림프로그램에 참가했던 말레이시아 피겨스케이트 선수 줄리안 지 지에 이(21)는 말레이시아 동계스포츠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동계올림픽 출전 기회를 얻었다. 박종흔 씨가 한창 활동하던 2005년 참가했던 남아프리가공화국의 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타마라 제이콥스는 2월 초 성화 봉송 주자로 뛸 예정이다. 동계스포츠를 널리 알리고 올림픽정신을 실현한 소중한 프로그램이 시간이 지나 빛을 발하고 있다.
“그땐 정말 용평스키장에서 살았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과 같이 지내고요. 인솔해온 지도자들에게는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면 평창이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도록 IOC 위원들에게 말해 달라고 막후활동을 했습니다. 제가 돌아다니면서 다 한 거죠. 지금 생각해도 드림프로그램은 정말 잘된 프로그램입니다.”
겨울 스포츠의 장, 평창으로 오세요!
강원도청에서 홍보부장 업무를 보다가 국제부장직을 맡아 서울로 근무지를 옮겼다. 이번에는 평창이 동계스포츠 경기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상을 전 세계에 심어주는 일이 관건이었다.
“예를 들어서 스노보드 세계 챔피언십 대회를 한다고 하면, 다음 대회를 우리가 유치해오는 것이었어요. 프레젠테이션도 많이 했고 또 큰 대회도 여러 번 강원도에서 유치했습니다. 동계올림픽에는 국제스키연맹, 스케이팅연맹, 바이애슬론 등이 쭉 있잖아요. 산하 연맹들이요. 거기서 다 호응을 또 해줘야 합니다. 대회를 유치하려고 많이 다녔고 유치도 꽤 했어요.”
국제부장에 이어 올림픽 업무를 총괄하는 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 되면서 밤낮 없이 일에 매달렸다. 홍보부장 때 용평스키장이 집이었다면 이후에는 전 세계가 올림픽 유치를 위한 영업장이었다. 세계를 돌며 평창에 한 표를 호소했고 열정을 쏟았다. 유리하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열심히 뛰었다.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러시아의 소치와 대한민국의 평창이 근소한 차이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개최지 결정은 남아메리카의 과테말라에서 이뤄졌다.
“우리나라는 전세기 한 대로 날아갔는데 러시아는 초대형 화물기 7대를 가지고 날아왔어요. 시내 곳곳에다가 공연장 만들고 엄청난 오일 머니를 갖다 부은 거죠.”
뭔가 전세가 밀리는 기운이었지만 우리 측도 표결이 있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발로 뛰고 평창을 알렸다.
“권양숙 여사님이 마침 저희를 도와주셨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을 만나서 미팅도 하고 애써주셨죠. 나름대로 전략을 세웠습니다만 소치를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4표 차이로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러시아 소치에 내주고 말았다. 2007년 7월 3일. 뼈아픈 그날이었다.
“평창은 벌써 2차 도전이었고 유치를 확신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더 이상 올림픽 업무를 보기가 싫어지더라고요.(웃음)”
쏟았던 정열에 비해서 얻은 게 없었다. 박탈감이 없었다면 세 번째 도전 때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었다.
“만약 있었으면 조직위원회에서 활동을 했겠죠. 그런데 한 3년 그렇게 하고 나니까 올림픽은 조금….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정년을 2년 남긴 상황이었거든요. 좀 더 유능하고 젊은 친구들이 새롭게 유치 업무를 맡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올림픽 유치가 물거품으로 돌아간 뒤 박종흔 씨는 올림픽 업무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며 강원도지사였던 김진선 전 지사에게 학교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이후 주문진에 있는 강원도립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9년 정년퇴직했다. 못다 이룬 평창의 꿈은 후배들에게 넘겨주었고, 올해 마침내 결실의 그날을 맞게된 것이다. 후배들이 선배님으로서 박종흔 씨를 좀 챙기고 있는지 물었다.
“안 그래도 후배한테 우스갯소리로 나를 잊은 게 아니냐며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나를 기억하라고 했더니 알았다 하더라고요.(웃음)”
후배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동계올림픽의 꿈을 실현시켰기에 자신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올림픽 유치 과정 속에서 상당 기간 근무한 것에 새삼 보람을 느낍니다. 이게 끝내 무산됐더라면 우리의 노력도 물밑으로 가라앉았을 거예요. 우리가 못 이룬 일을 후배들이 이뤄낸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죠. 제 나름대로 훗날 기여할 일이 있다면 물론 당연히 해야겠죠.”
박종흔 씨는 지금도 눈이 내리면 ‘이 눈은 설상경기에 좋을 눈이구나, 아니구나’를 생각한다. 오랜 시간 올림픽과 함께했던 삶이 여전히 몸에도 생각에도 배어 있다.
나랏일 전문가, 웰다잉 전문가 되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일궈낸 백전노장은 지금 그럼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제2인생도 궁금했다. 최근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웰다잉’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마침 기자와 마주한 곳은 현재 회장으로 활동 중인 아라웰다잉연구회의 공간이었다. 은퇴 뒤 인생에 대해 고민하다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것, 즉 ‘웰다잉’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과거에는 퇴직 공무원이 길가에서 쓰레기를 줍거나 산불 감시, 교통질서 캠페인 같은 단순노동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죠. 저는 30~40년 공직에 있었던 노하우를 접목해서 전문 재능을 기부하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생각했습니다. 퇴직 무렵 웰다잉에 대한 인식이 조심스럽게 사회에 퍼져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박종흔 씨는 2013년 웰다잉 전문가로 거듭났다. 그때 당시 *각당복지재단이 강원도의 동해가정법률상담소를 포함, 다섯 군데를 선정해 웰다잉교육전문지도강사양성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16주 교육을 이수한 뒤 웰다잉 지도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재는 비영리 민간단체인 아라웰다잉연구회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웰다잉 전문가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경로당과 노인복지원을 찾아다니면서 무료로 강의도 하고 봉사도 한다. 예전에는 아름다운 인생 마무리에 관해 주로 다뤘지만 최근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해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혹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 물었다. 또 봉사 이야기를 꺼낸다. 평생 공직생활에 국민들 염원을 담아 발에 땀나도록 뛰어온 사람이 지치지도 않나보다.
“퇴직 전부터 악기로 봉사하고 싶어서 한 10년 색소폰을 배워뒀습니다. 그래서 심심치 않게 어르신들을 위해 연주하고 있습니다.”
남을 돕는 것도 좋지만 지금껏 헌신하며 살아온 자신과 더불어 가족과 행복한 인생을 많이 즐기시길 바란다. 2월, 평창 밤하늘에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면 손자에게 꼭 말하시라.
“저게 다 할아버지 덕분이었다”고 말이다.
*각당복지재단 1986년 설립된 각당복지재단은 인류애 정신에 입각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죽음준비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말기환자를 보살피는 호스피스 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치과의사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세요?” 조윤선 문화체육부장관이 그를 보고 던진 첫 질문이었다. 장영준(張永俊·58) 회장은 대한바이애슬론연맹을 대표해 나간 자리에서 받은 그 질문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 조 장관이 아니라 누구라도 비슷한 질문을 했을 것이다. 바이애슬론이라는 비인기 동계스포츠를 대표하는 자리에 치과의사라니. 더군다나 지금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둔 중요한 시기. 그는 어떻게 동계스포츠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일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영준 회장은 사실 치과의사들 사이에서는 아주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올해 1월까지만 해도 그는 선거에서 당선된 대한치과의사협회의 부회장이었고, 그 전부터 협회 기획이사와 홍보이사 등을 경험한 회무에 밝은 사람으로 평가받아왔다. 때문에 치과계 돌아가는 사정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장영준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를 리 없다. 그를 치과계에서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직함이 있다. 바로 연세대학교 치과대학동문회장이라는 자리. 현재 국내에는 의대보다 훨씬 숫자가 적은 11개의 치과대학이 있고, 그만큼 의과대학에 비해 결속력이 강하다. 한때는 어떤 대학 동문회가 어느 후보를 지지하는지에 따라 협회 회장이 바뀐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이렇게 그는 뼛속까지 치과의사 그 자체다.
벽안의 한국인 서안나와의 인연
다시 그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조윤선 장관의 질문에 장영준 회장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물론 스포츠도 하나의 전문적인 분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격이 필요한 분야는 아니잖아요. 단체를 운영한다는 것은 운동과는 별개의 이야기니까요. 치과의사들의 다양한 사회 참여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치과의사들에 대한 인식이나 위상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에서의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영준 회장의 바이애슬론과의 인연은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올해 4월이 그 시작이었다. 바이애슬론 연맹은 곧 있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성적 향상을 통해 외국인 선수의 귀화를 야심차게 추진했는데, 그중 한 선수인 러시아 출신의 프롤리나 안나(한국이름 서안나·32)의 후원 요청을 받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바이애슬론의 주 무대가 유럽인 만큼, 활발한 활동을 위해서는 스폰서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바이애슬론은 제게 낯선 스포츠였죠. 그러나 제가 운영하는 의료법인 메디피움 이름으로 후원을 해달라는 선수 에이전시 측의 요청이 있었어요.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또 태극 마크를 달고 뛸 선수를 돕는 일이라 기분 좋게 동의를 했죠.”
후원이 결정된 프롤리나 안나는 2009년 평창 세계선수권대회 스프린트 4위, 계주경기 1위를 차지하고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는 여자 스프린트 7.5km 경기에서 4위를 기록한 세계 정상급 선수다.
이런 그의 응원이 힘이 됐는지, 안나는 한국 바이애슬론 역사상 첫 세계선수권 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지난 8월 27일 에스토니아 오테페에서 열린 2016 바이애슬론 하계세계선수권대회 여자 스프린트 종목에서 22분 29초 01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다음 날 열린 여자 추발 종목에선 3위로 결승선을 통과해 동메달을 하나 더 따냈다. 평창에서의 금메달을 바라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린 셈이다.
“안나는 결혼과 함께 잠시 은퇴했던 선수였어요. 그러다 2년 만에 복귀했는데 지난여름의 성과로 주변의 우려를 한 번에 불식시켰어요. 여성 운동선수들은 나이가 들면 남성호르몬 분비가 늘면서 오히려 성적이 더 좋아지는 경우가 있어요. 아마 안나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후원자에서 진두지휘하는 수장으로
일각에서는 마치 용병을 사 모으듯 외국인 선수를 귀화까지 시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대표를 출전시켜야 하는 바이애슬론연맹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바이애슬론의 올림픽 출전권은 국가 순위가 기준이 되는데, 이 순위는 9번의 월드컵과 1번의 세계선수권대회를 통해 결정된다. 그런데 한국의 2015~2016 국가 순위는 25위로 22위까지만 주어지는 자동출전권을 얻기는 어려운 상황. 게다가 남자 대표의 경우 성적이 나빠 세계선수권 출전권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결국 2016~2017 시즌에서 출전권을 확보하려면 성적을 낼 선수가 필요했다.
장 회장은 “귀화 선수를 더 확보하려고 추진하고 있는데 쉽진 않다고 들었어요. 여자 선수는 선수층이 얇아 보강이 필요하다고 하고. 이런 좋은 기량을 가진 선수들은 단기적인 성과만 내주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어린 선수들이 기량을 갖추는 데 마중물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안현수 선수가 쇼트트랙 종목의 수준이 낮은 러시아에 가서 금메달도 따고, 러시아 선수들의 기량 향상에 기여한 것처럼, 안나도 바이애슬론 수준이 낮은 한국에서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죠”라고 말했다.
장 회장은 안나의 후원식이 열리던 날 안나의 성적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후원이 결정되고 얼마 되지 않아 바이애슬론연맹 회장직에 도전하게 됐고 지난 7월 29일 열린 투표에서 제5대 대한바이애슬론연맹 회장에 당선됐다.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된 셈이다. 그 과정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해 3월에 국민체육진흥법이 바뀌고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가 통합되면서 새누리당 염동렬 의원이 맡고 있었던 전임 회장자리가 자동으로 공석이 됐어요. 국회의원의 체육단체장 겸직 불가 의견도 있어 새 회장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들었는데 문득 욕심이 나더라고요. 아마 안나를 후원하면서 바이애슬론 매력에 빠진 모양이에요(웃음).”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이렇게 평창올림픽을 위해 애쓰고 있는 입장에서 일련의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올림픽이 마치 범죄의 온상이라도 된 듯한 지금의 상황에 대한 그의 생각이 말이다. 장 회장은 당연히 성공적 개최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연맹과 조직위원회가 맡은 역할이 달라 세세하게 알긴 어렵습니다만, 지금의 상황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평창올림픽은 국가적인 사업이라는 점이에요. 실제로 이번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많은 사람이 애쓰고 있고요. 이미 IOC에서도 실사를 다녀갔고, 경기 준비 진행에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받았어요. 한 차례 세계대회를 치러본 경험도 있고, 경기장도 12월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주시는 일만 남았어요. 연맹 예산이 적어 홍보활동에 많은 한계가 있지만 좋은 성적을 내고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응원도 열심히 해주시고, 많이 보러 와주시면 좋겠어요.”
이종결합으로 대중화 앞당길 것
바이애슬론은 국내에선 어쩔 수 없는 비인기 스포츠이지만 유럽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국내의 프로야구나 프로농구에 비견될 만큼의 인기 스포츠 중 하나. 유럽 일부 국가에선 하루 24시간 바이애슬론 경기만 방영하는 방송국이 운영되고 있을 정도. 역대 올림픽 성적을 보면 독일이 가장 강국이고, 그 뒤를 노르웨이와 러시아가 뒤쫓고 있다.
장 회장은 “바이애슬론은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사격이 결합된 경기예요. 선수들은 총을 등에 맨 채로 스키를 타고 일정 거리를 달리다가, 사격장에선 사격을 겨뤄요. 바이애슬론이 인기가 있는 이유로는 두 가지 경기, 그러니까 스키와 사격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과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페널티가 주어지는 역동성이 꼽히죠. 이 밖에도 꽤 흥미로운 요소가 많아요. 한 가지 경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계주도 있고, 앞 주자를 앞질러야 하는 추적 경기도 있어요. 올림픽에서는 11개의 메달이 걸려 있는 종목이니까 비중도 꽤 높다고 봐야 합니다. 남자 5개, 여자 5개, 혼성 1개의 경기가 진행돼요”라고 설명한다.
장 회장이 바이애슬론연맹을 맡으면서 관심 갖는 것 중 하나는 바이애슬론의 대중화다. 결국 국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되지 않고서는 인지도와 성적 모두 다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바이애슬론은 생각보다 즐길 수 있는 여지가 많아요. 꼭 스키가 아니더라도 자전거와 같은 다른 종목과 결합할 수도 있고, 사격 역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죠. 요즘엔 레이저를 이용한 장비들도 있어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 대중화를 위한 연맹 차원의 행사가 있었는데, 어린아이들의 반응이 대단했어요.”
치과의사들의 다양한 목소리 듣고 싶어
그가 속한 의료법인 메디피아는 치과뿐만 아니라 의료검진센터 등 다양한 과목이 결합된 의료법인이다.
“메디피아를 시작한 시기는 1990년이었어요. 다른 과목 의사들과 의기투합해서 만들었는데, 어려움이 생겨 경매에 넘어가게 된 상황까지 처해 할 수 없이 모든 지분을 제가 인수하게 됐죠. 2000년 1월 1일에 이사장이 됐어요. 경영 정상화가 되면서 2013년에는 판교에 분점도 냈죠. 치과의사가 다른 메디컬 분야의 경영에까지 참여한다는 것이 한계도 있고 공부도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직의 힘과 팀워크 그리고 소통의 중요성을 알게 됐어요.”
그가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 중 하나는 바로 치과의사를 위한 일종의 사회운동, ‘행복한치과만들기 준비위원회’다. 그는 이 위원회를 통해 철학자 강신주를 초청, 대담을 진행한 적도 있고, 청년이나 여성 치과의사들과의 모임도 진행했다.
“치과의사들에게 ‘우리는 행복한가’라는 화두를 던져보고 싶었죠. 치과의사들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다양한 계층의 치과의사들과 터놓고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젊은 치과의사들이나 여성 치과의사들의 생각은 어떤지, 동료로서 선배로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다양한 시도들을 했습니다.”
이런 모임에서 여러 직함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그가 놓지 않는 것은 치과의사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이다. 이제는 직원이 300명인 의료법인의 대표라면 진료를 쉴 법도 한데, 아직도 매주 환자를 대면하고 직접 진료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이유에 대해 묻자 간단하게 대답한다.
“배운 것이 이것이고, 치과의사니까요.”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김운용(金雲龍·85) 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다. 정치인과 관료, 경제인이 올림픽 조직위원회를 거쳐 갔지만 유치 준비부터 폐막까지 전 과정에 참여한 이는 김 전 부위원장이 유일하다. 김 전 부위원장은 서울올림픽을 광복 이후 ‘6·25전쟁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의미를 돌이켜본다면
지금은 저절로 된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은 일이 많다. 나는 서울올림픽을 광복 이후 역사에서 6·25전쟁에 비견할 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본다. 무엇보다 축 늘어져 있던 한국 국민이 ‘우리는 할 수 있다, 해 냈다’고 느끼면서 의식을 개혁하게 됐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근대사에 남긴 의미는 단순한 왕정복고가 아니라 국민적인 의식을 개혁했다는 데 있다. 서울올림픽의 모토가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였다. 세계무대에서 정말 약소국이었던 대한민국이 문화국가로서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됐다.
서울올림픽이 최초로 기획된 것은 언제인가
얘기를 하려면 먼저 1978년 제49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한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낸 박종규 씨와 함께 유치한 대회였다. 멕시코에서 선수단 숙식을 하루 10달러에 제공해 주겠다고 큰소리쳤다. 급해진 나는 하루 5달러면 된다고 ‘뻥’을 쳤고 결과적으로 대회를 잘 치르게 됐다. 사격대회 다음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약간 허황된 건의를 했다. 박 대통령이 검토해보라고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당시에는 정부가 올림픽 유치를 결정하지 않았는데
국민체육심의위원회라는 게 있었다. 정부에서 국무총리, 문교부 장관, 서울시장 등이 참석했고 나도 세계태권도연맹 총재로서 참석했다. 대부분 올림픽 유치가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반대했다. 박종규 씨가 “유치에 직을 걸자”고 주장하면 김택수(전 IOC위원) 씨는 “내가 왜 그만두느냐, 당신이나 그만둬” 하면서 대립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뭘 해보기도 전에 10·26사태가 터졌다. 세상이 뒤집혔으니 (올림픽 유치계획도) 그렇게 스톱이 됐다.
다시 정부가 유치방안을 결정한 계기는 무엇인가
직후에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여러모로 어려울 때 이규호 문교부 장관이 나라를 끌어올리기 위해 올림픽을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신청했다. 지금 생각하면 열악했다. 얼마 전에 전 전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때는 IOC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고 하더라. 돈도 참 없었다고 했다. 한국인 국제심판도 없고 국제회의에서 한국인이 나밖에 없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좌우지간 우리나라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었다.
나고야가 우세했는데 어떻게 역전했나
나고야는 승리를 과신했다. IOC총회를 맞는 자세나 준비는 부실했다. 나고야의 전시실에는 여성 홍보요원 두 명에 사진 몇 장이 전시돼 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서울이 올림픽 유치에 얼마나 열정을 쏟고 있는지 보여줬다. 일본은 나고야가 중심이었지만 우리는 거국적으로 나섰다. 서울과 나고야가 아니라 한국과 나고야가 경쟁하는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없었다. 개최지 발표 순간 “쎄울, 꼬레아” 소리에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멍해졌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볼 때 가장 아쉬움이 남는 순간은
2001년 총회에서 유색인종 최초로 IOC위원장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것이 못내 아쉽고, 2005년 5월 구속된 상태에서 불명예스럽게 IOC위원을 사퇴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그나마 2008년 복권이 돼서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됐고, 2005년 유엔인권위원회 연례보고서에서 ‘김운용씨가 한국 정치인들에 의해 2003년 실시된 2010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의 희생양이 된 양심수’라고 기록한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다.
최근 활발히 힘을 쏟고 있는 일이 있는지
집필 활동과 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많은 대학에서 강연 요청이 온다. 현업에서 내가 이룰 수 있는 일은 많이 이뤘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경험하고 배웠던 것들을 후배들에게 유산으로 남기려고 한다. 만나게 해달라면 연결해주고 얘길 해달라면 해주겠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무조건 돕겠다. 이름을 빌려달라면 빌려주고 뛰어 달라면 뛴다. 한국에서 IOC위원 50명과 아무 때나 통화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나밖에 없다. 아직 운동도 하고 있다. 헬스장에서 웨이트 트레이닝도 하고 필라테스도 한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나
어렸을때부터 피아노를 무척 열심히 쳤다. 서울 삼선교 인근에 사시던 신재덕 이화여대 교수로부터 배웠다. 1947년 당시 레슨비가 한달에 20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일 내게 다시 젊음이 주어진다면 피아니스트가 꼭 돼보고 싶다. 연세대 재학시절 내가 피아노를 가장 잘 쳤다. 대학 1학년때는 전교 음악회에서 독주도 했다. 쇼팽의 음악을 곧잘 연주했다. ‘즉흥환상곡’을 가장 좋아했다. 쇼팽의 음악에는 연인에 대한 로맨스와 조국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6·25가 발발하면서 공부도, 음악도 그만둬야 했다. 외교관으로 주미 대사를 하면서 국제법 학자이자 피아니스트를 해보고 싶다.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은?
1986년 IOC 위원으로 선출된 것을 비롯해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국제경기연맹회장, 월드게임 창설회장, IOC TV·라디오 분과위원장, IOC 집행위원, IOC 부위원장 등을 맡아 국내외 체육계에서 맹활약했다. 유색인종 최초로 IOC 위원장 선거에 도전하기도 했다.
88서울올림픽 유치를 비롯해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02부산아시안게임 등 대한민국이 주요 국제대회의 국내 유치하는 과정은 대부분 김 전 부위원장의 손을 거쳤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폐회식에서는 남북한 공동입장을 성사시켰다.
그는 태권도 세계화의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장 취임 이후 국기원을 건립하고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설했다. 태권도가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돼 ‘효자종목’ 역할을 하게 된 것도 김 전 부위원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가적으로는 대통령특사 국제교류대사를 맡은 바 있으며 16대 국회에서는 통일외교통상위원으로 활약했다. 현재는 일본 게이오대학 법학부 방문교수, 미국아메리칸대학교 명예총장, 조선대 석좌교수 등을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1989년부터는 아호인 윤곡(允谷)을 따 국내 최대 여성 스포츠 시상식인 윤곡여성체육대상을 시행해 왔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인 박동숙씨와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 약력
1931년 대구 출생(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학·석사, 美메리빌大 법학박사)
1961년 내각수반 비서관·국방장관 보좌관
1963년 주미대사관·주UN대표부·주영대사관 참사관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 회장·대한체육회 이사
1972년 국기원 건립, 국기원 이사장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 창설총재
1985년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및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198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1986년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회장
1988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TV 분과위원장
1990년 대통령특사(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1992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
1993년 대한체육회(KSC)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1996년 외무부 국제체육교류 대사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2009년 현재 아메리칸스포츠대학교 명예총장, 조선대학교 석좌교수, 대한체육회(KOC) 고문, 대한태권도협회 명예회장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 동시에 기억의 동물이다. 세월에 쓸려 사라지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9월의 기억으로 1988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24회 하계올림픽, 그리고 올림픽 유치가 확정됐던 1981년 9월 바덴바덴, 올림픽 유치의 주인공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을 재조명해본다.
1981년 9월 30일, 자정을 앞둔 늦은 시각, 온 국민이 숨죽이고 TV 앞에 앉았다. 시선은 독일의 작은 도시 바덴바덴을 향했다. 사마란치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가 적힌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프랑스어를 알아듣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사마란치의 입에서 나온 “쎄울(서울)”은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집집마다 기쁨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의 9월을 환호의 계절로 만들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가난한 개발도상국이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지는 불과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승리를 예상하기 어려웠던 만큼 기쁨도 컸다. 더욱이 국민들은 상대가 일본이었다는 것이 더욱 기뻤다. 7년 뒤 1988년 9월에는 예정대로 서울올림픽이 전 세계의 전파를 탔다.
세계가 비웃던 유치선언, 세계가 놀란 역전극
서울이 일본 나고야와의 유치경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외국인들의 눈에 대한민국은 여전히 ‘전쟁폐허’ 이미지가 강했다. 더욱이 한국은 앞서 1974년에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가 능력 부족을 이유로 포기한 전력이 있었다. 일본은 이미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경험이 있었다. 기반시설, 자금력, 국제스포츠계 인맥 모든 면에서 서울은 나고야에 경쟁이 되지 않는 상대로 보였다.
국내의 시각도 올림픽 유치에 부정적이었다. 나고야와 표 대결을 해 봤자 형편없이 져 망신당할 것이란 우려가 팽배했다. 남덕우 당시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주요 인사들은 설령 유치에 성공한다 해도 대회를 치러 낼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올림픽 망국론’을 펼쳤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유치 신청을 철회할 거란 소문이 파다했다. 훗날 서울올림픽 민간추진위원장이었던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은 독일 바덴바덴으로 떠날 때 정부로부터 “창피만 당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개최지 선정 당일까지 서울의 승리를 점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외신은 누가 이길지가 아닌, 나고야가 몇 표 차이로 이길지에 초점을 뒀다. 하지만 결과는 52 대 27. 전체 79표 중 52표를 얻은 서울이 나고야를 두 배 가까이로 따돌리고 1988년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권을 따냈다. 세계가 깜짝 놀란 대이변이었다.
냉전마저 녹여낸, 역사상 가장 성공적 올림픽
1988년 9월 17일 예정대로 서울올림픽의 막이 올랐다. 서울올림픽에는 160개국에서 1만3304명의 선수단(선수 9417명·수행인원 3887명)이 참가해 올림픽 역사상 최다 참가국과 참가인원 기록을 경신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냉전으로 ‘반쪽 대회’가 됐던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외신들은 분단국가인 한국에 냉전으로 대립하던 각국이 모인 장면을 보며 ‘냉전종식의 신호탄’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재정 측면에서도 당초의 우려를 불식했다. 당시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의 이스라엘 선수단 테러사건으로 보안비용이 폭증했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몬트리올시의 파산 등으로 올림픽 유치 회의론이 퍼지던 시기였다. 올림픽조직위원회는 대회에 총 2조3826억 원이 투입돼 2520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상황에서 회계의 오차범위를 다소 고려한다 해도 예상보다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둔 것만은 분명했다.
대회운영 자체도 성공적이었다. 전 국가 차원의 역량을 결집한 결과였다. 개막 전까지만 해도 성공 여부를 반신반의했던 세계 스포츠계는 서울올림픽의 매끄러운 대회 운영을 칭찬했다. 대회기간 총 237개 세부 종목의 경기 중 지연된 경기는 단 6개뿐이었다. 대회에서는 냉전의 양 축이었던 소련과 미국이 나란히 1, 2위를 기록했고 동독이 3위에 올랐다.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역대 최고성적인 4위를 기록했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올림픽 이후 달라진 한국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의 도약에 커다란 시너지를 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를 두고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한국인은, 특히 젊은이들은 서울올림픽 이후 왕년의 고질적인 고립주의, 패배의식, 열등감을 털어버렸다”고 표현했다.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일본인에게 신분에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준 것처럼 서울올림픽도 우리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고 말했다.
경제 측면에서 ‘3저호황(저달러·저유가·저금리)’과 맞물린 올림픽의 성공은 오늘날까지도 한국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수출산업에 커다란 호재가 됐다. 올림픽은 ‘코리아’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던 세계 각국에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알렸다. 한국 경제의 국제적 지위가 올라간 것이다. 한국 기업의 공격적인 세계무대 진출이 시작된 시점도 서울올림픽 이후부터다.
전반적인 사회 모습도 대한민국은 올림픽 전후로 딴판이 됐다. 서울에 쏠린 세계의 이목은 민주화를 앞당겼다. 노동계의 요구를 수용해 최저임금법이 제정된 것도 1988년이다. 임금이 높아지자 내수가 급격히 성장했다. ‘마이카 시대’로 대표되는 소비시대가 도래했다. 학교에서는 단계적으로 급식이 시작됐고, 먹거리와 생활용품을 공산품이 채워가기 시작했다. 올림픽을 계기로 마련된 지하철, 아파트, 체육시설 등의 사회간접자본도 한국인의 삶을 바꿨다.
톨스토이의 어록 중에 “불효하는 사람과는 친구를 삼지 말라”는 말이 있다. 공자도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효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부모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효에 관한 정서는 동·서양이 같다. 그렇다면 어쩌면 효야말로 전 세계 사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연결고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원로 언론인 권혁승(權赫昇·83) 백교문학회 회장은 그 발상의 원대한 가능성에 주목했다. 효 문화의 세계적 전파를 위해, 평창 동계 올림픽이 다가옴에 따라 더욱 분주해지고 있는 그의 발걸음 속에 담긴 효의 가치를 추적해 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한국의 효 사상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유교 문화는 중국의 유교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서 중국의 학계에서조차도 유교 문화 연구를 위해 우리나라에 와서 조사를 하게끔 만들었을 정도다. 그 유교 사상에서 비롯된 효 사상 또한 한국에서 특히나 강렬하게 발현되었다.
‘그렇다면 한류로 대변되는 케이팝이나 김치로 대변되는 식문화처럼, 효도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으로서 널리 전파될 수 있다.’
권혁승 전 서울경제신문 사장, 그리고 현 백교문학회 회장은 그러한 생각에 강력한 추진력을 달아 효 사상의 세계 전파를 위해 야심찬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사다.
어머니를 기리는 사모정 공원을 만들다
어머니를 향한 권 회장의 그리움과 감사의 표현은 어언 6년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릉 출신인 그는 고향인 경포동 지변 저수지 아래 핸다리마을에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는 공원을 조성한다. 이름하여 ‘사모정(思母亭)’ 공원. 이곳은 권 회장이 사유지에 사비를 들여 만든 것으로, 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사라진 그의 생가에 대한 향수를 되살리고 한국 전통 문화의 근간인 효의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세워졌다. 안에는 정자를 비롯해 3개의 시비(詩碑)와 강릉 출신 예술인 신봉승 시인, 권순형 도예가의 작품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냥 보통의 정자가 아니라 제대로 잘 만들어진 전통 문화재에 진배없는 정자를 짓고 싶었습니다. 문화재 관리국장을 지낸 김진무 씨와 2년 여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전라북도 임실에서 제가 원하던 정자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정자의 제작자를 만나 제작에 들어갔죠.”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을 들여 만들어진 사모정 공원은 자연스럽게 효에 대한 권 회장의 의지를 느낄 수 있게 만든다. 그는 준공식 날 이 공원을 동네 마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뿐만 아니라 강릉에 오는 사람이라면 어머니의 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고 한 목적을 위해서 기꺼이 강릉시에 기증했다.
사친문학의 본산, 백교문학회의 시작
그런데 사모정 공원을 만들어 부모님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고 나니 그에게 문인들의 의견이 쏟아졌다. 지역 규모의 공원을 만들어 어머니의 뜻을 기리는 것도 좋으나, 보다 큰 범주의 의미가 있는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목소리들이었다. 문인들에게서 나온 발상인 만큼 문학상을 활용하는 방법이 추천됐다. 그리하여 백교문학회가 설립되었다. 백교(白橋)는 ‘하얀 다리’라는 의미로 그의 고향인 ‘핸다리’가 바로 백교의 강릉 사투리다. 권 회장은 이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다.
“백교문학상은 우리나라에 사친문학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만들게 됐습니다.”
사친(思親)은 부모를 생각한다는 의미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선조 때 문신 겸 시인인 박인로가 ‘사친’이라는 제목으로 시조를 지어 문집 에 실은 바가 있다. 그러한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백교문학상의 후보로 오를 글은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시와 수필만이 가능하다. 철저하게 부모님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 그려내는가에만 초점을 맞추기에, 권 회장 말마따나 사친문학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도 크게 이상할 게 없다.
2010년 제정된 백교문학상은 2014년에 5회째를 맞이했다. 제5회 백교문학상 시 부문의 수상자는 ‘항아리’를 쓴 정재돈 작가. 수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백교문학상이 강원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국 단위로 운용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어머니는 줄곧 항아리처럼
둥글고 잘 발효된 가정을 만드시길 원하셨다.
갓 빚은 항아리에 가정의 안위를 담그시고
오랜 기간 모정의 효소로
자식들을 맛깔나게 숙성시키셨다.
행여나 음지에서 부식되지는 않을까
뚜껑 열어 햇살이 드는 곳에 말리셨고
우설(雨雪)의 세례엔 포근한 품으로 감싸 안으며
남몰래 스미는 한기를 떠안으셨다. (하략)
한국의 효 사상이 세계의 효 사상이 되어야
최근 권 회장의 행보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큰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최명희 강릉 시장이 어느 잡지에 수필을 쓴 걸 읽게 됐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우리가 추구하는 길, 효 사상의 정서와 일치하는 내용이었어요.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의 고향이 바로 강릉 오죽헌이란 것을 설명하면서 강원도의 효 사상을 2018평창 동계올림픽 때 보다 널리 알리자, 그렇게 하여 강원도를 국제적인 효의 중심 도시로 만들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걸 읽고 제가 해야 할 게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권 회장은 최근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효 사상이 날로 꺼져가고 있음을 개탄했다. 그 잃어가는 효심을 적극적으로 함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책으로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화하여 인본주의적 가치를 세워 한국의 문화 영토를 확장하는 시도를 해보자, 그러면 2018년 동계올림픽이 끝나도 무형문화유산으로서 남을 것 아니겠습니까?”
권 회장은 세계적 인류학자인 아놀드 토인비가 “한국이 인류 문화에 기여한 것은 효 사상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한 말에서 힘을 얻었다.
“효의 기본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힘은 사랑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둘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효가 전세계 도서관에 꽂힌다
권 회장은 문학계, 언론계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청탁했다. 예상보다 험난했던, 제작 시간이 무려 3년 이상 소요된 장기 프로젝트였다. 작가들로부터 원고, 프로필, 사진을 받고, 원고 교정 교열을 하고 감수도 받고 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야말로 책의 목적답게 정성을 다해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이 만들어졌다.
책에는 박목월 시인의 시 ‘어머니의 눈물’을 비롯해 홍일식 전 고려대학교 총장, 김진선 전 강원도 지사, 최명희 강릉시장, 이희종 강원일보 사장 등 사회 각계지도층 저명인사 문인 63명의 작품 71편이 실렸다. 영문판으로도 만들어진 이 책은 국내 국립·대학도서관 190곳과 해외 60개국 국립·대학도서관 110곳에 기증됐다.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방문할 80개국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114명에게도 이 책을 줄 예정이다.
어머니, 신의 다른 이름
2남 2녀의 차남인 권 회장은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죽기는커녕 더욱 생생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연숙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어머니는 1900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권 회장이 한국일보 편집국장이던 20여 년 전,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 가면 그래요, 대관령만 넘어서면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사모정에 가면 가만히 앉아서 시를 읽어보게 되고….”
권 회장은 어머니에 대한 정의를 간단하게, ‘어머니는 신’이라고 표현했다.
“서양 사람들은 죽을 때 ‘오 마이 갓’ 하고 죽잖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엄마야’ 하고 죽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어머니가 신과 같은 거죠.”
어머니를 신과 같이 여긴다는 것, 권 회장이 품고 있는 효 사상이 일종의 신앙이자 율법과 같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던 부분이다. 권 회장의 말에서 사모정 공원의 시비들 중 신봉승이 쓴 시 ‘어머니’의 한 구절이 보였다.
촛불이 심지를 태우듯
어둠을 밝혀 주시고
손 시린 겨울밤은 화로가 되시네.
아름다워라
형극의 가시만 골라서 지은
거친 옷, 새 옷처럼 입으시고
환하게 웃으시던
어머니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