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이의 봄

기사입력 2020-03-30 10:33 기사수정 2020-03-30 10:33

[특별기고]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나이 먹어서 즐거운 일은 호수공원에 나가서 봄볕을 쪼이는 일이다. 일하다가 지겨워서 작업실 커튼을 열고 내다보면 공원에 봄볕이 가득하다. 나는 햇볕이 아까워서 하던 일을 밀쳐놓고 공원에 나가 양지쪽에 앉는다. 노인들이 많이 나와 있다.

햇볕을 쪼일 때 해와 나 사이에는 중간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다. 햇볕은 옷을 뚫고 들어와 내 몸속에 스민다.

자연을 받아들이는 행위들 중에서 봄볕을 쪼이는 일은 가장 관능적이다.

나는 젊었을 때 혼자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옷을 모조리 홀랑(!) 벗고 개울물 속에 들어가기를 좋아했다. 장마가 끝나고 며칠 지나면 물의 흐름이 순해지고 향기도 진해진다. 이때 개울물 속에 들어가면 몸의 구석구석에 와 닿는 물의 감각은 놀라웠다.

물이 숲의 향기를 싣고 내려와서 새로운 시간을 내 숨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물은 육신을 가진 생물로 변해서 내 몸을 안았다. 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려 와서 내 몸을 핥고 지나갔다. 머리가 두 쪽으로 쪼개져서 낡은 시간의 똥가루가 빠져나가고 창세기의 새벽처럼 순결한 세상이 전개되었다. 수묵 산수화를 그리던 조선의 선비들은 물을 멀리서 보고 그림을 그릴 줄만 알았지, 나처럼 홀랑 벗고 들어갈 줄은 몰랐던 것을 나는 답답하게 여긴다. 나는 봄부터 가을까지 산속에서 수행을 계속했고 겨울에는 얼음이 녹기를 기다렸다.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그 개울 아래쪽에 작은 절이 있었는데, 어느 날 새벽에 수행하러 갔더니 ‘나체 목욕 금지’라는 팻말이 박혀 있었다.

나이를 먹으니까 보는 눈도 있고 해서 이 짓을 더 이상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공원에 나가서 봄볕을 쪼이는데 이 즐거움은 젊은 날의 개울물 수행과 거의 맞먹는다. 나는 봄볕 쪼이기가 개울물 수행과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태양의 빛이 지구에 당도하기까지는 초속 30만 km로 달려서 8분 걸린다고 하니 이 무지막지한 공간과 속도는 물리학자들이 알겠지,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르지만 봄볕을 즐거워한다. 이 밝음과 따스함은 저 무한공간을 건너서 나에게 직접 다가온다. 나는 이 직접성의 사태에 경악한다. 나는 태양의 애무를 받는다.

봄볕을 쪼이면 잘한 것도 없이 상을 받는 것 같다. 봄볕을 쪼이면 어려서 어머니 속 썩인 일과 자라서 아버지 속 썩인 일과 함부로 지껄인 말들이 용서받고 있는 것 같다.

볕은 빛과 함께 우주공간을 건너서 내게로 온다. 빛은 스스로 아무런 색도 없지만, 이 세상의 모든 색을 드러나게 한다. 빛은 프리즘을 통과할 때 수억만 개의 색들의 스펙트럼으로 펼쳐지지만, 그 모든 색들을 다 합쳐서 아무런 색도 없는 백색광선이 된다. 모든 색을 다 아우러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다. 봄볕은 그 빛 위에 실려 있다.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봄볕 속에서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쪽에 분홍색 하늘이 펼쳐지고 그 위에 붉고 푸른 반점들이 별처럼 떠 있다. 반점들은 어디론지 흘러가고 또 다가온다. 그 반점들은 스스로 작동하고 있는 내 생명의 신호들이다. 신호들은 가물거린다.

봄볕은 생명을 깨어나게 하고 삶의 쓰라림을 위로한다. 겨울에 흰 눈에 덮인 공동묘지에 가면 삶과 죽음은 완벽히 차단되어 있다. 하얀 공동묘지에서 죽음은 범접할 수 없고 말 붙일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온다.

봄이 와서 흙이 부풀고 무덤들이 파래지는 한식날 성묘 가면 죽음은 삶의 연장으로서 평화롭다. 오래된 무덤에서는 슬픔의 날카로움이 풍화되어서 사람들은 울지 않는다.

봄에는 호수의 거북이들이 바위 위에 올라와서 한나절씩 봄볕을 쪼인다. 거북이들은 언 호수 밑에서 봄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바위 위에서 거북이들은 꼼짝도 않는다. 거북이들은 매우 집중되고 경건한 태도로 봄볕을 쪼인다. 거북이들은 눈을 감고 있는데, 거북이들의 눈꺼풀 속에도 반점들이 흘러 다니고 있을 터이다. 봄볕을 쪼이면서 나는 거북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북이의 즐거움을 안다.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작은 동물원의 미어캣들도 발딱 일어서서 봄볕을 쪼인다. 이것들의 자세는 교양 없어 보인다. 이것들은 몸을 활짝 열어서 봄볕을 맞는다. 아이들이 미어캣을 들여다보면서 미어캣 흉내를 낸다. 아이들의 뒤통수 가마에 봄볕이 가득하다.

닭들은 봄볕에 부푼 땅을 파고 들어앉아 흙을 파헤치며 뒹군다. 닭은 봄볕과 땅기운을 함께 뒤집어쓴다. 닭은 하늘과 땅, 양쪽을 다 안다.

봄볕을 쪼이면서, 나는 나와 거북이와 미어캣과 닭이 다 같은 중생임을 안다. 봄볕을 쪼이면서 나는 개울물 수행하던 젊은 날이 늙은이의 봄날 속에 살아 있음을 안다. 봄볕은 공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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