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01

단종은 왜 현재로 소환돼 재해석될까

입력 2026-04-01 06:00

[영상 속 세상] 사극이 역사적 인물을 불러오는 이유

극장가의 불황기에 천만 관객을 넘긴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지금껏 사극이 그려왔던 것과는 사뭇 다른 단종의 모습을 그렸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재해석한 단종의 모습은 오늘날 대중이 가진 어떤 갈증을 건드렸을까.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과 보수주인 엄흥도.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과 보수주인 엄흥도.


‘왕과 사는 남자’, 우리가 알던 단종이 아니다

사실 단종의 비극은 대중에게 익숙하다. 이미 많은 사극이 이 시대를 다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94년에 방영된 KBS의 대하사극 ‘한명회’는 무려 104회에 걸쳐 조선의 권력가 한명회의 정치적 선택과 성장과정을 그렸다. 당연히 한명회와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난이 등장하고, 이에 희생된 단종이 나온다. 대하사극에서 단종은 주도적인 인물로 그려지지 않았다. 한명회가 주인공이고, 그의 입지전적인 성장과정이 사극의 주요 서사였기 때문이다. KBS에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방영한 ‘왕과 비’도 마찬가지다. 세조와 정희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왕실 정치 대하사극이었던 이 작품에서 계유정난·폐위·유배 같은 사건이 등장하지만, 거기에 단종의 입장이나 감정·관점 등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대신 이를 선택하는 세조의 갈등이 부각될 뿐이었다. 같은 시대를 다룬 영화 ‘관상’은 어떨까. 역모를 꾀하는 수양대군과 관상을 보는 인물이 주역이다. 역모의 희생양이 된 단종은 주목받지 못했다.


▲MBC 드라마 ‘대장금’.
▲MBC 드라마 ‘대장금’.


그간 단종을 다룬 일련의 작품들을 염두에 두고 보면 ‘왕과 사는 남자’는 이례적이다. 단종(박지훈)과 더불어, 삼족을 멸한다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수양대군에 의해 시해된 후 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던 엄흥도(유해진)라는 실존 인물이 주인공이다. 이들을 시시각각 위협하는 악역으로 한명회(유지태)가 나오고, 수양대군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간 한명회나 수양대군을 주인공으로 세우고 단종을 잘 보이지도 않는 조역으로 내세웠던 사극들과 정반대 구도다. 단종이 주인공이고, 한명회는 최강 빌런(악역)이며, 수양대군은 아예 등장조차 배제했다.

게다가 이 작품 속 단종은 과거의 사극에서 유약하게만 그렸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는 호랑이 앞에 나서서 “네 이놈! 네 상대는 나다!”라고 외치는 인물이다. 물론 처음에는 아무런 삶의 의지조차 느껴지지 않는 텅 빈 눈빛으로 등장한다. 유배지에서 광천골 마을 사람들과 어우러지며 기운을 회복한 단종은 변한다. 자신의 밥상을 기꺼이 마을 사람들과 나누고 핍박받는 백성을 지켜내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나선다. 그 변화를 한명회는 이렇게 말한다. “눈이 달라졌다. 힘없고 병약했던 눈이 이곳에 와서 범의 눈이 되었구나.” 이러한 재해석은 왜 이뤄진 것일까.


▲유배지 영월 광천골의 마을 사람들.
▲유배지 영월 광천골의 마을 사람들.


권력자들이 지워낸 역사를 복원하는 사극

사극은 ‘역사’와 ‘극’이 합쳐진 형태의 장르다. 역사가 실제 기록이라면 극은 기록 바깥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은 허구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정통 사극의 시대에는 역사가 중심이었다. 1983년부터 1990년까지 MBC에서 방영한 ‘조선왕조 500년’ 같은 사극이 대표적이다. 이 시대에는 역사서를 벗어난 사소한 해석조차 ‘왜곡’이라는 논란이 생기기도 했다.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사극은 변화했다. MBC ‘허준’(1999)이나 MBC ‘상도’(2001) 같은 권력자와는 거리가 먼, 그래서 기록이 적은 실존 인물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채운 사극이 등장했다. 의녀의 성장담을 다룬 MBC ‘대장금’(2003)은 퓨전 사극 신드롬을 일으켜 정통 사극을 고루하게 만들었다. 사극은 점점 역사보다 극에 더 방점을 찍기 시작했고, 역사를 과감하게 재해석한 SBS ‘바람의 화원’(2008)이나 SBS ‘뿌리 깊은 나무’(2011) 같은 팩션(팩트+픽션, 역사적 사실에 상상을 가미한 재구성) 사극도 등장했다. 주체적인 여성의 성장 서사를 그린 ‘대장금’이나 MBC ‘동이’(2010), 노비들의 역사를 그린 KBS ‘추노’(2010) 같은 작품이 등장해 호평을 받았다.


▲단종과 식사하는 엄흥도.
▲단종과 식사하는 엄흥도.


이런 흐름은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때문에 생겼다. 역사는 그 자체로 팩트가 아니라 권력자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기록이라는 관점이다. 권력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은 역사 기록에서 소외당했다. 여성이나 노비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역설적으로 이들은 사극의 중요한 소재가 됐다. 오늘날에 이르면 사극의 역사적 내용이 진짜냐 아니냐를 따지는 ‘왜곡 논란’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상식을 넘어서는 과도한 해석은 지탄받지만, 사극은 이제 진짜 역사와는 살짝 거리를 둔 허구라고 대중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제 사극은 기존에 다뤘던 역사적 인물을 재해석하는 단계에까지 들어섰다.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이 그렇듯,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는 그저 비행을 일삼던 인물로만 그려졌던 사도세자를 지나친 기대와 잣대로 몰아붙인 영조에 의해 무너지는 인물로 재해석했다. 추창민 감독의 ‘광해, 왕이 된 남자’도 그렇다. 형제를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하는 패륜의 임금으로 그려지곤 했던 광해군은 혁신과 외교에서 실리를 추구한 왕으로 그려진다. 이제 역사는 팩트 자체가 아니라 하나의 관점으로 읽히게 됐다. 그리고 사극은 과거의 기록에 상상력을 더해 더욱 과감한 허구가 가능한 장르가 됐다.


▲한명회.
▲한명회.


과거보다 현재의 관점이 더 중요한 사극

당연한 말이지만 사극은 사건이 벌어진 과거보다 현재의 해석 관점이 더 중요하다. 그 많은 역사의 시공간과 인물 중에서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시대를 선택하고, 그 시대에 수양대군이 아닌 단종과 엄흥도의 이야기를 선택하는 건 현재의 제작자들이다. 그들은 바로 지금 단종과 엄흥도의 이야기가 대중에게 특별한 감흥을 줄 거라고 기대한다.

과거의 사극들과 ‘왕과 사는 남자’에서 단종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재해석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여주는지 알 수 있다. 먼저 쿠데타를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단종은 숙부였던 수양대군과 한명회 같은 인물에 의해 자행된 쿠데타의 희생자다. ‘한명회’나 ‘왕과 비’ 같은 옛 사극에서는 이 쿠데타를 상당히 긍정적이고 역동적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오랜 군부독재 시절을 거치며 당대까지 남아 있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와 1979년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쿠데타의 시대를 거치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혼란한 정국을 평정하고 국가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은연중에 대중에게 주입되던 시기다. 한명회는 가난한 유년기를 딛고 천하를 움직이는 입지전적 전략가로, 수양대군은 왕권을 강화해 조선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그린 이유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포스터.
▲영화 ‘왕과 사는 남자’ 포스터.


하지만 2020년대의 대중은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해도 더 이상 승자의 화려한 영광에 매료되지 않는다. 김성수 감독의 영화 ‘서울의 봄’이 전두광(황정민)이라는 악인을 세워 대중의 분노를 끌어내고, 그에 맞선 이태신(정우성)에게 열광하게 만든 건 당대의 대중이 가진 달라진 관점을 보여준다. 쿠데타에 짓밟힌 희생자지만 그 권력 찬탈자들의 부당함에 끝까지 맞선 이들의 고결한 정신에 주목한다. ‘왕과 사는 남자’ 역시 쿠데타 세력에 의해 삶의 모든 것을 박탈당한 소년과, 그 소년의 죽음을 지켜보는 백성의 슬픔에 감정을 이입하게 했다.

이준익 감독의 ‘사도’가 사도세자의 비극을 정치적 음모론이 아닌 부자간의 심리적 갈등으로 해석함으로써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무한 경쟁사회에서 자녀에게 과도한 기대를 투영하는 현재 한국의 부모 세대와, 그 기대에 짓눌려 힘겨워하는 청년 세대의 아픔을 재현했다. 또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광대지만 왕과 똑같이 닮아 왕 역할을 하게 된 하선(이병헌)의 입을 빌려 백성을 위하는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 설파한다. 물론 이러한 재해석은 판타지일 수 있지만, 그것은 현재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를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현실적이다.


▲영화 ‘사도’ 포스터.
▲영화 ‘사도’ 포스터.


성취가 아닌 가치, 결과가 아닌 과정

‘왕과 사는 남자’를 비롯한 현대 사극이 주인공 자리에 역사의 승자가 아닌 희생자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의 대중이 가진 정서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말해 ‘성취’가 아닌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고, ‘결과’가 아닌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은 결국 성취와 결과로 채색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극은 그 성취와 결과 바깥에 존재하는 가치와 과정을 찾아낸다. 12.12사태를 막아내진 못했지만 이에 저항했던 이태신 같은 인물이 존재했다. 이 사실에 대중은 극장을 찾는 행위로 반응한다. 영화를 소비하는 것으로 도덕적인 승리가 어느 쪽에 있는지 보여주고 싶어 한다. 단종은 정치적으로 패배했지만, 끝까지 그를 왕으로 여기고 지키려 했던 엄흥도의 의리와 백성들의 마음은 패배하지 않았다. 이는 시공간을 초월해 현재의 대중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네 정치사에서 쿠데타가 너무 자주 벌어졌고, 또 최근까지 시도됐다. ‘성공하면 혁명’이라는 구시대의 관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하지만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지금의 대중은 결과가 아닌 과정의 정당함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비상계엄 소식에 여의도로 한걸음에 달려간 국민의 염원이 그러했듯이.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기자의 주요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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