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맛'에 대한 그리움

기사입력 2020-07-15 08:00 기사수정 2020-07-15 08:00

황광해의 ‘食史’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고즈넉한 한담이다. 아마도 늦은 오후 무렵이었을 것이다. 절대 군주 영조대왕(1694~1776, 재위 1724~1776)과 신하 김양택(1712∼1777)의 대화다. 느닷없이 고추장이 등장하니 길게 인용한다. 당시 영조는 일흔다섯의 노인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음력 7월이니, 늦더위가 한창인 8월 말경일 것이다. 노인들이 입맛이 없을 계절이다. 내국(內局)의 도제조(都提調) 김양택도 쉰일곱 살이었다. 당시로는 노인이다. 두 사람이 ‘입맛’과 ‘음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국에서 입시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송이(松茸)·생복(生鰒)·아치(兒雉)·고초장(苦椒醬) 이 네 가지 맛이 있으면 밥을 잘 먹으니, 이로써 보면 입맛이 영구히 늙은 것은 아니다.” 하니, 도제조 김양택이 말하기를, “그러시면 생복을 복정(卜定)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만두라. ‘공자는 꿩고기를 세 번 냄새만 맡고 일어났다’고 하였으니, 때로는 혹 향당편(鄕黨篇)에 성인의 기상을 묘사하였음을 상상하였다. 적복(摘鰒)하기는 공이 많이 들므로 영상(領相)이 어사(御史)로 있을 때에 한 마리 큰 복어(鰒魚)로써 나에게 민폐가 된다는 뜻을 보였다. 방금 충재(蟲災)가 민간에 몹시 지독한데, 정당한 공물(貢物) 외에 때가 아닌 물건을 어찌 반드시 구하여 구복(口腹)을 위하겠는가? 마땅히 바칠 것 외에는 내가 받지 아니하겠다.” 하였다.


김양택은 우의정을 거친 고참 신하다. 사적으로, 두 사람은 먼 사돈지간이다. 김양택의 고모가 숙종의 왕비였다. ‘내국’의 이야기이니, 궁궐 깊은 곳의, 얼마쯤은 사적인 이야기다. 영조가 말한다. 송이버섯, 날전복, 어린 꿩, 고추장이 있으면 밥을 잘 먹으니, 내 입맛이 아주 늙은 것은 아니라고.

송이, 전복, 꿩은 지금도 고급 식재료다. 고추장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추장은 장류의 하나이고 특별히 고급이라고 말할 음식은 아니다. 그런데 고추장이다. 고추장은 매운 장이다. 적어도 영조는 고추장을 각별하게 여겼다. 고추는 임진왜란 무렵, 남방에서 건너왔다고 전해진다. 정설이다. 고추 전래 후, 170년쯤의 세월이 흘렀을 때다. 고추는 상당히 널리 퍼졌다.


한민족은 매운맛을 즐겼다

‘매운맛’은 중독성이 있다. 매운맛에 한번 빠지면 좀체 헤어나기 힘들다. 한민족은 매운 고추를 즐겨 먹는, 매운맛을 즐기는 민족이라고 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매운맛을 즐기는 민족이라는 표현은 맞다. 고추의 매운맛을 즐긴다는 표현은 틀렸다. 매운맛을 고추로만 즐기는 건 아니다. 고추가 전래되기 전에는 매운맛을 즐기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초’(椒)는 원래 산초를 의미하지만 매운맛이라는 뜻도 있다. ‘호초’(胡椒), ‘산초’(山椒), ‘고초’(苦椒)는 모두 매운맛이다. 오늘날의 후추, 산초, 고추다. 고추가 들어오기 전에도 매운맛은 있었다. 외국에서 수입(?)한 후추와 우리나라 산에서 자생하는 산초로 매운맛을 냈다.

산초는 한반도 남부지역 야산에서 널리 자라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민간에서는 산초를 쓰고 수입산인 후추는 궁궐 사람들과 사대부들이 주로 사용했다. 후추에 대해 지나친(?) 집착을 보인 이는 성종대왕이다. 조선시대 내내 후추 수입은 큰 문제가 없었지만, 통치자는 늘 ‘만약’을 대비해 국내 생산을 염두에 둔다. 성종은 “만약 외국(규슈 왜인)과의 교역이 끊어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염려했다.


후추는 음식과 더불어 약 제조에도 사용했다. 고기의 누린내를 잡아주고, 음식물을 상하지 않게 하며 음식에 매운맛을 더한다. 더불어 서증(暑症), 더위 먹은 병도 다스리니 후추는 필수적이었다. 성종은 왜인들과 교류가 끊어질 경우 필수품인 후추를 구할 수 없으니 후추 씨앗을 구해 직접 재배하고 싶어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후추 씨앗을 구해 한반도에서 기르는 일은 불가능했다. 성종의 ‘후추 씨앗 사랑’은 놀랍고 한편으로는 애처롭다. 이듬해인 성종 13년(1482) 4월 17일의 ‘조선왕조실록’에도 후추는 등장한다. 예조의 보고다.


“본조(本曹)에서 일본국(日本國) 사신을 연회하던 날 후추[胡椒]의 씨를 구해 보낼 것을 말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본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남만(南蠻)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유구국(琉球國)에서 항상 남만에 청(請)하고 본국에서 또 유구국에 청하여, 종자를 얻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당시는 다른 나라였던 유구국(오키나와)에서 구한다. 오키나와도 생산지는 아니다. 남만에서 생산된다. 남만은 오늘날의 태국, 미얀마 등 인도차이나반도다. 성종은 물러서지 않는다. “그들이 비록 생산되지 않는다고 말하나, 후추는 일본에서 왔으니, 일본이 유구국에 청하여 보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집착이다. 후추는 남만, 유구, 일본 규슈나 혼슈 서남단, 대마도 등을 거쳐서 한반도에 들어온다. 말을 전해서 원생산지인 남만에 이르면 후추 씨앗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듬해인 성종 14년(1483)에는 신하가, “대마도주(對馬島主)가 말하기를, ‘남만에 사신을 보내어 후추씨[胡椒種]를 구하고자 하는데, 남만은 땅이 멀어 3년이 걸린다. 그 내왕에 드는 식량을 죄다 미곡(米穀)만 실을 수 없으니, 동전 2만 꿰미를 내려 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청구함이 몹시 번거로운데, 장차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성종의 후추 씨앗 구하기에 대한 숱한 자료가 기록돼 있다.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으로도 손을 뻗는다. 성종 14년 9월의 기록에는 “관반(館伴)으로 하여금 중국 사신에게 후추씨를 구하게 하라”는 기록도 있다. ‘관반’은 ‘관반사’(館伴使)로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벼슬아치다. 중국 사신을 자주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니, 이들이 후추 종자를 구해보라는 뜻이다.

‘성종의 후추 종자 구하기’는 성종 16년(1485) 11월 무렵에 끝이 난다. 왜인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후추 종자 구하는 일을 미룬다. 남만의 뱃길이 머니 곡식 대신 돈을 달라 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측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대장경을 달라’는 요구도 내건다. 성종 16년의 기사에는 일본 측 사신인 앙지(仰之)의 확실한 대답이 나와 있다.


앙지가 대답하기를, “후추의 종자는 남만에서 생산이 되는데, 유구국은 남만에서 무역을 해오고 본국은 유구국에서 무역을 해옵니다. 그래서 본국에서는 후추의 종자를 무역하려고 윤 2, 3월에 이미 사자(使者)를 남만에 보내었으니, 내년 3, 4월 사이에는 돌아올 것입니다. 다만 남만 사람들이 전매(轉賣)할 적에 반드시 그 종자를 삶아버리므로 아마도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남만-오키나와-일본-한반도를 거쳐 힘들게 씨앗을 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씨앗은 한 번 삶은 것이다. 싹이 날 리가 없다. 설혹 구했다 해도 후추는 우리 땅에서 자라지 않는다. 열대성 식물이기 때문이다. 성종이 힘들게 후추 종자를 구했어도 후추를 생산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성종의 후추 종자는, 매운맛에 대한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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