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코틀랜드의 색깔 그대로 천년고도 에든버러
- 스코틀랜드의 긴 역사가 고이 간직된, 천년고도 에든버러. 대영제국이 된 지 300년이 흘렀어도 근원은 스코틀랜드일 뿐이다. 남자들은 킬트 줄무늬 치마를 입고 길거리에서는 백파이프 연주가 흐른다. 스코틀랜드의 민족성과 풍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도 스튜어트 왕가와 귀족들, 월터 스콧,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로버트 번스 등 세기의 작가들 흔적이 남아 있다. 회색빛의 고풍스러운 건축물에 서리서리 스며 있는 역사의 이야기는 긴 겨울밤을 하얗게 지새우게 한다. 스코틀랜드의 대문호 월터 스콧 기념탑 에든버러 공항에서 버스를 타면 시내 중심까지 한 시간이 채 안 걸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탓일까? 아니면 약간 구릉진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고색창연한 건축물들 때문일까? 에든버러 겨울의 첫 느낌은 ‘회색빛’이다. 어쩌면 버스정류장 앞쪽에 우뚝 서 있는 스코틀랜드 대문호인 월터 스콧(1771~1832)의 기념탑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해달라는 스콧의 유언에 따라 시커먼 사암석으로 만든 뾰족한 탑. 61m 높이의 기념탑은 왠지 기괴하고 음산하다. 이 탑을 만들 때, 잉글랜드에 대한 경쟁심으로 영국에서 제일 높은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기념탑보다 5m 더 높이 올렸다는 후일담이 있다. 287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에든버러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지만 포기하고 스콧 기념탑 아래 프린세스 정원의 국립 갤러리, 로열아카데미를 찾는다. 모두 무료 입장이다. 관광객으로서는 매우 반가운 일. 미술관에 걸린 수준 높은 명화를 마음껏 감상하면서 미소 짓는다. 에든버러의 국교는 장로교 에든버러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프린스 스트리트를 경계로 북쪽의 올드 타운과 남쪽의 뉴타운으로 구분된다. 구시가지는 15세기부터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로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다. 신시가지는 18세기 이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조성된 주택, 상업지구. 1985년, 유네스코는 신·구시가를 묶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시선도, 마음도 구시가지에 다 빼앗긴다. 무조건 ‘고성(古城)’을 기점으로 걷는다. 고성까지 걸어가는 길목에서 화폐 박물관, 뉴대학을 만난다. 대학 건물은 해묵은 향기를 뿜어낸다. 토마스 찰머스(1780~1847) 목사의 동상이 있는 이 대학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교구가 있던 곳. 16세기경, 이곳은 매우 중요했다. 1560년, 스코틀랜드가 국교로 지정한 장로교를 잉글랜드와 미국으로 전파하는 중심지였다.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격전지, 에든버러 성 에든버러 성은 오래전 활동을 중단한 화산 꼭대기(133m)에 있다. 성 뒤쪽은 거대한 바위산이 버티고 있는데 3면이 깎아지를 듯한 절벽을 이루고 있다. 딱 봐도 요새로 최적이다.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동쪽이 출입구. 이 성은 현재 영국군 사령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전통 복장을 한 두 명의 근위병이 성을 지키고 있다. 한겨울에도 킬트를 입은 채 맨살을 보여주는 근위병은 여행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정작 그들은 관광객들의 시선에 무심하다. 에든버러 성은 6세기에 지어졌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 1018년부터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현재의 건물들은 16~18세기 혹은 그 이후에 지어졌다. 이 성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격렬한 투쟁사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수 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성주가 바뀌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이 성은 이긴 자의 차지였다.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를 끝으로 결국 잉글랜드 차지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성내에는 가장 오래된 12세기 초기의 건축물인 세인트 마가렛 예배당이 있는데 대부분 군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타탄 무늬 제품의 천국 도시 에든버러의 백미는 구시가지 거리 로열마일이다. 에든버러 성과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을 연결하는 1.6km 남짓의 도로. 과거 왕가에서 쓰던 전용 도로로서 길이가 1마일이나 되어 ‘로열마일’로 불린다. 왕족들만 다닐 수 있는 로열마일 때문에 서민들은 좁은 클로즈 골목을 이용해야 했다. 대로 옆으로 무수한 클로즈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클로즈는 한국의 피맛골 거리와 엇비슷하다. 로열마일 양쪽으로는 역사를 간직한 옛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기념품 숍, 식당, 호텔 등도 무수히 이어진다. 로열마일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은 브로디스(Brodie’s) 클로즈다. 18세기, 낮에는 저명한 인사로 지내고 밤에는 도둑으로 살았던 윌리엄 브로디(1741~1788)의 이름을 따서 붙인 골목이다. 론마켓에서 캐비닛을 만드는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낮에는 경건하고, 부유하고, 훌륭한 시민이었다. 1781년에는 시의 조합장(deacon)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밤에는 강도짓과 도둑질을 했고 도박꾼으로 방탕하게 살았다. 그는 두 번째 부인과 살면서 돈을 많이 써댔다. 1786년에는 시립은행의 열쇠를 복사해 800파운드를 훔쳤다. 또 부유한 집안에 일하러 다니면서 열쇠를 따로 복제했다. 주변 상인들도 도둑질에 끌어들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교활함과 뻔뻔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결국 성 자일스 교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브로디의 이중적인 캐릭터에 영국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이 영감을 얻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라는 작품이 탄생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그 진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그의 집은 카페로 이용되고 있다. 애덤 스미스 동상과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로열마일의 가장 번화한 광장에 과거 스코틀랜드 국회의사당, 청동 말과 동상으로 만들어진 버클루 공작의 기념비, 애덤 스미스의 동상과 성 자일스 성당 등이 몰려 있다. ‘국부론’으로 잘 알려진 애덤 스미스(1723~1790) 동상은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애덤 스미스 동상 앞에 있는 성 자일스 성당(1495년 건립)의 노르만 양식의 탑이 인상적이다. 이 교회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곳. 종교개혁가 존 녹스는 프로테스탄트 동지를 규합했다. 성당 앞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18세기 시청사가 있다. 시청사 옆 리얼 마리 킹 클로즈는 ‘귀신 나오는 골목’으로 관광 트렌드가 되었다. 이 광장에서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콕번 스트리트를 앞두고 데이비드 흄(1711~1776)의 흉상이 있다. 흄은 에든버러 근교인 나인웰스에서 태어났지만 에든버러에서 대학을 다니는 등 인연이 깊다. 우여곡절이 많은 그의 인생 이야기가 참 재미있다. 흄은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철학 가운데서도 여전히 인간이어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메리 여왕이 살던 홀리루드 하우스 흄 흉상을 지나면서 길은 한가해진다. 길 끝에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이 있다. 홀리루드 하우스는 1128년 데이비드 1세가 지은,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성당이었다. 1498년, 제임스 4세의 명에 따라 궁전으로 다시 지었고 1530년대에는 제임스 5세가 자신과 왕비인 기즈의 메리를 위해 탑을 덧붙였다. 1560년대에는 이들의 딸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가 살았다. 메리는 1565년, 이 수도원에서 사촌 단리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하지만 단리가 살해되자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살해 용의자 보스웰 백작의 아이를 임신한 채 이 궁전에서 결혼했다. 메리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메리와 단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제임스 6세는 에든버러에 머물 때는 홀리루드 하우스를 이용했으나 1603년, 그가 영국으로 떠난 뒤로 이 궁전은 왕가의 방문이 있을 때만 사용되었다. 2002년에는 왕실이 소장한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퀸스 갤러리’가 만들어졌다. 주인의 무덤 지킨 충견, 보비 에든버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보비의 동상이다. 존 그레이의 양치기 개 보비. 존은 보비와 여행을 하던 중 병으로 객사했다. 존의 시신은 보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에든버러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묘지에 묻혔다. 당시 두 살이었던 보비는 죽을 때까지 무려 14년간 매일 밤 존의 무덤을 지켰다. 보비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스코틀랜드 전역은 물론 해외까지 퍼졌고, 에든버러의 아이들은 용돈을 모아 보비에게 목걸이를 선물했다. 보비가 집 없는 개로 오인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잡혀가거나 사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보비는 개로서는 유일하게 에든버러 시 명예시민권을 부여받았고, 죽은 뒤에는 특별허가를 받아 존 옆에 묻혔다. 보비의 동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해리포터’의 작가인 조앤 롤링(1965~)이 즐겨 찾았다는 카페가 있다. 이혼 후 에든버러에 정착한 그녀는 아이 분유 값을 벌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화를 쓰기로 결정한 그녀는 집 근처 카페에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완성했다. Travel Data 항공편 스코틀랜드까지 가는 직항편이 없다. 인천→영국 런던행 직항편을 이용해 히드로공항까지 약 11~12시간 소요. 교통 런던 빅토리아 코치 역에서 에든버러까지 내셔널익스프레스 버스가 운행된다.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는 매일 20여 회 기차가 운행된다. 시차우리나라보다 9시간 늦다. 음식 ‘하기스(Haggis)’가 유명하다. 양의 내장을 잘게 다져 곡물과 섞은 것을 양의 위장에 채워 삶은 음식. 스코틀랜드의 전통 요리로서 매시포테이토와 순무를 곁들여 먹는다. 주류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스카치위스키다. 몰트위스키와 그레인위스키를 섞어 만드는 블렌디드 위스키가 가장 일반적이고, 한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종류다. 숙박 게스트하우스, 호스텔 등을 이용하면 된다. 고급 호텔은 25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들지만 평균 8만~10만 원대에서 이용 가능하다. 화폐 파운드 여행 포인트 시간 여유를 갖고 북부 고지대에 있는 ‘하일랜드(Highland)’ 지역을 연계하면 좋다. 에든버러 시내 여행사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 2019-01-28 10:22
-
- 전혜린 작가가 머물던 예술과 낭만의 도시 ‘뮌헨’
-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아지트 뮌헨 슈바빙 거리. 불꽃처럼 살다 떠난 여류작가 故전혜린의 발걸음이 닿았던 그 길목에 들어서면 마냥 길을 잃고만 싶어진다. 그가 생전 즐겨 찾던 잉글리시 가든 잔디밭에 누워 우수수 낙엽 비를 맞으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문장들을 떠올려본다. 백조의 천국, 님펜부르크 궁전 강렬한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체코와 독일의 경계인 ‘젤레즈나 루다’에서 기차를 타고 뮌헨 중앙역에 도착했을 때 옛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몇 해 전, 스위스 취리히에서 출발해 야심한 시간 뮌헨에 도착했을 때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날, 예약해놓은 숙소에서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입소를 거절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그 기억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뮌헨에서 가장 먼저 님펜부르크 궁전부터 찾아 나선다. 당시에도 궁전 근처까지 갔지만 새 숙소를 찾느라 여념이 없었고 시간도 여의치 않아 간과하고 말았다. 1664년, 바이에른의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1636~1679)가 아들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의 탄생 기념으로 지은 곳으로 뮌헨 시내에 있는 레지덴츠의 별궁이다. 넓은 호수 그 앞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 궁전 건물이 아름답다. 이 궁전에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이었던 루트비히 1세(1786~1868)가 만든 ‘미녀들의 갤러리’가 있는데 당대에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켰던, 그의 정부 롤라 몬테즈의 초상화가 눈길을 잡아끈다. 그것 말고도 역사적인 마차들을 전시하고 있는 왕궁 마구간 등 볼거리가 넘치고 기념품 숍의 물건들은 고급스럽고 아름다워 현혹적이다. 전혜린과 뮌헨 슈바빙 지구 님펜부르크 궁전을 빠져나와 뮌헨 슈바빙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슈바빙 거리는 뮌헨의 예술과 낭만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들이 슈바빙을 찾는 이유는 전혜린(1934~1965) 작가 때문이다. 필자의 목적 또한 같다. 카페 제로제(Seerose)는 전혜린 작가와 당시의 문인들이 즐겨 찾은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슈바빙 거리는 넓어서 갈 방향을 잃고 만다. 애써 길을 헤집으면서 찾고 싶지는 않다. 그냥 분위기만 느끼고 싶을 뿐. 생각을 바꿔 ‘잉글리시 가든’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전혜린 작가가 슈바빙에서 4년간 살면서 자주 찾았던 곳이다. 정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앤티크한 카페. 문 앞에는 토마스 만(1875∼1955)이 머물렀음을 설명하는 작은 팻말이 서 있다. 그의 작품 중 노벨상을 받게 하고 영화로도 제작된 ‘베니스의 죽음’을 떠올리면서 조금 걸었더니 어느새 잉글리시 가든이다. 이자르 강을 따라 펼쳐진 광활한 영국식 정원은 생각보다 크고 아름답다. 숲길도 있다. 산책을 즐기고 잔디에 누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호수에서 배를 타는 사람들, 빵조각을 들고 와 백조와 오리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들. 호수 안쪽으로 보이는 중국탑(Chinsesischer Turm)과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석조물이 서 있는 모습이 참 조화롭다. 벤치가 아닌 잔디밭 안쪽으로 들어가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맞으며 잔디 위에 누워본다. 전혜린 작가 사후(死後)에 출간된 수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떠올린다. 책 내용은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젊은 시절의 추억은 새록새록 떠오른다. 카를 성문과 노이하우저 거리 맑고 눈부신 가을 하늘을 머리 위에 올리고 메인 광장으로 향한다. 중앙역 주변의 멋진 건축물은 바이에른 주의 지방법원. 차도를 건너면 카를 광장. 분수대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광장 바로 앞에는 카를 성문. 현재 올드 타운에 남은 성문 3개(카를, 젠들링어, 이자르) 중 서쪽 문이다. 카를 성문을 통과하면 노이하우저 거리가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카를 성문에서 마리엔 광장까지 이어지는 인도 전용 도로. 엄청난 인파로 거리가 파도처럼 일렁댄다. 도로 양쪽으로는 다양한 상업 시설과 교회, 미술관 등이 이어진다. 독특한 분수대도 많아 눈길을 끈다. 예쁜 성 미카엘 교회를 지나면 사냥과 낚시 박물관이다. 거대한 건물 발코니가 온통 붉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물고기 모양의 독특한 분수 앞을 지나면 저절로 발걸음이 멈춰진다. 13세기부터 1803년까지는 아우구스티노 교회 일부였다. 1900년경부터는 사냥 인기가 높아지면서 1934년 독일박물관으로 설립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수난을 당하다가 1966년 재개관했다. 이 박물관에는 약 500종의 전시품이 있는데 15~19세기 물건들도 보인다. 빅투알리엔 마켓 거리와 맥주 구시청사의 문을 통과하면 남쪽으로 오래된 성 페터스 교회와 성령교회가 있다. 성령교회를 지나면 빅투알리엔 거리다. 시장 거리여서 그런지 서민의 향기가 배어 있다. 이 거리는 1807년, 막시밀리안 1세 때 만들어져 1823부터1829년까지 크게 확대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많이 망가졌다. 주변으로는 천막을 친 정육점, 식당 , 빵집, 과일 판매점 등이 있다.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마켓 공원 내에 무작위로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다. 무수한 사람들이 앉아 맥주를 마신다. 뮌헨 하면 ‘맥주’. 국내 호프집에 가면 꼭 걸려 있는 뮌헨의 유명한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 사진의 현장이다. 옥토버페스트는 1810년 10월 12일, 바이에른 왕국의 황태자 루트비히 1세와 작센 가의 테레제 공주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20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매년 9월 15일 이후에 돌아오는 토요일부터 10월 첫째 일요일까지 16~18일간 축제를 연다. 이곳에서 맥주 마시기는 당연한 일. 맥주 고장에서 마시는 맥주 맛은 훌륭하다. 술안주도 입맛에 딱 맞아떨어진다. 맛있는 맥주와 맛있는 안주가 어우러지니 술술 목 넘김이 좋다. Travel Data 가는 길 한국에서 루프트한자를 이용하면 추가 비용 없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환승해서 뮌헨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현지 시외교통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ICE 기차를 타고 바로 뮌헨으로 이동할 수 있다. 소요시간은 약 3시간 30분 정도. 현지 교통 바이에른 티켓을 구입하면 바이에른 주(뮌헨, 퓌센, 뉘른부르크, 밤부르크, 로템부르크) 일대의 대중교통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인원이 많을수록 더 할인된다. 화폐정보 유로 시차 한국보다 8시간 느림 맥주 정보 옥토버페스트에는 뮌헨 시가 선정한 6대 맥주 회사만 대형 천막을 설치하고 맥주를 판매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너(1328년), 하커 프쇼르(1417년), 호프 브로이 하우스(1589년), 기사단 수도원 맥주인 파울라너(1634년)의 살바토르가 대표적이다. 음식 정보 구운 닭고기 구운 소시지 등이 술안주로 인기다. 숙박 정보 호텔, 호스텔을 비롯해 한인 민박도 있다. 호스텔은 대부분 조식과 무료 맥주를 서비스한다. 날씨 정보 독일의 겨울 날씨는 우리나라의 초봄 날씨와 비슷하다. 온도는 0~4℃ 정도. 유의사항 시내버스를 탈 때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사복 검표원들이 급작스럽게 티켓을 확인한다. 티켓이 없으면 70~80유로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 2018-12-10 14:13
-
- ‘백만 송이 장미’의 나라 라트비아 ‘리가’
- 발틱 3국 중 ‘라트비아’가 한국인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국내 대중 가수, 심수봉이 불렀던 ‘백만 송이 장미’라는 번안곡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노래의 원곡은 라트비아의 가수가 불렀다. 특히 이 노래 가사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 있다. 그루지아의 한 화가가 프랑스 가수를 흠모해 바친, ‘서글픈’ 백만 송이 장미. 라트비아 수도인 ‘리가’에 두 번째 방문하는데도 그 유행가 선율이 계속 머릿속에 감돈다. 두 번째 만남이 더 행복한 ‘리가’ 필자는 현재 4개월 여행의 막바지에서 핀란드에 와 있다. 가을이 짙은 핀란드 경치를 바라보면서 ‘최고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여행을 하면서 많은 나라, 도시를 만났다. 기억나는 곳들이 많지만 그중 한 곳이 라트비아 리가다. 러시아 프스코프에서 버스를 타고 에스토니아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 리가로 향했다. 4년 전 늦가을, 잠시 발만 딛고 떠나버렸던 리가. 어떻게 변했을까? 시외버스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중앙시장 건물이 반갑다. 다우가바(Daugava) 강 제방 위에 열 지어 서 있는, 다섯 개의 거대한 홀 모양의 건물. 현재는 시장 건물이지만 원래는 독일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할 목적으로 지은 체펠린 비행선 격납고였다. 전쟁이 끝난 후 리가로 그대로 옮겨져 현재는 활황을 누리는 재래시장 건물이 됐다. 잠시 눈인사로 대신하고 여행자들의 ‘숙제’와 같은 숙소 찾기에 나선다. 그런데 4년 전의 버스터미널이 아니다. 여행 안내소가 생겼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친절한 여행 안내원이 있다. 올드 타운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길이 울퉁불퉁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시내버스 타고 숙소로 갈까?”라고 물었더니 ‘고작 7분 거리’라면서 걸어가란다. 터미널에서 올드 타운으로 들어서는 골목길이 제법 정돈되어 캐리어를 끄는 데 크게 힘들진 않다. 저렴한 가격의 숙소 또한 훌륭하다. 낡은 건물이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있어 무거운 짐 옮기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실내도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조식 제공에 오이와 자른 레몬을 넣은 음료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한껏 편한 마음으로 어슬렁어슬렁 올드 타운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도심의 거리는 화려하고 활발하다. 관광 인파로 넘실대는 골목의 카페에서는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와 흥을 돋운다. 같은 장소를 두 번 방문하는 일은 생각보다 좋다. 기억을 더듬는 것도 좋고, 못 본 곳들을 재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4년이란, 충분히 도심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시간 같다. ‘백만 송이 장미’로 더 친숙하게 다가온 나라 제정 러시아 시대에 ‘리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에 이어 제3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활황을 누렸다. 러시아에서 발원한, 리가의 젖줄인 다우가바 강은 수로로 이용하기에 좋은 요새였다. 당시 리가는 ‘동유럽의 파리’, ‘동유럽의 라스베이거스’라 불렸다. 동유럽에서는 최고로 유흥산업이 발달했던 도시. 한국인에게는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로 알려진 나라.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는 라트비아 작곡가 라이몬즈 파울스가 만들고, 라트비아 여가수 아이야 쿠클레가 처음 불렀다. 이 노래를 알린 사람은 러시아 여가수인 알라 푸가체바다. 노래 가사는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시다. 한 화가가 살았네/홀로 살고 있었지/그는 꽃을 사랑하는 여배우를 사랑했다네/그래서 자신의 집을 팔고, 자신의 그림과 피를 팔아/그 돈으로 바다도 덮을 만큼 장미꽃을 샀다네/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붉은 장미… 이 시는 그루지아(현 조지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가 프랑스 출신 여배우에게 사랑에 빠졌던 일화를 바탕으로 쓴 것. 한 가난하고 외로운 무명화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살고 있는 고장에 유명하고 아름다운 여배우가 순회 공연차 오게 된다. 그녀를 흠모하던 화가는 단 하루밖에 없는 그 기회를 이용해 특별한 방식의 사랑 고백을 계획한다. 여배우가 묵고 있는 호텔 광장에 장미를 가득 뿌려놓겠다는 것.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 장미 백만 송이를 산 그는 그녀가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모든 곳에 장식했다. 이 노래는 동유럽 일원에서는 흔히 들을 수 있는, 길거리 음악의 대명사가 됐다. 구시가 골목 즐기기 긴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골목길. 자꾸만 길을 잃게 만들면서 블랙헤드 길드 광장 앞으로 안내를 한다. 이 광장은 리가의 랜드마크로 건물에 금박이 박혀 있어 금세 눈길을 끌어당긴다. 예전 상인들의 숙소와 연회장이었던 건물. 눈길을 끄는 천문시계에는 처음 주문한 길드가 시계공의 눈알을 빼버렸다는 전설이 흐른다.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동유럽의 흔한 전설 중 하나다. 그것보다 이 건물의 특징은 블랙헤드다. 금박 건물에 이들의 수호성인인 성 마우리티우스가 새겨져 있다. 그는 북아프리카 흑인 출신의 로마 전사였다. 그래서 블랙헤드라는 건물명으로 지칭된 것. 이 전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건물의 80%가 파괴되었는데 라트비아가 재건축(2001년)했다. 현재 박물관과 관광안내소가 함께 있다. 길드 앞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 조형물은 1510년, 리가의 길드 회원들이 커다란 전나무를 세워놓고 각양각색의 화려한 장식을 해 밤새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자리에 있다. 작은 트리 조형물. 왠지 억지스럽다. 그보다 광장 뒤쪽에 있는 성 피터 성당의 뾰족한 첨탑이 눈길을 끈다. 1209년에 건설된 이 성당은 1666년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가 현재는 1941년의 모습 그대로다. 이 성당은 시대에 따라 가톨릭 성당, 루터 교회, 그리고 박물관 등으로 여러 차례 기능이 바뀌었다. 종교와 상관없이 이 성당을 찾는 이유는 첨탑(123m)으로 올라 시내를 조망하기 위해서다. 탑 위까지 걷지 않고 리프트를 이용할 수 있다. 구시가지의 붉은 가옥과 강, 좁은 골목길, 그리고 사람들을 구경한다. 특히 반가운 것은 한국의 유명 기업 상호가 새겨진 멋진 고층 건물이다. 성당 뒤쪽으로는 독일 형제 작가인 그림 형제의 유명한 동화 ‘브레멘 음악대’에 나오는 동물들의 동상이 있다. 이외에도 독일인들이 이 땅에 와서 처음으로 지은 돔 성당도 여러 번 만난다. 이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6768개의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 제작(1884년)될 당시만 해도 이 파이프 오르간은 세계에서 가장 컸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에서 네 번째 크기가 됐다. 스웨덴 문과 아르누보 건축 그 어떤 곳보다 필자의 관심을 끈 곳은 스웨덴 병사와 리가 아가씨의 사랑 이야기가 흐르는 스웨덴 문 주변이다. 누군가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눈여겨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아치형 문.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애달파서일까? 좁은 골목길에서 풍겨나오는 향취가 남다르다. 케케묵은 연륜이 고스란히 남은 건물 모퉁이의 작은 카페들. 올드 타운의 화려하고 시끌벅적함과는 미세하게 색깔을 달리한다. 카페를 장식하고 있는 화단에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 때면 커피향이 그립다. 스웨덴 문을 지나면서 만나는 리가 성은 1330년, 리보니아 기사단의 기지로 강변 옆에 건설되었다. 리가의 구시가지를 빠져 나와 동쪽으로 가면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1935년에 세워진 자유의 기념물 옆 공원의 작은 개울에서는 보트를 빌려 탈 수 있다. 또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화약탑(1621년)과 리가에서 가장 큰 러시아 정교회의 모습도 보인다. 라트비아의 시인이자 사회운동가인 라이니스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리가 여행의 숨겨진 보석은 신시가지 거리의 아르누보 건축물이다. 리가의 아르누보 건축 설계는 미하일 에이젠슈타인이 했다. 1899~1914년에 조성된 이 건물은 요즘 들어 많은 관광객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필자는 그가 남긴 화려한 건축 양식보다는 그의 아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당시 세르게이는 러시아권의 유명한 영화감독이었지만 그 흔한 동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의 흑백영화는 무성시대의 찰리 채플린을 무색케 할 정도다. Travel Data 교통편 발틱 3국은 버스 편이 용이하다. 탈린이나 리투아니아에서 리가 행 버스를 타면 된다. 교통정보 대부분 걸어 다녀도 된다. 시내 교통카드는 편의점에서 판매한다. 맛집 퓨전 레스토랑이 많다. 구시가지 쪽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 음식값이 비싸다. 반면 동쪽 호텔 뒤쪽으로 가면 저렴하면서도 맛 좋은 음식점이 즐비하다. 숙박 고급 호텔을 비롯해 아파트, B&B, 호스텔 등 다양하다. 고급 호텔은 가격이 비싸지만 도미토리룸은 1인당 2만~3만 원 선에 이용 가능하다. 대표 술 리가 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은 러시아의 여황제 예카테리나의 병을 낫게 한 술로 유명해졌다. 그 외 리가는 러시아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 보드카가 많다. 라트비아 최고의 맥주는 알다리스(aldaris)다. 시차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 날씨 리가의 기온은 전형적으로 14°C에서 23°C. 5월부터 9월 중순까지는 날씨가 온화해서 여행하기 좋다. 그러나 11월부터는 급격하게 온도가 떨어지고 일교차가 커서 두터운 겨울옷이 필수다.
- 2018-11-05 14:30
-
- 톨스토이의 고향 툴라의 행복
- 톨스토이만큼 한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러시아 작가가 있을까? 그의 작품을 단 한 편도 읽지 않았다 해도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리바이벌되고 있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을 통해 젊은이들도 잘 아는 세계의 대문호다. 그가 태어나고 말년에 살았던 곳이 툴라 근처의 마을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다. 모스크바를 기점으로 남쪽으로 두 시간 남짓한 193km 지점. 툴라에서 10분이면 닿는 곳에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한적하고 고요한 툴라 톨스토이 고향을 가려면 툴라(Tula)로 가야 한다. 툴라는 모스크바를 기점으로 한 ‘황금고리 도시’ 중 한 지역. 황금고리 도시란 모스크바 근교의 역사적인 도시들을 일컫는 말로 도시들의 연결 형태가 반지 모양의 원형과 고리 형태를 이루고 있어서 붙여진 지칭이다. 툴라는 모스크바 쿠르스크(Kursk) 역을 통한다. 툴라 기차표를 살 때는 물론 기차를 탈 때도 짐과 ‘여권’을 검사한다. 툴라 기차 안에서 약간의 해프닝을 겪는다. 러시아에서 처음 해보는 기차 이동인 데다 매표소 직원이 영어를 전혀 못해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더니 침대칸을 발권해준 것. 4인용 도미토리 침대칸 중에서 2층으로 배정되었는데 침대를 이용하려면 시트가 필수다. 시트가 없어 결국 툴라까지 가는 동안 올라보지도, 누워보지도 못한 채 보조의자에 앉아 간다. 어느 새 툴라 역에 하차. 사람들이 다 사라진 역에 우두커니 혼자 서 있다가 경찰관에게 부탁해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간다. 가정집을 개조한 숙소는 시내에서 약간 비껴 있지만 귀가 먹먹할 정도로 고요하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분위기의 마당에서는 막 깎아낸 듯한 풀 냄새가 향긋하게 코끝을 스친다. 오래된 사과나무 한 그루와 앙칼진 러시안 고양이가 있는 가정집 숙소가 참 매력적이다. 툴라 중심부 크렘린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행사 숙소에서 툴라 중심부까지는 천천히 걸어 3분에서 5분 거리. 오래된 나무 가옥을 따라 호젓한 길을 걸으면 어느새 툴라 시내가 보인다. 러시아 어느 도시에나 있는 레닌 동상이 서 있고 돔 형식의 러시아 정교회 두 개 그리고 바로 크렘린(kremlin)이다. 크렘린이란 원래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러시아의 성채, 성벽을 뜻한다. 러시아 각 주(州)에는 꼭 있어 ‘크렘린’이라는 단어 하나만 알면 길 찾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툴라의 크렘린은 1540년에 완공되었는데 튼튼한 벽돌식이다. 성벽 모서리에는 나무 방어탑 아홉 개가 고깔 형태로 1km 정도 간격으로 뾰족하게 솟아 올라와 있다. 성채 내부는 크지 않지만 안정적이고 정교하다. 중앙에 대성당(1764)을 중심으로 전시관, 특산품 코너와 부속 건물들이 몇 개 더 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필자가 툴라에 머무는 동안에도 내내 축제가 열렸다.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만난 세르게이 툴라를 찾은 이유는 19세기의 러시아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Graf Tolstoy)의 고향을 찾기 위함이다. 툴라에서 남쪽 방향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 택시를 이용해도 큰 부담 없는 10분 거리다. 택시 기사가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돈을 더 치러야 했지만 여행객이라면 늘 감수해야 할 일이다. 톨스토이 고향 입구의 두어 개 난전에서 지역 특산품인 당밀과자를 팔고 있다. 나름 관광지라고 물 값이 시내의 두 배 이상이다. 포기하고 그냥 매표소로 간다. 모든 곳을 다 볼 수 있는 표를 사면 가이드 투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 언어로 들어야 하는 상황. 러시아어를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으니 가이드 투어를 하지 않아도 될 법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톨스토이 하우스 관람을 포기할 수는 없다. 잠시 벤치에 앉아 가이드를 기다리면서 만나게 된 세르게이(72). 젊은 층은 물론이고 나이 든 사람 대부분이 단 한마디 영어를 구사할 수 없는 이 나라에서 그는 영어를 잘한다. 모스크바에 사는 물리학자 세르게이는 부인과 조카가 동행인이다. 영어는 못하지만 한눈에 봐도 성격이 밝고 유머러스한 부인 타냐, 그리고 조카 표토르. 낯선 그들과 함께 톨스토이 고향 투어를 시작한다. 사과 농장이 있는 톨스토이의 고향 자작나무숲이 길게 이어지는 길 옆으로 톨스토이가 농노들을 위해 직접 심었다는 사과 농장이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20여 년간 머무르며 집필했던 ‘톨스토이의 집’은 본채와는 달리 작고 초라하다. 꼭 들여다봐야 할 공간이다. 지독하게 꼼꼼한 이 나라 사람들의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박물관 투어다. 박물관을 소중하게 지키는 것은 물론 소장품들의 인테리어가 얼마나 디테일한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톨스토이가 입던 옷, 식탁, 서재 등 그의 삶이 톨스토이 하우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질곡한 삶을 잠시 살았지만 대부분을 이 영지에서 살았다. 그리고 소설 ‘부활’, ‘어둠의 힘’ 등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는 못했다. 80세 되던 해, 부인에게 인세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10일간 기차를 타고 부인 곁을 떠났다가 7일 만에 모스크바 남부 톨스토이 역(옛 아스타포보 역)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문득 그의 말년 인생을 그린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2009)이 떠오른다. 어쨌든 톨스토이는 10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고향에서 그의 숨결과 흔적을 확인할 수 있어 행복했다. 인간미 넘치는 러시아 사람들 툴라와 톨스토이 고향이 특히 사랑스러운 이유는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사로운 마음’ 때문일 것이다. 톨스토이 고향에서 만난 세르게이는 모스크바대학교를 졸업한 후 유럽에서 물리학자로 살았고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 했다. ‘세르게이’라는 이름은 러시아에서는 흔한 이름 중 하나인데 그에게 ‘세르게이 예세닌’이라는 시인 이름을 말했더니 금세 ‘자작나무숲’이라는 시를 읊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의 낭만을 고스란히 전해주던 그. “툴라의 당밀과자는 이곳 아니면 살 수 없다”면서 생판 처음 만난 한국 여행객에서 선물로 안긴다. 또 조카 표토르는 기념품을 선물한다. 툴라까지 차를 태워주고 차를 세워 시원한 물까지 사준다. 관광지 앞이라 물 값이 비싸다고 했던 필자의 말을 기억한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과분한 선물을 받은 필자가 한 일은 고작 찍은 사진을 보내준 것뿐. 필자가 한국에 여행 오는 외국인들에게 이런 따사로운 애정을 베풀 수 있을까? 톨스토이 고향이 떠오를 때마다 ‘세르게이’ 가족이 필자에게 베풀어준 친절을 기억할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관광 안내소 스테프는 여행 중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했고 길거리에서 스치듯 만난 할머니는 영어 한마디도 못하지만 맛있는 우즈베키스탄 전통 빵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친절히 알려줬다. 크렘린 앞에서 러시아 전통 음료인 크바크(kbac)를 파는 아주머니가 시음해보라며 돈은 안 받겠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툴라에서뿐만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정 많고 인심 좋은 고령의 한국인을 닮은 러시아인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여행이 참으로 행복했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인천 공항에서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까지 직항. 9~10시간 소요. 현지 교통 툴라는 모스크바 쿠르스크 역에서 고속열차로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음식 정보 한국인 입맛에 맞는 음식들이 많다. 음식은 약간 짠 편이다. 툴라에서는 고층 건물을 이용하면 저렴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숙박 정보 인터넷 평점을 보고 예약하면 거의 실수하지 않는다. 3만 원 선이면 중상급 숙소에 머무를 수 있다. 도미토리 룸은 1만 원 이하다. 치안 정보 생각보다 안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경찰이 있기 때문. 유의사항 모스크바 외에는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은 나라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유심카드를 구입하거나 한국에서 사서 교체해야 한다. 기타 정보 러시아는 거주지 등록이 필수다. 숙소에 말하면 바로 처리해준다. 무비자 여행 기간은 60일까지. 러시아 여행 중 가장 큰 난고는 화장실이다.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따로 돈을 내야 한다. 버스터미널에서는 승차표를 보여주면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
- 2018-10-01 09:34
-
- 낯선 듯 낯설지 않은 나라, 카자흐스탄 알마티
- 카자흐스탄이 수도를 아스타나로 옮기기 전 수도는 알마티(1929~1997)였다. 지금도 카자흐스탄의 최대 도시로 손꼽히는 알마티는 카자흐스탄어로 ‘사과’를 의미하는 알마(Alma)와 ‘아버지’를 뜻하는 아타(Ata)가 합쳐진 말로 ‘사과의 아버지’라는 뜻을 지닌다. 예전에는 사과나무가 많아 개울에 사과가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도심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가옥을 에둘러 싸고 있어 마치 심산을 연상케 한다. 여기에 ‘아시아의 알프스’라 불릴 정도로 멋진 ‘톈산’이 있다. 고개만 들리면 도심 어디에서나 시원한 만년설을 볼 수 있는 곳. 한여름, 한낮의 강렬한 햇살도 비껴간다. 알마티는 나무들 천국 필자는 6월 말, 4개월의 동유럽 여행을 시작했다. 4년 만에 또 길 위에 서 있다. 첫 여행지는 카자흐스탄 남동부에 위치한 알마티(Almaty). 이곳은 단지 러시아를 가기 위한 스톱오버를 활용한 기점지다. 여행 시작부터 행운이 따른다. 출발 하루 전, 후배에게 현지민보다 알마티를 더 잘 아는 한인을 소개받는다. 그녀는 이 나라에서 25년을 살았고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매스컴에 무수히 소개된 유명인. 생판 모르는 나라, 도시에서 의지할 곳이 생겨서인지 사르르 긴장감이 떨어진다.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한 ‘호사’이니 얼마나 좋은가? 알마티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 안에서 만난, 카자흐인 여학생의 도움을 받는다.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에 살고 있다는 여학생은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이미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멋진 고리키 바르크(중앙공원) 공원 안에는 스타디움과 호수를 비롯해 테니스 코트, 동물원, 야외수영장, 카페 등 다양한 놀이 시설들이 들어서 있어 볼 만했다. 판필로프 28인 공원은 더 매력적이다. 이 공원에는 이슬람 국가에서는 보기 드문 ‘젠코브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있다. (구)소련 시대에 폐쇄됐다가 1995년, 러시아 정교회로 반환된 후 1997년부터 다시 성당의 위치를 찾은 곳. 못 하나 사용하지 않았어도 1904년의 대지진을 견뎌냈다. 이 성당은 세계 8대 목조 건축물로 꼽힌다. 또 이 공원에는 제2차 세계대전 순국용사를 위한 ‘꺼지지 않는 불꽃’과 ‘28인의 청동조각상’이 흩어져 있어 소련의 잔재를 느끼게 한다. 옛 러시아의 건축 양식으로 만든 ‘카자흐 민속 악기 박물관’도 눈길을 끈다. 그런데 울창한 숲을 자랑하는 이 도시는 아이러니하게도 공기가 매우 탁하다. 눈으로 볼 때만 싱그러울 뿐 대기가 탁한 이유는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 때문이다. 아무리 나무가 많다 해도 매연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1960~70년대의 우리나라도 이런 환경이었을까? 알마티의 알프스 톈산의 심블락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주요 여행지는 일레 알라타우 국립공원(Ile-Alatau National Park)이다. 언어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알마티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한국 교환학생으로 있었다는 20대 여성과 동행한다. 알마티에서 남쪽으로 약 25km 정도 떨어진 메데우(카작어로 Medeu, 러시아어로 Medeo) 빙상장까지 택시로 이동한다. 해발 약 1500m에 위치한 메데우에 가까워지자 도심에서는 못 느꼈던 바람과 공기가 싱그럽다. 부자들이 산다는 전원주택 단지들도 모습을 드러낸다. 택시가 멈추는 곳, 눈앞으로 만년설이 펼쳐진다. 한여름에도 녹지 않은 채로 눈이 남아 있어 ‘카자흐스탄의 알프스’라 불리는 톈산 산맥(天山山脈, Tian Shan)이다. 중국의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에서 키르기스까지 뻗어 있는 길이 2000km, 넓이 400km의 매우 긴 산맥. 톈산의 최고봉이 포베다(7439m) 산이니 그 높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알마티는 칸텡그리(Kan Tengri, 6995m) 산맥의 일부다. 산 이름은 몽골어에서 나왔는데 칸(Kan, Khan 또는 Han)은 ‘왕’이라는 뜻이고 ‘텡그리(Tangri)’는 ‘영혼’을 의미. 즉 ‘영혼의 왕’이라는 뜻을 지녔다. 현지인들은 ‘피의 산’이라는 의미로 ‘칸투(Kan Too)’라 부르기도 한다. 해가 질 때면 산의 북벽이 붉은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행자들 대부분은 메데우에서 곤돌라를 타고 심블락(카작어로 Shymbulak, 러시아어로 침블락Chimbulak) 스키장까지 올라 만년설을 보고 내려온다. 메데우에서 스키장까지는 약 4.5km. 곤돌라 안의 발아래로 메데우 댐과 세계 최고 높이에 있는 빙상 경기장이 보인다. 2011년 동계 아시안게임, 2012년 반디 세계 챔피언십, 201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가 개최된 곳이다. 질료니 바자르에서 만난 고려인들 심블락에서 다시 시내로 돌아와 국립박물관, 공화당 거리 등을 욕심 없이 둘러보고 찾은 곳은 질료니 바자르(Zelyony Bazar)다. 질료니는 러시아어로 ‘초록’을 의미한다. 과거에 야채와 과일을 주로 판매하는 시장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채소 코너에서는 필자와 똑같은 얼굴을 한 아주머니와 맞닥뜨린다. 먼 타국에서 만나는 똑같은 얼굴. 파장을 준비하는 그녀는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고려인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정육부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말 그림이 그려진 정육 코너에는 순대를 닮은 소시지가 많다. 다양한 치즈와 젓갈류 등을 구경하면서 도착한 반찬가게. 그곳에 고려인 상인들이 여럿 있다. 얼굴은 분명 한국인인데 러시아말을 구사하는 고려인 2세 혹은 3세들. 두어 명은 몇 마디 한국말을 구사한다. “아바이가 했던 말인데 난 모르오”라며 무뚝뚝한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할머니. 손맛을 인정받았는지 얼굴색 전혀 다른 사람들이 고려인 할머니가 만든 김치를 잔뜩 사들고 떠난다. 사실 알마티에서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모습을 한 사람들을 아주 많이 만나게 된다. 카자흐스탄은 130여 개의 민족이 살고 있는 나라다. 분명코 칭기즈칸의 정치적인 영향이 현재로 이어진 것일 게다. 고려인들은 이 도시의 소수민족. 알마티에는 한국인이 약 700명 정도 살고 있으며 이동 인구까지 포함하면 1000명가량 된다고 한다. 동족이라는 본능 때문이었을까? 고려인들을 만나니 눈물이 팽그르르 돌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어쨌든 필자는 현재 러시아 여행 중이다. 두 번째 방문한 러시아. 다음 호에는 이 매력적인 나라에 대한 소식을 길 위에서 전하리라.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아시아나 항공이 직항(매주 화, 금)한다. 또 카자흐스탄 항공사인 에어 아스타나(월, 목)가 있다. 편도 6시간 이상이다. 현지 교통 알마티에는 버스, 트램, 지하철의 대중교통 수단이 있지만 대부분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택시 표시가 없어도 길에서 손을 들으면 어김없이 차가 서는데 운전사와 교통비를 흥정해야 한다. 필수적으로 알고 가야 할 ‘어플’이 얀덱스 택시(Yandex. Taxi)다. 가격이 표시되니 전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택시 운전자의 바가지 상흔을 피할 수 있다. 러시아 권역에서는 거의 통용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자. 음식 정보 주민들 대다수가 이슬람권이어서 돼지고기는 거의 안 먹는다. 양고기와 말고기 등을 주로 먹는다. 꼬치구이인 샤슬릭, 수블리카가 대표 메뉴이고 그 외 스프, 메밀밥, 소고기 구이 등등이 맛있다. 언어 정보 카자흐스탄어가 있지만 대부분 러시아어가 통용된다. 영어 소통이 매우 어렵다. 치안 정보 길에서 경찰들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만큼 치안이 안전하다. 날씨 정보 4계절이지만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다. 여름에는 30℃를 웃돌 정도로 덥다. 그러나 기온 차가 크니 걸칠 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 2018-08-30 09:57
-
- 그리스 신전의 대표 마을, 델포이의 매력
- 나의 운명을 누군가가 알려준다면 인생이 편할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델포이 신전의 무녀 ‘피티아’에게 자신의 운명을 점지 받았다. 무녀가 아폴론 신을 대신한다고 철저하게 믿었던 것은 그 시대의 역대 왕들은 물론 소크라테스 등 철학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2500여 년이 지난 지금, 델포이 마을에 유적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파르나소스 바위산과 올리브 나무가 지천인 첩첩 산골마을 델포이. 아름다운 풍경과 정겨운 주민들은 떠나는 여행객의 옷깃을 자꾸만 부여잡는다. 2500여 년 동안 델포이를 지킨 유적지 델포이(오늘날은 델피로 불린다)는 BC 8~6세기 무렵만 해도 아테네보다 훨씬 번성한 도시였지만 현재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길을 묻지 않아도 “뭘 도와줄까?” 하고 말 걸어오는 정겨운 사람들이 있다. 델포이 여행은 서두를 이유가 없다. 느릿느릿 천천히 돌아다니면 된다. 델포이 마을 주변에는 2500여 년 전의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유적지는 크게 두 군데로 나뉜다. 산허리를 가르는 도로를 기준으로 위쪽은 신성 지역이고 아래쪽은 김나지움과 마르마리아 유적이 자리한다. 마을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신성 지역이다. 우선 입구에서 박물관도 함께 볼 수 있는 통합 티켓을 구입한 뒤 고대의 시간이 멈춰버린, 유적지 안으로 들어선다. 아폴론 신전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종교 용품과 생활 용품을 거래했던 아고라(시장), ‘블레우테리온’이라 불리던 델포이 의사당, 여러 도시 국가에서 보내온 보물을 보관해놓았던 보물창고 등 흥미로운 유적들이 부서진 채로 흩어져 있다. 옴파로스에 앉은 여 사제 아폴론 신전 앞에는 ‘대지의 배꼽(옴파로스)’이라는 돌이 있다. 이 돌 밑에 작은 구멍이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가 ‘델포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표시한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어느 날 제우스는 자신이 지배하는 세상의 중심이 어디인지 알아보기 위해 독수리 두 마리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하늘을 날던 독수리들이 다시 만난 곳이 델포이의 파르나소스 산(Parnassos, 2457m) 정상이었다. 제우스는 아들 아폴론을 이곳에 머물게 했다. 아폴론은 파르나소스 산의 코리시안 동굴에 살던 거대한 구렁이 피톤을 죽이고 신탁소(神託所, oracle, 신이 여 사제를 통해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물음에 답하는 일)를 열었다. 아폴론 신이 사는 곳이라 알려지면서 델포이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당시 델포이 신탁소는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했다. 아폴론은 신이었기 때문에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여 사제 피티아(Pythia)를 통해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몸을 정갈하게 한 뒤 듣고 싶은 내용을 남자 사제에게 말하면 남자 사제가 피티아에게 질문을 전달했다. 피티아는 그 내용을 아폴론 신에게 전달해 답을 받아 다시 전달했다. 신탁비로 펠리노스라 불리는 세금을 받았고, 제단에 동물을 바치도록 했다. 델포이 신탁소에는 왕은 물론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철학자들도 찾아와 무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중 리디아의 크리소스 왕이 페르시아를 침공해서 진 이야기와 소크라테스가 무녀의 말을 듣고 탐구의 길을 떠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렇게 번성하던 신탁소도 서서히 쇠퇴했다. 392년, 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교숭배 금지령을 내리면서 델포이는 역사의 페이지를 마감했다. 문득 생각해본다. 현실에서 신이 미래를 점지해준다면 삶의 갈등이 줄어들까? 델포이 원형극장과 스타디움 아폴론 신전을 지나 보물창고를 거쳐 더 위로 오르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델포이 극장을 만난다. BC 4세기에 건설된 델포이 극장은 35단의 관람석이 있어 5000명이 동시에 음악이나 연극 등을 관람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넓은 원형 극장과 부서진 유적들 밑으로 시야가 확 트여 눈이 시원하다. 뒤로는 파르나소스 암산이 턱 버티고 있고,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밑으로는 울울창창 올리브 나무가 경사진 터를 장악한 풍경이다. 골이 깊어 마치 강이 흐르는 듯한 전경도 장관이다. 극장에서 언덕을 따라 조금 이동하면 온통 침엽수로 둘러싸인 곳에 경기장이 있다. 델포이 제전이 개최되던 경기장이다. 바위를 깎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경기장은 길이가 200m, 폭은 50m에 달한다. 델포이 제전은 아폴론이 구렁이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BC 8세기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시와 음악에 관한 행사를 중심으로 8년마다 개최되던 제전은 AD 582년부터 육상과 말타기 기술, 마차경주 등이 더해지면서 4년마다 열렸다. 델포이 제전의 흔적은 김나지움과 마르마리아 유적지로 남아 있다. 김나지움은 그리스어로 ‘운동하는 곳’이고 마르마리아는 아테나 여신의 신전과 성역이다. 델포이 신탁소를 찾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들렀던 곳으로, 부서진 아테네 신전과 BC 4세기경에 지어진 원형 건축물인 ‘톨로스’ 등의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특히 톨로스는 현재 남아 있는 고대 그리스 건축물 가운데 가장 독특한 유적으로, 그리스를 소개하는 포스터와 책자에 자주 등장한다.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 노천 유적지를 다 보고 나면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을 찾으면 된다. 1902년에 개관한 이 박물관에는 델포이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내부 전시관은 기원전으로 시대가 돌아가 있다. 1896년에 발굴된 청동상과 작은 도상들, 아르카이크 시대에서 로마 시대까지 시대별로 그리스의 발전사를 볼 수 있다. 눈여겨볼 것으로는 아르카이크 시대에 만들어진 은판으로 된 황금머리 황소, 낙소스 인의 작품인 스핑크스, 대지의 배꼽이라는 옴파로스, 전차를 모는 청동 마부상,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 무희의 기둥 등이다. 또 마을 안쪽 끝으로 올라가면 앙겔로스 시켈리아노스(1884~1951)와 에바 팔머(1874~1952)의 축제 박물관이 있다. 이들은 1927년, 델포이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 공연을 기획했다. 세계 각국의 유명한 극단이 모여 벌인 연극 축제였다. 현재도 7~8월의 휴가철이 되면 음악과 고대 드라마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Travel Data 항공편 그리스 직항편은 없다. 프랑크푸르트, 파리, 로마, 이스탄불, 두바이 등을 경유해 아테네로 가면 된다. 현지 교통 아테네 리오시온(Liossion) 버스터미널에서 델포이로 가는 버스가 1일 2~3회 운행된다. 3시간 정도 소요된다. 맛집 정보 고급 식당보다는 일반 식당인 타베르나(Taverna)가 인기다. 카페에서도 피자는 물론 전통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숙박 정보 대부분의 숙소는 가정집을 개조해 만들었다. 조식이 제공된다. 카스탈리아 부티크 호텔, 레토 호텔, 이니오호스 호텔이 상위 순위에 있다. 대부분 4~5만 원 정도면 이용 가능하다. 날씨 정보 그리스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지닌 나라다. 6월부터 여름이 시작된다. 평균기온은 25℃ 이상. 7월은 30℃를 웃돈다. 델포이는 첩첩산중이지만 부서진 유적지는 나무가 없는 노천이라서 뜨겁다. 여름옷은 물론 파라솔, 모자는 필수다. 고온이긴 해도 습도가 낮아 불쾌지수는 거의 없는 편. 물가와 화폐 정보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다. 유로 사용. 인터넷 정보 대부분의 식당이나 숙소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 시니어 여행 포인트 델포이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번잡스럽게 움직일 필요 없이 천천히 즐기면 된다.
- 2018-07-09 15:02
-
- 파묵칼레에서 고대 로마식 온천욕 즐기기
- 로마인들의 휴양지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다. 목욕을 좋아해 자연 용출장이 있는 곳에 휴양지를 만들었다. 목욕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어김없이 볼거리, 즐길거리도 만들었다. 연극이나 스포츠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극장과 원형 경기장도 만들었다. 로마인들의 대표적인 휴양지 중 한 곳은 터키의 파묵칼레다. 고대 도시, 히에라폴리스의 부서진 유적 위에 만들어진 온천 수영장에서의 물놀이는 클레오파트라도 부럽지 않다. 거대한 흰 석회암 언덕이 있는 작은 마을 터키 여행을 할 때 파묵칼레(Pamukkale)를 여행 코스에 넣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파묵칼레에 대한 홍보 영상물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그곳에서 발산되는 매력을 저버릴 수 없다. 터키 여행 10일 정도 지날 즈음 파묵칼레로 간다. 고국에서 여행 온 후배들을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날짜를 정하고, 같은 숙소를 따로 예약하면 된다. 후배들보다 좀 더 일찍 여행을 왔기에 여유 부리며 터키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대부분의 터키 여행자들은 카파도키아에서 안탈리아로 이동해 파묵칼레로 이동하지만 카시~페티예~달얀에서 시간을 더 보냈다. 무계획 여행은 이래서 좋다. 달얀에서 파묵칼레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 비해 12배나 영토가 큰 터키이기에 긴 이동거리도 당연지사처럼 생각하게 된다. 달얀에서 승합차처럼 작은 돌무시를 타고 페티예로 나와 오토가르(터미널)에서 파묵칼레로 가는 버스표를 구입한다. 분명히 파묵칼레로 가는 표를 구입했는데 데니즐리(Denizli)가 종점이다. 돌무시로 바꿔 타고 10km를 더 가야 파묵칼레다. 통일성 없는 터키의 교통법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35℃ 온천수가 변화시킨 석회암 덩어리 파묵칼레는 아주 작은 동네다. 게스트하우스 앞으로 거대한 ‘설산’처럼 보이는 석회암 덩어리가 불쑥 솟아 있다. 편안한 차림으로 마을의 석회암 언덕으로 오른다. 사방팔방 온통 흰빛이다. 파묵칼레는 터키어로 ‘목화의 성’이라는 뜻이다. 온천수가 빚어낸 석회암 덩어리를 빗대어 붙인 지명. 석회 성분을 다량 함유한 35℃ 온천수가 수 세기 동안 바위를 타고 흐르면서 표면을 탄산칼슘 결정체로 뒤덮은 것이다. 석회암 언덕은 보기와 달리 미끄럽지 않다. 따뜻한 물이 흐르고 용액의 흐름을 보여주는 ‘층리’가 사방으로 펼쳐진다. 이 석회 언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차례 그 색이 변한다. 녹은 석회암이 물결 모양을 만들었다. 마치 다랑이논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서멀 풀(thermal pools)의 물줄기는 청옥빛이다. 종유석 등은 없지만 딱 석회동굴이 노출되어 있는 형상이다. 서멀 풀은 198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입욕은 불가하고 맨발로는 들어갈 수 있다. 그럼에도 한여름에는 수영복 입은 여행자들이 부지기수다. 석회 언덕 정상에 오르면 또 한 번 깜짝 놀란다. 부서진 문화 유적들이 무수하게 흩어져 있고 박물관도 있다. 이곳은 고대 페르가몬(Pergamon) 왕국이 기원이다. 기원전 130년경, 로마인들이 정복해 ‘성스러운 도시(히에라폴리스)’라고 불렀다. 그리스어 ‘히에로스’는 신성함을 뜻한다. 히에라폴리스는 로마에 이어 비잔틴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번성했다. 고대 로마의 히에라폴리스 유적지 ‘파묵칼레’라는 지명은 11세기 후반 셀주크투르크족의 룸셀주크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만들어졌다. 이후 1354년, 이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가 1887년, 독일 고고학자 카를프만이 발견해 복원했다. 로마시대의 원형 극장, 신전, 공동묘지, 온천욕장 등 귀중한 문화 유적이 남아 있다. 특히 최대 1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원형 극장은 현재 봐도 어마어마한 규모다. 또 증기가 발생하는 단층 위에는 아폴로신전이 세워져 있고 세베루스(Severus) 시대에 만들어진 극장도 있다. 1200기의 무덤이 남아 있는 거대한 공동묘지도 있다.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 유적 중 하나인 이곳에는 지금도 수많은 석관 뚜껑이 열려 있거나 파손된 채 여기저기 널려 있다. 이 석관들은 치료와 휴양을 위해 몰려들었던 병자들의 무덤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곳 또한 고대 도시 유적으로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클레오파트라 온천 수영장에서 물놀이 흩어진 문화 유적지와 박물관을 관람하고 클레오파트라 온천 수영장으로 들어간다. 폐허가 된 유적지에 온천물을 담아 언덕 위에 온천 수영장을 만들었다. 수영장엔 나무들을 심어 그리스, 로마식으로 만들었다. 간이 탈의실도 있고 식당도 있다. 물 온도는 35℃로 생각보다 높다. 물속에는 그리스, 로마시대 때의 대리석 기둥이 그대로 잠겨 있어 발밑이 평평하지 않다. 얕은 곳도 있지만 키를 훌쩍 넘는 곳도 있다. 이 온천수는 류머티즘, 피부병, 심장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져 그리스, 로마,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특히 로마시대에는 여러 황제와 고관들이 이곳을 찾았다. 테르메라고 하는 온천욕장은 온욕실·냉욕실은 물론 스팀으로 사우나를 할 수 있는 방, 대규모 운동 시설, 호텔과 같은 귀빈실, 완벽한 배수로와 환기 장치까지 갖추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와 물을 가져갔는데, 이 물은 양모를 씻고 염색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어쨌든 고대, 로마시대 때부터 있던 온천장에서 즐기는 온천욕. 수심이 깊은 곳에서 수영도 하고 밧줄에 매달리기도 하고 물도 먹기도 하면서 두어 시간 놀고 나니 몸이 가뿐해졌다. 클레오파트라도 방문했다고 하니 아무리 바빠도 온천욕은 필히 해야 한다. 파묵칼레는 사실 이게 전부다. 단 이틀 동안 후배들과 함께하고 아쉬운 작별을 한다. 헤어지는 날, 후배는 싸갖고 온 햇반과 깻잎을 건네준다. “선배. 정말 힘들고 외로울 때 이거 먹어. 그러면 아픔이 싹 가신대.” 아끼고 아껴뒀다가 힘들었을 때 꺼내 먹으면서 파묵칼레의 기억을 어찌 떠올리지 않았겠는가? 여행이란 단지 풍치만 보는 게 절대 아니라는 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기억 속의 파묵칼레는 그래서 더 좋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인천에서 이스탄불까지 직항이 있다. 이스탄불에서 데니즐리까지 항공으로는 1시간 10분 소요된다. 버스 등 대중교통으로는 10시간가량 걸린다. 데니즐리 터미널에서 파묵칼레행 미니버스가 운행된다. 이스탄불 ~ 카파도키아 ~ 안탈리아 ~ 파묵칼레 순으로 대부분 여행 코스를 짠다. 음식 정보 파묵칼레는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제법 있다. 숙박 정보 파묵칼레 마을은 크지 않다. 대부분 가정집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가 많다. 가격은 조식을 포함해 2~3만 원대다. 대부분 수영장도 갖추고 있다. 날씨 정보 터키는 지중해성 기후다. 생각보다 햇살이 따갑다. 4월부터 기온이 풀리고 곧 뜨거워진다. 봄옷을 준비하면 된다. 아침과 저녁은 일교차가 크므로 겉옷을 하나 준비하는 게 좋다. 물가와 화폐 정보 터키 화폐는 터키 리라(Turk Lirasi)다. 물가는 한국보다 싸다. 시니어 여행 포인트 파묵칼레 인근에는 또 다른 온천 명승지가 있다. 제2의 파묵칼레로 불리는 카클르크(카크리크) 동굴은 최근에 발견된 종유동굴인데, 광천수가 뿜어져 나온다. 파묵칼레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여행사를 통해 표를 구입해야 한다. 여행사가 두어 곳 있는데 가격 차이가 크다.
- 2018-05-30 08:42
-
- 도시 전체가 ‘가우디’ 박물관, 스페인 바르셀로나
-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가 보면 안다. 많은 한국인이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장기적으로 머물고 있는 이유를 말이다. 매력이 넘치는 바르셀로나는 영화 로케이션 장소로도 큰 인기다. ‘내 남자의 여자도 좋아’, ‘비우티풀’, ‘스페니쉬 아파트먼트’ 등은 모두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찍은 영화다. 또 몬주익 언덕에는 마라톤 선수 황영조 기념탑이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때 우승을 안겨줬던 도시. 낯선 나라에서 한글을 보면 가슴이 짜르르해지고 눈시울이 젖는다. 100년 넘게 공사 중인 대성당 스페인 북동부의 카탈루냐 자치주의 주도인 바르셀로나는 17세기에 건설된 항구도시다. 바르셀로나는 최근 카탈루냐가 스페인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시도하고 있어 국제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은 관광도시로 유명한데 특히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의 건축물은 탁월한 명소다.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카사 밀라, 카사 바트요는 건축 문외한의 눈길도 저절로 이끈다. 특히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여행자들의 필수 방문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뜻은 ‘성 가족’이라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 마리아, 요셉을 뜻한다. 이 성당의 원 설계자는 가우디의 스승인 비야르. 성 요셉 축일(1882년 3월 19일)에 착공을 했으나 건축 의뢰인과 의견 충돌로 중도 하차했고 이듬해부터 가우디(당시 31세)가 맡게 된다. 가우디는 1926년까지, 총 12년간을 오로지 이 성당에만 매달린다. 그러나 성당을 완공도 하기 전, 그는 전차에 치여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다. 그가 사망할 당시 이 성당은 ‘예수 탄생’ 파사드, 종탑 한 개, 네 개의 탑, 지하 납골당만 완성된 상태였다. 그날 이후 공사는 끊임없이 진행되었고 가우디 사후 100년(2026년)이 되는 해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성당은 천천히 자라나지만, 오랫동안 살아남을 운명을 지녔다”는 생전 가우디의 말이 이뤄질 것 같다. 입장료가 비싸지만 매표소는 늘 장사진을 친다. 매표 요금은 완공을 위한 기부금 형태로 쓰인다. 바르셀로나를 빛내는 건축가 가우디 일단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400여 개의 회오리계단을 따라 내려오면서 구경하면 된다. 가우디의 유해는 지하 박물관에 있다. 1869년(17세), 가우디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형이 이미 가 있는 바르셀로나로 터전을 옮겨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고향과는 달리 큰 도회지인 바르셀로나에서 처음은 적응이 어려웠지만 그 시절, 많은 자극과 동기를 받는다. 1874년(22세),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의 특이한 창조성은 호평보다는 혹평을 많이 받는다. 그는 늘 말이 없고 허름한 차림새에 이상한 실험들을 일삼았기에 평생 괴짜라는 꼬리표를 안고 살아야 했다. ‘귀족적이면서 천박한, 댄디(dandy)이자 방랑자, 박식하지만 오락가락하는, 기지가 넘치지만 재미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가 있었다. 그는 가우디를 천재라고 칭찬했다. 사후 30년 뒤인, 1960년대부터 그는 인정받기 시작했고 바르셀로나를 영원히 빛내고 있다. 카사 밀라에서 구엘 공원까지 바르셀로나에는 성 가족성당 말고도 가우디의 모더니즘 건축의 최고로 꼽히는 카사 밀라가 있다. 산을 주제로 디자인하고 석회암과 철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독특한 건축물로 파도가 치는 것 같은 곡선이 인상적인 건물이다. 또 바다를 주제로 디자인한 카사 바트요(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는 도자기 타일과 유리 모자이크가 아름답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구엘 공원(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다. 가우디와 구엘 백작의 합작품.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구엘 백작은 이상적인 전원도시를 만들 목적으로 바르셀로나의 펠라다 지역 땅을 매입한다. 구엘은 가우디에게 영국의 전원도시를 모델로 해서 그리스의 팔라소스 산과 같은 신전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공원 부지가 돌이 많은 데다 경사진 비탈이어서 작업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가우디는 자연스러움을 살리기 위해 땅 고르는 것도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이 단지를 위해 무려 14년(1900~1914)이나 매진했지만 결국 자금난 등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1922년, 바르셀로나 시의회는 구엘 백작 소유의 이 땅을 사들여 이듬해 시영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자연 친화적 건축물, 구엘 공원 구엘 공원은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독특한 공원 중 하나다.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는 사람은 꼭 방문해봐야 하는 곳으로 손꼽힌다. 멀리 지중해와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바지에 구엘 공원이 있다. 초콜릿을 닮은 듯한 돌기둥, 과자의 집처럼 생긴 건물, 반쯤 기울어져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인공 석굴, 계단 위에 타일로 만들어진 도롱뇽, 기념품 파는 건물 등 가우디만의 색깔이 분명한 건축물이 오롯이 모여 있다. 또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심이 많았던 구엘 백작의 요청으로 만든 도리아식 기둥도 눈길을 끈다. 녹색 식물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들어앉은 독창적인 건축물들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채 만들어졌고 사방팔방으로 시내가 조망되어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점까지 가세하면 두말할 필요 없이 행복한 공간이다. 단 과거 가우디가 살았던 집은 박물관으로 공개해 유료다. 가우디가 사용했던 침대, 책상 등 유품과 데드 마스크가 전시되어 있다. 가우디가 직접 디자인한 독특한 가구들이 감상 포인트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등 직항이 운행된다. 소요시간은 13~14시간. 현지 교통 바르셀로나는 규모가 커서 대중교통을 필히 이용해야 한다. 지하철이 제일 편리하다. 도심이 복잡하므로 1일권을 사서 무제한으로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음식정보 보케리아 시장에서는 해산물을 구입해 즉석요리를 해 먹을 수 있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 때는 근처의 레스토랑을 이용하자. 흥정으로 절반짜리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다. 숙박정보 바르셀로나는 관광도시라 물가가 비싼 편이다. 고급 호텔 가격은 1박당 50만 원 이상. 아파트, 한인 민박, 호스텔 등을 이용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아파트 숙박은 1박당 10만 원 정도. 화폐 유로화 통용. 날씨 바르셀로나의 4월 평균 최저기온은 8.5℃, 평균 최고기온은 17.6℃로 서울의 4월 중순 기온과 비슷하다. 예측 없이 비가 내릴 수 있으니 비옷과 우산은 꼭 챙겨서 외출하자. 시니어 여행 포인트 바르셀로나는 서둘러 여행하는 곳이 아니다. 천천히 여유를 갖고 둘러봐야 할 도시다. 몬주익 언덕은 꼭 올라가 봐야 한다. 도시를 한눈에 전망할 수 있다. 경기장 근처로 내려오면 차도 옆으로 황영조 동상이 있다. 차도를 따라 내려가면 미로 미술관을 만난다. 바르셀로나를 기점으로 근처 소도시 여행은 꼭 해야 한다. 몬세라트 성지와 타라고나를 적극 권한다. 누드 비치에 관심이 있다면 바르셀로나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시체스(Sitges) 해변을 찾으면 된다.
- 2018-04-09 16:15
-
- 세계유산의 천년 고도 크라쿠프에서 맛보는 만두
- 폴란드 남부에 자리한 크라쿠프는 옛 폴란드의 수도다. 17세기 바르샤바로 천도하기 전까지 유럽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 바르샤바는 세계대전 때 완전 파괴되어 온 도시를 새로 복원했지만 크라쿠프는 옛 유적지가 고스란히 남은 고도다. 구시가지는 세계유산 등재가 시작된 첫해(1978)에 지정되었다. 매력이 폴폴 넘치는 그곳엔 동양적인 것들도 남아 있다. 13세기 타타르족에게 굴복당했던 이 도시에는 만두를 닮은 ‘피에로기’가 전통음식으로 남았다. 글·사진 이신화(여행작가, ‘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피아스트 왕조와 야기에워 왕조가 남긴 위대한 업적 체코 프라하에서 폴란드로 가는 중요한 목적은 아우슈비츠를 보기 위함이다. 침대열차를 타고 승무원에게 오비시엥침 역에서 깨워 달라 부탁하고 깊은 잠에 빠진다. 덜컹거리는 기차의 움직임도 기적소리도 못 느낀 채 깊은 잠에 빠진 그날. 친절한 승무원이 일부러 깨우러 왔지만 잠에 취해버렸다. 어쩔 수 없이 크라쿠프 역에 내린다. 첫새벽이라 검표원도 없다. 부산하던 사람들의 발자국이 사라진 역사에 우두커니 한참 서 있다가 빠져나온다. 요새 역할로 성을 에둘러 심은 숲 정원을 넘어서자 바로 구시가지다. 도시는 기대 이상으로 고풍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크라쿠프는 그 역사가 깊다. 폴란드의 첫 번째 피아스트 왕조(960년경~1370년)가 410년간 통치했다. 피아스트 마지막 왕이었던 카지미에시 3세는 폴란드의 역대 왕들 중에서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피아스트 왕조 이후 야기에워 왕조(1386∼1572)가 186년간 통치한다. 야기에워 왕조는 리투아니아의 대공작이었던 요가일라가 야드비가 여왕과 정략결혼(1386)하면서부터다. 이 결혼으로 폴란드 사상 가장 빛나는 황금시대가 출현한다. 역 앞에서 만난 야기에워 기마상(1910, 그룬발트 전쟁 500주년 기념)이 힘차 보이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1410년, 독일 기사단을 격파한 그룬발트(타넨베르크) 전투는 대단한 일이었다. 500여 년의 중세 유럽 문화의 중심지, 유적으로 남아 도심을 에두른 방어벽인 바비칸(누문, 망루, 1498년경)이 남아 눈길을 끈다. 바비칸은 성 플로리안의 성문을 통과하고 도시에 들어온 모든 사람의 검문소 역할을 했다. 성문을 통과하면 겨우 마차 두 대가 지날 수 있는, 돌로 포장된 좁은 플로리안스카 길이 펼쳐진다. 올드 타운의 메인 광장은 리네크 글로브니(마켓 광장)다. 근 500년 넘게 크라쿠프 상징의 장소다. 언제나 많은 사람으로 활기가 넘치는 광장엔 골목을 누빌 관광마차가 대기해 있고 카페, 레스토랑은 물론 난전도 펼쳐진다. 광장에는 14세기에 지어졌다가 1555년 재건된,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직물 길드관(sukiennice)이 있고 그 앞에는 19세기 폴란드의 위대한 작가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동상이 있다. 그의 명성은 셰익스피어에 비교될 정도다. 또 가장 우아하고 화려한 두 개의 첨탑을 갖고 있는 성 마리 성당이 있다. 첨탑을 만든 형제의 불행한 전설이 흐르고 종탑에서는 매시간 ‘헤이날(Hejnal)’이라는 트럼펫 멜로디가 연주된다. 1241년, 몽골군(타타르족)의 침략을 알리던 노 나팔수를 기리기 위한 연주다. 이 성당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0년간 미사를 집전한 곳이다. 성 마리 성당 뒤에는 성 바바라 교회가 있고 중앙 광장 남쪽 끝에는 이 도시에서 가장 작고 오래된 성 아달베르트가 남아 있다. 유럽을 종단하던 중세 상인들의 예배처는 원래 10세기에 지어졌지만, 바로크양식의 지금 모습은 17세기에 재건축된 것. 이 작은 성당은 몽골 침략 때 시민들의 피난처였다. 긴 역사의 명문, 야기엘론스키대학교 크라쿠프 거리가 젊음이 넘치는 것은 야기엘론스키대학교 덕분일 것이다. 1364년, 카지미에시 대왕이 설립한 이 대학교는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됐다. 유럽 최초로 지어진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교를 본떴다. 그가 죽은 후 답보 상태에 있던 대학교는 야기웨어 왕조의 야드비가 여왕이 산후풍으로 죽으면서 남긴 보석과 유언을 받들어 재건(1400)했다. 1406년에 예술학부가 창설되어 많은 음악가가 이곳에서 수학했다. 15~16세기에 크게 발전했고 1817년 야기엘론스키대학교로 개명했다.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때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가 1918년에 폴란드가 해방된 후 눈부시게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동설의 코페르니쿠스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대학교 출신이다. 16세기에 파우스트 박사도 이 대학교에서 연구했다. 특히 관심이 가는 인물은 1996년 노벨상을 받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 시인이다. 그녀의 시어는 공감적이며 가슴을 폭 파고 들 정도로 매혹적이다. “이 땅 위에서의 삶은 꽤나 저렴해/예를 들어 넌 꿈을 꾸는 데 한 푼도 지불하지 않지/환상의 경우는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대가를 치르고/육신을 소유하는 건 육신의 노화로 갚아나가고 있어”(쉼보르스카 시 ‘여기’ 중). ‘북쪽의 로마’, 무수한 성당들과 바벨 궁전 메인 광장에서 곧추 직진해 카노니차 거리부터 바벨 성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교회들이 열 지어 모습을 드러낸다. 교회는 비스와 강변까지 이어진다. 17세기, 이 도시에는 수도원과 오래된 성당(약 65개소)이 워낙 많아 과거 ‘북쪽의 로마’로 불렸다. 도시 남쪽, 비스와 강 상류의 석회암 언덕(해발 228m)에는 바벨 성이 우뚝 서 있다. 바벨은 폴란드 왕조의 가장 중요한 궁이었으며, 폴란드 문화와 역사의 상징이자 기념물이다. 500여 년간 군주들의 대관식을 비롯한 중요 행사가 열리던 곳. 특히 돔으로 덮인 지그문트 예배당의 탑은 작고 소박하지만 예술미가 뛰어나다. 지그문트 종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곤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티칸으로 떠나기 전까지 봉직했던 성당이다. 그 외에도 유대인 지역인 게토가 남아 있다. 영화 ‘피아니스트’를 비롯 많은 명화를 만들어낸 로만 폴란스키가 8세 때 탈출한 곳이다. 또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의 영화 전반은 크라쿠프의 유대인 거주지였던 크라코브스카 거리가 배경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의 배경이 된 골목들이다.
- 2018-03-07 09:12
-
- 벳푸에서 온천하고, 유후인에서 즐기는 자유여행
-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대 섬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규슈(九州) 지방. 그중 오이타 현의 벳푸(別府) 시는 예로부터 온천 여관, 온천 욕장으로 번창해 1950년 국제관광온천문화도시로 지정되었다. 한마디로 온천 천국의 도시. 현재 300여 개의 온천이 있다. 시영온천에서는 단돈 1000원의 입장료만 내면 전통 온천을 즐길 수 있다. 매일 온천욕으로 건강 다지고 심심하면 인근 유후인 시로 나들이 떠나는 재미. 한 달이 후딱 지나간다. 글·사진 이신화 여행작가 (‘On the Camino’ 저자, www.sinhwada.com) 국제 온천관광도시, 벳푸 시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배로 이동하는 일본 여행은 특별하다. 좁은 의자에 앉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비행기 안보다 백번 낫다. 후쿠오카 하카타 항에 내려 텐진에서 점심만 먹고 바로 벳푸 시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두 시간 정도 달려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서면 벳푸 시내에 이른다. 뜨거운 온천 열기로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연기가 가득하다. 벳푸에 온 이유는 단 한 가지, 실컷 온천욕을 하기 위함이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온천은 츠루미다케 산(1375m)과 약 4km 북쪽에 떨어져 있는 가란다케 산(또는 유황산, 1045m)의 화산 동쪽에 집중되어 있다. 2800개 이상의 원천수가 자연용출되며, 용출량은 일본에서 1위다. 처음부터 온천도시로서 명성이 높았던 것은 아니다. 100℃가 넘는 고온의 용출수에 목욕은커녕 빨래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화탕지옥(火湯地獄)’의 땅이었다. 이 재앙의 도시를 명품 온천도시로 만든 이가 아부라야 쿠마하치(油屋熊八, 1863~1935)다. 그는 ‘산은 후지, 바다는 세토나이, 온천은 벳푸’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벳푸를 온천도시로 부상시켰다. 벳푸 역 앞 광장에는 ‘벳푸 관광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의 동상이 있다. 300여 개의 온천 천국, 10분 온천욕으로 힐링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목욕용품부터 챙겨 다케가와라 온천(竹瓦温泉)으로 향한다. 벳푸의 300여 개 온천 중에서 내로라하는 시영온천이다. 벳푸 만에서 멀지 않은, 한적한 주택가에 있는 온천은 건물부터 예사롭지 않다. 메이지 시대인 1879년, 한 어부는 해안 근처에서 솟아나는 자연용출장에 간소한 오두막을 지었다. 지붕에 대나무를 얹었다 해서 ‘다케가와라’라는 이름이 붙었다. 1938년에는 중국의 호화로운 기와지붕으로 장식해 재건립했다. 이 건축물은 2004년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었고, 2009년에는 근대화 산업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온천이 생긴 지는 139년의 세월이 흘렀다. 건축물도 80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어 전통의 향기가 폴폴 난다. 입장료는 단 100엔. 간드러지는 목소리의 여자 스태프는 일본식 영어를 구사하면서 이것저것 알려준다. 수건이 필요하냐? 모래찜질은 안 하냐? 신발보관장 코인은 나중에 돌려받는다 등등. 린스 하나만 달랑 사 들고 안으로 들어선다. 세월의 연륜이 느껴지는 실내 인테리어다. 윤기 나는 나무 바닥과 목욕 후 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나무 테이블. 로비는 천장이 높아 시원하다. 탕 입구는 두 곳으로 구분되어 있다. 한쪽은 모래, 한쪽은 40℃가 넘는 뜨거운 물이 용출되는 자연탕이다. 2층에서 탈의하고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옴팍한 곳에 우물보다 약간 큰 탕이 있다. 찬물을 쓸 수 있는 수도꼭지도 있다. 온천욕 하는 사람들 중에 한국인은 없고 대부분 일본 관광객 또는 동네 할머니들이다. 그들의 목욕 방법을 슬쩍 눈여겨본다. 일단 뜨거운 물에 들어가기 전, 바가지로 물을 퍼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다. 그리고 두어 번 탕 속에 몸을 담근 후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간다. 길어야 10여 분 정도. 일본 목욕 문화는 10분씩 3회를 하는 것이 건강에 유익하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식 목욕법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일본의 온천욕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 그래도 온천수가 좋아서인지, 아니면 온도가 높아서인지 몸이 금방 개운해진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옛 유곽 거리를 만난다. 옛날 옛적 전국의 한량들을 불러 모았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곳. 일본의 속살을 들여다보기 위해 작은 선술집에 들러 구운 닭요리를 안주 삼아 사케를 마신다. 그 재미가 묘하다. 이색 순례, 간나와 지옥 온천 벳푸 여행 코스에 지옥 온천 순례를 빼면 안 된다. 벳푸 핫토(別府 八湯) 중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간나와(鉄輪) 온천 단지. ‘지옥 온천’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그곳을 찾은 날 주룩주룩 비가 많이도 내렸다. 여러 형태의 ‘지옥’ 중 일본 국가 지정명소로 채택된 세 곳(바다지옥, 백야지옥, 소용돌이지옥)이 있다. 가장 인기 있다는 바다지옥만 둘러본다. 지옥 온천 중에서 가장 큰 열탕을 갖고 있는 곳이다. 약 1200년 전부터 지하 300m에서 뜨거운 증기와 흙탕물이 분출되고 있다. 200℃라니 말만 들어도 지옥에 온 느낌이다. 그저 구경하고 산책하는 것이 전부. 체험할 수 있는 곳은 족욕장뿐이다. 탁한 물에 양말을 벗고 물속에 발을 집어넣는다. 생각보다 뜨겁지 않다. 비가 내려 운치는 좋다. 관광객 특수를 누리기 위해 만들어진 특산품 코너로 간다. 수많은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곳에서 온천 증기로 만든 간장을 넣어 맛을 낸 푸딩을 사 먹는다. 흑설탕 맛이 나는 푸딩이 별미다. ‘오래된 마을’로 꾸민 ‘새 마을’ 벳푸에서 유후인(由布院)으로 간다. 25km 떨어져 있고 버스로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 일본인들이 가장 가고 싶은 여행지 1위이고 60% 이상이 한국인 관광객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유후인을 배경으로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을 제작했다. 유후인 기차역 앞으로 난 유노쓰보 거리(湯の坪街道)의 첫 느낌이 참 좋다. 아기자기한 숍들이 길 양쪽으로 이어진다. 마치 유럽의 소도시에 온 듯하다. 유후인을 명물로 만든 사람은 1955년 유후인 초대 정장(町長, 우리나라의 면장)을 지낸 이와오 히데카즈(岩男額一). 당시 36세였던 그는 마을재건위원회를 결성해 본격적인 온천 개발을 시작했다. 마을에 들어서는 건물 높이는 11m를 넘지 못하게 했다. 마을 어디에서나 유후다케 산(1584m)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호텔, 골프장 같은 대형 레저시설은 불허했고 60실 이하의 료칸(旅館)만 허가했다. 음식도 유후인에서 생산한 재료로만 만들어 판매하도록 했다. 단체 관광객도 받지 않았다. 그 후 ‘오래된 마을’처럼 꾸민 ‘새 마을’은 엄청난 관광 특수를 누리고 있다. 긴린코 호수도 보고 온천욕도 하고 유후인 역에서 긴린코 호수(金鱗湖)까지는 약 1.5km. 호수까지 걷는 동안 ‘재즈 카페’에서 맛있는 컬럼비아 산 커피를 마신다. 금상을 받았다는 크로켓도 너무 맛있어 두 개나 사먹는다. 크지 않은 긴린코 호수는 차가운 물, 뜨거운 물이 용출되어 만들어졌다. 호수는 아침이면 안개와 이슬을 만든다. 호수 앞쪽으로는 아름다운 미술관 건물이 들어앉아 있다. 하지만 단체 관광객 때문에 어수선하다. 호수를 빨리 벗어나 누루카와 온천(ぬるかわ溫泉)으로 간다. 유후인은 벳푸, 구사쓰에 이어 일본에서 세 번째로 용출량이 많은 도시다. 누루카와 온천은 벳푸의 시영온천보다는 비싸지만 유후인에서는 가장 저렴하다. 샴푸와 보디용품도 있다. 남탕과 여탕은 나누어져 있지만 말이 들릴 정도로 가깝다. 야외 온천탕 중간에 돌이 놓여 있고 칸막이도 만들었다. 울창한 숲은 담 역할을 한다. 온천욕을 즐기는 사람들은 거의 한국인. 료칸에서 머물지 못한 여행객들은 이것만으로 일본식 전통 온천을 체험한다. 훌륭한 일본 가정식까지 먹고 벳푸 시로 되돌아온다. 벳푸나 유후인이나 훌륭한 여행지다. 벳푸 시에서 장기숙박하면서 원 없이 온천욕을 하고 심심해지면 유후인으로 나들이나 하면서 푹 쉴 날은 언제 또 올까?
- 2018-01-25 16: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