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전 여름, 그러니까 미국 시애틀에 살던 2005년 7월 중순경의 일이다.
당시 필자는 부산소재 모 수산회사의 1인 지사장으로 시애틀에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말이 지사장이지 고정수입이 없는 프리랜서형 지사여서 힘겹고 배고프던 때였다.
23세부터 23년간 당연시 여긴, 중독중의 최고라고 여겨지는, '월급'이 없어 마음이 황량한 때였다.
당시 알래스카의 오지 공장들로 연어알 수집을 위해 출장가는 삿뽀로 소재 일본 Buyer의 통역으로
그를 대동, 2주간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험한 여정이 예상됐지만 한푼의 커미션이 아쉽던 때라서
마다할 수도 없었고, 알라스카에 대한 동경도 어느정도 있어, 그와 함께 가게되었다.
Tacoma공항에서 출발하는 날부터 오후비행기인 줄 모르고 새벽에 나갔다가 아침비행기로
땡겨서 타는 등, 좌충우돌 처음 겪은 일들이 많았다. Anchorage에서 다시 Kodiak이라는 섬으로
가는 비행기도 역시 땡겨 타고, Kodiak에서 Larsen Bay라는 곳으로 8인승 소형비행기를 탔다.
맨땅의 활주로를 이륙하여 40여분 비행해 도착한 곳에는 주민 약 100여명, 연어 수십만 마리와
역사 100년이 넘은 반 수상가옥형 공장(Kodiak Salmon Packer Inc. 이하 'KSPI'로 칭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반 수상시설은 짐작하겠지만, 연어잡이 배들이 접안, 하역, 가공하기 쉽도록 하기 위함이다.
KSPI부근에는 알라스카 원주민 위주의 주민들과 그 외에는 그네들 보다 많은 수의 야생 곰, 바닷새
수십만마리, 그리고 산과 바다, 구름, 비 외엔 없는 광막한 원시자연, 그야말로 하늘아래 1번지였다.
KSPI에는 세계 각국, 특히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 동구권의 자본주의에 막 맛 들이기
시작한 나라들과 도미니카 공화국,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의 가난한 히스패닉 나라들에서
학비내지 라스베가스 유흥비를 벌기 위해 방학을 이용하여 알바온 대학생들이 대부분의
노동자였는데, 지구 끝의 그 오지에서 뉴욕 못지 않은 Melting Pot를 연출함이 경이로웠다.
거꾸로 그들 눈에는 필자와 동행한 부산의 본사 직원, 그리고 일본인 Buyer 3명이 그 곳의
유일한 동양인이어서 더욱 신기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음식관련 가공공장을 경험해 본 사람은 짐작하겠지만, 장화와 모자, 비닐 앞치마와
고무장갑은 필수품이다. 필자의 역할은 통역이었지만 24시간 휴일도 없이 가동하는 공장사정상
막일도 나몰라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78,00하는 어부용 장화를 사 신고 공장일도 꽤
돕게 되었다. 당시 광막한 자연만큼이나 황량한 마음으로 읽고 있던 유태경전(주로 창세기
이전부터 구약에 관한 것으로 Kabbalah라고 하는데, 모태가 되는 경전은 Zohar라고 한다)에
의하면 여행을 떠날 때는 무기와 선물, 공부거리 3가지를 준비해야 한다는데, 장화가 당시
나의 무기가 된 것 같다.
당시의 출장겸 여행을 떠날 즈음에 웬지 신이 내게 인생의 목적을 가르쳐 출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를 갖게 했다. 목적지가 지구의 끝이거니와 하늘아래 일번지였기에 말이다.
카발라에 의하면 인생의 모든 사건들에 우연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모든 일이 자신이
뿌리고 나서 잊어버린 씨앗들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섬뜩한 진리인가!
Alaska에서 태어난 연어들은 약 5~7년 간의 대양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산란(다음세대의 창조)을 하고 생을 마감한다. 산란을 위해 기를 쓰고 고향민물을 역류해 가는
연어 떼의 장관을 목격한 것은 분명 진기한 경험이었다. 연어에는 참고로 Sockeye, Coho,
King, Silver, Red, Chum 등이 있으며, 이들의 고향회귀율은 평균 1% 이하라고 한다.
99% 이상은 조업선, 낚시꾼들, 곰 등에게 잡히거나 회귀도중 역류물살에 힘이 부쳐
자연사 한다. 자연사한 연어들은 굶주린 바닷새들에게 최고의 먹이가 된다.
연어의 고향회귀는 과학자들도 파악하지 못한 경이 중의 하나로, 고향민물의 광물질에서 풍기는
냄새를 기억하고 찾아간다는 설이 정설로 굳어가지만,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초자연적 신과
비슷한 존재가 인간에게 양식제공을 위해 연어로 화했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신의 육화
(Incarnation)로서 경건하게 연어를 대하는 것이다. 알라스카의 원 뜻도 Great Land(not Island)란다.
당시 주변에서 교회다니는 분들이 권하여 Warren목사가 저술한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
Driven Life)을 읽었는데, 연어들이야 말로 그러한 삶을 사는 듯했다. 바닷물을 벗어나면
염분이 없어져 아가미가 틀어지면서 몸체도 탈색하고, 거친 역류물살 외에도 곰, 바닷새 등
죽음의 위협이 곳곳에서 도사림에도 불구하고 산란을 위해 숭고하게 민물을 역류해 간다.
종족번식이라는 신이 부여한 숭고한 사명을 인식하고 가는 것일까? 신기하고 경이롭다.
KSPI에서 각국 젊은 대학생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다. 그들에겐 금지된 술도
몰래 주고, Sage라는 필명으로 게시판에 선현들의 지혜의 편린을 가끔 메모했기 때문일까?
폴란드 학생들 무리 150여명은 아예 비행기를 Charter하여 단체로 그 곳에 왔는데, 당시 교황이던
자국 출신 요한바오르 2세에 대한 프라이드와 존경심이 대단하였다. 폴란드 국민 97%가 카톨릭
신자라고 했다.
KSPI의 공장시설은 돌이켜보면 거의 감옥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수십년된 푹꺼진 벙크부터 열악한
샤워부스, 그리고 로버트 드니로 주연영화 Insomnia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백야현상 때문에 커튼을
암실수준으로 설치하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고, 공장 밖에는 광막해서 탈출?해 본들 아무시설도
없었다. 더구나 야생곰들이 많아 위험하니 창살없는 감옥과 다름 없었다. 속세?와의 소통도
공장에 설치된 몇대 안되는 공중전화 뿐, 핸드폰도 물론 터지지 않아 무용지물이었다.
음식도 별 가림 없이 잘먹는 필자에게 KSPI의 식당 음식은 먹기가 꽤 힘들었다. 술을 사려고,
KSPI에 처음 갈 때 다른 비행기에 잘못 실린 짐을 사후적으로 찾을 겸하여 비행기를 타고 Larsen Bay에
가야 했었다. 술도 감옥만큼이나 실제로 귀한 곳이었다. 그만큼 오지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앵커리지(돛을 매는 곳이란 뜻)경유 Kechikhan에 도착, 거기서 6인승 수상비행기
(Waterplane)로 캐나다 서안 Neets Bay의 Lucky Buck에서 해안에 정박시킨 배(선상공장)에서 2일을 지냈다.
그 배에서 새벽에 물안개가 가득할 때 덩치 큰 연어들이 귀향이 좋아서인지 수면 위로 점프하던 귀한 장면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케치칸 부두에는 타이타닉보다 큰 크루즈 유람선이 4척이나 정박해 있었는데, 그 배의
승객들에게 곰들이 연어를 사냥하는 곳으로 5~7명씩, 소형 Waterplane으로 태워다 주는 중간에 잠시 물에
착륙, 우리 일행을 내려주고 간 것이다. 관광객들은 우리 일행이 기실 최대의 연어사냥꾼?인 줄은 몰랐을 터.
케치칸 비행장은 활주로가 섬에 있어 승객전원이 Ferry를 3~5분 타고 육지로 가게 되어 있는 점도
매우 특이하려니와, 그 짧은 거리에 다리를 놓지 않는 이유는 Ferry 수입보다는 무수한 Boat-plane이 계속
이착륙하기 때문이란다. 알래스카에서 보트플레인은 제 2의 승용차라고 할 만큼 보급율이 높고 그 만큼
오지가 많다. 앵커리지 공항에서도 수십대를 보았다. 선상공장(가공선박)에서 비행장까지 나 한명 만을
위해 Small Boat로 태워다 주는 평생 잊지 못할 호사도 누렸다.
호사다마일까? 케치칸의 거리에서 죠지아출신의 술취한 저질 백인 인종차별론자(Whitrash = White와
Trash의 합성어)와 싸울뻔 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거칠게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일본, 한국"이라 했더니
대뜸 "무조건 싫으니 돌아가라"는 거다. 열받은 내가 "너는 어디서 왔는데?"라고 묻고 그가 "죠지아"라 해서
"너나 죠지아로 돌아가지?" 했더니 대뜸 완력으로 나오려는 그를 옆에 있던 가엾은 그의 처가 말렸고,
숫적으로도 우리가 우세였기에, 험한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다.
외양 하나는 천국같은 시애틀 집에 돌아 왔다가 몇일 후 다시 알래스카를 다녀 왔는데, 언제 또 갈일이
있으려나 싶다. 아름다운 도시 시애틀에 살면서도 수입이 일정치 않았던 내게는 정작 그 때가 인생 최고의
시련기겸 심리적 생지옥이었다. 이후 2006년 부터 기러기 생활을 하며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그제서야
가족들 보러 시애틀에 들락거릴 때 비로소 그 도시가 천국처럼 보이더라는 지나간 이야기다. '일체유심조'는
참으로 맞는 말임을 그 때 절감했다.
요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힐튼 헤드 섬(Hilton Head Island)이 은퇴자의 천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골프 애호가라면 PGA투어 RBC 헤리티지대회가 매년 열리는 아름다운 하버타운 링크스코스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힐튼 헤드 섬은 미국의 은퇴자들이 좋아할 요소를 거의 다 갖추고 있다.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 눈이 거의 오지 않는 온화한 기후는 한파에 시달리는 뉴욕, 보스턴 등 도회지의 은퇴자들에게는 큰 매력이다. 30도를 넘는 여름 더위가 9월까지 이어지기는 하지만 수온은 수상 스포츠에 최적이다. 저녁이면 선선해지니 휴식과 숙면을 취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고즈넉한 대서양 해변과 하얀 요트가 즐비하게 정박된 마리나와 야자수가 어우러진 항구의 전경은 숨 막히게 아름답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넓게 펼쳐진 바다, 하얀 모래와 맑고 깨끗한 습지 그리고 이끼로 뒤덮인 울창한 떡갈나무 숲은 대자연이 주는 은퇴기념 선물이며, 넉넉한 남부 인심은 은퇴자들에게 기를 불러 넣어주는 활력소다. 눈부신 햇살 아래 짭짤한 갯바람을 맞으며 160㎞에 달하는 자전거 도로를 달리고, 30여 개 골프 코스에서 라운딩을 하다보면 인생 후반기의 허무감은 어느새 충만감으로 바뀐다.
카약, 승마, 테니스, 낚시 등 갖가지 스포츠와 취미활동은 힐튼 헤드 섬의 주요 일과다. 19㎞에 걸쳐 펼쳐진 해안을 따라 무리지어 유영하는 돌고래를 유람선을 타고 관찰하며 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붉은바다거북의 산란을 위해 해변의 조명을 모두 끌 때면 자연과의 일체감을 맛보게 된다. 저지대 늪지에서는 새우와 게를 쫓아다니는 푸른 왜가리와 큰 입을 딱 벌리고 햇볕을 쬐는 악어를 만나는 놀라움도 있다.
맨해튼(여의도의 30배)만한 넓이의 힐튼 헤드 섬에서는 4만여 주민이 오순도순 지내지만 해마다 250만 명의 외지인이 찾아와 한가하고 여유로운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쇼핑 환경도 맨해튼 수준이다.
특가 상품에서부터 디자이너 브랜드와 특별한 사람에게 선물할 독특한 기념품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200여 개의 아웃렛과 상점, 그리고 6곳의 마리나 빌리지 상가는 주민뿐 아니라 관광객의 눈길과 발길을 끌고 있다.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자동차로 5시간, 사바나에서 45분(57㎞) 거리에 있는 힐튼 헤드 섬은 큰 다리로 내륙과 연결되어 있어 여객선이 다니지 않는 섬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이나 사바나국제공항에서 항공편을 이용하면 이동시간을 줄일 수 있다. 미국 동부 연안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힐튼 헤드 섬은 원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따뜻한 기후와 야자열매, 풍부한 해산물을 즐기던 곳으로 1663년 영국의 윌리엄 힐튼 선장이 처음 이 섬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힐튼 헤드’라고 명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섬의 73%가 은퇴자를 위한 주택단지
힐튼 헤드 섬의 73%는 10개의 대단위 리조트형 주택단지가 차지하고 있다. 이 주택단지 가운데 상당수는 매입 자격을 55세 이상의 신중년으로 제한하고 있다. 대부분 단지에는 관리사무소를 중심으로 실내외 수영장, 피트니스센터, 테니스장, 연회장, 식당 등이 갖추어져 있고 호수와 숲, 골프 코스와 마리나가 인접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섬에 정착한 은퇴자들은 평균 6차례 이상 방문하여 생활환경을 체험한 후 주택을 매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웃과 격이 없이 지내는 이 섬의 분위기를 느끼고 썰물 때면 90m나 밀려나 숨겼던 민낯을 드러내는 갯벌을 산책하면서 돌고래가 수영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게 된다.
이 섬의 지난해 주택매매 가격은 단독주택의 경우 52만달러, 타운하우스와 아파트는 20만달러 수준. 침실과 화장실이 각 2개인 아파트는 20만~40만달러, 단독주택은 25만~45만달러, 그리고 침실과 화장실이 각 3개인 주택은 40만~70만달러를 호가한다. 바다 경치가 아주 좋은 주택은 150만달러를 훌쩍 넘고 700만달러를 호가하는 그림 같은 주택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6개월 정도만 빌려 살아볼 수 있는 아파트도 구하기 어렵지 않다. 스튜디오형은 월 평균 600달러, 침실 1개짜리는 800달러, 침실 2개짜리는 900달러 수준이다. 성수기인 여름철에는 며칠만 빌릴 경우에도 임대료가 치솟는다. 침실 1개인 주택이나 아파트도 전망이 좋으면 1주에 1200~1800달러, 해변을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면 1000~1200달러 정도다. 봄과 가을에는 20% 정도 할인되고 겨울에는 50%나 싸진다. 2억달러 넘게 투입해 새 단장을 한 리조트의 하루 방 값은 일반형 기준으로 130~340달러 수준이다.
주거비가 웬만한 휴양지나 은퇴자 생활지보다 비싸지만 주거비를 포함한 생활비 총지출은 맨해튼의 50%, 워싱턴이나 보스턴의 75% 수준을 넘지 않는다. 재산세가 다른 지역의 25% 수준인 데다 소득세, 소비세 등 각종 세율이 낮고 85세 이상의 주민에게는 더 낮은 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자동차보험과 휘발유 값이 저렴한 것도 수월찮게 도움이 된다. 이 지역 주민들 가운데는 현역 시절 주택을 구입해 별장처럼 이용하다가 은퇴 후 눌러앉은 사람도 적지 않다. 세컨드 주택을 구입하면 세제 및 금융 혜택이 있는 데다 에어앤비를 비롯한 휴가용 주택 알선 사이트가 붐을 이루면서 목 좋은 곳의 별장은 재테크 수단이 되었다.
미국 남부 사람들이 테러보다 더 무서워하는 것이 허리케인이다. 힐튼 헤드 섬 주민들은 1850년 이후 섬 주변 반경 80㎞ 이내로 81차례의 허리케인이 지나갔지만 큰 피해를 입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는 전설을 믿고 있다. 천혜의 지형 덕분인지 주민들의 후덕한 인심과 간절한 소망 덕분인지 알 수가 없다.
각양각색의 취미활동 그리고 평생교육도
힐튼 헤드 섬에서는 축제와 이벤트가 풍성하다. 해마다 열리는 다양한 뮤직 페스티벌, 해산물 축제, 고기잡이 경진대회, 카약과 보트 경주 등은 주민과 관광객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자리다.
멋을 살린 음악 카페, 길거리 밴드,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이 늘어선 메이 강변에 각종 포장마차와 공예품 전시판매점까지 어우러지면서 남부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16㎞ 떨어진 블러프턴의 소도심에서는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고 남북전쟁 때의 화재와 파괴를 견뎌낸 대농장주의 저택과 교회는 박물관과 관광안내소로 활용되고 있다. 수백 년 된 거대한 나무와 옛 건물은 그림엽서로도 간직되고 있다.
은퇴자들의 취향은 제각각이다. 요트, 카약, 낚시 등에 빠져 있는 ‘해양스포츠파’, 생태관찰 보존과 식물 재배에 몰입한 ‘에코파’, 골프, 사이클, 테니스와 달리기 등을 주로 하는 ‘육상스포츠파’, 공예품 만들기, 독서, 해변 일광욕, 흔들의자 등을 즐기는 ‘정중동파’ 등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봉사활동과 평생교육은 이곳 은퇴 생활자들의 공통된 일과다. 해안사구와 야생동물 서식지 보호에서부터 노약자 서비스, 도서관 운영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자원봉사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과 협력관계를 맺은 오셔평생교육원은 1600명의 은퇴 생활자들을 대상으로 400여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1년 회비 40달러에, 수업료는 과목당 15달러. 모두 다 합쳐 연간 95달러를 넘지 않게 책정되어 있다. 선생과 학생이 따로 없다. 자신의 전공분야를 가르치고 관심 분야를 배운다. 학습을 하다가도 기분이 내키면 밖으로 나가 현장학습에 들어간다.
미국의 주요 언론과 관련 전문매체의 힐튼 헤드 섬 예찬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2015년 최고의 은퇴 생활지’, ‘인생을 바꿀 건강한 봄철 휴가지’, ‘하계 모임을 위한 남부 최고의 장소’, ‘2016년 북미지역 최고의 골프 휴가지’, ‘캐롤라이나 남부 최고의 사이클 친화지역’, ‘미국 남부 5대 하계 가족휴가지’, ‘세계 50대 테니스 휴양지’, ‘미국 최고의 섬’, ‘인터넷 검색이 가장 많은 섬’, ‘사우스캐롤라이나 최고의 해변’, ‘2015년 세계 최고의 여행목적지’ 등등. 이런 찬사 덕분에 이 지역 은퇴 생활자들의 만족감은 더 커지고 있다.
800km 국토종단, 4200km 국내 해안 일주, 24시간 밤새 100km를 걷는 울트라 걷기 등 젊은이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을 65세가 넘어서 이뤄낸 도보여행가 황안나(본명:황경화(黃慶花)·76)씨. 그녀는 국내뿐만 아니라 산티아고, 네팔, 홍콩, 몽골, 부탄, 동티베트, 베트남, 아이슬란드, 시칠리아 등 50개 국의 길을 밟았다. 지리산 종주도 벌써 여덟 번 했고, 오지여행도 숱하게 다녀왔다. 나이를 두고 우려하는 이들에게 그녀는 말한다. “비록 나이는 적지 않지만 뜨겁게 갈망하는 것이 있고 그것들을 내 두 발로 해낼 수 있으니 이만하면 젊지 않은가?”라고.
황씨는 춘천사범학교를 나와 20세부터 교직 생활을 하다가 정년을 7년 앞두고 제2 인생을 위해 과감하게 퇴직했다. 퇴직 후, 가장 먼저 문제가 된 것은 건강이었다.
건강검진 결과 고지혈증에 악성 빈혈 등 의사가 식단까지 짜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던 그녀다. 그런 그녀에게 의사는 운동을 권했고, 그때부터 동네 뒷산을 오르거나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씨는 TV 브라운관에 펼쳐진 땅끝마을의 풍경을 보고 눈을 뗄 수 없었다.
“드넓은 양파밭과 청보리순, 붉은 황토가 햇살에 반짝이는 그곳을 ‘한번 걸어보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땅끝마을이라는 그 단어도 무척이나 아득하게 느껴졌죠. 그때 마침, 제가 다니던 산악회에서 광주 무등산을 오른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산에서 내려와 터미널로 가서 땅끝마을로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순전히 그 길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에 걷기를 시작했고, 그 일이 계기가 돼 국토종단과 해안 일주에 도전했죠. 내 모든 시작과 도전은 65세부터였어요.”
장기 도보여행에 필요한 다섯 가지
그녀가 혼자 장기 도보여행을 한다고 했을 때 제일 걱정한 것은 ‘체력’이다. 그리고 체력과 함께 꼭 필요한 것들이 있다고 한다. “젊은 친구들은 체력은 있는데 시간이나 경비가 부족하죠. 나이 든 사람들은 시간과 경비는 있지만 체력이나 용기가 부족하고요. 한 달에서 길게는 몇 개월씩 다니는 장기 여행이기 때문에 가족의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4개월 해안 일주를 하는 데 700만원 정도 들었는데, 보통 할머니가 그만한 돈을 쓰기란 쉽지 않잖아요. 작정하고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퇴직하고 3년 동안 뒷산을 운동 삼아 다닌 덕에 체력도 단련돼 있었죠. 남편에게 내 계획을 이야기하니까 그이는 단순히 ‘해도 된다’ 정도가 아니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어요. 그렇게 체력, 시간, 경비, 그리고 가족의 이해까지 모두 해결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더라고요. 용기를 갖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여러 강연이나 인터뷰에서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왜 혼자 떠나느냐”이다. 그녀는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를 갖춘 동행자를 찾기 어려울뿐더러, 모두 갖춘 사람이라도 서로의 체력 정도나 관심사가 달라 나만을 위한 자유 여행을 즐기기 어렵다고 말한다.
“누군가와 함께 가면 나는 조금 더 걷고 싶은데 상대에 맞추느라 나아가지 못할 때도 있고, 사진을 찍고 싶은데도 마음대로 멈출 수 없어요. 남편이나 동생들이랑 가면 좋은 숙소에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걷기는 뒷전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즐겁고 편안하지만 단순히 관광에 그치고 말죠. 혼자 걸으면 힘들고 외롭고 막막하지만 그 절박함을 안고 걷는 길에서 느끼는 게 참 많아요.”
그녀는 외로움이 몰려올 때면 돌아가신 어머니의 일기장에 남아 있던 문구를 떠올린다.
‘자유로우려면 외로워야 한다!’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나 홀로 도보 여행’
목적지는 정하지만, 목표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그녀는 꼭 정상을 가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가다가 힘들면 되돌아오면 된다는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하고 싶은 걸 그냥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만족스럽다고.
“남들이 못할 거라고 말린다고 해서 ‘나는 꼭 성공할 테다’ 하는 마음으로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어디까지 가서 못하나 보자’라고 생각해요. 그냥 포기하는 것보다는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확인해보는 편이 낫잖아요. 망설이고 주저할 시간에 그냥 하는 게 남는 거죠.”
그녀는 길 위에서 잊지 못할 추억도 쌓고, 건강도 챙기고, 친구들도 많이 생겼지만 비워내는 과정을 통해 얻은 것이 많다고 했다.
“정말 잡초처럼 험한 인생을 견디며 살아왔어요. 아마 걷기를 하지 않고 그대로 노년을 맞았다면 마음이 아주 괴로웠을 것 같아요. 지난날의 아픔과 걱정 등을 모두 길 위에서 치유했기 때문에 지금 즐거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길을 혼자 걷다 보면 마음도 편해지고, 집착이나 욕심도 다 내려놓게 되죠. 자연히 자기 성찰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다이어트를 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걷는 내내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길 위에서 그녀의 주특기는 바로 ‘멍 때리기’라고. 근심 없이 머리가 텅 빈 상태로 걷다 보면 몸도 마음도 아주 편안해진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아야 할 것은 바로 ‘끈기’다.
“도전해서 꼭 이루리라는 욕심은 없지만, 끈기 있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 보니 도전한 것은 대부분 해낼 수 있었죠. 머리가 가자고 하면 몸은 자연히 따라가게 돼 있거든요. 도보여행을 하다보면 소나기를 맞을 때도 있어요. 비에 홀딱 젖고 나면 대개 의욕을 잃거나 힘들어하죠. 그럴 때면 저는 이렇게 외치며 한 발짝 더 내딛죠.”
“젖은 옷이 마를 때까지!”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영어사전에서 ‘버킷 리스트(bucket list)’를 검색하면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달성하고 싶은 목표 리스트’라고 나온다. 버킷은 얼마 전까지 바께쓰라고 부르던 양동이나 들통을 말하는 것이고, 리스트는 명단이나 목록을 뜻한다. 그런데 두 단어의 조합에서 왜 이 같은 풀이가 나오는 걸까? 해서 좀 더 찾아보니 버킷 리스트라는 단어가 원래 ‘죽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속어 ‘kick the bucket’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중세 유럽에서 교수형에 처하거나 자살할 때 목에 밧줄을 걸어 놓고 발밑에 놓인 양동이를 걷어찬 데서 나온 것이다. 영화 의 마지막 부분에서 유대인수용소장 아민 괴트를 교수형에 처할 때 발밑의 나무로 된 받침대를 걷어차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갈 것이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
필자의 두 번째 의문은 다음과 같다. 왜 이처럼 끔찍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단어를 많은 사람이 챙기고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아마도 누구나 양동이를 걷어차기 전에, 즉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또는 하고 싶은 일들이 있기 때문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버킷리스트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영화 제목이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2007년에 나온 영화 는 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두 사나이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실행해 가는 이야기이다. 평생을 자동차 수리공으로 살아온 카터 챔버스(모건 프리먼)와 재벌 사업가인 에드워드 콜(잭 니콜슨)은 우연히 중환자실에서 만난다. 카터의 어릴 적 꿈은 역사학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家長)으로서의 책임감과 흑인이란 이유로 포기하고 TV쇼를 보면서 위안을 삼으며 살았다. 반면 에드워드는 자수성가해 전용 비행기까지 갖게 됐지만 세 번의 결혼 실패로 딸에게조차 잊힌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다. 이른바 성공한 만큼 외로움의 빈자리도 큰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이 중환자실에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면서 의기투합한다. 급기야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적은 버킷 리스트를 들고 병원을 뛰쳐나간다. 그리고는 3개월 동안 ‘스카이다이빙하기, 문신하기,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냥하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과 키스하기, 모르는 사람 도와주기, 눈물이 날 때까지 웃어보기’ 등을 하면서 흥미진진한 나날을 보낸다. 영화에서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임박해서, 혹은 건강을 잃고 나서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러면서 미리 하지 않은 사실에 후회하고 그것들이 너무나 쉽고 간단한 일이라는 데 또 한 번 절망한다. 영화는 ‘인생에서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살면서 한 일들이 아니라, 살면서 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유명인사들이 갑자기 현직에서 사임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2014년 3월 애플의 재무최고책임자(CFO) 피터 오펜하이머는 무려 430억원 규모의 주식을 포기하고 그 해 9월에 은퇴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유는 단순명쾌하다. 1996년 애플에 입사해 2004년부터 만 10년째 CFO로 근무하고 있는데 이제 ‘자유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이는 51세로 아직 한창이지만 회사는 세계 최고가 되었고 돈은 벌 만큼 벌었으니 ‘앞으로는 회사와 일이 아닌 자신과 가족을 위해 시간을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결국 430억원과 내가 하고 싶은 일, 즉 버킷 리스트와 맞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구글의 CFO 패트릭 피체트 역시 52세때 ‘아내와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라면서 2015년 3월 회사를 미련 없이 떠났다. 짐 로저스와 피터 린치 등 펀드매니저 중에도 억만장자가 된 다음 유유자적하며 지내겠다고 40~50대에 은퇴한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럼 이렇게 유명하고 돈 많은 사람들만 버킷 리스트를 작성할까? 아니다. 평범한 사람 누구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2014년 6월 EBS의 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신권식씨(당시 86세). 경기도 평택에 사는 평범한 농부인 그는 환갑이 되던 해에 농사를 접고 땅도 거의 다 팔아치웠다. 아버지가 평생 일만 하다가 77세에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을 실행한 것이었다. 그 때부터 배운 서예가 늘어 가르칠 정도가 됐고 동네 향교(鄕校)에서 하는 행사에는 제관(祭官)으로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있다. 처음에는 땅을 파는 것을 반대했던 부인이 남편이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마음을 내려놓은 것도 큰 힘이 됐다. 그래서 그런지 여든이 넘은 두 분 다 건강하다. 조용한 시골에서, 그것도 평생 농사지은 곳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데 부러울 게 뭐 있으며 스트레스가 어디 있겠는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아직 은퇴하지 않았다면 오지 않은 은퇴를 걱정하느라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오늘을 놓치지 말고 지금 당장 나만의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은 꺼내지도 말자. 영화 속 이야기이기는 해도 6개월 시한부 인생도 얼마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않는가?
미국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포수 중 하나인 요기 베라는 말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니까!(It ain’t over till it’s over)” 그의 말처럼 설사 은퇴했다고 하더라도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은퇴(retire)’란 말 그대로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우는 것(re-tire)일 뿐이다. 9회 말을 지나 잠시 배트를 놓고 글러브를 벗었지만 다음 게임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정식 리그가 아니라 동네 야구일 수도 있지만 포기할 이유는 전혀 없다. 골프에서의 성패 역시 18홀을 끝내고 장갑을 벗을 때까지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최선을 다하는 삶이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나만의 버킷 리스트는 살아 있고 거기다 뭔가를 적어 넣을 여백과 그 리스트를 실행할 용기 또한 충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설가 박경리 선생(1926~2008)을 떠올려보자. 선생은 한국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아들을 먼저 보내는 큰 슬픔을 당했다. 참으로 모진 세월이었다. 누구보다도 불행했지만 누구를 원망하거나 그 뒤에 숨지 않았다. 불행에 이은 고독과 병마를 와 같은 불후(不朽)의 작품들로 바꾸어 우리에게 남겼다. 말년에는 원주로 내려가 소박한 농부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돌아가기 얼마 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모진 세월 가고, 아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선생의 버킷 리스트에는 버리고 갈 것만 남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버리고 갈 것만 남은 홀가분한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발트 3국으로 불리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지 않은 나라다. 멀게만 느껴지고 접근이 어려울 것 같은 이 세 나라는 실제로 접해보면 매력이 넘친다. 이 중 으뜸은 에스토니아다. ‘발트 해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수도 탈린은 유럽에서도 가장 잘 보존된 중세 도시 중 하나다.
글·사진 이신화(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덴마크 왕이 만들어낸 성채 도시 ‘탈린’
“탈린은 꼭 가봐. 아름다운 도시야.” 발트 3국을 여행하겠다는 필자에게 여행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순전히 편리한 이동을 위해 정한 버스터미널 근처 숙소의 스태프는 친절하다. 교대로 바뀌는 중년 여성 스태프들은 한결같이 영어를 잘한다. “일찍부터 영어를 배워서.” 순조로운 언어 소통은 여행하는 데 아주 편리하다. 달랑 탈린 교통카드만 사서 여행하기로 한다. 묻지도 않았는데 “충전해서 또 쓰면 돼”라고 매표소 중년 여성은 친절을 보인다. 이 생애에는 다시 오지 못할 에스토니아.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네 나라를 각인시켜주고 있다.
발트 3국은 발트해 남동 해안에 위치해 있다. 예로부터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8세기부터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소련’의 일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앞선다. 20세기 들어 1918년을 기점으로 발트 3국은 각각 독립해 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다 1940년 또 소련에 합병되었다가 1990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 영향으로 1991년 8월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는 가난을 면치 못하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 여행할 때는 그런 느낌을 받지 않는다.
발트 해의 핀란드 만 연안에 있는 항만도시인 탈린은 뱃길이 발달되어 이웃하고 있는 ‘잘사는’ 스칸디나비아 국민들이 많이 찾아온다. 그래서인지 탈린은 생각보다 많이 세련되어 있다.
탈린은 1219년,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가 에스토니아인들이 만든 성채 자리를 성으로 삼은 데에서 시작되었다. 탈린(Tallinn)이라는 이름도 ‘덴마크인의 도시’라는 뜻을 갖고 있다.
유럽에서도 가장 잘 보존된 중세 도시 중 하나로 ‘발트 해의 여왕’이라고 불린다. 보존이 잘된 이유엔 ‘안 좋은 기후’가 한몫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은 초토화하기 위해 탈린에 접근했다. 그날 안개가 많이 끼어 도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전투기는 발트 해에 폭탄을 쏟아붓고 돌아갔다. 이런 경우를 놓고 전화위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올드타운의 저지대는 상인과 서민의 옛 중세 분위기
탈린의 여행 시작은 구 시가지(old town)의 진입로인 쌍둥이 비루문(Viru Gate)에서 시작된다. 비루문은 올드타운으로 들어가는 6개 문의 하나로 1355년에 세워졌다. 원래는 성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파괴되고 현재 쌍둥이 탑만 남아 있다. 올드타운은 그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이 성곽으로 이어져 있는데 뿔 모양의 붉은 탑만 해도 46개. 일일이 세어볼 필요 없고 애써 구획을 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보고 느끼면 된다.
반질반질한 조약돌이 박힌 좁은 골목길에는 옛 향기가 물씬 배어 있다. 특히 카타리나(Katariina) 골목엔 중세 분위기가 여전하다. 13세기에 지어진 건축물이 많은 골목 자체로도 훌륭한 관광 상품이 된다. 골목 벽에는 중세기에 만들어진 듯한 석조물이 부서진 채로 남아 있다. 러시아 점령 시기에 러시아 군들이 세워놓은 안내 팻말에도 눈길이 간다. 입으로 유리를 불고 있는 그림 숍은 유리공예품을 전시해 팔고, 생선이 그려진 식당 앞에서는 메뉴판과 가격을 헤아려보게 된다. 오래되었다는 입간판이 달린 카페 앞에서 ‘커피 한잔 마실까’ 하며 어색하게 실내를 기웃거려본다. 손뜨개 상점 앞에 서 있는, 눈송이 스웨터를 입은 큰 인형을 보면 사고 싶은 욕망에 지갑을 만지작거린다. 똑같이 생긴 세 개의 건물이 눈길을 잡아끈다. ‘세 자매(15세기 건축물)’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은 현재 호텔로 이용되고 있다.
가장 넓은 시청사 광장(Raekoja Plats)은 여러 번 맞닥뜨리게 된다. 올드타운의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1406년에 세워진 시청사는 현재 콘서트홀로 쓰이며 고딕 첨탑에 오르면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오래전 시청사 근처를 저지대 거리라고 했다. 주로 상인과 일반인들이 이용했다. 성 올라프 교회(St. Olav’s Church), 각종 길드들의 회관, 카페, 식당들이 밀집되어 있다. 특히 이 광장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마기스트라트(Magistrat) 약국이 있다. 1422년 문을 열어 한 집안이 10대에 걸쳐 운영하고 있다. 약국 간판에는 징그러운 뱀 형상이 있다. 관광객들은 이 오래된 약국에서 약 사는 것보다 그저 구경하기에 여념 없어 보인다.
일찍도 찾아온 한겨울 어둠 사이로 거리 악사는 영화 주제가를 연주한다. 그 음률은 시청사 넓은 광장에 애달프게 퍼진다. 향수병에 젖은 여행객은 악사의 트럼펫 선율을 따라, 가로등 불빛을 따라 함께 부유한다.
영주나 귀족들의 영역, 토옴페아 언덕
저지대를 걷고 나면 으레 고지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토옴페아(Toompea) 언덕이라고 불리는데, 거의 영주나 귀족들이 살았다. 이곳은 두 개의 골목으로 연결되어 있다. 짧은 다리라는 뜻의 ‘뤼히케 얄그(Luhike Jalg)’와 긴 다리라는 의미의 ‘픽 얄그(Pikk Jalg)’ 거리다. 언덕배기에는 19세기에 세워진 알렉산드르 네브스키(Alexandr Nevsky) 성당이 있다. 겉모습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이 성당은 에스토니아인의 자존심을 건드린 건축물이다. 러시아인들은 에스토니아 최고 권력기관인 리이키코쿠(Riigikogu) 의회 앞에 보란 듯이 러시아 성당을 지은 것이다. 에스토니아 의회는 스웨덴 점령기부터 모든 주요 결정이 이뤄진 의사당이었다. 의회 옆으로는 집회 장소인 토옴페아 성이 있고 1233년에 세워진 루터교 성당 토옴키리크(Toomkirik)는 현재 길드 유물 전시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 외 18세기 귀족의 저택에 세워진 에스토니아 미술박물관, 1475년경에 높고 견고하게 세워진 탑, 키에크-인-테-셰크(Kiek-in-de-Kok) 등이 있다. 무엇보다 고지대에 서면 탈린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이리저리 장소를 옮겨가면서 조망하면 된다.
길을 따라 탈린 항 쪽으로 내려가면 16세기 탈린을 방어하던 요새 중 하나인 ‘뚱땡이 마가렛(paks margareeta)’ 성벽이 보인다. 1592년에 바다를 지키는 포탑으로 세워졌는데 성 안에는 감옥이 있었고 그 감옥의 교도관이 뚱뚱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해양박물관으로 이용된다. 공원을 지나 복잡한 도로를 건너면 탈린 항으로 이어진다. 항구 쪽에서 더 위쪽으로 가면 발트 해변(Lennusadam Seaplane Harbour)을 볼 수 있다.
시간이 있다면 발틱 역(Baltic Station) 맞은편에 서는 러시아식 재래시장을 찾으면 된다. 앤티크 제품부터 채소, 과일, 생필품까지 50여 개 상점이 문을 여는데 탈린 시내와는 전혀 다른 옛 소련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또 로카 알 마레(Rocca al Mare) 야외 박물관은 한적한 여정은 물론 시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발트 해를 가까이 산책하면서 호젓한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가는 길목에는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큰 쇼핑센터가 있다.
표트르 대제의 흔적 남은 카드리오르그 공원
또 하나 탈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구 시가지에서 동쪽, 약 2㎞에 있는 카드리오르그(Kadriorg) 공원이다. 울창한 숲과 호수가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기에 좋은 곳. 이 공원은 18세기 제정 러시아 시절, 표트르 대제가 두 번째 부인인 예카테리나 1세를 위해 조성했다. 이 공원에는 바로크 양식의 카드리오르그 궁전이 있다. 이 궁전은 1718년에서 1736년 사이에 이탈리아인 니콜로 미케티(Niccolo Michetti)의 설계로 건축되었으며 표트르 대제 자신이 직접 벽돌 3장을 쌓기도 했다고 전해온다. 표트르가 이곳에 성을 쌓은 이유는 모스크바에서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를 하고 당시 해상무역의 중요성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탈린은 유럽 진출의 요충지였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궁전 내부에는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러시아의 16~19세기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표트르가 건축 당시 거처했던 조그만 오두막집은 표트르의 개인 박물관이 됐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기에 좋은 공간이다. 해설사가 설명도 해준다.
그 외 건물 형태부터 현대적인 쿠무(Kumu) 미술관이 있다. 2006년에 문을 연 에스토니아 최대의 미술관으로, 2008년 ‘올해의 유럽 박물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다양한 예술품들을 접하는 공간이다.
김 현 (전 KBS 방송연구실장ㆍ여행연출가)
우리 부부가 함께 배낭을 메고 여행을 다니게 된 것은 1989년 1월 1일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부터였다. 그 후 27년 동안 아내와 나는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1년에 2회~5회씩 해외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그동안 우리 부부가 여행한 나라만 해도 165개국에 달한다. 이 덕분에 우리 부부에게는 ‘대한민국 부부 배낭여행가 1호’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아내와 내가 오늘날까지 큰 탈 없이 부부여행가로 활동한 데는 무엇보다 가족들의 도움이 컸다. 생전의 부모님은 언제나 공항까지 배웅을 나오셔서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고, 두 아들 역시 부모의 배낭여행에 열렬한 응원을 보내주었다. 가족들의 이러한 이해와 양보가 없었더라면 결코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참으로 운 좋게도 서로 좋은 배필을 만나 어언 47년을 해로하였고, 그중 절반에 이르는 세월을 ‘부부 배낭여행가 1호’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으니 정말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내는 인생의 반려자인 동시에 여행의 동반자인 셈이다.
그런데 내가 수많은 여행 중에서도 유독 배낭여행을 고집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마디로 배낭여행이야말로 ‘복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배낭여행 경비는 패키지 상품의 3분의 2 정도면 충분하다. 게다가 모든 일정과 방문지 등을 여행연출가가 되어 직접 설계해 완벽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부부가 함께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화가 늘어나 금실도 좋아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낭여행은 젊은이들만의 전유물로만 여기고, 나이가 들면 편안하고 우아한 여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부부의 생각은 좀 다르다. 오히려 나이 든 사람들이 배낭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은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이런 묘미에 이끌려 아내와 함께 배낭여행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 벌써 27년이 넘었다.
우리 부부는 여행을 하는 것은 ‘개안(開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한 번 여행을 다녀오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며 기회 닿는 대로 여행을 다녀와야겠다는 말들을 한다.
나 역시 여행을 통해 우리와 다른 문화를 접하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여행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가꾸는 것임과 동시에, 타인의 인생을 엿보면서 식견을 넓히는 창구이자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여행이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이 어려운 때 무슨 여행이냐고 되묻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행의 진정성이란 그런 단순한 가치를 뛰어넘는 것이다.
어느 시인이 여행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린 게 기억난다.
“여행은 두 개의 앨범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는 여행 중에 찍은 사진을 엮는 앨범이 될 것이고, 또 하나는 여행자의 가슴과 머릿속에 간직해 오는 앨범이 될 것이다.”
또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들도 한다. 그렇다.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부부가 함께하는 여행을 추천하고 싶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부부간에 대화할 시간이 적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대화라고 해봐야 아이들 걱정과 사회의 갖가지 사건 사고에 대한 스쳐 지나는 얘기 등이 전부일 테니까.
그런데 부부가 함께 여행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많아진다. 같은 시간에 같은 사물과 풍물을 대하게 되니 대화할 내용이 많아지는 것이다.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여행을 다녀온 배우자로부터 일방적으로 듣는 것보다, 부부가 함께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는 것을 나는 여러 번의 여행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부부가 함께 여행을 다니다 보면 저절로 정겨운 분위기 속에 빠져들게 되고, 나중에는 신혼과 같은 달콤한 느낌에 젖어들게 되니, 더 이상 부부여행의 장점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더욱이 가장 좋은 점은 여행을 통해 견문도 넓힐 수 있다는 점인데, 부부가 함께 견문을 넓히게 되므로 서로를 바라보는 시야와 이해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늘 좋을 수야 있겠는가. 부부여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아내는 남편을 위하고, 남편은 아내를 위하는 여행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는 점이다. 부부가 기껏 비싼 돈 들이고 귀한 시간 내서 온 여행인데, 다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먹거리나 볼거리에서부터 자신보다 배우자가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노력하다 보면 다툴 일도 많이 줄어들고, 어떤 면에서는 부부애가 더 돈독해진다고 볼 수 있다.
여행을 망설이는 부부에게 우리 부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여행은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못 간다고만 하지 말고, 꼭 한번 도전해 보라. 산다는 것은 즐겁게 사는 것을 뜻하지 않는가. 여행이야말로 인생을 즐기며 우리네의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해주는 활력소가 돼 줄 것이다. 또한 부부가 함께하는 여행을 통해 서로를 위해 투자하면서 낭만 속에서 몸과 마음을 살찌우다 보면 당연히 부부의 사랑도 자라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시어머니와 장모, 어느 회사의 CEO. 미혼 여성은 미혼 여성대로, 기혼 여성은 기혼 여성대로, 대한민국 중년여성들은 각자 주어진 책임과 의무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바쁜 일상 속에서 여자로서 가졌던 꿈과 정체성을 잃어가기도 한다.
“나와 함께 늙어가자. 가장 좋을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인생의 후반, 그것을 위해 인생의 전반이 존재하나니.”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쓴 시 ‘랍비, 벤 에즈라’의 한 구절이다. 통념과는 달리 인생의 절정기가 인생 후반에 온다는 이 구절은 나이 듦과 잘사는 법에 대해 고민하는 중년 여성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꽃중년은 걸어온 길에 대한 자부심과 다른 길을 향한 갈망, 성취감과 상실감, 자신감과 회의, 체념과 희망, 흥분과 무력감 등이 동시에 찾아오는 시기다.
여전히 중년은 기회가 주어진 가능성의 시간이다.
한평생을 자식과 남편, 가정을 위해 살아온 사람의 열정과 역량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인간의 에너지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솟구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바퀴가 돌다 보면 어느 한쪽이 부서지고 닳게 마련. 무엇이 더 필요한지, 버릴 것은 없는지 구석구석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 멈추고 쉬어야 한다. 자신을 내어주는 일과 내게 필요한 것을 재충전하는 것 사이에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 시기가 바로 50대, 60대, 70대인 것이다.
관계 맺기에 로그인을 잘해야 할 꽃중년
중년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고립’이다.
나이가 들면서 여성들은 기존의 외부 인맥이 끊어진다.
개인적인 인맥을 유지하기에는 이사, 가사, 육아 등등 주어진 일들과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부분에 대하여 가족들에게서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다. 가족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꾸려지는 공동체다. 그러나 여성들은
어느 순간 사람은 간 데 없고 역할만 남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엄마로서의 역할, 아내로서의 역할. 자신이 갖고 있는 개인적인 감정과 생각은 그 ‘역할’들 속에 파묻히게 되기 때문이다.
남편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맺은 가장 소중한 인연(人緣)
나이 들수록 소수정예 친구와 좁고 깊게 사귄다. 부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다. 한 심리학 교수는 사람은 타인의 생각을 해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돈을 벌수록 남을 이해하는 능력이 저하된다고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이유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64세 최인순 씨는 “남편이 저와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제가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멈추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요. 남편 입장에서 보면 제가 정말 쉬지 않고 말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고요. 게다가 남편은 제가 하는 모든 말을 ‘수다’라 칭하며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여기기도 해요” 라며 솔직한 심정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여성의 인간관계는 어디서부터 올까? 바로 ‘말’이다. 여성이 대화를 하는 가장 큰 목적은 ‘상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다. 자신의 의견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게 주목적인 남성과 달리, 여성은 내 기분을 상대방과 함께 나누고 공감을 얻기 위해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즉, 대화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여성들에게 수다 금지령을 내린다면 많은 우울증 환자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여자가 말이 많다며 인신공격하는 남자는 더 이상 신사가 아니다.
어떤 남편들은 아내가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래서 결론이 뭔데?”라고 말을 끊는다. 길어지는 대화에 남편은 점점 지루해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은 용건만 간단히 말하기보다는 최근에 재미있고 슬픈 일 등 새로운 정보를 말하면서 상대방이 공감해주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심정을 디테일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더 잘 나누기 위해 여성은 대화를 시도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남성의 뇌는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남편은 결과가 중요하지만 아내는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남녀의 대화 속도는 절대 같을 수가 없다. 아내는 남편에게 어떠한 결정을 해달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저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내는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그냥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응대만 해줘도 아내는 행복해한다.
그렇다. 부부클릭 전문가 소장은 “여자는 감정에 매우 민감하다. 그래서 감정이 좋은 사람과의 관계와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가 확연히 달라진다. 여자들이 남성에 비해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단계”라고 분석했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있어 수다는 단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매우 중요한 수단인 것 같다.
남편 아닌 다른 인연과의 관계 맺기
가족 아닌 관계를 잇고 싶은 여성들은 사는 지역에서, 혹은 종교 단체에서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되살리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렸을 적에 만난 친구들이 평생 친구가 되는 이유는, 서로를 판단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솔직히 보여줄 수 있는 나이 때에 만나서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만나게 된 인연들은 서로를 솔직하게 보여줄 수 없을 뿐더러, 보여준다 해도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다. 가족, 그리고 가족 외 관계에서 부딪히게 되는 이 모든 상황들은 중년 여성에게 고립감을 느끼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년 여성이 관계를 확장하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건 어려우니 현재 있는 관계, 그중에서 정말 내가 믿어볼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솔직하게 내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솔직하게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지 못하니 자꾸 가리게 되고 서로 오해가 쌓이고 친해졌어도 왠지 공허하게 된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라는 것이다.
그게 가능한 기존 관계 중에서는 가족, 그중에서 우선 배우자를 들 수 있다. 중년이 되면 남성들은 남성 호르몬이 내리막길이고 사회적으로 특별하게 잘나가는 사람이 아니면 사회가 아닌 가족과 보낼 기회가 많아질 수밖에 없어서 아내와 같이 늙어간다는 걸 보다 현실적으로 인지하게 된다. 반면 여성들은 나이가 들면서 시댁과 남편 눈치를 안 봐도 되는 시점이 오고, 그렇게 되면 조금 더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중년 여성들이 조금만 마음을 열고 남편을 영혼의 동반자로 생각해서 솔직한 대화를 하면 관계 회복이 가능해진다. 자녀들과의 관계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재설정할 수 있다. 이미 장성한 아이는 어른 대 어른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족은 서로를 믿을 수는 있지만 그간 살아온 시간과 경험들 때문에 너무 서로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서드 에이지 여성은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온 오랜 친구들에게 “우리 좀 더 솔직해지는 게 어떠냐”라고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면서 관계 개선을 추구하는 방법도 있다.
강현식 누다심심리상담센터 대표가 이런 방법도 제안했다. “지역 문화센터나 집단상담을 진행하는 곳에 가는 방법이다. 그곳에 가서 서로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야기하면 마음이 풀리고 인맥이 넓어지기도 한다. 잘 보이려 애쓰지 말고, 솔직해져 보라.” 이 모든 방법들에서 중요한 것은 숨기지 않고 솔직해지려는 자신의 다짐이다. 그 다짐이 없으면 변화는 찾아오지 않는다고 강 대표는 강조했다.
중년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
특히 강 대표는 “우울증, 울화병, 쇼핑중독 현상은 모두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뭔가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그렇게 몰두한다고 해도 공허감이 채워지지는 않는다. 마음의 공허함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만 해소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어떤 여성들은 그러한 공허감을 해소하기 위한 관계를 맺을 때, 남편이나 자녀 같은 가족과의 관계 개선은 뒤로 미룬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그 여성들은 가족 안에서 그동안 관계가 아니라 역할과 희생만을 했기 때문이다. 중년 여성들은 그토록 쉽게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밖에서 관계 개선이 잘 된다고 해도 가족과의 관계 회복이 이뤄지지 않으면 공허감은 채워지지 않는다. 결국 돌아오게 되는 곳은 집이고 그 안에는 가족이라는 반드시 만날 수밖에 없는 관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바둑의 기초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그럼에도 비교적 좋은 승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승부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50대 중반이 넘어서자 승부욕이 현저히 줄어들어 두기보다는 구경하기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어쩌다 바둑을 두어도 전과 같이 꼭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자연히 승률도 많이 나빠졌다.
이럴 때쯤인 1999년에 필자의 고교 총동창회가 기별 대항 바둑대회를 시작하였다. 필자는 5명으로 구성되는 단체전 대표보다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예비선수로서 주로 개인전에 거의 매년 출전했는데, 우리 동기들은 다른 기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승을 많이 했다.
2002년 3월에 기우회장을 맡게 된 필자는 김인 국수를 초청하여 지도대국을 가지도록 하고 저녁 후에는 2차까지 같이 가기도 했다. 유명한 애주가이자 필자보다 생일이 몇 달 빠른 김인 국수와는 대학 다닐 때 관철동의 한국기원 부근에서 한두 차례 술을 같이 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못 만나다가 바둑학과 관련으로 다시 만나게 되어 종종 술을 같이 하는 사이가 되었다. 또 2007년 11월의 제 1회 김인국수배 국제시니어바둑대회 때는 친구들과 더불어 전남 강진까지 가서 대회에 참여하고 같이 술을 들며 축하해 주기도 했다.
2002년 가을쯤인가 정동식 한국기원 사무국장이 남치형 초단과 식사자리를 마련하였다. 남 초단은 16세 때인 1990년에 입단한 후 서울대 영문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여류기사이자 재원이다. 예상대로 남 초단은 바둑학과 교수직에 관심을 보였고, 그를 적임자 중의 한 명으로 생각한 필자는 가능한 한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남 초단은 명지대학교에 지원서를 제출하였다.
당시 교무위원회에서 정한 교수채용 우선순위는 바둑학과가 최하위여서 교수를 뽑을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사위원회의 면담에서 남 초단이 얼마나 답변을 잘 했는지 만장일치로 채용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2003년은 또 앞에서 썼던 것처럼 한국바둑학회가 설립된 해이기도 하다. 학회는 정수현 교수가 총무이사를 맡았고, 학교에서 겸임교수로 강의를 하는 또 한명의 프로기사 한철균 6단(당시)이 감사를 맡았다. 회장인 필자와 학회 임원들과는 정기적으로 모였기 때문에 회의를 전후하여 정 교수나 한 6단에게도 지도를 받을 기회가 자주 있었다.
필자는 또 1년 여 연상이자 매우 서글서글한 윤기현 국수와도 별 허물없는 사이였다. 필자 생각에 윤 국수는 거짓말 같은 것을 할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가 바둑판 소송에 말려들고 또 패소까지 하여 바둑계에서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되었는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창호 국수는 좋아하는 테니스를 치러 명지대학교 용인캠퍼스에 여러 번 왔으나 돌부처라는 별명답게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 워낙 과묵하여 별로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보지 못했다. 이에 비해 필자가 왕 팬인 유창혁 국수는 전에도 좀 알고 지냈지만 최근 자주 만날 일이 생기면서 전보다 훨씬 더 가까워져 필자를 무척이나 즐겁게 하고 있다.
2004년에는 필자가 졸업한 대학교에서도 바둑대회를 시작하였으나 필자는 이 대회에 나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회 개최 얼마 전, 아마추어 고수로서 이 대회 개최에 관여하고 있던 후배 S씨가 바둑학회 회장 자격으로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대회가 열리는 일요일은 마침 등산이나 다른 일정이 없어 개막식 시간에 맞춰 대회 장소에 나갔으나 개막식이 시작될 때까지 S씨는 오지 않았고 필자를 찾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필자가 스스로 걸어 나가 바둑학회 회장이라고 VIP석에 앉기도 곤란하였고 그냥 돌아오자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기왕 온 김에 바둑이나 몇 판 두고 갈 생각으로 개인전 A조에 출전신청을 하였다. 바둑은 5판중에서 2~3판 이긴 것으로 기억된다.
본래 사람을 잘 사귀는 편인 필자는 그 과정에서 고교까지 후배인 C씨, EBS에 근무하던 H씨 등 몇 사람을 새로 사귀게 되었다. 대회 후에는 자연스럽게 대여섯 명이 술도 한 잔씩 나누며 다음해를 기약하였다. 다음해부터는 이들과의 약속 때문에 죽 대회에 참석해 벌써 10년이 되었다. 모이는 사람도 열 명 가까이로 늘어 이들 중 C씨나 H씨는 평소에도 종종 만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2008년경부터 필자는 바둑 벤처기업을 하는 S사장의 제안으로 한국기원 사무국장을 지낸 유건재 8단, 바둑기고가 이광구 선생 등과 함께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앞선 인터넷망을 기반으로 우리나라를 세계 바둑의 중심국가로 만들기 위한 세계 바둑표준화사업을 추진해 왔다. 필자는 사정상 이 모임에서 한동안 빠졌으나 그 후 다시 만나 얼마 전까지도 양재동에 있는 가백기원에 모여 원장인 김일환 9단에게 바둑도 배우고 어울려 식사나 약주도 같이 했다.
바둑이 늘려면 바둑책을 읽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가장 먼저 읽은 바둑책은 조남철 국수의 ‘위기개론(圍碁槪論)’이었다. 지금도 이 책은 참 잘 짜여진 바둑계의 명저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 칭위엔(吳淸源) 9단의 ‘신포석법’ 등과 같은 저서를 읽고 있으면 새로운 진리를 찾아가는 도인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우 칭위엔 9단의 스승이기도 한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9단의 ‘모양과 급소’ 등과 같은 저서를 읽으면 바둑수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하는 높은 예술적 경지를 느끼게 한다.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 9단의 저서는 마치 일본무협소설 같고 린 하이펑(林海峯) 9단의 저서는 중국무협소설 같다.
필자는 여행을 다닐 때마다 반드시 ‘월간바둑’을 휴대한다. 재미도 있을 뿐 아니라 부피에 비해 가장 오래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둑을 배워서 좋은 점은 지인들과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바둑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울퉁불퉁한 비포장과 포장 길이 4㎞ 정도. 하늘 향해 쑥쑥 뻗어나간 소나무 숲길을 지나고 몇 개의 개울을 잇는 다리를 건너고 시원한 계곡 길을 따라 지루할 정도로 한참을 가야만 민가 한 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띄엄띄엄 텃밭 주변으로 민가가 둥지를 틀고 있는 모습에서야 겨우 사람 사는 곳이라는 곳을 알게 되는 곳. 바로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응곡마을(일명 통바람골)이다.
글 이신화 여행작가
마을 사람들은 뒷산에 매가 사는 골짜기라는 뜻을 지닌 ‘응곡산(鷹谷山)’이 있어서 ‘응곡마을’이라고 하는데, 지도상에는 응복산(1359.6m)으로 표기되어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10~11가구가 있다. 토박이들은 아니고, 10~20여 년 전부터 이곳에 둥지를 튼 사람들이다. 대부분 겨울에는 마을을 떠나 있다가 봄철 산나물이 나올 즈음에 모여든다. 4월 말에서 5월 초순경이면 얼레지 나물로 초문을 연다. 얼레지는 일명 ‘가제 무릇’이라 불리기도 하며 고산지대의 숲속 음지에 자라는 백합과의 다년생 초본이다. 높이가 25㎝ 정도 자라고 4월에서 6월에 자주색(흰색 변이도 있다) 꽃이 핀다. 잎이 얼룩덜룩하여 얼레지라 이름 붙였다고 하며 꽃말은 ‘질투’ 또는 ‘바람난 여인’이라고 한다. 얼레지는 씨앗이 발아하여 꽃을 피우기까지 7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산나물을 뜯으러 산으로 오르는 동네사람들을 따라 함께 나서본다. 임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1시간 정도는 걸어야 한다. 나무들은 아직도 썰렁한 겨울 분위기를 내지만 산행 길에 간간이 피어난 야생화가 반갑다. 노랗게 피어난 ‘괭이눈’과 ‘꿩의 바람꽃’, ‘댓잎 현호색’ 노랗게 종 모양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백두대간 능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한계령 풀’이 눈 속에 들어온다.
특히 한계령 풀은 무지 희귀한 꽃으로, 지리산 모데미골에서 처음 발견된 모데미풀처럼 한계령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죽 길을 지나고 능선 참나무 군락지 밑으로 귀하디귀한 야생화가 눈에 띄더니만 능선을 넘어 고갯길에 이를 즈음에는 완전히 야생화 화원이 펼쳐진다. 일부러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화원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노란 꽃 사이로 이미 나물꾼들이 뜯어가 버린 얼레지의 보랏빛 꽃까지 합세해 더욱 빛이 난다. 생계가 아니라면 그냥 피고 지는 얼레지꽃 군락지까지 합세했다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야생화 화원이었을 것이다. 주민들은 나물이나 뜯어가라고 하지만 보랏빛 꽃이 너무나 처연해, 가늘게 봄바람 한 줌에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꽃잎이 가련해서 차마 뜯어버릴 수가 없다.
◇약수산에서 만난 신비한 철분 약수, 명계 약수터
그렇게 한참이나 야생화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새싹 움트는 몸짓을 느끼면서 돌아오기 싫은 길을 되돌아 나온다. 나물꾼들이 얼레지를 채취해 내려와 나물 삶는 데까지는 몇 시간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을을 비켜 임도길 중간 즈음에서 계곡 물을 건너가면 소로가 나온다. 계곡 옆길로 난 길이라 산책하기에 아주 좋다. 가래나물, 팥고비, 풀고비, 당귀싹, 화살나물, 골담초 등 나물 새순이 뾰족하게 올라오고 애기 괭이눈과 꽃잎에 점이 박혀 보기 쉽지 않다는 ‘긴 개별꽃’도 눈에 띈다. 산나물과 야생화를 관찰하면서 10분 남짓 올랐을까? 자그마한 폭포를 앞두고 약초꾼이 지어놓은 천막이 나선다. 켜켜이 장작을 싸놓고 부엌과 방을 들여놓고 뒤편에는 연통도 있다. 분명히 사람이 살았음직한 나물꾼의 천막은 당시에도 이곳에 있었는데, 여전히 사람은 만날 수 없다. 자그마한 폭포를 끼고 계곡을 건너면 암반 주변이 철분 빛으로 벌겋게 변해 있다. 누군가 계곡물과 섞이지 말라고 돌을 쌓아 막아 두었다.
자연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계곡 옆에 어떻게 이런 철분 약수터가 생겼는지 생각할수록 오묘하다. 붉은 물 사이로 뽀르르 기포가 올라온다. 물위에 떨어진 낙엽을 걷어내고 손으로 물을 마신다. 강한 철분 맛보다 톡 쏘는 탄산 맛이 느껴져 설탕만 넣으면 사이다와 같다. 이 약수를 통상 명계약수라고 하는데 통바람 약수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산 이름도 약수산이다. 약수산을 둘러싸고 남으로는 명계약수, 서쪽으로는 삼봉약수, 북으로는 갈천약수, 동으로는 불바라기약수가 있다. 약수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고 하여 부른 듯하다.
◇직접 만든 아궁지에 산나물 삶아 말리고, 지친 몸에 술 한잔
두어 시간이 지난 후, 필자가 이 마을에서 맨 처음 만났던 노부부가 사는 집을 찾는다. 자루에 나물이 가득 차면 집으로 와서 곧바로 나물을 삶는다.
시멘트로 네모진 통을 만들고 뒤에 연통을 단 아궁이가 있다. 장작불을 지피고 다듬지 않은 얼레지를 넣고 뚜껑을 닿고 5분 정도 삶아주고 양철통 위에 꺼내 말리면 되는 일이다. 할아버지가 나물을 삶는 동안 할머니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한다.
커다란 무쇠솥이 두 개, 고기도 구워 먹고 화로로 쓰는 널찍한 양철통이 한편에 놓여 있다. 깊은 산 물을 끌어다 쓰기 때문에 수도꼭지는 잠그지 않은 채로 졸졸 물이 흘러내린다. 무쇠솥에 물을 한가득 넣고 군불을 지핀다. 자그마한 풀무를 돌려가면서. 가스렌지 위에서는 구수한 된장국이 부글부글 끓는다. 하루 종일 나물 뜯느라 지친 몸을 얼레지 된장국에 찬밥을 넣고 김치 한 가지로 때우는 것이다.
“하루 정도만 우려내면 돼. 미역국처럼 맛이 좋아서 꼭꼭 얼려 두었다가 자식들에게 주지.” 겨울이면 춘천에 살다가 봄철 나물 뜯으러 온다는 할머니는 인심 좋게 된장국 한 그릇을 퍼준다. 그 맛이 얼레지 묵나물보다 훨씬 좋아서, 슬그머니 욕심이 생긴다. 뜯어오지 못한 것을 후회할 판이다.
그때 이웃 할아버지가 됫병을 들고 나타나 술잔을 돌린다. 자그마한 부엌에 옹기종기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화기애애하다. “얼레지는 귀한 나물이라서 호텔이 아니고서는 먹기가 힘들지. 말려 팔면 제법 비싸게 팔리는 산나물이야. 얼레지는 1주일 정도 후면 끝이 나고 그 다음에도 참나물, 곰취, 전우치 등 두 달 반 정도는 나물 작업을 해야 해.”
힘겨운 산나물 뜯기 작업 후에, 푸성귀로 배를 채우면 얼마나 허기질까 할 즈음 아랫집에서 전화를 한다. 이 집은 더 풍성하다. 고기에 직접 재배했다는 표고버섯과 막 뜯어 낸 곰취와 참나물, 산마늘 쌈이 차려져 있고, 여름까지 먹는다는 묵은 김치와 된장, 굵은 소금장이 있다. 막 지은 밥과 꽁치조림까지 곁들여지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계속 찾아든다. 할일 없는 겨우내 모여 술잔치를 벌였다는 사람들.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면서 밤이 이슥할 때까지 술판을 벌인다.
이 지역에서 나물은 이들의 생계수단이고, 나물 철이 끝날 때까지 산길 오르락내리락 하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사람은 이제 지긋지긋한 작업이 되지만 어쩌다 한 번 들르는 여행객의 눈에는 행복하기만 하다. 아직까지 이런 곳이 남아 있다니. 이것을 관광상품화한다면 덜 힘겹게 살 텐데 말이다. 돌아오는 길, 유난히 하늘에 떠 있는 달빛이 환하다.
주소 홍천군 내면 통바람길
찾아가는 방법 영동고속도로 → 속사IC → 운두령 넘어 창촌 방면으로 난 56번국도 이용 → 창촌 → 구룡령 가는 길에 우측 명계리로 들어가는 446번 지방도로 우회전. 다리 앞에서 왼편 비포장 길로 좌회전 → 응곡마을
맛집과 숙박정보 응곡마을 통바람 산장(011~9795~1684)에서는 식사와 민박이 가능하다. 또 가는 길목인, 이승복 기념관 주변에 운두령횟집(033~332~1943, 송어회, 용평면 운두령로 825), 장수촌(033~332~7419, 토종닭, 용평면 운두령로 286)이 괜찮다. 삼봉 자연휴양림(033~435~8535~6, 홍천군 내면 삼봉휴양길 276)이나 자연속으로(033~334~0770, www.naturalpension.com, 용평면 운두령로 109-49)와 같은 펜션에서는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
여행포인트 얼레지 채취는 올해 끝이 났고 계절에 맞는, 또 다른 산나물이 싹을 틔울 것이다. 여행객들은 필요하다면
주민들에게서 사오면 될 일이다.
△글ㆍ사진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춥고 예쁜 여자가 많을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을 간다고 했을때 지인들이 던진 러시아에 대한 이미지는 비슷했다. 어떤 이는 “유튜브를 보니 러시아 남자들이 총 들고 설치더라”며 치안을 조심하라고도 했다. 예쁜 여자가 많은 것은 맞는 말이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틀렸다. 12월 중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온은 영하 1도 정도. 당시 서울이 영하 7도~영하10도 사이였으니 서울보다 오히려 덜 춥다. 치안에 대해서도 몸 사릴 정도는 아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10년 정도 이곳에 머물면서 외국인이 치안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쨌든, 10시간 가까운 비행 끝에 만난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의 총평은 ‘아주 매혹적’이라는 것이다.
◇ 206년간 러시아의 수도였던 도시
1701년 표트르 대제는 유럽 순방을 끝내자마자 핀란드 만과 네바 강이 만나는 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암스테르담은 작은 섬과 섬 사이를 다리로 연결하고 열악한 환경을 거꾸로 이용해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크게 발달한 도시였다. 표트르 대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의 암스테르담으로 만들려 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유럽에서 오랫동안 러시아에 대적했던 스웨덴과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척박한 오지였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왕족들의 반대는 당연했다.
네바 강에 떠 있는 42개의 섬에 도시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새로운 도시건설은 성공적이었다. 1712년에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왔다. 1918년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기기 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고, 위대한 문학가와 예술가를 탄생시킨 문화의 도시로 성장했다. 흔히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유럽으로 향하는 러시아의 창이라고도 한다.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고전주의·바로크·모던 등 온갖 양식의 건물들로 가득한 도시 자체가 박물관과 같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 300년의 역사 그대로, 넵스키 대로와 겨울궁전
공항 도착 후 20분 정도를 달리면 넵스키 대로다. 황제의 거처였던 에르미타주 겨울궁전을 시작으로 40년의 공사 기간에 10만명이 죽어간 도시의 랜드마크 성 이삭 성당,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자리에 세워진 그리스도부활성당(피의 사원), 94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반원형의 회랑에 늘어선 카잔성당까지 대로를 따라 이어져 있다. 놀라운 것은 가이드의 설명대로라면 넵스키 대로의 꽤 큰 건물들은 대부분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48년에 문을 연 백화점 파사쉬, 1873년에 영업을 시작한 유럽 호텔, 엘리세예프스키 형제의 고급 상점, 카페, 고급 레스토랑들과 과자점, 수많은 고서점과 골동품점, 한때 50여 개에 다다랐던 은행들, 극장, 도서관과 궁전, 대학 등이 이곳에 있다. 1915년에 세워진 건물이 가장 마지막에 지어진 것으로, 현재의 넵스키 대로는 제정 러시아 시절 모습 그대로다. 여름이면 넵스키 대로에선 지나가는 여행객들에게 관광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연일 확성기를 들고 광고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단다.
일부 관광객들이 이곳을 보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오기도 한다는 곳이 에르미타주 미술관이다. 제정러시아 황궁이며 황제의 평소 집무실이 되었던 ‘겨울궁전’(冬宮)을 포함해 4개의 건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곳은 그 자체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와 문화의 상징이다.
현재는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이곳은 38점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렘브란트 컬렉션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수집한 예술작품 270만점이 5개의 건물에 보관돼 있다.
수 세기에 걸쳐 러시아 왕가에서 수집한 그림과 조각, 보석 등이 전시되고 있는데 바티칸, 루브르, 대영 박물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수준 높은 작품이 가득하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보관된 작품을 다 감상하자는 욕심은 금물이다.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겨울궁전은 건물의 둘레만도 2km나 되고, 실내는 1050개에 달하는 방과 120개나 되는 계단, 그리고 1100개에 이르는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술관 그림 중에는 배경이 어두운 초상화가 많다. 오늘날의 사진이 사실적 그림으로 표현된 것이다. 나폴레옹과 맞서 승리를 거둔 국가적 자부심이 묻어나는 작품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 종교적 색채가 짙은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한 번은 꼭 여행지로 와야 할 사람은 종교인이다. 특히, 크리스천이 이 도시에 오면 미술품, 혹은 건축물을 통해 ‘은혜’를 많이 받을 듯하다. 피의 사원에 있는 4개의 모자이크를 보면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책형’, ‘십자가를 벗는 예수’, ‘성림강하’ 등 예수부활의 성경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데카브리스트 광장에 우뚝 서 있는 상트 이사크 성당도 대표적인 종교 건축물이다. 1818년 공사를 시작한 지 40년 만에 완성된 상트 이사크 성당은 112종의 돌로 지어졌고 1만 4000명이 동시에 미사를 올릴 수 있다. 이 성당에서 반드시 가 보아야 할 장소는 전망대다. 전망대에 서면 황금으로 도금된 돔과 거대한 조각을 볼 수 있다. 거대한 돔은 금으로 도금되어 있는데, 자그마치 3만 3000kg의 금이 쓰였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경도 감상할 수 있다.
이사크 성당 전망대 오르기에 지친 몸이 쉴 곳은 오페라 극장이 제격이다. 저녁시간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새로운 주인공이 ‘지젤’로 데뷔했다. 마린스키 극장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제일의 발레, 오페라 극장으로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젤’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유명 연예인 이상으로 특별한 존재다. 평일 저녁도 만원 관객이다. 관객들은 발레리나의 우아한 몸짓에 탄성과 박수가 연이어 나온다. 조그만 몸짓, 숨소리도 함께하는 공연문화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배우고 익혀왔기 때문이다. 겨울, 하루 해 뜨는 시간이 6시간일 정도로 해를 볼 시간이 거의 없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거의 무표정하지만 공연을 볼 때만큼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가기 위해서는 최소 9시간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한다. 러시아 화폐인 루블 가치가 떨어져 한국 돈 1만원으로도 요긴하게 쓸 수 있다. 한국 사람으로서는 입맛에 맞는 식당을 찾기가 힘들어 음식이 예민한 사람은 장아찌나 고추장 챙기기는 필수다. 여행 동행자들은 비슷한 말을 했다. 긴 비행시간과 음식문제만 아니라면 꼭 다시 오고 싶은 도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