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시어머니와 장모, 어느 회사의 CEO. 미혼 여성은 미혼 여성대로, 기혼 여성은 기혼 여성대로, 대한민국 중년여성들은 각자 주어진 책임과 의무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바쁜 일상 속에서 여자로서 가졌던 꿈과 정체성을 잃어가기도 한다.
“나와 함께 늙어가자. 가장 좋을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인생의 후반, 그것을 위해 인생의 전반이 존재하나니.”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쓴 시 ‘랍비, 벤 에즈라’의 한 구절이다. 통념과는 달리 인생의 절정기가 인생 후반에 온다는 이 구절은 나이 듦과 잘사는 법에 대해 고민하는 중년 여성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꽃중년은 걸어온 길에 대한 자부심과 다른 길을 향한 갈망, 성취감과 상실감, 자신감과 회의, 체념과 희망, 흥분과 무력감 등이 동시에 찾아오는 시기다.
여전히 중년은 기회가 주어진 가능성의 시간이다.
한평생을 자식과 남편, 가정을 위해 살아온 사람의 열정과 역량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인간의 에너지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솟구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바퀴가 돌다 보면 어느 한쪽이 부서지고 닳게 마련. 무엇이 더 필요한지, 버릴 것은 없는지 구석구석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 멈추고 쉬어야 한다. 자신을 내어주는 일과 내게 필요한 것을 재충전하는 것 사이에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 시기가 바로 50대, 60대, 70대인 것이다.
관계 맺기에 로그인을 잘해야 할 꽃중년중년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고립’이다.
나이가 들면서 여성들은 기존의 외부 인맥이 끊어진다.
개인적인 인맥을 유지하기에는 이사, 가사, 육아 등등 주어진 일들과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부분에 대하여 가족들에게서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다. 가족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꾸려지는 공동체다. 그러나 여성들은
어느 순간 사람은 간 데 없고 역할만 남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엄마로서의 역할, 아내로서의 역할. 자신이 갖고 있는 개인적인 감정과 생각은 그 ‘역할’들 속에 파묻히게 되기 때문이다.
남편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맺은 가장 소중한 인연(人緣)
나이 들수록 소수정예 친구와 좁고 깊게 사귄다. 부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다. 한 심리학 교수는 사람은 타인의 생각을 해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돈을 벌수록 남을 이해하는 능력이 저하된다고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이유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64세 최인순 씨는 “남편이 저와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제가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멈추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요. 남편 입장에서 보면 제가 정말 쉬지 않고 말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고요. 게다가 남편은 제가 하는 모든 말을 ‘수다’라 칭하며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여기기도 해요” 라며 솔직한 심정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여성의 인간관계는 어디서부터 올까? 바로 ‘말’이다. 여성이 대화를 하는 가장 큰 목적은 ‘상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다. 자신의 의견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게 주목적인 남성과 달리, 여성은 내 기분을 상대방과 함께 나누고 공감을 얻기 위해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즉, 대화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여성들에게 수다 금지령을 내린다면 많은 우울증 환자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여자가 말이 많다며 인신공격하는 남자는 더 이상 신사가 아니다.
어떤 남편들은 아내가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래서 결론이 뭔데?”라고 말을 끊는다. 길어지는 대화에 남편은 점점 지루해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은 용건만 간단히 말하기보다는 최근에 재미있고 슬픈 일 등 새로운 정보를 말하면서 상대방이 공감해주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심정을 디테일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더 잘 나누기 위해 여성은 대화를 시도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남성의 뇌는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남편은 결과가 중요하지만 아내는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남녀의 대화 속도는 절대 같을 수가 없다. 아내는 남편에게 어떠한 결정을 해달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저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내는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그냥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응대만 해줘도 아내는 행복해한다.
그렇다. 부부클릭 전문가 소장은 “여자는 감정에 매우 민감하다. 그래서 감정이 좋은 사람과의 관계와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가 확연히 달라진다. 여자들이 남성에 비해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단계”라고 분석했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있어 수다는 단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매우 중요한 수단인 것 같다.
남편 아닌 다른 인연과의 관계 맺기
가족 아닌 관계를 잇고 싶은 여성들은 사는 지역에서, 혹은 종교 단체에서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되살리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렸을 적에 만난 친구들이 평생 친구가 되는 이유는, 서로를 판단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솔직히 보여줄 수 있는 나이 때에 만나서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만나게 된 인연들은 서로를 솔직하게 보여줄 수 없을 뿐더러, 보여준다 해도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다. 가족, 그리고 가족 외 관계에서 부딪히게 되는 이 모든 상황들은 중년 여성에게 고립감을 느끼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년 여성이 관계를 확장하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건 어려우니 현재 있는 관계, 그중에서 정말 내가 믿어볼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솔직하게 내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솔직하게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지 못하니 자꾸 가리게 되고 서로 오해가 쌓이고 친해졌어도 왠지 공허하게 된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라는 것이다.
그게 가능한 기존 관계 중에서는 가족, 그중에서 우선 배우자를 들 수 있다. 중년이 되면 남성들은 남성 호르몬이 내리막길이고 사회적으로 특별하게 잘나가는 사람이 아니면 사회가 아닌 가족과 보낼 기회가 많아질 수밖에 없어서 아내와 같이 늙어간다는 걸 보다 현실적으로 인지하게 된다. 반면 여성들은 나이가 들면서 시댁과 남편 눈치를 안 봐도 되는 시점이 오고, 그렇게 되면 조금 더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중년 여성들이 조금만 마음을 열고 남편을 영혼의 동반자로 생각해서 솔직한 대화를 하면 관계 회복이 가능해진다. 자녀들과의 관계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재설정할 수 있다. 이미 장성한 아이는 어른 대 어른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족은 서로를 믿을 수는 있지만 그간 살아온 시간과 경험들 때문에 너무 서로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서드 에이지 여성은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온 오랜 친구들에게 “우리 좀 더 솔직해지는 게 어떠냐”라고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면서 관계 개선을 추구하는 방법도 있다.
강현식 누다심심리상담센터 대표가 이런 방법도 제안했다. “지역 문화센터나 집단상담을 진행하는 곳에 가는 방법이다. 그곳에 가서 서로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야기하면 마음이 풀리고 인맥이 넓어지기도 한다. 잘 보이려 애쓰지 말고, 솔직해져 보라.” 이 모든 방법들에서 중요한 것은 숨기지 않고 솔직해지려는 자신의 다짐이다. 그 다짐이 없으면 변화는 찾아오지 않는다고 강 대표는 강조했다.
중년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
특히 강 대표는 “우울증, 울화병, 쇼핑중독 현상은 모두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뭔가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그렇게 몰두한다고 해도 공허감이 채워지지는 않는다. 마음의 공허함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만 해소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어떤 여성들은 그러한 공허감을 해소하기 위한 관계를 맺을 때, 남편이나 자녀 같은 가족과의 관계 개선은 뒤로 미룬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그 여성들은 가족 안에서 그동안 관계가 아니라 역할과 희생만을 했기 때문이다. 중년 여성들은 그토록 쉽게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밖에서 관계 개선이 잘 된다고 해도 가족과의 관계 회복이 이뤄지지 않으면 공허감은 채워지지 않는다. 결국 돌아오게 되는 곳은 집이고 그 안에는 가족이라는 반드시 만날 수밖에 없는 관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중년이란 연령층이 이처럼 주목을 받은 적이 있을까? 중년은 생물학적으로 꺾이면서 신체적 노화가 본격화되는 시기다. 여기에 조기 퇴직 등으로 사회경제적 위기와 불안이 가세하는 시기다. 위기의 중년에 주목해온 사회학자 김찬호는 중년에 부딪히는 난감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오로지 앞으로만 내달려왔건만 인생의 절반에 이른 가파른 고비에서 이정표가 갑자기 사라진다. 앞길은 온통 오리무중, 가속 페달을 밟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속도를 늦출 수도 없다.”
중년은 이렇듯 위기와 불안을 표상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찬미되고 있다. ‘꽃중년’ 등 중년을 지칭하는 수식어는 중년을 과거와 다른 ‘새로운’ 세대로 호출한다. 유례없는 일이다. 지금의 중년담론은 이렇듯 두려움과 찬미, 불안과 영광의 양면을 지닌다.
그동안 세대담론은 늘 청년의 몫이었다. 청년은 시대의 아픔이자 시대정신의 표상이었다. 청년은 수구와 기득권의 저항에 맞서는 변화를 상징했고 펄펄 끓는 청춘은 그 자체로 사회의 ‘희망’이었다. 반면 중년은 노년과 청년 사이에 끼어 묵묵히 자식 뒷바라지나 하고 부모 부양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특별한 자기 정체성을 갖기 어려운 연령층이었다.
중년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40대부터 50대 초반까지가 생물학적 중년에 가장 가깝다. 이 연령대 중 상당부분이 80년대 대학을 다녔거나 그 시기의 직·간접적 문화권에 있었던 386세대와 겹친다. 주지하다시피 이들이 청년일 때는 학생운동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이끌었다. 이들이 사회에 진출한 시기는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로 별다른 스펙과 준비 없이도 사회에 진출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20대에서부터 30대까지 한국사회의 변동기에 정치적, 사회경제적으로 열린 기회를 맘껏 누릴 수 있었고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다. 지금의 중년담론은 80년대 청년담론의 주역이었던 386세대가 중년이 된 시대, 이들을 주연으로 다시 호출하는 담론인지도 모른다. 이미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으로 이 사회의 주류가 되거나 기득권이 된 386세대는 이렇게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지평 위에서 중년을 조망할 때만이 중년에 대해 제대로 접근할 수 있다.
◇ 중년여성, 당당한 주체로 성장한 세대
현재 중년담론의 가장 큰 축은 중년에 맞닥뜨리게 되는 신체적, 사회경제적 위기에 대한 것이다. 중년의 위기와 불안은 여러 방면과 층위에서 엄습한다. 일자리 불안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 불안한 노후와 건강 문제, 그리고 자식세대인 청년층의 불안도 지금의 중년층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중년의 위기와 불안에 대한 담론은 대체로 남성을 염두에 두고 전개된다. , 등과 같이 중년남성을 염두에 둔 힐링서는 도처에 깔려 있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정작 지금의 자신은 초라하고 지질해져 버린 이들에게 바치는 위로와 토닥임이 주 내용이다. 물론 ‘꽃중년’ 등과 같이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문화적으로도 세련되며 외모의 측면에서도 충분히 매력적인 남성들이 등장해 갈채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극히 소수의 예외적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중년의 위기를 담고 있는 담론에서 중년여성은 비켜서 있다. 중년여성에 대한 서술은 다른 결을 지닌다. 기존의 중년여성은 육체적으로 퇴화한 ‘여성’ 아닌 ‘여성’으로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젊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중년여성은 그냥 ‘아줌마’일 뿐이었다. 하지만 의학의 발달로 인해 아름다움에서 젊음이 차지하던 절대적이고 독보적 위치가 약화되고 있다. 경제적 여력이 뒷받침된다면 의학의 힘을 빌려 얼마든지 시간을 멈추거나 심지어 되돌릴 수도 있다. 여기에 내면의 성숙미와 우아함까지 가세할 경우 20대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카피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중년여성은 과거의 중년여성과 다르다.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중년여성이 청년이었던 80년대와 90년대, 성장의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시기는 우리 사회 전반에서 민주주의가 본격화된 시대였다. 여성들도 자연스럽게 성평등 의식을 받아들이면서 남성과 대등한 여성으로서의 주체성, 가부장제에 속박되지 않는 ‘자아’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오로지 아내로서, 엄마로서 ‘희생’해온 엄마 세대와 달리 지금의 중년은 이미 청년시절부터 여성으로서의 주체성을 고민해온 것이다.
중년여성들이 청년이었던 시기, 한번쯤은 접했을 공지영의 소설 는 가부장제 문화와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한 반감과 아울러 여성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보여준 상징적 작품이다. 가족의 행복, 자식의 행복에 앞서 하나의 주체로서 자신의 삶과 행복을 고민하기 시작한 세대, 그것이 바로 지금의 중년여성이다.
◇ 문화와 소비의 주체
문화의 영역에서 중년여성은 중요한 향유층이자 소비 주체다. 이들은 성장기였던 80년대와 90년대 대중문화를 즐기면서 문화적 감수성을 습득했다. 취미와 여가도 적극적으로 즐기며 자신에 대한 투자에도 인색하지 않다.
엄마 세대들에게서 종종 나타나곤 했던 ‘여고 동창회’에서의 과시적, 사치적 소비와는 달리 그 소비는 ‘나’라는 자아, 주체를 향한다. 1968년생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는 중년여성들을 극장으로 대거 불러냈다. 극장을 가득 메운 중년여성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에 환호했고 공감했다.
등 중년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는 불륜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었지만, 한 여성이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주체로서 일어나는 과정에서 ‘불륜’을 설득력 있는 소재로 삼았다. 많은 중년여성들이 주인공 김희애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열광했다.
최근 중년여성의 불륜이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가 잦은데, 소위 ‘막장’ 성격보다는 여성이 주체로 일어서는 과정에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한 소재로 활용되는 측면이 적지 않다. 한 드라마 평론가의 분석처럼 “결혼이란 제도로 자기 정체성과 삶의 결정권을 잃어버리는 여성이 자아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그 발단을 만드는 자극제로서 ‘불륜’만큼 강렬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 행복의 주체로서 중년여성
행복에 대한 조사를 보면 특이한 대목이 있다. 40대 중년 중에서도 남성과 여성 간 차이가 극과 극에 이른다는 점이다. 한국심리학회가 2010년 발표한 한국인의 행복지수에 따르면 전 연령층 중 40대 남성이 가장 불행했고 40대 여성이 가장 행복했다.
이 조사에서 40대 남성들은 다른 집단과 비교할 때 자신의 성취·성격·건강 등과 같은 개인적 측면은 물론 인간관계·소속집단과의 관계와 같은 사회적 측면 모두에서 만족 수준이 가장 낮았고 삶에 흥미를 느끼는 정도도 전 연령층 중 가장 낮았다.
반면 가장 행복한 집단인 40대 중년여성은 긍정적 정서면에서 모든 연령집단을 통틀어 가장 높았다. 40대 중후반이면 자녀들이 어느 정도 성장해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여유가 생기고 경제적으로도 안정기에 이르는 시기다. 40대 여성의 높은 행복도에는 이러한 점도 일정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중년여성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행복을 갈망하고, 고민하며, 일상에서의 실현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바라는 행복은 다다를 수 없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충분히 실현가능한 소박한 것에 가깝다. 따뜻한 차 한 잔의 여유, 지지와 공감을 할 수 있는 친구, 기댈 수 있는 이웃 등. 이처럼 중년여성의 행복은 외부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직접 찾고 얻어낸 것이다. 행복에 이르는 길과 방법을 아는 중년 여성, 그래서 이들은 행복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다.
◇ 행복의 조건과 장애물
중년여성들에게 행복의 조건은 단순하다. 이들은 경제적 안정, 사회적 성공 등과 같이 이루기 어려운 세속적인 욕망을 좇기보다 일과 여가의 조화, 공동체에 대한 헌신 등 다른 길을 찾고 있다.
여가와 놀이는 중년여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핵심 요인이다. 여가를 통해 자신을 성찰할 여유와 힘을 얻게 되고 삶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다. 이들은 문화적 소비와 자신에 대한 투자에 인색하지 않다.
그동안 가족에 헌신하느라 잊고 지냈던 ‘자아’를 돌아보고 친구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여행을 통해 지나온 삶을, 그리고 함께 나이 들어감을 나누고 공감하는 중년여성들은 도처에 있다. 여기에는 한비아, 김남희 등 여성 여행 작가들의 기여가 적잖다. 자유롭게 자아를 찾아 떠나고 여행을 통해 당당하고 멋지게 성장하는 모습은 중년여성들의 로망이다. 이들은 지침 없는 성장과 변화를 꿈꾼다.
공동체에 헌신하는 중년여성들도 이전과 달라진 변화다. 가족 안에 갇힌 시선을 외부로 돌려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는 중년여성이 늘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분노한 앵그리맘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차고 나와 부당함을 제기하고 변화를 외칠 때, 이들의 존재감은 그 누구보다 묵직하다. 이들의 사회적 지평의 확대는 정치사회적 사안에서도 남편이나 자식에게 속박되지 않고 주체로 서고 있음을 시사한다.
중년여성의 달라진 위상은 일터에서도 확인된다. 임원 및 관리자급 중년여성들이 많아졌다는 양적인 측면을 넘어 질적인 측면에서 이들은 과거와 다른 존재감을 뿜어낸다. 공감능력, 수직적 위계가 아닌 수평적 연대, 위로와 치유 능력 등은 갈수록 팍팍해져가는 사회 속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해진 덕목들이다. 공감과 배려를 갖춘 여성의 존재는 그 자체로 소중하며 힘이 된다. 수직적 위계 속에서 가파르게 승진하는 사람이 아니라 동료와 교감하며 함께 가는 법을 체득한 중년여성이 존중받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
중년여성들의 아킬레스건은 무엇일까? 역시 자식이다. 이들의 주체성과 자아가 자식 앞에서는 무력해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헬리콥터맘’과 같이 자녀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고 엄마 마음대로 설계하려는 경우 불행한 결과는 예정되어 있다. 이는 자녀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자녀를 통해 대리충족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식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는 분리 불안증은 중년여성이 넘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이다.
◇ 중년여성, 새로운 ‘이륙’이 준비된 층
인생의 절정을 누리고 있는 그들의 삶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원칙은 중년의 정체성 확립, 일과 여가의 조화, 용감한 현실주의와 성숙한 낙관주의의 조화, 자신과 타인에 대한 배려의 조화, 진지한 성찰과 과감한 실행의 조화, 자신만의 자유와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의 조화였다. 이는 중년여성의 삶 속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항목들이다.
중년은 착륙의 시기가 아니라 또 다른 ‘이륙’이 가능한 시기라고 한다. 역사상 어느 세대보다 행복을 갈망하고 실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집단, 개인의 행복을 넘어 좋은 삶에 대한 고민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 집단이 바로 지금의 중년여성이다. 착륙이 아닌 새로운 이륙을 위해 중년여성은 이미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다.
>> 글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hgy4215@hani.co.kr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회학과를 다녔고 여론분석전문기관 한국사회여론연구소를 거쳐 지금은 한겨레신문사 경제사회연구원에서 사회조사센터장을 맡고 있다. 사회적 변화와 트렌드를 여론이란 프리즘으로 분석하는 일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한겨레신문과 한겨레21에서 정치사회적 이슈는 물론 세대와 문화 등을 주제로 정기적으로 칼럼을 쓰고 있다.
지금 우리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고령사회’는 인류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지(未知)의 세계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이토록 많은 노인들이 동시에 생존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행여 아들 며느리로부터 정성스레 효도 받던 옛날을 그리워한다면 그건 시대착오적 환상에 가까울 것이다. 어차피 장수(長壽)가 축복으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에,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았던 소수의 양반층에서나 가능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고령화 사회를 향해 첫발을 내디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노인이란 부양의 대상이자 사회적 부담의 온상이란 부정적 표현이 주를 이루었고, “부모님을 모신 마지막 세대요, 자식으로부터 버림받는 첫 세대”란 자조적 표현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회색빛 실버(silver) 세대 대신 ‘황금빛 골드(gold) 세대’란 애칭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날이 갈수록 그윽한 풍미를 자랑하는 ‘와인 세대’란 별칭도 얻게 되었다. 여기서 와인(wine)이란 현명하게(wisely) 인생을 하나로 엮어내는(integrated) 신(new) 노년(elderly)의 첫 글자를 딴 조어(造語)라 한다.
오늘날 생애주기 이론가들은 성인 이후의 나이 듦을 향해 세심한 관찰과 흥미진진한 해석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삶의 단계를 유년기, 사춘기, 오디세이기(성인으로 진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음을 강조하기 위해 고안된 용어), 성인기, 은퇴 후기(後期), 노년기, 이렇게 6단계로 업데이트하기도 했다. 또, 성인발달과정에 애정을 쏟아온 윌리엄 새들러는 마흔 이후 30년을 ‘서드 에이지’라 명명하면서 이제 “안전벨트를 매고 착륙할 준비를 해야 하나 보다” 하고 인생을 관조하려던 중년을 향해, “다시금 새 타이어(re-tire)로 갈아 끼우고 이륙할 준비를 하라”는 충고와 더불어, 20세기 부모님 세대의 경험 속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신선한 길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노후의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난 요즘 부동산, 펀드, 주식 투자 등 경제적 준비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사회적 상실감을 딛고 정서적 성숙함과 심리적 안정감을 위한 준비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충고를 들려주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일본에서의 정년 65세란 인류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연령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고, 독일에서 은퇴를 65세로 못 박았을 때는 연금 수령 자격이 있는 모든 이들이 그 이전에 세상을 떠날 것으로 가정했다 한다. 결국 인간은 죽을 때까지 몸을 움직여 의미 있는 활동을 해야 한다는 암시가 담겨 있는 게 아닌지.
우리가 특별히 서드 에이지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 시기가 인생의 쇠락기가 아니라 2차 성장 및 성숙이 이루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새들러가 만났던 주인공들은 ‘중년의 위기’란 허상에 사로잡혀 상실과 허무감에 허우적대기보다, 오히려 역동적이고 활기찬 생을 즐기면서 성공적으로 라이프스타일 이주(移住)를 실천하고 있었다 한다.
일례로 갱년기를 지난 여성들이 삶의 재충전을 위해 스포츠에 도전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관찰되었는데, 이들 여성이 선택하는 스포츠는 번지 점프, 산악자전거, 록클라이밍 등 예상외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거친 종목들이었다고 한다. 50대 후반 여성들은 거친 스포츠에 도전하면서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았음은 물론 삶의 에너지를 풍성하게 충전하게 되었음을 고백하였다.
뿐만 아니라 은퇴 이후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도전하거나, 숙련된 기술을 습득하는 데 성공한 경우는 우리 뇌 내부에 이전엔 없던 구조가 만들어지는 기적적 현상도 관찰되었다고 한다.
물론 서드 에이지를 지나가는 과정은 때론 복잡하기 그지없는 미로를 통과해야만 하는 상황도 기다리고 있고, 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때도 무수히 많은 데다, 한 번에 풀기 어려운 역설적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난관에 봉착하기도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삶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향해 성큼 발을 내디뎌보는 것이란 조언은 우리에게도 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서드 에이지의 ‘위기의식’과 ‘도전’ 사이에서 긍정적 정체성 확립하기, 둘째 ‘일’과 ‘쉼[休]’의 조화를 이루기, 셋째 ‘자신에 대한 배려’와 ‘타인에 대한 배려’의 균형을 유지하기, 넷째 ‘현실주의’와 ‘낙관주의’ 사이에 다리를 놓기, 다섯째 ‘진지한 성찰’과 ‘과감한 실행’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성숙한 선택지를 찾아가기, 여섯째, ‘개인의 자유’와 ‘타인과의 긴밀한 관계’를 동시에 실현하기. 이들 6가지 과제 속엔 언뜻 보면 서로 반대되는 의미로 들릴 수 있는 두 요소들 간의 조화와 균형의 필요성이 설득력 있게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직장과 가족을 책임지고 돌보느라 정작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돌보는 법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세대를 향해, 서드 에이지를 지나며 필히 수행해야 할 과제가 바로 ‘자신을 배려하는 법’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어 오면서 자신의 존재는 잠시 묻어둔 채 쫓기듯이 살아온 한국의 중·장년들에게 새삼 눈시울을 젖게 할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상자에 갇힌 듯한 직장 생활을 답답해하면서도 정작 이로부터 탈출했을 때 오는 해방감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의 지평을 확대하면서 일과 쉼의 조화를 꾀하라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구조조정 및 정리해고가 일상화된 삶 속에서 늘 불안감에 허덕여야 하는 우리들을 향해 유연한 생각의 미덕을 일깨워주는 것 같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생(生)에 관해 진지하게 성찰해 온 경험이 빈곤한 우리네로선, 더 늦기 전에 지금부터 30년 이후의 삶을 그려보며 상상의 기쁨과 도전의 의욕을 다질 수 있길 소망해본다.
>>글 함인희 (咸仁姬)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에모리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 , 등이 있다.
홍역과 태풍으로 두 아들을 잃은 큰댁 최막이는 대를 잇기 위해 작은댁 김춘희를 집안에 들이게 된다. 본처와 후처, 이보다 더 얄궂은 인연이 또 있을까? 그러나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이제는 마지막을 함께할 유일한 동반자가 된 두 사람. 영화 는 모녀처럼 자매처럼 때론 친구처럼 지내온 두 할머니의 아름다운 동행을 그린 영화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가 영화로 탄생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또, 제작 과정의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영화를 연출한 박혁지 감독은 2009년에 모 방송사의 휴먼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만난 두 할머니가 가슴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 없는 두 여자가, 남편이 죽었는데도 왜 굳이 한 지붕 아래 같이 살고 있을까?” 그래서 2011년 겨울 두 할머니를 다시 찾아뵙고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외딴 시골에 사는 어르신들의 일상은 지극히 평범하고, 두 분 모두 연로하셔서 촬영 기간의 대부분은 ‘기다림’의 시간이었죠. 그날그날 두 할머니의 일정을 파악하고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직관적인 판단을 믿으면서 촬영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꼬박 2년 만에 촬영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하 )와 두 작품의 프로듀서로서 두 영화를 비교한다면?
의 부부와 의 두 할머니는 사뭇 다른 관계입니다. 의 부부는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76년을 함께 했지만, 의 두 여자는 한 남자의 두 아내로 46년을 함께 살았죠.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관계’ 속에서 살고 있죠. ‘가족, 친구, 동료, 이웃 등, 나는 이들과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김춘희, 최막이 할머니의 삶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인생의 교훈이 있다면?
시대가 그러하여 맺어진 두 여자의 얄궂은 인연은 대단히 일방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두 여자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우며 서로를 오롯이 지켜냈죠.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대답을 춘희, 막이 할머니는 두 분이 함께한 시간으로 대신 말하고 있습니다.
노년의 삶을 주제로 한 영화가 세대를 초월하는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노인은 모두 ‘선생(先生)님’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아온 분들이죠. 험난한 질곡의 역사를 거쳐 온 이 땅의 ‘선생님’들의 삶에는 우리가 갖지 못한 인생에 대한 혜안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팍팍하기만 한 이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순수함과 맑은 정신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중년 관객들이 보면 더 감동하게 될까요?
본처와 후처에 대한 영화이지만,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시골에 홀로 사는 평범한 할머니들입니다. 그래서 특히 시골에서 나서 자란 대부분의 중년 관객들은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진한 향수와 추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춘희, 막이 할머니들처럼 본처와 후처가 함께 사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죠. 가족이나 이웃에 이런 기억을 가진 분들이라면, 오히려 이 영화가 불편하지 않고 훨씬 더 감동적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도 부부가 함께 또는 자녀들과 함께한다면 두 할머니의 인생을 통해서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 한경수 프로듀서
아거스필름 대표, 한국독립PD협회 글로벌전략위원장
다큐멘터리 영화 , , 프로듀서
좀 과장해 온 방송이 ‘먹방(먹는 방송)’이고 ‘쿡방(요리 방송)’이다. 정규 편성표를 가득 점령한 본방송에, 채널을 가리지 않고 거의 무한 재생되는 재방송까지 더하면 브라운관에서 요리하고 먹는 장면이 끊이지 않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덕분에 이른바 스타 셰프들이 연일 미디어의 중심에서 활약하고 있다. 어떤 이는 만능 요리 비법을 선보이며 사람들을 주방 안으로 끌어들이고, 또 어떤 이는 허세 가득한 동작과 신출귀몰한 요리 기술로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미디어의 중심에 선 이들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심영순, 홍신애 등 여성 요리인 또는 푸드스타일리스트들의 활약이 돋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허셰프’라는 별칭으로 사랑받는 최현석을 비롯해 샘 킴, 이찬오, 레이먼 킴 등 최근의 요리 유행을 이끄는 주동력은 역시 남성들이다.
하필 지금에 이르러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이는 “인간의 대표적 본능인 ‘식탐’을 자극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지나치게 단순한 분석이 아닐까 싶다. 식탐을 자극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최근 들어 갑작스레 만들어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요리하는 남성이 여성에게 성적으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라는 추측 역시 마찬가지. 요리 잘하는 남성이 여성에게 인기가 많은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최근 들어 유독 요리 유행이 도드라진 데는 분명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중심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옮아가는 도중에 필연적으로 생겨난 현상’이라는 분석은 귀 기울일 만하다. 남성의 도움 없이도 생활할 수 있게 된 여성들이 강한 남성보다는 모성적 남성을 원하면서 요리 잘하는 남성의 인기가 더욱 높아지고 더불어 남성들이 요리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는 주장이다.
가족 해체 등의 사회 불안이 이른바 ‘집밥 열풍’의 주요인이라는 설도 설득력을 갖는다. 먹고살기 힘들어지면서 남성들이 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을 때와 같은 편안함을 갈구하게 됐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복고주의’라는 견해도 있다. 원시사회 때부터 임신 및 육아가 여성의 몫이었던 반면, 식량 획득과 요리는 남성의 몫이었으므로 최근의 유행은 과거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성적 분업 이론(남성과 여성의 생리학적 특징의 차이에 따라 일이 나뉜다는 학설)에 근거한 주장이다. 개인적으로는, 돌아가려는 시기와 현재 사이의 간격이 터무니없이 멀어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이런 맥락과 비슷한 주장들이 최근 유행과 더불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요리에 진실로 그리워하는 것이 있다
더러는 지겨울 만도 하다. 튀기는 소리, 지지는 소리, 끓는 소리에 맛있다는 호들갑까지 더해진 천편일률적 요리 방송이 시청자들에게 쾌감만 선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백과사전이 ‘미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저술가이자 환경운동가’라고 설명하는 마이클 폴란은 저서 에서 현대인들이 직접 요리하지 않고 텔레비전 등 미디어를 통해 요리에 심취하는 현상을 ‘요리의 역설(Cooking Paradox)’이라 지칭했다. 미디어의 영향으로 요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잘난 듯 떠들어대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요리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폴란은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 가정에서 식사 준비에 필요한 시간은 하루에 고작 27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또 다른 저서 에서는 “우리는 음식의 홍수에 빠져 있지만 정작 ‘진짜 음식’은 드물다. 슈퍼마켓 선반에서 ‘진짜 음식’이 사라지고 ‘그럴싸한 음식’을 가장한 가공식품이 빼곡히 들어찼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최근 요리 유행의 핵심은 손쉬운 요리, 값싼 요리, 다가가기 쉬운 요리다. 폴란은 그런 요리들을 떠받쳐줄 기둥이 그다지 깨끗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라고 다를 리 없다. 음식평론가 황교익 씨는 우리나라 특유의 ‘치맥’ 유행을 ‘값싼 육류를 제공하려는 정부와 산업계의 노림수가 대중에 통한 결과’라고 비판하고, 요리사 겸 저널리스트인 박찬일은 모 언론에 기고한 칼럼 ‘달걀의 운명’에서 달걀이 대량 생산되는 현실을 두고 ‘이 불안한 풍요가 실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불안해한다. 우리 삶에 가장 가까운 닭고기와 달걀의 현실이 이럴진대 다른 식재료는 오죽할까.
요리 방송이 주로 밤 시간대에 편성된 것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유는 간단하다. 먹지 않아도 될 시간에 식욕을 지나치게 돋움으로써 건강상 부작용을 일으킬 소지가 높기 때문이다.
굳이 렙틴(Leptin)이니 글렐린(Glehlin)이니 하는 신경호르몬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요리 방송의 부추김에 떠밀려 맥주 캔과 더불어 기름진 안주거리를 찾은 경험이 누구든 한두 번쯤은 있을 터. “이른바 ‘쿡방’ ‘먹방’의 영향으로 뇌에 내성이 생기고 더 자극적인 음식을 찾게 돼 비만 등 건강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의사들의 진언은 괜한 걱정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바람을 선선하게 느낀다. 갖가지 역효과에 눈 감으려는 무책임함 때문이 아니다. 어떤 잇속이 걸려 있기 때문도 아니다. 무엇보다 나쁜 영향 못지않게 결정적으로 좋은 영향이 분명 그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남자에게 요리는 무슨 존재인가
요리 늦바람이 골프나 주식투자보다 재미있고 가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남이 해주는 요리만 먹던 ‘상남자’들이 아내의 전유물로만 여기던 칼을 집어든 이유는 뭘까.
은퇴한 남편이 집에 돌아오는 것과 달리 중년 부부의 경우 아내는 점차 밖으로 활발하게 움직인다. 남자들의 요리는 가정 평화는 물론, 고령화시대에 대비해 반드시 익혀야 하는 필수 학습으로 회자되고 있다.
남자들의 요리는 생의 진실을 담아낸 영화처럼 따뜻하며 때로는 코끝 찡하게 먹먹하다.
결국 우리의 인생이 맵고 짜고 달고 시큼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리는 섬처럼 고립된 개인들을 잇는 역할을 한다. 누군가를 위해 상을 차리고 함께 나눠 먹는 것은 상대방의 입맛과 식습관, 식탁 위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영화 의 주인공 도완득은 언제나 혼자 밥을 먹고 등·하교하며 자신의 삶에 누구도 초대하지 않는 다. 그러나 영화 말미에서 끈질기게 거절하던 반 친구의 “라면이나 먹고 가자”는 말에 “그러자”고 답한다. 그는 이제 누군가와 함께 밥상에 앉는 것을, 자신의 삶에 타인이 들어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화 은 핀란드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주인공과 각자 상처를 지닌 채 식당을 찾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 따뜻한 영화다. 카모메 식당은 우리나라의 분식집쯤 되는 작은 동네 식당. 세 여인은 이곳에서 시나몬 롤과 오니기리를 먹으며 각자의 상처를 치유한다.
요리를 하거나 음식을 제공하겠다는 것은 상대와 유대관계를 맺겠다는 적극적 신호다. 어릴 적부터 여기저기에서 자주 들어왔던 “한술 뜨라”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언어 습관은 바로 그 정신에서 출발했다.
제임스 L. 브룩스 감독의 걸출한 코미디 영화 에서 타인을 거부하던 시절의 주인공 멜빌 유달(잭 니컬슨)은 홀로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기만 한다. 그러다가 이웃집에 사는 게이 화가 사이먼(그레그 키니어)을 받아들이면서부터는 중국식 수프를 나눈다.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주인공이 게이 화가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음을 보여주는 장치로서 음식을 선택한 것은, 실로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다. 음식에는 그런 힘이 분명히 있다.
지금의 요리 열풍에도 그처럼 명쾌한 힘이 내재돼 있다. 그 동안 우리 가장들은 나쁜 의미에서 독야청청했다. 전통적 가부장제의 영향으로 근엄함과 배타심을 구분하지 못하고 스스로 차단막을 내걸었던 이가 많았다.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가 그로 인해 자기 고립의 함정 속으로 스스로 빠져들고 말았다.
‘삼식이’라는 말을 아시는가? 은퇴 후 삼시세끼를 부인이 해주는 식사로 해결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뉘앙스부터 천박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으니 바람직하지 않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생산 가능 인구(15세에서 64세 사이)와 생산 불가능 인구 사이의 비율이 2060년에 이르러 50대50이 된다는 고령화 사회에서 누구도 그 유행어의 비극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쉽게 말해, 한때 배달의 기수였던 남성들이 현대에 이르러 계륵 같은 존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요리 유행은 계륵과 가족 사이에 음험하게 드리워진 차단막을 걷어내도록 하고 있다. 음식을 타인과 나누는 요리의 정신이 계륵들로 하여금 스스로 벽을 허물게 만들고 있다.
최근 요리 열풍의 핵심에 나이 지긋한 남성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차줌마’로 일컬어지는 차승원, ‘백 주부’라는 애칭으로 사랑받는 백종원, 중화요리의 대가라는 이연복 등은 모두 마흔을 훌쩍 넘긴 중년 남성들이다. 그들은 방송의 중심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요리는 어렵지 않다”, “당신도 할 수 있다”고 외치면서 그 동안 요리에서 소외돼 있던 계층, 다시 말해 중년 남성들을 주방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런 점이 오히려 쉽게 요리에 접근하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닐까.
백 주부는 자신의 요리를 세발자전거에 비유했다. 어린 아이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자전거를 한 번도 안 타본 사람도 겁내지 않고 타 볼 수 있는 세발자전거처럼 누구나 시작해 볼 수 있는 수준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는 용기를 주어 다음에는 두 발 자전거 타기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주방 안으로, 관심 속으로
최근 은퇴 전후 남자들에게 요리교실이 인기다.
실제로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초문화원의 ‘아버지요리교실’은 정원 25명으로 3개월씩 진행하는데, 은퇴 전후의 50, 60대가 주축이다. 서울대 노화고령화사회연구소와 이화여대 글로벌식품영양연구소, 순창군이 함께 시행하는 ‘골드쿡’ 프로젝트는 은퇴 전후의 중·장년층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요리실습이다. 서울특별시 양천구청이나 강남구청 등이 꾸준히 운영해온 중년 남성 대상의 ‘아버지 요리교실’ 등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남양주 시청의 ‘아버지 요리교실’, 광주광역시 농업기술센터의 ‘아버지 요리교실’ 등 최근의 요리 유행에 힘입어 개설된 아버지 대상의 요리교실 역시 하나둘이 아니다.
고양시 ‘젠틀맨 생활 요리 교실’은 55세 이상의 은퇴 남성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남성을 위한 요리 교실로, 실생활에서 꼭 필요한 간단한 생활 요리법을 전수해준다. 수업 소개란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남성만의 요리 교실로, 새로운 인간관계와 자아를 재정립하고 그동안 소원했던 가족들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익한 강좌’라고.
여기에 경기 부천시, 광명시, 고양시, 충북 음성군, 강원 영월군, 경북 칠곡군 등 군 단위에서 시행되는 남자 요리교실과 ‘시니어 요리교실’ ‘행복남요리교실’ ‘츠지원’ 같은 사설 요리 강좌까지 합치면 중년 남성 대상의 요리 강좌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해외 유명 셰프를 초빙하는 경우도 있고 값비싼 식자재와 조리도구를 사용한다. 8~10명 정도의 수강생만 받아 소수 정예로 운영되는 만큼 전문직이나 높은 사회적 위치와 함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수강생들이 찾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강좌에 참가하는 남성들의 마음은 한결 같다. 가족을 비롯한 사랑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요리를 대접하겠다는 것, 그래서 그들과 좀 더 가까워지려는 것이다.
요리 잘하는 최철주 전 중앙일보 논설 고문은 “나이 먹은 남자들의 요리는 치유일 수밖에 없다”며 “가족을 위해, 혹은 지친 누군가를 위해 배려와 진심을 담아 요리하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다”고 말했다. 요리는 다름 아닌, 자신의 진심을 상대에게 전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강력한 한 방법이다.
마이클 폴란은 요리 방송이 요리에 대해 떠들기 좋아하게 만들 뿐 요리 자체로 끌어들이지 못한다고 역설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일고 있는 요리 유행은 그와 양상이 사뭇 다르다. “요리는 어렵지 않다”는 어떤 요리인의 주장에 고무돼 실제로 많은 남성들이 요리에 도전하고 있으며, 적어도 도전하려 하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요리는 사람들의 유대관계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게 분명하다. 부작용을 여럿 양산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요리가 가족 또는 타인과의 벽을 허물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최근의 요리 유행을 반갑게 맞이하고 싶다.
예나 지금이나 ‘밥’은 중요한 소통 수단이다. 어느 종교 지도자는 밥을 나눈다는 것은 음식과 시간을 함께하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의 꿈과 비전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중년 남자들이 ‘먹방’과 ‘집밥’을 통해 찾고자 하는 것은 ‘맛’이 아닌 ‘정’이고 ‘온기’가 아닐까. 분명, 요리라는 행위에는 그처럼 명쾌한 힘이 있다.
{ 남자가 가도 괜찮은 요리 수업 }
양천구 ‘아버지 요리 교실’
3·6·9·12월, 1년에 4회 양천구 지역 남성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요리 강좌. 한 달 과정으로 매주 토요일 4회 수업한다. 장어구이, 들깨수제비 등 비교적 난도 있는 요리 수업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초문화원 ‘아버지 요리 교실’
10~12월 3개월 12주 과정으로 진행하며, 강의 신청은 10월 31일까지 받는다. 매주 목요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수업한다. 단호박 밤수프부터 제육볶음, 황태찜, 연어 스테이크 등 반찬과 일품요리를 두루 배울 수 있다.
롱런아카데미 ‘아빠 요리 교실’
분기별로 2개월 8주 과정. 매주 월요반과 수요반 2회 운영한다. 두 강좌 모두 요리의 기본인 계량법과 밥 짓기로 시작해 떡갈비 같은 접대용 음식은 물론이고 생선 손질법과 찌개 끓이는 법 등 생활에 꼭 필요한 지식을 알려준다.
고양시 흰돌종합사회복지관 ‘젠틀맨 생활 요리 교실’
은퇴한 남성이 노후에 자신의 손으로 직접 요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개설한 요리 강좌로 기본적 요리 용어부터 꼼꼼하게 알려준다. 매주 목요일 12회 수업을 진행한다.
화장기 없는 얼굴. 보송보송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칼. 한 떨기 수선화처럼 여리여리한 배우 예수정(芮秀貞·60). 수줍은 소녀 같았던 그녀와 대화를 할수록 소녀가 아닌 소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속에 석유통을 지니고 있다며 야무지게 쥐는 두 주먹. 연극을 이야기할 때 빛나는 눈동자. ‘5월은 역시 어린이달’이라며 개구지게 웃음 짓는 모습까지. 건강보조식품이 아니라 연극을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그녀. 그래서일까? 무대 위에서 더 건강하게 빛나는 배우 예수정을 만나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979년 연극 으로 데뷔, 그야말로 인생의 반 이상을 연기자로 살아온 예수정이다. 가슴을 파고드는 내면 연기로 보는 이의 심장까지 쿵쿵거리게 만드는 그녀가 요즘 가장 설레는 일은 무엇일까?
“나이가 들면서 실질적으로 인간관계에서 설레는 게 줄어서인지, 자연이 주는 설렘이 커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여명(黎明), 길을 나설 때 찬란한 햇빛, 이렇게 꽃이 핀다든지 나뭇가지가 새순 내느라고 그러는 것을 봐도 설레고요.”
조금은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래도 예수정 하면 ‘배우’라는 타이틀을 빼놓을 수 없는데, 작품 속 역할이 주는 설렘은 없는지 궁금했다.
“어떤 역할을 맡아서 설레는 것보다는 어떤 작품을 대할 때 설레는 마음이 커요. 내 심장을 가장 뛰게 했던 작품은 2012년과 작년에 했던 이에요. 메시지가 강한 작품이죠. ‘구조가 왜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가?’, ‘우리는 해방을 향하여 걸어나가야 한다.’ 등의 메시지는 평생 머릿속에만 있거든요. 실제로 내가 데모를 한 것도 아니고, 늘 삶의 과제처럼 남아 있는 거죠. 근데 작품에서는 액팅(acting)이 되어 있고 난 액팅 아웃(acting out) 하잖아요. 그런 작품을 만나면 피가 뜨거워지죠.”
어떤 역할을 연기한다는 것은 가슴속에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펼쳐낸다는 기분일까? 그녀는 그보다도 더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고 표현했다.
“펼쳐볼 수 있다는 말로는 모자라요. 그대로 행위하니까, 그때야말로 진짜 살아 있는 것을 느껴요. 평상시 제 삶은 고즈넉해서 뭔가 역동치는 것은 없거든요. 그런데 같은 작품을 만나면 굉장히 행동적으로 변하죠. 실제 삶 자체보다도 더 큰 의지를 갖고 한 발을 딱 내딛는 거예요. 언젠가 나도 내 삶에서 그 한 발을 분명히 내디딜 것을 희망하지만 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작품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그 한 발을 내딛거든요. 사고가 현현화되고, 나의 이상이 현상화되는 순간인 거죠. 그래서 공연을 하는 것 같아요. 물론 배우로서의 삶이 어렵지만, 실제 삶은 굉장히 생생하고 풍부해지죠. 우리 딸도 연극공부를 해서 지금은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물론 고생할 게 눈에 선하죠. 하지만 내 경험을 통해서 분명히 아는 것이 있어요. 연극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삶이 풍부해질 것이란 거죠. 그래서 딸에게도 ‘훌륭한 길 택했다’고 얘기해줬어요.”
내겐 참 고마운 직업 ‘배우’
단순히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기한다’기보다는 한 인간이 거대한 사고를 이뤄내는 과정에 연기가 양질의 영양분을 더해주고 있는 듯했다. 그녀에게 배우라는 직업이 주는 의미가 남다를 것 같았다.
“배우라는 직업이 무척 고마워요. 내 인생의 근본적인 목적을 향하는 길에 현재 내 직업이 절대 흠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온전히 만족하고 행복하죠. 직업과 내 인생은 서로 보탬이 돼요. 작품을 통해서 나 개인 예수정보다 더 나은 정신을 들여다보고, 그 정신을 들여다봄으로써 나의 삶이 더 좋아지는 것을 발견하죠. 사실 작품이 끝나면 배우는 다시 누추해지거든요. 그것을 인지하면서 덜 누추해지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다른 작품을 만나게 되고, 그 노력한 만큼이 분명히 작품에 입혀진다고 봐요. 그런 과정에서 작품을 보는 여유가 생기고 그만큼 인생을 사는 폭도 넓어지죠. 이렇게 서로 도와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최고의 직업이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배우라는 직업이 숙명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녀가 이 숙명을 직감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 순간 역시 운명과도 같았다.
“대학교를 (고려대) 독문학과를 나왔는데, 그때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알게 됐어요. 브레히트의 ‘극장은 시민계몽의 공간이다’라는 말을 알고서는 ‘아, 내 평생 여기(극장)에서 산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라고 강하게 느꼈죠. 그 이후로 연극반에 들어갔고 엄마(배우 故 정애란) 몰래 연기를 시작했어요. 내가 고생할까 봐 연기하는 걸 반대했던 엄마의 마음도 이해했지만, 저 나름의 신념은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배우라는 것이 굉장히 소망이 가득한 일이라는 것 말예요.”
부끄러운 첫사랑의 추억처럼 살아 숨 쉬는 ‘열정’
처음 배우를 꿈꿨던 그때의 열정이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듯했다. 연기 인생 37년, 그때 가슴을 울렸던 그 결심이 현재는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 물었다.
“그 생각을 남 앞에서 이야기할 만큼 내 삶 자체가 계몽적이거나 혁명적이지는 못했어요. 때문에 입으로 말할 순 없지만 부끄러운 첫사랑의 추억처럼 가슴속에서 없어지지는 않죠.”
그동안 쌓아온 연기 내공이 있는데 나름의 사명감이나 소명의식은 분명할 것 같았다. 그런 기자의 이야기를 듣자 그녀는 ‘내공’이나 ‘연륜’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부끄럽기만 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런 것까지는 없고요. 소신이라면, 내 사고가 계속 앞을 향해 걸어나가고 있는 한 이 직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나도 모르죠. 어느 순간 나 스스로 느낄 때 내 사고가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지 않다고 느끼면 빨리 떠나야죠. 무대나 필름에 폐를 끼치면 안 되니까요. 그때는 무슨 사명감이나 소명의식 때문에 질질 붙들고 있지 말고 떠나야죠. 떠나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 걸어나가야겠지만.(웃음)”
그녀의 말처럼 정년이 없는 배우로 살아가다 보면 쌓여가는 경력만큼 부담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부담을 설렘이라 표현하고 있었다.
“이제는 어떤 작품이 나에게 왔을 때 내가 나이든 사람으로서의 그 특성을 얼마만큼 표현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겉으로 찌글찌글한 모습만이 나이든 사람은 아니거든요. 나 역시 뭔지는 모르겠으나 이만큼(60년)을 살아왔다면 중간에 실수도 있었겠지만, 단 1초라도 은총을 받아 한 발자국이라도 걸어나갔다면 그 흔적들이 어떤 작품을 만났을 때 여태 먹은 끼니만큼의 밥값은 해야지 될 텐데, 그게 어떻게 묻어져 나올까? 나도 궁금해요. 그래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다’는 없어요. 어떤 역할이든 좋아요. 거기에 내 끼니가 어떻게 나올지 나도 궁금하고 설레거든요.”
어떤 역할이든 좋다고 말한 그녀. 요즘 떠오르는 중년의 로맨스, 특히 젊은 남자배우와 중년 여배우의 로맨스를 다룬 작품도 적지 않다. 유독 멜로물과는 거리가 먼 배우 예수정. 혹시 그녀도 그런 로맨스를 꿈꿔본 적은 없을까?
“저는 뭐랄까. 사람이 참 건조해서. 아마 제가 만에 하나 그런 역할을 맡게 된다면, 그리고 그 역할이 제 피를 끓게 한다면 조금 또 다른 시각을 볼 것 같아요. 인생의 경험이 많아진 만큼 역으로 젊었을 때 청춘의 삶 속에 있었던 보석 같은 정서가 흐려졌을 수가 있죠. 어떤 젊은이를 만났을 때 남성이라서 끌리는 로맨스가 아니라, 그 젊은이를 통해서 다시 내 안에 생성되는 조금은 잊고 지냈던 그런 것들이 소생되면서 꽃처럼 피어나는 그런 거라 할까? 아, 소통하는 것. 그 노인 안에도 있는 젊음의 생기, 그 외부의 매개체와 함께 소통할 수 있다는 것 말이죠. 그런 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작품이 아닌 실제 그녀가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방법은 남달랐다. 아니, 오히려 방법이 없는 것이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특별한 방법은 없어요. 그냥 친구처럼 지내요. 그게 아마 동지의식이 있어서인가 봐요. 같은 작품을 하다 보면 동료애로 만나게 되죠. 제자들이 스승의 날 이야기를 꺼내면 ‘야야, 친구의 날은 없니? 하긴 에브리데이 친구의 날이니 친구의 날은 없나 보다.’고 말하기도 해요. 저는 아마 ‘공연’이라는 분명한 매개체가 있어서 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 무대 앞에서는 다 같은 배우니까요.”
조금 전 이야기와는 다른 면모였다. 자신을 건조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친근한 사람이니 말이다. 그녀는 왜 자신을 건조하다고 생각할까?
“옛날에 어떤 분이 날 표현하기를 ‘습기 없는 나무’ 같대요. 어? 이 사람 나를 참 잘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람이 좀 촉촉한 느낌이 나야 로맨틱하고 그런데, 그걸 아마 무의식적으로 차단하고 사는지 몰라요. 스스로 습관들인 자신의 삶이 건조한 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말하다 보니 그게 나만의 (실수하지 않으려는) 방어책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연극’을 먹어 건강하고, ‘연기’를 해서 행복한 그녀
그녀는 배우로 살아가며, 연극을 하는 것이 곧 삶의 행복이자 건강의 비결이라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건강한 에너지가 샘솟는 법. 그녀가 하고 싶은 역할은 무엇인지 물었다.
“하고 싶은 역할이요? 다 해봤어요. 대학 때부터 굉장히 하고 싶었던 라는 작품이 있었어요. 한 여성이 굉장히 육체적으로는 쇠퇴해지고, 정신적으로도 젊었을 때 순수성을 잃고 거기다 마약까지 하게 되죠. 그 여인은 자기가 본의 아니게 영혼, 정신, 육체가 다 망가진 삶 속에서도 순수함에 대한 동경을 놓지 않아요. 정말 감사하게도 그 역할을 두 번이나 할 수 있었어요.”
예수정의 데뷔작 의 연출을 맡았던 한태숙 감독은 당시 ‘예수정은 속에 불덩이가 있는 여자’라고 표현했다. 지금도 그 불덩이는 활활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제는 준비할 것도 없어요. 늘 내 속에 있으니까요. 없어지지 않아요. 넘칠 듯한 석유통을 품고 있거든요. 불은 언제나 붙어요. 오히려 그게 내 인생의 커다란 함정이랄까? 그래서 항상 조심하고, 나를 건조하게 만드는지도 몰라요. 삶 속에서 그게 확 타버리고 난 다음에는 어떠한 고통으로 다시 그 열량을 채워가야겠죠. 배우는 숙명적으로 ‘고통은 성숙의 미로’라는 말처럼 그 고통에서 벗어나 한 송이 꽃을 피워내야 해요. 그 고통을 지나 아름다운 꽃을 피웠을 땐 ‘아, 이 고통이 결국 내 삶을 꽃을 피우는 대미지였구나’라는 것을 깨닫곤 하죠. 또 한 가지, 나는 연극을 먹고 건강해지는 사람이거든요. 연극이 날 건강하게 하고, 내 삶의 활력을 가져다주죠. 누구든 매 순간 충실하면 그만큼 행복해질 수 있어요. 저는 연기가 생활이니까, 그걸 날마다 충만히 하는 가운데 늘 무언가가 채워지는 거죠. 그게 제겐 힘이 되고 행복인 셈이에요.”
예수정(芮秀貞)
1979년 연극 ‘고독이라는 이름의 여인’으로 데뷔, 1980년 고려대 독어독문학과 대학원 문학석사, 1984년 독일 뮌헨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 연극학석사, 2004년 제5회 김동훈연극상, 2005년 제26회 서울 연극제 여자 연기상, 제10회 히서 연극인상, 제41회 동아연극상 연기상, 2006년 제1회 한국 여자 연극인상 등 수상.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 ‘19그리고 80’, ‘고곤의 선물’, ‘벚꽃 동산’, ‘허난설헌’, ‘바다와 양산’, ‘그린 벤치’, ‘손님’, ‘늙은 부부 이야기’ 등 주연.
젊은 날의 무기가 톡톡 튀는 감성이라면, 연륜의 무기는 직감이나 종합적인 판단 능력이다. 인간의 직감과 판단능력은 연륜이 쌓이고 인생의 경험치가 더해질수록 단련되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최근 뇌과학 연구를 통해 ‘뇌는 쓰면 쓸수록 좋아진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나이가 들어 신체 노화가 진행되더라도 뇌는 충분히 젊게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중년 이후 머리가 나빠졌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익숙한 일상으로 인해 뇌의 활동이 둔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익숙한 일상을 새롭게 변화시킬 방법은 없을까? 눈, 코, 입, 귀, 피부 등 오감을 이용해 잠자고 있는 뇌를 깨우는 두뇌훈련을 소개한다.
도움말 양영애 인제대학교 작업치료학과 교수
참고 요네야마 기미히로 · 전나무숲 출판사
STEP 1. 오감자극으로 젊은 뇌 만들기
Q. 당신의 라이프 스타일은?
1. 일주일에 한 번은 처음 가보는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2. 음악은 항상 새로운 장르를 번갈아 듣는다.
3. 최신 유행어를 알고 있다.
4. 자신의 전문분야 말고도 다른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다.
5. 가끔 10분 이상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A. 당신의 두뇌 상태는?
위의 항목 가운데 2개 이상 체크되지 않았다면 당신의 뇌는 쿨쿨 겨울잠을 자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앞으로 소개할 두뇌 훈련을 열심히 실천해서 뇌에 생기를 팍팍 불어넣자!
1) 눈 감고 밥 먹기
시각 정보를 차단해 공간감, 후각, 미각, 촉각을 자극하는 방법이다. 먼저, 눈을 감고 상상력을 총동원해 반찬이 어디에 있는지 식탁 위를 헤매라. 공간과 관련된 상상은 우뇌를 자극한다. 반찬을 찾았다면 젓가락으로 집어 그것이 무엇인지 촉각과 후각을 이용해 탐색한다. 마지막으로 입으로 가져가 맛과 향으로 자신의 판단이 옳았는지 최종 확인한다. 이처럼 시각 정보를 차단하면 평상시 쓰지 않던 뇌 기능을 그만큼 의식해서 쓸 수 있다.
2) 주머니 속의 동전 알아맞히기
잠자고 있는 촉각을 깨워 두뇌를 자극해보자. 우리는 시각 덕에 평소 손으로 물건을 만져보고 형태를 파악하는 일이 드물다. 촉각이 뇌 속에서 가장 깊이 잠들어 있는 감각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머니에 10원짜리 동전과 100원짜리 동전을 각각 5개씩 넣고 그것이 얼마짜리 동전인지 만져서 알아맞혀 보자. 크기나 무게로 금방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쉽지 않다. 이처럼 손가락의 미묘한 감각을 더듬어 보는 일은 바로 대뇌피질의 자극으로 이어진다.
3) 귀 막고 계단 오르내리기
우리는 소리에서 힌트를 얻어 정보를 추측한다. 물건을 내려놓을 때 나는 ‘쿵’ 소리만 듣고도 그 무게를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계단을 내려갈 때도 자신의 발소리로 계단의 높이와 간격 등을 짐작한다. 새로운 자극을 원한다면 귀마개를 하고 계단을 오르내려 보자. 발가락 끝에 신경을 집중하는 것은 주머니 속의 동전을 알아맞히는 일처럼 대뇌피질을 자극한다. 귀를 막고 발가락으로 계단 위치를 확인하면서 사뿐사뿐 조심해서 내려가자. 소리가 차단되기 때문에 모든 감각이 발가락으로 쏠리게 된다. 평상시 거의 쓰지 않던 발가락 감각을 사용해, 뇌의 감각을 일깨우는 방법이다.
4) 코 막고 커피 마시기
커피를 마시기도 전에 달콤 쌉쌀한 향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커피의 후각적인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커피에서 향이 나지 않는다면 어떨까? 기존의 경험과는 색다른 감각으로 뇌를 자극할 것이다. 먼저 코를 막고 커피를 마셔보자. 평소대로라면 커피향이 코점막이나 후각을 통해 인식되지만, 향이 없기 때문에 뇌는 혀의 미각만으로 입속에 들어온 내용물을 분석하게 된다. 그러면 뇌는 돌발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며 분석 작업에 더욱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커피뿐만 아니라 다른 음식도 코를 막고 먹어보자. 좀 불편해도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뇌는 그런 혼란 속에서 점점 더 강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5) 커피 향을 맡으며 물고기 사진 보기
앞서 이야기했듯, 우리의 뇌는 돌발 상황에 닥치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인다. 누구든 커피 향을 맡는 순간, 커피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커피 잔이나 티스푼 등 커피와 관련된 물건들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커피 향은 나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커피가 아닌 물고기라면? 분명 당황하여 두뇌 회전이 빨라질 것이다. 향과 기억은 밀접하여 ‘이런 향은 이럴 때’라는 패턴이 우리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런 상식을 역으로 이용하면 뇌를 강렬하게 자극할 수 있다. 평소 익숙한 향을 준비한 다음, 그것과 전혀 관계없는 것을 눈앞에 둠으로써 확실하게 속임수를 연출해 뇌를 들썩이게 해보자.
# 양영애 교수 Advice
집중력이란 환경정보보다 감각정보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으로 새로운 정보를 학습할 때 필요한 각성, 집중하기 위한 노력, 상황에 따른 유연성이 요구된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크게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등 오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여러 가지 감각기능이 받아들인 정보를 한곳에 모으는 힘을 집중력이라 할 수 있다. ‘눈 감고 밥 먹기’ 등은 환경에서 오는 여러 자극 중 한 가지 자극을 차단 후 특정 자극에 집중하는 ‘선택적 집중력’이다. ‘커피 향을 맡으며 물고기 사진 보기’는 두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자극에 대해 동시에 주의집중을 유지하는 ‘동시 집중력’으로, 요리를 하면서 TV 뉴스를 듣거나 전화를 받으면서 수첩에 주소를 적는 행동도 이에 속한다.
STEP 2. 습관변화로 젊은 뇌 만들기
Q. 당신의 라이프스타일은?
1. 음식점에서 언제나 같은 메뉴를 주문한다.
2. 물건을 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3. 일단 공부를 시작하면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까지 계속한다.
4. 커피만 마신다.
5. 지하철에서 항상 똑같은 자리에 앉는다.
A. 당신의 두뇌 상태는?
위의 항목 가운데 2개 이상 체크되었다면, 당신의 뇌는 이미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다. 당장 ‘자극’이라는 비타민을 섭취해 뇌의 피로를 해소해야 한다.
자극은 뇌를 싱싱하게 만드는 비타민과 같은 역할을 한다. 무언가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대뇌와 소뇌 안의 기억 프로그램이 완벽하게 갖추어졌음을 의미한다. 프로그램이 완성되면 그 동작은 무의식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익숙해진 습관은 뇌를 지루하게 한다. 이번에는 과감하게 일탈을 시도하며 잃어버린 활력을 되찾아보자.
1) 점심은 다른 음식점에서 다른 메뉴로 주문해라
매일 하는 외식도 두뇌를 단련하는 훌륭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항상 먹던 음식 대신 메뉴판에 적힌 요리 가운데 가장 아래쪽 음식을 주문해보자. 아마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 당신의 눈과 코와 혀를 자극할 것이다. 익숙함은 머리를 거의 쓰지 않아도 돼서 편하다. 하지만 편한 만큼 뇌에는 치명적이다.
2) 한 달에 한 번 명품족이 돼라
백화점에서 비싼 물건을 살까 말까 망설일 때면 누구나 가슴이 뛰고 조바심이 난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럴 때 과감하게 물건을 사버리면 스트레스에서 바로 해방된다. 명품은 가격이 비싼 만큼 이리 재고 저리 재면서 살지 말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때 맛보는 팽팽한 긴장감이 머리가 좋아지는 특효약이다. 긴장을 하면 우리 몸에서는 아드레날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된다. 이 물질은 몸의 저항력을 높이고 심장과 호흡기의 기능을 도와준다. 긴장감은 아드레날린을 증가시켜 결과적으로 뇌를 활기차게 만든다. 뇌의 입장에서 보면 긴장감은 매우 반가운 심리상태이다. 과도한 긴장감은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키지만, 짧고 적당한 긴장감은 뇌가 제 실력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게 해준다.
3) 외국 지하철은 최상의 뇌훈련 장소
길을 잃으면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진다. 이곳저곳 이정표를 찾아 헤매면서 어떻게든 그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데, 그때 뇌에서는 아드레날린이 분비돼 움직임이 부드러워진다. 이를 훈련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외국의 지하철을 타보는 것이다. 외국에 나가면 언어 장벽과 낯선 환경 탓에 바짝 긴장해서 몸이 뻣뻣해지겠지만, 그건 보통 때보다 더 머리를 써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뇌가 오래 건강하기를 바란다면 가능한 한 불편한 방법을 선택해라.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 머리는 끊임없이 생각하며 자연스레 신선한 자극을 받게 될 것이다.
4) 욕실에 감미로운 음악이 흐른다면?
특별하고 색다른 방법으로 음악을 들어보자. 평소 잠들어 있기 쉬운 우뇌를 자극하기 위해서는 음악을 듣는 것이 좋다. 특별히 음악을 통해 두뇌를 단련하고 싶다면 평소 잘 듣지 않는 장르의 음악을 들어라. 대중가요만 듣는 사람은 재즈를, 클래식만 고집하는 사람이라면 트로트 등에 도전해보자. 또한, 욕실, 옥상 등 색다른 공간에서 듣게 된다면 효과는 배가 될 것이다. 대중가요 가사를 음미하면서 듣는 것도 좋다. 가사를 음미할 때 우리 뇌는 우뇌뿐만 아니라 언어를 관장하는 좌뇌도 사용하게 되는데 이는 뇌에 좋은 자극제가 된다.
5) 낯선 슈퍼에서 장보기
직접 장을 보고 요리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무작정 슈퍼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면 자연스레 요리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그게 바로 이미지 연상법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가본 적 없는 낯선 슈퍼에 가면 더욱 효과가 크다. 늘 가는 슈퍼가 아니면 상품의 진열 방식이 달라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찾아 헤매야 한다. 모르는 길을 지도도 없이 헤매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간적인 사고를 해야만 한다. 그러면, 자연히 우뇌가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부러 멀리 있는 슈퍼까지 찾아가기가 귀찮고 불편하겠지만, 그 불편함이 우리 두뇌에는 더없이 좋은 보약이 된다.
# 양영애 교수 Advice
익숙하지 않은 낯선 일 도전을 통한 두뇌 활성화 집중력을 발휘하는 노르에피네프린은 긴장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생기는 호르몬이다. 긴장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처음에는 뇌가 맑아지고 집중력이 생기는데 학업 성취도를 높여주고 순발력 있게 행동하도록 돕는다. 인간이 위험에 처했을 때 능력 이상의 힘을 보이는 것은 노르에피네프린 때문이다. 노르에피네프린은 극복이 가능한 일시적 스트레스 상황에서 집중력을 높이고 삶의 활력을 준다. 노르에피네프린은 수용체를 통해 주위의 뉴런을 조절하는데 이 조절이 잘 되지 않으면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가 생기고 우울 증상이 나타난다.
좌뇌형vs우뇌형 인간 체크하기
다음 질문을 통해 만약 4개 이상의 항목에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우뇌형, 반대로 3개 이하라면 좌뇌형 인간이다.
1. 공식 등의 암기에 약하다.
2. 약간의 실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3. 잡담을 좋아한다.
4. 시간을 잘 지키지 못한다.
5. 미술관 관람을 좋아한다.
6. 각출해서 돈을 낼 때 계산이 서투르다.
우뇌는 오감처리, 공감각, 종합적 판단력 등에 적합하고 전체적, 감각적, 직감적인 능력이 탁월하다. 동물적 감각으로 바로 결단을 내리는 것이 우뇌형 인간의 특징이다. 학교 공부로 말한다면 미술이나 음악에 남다른 소질을 보이는 반면 수학에는 약하다. 즉 아날로그 인간에 가깝다. 반대로 좌뇌형은 디지털 인간이라 볼 수 있다. 좌뇌는 언어, 계산, 관념 구성에 적합하고, 분석적이며 논리적이다. 수학을 잘하고 이론에 치우치기 쉽지만, 사물을 논리적으로 생각할 줄 알며 이성적이다.
1000억 개의 신경세포가 얽히고설킨, 소우주라 불리는 ‘뇌’는 인간이 생산해내는 모든 것들이 중심이 된다. 하나의 뇌세포는 수천 개의 뇌세포로부터 전기 신호를 받아 다른 수천 개의 뇌세포에 전달하게 된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의식, 인지, 감정이 발현된다. 인간의 마음은 이러한 과정의 연속이다. 즉, 뇌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도움말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 김영보 교수
어디까지 왔을까? 뇌로 마음을 읽는 것. 너무나도 복잡하기에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그러나 뇌 영상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의 상상은 현실이 되고 있다. 여기서 잠깐, 10여 년 전 발간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뇌’를 살펴보면, 뇌의 쾌락 중추에 전극을 심어 쾌락 감도를 외부의 제3자가 조절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내용은 당시 뇌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지만 공상과학 소설로 분류됐다. 소설 속에서는 해당 부위를 찾지 못해 마구 찔러대는 대목이 나오고 있지만 이제는 명확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허구가 아닌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가 됐다.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 김영보 교수를 만나 마음과 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감정의 중추, 새로운 발견
김 교수에 따르면 인간의 뇌에서 감정의 중추는 대뇌의 변연계(limbic system)로 알려져 있다. 이 변연계는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다양한 감정을 관장하는 신경망이 고리처럼 연결돼 있다. 각각의 신경줄기 다발이 담당하는 감정의 종류를 파악하면 이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앞서 언급했던 소설 ‘뇌’처럼 말이다. 해부학적 경로가 복합해 뇌-감정을 주관하는 변연계에 관한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조금씩 밝혀지고 있어 전 세계적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마음을 보는 뇌 연구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가 세계 최초로 분노, 슬픔, 우울 등 부정적 감정에 관여하는 신경섬유(ATR)와 기쁨, 웃음, 행복, 사랑, 보상 등 긍정적 감정에 관여하는 신경섬유(sIMFB, imMFB, SPT)를 발견해 냈다. ‘7T PET-MRI’라는 장비를 통해 뇌 영상을 찍고 분석해서 나왔다고 한다. 김 교수는 “이 연구를 통해 사람이 어떻게 울고 웃는지, 기분이 좋고 나빠지는지에 대한 근거를 찾게 된 것이다. 이 신경섬유의 존재는 감정 이상을 연구하는 데 포인트가 된다”고 설명했다. 아직까지는 대략적인 연구 성과만이 제시되고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더욱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뇌세포의 활동을 정확히 분석하면 범죄를 일으키는 감정을 제거하고 스스로 뇌를 좌지우지하게 되는 평화로운 세상이 열리게 된다는 측면에서 관심을 받고 있다”고 언급했다.
신중년, 뇌도 품격 있게 자란다
김 교수에 의하면 뇌의 기능은 나이에 따라 점점 쇠퇴해져 간다는 통념 때문에 가벼운 건망증 현상이 오면 덜컥 겁부터 내는 것이 신중년의 모습이지만, 뇌 과학 분야에서는 이와 상반되는 결과들이 나왔다고 한다. 특히 뇌의 가소성(Neuronal Plasticity)측면에서 인간의 인지기능은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발전해 50~60대에 절정에 이른다는 보고들이다. 실제로 뇌가 더 탄력적이고 유연해지며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인식 시스템을 갖추고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다는 것.
김 교수가 집필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 UCLA 신경학자 조지 바트조키스는 “중년이 돼야 뇌에 들어오는 직접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가공해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극대화된다”고 강조했다. 이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바트조키스는 MRI를 사용해 18~75세 300명을 대상으로 백질(白質)양과 분포를 측정했다. 대상은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 등 뇌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과 건강한 젊은이들이었다. 그 결과, 건강한 50대 신중년 대부분은 ‘미엘린(myelin)’ 양이 절정에 달했고 중요한 사고를 하는 뇌 전두엽과 측두엽에 가지고 있었다.
뇌는 신경세포, 회백질, 백질로 구성돼 있는데, 이 중 백질은 신경세포를 연결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여기에 미엘린이라는 지방성 물질이 덮개를 형성해 미세한 신경섬유를 감싸준다. 미엘린은 신호가 전달되는 동안 신호가 톡톡 튀거나 합선되는 것을 방지한다. 전선 피복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미엘린은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물질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미엘린을 다른 영장류보다 20~30% 더 많이 갖고 있다고 한다. 유아기나 어릴 때는 미엘린 중 많은 부분이 운동신경이나 감각기관에 놓여 있지만 중년이 되면 대부분 뇌 신호를 전달하는 신경세포 축색돌기 주위에 나타난다는 것. 이곳이야말로 인간이 정교하고 깊이 있는 사고를 하게 하는 부분이라는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나이가 들어 뇌는 전체적인 조직을 젊을 때보다 더 잘 작동하도록 하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이는 소화할 수 있는 정보량은 적을지라도 일상생활에서 더욱 잘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김 교수는 “신중년이 되면서 대학시절 시험을 볼 때만큼 많은 정보를 기억 속에 욱여넣을 수는 없을지 모른다. 단기기억 역시 예전 같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보를 다루고 말과 문장에 대한 의미를 깊이 이해하는 능력이 생긴다. 중요한 것은 성격마저 변해 모호한 상황에서 더욱 편안하게 적응하고 좌절이나 초조에 덜 민감하게 대응한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노인성 치매 등을 겪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은 결코 뇌를 나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좋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뇌를 비워야 미래가 열린다
실제로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가 진행한 실험이다. 수학문제를 풀고 있는 두 학생이 있다. 누가 공부를 잘 하는지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 뇌영상을 찍어 누가 똑똑한 학생인지 실험을 했다. 한 학생의 뇌에서는 포도당이 소모되면서 빨갛게 달아올랐고, 다른 학생은 별 다른 반응이 없다. 지능이 높은 학생은 누구일까?
정답은 별다른 반응이 없는 학생이다. 이 학생은 뇌의 에너지 소모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뚜렷한 반응이 나타난 학생은 못하는 것을 억지로 생각해 내려 하니 자극이 됐던 것. 이 실험은 ‘정직한 뇌’가 필요하다는 점을 알리고 있다. 사실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뇌를 깨끗하게 비운 상태로 유지하고 있지만, 거짓이나 알리바이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과부하가 걸린다는 것.
한 분야에 몰두해서 성공하고 싶다면,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행동이나 거짓보다는 정직이라는 덕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직하게 살아서 정말 필요할 때 진짜 머리를 쓰는 게 효율적이지 않을까?
※뇌 전문용어 정리
변연계(limbic system): 대뇌 속에서 동기와 정서를 주로 담당한다고 여겨지는 여러 구조물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변연 피질과 해마, 편도체, 중격 등이 포함된다.
뇌의 가소성(Neuronal Plasticity): 기억, 학습 등 뇌기능의 유연한 적응능력을 ‘뇌의 가소성’으로 표현한다. 뇌에 장기적인 변화가 일어나, 자극이 제거된 후에도 그 변화가 지속되는 것으로 본다.
미엘린(myelin): 인지질 성분의 막으로 ‘미엘린수초’라고도 한다. 뇌 신경세포를 둘러싸는 백색 지방질 물질로 뉴런을 통해 전달되는 전기신호가 누출되거나 흩어지지 않게 보호한다.
“이(異) 길에 답이 있다”
이 한마디에 협업(Collaboration)의 핵심이 담겨 있다. 다름과 만나 세상을 보라, 그리고 미래를 열라는 뜻이다. 두 개 이상 개체의 결합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협업은 비단 기술에 인문학을 입힌 애플의 성공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세계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고도성장기를 지나 상생과 동반성장이 화두가 된 한국사회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물결이기도 하다. ‘협업은 축복이다’라며 협업 문화 전파에 앞장서고 있는 윤은기(尹殷基)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을 지난 1월 7일 만나봤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윤 회장은 협업을 대학병원에서의 협진을 예로 설명했다. 서로 다른 전공의들이 만나야 협진이 이뤄지는 것처럼, 앞으로는 서로 다른 분야가 만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융·복합돼야 협업의 가치가 일어난다는 설명이다. 나아가 그는 다름이 아니면 소용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지내서 동지, 동포, 동료, 동창생 등 같은 것에는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끼지만 이교도, 이문화, 이단, 이민족 등 다른 것은 가차없이 배척했다. 이에 중앙공무원 교육원 원장을 역임한 윤 회장은 한국사회의 운명을 바꿀 만한 의제에 대해 고민하던 중 ‘협업’에 주목했고 지난해 1월 협회장에 취임해 사람들을 만나 협업에 대해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 1년간 전국을 돌며 1달에 보통 10번에서 많게는 20번가량 강의했고 그러다보니 처음엔 협업이란 단어를 생소하게 느끼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포털사이트에 협업 관련 콘텐츠들이 꽤 많아졌고 ‘협업’검색에도 그의 이름이 상당히 등장하게 됐다.
그와의 일문 일답이다.
지난해 매우 바쁘게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2015년은 어떻게 설계하고 있나
지난해 1월 협회장에 취임하고 한해 동안 협업문화의 원년으로 삼고 강의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2015년은 협업문화 확산의 해로 정해서 더 활발히 활동할 생각이다. 1월 말에는 직접 쓴 협업관련 도서도 나올 예정이다. 번역서는 있지만 한국인이 협업에 대해 쓴 첫 책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는 셈이다.
협업 전도사로서, 협업을 잘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세를 꼽는다면
다름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게 먼저다. 그리고 서로 협력을 해야 협업의 진정한 가치가 빛을 발한다. 지금까지는 ‘동’의 시대였지만 앞으로는 ‘이’의 시대라고 본다. 그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핵심이다. 문화 자체가 달라지는 이 시대에서는 ‘포’자 붙은 두 가지가 있으면 지혜롭게 살 수 있다. 포옹력(抱擁力)과 포용력(包容力).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더 끌어안아주는 포옹력, 서로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데는 포용력이 필요하겠다. 혹시 엉뚱한 데 가서 포옹하는 건 성희롱이니 조심하고.(웃음)
올해 64세로 누구보다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시고 있다. 100세 시대, 행복한 노후를 위해 무엇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첫째는 건강, 둘째는 적절한 경제력, 셋째는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나 놀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를 추가하자면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친구, 선배, 후배 상관없이 격의 없이 속마음을 나누고 같이 즐길 수 있는 삶의 동반자는 있어야 100세 시대를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멋지게 나이 들고 싶은 이유는
매력적인 시니어가 없는 사회는 선진 사회가 아니다. 닮고 싶은 시니어가 있다는 것은 참 행운일거다. 60이 넘어서부터 진짜 인품이 나타나는 것이고 진면목이 보여지는 시기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멋지게 나이 먹어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매우 유쾌하시다. 즐겁게 나이 먹는 비결이 있나
보통 청소년기 꿈을 이루는 사람이 행복한 인생이라는 말을 하지 않나, 나는 그때 꿈이 소설가였다. 심리학과도 그래서 갔고, 비록 현재 소설가의 길을 가고 있진 않지만 단 한 번도 그 길을 포기한 적이 없다. 나는 지금도 70세 전까지는 전업작가로 데뷔하겠다는 꿈을 품고 있어서 늘 소설가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또 한국문단의 대표적 작가인 ‘객주’의 김주영 선생도 꾸준히 만나 뵈면서 꿈을 가꿔나가는 중이다. 물론 연애소설은 이미 틀렸겠지만(웃음), 아마 자전적 소설을 쓰게 되겠지. 워낙 다양한 분야에 몸담아왔던지라 쓸 게 많지만 그냥 사실을 쓰는 게 아니라 소설로 다듬을 생각이다. 소설을 쓰겠다는 꿈, 그것만으로도 나는 즐겁다.
보물 1호가 있나
내가 가장 많이 가진 물건은 책이다. 하지만 가보 1호는 따로 있다. 내가 5개월 훈련받고 만 4년간 공군장교로 근무했는데, 그때 입었던 정복 한 벌은 지금도 깨끗하게 손질해 보관하고 있다. 이사 다닐 때마다 소중히 챙겨가지고 다니니 아내도 의아해한 적이 있는데, 나는 공군장교 시절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라서, 그때 입었던 이 군복이 내 정신적 가치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마침 지난해에는 내가 근무했던 부대를 찾아가는 국방TV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때 정복을 입어봤는데 다행히 20대 때 입던 게 잘 맞아서 입은 채 출연할 수 있어서 매우 기분이 좋았다. 아, 언젠가 KBS에서 방송작가가 연락이 와서 가보를 묻길래, 이 정복 얘기를 했더니 진품명품이라며 당혹스러워하더라, 그런데 이 정복이 나에게는 몇 천만원짜리 도자기보다 더 소중하다.
그러고보니 중앙공무원교육원장, 서울 과학종합대학원 총장, 국가브랜드위원회 글로벌시민분과 위원장, 명강사 등 워낙 다양한 길을 걸었다.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끊이지 않았을 것 같은데
학계, 재계, 관계, 문화예술계 그러니까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봤다. 안 해본 건 정치인데, 지금도 정치는 안 하기 진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안 해봐도 좋은 게 있는데, 나에겐 그게 정치다.
늘 청춘처럼 왕성하게, 나이를 잊고 도전하시며 살아오신 것 같다
진짜 간단하게도, 아내의 말이 부드럽게 들릴 때, 내가 진짜 어른이 됐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강의하고 책도 쓰고 심리학도 공부했고 그러다보니 젊었을 땐 이론적으로 따지면서 의견 충돌이 있었다. 서로 누구 말이 맞느냐 논쟁을 많이 했는데, 그게 시간이 지나다보니 아내 말이 들릴 때가 있더라. 내 말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그 말을 하는 심정을 헤아리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 영역에서는 OX나 사지선다형이나 과학적 정답 같은 걸 뛰어넘는데 그 말들이 들릴 때 우리는 어른이 되는 것 같다. 젊을 때는 모르던 세계가 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책이 있다면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나는 그 책을 읽고 다니던 종합무역상사를 그만두고 여행 다니다가 정보전략연구소(?)를 차렸으니까. 남들은 그냥 재밌다하고 말았는데 나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아내가 1주일간 여행을 간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나. 중년 남성들의 로망인데
내 서재에 책이 한 천 권 이상쯤 있는 것 같다. 종종 정리해서 줄이는데도 그 정도. 평소에는 그중에서 경영, 심리학 관련 책들을 주로 본다. 만약 아내가 여행을 간다면 소설책을 꺼내 쭉 읽게 되지 않을까. 아무래도 소설책은 호흡을 길게 가져가야 하니까.
자녀들에게는 어떤 아버지인지 궁금하다
나는 아주 담백한 아버지다. 엄하지도 않고 잔소리도 하지 않고 살갑지도 않은, 그냥 수채화나 담담한 가을날 같은 아버지다. 내가 밖에서 너무 교육적으로 살아오지 않았나. 심리학, 경영학하고 대학 총장에 방송에 강의도 많이 했으니까. 근데 집에서도 그러기 시작하면 이건 부자관계가 아니라 사제관계가 돼버리는 거다. 그래서 집에서는 절대 스승노릇은 안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내는 좀 아쉬워하기도 하지만 나는 가장 평범한 부자관계, 부녀관계를 맺고 싶다. 그리고 유수의 심리학자들도 실수하는 게 있는데, 심리학에서 배운 걸 그대로 자식에게 적용하는 것, 대개 망친다. 우리나라 성공한 사람들도 가정에서는 비슷한 실수로 관계를 망친다. 그냥 아들, 딸이 보고 알아서 느끼면 좋겠다. 나는 철저하게 스승 사절, 존경받는 아빠도 사절이다. 그냥 인간적으로 멋있게 살다 간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다.
살다보면 무수한 선택들을 하게 된다.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은 선택은
일단 심리학과에 진학한 것, 심리학을 원해서 지원했고 여전히 좋다. 또 공군장교 된 것과 현재 아내와 결혼한 것. 내 아내는 멋있는 사람이다. 부드럽고 여성적이면서도 매우 정의롭고 바른 길을 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이건 당신이 포기해야 하는 것이라고 부드럽게 나를 설득해준다.
다양한 길을 걸어오셨다. 마지막으로 성공의 기준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세상은 넓다. 한 우물만 파지 마라. 많이 싸돌아다녀라. 우리 세대는 한 우물만 파면 먹고 산다고 여겼고 실제로 그랬지만 지금은 세상이 변했다. 많이 싸돌아다니고 시야를 넓혀라. 60세 넘어서 제일 안타까운 모습이 맨날 노인정만, 청계산만 왔다 갔다하는 사람들이다. 조금만 더 가면 춘천도 남해도 동남아도 있다. 나이 들어서 가장 멋있는 건 많이 싸돌아다니는 거다. 아내에게도 그런 거 제한하지 않는 편이라, 다음주에는 친구랑 베트남에 간다고 하더라. 가라고 적극 지원해줬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와 평등이다. 비록 현실적 조건으로 인해 평등은 제약이 있겠지만 자유는 최대한으로 누리고 살았으면 좋겠다.
100세 시대에는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 한다. 몸이 늙는데 마음만 젊으면 그것도 문제지만 실제로는 나이가 들어가면 몸이 나이 들고, 몸이 나이 들면 정신도 거기에 맞춰서 나이 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나는 나이 먹어서 뭘 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이 아니라 좀 더 성숙하게, 어른값을 할 수 있게 돼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나이 들면서 보톡스 맞고 그러는 게 잘 늙는 것처럼 비치는 게 현실이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최근 안티에이징이 마치 웰에이징인 것처럼 호도되고, 왜곡되는 부분이 많아지고 있다. 사람이 몇 년을 살 수 있을지는 인류가 지구상에 생긴 이래 계속 이어져온 원초적 궁금증이다. 안 늙길 바라는 마음으로 본인들이 노력하면 의학도 발달했고, 생활수준도 좋아지고 했으니 옛날보다는 수명이 늘어가는 게 당연하다. 따라서 연령규범이 무너지고 생애주기가 늘어나면서 외관상은 물론, 나이에 대한 경계가 점차 흐릿해짐에 따라 나이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됐다.
미국 인구통계청에 따르면 이미 100세 이상 인구가 세계적으로 34만명에 달하며, 2050년이면 600만명에 이를 전망이다. 최장수 국가로 유명한 일본은 2050년에 100세인이 전체 인구의 1%인 62만 7000명이나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이미 평균수명이 81세를 넘었다.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2013년 기준 100세 이상의 인구가 1만 3700명이라고 한다.
수명이 늘어나고 100세인이 많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 노년학 전문가들은 저소득보다 고소득층에서, 후진국보다 선진국에서, 시골보다 도시에서 장수인이 늘어난다는 점을 꼽았다.
100세 이상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사람을 센터내리언(centenarian:백세인)이라고 부른다. 110세 이상 산 사람은 특별히 슈퍼센터내리언이라고 한다.
전세계적으로 슈퍼센테내리언은 2014년 기준 모두 74명이다. 이 가운데 미국인이 22명이었다. 이들의 평균 사망 나이는 112세였으며, 최장수 연령은 116세다. 14명은 유럽 출신, 2명은 히스패닉, 1명은 아프리카 출신이었다.
국제 100세연구단에서는 오래 사는 것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노후를 미리 준비하고, 작은 일이라도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자신 있고 당당하게 늙어가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유전적 요소보다 중요한 건 생활양식
서울시가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에 의뢰해 펴낸 ‘서울 100세인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장수인 10명 중 7~8명은 사교적이고 감정 표현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울증 의심 증세를 보인 사람은 전체의 4.6%에 불과했다. 또 10명 중 7~8명은 매일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고, 식사량이 일정한 것으로 집계됐다.
한경혜 노년·은퇴설계지원센터장이 연구한 ‘한국 장수인과 장수지역’은 장수인 생활세계에 대한 심층 분석이 ‘부양부담’ 문제 ‘의존적 존재’ 로 보고 접근하는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생활의 적극적 주체로서 장수인의 삶을 조망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했다.
20년 넘게 전 세계에서 수천 명이 넘는 백세인을 연구해 온 미국 조지아대 심리학과 레너드 푼 박사는 세계 장수학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장수 요인 다섯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유전, 성(性), 사회적 인간관계, 인지 능력, 영양 상태다.
유전이 장수에 미치는 영향은 약 25% 정도이고 나머지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건강한 인간관계가 중요한 것이며 마음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 것이 정신적·육체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국제 100세인연구단의 노년학자들은 건강한 장수의 요인은 유전적 요소 등 여러 요인이 얽혀 있지만 먼저 주목할 것은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80세 후반까지 생존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얼마나 바른 라이프 스타일을 지속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웰에이징이 우리보다 먼저 시작된, 또 노년학 관련 논의가 앞서 시작된 서구의 웰에이징 논의를 보면 의미 찾기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의미찾기가 안되면 이제 너무 오래 살게 돼서 쉽게 공허해진다. 이걸 문제라고 할 게 아니라 그게 가능성을 준다고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수인들은 그 사회의 멘토가 돼야
한경혜 서울대 노년·은퇴설계지원센터장은 “사람이 평생을 살면 삶의 경험에서 오는 지혜라는 게 분명히 있는 것 같다. 나이듦의 덕목 중 하나가 젊은이들과는 좀 다른, 삶을 바라보는 폭넓은 시각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젊은 시절의 덕목인 ‘머리가 좋다, 문제 해결을 잘 한다’ 등과 대비되는 노년기의 지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 맞는 멘토가 되라는 건 꼭 어떤 훌륭한 분이나 전문성을 가진 분이 되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조금 더 오래 산 사람으로서 사회에 멘토가 되도록 노력하는 게 삶의 의미를 찾는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한 센터장은 “문제는 개인이 혼자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사회가 노인을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게 문제다. 그런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부분의 큰 것들도 좀 바뀌어야 한다. 잘 늙는 것을 개인의 어깨에만 짐 지우지 말고 함께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citizen participation)도 중요하다. 멘토도 젊었을 때는 내 자식 내 가족을 위해서 살아왔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는 가족 우선, 가족 이기주의였는데 그런 경계에서 좀 벗어나는 것이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는 인생 후반전에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근데 요즘엔 오래 살게 되니까 젊었을 때 못한 거 해 보겠다, 손주도 안 봐주겠다는 조부모도 있다. 그래서 사실은 어떤 담론을 만들어 내느냐가 중요하다.”
생산적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도록
한경혜 센터장은 나이든 것 하나만으로 많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그룹으로 취급하는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중강연을 할 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그렇다고 답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나이는 엄연한 현실이다. 몸도 늙는다. 아무리 내 꿈이 젊고 생체나이, 신체지수가 40대 같다고 할지라도 젊은 애들 기준으로는 50만 넘어도 늙어 보인다. 물론 65세 이상 70대 이상 그룹에 들어가면 젊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노인이 어떤 취급을 받는 문화에 사느냐가 중요하다. 어항 속 금붕어처럼 되면 안 된다.”
한 센터장이 진행한 베이비부머 연구에서도 베이비부머들이 노년기 삶에서 가장 걱정하는 것 1위는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삶의 생산성이 끝나는 은퇴하는 시기여서 돈 문제보다 이 걱정이 더 컸다. 의미 있는 사회 구성원이란 뭔가 생산적이고 의미있는 기여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나이듦에 따른 심리적인 변화를 보면 나이가 들수록 유산을 남기려는 경향이 증가한다. 그 유산은 꼭 돈에 국한된 게 아니라, 내가 왔다갔다는 흔적을 말한다.
노년의 마지막 발달과업으로 자아통합이라는 게 중요하다. 내가 헛살았다는 생각이 아니라, 실수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는 식으로 삶 전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허무해진다. 그런데 그렇게 노년기에 자아통합 발달과업을 완성하려면, 굉장히 중요한 게 중년기이고 내가 아닌 다음세대에 대한 배려, 얼마나 돌봤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길 없던 곳에 사람들이 가면 길이 난다”
“나를 위해 살던 젊은 시절에는 자아정체감이 중요하지만 후반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면 자신의 자원, 시간, 지식, 에너지 등을 후속세대를 위해서 써야 한다. 그렇게 되면 생성감 과업이 완수가 되고 그렇지 않고 나이 60~70세까지도 내가 더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에 집중하게 되면 아무래도 젊은이들과의 경쟁에 치인다. 이미 중년이면 자신의 일에 대한 전문성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기이므로 다음 세대를 가르쳐 주고 멘토를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이른바 ‘규모의 문제’다. 예전에도 오래 사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베이비붐 세대처럼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사이즈가 크다. 달리 말하면 새로운 파워가 대두되는 일이다. “길이 없던 곳에 사람들이 가면 길이 난다”는 말처럼 길을 내는 일이다. 실제로 이 베이비부머나 노인들을 학계에서는 ‘모던 파이어니어(modern pioneer)’라고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도가 없으니까 개척을 한다는 의미에서.
나이에 상관없이 마음만 젊으면 된다고 말하는 건 엉터리 노년학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할 때 어항 속 물을 바꾸게 될 것이다. 실제로 건강을 위협하는 암, 심혈관질환, 당뇨병을 모두 없애도 평균 수명이 약 10년 정도 연장될 뿐 최장 수명은 늘어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혈압, 생활 습관, 혈당 생체지수 등 모두 30세 청년 수준으로 유지해도 인간 수명은 남성 99.9세, 여성 97세에 머문다는 계산도 나왔다.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는 날까지 나이 드는 것에 대해서 이제는 좀 나만이 아닌 다음 세대, 책임감 등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누구나 90까지는 산다. 그러니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즉 젊은이들에게 멘토를 하고 사회에 기여를 함으로써 나이 먹어도 저렇게 의미 있는 뭔가를 하는 생산적인 사회의 구성원이구나 느낄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삶을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