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언제 행복함을 느낄까? 행복은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우선인 것 같다. 필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처음 경험한 것은 결혼하고 약 8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아내가 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다음 해인 1989년 필자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영세를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영세는 절대자인 신으로부터 과거의 모든 죄에 대해 사함을 받는 것이다. 필자는 이날 큰 은총을 받았다. 살면서 수없이 많은 죄를 짓고 허물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고 하니 어찌 행복하지 않았겠는가.
더욱이 아내와 함께 종교를 갖게 되어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부부로서 영세 이후의 대화는 이전보다 훨씬 더 편안해졌고 소통도 잘됐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장남과 8남매의 막내딸이었던 필자와 아내는 가정문제로 대화를 하면 항상 평행선을 달리며 입장 차이를 쉽게 좁히지 못했다. 그러던 우리 부부가 신앙생활을 한 뒤로 평행선이 만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아니 그보다도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주일마다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외식을 하는 생활이 우리 가정에 새로운 문화를 가능하게 해준 전기가 되었기에 더욱 행복한 크리스마스로 기억되는 것 같다.
또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 영세를 받았기에 필자도 마치 새롭게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필자의 생활은 이런저런 혼돈의 블랙홀 속에 빠져 있었다. 경제적,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 풍조 속에서 방황도 많이 했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 종교생활을 하면서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물질적 충족보다는 정신적으로 풍요로울 때 비로소 평화롭고 충만해짐을 알게 됐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1989년 크리스마스가 유난히 행복한 날로 기억되는 것은 영세라는 축복 말고도 필자의 삶에서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아내가 우울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아들 둘을 낳고 나서 몹시 지쳐 있던 아내는 성당을 다니면서부터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 당시 필자는 아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심각한 가정의 위기까지 느꼈다. 결혼 후 어려운 살림을 하면서 휴일도 없이 장남의 맏며느리로서 오랫동안 강행군을 해왔던 아내였기에 그 고충이 십분 이해됐다. 미안한 마음에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일찍 퇴근해 아이들을 돌보면서 아내가 자신만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당에 다니도록 했는데 그 후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다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신이 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물론 아내의 미소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레지오 활동, 성지순례 등이 있는 날이면 필자가 두 아들을 돌봤다. 아내의 활동이 많아질수록 필자의 자유로운 생활이 제약받았지만 그래도 아내의 미소를 보면 행복했다.
두 번째는 영세를 받는 날 필자가 신으로부터 은총을 받고 철천지원수 같은 직장 동료를 용서해주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신념과 종교적 신념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인간의 신념은 강한 것 같아도 어느 한순간에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은 순교자처럼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정도로 강력한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영세를 받는 날, 하느님에게 원수와 같던 동료를 용서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때부터 동료가 회의 때나 모임에서 필자를 향해 공격을 해도 대응을 안 했고 그를 용서해달라고 하느님께 빌었다. 그리고 동료의 장점을 생각해보려 애쓰고 동료가 없는 곳에서 칭찬을 시작했더니 어느 날부터 행동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필자는 한 사람을 다시 얻게 되었다. 하느님과의 약속을 이행했더니 은총을 또 내려주신 것이다. 1989년 크리스마스는 이래저래 영원히 기억될 것 같다.
파워 블로거이자 미국의 미술 잡지 기자인 조이스 리(Joyce Lee·70)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의 개인 전시회를 가졌다. 그녀는 블로그(‘커피 좋아하세요’)를 시작하면서 사진에 입문하여 미국 곳곳의 자연을 찾아다니며 찍은 사진들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블로거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60세에 본격적인 기자로 데뷔했다. 그런데 그녀의 전직은 패션 디자이너. 대체 그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강한 제스처와 자그마한 몸, 진한 눈 화장, 쭈뼛쭈뼛 서 있는 머리, 영혼을 빨아들이는 목소리에서는 쉬이 범접할 수 없는 인디언 추장 같으면서 천진스런 어린왕자를 보는 듯했다.
“내가 좀 말이 많아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쏟아내야 하는 강박관념 때문에 이렇게 돼버렸어요. 나를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웃음). 그냥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도 있어요.”
조이스 리와의 인터뷰는 꼭 숨바꼭질 같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여전사의 옷자락을 잡고 마냥 헤맸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멈추고 싶은 말들이 오갔다.
Art&Culture 매거진 기자로 세 번의 사진 전시회를 가진 조이스 리는 오래전 명동에서 ‘이동희 부틱’을 운영했던 디자이너였다. 나름대로 자리 잡은 전문 디자이너였던 그녀가 미국으로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서른두 살에 낳은 딸이 하나 있어요. 그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막 조기유학 붐이 불었죠. 그때 남편의 형님이 미국에서 살았고, 딸이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해서 보내기로 했어요. 아이를 먼저 보냈는데, 처음에는 나는 갈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하지만 운명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작용을 하기 마련인가보다. 딸의 친구 어머니가 딸에게 충고를 했단다.
“그분이 ‘네 엄마가 오든지, 네가 들어가는 게 좋겠다’라고 말씀하시더라는 거예요. 바른말을 한 거지. 사춘기를 겪고 있는 자식 문제인데, 가게 문 닫고 달려갔어요. 저는 재단사 자격증이 있었던 덕분에 영주권을 얻는 것은 쉬웠죠. 그래서 미국에서도 패션 디자인 일을 할 수 있었어요.”
미국에서 뿌리내리기 위해 조이스 리 부부와 딸은 비장한 각오로 견디며 버텼다.
60세에 시작한 기자로서의 삶
그녀는 2008년 기자로 입사했다. 그때 나이가 미국 나이로 60세였으니 좀 놀랍다.
“어느 날 남편의 신장이 멈췄어요. 신장 투석을 일주일에 세 번씩 하면서 남편은 직장을 관두게 됐죠. 그런데 미국에서는 둘이 벌어도 융자를 감당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작은 아파트로 옮겨서 살았죠. 그리고 힘든 시간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으려고 시작한 것이 블로그를 통한 세상과의 소통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컴퓨터를 배우고 사진을 시작했습니다. 블로그를 하기 위해서.”
그녀는 다음 블로그의 우수 블로거가 400명이었던 시절에 그 중 한 명으로 뽑힐 만큼 성공적인 블로그 운영을 했다. 하루에 2000명 정도가 다녀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녀의 글을 눈여겨보던 사장이 그녀를 사진기자로 캐스팅했다.
“경향신문에 연재되던 안의섭의 라는 만화가 있었어요. 그 네 컷짜리 만화가 정치, 경제, 사회를 다 다뤘잖아요? 그런 느낌으로 이 여자의 글도 실어보자는 게 잡지사 사장의 의도였다는군요. 그런데 그 의도보다 내가 좀 더 잘했다고 해요(웃음). 하긴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다녔어요. 기자생활을 위해 손톱도 안 기를 정도였거든요.”
그녀는 컴퓨터를 배우고 기자가 된 게 참 잘한 일이라고 거듭 말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써주는 데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다는 것이다.
“제 첫 번째 라는 책이 나온 게 2012년이었어요.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제 책을 들고 와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어요. ‘50이 되고 갱년기가 와서 인생이 너무 슬픈데 선생은 60부터 이걸 하셨다니 놀라워요. 제가 60이 되려면 앞으로 10년이 남았는데, 10년을 더 노력하면 무엇인들 안 되겠습니까’라고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정신심리학 박사인 김효숙 교수는 조이스 리의 사진을 수천 장 넘게 갖고 있다고 한다. 그녀가 찍은 사진이 심리치료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기자의 시선으로 왜곡되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조이스 리 사진의 힘일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5일은 일하고 주말에 홀로 미국 대륙의 수천 마일을 오가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연인이 된다. 작은 체구이지만 그녀의 눈빛과 몸짓에서 뜨거운 용트림이 느껴진다. 그 에너지가 견딤의 실체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얼마 안 걸린다.
20만 번의 셔터 누름, 결국 고장 난 카메라
“닷새 동안 3000마일이 넘는 먼 거리를 혼자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네 시간 정도 잔 후 새벽 3시에 일어나 다시 작업을 시작해 정오까지 마치고 시장을 다녀왔어요.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철인 3종 경기에 나가도 챔피언이 될 거라며 혀를 찼습니다.”
그녀는 다시 태어나면 꼭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 아내가 마음 놓고 여가를 즐기며 쉬엄쉬엄 여행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겠다고 수없이 다짐한다. 그녀가 사진을 배운 것은 철저히 필요에 의해서였다.
“기자는 본격적으로 사진을 다룰 줄 알아야 하니까요. 50대 후반의 나이에 컴퓨터를 배우는데 어찌나 어려운지. 봄여름 학기와 가을겨울 학기 중 네 명의 장학생을 선발해 포토샵을 무료로 가르친다더라고요. 그게 욕심이 나서 열심히 공부했죠. 대상포진이 두 번이나 올 정도로 무리를 했어요.”
카메라 셔터 수명은 대략 15만 번 누르면 고장이 난다고 한다. 그러나 조이스 리의 카메라는 5년 정도 사용하면서 20만 번을 찍었고 결국 셔터는 고장이 나고 말았다. 셔터의 감각을 익히고자 했던 그녀의 집중력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제가 싫어하는 게 왜곡이에요. 그래서 어안렌즈는 아예 구매를 안 했어요. 줌도 잘 안 써요. 그런데 작가라는 이름을 안 쓰는 이유는 아직 카메라를 못 다루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냥 지나가다가 좋으면 찍거든요. 그러니 작가라고 말하지 못하죠.”
그녀는 글쓰기에도 욕심을 부린다.
“현재 집필중인데, 2년 후에 소설을 발표할 거예요. 제가 미국 서부의 내셔널 공원을 다 가봤는데 가장 아름다운 곳이 그랜드 티톤이었어요. 그곳에 가면 엘크 떼 수백 마리를 아침에 만날 수 있어요. 저는 엘크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남성성을 좋아해요. 그리고 버펄로, 울창한 숲, 거대한 연못과 그리즐리, 스네이크 리버도 있죠. 그곳에 가면 대자연을 만날 수 있어요. 소설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서정적인 이야기들이에요. 세계에서 최초로 한국어와 영어로 쓰인 인터넷 소설이 될 거예요.”
나의 전생은 ‘인디언’
역마살을 타고난 여자, 조이스 리는 어느덧 9년차 기자가 됐다. 인터뷰 후 얼마 있다가 잡지가 나오는데 이번에 그녀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인디언 문화다.
“요즘 미국 사람들이 자기들 역사는 아니지만 본래 그 땅의 주인공들인 인디언들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어요. 저는 이전부터 인디언에 대해 관심이 굉장히 많았는데, 3~4년 후에는 기자의 눈으로 만난 인디언들 얘기를 책으로 쓸 거예요.”
원래 미국의 인디언들은 거의 서부에 있었다고 한다. 동부에는 체로키족이 있었는데 이들이 유럽인을 가장 먼저 만나 백인 중심 인텔리 사회로 편입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서부에는 아직 야생의 문화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녀의 인디언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남다르다. 심지어 과거에 열렸던 조이스 리의 사진전 이름도 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전생에 인디언이었다고 주장한다.
“난 믿어 의심치 않아요. 그들에 대한 알 수 없는 연민이 있거든요. 그리고 언덕에서 붉은 계곡을 내려다볼 때 느끼는 감동 같은, 마음으로 통하는 데자뷔를 느껴요. 그것은 굉장한 희열이에요.”
지금 당장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결국에는 인생을 아름답게 채색해준다면 누구라도 그 험한 세상을 향해 달려갈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손주 시후의 일기를 쓰는 여전사 할머니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조이스 리의 딸은 지니프러덕션 L.A. 전산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손주는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갔는데 공부를 진짜 못해요. ‘0점’만 받아와요. 그래도 자연에 대한 감수성은 굉장히 좋아요. 이 아이에 대한 이야기, 를 요즘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어요.”
는 할머니의 시선으로 손주의 마음을 그려내는 글이다. 독특한 관점이다.
“네가 이렇게 자랐다, 할머니는 네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정말 이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 현실을 바라보는 하나의 상상인 거죠. 제 딸이 사춘기에 방황을 했어요. 저는 딸이 형제가 없어서 그렇게 방황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손주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요. 손주가 엄마랑 비밀이 있겠지만 저랑도 비밀이 있으면 좋겠어요. 자기편이 있다고 생각하면 힘들지 않잖아요.”
손주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각은 항상 밝다. ‘빵점 맞으면 어때. 그리고 설마 영어를 못하겠어? 긍정적 시각으로 미래를 보라 이거야.’ 손주 시후에게 항상 희망을 심어주는 그녀만의 특별 도구다.
“손주의 자랑이라면 유머가 풍부한 편이에요. 지금 시대는 먹고사는 걱정이 크지 않기 때문에 즐겁게 사는 게 중요해졌잖아요. 이 아이는 그렇게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손자의 개구쟁이 짓을 절대로 야단 안 쳐요. 어른을 놀려먹으려고 하는 게 아닌 이상은.”
손주가 어렸을 때 밥을 먹다가 먹던 것들을 컵에다 붓고 손가락으로 주무르는 행위를 자주 했다고 한다. 다른 식구들은 “저걸 왜 내버려둬” 하면서 경악했지만 그녀는 “지금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거다, 2년만 지나면 안 한다”라고 말했단다. 그녀는 손주가 촉감을 익히는 중이니 내버려두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손주 시후에게는 언제라도 미소를 지어주는 할머니다.
틀에 갇히지만 않는다면 시니어와 젊은이의 삶은 다르지 않다
이미 제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는 조이스 리는 멋진 인생을 살고자 하는 시니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야 이놈아 네 나이가 몇이냐?’ 하는 말이에요. 그 말을 해서 얻는 건 경멸밖에 없어요. 안 그래도 요즘 젊은이들은 노인네를 인류의 한 부족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어렵지만 앞으로 함께 나아가면 좋겠어요. 대화를 통해 지혜를 나눠주되 절대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하고, 나이 같은 건 의식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본능처럼 여겨온 삶의 철학, 느낌과 경험을 축적해 체득한 깊은 진심이 묻어났다. 조이스 리는 틀에 갇히는 것을 거부한다. 간절함을 미끼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한숨 쉬어갈 수 있는 삶의 여유를 찾았으면 하는 프레임, 그리고 그 안에는 세상 그 무엇보다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녀의 사진처럼 말이다. 그녀가 세상 사람들에게 간절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 by 조이스 리
몬순기에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대지가 거의 바위로 이어져 있는 계곡 때문에 물이 그대로 강물이 되어 내달린다. 이 물의 힘이 수수만년 이어지면서 협곡이 생기고 겹겹의 층 사이를 깎아내어 아름다운 속살을 드러낸 골짜기가 형성되었다.
산타페의 대표적인 건물은 어도비(Adobe)식 흙집으로, 해발 2200미터가 넘는 고지대인 이 지역의 혹독한 겨울과 뜨거운 여름을 잘 견뎌내도록 지어졌다. 두께가 50센티미터가 넘는 두꺼운 벽이 외부의 온도를 차단해주기 때문이다.
모래언덕 데스밸리. 여름 5월부터 9월까지는 날씨가 섭씨 50-60도를 웃돌므로 피하고 가을 한철 또는 이른 봄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이와 같은 척박한 사막의 땅에도 봄이면 야생화가 만발하고 동물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어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체계적인 의료 서비스, 문화센터, 스포츠센터에 어린이집, 뇌 건강센터까지. 경기도 용인에서 만난 삼성노블카운티는 스포츠와 문화 서비스와 함께 지역 주민과의 공존, 가족적 연대까지 추구하고 있는 하나의 마을공동체였다. 또한 자연과 도시의 장점을 혼합하여 이상적인 융합형 시니어타운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의 시니어타운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모종의 해법으로 제시될 수 있는 곳이었다. 고준호(高準浩·59) 삼성노블카운티 원장이 직접 말하는 노블카운티의 특별한 강점을 확인해 봤다.
고준호 원장은 출근하면 항상 확인하는 일이 있다. 호숫가에 산책 나온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어머님, 잘 주무셨나요?”, “아버님,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아드님은 잘 다녀가셨나요?” ,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요?”, “오늘은 패셔니스타 같아요” 살갑게 건네곤 한다. 매일 회원들을 살피고 이것저것 살뜰히 챙겨 주는 것이 몸에 배었다. 가끔씩 나누는 일상의 안부는 회원들에게 힐링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가족들보다 더 가까운 친구가 됐다. 회원들은 남 보다 못한 자식들보다 고 원장이 때로는 든든한 안식처다.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애정을 쏟는다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다.
회원들이 더 활기차고 행복한 제2의 인생을 누릴 수 있도록 일조하고 있는 고 원장은 세상 살아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시니어타운은 부자들만 간다’는 말은 좀 과장된 거죠. 부유한 어른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열심히 벌어 안정적인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정도면 부부가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저렴하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거든요. 다양한 동호회가 잘 조직돼 있어 회원들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요. 그래서 이 안에서는 교우관계가 왕성해요. 여기서는 어머님들의 활동이 활발하고요. 합창단, 당구, 사진, 탁구도 새로 배우시고, 회원들끼리 인생의 선후배로서의 교우관계로 행복한 시간을 채워 나가고 계십니다. 노블카운티 정원에서 서로 부축해 가며 다정하게 걸어가는 회원부부를 볼 때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더 편하게 해드려야지 싶어집니다.”
열심히 일하고 은퇴한 분이라면 큰 걱정 없이 비교적 품위 있게 노후를 보낼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건강하며 취미와 사교활동으로 행복을 누리면서 노후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존엄이 아닐는지.
이러한 삼성노블카운티는 2001년 5월 삼성생명 공익재단이 설립, 운영하고 있는 시니어타운이다. 건강하고 활력 넘치는 시니어가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일반세대(타워A, B동)와 일상생활에 도움이 필요한 시니어를 위한 프리미엄 세대로 구분되는 노블카운티에는 총 553세대가 입주해 있다. 지상 20층, 지하 3층 규모의 건물 2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실의 면적은 30평형대, 40평형대, 50평형대, 70평형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또한 타운 내 시설들은 지역 주민들에게도 개방되어 함께 이용하는 장소로 운영되는 등 도심형 시니어타운의 이점도 있는, 세대 간 소통으로 대표적인 시니어타운이다.
도심과 자연의 만남, 세계적으로 이런 시설은 드물다
“15년이 넘은 곳이라 여기는 외국 분들이 자주 방문합니다. 우선 외국 분들은 조경을 보며 아름답다며 놀랍니다. 그리고 지역민과 함께 쓸 수 있는 센터들이 같이 운영된다는 것에도 놀라죠. 일본도 도심형 시니어타운이 있는데 아주 도심에 있지 않으면서 자연 환경을 갖추고 지역 주민과 어울리는 곳은 거의 없어요. 노블카운티는 도심과 자연의 장점을 갖춘 시설이죠. 설립할 때부터 이런 취지로 개발한 시설은 드물어요.”
삼성노블카운티의 원장으로 취임한 지 1년 6개월이 되는 고준호 원장은 국내 최고 수준의 시니어타운 중 하나로 손꼽히는 노블카운티에 대해 세계적으로 봐도 이런 시설은 드물다고 소개했다. 그렇다고 노블카운티를 국제적으로 키우겠다든지 하는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노블카운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 더 편하고 더 만족하며 살 수 있게끔 해야겠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밝혔다.
“와서 보니 실버타운의 경영자는 반은 호텔 지배인이고 반은 아파트 관리소장이더군요. 호텔 지배인은 뭐랄까, 고급스런 고객을 모시고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역할이죠. 아파트 관리소장은 서민들이 사는 문제, 예를 들어 수도 흙탕물이 나온다, 왜 쓰레기 제때 안 치우냐, 관리비 왜 비싸냐 등등 소소한 불편 사항을 해소해 주는 역할입니다. 저는 그 롤들에 충실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고 원장은 회원들을 편안하게 모시는 게 목표라고 말하는 것처럼 특유의 소박한 분위기가 있어 보였다. 회원들 생활의 작은 것부터 다듬어 주자는 생각은 겸손함도 있지만 보다 회원들의 주거만족도를 높여 주자는 현실적인 차원도 있었다.
“우리나라 실버산업의 문제점들이 흔히 지적되는데 그런 것에 관심 갖는 것보다 왔다 갔다 하다가 마주치는 한 분 한 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거죠. 대부분의 회원님들이 ‘여기가 천국이야’라고 말씀하시는 게 여기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받는다가 아니라 그런 시스템에 만족하시는 것이라고 봅니다.”
나이 들면 모여서 살아야 한다
고 원장은 자신이 와서 새롭게 한 건 하나도 없고, 이미 구축된 시스템이 훌륭하게 움직이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병철 회장님은 노블카운티를 어떻게 지으라고 말씀은 안 하셨고 복지의 사각지대인 의료, 육아, 여성, 노인 문제에 뭔가 기여할 수 있는 걸 하라고 공익재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도적으로 만들어진 게 삼성의료재단이고 두 번째는 어린이집이었으며 다음이 노블카운티였죠. 노블카운티를 지을 때는 이건희 회장님이 선대 회장님의 마인드를 갖고 노인 복지 사업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노블카운티를 지으면서 이건희 회장님이 지시한 게 하루 종일 어린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고 원장은 노블카운티에 오기 전에는 시니어 주거시설에 대해 호감이 없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개인적으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시설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블카운티와 함께 시니어타운을 접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나이 들면 모여서 살아야겠구나 싶어요. 안전에 관한 문제가 가장 큽니다. 의료적인 안전도 있고 생활 안전, 보안 등의 문제도 있어요. 시니어들 집은 방범에 다소 허술하기 때문에 범죄 등에 취약하고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도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전철역까지 가는 게 다 건강 면에서 리스크가 돼요. 한마디로 안전 리스크에 항상 노출돼 있는 게 시니어입니다. 특히 낙상이 문제죠. 넘어져서 다치면 그로부터 노환이 시작돼요. 삶의 질이 떨어지고 의료비 지출 커지고 운동을 못 하니 건강도 나빠지고…. 특히 80세가 넘어가면 그런 리스크가 항상 있게 됩니다. 아파트에 살아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관심이 있나요? 그런데 여긴 식사할 때 다 같이 모여요. 산책할 때도 모이고. 그리고 직원들이 항상 보고 있고. 그래서 혼자 살 때 발생하는 리스크가 없어요. 단체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모여 사는 게 유리할 수 있는 겁니다.”
노후인구 급증, 이들의 주거를 충족시킬 방안 조성해야
노블카운티의 입주회원들 나이 평균은 83.5세. 부부는 35%정도고 65%가 싱글이다. 남녀 비율은 7:3으로 7이 여자다.
“당뇨병을 가진 분들이 많아요. 이분들 식단은 별도로 차려 드립니다. 그 외에는 집 밥처럼 만들고 있어요. 건강식만 챙기는 게 아니라. 제일 인기 있는 메뉴는 냉면이죠. 그 외에도 다양한 메뉴를 제공해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가 아니라 영양사, 주방장 등을 직접 고용하여 자체적으로 만드는 음식들입니다.”
노블카운티에서 일하는 스태프는 총 450여 명에 달한다. 이 많은 숫자는 노블카운티에 다른 시니어타운과는 다르게 지역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스포츠센터 등의 시설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설 관리 감독 및 프로그램 제공과 강사 등을 위한 다양한 인력들이 노블카운티에서 일하고 있다.
“시니어타운을 경험해 보니 어른들에게 권할 만한 시설이 전국에 얼마 되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전국에 수없이 많은 요양시설들이 있는데, 시니어타운 같은 양로시설도 많이 만들어야 하지만 요양시설은 정부에서 정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민간부문도 계속 활성화되어서 시니어들이 믿고 갈 수 있는 곳이 많아져야 한다고 봅니다. 노블카운티는 비싸니까(웃음). 그런데 그 숫자가 너무 적어요. 양로시설은 신뢰도가 확실한 곳이 20곳도 채 안 될 거예요. 양로시설은 요양시설과 달리 초기 투자가 필요한데 정부를 탓할 건 아니지만 대기업들이 투자를 하게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기업들은 안 그러면 안 해요. 특히 요즘 기업주들은 젊어져서 이런 데 신경을 잘 안 쓰거든요.”
고 원장은 사회공헌도 좋지만 그보다는 기업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명분은 창대하되 운영은 기업답게 하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걸 사회공헌이라고 하면 할 기업들이 없어요. 그렇게 접근하면 안 되고 기업 활동으로 하게 해 주면서 경영 이념을 공익사업으로 하면서 운영하게 해 줘야지 공익사업이라고 하면 누가 합니까. 정부에서도 지원해 주고, 운영이 정상화되면 그 다음부터는 민간 사업자들도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은 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고 해야죠. 공익사업으로만 생각하면 안 되는 게 개인들도, 기업들도 이윤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움직이거든요. 과거 기업 1세대들은 국가에 기여해야 한다는 마인드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닌 거 같아서 더 그렇습니다.”
공부와 함께 인생 2막 설계해요
고 원장은 삼성생명에서 전무로 은퇴한 후, 삼성생명에서 운영하는 재단으로 다시 와서 일하고 있는 셈이다. 일종의 재취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제2의 취업에 성공한 셈이죠. 솔직히 인생 2막이라고는 생각은 안 하고 1막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시작한 직업이 과거에 비해 다른 점이 있을까?
“일은 현업에 있을 때보다 적죠. 다른 부서랑 협업하고 경쟁한다든지 하는 일은 없으니까요. 그런 면에선 업무강도는 높지 않은데 끊임없이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입주자들의 불편이 늘어나고 시설은 노후화됩니다. 그런 면에선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인생 2막을 보다 청년다운 마음으로 준비하고 싶다고 말하는 고 원장은 나이 듦에 대하여 ‘좋다’라고 표현했다.
“청춘예찬이란 말도 있지만 20대, 30대 시절의 청춘이 아름다운 건 아닌 거 같아요. 투쟁적이고 경쟁적이라서 힘든 시기죠.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피해의식도 많고. 다시 돌아가면 절대 그때로 가고 싶진 않다는 말이 맞는다니까. 피곤한 시대였으니까요.”
나이 듦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고 원장의 생각에는 시니어타운의 관리자를 호텔 지배인이자 아파트 관리소장이라고 칭한 그 특유의 담대함이 있었다.
“나이 들면 성공에 대한 부담, 자녀교육에 대한 부담, 가장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나이 먹으면 의욕이 없어지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세상을 다 알고 달관할 줄 알았는데, 끊임없이 공부해야 해요. 그런 면에서 좋아요. 말하자면 나이 들었다는 건 진짜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거예요. 학교 다닐 때는 쓸데없이 뭘 배운 건지 모르겠어요(웃음). 대부분의 지식은 사회에 나와서 배우게 되잖아요. 정작 학생일 때는 정말 필요한 공부를 못 했던 거죠. 나이 든다는 게 그래서 좋은 거 같아요. 앞으로 나이 듦으로써 겪는 또 다른 낯선 경험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어요.”
소중한 삶을 위한 새로운 시도가 더 큰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고 원장의 그 기다림은 더욱 뜻 깊은 것이리라.
>>삼성노블카운티
삼성노블카운티는 약 22만4000㎡(6만8000여평) 부지 위에 독립생활이 가능한 타워 동(2개동 553세대, 30~72평)과 치매·중풍 등의 노인성 만성질환이 있는 경우 24시간 간호와 간병을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요양센터인 너싱홈(178 베드, 1, 2, 4인실)을 운영하고 있다. 입주에 필요한 비용은 입주 거실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타워 동 36평(전용 18평)에 입주하는 경우 보증금은 3.5억~4.8억원, 월 생활비는 독신 210만원, 부부 340만원 정도이다. 보증금은 퇴소 시 전액 반환되며, 생활비는 회원 전용 식당에서 맛과 영양, 건강을 고려한 식사, 청소 및 침구류 세탁, 부대시설 이용, 세대 관리비 등이 포함된 금액이다.
정부 부처들이 세종으로 옮겨간 지 5년이 지났다. 행정 능률 저하, 시간과 국고 낭비 등의 비효율성은 예상한 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최근에는 ‘세종섬’에 갇혀 있는 공무원들의 문제가 제기되더니 급기야는 정치권에서 행정수도를 이전하자는 주장이 회자되기에 이르렀다.
세종시, 정부를 반으로 쪼갠 기형적 도시
‘세종시의 저주’라는 말까지 만들어낸 세종특별자치시는 기형적으로 탄생했다. 정부의 최고 수뇌부와 일터는 서울에 남겨둔 채, 몸통만 허허벌판 세종으로 갔다. 공무원들은 국회의 잦은 호출에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정부청사 세종시 이전 후 아직 어린 자녀들을 둔 젊은 공무원들은 가족들과 함께 내려가 거주하는 경우가 많지만 장년층 공무원들은 혼자 내려가 주말부부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세종시로 내려간 후 이직을 고려하는 공무원들이 늘고 있다고 하니 탈(脫)관료 흐름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다. 목요일만 되면 주말을 서울에서 지내려는 공무원들로 세종청사 전체가 파장 분위기가 된다는 현지 소식도 전해진다. '육지의 섬'이 되어버린 세종시의 괴이한 풍경이다.
국무회의 주재와 장관 집무는 세종시에서
정부 부처의 업무 효율성을 위해 이제는 대통령이 세종시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장관의 직접보고를 받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무릎을 맞대고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들으면 무엇보다 국민과의 소통에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장관의 집무는 원칙적으로 세종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각 부처 공무원들을 제대로 지휘하고 사기를 북돋울 수 있다. 물론 청와대와 국회가 서울에 있는 상황에서 세종시에만 눌러앉아 있을 수 없는 입장도 이해는 되지만 공무원들의 기강해이를 탓하기 전에 장관부터 세종시에 상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최근 ‘성과급제’ 문제로 노동현장이 논쟁의 중심에 섰다. 공무원도 능력만 있으면 대기업보다 더 많은 연봉과 파격적인 승진 기회를 보장해 사기를 올려줘야 한다. 그러면 유능한 인재의 보신주의 행태가 사라질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공무원 숫자를 줄이면서 처우는 개선해 소수 정예화 방안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
누구나 살고 싶은 명품도시로
이제 와서 정부청사의 세종시 이전을 뒤집을 수는 없다. 세종시 이전에 따른 부작용을 줄이려면 주저앉아 있는 공무원들의 사기를 북돋울 수 있는 대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장·차관은 서울에, 간부들은 길 위에, 실무자는 세종청사에 떨어져 있는 비효율적인 행정 시스템부터 수정해야 한다.
정부 부처와 국회와의 업무도 상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지금처럼 국회의 시도 때도 없는 호출에 공무원들이 서울을 오가느라 업무의 질을 떨어뜨리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1급 이상의 정무직 외에는 국회 호출을 엄격하게 금해야 한다. 업무 방식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뜯어고쳐야 한다. 우선 산더미 같은 서류를 없애고 전자문서 유통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세종시에는 도시 기반 인프라도 태부족하다. 장년층 공무원들이 주말부부로, 젊은 공무원들이 불안을 느끼면서 거주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다. 따라서 유수대학, 종합병원을 서둘러 유치하고 놀이공원, 극장 등 문화시설을 확충해서 살고 싶은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
천재 피아니스트와 괴짜 음악교수의 소통과 우정을 그린 음악극이다. 과장된 유쾌함 속에 비극의 역사를 묻고 살아가는 주인공 마슈칸 교수 역을 맡은 배우 이호성을 만나봤다.
작품을 선택하게 된 계기
"욕심이죠. 좋은 작품을 해보고 싶은 욕망은 모든 배우에게 다 해당할 거예요. 특히 이 작품이 2인극이라는 데 더 매력을 느꼈어요. 모노드라마나 2인극의 경우, 무대에서 더 많은 연기와 주장을 하고, 나를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니까요. 스케줄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버거운 점이 있지만, 그 과정이 고통스럽더라도 한편으로는 그 고통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왜 소화를 못 할까?’ 고민하면서 그 생각을 화두 삼아서 인물에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갈피를 잡기도 하거든요. 힘들어도 그런 짜릿한 맛이 있어요."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
2인극이기 때문에 외워야 할 대사 분량이 많아서 부담스럽긴 하죠. 내가 실수를 해서 상대역을 하는 젊은 배우가 당황하면 결국 무대를 제대로 형성화하지 못하잖아요. 파트너나, 연출, 관객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겠다는 게 목표예요. 그래서 지금은 욕심을 많이 줄였어요. 대사를 정확히 외워서 적어도 민폐는 끼치지 말아야죠. 사실 제가 박치고, 목소리가 저음인데 우리 음악극에서 불러야 하는 노래가 굉장히 고음이거든요. 고음을 내는 두려움이나 호흡이 부족하긴 하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다는 것, 젊은 배우 못지않게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런 오기를 부리지 않으면 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느끼기 어려울 것 같아요.
주인공과 닮은 점이 있다면
먼저 똑같이 홀아비라는 거죠(웃음). 그리고 고독하다는 것. 사람의 살결도 그립지만 나와 접촉하거나 부딪히는 사람의 마음을 그리워한다는 게 닮은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들 하잖아요. 연애해라 그래도 외로울 것이다, 연애하지 마라 그래도 외로울 것이다. 결국 이렇든 저렇든 인간은 외로운 존재라는 거죠. 그런 점에서 관객도 공감할 부분이 있을 거예요.
작품 속 사제관계에 대해
두 인물 다 보편적인 캐릭터는 아니죠. 젊은 괴짜 학생과 늙은 괴짜 교수가 부딪히고 언쟁도 하지만 자연스럽게 대화도 하며 서로를 이해해요. 알고 보면 두 사람 모두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죠. 상처나 외로움 때문에 자기방어를 하기 위해 거만한 척 소리를 내는 것이지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가는 관계입니다.
고독을 다스리는 방법
사람들과 모여 웃고 떠들 때는 즐겁지만, 막상 자리에서 나와 헤어지고 나면 다들 홀로 집에 가잖아요. 죽음도 마찬가지고요.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라도 함께 세상을 떠날 수 있나요. 인간은 누구나 다 외롭고 고독한 존재예요. 그러니 오히려 즐기는 게 낫다는 거죠. 그렇다고 항상 고독한 건 아니잖아요. 사람을 만나면 이성 동성을 떠나 그이를 사랑하고요. 그렇게 따로 또 같이 고독을 친구처럼 여기며 아가야겠죠.
>>배우 이호성
뮤지컬 , 연극 , 외 다수, 영화 , 드라마 , 등 출연.1988 백상예술대상 신인상, 1993 제30회 동아연극상 남우주연상 등 수상.
>>음악극
일정 9월 21~10월 23일
장소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연출 김지호
출연 이호성, 안석환, 이현욱, 강영석
박원식 소설가
구불구불 휘며 아슬아슬 이어지는 가파른 비탈길의 끝, 된통 후미진 고샅에 준수한 한옥 한 채가 있다. 집 뒤편으로 세상의 어미로 통하는 지리산 준령이 출렁거리고, 시야의 전면 저 아래로는 너른 들이 굼실거린다. 경남 하동군의 곡창인 악양면 평사리 들판이다. 광활한 들 너머에선 섬진강의 푸른 물살이 생선처럼 퍼덕거린다. 호방하고 수려한 산수 풍광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요지(要地)에 터를 잡은 셈이렷다.
증권사 지점장 출신인 조동진씨(58)가 동갑내기 아내 고미선씨를 대동하고 이곳 지리산 자락으로 귀촌을 한 건 9년 전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지리산을 애호한다. 지리산의 너그러운 품에 병아리처럼 포근하게 안겨 오순도순 오붓하게 살아갈 꿈을 꾸기도 한다. 조동진씨가 그랬다. 서울에서, 분당에서, 증권맨으로 뛰었던 그는 휴가철이면 매번 지리산을 찾았다. 그렇게 지리산과 교제를 하는 사이 담뿍 정이 들었다.
그 대상이 사람이건 자연이건, 정 들어 사무치게 그리우면 투신하게 마련이다. 나, 퇴직하면 지리산에 살래! 그는 그렇게 안으로 다지고 밖으로는 광고를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을 저질렀다. 인생의 항해를 결정하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돛이다. 대양의 바람은 한 곳에서 불어오지만 돛의 향방에 따라 어떤 배는 동쪽으로 가고, 어떤 배는 서쪽으로 간다. 조동진은 의지의 돛, 지향의 눈을 돋워 지리산 산골을 겨누었던 것이다. 사연의 보따리를 헤쳐 볼까.
“악양의 산자락에 있는 감나무 과수원 3306㎡(1000평)를 미리 사들이는 것으로 거사를 도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대충 다 컸겠다, 아내만 끌고 내려가면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아내가 손사래를 치더라고요. 집사람이 원래 도회적 성향이라서 시골살이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질 못했던 겁니다. 세뇌교육에 들어갔죠.(웃음) 그러던 중 아내가 원인 미상의 중한 폐질환에 걸렸습니다. 의사들이 말하길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이라 하더군요. 그렇다면 이걸 어떡하나. 그래, 자연요법으로 고쳐보자. 이왕지사 땅도 사놨으니까 산골로 가자. 그렇게 아내와 합의를 보고 드디어 시골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던 겁니다.”
“지리산의 그 무엇이 그렇게도 좋았을까?”
“제가 실은 대학을 다닐 때부터 지리산에 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었는데요, 그 웅장한 풍경에 사로잡혔던 것 같아요. 게다가 저는 바닷가에 가면 힘이 쭉 빠지는 반면, 산에 가면, 특히나 지리산에 가면 힘이 난다는 걸 자주 느꼈어요. 체질적으로 기질적으로 잘 맞는 거겠죠.”
“한옥이 매우 근사해요. 저토록 야무진 한옥을 지은 특별한 이유가 있겠죠?”
“아내의 폐질환을 다스리기엔 한옥이 유리하다는 생각이었어요. 황토와 목재를 재료로 한 한옥은 숨 쉬는 집이라 하죠. 그러나 남들에겐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건축비가 너무 많이 들고, 공기(工期)도 길고, 관리도 힘드니까.”
“저는 말이죠, 이왕에 산골의 자연과 야생을 벗 삼아 살 거라면 작고 소박한 집을 짓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 아니랴. 동감입니다. 그저 값싸고 편리한 현대식 집을 짓는 게 좋을 겁니다. 다만, 사랑채 정도는 제법 운치를 풍기는 작은 흙집을 짓는 것도 재미날 거예요.”
조동진씨의 거처 한편엔 나무로 골격을 세우고 흙으로 벽을 쌓아 지은 사랑채가 있다. 누각이 딸려 있는 소담한 별채로 조씨가 손수 설계해 지었다. 여자로 치면 음전하면서도 은근히 요염한 멋을 풍기는 가인을 닮은 집이다. 부부가 수시로 눈을 맞추며 단란하게 속닥이는 데에 사랑채의 용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드는 벗들과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일에도 쓸모가 많겠지만 말이다.
농사일은 노동이 아니라 축제
조씨의 섬세한 조력과 자연의 협찬 덕분일 테지. 다행스럽게도 아내의 병증은 현저하게 개선되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시골 생활이지만 마을 주민들과의 관계에도 아무런 흠결이 없다고 한다. 감 농사도 순항이다. 한적한 산골에 입장했으니 그저 한가하게 노닥거리며 자연을 즐기면 그만일 성 싶지만, 조동진씨는 농사일이 오히려 구미에 맞다. 애초에 사들인 땅이 감 과수원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감 농사에 뛰어들 수 있었다.
“노후의 직업으로 농사처럼 이상적인 게 없습니다. 정년퇴직 없지, 누가 간섭하지를 않지, 적당한 육체노동으로 건강을 챙길 수 있지, 정직하게 땀 흘리는 농사일은 단순히 노동이 아닌 축제에 가까워요.”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직업이 농사라고들 해요. 벌이가 되질 않는다는 거죠.”
“저도 경제적인 면에 관한 두려움이 많았지만 적절히 극복해 왔어요. 2314㎡(700평) 규모의 감 농사를 지어 곶감이나 감식초를 만들어 판매를 하는데 연간 1200만원에서 1500만원 정도의 수익을 올립니다. 그 정도면 무난해요. 시골에선 말이죠, 골프 할 일 없지, 노래방에 가서 도우미를 부를 일 없지, 수입이 적더라도 지출을 줄일 수 있어 생각보다는 여유를 부릴 여지가 많습니다.”
흔히 귀촌과 귀농을 구분해서 선택을 하거나 판단을 한다. 조동진씨는 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성공한 귀농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농사에 목을 걸다시피 들입다 땅을 파는 인물은 아니다. 농사에 생활의 한 자락을 걸침으로써 한결 뿌듯한 실속과 실리를 구할 수 있다는 이치를 터득했을 뿐이다. 그의 시골살이 촉이 이렇게 살아 있다.
“제 경우는 귀농을 가장한 귀촌인이라 봐야 정확할 겁니다. 그저 작은 텃밭을 일궈 소소한 먹거리를 거두는 귀촌 생활도 즐겁겠지만, 농사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도 신나는 일입니다. 남자는 퇴직을 했더라도 명함이 있어야 해요. 992㎡(300평) 이상의 농사를 지을 경우엔 누구나 명함을 만들 수 있어요. 일테면 ‘지리산 농원 대표이사’라거나, 그런 식으로 떠억 명함을 새길 수 있는 거예요(웃음). 992㎡(300평) 정도의 농사만 지으면 농업인 등록을 할 수가 있으며, 온갖 지원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걸 왜 마다할까? 가급적 농업인 자격을 획득하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한 달에 하루만 일해도 폼 잡을 수 있는 게 농사에요. 시골에선 말이죠, 하는 일 없이 늘 술이나 마시고 돌아다니면 욕먹습니다. 그러나 농업인으로서 일을 할 경우엔 술을 퍼마셔도 욕먹을 일이 없어져요.”
“사전에 열심히 귀농교육을 받고 입촌한 사람들마저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 아녜요?”
“도시 인구를 분산하고, 실업을 해소하고, 도농격차 해결을 위해 정부에서 농촌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갖가지 지원 정책을 펼치지만, 사실 허점이 아주 많습니다. 귀농교육이랍시고 억대 수입이니, 특작물이나 유기농을 운운하며 과도하게 분위기를 띄우지만 사실 허황한 얘기들에 불과해요. 가령, 농사 경험이 없는 사람이 유기농에 도전하는 건 독립운동을 하는 것처럼이나 어렵고 위험합니다. 제가 힌트를 하나 드리죠. 특수작물이나 유기농을 요란하게 하려 하지 말고, 그 지역의 특산물을 하라는 것! 그래야 생산이나 유통의 이점을 누릴 수 있으며, 원주민들과의 소통도 빨라져요.”
“빈손으로 귀촌할 경우엔 어떤 재주를 발휘해야 하죠?”
“도시에서는 움직이면 돈이 나가지만 시골에선 움직일수록 돈이 들어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양육할 자녀가 없이 부부만 귀농할 경우, 빈손으로 시작해도 무방해요. 퇴직을 한 시니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건강만 있다면, 자세를 낮출 수 있다면, 늘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 일당 10만원짜리 일감을 찾는 건 일도 아니니까. 한 달에 열흘만 날품을 팔아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는 겁니다. 문제는 겸손한 마음, 열린 태도이겠죠. 퇴직을 뜻하는 리타이어(retire)는 ‘타이어를 교체한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은퇴 뒤 시골에서 살고자 한다면 마음 자체를 싹 바꿔야 합니다. 돈보다는 마음의 행복과 즐거움을 구하는 쪽으로 삶의 잣대가 변해야 하는 거죠.”
시골에서 오히려 진정한 문화생활 누려
사람들은 흔히 시골의 문화적 환경이 열악할 것으로 믿는다. 갖가지 공연과 전시회 따위가 펼쳐지는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살다 보면, 그저 주야간에 앞산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칫 우울증에 빠지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조동진씨에 따르면 이는 미신에 가깝다.
“서울에서 공연 구경을 가는 건 어쩌다 한번 아닐까? 공연물이 많다지만 막상 향유하긴 어려운 게 도시살이에요. 요즘의 시골엔 지역축제나 산사음악회 같은 문화 행사가 잦습니다. 아이돌 가수에 밀린 7080 가수들까지 대거 참여해요. 저는 이곳 공연장에서 소찬휘라거나 김재동 같은 연예인들을 처음 봤어요. 게다가 관람료는 전적으로 무료에요. 뒤풀이엔 술과 음식이 푸짐하게 나오고요.”
“풍부한 상상력으로 바라본다면 산야 자체가 뮤지엄이겠죠.”
“제가 도시에 살며 열네 번이나 이사를 했어요. 이사 때마다 고려한 게 창밖으로 달을 볼 수 있느냐는 점이었어요. 여기 산골의 달밤은 얼마나 좋은지요. 사랑채 정자에 앉아 달빛 흥건한 마당을 바라보며 술 한 잔을 하는 일은 최상의 낙입니다. 달 없는 밤엔 별들이 허공에 모이죠. 때로 반딧불이가 공연을 하고, 빗소리가 악곡을 연주하고, 사시사철 모든 풍경이 장관입니다. 뒷산의 야생화들이 뿜는 향기의 잔치는 또 얼마나 행복한지요. 이 다양한 자연 현상들이 명약이자 보약입니다. 시골엔 의료시설이 빈약하다는 소리들이 있지만, 제 아내가 병을 다스린 걸 보면, 저 산야 자체가 하나의 병원이라는 실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앗! 시골 예찬이 극에 달하셨다(웃음). 도대체 아무런 불만이 없는 거예요?”
“제가 외환위기 때 쫄딱 망해 시장에서 전을 벌리고 옷을 팔기도 했어요. 박수를 치며, 싸요, 싸요! 외치면서요. 그런 고통의 시절을 겪은 게 인생의 디딤돌이었습니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나름 깨달았어요. 그러하니, 제가 원해서 들어온 산골에서 무슨 불만이 있겠어요? 이제 제가 해야 할 일 하나가 남았는데요, 귀촌을 희망하는 은퇴자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해서, 최근 지리산웰빙귀농학교라는 걸 세웠어요. 대차게 밀어붙일 참입니다(웃음).”
10년 가까이 흐른 시골 생활을 통해 조씨는 어언 선수에 이르렀나? 귀촌에 관한 낙관과 긍정에 경계가 없구나.
>>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사람들이 사는 곳은 다 비슷했다. 미국인들에게도 희로애락이 함께 공존했다. 겉으로 봐서는 냉정하며 대화가 차단될 것만 같은 코가 높은 사람들에게도 눈물이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감정이 있게 마련이다. 단지 서로가 소통이 되지 않을 뿐, 어느 정도 사이가 통하면 깊숙한 대화가 오고 가기 시작한다. 더구나 미국인들은 조금만 친해지면 하루의 일과를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강아지의 생활사까지도 털어놓는다.
어느 날인가, 젊은 백인 한 사람이 새 손님으로 가게를 찾아왔다. 키가 훌쩍 크고 코가 높다란 전형적인 미국인, 라스트 네임(성)이 코넬리라는 사람이었다. 훠스트네임(자기이름)은 데이비드라는 이름으로 필자의 남편(데이비드)과 이름이 같았다. 첫 만남 이후부터 그는 어찌나 상냥하고 친절한지 필자 부부를 만날 때마다 얼굴에 하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코넬리는 자기의 직업이 돌 수입업자라고 진지하게 소개를 했다. 그전에는 음악을 아주 즐기는 뮤지션이었다며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다양하게 늘어놓았다. 한 6개월 이상을 단골로 열심히 필자의 세탁소를 드나들었다. 어느 날, 그가 불쑥 한 여인을 데리고 왔다. 얼굴이 까맣고 키는 자그마하고 예쁘장한 그녀가 자기 와이프라며 극진한 소개를 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열 살 이상은 되어 보였다. 와이프라는 까무잡잡한 여자는 누가 봐도 귀엽고, 이목구비가 아주 아름답게 생겨 남자들이 한눈에 반할 정도로 예쁘게 생겼다. 미국인들은 때로는 자그마하고 예쁜 동양인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필자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다가 어떻게 만났느냐고 문득 물어보았다.
그녀는 브라질 여성이었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남편인, 코넬리가 돌 사업으로 브라질을 갔다가, 그곳에서 만나서 그녀를 미국까지 데리고 왔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척 사이가 좋은 신혼부부가 깨가 좌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필자 부부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사랑 행위가 절절 넘쳐흘렀다.
일 년쯤이 지나, 하루는 코넬리가 얼굴에 슬픔이 가득한 채로 힘없이 가게로 들어섰다. 필자 남편이 서둘러 그를 맞이했고 무슨 일이 있느냐고 안부를 물었다. 그는 서슴없이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와이프가 이혼을 원하는데 어쩌면 좋으냐는 것이다.
더구나 오랜만에 겨우 임신을 했는데 막무가내라며, 뜻이 안 맞아 부부싸움을 왕창했다고 하는 것이다. 필자 부부는 무어라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저 참고 기다리라는 말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새파랗고 맑은 그의 눈에 진심 어린 눈물이 고여 왔다.
필자의 남편이 두 손을 잡고 안심을 시키며 함께 걱정을 해주었다.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나 그가 심각한 얼굴로 또 찾아왔다. 결국 와이프가 집을 나갔다고 울먹거리며 깊은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필자 부부는 직접 브라질로 가보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저 넋두리를 들어주는 것도 큰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단지 받아주고 몇 마디 해 준 것 밖에는 없었다. 그 후로 한 달쯤이나 지나 코넬리는 그녀를 브라질에서 직접 데리고 돌아왔다. 어느새 피부가 더 새까매진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져있었다. 코넬리의 얼굴에서도 다시 환한 모습이 보여왔다.
배가 남산만 한 그녀는 배를 까뒤집어 보이며 자랑을 서슴지 않았다. 아기가 들어있는 바가지 모양의 둥그런 배 위에 사인을 하라고도 했다. 그들의 묘한 문화였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미국 남녀의 관계였지만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그들도 필자 부부를 다시 만나게 되어 매우 기쁘다며 반가움에 서로 허그를 하며 함박 웃음꽃을 피웠다.
코넬리는 아기를 낳기 전에 필자 부부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겠노라고 했다. 쾌히 승낙을 하며 필자 부부는 선물로 코리안 바비큐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미국 사람들은 코리안 바비큐를 무척 좋아라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의 만남을 기약하며 손을 흔들며 서로 헤어졌다.
얼굴이 까맣고 자그마한 그녀는 배가 불쑥 나왔지만 엉덩이를 씰룩대고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나갔다. 촐랑대는 어리고 까만 남미 임산부의 모습이었지만 두 부부의 사랑이 참으로 아름답고 흐뭇했다. 결국 코넬리 눈물의 하소연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사람이 때로는 하소연을 국경 넘어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도 약이 되는 것만 같았다.
한국은 태어나고 자라난 고향 나라였지만 생활에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동안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많아 흥분을 하기도 했다
남편이 처음으로 혼자서 외출을 했다. 버스와 전철을 타고 혼자 볼일을 보고 와야만 하는 일이었다. 필자는 남편 혼자 보내는 것이 어딘가 모르게 불안했지만, 철저하게 채비를 갖추고 나가도록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간 지 15분 만에 벨이 울린다. 무슨 일인가 해서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전화를 열었다. 갑자기 기가 막힐 일이 벌어졌다.
“당신! 빨리 이리로 와. 지금 버스 안에 있는데 나, 눈이 찢어졌어!” 라며 벌벌 떨고 있었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싶어 정신을 못 차리겠다. 필자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시 차분하게 물었다. “뭐야? 갑자기 무슨 말이야. 일단은 버스 기사를 꼭 붙잡고 병원으로 가요. 지금 바로 출발을 할 테니까.”서둘러 아파트 주차장으로 향했다. 다시 전화를 했다.
연락이 안 되니 궁금하기만 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난감했다. 지하 주차장 차에 앉아 전화만 기다렸으나 속이 타오른다. 병원은 다행히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차를 몰고 단숨에 달려갔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모르니 답답하기만 했다. 덜덜 떨려와 차를 대충 세워놓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남편은 대기실 의자에서 어느새, 눈 옆에 두툼한 거즈를 대고 퉁퉁 부어 넋을 잃고 있었다. 피가 너무 많이 흘러, 급하게 지혈만 시키고 대충 치료를 했다고 했다. 다시 몇 바늘 꿰매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병원에 남편이 덜렁 혼자 와서 앉아 있었다. 필자는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냐고 물었다. 남편은 너무나 어이가 없다며 멍하니 말을 하지 못 했다.
정거장이 다가와서 버스 안에서 막 내리려고 하는데 기사는 급정거를 했다고 했다. 당연히 승객들의 몸은 흔들렸고 또 버스가 완전히 정지가 되지 않았는데,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문 앞에 서있는 남편의 얼굴을 문짝이 때린 것이다. 안경이 깨지고 그 안경 유리에 눈 옆이 찢어진 것이었다. 얼굴은 순식간에 피범벅이 되었다고 했다.
운전기사는 다친 남편을 몰랐는지 무시하고 다음 정거장으로 향했다. 남편이 앞으로 다가가 다쳤다고 하니, 무조건 내리라고 했단다. 못 내린다고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하니, 전화번호만 달랑 주고는 무작정 또 내리라고 했단다. 다행히 한 여자 승객이 손수건을 주었다고 했다. 또한 증인이 되어주겠다며 연락처도 주었다고 했다.
남편은 하는 수 없이 혼자 내려서 한 손으로 눈 옆을 손수건으로 감싸고, 길거리에 서서 택시를 잡았다고 했다. 이윽고 한참 만에 근처 병원에 겨우 와 있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듣고 보니 너무 황당한 일이라 말문이 막혔다.
필자는 우선, 남편이 받아온 전화번호로 연락을 취했다. 기사는 자기 소관이 아니니 사고 담당에게 하라고 퉁명스럽게 말을 한다. 다시 전화를 받은 남자는 버스회사 사고 담당 과장이라고 했다. 그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단호하게, 자기들이 아무 잘못이 없으니 한 푼도 물어줄 수가 없다고 하며 아주 기분 나쁘게 전화를 끊었다. 아마 기사가 먼저 무슨 말인가 서로 소통을 한 모양이었다.
말할 수 없이 참으로 황당하고 기가 막혔다. 환자가 우선이니 담당 의사를 만났다. 상처에 대한 의견을 듣고 상황을 이야기했다. 의사는 경찰서에 신고를 먼저 하고 사고처리를 하라고 했다. 임시 처치를 했으니 빨리 신고 한 후에 수술을 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 필자 부부는 관할 경찰서로 달려갔다. 담당 형사를 만나 서둘러 접수를 하고, 다시 병원으로 달려갔다.
무려 10바늘이나 꿰맸다. 바로 눈 옆이 너덜너덜 찢어져 아주 힘이 들었다고 했다. 의사는 천만다행이라며 하마터면 눈을 다쳐 큰일 날 뻔했다며 위로를 했다. 바로 눈 옆이라 위험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몰랐다. 필자 부부는 일단은 모든 수습을 하고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을 해보아도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미국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미국에서는 버스 안에서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기사는 일단 모든 승객들을 다 내리게 하고 무조건 정차를 한다. 바로 신고만 하면 구급차가 달려오고, 아무리 작은 사고도 사람이 최우선이다.
그러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 가. 다친 사람이 혼자서 피를 감싸고 모든 일을 다 수습해야 했다니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더구나 아무 잘못이 없는 승객이 무슨 죄란 말인 가. 필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인터넷을 찾았다. 시민 콜 센터라는 곳이 있었다. 혈압을 올리며 설명을 했다. 결과야 어떻든 간에 우선은 친절하게 접수를 해주니 그나마 고마웠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또 버스회사를 찾아 연락을 취하고 하소연을 했으나 답은 헛수고였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약이 올라 밤잠을 한숨도 못 자고 대책을 궁리했다. 나라가 겉으로는 놀랍도록 눈부신 발전을 했으나, 사람을 위한 기본적인 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무언가 분명한 진실을 규명하고 조금은 변화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언젠가 누군가는 또 다칠 것이고 그때마다 버스회사의 갑 질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당당할 것이다.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필자는 끝까지 가보자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헛수고 짓이라며 버스회사의 횡포를 묵인하고 있었다.
박원식 소설가
귀촌이란 단순히 도시에서 시골로의 이주라는, 공간적 이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삶의 꿈과 양상, 지향까지 덩달아 변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익숙했던 거주지에서 전혀 다른 장소로 주저 없이 옮겨 간다는 점에서는, 귀촌이란 안주하지 않는 정신의 소산이기도 하다. 충북 괴산의 산골에 사는 박미향(58)·엄팔수(61) 부부는 귀촌으로 인생 제2막을 시원하게 열어젖혔다.
7월의 성성한 초록 숲이 바람에 술렁거린다. 숲 사이 오솔길을 걸으니 나무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향훈이 상큼하다. 저 멀리 칠칠하게 늘어선 산봉우리들은 비안개의 희롱에 취해 아련하다. 계곡에선 솰솰 냇물이 흐르며, 머잖은 곳엔 호수가 있다. 사방팔방으로 멋들어진 풍광이 펼쳐진다. 박미향 부부의 시골집은 이 모든 수려한 자연경관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계곡 쪽 둔덕에 자리 잡았다. 터를 잡은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구나.
박미향 부부가 산골에 둥지를 튼 건 13년 전의 일. 원래는 청주 시내 아파트에서 살았다. 도회의 아파트생활은 나름대로 안전하고 쾌적했기에 딱히 불만이랄 건 없었단다. 그러나 사람에겐 못 말릴 취향이라는 게 있는 법. 중년 나이에 접어들던 즈음, 박미향씨는 자신의 내부에서 자글거리는 어떤 갈증을 느꼈던 것 같다. 그녀는 유심히 자신을 관찰한 끝에 소녀기 때 경험한 시골살이에 관한 향수가 강렬하게 들끓는 걸 알아차렸다. 산골에서 꽃과 나무, 새소리와 물소리를 벗 삼아 사는 게 자신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게 귀촌이라는 사건의 단초였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올드 뉴스가 있지만, 그건 진부한 소식에 불과하다. 아내는 동쪽으로 냅다 뛰는데, 남편은 서쪽으로 쌔앵 돌아서기도 하는 게 부부관계이지 않던가. 귀촌의 경우에도, 부부가 의기투합할 확률은 매우 낮다. 대체로 남정네들이 먼저, 가자, 산골로! 그렇게 선창을 하며 나서는 수가 많지만, 웬걸, 마누라들은 십중팔구 단박에 반기를 들게 마련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자들은 원래 남자보다 영리하고 영악한 고등생물이다. 그녀들은 모기에 뜯기고 뱀에 시달리기나 할 뿐, 자칫 따분하고 답답해질 가능성이 높은 시골살이라는 걸 입문할 일이 아님을 이미 눈치 채고 있는 것이다.
부부가 귀촌에 의기투합
그러나 박미향 부부는 달랐다. 박미향이 먼저 말을 타고 귀촌의 깃발을 드높이 들었고, 수더분하고 너그러운 남편 엄팔수는 뒤따라오는 수레처럼 선선히 따랐다. 빈틈없는 의기투합과 일심동체의 힘으로 산골살림을 착수하였으니, 그 시발도 과정도 결산도 자못 오붓한 것이었다. 박미향의 얘기를 들어볼까?
“일단 귀촌하기로 합의를 본 뒤로는 일사천리로 추진했어요. 남편은 직업군인이었어요, 정년을 채우고 전역한 다음 귀촌을 하기로 했으나, 굳이 뜸들일 게 뭐 있겠나 싶어 서둘렀어요. 정년 5년을 남긴 시점에 후다닥 이 산골로 들어온 거예요.”
“남편에게 감사패라도 드리진 않았나요?(웃음)”
“어쩌면 매우 공정한 합의였죠. 결혼 뒤 긴 세월 동안 저는 오직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공들여 기르는 일에 전념하며 살았거든요. 그건 좀 억울한 거 아니에요?(웃음) 이제는 남편인 당신이 나를 외조해주소서, 제가 그런 요청을 했어요. 그러자 남편이 조용히 수긍해줬어요. 고맙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대목이죠.”
“부부가 튼튼한 유대감을 갖고 귀촌을 했을 경우에도, 막상 실제로 촌살림을 시작하고 나서는 예상치 못했던 애환을 겪는 걸 흔히 봅니다. 매우 단기간에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심지어 이혼을 하고 갈라서는 부부도 있더군요.”
“맞아요. 우울증을 앓다가 결국은 도시로 되돌아가는 사례를 저도 많이 봤어요. 그런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저는요, 귀촌 초기부터 모든 게 다 좋았어요.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귀촌을 로망으로 삼은 분들이 많을 텐데,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해요. 과연 내가, 우리 부부가, 생소한 산골 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정서가 맞는지, 재미를 느낄 수 있을지, 그런 걸 우선적으로 점검해야 해요.”
“마을 원주민들과 융화하는 일도 쉽진 않았겠죠?”
“저희 집이 마을과 떨어진 외딴집이라서 주민과 교류할 일도 없었지만, 사실 초기엔 심한 소외감을 느꼈어요. 그러나 이젠 살갑게 사촌처럼 지냅니다. 도시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듯이, 저도 처음엔 시골 인심이 사나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전혀 사실과 달라요. 문제를 일으키는 건 늘 도시인들 쪽이죠.”
마음을 활짝 열지 않고서는 즐겁게 살 수가 없다. 반면에, 즐겁게 살지 않고서는 마음을 탁 열어 헤칠 수 없다. 소소한 애환과 갈등이 왜 없었으랴마는, 박미향 부부는 산골 생활에 매우 적극적으로 적응했으며, 그럴 수 있었던 기반은 산촌살이의 즐거움이라는 명품을 신속하게 얻었다는 데에 있다.
자연의 제전에 늘 감동과 갈채를
그렇다면 귀촌의 무엇이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 우선은 도시의 메마른 풍경과는 다른 산골의 자연 풍치가 주는 심미적 만족감과 정서적 위안이 이 부부를 즐겁게 하는 것 같다. 철따라 옷을 갈아입는 나무와 숲, 황홀하게 피었다가 상처처럼 시드는 온갖 들꽃들이 전하는 철학의 표정, 사람이 곤충이나 풀꽃과 하등에 다를 게 없다는 벅찬 상념들, 조화롭게 저 알아서 흘러가는 생태계가 전하는 유유함…. 박미향은 자연이 펼치는 제전에 매번 갈채를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무엇보다 막대한 즐거움은 박미향이 귀촌의 나날들을 통해 꽃차 전문가로 변신했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산골에서 풀이나 뽑고 살 수는 없었던 그녀는, 평소에 좋아하던 꽃들로 꽃차를 만드는 취미생활을 일삼아 거듭했다. 그러다가 노하우가 쌓이고, 이름이 알려지고, ‘꽃차연구소’라는 것 까지를 차리게 되었다. 아마추어적 취미를 밀어붙여 프로의 대열에 올라선 것. 요즘의 그녀는 꽃차 강의를 다니느라 부산하다.
“아이들 키우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 알았는데, 이제 저는 더 진정한 행복을 찾았어요. 산과 들에 가득한 들꽃들로 꽃차를 만들어 도시의 친구들에게 나눠주던 취미생활이, 꽃차 전문가로 성장할 계기가 될 줄은 저 자신도 미처 예상치 못했어요.”
“근래에 꽃차 붐이 분 것도 행운이었겠어요?”
“맞아요. 인생이란 정말 오묘한 것이에요. 제가 원래 꽃을 좋아해서 청주에 살 때에도 미장원이나 옷가게를 가기보다는 틈나면 꽃집을 드나들었어요. 그런데 귀촌을 계기로 꽃차 전문가로 거듭 태어난 셈이에요.”
“그걸 제2의 인생이라 하겠죠?”
“돈을 벌려고 시작한 일도 아니었고, 그저 내가 좋아서 해온 일이었을 뿐인데, 이젠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오거나 멀리 외지에서 강의 요청도 많아요. 물론 수입도 쏠쏠합니다. 남편의 연금보다는 많으려나?(웃음) 요즘은 세상살이가 참 재미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아 산다는 것, 그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생이지 않을까요?”
“꽃차의 매력은 뭐라 생각하시는지?”
“우선 시각적으로 아주 예뻐요. 덖어진 꽃차가, 찻잔 속 뜨거운 물에서 풀어지며, 다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걸 바라보면서 향과 맛을 음미하는 즐거움. 그게 사람들을 매료하는 거 같아요.”
산골에서 별다른 일이 없는 채로 한가하게 노는 것도 행복이자 도락이다. 텃밭 농사건 약초 채집이건, 소규모로나마 몸을 쓰는 일을 찾아내 귀촌생활의 생기를 불러 넣는 것도 현명하다. 또는, 내가 좋아하고 원했던 일을 드디어 찾아내 몸과 정신을 온전히 쏟을 수 있다면 그건 최상의 복락이겠지. 매우 신중하거나 내향적인 성품의 소유자로 여겨지는 박미향의 안면에 정착한 미소를 보노라면, 귀촌을 통한 자기 변신과, 그에 따른 만족의 크기가 자못 오롯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면민들과 함께 밴드를 만든 남편
귀촌 직후 한동안, 박미향의 도시 친구들은 후미진 산골에 박혀 사는 박미향을 걱정하고 염려하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산골의 자연과 긴밀하게 교류하는 우정, 또는 일을 찾아 투신하는 열정은 고독하기 십상인 인생을 보완하는 질료라는 걸 간과한 것이다. 물론, 친구들의 태도는 이제 싹 바뀌었다. 오히려 박미향을 선망한다는 게 아닌가.
“친구들은 처음엔, 미향이가 산골에서 얼마나 견디겠는가 하며, 너 언제 나올 거니? 산골에 살아보니 무섭고 외롭지? 그렇게들 걱정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소리들이 쑥 들어갔어요.(웃음) 오히려 저를 부러워해요.”
“시골 생활의 단순한 패턴은 자칫 귀차니즘을 불러올 수도 있을 거예요. 부부가 날마다 24시간 같이 붙어산다는 게 때로 지겹진 않나요?(웃음)”
“왜 안 지겹겠어요?(웃음) 때로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해요. 그럴 때면 제가 묵언수행이나 해야지, 하고선 아예 입을 봉합니다. 그게 제가 자제하는 방식이며 최선책에요. 덕분에 저희 부부는 싸움다운 싸움을 한 번도 해보질 못했어요. 참. 남편은요, 드럼을 쳐서 스트레스를 신나게 날려 버립니다. 면민 12명과 어울려 밴드도 만들었는데, 경로잔치 같은 곳에 위문공연을 다니곤 해요.”
“귀촌을 원하는 시니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팁을 주신다면?”
“귀촌은 실패할 확률도 많다는 걸 아셔야 해요. 현실은 녹록지않으니까.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야만 해요. 요즘은 ‘귀촌교육’을 행하는 기관이 많아요. 미리 수강을 해두는 게 좋겠죠. 무엇보다 본인의 성향이 산골과 조화할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점, 이웃 원주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해요. 그쯤이면 인생 2막을 성공적으로 누릴 수 있을 거예요.”
공자나 맹자를 길잡이로 삼은 인생도 근사할 수 있지만, ‘웃자’나 ‘놀자’와 동행하는 삶은 한결 경쾌하고 유쾌하다. 박미향은 귀촌을 계기로 매우 만족스러운 인생을 누린다. 꽃차를 통해 평온하게 웃을 수 있는 삶을, 안락하게 노는 일상을 구현하고 있다. 이를 쾌거라 일컬어도 무리가 없으리라. 인생의 쓸쓸한 황혼녘에, 오히려 환하게 생동하며 밝아오는 아침을 다시 맞이한 셈이니까.
>>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연기자의 길을 함께 걷는 나와 집사람은 상반되는 점이 많아요. 감성적인 나는 화가 나면 속에서 무언가가 위로 끓어오르지만 이성적인 집사람은 그럴수록 감정을 아래로 가라앉혀요.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상반된 부분을 닮아가는 것도 꽤 재미가 있습니다. 제가 아내의 연기하는 모습에 반해 결혼했지요. 46년 동안 부부로, 동료 연기자로 한길을 함께 걸어왔는데 참 행복합니다.” 중견 연기자 최불암(76)은 1970년 김민자(74)와 결혼해 46년 동안 부부로, 배우의 길을 함께 걷는 동료로 살아온 생활이 많이 행복하다고 했다.
“한참 활동을 할 때는 서로의 연기와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했지요. 저는 남편의 연기에 대해 엄격하고 냉정하게 평가하는 스타일이에요. 요즘에는 남편이 활동을 잘할 수 있도록 건강에 많이 신경을 쓰게 되네요. 연기자라는 한길을 걸었기에 연기자로 일하면서도, 부부생활에서도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큰 어려움 없이 잘 살았어요.” 김민자 역시 같은 직업을 가진 남편 최불암에 대해 후한 점수를 줬다.
근래 들어 최불암·김민자 부부처럼 연예인끼리 결혼하는 커플들이 늘고 있다. 교사, 의사, 변호사 등 같은 직업을 갖거나 식당, 농사 등 같은 일을 하는 부부들이 적지 않다. 같은 일을 할 때 상대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소통도 잘돼 직장생활뿐만 아니라 부부생활에서도 활력이 생긴다는 부부가 있다. 반면 서로를 너무 잘 알아 배우자에 대한 긴장감과 설렘이 사라지는 데다 일하는 능력과 수입의 편차 등으로 부부 관계가 소원해지는 경우도 있다.
연예인은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의 관심을 받고 대중매체의 조명이 잇따르기 때문에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구축된 이미지와 실제의 간극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 또한, 드라마나 영화, 음악 등 작품마다 반응과 평가가 다르고 수입과 직결되는 인기는 매우 가변적이다. 일하는 활동량도 인기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곳’이 연예계이기에 소문과 스캔들이 상존한다. 배우나 가수라는 직업은 일반 직장과 전혀 달라 근무 형태가 매우 불규칙적이다. 이러한 특성을 가졌기에 배우, 가수, 예능인 등 연예인끼리 결혼한 부부들은 일반인이 알지 못하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최불암·김민자 부부는 연기자라는 길을 함께 걸어 서로를 더 잘 이해해 생활면에서 많이 행복하고 배우로서 더 발전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최불암·김민자 부부처럼 가수, 배우, 예능인 등 연예인의 길을 함께 걷는 부부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연예인 부부의 삶은 천양지차다. 연예인 부부마다 연예 활동과 가정생활에 큰 차이를 보인다. 1964년 ‘세기의 결혼식’이라 명명되며 수많은 대중매체와 대중의 관심 속에 결혼한 영화 스타 신성일(79)·엄앵란(80)부부는 결혼 이후 활동에서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신성일은 계속해서 영화 활동을 왕성하게 했지만, 엄앵란은 배우 활동을 중단하고 가사와 사업에 전념했다. 부부생활 역시 남편 신성일의 외도로 인해 1977년 별거 상태에 들어가 현재에도 신성일은 경북 영천에, 엄앵란은 서울에서 서로의 삶을 간섭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살아간다.
엄앵란은 방송 등을 통해 “시댁에서 연예 활동을 반대했고 또한 가정을 책임져야 해서 결혼 이후 배우 활동을 접고 육아와 사업에 전념했다. 남편의 외도 등으로 매우 힘들었지만 내가 선택했으니까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해 견디며 살았다. 남들은 신성일 씨가 워낙 매너가 좋고 잘해줘 ‘당신 좋겠다’고 하면 속으로 ‘웃기고 있네’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신성일씨는 남편으로서는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지만, 연기자로서는 최고다. 같은 배우 입에서 봐도 그렇다”고 말했다. 신성일은 저서 등에서 “아내 엄앵란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엄마이고 아내로서도 최고다. 여러 가지 일로 내가 많이 힘들게 했다. 배우 신성일이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내 덕분이다. 팬들을 실망하게 하는 이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고 밝혔다.
1994년 방송된 드라마 남·녀 주연으로 나선 것이 인연이 돼 연인으로 발전해 1995년 결혼한 차인표(49)·신애라(47) 부부는 신성일·엄앵란 부부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차인표·신애라, 두 사람은 연예 활동은 물론 두 아이의 입양, 자선 활동, 종교생활에 이르기까지 함께하며 진정한 동반자의 삶을 살고 있다.
차인표·신애라 부부는 작품 선택에서부터 아이들의 육아 방향에 이르기까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대화를 하며 결정한다. 신애라는 아이를 출산하고 두 아이를 입양하면서 육아, 가사, 그리고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스스로 작품 출연과 방송 활동을 줄였다. 반면 차인표는 결혼 이후에도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신애라는 “아이들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싶어 연예 활동을 제가 스스로 줄인 겁니다. 물론 좋은 작품이 섭외가 오면 출연했지요. 전 저보다 남편이 연기자로서 더 잘되는 것이 좋아요”라며 결혼 후 차인표 인기는 치솟고 자신의 인기가 낮아진 것에 대해 오히려 더 좋다고 했다.
신애라는 “결혼 여부를 떠나 차인표씨만큼 저와 잘 맞는 사람이 없습니다. 서로가 받아 줄 수 있는 단점과 서로가 기뻐할 만한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고 남편 차인표에 대해 말했다. 차인표는 “당신은 옷장이었다. 문만 열면 필요한 옷이 있었다. 추울 땐 두꺼운 외투, 털장갑을 건네줬다. 무더운 날엔 시원하게 다니라고 모시옷을 내줬다. 나의 진실한 옷장이었다. 울면 울어주고, 기쁜 날 더 크게 웃어 주고 좋은 날 산책해 준 당신, 당신은 내가 있는 이유다”라고 신애라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최수종(54)·하희라(47) 부부 역시 차인표·신애라 부부의 행보와 비슷하다. 최수종이 드라마 작품에 들어가면 하희라가 다른 것 신경 쓰지 않고 연기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가정생활뿐만 아니라 남편의 대본 리딩도 옆에서 도와준다. 최수종 역시 하희라가 드라마에 출연하면 촬영장을 찾아 식사나 커피 등을 챙기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특히 최수종 하희라, 두 사람 모두 연기대상을 거머쥘 정도로 연기파 배우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연기 스타일이나 캐릭터 분석법이 다르지만, 서로의 연기에 대해 무한 지지와 격려를 해 발전을 꾀한다. 최수종은 “작품 선택이나 연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지만, 아내의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하는 편이다. 연기에 대해서는 무조건 격려를 해주는 편이다”고 했다.
예능인 부부 이봉원(53)·박미선(49)은 일반적으로 보이는 연예인 부부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박미선과 이봉원은 1989년 ‘철없는 아내’라는 개그코너에 함께 출연한 것이 인연이 돼 연인으로 발전했고 1993년 결혼했다. 결혼 이전 박미선은 스탠딩 개그의 일인자로 활약하며 인기 높은 개그우먼으로, 이봉원은 슬랩스틱 코미디와 성대모사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 개그스타로 군림했다. 결혼 후 아내 박미선은 개그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시트콤과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MC로 활동영역을 넓히며 최고의 예능 스타로 부상했지만, 이봉원은 연예 활동보다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프로덕션, 요식업 등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봉원의 사업은 실패를 거듭했다. 박미선은 연예 활동을 하면서도 육아뿐만 아니라 이봉원 사업 뒷바라지, 망한 뒤 수습까지 다 했다.
이봉원은 결혼 후 자신보다 아내 박미선의 활동이 늘어나고 더 인기가 많아진 것에 대해 “전 아내의 인기가 높은 것에 박수를 보내요. 나 자신이 위축되거나 그러한 것은 없어요. 원래 개그맨을 키우고 코미디 프로그램을 연출, 제작하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결혼 후 아내의 도움으로 할 수 있었지요. 사업이 잘 안 돼 아내에게 미안할 뿐이지요”라고 말했다.
물론 연예 활동과 가정생활이 순탄하지 못한 연예인 부부도 많다. 대중의 시선을 의식해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쇼윈도 연예인 부부에게는 연예 활동 하는 것이 오히려 상대의 활동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가정생활에도 어려움을 초래한다. 쇼윈도 연예인 부부는 결국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감정이 사라져 파경을 맞게 된다.
“나는 당신을 작년보다 올해 더 사랑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하구요,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이 사랑할 겁니다. 당신은 어느새 존경하는 내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 있네요. 당신 옆에 오래 있을게요. 당신은 오래만 살아주세요.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할 수 있도록…” 차인표가 2001년 5월 24일 한국일보 지면을 통해 소개한 아내 신애라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다. 이런 사랑과 배우자의 연예 활동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면 연예인 부부들의 행복한 동행은 지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