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가 어쩌다 다리를 다쳤다. 유아원에 다니는 4살 손자, 6살 손녀 둘을 할아버지가 자동차로 등하교 시켜 줬으면 좋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며느리 입장에서야 시아버지가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식으로 들락날락 아이들 돌보는 것이 여러모로 불편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아버지에게 SOS를 보내는 것은 마땅히 도움 청할 곳도 없는 모양이다. 오죽하면 시아버지
필자의 여고 시절 제2 외국어를 선택할 때 영어 선생님께서 문학이나 웅변을 하려면 독일어를 택하고, 사랑을 하려면 불어를 택하고, 돈을 벌려면 영어를 열심히 공부 하라는 우스개 소리를 하셨다.
오래 전에 작고하신 친정 아버지는 의사이면서 정치를 부업으로 하셨다. 비록 정치에 실패를 하셔서 많은 돈을 날리셨지만, 본업인 의사로 재기를 할 수 있었다.
자신을 가꾸고 멋을 내는 그 이유가 뭘까.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전부는 아니다. 젊어서는 이성에게 아님 친구에게 멋지게 보이려는 욕심이 많았다.
그러나 점점 자신에게 만족을 주기 위한 이유가 더 상위로 올라가고 있다. 우선 멋을 내기 위해서는 기본 바탕을 만들어야 하는데 몸이 뚱뚱해서는 어떤 경우에도 폼이 안 난다. 그래서 다이어트가 기본이 되어야 한
“안식년인데 안식을 못하고 있어요. 일이 많아서(웃음).”
주빌리은행장이자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인 유종일(柳鍾一·59) 교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근황을 얘기했다. 그러나 그 인간미 넘치는 모습은 한국사의 거친 부침 속에서 단련된 표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경제민주화 개념을 적극적으로 현실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오피니언
1964년 가을이었다. 그때는 서둔야학교가 새 교실을 짓기 전이어서 계사를 빌려 수업을 하던 시절이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토담에 깜박깜박하는 호롱불을 켜두고 바닥에는 멍석을 깔고 수업을 했으나 그곳은 우리의 유일한 배움의 보금자리였다. 선생님들은 열심히 가르쳐주셨고 학생들은 진지하게 눈과 귀를 모았다. 그런데 반드시 그런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날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영화와 공간: 홍콩’이라는 주제로 홍콩 영화 수작들을 상영했다. 상영작 중 두 편이 허안화 작품이었다. 홍콩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허안화(쉬안화, 許鞍華)의 작품들은, 일상을 통해 인생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여백과 깊이를 안겨준다. 현실에 발 디디고 사는 서민의 삶을 그려내는 감독 중 허안화만큼 진실한 감독도 드물다
주사(酒邪)는 ‘술을 마신 뒤에 나쁜 버릇으로 하는 언행’을 말한다. 생전의 아버지는 주사가 심했다. 언행에 더해 고압적이고 폭력적이었다. 그 당시는 필자가 사춘기라서 그런 주사를 참지 못하고 욱하곤 했다. 그 결과는 가출이었다. 한창 감정이 예민했던 고등학생 때 무려 4차례나 가출을 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맨손으로 상경해 서울에서 장사를 하며 자리를
한때 홍콩 감독 허안화(1947년~)에 관한 국내 평가는 “여러 장르를 아우르며 실망과 환희를 동시에 안겨주는, 높낮이가 심한 연출자”였다. 그러나 필자는 (1997)과 같은 범작에서도 실망한 적이 없다. 서극, 담가명 등과 함께 1980년대 홍콩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허안화는 진중한 사회파 드라마에서부터 액션, 시대극, 멜로를 아우르며 홍콩과 홍콩인이 처한
‘닭님에게 손수 밥을 만들어서 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하는 시인이 있다. 흔히 우둔함의 대명사로 꼽는 닭을 ‘닭님’이라고 부른다는 것 자체가 비범하다. 경기도 여주군 도리마을 외딴집에서 700여 마리의 닭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홍일선(洪一善·67) 시인이 바로 그 사람이다. 1980년 여름호를 통해 등단해 , 등의 시집을 낸 중견시인인 홍
필자 지인들은 은퇴 후에도 어울려 재미있게 지낸다. 몇 달에 한 번씩 모였던 동창들도 더 자주 모임을 갖고 우정을 다진다. 하지만 일원 중에 허풍쟁이가 있으면 화기애애한 모임 분위기가 가끔씩 망가지는 경우가 있다.
요즘은 모이면 막걸리 한 사발씩 돌리기보다는 건강 음식을 먹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 둘레길 산책·문화유적지 탐방·영화 감상 등 재미있는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