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사진은 이경숙 대표가 올댓SNS연구소를 소개하는 사진이고
네번째가 조희배 강사가 강의하는 사진입니다.
지금은 SNS 시대이다. SNS를 모르면 한글을 모르는 문맹자 대접을 받듯이 이 시대에는 SNS를 반드시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SNS라는 것이 현재 시니어들이 접한 것은 불과 얼마 전 일이라 SNS의 등장과 확산 속도에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다양한 기능을 탑재한 스마트폰의 급속한 보급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더 이상 SNS 활용을 미룰 수 없게 만들었다. 시니어들을 포함해서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소통을 하게 되자 SNS 활용 방법을 모르면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SNS 활용 방법을 배워보고자 했으나 마땅치 않았다. 자녀들에게 물어 보면 중간 과정은 생략하고 사용하는 방식만 너무 빠른 속도로 가르치는 바람에 이해가 어려웠다. 다시 물어보자니 민망하고 사용 빈도가 떨어지면 그나마 곧 잊어버리니 난감한 일이었다. 돈을 들여 학원에 가서 배우자니 경제적 부담도 문제지만, 가르치는 강사나 같이 배우는 사람들 수준과 안 맞으면 역시 마음의 상처나 부담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경숙 대표가 이끄는 ‘올댓SNS연구소’는 이런 시니어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수요에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맞춤 교육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올댓SNS연구소는 ‘시니어의, 시니어를 위한’ 정보지식산업 전파를 설립목적으로 한 사회적 단체이다. 스마트폰 SNS 활용법 연구 및 전파와 맞춤식 보조강사 활용으로 교육성과를 제고하는 방식으로 활동한다. 2013년 11월부터 아래와 같은 활동을 하고 있다.
2013년 11월∼ 사회연대은행, 송파실벗뜨락
2014년 1월∼ 사회연대은행, 송파실벗뜨락
2015년 1월∼ 송파실벗뜨락(초,중급), 시니어스타워
2015년 5월∼ 서울시도심권50플러스센터 초,중,고급 강의(수강생 최고 평점 받음)
2015년 12월∼ 사회연대은행 강의(클럽 단체상 수상)
2016년 1월∼ 송파실벗뜨락, 경기도교육공무원연수원 강의
도심권50플러스센터 기초반/심화반
도심권이나 사회연대 은행 등에서 진행하고 있는 ‘열린학교’ 강의는 강의를 하고자 하는 단체나 개인 강사가 개설을 신청하는 강의지만, ‘올댓SNS연구소’강의는 기관에서 정식으로 강의 의뢰를 받고 소정의 강사료도 받는다는 위상의 차이가 있다.
‘올댓 SNS연구소’의 강의 프로그램은 2015년 도심권 강의 프로그램 중 최고의 평점을 받았다. 매 기수 프로그램마다 20명 정원으로 인원을 받지만, 45명 이상이 몰려 와 책상도 없이 수업을 받는 경우가 속출했다. 수강생들의 반응은 “성의 있게 강의를 진행해 들을 게 많다”는 것이 중론이고 이미 수강했던 수강생이 재충전 차 등록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현재 도심권은 물론 시니어 관련 기관에서 스마트폰 강의를 하는 사람들은 ‘올댓SNS연구소’의 강의를 듣고 ‘올댓SNS연구소’가 만든 교재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림과 사진을 알기 쉽게 넣어 번듯하게 만든 교재라서 나중에 배운 것을 잊더라도 교재를 보고 기억을 되살릴 수 있게 만들어 인기가 높다. 수강인원보다 늘 교재가 모자라는 이유는 교재만 슬쩍 가져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금번 7~8월 강의 커리큘럼은 꿀 팁 과정으로 ‘스마트폰 자신 있게 다루기, 캘린더로 인적 네트 워크 강화하기, 카톡+밴드 200% 활용하기, 에버노트로 무엇이든지 기록하기, 구글앱을 활용한 인터넷 검색, 드라이브 사용하기, 재미있는 사진, 동영상 만들기, 해외여행 더욱 즐겁게 보내기’ 등으로 되어 있다.
매 학기 이경숙 대표의 ‘올댓SNS연구소’, 커리큘럼, 강사진 소개로 강의가 시작된다. 수강생 친목도모를 위하여 교육 과정부터 강사와 교육 참가자들 간의 정보 전달 커뮤니티 채널도 카톡과 밴드로 만들어 운영한다.
현재 창립 위원 중 7명이 강사로 포진해 있지만 지속적으로 수강생 중에서 올댓SNS연구소의 일원을 뽑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강사진은 커리큘럼이 정해지면 각자가 할당을 받고 교안을 PPT로 만들고 시연을 한다. 문제가 있으면 재 시연을 하는 식으로 훈련을 많이 한다고 한다. 그 과정이 엄격해서 풀이 죽는 경우도 생기지만, 서로 믿고 격려하며 소정의 수준에 도달하게 도와준다고 한다. 봄이나 가을에 워크숍을 1박2일 일정으로 삼림욕, 농장에 가서 일하고 밤늦도록 토론도 하고 술도 마시고 음식도 만들어 먹고 하며 결속을 다진다고 한다.
10여 년 전 필자가 개인회사를 차릴 때 지인의 소개로 세무사를 소개받고 사업자등록증을 냈다. 무역 중개업이었다. 초기에는 사업이 꽤 잘 되어 거래가 많으니 세무사도 할 일이 많았다. 세무사는 국내 회사만 상대하다가 영어가 등장하는 서류는 필자의 업무가 처음이었다. 무역을 모르니 용어도 모르고 어떻게 비즈니스가 되는지 반복해서 가르쳐 줘도 이해를 잘 못했다. 그러면서 월 10만원의 수수료를 지급했다.
그러다가 사업이 점차 시들해지자 일 년에 거래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줄었다. 분기별로 거래를 신고해야 하는데 분기에 거래가 한 건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수입은 점점 적어지는데 세무사 수수료는 고정비로 나가니 수수료를 좀 내려달라고 해봤다. 월 10만원이 최저라서 더 못 내려준다고 했다. 거래가 없어도 월 10만원은 내야 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거래도 일천한데 10년 동안 꼬박 월10만원의 수수료를 내야했다. 세무사가 도와주기는커녕 내 피를 빠는 기생충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는 한해에 거래가 한 두건으로 줄어들었다. 내가 낸 주문을 생산해주는 중국의 인건비가 너무 올라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사업을 접었다. 드디어 폐업신고를 하고 세무사에게 주는 수수료도 끊었다. 거래는 직접 생산 공장에 연결해주고 나는 손을 뗐다.
무역협회에서 마침 회원들 대상으로 무역 애로사항 공모전을 했었다. 거래는 뜸한데 고정비로 나가는 세무사 수수료에 대한 내 경험을 써서 보냈더니 1등상에 선정되었다. 개별적으로 세무사를 쓰지 말고 다른 업종처럼 대행사를 만들어 염가로 세무 대행을 해주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내 경우는 일 년에 한 두 건이니 건당 수수료를 지급하는 방식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렇게 실행이 안 되고 있다.
해마다 5월이면 국세청에서 세금 신고에 대한 공문 편지가 등기 우편으로 날아온다. 내가 통역 겸 고문으로 일해 주는 회사에서 내게 주는 약간의 고문료를 세무 신고하기 때문에 날아오는 것이다. 얼마 안 되는 금액인데 굳이 세무 신고까지 해야겠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내게 유일한 소속회사로서 그 가치가 있다. 사회 활동을 하다 보면 회사 이름을 적어야 할 때가 있는데 당당히 그 회사 이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직업란에 ‘무직’이라고 적는 것과 소속 회사를 적는 것은 본인이나 상대방이 볼 때에도 큰 차이가 있다.
5월에 국세청에서 등기우편이 날아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세금 내라는 얘기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홈텍스’라고 집에서 컴퓨터로 세무처리를 하는 방법을 설명한 안내장도 들어 있지만, 그냥 봐서 하기는 어렵다. 처리할 때까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면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그래서 옛날 세무사에게 한 두 해 신세를 졌다. 옛정을 생각해서 그냥 처리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더 이상은 그냥 처리해줄 수 없으며 처리를 원하면 또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해는 직접 세무서에 찾아 갔다. 필자처럼 세무신고 문의를 하려는 사람들로 문전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리려니 이렇게 시간투자를 해야 하는 것도 수수료에 들어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차례가 되었을 때 창구 직원이 줄을 잘 못 섰다며 다른 줄로 가라고 했다. 황당한 일이었다. 다른 줄로 옮기면 줄이 더 길어 그날 처리가 불가능해보였다. 필자가 난감해하자 창구 직원이 가만히 서류를 보더니 국세청 등기 서류내용이 틀림없으면 밑에 사인해서 접수 통에 넣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을 세무사는 대가를 지불하라고 했었다. 세무서에서는 긴 줄을 서라고 했었다. 인터넷으로 처리하지 못한 내게도 잘못이 있지만, 이의 없으면 사인해서 반송하라든지 세무서에 방문해서 접수 통에 넣으면 된다는 설명만 있었더라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서류를 접수해 놓으면 다음 달 국세 환급통지서가 날아온다. 종합소득세 공제초과라며 이미 낸 세금의 일부를 돌려주는 것이다.
올해는 등기 공문 편지에 반송 봉투까지 들어 있어 바로 사인해서 보냈다.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걸 세무사는 그렇게 생색을 냈었다.
부재중에 등기 우편물이 국세청에서 와 있다고 현관문에 쪽지가 붙어 있었다. 우체국에 와서 찾아가라는 것이다. 다른 등기우편물은 그냥 편지함에 넣으라고 할 수 있지만, 국세청 공문이라니 그럴 수도 없었다. 또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이제는 환급 통보서류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체국에 가보니 과연 짐작대로 환급통보서였다. 우체국에 신분증과 함께 환급통보서를 제시하면 바로 현금 지급한다는 내용도 함께 있었다.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1987년 부산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각각 미국과 프랑스로 입양된 사만다 푸티먼과 아나이스 보르디에가 4년 전 SNS를 통해 극적으로 재회한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를 보면서, 그리고 “저 역시 입양아로서 살아온 삶에 대해 긍정적이었고, 아나이스 역시 입양의 어두운 면이나 슬픈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저희는 대부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만다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의 입양 현실에 시선이 향한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표한 입양 현황 통계에 따르면 2015년 한 해 국내 법원에서 국내외 입양을 허가받은 아이는 1057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국내 입양은 683명으로 2014년의 637명보다 약간 늘어났지만, 국외 입양은 374명으로 2014년의 535명에 비해 줄었다. 국외 입양아 현황을 보면 미국이 전체의 74.3%로 가장 많고 이어 스웨덴(9.6%), 캐나다(5.9%), 노르웨이(2.7%) 순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01년 4206명이던 입양 아동은 2003년 3851명, 2006년 3231명을 거쳐 2013년 2652명으로 크게 줄었다. 그리고 2014년 1172명, 2015년 1057명으로 감소하는 등 입양이 활발하지 못한 상황이다. 입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역시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아이들을 입양해 행복한 가정을 꾸려 입양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며 국내 입양을 활성화하는 데 일조하는 연예인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차인표-신애라 부부, 중견 연기자 송옥숙, 탤런트 이아현, 개그맨 엄용수, 연극배우 윤석화, 가수 조영남, 개그우먼 이옥주 등이 자녀를 입양해 키우는 대표적인 연예인들이다.
여러 아이를 입양해 건강하고 행복하게 키우고 있는 브래드 피트-안젤리나 졸리 부부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일반인의 입양에 대한 인식 전환에 크게 기여한 것처럼 입양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엄존하는 한국에서도 차인표-신애라, 이아현 같은 대중의 시선을 받는 연예인 스타들이 입양 문화 활성화에 일조하고 있다.
자녀를 가슴으로 낳아 키우는 연예인들은 입양은 특별하거나 칭찬받을 일이 아니며 입양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과 다른 가족이 더 행복해졌다고 입을 모은다.
“정민이(큰아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부모로 선택하게 했듯 둘째 예은이, 셋째 예진이는 우리가 입양한 것이 아니라 정민이와 다른 방법으로 이 아이들이 우리를 부모로 선택했습니다. 입양은 가정이 절실하게 필요한 아이에게 울타리를 쳐주는 것이며 새 가족과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새 가족이 생기면서 아이가 사랑을 알게 되고 다른 가족들도 입양한 아이로 인해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입양한 예은, 예진으로 인해 가족들이 더 행복해졌어요.” 두 아이를 입양한 차인표-신애라 부부의 말이다.
“결혼 전 입양을 해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슴으로 낳은 아이도 배 아파 낳은 아이와 똑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둘째를 입양하고 키우면서 정말 좋았어요. 그래서 셋째도 입양을 하게 됐지요.”신애라의 말이다. 신애라의 적극적인 입양 의사에 남편 차인표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입양단체 관계자들은 스타 부부 차인표-신애라의 두 아이 입양은 많은 사람들에게 입양에 대해 관심을 끌게 하고 국내 입양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한다.
“입양했다고 하면 왜 칭찬받는지 솔직히 저는 반감이 듭니다. 내 딸들은 나를 있게 해준, 살게 해준 사람들입니다. 딸들이 아니었으면 너무 힘들어서 내가 지금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2007년 첫째 딸 유주(9)를, 2010년 둘째 딸 유라(6)를 입양한 탤런트 이아현이다. 이아현은 입양은 특별한 일이거나 찬사를 받을 일이 전혀 아니라고 했다.
혈연에 대한 집착, 법과 제도 문제 등 한국에서 입양이 활성화하지 못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자녀들을 입양한 연예인들은 강연과 홍보대사, 그리고 방송 등을 통해 입양에 대한 인식 전환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입양한 아이를 잘 키워 결혼까지 시킨 코미디언 엄용수는 방송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녀 셋 중 둘이 ‘가슴으로 낳은 애들’이다. 피 한 방울 섞이고 안 섞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가족을 이루면 되는 것이다”라며 입양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설파한다.
입양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연극인 윤석화는 방송 등 대중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유교적인 사상이 많고, 국내 입양에 대한 편견이 아직도 많은 것 같아요. 외국의 사례나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면, 정말 아이들이, 생명이 크는 것은 사랑이 가장 우선이고, 오히려 DNA(혈연)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랑이고,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아직도 많은 아이가 해외로 입양 가고 국내 입양이 잘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안타깝죠”라며 국내 입양이 활성화했으면 하는 바람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입양 문화가 이전보다 개선됐다고 하지만 장애아나 혼혈아 입양을 꺼리는 인식은 여전하다. 2015년 한 해 장애나 건강에 이상이 있는 아동 중 국내 입양은 24명이었지만, 해외 입양은 99명이나 됐다. 정부가 해외 입양을 통제하지 않았던 시기인 2002년에는 해외로 입양 간 장애아가 827명에 달했고 국내 가정에 입양된 장애아는 16명에 불과했다.
필리핀계 혼혈아를 2007년 입양해 가정을 이룬 중견 연기자 송옥숙은 “입양한 아이가 혼혈이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혼혈아에 대한 사회의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는 것만이 중요했다”고 말하며 장애아나 혼혈아에 대한 입양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입양아 가정에서 고민이 많은 입양 공개 여부에 대해서도 연예인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자녀를 입양한 연예인들 대부분은 외국처럼 입양 공개에 대해 찬성하고 있다. 가수 조영남은 “아이를 입양한 것은 세상의 빚을 갚는 심정이었어요. 아이를 공개 입양한 것은 입양 문화에 대한 인식을 바꿔보려고 한 거예요. 결과적으로 입양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아이를 밝게 키운 것 같아요”라고 했다. 차인표-신애라 부부는 “저희가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기 때문에 비밀 입양이라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비밀 입양은 아이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부모야 본인이 선택한 거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은 비밀 입양을 할 경우 숨겨야만 하는 음지가 생기는 것이지요”라며 입양 공개 찬성 이유를 밝혔다.
개그맨 엄용수는 여섯 살 때 입양해 2007년 결혼해 가정을 꾸린 딸 엄현아(35)씨가 아이를 낳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입양은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다시 한 번 깨달았다며 더 많은 사람이 입양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입양은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게 아니라 소중하게 태어난 생명을 하나의 인격체로 키워내는 것이다. 모든 아이들은 따뜻한 가정 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할 권리가 있고, 어린아이들을 사회적 인재로 키워내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입양은 내 삶에 가장 잘한 일이다.” 2003년 공개 입양으로 아들 매튜를 가족으로 맞은 영화배우 故 김진아가 생전에 나와 인터뷰하면서 한 말이다.
나무야 나무야 큰 나무야
사과나무야
힘에 겨워 업에 겨워
모진 삶을 살았느뇨
허리가 휘어지게
서글픈 구절로 시작하는 이 시의 제목은 ‘척추측만증’이다. 이 시인의 다른 작품들의 제목을 살펴보면 ‘인술(仁術)’, ‘골다공증’, ‘약이되는 사람’ 등 다소 생소하다. 그도 그럴 것이 김연아나 박지성 등의 허리를 책임졌던 자생한방병원의 신준식(申俊湜·64) 이사장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 신준식’의 시는 손이나 약,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제공 자생의료재단
신준식 자생한방병원 이사장은 한의사이자 정식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환자의 마음의 병까지 치유하는 심의(心醫)가 되고자 노력한 결과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아픔’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많다. 한 번은 척추측만증인 여학생이 그를 찾아왔다. 16세밖에 안 된 이 학생은 안타깝게도 척추가 구조적으로 비뚤어져 교정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그렇게 치료를 위해 땀을 흘리는 도중 소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봤다. 소녀의 고통과 아픔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척추측만증’이다.
그렇게 시를 쓰기 시작한 지가 20여 년이 됐다. 2012년 종합문예지 월간 의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 당선돼 시인으로 정식 등단했다. 그해 에 그의 시 ‘생의 반환점에서’ 등 2편이 선정되기도 했다. 이렇게 꾸준한 작품활동을 통해 지난해에는 네 번째 시집인 를 출간했다.
“시에 대한 영감은 주로 진료실에서 나오죠. 선친은 늘 저에게 마음의 병부터 치료하는 심의(心醫)가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그의 마음은 그의 시 ‘인술(仁術)’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아버지는 나에게/의사는 시내인술(是乃仁術)이라 하셨다/의사는 의술로만 치료하지 말고/인술로 치료해야 한다/마음의 병부터 치료하는 심의(心醫)가 되라.”
실제로 그는 선친의 뜻을 따라 영혼까지 치료하려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임직원과의 소통도 시로 한다. 병원 블로그 등에는 그가 직원들에게 전달하는 시가 심심치 않게 게시되곤 한다. 처음에는 낯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진심을 담아 한 줄 한 줄 자기 생각을 시로 전달했다. 그러자 직원들에게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환자를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졌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그가 시를 놓지 않는 이유다.
“하루는 직원 한 명이 제게 메신저로 수시로 보내주시는 이사장님 시 덕분에 삶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했다면서, 감사함을 환자에게 갚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빈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 시를 쓰는 보람을 새삼 느낍니다.”
이러한 소통 방식은 전국 18개 자생한방병원 분원과 임직원 1500여 명을 하나의 연결고리로 묶고, 국내 최대 규모의 한방 의료재단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1988년 자생한의원으로 시작해 2013년 11월 국내 최대 한방 공익 의료재단으로 거듭났다.
7대째 이어오는 한의사 집안
신준식 이사장의 집안은 7대째 한의업을 이어오고 있는 한의사 집안이다. 선친은 양의사이면서도 한의사였다. 외과의사로 양·한방을 함께 진료했던, 당시로선 매우 드문 의료인이었다. 한국전쟁 때 충청도 시골 마을로 피란을 갔는데 환자들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서울로 돌아오는 것을 포기했었다. 환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니느라 신 이사장의 가족은 무려 17번이나 이사를 했다.
충남 당진에서 한의원을 운영했던 선친은 환자들이 돈이 없다고 하면 쌀이나 감자, 옥수수 등을 받고 병을 고쳐주기도 했다. 그러다 척추 골절과 척추 결핵으로 6년간 앓다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병으로 고생하실 때 꼭 낫게 해드리겠다고 약속했어요. 하지만 결국 그 약속은 지킬 수 없었죠. 척추 질환을 꼭 정복하겠노라고 맘먹은 것도 그때쯤이었어요. 경희대 한의대에 들어가서 같은 뜻을 가진 동기들과 추나요법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해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덕분에 전국에 안 가본 곳이 없었어요. 국내에 추나요법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아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허릿병을 잘 고친다는 사람 따라다니다 쫓겨나기도 부지기수였죠. 비방(祕方)으로 추나요법을 전수받은 한의사를 설득해 배우기도 하고, 때로는 안마사에게도 고개를 숙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연구에 매달리다 보니 빛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2700년 역사 자랑하는 추나요법
척추질환은 현대사회의 대표적인 질환 중 하나다. 과거에는 통증을 줄이기 위해 수술요법을 많이 선택했지만, 수술의 높은 난이도와 재발의 위험성 때문에 비수술 요법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고 있다. 양의학에서도 절개를 최소화하는 최소침습시술 방식이 인기를 얻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한방에서 치료하는 ‘추나요법’은 대표적 비수술 요법이다.
대개 비수술 치료는 약물과 추나요법 등을 통해 상태를 호전시킨다. 약물과 추나요법만으로도 2~4주 이내에 회복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디스크가 빠져나오면 인체는 그것을 이물질로 간주해 강력한 면역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추나요법이란 어긋나거나 비뚤어진 뼈와 관절, 뭉치고 굳은 근육을 바로잡아 울체(鬱滯, 막히거나 가득참)된 기혈을 정상적으로 순환시켜 통증을 개선하고, 인체의 자연치유력을 회복하여 질병의 원인을 해소하는 수기(手技) 치료법이다. 골관절과 근육, 인대, 근막 등 주변 연조직의 기능적인 불균형으로 인해 발생하는 척추관절질환을 치료한다. 시술자의 손과 지체(肢體, 팔다리와 몸)의 다른 부분을 사용하거나 보조기기 등을 통해 인체의 특정 부위(체표의 경혈, 근막의 압통점, 척추와 전신의 관절 등)를 조작하고 인체의 생리적·병리적 상황을 조절함으로써 치료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즉, 한의사가 수기법을 통해 가하는 힘이 관절·골격 또는 환자의 특정 부위를 교정함으로써 치료 효과를 내는 것이다.
추나의 역사는 길다. 2700여 년 전 이라는 한의서엔 안마와 지압이, 그리고 밀고 당겨 어긋난 관절을 맞춰주는 에도 수기 치료가 기록돼 있다. 추나(推拿)라는 말은 한의학 경전인 에 나오는 치료법인 ‘도인’, ‘안교’에서 유래됐다. 그러다 명나라 때 문헌에 처음으로 ‘추나’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청나라 때는 황실의 의료를 담당하던 태의원(太医院)에 ‘추나과(推拿科)’를 설치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선 손으로 하는 의술을 천시한 데다 환자들이 신체 노출을 꺼려 빛이 바랬다가 서양의 카이로프랙틱이 들어오면서 역사 속의 추나요법이 부활했다. 물론 부활의 중심에는 신준식 이사장이 있었다.
한의학 세계화 이끌다
1992년 대한한의학회에서 추나학회(현 대한척추신경추나의학회)가 공식 인준되었고 그동안 별다른 관심을 얻지 못하던 추나요법은 마침내 공동 연구의 광장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한의대에서 추나학을 교과목으로 채택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민간요법의 하나로 홀대받던 추나요법이 이젠 한방 치료법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자생의 설립 목적에는 신 이사장의 의료철학이 담겨 있다. 한의학의 과학화·표준화다. 그는 소위 비방(祕方)이라는 명목 아래 등한시해왔던 한의학의 치료 효과를 과학적으로 밝히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이를 위해 SCI급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매년 수차례 게재하고 있다.
“한의학 또한 양방의학과 마찬가지로 치료의학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도록 임상을 통한 증명 자료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근거 중심의 임상치료 데이터를 모아 우수 논문들을 주류의학인 양방의학계에 발표해 한방을 과학화하고 인정받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병원 경영이 안정돼야 연구도 하고 논문도 쓸 수 있습니다.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병원의 현상 유지를 위한 행정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이러한 연구성과가 뒷받침되면서 신 이사장의 의술은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미국 어바인의과대학 선택과목 채택(2002), 미국 하버드대 의대 협력 연구(2006) 외에도, 2011년부터 미국 러시대학메디컬센터, 미시건주립대학교 정골의과대학, 시더사이나이 병원, 러시아국립의과대학교 등 해외 굴지의 대형 종합병원과 의과대학의 초청을 받아 강의하고 있다.
올해 6월에는 키르기스스탄 대통령병원 개원 70주년 기념 국제 콘퍼런스에 초청을 받아 비수술 한방 척추디스크 치료법 강연을 했다. 이 자리에서 신 이사장은 한방 추나요법과 침 치료법(동작침법) 등 강연을 하며 현지 급성요통환자에게 동작침법을 시연하기도 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척추환자가 통증으로 고통 받으며 수술 치료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비수술적 치료방법인 우리 전통 한의학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진정한 명의(名醫)란
명의(名醫). 사전적 의미로는 ‘병을 잘 고쳐 이름난 의원이나 의사’를 뜻한다. 말 그대로 유명한 의사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준식 이사장 또한 명의일 것이다. 하지만 신준식 이사장이 생각하는 명의는 명망 있고, 병을 잘 고친다고 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다. 환자의 마음까지 다스릴 줄 알아야 ‘진정한 명의’라고 강조한다.
“동의보감에는 ‘약을 잘 처방하면 약의(藥醫)로 삼등(三等)의사요, 음식을 잘 조절하면 식의(食醫)로 이등(二等)의사요, 마음을 잘 다스리면 심의(心醫)라 일등(一等)의사’라 했어요. 환자의 아픔을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치료해 더 이상은 고통 받지 않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진정한 명의예요. 저는 환자들이 아픈 몸을 치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원을 찾아다녔고,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을 들이며 힘들어 했는지 잘 압니다. 그러기에 제 방문을 열고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면 따뜻한 미소와 포근한 말과 정성스런 손길로 얼어붙어 있는 환자의 마음을 안아주고 싶습니다.”
생물학적 수명은 늘어나고 사회적 수명인 정년은 점점 짧아지면서, 제2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두 번째 인생을 위해서는 경제적 자유, 즉 은퇴자금 준비가 중요한 문제이지만 제2 직업은 더 중요하다. 시니어들의 이러한 요구에 발맞춰 여러 민·관 기관에서 제2 직업에 관한 다양한 안내와 새로운 직업 소개를 하고 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기보다 교육과 준비과정을 통해 새 인생에 어울리는 새로운 직업을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최근 제2 직업을 위해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시니어들과 이들을 대상으로 구인 활동을 펼치는 업체나 기업을 살펴보면 현실과 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장년들의 일자리를 위해 노사발전재단이나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은퇴자협회 등 여러 기관에서 중장년 일자리 희망센터를 전국 단위로 운영하고 있다. 이 일자리 희망센터를 이용하면 구인구직 정보에서부터, 교육 프로그램, 관련 컨설팅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다.
시니어 구인구직 단순직종에 집중
문제는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는 직업이나 일자리가 시니어들이 원하는 수준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자리가 경비직이나 청소, 택배와 같은 단순 노무직이고 그나마 이런 일자리의 대부분은 40대를 우선적으로 선호한다. 연령이 높은 시니어들에겐 순서조차 돌아오기 힘들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의 정현주 대리는 센터가 최근 사회공헌형 일자리로 사업 방향을 옮긴 것도 이런 현상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경제적으로 자유롭거나 노후 자금이 해결된 시니어들은 단순직 일자리를 원치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부분 그간의 경력을 살릴 수 있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통해 경제적 소득보다는 보람을 찾으려는 분들이 많아요. 수고를 인정받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이죠. 저희 센터에서는 이런 시니어들의 요구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 센터에서 준비하는 직업들은 경제적 소득보다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원이나 참여 시니어들의 자부심 확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 중에는 건강코디네이터 양성 과정이 있다. 지역 치매센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도 인지장애(초기 치매) 노인들을 대상으로 상담과 인지학습 역할을 할 사회공헌 활동가를 양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밖에 바른먹거리전문가 양성과정은 유치원 등 각 교육기관의 학생과 학부모에게 먹거리에 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전문가를, 다문화가족 서포터스 양성과정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요청을 받아 한국생활 정착의 멘토 역할을 할 지원자들을 교육하고 있다.
수익보다 보람과 자부심 얻을 수 있어야
지난해 도심권 50플러스센터를 통해 SNS전문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종로지역자활센터 등에서 강사로 활동 중인 김희순씨(64)는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시니어들에 대한 직업 교육은 지식 전달뿐만 아니라 삶의 활력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어요. 재능기부를 통해 교육생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도 있고, 사회에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갖게 됐습니다. 예전엔 손주들이 와이파이 터진다고 하면 뭐가 터졌냐며 놀랄 정도였지만, 이제는 대화도 통하고 생활이 달라졌어요.”
물론 일자리나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현장에선 이야기한다. 기본적으로 실업난을 겪고 있는 청년들의 일자리와 겹치게 되면 사업 자체의 정체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현장에서 원활하게 일할 수 있도록 활동 무대까지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자리 잡은 성공적인 직업에 정리수납전문가가 있다. 정리수납전문가는 여성발전센터, 여성인력 개발센터 등을 통해 민간에 알려졌다가 현재는 협회까지 설립됐다. 한국정리수납협회의 정경자 협회장은 이렇게 조언한다.
“정리수납은 보통 팀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혼자 활동하기 어려운 시니어, 특히 여성들에게 적합한 직업입니다. 평생 살림을 해온 분들은 원칙과 이론을 알려주면 금방 익숙해지거든요. 이렇게 새로운 직업을 만들거나 창업하려면 좋아하는 일보다는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하니까요.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의 전문성, 문제를 해결할 창의성, 구성원과 소비자를 대할 인성을 갖추고 있는지 늘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찾을 수 없다면 창직(創職)도 방법
새로운 직업에 대한 단서가 필요하다면 한국고용정보원(www.keis.or.kr)을 노크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곳에선 제2 직업을 필요로 하는 중년들을 위한 자료를 연구하고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올해 3월에 발간된 자료집 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인생 2막을 설계하는 베이비 부머들이 도전하기에 적합한 직업 30개를 선정해 하는 일을 소개하고 해당 직업을 가지려면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지 등을 알려주고 있다. 또 지난 5월부터는 중장년층의 창직 활동을 돕기 위한 라는 지침서를 배포 중이기도 하다.
#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시니어는 사회은퇴와 동시에 국민건강보험료 문제에 부딪친다. 상당수가 은퇴 후 바로 직장가입자인 자녀들의 피부양자로 신고하여 지역가입자 보험료를 납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부는 인정기준을 잘 몰라서 보험료를 납부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국민건강보험은 국민의 질병·부상에 대한 예방·진단·치료·재활과 출산·사망 및 건강증진에 대하여 보험급여를 실시함으로써 국민보건 향상과 사회보장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국내에 거주하는 국민은 국가유공자 등 일부를 제외하고 가입자 또는 피부양자가 된다. 가입자는 사업체 근로자, 공무원, 교직원이 가입대상인 ‘직장가입자’와 직장가입자 및 그의 피부양자를 제외한 자가 대상인 ‘지역가입자’로 구분한다. 직장가입자 자격을 상실하면 바로 지역가입자가 된다. 피부양자는 직장가입자에게 주로 생계를 의존하는 사람으로서 보수나 소득이 없는 직장가입자의 배우자, 직계존속(배우자의 직계존속을 포함한다), 직계비속과 그 배우자, 직장가입자의 형제·자매를 인정한다.
보건복지부령 고시 인정범위는 아래와 같으며 이 기준을 초과하면 피부양자 자격이 상실되어 지역가입자가 된다. 이자, 배당소득이 연 4000천만 원 이하, 사업소득(부동산 임대소득 포함)이 없을 것, 미등록 사업자, 장애인 등은 연 500만 원 이하, 공적연금소득의 50% 금액이 연 2000만 원 이하, 기타소득금액 연 4000만 원 이하이어야 한다. 근로소득자와 사업자등록을 한 사업소득자는 즉시 피부양자 자격을 상실한다.
이자소득과 배당소득은 수령일이 속하는 연도에 과세한다. 이자가 약간 높다는 이유로 장기예금을 들었다가 특정연도에 목돈을 받아서 위의 한도를 초과하면 피부양자로 인정되지 않는다. 수입시기를 연도별로 균등화할 필요가 있다.
국민건강보험 적자 타개책으로 직장가입자의 보험료 부과와 피부양자 기준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피부양자 기준을 현행 금융소득 등 연 4000만 원 이하 기준을 종합소득세 신고기준인 2000만 원 수준으로 강화하려고 한다.
변화하는 방향에 맞춰 대응이 필요한 대목이다. 직장가입자가 퇴직을 하고 피부양자에 해당되는 경우에는 지체 없이 피부양자 등록을 하여 지역가입자 보험료가 부과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신고하지 않으면 피부양자로 인정 되지 않는다. 만약 신고를 하지 않았을 때에는 3개월 이내에 정정신고를 할 수 있으므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은 고령이나 노인성 질병 등의 사유로 일상생활을 혼자서 수행하기 어려운 노인등에게 제공하는 신체활동 또는 가사활동 지원이다. 노후의 건강증진 및 생활안정을 도모하고 그 가족의 부담을 덜어줌을 목적으로 한다.
65세 이상의 노인이나 65세 미만이더라도 치매·뇌혈관성질환 등 노인성 질병을 가진 자를 요양대상으로 한다.
장기요양 보험료는 국민건강보험 가입자에게 국민건강보험료의 1만분의 655를 노인 해당여부와 관계없이 징수한다. 이 업무처리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전담하고 있다.
조국의 역사가 안겨다 준 수많은 비극이 있다. 그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 독립 투사와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애절한 감동으로 다가와 그 여인이 옥중에서 쓴 수기 내용을 우선 써 내려가본다.
“박열을 처음 사랑하던 그 순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박열의 식민지 조선 독립운동에 휘말리게 될지 모른다고…. 아무리 독립운동이 나의 사상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나는 박열을 사랑했다. 사랑받고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사랑하는 타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다. 즉, 그것은 자아의 확대라 할 수 있다. 나는 박열을 사랑했고 박열은 조선을 사랑했다. 그래서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 독립을 위해 나섰다. 박열의 동지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이 사건이 우습게 보인다면 우리를 비웃어 달라고. 다음 재판관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모든 것은 권력이 만들어낸 허위이고 가식이다. 부디 우리를 함께 단두대에 세워달라! 나는 박과 함께 죽을 것이다. 박열과 함께라면 죽음도 오히려 만족스럽게 여길 수 있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 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박열, 그는 1902년부터 1974년의 생애로 마감을 한 독립투사로 본명은 박준식이다. 경상북도 문경군에서 태어나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로 전학하여 재학 중에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한다. 1919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일본에서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했고, 조선 최초 아나키즘 사상단체를 만들어 일본제국 왕을 폭탄으로 제거하려는 등 온몸으로 반제국주의 항일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1920년 1월에는 일본에 있는 조선인 고학생들과 동경 조선고학생동우회를 결성해 조직활동을 시작했다. 박 열은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가, 그 해 관동 대지진 이후 일본인 연인인 가네코후미코( 金子文子)와 함께 1923년 10월에 일본 왕자 히로히토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죄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박 열과 가네코후미코는 1926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 두 사람은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박 열은 젊은 청년시절 22년 2개월간의 기나긴 옥살이를 마치고 1945년 10월 아키다 감옥에서 미군에 의해 석방되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에서 우익 교포 단체인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1947년 10월 민단 정기대회에서 이승만 계열의 남한단독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했고,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년 영구 귀국했다가 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도 군대 축소 및 국제 중립국화 등에 노력을 기울였고 1974년 서거하여 그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 능에 묻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 장이 추서되었다고 한다.
1926년 박 열과 옥중부부가 된 가네코 후미코, 그녀는 조선을 사랑한 일본여인이다. 요코하마에서 사생아로 출생한 그녀는 가난한 가정환경과 성적학대로 불우하게 살아왔다. 제국주의 일본의 모순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군국주의에 반감을 가져온 자유여성으로 23살의 짧은 삶을 살았다. 젊은 시절 약7년 동안 조선 부강 땅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아왔고 1919년 에는 부강에서 횃불 만세운동을 목격한 바가 있다. 그녀는 도쿄시내의 작은 오뎅 집에서 일하면서 조선유학생들과 교류하였고, 우연히 한 조선잡지에 실린 박 열의 자작시를 읽고 강한 감동과 함께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곧 사상공감에 이르렀고, 민족적 차이를 넘어 계급적 동지로서 뜻을 같이하고 항일활동을 함께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히로히토 암살을 기도한 후 체포되었고 서로 다른 감옥에 수감되었다. 옥중 부부가 된1926년 불과 몇 달 후 그녀는 결국 감옥에서 목을 메어 자살인지 타살인지 미스테리한 의문사로 생애를 마감했다고 한다. 죽은 후에는 일본 내에 그녀의 시신을 거둬줄 사람이 없어서 옥중에서 결혼서류를 작성하고 박씨 집안의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박 열의 형은 그녀의 유골을 인수하여 남편의 고향인 문경, 박 열 의사 기념관의 옆에 안장시켜 놓았다고 했다.
우리 조국의 사랑뿐만 아니라 투철했던 한 독립투사와 일본인 가네코의 끈질긴 사랑이 잔잔하게 가슴에 울려온다. 서로가 원수의 국적이었지만 남녀의 사랑으로 함께한 굳은 의지가 죽음도 불사했다. 한 독립투사는 조국을 위해서 앞장섰지만 일본인 여성을 사랑하게 되고 아내로 두었던 것이 오히려 해가 된 것이었을까? 무서운 권력 앞에 처절히 죽어가며 한 남성을 사랑하는 어느 여인의 절규가 애절하기만 하다. 박 열의 업적과 가네코의 항일운동의 업적은 현재 남 북한 양쪽뿐만이 아니라 고향인 문경에서 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두 남녀의 시신은 남과 북으로 서로 떨어져 있어 더욱 깊은 아픔 으로 남는다. 필자에게는 지금도 의사 박 열은 가네코의 기일이 되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하는 말이 애달프게 다가온다. 가네코 후미코 그녀의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도 구입해 봐야 할 것만 같다.
[출처] “한 독립투사의 사랑이야기”|작성자 로즈와이
중년 여성이 겪는 갱년기 증상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제는 대체로 공론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갱년기 극복 과정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제약회사 등 여러 단체들은 관련 캠페인을 펼치기도 한다. 이런 변화를 보면서 한 번쯤 묻게 된다. 그렇다면 남성은? 남성도 갱년기를 겪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들 쉬쉬할 뿐 해법을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남성 갱년기는 무엇이고 어떻게 극복하는지 대한남성과학회 허정식 홍보이사(제주대학교병원 비뇨기과)를 통해 알아봤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도움말 대한남성과학회 허정식 홍보이사
남성 갱년기 하면 떠오르는 것은 정력이다. 남성에게 있어 정력은 성기능 이상의 의미가 있는, 자존심과 같은 것이다. 정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남에게 밝혀서는 안 되는 비밀 중의 비밀 취급을 받는다. 술자리에서 성생활에 대한 허풍 섞인 농담을 주고받는 것도 이러한 인식 때문이고, 안타깝게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도 비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학적으로 남성 갱년기는 어떻게 분석하고 있을까? 허정식 이사는 아직 원인이 완벽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남성 갱년기는 학계에서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논란이 남아 있는 상태죠. 지금까지는 테스토스테론이라는 남성호르몬의 감소와 연관 있다는 정도만 밝혀진 상태입니다. 용어 역시 변화가 있어 그동안은 ‘후기발현 남성갱년기증후군’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였지만, 최근에는 ‘남성호르몬결핍증후군’으로 부르는 추세입니다. 그만큼 불확실한 것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허정식 이사에 따르면 여성 갱년기의 경우 여성호르몬의 변화로 인해 생리가 중단되는 경우를 말하지만, 남성의 경우는 노화과정이 급격한 생식능력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점진적인 감소세를 나타낸다고 한다.
남자의 고개 천천히 숙여져
대한남성과학회에서 2010년 전국의 40대 이상 남성 2000여 명을 대상으로 남성호르몬 검사를 한 결과 28.4%가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정상 이하로 나타났다고 허 이사는 설명했다.
“이렇게 40대 이상 남성은 4명 중 1명꼴로 갱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절하게 대처하는 사람은 드물죠. 남성 갱년기의 대표적인 증상은 생식능력의 감소입니다. 그 이외에 안면홍조, 기억력과 집중력 감퇴, 피로감과 수면 장애, 내장지방 증가 등이 있습니다. 여기에 근육량과 근력 감소, 체모와 골밀도 감소 등의 증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남성 갱년기라는 것이 이 테스토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이 테스토스테론을 보충하면 되는 것일까? 실제로 그렇다고 한다.
허 교수는 남성호르몬의 부족으로 갱년기 증상이 나타나는 환자들에게는 남성호르몬을 생리적 상태와 가장 근접하게 보충해 주는 것이 매우 유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남성호르몬은 약효 작용 시간이 충분하고, 안전하면서 사용이 편리한 제품을 사용하는데, 최근에는 겔 타입의 테스토스테론 연고가 많이 쓰인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식이요법이나 유산소운동을 통한 근력운동도 효과가 있다고 했다.
남성 갱년기 증상 중 성기능과 관련해선 비아그라와 시알리스 등으로 대표되는 발기부전 치료제가 일반적이지만, 간혹 남성호르몬 부족 환자 중에서는 이러한 약제가 듣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단독 요법이 실패한 경우에는 남성호르몬과 발기부전 치료제를 함께 투여해 치료한다고 허 교수는 말했다.
부족한 남성호르몬 보충가능
남성 갱년기 중 심각한 부분 중 하나는 단순한 성기능 저하로 생각해서 내버려뒀을 때 다양한 증상들이 함께 따라올 수 있다는 점이다.
“50~60대 베이비붐 세대는 무엇보다도 정년퇴직이나 은퇴에 따른 경제적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이런 스트레스와 만성피로, 우울증 등이 남성 갱년기와 겹치게 되면, 자신감이나 자존감이 떨어져 가족관계나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끼치게 되죠. 여기에 성욕 저하와 발기부전, 지적 활동이나 인지 기능의 저하 등에 시달립니다.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면 남성호르몬 검사를 통해 수치가 정상범위인지 꼭 확인해야 합니다. 물론 흡연과 음주는 줄여야 하고요.”
특히 허 이사는 남성 갱년기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치료가 가능한 질환으로 바라봐 달라고 당부했다.
“인간은 누구나 젊음을 유지하고,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면서도, 중년이 되며 겪게 되는 몸의 변화에 순응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인의 나이에는 그것이 정상일 것이라고 간주해 버리는 것이죠. 단지 남성호르몬이 부족해져서 여러 증상이 발생하는 것인데, 쉽게 오판해 치료시기를 놓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남성 갱년기는 치료 가능한 질환
일부에서는 자가진단표 등을 사용해 몸 상태를 점검하는데 변별력이 높지 않고, 오히려 치료시기만 늦추기도 해서 최근에는 권하지 않는 추세라고 한다.
아무래도 정력과 관련해선 보신음식이 빠질 수 없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실험적으로 해마를 먹는 사례가 있었지만, 이 역시도 증명된 바 없고,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고 운동을 쉬지 않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주변의 도움을 얻는 것이 좋다고 했다.
“남성 갱년기 증상을 너무 무시하거나,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금물입니다. 이러한 증상은 치료가 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질환은 치료의 대상일 뿐이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남성호르몬을 이용한 치료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 반드시 비뇨기과 전문의와 상담해야 합니다. 그리고 혼자 고민하기보다는 아내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사주나 점을 믿지는 않지만, 매번 '무난’, ‘평탄’ 같은 단어가 튀어 나온다. 전반적으로 필자 삶을 돌아 볼 때 과연 맞는 말인 것 같다.
인생 전반의 삶
인생의 여러 중대사가 결정되는 1970년대가 필자 20대 나이였다. 그 시기 대학교에 입학하고 군대에 갔다 오고 취직해서 결혼했으니 말이다. 아들딸까지 낳았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대학교도 단번에 합격하고 군대도 카투사로 갔다 왔다. 취업도 서로 오라는 데가 많아서 골라서 들어갔으니 요즘 청년들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직장에서 아내를 만나고 건설회사인 둘째 직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근무를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스포츠 장갑을 만들어 수출하는 중소기업에 스카우트 되어 임원으로서 12년간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혀 연고도 없던 회사에 기존 임원들보다 10세 연하인데도 젊은 패기로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입사 6년 만에 단일 바이어에게 거의 의존하던 매출구조를 미국, 유럽, 내수시장으로 확장해 건전한 포트폴리오대로 만들면서 세계 스포츠장갑 1위 업체로 부상시켰다.
1997년 IMF 금융위기는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스포츠 브랜드 UMBRO 사업에도 직격탄이었다. 미화로 지급해야 하는 로열티와 수입대금도 막대했지만 국내 시장이 초토화되어 더 이상 사업을 끌고 나갈 수 없었다. 결국 경영책임을 지고 퇴사한 것이 21세기를 두 달 앞둔 1999년 10월이었다. 직장 생활 23년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나이 49세였다.
묘하게 퇴직 1주일 후 섬유의날 시상식에서모범경영인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재직 중이었더라면 큰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자리였으나 찜찜하게 퇴직하고 난 처지라서 가족들과 단출하게 자축할 수밖에 없었다. 퇴직했으니 앞으로가 막막했으나 대통령 표창은 큰 용기를 주었다. 뭔가 큰 힘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표창은 위력을 발휘했다.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KAPPA의 한국 런칭도 그 덕분에 이뤄졌다. KAPPA의 성공 덕분에 JAKO 등 다른 스포츠 브랜드 도입도 수월했다. 비즈니스뿐 만 아니라 각종 서류 심사 때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밀레니엄 시대라는 2000년부터 퇴직 이후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UMBRO 대표 시절에 여러모로 도와줬던 업자가 동대문 사무실에 나와 소일하라며 권유했다. 그의 사업도 도울 겸 필자 사업으로 스포츠 장갑을 수출하던 시절에 가까웠던 바이어들과 연락하며 지냈다. 주문량이 적은 바이어들은 본사에서도 귀찮아하던 것을 필자가 주문을 대신 처리해줬다. 한 바이어는 당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공식 스폰서가 되면서 대량주문을 해 와서 그때 꽤 짭짤한 수익을 건졌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미국 경기가 급속하게 하락하면서 이 비즈니스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중국의 저임금을 활용하여 그나마 주문을 소화했었는데 중국의 인건비가 급속하게 올라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여기서 더 비즈니스를 이어가려면 중국보다 임금이 더 저렴한 나라를 찾아다니며 바이어들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했으나 비즈니스는 이쯤에서 접자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인생도 50 줄인데 돈을 더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필자랑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퇴직 대열에 합류하면서 실패하는 사람도 봤고 건강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인데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뜻 든 것이다. 그래서 자전거, 등산을 비롯하여 건강을 위한 삶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여러 가지 시도해본 결과 댄스스포츠가 가장 잘 맞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댄스 이야기
93년 한국에 댄스스포츠가 체계를 갖춰 상륙하자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했었다. 당시만 해도 댄스스포츠를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곳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독일에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어느 와인 촌 홀에서 백발의 할아버지와 고등학생은 되어 보이는 소녀가 같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완전히 매료된 충격적인 일이 기억났다. 그 춤을 제대로 배워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몇 몇 선생을 거치도 갈증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10년 만에 다시 댄스스포츠에 빠져 들었다. 집 근처 올림픽공원 스포츠교실에서 라틴댄스를 가르치는 데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한번은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댄스 경연대회를 했는데 하루 종일 예선부터 뛰어 최종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일이 생겼다. 춤에 대한 재능을 처음으로 확인한 일이다. 다음 해에도 챔피언 자리를 유지했다.
이 정도 했으면 필자도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의 ‘댄스스포츠 코치아카데미 코스’에 도전했다. 1년 만에 1, 2급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 올림픽공원에서 가르치던 선생이 영국 유학을 권했다.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은 영국이며 거기 가서 공부하고 국제지도자 자격증을 따가지고 오면 우리나라 댄스 역사에 드문 일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영국에 유학할 준비로 개인 레슨을 받으며 국제지도자 자격증 코스를 공부했다. 6개월 공부 후에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쌤리댄스스쿨’에 갔다. 지도교사로 'Technique of Latin Dancing' 이라는 책을 낸 라틴댄스 계의 전설 월터 레어드의 비서였으며 현존 최고의 지도자 준 먹머르도 여사를 만났다. 2개월간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집중적인 댄스 공부와 연습을 하며 결국 ‘국제지도자 자격증(IDTA:International Dancesport Teachers Association)’을 따 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영국에 가서 이 자격증을 따 온 사람은 몇 몇 댄스 계 원로에 불과했는데 동호인에 불과한 필자가 이 자격증을 들고 들어온 것이다.
개선장군처럼 귀국한 필자 주변에 댄스동호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해서 ‘댄스엔조이’라는 댄스 동호회를 만들었다. 무려 5년 동안 회장을 맡으며 댄스스포츠 동호회를 키웠다. 당시에는 1주일의 거의 절반을 댄스 강습으로 보냈다. 그 과정에 샤리권(권금순)이라는 학원 원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국에서 귀국 직후 ‘댄스엔조이-라틴댄스’라는 책을 내려고 ‘댄스스포츠코리아’라는 잡지사에 찾아 갔다가 그 자리에서 편집 기자 자리를 제의받았다. 책도 나왔고 3년 후에는 ‘댄스엔조이-
라틴댄스 실전과 이론’, ‘댄스엔조이 – 모던댄스’, ’댄스엔조이 - 즐거운 댄스 라이프‘ 3권을 동시에 냈다. 그리고 10년 후 낸 ’캉캉의 댄스이야기‘까지 내면서 댄스 칼럼니스트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다. 특히 ‘댄스스포츠코리아' 잡지사의 기자 자리는 필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댄스 잡지는 드물지만 국내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댄스 잡지라서 권위가 있었다. 국내 댄스 경기 대회나 행사에는 언론사 자격으로 VIP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국내 댄스 계 중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세계적인 챔피언들을 인터뷰하여 기사화할 수 있었다.
댄스 인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얘기하자면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빼 놓을 수 없다. 원래 장애인들과의 만남은 94년 ‘댄스 동호회’에 나온 시각장애인들을 통해서였다. 몇 사람을 가르치고 있는데 혼자는 힘들다며 도와달라고 하여 갔던 것이다. 자이브를 중심으로 가르쳤는데 시각장애인들도 곧잘 했다. 처음에는 물론 막막했으나 그들도 노력했고 필자도 가르치는 노하우가 생겼다. 그들과 함께 여성의날 행사에 오프닝 무대에서 춤췄는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였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도 함께 오프닝 무대를 자이브로 장식했는데 그때는 당시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참석했었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 객석을 보니 대부분 시각장애인이라 보이지도 않는데 춤을 춰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시큰둥했던 필자가 부끄러웠다. 보이지도 않고 댄스화 갈아 신기도 귀찮으니 운동화 신고 그냥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 파트너는 진지하게 임했다. 끝나고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사진을 찍어 봐야 볼 수가 없는데 왜 찍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이들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졌다고 했다. 이들과의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댄스대회가 없어 더 이상 끌고 나가기 어려웠던 탓이다.
또 다시 10년만인 2013년 서울시장애인댄스연맹에 코치 겸 선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이 정식으로 발족하여 전국적으로 경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너무 나약해서 안마사 시험에도 떨어졌다는 40대 할머니를 파트너로 하여 선수로 출전했다. 처음엔 왈츠 단일 종목으로 동메달을 겨우 땄는데 스탠더드 5종목을 다 연습하고 나니 금메달까지 딸 수 있었다. 한 대회에 3개 부문까지 출전할 수 있으니 출전만 하면 메달을 수확했다. 이 할머니 파트너가 은퇴하고 나서 만난 파트너 중 최고였다. 나이도 40대라 젊고 체형이 날씬했다. 국내 ‘스타킹’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플라멩코 춤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이 파트너 덕분에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장애인 문화예술 대상’에서 대중무용 댄스스포츠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장애인 댄스경기 대회는 대개 오전 중에 끝나지만 이 파트너와는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댄스경기대회에도 출전했다. 2014년 여수에서 벌어진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는 오전에 장애인 부문에서 3경기를 뛰고 오후에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장년부, 일반부, 아마추어부까지 결승에 올라 나란히 우승, 우승, 준우승하는 쾌거도 이뤘다. 스탠더드 5종목을 뛰려면 대단한 체력이 요구돼 세 부분을 연속해서 출전하는 선수도 처음이라며 화제가 되었다. 이 파트너도 건강상 그만두게 되어 아쉬웠다.
2015년에는 새 파트너를 만나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비록 동메달이나 덕분에 서울연맹이 ‘댄스스포츠 전국대항전’에서 간발의 차이로 우승할 수 있었고 전체 장애인종목에서도 만년 단골 우승인 경기 다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글쓰기
필자에게 글재주가 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국어시간에 다음 배울 것을 짧게 축약해 오는 ‘짧은 글짓기’에서 늘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받아쓰기는 늘 만점이었고 국어 성적도 거의 만점을 받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 그래서 글쓰기가 좋아졌다. 그 당시만 해도 책은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본 것이 어휘 구사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글쓰기 열풍이 불어 학교 내에서는 물론 서울 단위에서도 ‘어린이글짓기대회’가 열렸다. 당시 대회에서 필자는 후배 여학생과 단 둘이 입상하고 돌아와 교내 스피커를 통해 방송도 하고 전체 조회 시간에 교단에 서서 수상작 낭독도 했다. 그 인기 덕분에 전교어린이회장까지 했다.
중학교 때는 문예반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당시 ‘학원’이라는 학생 잡지에서 하는 ‘학원문학상’에 응모했더니 수상했다. 당시 학교 정문에 플래카드가 붙기도 했다. 당시 그림도 좋아해서 미술반에 들어갔으나 저녁 식사도 못 한 채 매일 밤 10시까지 버티기가 힘들어 그만 두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중학교 때 못한 그림 공부에 미련이 남아 사진반에 들어갔다. 그림은 한 장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사진은 셔터만 누르면 되니 적성에 맞았다. 예술사진이니 작품성도 있어야 하고 설명과 제목도 멋지게 달아야 하는데 그림과 글쓰기에 대한 갈증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주는 것 같아 한동안 사진에 빠져 들었다.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도 구성해서 활동했다.
사진에 꽂혀 있떤 필작 다시 글에 손을 댄 것은 40대 초반으로 직장에서 자리가 잡혔을 때였다. 젊었을 때부터 외국을 자주 다니면서 느낀 점들을 신문에 독자 투고했는데 인정받았다. 1000여 편의 독자투고 내용을 책으로 3권 냈고 서울 서초구청장으로부터 기록인증서도 받았다.
독자투고는 글이 짧아 하고 싶은 말을 간단명료하게 담아내야 했다. 그러나 글이 길지 않아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댄스 동아리를 만들면서 이 갈증을 충족할 수 있었다. 당시 인터넷에 댄스 칼럼을 길게 올린 것이다. 이 칼럼은 인기도 높었다. 그 글들을 모아 2004년 영국 유학 후 ‘댄스엔조이’라는 책을 4권 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유어스테이지’에 시니어 리더로 합격하면서부터였다. 블로거를 모집했는데 당시 필자는 블로그가 뭔지도 몰랐으나 그간 인터넷에 올린 글들 덕분에 합격한 것이다. 그때부터 ‘캉캉의 글모음’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었다. 이 블로그로 2012년에는 ‘대한민국 100대 블로거상’도 받았다. 필자 블로그는 하루 방문객 1500명 내외이더니 2016년 5월 드디어 누적 방문객 300만 명을 돌파했다.
2010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한 ‘액티브 시니어 자서전 공모전’에서 우수상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1등상을 수상한 사람은 필자보다 10세 이상 연배로 전쟁도 직접 겪었고 인생을 모범되게 살아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방송, 잡지 등에서는 필자에게 출연 교섭을 많이 해왔다. 춤이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블로그의 힘은 대단했다. 필자 블로그를 검색한 방송, 잡지 등에서 섭외가 많이 들어 왔다. ‘시니어 파트너즈’에서 지원해준 덕도 많이 봤다. 한국의 모든 공중파에 나갔고 케이블 TV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출연했다. 한 방송국에서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며 무려 10일간을 매일 녹화하기도 했다.
블로그는 현재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이다. 하루에 글 하나는 꼭 올린다. 글을 쓸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생각이 정리되어 힐링되는 것 같다. 자꾸 희미해지는 기억력을 붙잡으려면 일상이든 독후감이든 영화 감상문이든 바로 써둬야 한다.
사회 활동
초등학교 때 어린이회장을 한 이래로 감투 복은 있는 모양이다. 대학 시절에 4학년이 관례로 맡던 사진반 회장을 2학년 올라가자마자 맡더니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를 결성하여 회장단을 꾸리기도 했다. 군 생활 때도 동기들과 선배들이 즐비한데도 중대 전체의 선임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참여하는 곳마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회장을 많이 했다. 리더십도 있는 편이지만 말이 많지 않아 카리스마가 있다고 한다. 틀이 좋다거나 돈이 많거나 말을 잘하는 일반적인 요소는 없으나 중심을 잘 잡고 전체와 미래를 보는 시각이 있다는 평이다.
퇴직 후 삶은 IMF 외환위기로 고통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직장 생활 때 인적 관계는 퇴직 이후 거짓말처럼 멀어져 갔다. 새로 새로운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댄스스포츠에 집중한 덕분에 ‘댄스엔조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고 5년간 회장을 맡았다. 동호회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유어스테이지’에서 공모한 시니어 리더들의 모임에서도 5년째 회장을 하고 있다. 회장 맡은 것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회장을 맡은 덕분에 책임감을 가지고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는 것이 좋다. 그런 면에서 ‘브라보 마이라이프’ 기자 활동과 새로 맡은 운영위원회장 자리도 기대가 크다.
요즘은 유난히 발이 넓은 동네 친구 덕분에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그 덕분에 ‘KDB 시니어 브리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동문회 등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협회 자체의 행사나 프로그램도 많다.
강의도 자주 나간다. 퇴직을 앞둔 우리은행 지점장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생산성본부에서 해마다 인생 이모작 강의를 했었다. 200명을 대상으로 하루 8시간 하는 강의이다. 퇴직 후 16년차에 들어섰으니 인생 이모작 선배로서 그간 경험한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경험을 전해주는 강의이다. 노사발전위원회에서도 공모전 입상을 한 덕분에 비슷한 내용으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도심권 이모작 센터’’, ‘사회연대은행’ 등에서도 강의를 해오고 있다. 댄스스포츠 강의도 하지만 홀로 살기, 파워 블로거 되기 등 테마도 다양화하고 있다.
필자 스케줄 표를 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꽉 차 있다. 동호인들끼리 댄스하는 날, 노래배우러 가는 날, 책 만들러 가는 날, 댄스 동아리 강의 하는 날, 장애인 댄스 교습 및 댄스 선수 연습하는 날이 고정되어 있다. 일요일만 비워두고 있다. 그렇다고 전혀 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그런 스케줄은 대부분 저녁 모임이거나 한 나절 정도 걸리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다. 특히 남는 시간은 집 근처에 공유사무실이 있어 글쓰는 데 활용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너무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매력 없는 남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유 있게 차 한 잔 하면서 같이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데 필자처럼 바쁜 사람에게 전화했다가는 바쁘다며 거절당할 게 빤하다는 것이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가까운 사람들 인터뷰가 있었다. 필자도 동석한 자리이므로 좋은 대답을 기대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절대 바쁜 척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전에는 댄스 하러 가는 날이면 다른 스케줄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댄스는 어차피 여기저기서 하고 있고 한두 번 쯤 빠져도 큰 문제 아니니 결석을 택한다. 다른 고정 스케줄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60대 중반에서 70대 중반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런 것 같다. 아직 건강하고 활동력도 있다. 노후 대비 경제력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도 다행이다. 사주에서 보듯 무난하고 평탄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인생의 정점에서 ‘브라보 액티브 시니어 인생’을 사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