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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영원한 로망, 왈츠
- "너무 예쁘셔요." "그렇다고 빠지지는 마세요. 책임 못 져요." 며칠 전 남자 파트너와 홀딩을 하고 왈츠를 추는 중에 나눈 대화다. 물색 모르는 사람들은 필자가 춤을 꽤 잘 추는 것으로 오해할 것이다. 왈츠나 탱고는 가까운 거리에서 몸을 밀착시키고 춤을 춰야 하니 뭔가 ‘썸’을 타지 않을까?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분들에게 춤을 한번 배워보라 하고 싶다. 모든 일에 있어서 기본이 중요하다. 춤도 마찬가지다. 올바른 자세를 갖추는 것이 쉽지 않다. 인터내셔널 왈츠는 루틴이 복잡해서 루틴 외우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 춤추다 보면 자칫 자세가 흐트러지기 때문에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루틴대로 추려면 긴장해야 한다. 춤을 제대로 추는 사람은 춤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잡생각이 아예 불가능하다. "인아야, 엄마 왈츠 열심히 배워서 왈츠 선생 할 거다." "엄마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안 되거든. 엄마 몸치거든." 몇 년 전 딸에게 희망사항을 말했더니 단칼에 필자의 꿈을 날려버린다. 왈츠를 배운 지는 10년도 넘은 것 같다. 재직 시에는 송탄에 있는 국제대학교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배웠다. 퇴직 후 집을 서울로 옮긴 뒤에는 서초문화원에서 3개월 수강한 뒤 신사동에 있는 샤리권 댄스 학원에서 3개월을 수강했다. 2년 전에는 선릉에 있는 더 댄스 스튜디오에서 몇 개월을 수강했고 양재에 있는 리세움에서도 3개월을 수강했다. 지금은 선릉에 있는 휴먼 서비스센터에서 6개월째 왈츠를 배우고 있다. 정리해보니 엄청 여러 곳에서 많은 세월 왈츠에 빠져 살아왔다. 그런데도 폼은 아직도 엉성하고 실력도 하품 수준이다. 필자는 왜 이렇게도 몸치일까? "저는 학교 다닐 때 체육시간이 지옥 같았어요." 그러자 왈츠 선생님은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저는 너무 신났는데요."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못하면서 운동만 잘하는 애들을 무시했다. 그런데 정말 우수한 학생들이 체육도 잘한다는 것은 교사가 되어 알게 되었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본다든가 음악이나 영화감상을 즐기던 필자는 체육시간이 지옥 같았다. 특히 달리기는 딱 질색이었다. 그런 필자가 왈츠를 배우려고 한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려니 스트레스도 있었다. 인터내셔널 왈츠는 A코스, B코스, C코스, 바리에이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필자는 지금도 A코스만 무한반복하고 있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왈츠를 꼭 배워야 하나?‘ 몇 년 전이었다. 루틴을 외우지 못해 힘들어하던 피랒는 왈츠 수업을 가는 중에 문득 회의가 들었다. 지난 화요일 왈츠 수업 중에는 눈물까지 났다. 너무 못하는 자신에게 속이 상해서였다. '발레를 할 때는 행복해서 눈물이 났었는데….' '음지가 양지 된다고, 내가 춤 잘 추는 사람을 부러워하게 될 줄이야.' 영화 '전쟁과 평화', '왕과 나', '사운드 오브 뮤직', '라스페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에서는 주인공들이 우아하게 왈츠를 추는 장면이 나온다. 필자의 목표는 영화에서처럼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나비처럼 우아하게 왈츠를 추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공주처럼 기품 있고 우아한 삶을 동경해왔던 필자가 가장 가슴 설레던 장면이 바로 멋진 왕자와 왈츠를 추는 장면이었다. 안 되는걸 기어코 하겠다고 왈츠에 집착하는 필자에게 얼마 전 딸애가 말했다. "엄마 참 대단해. 나 같으면 두세 번 해보다가 안 되면 그만둘 텐데." 필자는 의지의 한국인이다. 그 꿈을 꼭 실현해보고 싶다. 언제 그런 날이 오려나? 아니 그런 날이 오기는 오는 건가?
- 2018-02-0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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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리하는 남자
- 남편은 요리를 좋아한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퇴직하자마자 필자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난 뒤 대신 부엌일을 돕다 보니 어쩌다 그렇게 되었다. 또 워낙에 먹는 걸 즐기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건강과 영양에 관한 책, 요리책, TV 요리 프로그램도 즐겨 보는 편이다. 특별한 맛을 내거나 예쁘게 장식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좋은 재료를 찾아 음식을 더 맛있게 먹는 것에는 관심이 많다. 요리책을 보는 이유도 자신에게 필요한 내용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리책 레시피대로 하는 요리는 거의 없다. 서로 다른 종류의 요리와 레시피를 보면서 자신의 입맛과 취향, 또 먹어주는 필자의 입맛도 생각하며 음식을 상상하고 만드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음식 재료들은 대체로 평범하다. 주로 제철에 나는 재료를 좋아하는데 생굴은 남해의 굴 생산자한테 직접 전화로 주문한다. 방송국 근무 시절 알아두었던 연락처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택배로 재료가 온다는 연락을 받으면 어린애들이 장난감 배달을 기다리듯 외출도 안 하고 기다린다. 택배가 도착하면 바로 손질해서 먹고 재료를 이용해 각종 요리를 한다. 자신이 만든 요리가 환상적인 맛을 보여줄 때 남편은 흥분(?)한다. 그리고 그것을 먹는 순간에는 다른 대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필자가 잠깐 화제를 돌리면 대답도 하지 않고 딴소리를 한다. 예를 들면 남편이 한 요리를 먹으면서 “어제 누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면서 화제를 꺼내면 “그런데 이거 진짜 맛있지?” 하며 동문서답을 한다. 요리도 물론 '능력'에 속한다. TV에서 하는 요리 대결을 걸 보면 같은 시간, 같은 노력이 주어져도 결과물의 차이가 크게 난다. 요리도 외국어를 잘하거나 글쓰기를 잘하는 것처럼 타고난 재능과 감각이 필수다. 우선 재능과 감각이 있고 거기에 취미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 요리에서 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정성을 있어야 제대로 된 요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많은 사람이 요리를 취미로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특히 은퇴한 남자들은 도전해볼 만하다. 요새는 먹방에서도 요리하는 남자를 섹시남이라고 치켜세우기까지 한다. 과거처럼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금기시하지도 않는다. 우선 밥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아주 특별하게 요리에 흥미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새로운 삶을 맛볼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2017-12-28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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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동계올림픽은 제가 꾸던 꿈이었습니다. 前 강원도국제스포츠지원단장 박종흔 씨
- 눈보라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닦아야만 했으니까. 희망이 보이는가 싶더니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망연자실 고개를 떨어뜨렸지만 초석이 다져졌고 단단한 징검다리가 놓였다. 노력은, 꿈은, 그렇게 현실이 됐다. 한 달여 남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삼수(三修) 만에 이뤄낸 쾌거’라고 말한다. 세 번의 도전 동안 수많은 사람의 헌신과 노력,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올림픽 또한 없을 것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위해 발 벗고 나섰던 노장을 기억해냈다. 前 강원도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자 現 아라웰다잉연구회 회장인 박종흔(朴鍾昕·69) 씨. 꿈이 이뤄진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창동계올림픽의 백전노장을 만나다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박종흔 씨를 만났다. 이미 10년도 더 된 올림픽 유치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는 기자의 말에 해드릴 대단한 얘기가 없다며 멋쩍게 웃는다. 박종흔 씨는 올림픽 관련 업적 외에도 공직자로서 명망 높고 존경받던 인물. 지금도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삶을 살고 있다. 2009년 강원도청 지방부이사관으로 공직을 내려놓기 전까지 지방과 중앙정부 요직을 비롯해 2014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업무까지 두루 섭렵한 박종흔 씨는 나랏일(?) 전문가였다. 현역 시절 인생을 걸고 몰두했던 일은 단연 ‘올림픽’이었다. 평창동계올림픽 재수 시절인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머릿속에는 오로지 올림픽 유치 생각밖에 없었다. “2004년도에 국무총리실에서 재난관리과장을 하고 있다가 강원도로 내려와서 받은 첫 보직이 ‘강원도 국제 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이었어요. 첫 번째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하고 난 뒤에도 강원도가 재도전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올림픽 유치에 관한 업무를 하는 조직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국제스포츠위원회가 구성되자마자 올림픽 유치를 위한 준비를 틈틈이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올림픽 유치 신청 뒤 후보 도시가 되기까지 각 도시 간 보이지 않는 경쟁은 치열하다. 홍보 담당자로서 어깨가 당연히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경쟁 도시와 비교해 최대한 좋은 인상과 올림픽 정신에 입각한 행동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밝힌 ‘드림프로그램’ 국제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을 하면서 단연 보람되고 뿌듯했던 것이 드림프로그램이었다. 올림픽 유치활동을 하는 중 가장 정열적으로 힘을 다하고 관심을 가졌던 프로젝트였다.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고 있고, 성과가 이번 올림픽에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드림프로그램입니다. 제가 오기 전부터 기획된 것이었어요. 눈이 내리지 않고 얼음이 얼지 않는 나라의 청소년을 강원도로 초정해 동계스포츠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죠. 스노보드도 타고 스키도 가르쳐주고 스케이팅도 가르쳐줬습니다.” 한편으로는 IOC 위원에게 한 표를 호소하겠다는 전략도 깔려 있었다. “아프리카 지역은 동계올림픽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동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왔던 참가자들을 통해 우리의 뜻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끊임없이 이어진 드림프로그램은 이번 평창올림픽에서 열매를 거두었다. 2009년 드림프로그램에 참가했던 말레이시아 피겨스케이트 선수 줄리안 지 지에 이(21)는 말레이시아 동계스포츠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동계올림픽 출전 기회를 얻었다. 박종흔 씨가 한창 활동하던 2005년 참가했던 남아프리가공화국의 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타마라 제이콥스는 2월 초 성화 봉송 주자로 뛸 예정이다. 동계스포츠를 널리 알리고 올림픽정신을 실현한 소중한 프로그램이 시간이 지나 빛을 발하고 있다. “그땐 정말 용평스키장에서 살았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과 같이 지내고요. 인솔해온 지도자들에게는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면 평창이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도록 IOC 위원들에게 말해 달라고 막후활동을 했습니다. 제가 돌아다니면서 다 한 거죠. 지금 생각해도 드림프로그램은 정말 잘된 프로그램입니다.” 겨울 스포츠의 장, 평창으로 오세요! 강원도청에서 홍보부장 업무를 보다가 국제부장직을 맡아 서울로 근무지를 옮겼다. 이번에는 평창이 동계스포츠 경기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상을 전 세계에 심어주는 일이 관건이었다. “예를 들어서 스노보드 세계 챔피언십 대회를 한다고 하면, 다음 대회를 우리가 유치해오는 것이었어요. 프레젠테이션도 많이 했고 또 큰 대회도 여러 번 강원도에서 유치했습니다. 동계올림픽에는 국제스키연맹, 스케이팅연맹, 바이애슬론 등이 쭉 있잖아요. 산하 연맹들이요. 거기서 다 호응을 또 해줘야 합니다. 대회를 유치하려고 많이 다녔고 유치도 꽤 했어요.” 국제부장에 이어 올림픽 업무를 총괄하는 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 되면서 밤낮 없이 일에 매달렸다. 홍보부장 때 용평스키장이 집이었다면 이후에는 전 세계가 올림픽 유치를 위한 영업장이었다. 세계를 돌며 평창에 한 표를 호소했고 열정을 쏟았다. 유리하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열심히 뛰었다.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러시아의 소치와 대한민국의 평창이 근소한 차이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개최지 결정은 남아메리카의 과테말라에서 이뤄졌다. “우리나라는 전세기 한 대로 날아갔는데 러시아는 초대형 화물기 7대를 가지고 날아왔어요. 시내 곳곳에다가 공연장 만들고 엄청난 오일 머니를 갖다 부은 거죠.” 뭔가 전세가 밀리는 기운이었지만 우리 측도 표결이 있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발로 뛰고 평창을 알렸다. “권양숙 여사님이 마침 저희를 도와주셨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을 만나서 미팅도 하고 애써주셨죠. 나름대로 전략을 세웠습니다만 소치를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4표 차이로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러시아 소치에 내주고 말았다. 2007년 7월 3일. 뼈아픈 그날이었다. “평창은 벌써 2차 도전이었고 유치를 확신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더 이상 올림픽 업무를 보기가 싫어지더라고요.(웃음)” 쏟았던 정열에 비해서 얻은 게 없었다. 박탈감이 없었다면 세 번째 도전 때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었다. “만약 있었으면 조직위원회에서 활동을 했겠죠. 그런데 한 3년 그렇게 하고 나니까 올림픽은 조금….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정년을 2년 남긴 상황이었거든요. 좀 더 유능하고 젊은 친구들이 새롭게 유치 업무를 맡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올림픽 유치가 물거품으로 돌아간 뒤 박종흔 씨는 올림픽 업무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며 강원도지사였던 김진선 전 지사에게 학교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이후 주문진에 있는 강원도립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9년 정년퇴직했다. 못다 이룬 평창의 꿈은 후배들에게 넘겨주었고, 올해 마침내 결실의 그날을 맞게된 것이다. 후배들이 선배님으로서 박종흔 씨를 좀 챙기고 있는지 물었다. “안 그래도 후배한테 우스갯소리로 나를 잊은 게 아니냐며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나를 기억하라고 했더니 알았다 하더라고요.(웃음)” 후배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동계올림픽의 꿈을 실현시켰기에 자신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올림픽 유치 과정 속에서 상당 기간 근무한 것에 새삼 보람을 느낍니다. 이게 끝내 무산됐더라면 우리의 노력도 물밑으로 가라앉았을 거예요. 우리가 못 이룬 일을 후배들이 이뤄낸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죠. 제 나름대로 훗날 기여할 일이 있다면 물론 당연히 해야겠죠.” 박종흔 씨는 지금도 눈이 내리면 ‘이 눈은 설상경기에 좋을 눈이구나, 아니구나’를 생각한다. 오랜 시간 올림픽과 함께했던 삶이 여전히 몸에도 생각에도 배어 있다. 나랏일 전문가, 웰다잉 전문가 되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일궈낸 백전노장은 지금 그럼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제2인생도 궁금했다. 최근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웰다잉’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마침 기자와 마주한 곳은 현재 회장으로 활동 중인 아라웰다잉연구회의 공간이었다. 은퇴 뒤 인생에 대해 고민하다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것, 즉 ‘웰다잉’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과거에는 퇴직 공무원이 길가에서 쓰레기를 줍거나 산불 감시, 교통질서 캠페인 같은 단순노동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죠. 저는 30~40년 공직에 있었던 노하우를 접목해서 전문 재능을 기부하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생각했습니다. 퇴직 무렵 웰다잉에 대한 인식이 조심스럽게 사회에 퍼져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박종흔 씨는 2013년 웰다잉 전문가로 거듭났다. 그때 당시 *각당복지재단이 강원도의 동해가정법률상담소를 포함, 다섯 군데를 선정해 웰다잉교육전문지도강사양성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16주 교육을 이수한 뒤 웰다잉 지도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재는 비영리 민간단체인 아라웰다잉연구회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웰다잉 전문가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경로당과 노인복지원을 찾아다니면서 무료로 강의도 하고 봉사도 한다. 예전에는 아름다운 인생 마무리에 관해 주로 다뤘지만 최근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해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혹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 물었다. 또 봉사 이야기를 꺼낸다. 평생 공직생활에 국민들 염원을 담아 발에 땀나도록 뛰어온 사람이 지치지도 않나보다. “퇴직 전부터 악기로 봉사하고 싶어서 한 10년 색소폰을 배워뒀습니다. 그래서 심심치 않게 어르신들을 위해 연주하고 있습니다.” 남을 돕는 것도 좋지만 지금껏 헌신하며 살아온 자신과 더불어 가족과 행복한 인생을 많이 즐기시길 바란다. 2월, 평창 밤하늘에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면 손자에게 꼭 말하시라. “저게 다 할아버지 덕분이었다”고 말이다. *각당복지재단 1986년 설립된 각당복지재단은 인류애 정신에 입각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죽음준비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말기환자를 보살피는 호스피스 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 2017-12-2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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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정호텔에서 열린 패션쇼
- 모델! 시니어들에게 차별화된 자부심을 심어주는 명칭이 아닐까? '나 이렇게 멋지다!' 패션쇼를 할 때 그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으로 빛난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열정으로 가득하다. 모델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대다수 여성들의 로망이다. 요즘은 남성들도 많은 관심이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8년에는 65세 이상 노령인구가 14%를 넘는 고령사회, 2026년에는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은퇴 후 재정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시니어를 강력하게 끌어들일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은 없을까? 깊이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면 합리적인 비용으로 건강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노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2012년 퇴직하면서 무엇을 하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놀까 고민했다. 필자가 하고 싶은 것은 패션모델과 패션디자이너, 왈츠와 탱고 배우기, 오페라와 발레 감상이었다. 이런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곳은 서울이었다. 필자가 사는 평택은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있다. 그렇다면 서울로 가자! 그래서 집을 서울로 옮겼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을 했다. 시니어 대상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운용되고 있는 곳은 강남시니어플라자와 서초문화원이었다. 서초문화원에서는 영어회화, 수필 쓰기, 시 낭송하기, 문화해설사, 왈츠 과목을 수강했다. 모델 워킹 수업은 서초문화원에 없어 강남시니어플라자에서 받기로 했다. 강남시니어플라자 프로그램 중에서 상한가를 친 것은 단연 '모델 워킹'이다. 이 과목은 늘 대기자들로 넘친다. 나는 초창기부터 수강해 벌써 3년이 지났다. 모델 워킹은 경쾌한 음악에 맞춰서 바른 자세로 1시간 동안 워킹을 한다. 몸도 좋아지고 마음이 즐거워져 힐링도 된다. 이른바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해지는 훌륭한 프로그램인 것이다. 2018년부터는 강남구민만 강남시니어플라자 프로그램을 수강할 수 있게 됐다. 소비자의 강력한 니즈가 있는 곳에서 수익이 창출될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이 탄생하는 것이다. 수요가 있는데 공급자가 없다. 누가 과연 이 블루오션을 선점할 것인가? 결실은 재빨리 트렌드를 읽어내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상암에서 영등포 비콤 벗들과 송년 행사가 있던 날 언주역에 있는 삼정호텔로 갔다. 코리아시니어 모델 학원 김소영 원장님 초대로 패션쇼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모델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기 때문에 세련됨이나 기품이 떨어지는 옷들이 간혹 눈에 띄어 아쉬웠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모두 통과! 사진에 담지 않았다. 4기 수료식과 패션쇼를 마친 후에는 '시니어 롤 모델'에 관련한 짧은 강의도 있었다. 뷔페로 마련된 식사시간에는 현역으로 활동하는 성악가들의 공연이 있었다. 먼저 바리톤의 우렁찬 목소리로 비제의 ‘카르멘’ 중 '투우사의 노래'를 불렀다. 다음은 소프라노 차례.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 중에 나오는 너무도 아름다운 아리아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가 곱게 흘러나왔다. 이어진 순서인 테너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에서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렀다. 이어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화한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중 아름다운 이중창 '투나잇 투나잇'을 테너와 소프라노 둘이서 불렀다. "이번에 부를 곡은 뭘까요?" 테너가 참석자들에게 물었다. "축배의 노래요." 필자가 대답했다. 그가 웃으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아셨지요?" 당연한 것 아닌가? 즐거운 식사 자리에서 대미를 장식해야 하는 노래로 그 곡을 뛰어넘는 곡은 없으니까 말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중에 나오는 '축배의 노래'는 젊음의 환희가 가득한 아름답고 카리스마 넘치는 노래다. 바로 이거다! 품격 높은 현역 성악가들을 초빙한 것은 감각 있는 원장님의 '신의 한 수'였다. 참석자들의 즐거운 저녁 만찬 시간이 단번에 럭셔리한 분위기가 되었다. 레퍼토리가 너무도 잘 알려진 곡들이라서 신선함은 떨어졌지만 익숙함과 편안함이 있었다. 클래식 음악 마니아인 필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행사였다. 새삼 김소영 원장님의 기획력에 깊은 신뢰가 간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머지않아 멋지고 아름다운 그녀의 꿈이 큰 결실을 맺을 것이다.
- 2017-12-28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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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의 퇴직 이후
- 우리 가족은 6·25 전쟁 납북 피해자 가족이다. 저의 시부모님은 일제 강점기 시절 동경 유학 생활 중에 만나서 당시로서는 드문 연애 결혼을 하셨다. 시어머님은 3남 1녀를 낳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시던 중 6.25 전쟁의 발생으로 시아버님이 납치 되신 것이다. 어머님은 6·25당시 34살의 젊디 젊은 나이에 혼자 되셔서 갖은 고생을 하시면서 자제분들을 대학까지 교육시키셨다. 어머님은 저의 결혼 후 평생 우리랑 함께 사시다가 5년전 9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얼마 전 6·25를 맞아서 정부로부터 를 받고 남편은 많은 감회에 젖었다. 남편은 아버님의 납치 후 직장 생활 초기에는 혹시라도 이북의 아버님과 접촉할까봐 출장 허가도 힘들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맞벌이로 직장에 다니던 필자는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 때는 지금처럼 건강 프로그램도 별로 없어 뇌졸중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회복은 했으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몸이 불편한 상태이다. 내가 쓰러지자 가정 생활은 즉시 엉망이 되었고 또 남편은 곧 정년 퇴직을 하게 되었다. 서울의 모 방송국에서 30 년 넘게 근무하고 정년 퇴직을 한 남편의 퇴직금은 그 때로서는 많은 금액이었다. 그 때는 퇴직금도 미래가 어떨지 모른다며 매달 지급되는 연금으로 받지 않고 일시불로 받던 시대였다. 그리고 당시엔 은행의 이자도 상당히 높아서 이자로만 살아도 어느 정도 생활을 유지 할 수 있었다. 또 그 때만 해도 장수 시대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 은퇴 후의 생활 준비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어떻게 퇴직금을 관리 해야할 줄도 몰랐다. 그 때는 지금 유행하는 ‘은퇴 이후의 재무 설계’ 같은 말은 존재 하지도 않았다. 남편이 할 일을 못 찾아 힘들어 하던 어느 날 필자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찾은 주례 협회에서 직업적 주례사를 모집한다는 걸 보고 남편 몰래 응모를 했다. 남편이 방송국에서 방송 경험이 있으니 주례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실제로 주례 경험도 많았기에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남편 대신 응모 서류를 보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을 할 정도로 궁핍하진 않았지만 하루 하루 똑같은 무료한 생활로 시간 보내는 남편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면 나름대로 활력을 줄수 있지 않을까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합격 통지를 받고 남편에게 기쁜 마음으로 말을 했더니 엄청 화를 내면서 누굴 뭘로 보냐며 자기를 무시 했다고 몇 달 동안 나와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가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면 남이 자길 얼마나 궁하게 보겠냐며 자긴 앞으로 돈을 버는 일은 절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는 거였다. 사실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 출근만 하면 하루 종일 온통 내 세상이었는데 갑자기 하루 종일 붙어 있기가 참으로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필자의 단순한 생각이 남편을 화나게 만든 것이었다. 요즘은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요령이 생겨, 퇴직 초기처럼 싸우지도 않고 서로 각자 시간을 잘 보내고 있는 필자를 보면 대견한 생각이 든다.
- 2017-12-12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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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려나는 7080세대
- ‘7080세대’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대학생활을 한 세대를 말한다. 필자는 71학번이므로 ‘7080 세대’의 선두에 서 있다. 1970년대에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했다. 그 사이에 군 복무를 마치고 취업과 결혼까지 했다. 아이 낳고 열심히 가족을 먹여 살리다가 퇴직하고 이제 환갑을 넘어 칠십고개를 향해 가고 있다. ‘7080 세대’에서 빠르면 60대 중반이고 마지막 세대는 50대 초반이다. 필자가 졸업하던 무렵에는 취업이 잘되던 시기다. 기업들도 한창 사업을 확장하던 시기라서 1980년대 말에는 오히려 구인난에 허덕였다. 직장에서는 승진 바람이 불었고 증권, 부동산 등 모든 것이 순풍에 돛 달고 잘나가던 시기라서 노후 준비도 끄떡없었다. 그래서 퇴직한 시니어도 여유 있게 노후생활을 즐겼다. 퇴직은 했지만 하나의 소비 주체로서 인정도 받았다. 그래서 7080 TV 프로그램이나 7080 노래방 등은 이 세대를 인정하는 대명사처럼 불렸다. 1970년대에 포크송과 기타가 등장해 문화적으로도 독특한 세대가 되었다. 그런데 요즘 ‘7080’ 대신 ‘8090’이라는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대학생활을 한 세대 대신 1990년대에 대학생활을 한 세대가 주류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간판들은 주로 단란주점 등 라이브 술집에서 사용하는 상호다. 70세대면 현재 60대 중반이다. 필자 주변에는 단란주점에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다. 술 마시는 사람도 찾기 어렵다. 건강상의 이유로 고기도 끊고 술을 끊은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러니 70세대가 자연스럽게 빠지게 된 것 같다. 강남역 등 새로 생긴 번화가의 도로변은 10~20대 차지다. 도로변의 가게들은 온통 이 세대를 상대하는 업종이다. 골목 상권으로 들어가면 나이 차가 10년쯤 나서 고객층이 30~40대다. 또 그다음 안쪽 골목에는 50대 이상 시니어가 좋아하는 메뉴의 음식점들이 있다. 양재역 부근은 그나마 덜 북적대던 곳이다. 그런데 최근에 가 보니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양재역 사거리 남쪽 부근 골목에는 70세대가 가기 좋은 만만한 음식점이 모여 있었다. 초입에 큰 막걸리 집이 있어 필자도 자주 갔다. 그런데 그 집이 횟집으로 바뀌어 고객이 젊은 층으로 바뀌었다. 이제 막걸리를 마시려면 양재시장 포장마차 같은 허름한 곳밖에 없다. 최근에 가 보니 골목 안쪽 깊숙이 막걸리 촌이 생겼다. 주요 소비층은 당연히 시니어다. 번화가에서 도로변은 젊은 고객들이 차지하고, 시니어는 안쪽 골목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가 많다 보니 아예 시니어가 모이는 지역이 따로 있다. 바로 종로3가 일대다. 탑골 공원 안이나 주변으로 주로 70대가 모인다. 음식점도 시니어가 좋아하는 메뉴에 값도 싸다. 도로 건너 국일관 주변도 그렇다. 국일관 건물에는 시니어가 좋아하는 당구장, 활어회 시장, 사우나, 콜라텍 등으로 차 있다. 주변에도 전통 먹거리가 많다. 종로3가는 20대가 몰리는 익선동, 30~40대가 몰리는 종로3가 5번 출구와 3번 출구 사이에는 포장마차들이 많다. 소비 주체에 따라 상권도 바뀌는 것이다.
- 2017-12-05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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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약 먹는 기분처럼 흥이 돋는다
- 1976년 여름밤, 진하해수욕장에서의 남녀 신입사원들을 위한 캠프파이어는 현란했다. 어둠 속에서 익명성이 확보된 100여 명의 격렬한 댄스파티는 젊음의 발산 그 자체였다. 그중 열정적이고 현란하게 춤을 추어대는 한 여직원의 실루엣이 너무 멋있어 끝까지 따라가서 얼굴을 확인해보니 순박하고 어려 보이기까지 했다. 익명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가능하게 하는가를 실감했다. 그리고 이어진 장기자랑에서는 흥이 오른 젊은이들이 끼를 경쟁적으로 선보여 필자의 경쟁심을 자극했다. 필자도 용기를 내어 국통과 식기를 악기로 삼아 중모리 12박을 치며 춘향가 중 ‘쑥대머리’를 목청껏 불러댔다. 개성적인 민요가락에 빠진 남녀 신입사원들의 호응으로 심사위원들은 1등상을 줬고 부상으로 큰 밥솥을 탔다. 어깨너머로 배운 민요와 북장단 필자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훨씬 전인 1954년 혹은 55년경으로 기억된다. 밤이면 외양간이 딸린 우리 집 사랑방으로 아버지 친구분들이 몰려오곤 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된 시기였는데, 환담을 나누면서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리던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말라붙은 정서를 되살리는 수단으로 북장단과 민요와 창을 배우셨다. 국악 선생님 한 분을 초청하여 우리 집에 모시면서 밤이면 민요와 북장단을 상당 시간 배우셨는데 나는 어깨너머로 익혔다. ‘궁궁딱 궁또드락 똑딱 궁궁딱 궁궁궁’, 소위 중모리 12박 장단은 밤마다 배워도 어르신들은 많이 틀리셨는데 필자는 어렵지 않게 익히고 반복하곤 했다. 1000회에 가깝게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는 우리 한민족! 민중의 삶이 피폐하고 삶의 뿌리가 흔들릴 때마다 건전한 일상을 회복하고 즐거운 정서를 고양하기 위해 민요를 만들고 발전시켜왔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리랑만 해도 같은 3박 세마치장단에 300종류가 넘게 만들어져 한국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민요가 되었고 2012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된 것이리라. 우리 가락의 멋과 흥 대형 조선소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봄가을이면 대형 선박을 발주한 여러 나라의 해운회사들이 선박 건조 현장에 파견한 감독 혹은 검사원들을 야유회에 초청하여 한국의 산하와 문화유산을 보여주곤 했다. 동해안을 따라 울산에서 감포항으로 야유회를 가던 때 한국 민요의 장점과 특징을 설명할 기회를 가졌었다. 서양음악은 4분의 3박, 4분의 4박, 8분의 6박 등이 주종을 이루는데 한국의 민요는 훨씬 창의적이고 다양하게 민족의 정한(情恨)을 표현함을 설명했다. 또한 한국인이 많이 부르는 아리랑만 해도 지역마다 달라 그 종류가 300가지가 넘는다는 사실을 자랑했다. 아리랑의 뜻이 무엇이냐는 외국 선주 감독들의 질문에 ‘순수한 사랑을 갈구하는 가락’ 혹은 ‘고난을 삭이고 승화시키는 가락’이라고 말해줬다. 어느 해 가을, 추석 명절을 쇠기 위해 직장이 있던 동해안 쪽 울산에서 천리길을 차로 달려 서해안 쪽 고향 영광 집에 도착하니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와 계셨다. 이내 부친과 두 분이 북장단에 민요를 교대로 부르기 시작하셨다. 민요장단을 익힐 좋은 기회여서 부친과 담임선생님이 민요를 부르실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모리와 중중모리 장단을 쳐드렸다. 북이 자꾸 발에서 빠져나가려고 해, 장단을 치며 북을 끌어안으려 애를 쓰니 두 분 모두 웃으시며 즐거워하셨다. 그 후 영화 가 나와 장님이 된 누이가 민요를 부르고 남동생이 북장단을 치며 서로 회포를 푸는 장면이 인상적이어서 민요와 가락을 익힐 기회를 더 엿보게 했다. 정년퇴직 후 달려간 민요교실 정년퇴직하고 집에서 가까운 신당5동 주민센터에서 민요·장구를 가르치는 것을 알고 바로 등록했다. 남자보다 여자 회원이 대부분이어서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일주일에 두 번, 2시간씩 민요와 장구를 익히기 시작했다. 노랫가락, 굿거리장단, 세마치장단 등 여러 박자들의 민요 7곡씩을 조합해 교본을 만들어 매번 반복해가니 익히기 좋았다. 2년 정도 하니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민요를 부르며 장구를 동시에 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중모리 12박에 맞춰 부르는 금강산타령 등은 소리를 올리고 내리고 감고 꺾는 내용들이 악보에 없어 따라 하기 힘들었고 가사 또한 많은 분량이라 외우기가 쉽지 않았다. 장구 치는 것은 북장단 익힌 경험이 도움이 되어 따라갈 수 있었다. 지금도 이곳에선 수요일과 금요일 2시간씩 민요·장구 배우는 프로그램이 계속되고 있다. 민요·장구 모임도 결성해볼 테다 경기도 용인으로 생활의 터를 옮겨 얼마 지나지 않아 집 가까운 곳에 노인복지관이 들어섰다. 약 60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데 민요·장구가 포함되어 있어 기뻤다. 가르치는 선생님에 따라 장점들이 다름을 새삼 느꼈다. 빠른 자진(잦은)모리장단의 경복궁타령과 잦은 뱃노래는 매우 흥겨웠고 굿거리장단 4박에 실린 창부타령의 가사들은 민족의 애환을 다양하게 담고 표출함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해 말에 60개 프로그램 단체공연을 할 때 10여 명이 무대에 나가 배운 민요들을 부르며 흥을 돋우어줬다. 청중석에서 나와 어깨춤을 추는 관중도 있어 민요의 힘과 전파력을 느낄 수 있었다. 민요·장구도 좋은 취미로 익히고 만들려면 역시 지속성과 성실성이 필요하다. 집 가까운 노인복지관에서 경제논리로 폐강이 된 후 집에서 좀 멀지만 다른 지역의 주민센터를 찾았다. 이곳에선 금요일 초급반과 월요일 중급반으로 2시간씩 운영되어 좋았고 선생님은 또 다른 개성과 장점이 있었다. 특히 굿거리장단의 다양성을 익히도록 매번 반복하여 민요를 부르고 장구를 힘껏 쳐대면 일주일의 피로가 풀리며 심신 건강을 위한 보약을 먹은 기분이 된다. 1996년 부친을 위한 칠순잔치 때 국악인을 불러 부친과 고향 친구분들을 즐겁게 해드렸다. 내년 필자의 칠순 날이 오면 형제자매들과 친구들을 불러 노래와 한민족의 영원한 고향노래인 민요들을 같이 불러볼까? 이를 위해 작년 말에 어떤 모임에서 불렀던 중모리장단의 ‘한오백년’ 과 처가 마을에 가서 담 쌓는 봉사를 하면서 목청 돋워 불렀던 ‘창부타령’을 즐겁게 다듬어 가보자! 그리고 전 직장동료들 취미모임인 산악회, 역사문화탐방회, 바둑회, 독서문학회에 이어 민요장구회 결성도 건의해보자.
- 2017-11-19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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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나는 어제 먹은 음식
- 1998년 무렵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법조인 이태영 변호사가 치매를 앓는다는 사실을 알고 필자는 탄식했다. ‘여성들의 권익을 찾아주기 위해 평생 헌신하신 분에게 이런 병이 오다니… 누구보다 두뇌활동을 열심히 한 분도 피해갈 수 없는 질환이란 말인가….’ 머리를 잘 안 쓰는 사람들이 치매에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필자는 큰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치매는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오는 병 같다. 필자가 평택에 살았을 때 아래층 70대 할머니가 그랬다. 자녀들이 분가한 후 홀로 지내던 분이었는데 젊은 시절 한 미모 했을 것같이 고왔고 말도 자분자분 조용히 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하고 어울린다거나 대화를 나누는 일이 거의 없었고 집 안에서 혼자 폐쇄적인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아들이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시고 갔다. 필자와 인연이 있는 서울농대 농화학과 P교수님도 치매를 피하지 못했다. 40대 후반 무렵 교수님 댁에 놀러갔을 때의 일이다. 사모님은 P교수님이 퇴직한 후 유럽 여행을 하며 찍은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사진 속에서 교수님과 사모님은 다정하게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와우! 사모님 부러워요. 완전 잉꼬부부시네요!” 물색 모르는 필자가 감탄하자 사모님은 웃으면서 P교수님이 알츠하이머병이 와서 손을 꼭 붙잡고 다닌 거라면서 설명을 해주셨다. “손을 놓으면 아무데나 막 가버리셔서 잠시라도 손을 놓을 수 없었어요.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던 날들이라서 서둘러 유럽여행을 떠났지요. 즐거워야 할 여행이 얼마나 쓸쓸하던지….”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1970년대 필자가 농대 학과장실에 근무할 때 학생지도위원이었던 P교수님이 가끔씩 들리셨다. 방문 여는 소리만으로도 P교수님이라는 걸 단박에 알았다. 문을 유난히도 씩씩하게 열어젖히셨기 때문이다. 그토록 건강하시던 분이 치매에 걸리다니… 인생무상이 이런 것인가 했다. 고령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치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점에서 최악의 질병이다. 치매는 진행 속도를 줄일 수는 있어도 완치는 되지 않는다고 한다. 병이 오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다. 치매가 올까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필자에게는 있다. 뇌가 여러 번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18세 때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며 심각한 생각에 빠져 걷다가 전봇대에 엄청 세게 부딪혔었다. 55세 때는 바위에 부딪혀 정신을 잃었었다. 요즘은 잠의 질이 형편없다. 꿈을 꾸다 깨어나는 일이 많아 머리와 몸이 무겁다. 이 노릇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심히 걱정스러웠는데 때마침 치매예방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 강남시니어 플라자에서 치매 테스트를 받아봤다. 그 결과는? 필자도 놀라웠다. 30점 만점에 30점이 나왔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 먹은 음식.’ 이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아침마다 디톡스 주스 한 잔에 사과 한 알, 현미 잡곡밥에 굴 미역국이나 시금치 된장국 등을 먹으며 건강한 밥상을 차리려 노력한다. 먹거리에서 오는 리스크만이라도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모델워킹을 하고, 왈츠를 추고, 서울 둘레길 걷기를 한다. 오늘도 필자는 많은 사람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치매가 가까이 올까봐 경계하며 살고 있다.
- 2017-11-09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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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경력 나이테
- 필자는 도전을 즐겨 한다. 삶을 활기차게 하며 희망을 준다. 현재 자리에 머물고 있음은 퇴보이다. 왜냐하면, 주변 환경이 급하게 움직이며 변하고 있어서다. 앞서지는 못하여도 변화의 속도에 묻어가야 한다. 인간의 뇌는 자극을 줄 때 성장하고 더 건강해진다.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유다. 기회가 있으면 망설이지 않으려 한다. 2014년 11월 24일 KBS 1TV 아침마당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이름 세자를 삼행시로 지어 이렇게 소개했다.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 이러한 공개적 선언도 도전을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담배를 끊으려는 의지를 강건히 하기 위해 친구들 앞에서 금연을 선언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또 하나의 도전으로 고용노동부 산하 기관인 노사발전재단에서 주관한 “금융인 희망 스토리 수기 공모전”에 출품하여 우수상을 받았다. 금융권에 재직 또는 퇴직한 사람을 대상으로 모집하여 같은 길을 가려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한 사업의 하나다. 필자는 조기 퇴직한 후 먹고 살기 위하여 다양한 직업과 일을 하였다. 대중 드라마 엑스트라 출연, 조경관리, 만화방 창업, 부대찌개 음식점 운영, 결혼 주례 등 별별 일을 하였다. 뒤늦은 나이인 63살에 “은퇴설계 전문 강사 과정” 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인생 은퇴설계 전문 강사로 나서게 되었다. 이 일이 후반생을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삶으로 만들어 가고 있어 “새로운 인생, 은퇴설계 전문 강사” 제목으로 수기 공모전에 출품했었다. 우수상에 선정되어 11월 3일 노사발전재단이 주최한 “2017년 금융인의 밤” 행사에서 상을 받았다. 수기 공모전은 두 번째 수상이다. 2016년도에 사회연대은행이 주최한 공모전에 “세 알의 씨앗을 뿌리다”라는 수기를 출품하여 수상한 경험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경험과 삶에서 얻은 지혜를 전수하는 일은 인생에 가치와 의미를 준다. 미국인 젤린스키는 수많은 은퇴자를 면담하여 얻은 결과치를 모아 펴낸 “은퇴 생활백서”에서 은퇴 후 가장 가치 있는 일로 경험 전수와 봉사를 들고 있다. 전 반생에서 경험한 삶의 지혜를 혼자 가지고 있다 세상을 떠난다면 아까운 일이다. 필자는 그런 일로 은퇴설계 전문 강사로 나서게 되었다. 그 배경과 내용 그리고 희망 사항을 수기로 썼다. 필자의 강의는 직접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에 공감과 관심도가 높다. 뒤늦은 나이 63살에 시작하였으나 어느 사이 5년의 경력이 쌓였다. 이제 조금 강의에 대해 눈을 떠간다. 수기공모전 우수상 또한 강사 경력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자료가 되었다. 브라보마이라이프 월간지 동년 기자로 써온 글들이 수기를 쓰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 2017-11-08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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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후 목공 장인 꿈꾸는 박규완씨
- 여성이 많은 목공교실에서 오롯이 눈에 띄는 중년 신사가 한 명 있다. 가구 제작에 몰두하는 모습을 얼핏 보면 이미 30년쯤 ‘톱밥만 먹고 살아온’ 장인처럼 보인다. 바로 박규완(朴奎浣·61)씨다. 하지만 그의 진짜 직업은 원자력 전문가. 한국원자력환경공단에서 근무하며 눈앞으로 다가온 퇴직을 준비 중인 엔지니어다. 평생을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관련한 일을 하며 살았고, 국내에서 운영 중인 상당수의 원전은 그의 손을 거쳤다. 정년이 가까워지면서 회사에서 운영하는 퇴직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고, 박씨의 선택은 목공예였다. “나무가 주는 독특한 매력이 있어요. 질감에 향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죠.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는 과정도 무척 행복해요. 사실 그 전부터 집 안의 간단한 인테리어를 위한 목공예는 직접 해왔어요. 하지만 전문적으로 배우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니까 제대로 배워보자 싶었죠.” 교육을 통해 그는 도면을 그리는 법, 공구나 장비를 다루는 법도 새로 배웠다. 원전 건설 현장에서 호령하던 그였지만 안전하게 자신만의 가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초가 중요했다. “안전이 우선이니까요.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할까요. 발전소 지을 때도 사고가 나면 가장 먼저 다치는 건 엔지니어 당사자라서 허투루 작업할 수 없었어요. 가구를 만드는 과정도 비슷해요.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죠.” 그가 목공예를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남을 도울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간 사회에서 혜택을 받고 살아온 만큼 이제는 재능기부를 통해 사회에 되돌려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최근에 도시 재생이 사회적으로 주목받고 있잖아요. 도시 환경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분야 중 하나가 바로 목공예입니다. 아직 배우는 단계라 어디까지 힘을 보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수료 후에는 방과 후 학습을 통해 아이들에게 나무 다루는 법을 가르치거나, 직접 제작한 물품들의 기부도 생각하고 있다. 또 소외계층 가족의 집수리도 그가 해보고 싶은 봉사활동이다. 이 과정에서 기대하는 것 중 하나는 다양한 관점이나 감각을 통해 사고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업무 환경이 아무래도 젊은이들의 미적 감각과는 거리가 멀었던 만큼 고리타분한 기성세대의 관념에서 탈피해보고 싶은 것이 그의 희망이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 그는 목공예뿐만 아니라 캘리그라피나 도시농업도 배우고 있다. 목공예를 시작한 덕분인지 요즘 집에서 인기가 높아졌다고 즐거워한다. 그가 만든 가구에 시집간 딸과 며느리가 반해 주문량이 늘었기 때문이다. 재료값이 만만치 않다며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이런 반응이 싫지는 않은 눈치다. “수납장과 탁자를 만들어줬는데 색상이 맘에 든다면서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요. 제품을 써보더니 믿음이 가는지 또 만들어달라고 성화예요.”
- 2017-10-27 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