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탔다. 승객이 많아 좀 붐비는 상태였다. 사람이 많으니 늦게 탄 필자는 출입문 바로 앞에 서게 되었다.
잠시 후, 문이 반쯤 닫히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투박한 어그부츠 발을 문틈에 쑥 들이밀고 있다.
이미 문이 닫히기 시작했으므로 다음 차를 기다리면 될 텐데 굳이 거의 다 닫힌 문을 열겠다고 발로 버티는 여자가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한번 해 본 솜씨가 아닌지 그 여자는 계속 전철 앞쪽을 쳐다보며 발을 빼려 하지 않았고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렸다.
언젠가 전철을 탈 때 문이 닫히고 있는데 무리하게 손을 넣거나 핸드백이나 우산 등으로 닫히고 있는 문에 들이밀어 억지로 여는 행동은 하지 말라는 경고 안내 방송을 들은 적 있는데 오늘 딱 목격을 했다.
앞쪽 기관실에서는 문틈에 발을 들이민 사람이 보이나 보다.
그것을 아니까 그 여자는 열릴 때까지 한쪽 발을 문 사이에 끼우고 앞쪽만 계속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문이 열리니 그 여자와 일행 남자가 탔다.
그들 뒤편에 서 있는 필자 눈매가 곱지는 않았을 것이다. 닫히는 지하철 문에 발 한쪽을 탁 들이민 그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던 필자는 잔뜩 그들을 흘겨보다가 얼마나 바쁜 일이 있으면 그런 행동을 했을까 이해해 보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는데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일본인이었다.
일본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는 예의 바르고 예절을 잘 지키기로 유명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저렇게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남의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걸까?
며칠 전에 가회동에 있는 은행에 볼 일이 있었다.
가회동에 갈 때마다 필자에겐 별스럽게 보이지 않는 골목인데 대형관광 버스나 소형 버스에서 내린 외국 관광객들이 그 골목으로 구경하러 가는 걸 보면서 뭐 볼 게 있나? 했는데 얼마 전 정식으로 북촌 탐방을 해 보니 그 골목은 북촌 8경의 한 곳으로 참 아름다운 전통 한옥 골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아름다운 우리나라 전통 한옥을 잘 느껴보기를 바랐고 우리나라로 여행을 와주어서 참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내리니 길 위에 한 무리의 일본인 여행객들이 아마 개인으로 놀러 왔는지 커다란 지도를 펼쳐 들고 의논을 하고 있었다.
가이드가 따로 없으니 아마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필자는 우리나라를 찾아 준 것이 고마워서 잠시 미소를 짓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고여덟쯤 되는 여행객들이 ‘스미마센’ 하면서 한옆으로 우르르 피해 주고 있었다. 아마 자기들이 필자가 가야 할 길을 막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필자는 좀 놀랐다. 그들이 필자를 방해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필자가 조금 옆으로 비켜 지나가면 될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일본어를 좀 할 줄 알았다면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할 수도 있었을 텐데 몹시 아쉬웠다.
그런 정도로 예의가 바르고 친절한 일본인도 있는 반면 오늘, 닫히는 지하철 문을 열겠다고 한쪽 발을 쑥 들이민 그런 일본인도 있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 이런저런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될 수 있으면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짓은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필자부터도 행동에 조심하자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혜화역 4번 출구를 나와 혜화동 로터리에서 길을 건너 3분가량을 걸었다. 한무숙 문학관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심히 걷고 뛰던 대학로 길 옆. 이 익숙한 거리를 수없이 지나다니면서도 문학관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니. 조용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문학관 입구가 보였다. 긴 숨을 내쉬고, 무거운 나무 대문을 열고. 그녀와 첫인사를 나눴다.
한무숙(1918~1993)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소설가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학교보다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중이염, 폐결핵 등을 앓아 어렸을 때 어른들이 ‘서른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한다. 서른까지만이라도 살아달라는 당부였다. 뇌막염으로 왼쪽 청력을 잃었지만 삶에 대한 의지와 탐구는 끊임없었다. 그림 재능이 있어 초등학교 2학년 때 독일 베를린 만국 아동 전시회에서 입상했다. 언어 능력도 뛰어났다. 독학으로 영어와 프랑스어를 익혀 쓰고 읽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화가를 꿈꿨지만 1940년 결혼 이후 그림 그리는 것이 쉽지 않아 펜과 종이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글쓰기로 전업했다. 1941년 잡지 장편소설 현상 공모에서 ‘등불 드는 여인’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대표 소설로는 , 등이 있다. 은 폴란드어, 영어, 프랑스어, 에스토니아어, 체코어, 중국어로 번역됐다. 대표적인 기념사업으로 1995년부터 한무숙문학상을 재정해 1년 중 활약이 돋보인 중견 소설가에게 상을 주고 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한무숙 소설 독후감 쓰기 대회’도 2011년부터 진행하고 있다.
작가의 흔적, 문학관에 담다
한무숙 문학관은 작가가 40년 동안 살았던 종로구 명륜 1가의 한옥집에 세워졌다. 대청마루에 꾸민 1전시실과 2전시실인 응접실, 집필실, 한무숙 작가의 사진과 다양한 소품 등을 전시해놓은 3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입구로 들어가 바로 앞에 보이는 널찍한 대청마루가 1전시실이다.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한무숙 작가의 대표 소설 에서부터 단행본, 평소 썼던 메모지, 여권, 여행을 하면서 가지고 다녔던 주사기 등 한무숙 작가의 대표 소장품들이 전시돼 있다.
2전시실은 응접실이다. 한무숙 작가가 살았을 때보다 집안 내부 규모를 넓혔다. 2006년 공사를 진행했는데 응접실 중앙에 있는 기둥을 기점으로 왼쪽이 원래는 뒷마당이었다고 한다. 펄벅 여사를 비롯해 국내외 유명 인사들이 다녀간 이곳에는 작가의 소품과 유명 문인과 화가들이 직접 선물한 족자 등이 전시돼 있다.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곳
한무숙 문학관의 백미는 집필실이다. 작가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살아생전에는 책이 더 많았는데 수천 권에 이르는 책을 숙명여대에 기증했다고 한다. 전시를 위해 책상의 방향을 관람객 쪽으로 돌려놓은 것 말고는 옛 모습 그대로다. 책상 위에는 작가가 쓰던 만년필과 잉크, 손녀가 그린 그림 등이 놓여 있어 따뜻함을 더해준다. 평소 사용했던 오래된 양산과 우산도 방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3전시실에 들어가면 작가가 시집갈 때 만들었던 수공예품을 비롯해 초기작 영인본을 감상할 수 있다. 드라마로 제작됐던 소설 의 비디오 등도 전시돼 있다.
한무숙 문학관은 사립박물관이지만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박물관보다 작다. 관람료는 받지 않지만 박물관 측은 방문 전에 꼭! 예약을 해달라고 당부한다. 예약을 하면 상주하는 문학사가 관람객들과 전시실을 함께 다니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한무숙 작가의 아들인 김호기 관장은 어머니의 소설을 이해하는 관람객을 소중히 모시고 설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매일 관람객이 꾸준히 찾고 있다.
관람 정보
관람시간 평일 9:30~5:00 (전화 예약 후 관람 가능), 주말 및 공휴일 휴관 (토요일 오전 관람 가능) 입장료 무료 문의 및 예약 02-762-3093 위치 서울시 종로구 명륜1가 33-100(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 혜화초등학교 방향 약 200m) 홈페이지 www.hahnmoosook.com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주를 한 번쯤은 가봤을 것이다. 필자도 30대에 경주를 가봤다. 잘 보존되어 있는 신라시대의 각종 유물과 시가지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왕릉은 신기함을 넘어 필자를 무아지경으로 몰고 갔다.
시니어가 되고 나서도 1년에 한 번쯤은 찾아가고 있지만 웅장함과 신비스러움은 점점 시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경주에서 지진이 난 후에 찾아간 유적지는 매스컴에서 방송되는 사실들과는 대조적으로 보였다. 일부 흙담이 진동으로 갈라지거나 떨어진 곳도 있었고 오래된 건물 지붕의 기와도 흘러내린 곳이 있었으나 아주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해마다 가을 단풍이 물들 때면 경주 시내와 유적지는 밀려드는 차량과 여행객들로 혼잡했고 식당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진 여파인지 이번에는 문화 유적지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해설사의 열띤 언변에 도취되어 그 어느 때보다도 알찬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보문단지를 지나 교리 한옥마을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도보로 교촌마을로 들어가니 그곳에서도 문화해설사가 반갑게 맞아준다. 교리 김밥집도 여행객이 없어서인지 문이 잠겨 있었다. ‘21세기의 최 부자로 살아가기’라는 스토리가 있어 최 부잣집을 둘러보았더니 최 부잣집의 가훈이 눈에 들어온다.
1. 흉년에는 땅을 사지 않는다.
흉년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부자에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이는 가진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라고 보았고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부를 축적하지 말라는 교훈이 담겨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인 것 같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다. 반드시 끝이 있다. 그러나 욕심은 끝이 없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동물이 인간이다. 다 같이 행복한 아름다운 사회가 지켜질 수 있도록 우리 시니어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2.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조선시대에는 과객(나그네)이 부잣집에 들르면 며칠씩 혹은 몇 주일씩 묵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운송수단과 통신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여서 과객을 통해 전국의 중요한 정보도 얻고 또 전국의 여러 곳에 그들의 인심을 전달해 중요한 일이 발생했을 때 좋은 여론을 형성하기도 했단다. 최 부잣집에서도 1년에 소비하는 쌀이 3000석 정도였는데 그중 1000석은 과객을 대접하기 위한 쌀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부정부패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도 이런 얘기를 듣기도 하고 글을 통해 보기도 했을 텐데 베풀기에도 인색한 그들의 욕심은 끝이 없다.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좀 묻고 싶다.
우리 시니어들은 부를 축적하기보다는 여생 동안 봉사를 생활화하면서 살아가면 좋겠다. 봉사는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만큼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누고 사회에 환원한다는 생각으로 생활한다면 좀 더 멋진 노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경제학 용어에 ‘한계효용(marginal utility)체감의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가 추가될 때마다 얻는 효용(만족감)은 줄어든다는 경제 용어입니다. 경제학자들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첫 번째 빵을 먹을 때는 큰 만족감을 느끼지만 2개3개 4개를 계속 먹어 갈수록 만족감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배가 불러 올수록 더 이상 빵에 대한 호기심이나 갈구하는 마음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세상은 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배우고 채워도 질리지 않는 신기한 것들이 많습니다. 세상은 호기심을 유발하는 진기명기한 일들이 즐비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원만한 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해도 어지간해서는 감동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새로운 것을 늘 보니 기뻐서 하루 800번을 웃지만 어른은 하루 8번 웃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궁금한 것이 많아서 어른들에게 계속 질문 합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어지간해서는 그러려니 하고 스스로 답을 얻고 말지 궁금해서 또는 호기심으로 질문하지 않습니다. 알고 싶은 욕망이 강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여주 신륵사에 선배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선배님은 다리가 아프신지 “신륵사 절이라고 뭐 다르겠어. 절 다 그렇지 뭐 나 여기서 쉴 테니 자네들끼리 다녀오게 ” 하면서 벤치에 주저앉습니다. 불과 300m만 가 면 절 구경을 할 거리에서 멈추어 버립니다. “선배님 나와 함께 천천히 올라가시지요.”했더니 손사래를 칩니다. 표정을 보니 확실히 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절 구경이 궁금하지도 않고 흥미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선배님이 착실한 기독교신자 여서 절은 싫어하나보다고 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선배님의 마음에는 사찰의 대웅전이나 부처님에 대한 호기심이 없습니다. 호기심이 없어지면 생각은 고루해지고 마음은 늙어가고 몸은 움직이는 것을 멈추려합니다. 물론 모든 사찰의 부처님은 대동소이합니다. 크게 보면 같지만 쪼개어 살피면 다 다릅니다. 누워있는 부처도 있고 받침대의 모양이나 앉은 위치 크기도 다 다릅니다. 나이 들면서 그러려니! 그럴 거야! 하고 질문을 닫아버리는 순간 우리의 뇌는 이미 늙어 감을 인정해야 합니다. 소녀들은 돌 굴러가는 것을 보고도 까르르 웃습니다. 하지만 나이 들면 바위가 굴러가도 겁만 먹을 뿐 즐거워 웃지 못합니다. 개그맨이 직업적으로 웃겨도 팔짱을 끼고 ‘웃기려면 웃겨봐라’ 노려보며 시큰 둥 합니다.
필자는 스스로 호기심을 만들어 냅니다. 카톡으로 자식들한테 문자나 그림을 날리면서 이놈 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 합니다. 예상한 반응을 보이면 재미있습니다. 오늘만 해도 도서관에 유지송님이 쓴 ‘은퇴달력’이라는 책이 철학 분류기호인 100번을 달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왜 틀린 분류표 명찰을 달았는지 궁금합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전문가인 사서 도서관 직원에게 300번 대의 사회분류표를 달아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금방 알아듣고 잘못을 시인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수로 잘못한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과거 이야기도 궁금하고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오늘 커피를 나눈 분은 젊어서 건설업에 종사했는데 시골에 한옥 황토방을 만들어 귀향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흥미진진한 건설현장 이이야기도 듣고 황토방의 좋은 점을 터득합니다. 책에 없는 호기심을 채워주는 좋은 이야기는 경험한 사람에게 직접 듣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려면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이 있어야 합니다.
늙어가는 잣대는 바로 호기심이 얼마나 있느냐 입니다. 궁금하지 않고 알고 싶은 것이 없으면 즐거움도 없습니다. 공자님 말씀에도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현대판 평생학습입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온통 호기심 천국입니다. 우리에게 호기심이 있는 한 우리는 영원한 청춘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맛있게 느껴지는 음식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청국장’이 아닐까 싶다. 쿰쿰한 냄새 때문에 꺼리다가도 그 참맛을 알고 나면 구수한 향에 밥 생각이 절로 난다. 청국장 특유의 맛뿐만 아니라 색다른 풍미까지 즐길 수 있는 ‘물꼬방’을 소개한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느림으로 먹는 밥상 ‘물꼬방’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에 터를 잡은 물꼬방은 한적한 주변 풍경과 어우러진 한옥이 돋보인다. 서울시 명륜동에 있던 오래된 한옥을 통째로 뜯어와 현재의 디귿자 형태로 재조립했다고 한다. 오랜 숙성을 거쳐야 맛이 더해지는 청국장처럼 세월의 흔적이 깃든 한옥의 모습이 정겹게 느껴진다. 가게 입구로 들어서자 바로 왼쪽에 ‘청국장 발효실(소정희 맛 연구소)’이 있다.
국내산 유기농 콩들이 3중 가마솥(물꼬방에서 제작)을 거쳐 맛있는 청국장으로 탄생하는 공간이다. 그 앞 카운터에서는 카페 메뉴를 주문할 수 있는데, 아름다운 아트라떼부터 고급 블랜딩 티까지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 디저트는 야외 테라스에서 즐길 것을 권한다. 시원한 가을 하늘 아래 자연을 벗삼아 즐기는 차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물꼬방은 계절에 따라 실내 분위기가 달라진다. 어느 자리에 앉아도 통유리를 통해 펼쳐지는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자연을 병풍처럼 둘러싼 물꼬방은 그와 어울리는 친환경 먹거리를 지향한다. 음식에 쓰이는 소금이나 된장, 채소 등은 엄선된 친환경 유기농 식재료를 사용한다. 청국장은 다른 반찬보다도 함께 먹는 밥맛이 중요하다. 우렁이농법으로 농사지은 유기농 쌀을, 식당에 마련한 미니 도정기로 매일 아침 3분도 현미로 도정해 사용한다. 쌀눈이 살아 있어 영양가가 높고 맛도 좋아 이곳을 찾는 단골도 많다.
또 한 가지 특별한 것은 ‘소금’이다. 8년 전, 신안 앞바다에서 직접 채취한 간수 뺀 천일염은 물꼬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한 식재료 중 하나다. 좋은 재료에 주인장의 정갈한 손맛이 더해지니 맛과 건강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다. 처음 방문하는 이들에겐 여러 메뉴를 풍부하게 맛볼 수 있는 물꼬방정식(1만8000원)을 추천한다. 직접 띄운 청국장찌개를 비롯해 일반 요거트와 달리 우유를 사용하지 않고 청국장 균주로 8시간 이상 발효한 청국장 요거트, 청국장 쌈, 유자청·청국장 요거트를 곁들인 토마토, 떡갈비, 더덕구이, 콩불고기, 버섯탕수육 등을 골고루 즐길 수 있다. 메뉴 구성은 계절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데 새로운 메뉴를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주인장 소정희씨는 “물꼬방은 단순히 밥만 파는 곳이 아니라, 문화를 파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한옥 지하에 있는 ‘아래 갤러리(Are gallery)’에 가보면 그녀의 말에 수긍이 간다. 단절된 현대인들의 삶에 소통의 물꼬를 트고 싶다는 주인장의 바람이 담겨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갤러리 입구에는 매달 다른 장르의 작가들이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할 수 있는 상설 전시장을 마련했다. 안쪽 공간에서는 ‘젓가락의 변천사 기획전’을 열고 있다. 전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젓가락 유물뿐만 아니라, 3000년 젓가락의 역사와 다양한 재료로 만든 한국, 중국, 일본의 젓가락 변천사 등을 살펴볼 기회다.
전시실 내부를 가만히 둘러보면 커다란 장독이 눈에 띄는데 그 안에는 소금이 한가득 들어 있다. 현재 음식에 쓰이는, 8년 전 신안 앞바다에서 가져온 소금인데, 소금도 청국장처럼 발효 과정을 거치면 맛있어질 것 같아 넣어뒀단다. 원래는 식품저장고였던 공간을 갤러리로 바꾸면서 소금 장독도 옮기려 했으나 소금 알갱이가 서로 붙은 채 굳어 있어 퍼 담을 수도 없었고 무게도 상당해 장독 밑이 빠질 우려가 있어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대로 오랜 시간 발효 과정을 거치면 훌륭한 식재료가 되거나, 젓가락처럼 유물이 될 테니 물꼬방의 보물이 될 소금임이 분명하다.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고모루성길 258 (031-544-1695)
‘느림으로 먹는 밥상’이라는 물꼬방의 콘셉트처럼 느릿하게 시간을 넉넉히 두고 찾아갈 것을 권한다. 여유를 갖고 천천히 바라보면 곳곳에 숨겨져 있는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글 박원식 소설가
지리산 자락,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산야에 살포시 내려앉은 9월의 소슬한 가을빛. 한낮이지만 핼쑥한 가을볕을 받은 능선도, 숲도, 나무도 덩달아 수척하다. 연신 허리를 틀며 휘어지는 언덕길 양편엔 상점이 즐비하다. 사람들의 발길도 연달아 이어진다. 소설가 박경리(1926~2008)의 대하소설 의 무대이자 드라마 촬영장인 ‘최참판댁’을 관람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다.
언덕 끝자락 외진 곳엔 ‘박경리문학관’이 있다.
‘최참판댁’ 일대엔 들고나는 사람들로 바글거리지만, 바로 옆에 있는 문학관은 찾아드는 이가 드물어 고요하다. 문화보다는 관광을, 문학보다는 눈요기를 포식하는 일로 만족을 구하는 항간의 경향이 여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박경리는 생시에 를 기념하는 공간인 ‘최참판댁’을 조성하는 일을 당최 마뜩치 않아했다. 죄스럽기까지 하다고 토로했다. ‘최참판댁’이 필시 요란한 관광상품으로 쓰일 것을 미리 내다보았으며, 가뜩이나 넘쳐나는 ‘관광지’ 홍수에 또 하나의 관광지를 보태는 게 달갑지 않았으며, 결국은 지리산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라 보았다. 세상과 세태를 읽는 박경리의 냉철한 눈과 광활한 가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경리문학관’은 하동군이 올해 5월 개관했다.
이전에 ‘전통농업문화전시관’으로 쓰였던 한옥 건물을 개조해 문학관을 꾸몄다. 건물의 형용은 덤덤하거나 밋밋해서 슬쩍 섭섭하다. 그러나 내부에선 박경리의 혼이 스멀거린다. 300㎡쯤 되는 공간의 벽면과 진열장에 작가의 개인사와 창작열과 일상을 더듬을 수 있는 갖가지 책자와 초상화, 사진, 영상물 등이 전시되었다. 다분히 정형화된 구색이자 구성이지만, 박경리가 생시에 사용하거나 아꼈던 유물 41점이 흥미롭다. 이 소중한 유물들은 박경리의 딸이자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인 김영주에 의해 무상 대여 받은 것들이다.
박경리의 는 자그마치 25년이라는 긴 집필기간을 통해 5부 16권으로 완간한 걸작이다. 그는 오직 칩거한 채 에 매달린 장구한 시간을 ‘빙벽에 걸린 자유, 주술에 걸린 죄인의 세월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암 수술을 받고 퇴원한 날에도 가슴에 붕대를 감고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썼다. 탁발한 재능의 소유자이기 이전에 그는, 유례가 드문 독종이자 강골이었다. 유리 진열장 안에 놓인, 방울방울 피를 뿜듯이 써내려갔을 육필원고 뭉텅이들이 숙연한 감동을 자아낸다. 글씨체에선 활달한 기운이 생동한다. 늘 곁에 두고 수시로 뒤져 알토란같은 토속어를 건져 올렸을 게 분명한 국어사전은 낡아 너덜거린다. 소설이란 여하튼 모국어와의 내밀하고도 치열한 통정(通情)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유품이다.
특유의 도회적이고 지적인 용모를 한껏 돋보이게 하는 데에 이바지했을 원피스와 재킷, 일상의 실용적인 동향을 짐작하게 하는 싱거 미싱, 안경과 만년필과 가죽장갑, 도자기와 그림부채 같은 유물들이 눈길을 오래 붙잡는다. 박경리의 끽연 습성은 생과 함께 유구하게 지속됐는데, 진열장 안에 덩그마니 놓인 저 아리랑 담배와 재떨이와 라이터를 무시로 애용했던 사람은 지금 우주의 어느 푸른 공간에 거주하는가.
빛바래고 균열이 간 흑백사진 하나에 다시 눈길이 오래 머문다.
박경리의 소녀 적 사진이다. 자못 그윽한 눈매, 고집스레 두툼한 볼, 헌칠한 이마…. 자존감과 내향성이 도드라지는 모습이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그는 진주여고에서 소녀기를 보냈는데 유별난 독서광이었다. 책에 푹 빠져 지냈던 소녀 박경리는 마치 예정된 길로 접어들듯이 문학이라는 꽃길, 혹은 가시밭길로 자연스럽게 걸어들어갔으며, 게걸스러운 독서를 통해 얻은 상상력으로 소설의 산정(山頂)에 올랐다. 많은 소설가들이 실증과 조사를 중시해서 작품을 쓰지만, 박경리는 붙박이 장롱처럼 칩거한 채 매진한 독서를 통한 상상력이라는 폭약을 창작의 화톳불로 삼았다. “내 소설의 밑천은 오로지 상상력이오!” 그는 그리 거듭 말했다. 해외여행이라는 걸 거의 하지 않았던 그는, 놀랍게도 의 배경지인 이곳 하동 악양 땅조차 작품을 완간한 뒤에야 처음으로 밟았다는 게 아닌가.
‘박경리문학관’은 박경리라는 거목을 하나의 풍경과 세계로 새삼 눈여겨 바라보게 하는 재료를 제공한다. 박경리는 자신을 추켜세우는 기념관 명색을 극구 꺼렸다. 그러나 그를 기리고 그리는 사람들에겐 흡족한 선물일 수밖에.
박경리문학관 관람 정보
주소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길 79 관람시간 09:00~18:30
관람요금 성인 2000원 / 청소년·군인 1500원 / 어린이 1000원
※박경리문학관은 하동 최참판댁 안에 있습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알고 나면 그 음식은 다르게 다가온다. 맛도 다르게 느껴지고 음식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음식인문학 여행’은 우리 땅, 우리 음식에 깃든 다양한 인문학적 의미들과 만나는 시간이다. 그 첫 번째로 강원도 음식을 만나러 간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막국수, 감자, 옥수수, 시래기는 먹고 싶어서 먹었던 음식이 아니다. 빈한했던 시절, 먹을 것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먹었던 음식이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빈한한 음식은 다이어트 음식이 되었고 강릉, 속초 등 바닷가의 신선한 해물들은 최고급 미식 재료가 되었다. 강릉, 속초를 거치며 가난한 음식, 풍성한 해물을 만난다. 강릉의 반가 음식도 만난다.
◇ 1박 2일 일정
1. 첫날 오전 9시, 강원도로 출발
20명 기준으로 ‘인문학 여행단’이 구성됩니다. 음식평론가 황광해씨로부터 여행길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인원을 20명 정도로 한정하는 이유는 조촐한 분위기에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누시길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2. 첫날 오전 11시 30분~오후 1시, 인제군 용대리 백담사 입구, ‘백담갓시래기국밥’
용대리는 황태, 두부, 버섯이 유명합니다. 용대리 ‘백담갓시래기국밥’에서 아침을 먹습니다. 두부, 버섯이 준비됩니다. 메인 음식은 ‘갓시래기국밥’입니다. 주인이 직접 음식을 마련하고 서빙합니다.
3. 첫날 오후 2시~3시 30분, 속초관광수산시장
속초관광수산시장을 돌아봅니다. 인솔 팀과 함께 다니셔도 되고, 자유롭게 다니셔도 좋습니다. 마른 건어물이나 젓갈 등 쇼핑도 가능합니다.
4. 첫날 오후 4시 30분~6시, 교산 허균의 호가 된 ‘교산’과 주문진항, 사천진항
‘도문대작’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식객으로 평가받고 있는 허균. 그의 호 ‘교산’은 외갓집인 강릉 ‘교산’에서 따온 것입니다. 아버지 초당 허엽은 삼척부사 시절 ‘초당두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교산’과 ‘도문대작’ 그리고 초당두부와 방풍나물 등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인근의 주문진항, 아름다운 사천진항을 돌아봅니다.
5. 첫날 오후 6시 30분~9시, 강릉 교동 ‘기사문’의 저녁식사
동해안 해산물을 자유롭게 사용해 수준급의 해물요리를 내놓는 ‘기사문’에서 저녁식사를 합니다. 회, 튀김, 조림 요리, 한국식 초밥, 볶음 등등 동해안 해산물을 이용한 풍성한 해물 요리를 만납니다. 와인, 증류 소주, 강릉 ‘버드나무 블루어리’의 수제맥주 등 주류도 제공됩니다. 메뉴는 11월 동해 바다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6. 첫날 저녁, 프리미엄 펜션에서 1박
바다와 산이 보이는 럭셔리한 펜션에서 강원도의 밤을 맞습니다. 1인 1실이 원칙이나 부부, 친구 등 원할 경우 2인 1실로 마련합니다. 숙소 관련 참고. www.pinehill.kr
7. 둘째 날 오전 8시 30분~10시, ‘기사문’의 아침 해장국
아침 해장은 ‘기사문’의 셰프가 마련한 ‘생선누룽지탕’입니다. 시원한 해장국으로 속을 풀고 출발.
8. 둘째 날 오전 10시 30분~12시, 강릉 ‘선교장’ 방문
‘열화당’ 등 의미가 있는 한옥, 정자 등이 많습니다. 반가의 전통이 살아 있는 ‘선교장’에서 산책을 합니다. 역시 인솔 팀과 동행도 가능하고 자유로운 산책도 가능합니다.
9. 둘째 날 12시 30분~오후 2시, ‘서지초가뜰’의 점심식사
창녕 조씨 가문의 음식입니다. 반가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한 못밥, 질상 등의 이름을 가진 독특한 음식입니다. 깊은 산골의 반가 음식을 만납니다.
10. 둘째 날 오후 2시, 서울로 출발
서울 도착 오후 6시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간단한 간식이 마련됩니다.
박원식 소설가
구불구불 휘며 아슬아슬 이어지는 가파른 비탈길의 끝, 된통 후미진 고샅에 준수한 한옥 한 채가 있다. 집 뒤편으로 세상의 어미로 통하는 지리산 준령이 출렁거리고, 시야의 전면 저 아래로는 너른 들이 굼실거린다. 경남 하동군의 곡창인 악양면 평사리 들판이다. 광활한 들 너머에선 섬진강의 푸른 물살이 생선처럼 퍼덕거린다. 호방하고 수려한 산수 풍광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요지(要地)에 터를 잡은 셈이렷다.
증권사 지점장 출신인 조동진씨(58)가 동갑내기 아내 고미선씨를 대동하고 이곳 지리산 자락으로 귀촌을 한 건 9년 전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지리산을 애호한다. 지리산의 너그러운 품에 병아리처럼 포근하게 안겨 오순도순 오붓하게 살아갈 꿈을 꾸기도 한다. 조동진씨가 그랬다. 서울에서, 분당에서, 증권맨으로 뛰었던 그는 휴가철이면 매번 지리산을 찾았다. 그렇게 지리산과 교제를 하는 사이 담뿍 정이 들었다.
그 대상이 사람이건 자연이건, 정 들어 사무치게 그리우면 투신하게 마련이다. 나, 퇴직하면 지리산에 살래! 그는 그렇게 안으로 다지고 밖으로는 광고를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을 저질렀다. 인생의 항해를 결정하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돛이다. 대양의 바람은 한 곳에서 불어오지만 돛의 향방에 따라 어떤 배는 동쪽으로 가고, 어떤 배는 서쪽으로 간다. 조동진은 의지의 돛, 지향의 눈을 돋워 지리산 산골을 겨누었던 것이다. 사연의 보따리를 헤쳐 볼까.
“악양의 산자락에 있는 감나무 과수원 3306㎡(1000평)를 미리 사들이는 것으로 거사를 도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대충 다 컸겠다, 아내만 끌고 내려가면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아내가 손사래를 치더라고요. 집사람이 원래 도회적 성향이라서 시골살이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질 못했던 겁니다. 세뇌교육에 들어갔죠.(웃음) 그러던 중 아내가 원인 미상의 중한 폐질환에 걸렸습니다. 의사들이 말하길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이라 하더군요. 그렇다면 이걸 어떡하나. 그래, 자연요법으로 고쳐보자. 이왕지사 땅도 사놨으니까 산골로 가자. 그렇게 아내와 합의를 보고 드디어 시골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던 겁니다.”
“지리산의 그 무엇이 그렇게도 좋았을까?”
“제가 실은 대학을 다닐 때부터 지리산에 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었는데요, 그 웅장한 풍경에 사로잡혔던 것 같아요. 게다가 저는 바닷가에 가면 힘이 쭉 빠지는 반면, 산에 가면, 특히나 지리산에 가면 힘이 난다는 걸 자주 느꼈어요. 체질적으로 기질적으로 잘 맞는 거겠죠.”
“한옥이 매우 근사해요. 저토록 야무진 한옥을 지은 특별한 이유가 있겠죠?”
“아내의 폐질환을 다스리기엔 한옥이 유리하다는 생각이었어요. 황토와 목재를 재료로 한 한옥은 숨 쉬는 집이라 하죠. 그러나 남들에겐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건축비가 너무 많이 들고, 공기(工期)도 길고, 관리도 힘드니까.”
“저는 말이죠, 이왕에 산골의 자연과 야생을 벗 삼아 살 거라면 작고 소박한 집을 짓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 아니랴. 동감입니다. 그저 값싸고 편리한 현대식 집을 짓는 게 좋을 겁니다. 다만, 사랑채 정도는 제법 운치를 풍기는 작은 흙집을 짓는 것도 재미날 거예요.”
조동진씨의 거처 한편엔 나무로 골격을 세우고 흙으로 벽을 쌓아 지은 사랑채가 있다. 누각이 딸려 있는 소담한 별채로 조씨가 손수 설계해 지었다. 여자로 치면 음전하면서도 은근히 요염한 멋을 풍기는 가인을 닮은 집이다. 부부가 수시로 눈을 맞추며 단란하게 속닥이는 데에 사랑채의 용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드는 벗들과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일에도 쓸모가 많겠지만 말이다.
농사일은 노동이 아니라 축제
조씨의 섬세한 조력과 자연의 협찬 덕분일 테지. 다행스럽게도 아내의 병증은 현저하게 개선되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시골 생활이지만 마을 주민들과의 관계에도 아무런 흠결이 없다고 한다. 감 농사도 순항이다. 한적한 산골에 입장했으니 그저 한가하게 노닥거리며 자연을 즐기면 그만일 성 싶지만, 조동진씨는 농사일이 오히려 구미에 맞다. 애초에 사들인 땅이 감 과수원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감 농사에 뛰어들 수 있었다.
“노후의 직업으로 농사처럼 이상적인 게 없습니다. 정년퇴직 없지, 누가 간섭하지를 않지, 적당한 육체노동으로 건강을 챙길 수 있지, 정직하게 땀 흘리는 농사일은 단순히 노동이 아닌 축제에 가까워요.”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직업이 농사라고들 해요. 벌이가 되질 않는다는 거죠.”
“저도 경제적인 면에 관한 두려움이 많았지만 적절히 극복해 왔어요. 2314㎡(700평) 규모의 감 농사를 지어 곶감이나 감식초를 만들어 판매를 하는데 연간 1200만원에서 1500만원 정도의 수익을 올립니다. 그 정도면 무난해요. 시골에선 말이죠, 골프 할 일 없지, 노래방에 가서 도우미를 부를 일 없지, 수입이 적더라도 지출을 줄일 수 있어 생각보다는 여유를 부릴 여지가 많습니다.”
흔히 귀촌과 귀농을 구분해서 선택을 하거나 판단을 한다. 조동진씨는 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성공한 귀농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농사에 목을 걸다시피 들입다 땅을 파는 인물은 아니다. 농사에 생활의 한 자락을 걸침으로써 한결 뿌듯한 실속과 실리를 구할 수 있다는 이치를 터득했을 뿐이다. 그의 시골살이 촉이 이렇게 살아 있다.
“제 경우는 귀농을 가장한 귀촌인이라 봐야 정확할 겁니다. 그저 작은 텃밭을 일궈 소소한 먹거리를 거두는 귀촌 생활도 즐겁겠지만, 농사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도 신나는 일입니다. 남자는 퇴직을 했더라도 명함이 있어야 해요. 992㎡(300평) 이상의 농사를 지을 경우엔 누구나 명함을 만들 수 있어요. 일테면 ‘지리산 농원 대표이사’라거나, 그런 식으로 떠억 명함을 새길 수 있는 거예요(웃음). 992㎡(300평) 정도의 농사만 지으면 농업인 등록을 할 수가 있으며, 온갖 지원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걸 왜 마다할까? 가급적 농업인 자격을 획득하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한 달에 하루만 일해도 폼 잡을 수 있는 게 농사에요. 시골에선 말이죠, 하는 일 없이 늘 술이나 마시고 돌아다니면 욕먹습니다. 그러나 농업인으로서 일을 할 경우엔 술을 퍼마셔도 욕먹을 일이 없어져요.”
“사전에 열심히 귀농교육을 받고 입촌한 사람들마저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 아녜요?”
“도시 인구를 분산하고, 실업을 해소하고, 도농격차 해결을 위해 정부에서 농촌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갖가지 지원 정책을 펼치지만, 사실 허점이 아주 많습니다. 귀농교육이랍시고 억대 수입이니, 특작물이나 유기농을 운운하며 과도하게 분위기를 띄우지만 사실 허황한 얘기들에 불과해요. 가령, 농사 경험이 없는 사람이 유기농에 도전하는 건 독립운동을 하는 것처럼이나 어렵고 위험합니다. 제가 힌트를 하나 드리죠. 특수작물이나 유기농을 요란하게 하려 하지 말고, 그 지역의 특산물을 하라는 것! 그래야 생산이나 유통의 이점을 누릴 수 있으며, 원주민들과의 소통도 빨라져요.”
“빈손으로 귀촌할 경우엔 어떤 재주를 발휘해야 하죠?”
“도시에서는 움직이면 돈이 나가지만 시골에선 움직일수록 돈이 들어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양육할 자녀가 없이 부부만 귀농할 경우, 빈손으로 시작해도 무방해요. 퇴직을 한 시니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건강만 있다면, 자세를 낮출 수 있다면, 늘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 일당 10만원짜리 일감을 찾는 건 일도 아니니까. 한 달에 열흘만 날품을 팔아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는 겁니다. 문제는 겸손한 마음, 열린 태도이겠죠. 퇴직을 뜻하는 리타이어(retire)는 ‘타이어를 교체한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은퇴 뒤 시골에서 살고자 한다면 마음 자체를 싹 바꿔야 합니다. 돈보다는 마음의 행복과 즐거움을 구하는 쪽으로 삶의 잣대가 변해야 하는 거죠.”
시골에서 오히려 진정한 문화생활 누려
사람들은 흔히 시골의 문화적 환경이 열악할 것으로 믿는다. 갖가지 공연과 전시회 따위가 펼쳐지는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살다 보면, 그저 주야간에 앞산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칫 우울증에 빠지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조동진씨에 따르면 이는 미신에 가깝다.
“서울에서 공연 구경을 가는 건 어쩌다 한번 아닐까? 공연물이 많다지만 막상 향유하긴 어려운 게 도시살이에요. 요즘의 시골엔 지역축제나 산사음악회 같은 문화 행사가 잦습니다. 아이돌 가수에 밀린 7080 가수들까지 대거 참여해요. 저는 이곳 공연장에서 소찬휘라거나 김재동 같은 연예인들을 처음 봤어요. 게다가 관람료는 전적으로 무료에요. 뒤풀이엔 술과 음식이 푸짐하게 나오고요.”
“풍부한 상상력으로 바라본다면 산야 자체가 뮤지엄이겠죠.”
“제가 도시에 살며 열네 번이나 이사를 했어요. 이사 때마다 고려한 게 창밖으로 달을 볼 수 있느냐는 점이었어요. 여기 산골의 달밤은 얼마나 좋은지요. 사랑채 정자에 앉아 달빛 흥건한 마당을 바라보며 술 한 잔을 하는 일은 최상의 낙입니다. 달 없는 밤엔 별들이 허공에 모이죠. 때로 반딧불이가 공연을 하고, 빗소리가 악곡을 연주하고, 사시사철 모든 풍경이 장관입니다. 뒷산의 야생화들이 뿜는 향기의 잔치는 또 얼마나 행복한지요. 이 다양한 자연 현상들이 명약이자 보약입니다. 시골엔 의료시설이 빈약하다는 소리들이 있지만, 제 아내가 병을 다스린 걸 보면, 저 산야 자체가 하나의 병원이라는 실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앗! 시골 예찬이 극에 달하셨다(웃음). 도대체 아무런 불만이 없는 거예요?”
“제가 외환위기 때 쫄딱 망해 시장에서 전을 벌리고 옷을 팔기도 했어요. 박수를 치며, 싸요, 싸요! 외치면서요. 그런 고통의 시절을 겪은 게 인생의 디딤돌이었습니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나름 깨달았어요. 그러하니, 제가 원해서 들어온 산골에서 무슨 불만이 있겠어요? 이제 제가 해야 할 일 하나가 남았는데요, 귀촌을 희망하는 은퇴자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해서, 최근 지리산웰빙귀농학교라는 걸 세웠어요. 대차게 밀어붙일 참입니다(웃음).”
10년 가까이 흐른 시골 생활을 통해 조씨는 어언 선수에 이르렀나? 귀촌에 관한 낙관과 긍정에 경계가 없구나.
>>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큰 명절 중 하나인 추석. 이때가 되면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차례상에 올라갈 밤을 깎고, 전 부치고, 이런저런 요리를 계속해서 나른다. 밥을 먹고 치우기를 반복하다 밤이 되면 송편 만들기에 돌입. 힘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시간은 오랫동안 쌓아두었던 수다로 이겨 낼 수 있다. 이렇게 음식이 차려지고 조상님 만나고 나면 헤어지기 아쉽다. 못다 한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다면 친지의 집에서 가까운 멋진 장소를 찾아가자. 글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북촌한옥마을(서울시 종로구 계동길)
북촌한옥마을은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서울의 600년 역사와 함께한 전통 거주 지역이다. 두 궁궐 사이에 전통한옥이 밀집해 있다. 옛 골목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역사 도시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지금은 전통 문화체험관이나 한옥 음식점 등으로 활용되는 곳이 많아 간접적으로나마 조선시대 생활상을 느껴 보기 좋다. 북촌한옥마을이 지속 가능한 관광지가 될 수 있도록 침묵 관광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침묵 관광’이란 관광객들로 인해 주민들의 생활권과 환경권이 침해받지 않도록 큰소리로 떠들지 않고 조용히 여행하는 관광형태를 말함.
관광코스 안내 도보관광코스(3시간 30분 소요) 안국역 → 북촌문화센터 → 가회동 11번지 → 한상수자수공방 → 가회민화공방 → 북촌생활사박물관 ‘오래된 향기’ → 안국동 윤보선가 → 안국역
예약신청 인터넷(dobo.visitseoul.net) 예약 / 관광일 기준 3일 전까지 신청
문의 02-6925-0777 www.bukchon.seoul.go.kr
제비원 석불이라 불리는 ‘마애여래입상’(경북 안동시 이천동)
경북 안동과 영주 사이를 지나는 이천동 길에는 자비롭게 위에서 내려다보는 석불을 만날 수 있다. 일명 ‘제비원 석불’이라고도 불리는 마애여래입상이다. 불두는 큼직한 육계가 표현된 소발(素髮)의 머리와 얼굴을 각각 다른 돌에 새겨서 조립했는데 미끈한 얼굴의 질감과는 달리 거칠게 표면 처리한 머리를 이마 위에 얹어 놓아 멀리서 보더라도 뚜렷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풍만한 얼굴의 미간에는 백호(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를 큼직하게 새겼다. 수평으로 길게 뜬 눈 위에는 초승달 모양으로 깊게 파인 눈썹과 날카롭게 우뚝 솟은 코가 이어져 있다. 붉게 채색된 도톰한 입술은 굳게 다물어 강한 윤곽으로 표현한 얼굴과 함께 장중하고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강한 각선으로 조각된 환조(丸彫)의 머리와는 달리 장대한 신체는 선각으로 처리됐다. 불두를 따로 제작하여 불신이 새겨진 암벽 위에 얹는 형식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는 형식이며, 얼굴의 강한 윤곽이나 세부적인 조각 양식으로 볼 때 11세기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여래입상 옆에는 연미사가 있으며 최근 주위를 공원으로 조성해 쉬기 편하다. 만약 공원까지 갔다면 마애여래입상 앞에 꼭 가보시라.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헤이리 예술마을은 예술인들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을 꿈꾸며 만든 곳이다. 미술인, 음악가, 작가, 건축가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 300여 명이 모여 집과 작업실,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 공연장 등을 세워 문화예술 공간을 조성했다. 마을 이름은 경기 파주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래농요 '헤이리소리'에서 따왔다고. 각종 문화예술의 창작 공간, 전시 공간, 공연 공간, 축제 공간, 교육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헤이리 마을은 주어진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리는 설계를 지향하며 최고의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축 전시장으로, 건물 자체가 자연과 예술이 조화된 예술작품이며 자연 친화적인 공간이다.
휴무일 대부분의 작업장이 매주 월요일 휴무(각 전시장, 작업장에 따라 다를 수도 있음)
체험안내 헤이리 마을 내 다양한 체험 코너 마련
이용가능 시설 전시장, 박물관·공연/소극장, 아트 숍, 서점, 공간대관, 레스토랑 및 카페, 갤러리, 게스트 하우스 등
이용시간 09:00~20:00 (전시 공간별로 다름)
죽녹원(전남 담양군 담양읍 죽녹원로 119)
전남 담양군이 조성한 죽녹원은 죽림욕장으로 인기가 높다. 관방제림과 영산강의 시원인 담양천을 끼고 향교를 지나면 바로 왼편에 보이는 곳이 죽녹원이다. 입구에서 돌계단을 하나씩 밟고 오르면서 굳어 있던 몸을 풀고 나면 대나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청량감을 불어넣어 준다. 죽녹원 안에는 대나무 잎에서 떨어지는 이슬을 먹고 자란다는 죽로차(竹露茶)가 자생한다. 죽로차 한 잔을 마시고 죽림욕을 즐기며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를 올려 보라.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매력과 함께 대나무와 댓잎이 뿜어내는 향기를 느낄 수 있게 된다. 대나무 숲 외에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과도 연결돼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입장시간: 3월 ~ 10월 09:00 ~ 19:00 (입장마감 18:00)
입장료 어른(단체요금) 3000원 (2400원) 청소년/군인(단체요금) 1500원(1000원) 어린이(단체요금) 1000원 (600원)
천리포수목원(충청남도 태안군 소원면)
천리포수목원은 ‘푸른 눈의 한국인’으로 불렸던 故민병갈(미국명: Carl Ferris Miller) 설립자가 40여 년 동안 정성들여 일구어 낸 우리나라 1세대 수목원이다. 1962년 부지를 사들여 1970년부터 본격적인 나무 심기를 시작한 수목원은 교육 및 종 다양성 확보와 보전을 목적으로 관련분야 전문가, 후원 회원 등 제한적으로만 입장을 허용했다. 2009년에 일부 지역이 일반에 공개됐다. 56만1000㎡(17만평)에 이르는 수목원 호랑가시나무, 목련, 동백나무, 단풍나무, 무궁화를 중심으로 1만3200여 품종이 식재됐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식물자원이 심어져 있다. 故민병갈 설립자는 식물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평생 동안 전 재산을 들여 민둥산을 지금의 수목원으로 만들었다.
탐방 소요시간약 1시간 30분 개방 구간총 7개 지역 중 밀러가든만 개방
홈페이지 천리포수목원www.chollipo.org
필자의 아지트는 다락, 길, 집이다.
◇다락은 나만의 공긴
방 세 개, 마루, 부엌 구조의 옛날 한옥에서는 부엌 바닥이 본 건물 다른 부분보다 낮다. 큰방이 부엌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큰방 옆 부엌 위가 제법 큰 공간의 다락이 된다. 간혹 사용하는 물건을 저장하는데 필자의 집 다락은 다른 집 다락보다 좀 넓었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 저장하고도 몇 사람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어린 시절 필자의 아지트였다.
혼자서 만화를 보기도 하고 울긋불긋 어린아이의 원색 생각도 펼쳤다. 동무들과 소소한 장난도 이곳에서 했다.
어린아이에게 다락방이 혼자만의 공간일 수밖에 없는 것은 방 세 개의 집에 거주하는 가족이 많은 환경 때문이기도 했다. 그나마 다락방이라도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지금까지도 예쁜 추억의 한 자락으로 남아있는 필자 집 다락방을 무척 좋아하였던 글짓기 잘하던 반 동무가 생각난다. 어린 시절 다락에서 금단의 장난을 하였던 기억은 없다. 단지 손윗사람들의 보호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싶은 장소였다. 인간의 보편심리인 좁고 어두운 장소에 대한 태아적의 향수이기도하다.
◇길은 인간의 영원한 친구다
필자는 길을 걸으며 생각하고, 공상하고, 고민하고, 두려워하고, 꿈꾼다. 모두에게 공개되고 허용된 길은 만인의 것이기에 개인의 것이기도 하다. 간섭도 없다 화가 나도, 슬퍼도, 문제가 생겨도, 친구들과 갈등이 있어도 필자는 길 위에 섰다. 화남도, 두려움도, 희망도, 대책 없이 부풀어만 가는 미래의 설계도도 걸으면서 머리와 가슴과 발로 함께 만든다.
길 위에서는 필자의 모든 생각은 활동사진이 된다. 생각이 깊고 길면 하염없이 걸었다 필자만의 세계로 함몰이 가능하다. 타인은 철저히 사라진다. 그럴 때 필자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변화한다. 슬픈 생각을 할 때면 눈물 글썽인다. 우스운 사건을 떠올리면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운다. 화를 내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심각해지기도 한다.
다양한 표정으로 필자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오인 받기도 한다. 큰 언니의 친구가 언니더러 “너 동생 길에서 자주 본다, 스쳐 지나가도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더라. 혼자서 싱글거리기도 하고, 슬픈 표정도 짓고, 집에서도 이상한 행동을 하니” 했단다. 그때부터는 되도록 필자 집에서 먼 곳의 길을 택하여 걸었다.
길 위에서 하는 몰입의 세계에서는 필자 두뇌의 회전도 가속을 받는다. 좋은 생각이든, 우울한 생각이든, 슬픈 생각이든 생각의 속도가 빠르다. 원심분리기처럼 마음의 갈피들을 분명하게 분리할 수 있다. 모든 감성의 문제들은 이 길 위에서 확대와 축소가 가능하다. 현재와 미래의 시간여행도 가능하다, 길은 필자 자아 형성의 기간 인큐베이터 공간이다. 길은 공개적이면서도 은밀한, 안이면서 밖인 완벽한 아지트다.
◇집은 영원한 아지트
가난한 애인들에게는 그들만을 위한 작은 공간이 파라다이스가 될 것이다. 필자는 집 전부가 내 아지트다. 집뿐 아니다. 모든 생활이 필자만이다.
눈을 피하여 하고 싶은 일도 없다. 필자가 하는 일에 방해할 사람도 없다. 집은 필자 생애 가장 넓은 나만의 아지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