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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국 왕자님께
- 이름도 잘 모르는 왕자님께 말을 걸어봅니다. 저는 왕자님의 성(姓)이 고(高) 씨인지, 양(梁) 씨 또는 부(夫) 씨인지도 모릅니다. 너무 오래전 일이니까요. 천년을 거슬러 이렇게 말을 건네니 좀 야릇한 기분이 들기도 하네요. 가족에게든 연인에게든, 부치지 않은 편지를 써놓은 기억이 없어서 뭘 써야 하나, 고심하던 중 오늘 아침 일어날 즈음 꿈결에서 왕자님이 떠올랐어요. 서귀포 하원동을 지나면서 ‘탐라국 왕자의 묘’라는 안내표지를 자주 봐서 그랬나봅니다. 왕자님은 탐라국 땅이 바다 밑 화산 폭발로 생긴 지가 160만 년이 된다는 건 모르셨을 겁니다. 한반도에서 제일 늦게 생성된 젊은 땅으로, 서울 크기의 3배나 된답니다. 섬 전체가 하나의 산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한라산이 곧 제주도요, 탐라국이었던 셈이지요. 하나의 산이라지만 370여 개의 ‘오름’이 여기저기 솟아 있어 멀리서 보는 것과는 달리 능선이 결코 밋밋하거나 단순하지 않답니다. 어떤 건축가는 이 오름들이 퍼져 있는 모양을 단면도로 그렸을 때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근래 주로 바닷가를 도는 올레길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보다 늦게 조성된 한라산 둘레길은 한번 들어가면 산의 속살을 마음껏 보고 누리면서 걸을 수 있어 좋답니다. 어딜 가나 여러 개의 오름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다가와 친근감과 아름다움을 더해줍니다. 왕자님도 탐라국 시절에 산속을 더러 유람하셨을 테니 제 말을 잘 이해하실 겁니다. 그런데 이런 자연의 수려함도 그렇지만 요즘 제주도는 문화와 예술 활동이 돋보인답니다. 온갖 예술인이 여기저기 많이 모여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에 일 찾아 제주로 왔다가 그 매력에 반해서 아주 눌러앉아 살기로 한 저도 예술이나 예술가들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한번은 유명한 언론인이자 작가인 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왜 제주도는 인구에 비해 예술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보입니까?” 하고요. 그랬더니 이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아, 그건 제주의 자연이 아름다워서 그럴 겁니다”라고 답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첨에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만큼 살면서 보니 그 말이 갈수록 실감이 납니다. 탐라국이었던 제주도는 어딜 가나 산이요, 숲이요, 바다입니다. 바람 따라 움직이는 구름의 모양이 시시각각 변해 하늘 자체가 장관인 데다 여명(黎明)이나 석양(夕陽) 공히 형형색색으로 지는 노을을 쳐다보노라면 감동이 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예술적인 영감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탐라국 시절의 예술로서 남아 있는 걸 본 게 별로 없어서 이에 대해 제가 여기서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왕자님은 그런 것도 다 알고 계시겠지요. 나라 잃은 슬픔이 아직도 남아 있을 왕자님에게 이런 얘기가 그리 재미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요즘 제주에는 제주어로만 노래를 부르는 멋진 밴드가 인기를 끌고 있으며 또 제주어로만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도 있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주어로만 말하는 연극단도 있고 무엇보다 ‘제주어(濟州語)’를 다시 교육과 생활에 들여오겠다는 운동이 만만찮게 일고 있답니다. 제주어란 결국 탐라국 말에서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본토의 말과 완전히 다른 건 아니지만 저 같은 사람이 들으면 30%도 이해하기 어렵답니다. 옛말을 다시 찾는 건 좋지만 인구의 반도 넘을 이주민들은 소외감마저 느낄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아무튼 왕자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잠시라도 미소 지을 거라 생각하면 저도 흐뭇하기는 합니다. 왕자님이야 더 잘 아시겠지만 탐라국은 신화가 풍부하지 않습니까. 1만8000의 신이 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 창조신화의 주인공인 설문대할망은 여전히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20여 년 전부터 조성돼온 제주돌문화공원은 100만여 평(휴양림 70만 평 포함)에 세운 엄청난 규모의 시설인데 모아놓은 기기묘묘한 돌들이 어쩌면 다 신을 형상화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 공원은 탐라국 신화를 테마로 세계인의 관심을 모아가면서 세계 명상의 중심지로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답니다. 매년 5월에 지내는 설문대할망제를 통해 탐라 시절,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살았던 제주인의 본 모습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이 서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일들이 잘되도록 왕자님께서도 영력(靈力)을 발휘해주실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 편지는 오는 5월 설문대할망축제에 가서 어딘가로 부치면 혹 왕자님께 전달되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해봅니다. 정달호 전 이집트대사관 대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지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저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다. 현재 제주돌문화공원 운영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한라산 자락의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는 등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고 있다.
- 2019-02-26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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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휴양도시 ‘다낭’, 삶에 지친 나에게 주는 쉼표 같은 선물
- 보들레르는 “여행이란 어른들에게는 인생이라는 악랄한 강대국과 맺은 휴전, 전반적인 긴장과 투쟁 중에 취하는 잠시 동안의 휴식이다”라고 했다. 찌는 듯한 여름엔 시원한 곳이 그립더니 마음까지 움츠러들게 하는 겨울이 되니 따스함이 마냥 그립다. 베트남이야말로 한겨울 따스한 꿈을 꾸기에 더없이 알맞은 곳이다. 여행에서의 하루는 1년 치 행복이다 한국에서 4시간 반을 날아 다낭 국제공항에 내리면 하노이나 호치민과는 또 다른 베트남을 만나게 된다. 산과 바다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다낭은 휴양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태국의 파타야나 필리핀의 세부처럼 리조트형 휴양지에선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화려함보다는 소박함, 떠들썩함보다는 호젓한 느낌이 바로 그것이다. 한쪽으로 비켜나 조용한 안식을 주는 곳. 그곳은 바로 다낭과 호이안 그리고 후에다. 파도가 낮은 포복으로 밀려오는 미케비치의 아침은 더없이 상쾌하다. 모래사장엔 대나무로 만든 광주리 모양의 전통 고기잡이배 ‘틴퉁’이 무심하게 던져져 있다. 베트남 국적기를 배에 단 어부는 부지런히 그물을 걷어 올리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의 베트남이지만 호젓한 새벽의 바닷가를 겁낼 필요가 전혀 없어 보인다. 사회주의 국가로 여행 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으레 ‘안전’에 대한 질문을 한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사회주의권 나라가 훨씬 더 안전하다. 이런 나라에선 범죄를, 특히 자국을 방문한 외국 여행자에게 범죄를 저지르면 중형의 벌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여행자들의 모습은 평화롭고 여유롭다. 여행자의 신분을 잊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바로 다낭이다. 다낭이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베트남 중부의 최대 상업도시이자 베트남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다낭은 베트남전쟁 때 미군의 최대 기지로 사용될 정도로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미군이 물러나자 아이러니하게도 침체기를 맞게 된다. 다낭은 역사와 문화, 자연이 어우러진 천혜의 환경으로 요즘 새롭게 부각되는 곳이다. 주변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매력적인 호이안과 후에도 있다. 동서양이 혼합된 낭만적인 밤 풍경 ‘호이안’ 여행을 자주 해서 좋은 점은 무작정 많이 보려고 허덕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고, 안 좋은 점은 어딜 가든 닮은 곳을 찾아내고 비교하게 된다는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건축물들과 중국식 유적이 어우러져 낭만적인 풍경을 선사하는 호이안은 남인도 항구도시 코친과 중국의 리장을 합쳐놓은 듯한 인상이다. 전통을 훼손하지 않고 개성 있게 변화한 골목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을 마주하고 있으면 호이안이야말로 가장 베트남다운 곳이란 느낌이 든다. 작고 아름다운 투본 강을 낀 채 마치 중세시대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호이안은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오랜 역사가 스며 있는 장소들과 과거 번화했던 국제 무역항의 모습이 애수를 자아낸다. 내원교, 전가사당, 풍흥고가, 광조회관처럼 천 년에 걸쳐 중국과 일본의 지배가 남긴 흔적들이 절묘하게 섞여 있다. 에도 막부가 수교 거부 정책을 펼치자 호이안에 살던 일본 상인들은 하나둘 떠나가 버렸고 그 자리를 중국인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호이안에 밤이 오면 상점들은 하나둘 화려한 연등을 켠다. 동서양이 혼합된 이국적인 풍경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할 만큼 낭만적이다. 베트남의 명물인 시클로를 타고 골목 탐험에 나서도 좋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면 시장기가 든다. 북부에선 국물이 있는 쌀국수가 대세이지만 중부에선 볶음쌀국수 카오라우가 대세다. 쌀국수가 질리면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내려온 바게트샌드위치(반미, 막대기 모양의 베트남식 바게트)를 먹거나 분위기 있는 노천 레스토랑에서 현지 맥주에 시푸드도 괜찮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구시가지를 관통하는 운하에서 연등을 팔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등을 하나 사서 강물에 띄우며 소원을 빌어본다. 원뿔 모양의 전통 모자 ‘논(non)’을 쓰고 연등을 파는 꼬마들의 순박함과 노를 젓는 노파의 온화한 미소가 기도를 더욱 순수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안 가면 후회할 ‘후에’ 다낭에서 후에로 가는 길. 이탈리아 남부 소렌토가 연상되는 멋진 해안도로를 끼고 달린다. 세계 10대 비경 중 하나라는 하이반 고개에는 외국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고 만들었다는 요새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망루에 올라 저 멀리 펼쳐진 바다를 감상한다. 점심은 유럽풍의 아기자기한 마을 랑코비치에서 먹는다. 다낭에서 두 시간 거리인 후에는 드라이브의 즐거움도 주지만 다낭과 호이안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은 역사적 자취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줘서 좋다. 후에는 옛 참파 왕국의 수도답게 독특하고 고풍스런 유적이 많다. 마지막 날엔 흐엉 강을 따라 산책도 하고 배를 타고 사색에도 잠겨본다. 바람도 상쾌하고, 강물도 더없이 잔잔해 다음 날을 계획하기에 이보다 소중한 시간은 없을 것 같다. 배는 충분해서 가격 흥정도 해볼 수 있는 분위기다. 보통 한 시간에 5달러(베트남 돈으로 10만 동=5000원), 두 시간에 10달러면 작은 배 한 채를 단독으로 빌릴 수 있다. 이보다 더한 호사가 없다. 그렇게 배를 빌려 타고 배 안에서 두 시간 정도 깊고 고요한 강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기울여본다. 사람들이 고요함을 못 참는 이유는 뭘까. 밖이 조용하면 상대적으로 시끄러워지는 내면의 소리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까. 익숙하지 않지만 참고 있어보면 고요는 나와 세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행지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으로 돌아간 후에도 하루 한두 시간 정도 고요히 나를 지켜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내면의 아름다움을 더 잘 찾아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travel tip ★찾아가기 인천- 다낭간 직항(대한항공, 베트남항공)이 있으며 4-5시간 소요된다. 다낭공항에서 시내까지는 차로 30분, 다낭에서 호이안까지 차로 30분 소요. 다낭에서 후에까지는 차로 두시간정도 소요되며, 기차도 매일 4편 운행된다. ★기본여행정보 아열대성기후이며, 여행 적기는 건기인 12월부터 5월이다. 5월부터 10월까지는 우기로 많은 비가 내린다. 특히 10월은 태풍이 지나가는 시기이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90일간 무비자며, 화폐단위는 동(VND)으로 1달러는 2만동이다. 언어는 베트남어와 부분적으로 영어가 통용된다. ★추천 숙소 풀만 다낭 비치 리조트 Pullman Danang Beach Resort 호이안 구시가지까지 무료셔틀 운행. 공항 서비스. Vo Nguyen Giap street, Khue My Ward Ngu Hanh Son District, 55000 Danang, tel. +84 511 3958 888 info@pullman-danang.com
- 2019-02-01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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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코 홍보대사 할배돌 ‘지오아재’를 만나다
- 인생 2막을 시작한 시니어를 수소문하던 중에 지인에게 지오아재를 소개받았다. 초겨울 날씨로 접어든 12월 초, 방배동에 위치한 연습실을 방문했다. 평소에는 주 2회 하루 3시간, 공연이 있으면 3~4회 연습을 한다고 한다. 상상했던 것보다 좁고 허름한 연습실이었다. 지오아재는 동년기자 두 명의 방문을 환영하는 의미로 캐럴을 화음에 맞춰 불러줬다. 지오아재(G.O.Age)는 노익장의 ‘그린 올드 에이지(Green Old Age)’를 독일식으로 발음한 이름이다. 구성원은 테너 박승호(76)와 이규대(67), 바리톤 주정서(67)와 손종열(65), 베이스 서준석(66)이다. 총 5명의 평균나이는 68.2세다. 지오아재는 그동안 KBS1 프로그램인 ‘인간극장’에도 소개됐고, 캠코(한국자산관리공사) 홍보대사로도 임명되는 등 매스컴도 좀 탔다. 음악으로 인생 2막을 시작한 할배돌에게 물었다. Q. 어떤 목적으로 뭉치셨나요? 이규대 ‘평생 하고 싶어 하던 음악을 다시 한 번 해보자’ 하며 뭉쳤습니다. 열심히 사는 모습을 동년배에게 보여주면서 인생 2막의 삶에 대한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박승호 노래 잘하는 달란트를 활용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나눠주면 좋겠습니다. 서준석청년과 시니어 간의 소통 역할을 담당하려고 합니다. 손종열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시니어도 프로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주정서 삶의 장르는 다양합니다. 음악은 인생의 한 장르에 불과합니다. 다른 분야에서도 인생 2막의 삶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주려 했습니다. Q.어떤 과정을 통해 만나게 됐나요? 이규대 그룹 결성은 제가 생각한 일입니다. 고등학교 후배 손종열 씨가 아마추어 합창단 단장을 하고 있어요. 성가대 지휘를 45년간 할 정도로 음악에도 푹 빠져 있고요. 이 친구를 통해 파트별 대상자를 수소문했어요. 서준석 2016년 초부터 개별적으로 만나오다 그해 5월 다 같이 만나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이규대 우리는 처음부터 프로 못지않았습니다. 음악 전공자는 아니지만 베이스 서준석 씨, 퍼스트 테너 박승호 씨 등 구성원의 재능이 많습니다. 진작 만났다면 큰 성공을 거두었을 거예요. 리더 이규대 씨는 1980년대 중반까지 활동한 7080세대 가수다. 다른 구성원은 프로는 아니지만 수십 년간 합창단과 성가대 활동을 해왔고 개인 음반을 낼 정도로 내공이 만만치 않다. 특히 이규대 씨가 작사·작곡이 가능하다는 게 그룹의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 기억력도 나빠져 가사를 외우는 데 시간이 많이 든다. 집중력과 순발력도 떨어지고 호흡도 짧아져 박자에 대한 감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연습을 많이 해도 며칠만 안 하면 금세 잊어버리는 율동은 소화할 수 있는 신체나이가 아니라 포기했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Q.그러면 할배돌은 포기하신 건가요? 이규대반드시 춤이 있어야 아이돌, 아니 할배돌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노래로 경쟁하기로 했습니다. Q.음악을 하는 요즘, 행복하십니까? 서준석 이 나이에 할 일이 있으면 행복한 거죠. 주정서 가끔 저희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분이 있어 살짝살짝 연예인이 된 기분도 느낍니다. 박승호 그토록 하고 싶었던 노래를 하는데 당연히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지난날은 부도수표, 다가올 미래는 약속어음, 현재는 가장 확실한 현금입니다. 이규대 중학생도 알아보고 인사하니 기분이 좋네요. 주위에서 어떻게 바라보나요? 이규대 30여 년 만에 음악을 다시 해보겠다고 하니까 아내가 처음에는 사고만 치지 말라고 했어요. 2017년 첫 앨범을 낸 후 저러다 그만두겠지 했는데 포기하지 않고 1년 넘게 꾸준히 하니까 이제는 아내가 인정해주고 지원도 합니다. 손종열 친구들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저희들을 부러워합니다. 서준석 홍대 앞에서 버스킹할 때 젊은이들이 지오아재의 음악에 관심을 가져줘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제 손주 녀석들은 나이 들면 할아버지처럼 살고 싶다고 합니다.(웃음) Q.추구하는 음악 장르는요? 이규대 솔직히 모든 장르를 다 해보고 싶지만 경쾌하면서도 삶의 진리, 사랑의 힘 같은 철학적 의미를 전해주는 음악을 선호합니다. 서준석 시니어에게 용기를 주듯 젊은이들에게도 음악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공연을 보고 나온 한 젊은이가 슬그머니 다가와 “할아버지, 제가 나중에 할아버지 나이가 되었을 때 이런 공연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을 때 정말 행복했습니다. 지오아재는 ‘지금 여기’, ‘이제야 사랑을’, ‘그것이 내 인생’, ‘사랑별곡’ 4곡을 발표했다. 대표곡으로 ‘지금 여기’를 꼽는다. ‘지금 여기(Here And Now)’는 높고 낮은 음의 영역을 오가며 랩, 국악 장르를 포괄하는 경쾌한 리듬의 노래다. 신나게 부를 수 있는 곡이긴 하지만 시니어가 따라 부르기에는 다소 어렵고 오히려 젊은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곡으로서 의미가 있다. 가사에는 과거의 성공과 실패보다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철학적 의미를 담았다. Q.첫 무대는 어떠했나요? 이규대 야심차게 준비한 ‘지금 여기’는 리듬도 빠르고 랩과 안무까지 완벽하게 소화해야 하는 곡인데 연습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자를 살짝 놓치면서 음정까지 불안했죠. 그 순간은 반주 소리도 잘 안 들렸어요. 눈앞이 깜깜해지더라고요. 주정서 정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Q.지금은 어떠신가요? 서준석 미꾸라지가 용 됐지요. 무대에 익숙해져 연주소리는 물론 청중들의 반응도 다 보입니다. 40여 회 공연을 하다 보니 무대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매니저나 기획사는 있나요? 이규대요즘은 매니저 대신 매니지먼트 기획사를 활용하는 추세입니다. 기획사와 일하려면 수입이 많거나 재정적 여유가 있거나 특출나게 잘나가는 경우에나 가능하지요.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닙니다. 대신 자체 기획사가 있습니다. 서준석 이규대 씨가 ‘예소리네’를 만들었습니다. 이규대 씨의 막내딸 이자람의 예명인 예솔, 그러니까 ‘예솔이네’를 소리 나는 대로 발음한 이름입니다. 이자람은 국악인으로 활동 중입니다. Q.국악 리듬을 곡에 넣으셨더군요? 이규대 전통 리듬이 있어야 서양 음악인들이 관심을 보입니다. 서양 음악은 아무리 잘해도 별 반응이 없는데 국악을 연주하면 금세 빠져듭니다. 세계를 상대로 활동하려면 국악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봤습니다. 딸이 국악을 전공해서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Q.경비 조달은 어떻게 하시나요? 이규대 첫 앨범 제작비는 제가 댔고 활동비는 N분의 1로 부담합니다. 출연료를 받으면 반은 앨범 제작비를 공제하고 나머지는 공동 경비로 사용합니다. 많이 벌면 좋겠지만 아직 손익분기점에도 이르지 못했어요. 그래도 수입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Q.향후 계획을 말씀해주시겠어요? 이규대 올해 두 번째 앨범을 낼 계획입니다. 틈틈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해외 진출 계획도 있나요? 서준석 조심스럽게 계획하고 있습니다. 언어가 달라도 음악으로는 통할 수 있으니까, 전 세계 시니어와 소통을 해보고 싶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에 K-POP만 있는 게 아니라 K-GRAND POP도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이규대 해외 진출을 대비해 ‘지금 여기’를 영어와 일어로 번역해놨습니다. 2018년 6월, 홍콩 BTV가 기획한 ‘120세 기획 프로그램’에 지오아재의 활동이 소개됐다. 이 프로그램이 한국, 일본, 미국 등지에서 인생 2막의 삶을 사는 주인공을 촬영해 방영하는데, 한국에서는 지오아재가 출연했다. 지오아재는 기획사도 없고 연습실도 협소하고 수입도 많지 않지만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어 성공이 기대된다. 음악을 통해 시니어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젊은이들에게는 닮고 싶은 시니어 모델이 되기를 희망한다. Q.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규대 시니어 모임에 많이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재능기부도 하고 싶고요. 무료공연도 가능하니 기회가 되는 대로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현재 노인대학, 복지관 등에서 재능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캠코 홍보대사로도 임명되었습니다. 캠코는 1000만 원 이하의 장기 소액 연체자를 위한 구제제도입니다. 이 제도를 활용해 인생 2막을 잘 기획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정서 나이 먹은 사람도 살아가는 의미가 남다르다고 생각해요. 앞날이 창창한 젊은 사람의 인생도 중요하지만 나이 든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죽을 때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자신 또는 남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규대 대부분의 방송이 20대에 편중되어 있어 시니어가 시청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별로 없습니다. 그나마 볼 수 있는 장수무대도 트로트나 뽕짝 일색입니다. 통기타 치고 팝송 부르던 세대를 만족시키는 무대가 없어 아쉽습니다. 손종열 가곡에 관심이 많아 가곡 부르기 모임을 인사동에서 매달 한 번씩 갖고 있습니다. 서준석 시니어 잡지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있는데 시니어를 위한 음악은 없습니다. 청춘합창단도 1회 행사로 끝났습니다. 낙원상가 4층에 있는 낭만극장에서 박 대표가 ‘딜라일라’를 부르면 60대 이상 청중이 모두 따라 부른답니다. 주정서 시니어의 반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춤추고 떼창하고 싶다”는 구호도 봤습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본 것처럼 시니어 떼창(합창) 모임이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서대문 문화일보 지하 홀에서도 시니어가 모여 함께 노래를 하고, 금요일과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이 되면 낙원상가 4층 낭만극장에서도 음악 모임을 합니다. 시니어를 위한 무대에 다들 굶주려 있는 겁니다. 박승호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시니어 음악 무대 마련에도 힘써주셨으면 합니다.
- 2019-02-01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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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릉 5백년 답사 ⑤
- 젊은 청년 장수 이성계 이성계의 아버지 자춘은 큰 형이 갑자기 병사(病死)하자 조카 대신 형의 벼슬을 물려받았다. 때마침 반원(反元) 정책을 펼치던 공민왕을 만나 쌍성총관부를 되찾기 위한 전투에 협력하기로 했다. 이를 성사시킴으로써 고려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때가 1356년(공민왕 5)으로 무려 99년 만에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쌍성총관부를 되찾은 것이다. 이자춘은 그 공로로 대중대부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고 저택을 하사 받아 개경(開京)에 머물렀다. 이후 동북면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되어 영흥(永興)으로 돌아갔으나 4년 뒤 병사(病死)한다. 이성계는 1335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자춘이 고려에 협력하여 쌍성총관부를 되찾는 공을 세울 때에 약관 20세의 청년 장수로 함께 참전하였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고려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아버지 이자춘의 벼슬을 물려받은 이성계는 동북면 지역의 실세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1361년 10월에 독로강 만호 박의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여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해 겨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온 홍건적의 침략에 공민왕이 개경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자 수하의 사병을 동원, 수도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선두로 입성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또한 쌍성총관부를 빼앗긴 원나라에서 여진족 나하추에게 수만의 군사를 주어 이를 되찾게 하였는다. 이들과 맞선 고려군이 패배하자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여 대적케 하였다. 이성계는 나하추 주력부대를 격멸, 격퇴시킴으로써 저물어가는 고려국의 새로운 별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30여 년 넘게 전쟁터를 누비며 승승장구하는 불패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1364년 반원 정책을 밀어붙이며 기황후의 오빠 기철 등 부원(附元) 세력을 제거한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새 왕으로 임명하면서 군사를 동원하여 쳐들어온 원나라 군사들을 최영 장군과 합동으로 물리친 이성계를 이제 고려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고려말 당시 경상도, 전라도 등 남쪽으로는 왜구가 공공연히 침략하여 분탕질을 치고 있었다. 북으로는 여진족들이 심심찮게 건너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성계는 남으로 달려가 왜구를 물리치고 북으로 올라가 여진을 격퇴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보인다. 특히 1380년 5월에 침략한 왜구들은 500척이 넘는 대선단으로 쳐들어왔으니 결코 도적떼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진포(鎭浦:지금의 군산) 부근에 배를 묶어놓고 상륙한 왜구들은 근처의 전라, 충청은 물론 멀리 경상도 내륙까지 약탈, 방화, 살육을 일삼았다. 정부에서는 진압군을 내려보내니 이때 최무선의 화약과 화통을 이용하여 적의 배를 모두 불살라 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조정에서 보낸 진압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9월에 이르러 남원 운봉과 인월 지역에 주둔하면서 곧 북상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이때 이들을 격파한 것이 이성계이다. 이키섬 출신 소년장수 아지발도(阿只拔都)를 포함한 왜구들은 전멸하다시피 하였으니 이 전투를 황산(荒山) 대첩이라 부른다. 이 황산대첩을 기념하여 1577년(선조 10)에 황산대첩비를 운봉에 세웠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이후 파편만 남은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일제는 강점기간 중 조선 팔도에 세워진 일본 관련 승전비나 석물들, 예를 들면 이순신 장군 관련 비석과 김시민 장군 관련 비석 등을 비밀리에 파괴하는 등 역사를 숨기려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이곳 황산대첩비 파괴도 그 일환으로 저질러진 만행이다. 이렇게 고려말 크게 이름을 떨친 청년장수 이성계는 나하추를 물리친 1362년에는 동북면 병마사가 되었다가 밀직부사에 제수되었다. 1382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1384년에는 동북면 도원수문화찬성사가 되었다. 1388년에는 문하시중의 바로 아래인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까지 오르게 되며 마침내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을 이루게 된다.
- 2018-12-07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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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고는 트렌드에 사무친 시니어의 문화 콘텐츠
- ‘그리움’의 다른 말 ‘復古’ 이경숙 동년기자 조국을 떠난 지 한참 된 사람도 정말 바꾸기 힘든 것이 있다. 울적할 때, 특히 몸이 좋지 않을 때면 그 증세가 더 심해진다고 한다. 어려서 함께 먹었던 소박한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다. 식구는 많고 양식은 빈약하던 시절, 밥상에서는 밥만 먹었던 것이 아니었나보다. 둥근 상에 올망졸망 모여 앉아 모자란 음식을 나눌 때 느꼈던 진한 가족애와 혈육의 뿌듯함이 DNA에 녹아들기라도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마솥 누룽지, 지겹던 보리밥,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던 시래기죽도 각자의 추억과 함께 잊히지 않는 음식이 되어 ‘그것만 먹으면 내 병이 다 나을 것’처럼 그리워지는 것 같다. 골목에 있는 만화방 주인은 청년이었다. 가끔 내게 만화방을 맡기고 외출을 하기도 했는데, 대신 보고 싶은 신간 만화를 실컷 볼 수 있어 좋았다. 만화방 앞에는 약간의 학용품이 놓여 있어 그것도 팔아야 했다. 그날도 만화방을 봐준다는 명목으로 독서(?)에 빠져 있었다. 누군가 나를 ‘툭툭’ 쳐서 보니 군인 아저씨가 물건을 들고 얼마냐고 묻고 있었다. 그렇게 몰두할 만큼 만화책은 너무 재미있었다. 그 만화방엔 안데르센 동화책도 많았다. 울적할 때면, 나는 동물들과 숲속 방앗간 짚 덤불에서 자던 소녀를 떠올리곤 했다. 샘물을 마시고 동물들과 대화하던 맑고 밝은 소녀가 아직도 가슴속에 있다. 지칠 때면 그 소녀가 가만히 내 창을 두드린다. 나팔바지를 입고 집을 나설 때마다 듣던 말이 있다. “동네 다 쓸고 다닐 거니?” 어깨는 각이 지고 허리는 잘록하고 엉덩이는 딱 맞고 바지통은 아주 넓은 디자인이었다. 그 시절엔 사실 유행이 일률적이었다. 지금처럼 다양한 취향을 주장할 만큼 당당하지도, 식견이 풍부하지도 못했다. 개성을 개인적 취향으로 인정해주기보다는 모자란 사람 취급을 하던 그런 시대였다. 그래서 좀 멋쟁이다 싶으면 일제히 미니스커트, 일제히 맥시스커트를 입는 그런 분위기였다. 어찌 보면 마치 유니폼을 입은 것 같았다. 테이블마다 달랑대는 조명등이 달려 있거나, 촛불을 켜는 낭만적인 카페도 많았다. 종종 작은 무대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술이 아니더라도 20대는 늘 무엇인가에 취해 있었다. 쉽게 흥분하고 자주 슬펐던 우리들의 20대. 끝도 없는 논쟁으로 밤을 새우고, 모든 게 다 진지하기만 했던 시절.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사랑 얘기를 쉼 없이 되풀이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모두 정의의 순교자라도 되고 싶어 했다. 미팅 땐 생맥줏집, 볼링장, 극장엘 갔다. 애프터 미팅은 카페에서 만나 주로 비원이나 경복궁, 덕수궁을 걸었다. 가난한 젊은 커플들은 버스를 타고 종점을 오가며 대화를 나눴다. 이런 추억들에 젖어보기 위해 옛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복고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냥 먹고 마시기만 하자니 심심하고 무미건조해 그리움이라도 불러와 옛 필름들을 다시 돌려보고, 식어버린 가슴을 조금이라도 데워보려는 것이다. 벼룩시장에서 보물찾기 윤종국 동년기자 “내가 나를 생각하는 만큼 남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나는 이 말을 엄청 좋아한다. 난 늘 나를 생각한다. 나는 키도 작고 몸집도 작다. 그러나 머리는 크다. 표준 사이즈로 옷을 고르면 거의 맞는 게 없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곳이 있다. 30여 년은 족히 된 듯하다. 독자들이 궁금해할 것 같아 먼저 알려준다. 바로 ‘벼룩시장’이다. 수백, 수천 가지의 물건이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청계6·7가에 있었고, 지금은 동묘(동대문구) 일대에 시장이 형성돼 있다. 벼룩시장에서 레트로를 본다. 내게는 수만 가지 물건이 레트로 대상이다. 한 달에 두세 번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간다. 내 작은 체구를 잘 알기에 어울리는 옷도 찾아본다. 손에 주로 들리는 옷은 복고풍의 외투다. 벼룩시장에서 입수한 옷은 꼭 수선 집을 거친다. 그래야 진짜 내 것이 된다. 누구나 알고 있듯 없는 게 없는 곳이 벼룩시장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덤빌 곳은 또 아니다. 내게는 오랜 세월의 경험이 있다. 레트로를 사랑하려면 요령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레트로인이 된다. 예를 들면 맘에 드는 복고풍 옷을 하나 발견했다 치자. 구매의사가 있을 경우 먼저 입어보고 가격을 흥정하면 초보자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구매자 몸에 어울린다 싶으면 가격이 달라진다. 가격 매기기는 벼룩시장 주인들만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먼저 가격을 물어본 다음에 흥정을 해야 하는 게 원칙이다. 설사 맘에 들더라도 그 맘을 들키면 절대 안 된다. 그래야 원하는 가격에 살 수 있다. 또 하나의 팁. 다른 물건에 관심이 있는 척하다가 진짜 맘에 드는 물건을 들고 슬쩍 “이건 얼마죠?” 하고 물으면 점포 주인은 대부분 낮은 가격을 부른다. 이것이 지혜롭게 레트로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수년 전 딸아이가 벼룩시장이 궁금하다며 따라나섰다. 그날 지나다 발견한 물건은 흙이 묻어 다소 지저분해 보이는 신발이었다. 신을 만해서 단돈 5000원에 손에 넣었다. 집에 와서 닦고 손질해보니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고가 브랜드 신발이었다. 딸아이가 좋아라 했다. 내가 벼룩시장 마니아로 인정을 받은 건 사실 그날이었다. 한 달 전 큰손주의 생일이 있었다. 그날을 위해 몇 번이나 벼룩시장을 찾아 헤맸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찾기 위해서다. 신제품도 생각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는 녀석의 발 사이즈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선물로 선택한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전국, 특히 서울에서 인라인스케이트 붐이 일었다. 그러다가 아파트 내에서 어린이 안전사고가 일어났고 그 충격으로 슬쩍 사라져버렸다. 벼룩시장을 갔던 날, 다행히 손주에게 맞을 것 같은 인라인스케이트를 발견하고 흥정을 시작했다. 일단 가격부터 묻고 사이즈를 확인한 뒤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어 손주 발 사이즈를 물어봤다. 그러면서 주인의 눈치도 살폈다. 발 사이즈가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듯 대화를 나눈 뒤 주인과 흥정을 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가격으로 물건을 손에 넣었다. 이런 요령을 터득해야 비로소 벼룩시장의 프로가 된다. 집으로 돌아와 깨끗하게 정비하니 새 물건보다 더 정감이 갔다. 손주 생일에 인라인스케이트를 건네주며 “지금은 키가 부쩍부쩍 크는 나이니까 일단 이것으로 먼저 타는 연습을 하자”라고 말했다. 갖고 싶어 했던 거라 그런지 손주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날 나는 손주바보 할아버지에서 멋진 할아버지로 거듭났다. 옛것들에서 한 수 배우며 사는 삶 육미승 동년기자 “넌 조금만 더 나중에 태어났더라면 뭔가 해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심심찮게 이런 말을 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민망하지 않은 표정으로 다정하게 미소를 짓는다. 친구들 말은, 내 패션이나 생각 그리고 사는 방법이 자기들과는 전연 다르다는 의미다. 그도 그럴 것이 레트로가 내 생활이니…. 특히 패션에 대한 생각이 그렇다. 옷을 살 때 겉옷은 지금 당장 유행을 타는 것들 중 나중에도 입을 수 있고 멋지게 소화해낼 수 있는 디자인을 고른다. 그리고 다른 옷들은 옷장 문을 열어 예전에 신나게 입고 즐겼던 옷들에서 선택한다. 그날의 모임 콘셉트에 맞고 남의 눈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유행에 뒤떨어짐이 없는 은은한 멋을 지닌 그런 의상을 즐기는 거다. 나는 옛것을 너무 좋아한다. 옛것들 버리지 않고 여전히 아끼고 사랑하는 나를 보고 “어머 얘, 너무 잘 어울린다아~’ 하고 해주는 말들을 좋아하는 것도 같다. 회상하고 추억에 빠지는 시간은 천천히 꼼꼼하게 내 생각들을 정리하는 데 꼭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인연이 끝나 지금은 만나지 않는 사람들과의 대화도 마음 한구석에 감춰두고 있다. 어느 날 그들과의 추억을 꺼내 감상하는 게 내 취미다. 나는 옛것들은 대부분 귀하게 여기고 좋아한다. 가끔은 그동안 읽었던 책 속에서 또는 영화 속에서, 예를 들면 사마의 같은 중국의 책사들에게 한 수 배우길 희망한다. 그 놀라운 생각의 회로를 닮아보려고 혼자 부단히도 노력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젊은이들. 그 두뇌를 못 따라가는 나는 느린 사고방식이 편하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싸워보질 못했다. 갈등이 일어날 것 같으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거나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게 내 모습이다. 져주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며 지내왔기 때문이다. 일처리를 할 때도 나를 뺀 모든 관계자들이 편한 쪽으로 해답을 구한다. 어느 면으로 보면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나를 길들이며 살아왔기에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지인들은 불똥이 내 발 바로 앞에 떨어져도 “이게 뭐지?” 하며 그제야 슬쩍 뒤로 물러날 사람이라며 핀잔 섞인 말을 한다. 그렇다. 나는 오래 생각하며 말없이 기다린다. 특히 답이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끝까지 기다린다. 엉망으로 뒤섞여버린 물을 가만히 두면 침전물들이 여러 층으로 가라앉고, 맑은 물이 맨 위로 올라온다. 내 앞의 문제도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면 마치 무위이화(無爲而化)하듯 저절로 아주 유효하고 명쾌한 답이 나온다. 그 신기함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이것이 바로 레트로의 진가라고 믿는다. 새로운 기술과 기교도 좋지만 옛 성현들의 말씀에서 더 많은 답을 찾는다. 레트로는 내 단짝이다. 한 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복고 속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찾아내는 마음으로 패션, 음악, 미술,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을 즐기며 여유작작한 삶을 살아가려 한다. 레트로는 ‘마음의 휴식’이다 손웅익 동년기자 1980년. 그 해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건축과 학생들 중 건축설계에 특히 관심이 많은 학생이 모인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다. 회원들은 매년 몇 달씩 동아리방에서 합숙을 하며 건축 작품전을 준비했다. 식사는 2학년생들이 돌아가면서 전체 회원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설거지 한 번 안 해본 학생들이 만든 밥은 그야말로 배가 고파서 억지로 먹을 수밖에 없는 정도의 상태였다. 그런 식사로 몇 달 합숙을 하다 보니 대부분 건강이 나빠졌다. 1980년의 교정은 봄부터 최루탄으로 뒤덮였다. 수업도 대부분 휴강이었다. 그렇게 혼란한 상황에서도 건축과 동아리 회원들은 밤낮으로 모여 작품전을 준비했다. 대체로 밤에 설계를 하고 낮에는 잠을 잤는데, 그 와중에도 매일 데모하러 나가는 회원도 있었다. 졸업을 앞둔 4학년 학생들은 최고참이라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저녁에 가끔 학교 앞으로 나가 막걸리도 한잔씩 했다. 그날도 4학년 동기들은 동아리방에서 저녁을 먹지 않고 학교 앞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4학년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막걸리를 마시고 난 뒤에는 학교 교문 근처 문방구점에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중계를 봤다. 당시 텔레비전은 다 흑백이었다. 그런데 선발대회 중에 화면 아래쪽으로 대학교를 폐쇄하겠다는 자막 뉴스가 떴다. 합숙 중이었던 우리는 얼른 짐을 챙겨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학교로 들어가려는데 어느새 장갑차가 교문을 지키고 있었다. 1980년 5월 15일이었다. 17일에는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 5월 18일. 그 해 우리가 준비했던 5월 전시회는 무산되었다.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면서 집회는 일절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회원들 집에서 만나 작품전 준비를 했고 가을에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동아리 회장이었던 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준비해서 내 임기 중에 전시회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울이 또 왔고 어느 날 술친구들이 중국집에 모였다.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고량주를 마시면서 방송 시작 시간을 기다렸다. 그날은 우리나라 텔레비전 역사상 처음으로 컬러 방송을 하는 날이었다. 당시의 자료를 찾아보니 1980년 12월 22일 이었다. 우리는 컬러로 텔레비전을 보면 중국 영화처럼 피가 난무하는 장면은 너무 살벌할 것 같다는 둥, 연예인들이 옷을 더 화려하게 입을 것 같다는 둥 이런저런 추측성 대화를 나눴다. 그날 그렇게 흑백텔레비전 시대가 종료되었고 내 학창 시절도 저물어갔다. 얼마 전에 영화 ‘로마의 휴일’을 텔레비전에서 다시 봤다. 오래전에 갔던 로마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옛날 영화를 보다 보면 흑백 화면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흑백이라서 불편하거나 아쉬운 점도 없다. 오히려 로마의 유적이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상상을 자극하는 것 같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컬러 사진이 보편화하기 전의 흑백 사진들은 그 분위기로 시간을 되돌리는 신비로움이 있다. 흑백 사진을 손에 들면 사진을 찍던 순간으로 순식간에 되돌아가는 듯하다. 흑백이라는 무채색의 아름다움은 그래서 복잡하고 바쁘고 혼란스러운 현대인들에게 향수를 자극하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마음의 휴식을 주는 것 같다. 현대인들은 현란한 색과 형태 그리고 자극적인 소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정보의 홍수와 자극의 파도를 견디려니 모든 감각기능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 이런 현실에서 흑백은 잠시나마 여백의 세계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눈이 편안해지면 마음도 편안해진다. 나는 새벽안개를 좋아한다. 특히 두물머리의 새벽안개는 한 폭의 수묵화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에는 온 세상이 흑백으로 변한다. 안개의 농담(濃淡)으로 그려놓은 수묵화는 화려한 가을날의 유화 같은 풍경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신비로움이 있다. 그 여백은 흑백 사진처럼 아련한 시간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한다. 요즘 펜화 스케치를 하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한다. 검은색으로만 그림을 그려놓고 원본의 컬러와 비교하면 흑백이 가진 깊이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가끔 의식적으로라도 흑백의 세계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흑백은 레트로다. 나는 레트로에서 마음의 휴식을 찾는다.
- 2018-11-2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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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어송라이터 백영규, “슬픈 계절, 백다방에서 만나요”
- 포크 음악 시대의 막바지였던 1980년, ‘슬픈 계절에 만나요’를 발표해 추억의 대명사로 각인된 가수 백영규. 이후로도 그는 제작자, 싱어송라이터, 그리고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제이라는 현업들을 꾸준하게 지켜나가며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최근 그는 자신의 다양한 삶의 경험과 노하우들을 하나로 모아 만든 청춘의 추억 ‘백다방’을 론칭해 업계로부터 ‘제대로 된 게 나왔다’는 평을 듣고 있다. ‘백영규’ 하면 떠오르는 계절, 가을. 그를 만나 그간의 삶과 현재에 대해 들어봤다.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가슴 깊이 파고드는데 들리지 않는 그 목소리에 스쳐가는 바람소리뿐’ 1980년에 발표되어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등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노래, ‘슬픈 계절에 만나요’는 제목이나 가사나 자연스럽게 가을을 떠올리게 만든다. 가을이 되면 생각나는 이 노래를 더욱더 가을답게 만드는 것은 백영규 특유의 처연하고도 서정적인 음색일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청소년 시절을 보낸 인천에서 라디오 경인방송(FM 90.7㎒)의 최장수 간판 프로그램인 ‘백영규의 가고 싶은 마을(백가마)’ 디제이로 활동하면서 꾸준한 음악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렇게 가수로서의 백영규와 디제이로서의 백영규가 합쳐진 이벤트가 얼마 전에 있었다. 바로 ‘백다방 콘서트’다. 원고까지 직접 쓴 ‘백다방 콘서트’ 1970년대 한국 가요와 청춘 문화의 핵심이 음악다방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백다방 콘서트’는 그 시절의 음악다방을 음악적 콘셉트로 삼은 백영규의 공연 프로그램이다. 무대 한편에 뮤직박스를 차려놓고 음악다방이 인기 있던 시절 실제로 인기 있었던 디제이가 초빙되고 색다르게 연출 구성한 추억의 음악다방 분위기 속에서 백영규의 공연이 함께 어우러져 진행된다. 당연히 애청자가 보낸 사연을 읽는 시간도 있는데 그 전에 안내방송이 나오도록 설정하는 등 그야말로 ‘정통’ 음악다방의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1월에 시흥에서 처음 쇼케이스를 가졌고, 지난 5월 행사 이후로는 수정 보완을 해 진행하고 있다. 여기서 백영규는 공연 기획뿐 아니라 원고까지 직접 쓰고 있다. “디제이를 하면서 배운 게, 다른 사람 가슴속에 빠르게 들어가는 법이에요. 그래서 관객의 생각을 파악하며 원고를 썼죠. 음악다방이 중심이 된 무대를 세우니 과거와 추억을 소환하는 보람이 있어요. 음악다방이라는 콘셉트가 관객들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어요. 저는 기분이 좋죠.” ‘인천가수’ 백영규의 보람 올해로 벌써 12년째인 디제이 생활을 이어나가는 그에게 디제이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처음에 디제이를 시작할 때는 겸손하지 못했어요. 가수들이 왕자병 많잖아요.(웃음) 나니까, 인천 출신이니까 시켰겠지 싶었죠. 그게 좀 오래갔어요. 그런데 살다 보면 정신 바짝 차리게 되는 그런 일이 어느 순간 생기잖아요. 저도 그런 일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깨닫게 됐죠.” 라디오 청취자들에게 백영규는 ‘촌장’으로 불린다. 프로그램명에 마을이라는 글자가 들어가서 그렇다. 그는 “촌장이라는 칭호까지 붙었는데 이름값을 해야지” 하며 웃었다. “제가 썩 좋은 성격은 아니었는데…. 중장년이 되면 배려 차원이든 자기 보호 차원이든 두 얼굴을 갖게 되잖아요. 가능하다면 (안 좋은 얼굴을) 버리는 척이라도 해야 해요. 척을 하다 보면 사람이 달라져요. 저는 특히 안병진 피디와 함께 일하면서 조직과 사회를 알게 됐어요. 큰 경험이죠.” 데뷔 40주년, 그리고 달라진 삶 아직 에너지가 넘쳐 보이는데 백영규가 중장년이라는 말을 한다. 그러고 보니 1978년 그룹 물레방아로 데뷔한 그가 가수활동을 시작한 지 벌써 40년이나 됐다. 이 특별한 숫자에 그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없어요. 괜히 40주년이니까 주위에서 뭐라도 해야 하지 않냐 그러지. 그런데 자꾸 그런 말 들으면 바람이 들게 되잖아요.(웃음) 그래서 백다방 콘서트도 시작하게 된 거고. 2016년 신곡 ‘술 한 잔’을 발표했어요. 그 음반이 대중들에게 좀 더 다가가기를 바랐는데… 올해 하나 더 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작업하고 있어요.” 그는 요즘 싱글로 발표할 곡을 하나 준비하고 있다. 가장 유력한 발표 후보 곡은 ‘그놈의 밥 때문에’라고. 디제이 일을 하고 있어도 가수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 하는 그는 요즘 노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고 말했다. “습관적으로 음반을 내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완성도가 떨어지더라고요. 한 곡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이유가 됐죠. 그래서 최근 3~4년간은 노래를 만들 때 수정작업을 많이 합니다. 과거에는 수정작업이 없었으니 완성도가 좀 떨어졌겠죠. 요즘은 노래 가사 토씨 하나 바꾸는 것도 하루 종일 고민하곤 해요. 신이 나요.” 노래 64곡을 다시 찾았다 저작권협회에 등록된 백영규의 노래는 총 210곡에 달한다. 싱어송라이터로서 그의 성실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런데 210곡 중 64곡은 최근에 편입된 곡들이다. 한두 곡도 아니고 수십 곡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과거는 지금처럼 곡들을 관리하던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 얼마 전에 발견한 거죠. 그 곡들을 한꺼번에 가져갔더니 저작권협회가 뒤집어졌어요.” 그가 디제이를 하면서 싱어송라이터 편을 만들었던 게 그 시작이었다. 여러 싱어송라이터의 곡을 모아보다가 정작 자신의 노래들에 대한 정리가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하나는 히트곡 모음, 다른 하나는 다른 가수들에게 준 노래들로 구분해 더블 앨범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팬클럽에 조사를 의뢰했는데, 그 과정에서 64곡이 빠져 있는 게 발견된 것이다. “저작권협회에 이 사실을 얘기했고 협회가 검토한 결과 모두 내 노래였죠. 그래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며 옥신각신했죠. 처음에는 싸우려다가 언론사에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연락을 했어요. 기자들이 기사 쓸 일이 생겨서 그런지 신나하더라고요.(웃음) 그런데 거기서 스톱했어요. 나이 들어 돈 벌려고 그런다는 말 듣는 게 싫어서요.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지만 협회도 잘못했다. 나 같은 컴맹을 위해 작품관리를 잘 좀 해줘라’ 하고 끝냈죠.” 그는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속이 상해서 작곡을 전혀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것도 제 개인의 역사이니까요. 또 계속 발전해나가는 중이니까 이런 일도 벌어지는 거겠고요…. 그래도 아쉽긴 했죠.” 나를 지탱하게 해주는 건 음악밖에 없다 중장년의 나이에 이르면 삶과 생활 속에서 생긴 생채기들이 흉터처럼 남기 마련이다. 백영규는 그럴 때마다 자신이 음악에 의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고 말한다. “90년대 중반에 이혼하고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굉장히 힘들었는데 어떻게 또 이겨내더라고요. 특별히 떼돈을 벌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제가 잘나갔다는 걸 잘 모르겠어요. 경제적으로 풍요로울 때는 그걸 느낄 새가 없었고. 저는 전초전이 없는 가수여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가수로 성공했죠. 가치라는 걸 몰랐어요. 그게 되게 아쉬워요.”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노래, ‘슬픈 계절에 만나요’를 발표했을 때가 전성기 아니었을까? “그때가 가장 유명했지만 경제적으론 힘들었어요. 지금은 매니저 시스템이 과학적이잖아요. 그때는 매니저가 가수가 큰다 싶으면 눌렀어요. 자기 말 잘 듣게 하기 위해서였죠. 언젠가 벽제에 공개방송이 있다고 해서 갔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허허벌판이었어요. 매니저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야 하는 그런 시대가 있었어요.” 그는 박정수의 히트곡 ‘그대 품에 안기고 싶어’를 제작하면서 제작자로서도 성공한 삶을 살았다. 그때 필드 매니저라 불리는, 이런저런 잡일까지 다하는 매니저로서의 역할도 해봤다. 그 경험은 지금도 그에게 삶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가요계의 정상에서부터 밑바닥 일까지 다해본 것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는 ‘고통이 자신을 만든다’는 말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이일 것이다. 세상을 넓게 보는 재미가 생겼다 백영규는 자신의 원래 꿈은 두루뭉술했다고 회고했다. “확고한 신념이라는 것도 없었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나왔다 하면 사람들이 놀랍니다.(웃음) 공부는 일찍 포기했어요. 그리고 대학 졸업하자마자 가수가 되었으니 미래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그러나 이제 그의 나이 예순일곱 살, 나이 듦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가 드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더군요. 나이 듦이란 그렇게 달라지는 맛이 있죠. 가끔 웃게 돼요. ‘동갑내기들은 이걸 못 찾았을걸?’ 하면서요.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에서 동네 사람을 마주쳤을 때 서로 외면하는 게 더 힘들지 않나요? 차라리 고개를 숙여 먼저 인사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제가 며칠 그랬더니 이제는 그 사람이 날 만나면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런 것이 바로 내 자신이 달라짐으로써 얻는 맛이죠.” 그가 변하자 노래도 달라졌다. 노래 주제가 예전처럼 서정적이거나 사랑은 빠지고 시사적이고 사회적인 것들을 다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그에게서 ‘계절을 기억하게 만드는 사랑 이야기’ 같은 노래를 원한다는 게 그의 딜레마기도 했다. “영감을 따로 얻는 원천은 없어요. 그래서 찾아야 해요. 제가 제일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은 감성 지키기예요. 가진 거라곤 그것뿐인데 감성마저 잃으면 어떡하나 싶어서요. 만날 사람 다 만나고, 할 거 다 하면서 감성이 나오기는 힘들죠. 감성을 지키기 위해 저는 주로 책을 읽어요.” 변화를 넘어 계속 진화하고 있다 그는 산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다. 아침마다 산을 탈 정도로 푹 빠져 있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하고 산에 갔다 와서 자투리 시간에 곡을 쓰고, 여유가 생기면 술 한잔하는 게 그의 일상이다. 산은 그에게 스스로 질문하게 하고 답을 모색하도록 하는 시간을 마련해준다. 백다방 콘서트 같은 공연을 구상하고 연출한 것도 그런 시간들이 선물한 숙고의 시간 덕분이리라. 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냐고 묻자 ‘생각하다 말았다’고 답한다. “계속 진화하는 중이라.(웃음) 그다음에야 할 수 있는 얘기인 것 같아요. 요즘은 ‘이러다 도인되는 거 아냐?’ 싶기도 한데, 그러면 재미없지. 술 한잔 먹고 귀여운 실수도 하고 그래야 사는 맛이 있잖아요. 사람이 완벽하면 쓸데없이 뻣뻣해지거든요. 요즘 고민이요? 이제 돈 좀 벌어야겠는데 돈 좀 벌려고 하니 길이 안 보이네요.(웃음) 그러니 하던 일이나 더 열심히 해야지요, 뭐.” “우선 작품을 잘 써야죠” 하며 웃는 그를 보며 젊은 시절에는 할 수 없었던 말이 아닐까 싶었다. 그가 인터뷰 내내 강조했듯이 나이를 먹는다는 증거는 변화된 모습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옳게 나이 드는 일이야말로 노년의 보람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보여주고 있었다. “전에는 뭘 모르고 썼는데, 이젠 정말 괜찮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작품 속에 내가 가진 마음 전부를 다 쏟아볼까 해요.”
- 2018-10-30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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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는 봤는가, 국민연금공단 노후준비 프로그램!
- 대체로 사람들은 국민연금공단(이사장 김성주, 이하 ‘공단’)을 국민연금만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알고 있다. 60이 되고부터 연금을 받는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올해로 31주년을 맞은 국민연금은 가입자 수가 2153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절반에 이른다. 연금수급자 431만 명, 기금도 601조 원에 이르는 세계 3대 연기금으로 성장한 종합복지서비스 기관이다. 국민연금의 궁극적 목표는 ‘노후의 행복한 삶’이라는 사회적 가치 실현이다. 노후준비 서비스는 어쩌면 공단의 당연한 업무. 공단은 100세 장수 시대를 맞아 연금을 중심으로 신중장년과 시니어를 위한 노후준비서비스팀을 운영하고 있다. 공단의 각 지역본부에서는 국민연금 관리에 덧붙여 국민의 노후준비를 위한 “NPS 아카데미”를 2017년부터 개설했다. 첫 프로그램으로 작년 7월 한 달여 간 ‘작가탄생프로젝트’ 진행한 바 있다. 이를 비롯해 ‘신중년 글쓰기 마라톤’, ‘1인 크리에이터 과정’, ‘비행(飛行) 신중년 프로젝트’ 등 흥미로운 프로그램으로 은퇴자의 구미를 잡아끌었다. 적당한 놀이터가 없는 신중년들에게 문화 플랫폼을 제공함으로써 즐겁고 보람과 의미를 함께 할 수 있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놀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 신중년을 위한 문화 플랫폼 특화 서비스 국민연금관리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 백수현 본부장(이하 북부본부)은 ‘노후준비 서비스가 공단의 소명 같은 것’이라고 밝혔다. “공단 사업의 기본은 연금관리입니다. 더 큰 틀에서 봤을 때 국민들의 안정된 미래 노후 생활에 기여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부본부에서 ‘신중년 특화서비스’를 2017년부터 시작했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기여하는 참신한 노후준비 롤모델로 발전함에 미래의 희망이 보였습니다.” 중단 없는 핵심 사업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백 본부장은 덧붙였다. 공단 업무의 블루오션으로 나아가 글로벌한 교육프로그램으로 성장시킬 것이라고 했다. “국민연금 관리의 근본 취지를 살리는 광의의 사업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구체적 목적은 첫째, 역량 있는 시니어가 노후를 스스로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둘째, 수요자 중심의 프로그램 기획으로 자발적 노후 준비 서비스 희망 고객을 발굴하여 사업 추진 효과를 높인다. 셋째, 국정과제의 하나인 ‘신중년 일자리 보장 및 사회 안전망 구축’을 위한 신중년 노후준비 교육 특화 사업으로 일자리 및 커뮤니티 활동 지원 서비스를 연계 추진한다. 지금까지 ‘작가탄생프로젝트’와 ‘글쓰기 마라톤’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쓰게 하는 작가탄생프로젝트 첫 번째 아카데미 프로그램이 바로 작년 여름내 진행된 ‘작가탄생프로젝트’였다. 방법과 내용이 신선하고 파격적이었다. 많은 사람이 프로그램의 성공 여부를 의아해하거나 불가한 일로 단정 짓거나 반신반의했다. 일주일에 2회 강좌와 글쓰기 지도를 통하여 한 달 동안에 참석자 모두가 각자 1권의 책을 쓰는 프로그램이었다. 참여자 40명 중 37명이 그 기간 안에 집필을 마치고 37권의 책을 출간했다. 한 달 안에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출간하는 참으로 어려운 일로 신중년의 가능성을 보여준 프로그램이 됐다. 그러한 성과를 안고 뒤이어 2018년도에 2기 작가탄생프로젝트를 출범시켜 가능성을 재차 확인했다. 1기와 마찬가지로 한 달에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쓰는 프로그램으로 43명이 참가하였고 그중 36명이 총 6,352페이지의 책 38권을 만들었다. 수강생 김도영 씨의 “은퇴 그리고 아름다운 삶”, 곽정숙 씨의 ”나를 위한 여행” 황선호 씨의 “황 첨지의 독일 유랑기” 등이 있다. 수강생들의 참가 소회에서 프로그램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다. 강정석 씨는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시점에 만난 “작가탄생프로젝트”는 새로운 도전의 출발”로 표현했다. 신영균 씨는 이렇게 소회의 글을 남겼다. “이 변화의 와중에 덤으로 성찰의 기회까지 주어졌다.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다”고 말이다. 다양한 신중년 문화 플랫폼 성공리에 안착 이러한 여세를 몰아 공단의 북부본부는 지난 5월 5일 일정으로 책 한 권을 쓰는 “글쓰기 마라톤 과정”을 새로 열었다. 2018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마라톤 거리와 같은 총 42.25시간에 걸쳐 글을 온종일 집중적으로 쓰게 했다. 33명이 참가하여 23권의 책을 완성됐다. 권수연 씨의 ‘마르지 않은 그리움과 사랑이 담긴 화수분’, 장의영 씨의 ‘더 곱게 살즈아’, 조왕래 씨의 ‘브라보마이라이프’, 김종억 씨의 ‘별 하나 꿈 하나’ 등이다. 시니어에 불가능은 없음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북부본부는 여행을 콘텐츠로 하는 ‘비행(飛行) 신중년 프로젝트’를 2017년 11월 20일부터 11월 24일까지 37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해 여행 커뮤니티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도보 여행가 황안나 씨가 함께해 ‘여행하고 일하며 나이 들기’가 주요 과제다. 매달 한 번 국내외 도보와 여행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동영상 시대에 발맞춰 1인 크리에이터을 위한 과정을 열기도 했다. 2018년 2월 2일부터 4월 13일까지 매주 금요일에 총 30시간 일정으로 23명이 참가하여 인기리에 진행됐다. 유튜브 채널 기획, 촬영, 편집 과정이었다. 동영상을 통한 새로운 후반생 활기찬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프로그램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은퇴자 1000만 명 시대다. 변화무쌍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신중년들에게 삶의 보람과 가치를 창출해갈 수 있는 신중년 문화 플랫폼 구축은 크게 기대되는 사업으로 보인다. 특히 고령 사회에 접어든 시점에서 희망의 빛으로 다가옴은 기자만의 생각일까? 소일거리가 없어 고민하는 시니어에 적당한 놀이터 플랫폼으로 여겨진다. 보람 있는 후반생을 꿈꾸는 시니어가 함께하면 좋은 프로그램이 아닐까 싶다.
- 2018-10-1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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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1년, 느리게 걸으며 세상을 보다, 손웅익 동년기자
- 작년 7월 손웅익 동년기자와 함께 동행 취재를 했다. 공장지대에서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한 성수동 거리를 걸어 다니며 공간을 소개하는 지면이었다. 그날은 손웅익 동년기자가 서울오션아쿠아리움 부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지 딱 일주일 되는 날이기도 했다. 마침표를 찍지 않았더라면 회사에 앉아 있어야 할 시간. 갓 내린 커피를 마시며 지금까지 살아온 얘기와 살아갈 얘기를 나눴다. 40년 건축 전문가로, 전문 경영인으로 살다 은퇴한 지 1년째.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해 또다시 데이트 신청을 했다. “경희궁이요?” 손웅익 동년기자는 그곳을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만들어준 공간이라고 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경성중·고등학교였으며, 해방 후 1980년까지 서울고등학교의 옛 교정이 있던 자리다. 무시험고교입학제, 소위 ‘뺑뺑이 세대’로 불리며 명문 서울고에 입학한 58년 개띠 손웅익 동년기자가 고교 시절을 보낸 장소. 본래 모습을 되찾아가면서 교정은 사라졌지만,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 자리가 대운동장이 있던 곳입니다. 경희궁 뒤에도 작은 운동장이 더 있었어요. 나무들도 그때 그대로입니다.” 인생 방향을 설정해준 운명의 장소로 꼽은 옛 서울고등학교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속상한 일도 많았다. 입학시험 관문 없이 명문고 대열에 무임승차한 자격미달 74년 고교 입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시험 쳐서 들어왔는데 저희는 아니잖아요. 선배들과 선생님들의 벽이 너무 높았어요.” 총동창회에 안 나오겠다는 졸업생도 많았다. 선배들 사이에서는 아예 74년 입학생을 후배로 인정하지 말자는 소리도 흘러나왔다. “큰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제가 졸업하고 한 10년 정도 됐을 때 총동문회에서 마이크를 잡을 기회가 있었어요. ” 동문들 앞에 선 손웅익 동년기자는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58년 개띠생을 후배 취급할 생각이 아니라면 다른 이름을 만들어 1회 졸업생으로 나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곳에 계신 선배님들 자식 중에 뺑뺑이로 서울고등학교에 들어오면 우리한테 대하듯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장내가 잠잠해지더라고요.” 손웅익 동년기자는 이날 동문들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정리해 동문회지에 글로 실었다. 이를 계기로 선후배 간 관계가 재정립됐고 지금의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이 자리에서 제가 공부했을 때가 제 인생 줄기의 큰 시작점인 것 같아서 이곳에서 뵙자고 했습니다.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제 경우는 많은 걸 깨달았어요. 학교 다닐 때 어린 마음에 반발심도 있었어요. 감성도 풍부할 때라 고목 주위에서 그림도 많이 그렸고요. 나중에 보니까 학교의 전통이나 정신이 알게 모르게 배어 있었습니다. 이곳의 추억이 벌써 40년 전인데 지금까지 맥락을 꿰뚫고 있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때 그 자리로 오고 싶었습니다.” 마침 대학 졸업 후 첫 직장도 옛 서울고가 내려다보이는 피어선 빌딩에 있었다. 은퇴하고 나서도 학교 주위는 친숙하기에 자주 찾는다. 시청역에서 덕수궁을 지나 정동길을 걸어 커피 한 잔, 차 한 잔 하며 여유를 즐긴다. 경희궁 한 바퀴 돌고. 서울역사박물관도 구경하고 말이다. 척박한 서울살이를 이기다 경주에서 태어난 손웅익 동년기자는 부모님을 따라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서울로 올라왔다. 성수동 카페거리 동행 취재 때 중랑천변 판자촌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비가 오면 집이 떠내려가기 일쑤였고, 전기가 없던 시절이라 횃불 들고 밤새 집을 지어야 했다. 그런 생활이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1 때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통장을 의무적으로 만들어서 적금을 붓도록 했어요. 그런데 돈이 없어서 못 냈다가 교우들 앞에서 선생님한테 맞은 적도 있어요. 그렇게 힘들었는데 나는 지금도 부모님이 내 대학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해주셨는지 잘 모르겠어요. 친구들한테 자주 민폐를 끼치면서 살았어요. 그야말로 빈대생활이었죠.(웃음)”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손웅익 동년기자는 미술대학 대신 한양대학교 건축과를 택했다. “미술 대신 선택한 건축이 저랑 잘 맞았어요. 건축은 조형물이고 예술품이지요. 미술을 선택하지 못했던 한을 건축에서 충분히 풀 수 있었으니까 제가 40년 가까이 건축을 했겠죠.” 건축과 졸업 후 돈을 잘 벌 수 있는 건설회사 대신 건축설계 사무실에 들어갔다. 건설회사의 3분의 1 수준인 월급을 받고 설계 사무실에 앉아 도면을 그렸다. 현장에서 공사하는 것보다 도면 그리는 것이 적성에 맞아서였다. “그때 건설회사로 간 친구들이 월급을 삼십만 원쯤 받을 때였어요. 설계 사무실은 십만 원이었고요. 그래도 나는 어쨌든 간에 도면이 좋았어요.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요. 나중에 건축사가 돼 설계 사무실을 차려 돈을 벌면 된다는 생각이었거든요.” 건축사 자격증을 따고 설계 사무실을 연 이후 일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건설 열기 덕분에 설계사 또한 바빠졌다. “결혼하고 1년 뒤에 건축사 자격증을 따고 서른한 살에 설계 사무실을 차렸어요. 정말 그때는 일도 많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죠. 미국에도 가고 이탈리아, 스위스 종주여행도 하고요. 당시 유럽 왕복 티켓 가격이 비쌌거든요. 1990년대 초반에는 분당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건설 열기가 또 어마어마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많았어요. 사무실 규모도 커지고 집도 사고 정말 내 세상이었어요. 말도 못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는데 30대 초반에 경제적으로 인생 역전했던 거죠.” 신나게 이야기가 흐를 때쯤 속도가 딱 끊기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이 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말문이 막히는 순간, IMF 금융위기 얘기가 이어진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직원들을 내보내지 않았어요. 내보내봐야 직원들이 갈 데도 없잖아요. 집 담보 잡히고 그냥 모든 걸 다 쏟아 붓고요. 이곳저곳에서 돈 빌려서 회사 사무실에 다 쓸어 넣었어요. 그 빚 갚는 데만 10년 걸렸어요. 경제적으로 제로인 상태에서 퇴직을 했습니다.” 10년을 준비한 은퇴, 퇴직 1년 차 작년 5월, 서울오션아쿠아리움 부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손웅익 동년기자. 부사장이라기에 넉넉해서 그만두는구나 생각했는데 이전 상황에 대해 듣고 나니 왜 그만뒀는지가 궁금했다. 회사에서 제안도 있었고 좀 더 은퇴를 늦출 수도 있었지만 흔들림 없이 계획대로 은퇴 날짜를 잡았다. “제가 은퇴 준비만 10년 했습니다. 자격증도 따고, 책도 내고, ‘이 정도면 부딪칠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강의하고 글 쓰고, 건축 일을 평생 했으니까 또 건축과 관련해서 자문도 몇 개월 했고요.” 은퇴를 위해 미술심리상담사, 노인심리상담사, 자살예방지도사 등 자격증도 땄다. 중앙일보에 건축과 관련한 글을 1년 여 게재했고, 동년기자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최근 우송정보대학교 리모델링 건축과 겸임교수로 임용돼 강의도 하고 있다. “강의하는 게 재미있습니다. 반응도 좋고요. 참 체질적으로 나랑 잘 어울리는구나 생각합니다.(웃음) 작년 5월에 수필작가로 등단했어요. 이외에는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그림. 정말 그림을 다시 한 번 하고 싶어서 삽화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림 그리고 사진도 찍고 그게 글하고 또 연결되잖아요.” 은퇴하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시간의 속박에서 해방된 것이라고 했다. 은퇴하는 순간까지 출근시간은 늘 아침 7시에 맞춰져 있었다. 고교 시절에도, 설계 사무실을 운영할 때도, 큰 조직에서 중역을 맡아 일할 때도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찍 출근해서 데이터 정리하고 글도 쓰고 사진도 정리하고요. 퇴근도 항상 늦었어요. 문제는 내가 정말 쉬고 싶어도 강제로 출근해야 되잖아.” 건축설계 사무실을 운영하는 후배가 자리를 내주어 출퇴근할 장소가 있기는 하지만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출근하다가 멈춰 설 수도 있고 어디론가 다른 길로 빠져서 내빼도 괜찮다. 사진 찍고, 산책하고, 집 근처 영화관에서 영화도 많이 본다고 했다. “좋잖아요. 생각도 하고. 하여튼 뭐 여러 가지로. 과거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현재를 봐요. 글이나 그림 소재도 생각하고요. 그리고 길가다 사진도 찍어야죠. 바삐 가야 하는 사람들과 걸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니 혼자 걷습니다.” 베이비부머가 주거문화를 바꿔야 한다 그렇다고 손웅익 동년기자가 1년 동안 유유자적 한가롭게만 지낸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업과 시니어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의견을 나누고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 중이다. 문 닫은 식당과 빈 공간들이 눈에 많이 띄어서 걱정이라고도 했다. “베이비부머는 위로는 늙은 부모가 살아 계시고 아래로는 부양해야 할 자식들이 있습니다. 정말 조금이라도 자식들에게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국민연금에 기대기도 어렵고 퇴직연금을 들어놓은 사람도 흔치 않고요. 재산을 분배하네 마네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생각도 줄이고 씀씀이도 줄여야 하고 실제로 우리가 사는 공간, 그러니까 집의 크기를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 주거 공간의 평수를 줄이고 입주자가 함께 쓰는 공간을 늘려 조금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주거로 전환하자는 운동을 현재 손웅익 동년기자가 펴나가고 있다. 자식들 출가시키고 나면 덩그러니 부부만 남아 있으니 적당한 규모의 집에서 살고 남는 돈은 현금화해서 노후자금으로 돌리자는 의미다. “내 공간은 최소화하고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구역을 만들어 여러 가지 활동도 하고 수익사업으로도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시니어 카페라든지,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요리를 하고. 이런 공동 주택이 마을화가 되면 다른 지역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러 혹은 빵을 맛보기 위해 방문할 수 있는 곳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또한 10년 넘게 연구했습니다.” 최근 정부의 잇따른 부동산 정책 실패로 혼란과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생각을 골똘히 해보면 나쁘지 않은 구조이기도 하다. 투자와 돈을 만드는 도구로 변질된 집의 개념을 본래의 기능으로 되돌릴 수 있는 혁신 운동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액티브한 시너지를 기대한다 회사에 있으면서 해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갈증이 심한지 그가 매진하는 일들이 많기도 하다. 삽화뿐만 아니라 캘리그라피에도 관심이 많아 시간이 나면 꼼꼼하게 글씨를 쓰기도 한다. “그림을 하다 보니까. 어떤 곳에서 책을 내는데 삽화를 그려 달라는 제의도 있었어요. 내가 그린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면 SNS 활동도 열심히 해야겠구나 생각합니다.” 끝에 뭐가 있는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시간을 마음껏 누려보겠다는 마음밖에 없다. “아무 준비도 없이 불확실한 미래를 그냥 기대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이가 없다잖아요. 맞는 얘기죠. 그런데 제가 오랫동안 건축설계 사무실을 운영하고 크고 작은 기업에서 일도 해보고 했는데 그때마다 제것도 아니고요. 그냥 열심히 살다 보니까 여기에 제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핵심은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관계요.” 시니어 세대로 접어들면서 좋은 점은 관계 정리에 의연해졌다는 것이다. 정리도 할 수 있고 새로운 관계도 만들 수 있다. 오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모이니 친해지기도 쉽고 다양한 경험들이 서로를 자극하고 발전시킨다는 생각도 든다. “굉장히 희망적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어요. 동년기자단도 멋진 시니어가 모인 모임이잖아요. 앞으로 동년기자 활동도 잘해야 할 텐데요.(웃음)” 경희궁 처마 아래서 손을 내밀어 비와 마주하던 손웅익 동년기자 모습이 기억난다. 혼란스러웠던 시절. 힘들었던 세상과 맞서던 추억 속 고교생 시절 자신과 만나 듯 손 위로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 2018-10-0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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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체 발광 소녀 감성, 전성기를 맞이하다-박애란 동년기자
- 작년 초, 2기 동년기자 발단식에 범상치 않은 여인이 나타났다. 망사와 레이스로 된 코사지를 머리에 올려 쓰고, 화려하게 빛나는 공단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박애란 동년기자였다. 상냥한 어투로 자신을 핑크레이디라고 소개하던 그녀는 어느새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없어서는 안 되는 대표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중. 최근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영상 제작에도 참여하며 그 누구보다 활발히 동년기자 활동을 넓혀가고 있는 그녀다. 잘 영근 숙녀의 삶 속에는 어떤 우여곡절이 숨어 있을까? 동년기자 리포터 가능할까요?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자주 가는 장소가 어디냐고 물으니 서울 강남에 있는 서초문화원이라고 했다. 현재 이곳에서 모델워킹 수업과 시창작 수업을 듣고 있다고. 대부분 시간을 주로 강남 일대에서 보내는데 1분 1초도 아깝지 않게 살뜰히 모아 사용하고 있다. “2012년부터 다니기 시작했어요. 평택에서 컴퓨터 선생님으로 교사생활 33년 하고 나서 서울로 이사왔습니다. 이곳에서 수필창작, 영어회화, 시낭송, 왈츠를 등록해 열심히 다녔어요. 패션학원도 등록해서 다녔어요.” 어렸을 때 꿈 중 하나가 교사였는데 이것은 벌써 이뤘고, 다른 하나는 패션디자이너라고 했다. 교사직을 맡고 있을 때도 꿈을 이루기 위해 평택과 서울을 오가며 패션 특강을 들었다고. 한국폴리텍대학교에서 패션디자인 야간과정을 6개월 정도 밟기도 했다. 순간마다 패션의 길로 접어들까 고민한 적도 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대신 패션 공부했던 경험을 실생활에서 활용하고 있다. 박애란 동년기자가 입고 두르고 가지고 다니는 것 대부분이 스스로 리폼한 제품이다. “어렸을 때 바느질을 좋아했어요. 내 옷은 내가 리폼하고요. 이 가방도 다섯 번도 넘게 끈 부분을 갈았어요. 레이스를 손바느질로 덧대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명품가방을 만든 거지요.” 퇴직하고 난 이후에 더욱더 열심히 사는 박애란 동년기자다. “생각을 바꿔야 해요. 퇴직 전은 전반생, 그 후는 여생이 아니라 후반생. 전반생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살았다면 후반생에는 의무감에서 벗어나도 괜찮아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면 돼요. 그래서 후반생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거죠. 내가 또 몸치이기는 한데 왈츠도 배우고 탱고 동호회도 나가고 있어요. 발레도 하고요. 이 나이에 몸이 잘 늘어나겠어요? 왜 내가 내 돈 들이면서 이 고생하나 하다가도 우아한 발레 음악 들으면 엄청 행복해집니다.(웃음)” 인터뷰 바로 전날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 제작하는 영상 프로그램 촬영을 다른 동년기자들과 마친 상태였다. 이후 의학 관련 영상에서는 리포터로도 활약했다. 검증된 끼와 재능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간판 리포터(?)로 벌써부터 점쳐졌던 인물이 박애란 동년기자였다. “아무래도 시작이다 보니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이 생기더라고요. 안 그래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도 영상을 시도할 만한데?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시작하더라고요. 동년기자들이 대단한 내공을 가진 시니어잖아요. 내 생각이 그대로 옮겨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대한 애정은 이뿐만이 아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품격 있는 시니어라면 반드시 봐야 하는 잡지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며 홍보 멘트를 꼭 날린다. 우리 잡지에 처음 자신의 기사가 실렸을 때는 너무 좋아서 기절할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생각해보니 당시 기자 앞에서도 본인 기사가 실린 잡지를 열어보고는 방방 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웃는 얼굴에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슬프고 착한 아이, 애란을 만나다 “내 패션이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지? 왜 이런지 물어봐주실래요?” 한껏 하늘을 날 것처럼 깃털 같은 얘기를 이어가다가 갑자기 기자에게 질문했다. 별 얘기 아니려니 하고 원하는 질문을 던졌다. 뜻밖의 소재로 이야기가 바뀌었다. “옷을 이렇게 입게 된 건 언니 때문이었어요. 어린 시절 아빠가 언니만 사랑해줬어요. 언니가 아버지를 닮았거든요. 한번은 언니랑 싸우는데 아빠가 싸우지 말라고 우리를 다그치다 저랑 언니를 톱자루로 엉덩이를 한 대씩 때렸어요. 정말 너무너무 아팠어. 그때 든 생각은 ‘언니도 아프게 때렸을까?’ 였어요. 나도 사랑받고 싶었어요.” 이때의 기억은 말 그대로 트라우마(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남아 있었다. 똑같이 때렸을 거란 기자의 말에 “아니, 아닌 거 같아요”라고 맞받아쳤다. “어느 날 언니가 책을 산다며 아버지한테 용돈을 달라고 했어요. 저한테도 ‘돈이 필요하지 않냐?’고 아버지가 물었어요. 그런데 저는 ‘됐어요. 그동안 제가 모아놓은 돈으로 사면 돼요’라고 했어요. 누가 착한 아이야?” 이 말에 기자는 “아버지가 속으로 많이 상처를 받았을 거 같다”고 답했다. 이에 박애란 동년기자는 그게 왜 상처냐고 되물었다. 아이 입장에서는 ‘돈 잘 모은 행동’을 칭찬받고 싶었겠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용돈을 주겠다’는 말이 일종의 사과였고 화해의 사인이지 않았을까. 박애란 동년기자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너는 도대체 애다운 맛이 없다”며 나무랐다. 화해의 손을 놓아버린 고집 세고 질 줄 모르는 애어른으로 아버지는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그때 박애란 동년기자가 아버지한테 “저도 책이 사고 싶어요, 돈 주세요”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아버지는 분명 화해를 표했던 것이라고 꼭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얘기하고 싶다. 어린 시절 언니를 편애하던 아버지 이야기가 끝나고 나니 초등학교 시절 너무 예뻐서 한 치도 따라잡을 수 없었던 두 친구 이야기로 흘렀다. 외모 콤플렉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선생님께 예쁘게 보이기 위해 길에서 주웠던 군번줄을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학교에 갔던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려줬다. 아버지에게 거부당한 사랑은 선생님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사랑으로 표출됐다. 이쁨받기 위해 고운 옷을 골라 입었고, 모자 쓰기를 좋아했다. 말을 하는 내내 박애란 동년기자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아직도 그렇게 서러운 걸까. 밝은 웃음 뒤에 철저하게 감추고 있었던 상처받은 어린 박애란이 바로 눈 앞에서 울고 있었다. 그나마 박애란 동년기자 인생에서 다행인 것은 어린 시절의 아픔을 서둔야학에서 대신 치유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서둔야학은 박애란 동년기자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야학으로 서울대학교 농대 재학생들이 주축이던 곳이다. 작년 말에는 서둔야학당터에서 ‘서둔야학 홈커밍데이’ 행사를 열었는데 본지가 찾아가 탐방 취재를 하기도 했다. 선생님 모두 착한 아이로서 박애란 동년기자를 인정해주었고 예뻐해줬다. 훗날 박애란 동년기자의 교사 꿈을 이루게 해준 놀라운 곳도 바로 서둔야학이다. 박애란 동년기자가 울컥할 때 주문처럼 되뇌는 마법과도 같은 말이 있다. “울면 안 돼, 짜장면은 돼!” 세상의 모든 낭만적이고, 슬프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순간에 박애란 동년기자는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아픔을 덮어주는 이불과도 같은 말. 이제는 좀 따뜻한 마음으로 사그라지고 아물고 용서할 수는 없을까. 백설공주처럼 예쁘게 안녕 “큰일날 뻔했어. 이 좋은 세상 못 보고 이생을 하직할 뻔했잖아.(웃음)” 상황 불문 눈물, 콧물 짜며 소녀감성 폭발하는 박애란 동년기자. 세상을 비관하고 꽃다운 나이에 자살을 시도했던 일화도 꽤 오랜 시간 털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야학에서 공부를 하고 나니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결국 선택한 곳은 대한방직이었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책에 빠져 있는데 현실은 공장이잖아요. 숨이 턱턱 막혔어요. 내 방에 공주들 사진을 붙여놓으면 아버지는 그런 것을 벽에 붙이면 귀신 나온다며 떼어버리라고 그러셨고요.” 이러다 평생 여공으로 살 것 같았다. 그러느니 죽자. 수면제가 가장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을 듣고 수면제를 사다 모았다. 사랑으로 감싸준 서둔야학 선생님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헝겊으로 꽃을 만들었다. 죽음 초읽기에 들어갔다. “1968년도 5월 15일에 야학당에 가서 스승의 날 꽃이라며 선생님들 가슴에 달아드렸어요. 정말 눈물을 꾹 참고요. 내 나이 열여덟 살이었어요.” 죽을 때 죽더라도 예쁘게 죽겠다는 생각에 하늘색 브라우스에 스커트를 입고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입 안에 수면제를 털어넣었다. 천운이었을까, 일어나보니 하늘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막 우시더라고요. 그래도 아버지가 고와보이지 않았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 맞았던 사건 이후로 아버지한테 사랑받기를 포기했어요. 무엇보다 아버지는 가족들 앞에 무력했습니다. 그땐 절망이었습니다.” 기운을 차리고 야학당으로 가서 그곳에 계신 대학생 선생님들에게 자신의 자살소동과 관련한 얘기를 했다고. “그때 번뜩 정신을 차렸어요. 선생님이 제 얘기를 듣고 놀라기도 했어요. 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누가 너 죽은 모습을 보고 아! 아름답다’ 하겠냐고. 백설공주를 본 왕자는 아름답다고 외쳤는데. 암튼 그때 제 생각에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죽으려 했던 것이 너무 낭만적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반전은 죽었으면 큰일날 뻔했어. 지금 사는 게 너무 재밌거든. 요즘 생각하면 죽기 정말 아까워요.” 여직공, 여교사 되다 “되게 힘들게 살긴 했네요. 고비, 고비. 길고긴 고비. 내가 산전, 수전, 지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이에요. 처음에는 수원에서 딸기를 땄어요. 그다음에 버스회사 사환을 했어. 방직공장에 들어갔어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일반직으로 이십대 때 근무했어요. 그다음에는 타자학원 강사로도 일했고요. 그리고 결국 스물아홉 살에 중등교사자격시험에 합격했어요. 이후에 공립학교 임용고시에 붙어서 선생님으로 33년 살았잖아요. 교사자격증을 손에 쥐었을 때 눈물이 강물이 되도록 울었어요.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말씀드렸는데 엄마가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서울대학교 농대에서 일할 당시 선생님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농대 학장은 유독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우리 여 선생님 오셨네”라고 하셨다. “일반직 여직원이 80명이 넘는데 저한테만요. 내가 주장하고 싶은 건 꿈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제가 학교와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제게 학교로 가는 길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트라우마를 조금씩 치유하고 어릴 적 자신과 타협하며 매일 조금씩 나아가며 살아가는 박애란 동년기자는 화려하게 보이는 일은 물론이고 매일 공부하며 사는 하루가 행복하다고 했다. 현재는 문화원에서 다양한 공부를 하는 것 이외에도 방송통신대학교에서 미디어영상학과를 전공하고 있다. 지금까지 농학과, 국어국문학과, 가정학과와 문화교양학과에 이어 미디어영상학과까지 5번째 입학이다. “우리 집 TV는 방송대 채널에 고정돼 있어요. 예능프로그램은 볼 생각해본 적 없고 클래식 음악 채널이나 다큐채널을 틀어놓아요.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인 거 같아요.” 압구정 날라리는 폼생폼사? 인터뷰도 하기 전에 이런 제목이 어떨까 하고 물어온 박애란 동년기자. 저 느낌이 본인 캐릭터라고 밝게 웃는다. 글쎄 눈물의 근원과 굴곡진 인생 얘기를 듣고 나니 그녀가 가볍게 폼생폼사로 살아간다는 느낌은 없다. 오히려 마감할 뻔했던 삶을 치유하고 보듬으며 매일을 기똥차게 열심히 사는 시니어, 내면에서 흐르는 진정한 멋을 가진 여인으로 느껴졌다. 앞으로 더 깊고 고운 아름다움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빛내는 동년기자로 함께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 2018-09-1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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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가 하석 박원규 제자 모임 ‘겸수회(兼修會)’
- 오랜 세월 붓을 들어 글을 쓰고 연구하다 보니 따르는 이들이 생겼다. 스스로를 제자라 칭했다. 그리고 스승을 따라 정진했다.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서로 의지해 돕는 일이 생겨났다. 눈빛 한 번에 손발 착착 맞는 환상적인 어울림으로 함께 익어간다. 사제지간 정이 쌓일수록 서로가 내는 향기는 깊고, 우정은 돈독하다. 일생일대 대업(?)을 마무리하고 오순도순 나들이 간다는 서예가 하석 박원규와 그의 제자 모임인 겸수회를 따라가 보았다. 마음 따뜻한 사람들의 소풍 길에는 기품 넘치는 특별함이 있었다. 何石이 아닌 兼修會가 주인공입니다 6월 초 화창했던 토요일 이른 아침,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주차장. 대형 관광버스 한 대가 겸수회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5월 말, 예술의전당 한국서예박물관에서 있었던 하석 박원규(이하 하석) 선생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전’이 잘 마무리된 것을 축하하는 여행이었다. 하석 선생이 작업한 ‘부모은중경’의 실제 소장자이자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지원한 석주미술관 류성우 관장이 마련한 자리였다. 지금까지 노고를 아끼지 않은 하석 선생은 물론, 그 옆에서 그림자처럼 따라준 제자들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을 전하는 뜻이라고 했다. 겸수회원들은 이날 광주시립박물관 서예전 ‘예결금란(藝結金蘭)’을 관람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이어 류성우 관장이 20년 넘게 조성 중인 대단위 문화 공원 ‘청사지향(靑思之鄕:영원한 청춘의 고향)’으로 가서 맛있는 요리와 공연을 즐겼다. ‘겸손함과 배움을 아울러 닦는 모임’이라는 뜻의 겸수회(兼修會)는 서두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서예가 하석 선생을 따르는 제자 모임이다. 하석 선생의 작업실인 석곡실에 모여 글을 배우고 익힌다. 지역도 세대도 성별도 직업도 너무나 각양각색인 하석 선생의 제자들. 제자라지만 그들 또한 누군가에게는 대 스승이기도 하다. 실로 색채 강한 무림고수 모임. 그럼에도 ‘겸수회’란 이름으로 모이는 순간 채도를 낮추고 묵색으로 모여 어우러짐을 즐긴다. 겸수회는 12년 전인 2006년에 생겨났다. 하석 선생이 붓을 잡은 지 55년이 됐다는데 너무나 늦은 출발이다. 하석 선생은 애초부터 본인을 중심으로 한 제자 모임 자체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작은 모임을 만들면 하석 선생은 모임 이름을 지어주는 정도였다. 스승의 이름이 높아질수록 문하의 의미 또한 커졌다. 겸수회 총무 배효룡 씨는 겸수회 조직 배경에는 일종의 압박(?)과 필요에 의한 떠밀림이 있었다고 말했다. “서예가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 선생의 제자 모임인 연우회 때문이었어요. 2006년에 우리 서단의 대표적인 스승과 문하, 문파가 모여서 합동 사대문파 사문전을 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석 선생님은 제자 모임이 없으니까 연우회 임원진이 당황한 거죠. ‘도대체 하석 선생님 제자와는 어떻게 연락을 하냐!’, ‘하석 선생도 전체 제자 모임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답니다. 그 바람에 겸수회가 생겨났죠. 2006년에 겸수회 창립전시 도록에 보면 왜 우리가 겸수회를 만들 수밖에 없었나가 적혀 있습니다.(웃음)” 당시 사문전이 없고 다른 서예가 제자의 요청이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모임이란 뜻이다. 조직을 만들어 세력을 키우는 데 별다른 흥미가 없었던 하석 선생의 뜻도 품성을 잘 알기에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겸수회는 생기고 난 뒤 다양한 면에서 하석 선생을 돕는 전문 지원단이 됐다. 느긋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전시 달인들 하석 선생이 6년의 공을 들여 쓴 ‘부모은중경’은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친 불교 경전 중 하나다. 이를 폭 145cm, 높이 340cm의 한지 여든한 장에 광개토대왕비에 쓰인 서체로 수를 놓듯 써내려갔다. 전시회 당시 눈에 잘 띄지 않는 높은 벽까지 이용해 작품을 걸어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후세에 역사적으로 남을 대작을 꿈꾸었고 길고 긴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진행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하석 선생은 ‘부모은중경’ 여든한 장 중 마지막 장을 일종의 영화 엔딩 크레디트처럼 장식했다. 겸수회 제자의 활약도 여기에 기록했다. 이번뿐만 아니라 행사 때마다 도록 제작, 홍보, 현장 지원 등을 겸수회원이 도맡는다.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고 나서거나 서두르지 않고 잔잔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바로 겸수회다. 전시회가 끝나고 나서는 아무 일 없었단 듯 벼루 앞에 앉아 먹을 갈고, 종이 위에 한 자 또 한 자 글을 써나가는 사람들. 우리 시대의 잊힐지 모르는 것을 지키고 앉아 하루하루를 산다. 평범한 듯 특별한 겸수회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 2018-07-03 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