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꾸준히 운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때 좋은 계절이 오면 새벽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곤 했다. 저녁에는 직장에서 끝나는 시간도 일정하지 않고 회식에 모임이 있어 좀처럼 규칙적인 운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에 30분이라도 꾸준히 하자고 새벽에 일어나 뛰기도 하고 걷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지속하기엔 날씨가 변수였다. 비가 오면 나갈 수 없고, 한겨울 눈보라가 치면 꼼짝을 할 수 없었다. 몇 해 전 중국 북경여행을 했을 때의 일이다. 북경 시내를 관람하고 중국이 자랑하는 서태후의 별장인 이화원을 방문했다. 이곳에는 바다라고 느껴질 만큼 큰호수가 자리 잡고 있는데 주변으로 700m가 넘는 산책로가 있다. 서태후가 산책하던 코스로 비를 피하고자 지붕이 만들어졌고 천정에는 칸마다 서유기를 비롯하여 각각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다. 호화로운 모습에 입이 딱 벌어진다. 서태후가 걷던 길을 따라 걷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 화려한 산책로도 비바람이 불거나 눈보라가 치면 걸을 수 없는 길이 아닌가? 그때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계단 운동이었다.
계절과 관계없이 전천후로 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계단이었다. 중국 여행을 마치고 곧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간단한 차림을 하고 계단으로 나간다. 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무릎에 무리가 있다 하니 내려갈 때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고 올라갈 때만 계단을 오른다. 그리하여 시작한 운동이 벌써 3년이 넘었다. 비록 천정에 예술작품은 없지만, 서태후도 하지 못한 운동을 계절과 관계없이 매일 아침 할 수 있으니 이런 호사가 어디 있을까?
몇 해 전 종합검진하면서 골다공증 검사를 했는데 왠지 뼈에서 칼슘성분이 빠져나가 꾸준히 운동하고 칼슘 약을 먹어야 한다는 진단이 내려졌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운동할 곳을 찾던 중 서태후의 이화원을 방문하고 “그래 바로 이거야!”하고 무릎을 쳤던 것이 동기가 되었다. 계단 운동의 여러 가지 장점도 알게 됐다.
- 서태후의 산책로처럼 평지가 아니고 계단이어서 운동량이 더 많다
- 눈보라나 비바람이 불어도 전혀 방해되지 않는다.
- 여름 폭염이나 겨울 매서운 추위에도 무관하다.
- 있는 시설을 이용하니 경제적이고 아무 때나 운동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전천후 운동 장소로 손색이 없는 계단 운동이다. 힘들고 귀찮을 때는 서태후의 이화원을 생각한다. ‘아무리 돈과 권력이 많아 산책로를 지어 운동했지만, 이렇게 전천후로 운동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는 내 주위에 있는 여기가 아닐까?’
제주에서 만난 오름매니저 변현철(邊賢喆·65) 씨는 제주도에서 태어났지만,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격언을 따랐던 도민들 중 한 명이었다. 번듯한 대기업을 다니다 IMF의 직격탄을 맞고 “내 사업을 해보겠다”며 회사를 나왔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여행업. “보헤미안 기질이 있어 실컷 세계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싶었다”고 변 씨는 말한다. 왕년의 여행 전문가가 오름매니저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셈이다. 199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여행 시장은 지금의 대형 여행사 중심이 아니라 중소 여행사들이 각자 여행 상품을 개발해 시장에 내놓는 분위기였다. 소원대로 그는 전 세계 80여 개국을 누볐다. 그의 회사는 스무 명이 넘는 직원들로 북적였고, 대한관광여행진흥협회에서 임원도 맡았다. 여행 업계에서 다들 알 만한 인물이 된 셈이다.
이 정도면 됐다 싶었을 때 후배에게 회사를 넘기고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하면서 그의 고민은 다시 시작됐다. 무엇을 할 것인가?
“맨 처음 손을 댄 것은 문화예술교육사였어요. 시민들의 문화예술 고취를 위해 만들어진 직종이었는데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았죠. 강사 수에 비해 강의를 할 기회가 적었어요. 그러다 거주하던 성동구의 마을공통체 지원센터에서 일하게 되면서 지역사회 사업의 중요성이나 사회적 경제에 대해 눈을 뜨게 됐죠.”
그가 고향인 제주에 내려오게 된 건 2014년. 노모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기왕 시작한 제주생활, 고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문화관광형시장육성사업단 공모에 합격해 서울에서의 경험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오름과 만나게 됐다.
“여행 사업을 할 때부터 각국의 멋진 관광지를 접하면서 자연과 함께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생각했죠. 어느 날 오름을 보면서 이거다 싶었죠. 당장 제주대학교로 달려가 오름해설사 과정을 수료했어요.”
오름해설사란 기존 오름매니저의 역할에 숲해설사, 문화해설사 기능까지 더해진 과정. 6개월씩 기본 과정과 심화 과정을 거쳐야 수료할 수 있다. 그는 이 수업을 통해 얻은 지식이 오름매니저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올 초 오름매니저가 됐다.
뜨거웠던 올여름 그가 활동했던 곳은 함덕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제주시 조천읍의 서우봉 오름이다. “바다와 산을 둘 다 즐길 수 있어 관광객이 많이 올 것 같아 골랐다”고 그는 말한다.
“관광객들에게 제주 이야기를 전할 때 가장 보람이 크다”는 그는, “좀 더 많은 오름에 오름매니저들이 배치되어 여기 오는 분들에게 제주의 아름다움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후를 내가 태어날 곳 혹은 평생 살았던 고향에서 봉사하며 보내는 것은 아마 많은 이가 꿈꾸는 여생의 모습일 것이다. 그 장소가 경탄할 만한 아름다운 곳이라면 금상첨화이리라. 여기 전국의 시니어가 부러워할 만한 직업을 갖고 고향을 위해 애쓰는 이들이 있다. 다소 낯선 명칭인 ‘오름매니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오름은 형성 방식에 따라 세분화해 구분하기도 하지만 간단히 정의하면 제주도 한라산을 중심으로 산록에서 해안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는 작은 화산체를 의미한다. 모양에 따라 넒은 평지 같기도 하고, 작은 언덕이나 산 같기도 하지만, 제주도민들은 이것들을 오름이라 부른다. 화산체라고 이야기하면 무언가 특별하고 진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제주에는 크고 작은 오름이 368개나 존재한다. 제주도민들이 오름을 생활 터전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이유다.
제주에 오름만 368개
문제는 이런 오름이 제주 도처에 존재하고 관광자원으로서 많은 역할을 하고 있지만, 관리할 수 있는 인력이 마땅치 않아 대부분 방치되고 있다는 것.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것이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다.
JDC 측은 지난해 말 노사발전재단 제주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와 함께 신중년의 사회 경험과 재능을 일자리로 잇는 ‘이음 일자리 사업’을 위한 새로운 직종을 찾고 있었다. 도내의 중장년이 제주도 발전에 기여하면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일자리 창출에 나섰던 것. JDC 관계자는 “그러다 오름을 보호하기 위해 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어 검토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이음 일자리 사업을 통해 탄생한 직종은 오름매니저를 비롯해 관광지를 중심으로 콘서트를 펼치는 버스킹 공연단, 주요 도서관에서 활동하는 사서, 푸드메신저, 일자리 지원단 등의 직종도 선발됐다. 이 과정을 통해 2월에 발대식이 이루어졌고 오름매니저 160명을 포함해 총 250명의 중장년이 새 일터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JDC 임석환 주임은 “제주 전역에 퍼져 있는 오름 중 관광객의 방문이 잦은 곳을 중심으로 관리 방안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직종이 바로 오름매니저”라고 설명하면서 “관광자원을 개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제주도가 갖고 있는 천혜의 자원인 오름을 아끼고 보존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또 숲해설사나 문화관광해설사처럼 오름의 역사적 배경이나 오름의 자연적 특징을 설명해줄 인력이 요원했다. 오름을 찾는 관광객은 해마다 증가하는데, 여행의 재미를 더해줄 스토리 텔링도 부족했다. 이로 인해 오름매니저에게 주어진 역할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됐다. 오름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역사적, 자연적 배경을 설명하는 역할이 그것이다.
환경보호와 해설이 주임무
오름매니저가 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된다. 만 50세에서 70세의 나이에, 제주도에 거주 중인 주민이면 된다. 지원자들은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이 가장 많으며 선발된 인원 중 최고령자는 만 70세를 꽉 채운 주민이란다. 이렇게 올 초 선발된 1기 오름매니저들은 2주간의 교육을 받았다. 교육은 오름 내 쓰레기 수거 등 환경관리를 위한 실무적인 것부터, 진드기 감염이나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교육, 오름의 역사적 배경 소개까지 다양하게 이뤄졌다.
한 오름매니저는 “아무래도 고령의 참가자가 많다 보니 오름 관리 과정에서 사고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교육이 많았다”고 말하면서 “평생 제주에 살면서도 몰랐던 오름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들 오름매니저는 3월부터 8월까지 총 6개월간 18개 오름을 관리했다. 새별오름이나 거문오름, 송악산 등 관광객이 많이 찾는 유명 오름을 중심으로 오름매니저들이 현장을 누볐다. 단순히 현장관리만 한 것이 아니라 관광객 대상 캠페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올여름 폭염이 한반도를 강타하면서 오름매니저들도 비상이 걸렸다. 더위가 이어져도 관광객들은 찾아오지만 중장년의 건강에 폭염은 치명적이기 때문이었다. 오름매니저가 2인 1조로 근무하는 이유에는 이러한 고려도 있다.
오름매니저의 근무 방식은 2인 1조로 배정된 오름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 근무하는 형태다. 오름매니저를 위한 유니폼과 명함도 지급되고, 겨울을 대비한 추가 유니폼도 준비 중이다. 근무시간은 매주 12시간에서 14시간 정도다. 시급으로 따지면 시간당 약 9500원을 받는다. 월급으로 계산하면 매달 약 45만 원이다. 업무강도 등을 고려하면 적은 돈은 아니라고 오름매니저들은 말한다.
1차사업 진행에 대한 정확한 결과 보고서는 아직 작성 중이지만, 오름매니저에 대한 기관과 참여자의 평가는 전체적으로 긍정적이다. 오름매니저들이 파견된 오름의 경우 자연환경이 눈에 띄게 개선됐다는 의견이 많다.
참여자 96%가 활동에 만족
JDC는 1차사업 종료 후 6개월간 참여했던 오름매니저를 대상으로 만족도를 조사했다. 전체 인원 중 96%는 “활동에 만족한다”고 답했으며, 99.6%가 “2차사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희망의 뜻을 밝혔다.
JDC는 9월부터 시작되는 2차사업을 위해 추가 오름매니저 선발을 진행했다. 9월 12일 마감된 추가 오름매니저 선발에는 29명을 뽑는데 127명이 지원했다. 무려 4.4대 1의 경쟁률. 1차 때는 오름매니저라는 직종이 생소해 경쟁이 심하지 않았지만, 사업 진행을 통해 중장년에게 좋은 일자리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인원이 몰렸다. “매일 산에 오르니 건강에도 좋다”는 소문까지 났다.
추가 인원이 합류한 2차사업에는 총 189명의 오름매니저가 활동하게 되며, 관리 오름도 2개소가 늘어 총 20개 오름에서 활약할 예정이다. 인원 확대와 함께 제공 서비스 확충도 고려 중이다. 현재는 관광객이 오름매니저 해설을 듣고 싶어도 사전예약이 불가능한 상태여서, 이 부분의 개선도 준비 중이라고 JDC 관계자는 귀띔한다.
오름매니저 활동에 참가자들이 만족하는 데에는 일자리, 보람과 함께 제주도민의 정서 속에서 오름이 차지하는 의미도 간과할 수 없다. 제주 토박이라 자처했던 한 오름매니저는 “제주도 사람에게 오름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삶 속에서 늘 함께했던 터전”이라고 소개하면서 “인생에서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포함한 일상을 오름 위에서 해왔기 때문에 오름을 지키고 보살핀다는 것은 단순한 일자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물론 오름매니저의 활동이 100% 이상적인 것은 아니다. 일부 참여자들은 관광지에서 오름매니저들의 대기 공간이 없어 어려움이 있고, 오름매니저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문제점을 논의할 수 있는 커뮤니티 형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오름매니저의 활동은 제도적으로도 상징성을 갖는다. 중장년 일자리를 마련하는 데 있어 지자체의 자연환경을 살리면서, 관광자원을 활성화하는 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참가자들은 “단순한 청소나 관리 역할이었다면 보람이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적절한 교육을 통해 지역 정보까지 제공할 수 있는 역할까지 부여함으로써 참가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오름매니저에게 보람과 일자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한 셈이다. 국내 전체 인구의 14%에 육박하는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후 취업 시장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일자리 마련을 위한 정부와 지자체가 골머리를 썩고 있는 지금, 오름매니저가 제시하는 긍정적인 효과는 참고할 만한 것으로 보인다.
부모는 주는 존재, 자식은 받는 존재 김미나 동년기자
‘내 몫은 얼마나 될까’, ‘언제쯤 주실까?’
그러나 짜다는 소리 들으며 부를 축적하신 부모님께 성화를 부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투잡을 뛰고 하얀 밤 지새우며 일했지만, 누구는 연봉 3억이란 말에 손을 떨궜다. 언젠가는 주시겠지 하는 느긋한 마음도 아이들이 자라고 사교육에 등골이 휠 때마다 절심함으로 밀려왔다.
그렇게 기다림에 지쳐가던 사촌 언니의 넋두리에 드디어 종지부가 찍혔다. 부모 도움 없이 성공하는 일이 정말 힘든 세상이라며, 내 자식 뒤처질까 증여를 해주셨다는 것이다. 환한 목소리로 곧 이사를 해야 한다며 전화를 끊는 언니는, 가뿐하게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꽃밭으로 들어갔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으로 아들 유학도 보냈다. 만만치 않은 등록금 폭탄에도 한숨이 터지지 않았다. 중년 이후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 노후자금 끌어다 자녀 유학비 대는 것이라지만 언니 마음은 늘 아들에게로 향했다. 남편과 부딪혀도 위로를 해주는 건 아들이고, 엄마 스테이크를 한입 크기로 잘라서 먹기 좋은 쪽에 놓아주는 사람도 아들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 가진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자녀들은 나만큼 살기 어려울 것이라는 현실에 직면하니 더 안쓰러웠다. 부모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는 자조가 씁쓸해도, 받은 것이 있으니 주기가 한결 수월했다. 인생에서 돈이 다는 아니지만 돈만 한 것이 없고 그 맛을 봤으니 어쩌랴.
유학을 마치고 모두들 어렵다는 취업 허들도 가뿐히 넘은 아들이 여자 친구를 데려왔다. 둘이 결혼 말이 오간 모양인데 외동딸인 여자 친구 앞으로 번듯한 아파트가 있다고 했다. 게다가 그 집에서 신혼살림을 하기로 했다니 돌아서 빙그레 웃었다. 그러던 중 문제가 생겼다. 신혼살림을 하려던 그 집이 살고 있는 세입자와 이사 날짜가 맞지 않아 입주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쌉싸래한 기분을 내색할 수도 없어 아들 가진 쪽에서 적잖은 전세금을 내줬다. 얼마 후 며느리의 임신 소식에 그간의 속상함은 어디론가 내빼고 애정이 솟았다.
연이은 한파가 휘몰아쳐 뼈마디가 시큰거리고 마음까지 곤두박질치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짧은 추위에도 내의를 챙겨주던 아들이 전화를 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장장한 대화 중에 엄마의 단락은 없었다. 장모님께서, 매서운 추위에 사위 감기라도 걸릴까 두툼한 패딩 사 입으라 50만 원을 보내셨다는 감동 소감만이 물결쳤다. 엄마도 거기에 공감하라는 메시지를 폭풍 전송하고 있는 남자가 아들이었다. 사돈댁 지원에 제스처를 취해야 할 것 같아 상응하는 임신 축하금을 보냈다. 아들은 오래된 집이라 아기 키우기에 춥고 불편해 이사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흘렸다.
찌르르하면서 멍함이 파고들었다. 아들은 잊고 있나보다. 막대한 유학비와 조건 없는 억대의 전세자금이 흘러 들어간 벅찬 사정을. 그때 감사 표현을 지금 감동의 조각만큼이라도 했던가. 제 돈 가져가는 것처럼 당당했지. 크고 작은 결제를 할 때도 머뭇거림 없었지. 주저 없이 카드를 썼지. 손 벌려 받은 것이니 그렇게 써도 되는 돈이라 생각했겠지. 부모가 영원한 봉이냐고 말하려다 사촌 언니 스스로 말문을 닫았다. 마치 자기가 들어야 할 말처럼 뜨끔해했다. 애써 모은 내 돈 쓸 때는 가슴이 벌렁거리고, 부모님이 고생하며 번 돈 쓸 때는 아무렇지 않았다. 어느 날 뚝 떨어진 돈, 쓰는 재미가 쏠쏠했고 잘 먹고 잘 사니 어깨가 가벼웠다.
울적한 마음 달래보려 남편 앞세워 여행을 기획했다. 그런 사촌 언니에게 아들은 말했다. 3~4년 후에 아이 크면 그때 함께 가자고. “어이쿠, 이게 바로 친구들이 뜯어말렸던 ‘육아 도우미’ 패키지 여행이로구나.” 손주와 가는 여행에 따라나섰다가는, 독박 육아에 여행 경비 떠맡을 돈줄로 내몰려 여행은커녕 스트레스만 뒤집어쓰고 돌아오게 된다 하지 않았던가. 사촌 언니는 소리 소문 없이 빠르게 여행을 떠났다. 답 없는 질문을 변명으로 툭 던지면서.
애초에 부모는 주는 존재, 자식은 받는 존재로 태어난 것일까.
자연으로 돌려주고 싶은 유산 백외섭 동년기자
지난 여름휴가 때 지인으로부터 제주도 초대를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자산관리사인 내가 이번 그의 여행에 동행해 상속재산 ‘제주 땅’을 찾고 그 활용 방안 자문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휴가를 겸해서 떠난 상속재산 찾기 여행. 이른 아침 거북바위에서 바라보는 제주도의 풍광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는 자신이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에 그 땅이 있을 것이라 했다. 모친에게 상속등기를 해놓은 땅인데, 성산일출봉에서 가깝다는 ‘제주 땅’을 아직 본 일은 없다 했다. 아직 젊은 그는 재능기부 창업상담 활동을 하면서 나와 만났고 가끔 산행을 같이하면서 교류하는 사이다.
상속은 멀리 그의 외조부로부터 시작됐다. 옛날에는 상속지분이 지금처럼 ‘남녀평등’하지 않았다. 아들과 딸, 호주상속자 차별이 심했다. 제사를 모시는 장자에게는 듬뿍 주고, 출가한 딸의 몫은 거의 없었다.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도 오늘날처럼 상속분쟁으로 패가망신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의 외조부는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두었다. 집과 선산, 문전옥답은 아들 몫이 될 터였다. 외조부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세 딸도 생각했다. 농토의 일부를 정리한 뒤 현금을 마련해 딸들에게도 재산을 똑같이 나눠줬다. 이는 상속과 구분하기 어려운 증여였다. 그의 어머니와 이모들은 생각지도 않은 돈을 받고 생활 여건에 따라 긴요하게 사용했다. 어렸을 때 그가 부모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큰 회사 제주지사에 근무했던 그의 부친은 장인에게서 받은 돈이므로 땅에 묻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장래에 집 지을 생각으로 적당한 곳의 임야를 샀다. 개발전망이나 투자가치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던 옛날이야기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서울로 발령이 났고, 그 후로는 제주도에서 살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그의 가족은 그 땅을 보지도 않았고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성산일출봉이 바라보이는 곳인데도 누구 하나 찾는 사람도 없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그 땅에 있었다. 우선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분석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는 창작예술 사업가였는데,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차를 운전하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뭔가 창작소재를 찾고 싶은 눈치였다.
얼마 후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던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주소대로 안내를 받은 곳은 해안의 반듯한 도로와는 전혀 다른 비포장도로였다. 한참 더 들어가서야 차가 멈췄다. 우리가 찾는 ‘임야’였다.
하지만 도로보다 조금 낮게 야트막한 늪이 펼쳐져 있었다. 물오리 몇 마리가 수영을 즐길 정도로 물이 있었다. 상당한 넓이의 임야 중 절반이 그랬다. 경사진 땅으로 가려면 늪에 배를 띄워야 할 형편이었다. 이른바 맹지였다.
“허허! 이게 뭐야?”
그의 헛웃음이 주변으로 메아리쳤다.
가까운 곳에 몇 가구가 사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마침 ‘토박이 부동산’ 어르신을 만났다. “옛날에는 모두 땅이었는데, 웬일인지 지반이 점점 내려앉아 물이 고였다”고 설명해줬다. 토지로 활용하려면 늪을 메워야 하는데 지반이 약한 제주에서는 장래를 기약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일출봉 앞 백사장에서 우린 맥주를 들고 마주 앉았다. 낮에 봤던 물오리 몇 마리가 눈에 어른거렸다. 인공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풍경, 물오리가 사는 늪이 좋았다. 그러니 그 ‘제주 땅’을 자연으로 돌려주자!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공평한 나눔에 대한 생각 박종섭 동년기자
공평한 나눔이란 어떤 것일까? 어느 집이든 이런 물음을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크든 작든 돈과 연관이 되면 하나의 답을 내기가 어렵다. 그리고 상속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 걸려 있다. 핏줄을 나눈 형제도 있고 배우자도 있다. 아무리 우애가 좋은 형제라도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산 때문에 사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겪지 않았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6남매를 키우신 우리 부모님은 부지런히 일해 돈이 생길 때마다 근처의 땅을 사들이셨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시골에서는 논마지기깨나 있는 집안이 된 것이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부모님이 땅을 살 때마다 명의를 자식들 앞으로 하나둘 해놓으셨다는 걸 알게 됐다. 집 앞 논은 큰아들, 고개 넘어 서 마지기는 작은아들, 그리고 주산골 밭 한 뙈기는 막내아들, 이런 식이었다. 그때는 그게 별거 아닌 것 같았고 큰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그 유산이 자식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게 됐다. 무엇보다 자식들이 서로 마음 상하지 않고 감사해하며 부모님 제사를 지낼 수 있어 좋았다.
나는 아들에게 부모님이 물려주신 땅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이 땅은 팔지 않고 네게 물려줄 거다. 그러니 너도 팔지 말고 훗날 네 아들에게 물려줘라. 저 건너 밭은 네 사촌형 밭이니 사촌끼리도 잘 지내도록 하라.”
내 처가도 형제간 우애가 정말 좋다. 부모님이 아직 생존해 계셔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제들은 시골에 자주 모여 즐겁게 지냈다. 가을이면 텃밭의 배추를 뽑아 온 가족들이 모여 김치를 담그고 맛있는 보쌈김치도 만들어 두툼한 돼지고기와 막걸리를 곁들이며 축제를 열었다. 남은 텃밭에는 형제들이 나눠 먹자고 건강에 좋다는 ‘아로니아’ 나무를 심었다. 형제들이 모여 거름 주고 김매고, 열매가 까맣게 익으면 함께 수확을 하곤 했다. 어느 가족 못지않게 형제들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작년에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다. 옛날 어른이라 그런지 덩치가 가장 큰 뒷산은 장남에게 벌써 명의이전을 해놓으셨다. 나머지 논밭 그리고 집이 있는 대지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있다. 분배 과정에서 서운함이 있었고 결국 형제들은 옛날 같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 물론 법이 있기는 하지만 형제간 문제는 법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살아 계실 때 어느 정도 정리하시고 가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특별수익’을 챙긴 손윗사람이 먼저 마음을 비우고 아랫사람을 품어야 한다.
공평한 나눔이란 어떤 것일까? 내가 나눠놓고 선택 우선권은 상대에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럴 경우 남의 떡이 커 보이는 상황은 거의 없다.
어떤 나이에는 인간이 만든 문명들을 보며 지식을 키우는 시기가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인간이 만든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그것이 아무리 대작이라 할지라도 별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있는 에너지 없는 에너지를 다 끌어모아 대자연 탐험을 시작한 것은…. 힘든 만큼 더 단단해지고, 땀흘린 만큼 충전이 되는 여행이 바로 트레킹 여행이었다. 알프스의 대자연을 온몸으로 느끼는 1200km의 돌로미티 트레킹! 겨울에는 스키 천국으로, 여름엔 트레킹 천국으로 변신한다. 지구라는 이름의 건축가가 만들어낸 웅장한 조각품에 감탄하는 시간 속으로 떠나보자.
이탈리아가 숨겨놓은 천상의 트레일, 돌로미티 알타비아 넘버원
북부 이탈리아 알프스의 동쪽 끝자락에 솟아오른 바위 산맥 돌로미티(Dolomite)는 해발 3000m 이상의 봉우리를 18개나 품고 있는 웅장한 산악지대로 2009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기묘한 바위 봉우리들과 에메랄드빛 빙하 호수, 울창한 숲과 계곡, 산상화원을 보는 듯 군락을 이룬 야생화가 어우러져 알피니스트들의 요람이자 암벽 등반가들의 성지가 된 돌로미티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군과 이탈리아군이 치열한 접전을 펼친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돌로미티를 가기 위해 베네치아로 들어가 ‘알타비아 넘버원(AV1)’의 관문도시 격인 코르티나담페초에서 짐을 풀었다. 아웃도어 매장과 레스토랑이 아기자기 모여 있는 마을이 너무 청량하고 예뻐서 굳이 어딜 가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마을은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자주 와 머물렀고, 헤밍웨이도 집필활동을 한 곳이라고 했다. 다음 날 드디어 ‘높은 길’이라는 뜻의 ‘알타비아’ 트레킹을 시작했다. 해발 2000~3000m의 고원을 걷는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첫날 오르막길이 계속되는 것을 제외하곤 난이도가 아주 높진 않아서 천천히 음미하며 걸었다.
니체가 사랑하고 르코르뷔지에가 극찬한 아름다움
니체는 돌로미티를 두고 “등산의 기쁨은 정상에 올랐을 때 가장 크다. 그러나 나의 최상의 기쁨은 험악한 산을 기어 올라가는 순간에 있다. 길이 험하면 험할수록 가슴이 뛴다. 인생에서 모든 고난이 자취를 감췄을 때를 생각해보라. 그 이상 삭막한 것이 없으리라”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어떤 이는 다시 내려올 산을 뭐하러 힘들게 오르느냐고 묻지만 인생에서 아무 어려움도 없고 그것을 이겨냈을 때의 희열도 없다면 니체가 말한 대로 삭막하고 의미 없는 삶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계적인 건축가 르코르뷔지에 또한 돌로미티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 건축물이라고 말할 정도로 독보적인 풍광을 지닌 돌로미티는 14좌를 알파인 스타일로 오른, 현존하는 최고의 등반가 라인폴트 매스너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며, 그가 고작 다섯 살일 때 이곳 3000m급 암봉을 올랐다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트레킹을 하다 보면 세 살도 안 된 아이를 목마 태우고 마치 동네 공원 산책하듯 가벼운 차림으로 험준한 산을 오르는 가족들이 있다. 또 주말에 친구들과 그룹을 짜서 걷다 쉬다 하면서 놀이하듯 등반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이곳 사람들에게 알프스 트레킹이나 암벽등반은 마치 우리가 매일 동네 산책을 하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로 보였다.
트레커의 로망, 알타비아 넘버원
히말라야, 로키와 함께 세계 3대 명산에 속하는 알프스 산맥, 그중에서도 돌로미티는 트레킹 코스만 해도 수백 개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3개의 봉우리 “트레치메(Tre Cime)”는 돌로미티를 말할 때 늘 대표 사진으로 등장한다. 가장 높은 치마그란데(Cima Grande) 봉우리의 높이는 무려 3003m에 이른다. 해가 지는 기울기에 따라 갖가지 색으로 변신하는 바위의 장관은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유명 사진작가들로부터 한결같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세체다(Seceda) 봉우리를 비롯한 거대한 암봉들이 압도적 풍광을 선사하는 알타비아 넘버원은 돌로미티에서도 가장 클래식한 트레킹 루트다. 거대한 암봉군 사이를 걸으며 만나게 되는 풍경들은 그동안 수없이 유럽을 들락거렸지만 단 한 번도 체험해보지 못했던 유럽 문화의 진수를 맛보게 해줬다. “여행의 백미는 트레킹”이라는 어느 트레커의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눈이 녹아 싱그러운 빛깔을 뽐내는 알프스 산자락의 맨살은 가는 곳곳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그늘이 많지 않은 돌산이지만 첫날과 마지막 날을 제외하고는 너른 평지를 걷는 코스라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길을 잃기 쉬운 돌로미티 트레킹은 현지 이탈리아 산악 가이드와 함께 했는데 이들의 스틱 사용법이 우리네와 달라 참으로 신기했다. 그가 등산 스틱을 쓰는 모습은 마치 스키를 타는 것처럼 보였다. 이곳 산장 사람들이 겨울이면 스키를 교통수단으로 삼아 이 산장에서 저 산장으로 다닌다고 하니 이해가 되었다. 해가 뜨면 걷기 시작해 다음 산장까지 걷다가 경치 좋은 곳에 자리를 깔고 알프스 품에 안겨 도시락을 먹을 때의 기분을 잊지 못한다. 오후 서너 시가 되면 다음 산장에 도착해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그 막간의 시간에도 산악 가이드는 산장집 어린 아들과 암벽등반을 하러 갔다. 그 모습을 보며 이들에겐 정말이지 산악 스포츠가 밥 먹는 것 같은 일상이구나 싶었다.
산악 가이드는 그늘 하나 없는 길을 긴 등산 바지를 입고 걷는 나를 보더니 왜 반바지를 입지 않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는 풀독이라도 오를까봐 늘 긴 바지를 입었던 나는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도 긴 바지 차림이었던 것이다. 돌로미티는 한국의 산과 다르고 바위산이라 풀독이 오를 일도 없다. 다음 날 반바지를 입었더니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유러피언들은 햇살을 즐긴다. 내 긴 바지가 당연히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림 같은 알프스 산장, 그리고 이탈리아 음식의 진수
돌로미티 트레킹은 겨울이면 스키어들의 성지인 산장과 산장 사이를 걷는 것이다. 눈이 없는 알프스의 아름다움을 이보다 더 잘 느끼는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을 듯하다. 케이블카도 있어 걷기 싫은 곳에선 이용할 수 있다. 눈뜨면 알프스의 압도적인 풍광들 사이를 걷다가 휴게소에서 최고의 이탈리아 코스요리를 먹고, 해가 지면 해발 2000m가 넘는 드라마틱한 풍경 속에 위치한 최고급 전망을 자랑하는 산장에서 잠을 자고 알프스의 일출을 날마다 맞이하는 일은 호사롭다. 이탈리아 음식이라면 피자와 파스타, 후식이라면 고작 카푸치노와 에스프레소만을 떠올린다면 이탈리아 음식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이번 여행에서 알았다. 트레킹 여행이니 다이어트가 좀 될 거라는 희망은 무궁무진 미각을 자극하는 이탈리아 코스요리 앞에서 물 건너 가버렸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정말 많이 먹는다. 보름 동안 매일 맛본 요리의 순서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우선 스프리츠 같은 식전주로 입맛을 예열한다.
② 프리미라는 일종의 전체요리다. 주로 덤플링(완자탕), 굴라시, 라비올리, 야채스프, 마카로니, 파스타 중 선택하는데 양이 메인디시 수준이다.
③ 세콘디 피아티라는 메인 요리를 먹는데 스테이크 종류, 감자 요리, 폴렌타, 스파게티 등이 나왔다.
④ 디저트로 팬케이크, 브라우니, 푸딩, 젤라토(아이스크림)를 먹는다.
⑤ 식후주로 그라파같이 향이 좋은 술이나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트레치메 앞 산장에서 먹었던 라비올리의 맛과 트레킹이 끝나던 날 마지막 산장에서 마신 스프리츠의 황홀함을 잊을 수 없다. 환상적인 풍경을 벗 삼아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이탈리아 정찬의 세계를 느껴보는 일, 전통주 그라파 한 잔에 피로를 풀고 밤이 되면 쏟아지는 별빛 아래 대자연과 하나 되는 일, 모두가 잠든 새벽 알프스 정상에서 고요한 일출을 맞이하는 일. 이것이 바로 알타비아 트레킹의 진수다.
숲으로 들어서자 솔 그늘이 짙다. 부소(扶蘇)란 ‘솔뫼’, 즉 소나무가 많은 산을 일컫는 백제 말이란다. 부소에 산성을 쌓았으니 부소산성이다. 백제 당시에는 사비성이라 불렀다. 산의 높이는 겨우 106m. 낮고 평평하나, 이 야산에 서린 역사가 애달파 수수롭다. 부소산성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백제의 도성(都城). 백제 최후의 비운과 아비규환이 화인(火印)처럼 새겨진 현장. 숲길은 참신하지만 106m 높이로 퇴적된 한(限)과 비애가 비쳐 서글프다.
8월의 지독한 폭염 아래서도 숲은 싱그럽다. 잎잎이 푸른 여름 나무들. 열정처럼, 정념처럼, 눈부시게 환히 너울거리는 저 초록 불꽃들. 매혹될 수밖에.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초록의 사태는 어디까지나 고요해 평화롭다. 지친 마음을 숲길에 부려놓기 적격이다. 번잡하게 날뛰는 마음의 날치를 평온하게 길들여볼 만한 시간이다. 하지만 평온한 시간은 짧게 지난다. 평화로운 시국도 그리 길지 않다.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했던 백제의 국력은 강성했다. 강성해서 평화로웠다. 하지만 종단엔 추락했다.
뭐 볼 게 있다고 부여를 여행하나? 흔히들 하는 야박한 소리가 그렇다. ‘백제문화제’가 열렬히 펼쳐지고, 백제 문화유산을 재현한 ‘백제문화단지’가 웅장한 규모로 조성됐지만 백제 당시의 유적은 놀랍게도 소소하다. 정림사지와 능산리 고분, 궁남지, 테뫼식과 포곡식 산성이 혼합된 부소산성의 흔적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문화강국 백제의 다채롭게 빛났을 유적들을 옹골차게 접할 길이 아예 없다. 참혹한 전화(戰禍)에 스러지고, 점령군의 횡포에 찢겨서다. 시절의 평화도, 문화의 정채(精彩)도 이렇게 한순간에 산산조각 난다. 오호 통재라, 망국이란 실로 완전한 소진이다. 숲의 저 천진한 생동과 우수에 찬 역사의 배치(背馳)라니.
백제의 융성한 문화는 일찍이 일본으로 흘러 일본 고대 문화의 끌텅을 이루었다. 신라 왕경 경주의 랜드마크였던 황룡사 9층 목탑은 백제의 명장 아비지의 작품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궁궐 건축을 평하길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 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던’ 백제의 정신과 백제인의 마음을 헤아리자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찬사와 조의를 함께 표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숲의 초록 사이로 어둑한 소로가 거듭 이어진다. 뙤약볕이 간간이 스며들어 흰 강아지처럼 길에 드러눕는다. 가파를 게 없는 숲길이니 더위에 절여진 몸으로도 헐떡일 일은 없다. 길섶엔 백제를 상기시키는 건조물들이 들어서 있다. 백제의 세 충신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을 모신 삼충사를 비롯해 군창지, 궁녀사, 영일루, 반월루, 사자루 등이 있다. 모두 백제 이후에 발굴되거나 복원되거나 현대에 이르러 신축됐다.
부소산성은 도성의 방어 기지이면서 왕궁의 후원 역할도 겸한 걸로 추정된다. 왕족들의 소풍과 산책이 숲에서 숲길에서 다반사로 펼쳐졌을 게다. 질박한 흙길로 자못 심원한 정취를 자아내는 태자골 숲길은 왕자들의 산책로였다지. 철부지 어린 왕자들이 간혹 참새처럼 조잘대며 이 숲에서 뛰놀았을까?
숲이 무성하니 고목도 숱하다. 상흔으로 겨우 선 나무도, 썩어가며 곰팡이에 몸통을 내주는 나무도 많다. 재난과 수난을 피할 길 없는 게 생태계이지만 생명은 이어진다. 한 줌 거름으로 돌아가 다른 생명의 밥이 되는 나무의 순환은 고고하다. 삶 안에 죽음이 있듯이 죽음 안에도 삶이 있다. 오직 사람만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낙화암 벼랑에서 꽃처럼 분분히 떨어져 죽었다는 삼천궁녀들은 언제 다시 오려나.
궁녀들뿐이었겠는가. 망국과 함께 노을처럼 시든 수많은 부녀와 노약과 군병들이 백마강의 고혼으로 떠돌겠지.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은 ‘해동증자(海東曾子)’로 칭송된 인물이었다. ‘과단성 있고 침착하며 사려가 깊어 명성이 홀로 높았다’는 기록 역시 의자왕이 준재였음을 웅변한다. 하지만 승자의 각색 속에 나오는 의자왕은 궁녀들과 더불어 음란과 향락에 취한 얼간이. 해서, 고인 물처럼 썩어 무너진 게 백제였다는 투의 오진이 활개를 쳤다. 낙화암 ‘삼천궁녀 전설’ 역시 승자들이 부풀린 조작일 뿐이다. 패자의 봉욕이란 슬픈 과보란 말인가. 백마강 수면에 물살이 어린다. 쏴아, 황량한 바람이 유령처럼 허공에 일어 숲을 흔든다.
탐방 Tip
부소산성 숲길 탐방엔 한두 시간이 걸린다. 산을 끼고 도는 백마강 나루에서 황포돛배 유람선을 탈 수도 있다. 인근 부여읍내에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 궁남지, 국립부여박물관을 함께 탐방해 백제 문화를 살펴본다. 신동엽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도 둘러보자.
해마다 추석 연휴 즈음엔 가을의 정취가 절정으로 무르익는다. 무더위에 지치는 여름날보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때 즐기는 휴식은 더욱 알짜라 하겠다. 고향에도 내려가고 가족여행을 떠나는 등 저마다 연휴 계획이 있겠지만, 특별한 일정이 없는 이들이라면 호텔 패키지를 활용해보는 것도 좋겠다.
파크하얏트서울 더라운지 ‘라이츠아웃’ 프로모션
파크하얏트서울 더라운지에서 반짝이는 가을 야경을 감상하며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라이츠아웃(Lights Out)’ 프로모션을 11월 30일까지 진행한다. 매일 오후 9시 30분부터 오후 11시 30분까지 콜드컷, 치즈플래터와 와인, 맥주 등의 무제한 주류를 즐길 수 있다(가격 1인 6만9000원, 부가세 포함, 봉사료 없음). 호텔 24층에 위치한 더라운지는 전면 유리창을 통해 낮에는 풍부한 자연 채광을, 밤에는 아름다운 도심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가을밤을 더욱 낭만적으로 만들어줄 무제한 주류로 스파클링, 레드, 화이트 등 종류별 와인과 플래티넘 화이트에일 생맥주가 제공된다. 영동대로와 코엑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연인석은 좌석이 한정돼 있으므로, 둘만의 시간을 계획하고 있다면 예약을 서둘러야 한다. 추석 시즌에는 아르헨티나 말벡 와인에 고급 육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미트말벡’ 프로모션(10월 7일까지)과 쌀쌀한 가을 날씨에 잘 어울리는 ‘스키야키와 사케’ 프로모션(10월 31일까지)도 진행하니 참고하자.
여의도 메리어트 호텔 ‘시네마 홀리데이 패키지’
여의도 메리어트 호텔은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9월 22일부터 10월 8일까지 넉넉히 즐길 수 있는 ‘시네마 홀리데이 패키지’를 내놓았다. 스위트형의 객실 1박 이용권을 비롯해 파크카페 내에서 추석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전, 송편, 식혜 등 명절 음식이 포함된 조식 2인 이용권을 제공한다. 더불어 젠가, 미니 사커 게임, 흔들흔들 해적 등 보드게임 이용(택 1) 혜택으로 아이들과 함께라도 즐겁다. 8만 원 추가 시에는 수 스파 페이셜&보디 60분 트리트먼트 혜택으로 명절로 지친 피로를 풀어줄 뿐만 아니라, ‘CGV 영화 티켓 2매’가 증정돼 바빠서 누리지 못했던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다. 2박 투숙 시 10% 할인, 3박 투숙 시 15% 할인 혜택이 제공되며, 스튜디오와 1베드룸 아파트먼트 객실이 문으로 연결돼 가족 또는 친구와 함께 투숙하는 고객들이 보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커넥팅 룸 선택도 가능하다. 이 밖에 실내 수영장, 피트니스센터, 사우나, 키즈풀&키즈룸 등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가격 스튜디오 23만6000원, 1베드룸 아파트먼트 26만6000원, 1베드룸 스위트 28만8000원, 커넥팅 룸 50만8000원, 10% 봉사료 및 10% 세금 별도).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제주 ‘스태리 나이트 & 해피투게더’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제주는 추석을 맞아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스태리 나이트(Starry Night)’와 ‘해피투게더(Happy Together)’ 패키지를 선보인다. 스태리 나이트 패키지에는 제주 경관을 품은 호텔 슈페리어 객실 1박과 조식 뷔페 2인, 바다를 바라보며 늦은 저녁까지 수영을 즐길 수 있는 실내외 온수풀 이용권이 포함된다. 명절의 피로를 풀어줄 사우나 이용권 2매와 카페 디저트(커피 2잔 및 쿠키 세트)도 제공한다. 2박을 이용하는 고객에게는 가을밤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는 별비치 가든과 칵테일 2잔 이용권을, 3박 투숙객에게는 보다 넓고 편안하게 머물도록 스위트 객실 업그레이드 혜택을 준다(가격 23만9000원부터, 세금 및 봉사료 별도). 해피투게더 패키지는 3인 가족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리조트프리미어 트윈 객실 1박과 조식 뷔페 3인, 실내외 수영장 이용권으로 구성된다. 보드게임 ‘모드락’ 1시간 무료 이용과 사우나 3인 이용 혜택도 누릴 수 있다. 2박을 할 경우 해비치만의 노하우로 숙성시킨 흑돼지와 식사 메뉴로 구성된 ‘하노루 디너 세트’를 1회 제공하며, 3박에는 스위트 객실로 업그레이드 가능하다(가격 27만9000원부터, 세금 별도).
올여름 일본은 연이은 자연재해로 홍역을 치렀다. 서일본 지역에 그야말로 물 폭탄이 쏟아져 한바탕 난리더니 초대형 태풍으로 오사카공항이 물에 잠기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태풍이 지나가자마자 홋카이도에 진도 7의 강진이 몰아쳐 삼중고를 겪고 있다.
이런 때에 일본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괜찮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가사키는 안전하겠냐는 눈초리를 뒤로 하고 올해 두 번째 초저가 여행을 감행했다. 나가사키 근방에 있는 운젠지옥이 목적지였다.
자연재해는 불가항력이다. 제아무리 인간이 준비하고 대비를 철저하게 한다 할지라도 자연의 힘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함은 그것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운젠지옥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1991년, 50만 년 동안 활동해온 거대한 화산이 폭발해 마을을 집어삼켰다. 2500채 가옥이 소실되고 마을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변해버렸다. 화산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지만 마을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운젠을 인기 있는 온천 여행지로 만들어 놓았다.
운젠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인천에서 나가사키까지 1시간, 나가사키공항에서 운젠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어 아사햐야에서 갈아타야 했다. 나가사키 공항에서 아사하야 터미널까지 1시간, 아사하야에서 운젠까지 1시간 30분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새벽 5시 반에 집을 나섰는데 운젠에 도착하니 오후 1시가 넘었다.
버스가 굽이굽이 산길을 돌다가 동네가 보이기 시작했다. 버스기사에게 운젠지옥을 순례하려면 어디서 내려야 하냐고 물으려는데, 입에서는 그저 ‘지코쿠(지옥)’라는 외마디만 나왔다. 두 손으로 뽀글뽀글 물이 끓는 형상을 만들어 보이며 지코쿠를 외치자 기사는 웃으면서 그곳 일대 어디서 내려도 된다고 했다. 부리나케 짐을 챙겨 내리면서 ‘지옥’, ‘지옥’을 거듭 외치는 내 모습을 그려보니 웃음이 났다.
운젠지옥은 냄새로 먼저 다가왔다. 버스에서 내리니 진한 유황내가 진동했다. 땅 밑에서 뿜어 나오는 증기와 열기가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차도건 인도건 틈이 있는 모든 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운젠지옥으로 가는 길을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곳을 보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인근 주차장에서 받은 지도를 들고 운젠지옥 순례를 시작하였다. 30여 개의 화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슉슉’ 발밑에서 물이 솟는 소리가 마치 압력솥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와보면 이곳에 왜 지옥온천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금방 이해가 간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은 고통으로 가득 찬 지옥엘 간다고 말할 때 떠오르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펄펄 끓는 물과 땅 밑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리고 달걀이 썩는 것과 같은 진한 유황냄새는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과 너무나 비슷해 몸서리가 쳐졌다. 그런데 이곳을 진짜 지옥으로 만든 건 약 350년 전 있었던 종교탄압이다.
에도시대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신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이곳으로 끌고 와 펄펄 끓는 물에 산 채로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여 서서히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을 운젠지옥이라 불렸다는 설도 전하는데, 야트막한 동산 위에 30여 명의 신자순교비가 있다. 지금까지 들었던 지옥의 소리가 그들의 비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운젠지옥을 걷는 내내 유황 냄새가 유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깊게 들이마시면 폐 질환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니 유황내를 깊이 받아들이는 심호흡을 하며 걸었다. 야트막한 언덕길이라 걷는 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척박한 땅에도 나무가 자라고 새가 울었다. 운젠지옥 주변은 가스와 지열 때문에 억새나 철쭉, 적송 등 악조건을 견디면 살아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식물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식물들이 힘겹게 뿌리 내린 그 땅에서 새들이 울고 사람들도 산책을 즐겼다.
산책 후에 어여쁜 고양이와 눈맞춤을 하며 지열로 삶은 달걀과 운젠의 명물인 레몬사이다를 마셨다. 운젠지옥은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일지 몰라도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삶의 터전이다. 어떤 재난이 닥쳐와도 극복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들은 화산 폭발이라는 대재앙을 축복으로 바꾸어 놓았다. 오바마 마을로 가는 버스를 타고 산길을 돌아가면서 인간은 왜소한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운제지옥이 내게 들려준 값진 교훈이다.
우리나라 기상관측 이래 가장 뜨거운 여름이 가고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이 원망스러운 여름이었다. 강이 바닥을 드러내고 호수가 말라 땅이 갈라졌다. 한국에 일하러 온 아프리카 사람들 사이에 한국 날씨가 더워서 못 살겠다는 유머가 돌 정도였다. 온열 병 환자 중에 사망자도 많이 발생했다. 농작물은 타들어 가고 가축들도 집단 폐사했다. 기온은 매일 신기록을 갈아치웠다. 식수공급이 중단된 지역도 생겼다. 급기야 태풍만이 이 비상사태를 잠재울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매스컴에서는 북태평양에서 매번 태풍이 발생할 때마다 한반도 상륙 가능성을 보도했다. 중국이나 일본으로 방향을 틀 때는 모두 안타까워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아무튼, 우리가 간절히 원했던 대로 더위도 잠재우고 비도 가져올 수 있는 태풍 솔릭이 한반도로 향했다. 문제는 솔릭의 행보가 심상치 않았고 제주도를 비켜 가면서 보여준 위력은 한반도를 덮치면 그 위력이 어마어마할 수 있겠다는 불안을 키웠다. 서남 해상에서 그 속도를 4㎞까지 줄이며 폭우와 강풍을 휘몰아칠 때는 더 큰 공포가 밀려왔다. 한반도의 허리인 수도권을 가로 지르면서 어마어마한 바람과 폭우를 쏟아부으면 가공할 만한 피해가 우려된다고 연일 매스컴에서 떠들어댔다. 강풍에 대비하려면 창문을 엑스자 모양으로 테이프를 붙이는 것보다 사방 창틀에 단단하게 테이프를 붙이는 게 효과적이라고 그림까지 보여주면서 공포를 조장했다. 과거 사라호 태풍부터 한반도에 엄청난 피해를 준 대형 태풍의 피해 영상 자료들도 총출동했다. 태풍이 상륙하는 지점이 태안반도, 군산, 평택 등으로 수시로 바뀌면서 상륙 지점 주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전국의 학교는 휴교령이 발령됐다. 모 방송국에서는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태풍의 진로를 따라가면서 그 생생한 피해 현장을 보도하겠다는 야심 찬 태풍 실시간 중계 계획을 발표했다.
그 모든 예측과 달리 태풍 솔릭은 방향을 급선회해서 목포 인근으로 상륙했다. 상륙하기 전에 이미 많이 약화되어 한반도를 지날 동안 예상보다 적은 피해를 남겼다. 일부 매스컴에서는 수도권에 피해를 주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수도권에만 사람이 사는 것도 아닌데 그런 방송맨트를 듣고 있자니 영 불편했다. 농작물 피해는 피해가 아닌지도 묻고 싶다. 농작물 피해는 곧 농민들의 피해로 직결된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도 기다렸던 태풍 솔릭이 가뭄 해소에는 역부족이라고 아쉬워들 했다. 기대했던 만큼의 비가 오지 않아 해갈에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농민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방송에서 여과 없이 내보내는 것도 듣기 불편했다. 원하고 원해서 태풍 솔릭을 보내줬는데도 우리는 불평불만을 그치지 않았다. 인간사도 그렇지 않은가. 도움이 절실한 누군가에게 필요한 도움을 줬더니 고마워하기는커녕 충분한 도움이 안 되었다고 불평불만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이번 늦여름 물 폭탄은 그런 의미에서 자연의 응징 같다. 그리도 원하던 태풍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얼마나 물을 더 줘야 만족하는지 보자’하는 자연의 응징 말이다.
우리나라는 물 부족 국가다. 매년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용하게도 매년 장마가 오고 태풍이 와 주어서 가뭄이 어느 정도 해소되곤 했다. 물관리를 잘 한 게 아니고 운이 따랐기 때문이다. 올해처럼 장마가 짧고 더운 날씨가 길어지면 식수도 부족한 지경이 된다. 농민들은 여름 내내 작물에 물 대느라 고생한다. 그러나 이번처럼 곡식이 익어갈 때 내리는 늦여름 물 폭탄은 농사를 완전히 망쳐버린다. 질병관리본부의 올바른 손 씻기 홍보영상을 보면 무려 6단계의 방법으로 30초 이상 손을 씻으라고 권장하고 있다. 수돗물을 틀어놓고 30초 동안 받아보니 세면기 하나가 가득 차 넘치는 정도의 양이다. 매번 이렇게 많은 양의 물을 쓰면서 손을 씻어야 질병으로부터 안전한지는 모르겠지만, 부처마다 물관리에 대한 개념도 엇박자라는 생각이 든다. 올여름처럼 식수도 고갈되는 가뭄은 앞으로도 빈번히 일어날 것이다. 한반도가 아열대 기후로 바뀌어 가는 징조는 여러 가지 자연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머잖아 국토의 사막화를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유럽 여러 마을을 여행하다 보면 빗물을 저장하고 활용하는 시설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물 부족 국가에 사는 우리는 빗물 활용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특히 도심지의 양호한 도로포장 상태는 빗물이 잠시라도 머물 수 없는 구조다. 작게는 개별 건물에서부터 도시계획 차원에서의 빗물관리 계획이 시급하다.
카자흐스탄이 수도를 아스타나로 옮기기 전 수도는 알마티(1929~1997)였다. 지금도 카자흐스탄의 최대 도시로 손꼽히는 알마티는 카자흐스탄어로 ‘사과’를 의미하는 알마(Alma)와 ‘아버지’를 뜻하는 아타(Ata)가 합쳐진 말로 ‘사과의 아버지’라는 뜻을 지닌다. 예전에는 사과나무가 많아 개울에 사과가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도심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가옥을 에둘러 싸고 있어 마치 심산을 연상케 한다. 여기에 ‘아시아의 알프스’라 불릴 정도로 멋진 ‘톈산’이 있다. 고개만 들리면 도심 어디에서나 시원한 만년설을 볼 수 있는 곳. 한여름, 한낮의 강렬한 햇살도 비껴간다.
알마티는 나무들 천국
필자는 6월 말, 4개월의 동유럽 여행을 시작했다. 4년 만에 또 길 위에 서 있다. 첫 여행지는 카자흐스탄 남동부에 위치한 알마티(Almaty). 이곳은 단지 러시아를 가기 위한 스톱오버를 활용한 기점지다. 여행 시작부터 행운이 따른다. 출발 하루 전, 후배에게 현지민보다 알마티를 더 잘 아는 한인을 소개받는다. 그녀는 이 나라에서 25년을 살았고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매스컴에 무수히 소개된 유명인. 생판 모르는 나라, 도시에서 의지할 곳이 생겨서인지 사르르 긴장감이 떨어진다.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한 ‘호사’이니 얼마나 좋은가? 알마티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 안에서 만난, 카자흐인 여학생의 도움을 받는다.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에 살고 있다는 여학생은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이미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멋진 고리키 바르크(중앙공원) 공원 안에는 스타디움과 호수를 비롯해 테니스 코트, 동물원, 야외수영장, 카페 등 다양한 놀이 시설들이 들어서 있어 볼 만했다. 판필로프 28인 공원은 더 매력적이다. 이 공원에는 이슬람 국가에서는 보기 드문 ‘젠코브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있다. (구)소련 시대에 폐쇄됐다가 1995년, 러시아 정교회로 반환된 후 1997년부터 다시 성당의 위치를 찾은 곳. 못 하나 사용하지 않았어도 1904년의 대지진을 견뎌냈다. 이 성당은 세계 8대 목조 건축물로 꼽힌다. 또 이 공원에는 제2차 세계대전 순국용사를 위한 ‘꺼지지 않는 불꽃’과 ‘28인의 청동조각상’이 흩어져 있어 소련의 잔재를 느끼게 한다. 옛 러시아의 건축 양식으로 만든 ‘카자흐 민속 악기 박물관’도 눈길을 끈다. 그런데 울창한 숲을 자랑하는 이 도시는 아이러니하게도 공기가 매우 탁하다. 눈으로 볼 때만 싱그러울 뿐 대기가 탁한 이유는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 때문이다. 아무리 나무가 많다 해도 매연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1960~70년대의 우리나라도 이런 환경이었을까?
알마티의 알프스 톈산의 심블락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주요 여행지는 일레 알라타우 국립공원(Ile-Alatau National Park)이다. 언어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알마티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한국 교환학생으로 있었다는 20대 여성과 동행한다. 알마티에서 남쪽으로 약 25km 정도 떨어진 메데우(카작어로 Medeu, 러시아어로 Medeo) 빙상장까지 택시로 이동한다. 해발 약 1500m에 위치한 메데우에 가까워지자 도심에서는 못 느꼈던 바람과 공기가 싱그럽다. 부자들이 산다는 전원주택 단지들도 모습을 드러낸다. 택시가 멈추는 곳, 눈앞으로 만년설이 펼쳐진다. 한여름에도 녹지 않은 채로 눈이 남아 있어 ‘카자흐스탄의 알프스’라 불리는 톈산 산맥(天山山脈, Tian Shan)이다. 중국의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에서 키르기스까지 뻗어 있는 길이 2000km, 넓이 400km의 매우 긴 산맥. 톈산의 최고봉이 포베다(7439m) 산이니 그 높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알마티는 칸텡그리(Kan Tengri, 6995m) 산맥의 일부다. 산 이름은 몽골어에서 나왔는데 칸(Kan, Khan 또는 Han)은 ‘왕’이라는 뜻이고 ‘텡그리(Tangri)’는 ‘영혼’을 의미. 즉 ‘영혼의 왕’이라는 뜻을 지녔다. 현지인들은 ‘피의 산’이라는 의미로 ‘칸투(Kan Too)’라 부르기도 한다. 해가 질 때면 산의 북벽이 붉은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행자들 대부분은 메데우에서 곤돌라를 타고 심블락(카작어로 Shymbulak, 러시아어로 침블락Chimbulak) 스키장까지 올라 만년설을 보고 내려온다. 메데우에서 스키장까지는 약 4.5km. 곤돌라 안의 발아래로 메데우 댐과 세계 최고 높이에 있는 빙상 경기장이 보인다. 2011년 동계 아시안게임, 2012년 반디 세계 챔피언십, 201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가 개최된 곳이다.
질료니 바자르에서 만난 고려인들
심블락에서 다시 시내로 돌아와 국립박물관, 공화당 거리 등을 욕심 없이 둘러보고 찾은 곳은 질료니 바자르(Zelyony Bazar)다. 질료니는 러시아어로 ‘초록’을 의미한다. 과거에 야채와 과일을 주로 판매하는 시장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채소 코너에서는 필자와 똑같은 얼굴을 한 아주머니와 맞닥뜨린다. 먼 타국에서 만나는 똑같은 얼굴. 파장을 준비하는 그녀는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고려인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정육부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말 그림이 그려진 정육 코너에는 순대를 닮은 소시지가 많다. 다양한 치즈와 젓갈류 등을 구경하면서 도착한 반찬가게. 그곳에 고려인 상인들이 여럿 있다. 얼굴은 분명 한국인인데 러시아말을 구사하는 고려인 2세 혹은 3세들. 두어 명은 몇 마디 한국말을 구사한다. “아바이가 했던 말인데 난 모르오”라며 무뚝뚝한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할머니. 손맛을 인정받았는지 얼굴색 전혀 다른 사람들이 고려인 할머니가 만든 김치를 잔뜩 사들고 떠난다.
사실 알마티에서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모습을 한 사람들을 아주 많이 만나게 된다. 카자흐스탄은 130여 개의 민족이 살고 있는 나라다. 분명코 칭기즈칸의 정치적인 영향이 현재로 이어진 것일 게다. 고려인들은 이 도시의 소수민족. 알마티에는 한국인이 약 700명 정도 살고 있으며 이동 인구까지 포함하면 1000명가량 된다고 한다. 동족이라는 본능 때문이었을까? 고려인들을 만나니 눈물이 팽그르르 돌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어쨌든 필자는 현재 러시아 여행 중이다. 두 번째 방문한 러시아. 다음 호에는 이 매력적인 나라에 대한 소식을 길 위에서 전하리라.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아시아나 항공이 직항(매주 화, 금)한다. 또 카자흐스탄 항공사인 에어 아스타나(월, 목)가 있다. 편도 6시간 이상이다.
현지 교통 알마티에는 버스, 트램, 지하철의 대중교통 수단이 있지만 대부분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택시 표시가 없어도 길에서 손을 들으면 어김없이 차가 서는데 운전사와 교통비를 흥정해야 한다. 필수적으로 알고 가야 할 ‘어플’이 얀덱스 택시(Yandex. Taxi)다. 가격이 표시되니 전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택시 운전자의 바가지 상흔을 피할 수 있다. 러시아 권역에서는 거의 통용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자.
음식 정보 주민들 대다수가 이슬람권이어서 돼지고기는 거의 안 먹는다. 양고기와 말고기 등을 주로 먹는다. 꼬치구이인 샤슬릭, 수블리카가 대표 메뉴이고 그 외 스프, 메밀밥, 소고기 구이 등등이 맛있다.
언어 정보 카자흐스탄어가 있지만 대부분 러시아어가 통용된다. 영어 소통이 매우 어렵다.
치안 정보 길에서 경찰들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만큼 치안이 안전하다.
날씨 정보 4계절이지만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다. 여름에는 30℃를 웃돌 정도로 덥다. 그러나 기온 차가 크니 걸칠 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