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무등산 자락에 가면 ‘생오지문예창작촌’을 만날 수 있다. 소설가 문순태(文淳太·80) 씨가 추구하는 문학의 열정을 증명하는 이곳 주변의 도로명은 생오지길. 원래는 만월2구라 불렸다고 한다. 그 이름을 바꾼 것이 바로 문 작가다. 그가 어린 시절 이곳을 생오지라고 불렀던 기억을 되살려 문학의 집을 만들어 생오지라고 이름 붙인 것이 지금에
처음에는 귀촌 목적이 아니었다. 꽃향기, 흙냄새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텃밭 하나 장만할 생각이었다. 부부는 사랑에 빠지듯 덜컥 첫눈에 반해버린 땅과 마주했다. 부부는 신이 나서 매일 밤낮없이 찾아가 땅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응답이라도 하듯 땅은 씨앗을 감싸 안았고, 뿌리 깊은 나무는 온몸으로 품었다. 텃밭은 꽤 큰 대지가 됐고, 이후 정자와 살 만한 집도
직장을 퇴직한 시니어 중 하는 일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남달리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바로 액티브 시니어다.
바쁘든 바쁘지 않든 그동안 살아온 인생 경험과 전문성을 살려 왕성한 에너지로 책을 쓰고 글을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한 목적을 위해 내가 10년 전에 시작한 것이 ‘책과 글쓰기 학교’다. 2년
도시에 살다 농촌으로 삶터를 옮기는 것을 귀농 또는 귀촌이라고 한다. 농촌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농사를 지으러 가는 것은 ‘귀농’이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귀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시골을 찾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가는 것보다 여유를 즐기기 위해 이동하는 경우가 더 많다. 또한 자신이 살던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결혼하고 40대에 같은 아파트, 같은 층에 살게 된 인연으로 가깝게 지내던 여고 3년 선배가 있었다. 내가 카톨릭 신앙을 가지게 됐을 때 가톨릭 신자이던 대모로 모시고 세례 받을 만큼 가깝다. 나는 평소에 대모를 ‘언니’라고 불렀다. 은행원 남편과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언니다. 젊었을 때는 내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었기에 언니네 집으로 자주 놀러가곤
우리 인생을 1막, 2막, 3막으로 나눌 때 각자의 기준이 다르다. 정년까지 일하는 시기를 1막으로 잡는 것은 대부분 비슷하다. 55세에서 60세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를 즐기거나 봉사하는 시기를 2막으로 잡는다. 60세 이상 70세까지로 본다. 인생 3막은 유유자적하며 사는 시기로 70세 이상부터 죽을 때까지이다.
필
만나고 보니 꽤나 독특한 삶이다. 마치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듯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완벽하게 전문적이고 색다른 인생담. 전생과 현생을 말하는 듯 세대를 넘나드는 사건 전개. “내가 무슨 인터뷰할 게 있어”로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특별하고 치열한 역사 드라마를 고스란히 감상한 느낌이랄까? ‘선데이서울’ 전 방송사 출입기자이자 MBC 전 복싱 해설위원
미사리 카페 ‘쏭아’에서의 밤 11시, 전설적인 포크 가수이자 대한민국 가수 송창식은 막 공연을 끝내고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 남양주 작업실로 이동했다. 새벽 5시에 잠들어 오후 2시에 깨는 생활을 수십 년째 하고 있는 그에게 있어 이 늦은 시간은 보통 사람들로 치면 저녁식사 시간쯤 된다. 국내에 단 두 대 있다는 1억 원짜리 스튜디오 모니터 스피커, 19
큰 창 사이로 봄볕이 드는 넓은 복도 한편. 간이의자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트렌치코트에 중절모를 쓴 그는 시간을 쪼개서 뭔가를 읽고 있다. 가방 안에는 공부해야 할 읽을거리와 책이 가득해 보인다. 정지한 듯 몰두해 있는 모습, 옛 러시아 영화의 롱테이크 장면처럼 깊고 안정된 정적이 흐른다.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다물었던 입술이
1981년. 어렵게 마련한 임대료를 손에 쥐고 며칠 영동(지금의 강남)을 헤맨 김옥란(80) 씨의 마음은 다급했다. 실패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한 달만 참으면 평생 먹고산다”고 호언장담하던 점쟁이 말도 큰 위안이 되진 못했다. 몫이 좋은 가게 터는 가진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복덕방에서 추천해준 곳은 번화가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