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인생 66년 차, 출연 작품 300편 이상, 코믹‧멜로‧드라마‧다큐멘터리‧사극 등 장르 불문 어떤 캐릭터든 소화 가능. 배우 이순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수십 년간 다양한 캐릭터로 안방과 스크린에 웃음과 감동을 선물한 그는 후배들의 귀감이 되는 인생 멘토이자 시니어 시청자들 마음 속의 오랜 벗이다. 이번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국민배우 이순재의 열연이 돋보이는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덕구 (Stand by me, 2017)
영화 ‘덕구’는 이순재가 노 개런티로 찍은 작품이다. 가족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돋보이는 시나리오가 마음을 사로잡아서다. 영화는 일흔 살 할아버지와 일곱 살 손자 덕구의 이야기를 다룬다. 덕구 할아버지는 아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며느리도 없이 두 손자를 홀로 키우며 살아가는 어깨가 무거운 가장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사정을 알 턱이 없는 덕구는 그 나잇대 애들답게 돈가스가 먹고 싶다며 투덜대고,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른다. 영화는 이런 평범한 서사를 반복하며 러닝타임 내내 단조로운 분위기를 유지한다. 그러나 지루하기는커녕 갈수록 눈은 벌게지고 코끝은 찡해진다. 특히 덕구 할아버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는 덕구와 함께하는 평범한 순간들이 오래도록 잔상에 남는다. 눈빛만으로 먹먹함을 자아내는 이순재의 연기는 말할 필요도 없다. 시청 전 손수건 준비는 필수다.
2. 로망 (Romang, 2019)
수십 년 세월의 풍파를 견디고 황혼에 접어들 무렵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며 살아가는 부부를 보면, 어떤 역경 일이 닥쳐도 끄떡없을 것 같은 단단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치매는 고난에 면역력이 있는 이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시련이다. 특히나 부부가 함께 기억이 흐릿해지기 시작한다면 절망의 깊이는 배가 된다. 영화 ‘로망’은 몸도 마음도 닮아가는 45년 차 부부가 치매 판정을 받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기존 치매 영화와 달리 ‘부부동반 치매’라는 새로운 소재로 고령화 사회에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이순재는 자신보다 더 빨리 치매가 악화되는 아내의 곁을 지키는 택시운전사 ‘조남봉’ 역을 맡아 노년기 애틋한 사랑을 절절하게 녹여냈다. 연기 경력 도합 110년이 넘는 이순재와 정영숙의 관록이 빛나는 부부 연기가 눈물샘을 자극한다.
3. 굿모닝 프레지던트 (Good Morning President, 2009)
“야동 나와라, 야동!”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 순재’를 기억한다면 이순재가 정극 뿐 아니라 코믹 연기의 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재치와 능청은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도 빛을 발한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서로 다른 세 대통령의 사적인 고민과 삶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퇴임을 앞둔 노년의 대통령 ‘김정호’(이순재)는 244억 복권에 당첨돼 어떻게 하면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고 당첨금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미남 대통령 ‘차지욱’(장동건)은 첫사랑 앞에서 마냥 수줍은 청년이 된다. 여자 대통령 ‘한경자’(고두심)는 철없는 남편의 대책 없는 내조로 이혼을 고민한다. 영화는 대통령을 진중하고 거리감 있는 이미지로 묘사하던 기존 영화와는 달리 장진 감독 특유의 유머 코드로 캐릭터들의 인간미를 극대화한다. 울다가 웃으면 곤란하니 앞서 소개한 영화와는 다른 날에 시청하길.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이한 시인, 나태주(75). 그는 사모하던 여인을 생각하며 쓴 시 ‘대숲 아래서’로 등단한 이래 한시도 펜을 놓지 않았다. 이제껏 써온 시는 5000페이지가 넘는다. 주로 삶과 사랑, 자연을 시로 썼다. 문장은 쉽지만 가볍지 않고, 단어는 간결하지만 내용은 묵직했다. 그의 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독자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연애편지 쓰듯 시를 쓴다는 그는 ‘사랑’을 주제로 한 시집으로 돌아왔다.
신작 ‘사랑만이 남는다’는 그가 여태껏 써온 시를 차곡차곡 모은 시집이자 연애편지다. 시의 수신인은 애인과 아내, 딸이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젊은 사람이 인생에 대해서 묻는다면 첫째도 사랑이고 둘째도 사랑이고 셋째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쓰며 사랑을 인생의 화두로 꼽았다. 사랑을 삶의 화두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은 수학이 아니다. 답이 없다는 말이다. 일 더하기 일처럼 명확한 해답이 없다.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연애시를 썼다. 정답이 있었다면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50년 내내 답을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찾지 못할 것 같다.”
영원히 맞힐 수 없는 문제에 왜 그리 오랫동안 천착한 것일까? 모르는 문제는 풀지 않고 넘어가는 방법도 있을 터. 오랫동안 사랑을 노래한 시인에게 사랑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삶에서 사랑은 중요하다. 밥을 먹는 건 순전히 배가 고파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우리 삶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 독자가 가장 듣고 싶은 주제가 ‘사랑’이다. 역사가 끝날 때까지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공상과학 영화를 보면, 인간이 만든 괴물이 결국 사랑과 감정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면서 끝나지 않나? 그만큼 사랑은 우리에게 가치 있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는 시의 수신인에 해당하는 딸과 아내에게 어떤 아버지와 남편이었을까? 그는 그간의 시간을 곱씹듯 순간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미흡한 것이 많았다. 다만 기본은 하려고 노력했다. 살아보니 기본도 안 하는 사람이 있더라. 교사 생활을 하면서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가장으로서 노릇을 해야 하기에 버텼다. 특출나게 잘하는 것보다 기본에 충실한 마음으로 살았다.”
見이 아니라 觀
공자는 인간의 나이 ‘50’을 지천명(知天命)으로 비유했다. 하늘의 명을 안다는 뜻으로, 흔히 진정한 어른에 도달하는 시기라 말한다. 10년마다 강산이 바뀐다고 가정했을 때 50년이란 세월은 강산도 5번이나 바뀌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50년은 과연 어떤 세월이었을까?
“50년은 두 번 사는 삶과 같았다. 바라보기만 해도 좋고, 가슴 뛰고, 못 만나면 죽을 것 같고, 영원히 못 잊을 것 같던 사랑도 30년이 지나니 무감각해지고 자연스레 잊히더라. 인간 사이의 연은 벽에 박힌 못과 같다. 한 30년은 못이 꽉 박혀 있어서 잘 안 떨어지는데, 시간이 지나면 녹슨 못처럼 헐거워지고 지난날 썼던 시나 모습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온다. 쉽게 말하면 자기 객관화가 된다. 그때부터 또 다른 삶이 시작되더라. 지금 돌이켜보면 꼭 내 안에 두 사람이 있는 것 같고, 두 번의 삶을 산 것같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그 긴 세월 동안 어떤 마음으로 시를 써온 것일까? 그는 자신을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하며 시인으로서의 철학을 덧붙였다.
“삶의 기준이 남이 아니라 내게로 향해야 한다. 남들이 부러워한다고 해도 소용없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모두가 가짜다. 결국 본질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 시도 똑같다. 마음에 ‘대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써야 한다. 외로움에 대해서 쓰는 건 복사본이지만, 외로움을 쓰는 건 원본과 같다. 좋은 시란 명확하고 헷갈리지 않는다. 위로를 원하는 사람에게 위로를 전달하고, 시 자체가 고독이라서 읽으면 고독이 느껴지는 시. 그런 시가 좋은 시다. 스쳐 지나가듯 보는 ‘견’(見)이 아니라 ‘관’(觀), 즉 관조(觀照)하는 자세로 시를 써야 한다. 사랑에 대해서 쓰지 않고, 시와 문장이 사랑 자체가 되는 일. 이게 시의 본질이다. 시를 쓸 때 어떻게 하면 본질에 더 다가갈 수 있을지 늘 고민했다.”
최선을 다하는 삶
최근 하늘나라로 떠난 정인이를 위해 추모시를 썼다. 그가 쓴 시 ‘길 잃은 천사’는 정인이가 잠든 안데르센공원묘원의 담벼락에 새겨졌다. 그는 이제껏 써온 시처럼 따뜻한 시선을 가진 시인이었다.
“정인이 사건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다. 아내에게도 얘기했지만 천사를 울려서 보내면 안 된다. 환대해서 보내야 한다. 내 시를 읽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시가 씨앗이라면, 독자는 밭이다. 독자가 없는 시는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늘 최선을 다해서 대한다. 아무리 바빠도 독자가 사인을 요청하면 정성 들여서 한다. 직원들에게도 풀꽃문학관에 오시는 분들을 정성스럽게 대하라고 얘기한다.”
끝으로 노시인이기 전에 인생의 선배로서 삶의 지혜가 담긴 덕담을 잊지 않았다. 그는 시간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시간을 아껴 써야 한다. 젊은이는 할 수는 있지만, 잘 알지는 못한다. 반면에 늙어서는 알지만 할 수 없을 때가 많다. 한 살이라도 젊을수록 책을 많이 읽고, 배울 수 있는 어른과 교류하고, 삶의 견문을 넓힐 수 있게 여행을 가는 것이 좋다. 늘 자신을 아낄 줄 알고, 젊을 때는 하나라도 더 알기 위해 노력하고, 늙어서는 한 가지라도 더 할 수 있도록 여력을 남기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최선을 다하는 삶이다.”
풀꽃 시인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은 시인의 언어는 과녁의 정중앙을 노리는 화살처럼 간명했다.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시와 독자였다. 시를 쓸 수밖에 없어서 쓴다는 그의 말처럼 시는 그와 분리할 수 없는 존재였다. 특히 ‘시’에 관해서 얘기할 때는 장명등을 밝히는 불꽃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였다. 노시인이 아니라 호기심 가득한 소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50년간 5000페이지가 넘는 왕성한 활동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열정 덕분일지도 모른다. 인터뷰를 시작할 때 그가 건네준 차는 차갑게 식었으나, 그가 보여준 시에 대한 사랑은 사그라지지 않는 불꽃처럼 그 자리에 맴돌았다. 노시인의 불꽃을 오랫동안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마친다.
최근 CNN은 힐러리 클린턴 미국 전 국무장관이 추리 소설을 집필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와 더불어 힐러리의 남편인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도 퇴임 후 소설을 발표한 이력이 주목받으며, 두 정치 거물이 ‘부부 소설가’로 거듭났다는 소식이 전해져 화제가 되었다.
클린턴을 비롯한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퇴임 후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을까? 초강대국의 수장으로 세계를 호령한 그들의 인생 2막을 소개한다.
소설가 클린턴 부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베스트셀러 작가인 제임스 패터슨과 공저한 소설을 출간했다. 제목은 ‘대통령이 사라졌다’. 세계 정계를 배경으로 한 권력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만큼, 미국 대통령만이 알 수 있는 경험담을 녹여내 인기를 끌었다. 2018년 출간되어 300만 부 이상 팔렸다. 클린턴은 패터슨과 함께 두 번째 합작 소설 ‘대통령의 딸’도 집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부인이자 전 미국 국무장관인 힐러리 클린턴도 소설가로 등단한다. 힐러리는 추리소설 작가 루이즈 페니와 함께 첫 소설 ‘스테이트 오브 테러’(테러의 나라)를 공동 집필 중이다. 장르는 정치 스릴러로, 재임 시절 경험담 등 자전적 요소가 다수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화가 부시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전업 화가로 변신했다. 처음엔 고양이나 강아지, 정물화를 그리다 초상화에 빠져들었다. 상이용사, 이민자, 재임 중 만난 각국 정치인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전시회도 여러 차례 열었다.
2014년 전시회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선보였다. 2019년 방한 당시에는 봉하마을을 찾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 참석해, 직접 그린 노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유족에게 선물했다.
부시는 “평생 미술관을 몰랐지만, 그림을 배운 이후 이제는 미술관에 서너 시간씩 머물며 화가의 붓 터치나 색감을 들여다본다”고 말했다. 그는 “내 안에 렘브란트가 갇혀 있다”는 농담도 종종 한다고 전해졌다.
팟캐스트 방송인 오바마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음악 스트리밍ㆍ미디어 서비스 업체인 ‘스포티파이’의 팟캐스트 출연자로 나섰다.
오바마는 록 음악의 아이콘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함께 출연했다. 스프링스틴은 오바마와 인연이 깊다. 오바마의 오랜 지지자로, 2008년 오바마가 처음 대선에 도전할 때부터 지지 공연을 하는 등 조력자 역할을 했다.
록의 대부와 전직 대통령은 결혼생활, 아빠의 삶, 인종 문제 등을 논하며 서로의 분야를 뛰어넘어 공감대를 형성했다.
오바마의 이런 시도는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차별화되는 행보다. 오바마는 회고록을 출간하고, ‘오바마 재단’을 설립해 젊은 리더 양성에도 힘썼다. 이는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유사한 활동이나, 팟캐스트 같은 뉴미디어와의 협업은 다른 전임자와 차별화된 도전이다.
마당에 널어둔 육쪽마늘 씨알이 참 굵다. 주말 내내 마늘을 캤으니 온몸은 쑤시고, 흘린 땀으로 눈은 따가워도 수확의 기쁨이 모든 것을 이겨낸다. 이틀간 내 손같이 쓰던 ‘마늘 창’을 놓으니 가뿐하면서도 무언가 허전하다. ‘마늘 창’이란 모종삽보다 조금 큰 손잡이에 쇠스랑보다는 작은 창살이 두 개 혹은 세 개 달린 농기구다. 꼭 50년 전 이즈음, 마흔이 되기 전의 젊은 부모님과 마늘이며 감자를 캘 때에는 없던 녀석이다. 하얗고 통통한 마늘에 앳된 소년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시골 소년답지 않게 뽀얀 피부의 소년이 삽과 호미로 열심히 마늘을 캐고 있었다. 수업료와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서 조례시간에 담임에게 호명이 되었다. 급우들 형편이야 다들 비슷한 처지였건만, 이번 분기에는 어찌 다들 납부하고 몇 명만 미납이었다. 마늘을 캐서 팔아야 수업료를 낼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소년은 기말고사를 앞둔 시점에도 마늘 캐기에 열심이었다.
상고에 진학해서 농협 직원이 되어 가계에 보탬이 되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다. 맏이는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주장이었다. 평소 남편 의견에 무조건 순종하던 어머니는 맏이의 대학 진학과 관련해서는 요지부동이었다. 어머니가 자기주장을 그토록 강하게 하신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지막이자 두 번째는 여동생을 대학에 보낼 때였다. 인근 조선소에서 깡깡이(녹슨 배에 페인트칠을 하기 전에 망치로 녹을 떼어내는 작업)를 하고, 쉬는 날에는 농사를 지으며 손톱이 빠지도록 일한 어머니의 교육열은 아버지도 말릴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망치로 녹을 떼어내는 일을 하고 돌아온 어머니의 덜덜 떨리는 손을 보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한 뒤에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야 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위해 과외 교사와 학원 강사를 병행해야 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유학생의 처지는 다 비슷했으리라. 대학생활 내내 과외와 학원 강사를, 그리고 운 좋게도 졸업 전에 취업해서 월급을 받았지만 늘 지난한 삶이었다. 농사로는 가족 건사가 힘들어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사고로 몸져누웠고, 어머니는 아버지 병간호와 7남매를 혼자서 건사할 수 없었다. 첫 월급은 23만 원,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버지 병원비와 동생들 학비를 위해 집으로 송금했다.
36개월 군대를 마치고, 복학해서 재학 중 취업하고 1년간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한 뒤에 졸업장을 딸 수 있었다. 입학식에는 와보지 못했던 가족들이 졸업식에는 모두 상경해 함께했다. 거리 사진사에게 2000원인가 2500원인가를 주고 찍었던 가족사진은 아직도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다. 사진 속에서 어머니는 참 환하게 웃으며 학사모를 쓰셨다. 어머니에겐 그게 고된 삶의 보상이었으리라.
뒤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사는 게 삶의 우선순위였다. 사업에 실패하고 술독에 빠져 살다가 겨우 정신 차리고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사고를 당했던 아버지처럼 되기는 싫었다. 손으로 밤낮없이 바닷물에 녹슨 페인트 덩어리들을 쳐대는 노동으로 남자보다 거친 손을 한 어머니. 어머니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막냇동생이 대학에 입학하던 1986년, 동생 등록금을 납부해주면서 항상 어깨를 짓누르던 장남의 책임에서 조금 가벼워졌다. 동생들도 졸업하고 취업해서 자리를 잡고 있었고, 아버지는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고 어머니도 드디어 깡깡이를 그만둘 수 있었다.
장남 대신, 이제는 한 여자의 남편, 그리고 두 아이의 아빠라는 책임이 더 깊어졌다. 부서 경리로 일하던 아내와 사내 커플로 만나서 결혼했다. 회사 비품 하나도 살뜰히 아끼고, 부서 살림을 맵짜게 운영하던 모습에 반했다. 연애는 짧았어도 이 여자가 내 일생의 반려자다 싶었다. 연년생 두 아이를 키우면서 결혼 후에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억척스레 일했다. 아내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1986년부터 1988년은 내 인생의 첫 번째 전성기였다. 아시안게임부터 올림픽까지 내가 일하던 회사에서 참여했고, 참여 팀의 주요 팀원 중 하나였다. 건국 이래, 아니 단군 이래 가장 큰 행사가 내 손을 거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밤낮없이 일했고, 주말도 잊은 채 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미련한 일이었다. 또한 아내에게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다. 두 아이의 육아를 아내에게 맡긴 채 회사 일에만 몰두했으니, 그래서 지금은 항상 아내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회사 일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아내의 희생 덕분이긴 했지만, 두 아이가 잘 자라고 있었고, 생애 처음으로 ‘내 집’, 아니 ‘우리 집’이 생겼다. 서울 외곽의 작은 주택이었지만 사글세도 전세도 아닌 ‘우리 집’이었다. 아이들이 벽에 낙서를 해도, 대문을 꽝 닫아도, 마당에 오줌을 싸도 한소리 듣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는 라면만 먹어도 배부를 것 같다며 아내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침엔 영어학원, 저녁엔 중국어학원에 등록했다. 30대 후반에 접어드는 나이라도 시대의 흐름에 뒤처질 수는 없었다. 특히 외국과 일하는 것이 많은 업무 특성상 영어는 기본이고, 점점 발전하고 있는 중국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직은 미수교국이지만 조만간 중국과 국교가 수립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992년 중국과 국교가 수립되자마자 회사에서는 중국 지사 설립과 중국 공장 설립을 위해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팀을 중국에 파견했다. 팀장이 되어서 중국에 첫발을 내딛었다. 장기출장 가방을 싸주며 근심이 가득하던 아내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공산국가, 적대국의 이미지가 강했던 중국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지사가 설립되고 3년 뒤에 중국에 온 아내는 생각과 달리 많이 발전된 모습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1997년까지 중국에서 발판을 다지고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성과에 맞는 승진 자리를 얻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모든 기대를 베어버리는 IMF 구제금융 시대가 닥쳤다. 자고 일어나면 부도 소식이 들렸다. 재무 쪽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1달러라도 더 모으기 위해서 다들 혈안이었다. 달러 부족으로 흑자도산하는 기업들도 부지기수였다. 회사에서의 하루하루가 칼날 위를 걷는 듯했다. 가만히 있어도 불편하고, 무슨 일을 하려 해도 불편한 시기. 자칫 썰려나지 않기 위해 모두가 작두 위에서 위태롭던 시간이었다.
혹독한 시간, 책상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자리는 지키지 못했다. 핵심 인력이라 생각했던 내가 자르다 남은 인력이 되어버렸다. IMF의 파고는 조금 작아졌지만 개인들에게는 정말로 하루 앞을 알 수 없는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살얼음을 걷는 하루하루, 눈을 감으면 아내가, 눈을 뜨면 아이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톡 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끊어질 것 같은 지푸라기를 잡고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어머니, 7남매의 무탈만을 위해 살아온 어머니의 이마에 주름 하나를 더 늘릴 수는 없었다.
엄혹한 시절이 지나고 조금씩 훈풍이 불었다. 훈풍을 따라 IT벤처 열풍이 불었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부터 인터넷 기업, 닷컴 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겼고 이내 한국에도 수많은 IT 기업들이 강남 테헤란로를 점령했다. 회사에서도 젊은 직원들을 모아 새롭게 도전해볼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20~30대 젊은 직원들이, 그것도 IT 관련이나 기술 관련 전공자들이 젊은 혈기로 뛰어드는 사업이라는 이미지를 ‘벤처’ 기업은 갖고 있었다. 이미 십수 년간 조직에 몸담아 회사원으로 살아왔던 구태가 몸에 밴 사람들이 섣불리 도전하기 쉬운 게 아니었다. 회사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렵게 IMF를 넘기고 새롭게 투자하는 사업인데 아직 혈기왕성한 젊음만 믿고 도전하는 직원들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었다. 회사라는 조직을 운영하고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어차피 남는 인력이었고, 그대로 버티고 있는다고 다시 원하던 자리가 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꼰대’ 소리 듣는 나이가 되어가는데 더 늦기 전에 도전을 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잘린다고 어디 가서 밥이야 굶겠는가. 아직 초등학생, 중학생인 아이들이 걸렸지만 마지막 도전이다 생각했다. 살아오면서 가장 큰 결심이었다.
사내 벤처팀의 사업계획서를 보았지만 처음엔 내용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십수 년간 해온 일과는 전혀 접점이 없던 사업 계획이었고, IT 분야는 전혀 알지 못했다. 주판을 쓰고 수기로 장부와 기획안을 쓰던 시기에 입사해서 경리가 타자를 쳐주던 시기를 지나왔다. 독수리 타법은 벗어났고 워드프로세서 정도는 다룰 수 있었다. 영어와 중국어를 배웠듯이 이제는 젊은 직원들에게 단어 하나하나, IT 관련 사업 하나하나를 배워가야 할 때였다.
많게는 스무 살, 적게는 띠동갑 정도 되는 직원들은 세대 차이를 넘어서 나에겐 아득한 존재들이었다. 오렌지족, X세대 등으로 불리던 그들은 나와는 다른 나라에서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 같았다. 여동생이 대학에 갈 때, 시대가 바뀌어서 이제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며 눈물을 흘리던 우리 어머니가 느끼던 그 감정 같은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 감정보다 더 멀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꼰대짓’을 하는 것만큼이나 보기 흉하다.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20대 때, 30대 때 열심히 일했던 나처럼, 벤처팀들도 자기 선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지켜봐주는 것이 중요했다. 대신 적절한 예산과 범위 내에서 그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면 되는 것이다. 닷컴 버블과 시작된 사내 벤처는 의외로 성공을 거두었고 젊은 청년들이 성공담에 한 줄을 보탤 수 있었다. 지금은 인터넷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지만 함께했던 청년들은 지금 여러 곳에서 맹활약 중이다. 가끔씩 들려오는 그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분당에서, 강남에서 밤을 새던 때가 떠올라 미소 짓게 된다.
사업 론칭이 성공하고 나서 다시 본사로 돌아왔고 중국 지사에 다시 갔다. 3년 후에 본사로 돌아오니 지천명을 넘긴 나이가 되어 있었다. 회사에서는 부속품처럼 25년 가까이 일하고 배터리처럼 방전되었다. 정년을 5년 남짓 남긴 그때, 회사 내 권력에서 밀려나 있어서 임원이나 사장단에 도전하기에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더 이상 도전할 여력이 내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바쁘게 살아온 시간에 어느새 훌쩍 커버린 두 아이는 스무 살을 넘어 성인이 되었으니 제 앞가림을 할 터였다. 늦은 나이에 방통대에 입학한 아내는 그동안 하고 싶어 했던 상담 관련 공부를 시작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이제는 진짜로 잉여가 되는 것은 아닌가, 출근길도 퇴근길도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건강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술과 폭식으로 인한 고혈압에 고지혈증, 당뇨까지. 쉰을 넘긴 몸은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IMF 시절 이후 다시 백척간두에 선 느낌이었다. 시간은 갈수록 빠르게 지나가고 머지않아 환갑을 넘길 텐데 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다. 부모님 세대의 쉰과 우리 세대의 쉰은 다르다. 또 우리 뒷세대, 그리고 지금 20대가 쉰이 되었을 때의 그 ‘쉰’이 주는 느낌은 전혀 다를 것이다. 나이와 직급에 얽매여 권위를 찾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벤처 일을 할 때 깨달았다.
이 나이쯤엔 이 정도 재산이나 이 정도 사회적 직위를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도 사회적 관습에 의한 고정관념이었다. 20대에 대학을 가고, 30대에 결혼을 하고, 40대에 내 집을 갖고… 이렇게 컨베이어벨트처럼 이루어진 한국인들의 삶을 한 장면으로 나타내며 비판하는 카툰을 본 적이 있다. 그렇게 정해진 대로만 산다면 60대에는 손주들을 돌보는 삶을 살아야 하리라.
참으로 평범하게 모나지 않게 살아온 50년이었다면 이제 남은 생은 그 컨베이어벨트에서 이탈해서 다른 곳에는 뭐가 있는지 살펴보며 살아도 좋지 않을까? 은퇴에 대해 처음으로 아내와 이야기했을 때 아내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당신처럼 꽉 막힌 일벌레가 이런 생각도 하다니 대견하다면서.
정년은 금방이었다. 30년 넘게 일했으니 미련이 없을 만도 한데 사원증을 반납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들과 술을 마시면서 처음으로 취한 날이기도 했다. 시원함 반, 아쉬움 반, 거기에 임원에 대한 미련 한 꼬집. 눈물이 핑 돌던 밤이었다.
퇴직 후에 딱 1년만 쉬자고 했지만 달리던 자전거는 그리 오래 멈춰서 쉴 수 없었다.
딱 가족이 먹을 것만 소일거리로 농사지으며 1년을 보내던 중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고상하고 우아한 취미생활은 거리가 멀었다. 몸을 쓰고 현장에서 뛰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맥도날드 시니어 알바도 해보고, 편의점 알바도 해봤다. POS를 익히는 것이 제일 어려웠지만 그래도 한때 IT 벤처에서 일했던 가닥에 그 뒤로도 꾸준히 컴퓨터를 다루다 보니 온갖 할인이나 쿠폰을 다루는 데도 익숙했다. ‘아직은 청춘!’ 이런 마인드가 아니었다.
40년 전, 내가 스무 살 때는 없었던 일들을 해보며 우리 아이들과 주변의 청년들이 어떻게 사는지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패스트푸드점 복장과 편의점 조끼를 입은 나를 보며 아내와 아들들은 누구보다 좋아했다. 가족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가족과 다시 하나가 되는 느낌, 참 오랜만에 받는 느낌이었고 이때부터 다시 나의 제2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같은 시기에 퇴사한 동기와 무역업을 시작한 것은 한참 뒤였다. 다 잊어버린 중국어를 떠듬거리며 중국전자제품을 수입했다. 거창한 사업도 아니고 동기와 나 두 사람 소소한 용돈벌이로 시작했다. 그래도 저가 저품질 제품을 다량으로 떼다가 파는 일은 하지 않는다. 적정 가격의 적정한 품질의 제품을 파는 게 목적이었다. 사업을 키울 생각은 없었지만 몇 년 새 규모가 커져갔다. 욕심을 부리지 말자,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자. 시작할 때의 다짐은 잊지 않고 지켜가고 있다. 주말 농장과 아내, 손주들과 함께할 시간은 빼두고 일하는 것이 가장 먼저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다운 할아버지가 지금 내 삶의 목표 중 하나다. 할아버지가 아닌 ‘노땅’이나 ‘꼰대’가 되는 것이 문제 아닐까? 푸근하게 가족과 이웃을 품어줄 수 있는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다운 할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오늘 하루도 웃으며 시작한다.
이제 마늘을 엮어 공기가 잘 통하는 곳에 걸어둘 때가 되었다. 장마철을 무사히 보낸 마늘은 농막 처마 밑에서 더욱 단단하게 맵고 달달하고 향긋한 마늘로 익어갈 것이다. 그처럼 내 안의 할아버지가 더 할아버지다워졌으면 좋겠다.
그는 직장 은퇴를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전에 가보지 않은 길에 자신의 전부를 투입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도래한 걸로 간주했다. 그런 그가 귀농을 선택한 건 매력과 환멸이 공존하는 서울이라는 기이한 대도시를 통쾌하게 벗어난 시골에서 삶의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였다. 구체적으로는, 농업에의 투신이라는 미지의 모험을 통해 자신의 내공을 시험하고 싶었다. 올해로 귀농 7년 차. 허진영(64) 씨의 농장은 그간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정신과 육체의 거의 모든 걸 쏟아 부은 결과가 그렇다.]
허진영 씨는 알아주는 눈이 많은 귀농인이다. 강소농(強小農)의 본으로 지역에 회자된다. 고행에 가까운 게 귀농생활이다. 그러나 그는 진지한 몰입으로 치고 나갔다. 고전과 시행착오로 허우적거리기 쉬운 게 농사이지만 물 위를 뛰어다니는 물방개처럼 활개를 쳤다. 용의주도! 매사 빈틈없는 숙고와 실행을 숭상하는 자질을 어디서 얻어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깐깐하게 돌다리를 두드려 물을 건넜으며, 건널 다리가 없을 경우엔 스스로 다리를 고안해 형세를 호전시키는 재능을 발휘해 귀농의 갖가지 난관을 타파했다. 요컨대 그의 머리는 전략적으로 작동한다. 32년간 일했던 ‘삼성맨’ 시절에도 두각을 나타내기를 밥 먹듯이 했다고 한다. 이 영민한 사람의 귀농 사전준비는 전혀 평범한 게 아니었다.
“일단 철저한 준비를 했다. 예컨대 작목 선정을 미리 해뒀는데 장단기 작물을 병행 재배하기로 했다. 귀농 당해에 수확할 수 있는 단기작물로 초석잠이나 복분자, 산딸기를 택해 귀농 1년 전에 미리 심었으며, 최소 이삼 년이 지나야 소득이 발생할 중장기 작물로는 베리 종류나 호두나무 같은 유실수를 선정했다. 이 모든 선택 작물들은 나름의 공부와 분석을 통해 고른 것들이었다.”
신중하게 작목을 선택하더라도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 게 농사다.
“실로 그렇더라. 귀농 첫해에 거둔 소득이 예상을 거슬러 형편없이 적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받았던 한 달 치 봉급 수준밖에 되질 않았거든.”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첫 농사였던 만큼 생산량 자체가 미미했다. 게다가 판로가 막연하더군. 고구마, 감자, 고추도 심었지만 수익 발생이 되질 않아 무의미한 걸 알고 다시는 이것들을 재배하지 않기로 했다. 첫해의 성과는 초라했으나 덕분에 공부를 한 셈이고 비전을 세울 수 있었다. 향후의 대책을 수립했으니까.”
실의에 빠지진 않았고?
“쓴맛을 보고서야 한결 정신을 번쩍 차리는 게 사람이지 않던가. 일종의 통과의례로 작은 실패를 했다 여기고 이듬해 농사에 만전을 기했다. 귀농 전에 구상했던 기본 방향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이기도 했지.”
어떤 기본 방향?
“첫째는 다양한 작목을 재배해야겠다는 구상이었다. 여기엔 많은 강점이 있다. 우선은 노동력을 분산할 수 있어 탄력적이다. 그리고 자연재해나 병충해, 또는 가격폭락 등에 따른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일부 작물들이 흉작이더라도 피해를 덜 본 일부 작물들이 손실을 보완해주니까.”
둘째는?
“소량생산을 추구하기로 했다. 대량생산을 할 경우 흘려야 할 땀 역시 대량일 수밖에 없지만 고품질 농산물을 생산하기 어렵다. 소량 규모여야 고품질 생산이 가능하고, 이는 고가격 정책의 밑거름이 되는 게 아니겠는가.”
SNS 마케팅이 없으면 승산도 없다
허진영 씨는 귀향으로 귀농을 실현했다. 낳고 자란 산 깊은 벽촌으로 내려가 농사꾼으로 변신한 거다. 자식들 걱정에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을 고향의 홀어머니를 모처럼 살뜰히 봉양하자는 생각도 귀농을 추동했다. 그는 선친이 생시에 농사를 지었던 농토 8000여 평을 다듬고 닦아 ‘산중햇살농장’이라 이름 붙였다. 농장의 반은 호두나무 과수원, 나머지는 갖가지 약용식물들이 생육하는 밭이다. 농장 가운데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면 산이 절반, 하늘이 절반이다. 그 사이를 천천히 흘러가는 뜬구름은 정처 없어 걸릴 게 없으니 자유로운 나그네임을 알 만하다. 숲속 언덕배기에 오두막 하나 슬쩍 짓고 세월아 네월아, 한가하게 노닥거리기 좋은 풍광이다. 하지만 그는 오직 농사에 용무가 많아 농사 외엔 매사 심드렁한 분위기다.
초심자로 농사에 뛰어들었으나 구상도 패기도 짱짱했던 그에게 첫해 농사의 섭섭한 소출은 약진의 발판이었나보다. 이듬해부터 곧바로 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했으니까.
“다작물 재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경제성 높은 약용작물이나 핫이슈 작물을 발굴해 도입했다. 인디언감자라고 들어봤나? 북미 원주민, 즉 인디언들의 주식이었던 덩굴식물로 천연 자양강장제라 평가되더라. 이게 국내에 막 들어온 시점에서 종자를 구해 심었는데 결과가 좋았다. 치매에 좋다는 블랙커런트, 항산화 작용이 빼어나며 당뇨에 좋은 코끼리마늘, 오미자, 슈퍼도라지, 토종 보리똥 등도 재배해 재미를 봤다. 귀농 2년 차에 흑자가 나자 자신감이 솟구치더군.”
모든 작물이 효자 노릇? 그렇다면 당신은 작목 선정의 귀재다.
“유행가만 한순간에 사라지는 게 아니다. 유행작물의 수명도 짧고 변덕스럽다. 나는 작목별 손익분기점을 계산해 상황이 나쁜 작물은 과감히 버린다. 신속히 대체작물을 찾아 채워 넣는다. 여기엔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수적이다. 한마디로 농사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우선은 목표치부터 확실하게 설정해야 한다. 귀농 시 나는 은퇴 전 삼성에서 받았던 연봉 수준의 농업소득을 목표로 잡았다. 그리고 그걸 4년 만에 달성했지.”
올해 7년 차다. 2020년의 소득액은 얼마였지?
“매출 2억에 순수익 1억3000만 원 정도다. 이는 매우 드문 경우라 하더라. 이른바 ‘강소농’의 기준 소득액은 연매출 1억이다.”
판정패와 케이오패가 드물지 않은 게 귀농이다. 귀농열차를 타고 내달리는 이들을 보면 그 용기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농림부 자료에 따르면 전체 귀농인의 90%가 실패한다. 현상 유지 케이스는 8~9%, 성공하는 농가는 1%에 불과하다.”
그게 정말 믿을 만한 자료라고? 휴, 귀농은 실로 격렬한 레이스군. 실패 요인 중 가장 핵심적인 건 무엇이라 보나?
“단연 판로 문제다. 피땀 흘려 농산품을 생산하고도 판로가 여의치 않아 고심들을 한다. 공판장이나 백화점, 대형마트 같은 곳에 상품을 줄 경우에도 가격을 후려쳐 실속이 없다. 결국은 직거래가 답이다. 내가 농장을 성장시킨 비결이 직거래망 구축에 있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매개로 한 직거래 마케팅으로 활로를 찾았다. SNS 마케팅은 이제 필수다. 귀농을 해서는 반드시 SNS 마케팅을 해야 한다. 그게 없이는 승산도 없다.”
일 없이 노는 건 불행의 첩경
허진영 씨가 생산한 농산물은 기똥차게 잘 팔려나간다. 대부분 완판을 본다. 인터넷 마케팅 덕분이다. 지인들에게 상처를 줘가며 물건을 팔아치울 필요가 없다. 블로그 덕분이다. 댓글로 쌍방향 소통을 하는 블로그를 통해 막대한 수효의 직거래 고객을 확보한 덕분이다. 사실 농업인들의 블로그 운영은 이미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블로그의 품질은 제각각이다. 허 씨의 블로그는 높은 충실도로 차별화를 꾀했다. 단순하거나 얄팍하게 상품 홍보에만 주력하지 않는다. 귀농일지에 가까우리만치 귀농 경험담을 소상히 고백한다. 귀농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비결을 제시한다. 고난을 이겨내는 결기와 과정을 소박한 글과 사진으로 진솔하게 기록한다. 공감과 신뢰를 자아내는 휴먼 터치로 고객관리에 성공한 셈이다.
“농사꾼들의 화두인 판로 문제를 인터넷 마케팅으로 해결하기 위해 귀농 2년 차부터 블로그를 독학으로 배워 운영했다. 죽기 살기로 블로그에 매달렸다. 전체 노동량의 50%는 농사에, 나머지 50%는 블로그에 쏟았던 거다. 그 결과는 너무도 좋았지. 많을 때는 하루에 7000~8000여 명이 접속한다. 그런 날엔 수백만 원씩 매출이 오르더라.”
이제 순풍을 매단 배처럼 질주를 한다고 보나?
“보람을 느낀다. 귀농 멘토로서도 활동량이 늘어 뿌듯하다. 그런데 일이 너무도 많아 힘겹다. 새벽부터 온갖 노동에 시달리고 밤엔 자정까지 블로그에 매달리다 쓰러져 잔다. 남들은 이런 나를 미쳤다 하더라. 겨울철도 내겐 농한기가 아니다. 산으로 들로 다니며 갈대나 뽕나무 뿌리, 유근피 등을 채취해 상품을 만들거든. 몸 아플 겨를조차 없다. 가끔 이런 생각한다. 이거 정말 내가 미친 거 아냐?(웃음)”
과중한 일에 속박돼 산다는 회의?
“내겐 이미 퇴직 이전에 모아둔 재산이 꽤 있다. 돈벌이 목적의 귀농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퇴직을 하고 놀면 뭐하나, 일 없이 노는 거야말로 불행의 첩경이지 아니한가, 이런 생각으로 농사에 도전했던 것이다. 그게 새로운 삶이기에. 그리고 어느 정도의 성공으로 만족감을 얻기에 이르렀지. 하지만 일의 스케일을 키워 더 많은 성취를 하고 싶다. 아직 갈 길이 먼 거다. 이런 나를 두고 아내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사람 취급을 한다.(웃음)”
그의 아내는 서울에 산다. 가끔 내려와 남편을 챙겨주고 후다닥 달아난다. 귀농하자는 얘기를 들은 순간에 사색이 됐던 그녀는 길고도 격렬한 논쟁 끝에 당신 혼자 잘해보세요, 그리 선언하고 서울에 남았다. 여행이나 하며 부부가 오붓하게 인생을 즐길 나이에 웬 귀농 고생살이? 아내의 취지는 충분히 합리적이었으나 허진영 씨의 뜻을 꺾을 순 없었다. 그는 아내의 불만을 잠재울 유일한 길은 보란 듯이 사업을 확장하는 데 있다는 생각으로 뛰고 또 뛴다. 귀농의 기수로 줄달음친다. 이는 과욕의 산물? 아니면 진취적 기개?
허진영 씨가 주는 귀농 Tip
•인생의 막다른 길에 접어든다는 결연한 각오가 없으면 귀농하지 마라. 적당주의가 통하지 않는 게 농사다.
•귀농 목표를 구체적으로 세우고 빈틈없이 실천하자.
•농사로 소득을 얻기 쉽지 않다. 따라서 초기 투자비용을 최소화하고 매사 절약해야 한다.
•농사도 기술이고 과학이다. 많은 정보를 섭렵하자.
•SNS 마케팅을 적극 활용하라. 의외의 성과가 빠르게 도출될 수 있으니.
•작목의 경제성을 과장 선전하는 묘목상의 상술에 현혹되지 말자.
•가장 믿을 만한 농사 조언자는 귀농 선배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이야기입니다. 손자가 넷이나 되는 미국 시카고의 한인부부에게 어느 날 손녀가 생겼습니다. 아들이 둘인 큰딸 크리스틴이 딸아이를 입양하겠다고 했을 때 부부는 반대했답니다.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전업주부도 아니고 노상 출장 다녀 주말에나 귀가하는데 꼭 입양을 해야겠느냐는 거지요. 피붙이도 아닌 아이를 친손자처럼 사랑해줄 자신도 없었답니다.
그러나 큰딸은 “이번에 처음으로 엄마에게 실망했다”며 생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이 한사코 핏줄을 따지고 입양을 꺼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엄마마저’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게 너무 놀랍고 실망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크리스틴은 남편 조(미국인)와 함께 한국에 가서 아홉 달 된 아기를 안고 돌아와 자기 동생과 같게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참 예쁘고 귀여웠습니다. 그런데 사흘쯤 지났을 때 전혀 듣지를 못하는 선천적 청각장애아인 걸 알게 됐습니다. 가족들은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놀란 홀트아동복지회는 거듭 사과하면서 “파양 권한이 있으니 원하면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크리스틴은 한 달 내내 울며 생각하더니 “입양한 날부터 내 자식인데 귀머거리라고 포기할 수는 없다”며 키우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미 너무 사랑해서 보낼 수 없다는 말에 모두가 참 많이 울었답니다. 크리스틴은 “이 아이에게 엄마, 이모,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두 한국 사람인 우리 집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도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사위였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큰돈이 드는 수술을 받아야 하고, 지속적으로 치료 받아야 했습니다. 또 매일 재활센터에 데리고 다녀야 하고, 장애아를 키우는 교육도 받아야 하는 등 아이에게 하루 종일 매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위는 아이를 돌보기 위해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한창 일하는 나이 마흔 살에 회사 부사장직을 포기했습니다.
사직서에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동안 회사에서 저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경청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사실이겠지요. 저는 앞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을 통해서 잘 듣는 걸 배울 것입니다. 제가 가능하다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It has been said that I am not the strongest listener in the group! While this may have been true, I can assure you that through deafness I am learning to listen in ways I never thought possible.)
입양을 결정하면서 크리스틴은 부모에게 긴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엄마, 누가 우리만큼 엘리자베스에게 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요? 설령 있다 해도 우리도 절대 뒤지지 않는, 최고로 좋은 부모라고 자신해요. 엘리자베스가 자라서 우리가 엘리자베스 때문에 행복했던 것처럼 자기도 우리를 만나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요….”
이것은 미국의 내 블로그 이웃이 2008년의 일이라면서 19일에 되살려 올린 글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글을 다시 올린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문재인 대통령의 하루 전 신년회견 발언 때문입니다. “입양 자체는 위축시키지 않고 활성화해나가면서 입양 아동 보호할 수 있는 대책도 필요하다. 입양 부모 경우에도 마음이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일정 기간 안에는 입양을 취소하거나 여전히 입양하려는 마음은 강하지만 아이하고 맞지 않는 경우 입양 아동을 바꾼다든지 (하는) 여러 방식이 있다.” 귀가 의심스러운 발언이었습니다. 생후 16개월 된 아기 정인이는 입양된 후 양모의 학대와 폭력으로 끝내 목숨을 잃었지요. 그런 사건의 재발 방지책을 묻자 대통령이 한 대답입니다.
발언이 알려지자 충격과 실망, 분노를 담은 비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입양하려는 아이가 공산품인가요?”, “입양이 무슨 홈쇼핑이냐.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 “개와 고양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소시오패스가 아니라면 이런 발상 자체가 불가능하다” 등등.
지금 국민들은 정인이 사건으로 큰 내상을 입은 상태입니다. 양부모의 끔찍한 학대로 고통스럽게 짧은 생을 마감한 정인이 때문에 슬퍼하는 국민들에게 대통령의 발언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황당한 발언은 처음이 아닙니다. 세월호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이들에게 “고맙다”고 방명록에 쓰거나 북한의 목함지뢰 폭발사고로 다친 병사를 만나 “짜장면이 먹고 싶은가”라고 물은 일도 있었습니다.
왜 말을 그렇게 한 것일까요? 신년회견을 앞두고 네 번이나 리허설을 했다던데, 당연히 나올 걸로 예상되는 질문이었을 텐데. 일부의 지적대로 ‘공감능력의 결여’ 탓일까요? 대통령은 기자들을 자주 만나지도 않지만 회견을 할 때마다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그 말을 받아서 “대통령도 반품이나 취소를 해야겠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말은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 서툴러집니다. 귀는 남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 어두워집니다. 그러니 언론과 담을 쌓고 살거나 아랫사람의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살다 보면 본의도 아니고 고의도 아니지만 실언도 허언도 아닌 망언이 나오게 됩니다.
그나저나 그 여자는 왜 굳이 입양을 해서 어린 생명을 앗아갔을까요? 잊고 싶기도 하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정인이의 모습이 자꾸만 되살아납니다. 선의를 가장하고, 입양 사실을 자랑하면서, 시시덕거리면서 살던 양부모의 영상을 보는 것도 괴로운 일입니다. 말은 쓸어 담을 수도 없고, 반품도 취소도 안 되지만, 그래도 대통령님, 어디 다시 한번 대답을 해보세요.
2018년 초연 당시 전 좌석 매진 신화를 기록한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가 3년 만에 정동극장에 귀환한다. 초연을 함께한 뮤지컬 배우 정영주는 이번 공연에서 출연과 함께 프로듀서를 맡아 무대 안팎을 동시에 책임진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그녀의 연기 인생에 첫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안겨준 작품이자, 프로듀서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그녀에게 뜻깊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에 참여한 소감은 어떨까. 배우와 프로듀서를 넘나들며 무대를 뛰어다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베르나르다 알바’는 어떤 작품인가?
남편을 잃고 집안의 권력자가 된 베르나르다 알바가 자신의 다섯 딸에게 극도로 절제된 삶을 강요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딸들의 참아왔던 본능과 욕망이 움트고 표출되면서 갈등이 시작되죠. 알바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딸들에게 어떤 비수가 되는지 모르는 채 앞만 보고 달려가요. 처절하고, 어리석다면 어리석은 캐릭터죠.
Q. 여배우들만 출연한다는 점이 인상 깊다
늘 듣는 질문인데요. 다양한 인간 군상을 표현하는 작품에 여배우 열 명이 모인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오랜 시간 휴머니즘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뤄지지 않았잖아요. 특히나 한국 공연계는 장르 편식이 심한 경향이 있죠. 그래서 여성 배우들만 출연하는 작품이라는 데 초점이 맞춰지는 게 아닐까 해요.
Q. 작품 속 플라멩코의 역할은?
스페인의 정열적인 전통 안무인 플라멩코는 감각적이면서도 영리하게 인물들의 내면을 극대화화하는 역할을 해요. 안무의 한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캐릭터 같죠. 마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 살고 있는 여자들 같다고나 할까요. 단순히 몸짓, 춤 등으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예요.
Q. 프로듀서 데뷔인데 소감이 어떤가?
초연을 하고, 한 번으로 끝나서는 안 될 공연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작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 보니 용기 내주는 회사가 많지 않았죠. 운 좋게도 제가 소속된 ‘브이컴퍼니’의 황주혜·최대성 대표는 이 공연에 대한 제 열정을 알아주었어요. 대단한 설득을 하지 않았는데도 프로듀서라는 직책을 맡겨주었죠. 엄청난 책임감을 안고 있는 상황이지만, 즐기면서 버티고 있어요.
Q. 배우로서 무대에 설 때와 다른 점은?
같은 공연을 다시 올리는 무게감은 배우로서 여러 번 경험해봤지만, 프로듀서로서 참여할 때는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아요. 프로듀서는 무대뿐 아니라 무대 바깥까지 모든 것을 살피고 분석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객석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하거든요. 두렵지 않은 건 아니지만, 해내지 못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Q. 작품 외에 관심 있는 서사가 있다면?
극작과를 전공해서 습작이 좀 있어요. 각기 다른 분야에서 연기를 하는 4명의 여배우 이야기, 불후의 명작에 등장하는 치열한 5명의 전사들 이야기, 만화 속에 나오는 성공하지 못한 마녀들이 조찬회동에서 벌이는 이야기 등 아이디어가 꽉 차 있죠. 어설프고 완성도도 떨어지지만, 열심히 고쳐보면 덤벼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하나씩 자랑해볼까 해요.
Q. 이루고 싶은 최종 꿈은?
무대를 놓지 않는 것이요. 배우로서든 프로듀서의 위치이든, 왠지 무대를 떠나지 못할 수도 있는 운명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하하. 너무 거창하죠? 그냥 예술 노동가로 장수하고 싶어요. 한 239살쯤까지?(웃음) 제 무대로 많은 분이 위로받고 용기도 얻는다면 한없이 감사할 것 같아요.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일정 1월 22일~3월 14일 장소 정동극장
연출 연태흠 출연 정영주, 이소정, 강애심, 황석정 등
15년 넘게 파킨슨을 앓았지만, 왕복 네 시간 사무실을 오갈 정도로 건강했던 남편. 그러던 남편이 85세 되던 해, 갑작스러운 병고로 쓰러지며 4개월여를 병상에 누워 지냈다. 당시 아내 유선진 씨의 나이 80세. 병원에만 갇혀 사는 남편에게 다시 일상을 선사하고자 그녀는 의사의 만류에도 재가 간병을 택했다. 그렇게 남편을 돌본지 어느덧 5년이 훌쩍 지났다. 이제 남편은 아흔이 넘었고, 아내도 여든 중반이 됐다. 혹자는 인생의 황혼기에 병 수발드는 아내의 모습을 안쓰럽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 어느 때보다 현재의 부부생활이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녀다. 비로소 ‘진짜 부부’가 되어 사는 하루하루가 감사하다는 유선진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 평 반의 행복’을 펴내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온라인상에 제 글이 몇 편 올라가 있었어요. 여고 동문 카페랑 동생이 운영하는 카페 등등. 그런 글이 공유되다가 지금 출판사 사장님 눈에 들어온 거죠. 제 글이 마음에 드셨는지 이렇게 노부부의 생활을 책으로 엮었으면 한다고 제안하더군요. 저는 원래 수필을 써왔던 사람인데, 그 글은 남편하고 사는 일상을 틈틈이 적어놓은 거였거든요. 해서 정통 수필도 아니고, 어디 발표하려고 준비한 것도 아니라 문학성이 부족하다 느껴 출간을 주저하긴 했어요. 그런데 100세시대다 보니 저처럼 배우자를 수발하는 분이 많잖아요. 그런 분들에게 제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더군요. 감사하게도 책을 읽은 분들이 도움이 됐다고 연락을 많이 주셨어요.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끼친 것 같아 보람을 느낍니다.
‘한 평 반의 행복’이라는 책 제목의 의미가 궁금한데요.
우리 부부는 한 30년 가까이, 정말 오랜 세월 각방을 썼었어요. 한 사람은 야행성, 또 한 사람은 아침형이라 도저히 패턴이 맞이 않았거든요. 그러다 남편이 85세 되던 해에 쓰러졌는데, 계속 병상에 있는 걸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의사와 자식의 반대를 무릅쓰고 억지로 남편을 집으로 데려왔어요. 그에게 삶을 주고 싶었거든요. 당시 우연히 엄청 큰 침대가 생겼죠. 그 침대 사이즈가 바로 한 평 반이에요. 그렇게 우리는 한 침대를 쓰게 됐는데, 남편 입장에서는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가장 행복했으리라 생각해요. 지난날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잠 한번 편이 못 자본 사람인데, 이제야 비로소 잠을 아주 편하게 자거든요. 하루에 18시간 이상을 자기도 할 정도로요. 그런 의미에서 한 평 반의 침대가 그에겐 참 편안하고 행복한 공간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제목을 그리 지었습니다.
책에서 그렇게 결혼 생활 53년 만에 ‘완전 일체의 부부가 되었다’고 했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가요?
내가 나를 사는 게 아니라, 내가 그를 산다는 것. 즉, 이제야 내가 남편을 살아요. 그와 똑같이 괴롭고, 똑같이 감사하고, 똑같이 즐겁고, 매사를 한 사람인 것처럼 나를 그에게 일치시키게 되었으니까요. 간호를 하면서 보니 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사람이더군요. 그전까지는 몰랐던 감정이죠. 그런 점에서 ‘완전 일체의 부부가 되었다’고 표현했어요. 신혼 때는 각자 자기 의견이 강하고 생성이 뚜렷해서 아무리 좋아도 그런 부부 일체는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남편이 아주 어린 아이처럼 되어버려서, 다른 의견을 가질 것도 없어요. 제가 거기에 맞추면 되니까요. 그러니 갈등도 없고 마찰도 없고, 사실 집안에서 잘 걸어 다니고 밥 씹어 넘기는 것만 해도 다행이니, 별다른 기대도 없어요. 젊은 시절에 그런 걸 감사할 사람이 어디 있나요? 그땐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일이 감사한 요즘입니다.
재가 환자인 남편을 수발한 지 5년이 넘었는데,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지요?
저도 천사가 아니거늘 힘들 때야 있죠. 아무래도 인지력도 많이 떨어진 상태고요. 사실 크게 힘든 점은 없는데, 남편이 퇴원하고 한동안은 식사 시간이 참 곤혹스러웠어요. 제가 간호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바로 세끼 식사였거든요. 나름 섭생에 최선을 다해 준비했는데, 식사하러 나오는 과정에서 참 속을 썩였어요. 그때가 가장 힘들어서, 식사 시간만 잘 지켜주면 다른 건 바랄 게 없다 싶을 정도였죠.
반대로 가장 즐거운 일은 무엇인가요?
그냥 다 전체적으로 함께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 즐거워요. 무엇보다 남편이 엄청 행복해하는 게 느껴지거든요. 정말 예전에는 못 봤던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을 때가 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 저도 참 즐겁고 행복한데, 저희 아들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환자의 상태에 따라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라고요. 환자가 상태가 좋다고 해서 기분 좋아지고, 아프다 해서 기분 나빠지고 하지 말라는 거죠. 그저 이만큼이라도 나아져서 일상을 함께하고, 그동안 잘못했던 것을 만회할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라 하더군요. 그 말을 잘 새기고 보니 현재가 감사하고, 또 즐거운 일 천지더라고요. 사실 저는 남편에겐 아주 나쁜 아내였거든요. 아들의 조언처럼 고약하게 굴었던 지난 세월을 만회할 수 있는 지금의 시간이 참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남편과의 여생을 어떻게 보내고 싶으신지요?
남편도 아흔이 넘었고, 인지력도 거의 없다 보니 앞으로 함께할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이 한 인간으로 태어나 보내는 인생의 마지막인 순간인 거잖아요. 지금 나하고 보내는 일상을, 이 삶을 간직하고 떠나게 될 텐데, 모쪼록 좋은 기억으로 남아 ‘이 세상이라는 게 참 좋고 따뜻한 것이구나’라는 걸 마음에 품고 갔으면 해요. 그게 제 소망입니다. 그러기 위해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늘 웃는 얼굴로 남편을 맞이하고, 내 자신이 먼저 즐겁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 모습이 남편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물론 그렇게 사는 것이 제게도 충만한 삶이고요.
2021년 한 해 바람이 있다면요?
올해 1년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에 기도할 때마다 ‘오늘만 같게 하소서’라고 빌어요. 더 낫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오늘만 같길 바라는 거죠. 어쩌면 지금의 우리에겐 그게 가장 어려운 바람일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어떤 물리적인 상황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제 마음이 오늘만 같길 바란다는 의미도 있어요. 하늘이 주시는 대로, 어떤 위기가 오든지 욕심 없이 감사하며 같은 마음으로 살았으면 해요. 남편도 이제 거의 노환의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에 헛된 바람 같은 건 가지면 안 되거든요. 가능한 한 병원 신세 안 지고, 저하고 이렇게 오늘처럼 평안한 삶을 살다가 떠난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유선진 저자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미동초등학교, 경기여중·고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고, 1987년 ‘월간문학’ 수필 부문에서 신인상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2002년에 발표한 첫 수필집 ‘섬이 말한다’가 같은 해 한국문예진흥원 우수도서로 선정됐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며, 2009년 산문집 ‘사람, 참 따뜻하다’, 2014년 수필선집 ‘쓴맛 단맛’, 2020년 어르신 이야기책 ‘그와 내가 있는 삽화’, ‘내 사랑 엄지’, ‘딸’을 출간했다.
글 정순옥(제1회 브라보 ‘인생 100세 시니어 공모전’ 대상 수상자)
“여기 이 쇼핑 봉투에 넣으면 될 것 같은데?”
“아니야. 보나마나 작아. 이건 너무 크고, 어쩐다?”
아이가 건네준 서너 개의 쇼핑 봉투는 제 몫을 하지 못하고 차례로 옆으로 놓였다. 내 앞에는 아이가 가져갈 옷들과 잡다한 물건들이 담아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양이 어중간해서 쇼핑 봉투로 한 번에 담으려는 손길을 무색하게 한다. 그렇다고 버스에 전철을 갈아타고 가야 하는 길을 양손에 짐을 들고 다니기에는 번거로워 딱 맞는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이다. 순간 무언가 떠올라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갑 속에서 두둑한 상자를 꺼내왔다. 그러고는 꺼낸 것이 바로 보자기였다. 크고 작은 색색의 조각보로 만든 보자기들, 그중에서 제법 넉넉한 크기로 골라 짐을 싸니 한 번에 담을 수 있었다.
“어때? 좋다. 손에 들기도 편하고 예뻐서 보기에도 좋고.”
“응? …으응.”
아이의 얼굴에는 마뜩치 않은 웃음이 흘렀다.
“됐어. 어차피 내가 들고 갈 텐데.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이제 짐을 쌌으니
나갈 준비해야겠다.”
하긴 나도 보자기를 서슴없이 손에 들게 된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직 공부 중인 아이에게는 영 어색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보자기는 쇼핑 봉투가 나오기 전에는 짐을 옮기는 일을 전담했고 대부분 집에서 만들어 썼다. 내 기억 속에도 생전에 엄마가 볕 좋은 날 툇마루에 앉아 보를 만드는 모습이 있다. 주로 한복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으로 크기에 따라 자르고 이어 붙여가며 만들었는데 특히 한복은 화사함이 좋아 조각보로 이어 붙이며 상보나 베갯잇. 보자기 등으로 탄생하곤 했다.
조각보는 크고 작은 조각들을 손으로 바느질해야 하고, 홑겹이기 때문에 시접을 서로 맞물려 고정시켜 나가는 쌈솔로 해야 한다. 그 과정이 한 번에 ‘뚝딱’이 아닌.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해야 하는데 그렇게 이어 붙여가는 부분은 홑겹이 두 겹으로, 바탕보다 진한 부분으로 드러나고, 그렇게 도드라진 선은 다시 이어지며 완성하고 나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무엇보다 조각보를 잇는 바느질은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야 한다. 자칫 설렁설렁 바느질을 했다가는 모양이 엉성해지는 것은 물론 이음 부분이 벌어져 제 기능을 못하고 전체적인 균형도 일그러지고 만다.
삯바느질로 자식 넷을 키워낸 엄마는 시내에서 꽤 이름 있는 한복집에서 일을 맡아 했다. 자그마한 몸집에 무척이나 바지런했던 것처럼 바느질 솜씨도 좋아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손끝이 야물다는 칭찬에 단골손님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 공부가 끝나고 집에 들어서면 엄마는 늘 화사한 한복과 함께하고 계셨다. 그런 엄마 곁에서 어쩌다가 자투리 천으로 바느질이라도 할라치면 엄마는 세모난 눈길로 바늘을 놓게 했다.
“엄마는 한복을 만들지만 너는 한복을 맞춰 입어야 헌다. 암, 그래야지. 그렇고 말고.”
그래도 나는 엄마가 바느질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 특히 한복을 만들고 남은 옷감으로 무언가를 만들 때는 나도 참여할 수 있어 좋았고 조각보로 이어감으로써 점점 커져가는 시간은 뿌듯함마저 갖게 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보자기에 짐을 싸면 특별함이 더해져 참 좋았다.
손끝으로 전해져오는 부드러운 질감도.
지금 돌아보면 조각보를 이어가는 것이 바로
내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탕이 되는 기본 조각보에 덧대어지는 크고 작은 조각들.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로 툭하면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을 맞이했던 서러움으로 채워진 조각보 하나,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덤벼들 기세로 마음의 날을 세웠던 조각보 둘,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에 힘을 얻었던 조각보 셋….
처음에는 조각보를 잇는 바느질 솜씨가 서툴러 이리 삐죽, 저리 툭, 이음 부분이 삐져나오고 시접 부분이 불거져 풀고 다시 바느질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다른 조각으로 대처할 수도 없었으니. 그렇게 힘듦으로 이어진 조각보는 내 삶의 든든함으로 자리 잡았고 은근한 배짱으로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지금,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이 많기를 바라는 내 삶은 수많은 조각들로 이어져 왔고 또 다른 조각들로 이어질 것이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날을 보내면서 얻게 되는 일상의 소소함과 그로부터 갖게 되는 마음이 풀어내는 것들로 조각보는 이어져가고,
한 숨 쉬어갈 때쯤이면 상보가 되고, 보자기가 되어
내 삶의 반짝이는 순간이 되어준다.
단발머리 깡충이며 아무 걱정 없던 그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앙증맞은 소반 위에 차려진 밥상 위에 놓인 상보가 전해주던 맛있는 즐거움으로. 자식의 나이에서 벗어나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식을 준비할 때 손수 지어주신 한복을 싸주던 보자기가 품어주던 설렘으로, 엄마의 사랑으로.
“엄마, 이제 나가야 해요. 버스 도착 10분 전이에요.”
“그래. 가자.”
나는 아이의 짐을 싼 보자기를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부드러운 질감이 기분 좋음으로 전해져 왔다. 삶의 너울로 울퉁불퉁한
내 삶을 한 번에 안아주는 든든함으로.
조각보자기를 통해 내 삶을 마주한다. 빳빳한 쇼핑백보다는 조각보자기가 더 좋은 만큼 그 어떤 감정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 듦의 여유로움을, 색도 크기도 다른 조각보 속에 담겨 있는 내 삶이 소중함을, 조각보를 바느질하며 남아 있는 내 삶을 담아가는 주름진 손에 힘을 쥐어본다.
귀농생활이 힘들 것을 미리 충분히 알았으나 단단히 각오할 것까진 없었단다. 도시의 아파트를 벗어나는 해방감이 컸거니와, 시골에서 자라며 쌓인 경험과 정서를 밑천으로 삼은 귀농이라 날아오르듯 가뿐한 행보였다. 그리고 즐거운 귀농의 나날이 이어졌다. 살다 보니 구름인 양 물인 양 걸림 없이 한 세상 흐르기에 좋은 게 시골인 걸 알았나보다. 김영남(56, 옥천 풀잎체험농원) 씨는 이렇게 정든 시골에서 활개를 친다. 그저 매양 웃으며 산다. 웃지 않고 산다면 이 무슨 인생 낭비? 그리 여기는 것 같다.
영남 씨의 귀농은 우연한 계기로 촉발되었다. 남들처럼 뜸 들여 면밀한 계획을 세우거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귀농지를 물색하는 식의 사전 작업을 면제해준 선연(善緣)이 그를 방문했던 것이다. 대전의 한 병원에 입원한 시어머니를 수발하다 옆 병상의 어떤 할머니까지 덩달아 수발한 게 귀농의 연줄이 될 줄은 그도 미처 몰랐다. 발버둥 쳐도 안 되는 일이 있고 가만 있어도 술술 풀리는 일이 있으니 인생이란 기묘한 게임이다. 영남 씨는 할머니와의 인연을 복이라 친다. 그렇다면 이 복은 하늘이 내렸나? 영남 씨의 갸륵한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세사의 인과(因果)는 대략 오차 없이 행진하는 법이다.
“퇴원을 한 할머니께서 당신의 시골집에 놀러오라 청하시더라. 병원에서 정들어 양어머니로 삼아 섬겼던 터라 막역한 관계 형성이 됐던 거였다. 해서, 남편과 함께 놀러갔더니 마을의 느낌이 무척 좋아 거기에 아예 살고 싶어지는 게 아닌가. 게다가 양어머니가 빈집을 추천해줬다. 뭐를 따지고 잴 게 없었다. 살던 대전의 아파트 등 부동산을 서둘러 팔아 자금을 만들었고, 그 빈집을 사 허물고 황토 집을 나름 멋지게 지었다. 일사천리로 단숨에 귀농했던 거다. 2016년의 일이었다.”
농원 규모가 엄청나다. 이 너른 언덕배기 토지를 어떻게 확보했지?
“시부모님이 남편에게 물려준 유산이다. 전답과 임야로 이루어진 1만8000평짜리 터로 이 가운데
1만 평을 과수원으로 개간해 운영한다. 복숭아도 꽤 많이 심었지만 사과 재배에 주력하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농원 일대의 풍광이 아름답다고 팔짝팔짝 뛰더라. 정작 나는 풍경을 즐길 시간 여유조차 없는데.(웃음) 귀농, 이거 정말 장난 아니다.”
우연하고도 충동적으로 이루어진 귀농이었구나.
“그런 셈이다. 계획적이었다면 남편의 직장생활부터 청산했겠지만 그러질 않았다. 시골에 내려와서도 남편은 한동안 대전으로 출퇴근을 했다. 1년 이상 직장 일을 계속하다 그만뒀거든.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옆집 주민과 마찰이 빚어져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동네에서 아예 내놓은 기인이었다. 결국은 여생을 눌러 살고자 공들여 잘 지은 집에서 2년여를 살다 현재의 이곳으로 이사를 했지. 이게 전화위복이 됐다.”
이곳은 풍광부터 평온하다. 산자락에 안긴 집이라 호젓하고. 이런 터를 찾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용케도 이사를 결심했던 때에 나온 매물이었다. 처음에 살던 집과 지척이지만 모든 여건이 더 좋았다. 기도원으로 쓰던 2층집이었다. 부지 2000평에 전답도 딸려 있어 금상첨화였다. ‘야, 여기가 낙원이구나, 이제 본격적인 귀농생활로 고고싱이다!’ 내가 그렇게 외쳤던 거다.(웃음)”
드디어 농사를 시작했나?
“농사를 해본들 보람이 있겠나? 내가 원래 농사라는 직업엔 회의적이었다. 시골 출신으로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지. 그러나 남편은 농사에 뛰어들었다. 어쩔 수 없이 나도 복숭아대학을 다니는 등 농업에 관심을 가져봤지만 그건 나의 일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농사는 남편이 짓고,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은 너무도 많았다. 뭐든 맘먹고 덤벼들면 다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넘쳤지. 문제는 최적의 일을 찾아내야 한다는 데에 있었다. 식용곤충농장이 적합해 보여 산업곤충 공부를 좀 해봤지만 비전이 보이지 않아 포기했다. 이런저런 모색을 하다 그냥 적성과 능력에 맞춰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답이 나오더라.”
어떤 답이?
“도시에서 오랫동안 다육식물과 야생화를 즐기는 단체에서 활동한 경험을 살려 다육식물 전문 농원을 만들기로 했다. 된장이나 고추장을 맛있게 담그는 사람으로 알려졌으니 장류 사업을 병행해도 무난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들은 단기에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일이 아니지. 그래 일단은 카페를 차려 생활비를 벌기로 하고 2층 공간을 개조해 찻집을 차렸다. 내겐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었다.”
그의 카페엔 특별한 게 있다
허세와 뻥 없는 겸허함으로 내 실력에 맞춰 사는 일. 그걸 지혜라 일컫지만 지지고 볶는 세파에 흔들리다 보면 과욕과 과속을 일삼다 표류하기 십상이다. 잘할 수 있는 일을 잘해내는 인생은 꽃길이다. 그러나 정작 가시밭길을 헤매다 종 치기 쉬운 게 인생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영남 씨,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로 자신부터 기쁘게 하는 쪽으로 일을 구상했던 것 같다. 후미진 산기슭에 웬 카페인가 싶지만 개업 1년 남짓이 지난 현재 어지간히 자리가 잡혔다. 잘 돌아간다.
농원 전체의 담백하고 조촐한 풍색과 마찬가지로 카페 역시 소박하게 꾸몄다. 조화나 그림 액자, 소쿠리, 또는 특별할 것 없는 빈티지 장식품들로 공간을 치장해 동네 사랑방처럼 따사로운 분위기가 감돈다. 그래서인가, 인근 읍내 주민들이 찾아들어 단골 노릇을 한다. 멀리 대전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사뭇 독특하거나 매력적인 공간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순탄하단다. 이 카페엔 뭔가 특별한 게 있나보다. 뭘까.
“손님들이 편하게 쉬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기도 하지만 우선은 찻값이 착해 좋다고들 한다. 차와 함께 제공되는 군것질거리로도 호감을 산다. 푸짐하게 내놓거든. 요즘 같은 철엔 군고구마와 군밤, 옥수수 튀밥을 한꺼번에 제공한다. 이렇게 퍼주고 남는 게 있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지만, 이 외진 산골짝을 찾아주는 분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일 뿐이지. 난 스스로 선택한 일이면 무조건 즐기는 태도로 임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정말 즐거워지더라.”
날이면 날마다 손님들을 맞이해 신경 써야 하는 게 찻집 일이다. 은근히 감정 소모가 많을 것 같다.
“난 센치한 멋과 분위기를 추구하는 스타일의 여자가 전혀 아니다. 사교적이랄까, 긍정적이랄까, 내겐 그런 기질이 충만해 있다. 때로 아줌마들과 어울려 앉아 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카페 일에 만족스럽다.”
코로나로 불황이 자심하다. 찻집에서 나오는 월수입을 말해줄 수 있을까?
“평균 순소득 250만 원쯤?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부부 둘의 생활비로는 부족하지 않다. 그래도 남편에겐 좀 미안하다. 그간 농원 조성을 위해 내가 많은 자금을 쏟아 부었거든.”
당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남편은 자동차 회사 쉐보레에서 판금 기술자로 근무하다 은퇴했다. 농장 운영이나 카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력의 소유자라는 얘기다. 그러니 내가 모든 걸 주도하지 않으면 누가 하나? 남편에게 선언한 약속이 있다. ‘걱정 말라, 반드시 수익이 창출되는 농원으로 키울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겠다!’ 하하하!”
아직은 불쏘시개 지피는 단계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도 목소리도 쾌활하다 못해 화통하다. 말방울 쩌렁거리는 것 같다. 그건 오래된 습이다. 잘 이해할 수 없는 게 인간사라지만 낙관과 긍정으로 매사를 접수하면 넘지 못할 벽이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밝은 천성도 한몫 거들어 잘 웃게 하는 안면근육을 발육시켰다. 그의 어려서부터의 꿈은 가수였다. 결혼을 하고서도 버리지 않은 꿈이었으나 남편의 반대로 포기했단다.
“남편이 뒷바라지를 해줬다면 지금쯤 유명 가수는 아니라도 밤무대 가수 정도로는 뛰고 있을 게 틀림없다.(웃음) 애석하게도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노래강사 자격증을 따 대전에서 갖가지 봉사활동을 했다. 웃음치료사로도 맹활약을 했다. 그거 아시나? 웃음치료사가 얼마나 좋은 건지를. 남들을 행복하게 하기 이전에 나 자신부터 행복해져 너무 좋더라. 인생이 바뀌더라. 매사에 긍정적인 인간으로 변하거든.”
우울의 늪에 빠질 뻔한 시절도 있었다. 유방암 3기 판정을 받고 사투를 했던 것인데 긍정심을 약 삼아 완치했다. 이후 삶이 한결 소중하고 감사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삶의 감사함을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좋은 인생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걸 실증해보이기 위해 귀농의 나날들을 웃음으로 맞이하고 웃음으로 떠나보낸다.
농장을 둘러볼까. 집 뒤편 경사지에 비닐하우스 석 동이 있다. 하우스 하나에선 다육이 화분들이 도란거린다. 영남 씨는 이 땅딸보 식물들이 향후 농원의 성장 주역으로 부상하게 될 것을 믿는다. 특용작물을 시험 재배하는 하우스도 있다. 닭과 칠면조와 토끼를 기르는 하우스도 재미있다. 국화를 군락으로 조성한 산책로 맨 위편 평탄지엔 언제 보아도 푸근한 인상으로 무상의 보시를 하는 항아리 200여 개가 놓여 있다. 한판 야무지게 된장 사업에 뛰어들 것을 예고하는 풍경이다. 찜질방과 민박용 객실도 지어놨다. 아직은 불쏘시개를 지피는 단계이지만 영남 씨는 복합농원으로 키워나갈 포부에 부풀어 있다.
“친구들은 나를 두고 이미 성공한 귀농인이라 한다. 나를 보고 귀농을 따라 한 친구들도 있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 귀농인의 귀감이 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목적 지점에 도달하고 싶다. 마을 이장 선거에도 나갈 참이다. 왜냐고? 이장의 선의와 노력만으로도 마을 공동체의 풍토가 개선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김영남 씨가 주는 귀농 Tip
•반드시 부부가 함께 귀농하자. 농촌에선 원주민들과의 소통 등 아내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다.
•농업정책자금에 관심을 가져라. 크고 작은 각종 지원 제도가 운영되고 있으니까.
•귀농하기 전에 각 지역에 있는 귀촌귀농단체의 총무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자. 그게 가장 신빙성 있는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