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대한 정의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여행 아닐까. 이왕이면 평소 사는 곳과 다른 곳일수록,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일수록 완벽한 여행지가 되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 하지만 누군가는 별을 보고 있다네”라고 했던가. 살면서 꼭 한 번은 밤하늘에 펼쳐지는 신비로운 빛을 만나보고 싶다. 그 황홀한 광경을 보고 나면 우주는 더욱 위대해 보일 것이고 우리네 삶도 조금은 숭고하게 느껴질 것 같다.
최고의 오로라 관측소, 옐로나이프!
전 세계적으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같은 북구의 나라와 미국 알래스카, 캐나다 화이트호스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중 옐로나이프는 나사(NASA)가 지정한 오로라 관측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다. 여름에도 오로라를 볼 수 있지만 11월에서 4월 사이 밤이 긴 겨울이 가장 좋다.
북극광(northern light) 혹은 극광이라고도 불리는 오로라는 라틴어로 ‘새벽’을 뜻한다. 태양에서 방출된 플라스마 입자가 자석 성질을 가진 지구의 극지방 주변을 둘러싸면서 붉은색이나 녹색, 파랑, 노랑, 분홍 등 다양한 색의 자기 에너지 띠로 나타나는 것이다.
엘로나이프로 향하는 프로펠러 비행기 안. 일본인들과 중국인들, 영국 등지에서 온 유럽인들, 그리고 캐나다인처럼 보이는 가족들도 보인다. 일본은 오로라 여행이 대중화되어 일반인과 신혼여행객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오로라가 뜰 때 아기를 가지면 그 아기가 천재가 될 확률이 높다는 믿음 때문이라지만, 혹한과 어둠을 뚫고 세상에서 가장 보기 어려운 신비로운 빛을 함께 경험하는 일은 두 사람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을 선사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비행기 안에서 엷은 환호가 터져 나온다. “저기… 저기… 오로라다.” 반대편에 앉은 승객이 창 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자 기내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창밖으로 향한다. 나도 벌떡 일어나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깜깜한 하늘에 두 줄기 오로라가 어른댄다.
“아~ 저것이 말로만 듣던 오로라구나.”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오로라, 그것은 마치 바닷속의 돌고래를 보는 것과 같다. “고래다!” 하고 소리치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신기루 같은 존재 말이다.
오로라 빌리지를 통하면 모든 예약이 하나로
오로라를 보러 옐로나이프를 간다면 오로라 빌리지(Aurora Village)를 통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한국에서 비싸기로 유명한 캐나다 구스는 영하 50도까지 내려간다는 이곳 옐로나이프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평소엔 입을 일이 없기에 오로라 빌리지에서 대여해준다. 방한 점퍼와 바지, 마스크, 두터운 신발과 장갑까지 착용하고 나면 마치 우주복을 입은 듯한 기분이 든다. 이제 저 하늘을 둥둥 떠다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옐로나이프 오로라 사진마다 등장하는 아름다운 원주민 텐트 ‘티피(teepee)’ 안엔 따뜻한 화로가 있고 간단한 수프와 빵, 차와 커피, 코코아 등이 준비되어 있어 장시간 오로라 사진을 찍거나 관측하다 꽁꽁 언 몸을 녹일 수 있다.
캄캄한 어둠속을 달려 오로라 빌리지에 도착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스고이”, “스고이”라는 일본말과 외국인들의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뛰어나가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과연 지상에서 보는 오로라는 어떤 모습일까? 정말 사진에서처럼 그렇게 환상적일까? 깜깜한 밤하늘에서 처음엔 희미한 듯하더니 점점 더 강렬하게 하얀 빛줄기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20초. 마침내 신의 영혼인 듯, 천상의 빛인 듯, 신비롭고 영험한 기운이 내게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잊지 못할 오로라 여행이 시작되었다.
낮 동안의 신나는 북극 체험
전날 밤 오로라를 보고 숙소에 돌아온 시각은 새벽 3시. 이곳에서의 일정은 밤에 오로라를 보기 위한 기다림으로 채워진다. 바쁠 것 없는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내다보는 창밖 풍경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영화 속 엘사가 살던 ‘겨울 왕국’ 그 자체였다.
밤엔 매일 오로라를 관측하고, 낮엔 다양한 북극 체험을 했다. 얼어붙은 그레이트슬레이브 호수를 걸어보는 아이스로드(ice road) 체험, 시베리안 허스키를 타고 하얀 숲을 달리는 개썰매 체험, 이누이트 원주민들이 신던 스키를 신고 산속을 트레킹하는 스노슈잉(snow shoeing) 체험이 대표적이다. 이런 액티비티한 경험은 어디서도 해볼 수 없는 이색 체험들로 반드시 해보기를 권한다. 노스웨스트 의회 청사나 박물관에 들러 이곳의 역사를 알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노슨이미지(Nothern Image)에서는 원주민이 직접 그리거나 만든 예술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마지막 밤, 오로라를 보며 신에게 감사를
드디어 떠나기 전 날 마지막으로 오로라를 보러 가는 길, 호텔 로비의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밤 9시의 기온은 영하 33도, 체감온도는 영하 40도!!!!! 실제로 체험해보기 전엔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기온이다. 그러나 언제나 상상이 더 무서운 법. 막상 가보면 별것 아니다. 오로라 빌리지에 도착하니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오로라도 별이나 달처럼 날이 맑을수록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티피 안에서 코코아를 마시고 있을 때 밖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4박 6일의 여행기간 중 가장 눈부시고 화려한 오로라가 나타나줬다. 영하 40도의 혹한과 어둠을 뚫고 마지막 날 가장 아름다운 신의 영혼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의 마음이 북받쳐 올라왔다. 좀체 보기 힘들다는 핑크오로라도 볼 수 있었다. 마시초 갓(Mahsi-cho, god)! 원주민어로 “신이시여, 감사합니다”라는 의미다. 사진 속에서만 보던 ‘오로라의 아우라’를 실제로 체험하고 나니 오랫동안 꿈꿔왔던 소원 하나를 이룬 느낌이다. 모든 여행은 눈을 뜨고 꾸는 꿈이라 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꿈을 꾼 듯했다. 지구별이 아닌 다른 행성으로 다녀온 꿈 말이다.
travel tips>>
항공편>>인천-밴쿠버-캘거리-옐로나이프로 연결된다. 밴쿠버에서 옐로나이프로 바로 가는게 없고, 캘거리를 거쳐야 하므로 비행기를 최소한 세 번을 바꿔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가는데만 하루가 소요되는 힘든 길이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오로라 빌리지 예약 시스템>> 옐로나이프 여행의 핵심은 오로라빌리지이다. 모든 여행 시스템은 오로라빌리지를 중심으로 매우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개별여행자는 오로라 빌리지를 통하면 방한복 대여 및 오로라관측에 대한 일체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Aurora village (www.auroravillage.com)4720 Northwest Territories Ltd. Yellowknife, NT, CANADA /Tel 867-669-0006
추천숙소>>
옐로나이프엔 혹한과 어두음을 피해 안락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숙소가 다양하다. 필자의 경우, 더운 나라에 갈때엔 저렴한 게스트하우스 등을 이용하는 편이지만 이곳은 혹한의 환경이라 가장 좋은 익스플로러 호텔을 선택했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호텔급에서부터 inn, B&B, 게스트하우스, 로지, 콘도스타일까지 다양하므로 취향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숙소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시내 중심의 관광 인포메이션을 제공하는 비즈니스 센터에서 얻을 수 있다.
Explorer Hotel 익스플로러 호텔 엘리자베스 여왕도 묵고 갔다고 해서 로비에 사진도 걸려있는 가장 럭셔리한 호텔이다. 그날그날의 일기예보는 물론 친절하고 품격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며 다운 타운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용이하다. 로비와 방에서 무료인터넷도 가능하다. (www.explorerhotel.ca) P.O.Box 7000, Yellowknife, NT, CANADA Tel 867-873-3531
추천레스토랑>>
극지방에 왔으니 다른 곳에서 먹어볼 수 없는 특이한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된다. 익스플로러 호텔 1층에 있는 트레이더스 그릴(Trader's Grill) 레스토랑은 극지방에서 잡아올린 신선한 해산물과 원주민 전통요리인 순록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늑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Address 4823-49th Avenue, Yellowknife, NT, CANADA
Tel 867-873-3531
추천 준비물>>
오로라 사진은 핸드폰으로는 잘 찍히지 않는다. 일정시간 이상 노출을 해야 하므로 오로라 사진을 찍고 싶다면 트라이포드(삼각대)와 수동설정이 가능한 카메라와 광각렌즈(18mm이상)를 준비해가는 것이 좋다.
★여행경비400만원 내외
58개띠들이 하면 유행이 된다. 폭발적인 우리 사회 인구증가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58년생들은 사회 변화와 유행을 주도한, 지금으로 치면 ‘완판남’·‘완판녀’로 부를 수 있는 세대다. 그들의 문화적 파괴력은 굉장했다. 여러 분야 중 특히 여행과 관련한 58개띠들의 문화주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빈궁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의 혜택을 보기 시작한 이들은 다양한 여행을 경험해나갔다.
1978년. 58개띠들이 만 스무 살이 되던 해. 당시 8월 17일자 경향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린다. ‘바캉스 파장 … ‘고요’ 되찾는 산하, 연인원 5천만 기록’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당시 여름휴가를 위해 산과 계곡, 바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를 증언한다. 재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작년 대비 피서객이 40% 늘었다는 대목이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성인이 된 58개띠들이 피서객 증가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도 제주도는 관광지로 인기가 좋았다. 평소 600석 내외로 운영되던 서울-제주 간 항공편은 피서기간에는 1000석 이상으로 증편돼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다음 해인 1979년, 철도청은 고급여행을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새마을호 객차 확충을 서둘러 진행했다.
물론 58개띠들이 여행 보따리를 맘껏 싸기 시작한 원인에 경제성장의 수혜도 빼놓을 수 없다. 1977년은 우리 경제의 상징적인 시기였다. 1인당 GDP가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해 1034달러를 기록했고, 수출 역시 최초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배고픔은 점차 잊히고 있었다.
가장 원하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
그렇다면 58개띠들의 신혼여행은 어땠을까. 통계청이 2011년 발표한 ‘최근 30년간 초혼자료 분석’에 따르면, 1981년의 남성 초혼 연령은 26.4세, 여성은 23세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58개띠들의 결혼이 이뤄진 시기는 이들이 23세에서 26세를 지낸 1981년에서 1984년 사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1982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젊은이들의 신혼여행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등장한다. 한국갤럽이 18세 이상의 남녀 12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많이 다녀온 신혼여행지는 부산(21.6%), 경주(12.6%) 순이었다. 아무래도 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제주도는 3위(12.2%)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재미있는 것은 순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존재다. 당시 지방 거주민들에게 서울은 충분히 매력 있는 여행지였다. 신혼여행으로 서울을 선택한 이들은 5.4%나 됐다.
가고 싶은 신혼여행지로는 역시 제주도(46.5%)가 가장 많이 꼽혔고, 당시 왕래가 여의치 않았던 외국을 꼽은 이들도 13.1%나 됐다. 3위는 설악산(11.8%)이 꼽혔는데, 다녀온 여행지에서 7위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설악산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1978년 진갑을 맞은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관광지도 개발이 막 시작된 설악산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천지개벽’
58개띠가 해외 땅을 밟은 것은 ‘여행’보다 ‘일’이었다. 물론 해외 출장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고위직 공무원이나 주요 기업의 임원이 해외 출장이라도 나가면 모두 기삿거리가 됐다. 그만큼 해외 방문은 쉽지 않았다. 출장이 목적이어도 회사의 매출 규모가 낮은 기업은 여권을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
중동에서 일어난 건설 붐은 58개띠들의 해외 구경의 좋은 구실이 됐다. 굳이 따지자면 58년생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말까지 일었던 중동 붐의 막차를 탄 세대다.
1985년 해외로 나간 한국인은 약 48만 명이었다.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 이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많았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다.
서울올림픽 개최 다음 해인 1989년이 되면서 전 국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졌다. 1983년만 하더라도 50세 이상인 사람이 관광예치금을 200만 원 이상 맡겨야 관광여권을 받을 수 있었지만 매년 대상 연령이 낮아지다가 1989년에 완전 자유화가 이뤄졌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1990년부터 신문 지면에는 ‘배낭여행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즐겨 찾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에서 태국이나 필리핀으로 바뀌었다.
세운상가 외제장사 아시나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해외 출장 근로자들의 부업 중 하나는 바로 소니와 산요로 대표되는 일본 가전제품을 내다 파는 일이었다. 이들이 면세점 등에서 구매해 들여온 카메라, 오디오, 전기밥솥 등은 세운상가 상인들에게 늘 환영받았다.
그러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지면서 소비자들이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사갖고 들여오는 문화가 확산됐다. 이런 문화의 아이콘으로 ‘코끼리 밥통’이 있다. 일본 조지루시 전기밥솥은 밥맛이 좋다고 입소문을 타면서 고소득층 사이에서 필수품 대접을 받았고, 점차 대중화되어갔다.
매일경제신문은 1992년 광복절 ‘일제선호 불치병인가’란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일본 버블경제의 거품이 꺼져가면서 가전제품 상점가가 몰려 있는 아키하바라역 인근 가게들은 불황을 겪고 있지만, 한국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밥통 등 가전제품을 사주는 덕에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최근 중국 관광객 유커들이 백화점에서 한국산 밥통을 사재기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당시 58개띠들의 나이는 34세였다. 김포공항 입국 수속 행렬에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신문에 게재된 해외여행 광고를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도 일본, 미국, 동남아로 지금과 차이가 나지 않았고, 도쿄 4일 여행상품이 70만 원 선, 필리핀 4일 여행 상품이 48만 원 선으로 가격도 비슷하다. 다만 다른 부분이 있다면 중국 관광의 유무다. 58개띠들이 중국 관광지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1994년 중국여행 전면자유화 이후부터다.
[추억 한토막] 대전역 가락국수 맞먹는 앵커리지공항 우동의 추억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났던 대전역. 선로가 붐비고, 대기시간이 길었던 탓에 대전역 승강장의 가락국숫집은 승객들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됐다. 비행기 여행과 관련해서도 대전역 가락국수와 비슷한 추억의 공항이 있다. 다소 엉뚱하게도 미국 알라스카 앵커리지공항이 그곳이다.
대한항공이 1975년 서울-파리 여객노선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노선이 늘기 시작하면서 앵커리지 공항은 상당수 여객기가 들러야 할 경유지였다. 당시 여객기들의 비행거리가 짧았고, 냉전으로 인해 소련 영공을 지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절차였다. 이런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 버블시대 해외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던 일본의 항공사들도 이곳을 들러야 했다.
환승보다는 급유의 목적이 컸기 때문에 앵커리지에서 머무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해외 출장이 잦았던 상사맨들이나 항공사 관계자들은 당시 앵커리지의 추억을 기억한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했던 안영희 동년기자는 “한 시간은 있어야 했는데 승객들이 딱히 할 만한 것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면세점들이 장사가 잘됐죠”라고 설명한다.
이 공항에서 인기가 가장 높았던 매장은 바로 ‘우동’. 해외 왕래가 잦았던 한국과 일본의 ‘밀리언 마일러’ 사이에선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성지였다. 일본의 몇몇 사이트에 남아 있는 기록의 편린을 맞춰보면, 앵커리지 우동은 주인이 두 번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주인은 미국계 일본인으로 육수 제작과 제면을 직접 하는 정통파여서, 본토 일본인들도 인정할 정도였다고. 가격은 10달러 내외로 비싼 편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선 ‘앵커리지 우동’이란 단어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수준 높은 우동집을 칭하는 대명사처럼 통용되고 있다.
장사가 잘되자 한 항공사 자회사가 주인을 밀어낸다.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물론 우동은 인스턴트로 바뀌었다. 냉전의 종말과 항공기 성능의 향상으로 앵커리지 경유 노선이 줄자 이 우동집은 한국인 사업가에게 넘어간다. 맛도 한국식으로 변했고, 단무지는 별매여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대한항공에서 정년퇴직한 정용진 기장은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서 앵커리지공항의 우동은 자주 언급될 정도로 유명했어요. 우동과 함께 팔았던 연어 고기도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이어서 인기가 많았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학교는 왜 그만두셨어요?”
“8월에 미국에서 있었던 개기일식이 보고 싶어서요.”
정년퇴임 2년여를 앞두고 명예퇴직을 선택한 전 부산과학고등학교 이경훈(李京勳·60) 선생님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 놀랍고 신선하다.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하산하듯 선생 자리에서 물러났단다. 은퇴를 앞두고 고민이 많았을 텐데 답변 한번 간단하다. 통쾌함도 몰려온다. 걱정 따위는 잊고 내가 즐기는 삶, 내가 소중한 삶을 살아가는 얘기를 들어봤다.
좌우명 ‘놀자’, 백발소년(白髮少年) 이야기
“개기일식 날짜가 딱 여름방학 끝나고 2학기 개학하고 나서였거든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제 인생 좌우명이 ‘놀자’거든요(웃음).”
개기일식을 이런 것 저런 것 신경 안 쓰고 보고 싶었다고 했다. 날짜도 조금 애매하게 걸려 있었다. 그렇게 과학 선생님으로서의 인생을 마감하고 신나게 개기일식 여행을 준비했다는 이경훈씨. 부산지부장으로 있는 (사)아마추어 천문학회 회원 48명과 함께 미국 아이다호로 개기일식을 보러 다녀왔다.
“이번 개기일식은 2분 16초 동안 진행됐거든요. 이 짧은 시간 동안 알차게 촬영을 하기 위해 두 달 동안 계획을 세웠어요.”
달이 해를 가리는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동안 사진과 동영상을 동시에 찍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기다려왔던 그 순간을 만끽할 만한 여유가 없다.
“개기일식을 볼 때보다 준비할 때가 더 좋아요. 현실로 닥치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계획했던 것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요.”
하늘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일도 좋지만 새로운 장비를 장만하고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이 즐겁다고. 사실 간단하게 ‘개기일식 때문이었다’고 은퇴 이유를 밝히긴 했지만 결정이 어렵지는 않았을까? 현직과 전직의 차이, 정년퇴직으로 누릴 수 있는 금전적 차이가 꽤 크다.
“3월에 학교를 그만뒀어요. 은퇴가 한 2년 반 정도 남아 있었을 때죠. 계속 과학고등학교에서 근무했으면 연봉이 대략 1억이 넘어요. 제가 2년 반을 일찍 그만둬서 명예퇴직수당이 한 5000만원 조금 안 됩니다. 임용과 관련한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다른 건 모르겠고 개기일식이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렇다면 훌쩍 떠나버린 선생님의 빈자리에 대해서 학생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교직에 있던 시절 이경훈씨는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깨나 누렸던 선생님이었다. 친구처럼 함께했던 선생님과의 갑작스런 이별을 학생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했다.
“학생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아마 알았을 거예요. 제가 나중에 자유로워지면 뭘 할 거다, 이런 얘기들을 자주 했어요. 과학고등학교 아이들이라 한마디 딱 던져도 눈치를 잘 채거든요. 깜짝 놀랐겠지만 ‘아, 이 선생님 같으면 그래서 은퇴했을 거야’라고 짐작을 했을 겁니다.”
백발의 이경훈씨는 철없는 소년처럼 생글생글 잘도 웃으며 얘기한다. 인생의 좌우명이 ‘놀자’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고 즐거운 소풍 길이었으리라.
사업가 집안에서 선생님을 꿈꾸다
이경훈씨가 만약 선친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면 부산 지역에서 이름 높은 기업 대표가 돼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을 비롯해 친척 대부분이 국제시장에서 철물, 전기와 관련한 사업을 했고 지금도 부산 지역에서 다양한 기업을 거느리고 있는 사업가 집안이다.
“우리 집안과 친척들 중에서 사업을 안 하는 사람은 저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렸을 적 이경훈씨는 사업하는 부모님을 보며 자랐다. 선친이 운영하던 사업은 바로 위 누님 내외가 이어받았다고 한다.
“제가 뭘 보고 컸냐면 월말이 되면 직원들에게 급여 챙겨주려고 돈 세는 모습과 부도였어요. 부도나면 집안 여기저기에 빨간 딱지가 붙잖아요. 그걸 보며 사업은 ‘내가 할 일은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그때가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물론 장사를 했으면 잘했을 거예요. 하기 싫어서 그렇지(웃음).”
사업가가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은 한 번쯤은 찾아오는 ‘고비’ 때문이다. 고비에 대처할 자신이 없어 일찌감치 사업은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
“그럼 뭘 할까 고민하다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올라가서 과학에 대한 흥미도 좀 생겼고요. 선생님이란 직업이 나빠 보이지 않았어요.”
사업도 사업이지만 대단하게 치열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고 그렇게 사는 것도 싫다고 했다.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요(웃음). 그냥 교실에만 앉아 있으면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오잖아요. 공부를 치열하게 했으면 성적이 더 나왔겠죠. 그럼 인생 진로가 바뀌었을 거고. 만약 그랬으면 대단히 피곤하게 살았을 가능성이 커요.”
공부를 좀 더 잘했다면 사회적 지위는 더 올라갔겠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놀면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직업을 가진 사회 구성원으로 사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경남고등학교에 응시했다 떨어져서 부산사대 부속 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어요. 고3 때 대학 진학을 결정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그러는 거예요. 사업을 이어받으려면 관련되는 학과를 가라고요.”
사범대 지원을 못하고 부산 수산대학교(현 부경대학교) 식품공학과에 진학했다.
“1학기 다니고는 몰래 자퇴했어요. 그리고 한두 달간 입시준비 뒤 부산대학교 사범대학에 합격하고 나서야 부모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대학교에서도 자신의 성적과 상황을 받아들이며 진로를 결정했다. 그렇게 전공과목으로 선택한 것이 지구과학교육학과였다.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 대학교 때 지구과학을 선택한 것입니다.”
지구과학이 천체 사진에 빠져들게 하다
지구과학교육학과에 들어가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천체 사진에 눈을 뜨게 됐다. 본격적으로 뛰어든 계기는 바로 핼리 혜성 때문이었다.
“1986년에 핼리 혜성이 한국에 왔었어요. 모교였던 부산사대 부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였어요. 학부생들이랑 같이 핼리 혜성 찍겠다고 다대포도 가고 금정산성도 오르고 그랬죠. 차가 없어서 많은 장비들을 짊어지고 버스 타고 다녔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천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천체 사진을 찍으려면 천체망원경이 필요했다. 중등 교사를 하는 동안 학교와 정부 지원 예산을 적절하게 지원받아 천체망원경을 구입해 학교에 비치했다.
“선생님들이 예산을 잘 안 써요. 돈 세고 계산하는 거 귀찮으니까요. 연말이 되면 다른 과에서 돈을 안 쓰니 돈이 남죠. 그래서 선생님들에게 이번에 안 쓰시면 천체망원경 하나 사겠다고 말하고 장만했습니다.”
연말이 되면 천체망원경 한 세트 사고 카메라도 샀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천체망원경을 구입하고 학생들의 천체 동아리 활동을 이끌었다. 지금도 그렇게 만난 제자들과 자주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난 뒤 그는 천체 사진을 찍고 또 천체 사진 찍는 방법 등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 학교 과학 선생님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그때와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과학을 대하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천체 사진의 매력은 무엇일까?
“대상에 대한 매력이죠. 별에 대한, 우주에 대한. 우선 별을 좋아하지 않으면 천체 사진에 관심이 생길 수가 없죠. 과학 중에서도 아마추어라는 이름으로 다가갈 수 있는 분야가 천문학밖에 없습니다. 과학 이론이나 지식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고 미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천체를 ‘아름답다, 정말 보기 좋구나’ 이렇게 볼 수도 있는 거죠.”
아마추어 천체 사진가들 중에는 천문학적인 과학 지식과는 상관없이 미적 대상으로만 접근하는 사람도 많다. 이경훈씨는 취미로 찍기도 하지만 주로 전문 사진을 찍고 있다. 과학 정보를 얻기 위한 데이터 중심의 천체 사진은 하드디스크에 저장해놓는다. 이렇게 저장된 사진과 영상들은 필요할 때 과학 자료로 쓰인다.
미치지 말고 서서히 중독돼라
“경북 영천에 보현산 천문과학관이라고 있거든요. 바로 그 건너편에 제 개인 천문대를 만들려고 올 초에 땅을 좀 매입했어요. 개인 공간에서 별이나 원 없이 봐야죠.”
천체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이것이 수익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인류를 위한 봉사 같은 것. 수익을 생각해 영천에다가 개인 관측지를 만들 생각이다. 전문적으로 별을 관찰할 수 있는 천체 펜션도 생각 중이다.
“별을 보러 온 사람들은 통제된 숙박을 하게 될 겁니다. 먹는 것도 통제를 받고 자는 것도 통제받고요. 별을 보기 위한 게 목적이니까. 와서 먹고 자기 위한 게 목적이 아닌 거죠. 먹고 잘 시간에 별을 봐라, 뭐 이런(웃음).”
펜션 관리를 하는 대신 천체와 관련한 고급 정보를 주고 가이드도 해줄 생각이다. 장비가 없는 사람들한테는 장비도 대여해주고 말이다.
천체 사진이나 천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당부할 게 있단다. 갑자기 매료돼 미쳐서 달려들지 않기를 말이다.
“제일 경계하는 게 미치는 거예요. 미치면 빨리 떠나요. 대체로 그래요. 너무 치열하게 하지 마라. 쉬엄쉬엄 여유를 가지라고요. 같이 시작한 사람들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2035년 9월 2일 우리 만나자!
“은퇴하고 나니까 남는 건 시간, 모자란 건 돈이에요. 2019년과 2020년 칠레에서 개기일식이 있는데 한 번은 갈 거예요. 2024년에는 미국에서 개기일식이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도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날이 있다. 바로 2035년 9월 2일. 제자들을 비롯해 강연회에서 만난 교육생들과 이날 만나자고 이미 약속했다.
“이때 개기일식이 평양을 지나 동해안, 그리고 DMZ박물관을 지나갑니다. 통일이 되면 평양 가서 볼 거고, 안 되면 동해안 DMZ박물관에서 봐야죠. 2004년부터 개기일식 관련 수업을 학생들과 할 때마다 2035년 개기일식 시뮬레이션을 했어요. 그때마다 얘기했죠. 만나자고요.”
물론 제자들이 그 약속을 평생 간직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2035년이 되면 한국의 개기일식에 관한 뉴스가 나올 테고 제자들의 기억이 봉인 해제되듯 살아날 거라 생각한다.
“2035년 9월 2일 DMZ박물관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다들 올 거예요. 근데 당일 출발하면 동해에서 길이 막혀서 못 들어올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적어도 4~5일 전에 캠핑카 타고 가서 천체망원경 몇 대 깔아놓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제자들이 애기들 데리고 오겠죠?”
이경훈씨가 팔십이 되기 전이니 정정하게 제자들과 해후하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제자가 모일까? 사뭇 궁금해진다.
작년 여름, 교회에 다니는 친구가 바자회를 한다고 연락이 와서 가봤다. 맘에 드는 겨울 코트 하나를 샀다. 요즘은 지퍼가 달린 패딩 코트가 많은데 한 손이 불편한 필자는 지퍼 채우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날 커다란 단추로 옷을 여밀 수 있는 코트를 발견하고 횡재한 기분으로 얼른 구매했다.
필자는 혼자서는 외출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남편, 손윗 시누이랑 만나 한 달에 한 번 대형 할인 매장인 코스트코에서 쇼핑을 하고 점심을 먹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 시누이는 남편을 필자에게 소개한 분이다. 팔십이 넘은 나이인데도 친구들과 해외 온천 여행을 즐기고 카톡, 인터넷 서핑도 할 줄 아는 멋쟁이시다. 지난달 우리가 만나기로 한 날, 필자는 여름에 바자회에서 산 코트를 자랑하려고 잘 차려 입고 즐거운 마음으로 나갔다.
한 달 만에 만나는 시누이는 반가운 얼굴로 필자를 보자마자 “올케, 내가 지난번에 준 그 옷 잘 입네, 아주 잘 어울리는데?” 하는 거였다. “아니 이거 내가 지난여름에 산 옷인데 무슨 말씀이셔요?” 했더니 “올케, 큰일 났네, 벌써 기억력이 그렇게 나빠지면 어떡해. 이 옷 내가 많이 아끼던 옷인데 작아져서 입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다가 올케 준 거잖아, 내가 얼마나 잘 기억하는데” 하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 필자는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며 “이 옷 당신도 알잖아?” 하니까 남편이 “아니, 난 몰라” 하며 딴전을 부렸다. 이럴 때 우기고 고집을 부려봤자 시누이와 말다툼이나 하겠다 싶어 “제가 착각을 했을까요?” 하면서 멋쩍게 웃고 말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너무 억울했다. 화가 난 상태로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다 알면서 어쩌면 그렇게 내 편을 안 들어주냐!”고 했다. 그러자 남편은 거기서 자기가 편을 들어주면 상대가 기분 상하지 않겠냐면서 오히려 누님이 그렇게 말하면 인정하고 얼른 져줄 것이지 쓸데없는 걸 우긴다며 오히려 역정을 냈다. ‘아이고, 할 수 없다. 내가 지고 말아야지’ 하고 그냥 넘기려 했지만 자꾸 억울한(?) 생각이 들고 다음 달에 만날 때는 시누이가 “올케, 미안해. 내가 착각했어” 하시기를 기대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 똑똑한 시누이가 어떻게 그런 착각을 다 하게 됐을까 염려가 되면서 역시 세월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보다 했다.
어제도 우리가 만나는 날이었다. 필자는 시누이가 자신의 착각을 인정하기를 은근 기대하며 즐거운 표정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시누이는 똑같은 소리를 했다. “올케, 이제 기억났어?” 하는데 이번에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필자는 하는 수 없이 “네~ 제가 착각했나봐요” 하고 말해드렸다.
그래, 우리 나이에 누구의 기억력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남편 말대로 그렇게라도 말해드린 건 정말 잘한 일 같다.
호로록! 따뜻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차갑게 얼어 있던 몸을 녹여준다. 면을 힘껏 빨아올리자 국물이 얼굴을 때린다. 조금 튄 국물이 대수인가. 통통한 면발을 한입 오물거리다가 삼키면 그저 행복할 뿐이다. 쫄깃하고 깔끔한 우동을 맛보고 싶다면 ‘카덴’을 추천한다.
‘카덴’은 JTBC 에서 얼굴을 알린 정호영 셰프가 운영하는 우동 가게다. 일본 유학 시절 관심을 갖게 된 우동의 매력에 빠져 한국에 돌아와 가게를 차리게 됐다. 서교동 본점에 이어 연희동에 2호점이 생길 만큼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대한민국 레스토랑 가이드북 , 세계 최고 권위의 여행정보 안내서인 에 등록된 맛집으로 맛은 이미 보장된다고 할 수 있겠다. 가격은 6500원~1만2000원 사이로 부담스럽지 않다.
정성이 담긴 우동 한 그릇
일본 우동은 지역에 따라 육수를 내는 방법과 면의 종류가 다양하다. 가가와의 사누키 우동, 아키타의 이나니와 우동, 군마의 미즈사와 우동이 일본의 3대 우동으로 꼽힌다. ‘카덴’은 오사카 쪽으로 오면서 발달한 관서지방식 우동으로 우리가 흔히 먹는 사누키 우동과 비슷하지만 좀 더 부드러우면서 떡처럼 쫄깃한 식감이 특징이다.
면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 물, 소금으로 반죽한 뒤 4시간 정도 1차 숙성을 거친다. 이후 발로 치대면서 반죽을 하는데 이때 체중이 실린 발이 반죽 속 공기를 최소화시켜 탄성을 높여준다. 이 반죽을 다시 여러 개의 덩어리로 나눠 12시간 숙성시키면 진정한 ‘카덴’의 면발로 탄생한다. 여름에는 10분, 겨울에는 13분 정도 삶아내는 과정을 통해 면발의 식감에도 특별히 신경을 쓴다. 우동은 국물의 맛 또한 중요하다. 카덴은 멸치, 고등어, 가다랑어를 우려낸 육수를 사용한다. 여기에 완도산 다시마와 말린 밴댕이 디포리를 사용해 진하고 깔끔한 맛을 낸다. 우스구치(국간장)를 사용해 간을 맞춘 국물은 자극적이지 않아 좋다.
가키아게 우동(7000원)을 주문하면 우동과 가키아게가 따로 나온다. 정호영 셰프는 “튀김을 국물에 넣어두면 눅눅해지기 때문에 따로 내놓는다. 튀김을 어느 정도 먹다가 국물에 넣어 먹으면 튀김의 맛과 기름이 섞여 농후한 우동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색다른 맛의 매력, 자루우동
자루우동(7000원)은 고이구치(진간장)와 육수를 섞어 만든 소스에 면을 찍어 먹는 우동으로 따뜻한 국물에 담겨 나오는 우동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실파, 생강, 간 무를 입맛에 맞게 소스에 넣고 면을 살짝 담갔다 먹으면 된다. 얼음물에 헹궈낸 쫄깃한 면발에 짭짤한 소스와 건더기가 달라붙어 감칠맛을 낸다.
주소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 173
예약 및 문의 02-337-6360
운영시간 평일 11:30~22:00 (15:30~17:30 브레이크타임) 토요일 11:30~21:30 일요일 휴무
드디어 2018년 1월 18일 인천공항 제2청사가 공식적으로 개통된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이용하고 있는 제1터미널과 비슷한 규모로 만들어진 제2터미널은 평창 동계 올림픽을 3주가량 앞둔 시점에 공식 개장하는데 동계올림픽 선수촌 오픈 1월 30일과 현지 적응을 위해 조기 입국하는 선수 및 대회 관계자에게 더욱 쾌적한 서비스 제공을 할 수 있도록 평창 동계올림픽 전에 개장하게 되었다.
공항이라는 단어는 왠지 모르게 애틋한 이별과 반가운 만남을 동시에 떠오르게 해 준다.
특별히 내가 공항에서 슬픈 이별을 해 본 적이 없는데도 그런 느낌인 건 아마 사랑하는 어린 조카가 유학길에 오를 때 배웅 나가서 무사히 공부 마치기를 바라며 보낸 그 날이 생각나기 때문인 것 같다.
애틋한 이별만이 아니라 따뜻한 만남도 생각나는데 미국에 사는 시누이가 귀국했을 때나 지인의 한국방문에 마중 나가서 기뻤던 마음이다.
또한, 가족이나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할 때 공항에 가면 즐거운 기대는 한껏 부풀어 오른다. 그래서 공항은 우리에게 축제처럼 들뜬 기분 좋은 설렘을 주는 곳이다.
필자는 지난달 아직 마무리 공사 중인 제2터미널에 미리 가보았다.
동북아의 허브로 우리나라의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은 꾸준히 성장해 12년 연속 세계 공항 평가에서 1위를 할 만큼 크게 성장했다.
많은 승객을 수용하고 주변 공항과의 허브경쟁력 강화를 위해 인천공항은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해 내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에 맞추어 2009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제2터미널이 개장하게 된 것이다.
제2청사가 개장되면 연간 1800만 명을 추가로 수용할 수 있고 9만 명의 고용창출이 될 것이라 한다.
제2청사의 주제는 Green과 Eco로 자연과 건축물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이다.
자연채광과 지열 시스템, 태양광발전, 자연 환기 시스템 등을 이용하여 친환경 공항을 모토로 하고 있어 이를 통해 저에너지공항, 탄소 저감, 신재생에너지 확대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먼저 인천공항 3단계 건설 상황실의 홍보전시실을 방문했다.
90년대 초반 인천공항을 건설하면서 트럭 100만대 분량의 흙을 퍼부어 물막이 공사를 했다는 홍보사진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고 이제 제2청사까지 개장하게 되니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한 우리나라 국제공항이 자랑스러워 가슴이 절로 펴지는 듯했다.
이번에 완공되는 제2 여객터미널은 인천공항 3단계 건설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1, 2단계 사업으로 완공된 제1 여객터미널과 탑승동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터미널이고, 이번 3단계 사업으로 제2터미널이 완공된다. 곧이어 4단계 사업도 시작될 예정인데 그렇게 되면 인천공항은 연간 1억 명 이상이 이용하는 대형공항이 될 것이라 한다.제2 터미널에는 4개 항공사가 이용하게 된다는데 대한항공과 에어프랑스, 델타항공, KLM 항공사 등 스카이팀 항공사이다.
제1터미널은 아시아나와 저가항공사가 운항한다.
이제 우리는 해외여행을 떠날 때 어떤 항공기를 탈지에 따라 제1터미널, 제2터미널로 가야 한다.
제2터미널은 버스와 지하철, 철도 등의 대중교통을 한곳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편리하게 해 놓아서 교통 센터 지하 1층에 버스와 철도대합실이 한곳에 있고 터미널이 실내에 있어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도 쾌적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또한, 제2터미널은 한국적인 디자인이라는 특징이 있다. 기존의 제1터미널은 외국회사가 디자인한 것을 바탕으로 했지만, 제2터미널은 우리나라 기술로 디자인했다는 점이 뿌듯하고 감동적이다.
아직 마무리가 안 된 전망대를 둘러보았는데 유리창 너머 광활한 활주로에 앞으로는 우리 국적기인 대한항공을 비롯해 여러 SKY팀 항공사의 비행기가 가득 찰 것이다.
대한민국의 관문 인천공항이 명실상부 동북아의 허브공항으로 자리매김하고 세계적인 대표 공항으로 도약하려 한다.
제2터미널 개장으로 전 세계인 누구나 만족하고 좋아하는 자랑스러운 인천 국제공항이 되기를 바란다.
캐나다 본토에서 배로 한 시간 거리에 밴쿠버 섬이 있다. 그리고 그 섬 안에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주도 빅토리아가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에 의해 발전한 땅으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밴쿠버 섬의 빅토리아로 주도를 옮기면서 빅토리아는 BC주의 주도가 되었고, 지금까지 주도로 남게 되었다.
밴쿠버에 간다면 꼭 한번 들러봐야 할 여행지 빅토리아. 밴쿠버 항구에서 배를 타면 약 한 시간 반 만에 빅토리아에 닿을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밴쿠버를 찾을 때마다 열일을 제치고 가이드를 자처하는 형부가 이번 여행도 앞장 섰다.
7시에 밴쿠버 항을 출발하는 배를 타기 위해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에 집을 나섰지만 7시 배를 타는데 실패했다. 조카가, 월요일 아침이어서 빅토리아로 출근하는 사람들의 차가 많다고 했는데 진짜 그런가보다. 새벽 잠을 쫓으며 달려온 우리는 허탈한 마음을 달래며 스타벅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9시 배에 올랐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빅토리아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차드가든이다. 빅토리아 하면 제일 먼저 아름다운 꽃이 떠오르는데 그런 이미지를 만든 장본인이다. 본래 석회석 채석장이었던 곳을 소유주인 부차트 부부가 전세계 꽃과 나무를 모아 테마별 정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봄, 여름에 특히 예쁘다던데 가을에 만난 부차드가든도 운치있고 멋졌다. 꽃도 나무도 예쁘고 날씨마저 아름다워 감탄사가 나왔다. 가을빛으로 아름답게 물든 정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대자연 속에 사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가꿔놓은 정원에 감동하는 이유는 뭘까 라는 생각을 하며 다운타운으로 이동했다.
빅토리아 다운타운에 들어서니 바닷가를 따라 오래된 건물들이 고풍스럽게 서있었다. 주의사당의 아름다운 석조건물과 푸른 잔디밭, 거리를 다니는 마차와 오랜 역사를 지닌 호텔 등 밴쿠버와는 다른 이국풍광을 볼 수 있었다.
1897년에 세워진 주의사당은 외관이 인상적이었다. 예전 영국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데 주의사당 건물은 직접 눈으로 보아야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50m 높이의 중앙 돔과 화려한 스테인 글라스가 눈을 사로잡는다. 1층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빅토리아여왕의 초상화를 둘러보고 영국 여왕이 즐겨 찾았다는 엠프레스 호텔로 향했다.
빅토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건 아마도 앰프레스 페어몬드 호텔일 것이다. 1908년에 세운 영국풍의 호텔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의 호텔이다. 영국 왕실 사람들도 묵어가는 곳이라 더 명성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빅토리아는 거리 곳곳에 영국 풍의 건물과 문화가 남아 있어 밴쿠버 속 영국을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영국 귀부인들의 한가한 오후를 엿볼 수 있는 애프터눈 티 문화도 그대로 남아있다. 밴쿠버에 오기 전에 엠프레스 호텔에서 애프터눈티를 먹고 싶다고 위시리스트를 전했는데 조카들이 다른 곳에 하이티를 예약해 두었단다. 어차피 여행 중엔 영국 사람들처럼 여유롭게 애프터눈 티를 마시기 쉽지 않을 텐데 아름다운 장소 때문에 괜한 욕심을 부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에 호텔 커피숍 항구가 보이는 자리에서 앉아 커피와 시니그처 케익을 주문했다. 자리 탓인지 여행 중이라는 걸 잊을 만큼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따뜻한 봄날 같은 날씨 덕분에 빅토리아 여행은 즐거웠다. 온화한 날씨로 은퇴 후 여유를 즐기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니 그 말에 수긍하게 되는, 좋은 날이었다. 내가 살아가면서 이런 날을 얼마나 만날 수 있을까? 커피 잔에 비친 내게 말을 걸어보았다.
밴쿠버는 세계 4대 미항 중 하나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직접 가보니 세련된 대도시와 웅장한 자연의 조화가 아름다운, 매력적인 곳이었다.
밴쿠버 다운타운의 서쪽에는 뉴욕의 센트럴파크보다 규모가 큰 도시공원이 있다. 1888년 당시 총독이었던 스탠리 경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스탠리 파크는 공원 둘레가 30km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다. 밴쿠버 여행자들은 하나같이 스탠리 파크에서 자전거를 타볼 것을 권했다. 방파제를 따라 10km가량 이어지는 해안도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기분은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짐작이 가능했다. 공원 규모 또한 어마어마하니 자전거를 타고 둘러보는 것이 효율적일 것도 같았다.
조카와 둘이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공원 입구에서 자전거 대여 매장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형부는 전동자전거는 위험하니 일반 자전거를 타라고 권했지만 2시간 동안 페달을 밟을 생각을 하니 전동자전거에 살짝 마음이 기울었다. 하지만 전동자전거 대여소가 휴가 중이어서 일반 자전거를 빌렸는데 결과적으론 그게 더 나았다.
사실은 1시간 이상 자전거를 탈 수 있을까, 체력적인 걱정도 있었다. 작년이었다면 자전거를 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겠지만 지난 여름 루앙프라방에서 30년 만에 자전거를 타보곤 내 몸이 자전거 타는 법을 잊지 않았다는 걸 알았으니 일단 시도해 보기로 했다. 1인당 1시간에 10불 정도로 자전거를 빌렸다.
쌀쌀한 가을이서인지 스탠리 파크는 한산했다. 드문드문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해안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자 얇은 패딩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고 손이 시려웠다. 지원이는 이모가 걱정되는지 자꾸 뒤돌아보았다. 내 걱정 말고 실컷 달리라고 수신호를 보내고 힘껏 페달을 밟았다. 곧 이마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자전거 길이 잘 만들어져 있어 나같은 초보도 쉽게 자전거를 즐길 수 있었다.
도시 가운데 이렇게 자연 속에서 바다를 느끼고 가을 낙엽을 보고 달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내가 언제 또 태평양을 바라보고 자전거 바퀴를 돌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더더욱 즐거웠다.
비수기여서인지 스탠리 파크는 여기저기 공사 중이었다. 인어공주 동상이 있는 곳에서 잠시 쉬다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을 무렵 해안도로가 공사 중이라는 싸인이 눈에 띄었다. 그 곳에서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숲 속 길로 방향을 바꾸었다. 처음엔 인적 없는 울창한 숲 속으로 들어서는 것이 조금 두려웠지만 해변을 달리다가 3만 년 이상 된 원시림이 우거진 숲 속을 달리는 맛은 또 다른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신나게 달리고 맘껏 소리치며 달리고 또 달렸다. 마치 비자림 속을 달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이제, 밴쿠버를 여행한다는 사람을 만나면 스텐리 파크에서 자전거를 꼭 타보라고 권할 것 같다. 왼쪽엔 울창한 숲을, 오른쪽엔 바다를 끼고 달리는 맛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쉽게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깊어가는 10월의 부산은 여러 행사로 풍요로운 문화를 만나 볼 수 있다.
부산은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이며 어쩐지 무언가 역동적이고 활발한 기운을 불어넣어 줄 것만 같은 멋진 곳이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에 섞여 자갈치시장의 회 맛도 보고 싶고 영화 국제시장이나 친구에서 장동건 유오성 등 네 친구가 교복 차림으로 비뚜름히 모자를 쓰고 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 마구 달리던 그곳도 한번 찾아보고 싶다.
애틋한 이별이 있음 직한 항구도시로, 떠나는 이와 보내는 사람의 눈물이 뱃고동 소리와 함께 어우러질 것 같은 부산은 한 번쯤 배낭을 메고 훌쩍 떠나 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큰 국제행사로 부산국제영화제가 있어 흥겨운 10월에 눈여겨 볼만한 문화제가 있다. 다대포 해변의 바다 미술제이다.
필자가 직접 가보니 확 트인 시원한 넓은 바닷가 전체가 캔버스처럼 작품으로 가득하다.
지난 9월 16일부터 10월 15일까지 다대포해수욕장에 2017 바다 미술제가 열렸다.
바다 미술제는 바다+미술+유희를 주제로 11개국의 41팀이 작품 40점을 전시했다.
예술은 항상 진지하고 어렵기만 한 것일까? 혹은 예술은 유희일까? 라는 질문에 ‘미술이/미술은/미술도 재미있어야 한다’는 명제로 유희적 예술을 뜻하는 ‘아르스 루덴스‘(ars ludens)를 주제로 내걸었다고 한다.
이 용어는 ‘호모 루덴스’에서 착안한 단어로 문화학자 ‘호이징하(johan huizinga)가 인간의 특성 중 하나를 놀이하는 것으로 규정한 부분의 연장선으로 인간이 만드는 예술에도 역시 유희적 속성이 담겨있다는 점을 부각했다.
바다 미술제는 1987년 88올림픽의 프레올림픽 문화행사의 하나로 시작된 문화제이다.
1987년부터 1996년까지 해운대해수욕장과 광안리해수욕장을 주요 개최지로 활용하면서 대중적이고 특색 있는 야외전시를 매년 개최해 왔다.
그 후 2000년부터 2010년까지 부산비엔날레 행사에 통합 개최되었다가 2011년부터는 독자적인 문화브랜드로 성장시키기 위해 홀수 해마다 부산 곳곳의 해수욕장에서 독립적으로 바다 미술제를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전시 관람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고 전시 기간 동안엔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이곳에 종합안내소를 운영한다.
작품 감상을 위해 도슨트도 제공되며 물품보관소도 운영해 편리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철 지난 바닷가는 여름의 눈부신 화려함은 없지만 깨끗한 하늘과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는 넓은 모래사장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준다.
그 넓은 모래사장에 재미있기도 하고 심오한 뜻을 담기도 한 작품이 한가득 보인다.
파란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는 아름다운 해변에 세워진 작품을 돌아보니 여느 미술관 못지않게 훌륭한 화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침 병아리처럼 귀여운 부산 어린이들이 단체로 구경나왔다. 재잘대는 어린이들 옆에서 필자도 어린아이가 된 듯 작품을 보며 행복했다.
10월의 부산에는 풍성한 볼거리 즐길 거리가 있다. 가을에 여행을 떠날 계획이 있다면 부산으로 떠나도 좋을 것 같다.
요즘은 사시사철 과일을 먹을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 필자가 자랄 때는 열매나 과일채소라고는 봄에 딸기, 여름부터 가을철에 나오는 수박, 참외, 토마토, 자두, 복숭아, 사과, 배, 포도, 감, 대추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품종이 몇 개 안 되고 시장에 나오는 시기도 짧았다.
예를 들어, 자두는 7월이면 끝물이었는데 요즘은 품종은 다르지만, 자두가 가을에도 시장에 나온다. 복숭아도 여름까지는 나왔지만, 복숭아털이 없어 먹기 좋은 천도복숭아라는 것은 나온 지 몇 년 안 되는 신품종이다. 먹기 좋게 품종 개량한 방울토마토도 그렇다. 제주도 귤도 지금은 흔하지만, 어렸을 때는 못 먹어 보던 과일이다. 제주도로 신혼여행 갔을 때 선물로 사오던 과일이다. 사과도 지금은 어느 품종이든 다 맛있지만, 그 당시에는 맛없는 품종도 여럿 있었다. 지금은 맛없는 사과는 도태되어 안 보인다.
그전에는 흔하지 않던 과일도 보인다. 거들떠도 안 보던 오디, 우름, 꾸지뽕, 복분자도 제 철에는 먹을 수 있다. 무화과도 귀한 과일이었는데 흔한 과일이 되었고 가격도 싸다. 블루베리도 그렇다.
수입과일도 많다. 오렌지, 자몽, 메론, 바나나는 물론 동남아시아 관광이나 가야 맛 볼 수 있던 갖가지 열대 과일도 수입되어 들어온다. 바나나가 귀한 과일이라고 하면 의아해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유일한 수입과일이었다. 가격은 좀 비싸지만 적당히 새콤달콤해서 인기 있는 체리도 들어온다.
전반적으로 운송, 저장 기술도 발달해서 싱싱한 과일을 먹을 수 있고 심지어 겨울철에도 여러 가지 과일이 있다. 온상 재배한 과일까지 나온다. 그 덕분에 노모가 겨울철에 딸기를 먹고 싶고 하여 산야를 헤매다 쓰러진 효자에게 신선이 딸기밭을 인도했다는 동화 속에나 나오던 겨울철 딸기도 현실화 되었다.
당도도 높아졌다. 재배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달아야 좋아한다. 그전에는 수박은 두드려 보고 잘 익은 것을 골라서 샀다. 꼭지 부분을 삼각형으로 오려 내서 빨갛게 잘 익었다며 안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 없이 믿을만한 판매처에서 사면 당도에 문제가 없다.
어렸을 때부터 과일을 좋아했지만, 지금도 아침 식사에는 과일이 빠지지 않는다.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사시사철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
요즘 참 살기 좋아졌다며 이런 얘기를 하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시큰둥하다. 제 철 과일이 시장에 나왔다고 만만하게 사 먹을 수 있는 집도 많지 않았다. 겪어 보지 않은 세대들이라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과일에 얽힌 얘기도 많다. 필자는 자두를 좋아했는데 아내가 참외만 사들고 와서 다시 시장에 갔다가 여름 휴가지로 떠나는 단체 버스를 놓쳤다. 끝물이라 다 삭은 자두 담은 봉투를 들고 시외버스를 타고 만리포까지 따라 간 적이 있다. 제주도 신혼여행 때 귤을 몇 박스 샀다가 그 무거운 것을 가지고 오느라고 고생한 추억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파견 근무 시 장티푸스에 걸려 식사를 제대로 못할 때 바나나 한 다발로 식사를 대신하며 극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