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월의 문화행사
- 전시 두들월드 일정 7월 4일~9월 9일 장소 아라아트센터 ‘뭔가를 끼적거리다’라는 뜻의 두들(doodle). 언뜻 보면 낙서처럼 보이는 두들링 작업에 푹 빠진 아티스트가 있다. 바로 미스터 두들 (Mr.Doodle)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영국 아티스트 샘 콕스(Sam Cox)가 이번 전시의 주인공이다. 두들월드 전에선 그를 세계에 알린 독특한 벽화 작품, 서울 전시를 위해 특별히 작업한 서울 시리즈, 그리고 현장에서 진행되는 초대형 설치 작품까지 총 700여 점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축제 부여서동연꽃축제 일정 7월 6~15일 장소 부여서동공원 매년 7월이면 백련, 홍련, 수련, 가시연 등 50여 종의 다양한 연꽃이 부여 궁남지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는 물론 야생화와 수생식물이 있어 아이들의 자연생태 학습장으로도 좋다. 부여서동연꽃축제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하는 우수 축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축제기간에 연밥인형만들기, 연지탐험, 연씨팔찌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행사와 전시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전시 신카이마코토展 ‘별의 목소리’부터 ‘너의 이름은.’까지 일정 7월 13일~9월 26일 장소 한가람미술관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신카이 마코토의 데뷔 15주년을 기념한 전시다. 그의 대표 작품으로는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초속 5센티미터’, ‘언어의 정원’, ‘너의 이름은.’ 등이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별 설정 자료, 애니메이션 콘티, 작화 등 신카이 마코토의 감성을 엿볼 수 있는 원화를 만나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180도 와이드 스크린, 프로젝터 매핑 등을 이용해 애니메이션 속의 명장면을 재현했다. 연극 생쥐와 인간 일정 7월 24일~10월 14일 장소 대학로 TOM 1관 출연 문태유, 신주협, 최대훈 등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레니’와 그런 레니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조지’라는 이주 노동자의 비극적인 우정을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허구성과 비극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 인랑 개봉 7월 25일 장르 SF, 액션 감독 김지운 출연 강동원 한효주 정우성 김무열 등 ‘인랑’은 경찰조직 ‘특기대’와 정보기관인 ‘공안부’를 중심으로 한 절대 권력기관 간의 대결 속에 늑대로 불리는 인간병기 ‘인랑’의 활약을 그린 영화다. 박진감 넘치는 액션신과 총격신을 더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영화 어느 가족 개봉 7월 26일 장르 드라마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릴리 프랭키, 안도 사쿠라, 마츠오카 마유 등 2018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원제는 ‘만비키 가족’. 일본어 만비키(万引き)는 좀도둑을 의미한다. 할머니의 연금과 물건을 훔쳐 생활하는 한 가족이 우연히 길 위에서 떨고 있는 소녀를 발견하고 같이 살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렸다.
- 2018-06-26 08:44
-
- 우리 집 권력 순위는 엎치락뒤치락
- 실제 이야기인지 지어낸 이야기인지 불분명하지만 인터넷상에 떠도는 이야기다. 어느 할아버지가 가출을 했다. 아들에게 편지를 써놨는데 “3번아 잘 있어라. 5번은 간다”라는 다소 모호한 내용이 있었다. 3번은 누구를 뜻하고 5번은 누구인가? 그 집의 권력순위 1위가 고등학생인 손자이고 2위는 며느리, 3위는 가장인 아들, 4위는 애완견, 마지막 5위가 할아버지라고 했다. 이 내용을 풀어보면 “아들아, 애비는 서러워서 집 나간다”라는 말이 된다. 1번, 2번은 권력 순위라기보다는 집에서 관심을 많이 받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불편한 진실은 집에서 순위의 근거가 나이가 많다거나 돈 벌어오는 거와는 별로 연관이 없다는 점이다. 돈을 많이 쓰는 사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돈을 쓰도록 만들어주는 사람이 권력 순위의 앞자리를 차지한다. 친구 모임에서도 돈을 펑펑 잘 쓰는 친구가 늘 대장이다. 다음으로 돈 많은 친구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도록 아주 기분 좋게 펌프질하는 친구다. 직장에서 필자는 돈을 벌어오는 부서에 있었다. 수입을 많이 올리면 당연히 사장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봉급쟁이 고용 사장의 속 깊은 예쁨은 필자보다 예산부장이 더 많이 받았다. 적자일 때는 필자가 들볶이지만 흑자일 때는 예산부장이 먼저, 필자는 늘 후순위로 칭찬을 들었다. 예산부장은 회사의 살림을 맡은 사람이다. 어느 날 사장으로부터 속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너는 돈을 벌어왔지만 실제 그 돈을 쓰게 해주는 사람은 예산부장이다. 예산을 적절히 편성해서 내가 쓸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도 목소리 큰 사람은 안주인이다. 돈 벌어오는 남편은 성능 좋은 돈 버는 기계 대접이나 받는다. 정부의 기획예산처 장관도 다른 장관들보다 파워가 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오면 뭐하나. 내가 쓸 수 없다면 그림의 돈이다. 아내는 자식들 앞에서 필자를 항시 앞세운다. “아빠가 오리고기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오늘 저녁 외식은 오리고기로 하자” 하면 아무도 토 달지 않고 오리고기 집으로 낙착이 된다. 필자는 음식 메뉴 선택은 늘 아내에게 정하라고 하지만 아내는 언제나 필자 의중을 살핀다. 표정이나 말투에서 힌트를 얻어 필자 마음을 읽어낸다. 그리고 아빠의 뜻으로 몰고 가면 아이들도 반대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필자가 우리 집 권력순위 1위라고 늘 믿고 있다. 집 안에서 쓰는 돈 대부분은 아내의 손을 거친다. 설날 세뱃돈도 우리 부부 몫으로 합산해 아내가 단독으로 준다. 아내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왔지만 그 돈의 바탕은 할아버지이고 아버지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어린 손주들을 데리고 외식하면 아내가 카드로 계산을 한다. 이 장면을 아이들도 다 보고 있으니 당연히 할머니가 사는지 알까봐 아내는 “오늘 저녁은 할아버지가 쏘는 것이니까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드려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할아버지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다. 아내는 직접 돈 쓰는 재미를 느끼고 나는 인사 받는 재미로 으쓱해진다. 최근에 경치 좋은 바닷가 리조트로 놀러갔다. 우리 부부와 딸 내외 그리고 외손자를 포함해 다섯 명이 갔다. 전날 저녁, 회를 안주로 과음을 해서인지 늦잠까지 잤다. 아침식사를 하러 나가자고 했지만 밥 생각이 별로 없었다. “곧 점심을 먹으면 되니 간단하게 라면이나 끓여먹자”라고 필자가 제안했다. 모두가 좋다며 컵라면을 사오겠다고 했다. “아니 컵라면 말고 끓여먹는 라면이 좋지”라고 즉각 제안을 했다. 당연히 아내가 필자 말에 맞장구쳐줄 줄 알았다. 그런데 “설거지하기 귀찮으니 컵라면 먹어요”라며 필자 말을 무시해버렸다. 게다가 필자 눈치를 살펴야 할 사위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컵라면 사오겠습니다” 하고 뛰어나갔다. 별것 아니지만 약간 체면이 손상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만한 일에 정색하기는 싫었다. 속으로 ‘이거 불안한 1위의 권력이 유지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잠깐 들기는 했다. 가정 내 가장의 권력은 경제력에서 나온다. 소설가 김훈은 남자는 죽는 날까지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장의 파워는 경제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남자들이 퇴직을 하고 수입이 없어 아내로부터 용돈을 받아쓰는 순간 날개 부러진 새의 신세가 된다. 세상을 살다 보면 말하기 곤란한 곳에 돈 쓸 일도 있고 정당한 곳에 썼다고 해도 일일이 다 말해야 하는 상황도 마치 남자의 자존심이 구겨지듯 서럽다. 아이가 잘 때도 사탕봉지를 끌어안고 자듯 남자는 돈줄을 죽는 날까지 잡고 있어야 하는 이유다. 필자는 지금까지 번 돈을 아내에게 다 주지 않았다. 봉급의 일부를 아내에게 주고 재산 증식 등 대부분의 굵직한 돈 관리는 직접 했다. 물론 아내가 궁금해하지 않도록 쓰는 곳을 오픈했고 아내는 의심하지 않고 이해하고 잘 따라왔다. 아내는 엄밀히 말하면 가정살림을 꾸리는 필자의 고용 사장으로서 풍족하지는 않지만 본인의 의사대로 살림을 잘 해나갔다. 회사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보이지 않는 오너보다 계약서에 서명하는 고용 사장이 실제 일은 다 한다. 우리 부부는 컵라면 사건처럼 작은 일에는 독단을 부리기도 하지만 늘 배려하고 상대의 의견을 존중한다. 우리 집 권력순위 1위는 나인가? 아내인가? 필자가 아내를 받쳐주지 않으면, 아니 아내가 필자를 받쳐주지 않으면 우리 부부는 모래성의 성주에 불과하다. 평행선 레일 위를 달리는 열차 바퀴처럼 언제나 함께 달려야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 집의 권력 1순위는 부부가 공동 1위라 하는 것이 맞겠다.
- 2018-06-25 10:42
-
- '웰다잉 연극단'의 무대 위 웰다잉 수업
- 사회복지법인 각당복지재단의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의 커뮤니티 ‘웰다잉 연극단’. 단원 모두 웰다잉 강사 자격을 갖춘 이들로 2009년 3월 창단해 올해로 10년째 자원봉사 형태로 활동 중이다. 웰다잉 연극 ‘춤추는 할머니’, ‘행복한 죽음’, ‘소풍가는 날’ 등을 통해 공감대를 일으키며 더욱 쉽게 죽음의 의미와 준비 방법에 대해 전파하고 있다. 최근 공연작인 ‘아름다운 여행’(장두이 작·연출)은 존엄사 유언장과 사전장례의향서, 버킷리스트를 준비하는 노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실제 암 투병 중에도 항암치료를 견디며 무대에 선 최명환 단장은 “100회 공연을 하는 것이 버킷리스트였는데, 이미 초과 달성했다”며 “웰다잉 연극단 10년사를 잘 엮어 책으로 남기는 것이 새로운 버킷리스트다”라고 말했다. 김희숙 부단장은 “단원 모두 유언장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둔 상태”라며 “웰다잉 전문가들이지만, 죽음을 주제로 연극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강의보다는 몸으로 보여주며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내용을 이해시키는 데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웰다잉 연극단 총무를 맡은 홍재응 씨는 “연극을 통해 관객은 자기 마음속 이야기와 마주한다. 특히 언젠가 떠나리라 인정하면서도 멀리만 느꼈던 죽음의 문제와 직면하며 실천을 미루거나 망설였던 일들을 상기하게 된다”고 말하면서 관객의 반응을 통해 연극의 효과를 실감한다고 덧붙였다. ‘아름다운 여행’에서 저승사자 역의 방성희 씨는 “웰빙과 웰다잉은 하나이지, 분리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나의 죽음에 대해 스스로 결정권을 갖고,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 즉,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느냐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라고 조언했다. 연극의 주인공인 노인 역의 유한권 씨는 “죽어가는 인물을 연기하며 간접적으로 죽음을 체득하게 됐다. 그러면서 죽음은 곧 새로운 삶을 위한 과정임을 깨달았다”며 관객뿐 아니라 연극 단원으로서 느낀 소회를 들려줬다. 단원들은 입을 모아 “우리는 웰다잉을 위해 웰빙하는 사람들”이라 말한다. 자신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웰다잉을 실천하길 바란다는 그들의 웰빙 무대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웰다잉 연극단은 올해 2월 4일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시행에 맞춰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노인복지관, 평생교육원 등 10곳을 선정하여 무료로 찾아가는 공연을 진행했다.
- 2018-06-22 10:56
-
- 손녀의 휴대폰 기능
- 손녀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여덟 살이다. 밑으로 두 살 터울인 여섯 살 남동생과 네 살 여동생이 있다. 엄마의 손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아이를 셋이나 키우고 있다 보니 며느리는 다니던 직장을 휴직하고 전업주부로 돌아섰는데도 늘 바쁘다. 우리 세대가 아이들을 키우던 방식과 지금은 매우 다르다. 교육 환경이 참 많이 변했다. 나는 유치원도 못 다니고 바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자식들은 유치원을 보내고 태권도나 피아노 같은 사설학원을 하나 정도 보낸 기억이 있다. 요즘은 아이들이 불쌍할 정도로 놀 틈이 없다. 우리 집의 경우만 봐도 네 살, 여섯 살은 어린이집에 보내고 어린이집이 끝나면 여섯 살은 발레학원에, 네 살은 집으로 돌아와 엄마랑 그림 맞추기 퍼즐게임을 한다. 초등학교 1학년인 큰 손녀는 학교수업이 오후 1시쯤 파하면 요일별로 영어, 수학, 체육 등 과외공부를 한다. 체육과외라는 말이 생뚱맞아 뭘 하는가 보니 줄넘기 같은 것인데 신기하게도 이런 과외를 받으면 잘한다. 며느리 말에 의하면 남들도 다 하기 때문에 이렇게 발을 동동 구르며 하지 않으면 도저히 다른 아이들을 따라갈 수가 없단다. 못 따라가는 것까지는 좋은데 아이가 기죽어 시들해진 모습은 차마 못 보겠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매일 전쟁터처럼 아이들도 바쁘고 며느리도 한눈팔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며느리가 삐끗 다치기라도 하면 난리가 난다. 5분대기조처럼 숨죽이고 기다리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바로 구조요청 전화가 날라 온다. 그럴 때는 걸어가도 안 된다.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가야 한다. 아이들을 자동차로 실어 나르는 운전도 해야 하고, 시간 맞춰 학원에 보내는 일도 늘어 할머니 할아버지로서는 현기증이 다 난다. 초등학교 1학년이면 이제 혼자 해야 할 나이다. 혼자서기 훈련을 시켜야 했다. 우선 등굣길에 위험요소를 알려줬다. 큰길을 건널 때는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더라도 좌우를 보고 건너고, 아파트 안에서는 자동차들이 많고 키 작은 아이들을 운전자가 못 볼 수 있으니 뛰지 말 것, 한적한 뒷길은 위험하니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길로 다닐 것, 등하굣길에 친구와 항시 같이 다닐 것 등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노래 부르듯 가르쳤다. 아이를 혼자서 내보낼 때는 불안하다. 마음이 놓일 때까지 아이의 동태를 CCTV 보듯 감시 선상에서 볼 필요가 있다. 좋은 방법은 아이에게 휴대폰을 사 주는 것이다. 요즘 휴대폰에는 이런 기능들이 많이 개발돼있다. 문제는 학교에서 수업에 방해가 된다며 아이들이 휴대폰을 갖고 등교하지 못하도록 막아 달아는 가정통신문이 왔다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전화벨 소리가 나면 수업에 지장을 준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래도 아이의 홀로서기를 위해서는 휴대폰을 사주지 않을 수가 없다. 단, 학교 안에서는 가방 속에 넣고 절대 꺼내지 말 것을 당부했다. 휴대폰으로 아이의 위치추적이 가능하다. 게임을 못 하도록 막는 기능도 있다. 필요한 사람만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지금은 학교에 등교해서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엄마에게 무사히 학교에 왔다는 전화를 하고 수업을 마치고 정문을 나설 때도 전화를 하도록 했다. 앞으로 혼자 등교가 완전히 익숙해지면 이런 전화는 불필요해질 것이다. 피아노학원이나 수학 과외를 갈 때도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움직인다. 하루는 학교에 도착했을 시간인데 아이에게 전화가 없었다. 궁금한 엄마가 전화를 했다. 한참 후 전화를 받은 아이가 “엄마! 왜 학교로 전화했어요? 학교로 전화하면 선생님께 혼나요” 하더란다. 그날은 등굣길에 친구를 만나 이야기에 열중하다가 그만 엄마에게 전화하는 걸 잊어버렸다고 한다. 휴대폰을 사주고 큰아이로부터 신경을 덜 쓰게 되자 며느리의 하루는 부쩍 여유로워졌다. 집 밖으로 나간 아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우물가에 내놓은 것처럼 늘 불안했다. 아이에게 위험한 자동차나 나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있다. 도시는 사람은 많아도 철저히 개인주의로 고립되어 있다. 남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휴대폰을 매개로 하여 엄마와 아이가 늘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 좋다. 빨리 아이가 혼자 생활하는 데 익숙해지고 더욱 안전한 사회가 되어 CCTV 기능을 하는 휴대폰이 없어지는 날을 희망해본다.
- 2018-05-29 08:40
-
- 페이스북 메신저 사기 조심하세요!
- 나는 장애인이다. 10여 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후유증으로 인해 장애인이 됐다. 장애인을 위한 정부 복지 정책이 있어서 그 덕을 몇 가지 보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1년에 한 번 컴퓨터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오는 '장애인을 위한 무료 방문 교육'이다. 지난달에 내 순서가 돼서 교육을 받았다. 평소 모르면서도 그냥 지나간 것을 쭉 적어 놓았다가 질문하니 너무 시원하고 좋았다. 교육 마지막 날 선생님이 페이스북(facebook.com)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 필요 없다고 했지만 심심할 때 해 보라고 했다. 가입하고 테스트를 하니 어떤 미국 남자와 페이스북 메신저로 접속이 됐다. 나이와 직업을 서로 소개하는데 난 물론 73세 할머니이고 상대방은 무척 흥미로웠다. 50세 후반 남성이었는데 열 살짜리 남자 아들을 둔 이혼남이었다. 첫 부인은 중국 여성이었는데 마약을 하는 바람에 이혼했다고 한다. 난 공연히 안타까운 생각으로 흥미를 갖게 되어 사진도 몇 개 교환했다. 직업은 외과 의사고 미군이 주둔하는 이집트 부대에서 의사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들은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도 했다. 몇 달 후 제대하면 한국에서 살고 싶다며 한국 여자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잘 나온 사진을 한 장 보내며 말이다. 그 말이 오고 간 후, 날짜가 지나자 안쓰러운 얘기를 꺼냈다. 보육원에서 자라다 부잣집으로 입양됐다고 말이다. 하버드대학을 졸업했지만, 평생 외로운 인생을 살았다고 했다.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난 한 번도 상대방을 의심하지 않았다. 거의 매일 페이스북 메신저로 문자가 왔다. 자기가 얼마 있으면 제대한다고 했다. 며칠 후 부대장과 면담이 끝나면 일종의 공로금 같은 것을 받게 될 거라고 했다. 그 돈으로 한국에서 집을 사고 재혼도 하고 싶다는 거였다. 난 심심하던 차에 재혼 신랑 깜(?) 사진을 또래의 조카딸에게 보여줬다. 이런 일도 있다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떠벌렸다. 조카의 친구 하나가 관심도 보였다. 지난 일요일 아들이 왔길래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눴다. 신랑감의 사진이랑 내가 나눈 문자를 보여줬다. 아들이 깔깔 웃으며 “이거 완전 거짓말”이라며 당장 친구 차단하라고 했다. 모든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꾸민 것 같다는 아들의 이야기. 읽어 보니 하버드 졸업생이 쓸법한 영어도 아니고 사진도 합성일 소지가 다분하다고 했다. 무슨 목적으로 나 같은 할머니에게 그런 일을 하느냐고 아들에게 물었다. 심심풀이일 수도 있고, 심하면 나의 네트워크를 통해 국제 사기에 이용할 수 있다는 거였다. 애고 놀라라!
- 2018-05-16 14:29
-
- “제 인생의 ‘화양연화’는 지금이에요”
- 열다섯 살 소녀는 키가 멀대같이 컸다. 친구들이 꺽다리라고 놀려댔다. 선생님은 운동을 권했지만 소녀의 눈에는 모델과 영화배우의 화려한 옷들만 아른거렸다. 아버지가 가끔 사오는 잡지를 들춰보며 무대에 오르는 꿈도 꿨다. 패션계를 주름잡던 모델 루비나를 흠모하고 카르멘 델로피체처럼 되고 싶었던 소녀는 자주 잠을 못 이루고 뒤척였다. 그리고 어느새 75세가 되어버린 은발의 소녀는 기어코 일을 내고야 말았다. 발가락 다섯 개만 겨우 집어넣은 하이힐을 신고 그녀가 무대 위에 오르자 관객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숨이 막혀왔다. 등짝에서는 식은땀이 흘렀고 조명 속에서 쾅쾅 울려대는 음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런웨이를 돌아 나오는 그 짧은 시간을 위해 캣워크를 무던히도 연습했건만 소용이 없었다. 등 뒤에서 누가 자꾸 쫓아오는 것만 같아 도망치듯 걸었다. ‘2018 F/W 헤라서울패션위크’에서 ‘키미제이’ 메인 모델로 런웨이에 오른 최화자 씨는 아직도 설레는지 두 볼이 발그레했다. “너무 떨렸어요. 높은 구두를 신고 걸어가다 잘못해서 넘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태산이었죠.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요. 시니어 모델이 국내 최대 패션쇼 메인 모델로 발탁된 것은 처음이었거든요. 키미제이 대표 김희진 디자이너가 함께 모델 공부를 하는 김칠두 선생이랑 저를 부르시더니 무대에서 선보일 옷을 입혀보고 워킹도 해보라 하셨어요. 부족한 게 많았을 거예요. 그래도 우리를 과감히 메인 모델로 세우셨어요. 김칠두 선생은 오프닝, 저는 피날레 무대를 장식했죠.” 20대 젊은이들을 위한 패션쇼에 “웬 시니어 모델?” 하며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었을 터. 그러나 관객들의 반응은 예상외로 뜨거웠다. 카메라 감독들도 이 낯설고 도발적(?)인 무대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셔터를 눌러댔다. “런웨이에 오르기 전, 실수만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걱정했던 것보다 무대 분위기가 괜찮았나봐요. ‘신선하다, 젊은 모델과 견줘도 손색없다, 멋지시다’ 하며 엄지손가락을 척 올려주시는 카메라 감독도 있었어요. 꿈만 같았죠.” 은발의 소녀는 수줍게 웃었다. 칠십 넘어 시작한 모델 공부 최화자 씨가 본격적으로 모델 공부를 시작한 것은 71세 때인 2014년. 강남에 모델 교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당장 달려가 등록을 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너무 늦은 출발이었다. 대부분은 허리가 굽고 다리가 휘어질 나이였다. 친구들은 봉사나 하러 다니면서 손주들이나 돌볼 일이지 그 나이에 유난스럽게 별 걸 다 배운다며 한마디씩 했다. “우리 집 애들도 ‘운동 삼아 다니시겠지’ 했대요. 엄마 나이에 모델? 전혀 상상이 안 됐던 거죠. 지금은 ‘우리 엄마 점점 더 멋져지시네!’ 하면서 좋아해요. 손주들도 ‘우리 할머니 짱!’이라고 해주고요.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 아이들이 내 품에 손주들을 안겨줬을 때도 기뻤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말하라면 바로 지금이에요.” 그래도 칠십이 넘은 나이에 하는 공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허리를 똑바로 펴고 걷는 것부터 연습했어요. 기본 워킹에 표정 연기, 포즈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어요. 처음엔 일자로 걷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비뚤어진 체형 바로 잡는다 생각하고 틈날 때마다 거울 보며 연습했어요. 또 장 보러 갈 때도, 친구 만나러 갈 때도, 전철 타러 갈 때도 일자걸음으로 걸으려 애썼죠. 그러기를 벌써 5년이 됐네요. 그런데 왜 표정 연기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 걸까요?(웃음)” 중학교 때 소녀의 키는 168cm나 됐다. 선생님은 키가 크니 운동선수를 해보라 권했다. 그러나 소녀는 운동이 싫었다. 온통 예쁜 옷에만 관심이 있었다. 화려한 옷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상상도 자주 했다. 하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잡지 속 여인들처럼 예쁜 얼굴이 아니라서 주눅이 들곤 했다. “‘나는 못생겨서 모델을 할 수 없을 거야’ 하면서도 자꾸 그쪽을 돌아봤어요. 한동안은 패션계를 주름잡던 모델 ‘루비나’에 푹 빠져 지냈어요. 제 롤모델이었지요. 움푹 들어간 눈이 묘한 매력을 발산하던 그 여인, 카리스마가 대단했죠. 카르멘 델로피체는 또 어떻고요. 부러움과 질투심을 동시에 일으키게 하는 여인이잖아요. 올해 87세인데도 무대를 누비고 다닌답니다. 그녀의 표정과 몸매를 보셔요. 전율이 느껴지지 않나요?” 열다섯 살 그 시절로 돌아가 다시 꿈꾸는 소녀처럼 그녀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휴대폰에는 델로피체의 사진이 한가득이었다. 파도가 몰아치던 시절 한 됫박의 물음표를 들고 걸어가는 것이 인생일까. 누구든 파도가 치는 시절을 겪는다. 40대 때 그녀의 삶도 물음투성이였다. 하루 종일 눈물이 흐르는 시간을 살던 어느 날 무작정 교회를 찾았다. 기도라도 해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경제적 어려움과 인간에게서 받은 상처로 휘청일 때 종교는 위안이 됐다. 아직 먼 곳을 바라볼 힘은 없었지만 그날그날 이겨나갈 수 있는 에너지가 조금씩 생겨났다. “경제적으로 크게 무너지니까 회복이 잘 안 되더라고요.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어요. 그러나 주부로만 살던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더군요. 하루는 막막한 심정으로 벼룩시장 광고지를 들여다보는데 간병인을 모집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우리나라가 서독으로 간호사를 파견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1970년대 무렵이었을 거예요. 결혼 전 저도 독일에나 가볼까 하고 간호 보조 교육을 받았어요. 결국은 못 갔지만 간호 업무를 배워둔 덕에 한전 부속병원 소아과에 취직도 할 수 있었죠.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병원일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더군요. 이 일 저 일 가릴 형편이 아니어서 용기가 났는지도 몰라요. 그렇게 17년 동안 간병일을 했어요. 아직도 함께 일했던 몇몇 동료들이 일하고 있는데 급한 상황이 생기면 가끔씩 도와 달라고 전화가 옵니다. 예전에는 돈 때문에 일했지만 지금은 봉사하는 마음으로 갑니다.” 간병일을 하면서 그녀는 인간의 모습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젊은 사람에게 병원은 나아서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곳이지만 노인에게 병원은 저 세상으로 가기 전 들르는 정거장 같은 곳이었다. 가진 게 많든 적든 떠나는 길은 다 똑같았다. 모두들 후회하고 아쉬워했다. 그래서 그녀는 더 건강을 챙기고 스스로를 사랑하기로 했다. “모델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뒷방 노인네처럼 살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뒤늦게라도 시작한 공부가 삶의 원동력이 되었어요. 알게 모르게 건강에도 많은 도움을 받는지 대사증후군도 없고 당뇨, 고혈압도 없어요. 뱃살 하나 없이 몸무게도 일정해요. 의사 선생님도 깜짝 놀란답니다. 성격도 긍정적으로 변했어요.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재미있고요. 10년, 20년 아래 동생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감각도 생각도 젊어지는 것 같아요.” 쇼호스트에도 도전 그녀는 현재 ‘더쇼프로젝트 모델컴퍼니’에서 공부한다. 일주일에 두 번씩 나가 워킹과 표정, 포즈를 연구하고 연습한다. 이곳을 운영하는 정영주 대표는 청계천수상패션쇼, 광명동굴패션쇼 등 다양한 공연을 통해 시니어 모델 참여를 기획하고 도왔다. 정 대표 덕분에 그동안 10여 차례 패션쇼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최근 메인 모델로 무대에 오르는 데도 큰 힘이 되어줬다. 소중한 인연이다. 그녀의 첫 무대는 무사했을까. “당연히 진땀 흘렸죠. 무대에 오를 때는 대본을 먼저 짜요. 어디까지 걷고 어떤 포즈를 하고 어떻게 들어와라 하는 내용이죠. 첫 무대에 올랐을 때 얼마나 떨렸겠어요. 잔뜩 긴장해서 걷고 있는데 한 분이 ‘그쪽으로 가면 안 돼’ 하고 지적을 해서 순간 아찔했어요. 지금 같으면 표 나지 않게 수습했겠지만 그때는 무대 경험이 전무했던 터라 머릿속이 하얘졌어요. 그래서 ‘어머나! 어떡하지? 내가 실수했나봐’ 하고 뒤로 돌아선 거예요. 뒤따라오는 사람 얼굴과 떡 마주쳤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잘못 알고 지적을 했더라고요. 교수님은 누가 실수를 해도 지적하지 말라고 조언하셨어요. 당황해서 더 큰 실수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우왕좌왕 허둥댔던 그날이 어느새 추억이 됐네요.(웃음)” 최근에 쇼호스트 공부도 시작했다는 그녀. 건강할 때까지 계속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단다. 시니어가 자신을 보며 ‘이 나이에 이런 사람도 있네’ 하면서 자극을 받아 자신의 삶을 한 번 더 불태우면 좋겠다는 바람도 슬쩍 귀띔한다. 영원히 박제될 뻔했던 꿈, 다시 꺼내어 펼쳤으니 그녀만의 무대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 2018-05-16 08:45
-
- 빌딩숲 강남에서 오롯이 음식 전통 지켜온 ‘원주추어탕’
- 1981년. 어렵게 마련한 임대료를 손에 쥐고 며칠 영동(지금의 강남)을 헤맨 김옥란(80) 씨의 마음은 다급했다. 실패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한 달만 참으면 평생 먹고산다”고 호언장담하던 점쟁이 말도 큰 위안이 되진 못했다. 몫이 좋은 가게 터는 가진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복덕방에서 추천해준 곳은 번화가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몇 년의 고생과 실패로 날이 선 직감은 ‘이만하면 됐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은 강남 빌딩숲 속 명물이 된 교보타워사거리 ‘원주추어탕’의 시작이었다. 원주추어탕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막내아들 이남수(49) 사장은 지금 자리에서의 개업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원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을 때 첫 3년은 가족의 기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미아리에 첫 번째 가게를 차렸지만 가게 자리를 고르는 일도, 식당을 운영하는 일도, 모두 처음이었던 이들 가족에게 손님들의 반응은 냉정했다. 때문에 강남에서의 새로운 시작은 온 가족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집으로 헐레벌떡 뛰어왔죠. 아직도 생생합니다. 가게 문을 급하게 열었는데 식탁 바닥에 입 닦은 휴지와 나무젓가락 등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첫날부터 손님이 밀려들어 부모님이 그것들을 치울 겨를이 없었던 거죠. 미아리에서 가게를 차렸을 때 3년간 그렇게 많은 손님을 대해본 적 없었어요. 그날 부모님은 꽤 지쳐 보였어요. 하지만 입가의 미소는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날부터 손님은 점점 더 늘어났어요.” 원주식 추어탕 서울에 보급한 원조 원주에서 온 이 가족의 가업이 식당이 된 사유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 전후 경제발전 과정에서 많은 가족의 선택처럼 이들도 가난을 피하기 위해 1977년 서울행을 결정했다. 아직도 매일같이 출근해 재료를 살피고, 맛을 확인하는 김옥란 씨는 원주추어탕의 시작을 이렇게 설명한다. “동네 앞집 아저씨가 미꾸라지 잡는 데 선수였어. 양재기 한가득 잡아온 날이면 고추장을 휘휘 풀어 야채와 함께 끓여 동네잔치를 벌였거든. 미꾸라지도 잘 잡고 음식도 맛있으니 주변에서 식당을 해봐라 했는데, 차리고 나서 꽤 잘됐어. 손님이 많은 날이면 가끔 나도 가서 돕곤 했는데, 한 손님이 서울에서도 해봐라 하는 얘기에 내가 차려봐야겠다 싶었어. 식당 주인도 돕겠다 하고. 그래서 미아리에 자릴 잡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가 엉뚱한 데 식당을 냈으니 잘될 리 없었지.” 당시 이웃이었던 원주의 추어탕 집은 현재까지도 성업 중이다. 물론 서울의 원주추어탕과의 교류도 여전해서 이남수 사장은 그곳을 아직까지 ‘큰집’이라고 부른다. “미아리에서 장사를 시작했을 때 추어탕 한 그릇에 1200원이었어. 처음엔 재래식 요리법을 고집해서 식탁 앞에서 살아 있는 미꾸라지를 냄비에 넣었는데, 손님 옷에 국물이 튀고 난리도 아니었지. 3년간 고군분투하다 안 되고 빚낸 돈 다 떨어지기 전에 다시 원주로 내려가야겠다 싶었는데, 이대로 내려가기엔 그간의 고생이 너무 아까웠어. 그러다 그 시기에 영동에 가게들이 들어선다는 얘기에 거기서 다시 시작해보자 했던 거지.” 강남 개발 광풍 속에서 지켜온 전통 모자는 가게가 자리 잡았던 1981년 강남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1976년 준공된, 길 건너 제일생명 건물은 당시 그 지역이 ‘제일생명 사거리’로 불릴 정도로 존재감이 대단했고, 그 옆에는 영흥자동차학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거리에서 영동시장까지는 목재상, 골재상 등 건축과 관련한 각종 장비와 자재를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강남은 정부 주도 개발의 핵심에 있었고, 그 시기는 강남의 개발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이제 당시의 흔적은 찾기 어려워졌다. 위용을 자랑하던 제일생명 빌딩이 철거되고 2003년 교보타워가 들어섰으니 다른 건물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고집스레 당시 모습을 간직한 곳이 있다. 바로 원주추어탕이 운영 중인 건물이다. 1974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돌아보면 당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강남 제비’의 제비집도 여전히 처마 밑에 그대로다. 그중 모자가 가장 아끼는 것 중 하나는 여전히 현역으로 가게 앞을 지키고 있는 간판이다. ‘원조 고유의 음식’이라고 씌어 있는 간판은 이 사장의 선대가 직접 다듬어 제작한 것이다. 지금 위치에 자리 잡고 나서 2년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식당은 잘 운영됐다. 당시 건물에 4개의 점포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하나씩 인수하면서 조금씩 자리를 넓혀갔다. 그런데 한창 장사가 잘될 무렵 건물주가 부도가 나 건물이 은행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결국 무리를 해서 건물을 샀고, 원래 1층이었던 건물은 증축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누구도 못 말린 재료 고집 이남수 사장이 경영을 맡게 된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원래 볼링선수였던 그는 서울시 대표로도 활약했고 실업팀에 입단할 정도의 실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어머니 김옥란 씨에게는 배부른 직업으로 보이지 않았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가게로 와 도와달라고 했지. 식당일이 워낙 힘드니까. 처음엔 대를 이어 식당을 맡기겠다는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손님도 늘고 할 일이 많아지면서 의지하게 되더라고.” 그렇게 아들 셋은 모두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첫째는 성남시 서현동에 ‘원주추어탕’을 차리면서 독립했고, 둘째는 인근에서 번듯한 주점을 차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막내인 이 사장이 원주추어탕을 이어받게 됐다. 어머니 김 씨는 이 사장이 가게에 합류했을 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다고 기억했다. “의욕이 넘쳤어. 나는 그동안 잘해왔으니까 잘해온 방식을 고수하고 싶은데, 자꾸 이것저것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자는 거야. 처음엔 불안해서 혼내기도 하고 말리기도 했는데, 지내다 보니 제대로 된 의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거지. 그래서 지금은 뭘 하자고 하면 잘 듣는 편이야.” 새로운 시도를 한 메뉴 중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 메기불고기. 한 가지 메뉴로 사랑받는 맛집이 메뉴를 추가한다는 것은 꽤 부담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장의 고집으로 탄생한 메기불고기는 이제 대표 메뉴가 됐다. 이 사장의 또 다른 고집은 추어탕의 가장 기본이 되는 미꾸라지와 고추장에 관한 것. 특히 손님에게 좋은 미꾸라지를 내놓는 일은 그의 평생 숙제 중 하나다. “원래 미꾸리로 불리는 토종 미꾸라지를 썼어요. 몸통이 동그란 모양이라 동글이라고도 불리는데 성장 속도가 느려 양식에 적합하지 않아요. 또 자연산은 당연히 수급이 어렵죠. 그러다 보니 넙죽이라 불리는 중국산 미꾸라지가 대세가 됐죠. 저희도 어쩔 수 없이 그걸 쓰지만, 지금 동글이 양식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요. 성공해서 더 맛있는 추어탕을 손님에게 내놓는 것이 꿈이에요.” 구할 길이 없어 자연산 미꾸라지를 1년 내내 재료로 쓸 수는 없지만 소량이라도 매수가 가능한 매년 7월과 8월에는 자연산을 확보해 특별 메뉴로 내놓는다. 단골들은 절대 놓치지 않는 연례행사다. “다른 지역 추어탕과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고추장 역시 제가 신경 쓰는 재료예요. 3~4년에 한 번씩 담그던 고추장을 이젠 매년 만들고 있어요. 많이 만들어놔 여유가 있지만 그래도 제가 욕심을 부려요(요즘 손님용으로 사용 중인 고추장은 16년이나 묵은 것이다). 고추장 담글 때 어머니는 쉬셔도 된다 할 정도로 이제는 자신 있어요. 간장은 씨간장을 다양하게 만들어가면서 이런저런 실험을 하고 있어요. 고객들 입맛을 완벽하게 만족시켜줄 간장을 찾기 위해 계속 시도를 해보는 거죠.” 자리를 잘 잡아서 맛집이 되고 노포(老鋪)가 될 수 있었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강남은 수많은 식당이 생겼다 사라지는 중심 상권의 대표 지역이다. 원주추어탕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맛에 대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최근에는 미꾸라지가 난임부부에게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포장해가는 고객도 늘었다. 난임시술로 유명한 주변 병원의 환자들 사이에서 퍼진 속설 탓인지 ‘목적을 갖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다고. 실제로 쌍둥이 유모차를 끌고 간증과 함께 감사인사를 전하는 부부가 찾아오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다고 한다. 3대로 이어진 ‘고유의 음식’ 이 사장에게는 최근 가슴 벅찬 사건이 하나 있었다. 올해 아들이 원주추어탕 3대 사장이 되겠다며 식품공학과를 선택해 대학을 갔기 때문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그에게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제게는 그런 뜻을 내비친 적 없었거든요. 그런데 여동생하고 아이들끼리는 자주 이야기했던 모양이에요. 식당일을 하고 싶다고 말이죠. 어릴 때부터 식당에 자주 와 일을 돕곤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어요. 요즘엔 셰프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고, 또 대견하기도 해서 반대하진 않았습니다.” 입학원서 내는 날 할머니와 아버지, 아들 3대는 특별한 사진을 찍었다. 장소는 학교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식당에 내건 ‘원조 고유의 음식’ 간판 앞에서였다. 이 사장은 이 사진을 계산대 앞 잘 보이는 곳에 세워뒀다. “아이가 대를 이어준다고 하니 저도 꿈이 생겼어요. 좋은 식당 주인을 만들기 위해 제가 알아놓은 주변 식품기업, 제조시설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어요. 본인은 힘들겠지만.(웃음) 저희 부모님은 가족을 위해 이 식당을 만드셨고, 제가 물려받은 다음부터는 모든 일을 손님을 위해서만 해왔어요. 하지만 아이가 이 식당을 3대째 운영하게 될 땐 사회를 위한 주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주변과 세상을 보살필 수 있는 원주추어탕이 되길 바랍니다.”
- 2018-05-08 09:45
-
-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5월까지 공연되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관람했다. 오랜 시간 공연되어왔을 텐데도 오늘 공연에도 큰 객석이 꽉 차는 성황을 이루었다. 어린이 관객도 꽤 많은 건 아마 어린 빌리 엘리어트의 유명세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빌리 엘리어트를 뮤지컬로 보게 되었을 때 영화로 먼저 이 작품을 만났던 필자는 어떻게 영화의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고 연출했을지 매우 기대되었다. 영화로 봤을 때 정말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뮤지컬 본토에서 우리나라 소년 빌리 엘리어트를 발탁하려는 오디션 담당자가 내한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세계적인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소년들이 오디션에 참가해 피나는 연습을 하며 재능을 심사받았고, 그 과정이 다큐멘터리로 방영되기도 했다. 오디션 과정은 매우 까다로웠다. 현재는 적합해 보이는 지망생이지만 앞으로의 변성기 등을 고려할 때 재능이 출중해 보이는 아이가 오디션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슬퍼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오늘의 주인공이 그 소년 중 하나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체구에서 뿜어내는 에너지가 상당했다. 멋진 아이는 뮤지컬 내내 날아다녔다. 영화로 이미 잘 아는 내용이라 그만큼의 기대를 하고 관람을 했다. 대작 뮤지컬답게 웅장한 사운드와 배우들의 우렁찬 목소리로 좌중을 압도하는 연극이 시작되었다. 캐스팅을 모르고 왔는데 아버지로 김갑수 씨가 나왔고 할머니 역을 박정자 씨가 맡아 매우 반가웠다. 내용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어수선한 영국의 한 작은 마을 탄광촌 이야기다. 탄광촌의 광부들은 정부를 상대로 파업을 하며 그들의 권리를 지키려 했다. 주인공 빌리는 몇 년 전 엄마를 잃고 광부인 아버지와 형 그리고 할머니와 사는 11세 소년이다. 과거에 권투선수였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권투를 강요한다. 그러나 어린 빌리는 권투보다는 발레에 관심이 많다. 빌리의 재능을 알아본 발레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빌리는 발레리나의 꿈을 꾸는데 이를 안 아버지가 심한 꾸지람을 한다. 아버지는 강한 사나이로 크려면 권투가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발레 선생님은 빌리를 런던 왕립발레학교에 보내고 싶어 오디션을 추천한다. 그리고 비용이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발레 연습을 하고 있는 빌리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아들만큼은 이 가난한 탄광 마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며 오디션을 허락한다. 그리고 빌리는 마을 사람들이 마련해준 돈을 들고 런던으로 간다. 뮤지컬에서는 옷걸이에 걸린 옷들의 댄스 등 볼 만한 장면이 많았다. 탭댄스의 경쾌한 리듬도 관객의 마음을 들썩이게 했다. 필자는 감동의 눈물을 쏟게 했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기다렸다. 영화는 탄광촌에서 영국 최고의 왕립발레단에 들어가 크게 성장한 빌리가 어려운 살림에도 빌리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고 뒷받침했던 아버지와 형을 공연에 초대한다. 공연장에는 화려하게 치장한 귀부인들과 신사들이 가득했다. 허름한 모습의 아버지와 형은 머뭇거리며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무대 뒤에서 아버지와 형을 발견한 빌리는 음악 ‘백조의 호수’에 맞춰 무대로 날아오르며 비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호흡이 멈춰질 정도로 멋진 광경이었다. 비리비리했던 어린 시절의 빌리는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리노가 되어 있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해준 아버지와 형에게 보답하는 마음이 전해지는 그 장면에서 필자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딱 그 장면을 기대했는데 뮤지컬에서는 그냥 왕립학교로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좀 아쉬웠다. 하지만 매우 경쾌한 장면이 많아 재미있게 관람했다. 어린 빌리를 연기한 아이는 정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멋진 배우가 될 것으로 기대되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 2018-04-21 15:59
-
- 4월의 문화행사
- 벚꽃이 만발하는 4월, 이달의 추천 전시·공연·행사를 소개한다. 진해군항제 일정 4월 1~10일 장소 중원로터리 및 진해 일대 국내 최대의 벚꽃축제로 손꼽히는 ‘진해군항제’가 개최된다. 벚꽃 명소인 여좌천, 경화역, 진해탑 등에선 36만 그루의 아름다운 왕벚나무를 감상할 수 있다. 축제 동안에는 평소 출입이 어려운 해군사관학교, 해군진해기지사령부의 영내 출입이 가능하며 해군복 입기, 요트크루즈 승선 등 다양한 체험 행사가 열린다. 특히 금요일 저녁과 주말에 개최되는 군악의장페스티벌은 진해군항제에서만 볼 수 있다.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 일정 4월 3~8일 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는 출연진과 관객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공연으로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없앴다는 점이 특징이다.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중년 여성들에게 아직도 아름답고 열정을 내뿜을 수 있다는 용기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지난 6년 동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민참여형예술프로젝트,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신나는 예술여행 등의 사업에 선정됐다. 돌아온다 일정 4월 5일~5월 6일 장소 드림아트센터 2관 더블케이씨어터 출연 강성진, 정상훈, 김수로, 김곽경희 등 포스터에 ‘그리운 사람이 돌아옵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연극 ‘돌아온다’는 군대 간 아들을 기다리는 초등학교 여교사, 집 나간 필리핀 아내를 기다리는 청년, 욕쟁이 할머니 등 후회와 미련이 많은 주인공들의 사연을 통해 기다림과 그리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배우 김수로와 강성진을 필두로 다양한 연극무대에서 경험을 쌓은 정상훈, 김로사, 김사울 등이 참여한다. 아드만 애니메이션 – 월레스&그로밋과 친구들 일정 4월 13일~7월 12일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아드만 스튜디오’는 영국의 유명한 클레이 애니메이션 제작사다. 이번 전시에서는 아드만 스튜디오의 대표작 ‘윌레스와 그로밋’, ‘숀더쉽’, ‘치킨런’ 속의 주인공들을 만나볼 수 있다. 2018 앙상블마티네 개막 4월 21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지휘 윤승업 연주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단 모차르트 시리즈를 목관, 현악, 금관, 심포니 총 4가지 테마로 나눴다. 이번 첫 번째 시리즈에서는 모차르트 작품 중 유일한 클라리넷 협주곡인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1악장’이 연주될 예정이다. 사랑해요, 당신 일정 4월 28일~6월 3일 장소 KT&G상상마당 대치아트홀 출연 이순재, 장용, 정영숙, 오미연 등 연기 베테랑 이순재, 장용이 남편 '한상우' 역을, 정영숙, 오미연이 아내 '주윤애' 역을 맡았다. 연극 '상랑해요, 당신"은 평범했던 부부에게 치매라는 불청객이 찾아오면서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렸다.
- 2018-03-29 10:38
-
- 소통하고 싶다면 당장 SNS를 시작하라
-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한 지 10여 년이 됐다. 이제 스마트폰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됐다. 시니어 역시 스마트폰 보유율과 SNS 이용률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50대의 스마트폰 보유율은 약 90%에 달한다. 또 50대의 SNS 이용률도 2014년 21.5%에서 2016년 33.4%로 10% 이상 큰 폭으로 증가했다. 60대도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이런 추세는 시니어가 디지털 세상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즐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현대인의 일상, ‘SNS’에 있다 최근 시니어도 빠르게 디지털 세상에 적응하고 있다. 친구들과 카카오톡으로 사진이나 건강 정보를 공유하고, 스마트폰으로 은행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가족 간에도 단톡방을 만들어 대화를 나눈다. 또 카카오스토리나 페이스북에서 취미와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도 많다. SNS의 가장 큰 순기능은 바로 ‘소통’이다. 온라인은 연령과 성별을 초월한다. 그래서 시니어가 많이 이용하는 SNS도 중요하지만 다른 연령층에서 이용하고 있는 SNS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인터넷진흥원의 ‘2017 인터넷이용실태조사’에 따르면, 소위 ‘인스턴트메신저’를 이용하는 사람의 99.4%가 카카오톡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SNS 이용자 10명 중 6명이 페이스북을 이용하고 있다. 그 뒤를 카카오스토리(47.6%), 인스타그램(30.5%), 네이버밴드(29.7%)가 잇고 있다. 이들이 SNS를 하는 이유는 ‘친교(76.5%)’가 가장 큰 목적이었다. 또 다른 사람이 올린 콘텐츠를 보거나(55.3%), 취미나 여가 등 관심사를 공유하기 위해(43%) 이용하는 사람도 다수였다. 이들은 SNS를 이용하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아지고(68%), 최신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다고(66.4%)도 생각했다. 또 직접 만나지 않아도 SNS를 통해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일하는 자녀를 대신해 손주를 돌봐주는 조부모가 늘고 있다. 특히 저출산으로 ‘식스포켓(six pocket)’, ‘에잇포켓(eight pocket)’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부모, 조부모, 외조부모에 더해 이모, 고모, 삼촌까지 모두 아이 한 명을 위해 지갑을 연다는 의미다. 손주 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인터넷을 접하는 모태 디지털 세대다. 이들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없는 세상을 겪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들과 소통하려면 인터넷과 SNS 활용은 필수다. SNS가 주는 3가지 장점 SNS는 생각보다 장점이 많다. 첫째, 돈을 벌 수 있다. 요즘은 1인 미디어 전성시대다. 유튜브 같은 플랫폼에 올린 영상이 인기를 얻으면 수익으로 연결된다. 일상생활, 반려동물 이야기, 먹방(먹는 방송) 등 다양한 내용을 동영상으로 담을 수 있다. 조회수에 따라 광고 수익도 들어오며, 유명한 크리에이터는 제품 협찬 등으로 수익원이 다양하다. 또 창업을 하거나 소규모 자영업을 할 경우 SNS를 통한 홍보가 가능하다. 입소문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지만, SNS는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다. SNS의 또 다른 장점은 가족을 비롯해 다른 세대와도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36년 만에 브라질에서 귀국한 이찬재(76) 씨는 인스타그램에서 ‘내 손주들을 위한 그림들’이라는 SNS 계정을 운영한다. 브라질에 있을 때 한국과 뉴욕에 사는 손주들이 그리워 2015년부터 SNS에 매일 그림을 올렸다. 이러한 사연이 영국 BBC에 소개되며 그는 유명인사가 됐다. 사실 그는 인터넷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돌보던 손주들이 한국으로 귀국한 후 그림으로 손주들에게 추억을 남겨주기로 결심했다. 한국의 옛 모습에서 최근의 평창동계올림픽까지 그가 그린 그림은 700여 점을 넘어섰다. 그에게는 33만여 명의 팔로워도 있다. 전시회도 개최하고 그림도 판매한다. 그는 늦은 나이에 SNS를 시작해도 충분히 배울 수 있고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점은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셀카를 이용해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겨주는 일본인 니시모토 키미코(90). 72세에 사진을 배운 그녀는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거나 개구리 분장 사진 등을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현재 약 8만 명의 팬들과 소통하고 있는 그녀의 유쾌한 사진을 보면 구순의 할머니라는 상상이 전혀 안 된다. 사진들이 큰 인기를 끌면서 책도 출간했다. 이외에 노부부의 커플룩, 먹방 등을 SNS를 통해 공유하며 노후를 즐겁게 보내는 시니어도 많다. SNS를 시작할 때 꼭 알아야 할 것들 SNS는 더 이상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SNS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먼저 어떤 SNS를 이용할지 결정하기 위해 각각의 특징부터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과 카카오스토리는 프로필을 기반으로 지인들과 연결된다. 반면 인스타그램은 사진이나 동영상 등 특정 관심사를 올릴 수 있는 이미지 기반의 서비스다. 만약 그림이나 패션 사진을 주로 올리고 싶다면 인스타그램이 적합하다. 각 SNS 앱은 스마트폰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다음은 계정 만들기다. 사용할 SNS를 결정했다면 가입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은 이름과 휴대폰 번호 또는 이메일, 생일, 성별을 입력한다. 또 시니어가 많이 이용하는 카카오스토리는 카카오톡을 사용하면 바로 시작할 수 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SNS 활용 교육을 무료로 하는 시도별 지자체도 많다. 가까운 지자체의 교육 프로그램을 찾아보고 등록하면 된다. 교육 참가가 어렵다면 혼자서도 시작할 수 있다. 유튜브나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이용할 수 있는 SNS 사용법을 검색하면 많은 자료를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새로운 용어와 사용법을 익혀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하다 보면 신비한 SNS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시니어는 다양한 삶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창업에서 취미까지 활용 범위가 넓다. 외로움은 시니어의 4대 고통 중 하나라고 한다. SNS에서는 멀리 사는 자녀, 친구와 언제든 만날 수 있다. 아직 SNS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면, 디지털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이번에 시도해보면 어떨까. 이나영 시니어 전문 칼럼니스트 한국외국어대학교 졸업. 차의과학대학교에서 고령친화산업학을 전공했다. 한화그룹과 신한은행에서 근무했다. 현재 경향신문에서 고령사회 담당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며, ‘이나영의 고령사회 리포트’를 연재하고 있다.
- 2018-03-29 1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