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리지앵 농부 충주의 땅을 와인에 담다
- “그렇다면 인생을 바꿔야지!” 새벽 2시, 야근 후 돌아와 죽어도 농부가 되겠다는 남편의 아우성에 아내는 결단을 내렸다. 그렇게 어제까지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던 남편은 청바지를 입고 밭으로 향했다. 땅에 심은 건 포도나무였지만, 부부는 꿈을 심었노라 말한다. 그들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남편은 뭐든 이뤄진다 하고, 아내는 뭐든 이뤄지지 않아도 괜찮다 한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들의 꿈은 자연히, 그리고 자연이 이뤄가리라는 것이다. 테루아(Terroir)는 프랑스어로 ‘땅’을 의미한다. 와인이 만들어진 땅을 가리킬 때 흔히 사용한다. 충주의 와이너리 ‘작은 알자스 레돔 테루아’(이하 작은 알자스)는 소설가 아내 신이현(57)과 농부 남편 도미니크 레몽 에으케(53)의 꿈을 심은 땅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직접 과일을 농사지어 ‘내추럴 와인’을 만든다. 작은 알자스에 도착했을 때, 부부는 ‘웰컴 드링크’처럼 내추럴 와인을 내왔다. 풋사과 시드르였다. ‘폭’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더니, ‘꼬르르르’ 미세한 탄산이 잔을 타고 미끄러졌다. 그 맛은 어떤가 하니, 마치 와인계의 평양냉면이라고 할까? 깔끔하면서도 은은하게 산뜻함이 감돌았다. 단순히 ‘맛있다’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했다. 걸맞은 단어를 고르던 차, 아내 신이현이 제대로 설명에 나섰다. “내추럴 와인은 유기농 과일을 수확해 착즙한 뒤 필터링이나 살균 등을 거치지 않고 만든 와인입니다. 흔히 ‘맛있다’고 표현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려 인위적인 첨가물을 넣지 않고 자연이 준 그대로 발효해서 만든 거예요. 즉 그 과일이 자란 땅이나 한 해의 기후 등에 대한 솔직한 설명과 같죠. 가령 비옥하지 못한 땅에서 나온 와인은 심플한 맛이 나기도 하는데, 그 역시 나름의 개성으로 보는 거예요. 고로 세상에 맛없는 내추럴 와인은 없습니다. 과일이 자라던 땅과 나무, 바람과 햇볕을 느끼고 즐기면 그뿐이죠.” 열매가 좋아하는 날을 기다리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술, 내추럴 와인을 한잔 마시는 것은 한 움큼의 땅을 먹는 것과 같다고 했다. 와인 맛이 다른 것은 땅이 다르기 때문이고, 땅이 다른 것은 땅마다 스며 있는 농부의 땀방울이 다름일 테다. 더군다나 오롯이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내추럴 와인의 경우엔 가히 그 땅에 농부의 철학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미니크는 어떤 농부라 말할 수 있을까? 그는 “땅을 키우는 농부”라 일컬었다. “농부는 나무만 키우는 게 아니라 땅도 함께 키워야 해요. 일반적으로 포도밭을 한다고 하면 포도가 주렁주렁 많이 열리고, 그것을 수확해 큰돈을 얻는 게 목적이겠죠.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다릅니다. 나무와 땅이 있다면, 우린 땅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지금 당장 열매가 많이 열리는 것보다 땅을 살리는 기쁨이 더 크거든요. 그렇다 보니 농사짓는 방법도 다른 거죠.” 땅을 키우는 차별화된 농법으로 도미니크는 ‘생명역동농법’을 택했다. 생명역동농법이란 한마디로 우주의 기운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다. 식물에 영향을 주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기록한 달력을 농사에 적극 반영한다. 꽃식물이나 잎식물, 열매식물 등 각기 다른 식물은 저마다 좋은 기운이 있는 날엔 활짝 생명을 펼치지만, 그렇지 않은 날엔 조용히 웅크리고 움직이지 않는단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도미니크는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옮길 때 항상 별자리 달력을 펼쳐놓고 식물에게 좋은 날을 찾는다. 와인 역시 같은 방법으로 만든다. 가령 포도를 따거나 착즙할 때는 열매에게 좋은 날을 골라 작업한다. 씨를 뿌려 열매를 수확하고 내추럴 와인이 탄생하기까지, 모든 과정에 인간은 ‘돕는 자’의 역할을 할 뿐 그밖의 모든 것은 자연의 힘에 맡긴다. 그 이름처럼 ‘내추럴’(Natural)하게 말이다. 애당초 땅에 그러한 철학을 심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들의 삶에도 그러한 양식이 깃들었기에 가능했다. 혹자는 이런 부부를 보고 마치 물 따라 바람 따라 유유자적 산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이에 아내 신이현은 “그저 가만히 내버려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살아지는 건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가령 농사에서 ‘자연스러운’ 것은 수확을 위해 인간의 손이 가장 덜 가게 하는 거죠. 그런데 그게 가능하려면 실제로는 초반에 아주 많은 손길이 필요해요. 농부의 상당한 노력을 투여해야만 결국 자연스럽게 식물이 자라고 열매 맺는 시간이 찾아오죠. 물론 몸은 고단하고 힘들어요. 그런데도 자연에 맞춰 산다는 게 엄청난 철학이 있어서는 아닌 것 같아요. 그보다는 우리는 그냥 그게 좋더라고요. 자연에 해가 되지 않는 일이 나에게도 즐거움이 되고, 그것을 목표로 삼으니 소소하지만 매 순간 성공하는 듯한 기분도 들고요.” 농업의 꽃 술, 농부의 손으로부터 부부는 매 순간 성공이라 말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정신승리라 하겠다. 물론 그들에게는 그 말이 진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타자로서 일련의 과정을 듣노라면 매 순간 결코 녹록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그 위대한(?) 서막은 그들이 프랑스에서 한국에 오고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익히 알듯 포도농사와 와인 양조라면 프랑스의 여건이 더 나았을 테다. 농사에 관해선 고집스런 도미니크지만, 한국행을 택한 데에는 아내의 의견이 컸다. 사실 도미니크는 농사만 지을 수 있다면 어느 땅이라도 좋다고 했지만 말이다. “남편이 농부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프랑스 남쪽으로 밭을 보러 다녔어요. 피레네산맥 근처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진 곳이었는데, 비싸지도 않고 환경도 괜찮았죠. 그런데 제게는 너무나 낯설었어요. 남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포도 따는 외로운 동양 할머니로 늙어갈 걸 상상하니 그건 싫더라고요. 마침 한국에 포도 와인은 많지만 사과로 만든 시드르는 없길래, 도미니크에게 한국은 어떠냐고 권했죠. 그렇게 파리의 아파트를 팔고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단순히 남편은 농사를 짓고 싶고, 아내는 한국에 살고 싶어 무작정 삶의 터전을 바꿨다. 한국의 땅값이 얼마인지, 양조장을 짓는 데 얼마가 들지, 생활비는 어떻게 벌지 등등 구체적인 계획도 대책도 없었다. 원대한 꿈만 가득했다.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 망해도 좋다. 적어도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했다는 말은 할 수 있겠지”라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렇게 중고차 한 대를 구입해 새 터를 잡기 위해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농업기술센터에 찾아가 자신들의 처지를 털어놓기도 했고, 공공기관에 도움도 요청했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사과연구소도 가보고 포도작목반에도 갔다.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특히 과일을 직접 농사지어 와인을 만들겠다고 하자 반응은 더욱 냉랭했다. 근처에서 과일을 구입해 양조하는 것이 돈과 수고가 덜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의 훈수가 더해질수록 도미니크의 철학은 되레 견고해졌다. “농업의 꽃은 술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좋은 술은 농부의 손에서 시작됩니다. 때문에 와이너리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기본이라고 봐요. 농부가 뙤약볕 아래 허리를 구부려 일하는 것은 배를 채우기 위함, 즉 생존을 위한 것이죠. 그러나 농업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술은 휴식과 즐거움을 위한 액체니까요. 우리가 먹는 쌀, 밀 같은 농산물은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그 농산물로 만든 술은 온전히 즐거움을 위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술을 만드는 일 속에서 가장 인간다운 가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애처롭고도 숭고한 농부의 삶 아쉽지만 첫해 사과 농사는 망했다. 안타깝지만 두 번째 농사도 망했다. 그 후로도 장마, 가뭄, 병충해 등 고난은 계속됐다. 자연의 힘에 맞서기 위해 다른 농부들은 관수를 대고, 비닐을 깔고, 농약을 치기도 했지만, 내추럴 와인을 고집하는 도미니크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자연의 섭리대로 땅을 일궈온 것처럼, 야속할지언정 편법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쓰라린 경험은 고스란히 초보 농부에게 귀한 밑거름이 됐다. “점점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 같아요. 흉년이든 풍년이든 자연이 주는 것을 우리가 너무 슬퍼할 필요도 없고, 또 너무 기뻐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건데, 그럴수록 나무가 깊게 뿌리 내릴 수 있는 좋은 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땅이 좋고 뿌리가 깊이 나면 나무들도 어려운 환경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거든요. 당장은 좀 힘들더라도 먼 훗날을 위해 그 토대를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온종일 땅과 씨름하는 도미니크를 보고 있노라면 아내는 뭉클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애처로운 마음마저 든다. 남편이야 꿈을 이루느라 그렇다 하지만, 소설가 신이현의 꿈이 ‘농부의 아내’는 아니었을 터. 그러나 한국 생활이 서툰 남편의 뒷바라지는 고스란히 아내의 몫이 됐다. 생명역동농법을 위해 소똥이며 꿀벌이며 안 구해본 것이 없고, 갖가지 서류 준비며 비즈니스며 고객 응대며 자신도 처음 해보는 일들을 해내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옳고 가치 있는 일임을 알기에 그녀는 오늘도 기꺼이 꿈의 조력자가 된다. “도미니크가 만약 다른 일을 한다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돕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 사람이 하는 일이 굉장히 뜻깊다는 걸 느꼈고, 때론 그 모습이 감동적이기도 해요. 남편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옆에서 보면 ‘아, 저 사람이 하는 일이 굉장히 숭고하다’는 생각이 들죠. 물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집안에서는 인정을 못 받는 것처럼 저도 바가지를 긁곤 해요. 그러고 나면 또 미안하고, 힘들어도 도와주게 되고. 사실 이 나이에 제게 새로운 꿈이랄 건 없지만, 차차 땅과 일이 안정되면 양조장을 떠나 조용한 곳에 가서 판타지 소설이나 써볼까 상상해봅니다.(웃음)” 포도밭에서 피어나는 예술 부부가 그리는 ‘작은 알자스’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물었다. 이에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고 했다. 그저 하루하루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주어진 일을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하자는 마음가짐 정도? “시골에 산다고 하면 ‘힘들게 어떻게 사느냐’며 촌이 가진 소외감을 떠올리는 이도 있고, 전원주택 짓고 제2의 인생을 여유롭게 사는 모습을 그리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식으로 시골이 주는 어떤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는데, 우리 생각은 달라요. 가령 문화, 예술 이런 걸 왜 도시에서, 갤러리에서만 해야 한다고 여기는지 모르겠어요. 최근 양조장에서 ‘농부 요리사 예술가’라는 작은 축제를 열었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거든요. 예술가를 비롯해 마을분들도 오시고 함께 기타 치며 노래도 불렀는데 활기가 넘쳤죠. 그렇게 밭은 수확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얼마든지 예술을 위한 창작의 장으로도 쓰임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그렇게 자연을 향유할 때 땅도 더 즐겁지 않을까요?” 작은 알자스의 첫 와인이 출시된 지 이제 5년 차. 아직 농부로서도 사업가로서도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부부는 서두르지 않는다. 와인 사업이 대박 나서 돈방석에 앉는 것이 목표가 아니기에 그렇다. 그저 현재처럼 원하는 방식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면 그뿐, 수익은 나중 몫이다. 그런데도 주변 이들은 흔히 “대박 나시라! 성공하시라”는 말로 그들을 재촉한다. 이에 그들은 말한다. “그런 응원은 사실 별 의미 없습니다. 이미 원하는 인생을 사는걸요. 어쩌면 남들 눈에는 불안해 보일지라도 지금이 나쁘지 않거든요. 그러니 제발 그런 걱정은 넣어두셨으면 해요.(웃음) 적어도 우리는 지금 후회 없이 꿈꾸고 있다 말할 수 있으니까요.”
- 2022-07-20 08:43
-
- 도발과 전복의 메시지를 다탄두로 장착한 백남준의 예술 전당
- 소설가 스티븐 킹은 이런 말을 했다. “소설은 독자를 움켜쥐고 한 대 후려갈기는 것처럼 위력적이어야 한다.” 그는 독자들에게 충격과 전율을 야기하는 작품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의 관습과 관점을 타격하려는 예술가로서의 목적의식이 선명하기로는 비디오아트 창시자 백남준(1932~2006)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발하고 기이한 작품 행위를 통해 대중의 굳은 의식을 비트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럭비공, 그것도 도발과 전복의 메시지를 다탄두로 장착한 럭비공처럼 날아가 사람들의 타성을 가격한 백남준의 작품은 전례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는 점에서 창조의 원본이었다. 사람들은 초기 한때 그의 작품에 어지러워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갈채는 뜨거워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탁월한 예술혼의 작품 다수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백남준아트센터다. 백남준아트센터는 도시 외곽 야트막한 동산 아래에 있다. 유리로 외부를 두른 3층 규모의 대형 단독 건물을 지어 미술관을 꾸렸다. 첫눈에 감흥을 맛보기는 다소 어려운 형상이다. 물결처럼 굽이치는 건물 뒤편 곡면이 매우 유려하지만 미감을 자극할 만한 디테일 요소는 부족한 편이다. 설계를 주도한 이는 독일 건축가 마리나 스탄코비치. 그는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했으며, 건물 외벽을 유리로 만들어 안과 밖이 연결되도록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주변 지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지었다는 점은 이 건물이 지닌 커다란 미덕이다. 건물의 형상은 동서 방향으로 눕혀진 ‘P’자를 닮았다. 주변의 언덕과 골짜기를 배려하 는 한편, 가용 부지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귀결된 형상이 그렇다. 이 ‘P’자 모양은 그랜드피아노의 형태와 비슷하다. 그래서 피아노를 퍼포먼스 오브제로 즐겨 동원했던 백남준의 경향을 이미지화한 건물 형상이라 유추하는 이들이 많다. 설계자가 의도적으로 건축에 담은 백남준의 상징물은 외벽 유리 커튼월에 즐비한 가로줄이다. 이는 백남준이 구사한 작업의 핵심 매개체인 TV 화면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과거 흑백 TV의 화면 조정 시간 때 지지직거리며 출렁거리는 줄무늬에서 착안한 것. 재미있게 음미할 만한 요소가 적지 않은 건물인 셈이다. 그러나 백남준이라는 거대한 콘텐츠를 담은 그릇치고는 평범하고 소박하다. 실험과 도발을 일삼았던 백남준을 닮았더라면, 건물을 척 보는 순간 감동과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솟을 텐데. 세계적 수준의 예술가는 세계적 수준의 건축에 담아야 아귀가 맞는 게 아닐까. 정신의 대륙붕에서 융기한 준봉 이 미술관은 백남준의 작품 130여 점을 소장했다. 해마다 두어 차례 펼쳐지는 백남준 상설전에 소장품 일부를 번갈아 전시한다. 현재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전이 열리고 있다. 올해로 탄생 90주년을 맞이한 백남준의 놀라운 예술 세계를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한 전시회다. 1층 전시장에서 맨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는 작품은 ‘TV정원’이다. 열대성 식물로 채운 인공 정원에 경쾌한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오는 TV 모니터들을 배치한 이색으로 눈길을 붙잡는 작품이다. 식물과 기계, 또는 자연과 기술의 컬래버레이션이다. 조물주의 작품이라 할 만한 식물을 오브제로 끌어들여 예술의 경계를 확장했다. 언뜻 대수롭지 않은 조합처럼 보이지만 백남준의 작품이라 뭔가 대수로운 걸 열심히 찾아보게 된다. 이게 예술의 소구력이자 백남준의 힘이다. 평범하거나 따분한 세상과 사물을 한 걸음 더 들어가 흥미진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달아주는 게 그의 예술이지 않던가. 백남준의 예술 여정은 전위음악으로 시작됐다. 1960년 그는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공연하면서 피아노를 박살내고 스승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 청중을 경악시켰다. 그건 예상을 초월한 급진적 퍼포먼스였다. 텔레비전을 오브제로 동원, 비디오아트의 신호탄을 쏜 건 ‘음악의 전시’라는 개인전을 통해서였는데, 이번엔 잘린 소머리까지 진열했다. 틀에 갇힌 예술 관행을 질타하고, 위선의 이웃사촌인 엄숙주의를 조롱했던 거다. 이때부터 백남준은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백남준을 알아보는 눈은 많지 않았다. 언론의 보도 자체가 드물었다. 기사를 쓰더라도 백남준의 작업이 희한하지만 그게 과연 예술인지 뭔지 모르겠다는 투의 의문을 제기하는 글에 그쳤다.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 나체 퍼포먼스를 하다 경찰에 연행됐다는 외신을 가십으로 전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후 백남준이 비로소 국내에서도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계기로 해서였다. 전시장에선 백남준의 출세작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볼 수 있다. 1984년 새해 벽두,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중계로 한국, 미국, 독일, 프랑스에 생방송된 이 퍼포먼스는 현대미술사의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년’을 통해 기계문명의 폐단을 암울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백남준은 ‘1984년’을 비디오아트로 패러디, 오웰의 어두운 미래 전망을 뒤엎었다. 기술 발전으로 오히려 인간 해방이 가능하다는 낙관적인 세계관을 개진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백남준은 드디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주목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전시실의 백남준 작품은 10여 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 시대를 태풍처럼 휩쓴 거장의 작품들이니 반색하지 아니할 수 없다. ‘칭기즈 칸의 복권’에는 말 대신 자전거를 탄 20세기 칭기즈 칸 로봇이 등장한다. 자전거의 짐받이에는 TV가 가득 실려 있다. 왜 칭기즈 칸인가? 백남준은 자신의 진취적 성향의 출처를 ‘몽골 유전자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비디오아트로 세상의 모든 예술을 압도하겠다는 야심의 표명? 그는 다만 머리와 기교로 예술을 성취하지 않았다. 어릴 적에 가족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만들어 사용할 정도의 기찬 상상력, 어마어마한 독서량, 정밀한 철학적 논문 등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로 벼린 통찰력…. 그의 예술은 정신의 대륙붕에서 융기한 하나의 준봉이었을지도. 2층 전시실에 있는 ‘메모라빌리아’(Memorabilia)는 뉴욕 소호에 있었던 백남준의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 재현한 공간이다. 백남준의 숨결이 선연히 느껴지는 공간이라 기억에 남겠다. 작품 관람을 마친 뒤엔 건물 뒤편을 굽이치는 산책로를 즐길 일이다. 돌을 바닥에 깔고 경사지의 곡면을 채웠으니 돌의 성채다. 구간은 짧지만 매우 아름다워 강렬하다.
- 2022-05-27 08:40
-
- 손주 육아에 발목 잡힌 중년의 두 번째 사랑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두 눈에 기어이 눈물이 고였다. 여전사처럼 살아온 날들이 일순간 스쳤다. 기쁜 날이 슬픈 날인 사람들. 나도 그랬다. 남편 없이 10년을 혼자 달려왔지만 오늘처럼 그의 부재가 크게 느껴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남편 없이 치르는 애들 결혼식이 처음도 아니고 이번이 두 번째건만…. 기념 촬영을 마치고 피로연장으로 가려는데 막 걸음마를 시작한 외손녀가 하객들이 빠져나간 예식장 로비를 뒤뚱이고, 행여 넘어질세라 엄마인 딸애가 그 뒤를 부지런히 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있을 곳이 어디일까, 다시금 갈등이 일었다. 연인산에서 받은 프러포즈 10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은 같은 대학의 등산 동아리에서였다. 그는 재수를 한 복학생 선배, 나는 새내기. 다섯 살이 많았던 그는 나를 여동생처럼 스스럼없이 대했다. 귀염성 있는 내 외모와 활달한 성격이 말수 없는 그에게 친근감과 활력을 주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와 두 살 많은 언니, 이렇게 여자 셋이서 단출히 살아왔던 내게 그의 존재는 오빠 같고, 때로는 아빠 같았다. 그는 맘도 몸도 넓고 듬직했다. 그렇게 서로 가까워지면서 동아리 등산보다 둘만의 등산이 잦아졌고, 주말마다 자연스레 손을 잡고 산자락을 누비며 산등성이를 오르내렸다. 동아리 회원들 앞에서 시치미를 딱 뗀 채 비밀 연애를 하는 스릴도 만끽했다. 그가 졸업 후 우리의 만남은 더욱 자유롭게 무르익어 어느 단풍 짙은 가을, 경기 가평 소재 지금의 연인산에서 그가 내게 프러포즈를 해왔다. 연인산, 로맨틱한 이름의 산. 단풍에 취해, 달콤한 키스에 취해 나는 졸업하자마자 그와 결혼했다. 지금 생각하면 뭐가 그리 급했는지. 하지만 다른 미련은 없었다. 미련은커녕 대기업에 근무하는 남편, 살림이 적성에 꼭 맞는 나, 연달아 낳은 3남매와 옥시글옥시글 가정 꾸리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다. 졸업 후 진로 계획도 딱히 없었던 나의 결혼은 집에서도 환영하는 운 좋은 ‘취집’이었다. 주말이면 연애 때 기분을 살려 함께 산에 오르는 것도 같은 취미를 가진 부부라는 점에서 행복을 더했다. 자존심과 맞바꾼 캐나다 이민 남편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지고 침울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지금도 가슴 아프다. 생각해보면 남편은 종달새처럼 조잘대는 귀여운 여자로만 나를 대했지,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성숙한 아내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나대로 남편 뒷바라지에, 한창 손이 가는 아이들 치다꺼리로 그의 사정을 소상히 알지 못했다. 알았다 한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어느 날 저녁 밥상을 물린 후 남편이 이민 카드를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자고 했다. 회사 사정이 나빠져 본인이 곧 밀려날 것 같다면서. 그렇게 되면 자존심 상해서 더는 한국에 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남편 말대로 자존심이 문제였다면 당연히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듣기에 솔깃했다. 위기가 기회라고 하지 않나. 무엇보다 아이들 교육 면에서 새로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캐나다 이민 생활은 남편에게는 시련의 시작이었다. ‘넥타이를 풀어야 산다’는 말이 있지만 그는 10년 가까이 넥타이를 풀지 못했던 것이다. 이른바 화이트 칼라가 영어권 선진국으로 이민 갔을 때는 본국에서의 커리어를 내려놓고 블루 칼라 노동 시장에 과감히 뛰어들어야 살 수 있다는 이민계의 정설을 예의 그 자존심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남편의 퇴직금 외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산이 얼마간 있었기 때문에 일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다른 이민자들에 비해 훨씬 적었다. 여유를 가지고 신중하게 일을 찾자고 한 것이 그만 세월만 흘려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위기가 기회라고 하지만 위기를 위기로 의식하지 못하는 한 위기는 말 그대로 위기가 되어 덮쳐올 뿐인 것을. 넥타이를 풀지 못한 남편의 위암 이민 7년 차 무렵, 이미 50대 초중반의 남편은 일 찾기를 포기하는 상태에 이르렀고, 다섯 식구가 물가 비싼 나라에서 벌이 없이 의식주를 해결하다 보니 곶감 빼먹듯 가진 돈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이민 초기에 부부가 함께 청소라도 하자고 북돋우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울 따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캐나다 생활에 잘 적응해주었다는 점이다. 백인 학생 위주의 학교도 무난히 잘 다녔고 교우 관계도 원만했으며, 별로 신경 써준 것도 없었는데 학업 성적도 그만하면 좋았다. 터울이 크지 않은 3남매가 원만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탈 없이 대학에 진학해준 것이다.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게 캐나다에서의 10년 세월이 흘렀다. 기왕 늦은 것, 아이들이 잘 정착해준 것에 안도하며 일이야 지금부터 찾으면 되지 않냐고 남편과 내가 뒤늦은 결의를 다진 것도 잠시, 불안은 불행이 되어 현실에 얼굴을 디밀었다. 남편이 위암 판정을 받았다. 10년의 무직 스트레스를 몸이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손써 볼 새도 없을 만큼 급박한 상태에서 3개월 후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럴 수는 없었다. 믿기지 않았다. 허망하고 허탈했다. 아무리 본인이 선택했다지만 멀쩡한 내 나라 두고 이국에 와서 병 걸려 죽은 남편이 너무나 가여웠다. 체면 따위 생각하지 말고, 자존심 내세우지 말고 아무 일이나 했더라면, 돈을 떠나서 건강을 유지하지 않았겠는가. 뒤늦은 후회로 가슴을 쳤다. 사회에서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자기 위치가 없다는 것이 남자로서 얼마나 좌절감과 자괴감이 들게 했을지, 가족들 건사하느라 바쁘게 돌아치던 나는 미처 몰랐다. 미련하고 지혜 없고 아둔하기 짝이 없는 아내가 바로 나였다. 생활 전선에 부는 칼바람 남편을 황망히 떠난 보낸 후 몰아닥친 것은 현실의 칼바람이었다. 그해 막 대학을 졸업한 맏이인 딸은 다행히 바로 취업이 되어 집안의 기둥이 되었고, 대학 3학년이던 큰아들과 신입생 둘째 아들은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여 자신들의 용돈을 해결했다. 학자금은 장기 대출이 가능하고 취업 후 갚으면 되니 당장 재정적 압박이 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나였다. 이일 저일 가릴 것 없이 취업전선에 나서야 했다. 한국에서나 캐나다에서나 남편만 믿고 살면서 돈 한 푼 벌어본 적 없던 내가 허드렛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겠나. 게다가 집에서 살림하며 가족끼리만 지내느라 영어라곤 한마디도 할 줄 몰랐으니. 그런 내가 한인이 경영하는 시내 카페에서 일자리를 구한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 커피를 타거나 서빙을 할 처지는 아니라도 주방에서 빵을 굽고 간단한 샐러드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된 것만도 아무 기술 없는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었다. 아이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집의 월세를 내고 생활을 꾸릴 수 있는 게 어딘가. 다시 사랑이 찾아왔으나 카페 주방 6년 차로 일이 익숙해질 무렵 매주 화·수·금요일마다 아침을 먹으러 오는 캐나다 현지의 중년 남자가 1년 전부터 내게 호감을 표해왔다. 그는 인근 대형 약국의 관리 약사로 주 3일을 근무하는데, 출근하는 날이면 내가 일하는 카페에서 아침 식사를 한다. 3년 전 이혼하면서 아내와의 재산 분배 문제로 운영하던 약국을 처분했고, 두 자녀의 재정적 부양에서도 이제는 자유롭다. 건강하고 외모도 괜찮고 진중한 성격이다. 나도 그에게 호감이 간다. 그가 오는 날, 카페에서 그를 기다리는 설렘도 있다. 그와는 퇴근 시간이 맞을 때면 함께 저녁을 먹고 산책하는 정도의 데이트를 하고 있다. 그는 나와 더 가까워지길 원하지만 아직 나는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내 쪽에서 마음을 정하기만 하면 조만간 그와 재혼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딸은 결혼해서 한국에 나가 살고, 아들도 졸업 후 한국으로 취업이 되어 내 곁을 떠났다. 집에는 막내아들과 나, 둘만 산다. 내가 그와의 본격적인 교제를 망설이는 이유는 딸 때문이다. 직장에 다니는 딸은 내가 한국에 와서 외손녀를 키워주길 원하고 있다. 그러면 사실상 나는 캐나다를 떠나야 한다. 그와의 관계만 없다면야 남편도 없는 캐나다에 무슨 미련이 있으랴. 막내도 어차피 독립할 것이고, 그러면 결국 나 혼자 남게 되니 딸과의 합가는 내게도 반가운 일이다. 나이 들어 자식과, 그것도 도움을 주면서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은 떳떳하고도 다행스러운 일이기에.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와는 헤어져야 한다. 딸에게는 이번에 네 동생 결혼식 때 어차피 한국에 가니 그때 의논하자고 답을 미뤘지만, 딸은 이미 내가 승낙한 것으로 여기는 눈치다. 그 사람의 존재를 모르는 딸로서는 혼자 된 엄마를 모시게 된 것에 안도감도 느낄 테지.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집안의 기둥 노릇을 해준 생각 깊고 대견한 아이니까. 물론 딸은 내 사정을 듣는다면 흔쾌히 나의 길을 축복하고 응원할 것이다. 아들도 아니고 딸이니 더욱. 그런데 내가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내 행복 찾자고 다른 할머니들 다 해주는 걸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아서라기보다, 손녀를 봐줌으로써 자식들과의 연을 끈끈하게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만약 캐나다에서 그 남자와 살게 된다면 자식들과는 어쩔 수 없이 서먹해질 것이다. 그것은 내게 두려운 일이다. 남들은 내게 사랑을 선택하라고 말하겠지만, 나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조언하겠지만, 막상 내 일이 되고 보니 결정이 쉽지 않다. 그 사람의 나를 향한 훈훈한 미소도 그립고, 삐삐 머리 손녀의 앙증맞은 분홍색 리본도 눈앞에서 아른거리니 이를 어찌할꼬.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2022-04-15 09:28
-
-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부적 쓰는 여자
- 나직이 숨을 고르고는 붓에 힘을 주었다. 오늘은 왠지 붓끝이 가볍다. 이제 한 획만 쓰면 된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마지막 획을 길게 내리긋는다. 미세한 흔들림도 없이 붓끝이 전서체의 획을 마무리했다. 나는 황색 부적지에서 붓을 떼고 지긋이 글씨를 바라보았다. 집안에 두 마리의 용이 화목하게 깃들어 있는 모양새다. 마주 보는 획이 기울지 않고 균형을 잘 이루고 있다. 게다가 단아한 글씨와 잡귀를 물리치는 담백한 운필로 금방이라도 집안 가득 화평한 꽃 기운이 생동할 것만 같다. 나는 매우 흡족해하며 붓을 옆에 나란히 놓았다. 보통 부적符籍이라 함은 대개 한 해의 액厄을 피하거나 벽사壁邪와 기복祈福의 민간 신앙을 담고 있는 데서 유래한다. 요즘에는 현대적이며 새로운 글씨체를 통해 무병장수의 삶과 소망을 담긴 부적을 주로 찾는다. 적당한 먹의 농담과 담백한 운필. 그리고 기운 생동한 붓질과 여백 등이 조화롭게 그려진 부적을 높이 쳐 준다. 가게 진열대에 인쇄소에서 찍어낸 부적이 다발로 있지만 단골 손님들은 내가 직접 쓴 부적을 원한다. 내가 직접 써서 파는 것은 한 장에 십만 원 정도를 받는다. 부적은 누가 쓰느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비싼 것은 한 장에 백만 원까지 받는다는 소문도 있다. 그런 경지의 부적은 가로세로 획마다 금석기金石氣가 있으며 글씨는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과 다양한 서체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조형미까지 갖추고 있다. 실로 대단한 경지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게다가 그보다 한술 더 뜬 최고 경지에 이른 부적은 완연한 획의 흐름에서 삶의 희로애락이 감지되며 파격적인 데다 변화무쌍하고 괴기스러움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나는 부적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쓴다. 부적을 쓰는 날은 보통 손 없는 날을 잡는다. 부적을 쓸 때는 신령한 공력이 배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 동쪽을 향하여 정화수를 올린다. 그리고 향을 사른 후 무릎을 꿇고 주문한 손님들의 소망을 염원하며 기도를 올린 뒤 경건하게 붓을 든다. 나는 진열장 겸 책상으로 쓰는 계산대에 앉아 방금 쓴 부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색종이 위에 마르지 않는 붉은 글씨가 물기로 번들거렸다. 부적지로 사용하는 종이는 홰나무로 만든 괴황지다. 크기는 가로 10센티 세로 15센티 정도다. 붉은 먹물은 흔한 물감이 아니라 경면주사鏡面朱砂라고 하는 특별한 안료이다. 그것의 원료는 붉은색을 띠는 광석에서 채굴한다. 원료를 작은 용기에 넣고 절구공이로 곱게 빻아서 미세한 가루로 만든다. 그리고 부적유符籍油로는 참기름이나 백설탕을 녹인 액체를 가루와 섞으면 부적 특유의 붉은 색깔과 특유의 향을 풍기는데 이것을 경면주사라 한다. 나는 고개를 들고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벽시계는 한겨울의 나른한 오후를 가리키고 있다. 가게 중앙에는 활활 타는 전기난로가 썰렁한 가게 안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다. 아담한 공간에는 무속인들에게 필요한 각종 제의 용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맞은편 붙박이 진열장에는 망자들의 넋을 달래줄 영가 옷이 촘촘히 쌓여있고 그 옆에는 무속인들이 굿할 때 쓰는 무신도 대신방울 오방기 장군칼 향로 장구 꽹과리 북 등 무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으며 등 뒤로는 기도할 때 쓰는 등초 무지개초와 목향 금난향 궁연향 등 각종 향과 초가 칸칸마다 들어있다. 다시 고개를 들고 실내에 놓인 간이 탁자 위로 시선을 옮긴다. 그것은 장판을 씌운 자그마한 작업용 탁자다. 무속인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골라 탁자에 놓으면 그것들을 큰 보자기로 싸서 묶는 곳이다. 그들이 한 번씩 가게에 들러 굿판에 쓸 제의 용품을 고르면 보통 서너 보따리가 넘을 때도 있다. 흔히 사람들은 무속인, 하면 무당이라 하여 천시하는데 정작 그들의 신심은 대단하다. 그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 보는 신령님을 섬긴다. 신령님을 무가에서는 보통 몸주라 부르는데, 그들은 몸주와 교감하는 능력을 지닌 영매자靈媒者이기 때문이다. 잠시 창밖으로 눈길을 부렸다. 하늘이 점차 흐려지는가 싶더니 진눈깨비가 풀풀 날리기 시작했다. 저만치서 팔짱을 낀 연인이 까르르 웃으며 정답게 걸어왔다. 세련된 차림에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두 사람의 어깨엔 얼음 가루가 묻은 스케이트화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어디 스케이트장에라도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언뜻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눈길을 당겨 부적을 봤다. 부적이 거의 다 말라 있었다. 부적을 조심히 집어서 서랍장에 넣었다. 지금은 명절 전이어서 손님이 뜸한 편이다. 설이 지나면 한해의 액땜이나 복을 바라는 부적 주문이 들어오고 굿판도 자주 열릴 것이다. 내가 부적을 쓰게 된 것은 손님들 때문이다. 부적을 찾는 손님마다 직접 손으로 쓴 걸 원하기에 오빠를 통해 부적 쓰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한 장 두 장 팔리던 것이 지금은 소문이 좋게 돌아 단골로 내 부적을 사가는 손님들이 제법 있다. 유리문에 매달린 종소리가 쨍그렁, 하고 울렸다. 출입문 쪽을 보았다. 조금 전에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걸어가던 연인이다. 나는 방긋 웃으며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언니, 우리가요, 만난 지 꼭 백 일째거든요. 그래서 부적처럼 간직할 수 있는 기념품을 찾는데, 어떤 게 있어요?” “그러세요? 축하드려요.” 나는 현대적으로 고안된 액세서리 부적 용품이 걸려 있는 매대로 그들을 안내한다. 진열대에는 갖가지 액세서리 부적 용품들이 걸려 있다. 그들은 이것저것 가늠해보다 그중 하나를 고른다. “언니, 이걸로 할게요.” 그들이 고른 것은 나비 문양의 매듭 핸드폰 줄이다. 날개 사이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옴(범어)자가 새겨져 있다. 옴이란 길상의 뜻을 지닌다. 전통 문양인 나비 그림에 상감기법을 적용한 앙증맞은 부적이다. “나비 문양이네요. 나비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아름다움을 상징한대요. 게다가 사이좋은 연인이나 금실 좋은 부부를 상징하기도 하구요.” “그래요? 그럼 우리가 잘 고른 거네요, 호호.” 풋풋한 연인들이 싱그러운 웃음을 떨어뜨려 놓고 나가자 마음 한곳이 공허해졌다. 나는 콤팩디스크를 켰다. 오카리나의 잔잔한 소리가 가게 안을 흘렀다. 혼자 있을 때면 자주 듣는 음악이다. 나는 눈을 감고 향기로운 소리에 잠겨 들었다. 짙고 푸른 숲이 보이고 맑은 계곡물 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가난한 저녁을 먹고 달빛 맑은 산중에서 도란도란 자연과 대화하는 소리. 때로는 별빛 아래에 앉은 외로운 목동의 피리 소리 마냥 멜로디가 귓가에 들려왔다.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찻잔에 부었다. 계산대에 앉아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눈발이 제법 굵어져서 분분히 날리고 있었다. 집안일 외엔 다른 일이라곤 전혀 해 본 적 없던 내가 10년 전에 불교용품점을 차리게 된 까닭은 불의의 화재 때문이다. 그 화재로 인해 남편은 세상을 떴다. 남편을 빼앗아간 그 화마의 기억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악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내 마음 어느 한켠에는 여전히 남편과의 마지막 순간이 스냅사진처럼 뚜렷하게 찍혀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남편이 내 곁에 존재하는 듯 그의 부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환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남편을 빼앗아가 버린 그 악몽의 기억이 스르르 떠올랐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자동차 딜러였던 남편은 여느 날처럼 출근 준비를 했다. 새로 다려놓은 하얀 와이셔츠에 내가 생일 선물로 사 준 넥타이를 맸다. 그리고는 셋집 빌라 이 층 계단을 바쁘게 내려갔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남편은 남보다 항상 먼저 출근을 했다. 또한 가장의 책임감 때문인지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성실함 때문인지 남편은 동기들보다도 먼저 승진하는 기쁨도 누리기도 했다. 잠시 뒤 남편이 투덜거리며 다시 계단을 올라왔다. 자가용 바퀴가 펑크 났다고 했다. 아무래도 전철역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날씨가 풀렸다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날씨여서 나는 남편에게 외투를 한 겹 더 입혀주며 잘 다녀와요, 라고 하며 생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잘 다녀와요, 라고. 그리고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킨 후에 청소를 하며 TV를 켜는데, 뉴스 속보가 자막으로 떴다. 오전 9시 경 ㅇㅇ역 전철 내에서 50대 남성이 플라스틱 통에 든 휘발유에 불을 붙인 뒤 객실 내에 던져 차량 내부를 완전히 전소시켰다는 뉴스였다. 뉴스 자막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ㅇㅇ역은 남편이 종종 전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할 때 이용하는 전철역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범인의 방화시간과 남편의 출근 시간을 되짚어보았다. 9시 경이면 남편은 이미 회사에 출근해서 근무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남편은 보통 회사에 한 시간 정도 일찍 출근하기 때문에 화마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의 직업상 외근이 잦은 업무여서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그의 휴대폰에 전화를 해 보았다. 그런데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음성만 줄곧 들려왔다.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계속 통화 중이더니 겨우 연결이 되었다. 저쪽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사모님,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김과장님이 9시 경에 ㅇㅇ역 방향으로 외근을 나갔다고 합니다. 저희도 지금 연락이 안 돼...‘ 나는 저쪽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전철 화재는 내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남편의 시신은 화염 속으로 사라져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너무나 큰 충격에 오열과 통곡을 하며 까무러치기를 반복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빙의 상태로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넋을 놓고 살았다. 살아도 산 게 아닌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남편은 꿈속이든 현실이든 가릴 것 없이 언제든지 내 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우리가 연애할 때 서로 손을 꼭 부여잡고 마음 졸이며 봤던 이라는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슬픔에 잠긴 한 여자와 그런 여자를 두고 이승을 떠나지 못한 한 남자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감동적인 영화였다. 우린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눈물을 글썽이며 가슴 저릿하게 관람했었다. 그런데 그 영화가 몇 년 후 내 얘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편을 잃은 그 도시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내가 어느 정도 사고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고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을 무렵. 친오빠의 도움으로 수원으로 이사한 뒤 ’종로불교사‘라는 가게를 열었다. 친오빠는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불교용품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를 연 후로 나는 남편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살아왔다. 행여 힘든 일이 생기면 나 자신이 나약해질까 두려워서 일부러 강해지려고 노력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가게 앞에 서 있는 남천나무에도 조용히 눈이 쌓여갔다. 붉게 물든 채로 말라버린 남천나무 이파리들은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어도 떨어지지 않고 나무에 꼭 붙어있다. 나는 시선을 당겨 계산대 끝에 놓인 모래시계를 발견했다. 유리로 된 호리병 모양의 입구가 위아래로 마주 보게 붙어있다. 그 안에는 보라색 모래 알갱이가 들어있다. 모래시계를 거꾸로 세우자 보라색 모래 알갱이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듯 모래 알갱이들이 시간을 거슬러 쌓인다. 모래시계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보니 남편을 떠나보낸 지 5년쯤 후에 문득 내 앞에 나타난 한 남자가 떠올랐다. 평소 친한 언니의 소개로 알게 된 남자다. 언젠가 그 남자와 애들이랑 커다란 모래시계가 있는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사 온 기념품이다. 피차 서로 미워해서 헤어진 게 아니어서 추억이 깃든 모래시계를 굳이 버리지 않고 남겨두었다. 초혼일 때는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크고, 재혼일 경우에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다,라고 어느 심리학자가 말했던가. 만약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한 남자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될까. 아니면 아이들의 의견을 따라 지금처럼 혼자의 삶을 선택하게 될까. 지혜롭게 사랑하고 냉정하게 판단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행복이다, 라는 명제를 어느 책에선가 읽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 운명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운명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바꾸기 나름일까. 여전히 나는 홀로서기라는 무거운 숙제 앞에 주눅이 들곤 한다. 그 남자는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은혜 씨를 향한 사랑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자신도 몇 년 전 이혼이라는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수수하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그의 첫인상에 호감이 갔다. 그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아니,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나도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는 결혼을 전제로 종종 만남을 가졌다. 남자가 모 문예공모전에서 상을 받았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기뻐했고 축하를 건넸다. 그날 밤 우리는 수상의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격렬하고도 뜨거운 사랑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사랑의 증표로 남자에게 새 자동차를 선물했다. 자동차 키를 받아든 남자는 감격하며 자신은 여태까지 한 번도 자동차를 소유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한다고 다 결혼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신은 인간에게 그렇게 호락호락 않다는 걸 알았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은 그 남자에게 매우 호의적인 데 반해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은 은근히 적의를 품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어쩌면 낯선 남자에게 엄마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심리가 깔려있는 것 같았다. 그런 심리가 은연중에 나타난 날이 있었다. 한번은 다 같이 어느 공원에 나들이 가는 중이었다. 그날따라 비를 뿌렸는데 자꾸 앞 유리창에 성에가 끼면서 뿌예졌다. 아직 새 차에 적응하지 못한 남자는 어떻게 성에를 제거하는지를 몰라서 무척 당황해했다. 그 와중에 뒷좌석에 탔던 아들이 괜히 심통을 부렸다. 남자는 차량 조작법을 몰라 당황하던 터라 아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풀이를 했다. 그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과연 내가 저 남자를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들기도 했다. 내가 가끔씩 남자를 만나는 동안 유독 예민해진 아들이 은근히 속을 끓였다. 어느 날은 밥을 먹지도 않고 짜증을 부리는가 하면 예전에 안 하던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아들이 한편으로는 안 되어서 하루는 잠들기 전 나란히 누워서 대화를 나눴다. “엄마, 그 아저씨랑 함께 사는 거야?” “왜? 그러면 안 돼?” “나, 그 아저씨 싫어. 나는 엄마랑 오래오래 살 거야. 엄마, 그 아저씨랑 살지 마. 알았지?”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며 뭔가 설움 같은 게 울컥 치밀어서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엄마는, 아무하고도 안 살아. 우리 아들하고만 살 거야.” 나는 아들을 꼭 껴안아 주었다. 아들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내 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기어코 사단이 나고 말았다. 한날은 잠시 놀러왔던 남자는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거실에서 깜박 낮잠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밖에서 들어온 아들이 그걸 보고는 안 그래도 꼴보기 싫었던 터라 마침 잠자고 있던 남자의 머리통을 냅다 발로 밟아버렸다. 남자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듯 너무 황당하고 화가났다고 했다. 어찌 생각하면 순수한 아이로서는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사랑하는 엄마를 빼앗아가는 남자가 오죽 미웠으면 그랬겠는가, 싶기도 했다. 남자는 어린아이의 돌발적인 행동에 무척이나 당황하기도 하고 실망해서는 그날 이후로 발길도 뜸하다가 자동차를 돌려주는 것으로 관계를 정리했다. 그렇게 그 남자와 사이가 멀어지고 나니 다시 예전처럼 되돌리기는 쉽지가 않았다. 아마도 남자도 자신의 혈육이 아닌 두 아이를 감당하며 어찌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 후로 그 남자와는 가끔씩 안부를 묻는 친구 사이로 남기로 했다. 최근에 그 남자로부터 시집이 배달되었다. 등단 후 출간한 첫 시집이라고 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시집을 펼쳐들었다. 모래시계의 모래 알갱이들이 거의 다 흘러내릴쯤 유리문에 달린 방울 소리를 짤랑거리며 누군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돌려보니 천궁 보살이다. 보살은 올해 쉰 줄로 머리가 벌써 반백이다. 생머리를 뒤로 빗어 넘겨 쪽을 쪘다. 굿이 있는 날이면 가게에는 가끔씩 들렀다. 그는 늘 피곤한 기색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가격을 흥정할 때도 고갯짓으로 거의 다 하곤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쉽게 속내를 보인 적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말해야 될 때도 필요한 말이 끝나면 도로 입이 닫힌다. 나는 예의 밝은 표정으로 인사말을 건넸다. “보살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 “차 한 잔 드릴까요?” 보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탁자에 앉았다. 그날따라 보살은 더욱 초췌하고 피곤해 보였다. 나는 차를 타서 보살에게 건네고 곁에 앉았다. 볼륨을 줄인 오카리나 소리가 가게 안을 잔잔히 흐르고 있다. 보살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입에 댔다가 뗐다. “부적이나 한 장 받을까 하고….” “부적이라면 보살님도 쓸 수 있지 않아요?” 사실 웬만한 무속인들에게 부적은 필수여서 대개가 다 직접 써서 판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저 어깨너머로 배운 내게 부적을 써 달라니. 나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부적이라면 신통력이 있는 무속인들의 부적을 더 높이 치기 때문이다. 무속인 중에도 세습무인 숙무와 신내림을 받은 강신무가 있는데, 특히 강신무의 부적이 더 영험하다 하여 부르는 게 값이다. 천궁보살도 내 짐작으론 강신무降神巫임에 틀림없다. 일전에 어느 손님이 천궁보살한테 부적을 받은 거라면서 쓴 지 오래된 부적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흔히 보는 부적이 아니라 자동 기술된 검은색 글씨였다. “나, 부적 안 쓰네.” “아니, 부적을 안 쓰다니요?” “…….” “아무렴, 제가 쓴 부적보다야 보살님이 쓴 부적이 훨씬 더 영험하지 않아요.” “영험은 무슨...우리 집 영감이 엊그제 죽었네. 그래서 저승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부적 보시나 하려고.” “그렇다면 영감님을 위해서 더욱 부적을 쓰셔야죠.” “급살 맞을 냥반….” 보살은 퀭하게 들어간 눈언저리를 비비며 물기를 닦았다.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 보인다. 그동안 마음고생도 어지간히 한 것 같아서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다. 남편과 살아오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을 보살의 심정을 어느 정도 헤아릴 것 같다. 어쩌면 보살의 마음이 시린 하늘에 떠 있는 조각달처럼 한없이 쓸쓸하리라. 남편이 떠난 이후에 내게 하늘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길을 걷다가도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면 마치 남편이 손짓하는 듯한 환영. 꿈속을 찾아온 남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눈을 뜨면 문득 혼자란 생각에 하염없이 베개를 적시던 눈물. 내 안에 간직된 남편이라는 슬픈 단어. 신의 시샘을 받은 것일까. 남편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려고 내게 많은 사랑을 안겨주었는지도.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힘들게 결혼한 만큼 남편은 나를 더욱 아껴주었지. 그런 남편의 따뜻한 품에서 나는 온실 식물처럼 살았다. 쉬는 날이면 나를 데리고 드라이브하는 게 취미인 듯, 바다로 가서 개펄을 파헤치거나 산을 오르기도 했다. 한 번은 산을 오르다 토끼풀이 수북이 우거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네잎크로버를 찾기로 했다. 먼저 내가 한 잎을 찾자 남편도 곧이어 찾았다. 그리고는 네잎크로버가 잇따라 발견되었다. 남편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행운이 줄줄이 오려나 보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행복했던 시간들. 남편은 발견한 네잎크로버를 행운의 부적이라며 책갈피에 소중히 끼워 두었다. 실내를 흐르던 오카리나 멜로디가 다음 곡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보살을 향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영감님이 생전에 보살님한테 잘못한 게 많으신가 보네요?” “웬수도 그런 웬수가 없지. 불쌍하기도 하고….” 목이 타는 듯 보살은 손에 든 찻잔을 입에 가져가 길게 들이키고 한숨을 내쉬었다. 윤기를 잃은 반백의 머리가 빗질을 자주 하지 않아서 부스스 일어나 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보살이 부적을 쓰지 않을까. 보통 무속인들은 굿이 없을 때는 사주를 봐주거나 부적을 써서 생업을 이어간다. 더러는 식당이나 상점을 하기도 하지만. 보살은 찻잔에서 입을 떼고 헛기침을 한 뒤에 목청을 다듬었다. “우리 집 냥반이 젊었을 적부터 내 속께나 썩였지. 아들을 하나 낳고 둘째를 가지려는데 어떤 영문인지 들어서지가 않더구먼. 그래서 외아들을 금쪽같이 여기며 키웠네. 그런데 원래 난봉기질이 있던 냥반이 슬슬 바람을 피우더란 말일세. 그래서 바람기를 잡으려고 점쟁이 집에 가서 부부금슬이 좋아지는 애정 부적을 샀네. 부적은 양과 음이 조화를 이루어야 효험이 있잖은가. 그래서 두 장을 받아서는 한 장은 꼭 접어서 영감 바지춤에 몰래 숨겨놓고 또 한 장은 베개 속에 넣었지. 그런데 부적이 효험이 없는지 이 냥반의 바람기는 갈수록 심해지더구먼. 그래서 다음번엔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서 비방을 물어봤네. 남편 바람기를 잠재우는 데는 여우자궁 만큼 좋은 부적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요새 살아있는 여우도 보기 힘든데 어디서 여우자궁을 구하냐니까. 다 구하는 수가 있다며 알려주데. 중국을 드나드는 보따리 상인들이 몰래 사가지고 들어온다는구먼. 그래서 얻기 힘든 여우자궁을 하나 얻지 않았겠나. 그리고는 그것을 내 속옷에 몰래 숨기고 있었지. 그러고 한 며칠 지나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 냥반의 바람기가 수그러들더란 말일세. 집에도 곧장 들어오고 사업차 출장 간다는 핑계도 줄어들고 말이지. 그게 정말 효험이 있어서 그런 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바람기는 없어졌네.” “아휴, 보살님. 사내들은 젊을 적에 한 번씩 다 바람을 피운다잖아요.” 남편에게도 그와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었다. 한번은 빨래를 하려고 남편 바지주머니를 뒤지는데 쪽지가 하나 나왔다. 업무적인 메모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것도 같고. 암튼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건 메모 내용이 아니라 글이 적힌 메모지였다. 그것은 일상적인 메모지가 아니고 하트 그림이 그려진 종이였다. 저녁에 퇴근하자 대뜸 당신, 어디 숨겨놓은 여자 있어요? 하고 물었다. 남편은 뜨악한 눈빛을 하다가 이내 웃으며, 당연히 있지. 여기 당신, 하고는 얼버무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남편이 뭔가 숨긴다 싶어 감추고 있던 메모지를 얼굴에 디밀었다. 메모지를 본 남편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아, 그거! 하면서 고백을 했다. 며칠 전 출장길에 우연히 결혼 전 사귀었던 여자를 만났다고. 그리고 함께 차를 마시고 헤어질 때 여자가 남편에게 메모지를 건네준 거라고. 나는 남편에게 이딴 메모지를 받지 말라며 못을 박고는 씩씩댔던 기억이 났다. 보살은 눈이 약간 침침한 듯 눈을 한번 비비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일별했다. 어젯밤에 잠을 옳게 못 잤는지 눈동자도 붉게 번져있었다. 찻잔에 남은 차를 마저 입에 붓고는, “그것뿐이면 말을 안 하지. 이 냥반의 바람기도 좀 잠잠해지고 사업에 열심이다, 싶었는데 덜컥 부도가 나버렸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 앞으로 열차가 지나다니는데, 철로에서 놀고 있던 외아들이 열차에 치여 죽었어. 부도난 이후로 이 냥반은 도망다니느라 기별도 없고, 외아들은 죽고. 나는 실성하다시피 해서 사는 걸 작파했지. 그러다가 종종 부적을 받으러 드나들던 무당을 찾아가서 죽은 아들 넋이나 달래주려고 굿을 부탁했어. 그리고 굿판이 한창 열리고 연신 비나리를 하는데 천궁에서 온 신령神靈이 그예 턱 하니 내 몸주로 들어와 버렸다네. 그때가 아마 20여 년 전이었지.” 물끄러미 얘기를 듣고 있는 내 마음도 덩달아 숙연해졌다. 늘 입을 닫고 살아가는 보살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게다가 가게에 올 때마다 늘 추레한 옷차림. 영감님의 행방불명과 외동 아들의 불의의 사고. 아마 보살은 죄인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소중한 자식을 잃고 녹록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저 앙상한 가슴에는 얼마나 깊은 한을 담고 있을까.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생떼 같은 아들을 잃은 어미의 슬픔을 그 무엇에 비할 수 있겠는가. 살아있는 날이 어쩌면 죽는 일보다 못한 형벌의 삶이리라. 내 삶이란 것도. 남편이 남기고 간 흔적을 매일 마주쳐야 하는 슬픈 날들. 아침이면 눈물로 흥건히 젖어있는 베개를 안고 또 흐느껴야 하는 텅 빈 시간. 남편이 여느 날처럼 일찍 일어나는 습관처럼, 불쑥 화장실에서 나올 것만 같은 착각에 물끄러미 화장실 문을 응시하기도 했다. 다른 남편들은 반찬 타박도 잘한다는데, 어떻게 된 건지 음식솜씨도 별로인 내가 밥상을 차려주면 꾸역꾸역 군소리 없이 잘도 먹었다. 한번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때는 정말 남편이 귀엽게 보여서, 일부러 맵고 짜게 국을 끓였더니 내 입맛이 변했나,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남편이다. 남편과 사내 결혼한 내가 잠깐 직장 생활한 것 말고는 결혼한 이후 줄곧 살림만 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서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남편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하며 문득문득 며칠 전의 아침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침울한 아이들을 달래 학교에 보내 놓고 힘없이 앉아 남편의 체취가 밴 가구들을 만져보다 울컥 슬픔이 복받쳐오기도 했다. 가난한 우리는 소박한 결혼식을 하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신혼여행을 설악산으로 갔다. 마침 눈이 내려 산길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등산로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을 때 나를 덜렁 업고 가면서 내 와이프가 보기보다 무겁네, 하며 놀려댔었지. 엊그제 남편의 쉰 번째 생일날, 생일상에 밥과 미역국을 떠 놓고 그의 부재에 난 또 얼마나 흐느꼈던가. 남편은 결혼하고 십 년간 내 곁에 머무르다 떠났다. 그리고 홀로 견뎌온 십 년의 시간. 그 시간 동안 가끔씩 모든 게 허무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살아있으면서 이렇듯 무감각하게 세상을 응시하는 지금의 나. 어떤 날은 일이 손에 안 잡혀 매사에 흐느적거리다 하루해를 넘기기도. 그럴 때면 거울을 들고 또 다른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깨진 거울 조각 속에 내 얼굴이 들어 있는 것처럼. 그 안에 조각난 얼굴이 슬픈 눈으로 나를 지그시 건너보았다. 언젠가 남편과 함께 동해 바닷가로 드라이브 갔던 날, 처연한 장면을 봤다. 국도 한복판에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차량들이 쌩쌩 달리며 일으키는 바람에 하얀 털이 날리고 있었다. 만지면 아직은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을 것 같은 들개의 주검. 나는 문득 죽어있는 들개의 몸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순간 내 손끝을 타고 끔찍한 소름과 시체의 온기가 동시에 전해져 온 것 같아 몸을 가늘게 떨며 움츠렸다. 사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차량들이 들개의 몸을 타고 넘어갔다. 그럴 때마다 죽은 들개의 머리가 들썩거렸다. 죽기 전까지도 한 발만 더 뛰면 바퀴에 치여 죽는다는 것을 모른 채 앞으로만 달렸을 미련한 짐승. 어쩌면 내 삶도 길 위에 죽어있는 그 미련한 짐승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욱한 존재. 어느 순간 내 앞에 깊은 슬픔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달려오지 않았던가. 남편이 책갈피에 끼워놓은 네잎크로버의 행운이 늘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여기듯. 슬픔과 행복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둘이 아님을, 남편을 잃고서야 가슴이 저리도록 와 닿았다. 전철 화재사건 뒤 처참한 내 심정은 길에서 죽은 개의 사체 같았다. 개의 몸뚱이 위로 차바퀴가 수없이 지나다 보면 나중에는 털가죽만 남듯, 남편을 잃고 한동안 방황한 내 삶은 생명을 잃은 털가죽이나 다름없었다. 남편이 바닷가 큰바위에 서서, 우리도 여기 온 기념으로 글을 새겨두자고 했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싫어할 텐데, 하며 말렸다. 그러나 남편은, 옛날 선사시대에 바위에 그렸던 암각화라는 것도 일종의 행운을 비는 부적이래. 그때 사람들도 바위에 그림을 새기며 풍요를 빌었을 거야. 그리고 바위에 새긴 동물마다 상징하는 그들의 소망도 깃들어 있는 거래, 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마침 색깔이 나는 작은 돌멩이를 찾아서는 글을 새기기 시작했다. 우리 가정에 사랑과 행복이 가득 넘치기를. 현우와 은혜 다녀감. 글을 다 쓰고 난 남편의 환하게 웃는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이들과 함께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하는 많은 시간. 어느 순간 남편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아이들과 나를 지켜보리라는 느낌이 불현듯 들 때도 있다. 언뜻 등 뒤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시선. 얼핏 뒤돌아보면 무료한 정물 풍경만이 헛헛한 가슴으로 밀려들던 상실감에 몸을 떨기도.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유독 아빠를 잘 따랐다. 퇴근한 남편과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장난을 치거나 할 때면 은근히 질투가 생길 정도였으니까. 짧은 시간 동안 남편은 나와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안겨주고 떠난 것 같다. 평생 나누어 줄 사랑을 한꺼번에 다 주고 가려는 것처럼. 시난고난한 삶을 살아 온 보살은 나이에 비해 주름도 많이 잡혀 있었다. 그 모진 세월을 저 보살은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을까. 보살은 눈언저리로 흘러내린 몇 올의 머리카락을 갈퀴 같은 손으로 쓸어 올리더니, “그렇게 집안 폭삭 망하고 팔자에도 없는 무당이 되었지. 사는 게 힘들 때는 한 많은 이 세상과 연을 끊으려고 골백번도 마음먹었지. 그래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고, 모진 게 목숨인가 벼. 이를 악물었지. 죽을 때 죽더라도 이 냥반이 집에 돌아오는 것 보고 죽겠다고. 그래서 내가 배운 짓이라고는 푸닥거리밖에 없으니 굿판을 열거나 부적을 쓰면서 연명했네. 시난고난 갖은 고생하며 사는데 한날은 파출소에서 깜깜무소식이던 그 냥반 소식이 들려오더란 말이여. 웬 부랑인이 나를 찾더라고 하면서. 한달음에 가보니 허, 이 냥반이 거지꼴을 하고 쭈그려 앉아있는데, 우리 집 영감이 맞는가 싶더구먼. 가만히 보니 눈도 좀 이상해 보이는 게 정신도 온전치 않더라니. 옛날에 그 번지르르하던 행색은 어디 가고 꼭 비렁뱅이 짝이었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조금 전까지 사락사락 날리던 눈발이 어느새 멎었다. 그 눈발은 보살의 앙상한 가슴속에서 여전히 날리는 것 같다. 황량한 들판 위로 가뭇없이 날리는 눈보라처럼. 보살의 눈동자가 텅 비어 보인다. 생기라곤 한 가닥도 없어 보이는 그런 눈빛. 예전에 내 눈빛이 그랬었지. 멍한 눈으로 앉아있는 날들이 많았다. 공원에서 낯선 이가 앉았다 간 빈자리도 쓸쓸해 보이는데, 하물며 가장 사랑하는 남편의 빈자리임에랴. 혼자인 시간에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면 햇빛 쨍쨍한 대낮이 걸려 있고, 눈을 감으면 내 안에는 굵은 눈발이 날렸다. 하루하루가 혼돈과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행여 시장이라도 다녀오다 아는 이를 마주치면 왠지 미워지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도 저이와 나는 행복의 저울질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 형편과 비슷한 집이나 조금 잘 사는 집의 행복을 저울질하며 그렇게.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 오면 일부러 돌아가기도 하며 내 처지에 대해 원망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나는 작은 일에도 신경질을 내거나 분노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한없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전에는 간혹 싱크대 밑에 서식하던 바퀴벌레라도 스멀스멀 기어 다니면 징그러워 비명을 질렀는데, 언젠가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꾹꾹 눌러 죽이는 내 모습에 스스로도 놀랐다. 남편을 잃은 내 마음은 늘 공허했다. 부적 쓰는 법을 배운 뒤 처음으로 남편의 넋을 위해 붓을 잡던 날. 나는 한 획도 쓰지 못하고 펼쳐진 부적 종이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종이 위에 남편의 얼굴이 어른거려 눈물만 떨어뜨렸다. 나는 붉어진 눈언저리를 닦고 모질게 마음먹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악착같이 한번 살아보리라. 만약 신의 시샘이라면 멋지게 살아서 초라해진 내 삶을 복수하리라고. 그리고는 다시 붓을 잡고 온 기력을 쏟아 부적을 썼다. 나는 고즈넉이 난로를 바라봤다. 여전히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열기로 가게 안이 따뜻해졌다. 혼자가 된 이후 나는 한동안 불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불을 보면 자꾸만 남편이 떠올랐다. 저 뜨거운 불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남편의 모습. 그 악몽 같은 환상에 사로잡혀 꿈속에서도 남편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나타나곤 했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남편과 내가, 그리고 단란했던 우리 가정이 송두리째 불길에 휩싸였던 그날의 악몽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어느덧 오카리나 소리도 멎어있었다. 보살은 회한이 밀려오는 듯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 다시금 눈에서 물기가 나오는지 손등으로 살짝 훔치더니,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집에 돌아온 냥반이 그래도 핏줄은 보고 싶었는지 아들을 찾더라니. 벌써 저 세상으로 간 아들이 살아올 리는 없고. 아들이 열차에 치여 죽은 걸 알고는 점점 더 정신이 오락가락했지. 그래서 굿판도 열어 푸닥거리도 해보고 부적을 써서 집안 곳곳에 붙여도 봤지만 효험이 없더구먼. 나중에는 병이 깊어져 할 수 없이 병원에 입원을 시켰네. 그런데 며칠 후에 이 냥반이 병원에서 사라져 버렸다네. 다시 찾고 보니 이 양반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큰 사고를 내지 않았겠나. 그 사고로 온몸에 중화상을 입고 여태까지 식물인간과 다름없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네. 그러다가 결국 저승사자가 불러서 엊그제 저 세상으로 갔네.” “참 안 되셨네요. 그런데 영감님이 무슨 사고를 냈는데요?” “급살 맞을 냥반이 글쎄, 귀신에 홀렸는지 전철 안에다 불을….” “전철요? 아니, 영감님이 전철에다 불을 냈다구요?” “…….” 나는 너무 놀라 동공이 저절로 크게 열렸다. 혹시 보살의 말을 잘 못 들었나 싶었다. 그날의 악몽을 잊기 위해 그곳에서 이사를 왔는데, 설마 그 사건의 방화범이 지금 내 앞에 있는 보살의 영감님이라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내 볼이라도 꼬집어보고 싶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키어버린 듯 복잡해졌다. 나는 보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살의 얼굴이 많이 일그러져 있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지 입매가 씰룩이고 눈썹이 파르르 떠는 것 같았다. “그 냥반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뒤로 부적을 끊었네. 천벌을 받아도 시원치 않을 여편네가 무슨 낯으로 부적을 쓰겠나. 죽는 날까지 그저 죄인의 몸으로 살아야지….” 고개를 세우고는 남편의 부적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쓴 남편의 부적을 들고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으로 갔다. 화재 현장에는 여러 유해가 뒤엉켜있어 그 일부를 유골함에 담아 납골당에 안치했다. 유골함에 부적을 붙이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무리의 새 떼가 황혼의 서편 하늘가를 나는 게 보였다. 나는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새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산과 하늘의 경계선이 흐릿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하늘 한편에서는 노을이 스러져 가고, 아래로는 완만한 능선이 아름답게 보일 무렵이었다. 새들은 황혼을 날면서도 서두름 없이 날고 있었다. 뒤 쳐진 새 한 마리가 바삐 무리를 쫓고 있었다. 나는 새들이 서편 하늘로 가뭇없이 사라질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편안해진 것도 같았다. 천궁 보살이 가게를 나간 뒤 시계를 보니 정오를 막 지나고 있었다. 나는 멍해진 기분으로 줄곧 앉아있다가 창밖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멎었던 눈발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나는 깨끗한 부적지를 꺼내어 조심히 유리판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복잡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남편 얼굴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희미하게 웃는 것도 같았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뒤 망자의 부적을 정성껏 써 내려갔다. •수상소감 - 최우수상 단편소설 박도열 “닐 암스트롱처럼 아무도 밟지 못한 미지의 땅에 소설가로서 첫발자국을 남기고 싶어” 코로나 19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저에게 뜻밖에 소설 당선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게는 올 한해 최고의 선물이 되겠습니다. 제가 소설에 관심을 가진 지는 오래됐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여건과 생업 때문에 소설 쓰기에 집중적으로 매달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최근 오랫동안 하던 일을 접고 비로소 소설 쓰기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소식을 접하고는 응모를 하게 됐습니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으며 다방면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십 대에는 감동적인 소설을 읽고 나면 볼펜으로 필사를 해 보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저의 경험을 토대로 여러 편의 소설 습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시에도 관심이 많아서 초기에는 한동안 시에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모임에 종종 참석하게 됐는데, 그곳에서 유명한 소설가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분이 평소 저의 시를 보셨는지 하루는 시보다는 소설 쪽에 더 어울린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분 말씀을 듣고 나서 소설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소설가라면 으레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작가로 남는 게 가장 큰 소망이겠습니다. 저 또한 그런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겠습니다.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처럼 아무도 밟지 못한 미지의 땅에 소설가로서 첫발자국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제게는 아픈 손가락들이 있습니다. 늘 무거운 짐으로 제 가슴에 내려앉아 있습니다. 그 아픈 손가락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 2021-08-27 10:00
-
- 미술관 풀밭에서 소풍과 낮잠을
- 미술 작품 감상을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다. 곰곰 뜯어봐도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추상화 앞에선 머리에 쥐난다. 이게 관람객의 둔감 탓이라고만 할 수 있으랴. 작가 자신도 무슨 짓을 했는지 알 바 없이 휘갈긴 작품도 ‘천지삐까리’다. 작품이 난해하니 미술관에 가봐야 재미가 없다. 미술관들의 따분한 콘셉트에도 식상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여기에 꽤나 재미있는 미술관이 있다.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있는 가나아트파크다. 일영리는 산 좋고 물 좋은 전원이다. 예전부터 교외선을 타고 장흥역(현재는 폐역)에 내려 일영 일대의 산수와 찻집을 즐기는 데이트족들이 넘실거리던 곳이다. 유흥주점과 러브호텔로 불야성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다 2008년 ‘장흥문화예술특구’로 지정되면서 슬쩍 변신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알록달록 치장한 업소들이 난립해 어지럽지만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등 문화 공간 다수가 이 골짜기에 들어서면서 좀 색깔 있는 동네로 부상했다. 처음 문화예술의 공기를 주입한 건 토탈미술관이었다. 토탈미술관을 서울 평창동에 있는 가나아트센터가 인수하고 개조해 2006년에 문을 연 게 가나아트파크다. 가나아트파크는 ‘쉬운 미술관’을 표방한다. 설립자는 가나아트센터의 리더 이호재 씨. 화랑계의 ‘큰손’이자 진취적인 기획자다. 그는 문턱과 눈높이를 낮추고 재미를 부여해 누구나 쉽게 찾아와 미술 체험을 할 수 있는 미술관을 궁리하다 가나아트파크를 열었다. 그의 지향과 방책은 선명했다. 어린이들을 주 타깃으로 삼은 거다. 아이들에게 미술과 미술관도 사이버 게임처럼 아주 신날 수 있다는 걸 경험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울러 아이들의 삶에 좁쌀만큼의 작은 크기로라도 미술이라는 소우주가 달라붙을 수 있길 바랐을 테고. 그게 결국은 미술 인구의 확대와 저변의 풍토를 다지는 지름길이라 보았을 테고. 이호재 씨의 이와 같은 궁리와 실천은 평범한 게 아니었다. 머리 잘 돌아가는 미술 사업가들이 많지만 아무도 ‘어린이 중심의 미술관’을 착상하지 못했던 시절에 기염처럼 토해낸 발상이었으니까. 요즘이야 어린이들을 주 고객으로 삼은 사립미술관이 꽤 있지만 예전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국내 최초의 어린이 미술관으로서 가나아트파크가 지닌 위상이 우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구름처럼 몰려오나? 연간 관람객 수가 10만 명 이상이라 하니 순항이다. 하지만 적자를 면치 못한다더라. 이건 사립미술관의 숙명에 가깝다. 무료입장 제도를 운용하는 국공립미술관의 관람객 유인력을 당할 재간이 없다. 비싼 입장료를 내고(사실 비싸지도 않지만) 사립미술관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아무려나, 가나아트파크는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뜀박질로 흥겹다. 그러라고 놀이터처럼 꾸며놓은 공간과 시설이 많다. 아이들은 다들 부모나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이끌려 이곳에 온다. 그러기에 아이들 못지않게 어른들도 많다. 젊거나 늙숙한 부부와 연인들도 전시실의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너른 정원에서 짧은 피크닉을 즐긴다. 자유로이 마음 보따리를 풀어놓고 쉬기 좋은 미술관이다. 즉 남녀노소가 어울려 체면 차릴 것 없이 일락(逸樂)할 수 있는 곳이다. 정원을 가로질러 본관 건물로 들어간다. 지상 2층과 지하 1층으로 지은 이 건물엔 각각 층고가 다른 6개의 전시실이 있다. ‘카페 오월’과 아트숍도 있다. 1층 전시실 옆댕이엔 아이들의 놀이장인 ‘볼풀 아일랜드’가 있다. 그림 관람을 하는 어른들과 잠시 헤어진 아이들은 이곳에서 맘껏 논다. 아이와 어른을 동시에 배려했다. 이런 기발하고도 친절한 미술관을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을 위한 전시실도 따로 구획해 ‘교과서 속 그림여행’이라는 이름의 상설전을 펼친다. 피카소,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 등 교과서에 나오는 거장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인기를 끄는 백남준 전시실 2층 5전시실에선 기획전이 펼쳐진다. 젊은 서양화가 허보리의 ‘Love My Hero’전이다.(4월 30일까지) 허보리는 만화가 허영만의 딸이란다. 전시실로 들어서자 탱크 한 대가 눈에 쑥 들어온다. 허보리의 설치 작품이다. 그녀는 은퇴한 가장들의 양복과 넥타이를 잔뜩 수집해 오브제로 삼았다. 천을 잘라 감거나 둘둘 뭉쳐 캐터필러를 비롯한 동체와 포신을 만들었다. 이 괴상한 헝겊 탱크로 어떤 메타포를 전하는가? 쉽다. 삶이라는 전장에서 먹이를 물어오기 위해 탱크처럼 진격하는 생활의 전사(戰士)를 오마주했다. 포신은 맥없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탱크처럼 밀어붙여도 어찌할 수 없이 돌아오는 생의 피로와 패배를, 무기력과 발기부전을 보여준다. 정육 쇼케이스 안에 총알과 수류탄 따위를 만들어 고깃덩어리처럼 진열한 작품 ‘무장가장’(武裝家長)도 노골적이긴 마찬가지다. 인생의 희로애락 중에서 작가는 ‘애’(哀)를 끄잡아냈다. 삶이 기쁘고 아름답다고? 잉? 그럴 리가! 허보리는 그리 따진다. 혹은 가혹한 삶을 위무한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들을 모은 전시실도 있다. 가장 인기를 끄는 공간이란다. 새와 나무, 꽃을 그린 크레파스화들에서 드러나는 백남준은 어린애다. 세 살짜리 천진이 끼적인 낙서처럼 알량하나 생기롭다. 백남준의 나이 67세에 이 유치한 그림들이 나왔다. 도통하면 애로 돌아간다. 달통하면 쉬워진다. 그에겐 닫힌 게 없어 막힐 것도 없었다. 관조의 눈으로 세사를 넓게 읽었다. 자전거를 탄 모니터들로 이루어진 작품을 보라. 골치 아플 거 없이 쉽고 재미있다. 거기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나. 백남준은 남들이 안 하거나 못 하는 걸 찾아 해치우는 재주를 창작의 견인차로 삼았을 뿐이다. 백남준이 괴로워한 유일한 문제는 어쩌면 경제였다. 당신은 왜 TV 모니터로 작품을 일삼는가, 이런 질문에 돌아온 답이 이랬다. “돈이 있어야 예술도 되거든. 집에서 보내주는 돈도 끊겼고, 뭘 해야 돈이 되나 궁리를 하다 하다 TV에 착안한 거라고.” 본동 외에도 가나아트파크엔 다수의 건축물이 있다. 동쪽 끝자락에 있는 아틀리에 두 개는 모텔을 사들여 개조한 건물로 많은 작가들이 입주해 창작활동을 한다. 루브르박물관과 대영박물관 내부 설계를 맡았던 장 미셸 빌모트가 개조 설계를 했다. 도드라지기로는 미술관 중심부에 나란히 선 박스형 건물 세 채. 각기 통째로 파랑과 노랑, 빨강을 입어 매우 강렬하다. 이 미술관은 피카소 작품 1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반가워라, 피카소! 파란색 건물에선 피카소 작품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피카소의 일상을 담은 사진도 여러 점 내걸려 흥미롭다. 담배를 물고 싱긋 웃고 있으나 뭔가 길들지 않은 포악한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표정의 피카소. 살기등등한 송골매의 눈으로 작업을 하는 피카소. 그는 도발적인 화풍으로 타성에 갇히기를 거부했다. 피카소의 작품은 이제 고전이 됐지만, 치열했던 자유의지는 시대를 관통하는 패션으로 남아 세상의 모든 ‘우물 안 개구리’들을 일깨운다. 노랑 건물엔 섬유작가 토시코 맥아담이 아이들을 위해 만든 그물놀이터 ‘에어 포켓’(Air Pocket)이 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초대형 뜨개질 작품이다. 이 기이한 구조물엔 구멍이 숭숭 뚫려 아이들이 기어 들어가 놀도록 했다. 거미줄에 매달려 곡예를 하는 거미처럼. 미지의 차원으로 넘어간 듯, 아이들은 신비감으로 도취될 수밖에 없겠다. 미술관의 너른 정원엔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조각 작품이 흔전만전하다. 류인, 문신, 강대철, 최종태, 앙투안 부르델, 조지 시걸, 세자르 발다치니 등의 작품들이 경연을 펼친다. 조각보다 보기에 좋은 풍경은 풀밭에 앉아 소풍의 한때를 지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정원을 희희낙락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해맑은 표정이다. 이 미술관은 풀밭 위의 도시락 식사도, 야유회도, 낮잠 때리기도 허용한다. 분노도 많고 긴장도 많아 남몰래 아픈 그대여, 여기서 쉬어가라! 미술관은 그리 권하고 싶은가 보다. 이렇게 확 열린 미술관, 본 적 있나?
- 2021-04-05 08:49
-
- 급하면 전화로 원고를 불렀다
- 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나도 그랬어, 그랬지!!라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보는 마당입니다. 성탄절 분위기로 거리가 술렁거릴 때면, 오래전 세모의 귀성열차가 떠오른다. 4·19 학생혁명이 일어난 1960년 12월 31일, 내가 타고 온 열차는 6·25 피란열차 같다 했다. 그걸 경험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짐작이 되지 않았다. 지붕 위까지 사람과 짐으로 빼곡한 사진들을 보면, 거기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다. 객차 안은 사람이 지나다닐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입석 승객이 꽉 들어찼다. 객석에는 예외 없이 세 사람씩 앉았고, 무릎에 어린아이를 앉힌 사람도 많았다. 약삭빠른 사람들은 짐을 올려두는 선반까지 차지하고 누웠다. 연말 귀성 인파였다. 그런 혼잡 속에 화장실 가는 사람, 사이다 맥주 파는 홍익회 판매원, 역마다 밀고 들어오는 승객들, 검표원, 차장 등이 수시로 인파를 헤치고 다녔다. 비켜 달라, 발 밟지 마라, 사이다 한 병 달라, 조용히 해라…. 말과 말이 부딪치고, 억양에 감정이 묻어나고, 더러는 상소리도 오갔다. 추운 날인데도 사람의 체열과 난방 열기로 객차 안은 후덥지근하여 창을 열어야 할 정도였다. 열차가 터널을 지날 때는 쾅쾅쾅 마치 총소리 같은 경음이 귀청을 때렸다. 일제히 차창을 내리는 소리였다. 창을 닫지 않으면 기관차 연기가 객실로 쏟아져 들어와 기침들을 해댔다. 창가에 팔을 올리고 있다가, 내리치는 창틀에 맞아 비명을 지르는 이도 있었고…. 정오 무렵 제천 역을 떠난 열차는 그런 혼잡과 소음을 싣고 청량리역에 닿았다. 저녁 8시, 정선 화암면을 떠난 시간이 새벽 4시였으니 서울까지 16시간 넘게 걸린 셈이었다. 역사를 빠져나오는 내 귀청에 울린 멜로디가 묘한 감흥을 일깨웠다. 가수 손시향의 히트곡 ‘이별의 종착역’이었다. 처음 타보는 전차 차창 밖 종로 거리 풍경은 놀라움과 경탄의 연속이었다. 세상에! 책방이 저렇게나 많다니… 저렇게 밤거리가 밝다니… 사람들은 왜 저리 많지? 그렇게 나를 달뜨게 했던 1960년은 저물었고, 중학교 시절도 끝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꿈에도 그리던 서울 학생이 되어서는 신기한 것, 갖고픈 것이 너무 많았다. 제일 신기했던 건 스케이트였다. 날렵한 가죽 신발에 반짝이는 스케이트 날은 겨우내 마음속에만 있었다. 그 비싼 걸 사 달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원효로 전차 종점 마을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 것을 빌려 처음 타본 날의 기분은 지금도 어제 일 같다. 펄펄 날아갈 것 같았다. 무거운 통나무 스케이트에 비하면 얼마나 가볍고, 얼마나 안정적이고, 얼마나 빠른가! 원효로 앞 한강 스케이트장이 좁은 게 한이었다. 인도교를 지나 광나루까지 씽씽 달려가고 싶었다. 이토록 스케이트에 혹한 것은 시골에서 내가 타던 것과 너무 달라서였다. 현대 문물의 혜택을 누려보지 못한 산골 소년들은 통나무를 갈라 만든 대장간 스케이트를 탔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앉아서 썰매를 지치는 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어떻게든 통나무 스케이트를 장만해 서서 타야만 체면이 섰다. 나는 동네 형에게 ‘겨우내 누룽지 제공’을 약속하고 스케이트를 장만했다. 발 넓이에 맞는 통나무를 반원형으로 가르고, 양옆에 못을 촘촘히 박아 노끈을 매도록 하는 데까지는 내 손으로 했다. 문제는 스케이트 날인데, 그건 내 능력 밖이었다. 대장간에서 철판을 스케이트 날처럼 벼리고 날을 갈아서, 통나무 밑에 튼튼히 박아 넣어야 했다.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그걸 타는 재미에 푹 빠졌다. 겨울방학이 늘 즐거웠다. 노끈으로 발을 칭칭 동여매면 발이 아프고 시렸지만, 달리는 재미로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신발 위로 묶으면 헐거워 양말만 신은 맨발에 묶었다. 안정감은 좋았지만 대신 발이 아팠다. 고통을 참고 땀이 나도록 얼음을 지치고 나면 감각이 마비될 정도였다. 강가에 피워놓은 모닥불에 발을 녹이고 나서 또 달리러 나갔다. 허기가 질 때까지 그렇게 즐기다가 집에 들어가면 야단을 맞았다. 볼이 빨갛게 얼고 코를 훌쩍이며 들어서니 얼마나 애처로웠을까. 그렇게 스케이트와 친해진 덕에, 나는 퇴직 후 10년 동안 인라인 스케이트 가방을 메고 한강공원으로 출퇴근했다. 지금 내 오른손 중지 마디에는 구덕살이 박혀 있다. 신문사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 선배들이 전화로 불러주는 기사를 많이 받아 적은 탓이다. 컴퓨터도 팩스도 없었던 1970년대 초반의 글쓰기는 모두 볼펜 육필이었다. 출입처 기자실이나 현장에 나간 선배들의 송고 수단은 언제나 전화였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받아쓰기가 일이었다. 속필로 쓰려고 볼펜을 꽉 쥐고 그 일을 하고 나면, 귀가 멍멍하고 손가락이 저렸다. 전화 송고에 얽힌 이야기의 백미는 연재소설 받아쓰기다. 작가 사정으로 연재가 중단되면 독자들 항의전화가 빗발친다. 간혹 자유분방한 작가들이 그런 사고를 치곤 했다. 내가 몸담았던 신문사에서는 작가가 전화로 불러주는 소설 원고를 받아쓰는 일이 잦았다. 지방에 체류 중인 작가들은 대개 우편이나 고속버스 편으로 며칠 분의 원고를 보내오곤 했는데, 더러 그걸 빼먹는 작가가 있었다. 전화로 독촉하면 작가는 전화로 소설 원고를 불러줬다. 잘못 받아 적으면 작가와 기자 간에 책임 소재로 다투는 일도 일어났다. 기자들의 송고에 얽힌 에피소드들은 대하소설감이다. 누구에게나 책 한 권 분량의 이야깃거리가 있다. 나도 다급한 송고난을 여러 번 겪었다.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나, 이란의 수도 테헤란으로 취재를 갔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취재도 어려웠지만, 제일 고생스러웠던 것은 송고였다. 특급 호텔에 묵었는데도 해외 전화선이 두 회선뿐이라, 송고 중 자주 전화가 끊겼다. 한 사람이 통화를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선배들에게 배운 ‘궁즉통’의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치사한 방법이지만 소임을 다하려면 도리가 없었다. 호텔 아케이드에서 여성 스타킹을 사 들고 전화 교환실 문을 두드렸다. 내 사정을 말하고 방 번호를 일러줬다. 즉각 효험이 났다. 아무리 오래 전화기를 잡고 있어도 끊어지지 않았다. 뉴스 기사와 해설까지 200자 원고지 15매 분량을 송고하려면 최소한 30분 이상, 한 시간도 걸렸다. 텔렉스는 있었지만 우리말 로마나이즈(로마자 표기)가 까다로워 다들 꺼렸다. 취재의 어려움도 덜하지 않았다. 호메이니 독재 시절이어서 해외 언론에 대한 이란 정부 서비스는 아무것도 없었다. 애써 찾아가봐야 발품만 아까웠다. 제휴 언론사인 일본 신문 특파원을 찾아가 도움을 청해보았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도 라디오로 BBC 방송을 듣고, 미국과 유럽 신문을 참고한다고 했다. 1990년대 초, 도쿄 특파원 시절 선배 특파원 이야기를 듣고 박장대소했다. 늘 오전 일찍 하네다 공항발 대한항공 비행기를 이용해왔는데, 하루는 전철을 놓쳐 택시를 탔다. 공항으로 가다가 고가도로 위에서 트래픽 잼에 걸렸다.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다 보니 비행기 출항 시간이 촉박해 택시에서 내려 뛰었다. 넥타이를 펄럭이며 고가도로 위를 달리는 신사의 모습을 상상하면 지금도 웃음이 터진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달렸더니, 소나기 맞은 사람 같더라나…. 도쿄 시절 일본 총리 수행 취재를 갔다가 프레스룸에 우리 신문 전용 송고 부스도 있어, 느긋하게 기사를 보낸 일이 있었다. 나중에 사무실로 날아온 전화료 청구서 액수를 보고 크게 놀랐다. 부스까지 설치해줘 서비스인 줄 알았더니…. 그때 내 사무실에는 팩스와 사진 전송기까지 있었지만, 막 부임한 모스크바 특파원에겐 그게 없었다. 소련 연방이 해체되어 기사가 폭주하는데 송고 수단이 없다고 그는 늘 나에게 원고 팩스를 보내왔다. 아직 서울과 팩스 송수신이 안 되던 시절이었다. 그런 ‘송고 중개업’도 해봤다.
- 2020-12-28 09:55
-
- 생명소통, 치유를 노래하는 이선화 추상화가
- 이선화 추상화가(52세)의 작품은 색채와 그림이 모두 인상적이다. 컬러풀한 색채는 열정과 에너지를 전하고, 역동적인 그림은 생명력과 자유로움을 이야기한다. 작가 자신도 늘 밝은 기운을 발산해 주변에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전시가 대부분 취소된 가운데, 고양시에 있는 한양문고의 ‘갤러리 한’에서 3월 3일부터 6월 8일까지 이선화 작가의 ‘생명소통’ 전을 진행 중이다. 이곳에서는 작년 8월에 초대전을 한 이후 반응이 좋아 2번째로 하는 전시다. 그는 20살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30년이 넘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10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게 너무 좋았어요. 중학교 때 마티스의 그림을 보고 ‘나도 색채의 마술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색감이 뛰어난 작가’라는 평을 듣는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꿨어요.” 대학졸업 후 여러 해 동안 미술 교사로 재직했을 때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외할아버지는 화가였고, 어머니도 어린 그녀를 무릎에 앉혀 놓고 목단꽃을 그려주곤 했다. 언니와 여동생 역시 그림을 그릴 정도로 예술가적인 분위기로 가득 찬 집안에서 성장하다 보니 화가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늘 생명력, 에너지, 색채에 관심을 두었고, 40대부터의 표현 주제는 생명소통이다. 작품과 제목에도 물고기와 새, 나무, 바람, 물 등 장자의 자유 사상과 생명체들 간의 소통을 담았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생기와 울림을 주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심리학과 동양철학, 명상 관련 책을 즐겨 읽은 덕분에 이런 사고가 가능하다. “생명도 중요하고 소통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우주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한 줌도 안 되는데 서로 연결이 되어 있죠. 사람을 포함한 생명 하나하나는 우주 안의 하나의 세포라고 생각해요.” 그는 작품을 통해 추상화의 동서양적 만남을 시도했다. 추상화의 출발은 서양이지만, 추상적 사유와 미학은 동서양이 따로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저는 우리나라의 전통색인 오방색을 주로 써요. 오방색이 우리 민족의 심성에 가장 어울리는 색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음양오행의 의미를 담고 있는 청, 적, 황, 백, 흑색은 서로 충돌하면서 조화를 이루죠. 마치 카오스와 코스모스, 즉 혼돈과 질서가 함께 있는 우주와 같아요. 이런 것들이 생명력을 표현하는 제 회화를 만드는 요소들이에요.” 그의 작품들은 멀리서 보면 어떤 기운이 느껴지다가, 가까이서 보면 온갖 생명체들이 서로를 향해 꿈틀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관객들이 자신의 그림에서 때로는 온화하고, 때로는 격정적이며, 때로는 시원한 치유의 바람을 느끼길 바란다. “컬러 테라피, 즉 색채에는 치유 효과가 있다고 믿고 있어요. 제 그림과 소통을 하는 모든 분에게 생명력과 에너지를 주고 싶어요. 그림을 통해서 감상자들의 트라우마를 줄여주고 활력 있고 행복한 삶에 도움을 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죠.” 그의 작업을 보면 현대미술 대중화를 위해 고민한 흔적도 읽을 수 있다. 선입견 없는 마음,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담으려고 인문학 공부를 꾸준히 한 덕분인 듯하다. 그 스스로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수행하는 마음으로 예술 활동에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추상화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가 전하는 감상법은 명쾌하다. “예술가는 대상을 표현하고 평론가는 작품을 해석하려고 하죠. 그런데 감상자는 그 느낌 자체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작품을 머리로 해석하려 하지 말고 가슴으로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바람의 의미를 묻지 않고 바람을 느끼듯이, 꽃의 의미를 묻지 않고 꽃향기를 맡듯이, 파도의 의미를 묻지 않고 파도에 몸을 던지듯이 말이에요. 그때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은 오롯이 감상자 고유의 것이 될 것이고, 감상자는 창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화여대와 홍익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그동안 20여 차례의 개인전과 100여 회의 단체전에 참석하며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해왔다. 중국 상하이를 비롯해 런던 ‘어포더블 아트 페어(Affordable Art Fair)’와 홍콩 ‘하버 아트 페어(Harbor Art Fair)’ 등 해외 여러 곳에서 전시를 했다. 2017년에는 20여 명의 한국 작가들과 함께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열린 ‘아트 쇼핑(Art shopping)’에도 참여했다. 국내에서는 키아프, 화랑미술제, 롯데호텔 아트 페어, 부산국제화랑미술제 등에서 단체전과 국회 아트갤러리, 현대백화점 등에서 초대 개인전을 했다. 작품은 박영사, 고영 테크놀러지, LG생활건강, 리더스경제신문사 등 많은 곳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는 SNS를 통해 대중들과 소통도 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을 활용해 스카프, 넥타이, 스탠드 조명 등의 아트상품을 만드는 것도 소통을 위한 일 중에 하나다. 5월 한 달간 ‘갤러리 한’ 전시장에서는 추상화 개인 레슨도 할 예정이다. 그동안 종종 자신의 작업실에서 캔버스와 물감, 붓 등의 재료를 제공하고 2시간 동안 작품을 완성할 수 있도록 지도해 왔는데 만족도가 높았다고 한다. 그 덕분에 추상을 힘들고 낯설게 생각했던 이들이 추상의 매력에 빠져들기도 한다.
- 2020-04-10 09:13
-
- 한국산 롤러코스터
- 2017년, 갑작스런 사위의 발령으로 인해, 손자들은 어학 준비를 못 한 채 파리의 국제학교에 입학했다. 영어, 불어, 모국어 사이에서 방황하는 손자들은 매일 아침 등교를 거부하였다. 낯선 이국생활의 시작은 딸 자신에게도 매우 버거웠다. 급기야 나에게 SOS가 날아왔고 딸바보인 나는 이틀 만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손자들의 등하교 챙기기였다. 군소리 안하고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 등교 시 1유로씩, 하교 시 나를 쳐다보지 않고 앞장서서 제대로 집을 찾으면 1유로씩을 지급했다. 그리고 각종 생활수칙을 잘 지키면 즉시 현금 포상을 하였고, 특히 그 돈들은 절대 딸 내외가 손을 못 대게 하였다. 이렇게 등하교 및 이국생활 문제들은 해결되었고 애들은 점차 학교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자 손자들의 학교생활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먼저 식당에서부터였다. 프랑스에서는 급식시간에 모든 학생들에게 잼이 지급된다. 그런데 그 용기는 햄버거 가게의 토마토케첩처럼 손톱으로 찢어야만 한다. 그런데 외국 아이들은 그것에 매우 서투르다. 하지만 우리 손자들은 옷에 흘리지 않게 귀퉁이를 잡아 찢는, 그 섬세한 작업을 아무렇지도 않게 쉽사리 해 냈다. 그래서 점심시간마다 전 세계에서 온 학생들에게 잼 봉지 찢기 봉사를 하며, 손자들의 위상은 높아졌다. 그 후 체육시간에 신발 끈을 제대로 못 매 쩔쩔매는 영국 애들, 교복 넥타이를 못 매는 독일 애들, 연필을 칼로 못 깎는 미국 애들까지 도와주면서, 타고난 손재주를 과시하며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모두 한민족 유전자 덕분이었다. 프랑스 주최인 2019년 5월의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의 명성은 상한가를 쳤다. 딸네가 살고 있는 파리 근교의 자그마한 동네(Chatou) 영화관에서도 ‘기생충’이 상영되었다. 딸 부부는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자막 없이 보는 한국 영화가 반가웠기도 했지만, 영화 종료 후 동네사람들이 딸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축하를 받으며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어깨에 힘이 팍 들어갔다. 2020년, 우울한 시작이었다. 중국에서 발생한 코로나19가 한반도를 급습했다. 그러자 프랑스 사람들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다. 교장선생님은 직접 딸에게 전화를 해 겨울방학 중 한국에 다녀왔는지를 물었다. 길거리에서의 동양인들은 기피 대상이었고, 2월인 작은 손자의 생일파티는 당연히 취소되었다. 그들에게 우리 한국인은 검정색 마스크를 쓴 채 파리 중심가에서 쇼핑하는 중국인 관광객들과 다르지 않았다. 특히 유력 신문인 ‘르몽드’에 코로나19 확산의 주역인 신천지교회 이만희 총회장이 땅에 엎드려 절하는 사진이 실리면서, 그동안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급락하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IT산업 강국인 한국과 이상한 종교가 판치는 한국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원래 신체가 건장하고 생활수준도 높아 코로나19쯤은 걸려봤자 감기처럼 금방 낫는다고 자부했다. 자신들의 문화와 어긋나는 마스크 착용은 당연히 무시되었다. 그들에게 코로나19는 먼 극동의 비위생적인 국가들 얘기였다. 그런데…. 프랑스에서의 코로나19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급기야는 마크롱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코로나19에 대한 논의를 하였고 그로 인해 G20 정상회담이 개최된 것에 대한 보도가 나오면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다시 롤러코스트를 탔다. 이제는 한국 방역모델이라는 말이 일반명사화 될 정도로 자주 등장하고, 한국을 걱정하던 이들이 한국을 부러워하는 분위기로 급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가 앞으로 또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리에서 3명의 자녀와 함께 4년째 거주하고 있는 딸과 사위는 이렇게 고국의 위상 변화에 얹어져 어지러운 롤러코스트를 타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 2020-04-07 08:59
-
- 일상에 스며든 그들의 '럭셔리'
- 어딜 가든 화제가 되는 슈퍼리치는 부지불식간에 일상마저 들키곤 한다. 이때 대중의 시선은 그들의 패션을 단번에 스캔한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 또 어떤 신발을 신고 액세서리는 뭘 착용했는지. 최근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낸 슈퍼리치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애용하는 패션 아이템이 무엇인지 살펴봤다. ◇꼼데가르송 지난 2월 9일 미국 LA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을 포함해 4개 부문을 석권했다. 이날 대중은 투자·배급사인 CJ그룹의 이미경 부회장이 입은 의상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바로 ‘꼼데가르송 빈티지 재킷’이었다. 이 의상에 부착된 밴드 위에는 ‘PARASITE is Cool’(기생충은 쿨하다), ‘I’m Deadly Serious’(나 정말 진지해요), ‘RESPECT’(존경해요) 등 영화 속 명대사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새겨져 있었다. 이 부회장이 직접 넣은 문구들로 세간의 화제가 됐다. 꼼데가르송은 1969년 출시된 일본의 아방가르드 고급 패션 브랜드다. 이 브랜드에 전 세계가 주목한 것은 1981년 파리 컬렉션에서다. 블랙을 기초로 한 비대칭 재단과 미완성인 듯 보이는 바느질, 풀어헤쳐진 원단을 사용한 의상들은 당시 충격을 안겨줬다. 이 부회장이 시상식에서 입은 재킷의 정확한 가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200만 원대로 추정된다. 꼼데가르송의 재킷과 코트는 100만~300만 원대의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에 잘 알려진 하트 로고의 플레이 라인 티셔츠는 10만 원대, 카디건은 30만 원대다. ◇에르메스 이만희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신천지교회) 총회장이 명품 넥타이로 주목받았다. 지난 3월 2일 코로나19 확산 사태와 관련, 국민에게 사죄하기 위해 마련한 기자회견장에 ‘에르메스’의 노란색 실크 넥타이를 매고 나온 것. 해당 제품은 약 20만 원에 판매되고 있다. 에르메스는 프랑스의 하이엔드 명품 패션 브랜드다. 루이비통, 샤넬과 함께 3대 명품 브랜드로 통하는데, 그중에서도 최고로 꼽힌다. 하지만 가격대가 상당한 프리미엄 라인은 따로 있다. 대표적으로 ‘버킨백’과 ‘켈리백’이 초고가 제품이다. 버킨백 가격은 2011년 기준으로 1240만 원 정도다. 그레이스 켈리가 들고 다녀서 유명해진 켈리백은 35㎝급 제품이 930만 원 선이다. 이 제품들을 구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예약을 한 뒤 오랜 대기기간을 거쳐야 살 수 있어서다. 버킨백은 현재 2000여 명의 대기자가 있어 3년 후에나 구매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켈리백은 현재 국내 VIP의 예약을 받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롤렉스 지난해 연말,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를 찾은 세계적인 축구 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착용한 시계가 화제였다. 영국 언론 데일리미러의 보도에 따르면, 호날두가 착용한 시계는 스위스 명품 브랜드 ‘롤렉스’의 ‘GMT-마스터 아이스 워치’다. 이 시계의 가격은 38만 파운드(약 5억7400만 원)에 달하는 고가의 한정판 제품이다. 데일리미러는 이날 호날두가 차고 나온 시계도 희귀하지만, 그의 소장품 중 가장 비싼 제품은 아니라고 전했다. 롤렉스는 시대와 분야를 막론하고 성공한 사람들과 유명인의 총애를 받는 대표적인 명품 시계 브랜드로 정확성과 내구성을 최우선 가치로 꼽는다. 엄격한 자체 검증과정을 통해 하루 오차 2초 내외로 정밀 조정된 시계만 출고한다. 롤렉스는 매우 일관적이고 확실한 콘셉트를 갖고 있어 용도와 라이프스타일에 따른 모델 분류가 철저하다. 다른 브랜드들도 용도에 따른 분류를 하지만 롤렉스에 미치지 못한다. 롤렉스 시계가 필드 쓰임새를 극대화한 ‘고급 툴워치’라는 개념으로 설명되는 건 이 때문이다.
- 2020-03-30 10:34
-
- 스타일의 완성, 향수를 입다
- 화려한 액세서리, 깔끔한 외투, 잘 정돈된 소매와 옷깃. 센스 있는 옷차림은 눈길을 끈다. 하지만 향기로운 사람에겐 눈길이 머문다. 길을 걷다 우연히 코끝을 스친 향기는 절로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패션의 완성은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향수다. 보이지 않는 패션, 향수 어떤 향기를 맡고 자연스레 내가 만났던 사람, 어린 시절 추억의 한 장면이 떠올랐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향기를 맡고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한다. 이후 사람들은 향기가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는 것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불렀다. 또 미국 모넬화학감각센터의 레이첼 헤르츠(Rachel Herz) 박사는 실험을 통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가 더 자극적이고 매혹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향기는 상대방에게 나를 제대로 각인시킬 수 있는 또 하나의 명함인 셈이다. 당신은 어떤 향기로 기억되고 싶은가? 나만의 향기를 찾아서 국내 향수 브랜드 ‘톰빌리’의 퍼퓸 디렉터 박재석(29) 씨는 먼저 내가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를 파악한 후 각각의 향이 지닌 매력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신이 활발한 이미지의 사람이라면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를 활용해 활발함을 더 강하게 표현할 수도 있고, 좀 더 무거운 계열의 향으로 활발한 이미지를 중화시켜 균형을 맞출 수도 있다. 향수공방 ‘센토리움’을 운영 중인 오원택(33) 씨는 겨울에는 긴 소매, 여름에는 짧은 소매의 옷을 입듯 향수도 하나의 패션으로 계절에 맞춰 사용하라고 조언한다. 봄과 여름에는 가볍고, 경쾌하고, 싱그러운 느낌의 시트러스, 그린, 플로럴, 프루티 계열의 향수를 쓰고 가을과 겨울에는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의 애니멀, 우디, 바닐라, 구루망(쿠키 같은 디저트류) 계열의 향수가 좋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향이어야 하며, 향수로 개성 있는 스타일링을 연출하려면 다양한 향을 직접 맡아보고 경험해봐야 한다. ①시트러스(Citrus) 레몬, 자몽, 라임 등 감귤류의 향으로 상쾌하고 활동적인 느낌을 준다. ②아로마틱 (Aromatic) 라벤더, 바질 등 허브류의 향으로 진중한 느낌을 준다. ③플로럴(Floral) 장미, 재스민 등의 꽃향기는 우아한 느낌을 준다. ④프루티(Fruity) 시트러스와는 다른 달콤하고 싱그러운 과일 향으로 발랄한 느낌을 준다. ⑤우디(Woody) 나무 향으로 향긋 하면서도 무게감이 있어 중후한 느낌을 준다. 향수, 제대로 맡는 법 향수의 향을 맡는 과정을 ‘시향(試香)’이라고 한다. 시향을 할 때는 향수와 시향지 사이에 7~15cm 간격을 두고 향수를 분사해야 한다. 시향지에 너무 가까이 대고 분사할 경우 본연의 향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향수는 분사 후 시간 경과에 따라 톱 노트, 미들 노트, 베이스 노트 3단계로 나뉘는데 톱 노트는 15분~2시간, 미들노트는 3~5시간, 베이스노트는 10~15시간 향이 지속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향수를 뿌린 직후의 향, 즉 톱 노트만 맡는다. 향을 단계별로 제대로 느끼려면 시간적 여유를 충분히 갖고 맡아야 한다. 반나절 정도라면 베이스 노트의 향까지 경험할 수 있다. 만약 그럴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최소 15분 정도의 시간을 갖고 시향할 것을 권한다. 또 한 번에 3개 이하의 향수만 시향하는 게 좋다. 너무 많은 종류의 향수를 연달아 시향하면 후각이 무뎌져 나중에는 향을 제대로 못 맡게 된다. 이럴 때는 ‘커피’를 활용해보자. 커피 원두 향이 피로한 후각을 진정시켜준다. 마지막으로 피부에 ‘착향(着香)’을 해봐야 한다. 사람마다 고유한 체취가 있고 피부 온도와 습도 차이에 따라 같은 향수라도 향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잔향까지 마음에 들어도 꼭 착향을 해본 뒤 구매해야 후회가 없다. 향수, 제대로 입는 법 이렇게 고른 당신만의 향수, 어떻게 뿌리는 것이 좋을까? 향수는 기본적으로 맥박이 뛰는, 온기가 있는 부위에 뿌린다. 손목 안쪽, 목 뒤, 왼쪽 가슴 부근이 대표적이다. 손목에 향수를 뿌린 후엔 가볍게 톡톡 두드려주면 된다. 간혹 양 손목에 뿌려 비비는 사람이 있는데, 향수의 노트가 뭉개져 본연의 향을 잃어버린다. 팔꿈치 안쪽은 옷으로 덮여 있는 경우가 많아 향을 은은하게 오래 즐길 수 있다. 여름에는 소매가 짧은 옷을 주로 입기 때문에 발향이 강한 편이다. 이외 외투 안쪽, 넥타이 뒷면, 바지, 치마 등 옷에 뿌려도 된다. 다만 실크와 가죽옷에 뿌리면 옷이 상하거나 향이 변할 수 있으므로 피하는 게 좋다. 향의 지속력을 높이고 싶다면 피부를 촉촉하게 유지하면 된다. 무(無)향 로션을 바르고 그 위에 향수를 뿌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화향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 꽃의 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의 향기는 천 리를 가지만,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는 말이다. 그만큼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는 특별하다는 의미다. 당신만의 향기로 누군가에게 오래 기억되고 싶다면 집을 나서기 전, 가볍게 향수를 걸쳐보자.
- 2019-03-25 0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