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와 환자, 생명을 걸고 맡기는 관계, 둘 사이에 맺어지는 깊은 신뢰감을 ‘라뽀 (rapport)’
라고 말한다. 당신의 의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심장을 이식받아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김현중(金泫中·44)씨와 그를 살린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김재중(金宰中·57) 교수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열한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충성!”
분주하게 병원 복도를 오가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두 사람을 주목한다. 심장이식을 받은 김현중씨가 주치의 김재중 교수를 보자마자 하는 인사다. 김씨에게 김 교수는 생명을 준 대장님이다.
“아이 참, 됐어요. 등산은 잘 다녀왔나요?”
김 교수는 흐뭇한 미소를 띠며 안부부터 물어본다. 김 교수에게 김씨는 살아줘서 또 활발히 활동을 해줘서 고마운 전우다.
이들은 다시 뛰는 심장을 공유하고 있는 애틋하고도 강렬한 관계다. 그 중심에는 사후 장기기증을 통해 심장을 내어준 이에 대한 감사함도 얽혀 있다. 이들이 발산하는 에너지를 더 깊게 들여다보기로 했다.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생수 유통업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기침이 나더군요. 가슴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2008년 어느 날, 너무 고통스러워서 소리쳤던 날이 기억나네요. 그때 살고 있던 광주광역시 모 종합병원을 찾았는데 심장이 안 좋다고 하더라고요. 심장이식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억장이 무너져 내리더군요.”
남들처럼 가장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자 했던 김씨에게 불현듯 심장병이 찾아왔다. 심장의 펌프 기능이 떨어진 확장성심근병증. 돌연사 확률이 매우 높은 병을 얻게 된 그는 고민에 빠졌다.
병아리 같은 자식과 부인을 두고 갑작스런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은 막아야만 했다. 유일한 해결방법은 아쉽게도 먼저 세상을 떠난 자의 심장을 제공 받아야 하는 것. 심장이식밖에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동네 종합병원에서는 심장이식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김씨는 살기 위해 직접 서울로 가기로 했다.
“동네 병원에서는 심장이식을 할 수가 없었죠. 무의미하게 약만 복용하면서 연명하는 식의 치료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죠. ‘심장이식을 전문적으로 하는 병원에 찾아가자.’ 그래서 수소문 끝에 2009년, 서울아산병원에 왔고 지금 제 대장이신 김재중 교수를 만나게 됐습니다. 유명한 의사라고 해서 뻣뻣할 줄 알았는데, 무척 자상했죠. 왠지 모르게 보는 순간,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만 믿고 따라가자. 그러면 나는 내 아내와 자식들을 지킬 수 있을 거야’라고 말이죠.”
그 믿음 덕분이었을까. 6개월간의 대기기간을 거쳐 기적적으로 장기기증자를 찾았고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물론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김씨는 점차 건강을 회복했다. 직업도 다시 갖게 됐고 중학교,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뒷바라지도 이제는 문제가 없다. 다시 뛰는 심장으로 그는 새 삶을 살게 됐다.
병원 밖 감사의 연결고리
“감사합니다. 이 말을 하루에도 수백 번씩 해도 모자라다는 것을 아시나요? 특히 저와 같은 심장이식 환자에게는 두 명의 천사가 있죠. 한 명은 바로 옆에 계시는 김재중 대장님이고, 다른 한 분은 심장을 주신 이름 모를 그분입니다. 한시도 잊을 수가 없죠. 잊으면 배신자가 되는 겁니다.”
그 감사함을 전파하기 위해 김씨는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심장이식 환우회 서울경기지역 지부장을 맡아 환우들과 김 교수의 메신저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것. 환우들이 건강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기적인 산행모임과 김 교수와의 만남을 병원 밖에서도 이어가게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실제로 6월 13일, 남산둘레길 걷기대회를 기획하고 있다. 이번 걷기대회는 심장이식 후 운동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환우들과 함께 궁금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자리가 된다. 약 30명의 환우가 참여할 계획이다.
김씨는 김 교수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며 알찬 시간을 만들겠다고 다짐 또 다짐한다.
“환우회 걷기대회의 장점은 동질감을 느끼는 동료와, 그리고 우리를 이끄는 대장님과 함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죠. 환우들에게는 몇 년이고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갖게 하는 특별한 시간이 되죠.”
어느샌가 김씨는 김 교수와 함께 행사를 추진하는 기획자로 변해 있었다. 그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받은 만큼, 그 이상으로 나눠야 행복해집니다. 저는 심장이식 이후,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긍정적으로 밝게 웃음을 짓고 살아야 한다는 것.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심장이식 권위자, 그의 비밀노트
1991년부터 지금까지 심장이식 520건의 사례를 성공시킨 서울아산병원 김재중 교수. 그는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심장이식의 한 획을 긋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말만 들으면 권위적일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만, 그의 장점은 환자를 가족처럼 보는 세심한 배려에 있다.
특기는 깨알 같은 메모다. 그의 집무실에는 수많은 파일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다. 물론 김씨의 파일도 두껍게 작성됐다.
“심장이식은 이식이 끝난 뒤부터 새로운 치료가 시작됩니다. 면역억제제를 평생 동안 복용해야 하고 다른 이의 장기가 이식된 것인 만큼 사소한 부분이 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 환자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게 제 임무죠.”
무덤덤하게 별일 아닌 듯 들려주는 김 교수의 말. 그런데 그것을 아는가. 깨알 노트가 심장이식 환자들의 생존율을 높이는 데 적극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실제로 서울아산병원에서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의 생존율은 국제심폐이식학회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10년 생존률: 아산병원 75%, 학회 47%)를 기록하고 있다.
‘밴드’로 매일 만나는 사이
김 교수는 매일 1시간 동안 밴드(모바일그룹 메신저)를 한다. 환자들의 질문, 사소한 고민에까지 일일이 답변을 달고 있다. 김씨가 환우들의 의견을 받아 대표로 질문을 올리기도 한다. 앞서 이야기한 깨알 노트를 기반으로 환자에게 생기는 작은 변화를 그냥 지나치지 않겠다는 일종의 소명감에서 하는 일이다. 굳이 아산병원 환자가 아니더라도 질문의 답은 꼭 해주고 있다.
“사실 외래진료가 밀리고 여러 일정이 잡히면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가 많아요. 그래도 꼭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예전에는 인터넷 카페를 통해 소통을 했었는데 이제는 휴대폰으로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적극적으로 활용해야죠.”
뇌사자 장기기증 활성화, 우리의 소망
김 교수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말이다. “심장이식을 기다리는 환자가 아직 많이 있습니다. 장기기증을 통해 새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큰 가치를 믿고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서약에 동참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김씨도 덧붙인다. “제가 받은 새 생명은 장기기증자의 또 다른 삶이기도 합니다. 저의 모든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 뇌사자 장기기증이 활발해졌으면 좋겠습니다.”
▲ 새로운 심장을 갖게 된 김현중씨와 주치의 김재중 교수는 누구보다 따듯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병원 밖에서도 수시로 만나 일상을 함께하는 둘의 모습은 평생 관리가 필요한 심장이식 환우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오는 7월부터 75세 이상 노인들은 현재의 절반 비용으로 어금니 또는 앞니에 대해 평생 2개까지 건강보험 혜택을 받게된다.
또 인공성대삽입술, 표적 항암제 사용에 필요한 유전자 검사 등도 건강보험 급여 항목으로 추가돼 환자 본인 부담이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보건복지부는 14일 열린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건강보험 행위 급여·비급여 목록표 및 급여 상대가치 점수 개정안'이 심의·의결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오는 7월부터 만 75세이상 노인의 어금니나 앞니 임플란트에 건강보험이 적용된다. 평생 2개의 임플란트에 건강보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며 본인 부담률은 50%이다.
임플란트 행위에 대한 수가(의료서비스 대가)가 1개당 약 101만원, 식립치료재료는 13만~27만원 수준으로 결정될 예정이다. 종전에는 임플란트 시술 환자는 139만~180만원(한국보건사회연구원 자료기준) 정도를 내야 했지만 보험적용을 받게 되면 1개당 약 60만원 대로 부담이 줄어들게 된다.
다만 75세이상 노인 가운데 일부 치아가 남아있는 '부분무치악' 환자만 건강보험 급여로 임플란트를 받을 수 있다. 이가 없는 '완전무치악'의 경우 몇 개 임플란트로는 '씹는(저작) 기능' 회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임플란트를 하는 것이 효과가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 이같은 조건을 달았다.
앞니 임플란트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도 어금니 임플란트가 불가능한 예외적 경우에 한해 허용된다. 치조골(잇몸뼈) 이식이 필요한 임플란트도 건강보험 대상에서 제외된다.
복지부는 이번 임플란트 건강보험 시행으로 올해에만 약 4만명이 혜택을 받고, 최대 476억원의 건강보험 재정이 들어갈 것으로 추정했다.
특히 복지부는 임플란트 보험 급여 대상을 2015년에 만 70세이상, 2016년에 만65세이상까지 연령폭을 낮출 방침이다. 틀니(완전·부분) 대상 연령도 임플란트 연령과 맞춰 함께 확대할 예정이다.
아울러 이날 건정심에서는 암· 심장·뇌혈관·희귀난치성 질환 등 '4대 중증질환' 보장 강화 계획도 논의 됐다.
복지부는 인공성대삽입술 등 10개 항목에 대해 건강보험을 적용한다. 또 척수강내 약물주입펌프이식술 등 3개 항목에 대해서는 선별급여로 결정했다.
후두암 등으로 후두가 절제된 환자의 발성기능을 회복해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하는 '인공성대삽입술'이 6월부터 보험급여로 전환된다. 이렇게 되면 환자 부담이 94만원에서 13만원으로 근 폭으로 줄어든다.
고가의 표적항암제가 암환자의 유전자 타입과 맞는지 여부와 항암제의 효과를 판별하는데 필수적인 '유전자 검사' 8종도 6월부터 보험적용을 받는다. 환자 부담금은 종전 14만~34만원에서 2만~6만원으로 낮아진다.
부정맥 환자의 심장 내 병변부위를 고주파로 절제하는 '삼차원 빈맥 지도화(3D 매핑)'를 이용한 시술도 6월부터 급여로 바뀌면서 249만원 가량 하던 환자 부담금이 앞으로는 27만7000원으로 줄어들게 된다.
복지부는 △척수강내 약물주입펌프이식술 △뇌 양전자단층촬영 △뇌 단일광자단층촬영 등은 선별급여 방식을 적용해 보험혜택이 없는 비급여 치료항목을 급여로 전환하되 환자 본인부담률을 높이는 방식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오는 8월부터 선택진료비를 평균 35% 축소하는 내용 등을 포함한 선택진료·상급병실료 개선 추진 경과도 이날 건정심에 보고됐다.
건정심은 이밖에도 이미 건강보험 항목에 등록돼있는 8개 성분·89개 약품의 임상적 유용성 평가 결과도 심의·의결했다.
그 결과 소화성 궤양치료에 쓰이는 설글리코타이드 등 4개 성분 59개 품목의 건강보험 급여 자격은 유지됐지만, 나머지 칼레디노게나아제(1개 성분 1개 품목)와 아르테미시아 아시아티카 추출물(1개 성분 1개 품목)의 경우 유용성 입증 실패 또는 포기로 해당 효능에 대한 급여가 삭제(취소)됐다.
이에 따라 특히 동아에스티의 대표 제품인 만성위염 치료제 '스티렌정'(아르테미시아 아시아티카 추출물)이 지금까지 받아온 수 백억원의 건강보험 급여를 반환해야 할 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5년 동안의 병상생활을 굳건히 지켜주던 아내마저 인공심장판막 이식술과 부정맥 확장 수술을 받았다. 몸을 추스르기 위해 찾아온 순창의 월곡마을. 농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지역 주민들과 더불어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건강도 일도 찾은 당당한 농사꾼이 됐다.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려고 온 월곡마을 = 내 고향은 전북 정읍이다. 어렸을 적 도시로 나가 인천에서 살다가 건강이 좋지않아 산 좋고, 물 좋은 청정지역인 이곳 순창으로 7년 전에 이사를 왔다. 그 때 당시에는 몸이 너무 아파 힘든 농사는 생각하지도 못했고 그저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이나 하려는 생각이었다. 마침 처갓집이 순창 팔덕면 월곡리이기에 이곳 월곡마을로 오게 됐다.
처음 이곳에 올 때, 땅 640평을 구입해 집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처음 집을 지으려 할 때부터 쉽지는 않았다. 마을에서는 이런 저런 말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집의 위치가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마을 상류에 살면서 축산업을 할까봐서 집을 못 짓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절대 축산업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하게 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집 문제로 마을에서는 임시 총회가 열렸고 찬반 투표까지 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5대 5라고 전해 들었지만 그래도 집은 계속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과 관계가 매끄럽지 못했던 그때 돌파구가 된 계기가 있었다. 당시에 월곡교회 목사님이 팔덕면 독거노인 70분에게 반찬도시락을 배달하고 계셨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나누어 드리는 일을 맡아서 하게 됐다. 집을 지으면서도 봉사활동 하는 날에는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참여했다. 그런 노력 때문이었는지 집을 짓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집 짓는 일이 거의 마무리 될 무렵은 가을 추수 때가 다 되어서였다. 아스팔트 도로가에다 벼를 말릴 때였다. 오가다보니 다 말린 벼를 자루에 담는 일도 어른들에게는 힘든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 일이 보일 때마다 가서 도와 드리게 됐다.
아무런 의도도 없이 그냥 기쁜 마음으로 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의 인심이 얼마나 좋은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추수가 끝나고 나니 그분들이 제일 먼저 쌀가마니를 우리 집으로 가지고 오신 것이었다. 농사를 짓지 않던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은총 같은 선물이었다. 40킬로그램의 쌀을 1포씩 가져다 주셨는데 집안에는 일곱 포대가 쌓였다. 그 쌀은 농사를 짓지 않는 우리 가족이 1년 동안 충분히 먹을 식량이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했던 기억들이다.
◇주민들과 함께 살다보니 ‘성공한 귀농’= 이런 일이 있으면서 내가 가진 기술을 통해 보일러도 무상으로 고쳐드리고 차
량봉사도 시작했다. 말이 봉사지 그리 거창한 일도 아니었다. 순창에는 5일마다 장이 서는데 차가 없는 분들을 위해 장터까지 모셔다 드리고 장터에서 점심도 같이 사 먹었다. 그럴 때마다 잔잔한 정담들을 나누며 가까워 질 수 있었다.
또한 마을에 농악단이 있었는데 농악에 취미를 붙이면서 지역 주민들과 더욱 가까워지게 됐다. 행사가 있으면 함께 즐거워하면서 마음이 통하게 된 것이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더욱 더 합심하려고 노력했다.
이듬해 마을 농가에서 수확한 오디와 복분자를 서울과 인천에 사는 지인들에게 직거래로 팔아드렸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나는 대부분의 농산물을 직거래로 판매해 드렸는데 고사리와 잡곡, 고추 등은 직거래 고객이 많이 늘어나 지금은 인기가 아주 좋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이미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던 사람들처럼 너무나 친숙한 마을 주민이 됐다. 이렇게 마을 분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우리 부부의 건강도 좋아졌고, 살림살이도 늘어나면서 이제 당당한 농사꾼이 됐다. 꾸지뽕 묘목을 재배해 많은 소득도 올렸고 3000평이 넘는 부지에 꾸지뽕 농장을 만들었으며 이제는 꾸지뽕나무를 분재와 관상용으로도 만들어 농가 부업으로 활용 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는 꾸지뽕 가공식품 개발에 많은 연구와 노력을 할 계획이다. 더불어 우리 농장을 관광농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부부가 건강을 되찾은 것을 꼽을 수 있다. 지금은 이곳에 이사 오길 참 잘 했다고 부부가 얘기한다. 농가소득도 늘어나 지금은 연간 6000만 원 정도 소득을 올릴 수 있어 행복한 귀농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던지 우리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귀농·귀촌을 꿈꾸고 있다. 그 중에 여섯 가정(17명)이 이곳 순창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우리 자녀들의 가정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가는데 자연스럽게 홈스테이를 하게 된 이유다.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머무는 동안 귀농 후의 삶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정말 반가운 일은 또 있다. 귀농인들과 함께 마을에 빈집들을 보러 갔을 때 마을 분들이 얼마나 친절을 베풀어 주시는지 모른다. 진심으로 예비 귀농인들을 환영해 주시는 탓에 감동하여 꼭 이 마을에 오고 싶다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살 집들을 현재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순창서 얻은 경험, 귀농인들에게 모두 전할 생각 = 장류의 고장 순창에 이사를 와서 제일 먼저 배우고 싶었던 것은 고추장, 된장, 청국장 만드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마을 할머니들을 집으로 모셔다가 고추장 만드는 방법도 배우고, 장 담그는 방법을 배우면서 어르신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르신들에게 배운다는 자세로 다가서니 할머니들께서 직접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모르는 부분은 일부러 이웃 사람들에게 물어 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알려 주시기도 했다.
그렇게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전북대학교 식품공학과에서 실시하는 장류 만드는 방법에 대한 교육을 수료하게 됐고, 지금은 아주 맛있는 고추장, 된장, 청국장을 만들 수 있다. 이제는 내 나름의 비법을 레시피로 만들 수 있는 수준으로, 도시에 사는 형제들과 교회의 아는 사람들을 통해 상당한 양의 직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도시민들과의 직거래는 여러 가지 농산물을 다 팔수 있으므로 한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이 된다. 정성을 들여 정직하게 거래를 하면 신뢰를 쌓게 되고, 그 신뢰가 소개로 이어져 거래처가 계속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이곳 순창으로 귀농·귀촌 하시는 사람들에게는 고추장, 된장, 청국장 만드는 방법이나 여러 가지 조언을 아끼지 않고 함께 연구하여 순창의 장류사업 발전에 힘을 보태고 지역발전에 적극적으로 노력할 생각이다. 그리고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며 살 계획이다.
꾸지뽕 농사는 다른 작물에 비해 농가 소득이 많은 반면에 노동력은 적어서 아주 효율적이고 부가가치도 높다. 꾸지뽕나무를 접목하는 기술이나 재배 방법, 판매 방법 개발에 더욱 경주할 생각이다. 꾸지뽕을 첨가한 식품 개발 연구를 통해 부수적
인 농가 소득은 물론 순창 지역 발전에 힘을 보태고 싶다. 이를 위해 그동안 경험한 모든 기술은 순창이 좋아 귀농 하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공개할 예정이다.
◇도시에서 살다 왔다고 더 잘 난 것은 없다 = 이런 생각들이 결실을 얻었는지 이번에 또 다른 두 가정이 귀농을 결심하게 되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 앞으로 귀농이나 귀촌을 하시는 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스스로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서라는 것이다. 농촌은 지역이 매우 좁아서인지, 아니면 낯설음에서 오는 편견 때문인지 외부사람들에 대한 경계가 매우 심
하기도 하다. 우선 어떤 사람들인가 하고 지켜보는 경우가 많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타지에서 이사 오는 사람들이 간혹 마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느끼는 것이 지역 주민들과 빠른 시일 내에 가까워져야 좀 더 편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며 정착이 빨라진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지역사회 봉사활동 한두 가지 정도는 같이 해야 할 것 같다. 나 같은 경우에는 자율방재단에 가입해 봉사하면서 보람을 얻기도 한다. 지역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지역 주민들에게 신뢰를 얻고 정착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내가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이 그들과 소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마음이 통해야 그들과 친해질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소통하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다. 그저 진심을 다해
도왔고, 진심으로 배우길 원했고, 진심으로 이 마을주민이 되고자 했기에 마을 사람들도 그 진심을 알아주게 되면서 마을 분들 역시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여 주신 것 같다.
진심은 이렇게 통한다. 도시에서 살다 왔다고 마을 주민들보다 더 잘 난 것은 없다. 도시에서 알던 지식이나 생활 방식들은 오히려 이곳에서 쓸모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도시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에게 더 낮은 자세로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남을 먼저 존중해야 나도 존중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통하는 가장 기본인 것이다. 이런 기본에만 충실 하다보면 빠른 정착의 지름길이 되리라 생각한다.
·귀농 전 거주 지역: 인천
·귀농 전 직업: 생산직
·귀농 결심동기: 요양
·귀농 선택작목: 꾸지뽕
·귀농귀촌 교육이수: 없음
·귀농 연도: 2006년
·귀농시 나이: 55년생
·귀농지 선택사유: 처가 인근
·귀농시 영농기반: 없음
·귀농 초기자금: 1억
·연간 수익: 6000만원(꾸지뽕 3500만원 이상, 묘목·고사리 등 2500만원)
·향후 계획: 꾸지뽕 가공공장 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