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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릉 5백년 답사
- ‘덕을 베풀고 의로써 행했다’ 하여 이성계가 목조(穆祖)로 추존한 4대조 이안사(李安社). 이안사는 전주에서 삼척으로 옮기면서 부모의 묘도 이장해 모셨다. 부친 양무장군의 묘가 준경묘(濬慶墓), 모친의 묘가 영경묘(永慶墓)이다. 이곳은 5대손 안에 군왕이 나온다는 왕조 창건 전설이 시작된 곳이다. 한 도승이 개토제(開土祭)때 소 백(百牛)마리를 잡아 올리라고 일러준 것으나 흰소(白牛)로 대신해 천년 사직이 반으로 줄어 오백년이 됐다거나, 준경묘 사방 다섯 봉우리의 수명이 각각 1백 년이라 도합 조선왕조 수명이 오백년이 되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어렵사리 전주에서 삼척으로 옮겨갔지만 악연의 뿌리는 모질고 질겼다. 전주에서 충돌했던 산성별감이 강원도 안렴사로 부임해 온다하여 짐을 꾸려 더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동북면의 원산(元山) 북쪽 덕원(德源)으로 1236년(고려 고종 23))의 일이다. 몽고군의 침략이 수차례 이어지던 때로 고려는 목조대왕을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아서 원나라가 점령하고 있는 쌍성(雙城: 永興 · 和州) 바로 남쪽인 고원(高原)을 지키게 하였다. 그 당시 함경도는 원나라의 속령이었다. 원나라가 이안사에게 여러 차례 항복을 요구하니 세(勢) 부족의 현실을 감안하여 수하의 족벌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이후 경흥(慶興) 바로 아래 원나라 점령하의 여진(女眞) 땅인 오동(斡東)까지 북상하여 구역 내 수천호(首千戶)를 다스리는 원나라 관직 다루카치(達魯花赤)를 겸하게 된다.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에 별세하였다. 경흥(慶興) 남쪽에 장사 지냈다가 그 후 1410년(태종 10) 경인년에 함흥 서북쪽으로 이장했다. 이른바 덕릉(德陵)이다. 목조대왕 이안사의 후계는 4남 행리(行里)로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이어받았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에 함께 나아갔다가 충렬왕을 만났을 때 선친 때의 이주가 배반이 아니라 위험을 벗어나기 위함이었음을 아뢰고 의심을 벗었다고 한다. 이후 원나라의 이민족 배척과 여진족의 적대행위가 계속되는바 그들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위하여 오동(斡東)에서 덕원(德源)으로 돌아와 쌍성 지역을 계속 관할하고 지내다 승하했다. 태조 이성계은 익왕(翼王)이라 칭했고 태종 때에 익조(翼祖)로 추존하니 능은 지릉(智陵)이다. 부인 정숙왕후 최 씨의 능은 숙릉(淑陵)으로 남편과 떨어져 모셨다. 최 씨의 상여가 출발하여 지릉으로 향하는 도중에 한 고개에 이르자 상여가 갑자기 저절로 부서져 더 갈 수가 없어 근처에 장례를 모신 탓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지릉과 숙릉의 사진이나 자료가 없다. 익조 이행리의 후계 역시 4남 춘(春)으로 부친의 벼슬을 이어받았다. 관할지역에 대농장을 유지하며 풍부한 재력으로 사병 2천 명을 관리할 수 있었다. 개경으로 올라가 충숙왕으로부터 하사품도 받아오는 등 왕실과의 관계도 유지하며 지내다가 돌아가니 각각 의릉(義陵)과 순릉(純陵)에 모셨다. 이렇게 고조부 이안사로부터 증조부 이행리를 거쳐 조부 이춘까지 벼슬을 세습하며 영흥, 함흥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조부 이춘의 후계는 장자 자흥에게 이어졌으나 두 달만에 되돌아 갔다. 그 아들 교주(咬住)는 나이가 어려 계모의 흉계를 물리치고 이성계의 아버지 자춘(子春)이 임시로 이어받았다. 조카 교주가 성장함에 따라 관직을 돌려주려 했으나 받지 않았다. 고려 공민왕 때로 반원(反元) 정책에 따라 원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쌍성총관부를 되찾기로 했다. 공민왕과 이자춘이 협약해 1356년, 99년 만에 옛 땅을 회복했다. 큰 공을 세운 이자춘은 대중대부(大中大夫) 사복경(司僕卿) 벼슬을 하사 받는 등 고려국 중앙에 등장했다. 개경으로 올라온 이자춘은 아들 이성계와 함께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했다. 승승장구함과 아울러 벼슬이 높아지게 되는데 천호(千戶) 관직에서 만호(萬戶) 관직으로 높아져 함경도로 떠난 그해 승하하여 함흥에 장사 지내니 환조대왕의 정릉(定陵)이다. 이렇게 이성계의 4대 선조 왕릉은 모두 북한의 함경남도 를 모셔져 있다. 2기는 쌍릉으로 함께, 2기는 각각 모시다 보니 여섯 지역에 나뉘어져 있는데 현재 어떤 상태인지는 알 수 없다. 세계유산에도 포함되지 않은 채 말이다.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답사꾼들이 찾아가볼 날을 기대해본다.
- 2018-11-2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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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땅
- 6월 13일, 강신영, 김종억 동년기자와 내가 백두산 트레킹 팀(총 33명)에 합류했다. “백두산은 한민족의 발상지. 또 개국의 터전으로 숭배되어온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어떤 결의에 찬 출발이라기보다 막연히 뿌리를 보고 싶었다. 또 더 나이를 먹으면 백두산에 오르기 힘들 것 같은 불안감도 있었다. 일찌감치 4박 5일의 여행 일정표를 받았지만 비용과 둘러볼 장소만 보고 무심히 있다가 출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세히 보니 ‘오전 6시,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3층 집합’이라 씌어 있었다. 난감했다. 다른 사람들은 4시에 출발하는 공항버스를 이용할 수 있지만 경기도에 사는 나는 그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인천공항 근처의 호텔을 알아봤다. 아침에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까지 포함해 숙박료가 4만5000~5만5000원 정도였다. 인천 운서역 근처에 있는 호텔을 예약한 뒤 4만5000원을 지불했다. 다음 날 새벽 5시 40분까지 인천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를 받았다. 집에서 왔으면 잠도 설쳤을 텐데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비용으로 쓴 4만5000원은 그 가치가 충분했다. 짐을 꾸리면서 트레킹과 등산, 어디에 맞춰야 할지 좀 헷갈렸다. 그래서 트레킹 준비를 했고, 내 상태를 고려해 스틱까지 준비했다. 우산과 비옷, 따뜻한 옷도 집어넣었다. 허전한 코리아타운 드디어 1시간 30분 만에 심양국제공항에 도착,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버스에서 내려 코리아타운 ‘서탑가’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중국어와 한국어로 된 간판이 이어져 있었지만 한국어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마사지, 노래방, 술집, 음식점, 찻집, 미용외과, 횟집, 족도관, 한국당구장…. 뭔가 허전했다. 거리에서 돈을 쫓아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느껴져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선의 문화가 배어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문화를 팔아야 돈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잘 보존된 고려의 옛 거리, 결기 있는 독립투사 후예들이 자신들의 혼을 녹여 만든 거리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고구려 유적지, 민족 성지 만주벌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러나 곧 이런 생각들을 후회했다. 먹고살기 팍팍하고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면 문화도 역사도 예절도 지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많은 고난 속에서도 조선족으로 남아 우리의 말과 풍습을 지켜오지 않았는가. 산 자와 죽은 자의 도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통화시에서 집안시로 두 시간에 걸쳐 이동했다. 광개토대왕비와 능,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을 관광하기 위해서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우리의 논, 밭, 산과 너무도 흡사했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인 국내성이 있었던 곳이다. 고구려 2대 왕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이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400여 년 이상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다. 지금도 땅을 파면 유적과 유물이 나오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도시다. 1570년간 땅속에 묻혔던 광개토대왕비는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장수왕은 높이 6.9m, 무게 37t의 비석에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해놓았다. 그러나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훼손되었고 일제가 기록 일부를 변조하는 일까지 벌였다고 한다. 우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수모의 공간, 빼앗긴 국토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광개토대왕비는 중국 공안 복장의 경비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사진촬영을 금했다. 인형처럼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에 박제가 된 채 서 있는 비석. 우리 조상의 업적을 다른 나라 사람이 지키면서 우리에게 입장료를 받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뒤를 돌아 광개토대왕릉으로 향했다. 마치 조그만 동산처럼 느껴지는 흙더미. 그 위에 초라한 나무 한 그루가 능임을 알게 해줬다. 내부 석실에는 한국 관광객이 던져놓은 듯한 1000원짜리 지폐 몇 장이 놓여 있었다. 먹먹한 마음을 그렇게라도 달래고 싶었던 모양이다. 좀 더 걸어가니 413~490년에 축조된 장군총이 나왔다. 거대한 화강암을 쌓아올리고 그 옆에 밀리지 않도록 지지석을 세운 피라미드식 축석묘다. 높이 12.4m, 길이 31.6m의 7단 계단식 동방의 피라미드는 아직도 탄탄해 보였다. 침묵, 그리고 안타까움 장수왕 무덤가에 머물며 안타까운 질문을 하고 싶었다. ‘거대한 만주 벌판을 버리고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안 그랬다면 아직도 만주는 우리 영토일 텐데요.’ 모두의 가슴으로 젖어드는 안타까움. 그것이 비가 되었는지 그칠 줄 모르고 따라다녔다. 아니면 아비를 박제화한 것을 통곡하는 장수왕의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웅장하고 거대한 무엇을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뿌리에 존재하는 의식을 일깨워준 여행이었다. 순간순간 가슴이 저려왔다. 잘 키운 딸을 강탈당한 부모의 심정이 이럴까. 가이드는 천지에 올라 태극기를 꽂았다가 벌금 물고 감옥까지 갈 뻔했던 한 한국인의 이야기를 해줬다.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괜히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2018-08-28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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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보물 1호, 디지털 녹음 언어 학습기
-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날이 있다. 분기별로 한 번씩 만나 대청소를 하는 날이다. 집 안을 한 구역씩 나누어 뒤집어놓는다. 앞뒤 베란다, 거실, 냉장고, 안방, 공부방, 그리고 창고를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이다. 그날은 창고를 정리하는 날이었다. 이사 오고 20년 가까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창고의 짐들을 거실에 펼쳐놓았다. 창고 속 상자를 열자 왕릉 속 유물이 발굴되듯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하나가 수십 년 전 나의 보물 1호였던 ‘디지털 녹음 언어 학습기’였다. 생활이 넉넉지 않았던 시절, 가족이 내 생일선물로 당시로서는 꽤 거금을 들여 구매한 물건이었다. 세월이 흘러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불현듯 눈앞에 그 보물이 나타났다. 마치 시간을 되돌려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오래전 ‘마이마이’ 같은 간편한 휴대용 물품이 나오면서 창고 속으로 들어간 듯했다. 아무튼 온 식구가 다 아는 내 보물이 나오자 탄성이 쏟아졌다. 성능도 좋아 당시로서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듣기는 물론 녹음, 재생, 그리고 듣고 싶은 부분을 누르면 같은 내용을 세 번씩 반복해주고 원어민 음성과 내 음성을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첨단기능이 장착된 멀티 플레이어였다. 이제는 낡고 볼품없는 물건이 되어버리긴 했어도 플레이 버튼을 누르니 “How are you doing?” “I’m fine. How are you?” 하며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내 젊은 시절, 꿈 많던 열정의 시대여. 그 모습으로 나는 잠시나마 돌아가 감격에 젖었다. 비록 오래되어 빗소리가 들리긴 해도 아직까지 쌩쌩한 듯했다. 그때 재단사 칼질하듯 아낌없이 물건을 버려대는 딸이 내 모습을 보며 한마디했다. “아빠 이건 못 버리시겠지요?” 그래서 ‘내 추억의 보물 1호’는 새롭게 포장되어 다시 창고 깊숙이 보관되었다.
- 2018-08-13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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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릉 500년 답사③ 왕조 창건의 전설
- 조선왕실의 뿌리 '전주'를 떠나다 전주(全州)는 전주 이씨의 시조(始祖)와 조상들이 태어나고 자란 조선왕실의 뿌리라 할 수 있는데, 대대로 살아오던 이곳에서 이성계의 4대 조상 이안사에 이르러 전주를 떠나게 된다. 훗날 이성계에 의하여 목조대왕으로 추존된 이안사는 시조 이한의 18세가 되며 전주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지금의 이목대(梨木臺)가 그곳인데 ‘전주읍지(全州邑誌)’에 ‘전주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발산(鉢山)은 발산(發山), 또는 발리산(發李山)이라고 이른다. 발리산 남쪽 아래에 자만동(滋滿洞: 現 校洞)이 있었는데, 이 자만동에 목조대왕의 집이 있었다’고 하였다. 지금의 전주시 교동, 한옥마을 위쪽에는 이안사가 살던 곳 이목대(梨木臺)와 이성계가 남원 운봉까지 내려와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개선하던 길에 잠시 들러 잔치를 베풀었다는 오목대(梧木臺)가 남아 있다(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 시조 이한부터 누대에 걸쳐 이곳 전주에 살던 이성계의 조상들은 4대조 이안사에 이르러 전주를 떠나게 되는데 1230년경, 27세쯤이던 그가 전주의 고급 관리들과 갈등을 빚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당시 전주에는 안렴사(按廉使)와 산성별감(山城別監), 주관(州官) 등 고급 관리가 있었는데 때마침 전주에 산성별감이 새로 부임하게 되자 주관은 바쳐야 할 관기(官妓)를 목조대왕께 청탁하였으나 거절당했으며 이를 관의 명을 거절했다 하여 핍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는 사병(私兵)을 가진 무신들이 전횡하던 시대인지라 군사를 보내 굴복시키려 살해위협이 예상되는바 화를 면하기 위하여 부모와 일족을 이끌고 전주를 떠나게 되었다. 이때 그를 따른 혈족과 외족이 170여 호나 되었다고 한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자료). 왕조 창건의 태몽,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 이안사가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온 지 1년 후 부친상을 당한다. 마땅한 묏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한 도승으로부터 소 백 마리(百牛)를 잡아 제사 지내고 금관(金棺)에 안장해 장례를 치르면 5대손 안에 왕이 태어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형편이 그렇지 못한 이안사는 하얀 소(白牛)를 구하여 ‘百牛’를 ‘白牛’로 해석하고 들에 널린 귀리 짚으로 관을 감싸니 금빛이 도는 금관이 되어 도승의 말을 실천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이안사는 아버지 양무장군의 묏자리를 잘 써서 5대손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 왕이 되었으며, 이성계는 4대 조상을 모두 왕으로 추존하여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칭하였으니 이곳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活耆里)는 황제가 나왔다는 황터, 곧 황기(皇基)라고 전한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 건국 후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고 수호군(守護軍)을 두고 관리하였으며 삼척을 선대의 묘가 있는 곳이라 하여 현(縣)에서 부(府)로 승격시켰다. 고종 때(1899) 이르러 묘호를 준경(濬慶)으로 공식 추봉하고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준경묘는 큰길에서 40분 넘게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금강송 군락지를 통과하는 길이다. 특히 이곳에는 전국에서 가장 멋진 소나무로 뽑힌 미인송(美人松)이 있는데 2001년 충북 보은 속리산에 있는 정이품송과 혼례를 치르고 후손을 받아 키우는 그 나무이다. 이렇게 전주에서 삼척으로 옮겨 온 이안사는 부모를 모두 삼척에 묻었는데 부친 양무 장군의 묏자리가 군왕이 나온다는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조선왕조의 탄생을 예약 한 곳이다. 당시 해안지역은 이곳 강원도까지도 왜구의 침략이 빈번하였으며 몽고군이 일곱 차례나 전국을 초토화시키며 휘젓고 다닐 때다. 이에 이안사는 대규모 족단(族團)을 이끌며 외적에 항전하면서 잘 지내고 있었으나 전주에서 충돌했던 산성별감이 강원도 안렴사로 부임해 옴으로써 수년 만에 다시 짐을 꾸려 더 북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 2018-07-2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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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릉 500년 답사② 조선 왕실의 뿌리
- 풍패지향(豊沛之鄕) '전주' 전주(全州)는 조선 왕실 가문의 관향(貫鄕)으로 전주 이씨의 시조(始祖)와 조상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즉, 조선 왕실의 뿌리가 그곳인데 전라도의 수부(首府) 전주(全州)로 부르기보다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고 부르는 것을 더 높이 섬기고 받든다. 이는 천하를 최초로 통일한 중국의 진(秦) 나라가 3대를 넘기지 못하고 멸망한 후 다시 재통일한 한나라 유방(劉邦)이 강소성의 작은 시골 풍패(豊沛) 출신임을 빗대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관향을 일컫는 말이니 전주를 풍패향(豊沛鄕)이라거나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그래서 지금 전주성은 다 없어지고 남쪽 성문만 남았는데 그 이름이 풍남문(豊南門, 풍패지향 전주의 남문)이며, 전국의 객사(客舍)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전주 객사의 주관(主館)에 걸린 편액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고 씌어 있으니 이러한 내력을 모르면 왜 전주를 풍패향(豊沛鄕)이라고 부르는지 또한 풍패지관(豊沛之館)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시조묘역(始祖墓域) 조경단(肇慶壇) 전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의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에게 21대 조가 되는데 전주에서 태어나 살았다고 하나 자세한 기록이나 자취는 없으며 ‘건지산에 묘소가 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태조 이성계는 건국 후 이곳을 묘역으로 정하여 지키도록 하였으며 영·정조 때에 이르러 실태조사를 하였으나 묘소의 실체는 찾지 못하였으며 1899년(광무 3) 고종황제가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워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 명명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조경묘(肇慶廟)와 경기전(慶基殿) 조경단이 시조묘역이라면 조경묘는 시조를 모신 사당이다. 전주가 전주 이씨의 발상지라 하여 전국 유생의 상소에 의하여 1771년(영조 47)에 창건되었는데, 위패 ‘시조고신라사공신위(始祖古新羅司空神位)’와 ‘시조비경주김씨신위(始祖妣慶州金氏神位)’는 영조의 친필이다. 동학혁명 때는 경기전의 태조 영정과 함께 시조와 시조비 위패를 위봉산성(威鳳山城)으로 이안하여 보존하였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 즉 어진(御眞)을 모신 경기전 뒤쪽에 홍살문을 세운 조경묘는 늘 잠겨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전주가 조선왕실의 뿌리라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시조의 위패를 모신 조경묘는 경기전 안에 있지만 별개의 영역으로 관리되며, 영조가 자신의 서자 콤플렉스를 의식하여 조상을 잘 모시는 위선(爲善) 대책으로 추진하였다는 시각도 있다. 반면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모신 경기전은 조경묘보다 훨씬 앞선 태종 10년(1410)에 세워졌는데 당시 명칭은 어용전(御容殿)이었다가 진전(眞殿)으로, 다시 경기전으로 바뀌었다. 태조의 어진은 애초 26폭이 전해져 나라 곳곳에 진전(眞殿)이 있었으니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이라 이름 지었으며 현재의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고쳐지었으며 사적 제339호이다. 경기전의 태조 어진(御眞)은 고종 9년(1872) 당시 어진이 낡고 해져 새로 제작한 것으로 원본을 옮겨 그린 모사본(模寫本)이자 유일하게 남아있는 태조 어진이며 국보 제317호이다. 참고로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임금중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뿐이다. 이는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며 특히 6.25 전쟁 때 부산으로 이안 했다가 1954년 창고에 불이나 대부분 타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곤룡포(袞龍袍)라고 하면 붉은색 홍포(紅袍)를 떠올리는데 이성계는 청색 곤룡포를 입었다. 이에 대하여 개국 초기에 나라를 열었기에 청색이라거나 중국에서 아직 정식 인준을 받지 못하여 그렇다는 주장 등이 있는데 명확하지는 않다. 세종 때에 이르러 명나라에서 곤룡포를 보내왔다고 하니 그 이전에는 전 왕조인 고려의 습속을 이어받아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조선왕실의 뿌리라고 부르는 전주에는 전주 이씨의 시조묘인 조경단과 사당 조경묘, 그리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이 있어 조선왕조를 연구하고 답사하자면 꼭 들려보기를 권하는 곳이다. 게다가 경기전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전주사고(全州史庫)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옛 사고터가 남아 있으며, 7대 임금 예종(睿宗)의 태실과 태실비가 있는데 이는 원래 완주의 태봉산에 있던 것으로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6호이다.
- 2018-06-27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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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릉 500년 답사① 세계유산 조선왕릉
- 세계유산(世界遺産) 이집트 최남단 아스완 지역, 수단공화국과의 국경지대에 고대 이집트 19왕조의 파라오 람세스 2세가 건설한 아부심벨 신전이 있다. 입구에 20m 높이의 거대한 석상 4개가 앉아있는 모습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신전은 1817년에 발굴되었는데 아부심벨은 당시 안내를 맡았던 이집트 소년의 이름이다. 1960년대 초 아스완 하이댐의 건설로 이 아부심벨 신전이 수몰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구하자는 세계적인 여론이 일어나 유네스코가 모금 운동을 펼치고 미국이 발 벗고 나서서 신전을 살리기로 하였다. 거대한 신전을 1만6000여 조각을 낸 후 70m 위쪽으로 옮겨 성공적으로 재건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1972년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 보호협약을 체결하고 인류가 범세계적으로 보존해야 할 유산의 등재를 추진하니 이것을 세계유산(世界遺産)이라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세계유산은 인류무형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이 추가되어 유네스코 등재유산이라 부르는데 2018년 6월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유산 12점, 인류무형문화유산 19점, 세계기록유산 16점을 보유하고 있다. 시행 초기에는 홍보를 위하여 웬만하면 거부 없이 등재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세계유산 등재 여부와 등재 건수에 따라 그 나라에는 영광이자 관광 홍보에 엄청난 효과가 있어 신청이 쇄도하고 있으며 심사와 등재가 매우 까다로워진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 9번째 세계유산, 조선왕릉 조선왕릉은 2009년 6월 27일, 우리나라에서 9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날은 610년 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승하한 날이었다. 이성계는 1408년 5월 24일(음력) 승하하였는데 양력으로 환산하면 6월 27일이니 초대 임금이 세상을 떠난 날 그 후손들로 이어진 조선 임금과 왕비들이 묻힌 조선왕릉이 세계의 보물로 지정이 된 것이다. 조선왕릉은 일본이나 중국 등 주변 나라에서 볼 수 없는 고유한 조형의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풍수이론에 대한 고유한 해석과 적용은 물론 왕릉 조성과 관련한 모든 내용을 기록한 풍부한 기록문화와 함께 600년을 이어온 무형적인 문화전통인 왕릉제례를 지금도 계승하는 점 등을 고려하여 당당히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현재 남북한을 통틀어 42기의 조선왕릉이 있으나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하고 남한에 있는 40기가 세계유산으로 일괄 등재되었으며 대부분 수도권 주변에 있어 비교적 쉽게 답사할 수 있어 지금부터 조선왕릉 답사를 시작하려 한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 40기 모두를 답사함으로써 조선왕조 519년의 역사를 살펴보고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을 만나봄으로써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 온 철학과 종교, 정치와 사상, 문화와 예술의 깊이를 느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대하드라마의 주인공은 물론 조선왕조의 27대 왕과 그들의 왕비, 그리고 후궁들과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가 될 것이다. 또한 역대 세자와 세자빈은 물론 대군과 공주, 군(君)과 옹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왕실가족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영욕(榮辱)의 세월을 보낸 공신들이나 역신들, 심지어 민초(民草)라 불리며 이름 없이 살았던 백성들의 이야기도 엮어보려 한다. 답사기는 연대별, 시간대별로 이어가는 편년체를 택하여 우리가 늘 외워대던 '태정태세문단세...' 순서로 진행할 예정이며 처음에는 조선왕실의 뿌리를 찾아보고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알아보는 과정이 선행될 것이다.
- 2018-06-2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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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알아두면 쓸모 있는 걷기 꿀 Tip① 웹사이트로 걷기 코스 찾기
- 걷기가 일상의 행위를 넘어 여행이 되려면 나름의 계획성과 준비가 필요하다. 유유자적 도보 여행가를 꿈꾸며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기 전 알아두면 쏠쏠한 걷기 정보를 담아봤다. 두루누비 www.durunubi.kr 걷기와 더불어 자전거 길까지 교통, 숙박, 음식, 문화 등 관련 정보를 한꺼번에 검색할 수 있는 사이트다. 길 이름으로 검색하거나 지도에 표시된 아이콘을 클릭해 지역에 따라 코스 찾기가 가능하다. 코스에 대한 소개 글과 사진, 지도, 거리, 시간, 난이도, 편의시설 등에 대한 기본 정보와 전문가 평점까지 골고루 담았다. ‘여행일정 짜기’, ‘이달의 추천 길’ 등을 이용하면 더욱 수월하게 도보여행 계획을 짤 수 있다. 서울두드림길 gil.seoul.go.kr 서울둘레길, 한양도성길, 근교산자락길, 생태문화길, 한강·지천길 등 서울의 도보 코스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서울둘레길 8개 코스의 지도와 거리, 소요시간을 비롯해 난이도, 진입로 교통정보, 주변 볼거리 등의 정보를 제공한다. 해당 자료는 그림 파일로 다운로드 및 출력 가능하다. 한양도성길의 경우 서울두드림길 홈페이지를 통하거나 도메인(seoulcitywall.seoul.go.kr)을 직접 입력해 접속하면 된다. 강화나들길 www.nadeulgil.org ‘나들이 가듯 걷는 길’이라는 뜻을 지닌 강화나들길은 총 20개 코스로 연결돼 있다. 선사시대 고인돌과 고려시대 왕릉 등 유적지와 함께 저어새, 두루미 등 천연기념물 철새가 서식하는 자연환경까지 경험할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 좋다. 사이트에서는 코스별 지도, 거리, 소요시간, 난이도, 주변 볼거리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걷기 모임 일정과 더불어 ‘나들길지기’의 연락처와 콜버스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강릉바우길 www.baugil.org 강릉바우길은 백두대간에서 경포와 정동진까지 산맥과 바다를 함께 걷는 총 400km의 코스다. 산맥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길이 대부분이라 경사가 높지 않아 초보 여행자들에게 부담이 덜한 편이다. 사이트에서는 코스별 지도, 교통정보, 준비물을 비롯해 길마다 히스토리를 담은 ‘스토리텔링’ 콘텐츠까지 볼 수 있다. 지리산둘레길 jirisantrail.kr 지리산둘레길은 전북, 전남, 경남을 아우르며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의 21개 읍면 120여 개 마을을 잇는 길이다. 웹사이트를 통해 총 22개 구간으로 나뉜 코스의 지도, 거리, 예상시간, 난이도뿐만 아니라 해발고도까지 볼 수 있다. 더불어 주요 경유지와 안내센터 전화번호, 민박 정보, 마을회관 전화번호 등을 제공한다. 해파랑길 haeparang.org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을 시작으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770km 장거리 도보여행 길이다. 고성 구간, 울진 구간, 포항 구간 등 크게 10개 구간으로 나뉜 50개의 코스가 있다. 사이트에서는 구간별 거리와 소요시간, 난이도를 비롯해 지역별 대표 연락처와 전 구간 교통편 확인이 가능하다. 제주올레길 www.jejuolle.org 제주올레길 18코스 정보를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해놓은 사이트다. 각종 안내소, 화장실, 숙소, 식당, 볼거리, 즐길거리와 시간대별 날씨와 미세먼지, 오존 상태, 휠체어 가능구간 정보도 제공한다. 걷기 또는 제주 여행 관련 행사, 축제, 프로그램 소개와 제주 소식, 여행 준비에 도움이 되는 조언까지 알차게 담겨 있다. #도보여행 #걷기코스 #걷기사이트
- 2018-05-1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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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아두면 쓸모 있는 걷기 꿀 Tip①
- 걷기가 일상의 행위를 넘어 여행이 되려면 나름의 계획성과 준비가 필요하다. 유유자적 도보 여행가를 꿈꾸며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기 전 알아두면 쏠쏠한 걷기 정보를 담아봤다. ◇웹사이트로 걷기 코스 찾기 두루누비 www.durunubi.kr 걷기와 더불어 자전거 길까지 교통, 숙박, 음식, 문화 등 관련 정보를 한꺼번에 검색할 수 있는 사이트다. 길 이름으로 검색하거나 지도에 표시된 아이콘을 클릭해 지역에 따라 코스 찾기가 가능하다. 코스에 대한 소개 글과 사진, 지도, 거리, 시간, 난이도, 편의시설 등에 대한 기본 정보와 전문가 평점까지 골고루 담았다. ‘여행일정 짜기’, ‘이달의 추천 길’ 등을 이용하면 더욱 수월하게 도보여행 계획을 짤 수 있다. 서울두드림길 gil.seoul.go.kr 서울둘레길, 한양도성길, 근교산자락길, 생태문화길, 한강·지천길 등 서울의 도보 코스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서울둘레길 8개 코스의 지도와 거리, 소요시간을 비롯해 난이도, 진입로 교통정보, 주변 볼거리 등의 정보를 제공한다. 해당 자료는 그림 파일로 다운로드 및 출력 가능하다. 한양도성길의 경우 서울두드림길 홈페이지를 통하거나 도메인(seoulcitywall.seoul.go.kr)을 직접 입력해 접속하면 된다. 강화나들길 www.nadeulgil.org ‘나들이 가듯 걷는 길’이라는 뜻을 지닌 강화나들길은 총 20개 코스로 연결돼 있다. 선사시대 고인돌과 고려시대 왕릉 등 유적지와 함께 저어새, 두루미 등 천연기념물 철새가 서식하는 자연환경까지 경험할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 좋다. 사이트에서는 코스별 지도, 거리, 소요시간, 난이도, 주변 볼거리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걷기 모임 일정과 더불어 ‘나들길지기’의 연락처와 콜버스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강릉바우길 www.baugil.org 강릉바우길은 백두대간에서 경포와 정동진까지 산맥과 바다를 함께 걷는 총 400km의 코스다. 산맥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길이 대부분이라 경사가 높지 않아 초보 여행자들에게 부담이 덜한 편이다. 사이트에서는 코스별 지도, 교통정보, 준비물을 비롯해 길마다 히스토리를 담은 ‘스토리텔링’ 콘텐츠까지 볼 수 있다. 지리산둘레길 jirisantrail.kr 지리산둘레길은 전북, 전남, 경남을 아우르며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의 21개 읍면 120여 개 마을을 잇는 길이다. 웹사이트를 통해 총 22개 구간으로 나뉜 코스의 지도, 거리, 예상시간, 난이도뿐만 아니라 해발고도까지 볼 수 있다. 더불어 주요 경유지와 안내센터 전화번호, 민박 정보, 마을회관 전화번호 등을 제공한다. 해파랑길 haeparang.org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을 시작으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770km 장거리 도보여행 길이다. 고성 구간, 울진 구간, 포항 구간 등 크게 10개 구간으로 나뉜 50개의 코스가 있다. 사이트에서는 구간별 거리와 소요시간, 난이도를 비롯해 지역별 대표 연락처와 전 구간 교통편 확인이 가능하다. 제주올레길 www.jejuolle.org 제주올레길 18코스 정보를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해놓은 사이트다. 각종 안내소, 화장실, 숙소, 식당, 볼거리, 즐길거리와 시간대별 날씨와 미세먼지, 오존 상태, 휠체어 가능구간 정보도 제공한다. 걷기 또는 제주 여행 관련 행사, 축제, 프로그램 소개와 제주 소식, 여행 준비에 도움이 되는 조언까지 알차게 담겨 있다. ◇기분 좋은 걷기 매너 01 오르막길에서 힘들게 올라오는 사람에게 길 먼저 양보하기 02 추월할 때는 앞사람에게 양해 구하기 03 시끄러운 음악이나 요란한 행동 삼가기 04 지정된 노선을 이용하고 안전수칙 지키기 05 걷기 중 음주, 흡연하지 않기 06 야생동물에게 먹이 주지 않기 07 쓰레기 되가져오기 08 여럿이 걸으며 길 막지 않기 09 주변 농작물과 열매는 눈으로만 바라보기 10 공공시설물 깨끗하게 사용하기 11 도로변이나 좁은 길 지날 때는 한 줄로 걷기 12 지역 문화 및 지역민 존중하기 13 위험 구간 발견하면 제보하기 14 이정표나 길 표식 훼손하지 않기 15 길가에 핀 꽃과 나뭇가지 꺾지 않기 ◇2018 주요 걷기대회 일정 △4/21~22 제12회 한국 100km 걷기대회 4/26~29 IML 총회 및 스웨덴국제걷기대회 △5/12 제5회 고양누리길 전국걷기축제 △5/18~27 재미대한걷기연맹 2018 미국그랜드캐니언 걷기 △6/2~3 제18회 일본 SUN-IN 미래걷기대회 △7/17~20 제102회 네덜란드 나이메헨 국제걷기대회 △9/15~16 제2회 낙동강 세븐 스테이지 걷기대회 △10/13 제9회 군산 66km 새만금걷기대회 10/20~21 △제11회 울산 태화강전국걷기대회 △제8회 부산 갈맷길국제걷기대회 △제4회 영주 소백힐링전국걷기대회 △10/27~28 제24회 원주국제걷기대회 △11/2~5 제41회 일본 히가시마쓰야마 국제걷기대회 △11/10~11 제6회 일본 SUN-IN 100km 걷기대회 △11/17~18 제10회 인도네시아 족자 국제걷기대회 △12/1 2018 워커인의 밤
- 2018-04-04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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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와 조선 왕릉
- 종묘는 종로 3가역과 5가역 근처에 있다. 초등학교 때 단체로 갔던 기억이 있고 그 후로는 가보지 못했다. 조선왕조의 혼백을 모신 곳이라 하여 조심스럽기도 해서 왠지 발길이 가지 않던 곳이다. 그러나 몇 해 전 종묘 앞 쪽에 광장과 공원을 마련하고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어 가볼만 한 곳이 되었다. 입장료 1,000원인데 경로 우대는 무료이다. 안내서는 무료로 주지만, 자세한 설명이 잇는 소책자는 500원에 사야 한다. 아무 때나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제로 입장시켜 시간이 안 맞으면 번거롭다. 대부분 한 시간 간격이다. 일단 들어가면 해설사가 붙고 50분 동안 경비들이 지킨다. 그래서 정문까지 갔다가 돌아선 적이 몇 번 있다. 종묘는 종로에 있는 묘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종로는 쇠북 종(鐘)이고, 종묘의 종(宗)은 마루 종이라 하여 산마루처럼 꼭대기를 뜻한다. 그러므로 왕과 왕비의 혼백을 모신 곳이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썩어 없어지지만, 혼백은 남아 있다는 유교 사상에서 유래된 것이다. 나무로 만든 신주가 혼백이 머무는 곳이라는 것이다. ‘혼비백산’은 혼백에서 나온 말로 혼이 나갈 정도로 놀랐을 때 쓰는 말이다. 종묘는 정전이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다. 길이가 101m에 달하는 가장 긴 한식 건물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5명의 왕을 모시려 했으나 조선 왕조가 500년간 이어지면서 왕과 왕비들도 늘어나자 옆으로 계속 이어 지었다고 한다. 모두 정전에 모시지 못해 비중이 좀 떨어지는 왕들은 옆 건물인 영녕전에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 오면 학창 시절에 배웠던 조선 왕들의 순서와 여기 모신 왕들의 순서가 다르다. 원래 조선 건국을 개성에서 하고 한양으로 옮겨 왔을 때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정전은 국보, 영녕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종묘 제례는 무형 문화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종묘는 분위기가 다른 왕릉과 다르다. 일단 잘 가꾼 나무가 많아 공원 같은 분위기인 것은 비슷하지만, 정전 앞에 이르면 단조로운 긴 건물과 넓은 공간에 분위기가 차분하다. 그래서 ‘멍 때리기 좋은 곳’이라는 것이다. 정전 앞에 서 있으면 생각이 차분해진다고 한다. 정말 묘한 차분함이 느껴진다. 조선 왕릉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어 있으며 북한에 2기를 제외하고 40기가 대한민국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종묘에 간 날 마침 서오릉에 갈 일이 있었다. 왕실도 신분에 따라 능, 원, 묘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직계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종묘에서 조선왕릉에 대한 이해를 하고 가니 훨씬 도움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강남에 있는 선정릉, 학창 시절 소풍 가던 동구릉, 양재꽃시장 쪽에서 성남 가는 길에 있는 헌인릉, 여주의 영릉과 명릉, 영월의 장릉, 군대 생활하던 곳과 가까웠던 파주의 공순영릉까지는 가 봤다. 서울에 가까이 있는데도 못 가본 정릉이나 태릉 등 아직 안 가본 곳이 꽤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남양주 사릉, 홍릉, 유릉, 광릉 등 이름도 생소하거나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해 못 갔다. 교통이 불편하기도 하고 가 봐야 비슷비슷하니 안 갔을 것이다.
- 2017-11-15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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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규환의 남원·황석산 전투
-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저녁놀이 고와 보이지 않았다.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자진하겠다고, 부녀자들이 줄지어 뛰어내려 핏빛이 되었다는 황석산 바위를 보고 온 탓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함양을 떠난 시간이 오후 7시였다. 남원성 전투 취재 때도 같은 시간이었다. 고속버스 차창에 타는 저녁놀이 가득 드리웠지만 여느 때처럼 가슴 뛰는 풍경이 아니었다. 어찌 피뿐이랴. 성안에 있던 군사와 백성이 모두 도륙당한 그 아비규환이 머릿속에 가득한데 붉은 빛이 아름답게 보이겠는가. 전투가 아니어도 그랬다. 왜군 종군승려 케이넨(慶念)의 에는 남원으로 쇄도하던 왜병들의 악귀 같은 만행이 사건기사처럼 기록돼 있다. “너나없이, 남에게 뒤질세라 재보를 빼앗고 사람을 죽이며 서로 쟁탈하는 모습들,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기분이다.”(1597년 8월 4일)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인다. 그리고 산 사람은 쇠사슬로 꿴 대롱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처음 보게 되었다.”(1597년 8월 6일) 이 모든 비극은 원균의 칠천량 패전에서 비롯되었다. 호랑이 같은 조선수군이 궤멸되어 남해안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게 된 왜군은 바로 전라도 공략에 나섰다. 임진년에 진주에서 참패하고 이순신에게 짓눌렸던 한풀이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을 주축으로 한 왜적우군 6만 명은 7월 25일 울산 서생포 등 각자의 주둔지에서 밀양-거창-안의를 지나 황석산에 이르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이 주력인 좌군 5만 명은 28일 부산포 안골포 순천 등에서 하동-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쳐 올라갔다. 수군 7000명도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구례에서 좌군과 합류해 남원으로 쇄도했다. 남원성 전투와 만인의총 남원성 전투는 중과부적이었지만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의 용렬한 작전계획이 초래한 참화였다. 지키기 좋은 교룡산성을 버리고 평지성인 남원읍성에만 의지한 졸전이었다. 조선군의 건의대로 험준한 교룡산성에서 버텼다면 최소한 저항기간을 더 늘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 지원군이 오면 수성에 성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구례와 곡성을 거쳐 오면서 마치 사냥하듯 사람을 죽이고 잡아가던 왜적 병력은 5만7000명이었다. 이에 맞서는 수비군은 양원이 거느린 명나라 병사 3000명에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이끄는 조선군은 1000명을 밑돌았다. 그것도 제 군사들은 다 도망치고 남의 군사를 끌어모은 오합지졸이었다. 여기에 읍민 6000명이 전투를 도왔다지만, 그래도 6대 1의 싸움이었다. 남원성은 높이 4m 둘레 3.4km에 불과한 읍성이었다. 이 작은 성을 5만7000명의 왜군이 겹겹이 둘러쌌다.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군 1만 명은 남쪽,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군 1만4000명은 서쪽,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군 1만 명은 북쪽,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군 1만3000명은 동쪽을 에워쌌다. 물 한 방울 샐 틈도 없는 완전 봉쇄였다. 개전 나흘 만에 낙성된 남원성 전투의 경과는 유성룡의 에 자세히 나와 있다. 조선 파진군(특공대)의 일원으로 명군에 파견되었던 김효겸(金孝謙)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와 유성룡에게 자초지종을 고한 것이다. 8월 13일 왜군 선봉대 100여 명이 성 밑에 접근해 조총을 쏘아댔다. 우리 군사들은 승자소포(勝字小炮)로 응전했지만 사정거리가 짧아 미치지 못했다. 왜적은 몇 명씩 패를 지어 출동했다가 화살을 피해 밭고랑에 흩어져 숨어 총을 쏘았다. 성 위의 우리 군사 여럿이 쓰러졌다. 얼마 후 왜적 몇이 깃발을 들고 성 아래에 와서 큰 소리를 질렀다. 양원이 통역과 함께 병졸을 적진에 보냈는데, 그들이 받아온 문서는 선전포고인 약전서(約戰書)였다. 다음 날 왜군은 성을 3면에서 포위하고 우박처럼 총과 포를 쏘며 공격해왔다. 싸움이 벌어지기 전 양원은 성 밖에 빼곡히 들어찬 민가를 모두 태웠지만, 남은 흙벽과 돌담이 왜적의 방패가 되었다. 반면 성 위의 수비군은 적에게 노출되어 사상자가 속출했다. 15일 왜군은 볏단과 풀단을 무수히 만들어 밤 8시쯤 성 밖의 참호를 메우더니, 성 밑에도 쌓기 시작했다. 성보다 풀단이 높아지자 그것을 타고 넘어 성안으로 쳐들어왔다. 대혼란이 일어났다. 성안 여기저기에 불길이 치솟고 병사와 읍민들이 뒤엉켜 도망치고 숨기에 분주했다. 명나라 기병들은 말을 타고 달아나다 두 겹 세 겹 둘러싼 왜병의 총칼에 낙엽처럼 떨어져 비명을 질렀다. 양원은 호위대의 도움으로 위기를 돌파해 몇몇 수하와 함께 살아남아 제 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탈영죄로 참수되었다. 명 조정은 그 수급을 한양으로 보내 조리돌림시켰다. 유성룡은 “왜적이 양원을 알아보고 짐짓 모른 척 빠져나가게 했다는 말이 있다”고 에 썼다. 조경남의 에도 “양원이 왜적에게 성을 내주는 대신 목숨을 건졌다는 소문이 전해져 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전라병사 이복남을 비롯해 남원부사 임현(任鉉), 총병사후 정기원(鄭期遠), 별장 신호(申浩), 구례현감 이원춘(李原春) 등 9명의 장수가 분전 중 전사했다. 조명 양군 병사 4000명에 읍민 6000명 등 1만 명이 죽었다. 가망이 없게 되자 이복남은 탄약이 적군 수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분전을 독려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그의 아들 이성현(李聖賢)은 왜군에게 붙잡혀 끌려간 일본에 뿌리를 내렸다. 히데요시 고다이로(五大老)의 일원이었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그에게 자기 이름의 ‘元’자를 넣어 ‘李家元宥’로 개명시켜 녹봉 100석의 관리직을 주었다. 일본 여자와 결혼해 3남4녀를 두었던 ‘李家’ 가문은 에도시대 조선 왕족의 지류로 인정받아 녹봉 500석을 받았다. 그 후예로는 1980년대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출판국장과 아시히학생신문사(朝日学生新聞社) 사장을 지낸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가 유명하다. 그는 어려서 이왕가(李王家) 후손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뿌리 찾기 이야기를 책으로 써 화제가 되었는데, 1980년대에 한국에 와서 조상 묘에 참배했다. 케이넨은 전투가 끝난 8월 18일 일기에 “성안으로 진을 이동하다가 날이 밝아 주위를 돌아보니 길에 시체가 모래알처럼 널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고 썼다. 왜병들은 시체에서 코를 잘라 항아리와 나무통에 넣고 소금에 절여 부산으로 보냈다.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姜沆)의 에는 이때 일본에 보낸 코 상자의 높이가 “구릉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일 교룡산성에 의지했다면 어땠을까. 수비군 위치가 높고 공격군이 아래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5월 10일 남원에 부임한 양원은 왜군의 공격에 대비한다고 교룡산성 안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백성을 읍성 안으로 모아 항전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남원부사 임현은 “천험의 요새인 교룡산성을 지키지 않으면 왜적의 근거지가 됩니다. 다른 고을 백성을 거기에 들여 지킵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원은 칠천량 패전을 입에 담으며 “멍청하고 겁이 많은 그대 나라 사람들이 적을 보고 또 자멸하면 어쩔 텐가?” 하면서 교룡산성을 버리고 말았다. 피란지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사방에서 썩어가는 시신을 한곳에 모아 묻고 만인의총이라 불렀다. 시내에 있던 의총은 서원철폐령과 일제의 탄압 등으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격식 있는 예우를 받게 되었다. 왕릉에 비교될 만큼 큰 유택을 갖게 되었고 국가사적지 지위까지 얻었다. 만인의총을 둘러보고 관리소 직원에게 물으니 걸어서도 갈 만하다기에 교룡산성을 찾아 나섰다. 의총 왼쪽으로 보이는 고속도로 뒤편이 교룡산(蛟龍山)이라 했다.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 가까이 걸어 산 중턱 선국사 입구 산성 문에 당도했다. 가파른 경사에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쌓은 성벽이 옛 모습 그대로였고, 성문은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홍예문이었다. 임진년 진주성 싸움처럼 험한 산성을 등지고 군민이 일체가 되어 돌을 굴리고 끓는 물을 퍼부어가며 항전했다면, 그토록 허망하게 낙성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황석산성 전투와 백성들의 수난 황석산성 전투 기록은 남원처럼 자세하지 않다. 에는 왜군이 움직이자 “도원수를 비롯한 모든 장병들이 왜적을 피하기만 했다”라고 적혀 있다. 전주를 목표로 서진하는 길목의 목민관들에게는 “각자 알아서 흩어져 피란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영·호남 경계선에 있는 황석산에는 함양, 안음(안의), 거창, 합천, 김해, 초계, 삼가 등 7개 고을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줄잡아 7000명이 넘었으리라. “안음 현감 곽준(郭䞭)이 황석산성으로 들어가자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도 들어갔다. 그가 무인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든든히 여겼다. 그런데 왜적에게 공격을 당한 지 하루 만에 그가 도망치자 먼저 군사가 무너졌다”고 은 기록하고 있다. 에는 곽준 일가의 의연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남문으로 적이 쳐들어오자 곽준은 밤낮으로 독전했다. 울면서 계책을 청하는 아들과 사위에게 준은 이곳이 내 죽을 곳인데 무슨 계책이 있겠느냐면서 태연히 호상(胡床)에 앉아 죽임을 당했다. 두 아들(履祥, 履厚)이 시체를 부둥켜안고 왜적을 꾸짖으니 적이 함께 죽였다.” 그의 딸은 아버지가 죽고 남편(柳文虎)마저 적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목을 매 자진했다. 등 다른 기록에도 백사림의 행태가 고발되었다. 사태가 위급함을 알고 어머니와 두 첩을 줄에 매달아 밖으로 내려보내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 측 기록에도 나온다. 근세 일본의 베스트셀러 에는 백사림이 성문으로 도망쳐 나오는 그림과 함께, 그 일이 소상히 적혀 있다. 전투 상황에 대해서는 “일본병(日本兵)이 성안에 난입하니 베어지고 넘어진 조선 병사들의 피가 성안에 가득 넘쳐났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함양군수를 지낸 조종도(趙宗道)는 성문으로 들이치는 일본 세와 불을 뿜으며 싸웠으나 성문이 열린 것을 알고 자기 처자를 끌어내 한칼에 베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가 산성에 들어오기 전에 지었다는 시 한 편은 에 실려 있다. 崆峒山外生猶喜 (공동산* 밖이라면 사는 게 외려 기쁘련만) 巡遠城中死亦榮 ( 순원성* 안에서 죽는 게 또한 영광스러워) *공동산과 순원성은 파천과 순절의 고사를 지닌 중국의 산 우리 측 기록에는 황석산 전사자가 군민 500명 정도로 돼 있다. 그러나 향토사학계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7개 고을 백성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피란해온 산성에 군민이 500명밖에 안 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10년 넘게 관련 자료를 수집해 을 출간한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은 “황석산 전투는 하룻밤 전투로 조선군 500명이 죽고 왜병은 하나도 죽지 않은 이상한 전투가 아니라, 왜군 7만5000명을 상대로 5일간 치열하게 싸워 왜군을 궤멸 상태로 빠트린 전투였다”라고 저서에서 주장했다. 7개 고을에서 모여든 의병과 백성 7000명이 아녀자들까지 물과 기름을 끓이고, 노인과 아이들은 돌을 나르고 굴린 의로운 전투였다는 것이다. 우리 군민의 피해가 7000명에 이르고, 전투가 끝나고 전주에 입성한 우군 병력이 2만7000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그들의 인명피해가 엄청났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일본 측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8월 17일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를 비롯한 적장 6명이 공동으로 작성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한 내용은 이렇다. “8월 16일 조선군을 크게 꾸짖고 공격하여 산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성안에서 조선군 수급 353급을 베고, 골짜기에서 추가로 수천 명을 죽였습니다.” 성 바깥 골짜기에 피신한 백성들까지 다 죽인 것으로 볼 수 있는 문서다. 곽준 조종도 등 순절자 위패를 모신 황암사(黃巖祠)는 일제 때 폐사되었다가 2001년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황석산 기슭에 재건되었다. 홍살문 너머로 출입문이 서 있고 그 안에 사당, 그리고 그 안쪽에 석재로 감싼 커다란 봉분이 외로이 누워 있다. 사당을 찾는 이보다 그 옆 청소년수련원을 드나드는 발길이 많은 것은 황석산 전설마저 잊힌 탓이리라. 반대로 황석산은 등산객 발길이 잦은 곳이다. 전국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린 탓이겠으나, 백두대간 덕유산과 통하는 육십령과 맞닿아 있어 산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황암사에서 남강 상류 계곡을 따라 오르다 우전마을 입구에서 ‘정상 5.7km’ 이정표를 따라가면 2시간 반이면 당도할 수 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능선부에 옛 성터가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고, 무너진 곳은 근년에 다시 쌓아 온전한 험지 산성 모습을 지녔다. 산을 오르면서 남부여대 피란길에 나섰을 백성들의 수난이 떠올라 세월의 간격을 실감했다. 어찌 남부여대뿐이었겠는가. 솥단지와 이부자리에 된장독까지 끌고 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간단한 행장의 배낭 무게도 벅차 가파른 오르막길을 쉬고 또 쉬어 올랐는데, 노약자와 부녀자들 고통이 오죽했을까. 아무도 살아남지 못해 원혼들이 구천을 맴돌고 있지는 않을까…. 육십령 고개를 넘고 장수와 진안을 거쳐 전주에 당도한 우군은 남원성을 유린하고 임실을 거쳐 올라온 좌군과 세를 합쳐 전주 공략에 나선다. 그러나 공략이라 할 것도 없는 무혈입성이었다. 동남 양쪽에서 10만 대군이 닥쳐온다는 소식에 전주성내는 패닉 상태가 되었다. 명군 유격장 진우충(陳愚衷)이 수비군 병력을 이끌고 도망치자, 백성들은 돌팔매에 고기떼 흩어지듯 산지사방 흩어져 성안이 텅 비었던 것이다. 왜군은 그렇게 허무하게 전주를 손에 넣었다. 임진년부터 군량 걱정을 해결하려고 그렇게도 노리던 호남 땅이었다.
- 2017-06-30 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