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도와 99년 만에 쌍성총관부를 되찾으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청년 장수 이성계는 30년 남짓 전쟁터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백전백승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며 문하시중의 바로 아래인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까지 승승장구한다.
그동안 고려는 저물어가는 원나라의 국내 사정을 잘 아는 공민왕이 즉위해 반원(反元)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부인 노국공주의 죽음 후 정신병적 모습을 보이며 남색(男色)과 관음(觀婬) 등 변태적인 행동까지 일삼다가, 신돈에게 맡긴 개혁정치가 실패하고 공민왕까지 시해당한 후 신돈의 여종 반야의 소생인 우왕(禑王)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는 등 혼란스러웠다.
이때 중국은 원나라를 대신해 명나라가 들어섰는데 일방적으로 공민왕이 되찾은 쌍성총관부 지역, 즉 철령 이북의 땅이 원래 원나라에 속했던 땅이니 당연히 자기들이 차지해야 한다며 군사와 벼슬아치를 파견해 철령위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에 고려 조정은 대책회의를 거듭해 문하시중 최영 장군의 주장을 채택, 요동을 정벌하기로 하고 전국에 징집령을 내리는 한편, 수문하시중 이성계에게도 의견을 물어오니 이성계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요동정벌의 무모함을 역설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성계는 지나친 반대에 따른 불이익이 걱정되어 그러면 요동정벌의 시기를 식량이 풍부한 가을로 늦추자고 수정 건의했지만 최영의 주장으로 출병이 강행되어 1388년 5월, 5만 대군의 요동정벌군이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북쪽으로 향하게 된다.
정벌군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 최영은 장인은 내 곁을 지켜달라는 우왕의 간청에 서경(평양)에 남아 전쟁을 독려하는 가운데 정벌군은 압록강의 위화도에 도착했지만 강물이 불어나 진군을 못하고 이런저런 질병에 병사들이 시달리게 되자 다시 한 번 군사를 돌려달라는 회군을 건의한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속히 요동으로 진군하기만을 재촉하니 이성계는 조민수를 비롯한 장수들과 숙의 끝에 군사를 돌리기로 결심한 것이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으로 1388년 5월 22일의 일이다.
정벌군이 회군해 남하한다는 소식을 접한 우왕과 최영은 급히 진압군을 수습해 막아내고자 했으나 역부족으로 패배한다. 이후 우왕이 폐위되고 그의 아들 창왕이 즉위했으며 최영은 유배되었다가 그해 말 개경으로 압송되어 참수된다. 뿐만 아니라 창왕도 1년 반 만에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한 뒤 우왕과 창왕 모두 살해된다.
위화도 회군으로 조정을 장악한 이성계와 정도전 등은 온건 개혁파로 상징되는 정몽주를 살해하고 공양왕을 폐위시켜 유배 보내 죽인 후 이성계가 새로운 고려 국왕에 오른다(1392년 7월 17일). 이듬해 2월에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역성혁명을 완성한다.
이렇듯 고려 말 혼란기에 변방 세력인 이성계는 중앙 훈구세력인 최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후 온건 개혁을 주장하는 정몽주마저 살해하고 우왕과 창왕은 가짜이니 진짜를 세워야 한다는 폐가입진(廢假入眞) 명분으로 옹립한 공양왕마저 퇴위시킨 뒤 조선을 개국한다.
개국 후 이성계 일파는 왕 씨들을 한곳에 모아 섬을 하나 내주어 편히 살게 해주겠다고 한 뒤 모조리 수장(水葬)해버린다. 살아남은 왕 씨들은 성을 옥(玉) 씨, 전(田, 全) 씨 등으로 바꾸거나 모친의 성으로 바꿔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계는 즉위 후에는 왕건을 위한 사당을 지어주는 등 고려 유민들에게 유화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최영 장군에게는 무민(武愍) 시호를 내려주고 정몽주는 천하제일의 충신으로 받들어 올렸고, 공양왕은 군(君)에서 왕(王)으로 추봉하고 왕릉을 조성하는 등 민심을 배려하는 정책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