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보물 1호, 디지털 녹음 언어 학습기

기사입력 2018-08-13 08:43 기사수정 2018-08-13 08:43

[同年기자] 그 여자 그 남자의 물건, 추억을 소환하다

▲추억이 담긴 녹음기(박종섭 동년기자)
▲추억이 담긴 녹음기(박종섭 동년기자)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날이 있다. 분기별로 한 번씩 만나 대청소를 하는 날이다. 집 안을 한 구역씩 나누어 뒤집어놓는다. 앞뒤 베란다, 거실, 냉장고, 안방, 공부방, 그리고 창고를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이다. 그날은 창고를 정리하는 날이었다. 이사 오고 20년 가까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창고의 짐들을 거실에 펼쳐놓았다. 창고 속 상자를 열자 왕릉 속 유물이 발굴되듯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하나가 수십 년 전 나의 보물 1호였던 ‘디지털 녹음 언어 학습기’였다.

생활이 넉넉지 않았던 시절, 가족이 내 생일선물로 당시로서는 꽤 거금을 들여 구매한 물건이었다. 세월이 흘러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불현듯 눈앞에 그 보물이 나타났다. 마치 시간을 되돌려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오래전 ‘마이마이’ 같은 간편한 휴대용 물품이 나오면서 창고 속으로 들어간 듯했다.

아무튼 온 식구가 다 아는 내 보물이 나오자 탄성이 쏟아졌다. 성능도 좋아 당시로서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듣기는 물론 녹음, 재생, 그리고 듣고 싶은 부분을 누르면 같은 내용을 세 번씩 반복해주고 원어민 음성과 내 음성을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첨단기능이 장착된 멀티 플레이어였다. 이제는 낡고 볼품없는 물건이 되어버리긴 했어도 플레이 버튼을 누르니 “How are you doing?” “I’m fine. How are you?” 하며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내 젊은 시절, 꿈 많던 열정의 시대여. 그 모습으로 나는 잠시나마 돌아가 감격에 젖었다. 비록 오래되어 빗소리가 들리긴 해도 아직까지 쌩쌩한 듯했다.

그때 재단사 칼질하듯 아낌없이 물건을 버려대는 딸이 내 모습을 보며 한마디했다.

“아빠 이건 못 버리시겠지요?”

그래서 ‘내 추억의 보물 1호’는 새롭게 포장되어 다시 창고 깊숙이 보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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