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만큼 한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러시아 작가가 있을까? 그의 작품을 단 한 편도 읽지 않았다 해도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리바이벌되고 있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을 통해 젊은이들도 잘 아는 세계의 대문호다. 그가 태어나고 말년에 살았던 곳이 툴라 근처의 마을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다. 모스크바를 기점으로 남쪽으로 두 시간 남짓한 193km 지점. 툴라에서 10분이면 닿는 곳에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한적하고 고요한 툴라
톨스토이 고향을 가려면 툴라(Tula)로 가야 한다. 툴라는 모스크바를 기점으로 한 ‘황금고리 도시’ 중 한 지역. 황금고리 도시란 모스크바 근교의 역사적인 도시들을 일컫는 말로 도시들의 연결 형태가 반지 모양의 원형과 고리 형태를 이루고 있어서 붙여진 지칭이다. 툴라는 모스크바 쿠르스크(Kursk) 역을 통한다. 툴라 기차표를 살 때는 물론 기차를 탈 때도 짐과 ‘여권’을 검사한다. 툴라 기차 안에서 약간의 해프닝을 겪는다. 러시아에서 처음 해보는 기차 이동인 데다 매표소 직원이 영어를 전혀 못해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더니 침대칸을 발권해준 것. 4인용 도미토리 침대칸 중에서 2층으로 배정되었는데 침대를 이용하려면 시트가 필수다. 시트가 없어 결국 툴라까지 가는 동안 올라보지도, 누워보지도 못한 채 보조의자에 앉아 간다. 어느 새 툴라 역에 하차. 사람들이 다 사라진 역에 우두커니 혼자 서 있다가 경찰관에게 부탁해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간다. 가정집을 개조한 숙소는 시내에서 약간 비껴 있지만 귀가 먹먹할 정도로 고요하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분위기의 마당에서는 막 깎아낸 듯한 풀 냄새가 향긋하게 코끝을 스친다. 오래된 사과나무 한 그루와 앙칼진 러시안 고양이가 있는 가정집 숙소가 참 매력적이다.
툴라 중심부 크렘린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행사
숙소에서 툴라 중심부까지는 천천히 걸어 3분에서 5분 거리. 오래된 나무 가옥을 따라 호젓한 길을 걸으면 어느새 툴라 시내가 보인다. 러시아 어느 도시에나 있는 레닌 동상이 서 있고 돔 형식의 러시아 정교회 두 개 그리고 바로 크렘린(kremlin)이다. 크렘린이란 원래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러시아의 성채, 성벽을 뜻한다. 러시아 각 주(州)에는 꼭 있어 ‘크렘린’이라는 단어 하나만 알면 길 찾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툴라의 크렘린은 1540년에 완공되었는데 튼튼한 벽돌식이다. 성벽 모서리에는 나무 방어탑 아홉 개가 고깔 형태로 1km 정도 간격으로 뾰족하게 솟아 올라와 있다. 성채 내부는 크지 않지만 안정적이고 정교하다. 중앙에 대성당(1764)을 중심으로 전시관, 특산품 코너와 부속 건물들이 몇 개 더 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필자가 툴라에 머무는 동안에도 내내 축제가 열렸다.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만난 세르게이
툴라를 찾은 이유는 19세기의 러시아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Graf Tolstoy)의 고향을 찾기 위함이다. 툴라에서 남쪽 방향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 택시를 이용해도 큰 부담 없는 10분 거리다. 택시 기사가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돈을 더 치러야 했지만 여행객이라면 늘 감수해야 할 일이다. 톨스토이 고향 입구의 두어 개 난전에서 지역 특산품인 당밀과자를 팔고 있다. 나름 관광지라고 물 값이 시내의 두 배 이상이다. 포기하고 그냥 매표소로 간다. 모든 곳을 다 볼 수 있는 표를 사면 가이드 투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 언어로 들어야 하는 상황. 러시아어를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으니 가이드 투어를 하지 않아도 될 법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톨스토이 하우스 관람을 포기할 수는 없다. 잠시 벤치에 앉아 가이드를 기다리면서 만나게 된 세르게이(72). 젊은 층은 물론이고 나이 든 사람 대부분이 단 한마디 영어를 구사할 수 없는 이 나라에서 그는 영어를 잘한다. 모스크바에 사는 물리학자 세르게이는 부인과 조카가 동행인이다. 영어는 못하지만 한눈에 봐도 성격이 밝고 유머러스한 부인 타냐, 그리고 조카 표토르. 낯선 그들과 함께 톨스토이 고향 투어를 시작한다.
사과 농장이 있는 톨스토이의 고향
자작나무숲이 길게 이어지는 길 옆으로 톨스토이가 농노들을 위해 직접 심었다는 사과 농장이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20여 년간 머무르며 집필했던 ‘톨스토이의 집’은 본채와는 달리 작고 초라하다. 꼭 들여다봐야 할 공간이다. 지독하게 꼼꼼한 이 나라 사람들의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박물관 투어다. 박물관을 소중하게 지키는 것은 물론 소장품들의 인테리어가 얼마나 디테일한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톨스토이가 입던 옷, 식탁, 서재 등 그의 삶이 톨스토이 하우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질곡한 삶을 잠시 살았지만 대부분을 이 영지에서 살았다. 그리고 소설 ‘부활’, ‘어둠의 힘’ 등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는 못했다. 80세 되던 해, 부인에게 인세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10일간 기차를 타고 부인 곁을 떠났다가 7일 만에 모스크바 남부 톨스토이 역(옛 아스타포보 역)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문득 그의 말년 인생을 그린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2009)이 떠오른다. 어쨌든 톨스토이는 10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고향에서 그의 숨결과 흔적을 확인할 수 있어 행복했다.
인간미 넘치는 러시아 사람들
툴라와 톨스토이 고향이 특히 사랑스러운 이유는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사로운 마음’ 때문일 것이다. 톨스토이 고향에서 만난 세르게이는 모스크바대학교를 졸업한 후 유럽에서 물리학자로 살았고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 했다. ‘세르게이’라는 이름은 러시아에서는 흔한 이름 중 하나인데 그에게 ‘세르게이 예세닌’이라는 시인 이름을 말했더니 금세 ‘자작나무숲’이라는 시를 읊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의 낭만을 고스란히 전해주던 그. “툴라의 당밀과자는 이곳 아니면 살 수 없다”면서 생판 처음 만난 한국 여행객에서 선물로 안긴다. 또 조카 표토르는 기념품을 선물한다. 툴라까지 차를 태워주고 차를 세워 시원한 물까지 사준다. 관광지 앞이라 물 값이 비싸다고 했던 필자의 말을 기억한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과분한 선물을 받은 필자가 한 일은 고작 찍은 사진을 보내준 것뿐. 필자가 한국에 여행 오는 외국인들에게 이런 따사로운 애정을 베풀 수 있을까? 톨스토이 고향이 떠오를 때마다 ‘세르게이’ 가족이 필자에게 베풀어준 친절을 기억할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관광 안내소 스테프는 여행 중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했고 길거리에서 스치듯 만난 할머니는 영어 한마디도 못하지만 맛있는 우즈베키스탄 전통 빵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친절히 알려줬다. 크렘린 앞에서 러시아 전통 음료인 크바크(kbac)를 파는 아주머니가 시음해보라며 돈은 안 받겠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툴라에서뿐만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정 많고 인심 좋은 고령의 한국인을 닮은 러시아인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여행이 참으로 행복했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인천 공항에서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까지 직항. 9~10시간 소요.
현지 교통 툴라는 모스크바 쿠르스크 역에서 고속열차로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음식 정보 한국인 입맛에 맞는 음식들이 많다. 음식은 약간 짠 편이다. 툴라에서는 고층 건물을 이용하면 저렴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숙박 정보 인터넷 평점을 보고 예약하면 거의 실수하지 않는다. 3만 원 선이면 중상급 숙소에 머무를 수 있다. 도미토리 룸은 1만 원 이하다.
치안 정보 생각보다 안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경찰이 있기 때문.
유의사항 모스크바 외에는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은 나라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유심카드를 구입하거나 한국에서 사서 교체해야 한다.
기타 정보 러시아는 거주지 등록이 필수다. 숙소에 말하면 바로 처리해준다. 무비자 여행 기간은 60일까지. 러시아 여행 중 가장 큰 난고는 화장실이다.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따로 돈을 내야 한다. 버스터미널에서는 승차표를 보여주면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
‘하나 더하기 하니는 더 큰 하나’ 는 서울시 강서구 다문화 가족 지원센터의 슬로건 이다. 각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하하하’ 로 함축했다.
둘이 아니고 계속 하나가 되려면 동질성을 지속 시켜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국적은 분명 한국인인데 이주민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놓고 차별하려는 경향이 있다.
전라도에서 태어났어도 경상도에서 태어났어도 한국사람이 분명하듯이 이제는 좀 더 넓은 안목을 갖고 베트남에서 태어났든가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어도 대한민국의 국적이 있으면 대한민국 국민이다.
강서구 다문화 가족 지원센터에서는 다문화 축제를 개최하였다. 우리는 그간 알게 모르게 그 니라의 GNP로 그 나라 국민과 나라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다문화 축제의 현장에서는 ‘우리는 당신과 다른 이런 문화를 갖고 있어요. 우리의 문화도 아름답지만 당신의 문화도 역시 아름답네요.’ ‘우리의 음식도 맛있지만 당신네 음식도 역시 맛있어요.’ 서로 이런 격려의 말이 없어도 축제는 이미 국경을 넘어 사람과 사람의 어울림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들의 고유의상인 아오자이를 예쁘게 입고 나왔고 중국은 치파오를 입고 나왔다. 인도네시아 태국 일본 우즈베키스탄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축제를 했지만 문화의 경쟁이 아닌 서로가 잘 모르던 이국의 문화와 융합의 현장이었다. 아름다웠다. 문화에는 더 이상 국경이 없었다. 다문화 축제현장은 한마당 흥겨운 잔치판이었다.
우리국민들의 열심 있는 노력으로 당당히 대한민국은 선진국 대열에 들었고 그 결과 수많은 외국인은 ‘코리아 드림’(Korea Dream)을 꿈꾸며 이 땅으로 몰려왔다.
한때는 길림 영사관 앞에는 대한민국에 입국을 위해 심사를 받으려는 중국 동포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던 적도 있었다. 미국 영주권을 위하여 미국대사관 앞에 길게 줄지어 서서 인터뷰의 순서를 기다리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들이었다.
많은 외국인들이 까다로운 한국 입국비자를 받기위해 결혼이란 쉬운 방법을 택하였다. 혼기를 놓친 수많은 농촌 총각들은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외국인 아가씨와 결혼을 하였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 된 것 같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파경을 맞았다.
국제결혼에 대한 인프라(INFRA)가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다. 초기에 결혼하여 입국한 외국인들을 감싸 안을 그들의 문화가 없었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인천 월미도관광 특구에 가면 1905년 미국기선 ‘갤릭’ 호에 의하여 총 출항 횟수 64회 총인원 7415명의 이민 기록이 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이민 초창기의 아픈 기록이 있는 한국이민사 박물관이 있다.
살아서 장례를 치르는 아픈 이별을 하며 아메리카 드림(America Dream)을 꿈 꿨던 우리의 선조들의 노력으로 이민 1,5세대~이민 3세대가 되고, 세계 속의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곳에 집도 없는 허허벌판에 사탕수수로 움막을 짓고 고생하며 지낸 기록도 있다. 슬픈 우리의 상처들을 안고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다문화라고 하기 보다는 융합문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 같다. 우리의 고유문화가 외국의 문화와 결합되어 또 다른 문화를 창출하듯 문화는 진화 할 것이다.
문화는 일상생활에서 오는 공동의 스트레스를 공동으로 해결하는 기능이 있다. 서로 모여 정보도 교환하고 갈등도 해소 하지만 이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신경을 써야 할 문제이다.
이 문제를 신경을 써야 한다면 어떤 시선으로 볼 것인지가 중요하다. 나의 시선이면서 너의 시선이기도 한 우리의 공동시선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국문화와 이 땅의 문화가 협력하는 융합 문화이다.
문화융합의 성공이 강대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이미 그길로 들어섰다.
국내 자동심장충격기(AED) 제조전문기업 ㈜라디안이 한국디지털병원수출사업협동조합(KOHEA)이 진행하는 ‘중앙아시아 수출컨소시엄 비즈니스 로드쇼’에 초대 받아 중앙아시아 공략에 나섰다.
지난 9일부터 7일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등에서 진행된 ‘중앙아시아 수출컨소시엄 비즈니스 로드쇼’를 통해 중앙아시아로의 수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최근 한국의 의료장비·정보통신기술(ICT)은 세계적인 기술력 개발과 함께 수출의 포문을 열었다. 이어 KOHEA가 ‘중앙아시아 수출컨소시엄 비즈니스 로드쇼’를 진행하며 원격진료를 포함한 한국의 선진 의료ICT가 실크로드를 따라 기술을 전하고 있다.
이번 행사에는 ㈜라디안을 비롯해서 의료ICT 기업 바이오넷, 유일엔지니어링, 메디칼스탠다드, 비에스엘, 젬스메디칼, 아이알엠, 제윤메디컬, MMA코리아, 세광 등 10개 사가 참여해 2600만 달러(약 290억)의 상담실적을 올렸다.
라디안 관계자는 “이번 ‘2017 중앙아시아 수출컨소시엄 비즈니스 로드쇼’를 통해 현재 바이어들과 진행되고 있는 수출계약이 마무리 되는대로 한국의 자동심장충격기 기술을 세계에 전파한 소식을 전하겠다”고 밝혔다.
가르치는 재미를 몽골국제대학교에 와서 배우고 있다. 학생들과 만나는 강의명은 ‘Liberal arts through Photography-사진으로 만나는 인문학’이다. 국제대학교라 학생들뿐 아니라 교수들도 여러 나라에서 왔기에 모든 행정절차와 강의는 영어로 진행된다. 여러 나라란 몽골을 비롯한 러시아, 중국,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한국, 인도,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영국, 홍콩 등 다양하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는 다른 대학과 다른 독특한 분위기와 문화가 스며 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서로 배운다는 태도이다. 서로 호감을 갖되 존중하고 이해해야 하는 현대 국제사회에서 요구되는 자세이다. 그렇다고 이 지역 정서가 옅어지는 것은 아니다. 몽골이라는 지정학적 특징과 역사에서 우러나는 유목민적인 성격은 언제나 바닥에 녹아 있다.
지난 호에 내보낸 ‘낯선 이국에서 새 시대와 새 세대를 본다’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러한 환경에서 알게 된 시간적인 내용이었다면 이번에는 새 시대에 공간적인 새 지역을 얘기하고 싶다.
4년 전까지만 해도 난 한 번도 몽골에 들어와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다만 사진가로 몽골을 촬영할 일이 여러 번 있었을 뿐이다. 먼저 1990년대 초 세브란스병원에서 몽골에 연세친선병원을 세우는 과정에 우연히 참여하게 되는 행운으로 첫발을 딛게 되었다. 그리고 몽골 대통령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한 기업 총수의 국빈 초청 응답 선물로 몽골의 아름다움을 사진첩(Land of Lands Mongolia)으로 만들기 위해 아내와 방문하게 되었다. 그 사진첩은 국가원수의 격에 맞는 의전을 갖추어야 해서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원본 사진으로 만들어진 수제 책이다.
그리고 2005년에는 연세대학교 120주년 기념사업회로부터 ‘희석된 학교의 건학정신을 사진으로 되살려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 부합하는 기획을 준비하다가 세브란스 2회 졸업생인 이태준 열사를 찾게 되었는데 그의 활동무대가 몽골임을 어쩌랴! 그렇게 ‘이태준 선배는 왜 몽골로 갔는가’를 위해 다시 제자들과 몽골을 촬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미국 비정부기구유엔총회라 불리는 인터랙션대회에서 대상을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몽골 양로원에서 촬영한 사진 ‘Such wealth and such freedom’이다. 그리고 사람뿐 아니라 가축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몽골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낙타의 눈물’ 스틸을 촬영하게 되었으며, 미국 캘리포니아 어바인시 파인 아트 홀과 우리나라 안양시의 알바로 시자 홀에서 연 휴먼다큐 를 준비하기 위해 몽골과 또 인연이 생겼다. 이렇게 되짚어보면 몽골에 대한 인연이 특별히 많게 보이지만, 사실 몽골만 많이 다닌 건 아니다. 따져보면 어느 나란들 그렇게 안 다녔으랴! 사진가라는 직업이 그렇게 세상을 많이 다니는 게 일이다.
몽골이 중앙아시아의 시작 지역이란 얘기를 꺼내기 위한 얘기가 길어졌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나라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나라들이다. 그래서 그동안 나는 몽골보단 ‘스탄’으로 끝나는 실크로드 천산북로로 이어진 중앙아시아 나라들을 몽골만큼이나 많이 다녔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으로 연결되어 유럽과 닿는 아시아의 서쪽 끝 보스포루스 해협이 관통하는 이스탄불까지.
또 다른 길도 다녔다. 천산 아래 중국 시안(西安), 신장 위구르 자치지역 북서쪽 파미르 고원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가 카라코람 하이웨이, 훈자왕국을 지나 라호르와 이슬라마바드, 그리고 인도 중동 나라들과 만나는 옛 동로마제국 터키에 닿는 길에 만나게 되는 나라들. 그 중앙아시아 나라들을 생각하면 어렸을 때부터 왠지 가슴이 뛰었고 지금도 맥박이 빨라진다.
이 나라들을 꿈꾸고 가까이 보기 위해 난 몽골로 왔다. 대한민국 우리나라에서 보면 이 나라들이 시작되는 곳 중 하나가 몽골인 것이다. 오늘의 몽골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그리고 내몽골의 중국과 맞닿아 있다. 러시아를 부를 때는 시베리아라는 러시아 지역 이름이 난 더 좋다. 거기엔 몽골의 홉스굴 호수와 연결된 바이칼이 있고, 우리와 얼굴과 정서가 많이 닮은 민족들이 살고 있다.
길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관심으로 퍼지며 피어난다. 앞에서 얘기한 중앙아시아 나라들과 우리를 이어줬던 길들이 소위 실크로드란 이름으로 세상에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많고 어떤 길보다 큰 길이었던 실크로드는 근세 서양 문명의 휘황찬란한 빛에 오랫동안 가려졌었다. 근세 대서양과 태평양 길의 번성으로 사람들에게 잊혔다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여기 몽골에선 분명히 보인다. 그 길을 따라 큰 기운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를 떠나 있는 한국 사진가이기에 보이는 것이다.
새 시대는 공간도 시간과 함께 드러난다. 이제 가려졌던 길이 드러나면서 그 공간의 시간도 새롭게 조명될 것이다. 공간의 시간은 역사로 살아난다. 역사는 서로 다른 가치가 만나 각축하는 실질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덮였던 시간이 오랠수록, 드러나는 공간은 경이로울 수밖에 없다. 그 길과 연결된 나라들이 각자의 역사와 함께 깨어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새 세대는 그 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직까지 너와 나를 가르는 남의 역사에서 이제 우리를 아우르는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려고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혹여 잃어버린 것이 소리에 있나 하고 음악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연극을 하며, 각자 열심이듯 나도 잃은 것이 있나, 있다면 그것을 찾아보려고 여기에서 사진작업 중이다. 실크로드의 나라들이 깨어나듯이 나도 새롭게 깨어나고 있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랙션대회(NGO의 유엔총회)에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수십 년에 걸친 오랜 회사 생활. 규율과 답답함으로 채워진 오랜 시간을 보낸 끝에 마침내 은퇴한 남자는 그동안 품었던 꿈과 모험을 즐기기 위해 과감한 도전을 시도한다. 소설과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다. 꿈과 모험과 도전의 이야기가 예술작품의 소재로 끊임없이 사용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길 그토록 열망하지만 막상 실현시킨 사람들은 그만큼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문광수(文光洙·72)씨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래서 68세의 나이에 바이크 면허를 땄다. 그가 향한 곳은 유라시아. 일흔이 넘어 스스로 ‘철이 들었다’고 말하는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바이크 면허는 많이 떨어졌어요. 처음에는 배우다가 다리를 다쳐서 집에서 난리가 났고 일 년을 쉬어야 했죠. 몸이 나았을 때 아내 몰래 다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멀쩡한 양반이 별 약속도 없는 거 같은데 아침 일찍 어딘가로 가니까 아내가 수상하게 여겼어요. 그것도 한 번에 합격했으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자꾸 떨어지니까(웃음).”
새한정보 대표이사로 은퇴한 후 문광수씨가 바이크 면허를 딴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바로 바이크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고 싶어서였다.
바이크 면허를 따기 위한 좌충우돌
“꿈은 이뤄지든 이뤄지지 않든 갖는 거니까. 면허 합격이 되자마자 바이크를 몰래 중고로 하나 샀어요. 집에는 가져가기가 뭐하니까 바이크 가게에 일 년간 보관하면서 연습할 때 썼죠. 그러고 보니 면허 취득부터 계산하면 바이크를 제대로 타는 데 한 삼 년 걸렸네요.”
마침내 바이크를 집으로 가져 오게 됐을 때 아내에게 들키는 게 두려웠다. 할 수 없이 옆 동에 세워놓고 경비에게 막걸리를 사주면서 잘 좀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바이크를 집 근처에 갖다놓으니 자꾸 보고 싶은 마음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주일 만에 들켰어요. 매일 사라졌다가 한 시간 있다가 들어오곤 하니까 아내가 의심한 거죠. 참 여자의 육감은 대단해.”
어느 날 바이크 덮개가 벗겨져 있었다. 누가 바이크를 건드렸나 해서 경비실 CCTV 영상을 확인해보니 그의 아내가 바이크 쪽으로 가까이 가더니 덮개를 탁 하고 벗겨내는 게 보였다. 별 수 없었다. 이실직고하는 수밖에.
계획, 예약, 기약 없는 유라시아 횡단의 시작
문씨는 얼마 전 바이크로 유라시아 횡단을 마쳤다. 장장 3개월에 걸친 여행이었고, EBS에서 촬영을 마친 상태라고 했다(인터뷰를 한 시점에는 10월 17일 프로그램에서 4일간 방영 예정이라고 했다).
“연습하고 훈련하고…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까지 갈 예정이었는데, 처음 가보는 길이라서 계획이란 건 있을 수 없었고, 얼마만큼 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 뭔가를 예약할 수도 없었고, 직접 가봐야 모든 걸 알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가 어떠한 계획도 없이 오로지 바이크에 의지해 유라시아를 횡단하겠다는 엄청난 계획을 세운 것은 자신의 신념 때문이었다.
“바이크 자체가 자유니까, 아주 자유롭고 낭만적인 여행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아무 계획 없이, 예약 없이, 기약 없이 홀로 유럽으로 떠나자는 거였죠.”
바이크 여행 계획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이스캠프는 있어야 했으므로 세이브칠드런에 있는 친구에게만 베이스캠프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고등학교 모임에서 그 얘기를 터뜨려버렸다.
“처음에는 저 혼자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나도 따라가면 안 되나’ 하면서 두 명의 동창이 적극 관심을 보였어요. 바이크 탈 줄 아냐고 물어봤지요. 탈 줄 모르면 못 간다 했죠. 그랬더니 당장 배우겠다더군요. 그 친구들은 2개월 만에 면허를 땄어요.”
여행 중에 닥쳤던 위기들
아무 계획 없이 떠난 바이크 여행. 당연히 아무 사건 없이 진행될 리 없었다. 한 열흘쯤 지났을까 친구 한 명이 어깨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어쩔 수 없이 친구를 비행기로 귀국시키고 남은 두 사람만 바이크에 몸을 실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바이크가 고장이 났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문씨가 운영하는 블로그 이웃이 크로아티아에 살고 있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여성분이었는데, 슬로베니아에 살고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마침 이분 남편이 슬로베니아 현지인이었는데 엔지니어였죠. 그분이 도와주셔서 바이크를 다시 탈 수 있게 됐어요.”
언어의 문제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 나라 말을 잘하면 좋겠죠. 안 그래도 걱정을 했는데, 여행을 시작하기 전 호주에서 한 부부를 만났어요. 그들도 바이크를 모는 부부였죠. 영어를 잘해서 부럽다고 했더니 ‘너는 한국말을 잘하지 않냐, 러시아에 가면 너나나나 말 안 통한다, 보디랭귀지가 최고다, 언어는 하다 보면 느는 거니 일단 가봐라’ 하면서 용기를 주더군요. 많은 위안이 됐습니다. 여행자들의 커뮤니케이션은 한계가 있어요. 결국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니까요. ‘어디서 왔니? 어디로 가니? 가족은 어떻게 되니?’ 그 정도예요. 질문들이 비슷비슷하니까 나중에는 제가 먼저 묻게 됐어요(웃음).”
바이크 여행은 자유와 낭만이다
문씨는 자신이 숨기는 게 없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자신의 성격이 인간적인 매력을 덜 느끼게 만든다고 안타까워했지만, 여행지와 같은 낯선 장소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특별한 강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에게 보통의 여행과 바이크 여행의 차이를 물어봤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여행은 안방 여행이라고 봐요. 그에 비하면 바이크 여행은 아웃도어죠.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놓는다는 점에서 자연친화적이고, 그야말로 자유롭고 낭만적인 여행입니다. 제가 원래 체질이 좀 야생이어서 제 성향에 잘 맞는 거 같아요.”
그는 바이크 여행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두려워하지도 말고 주저하지도 말라고 충고했다. 그의 신념은 ‘무작정 출발해라’다.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다 똑같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바이크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저는 바이크 전문가는 아니지만 바이크를 타고 여행하면서 매스컴이 올바른 정보를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바이크만큼 훌륭한 스토리를 가질 수 있는 여행이 없어요. 유럽에서는 바이크 뒤에 부인을 태우고 다닙니다. 뉘엿뉘엿 해가 지는 시골길을 바이크를 타고 천천히 감상하는 일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바이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해요. 낭만과 자유의 상징으로서 바이크의 좋은 점들을 알려줬으면 해요.”
이제 파미르 고원을 달려보고 싶다
문씨의 기질은 역시 야생이 맞는 것 같다. 바이크뿐만 아니라 암벽등반에서도 화려한 흔적을 남겼다.
“저는 삼성에서 30년 동안 쉬지 않고 일만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정말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은 욕구가 늘 가슴에 차 있었어요. 일곱 시까지 정확히 출근해야 하고 넥타이를 맨 정장을 반드시 입어야 하는 게 직장생활의 기본이죠. 그런 생활을 30년 가까이 했으니 얼마나 자유가 그리웠겠습니까. 은퇴 후 예순의 나이에 뭘 할까 고민하다가 대학 때 잠깐 해봤던 암벽등반이 생각나서 입문하게 됐죠. 암벽 전문가인 박준규 클라이머를 찾아가서 사사받았어요. 5년간 굉장히 열심히 했죠.”
설악산에는 암벽등반가를 위한 대표적인 바위가 두 개 있다. 바로 인수봉과 적벽이다. 그중 적벽에서 등반할 수 있는 루트 중 하나는 문광수씨가 개척한 길이다. 이름은 777. 2007년 7월 7일에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박준규씨를 통해 국내 정상급 클라이머로 인정받은 그는 65세의 나이에 국내 최고의 전문 등산학교 익스트림라이더의 교장으로 초빙됐다. 바이크로 유라시아를 횡단한 것이 전혀 놀랍지 않을 전적이다.
“요즘은 중앙아시아가 매력적이에요. 특히 지구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파미르 고원을 가고 싶습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키스탄, 중국, 파키스탄이 맞닿는 곳이고 과거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했던 곳이죠. 신라시대 때 혜초 스님이 갔던 길을 따라가는 게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친구와 함께 뛰었으면 좋았을 텐데”
“보통 사람들처럼 열심히 살아왔고 나름대로 잘살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여행을 하고 보니 그리 잘살아온 것 같지 않더군요.”
문씨는 한국 최고의 대기업에서 임원 자리에까지 오른 비교적 괜찮은 삶을 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공적’인 삶이라고 평가해주는 인생이지만, 정작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행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풍경들을 경험하면서부터다. 오직 하나의 틀에만 맞춘 삶을 살다가 무한히 열려 있는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경험하면서 그의 생각은 많이 달라진 듯했다.
“여행하면서 나름대로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돼요. 밤에는 철저히 혼자잖아요. 혼자 있으면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그러다가 자기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반성도 하게 되고… 제가 너무 건방진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과거에 그토록 정신없이 뛸 때, 친구의 손목도 잡고 함께 뛰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남은 여생은 정말 겸손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나이 들면서 이제야 철이 드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