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침이 좋습니다. 그래서 늦잠을 자지 못합니다. 아예 밤의 끝자락에서 깨어 눈을 바짝 뜨고 새벽을, 아침을, 기다립니다. 때로 밤을 새우기도 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각이 들쑥날쑥하긴 하지만 대체로 남보다 더 많이 자는 셈인데 일어나는 시각은 늘 새벽 4시쯤입니다.
이러한 저를 보고 기가 차서 말을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아니, 꽤
반려견, 아니면 더 넓게 반려동물에 대한 사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학생은 제대하고 복학한 친구인데, 수업시간에 ‘관계’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다 자기가 키우던 개가 죽은 이야기를 하면서 글자 그대로 엉엉 울었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고 묻자 다섯 달 전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예를 제가 사는 아파트 이웃에서도 들었습니
글 정진홍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비에 흠뻑 젖어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추워 귀가 떨어져나가는 것 같아도 그랬습니다. 집에 가면 마른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고, 따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언짢은 일이 있어도 집에 가면 마음이 편했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편이었으니까요. 어렸을 적에 집은 그랬습니다. 걱정이 없는 공간, 집을 그렇게 지금
‘돈에 얽매이지 않는 삶’이라고 제 글의 주제를 잡았습니다만 실은 이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 말입니다. 무릇 우리의 삶에서 돈이란 그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돈은 생존을 위해 갖춰야 하는 거의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돈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하루도, 한시도 살지 못한다고 해도 과장일 수 없는 그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에서 자유롭기를 바란다는 것은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린다면 안 마시는 것이 아니라 못 먹습니다. 대체로 제 이러한 태도에 대한 반응은 그 까닭이 종교적인 데 있으리라는 짐작으로 채색됩니다. 그래서 때로 저는 뜻밖에도 힘들게 순수를 유지하는 경건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짐작이 저를 겨냥하는 것을 넘어 제가 속한 종교와 그 교조와 그 종교의 신에 대한 격한
어렸을 때 일입니다. 참 만화가 좋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아무래도 더 부연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를테면 슬픈 이야기인데도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위다(Ouida)의 소설 를 동화책으로 ‘읽었’는데, 얼마 뒤에 만화로 다시 ‘보았’습니다. 감동은 다르지 않았는데 동화를 읽으면서 잔잔하게 스미던 안쓰러움이 만화에서는 거의 ‘쿵
아직도 이 나이에 ‘부러운 것이 있다’면 모두들 웃겠지만 저는 저리게 부러운 것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내가 갖고 싶었는데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도 부럽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딱히 물건이면 어떻게 해서든 나도 그것을 마련하여 아쉬움을 채우고는 부러움을 지울 수 있겠는데, 제가 지닌 부러움은 그렇게 할 수 없는 부러움입니다.
계절은 색깔을 지닙니다. 우리 다 아는 일입니다. 봄은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지가 연한 녹색을 띨 때부터 스미는 것 같습니다. 여름은 아예 온 세상이 진한 녹색입니다. 그러다가 가을이면 서서히 황갈색으로 대지가 물들여지면서 마침내 겨울은 다시 온 세상이 흰색으로 덮입니다. 당연히 이런 색칠은 사람 따라 다릅니다. 하지만 철이 서로 다른 색깔로 채색된다는 사
달력에 빨간 글자로 적힌 쉬는 날들이 많으면 사람들이 모두 좋아합니다. 놀 수 있으니까요. 자칫 질식할 것 같았는데 ‘숨통이 트인다’는 사람도 있으니 그 좋음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 정말 누구나 그렇게 좋아할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사사로운 것이긴 합니다만 저는 젊었을 때부터 명절을 포함한 쉬는 날이 두려웠습니다. 현실적
사람이 털북숭이가 아닌 다음에야 살갗을 다치지 않기 위해 옷을 입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나아가 추위와 더위를 견디기 위해 거기에 맞는 옷을 마련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사람이 원숭이가 아닌 다음에야 질기고 편하고 보기 좋은 옷을 입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도 마땅한 일입니다. 하물며 사람인데 자기에게, 그리고 경우에 따라, 잘 어울리는 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