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진홍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비에 흠뻑 젖어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추워 귀가 떨어져나가는 것 같아도 그랬습니다. 집에 가면 마른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고, 따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언짢은 일이 있어도 집에 가면 마음이 편했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편이었으니까요. 어렸을 적에 집은 그랬습니다. 걱정이 없는 공간, 집을 그렇게 지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늘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집의 소멸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은 집[家屋]도 집[家庭]도 산산이 부숴버렸습니다. 나는 집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지면 으레 집에 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마음은 서두는데 막상 일어서면 망연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갈 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이 얼마나 저렸던지 나중에 내 집을 지니고 잠자리에 들면서도 ‘어서 집에 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다고 딱히 말할 수는 없지만 이래저래 집을 꾸리고 장만하는 일은 내 삶의 목표이기도 했고 삶 자체이기도 했습니다. 집 한 칸도 없으면서, 나는 친구들보다 먼저 집을 꾸렸습니다. 둘 다 눈이 멀어서 그랬겠지만 아무튼 집은 둘이서 함께 장만하면 되지 않느냐는 사랑하는 여인의 말에 감동해서 벌컥 일을 저지른 셈인데 집 장만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쉽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집 장만 하느라 우리 둘의 세월을 다 보냈다고 해야 할 만큼 힘이 들었습니다. 셋방살이조차 방 넷에 부엌이 세 개인 산등성이 무허가 주택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꼽아보니 그 뒤로 정확하게 14번째 집에서 지금 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집을 살아가면서’ 어줍지만 집을 나 나름대로 다듬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집은 지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집은 머무는 곳입니다. 하기야 집뿐이겠습니까? 세상의 어느 것도 누가 그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처럼 어리석고 딱한 사람이 따로 없다고 나는 가끔 생각합니다. 실은 나도 별 차이가 없지만 나는 ‘소유라는 착각’, 그것의 비극성을 언제나 잊지 않으려고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이곤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을 자기 것이라 여겨 그것을 자기가 누릴 영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거개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집도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집이란 자기가 살 영원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한 온갖 정성을 집을 장만하고 집을 짓고 집을 꾸미는 데에 쏟아 붓습니다. 참 좋고 부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기술한 ‘집의 생애사’ 또는 ‘집의 편력’이 개인의 독백만이 아니라 어쩌면 ‘집 경험의 보편성’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유념한다면 ‘지니는 것으로서의 집’이 아닌 ‘머무는 곳으로서의 집’을 생각하면서 집에다 쏟아 붓는 정성을 조금은 ‘절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소유의식의 과잉은 사치를 낳습니다. 그리고 사치라는 이름의 넘침은 늘 일컫듯 모자람만 못합니다. ‘지님의 의식’이 아닌 ‘머묾의 의식’은 그 사치를 억제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집은 그저 ‘웬만하면’ 된다는 자족감으로 행복할 수 있어야지 내 것이니까 완벽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골똘하면 뜻밖에 삶의 많은 부분을 나도 모르게 잃어버릴 수도 있게 된다는 생각이 집에 대한 나의 이해입니다.
그렇다면 집과 더불어 주목할 것은 그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집의 삶’입니다. 디자인을 공부한 친구는 젊었을 때 나중에 자기는 자궁(子宮)과 같이 생긴 집을 짓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까닭을 묻자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원초적인 평온(平溫)함 안에 머물고 싶으니까!” 평온을 일게 하지 못하는 집은 집이 아닙니다. 평온이 담기지 않으면 그 집은 집이 아닙니다. 집이 있어도 집은 없습니다.
세상의 집들은 참 여러 모습입니다. 인도네시아의 시골에서 어느 집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여러 개의 기둥들이 세워져 있고 거기 거의 투명한 발이 처져 있어 방과 방을 구분한 그런 집이었습니다. 그래야 바람이 시원하게 드나들겠지만 사사로운 공간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당연하게 부부간의 은밀한 사랑을 어떻게 나누느냐고 물었을 때 그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꼭 집에서 나눠야 하나요?” 우리가 이해하는 집 안에서의 삶이 집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타이완의 한 고산족 집은 기어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집 안에서는 일어나 걷지 못합니다. 천장이 낮으니까요. 불편하지 않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집 안에 들어와서도 일어나 걸을 필요가 있나요?” 집은 오로지 누워 휴식하는 공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삶은 집보다 훨씬 넓고 높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몽골의 집 게르[包]는 둥근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옆으로 새어 흘러 집이 날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니면 이동하기 좋도록 한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오랜 세월의 지혜가 낳은 건축 기술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에스키모의 얼음집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도 전통적인 집들이 원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람도 심하게 불지 않고 이동할 필요가 없는 곳인데도 둥근 집에서 삽니다. 둥근 집의 산재(散在) 현상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문화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둥근 집을 설명하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모퉁이, 모서리, 구석에는 못된 귀신이 깃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귀신이 집안 식구들을 병들게 하고 다투게 하고 온갖 못된 짓을 다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것을 피하려면 모서리나 모퉁이나 구석이 없는 둥근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차피 집을 꾸리고 집을 짓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집을 장만하느라 허리가 휘인 채 한살이가 훌쩍 지납니다. 겨우 집을 장만해놓았더니 꾸린 식구들이 훌훌 떠나가 텅 빈 집을 마련하느라 이렇게 힘들었나 싶기도 합니다. 애써 온갖 치장을 다하여 이상적인 집을 가꿨나 싶은데 이제는 내가 모든 것 버리고 떠나가야 할 때가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노력이나 정성이 허무한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내 집에 모퉁이나 그늘진 구석이 없는 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집을 마련하려면 모퉁이 없는 둥근 집을 마련하십시오. 집을 꾸리려면 구석이 없는 환한 집을 꾸리십시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