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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을 덕으로 바꾸는 지혜
- 벌써 1년 전의 일이다. 2012년 12월 21일 경주힐튼호텔에서 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토론회장은 600명의 사람들로 열기가 가득했다. 여느 학술대회와 달리 촌부와 촌로 등 장삼이사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이 학술대회는 우리나라에서 수백년 동안 존경받는 부자로 꼽힌 경주 최부자 학술 심포지엄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식당으로 참가자들이 이동했다. 600여 ‘과객(?)’들이 길게 행렬을 이룬 채 뷔페 음식을 먹기 위해 줄을 섰다. 나 또한 그 행렬의 일원이 되었다. ‘경주시민, 또 전국에서 찾아온 과객들이 이렇게 많이 모일 수 있다니….’ 나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1947년 이후 사라졌던 최부잣집의 사랑채 온정을 마치 65년 만에 다시 보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덕의 힘’을 실감했다. 최부자의 후손인 최염(경주최씨중앙종친회 회장)씨는 “어쩌면 9대 진사 12대 부자였던 경주 최부잣집의 ‘마지막 과객 접대’인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경주 최부자는 1947년 9월 22일 대구대 설립에 전 재산을 기부함으로써 400년에 걸친 부의 대물림을 마감했다. 최부잣집의 토대를 세운 최국선(1631~1681)은 처음부터 존경받는 부자는 아니었다. 최국선도 처음에는 당시 관행대로 8할의 소작료를 받거나 보릿고개에 양식을 빌려주고 2배를 받는 장리를 놓았다. 어느 날 도적질을 일삼던 ‘명화적’이 횃불을 들고 집에 쳐들어왔다. 횃불을 들고 집에 쳐들어왔다는 것은 신분 노출을 작심한 것이다. 최국선은 이때 큰 충격을 받았다. 명화적에는 소작농과 그 아들들, 종들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들은 양식은 안 가져가고 장리를 빌려간 증표인 채권 서류들만 가져갔다. 명화적의 침입을 받은 다음 날 아침 친척들과 가복들은 명화적에 가담한 배은망덕한 놈들을 잡아 처벌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모두 처단해야 한다는 말에 최국선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다. 남은 채권 문서를 그냥 모두 돌려주어라. 도적질한 것 역시 불문에 부친다.” 최국선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80% 이상 받던 소작료도 50%로 전격 인하했다. 이는 당시엔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위기를 맞자 최국선은 부를 더 ‘축적’하는 데 골몰하지 않고 그 반대로 부를 ‘분배’하는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리더에게 요구되는 결정적 국면 전환이었다. 이로 인해 경주 최부잣집은 이후 300년 동안 새로운 부자의 패러다임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결코 보여주어서는 안 되는 것은 눈앞의 이익을 탐하는 인색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반발 심리로 인해 되레 자녀를 방탕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러시아의 거장 도스토옙스키가 그랬다. 돈이 생기면 펑펑 썼고 도박으로 날렸다. 덕은 오래가지만 돈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부자라면 돈을 덕으로 바꿀 줄 알아야 하고, 특히 이를 자식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최염 옹은 할아버지 비서 역할을 하면서 직접 보고 자랐다. 직접 가르쳐주지 않아도 등 너머로 배우기 마련이다.
- 2014-01-2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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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문가를 이룬다는 것은 여러 세대 간의 공동 작업
- 요즘 ‘폭풍성적’이란 말이 있다. 부모들은 자녀를 키우면서 성적이 폭풍처럼 올라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런데 모든 일이 그렇듯이 조급함은 대세를 그르친다. 서두르면 결코 큰일을 이루지 못하는 법이다. 서두르면 지는 거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이 조급하게 ‘폭풍성적’을 바라는 것일 게다. 그러나 폭풍성적은 요행을 바라는 것과 진배없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미국의 케네디가(家)만큼 교훈을 주는 가문도 없다. 보잘것없는 아일랜드 농부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 가문에서 4대 110년 만에 대통령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선조는 당시 아일랜드를 휩쓴 감자 대기근으로 여비조차 없어 이웃에 빌려 야반도주하듯 아일랜드를 떠났다. 물론 돈을 갚았을 턱이 없다. 그러나 이후 케네디가의 행적은 다르다. 케네디가의 가장 큰 성공 비결은 바로 부모가 한 가문의 CEO가 되어, 세대를 이어가는 단계적 시나리오를 세웠다는 것이다. 명문가를 이룬다는 것은 여러 세대 간의 공동 작업이지 결코 한 세대가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케네디가의 이야기는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패트릭 케네디, 즉 케네디 대통령의 증조부(1대)가 미국에 이민을 오면서 역사가 시작된다. 증조부는 이민의 고단함 때문인지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케네디의 할아버지·2대)은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술통 장사를 하면서 생계전선에 나섰다. 점차 주위에서 신망을 얻자 급기야 주의원에 당선되었고 정치가로의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다. 이어 3대인 케네디 아버지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후 은행장, 사업가, 외교관을 걸쳐 루스벨트 대통령의 후원회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정치 가문으로서의 기반을 닦아 주게 된다. 그리고 그 무대에 오른 이들은 바로 미국 역사를 뒤흔든 케네디의 4형제였다. 존 F. 케네디는 최연소 미국 대통령이 되었고, 그 형제들 역시 미국을 대표하는 정치가가 되었다. 그리고 현재 케네디가의 자녀들 역시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명문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케네디가를 큰 시나리오로 보면, 1대는 생활의 터전 준비, 2대는 경제력 기반 준비, 3대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인적 네트워크 구축 그리고 4대는 가문의 비전 실현이라는 큰 그림이 나온다. 이 큰 시나리오 중심에는 ‘케네디 가문의 기획자’와 같은 역할을 담당한 케네디 할아버지가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어떤 분야에서든 ‘최고가 되기 위해 늘 일등을 하라’고 강조했는데 이는 가난한 아일랜드계 후손이 미국 사회에서 당당하게 인정받으려면 오로지 최고가 되어야만 했던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에서 케네디 가문을 들여다보면 가슴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아무리 가난해도 세대를 이어 서두르지 않고 노력하면 누구나 숭고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계속)
- 2014-01-2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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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지로 하게 하는 것도 부모의 역할?… 케네디 家
- 케네디가의 자녀교육을 말할 때 식사시간을 활용한 토론교육도 빼놓을 수 없다. 4남5녀의 자녀를 둔 어머니 로즈 여사는 식사시간을 엄수하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았다. 이는 아이들에게 약속과 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식사시간에는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읽고 토론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케네디는 중·고교시절 공부를 등한시해도 신문 읽기만은 빼먹지 않았다. 케네디는 초트스쿨에 다닐 때에도 학교 기숙사에서 뉴욕타임스를 정기 구독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이끈 신문 읽기 습관을 평생 습관으로 만든 것이다. 케네디가 훗날 대통령 선거에서 토론을 잘할 수 있었던 것은 신문을 보면서 시사에 밝았던 게 한몫했던 것이다. 그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매일 신문을 읽었는데 그게 케네디의 ‘비밀병기’였던 셈이다. 당시 초트 교장선생은 “언뜻 보기에도 교과서 뒤적이는 건 뒷전인 게 분명한데 세상사에 관한 소식통으로는 자기 학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학생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케네디가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뿐만 아니라 예체능도 열심히 하게 했다. 한 번은 셋째 딸 유니스가 다른 사람 앞에서 춤을 추는 게 창피하다며 일주일에 한 번씩 받는 댄스교습이 싫다고 했다. 그때 로즈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유니스야, 세상에는 하고 싶은 일보다 하기 싫은 일을 할 때가 더 많단다. 지금은 필요 없는 것 같지만 나중에 필요할 때가 온단다. 지금 춤을 배워두면 나중에 네가 커서 내 말대로 배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올 거야.” 유니스는 어머니의 말대로 춤이 싫어도 참고 계속 배웠다. 나중에는 춤을 잘 추게 되었고 덩달아 자신감도 생겼다. 어머니 로즈여사는 자녀들에게 수영, 테니스, 골프 교습도 시켰다. 아이들은 짜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계획대로 따라한 결과 훗날 소중한 재산이 되었다. 만약 케네디 대통령이 어린 시절 수영교습을 받지 않았다면 태평양에서 그가 탄 전함이 침몰했을 때 다른 사람을 구출하기는커녕 자신의 목숨도 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기 싫었던 수영이 훗날 그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운동이나 음악 등을 하기 싫어도 어린 시절 익히고 실력을 다져놓으면 나중에 크게 쓰일 수 있다. 케네디가의 로즈 여사는 그 사실을 중시하고 자녀교육을 이끌었다.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시켜선 안 된다.”, “아니다, 억지로라도 시켜야 한다.” 이 명제는 자녀교육에서 오래된 논쟁 가운데 하나다. 두 주장 가운데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쉽게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 로즈 여사는 자녀들에게 “처음에는 서툴러도 열심히 반복하다 보면 나중에는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또 “세계의 운명은 좋든 싫든 자기의 생각을 남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게 로즈 여사의 지론이었다. 중요한 것은 부모의 확고한 신념과 원칙이다.
- 2014-01-2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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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견 갖지말고 실용학문 힘써라 '고산 윤선도家'
- 전남 해남읍 연동리에 가면 마치 오래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듯한 고풍스러운 담장 길을 만날 수 있다. 바로 400년이나 된 종가 뒤 비자나무 숲속으로 가는 담장 길이다. 여행의 묘미는 앞에 보이는 것을 구경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을 찾아보는 재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녹우당의 담장 길을 거닐며 비자나무 숲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를 듣는 것은 이곳 여행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어부사시사’로 잘 알려진 고산 윤선도(1587-1671)는 칠순이 넘도록 유배지에서 고생하며 고난을 견뎌낸 인물이기도 하다. 무려 15년 동안 유배를 당한 윤선도는 유배기간의 ‘강요된 은둔’ 속에서도 세상을 밝히는 주옥같은 시들을 남겼다. 고산은 보길도에서 은자 생활을 하다가 85세 때 부용동에서 세상을 떴다. 필자는 몇 년 전 2월 봄방학 때 아들과 함께 보길도를 도보 여행한 적이 있다. 2월의 추운 날씨인데도 보길도와 해남 그리고 땅끝마을 등에는 동백나무가 빨간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과 해풍을 견뎌내고 피워낸 동백의 기품과 자연의 섭리에 겸손한 마음마저 들게 했다. 고산은 유배 등 정치적 고난을 이겨내고 실용학문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고산은 당시의 사대부로서는 거들떠보지 않던 의학, 천문, 지리, 점성술, 음악, 미술 등을 두루 섭렵했다. 그래서 녹우당은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접할 수 있는 ‘잡학 도서관’ 역할을 했다. 후손뿐만 아니라 인근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었다. 윤선도는 이러한 학문을 연구했을 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이를 직접 응용했다. 그는 한의학에 정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약을 처방해 주기도 했다. 녹우당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그중 하나가 ‘노학암(老學岩)’이다. ‘늙도록 배움이 있는 방’이라는 뜻이다. 고산 윤선도 가에 내려오는 공부법은 바로 오늘날에도 주목받고 있는 ‘자기주도적 공부법’이다. 고산의 삶과 학문 세계는 그의 후손들에게 삶의 지침과 등불이 되었다. 자녀교육은 바로 그의 주도적 삶이 교훈이 되고 가르침이 되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 불우한 생을 산 고산은 후손들에게는 가능하면 정치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말고 대신 실용적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이게 바로 고산 가에 내려오고 있는 공부법으로 ‘직업에 편견을 갖지 말고 실용적 학문에 힘써라’이다. 이러한 삶의 지침은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 시대에도 일부 학부모들은 여전히 법관이나 의사 등 직업이나 명문대만을 고집한다. 하물며 신분 질서가 공고하게 작동했던 시대에 실용학문이나 직업을 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후손들은 녹우당에 있는 수많은 서적을 보면서 자신의 갈 길을 찾았다. 결국 윤선도와 같은 학자를 배출한 집안에서 윤두서-윤덕희-윤용 등 3대에 걸쳐 화가가 나왔다. 자녀와 함께 나들이할 기회가 있다면 실용적이고 개방적 문화를 대대로 이어오고 있는 해남의 녹우당을 찾아보자.
- 2014-01-29 1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