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라고 담임선생님에게서 배운 기억이 난다. 같은 반도국가이고 두 나라 국민들이 노래를 즐겨 부른다는 등. 그래서 이탈리아는 왠지 가깝게 느껴지는 나라였다. 그런데 1960년대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코리아’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을 연달아 경험하게 된다.
한국의 김기수는 1966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인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벤베누티(국내 스포츠 팬들에게는 애칭인 니노로 알려져 있다)에게 도전했다. 벤베누티는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금메달리스트로, 복싱 실력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당시 세계 동급 최강이었고 외모 또한 준수해 지금으로 치면 ‘꽃미남’이었다. 이탈리아 스포츠 팬, 특히 여성 팬의 우상이었다. 그런 벤베누티가 동양 여행 삼아 나선 타이틀전에서 무명의 복서에게 챔피언벨트를 내줬다. 이탈리아는 경악했다. 벤베누티의 아마추어 전적은 120승 1패이고 김기수에게 진 뒤에는 미들급으로 체급을 올려 세계 프로 복싱 양대 기구인 WBA와 WBC(세계복싱평의회) 챔피언을 지내는 등 이탈리아인들의 사랑을 계속 받기는 했다.
얼마 뒤인 그해 7월 19일 북한은 영국 미들스보로에서 1만8727명의 유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잉글랜드 월드컵 4조 마지막 경기에서 1934년, 1938년 대회 우승국이자 세계적인 축구 강국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이변을 일으켰다. 월드컵 역사는 이 경기와 1950년 브라질 대회에서 미국이 잉글랜드를 1-0으로 제친 경기를 깜짝 놀랄 경기 가운데 첫 손가락으로 꼽고 있다.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당한 이탈리아 선수들은 귀국길에 자국 팬들로부터 토마토 케첩과 잼 세례를 받았다.
한국인 이상으로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충격을 안긴 김기수를 ‘스포츠 인물 열전’ 첫 번째로 꼽은 까닭은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이겨 내고 세계 속의 한국으로 나아가려고 몸부림치던 1960년대 중반, 아마추어와 프로를 막론하고 스포츠 팬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한국도 세계 최고(챔피언)’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첫 올림픽 챔피언(1976년 몬트리올 대회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양정모)은 이때로부터 10년 뒤에 나온다. 1960년대 후반, 김기수가 뻗는 주먹은 모든 이들에게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잊게 했다.
김기수는 193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12세 때인 1·4 후퇴 때 남녘으로 와 전라남도 여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형에게 자극을 받아 복싱에 입문해 1957년 전국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 주니어 웰터급에서 우승했고 곧 이어 서울 성북고로 전학해 을지로 3가에 있는 한국체육관에서 복싱에 전념했다.
그 무렵 성북고는 복싱과 레슬링 등 격투기 종목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우수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김기수는 아마추어 시절에도 뛰어난 복서였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열린 각종 국내 대회에서 연전연승했다. 그 사이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웰터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1962년 프로로 전향하기 전까지 88전 87승 1패의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유일한 1패가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2회전(16강)에서 벤베누티에게 당한 판정패였다. 비록 올림픽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지만 김기수는 아마추어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의 경기력을 발휘했고 1964년 도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정신조,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은메달리스트 지용주 등으로 이어지는 올림픽 복싱 메달리스트들의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프로에서도 연승 행진을 이어간 김기수는 1962년 12월 일본 원정 두 경기를 포함해 프로 데뷔 네 번째 경기에서 강세철을 판정으로 물리치고 국내 미들급 챔피언이 됐다. 1965년 1월 일본의 가이즈 후미오(海津文雄)를 6회 KO로 누르고 동양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김기수는 여세를 몰아 이듬해 벤베누티와 6년 만에 다시 만나 2-1 판정승을 거두고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이 됐다. 이 경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관중석에서 지켜볼 정도로 전 국민적인 관심사였다. 박 대통령의 결단으로 5만 달러가 넘는 벤베누티의 개런티를 줄 수 있었기에 한국인 첫 세계 챔피언이 나올 수 있었다. 1950년대에는 외환 사정이 더 나빠 축구 대표 선수들이 외상으로 비행기를 타고 국제 대회에 출전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김기수가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던 날 사진을 보면 챔피언벨트를 허리에 감은 김기수 옆에 있는 이방인이 눈에 띈다. 미국인 트레이너 보비 리처드다. 리처드는 김기수의 세계 타이틀 도전이 확정되자 트레이너로 영입된 인물이다. 일본 프로 복싱계에서 활동하던 리처드는 뒷날의 거스 히딩크 같은 족집게 과외 선생이었다.
김기수는 리처드의 지도를 받으며 타이틀 매치를 준비했고 15라운드 내내 왼손잡이 이점을 살리면서 포인트 위주의 작전을 펼쳐 챔피언이 됐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히트 앤드 클린치(Hit and Clinch)’라고 표현했다. 짧은 기간이라도 외국인 지도자가 쓸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66년 12월 스탠리 해링턴(미국), 1967년 10월 프레디 리틀(미국)을 상대로 타이틀을 방어한 김기수는 1968년 5월 3차 방어전에서 산드라 마징기(이탈리아)에게 판정으로 져 타이틀을 빼앗긴 뒤 그해 11월에는 미나미 히사오(南久雄)에게 판정으로 져 동양 미들급 타이틀도 내놓았다. 1969년 3월 리턴매치에서 미나미에게 판정승을 거두고 타이틀을 되찾았으나 그해 9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갖고 글러브를 벗었다. 프로 복싱 전적은 49전 45승 2무승부 2패다.
김기수는 은퇴한 뒤 사업가로 활동했다. 그가 서울 충무로에 개업한 챔피언다방은 복싱 올드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명소다. 행복한 은퇴 생활을 하던 김기수는 안타깝게도 한창 나이 58세 때인 1997년 세상을 떠났다. 김기수는 프로 데뷔 초기 일본에서 활동하며 귀화 제의를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화가 있다.
한국은 김기수의 세계 타이틀 획득이 기폭제가 돼 1970년대 홍수환과 유제두, 1980년대 유명우와 장정구 등 수많은 챔피언을 배출했고 WBA와 WBC에 동시에 세 명의 챔피언을 보유하기도 하는 등 세계적인 프로 복싱 강국으로 성장했다.
세계 챔피언 김기수가 태어나기 훨씬 전,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 프로 복싱 세계 랭커가 있었다면 쉽게 믿기 어려울 터. 프로 복싱 한국 최초의 세계 랭커 서정권은 전남 순천 갑부 집안의 4남 3녀 가운데 셋째로 1912년 태어났다. 플라이급과 밴텀급 선수로 일본 무대에서 활약하다 1932년 미국으로 건너가 WBC 밴텀급 6위까지 오르는 등 활약했으나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하고 1936년 귀국해 세계 랭커였다는 긍지로 평생을 살다 1984년 타계했다.
서정권은 16세 때 동향의 마라톤 선수 남승룡(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리스트)과 함께 도쿄로 건너가 한국 최초의 올림픽 출전(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복서인 황을수의 지도를 받았다. 그때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서정권의 큰형은 두 소년이 복싱 선수가 되겠다는 것을 우려해 자신이 후원하던 황을수에게 “복싱에 대한 의욕을 단념하도록 혼내 주라”고 부탁했다. 황을수의 강펀치에 이가 흔들거리자 남승룡은 글러브를 놓았으나 서정권은 오기로 버티면서 형과 황을수가 놀랄 만한 투지와 기량을 보였다. 재능이 뛰어나다고 여긴 황을수의 지도를 받으며 복싱에 매진한 서정권은 일본을 석권하고 미국으로 진출하게 된다.
글 신명철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보는 이를 여러 번 놀라게 하는 야생난초가 있습니다. 바로 지네발란입니다.
처음엔 그 독특한 생김새에 놀라게 됩니다. 동의보감에도 등장할 만큼 유용한 약재라고는 하지만, 처음 보는 순간 누구나 징그럽다며 눈살을 찌푸리는 절지동물 지네를 어찌나 똑 닮았는지 참으로 신기할 정도입니다. 둥글고 가느다란 줄기를 따라 양편에 어긋나기로 뾰족하게 나온 잎 모양이 지네의 발을 닮았다고 해서 지네발란이라 부릅니다. 지네난초라고도 합니다. 우리만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닙니다. 학명의 종소명(種小名) 스콜로펜드리폴리우스(scolopendrifolius)가 바로 그리스어의 지네(scolopendra)와 잎(folios)의 합성어로서 ‘지네를 닮은 잎’이라는 뜻이니, 서양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증좌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놀라게 되는 것은 집채만 한 바위에 몸을 의탁하고 새벽이슬만 먹고 살아가야 하는 척박한 서식 환경입니다. 천 길 낭떠러지 바위 절벽에 담쟁이덩굴처럼 온몸을 붙인 채 천지를 굽어보는 지네발란은 보는 이를 경악하게 합니다. 뿌리 내린 바위 덩어리를 제아무리 비틀어본들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테니, 인근 바다나 저수지의 새벽안개가 만들어주는 이슬방울이 한여름 뙤약볕 아래 꽃을 피우는 지네발란의 유일한 생명줄일 것입니다. 물론 바위에 붙어사는 식물들이 거개 그렇듯, 지네발란 또한 줄기나 잎이나 모두가 통통하니 한번 들어온 물기를 오래 보관할 수 있게끔 되어 있기는 합니다.
다소 흉측한 외모나 이름과는 달리 어린아이의 미소만큼이나 환하고 해맑은 지네발란의 꽃을 보는 순간 세 번째로 놀라게 됩니다. 흰색과 연분홍, 자주색이 어우러진 꽃 모양은 그 어떤 난 꽃 못지않게 화사한데, 생김새 또한 갓난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듯 귀엽고 깜찍하기 짝이 없습니다. “누구는 지네발란의 꽃을 하늘의 별이라고 했다.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지네발란의 꽃은 가슴속에 일렁이는 하늘의 꽃물결이다.” 한 야생화 동호인이 자신의 블로그에 쓴 찬사입니다. 지네발란 꽃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나타냈기에 소개해 봤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만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자생지가 제주도와 진도 등 극히 일부에 제한돼 있어 2012년부터 멸종위기종 2급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습니다.
Where is it?
제주도나 진도 등 전라남도 해안가에 가야 만날 수 있다. 몇 해 전 전남 나주에서 최북단 자생지가 발견되면서 찾는 발걸음이 많아졌다. 제주도의 경우 거대한 바위산인 산방산 남쪽 암벽에 솔잎란 석곡 등 다른 착생난초들과 함께 지네발란이 붙어 자생한다. 목포 유달산에 국내 최대 규모의 지네발란 자생지가 있는데 최근 주변에 둘레길이 개발되면서 불법 채취 등으로 서식지 훼손이 우려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나주의 경우 나주호(사진) 인근 야트막한 야산 바위에 자생한다. 나주시 다도면 대한기독교청소년수련원 인근의 한 야산을 10여 분 오르면 나주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바위 더미가 나온다. 바로 그 바위에 지네발란이 붙어 꽃을 피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오후 2시. 약속시간을 부득이하게 미뤄야겠다고 알려왔다. 겨우 10분 늦는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색을 표하는 이만의 전 장관은 근처 회의에 참석했다가 점심도 못 먹고 걸어오느라 늦은 것이었다. 그는 공공연하게 ‘BMW(Bus&Bicycle, Metro, Walk) 예찬론자’라고 말한다. 장관 재임 시절에도 전용차량 ‘에쿠스’를 반납하고 ‘아반떼 하이브리드’를 타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물질적 가치보다 사람을 아끼고 환경을 사랑해야 한다는 그다. 높은 직함을 갖고 있다고 해도 더욱 더 겸손해야 한다는 그다. 그런 그를 만든 어머니 이야기가 몹시도 궁금해졌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6살 꼬마 이만의의 집에 인민군들이 몰려왔다. “이승만을 내놔라.” 이승만이 그려진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기르던 소를 가지고 가버렸다. 앞산과 뒷산에서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지독히도 무서웠던 기억, 어머니의 품속에서 6·25전쟁을 견뎠다. 어머니는 굳세게 하루하루를 이겨냈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지만 삶은 녹록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찾아왔다. 그는 어린 시절 기억에 각인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남 담양 산골마을에서 살았는데, 다들 먹고사는 게 힘든 시절이었죠. 너무 먹을 게 없으니까 어머니는 들풀을 베어다 국을 끓였고 밀개떡을 해서 먹였죠. 그렇게 못 먹고 살다 보니까 위장도 약해졌죠. 어느 날 체했는데, 당시만 해도 근처에 병원이 없어 체를 내리는 곳에 가야 했어요. 어머니는 고무신이 벗겨지는데도 산을 뛰어넘어 가며 그곳에 도착했죠. 당시만 해도 별거 아닌 일로 죽어나가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어머니는 저를 살리려고 치열하게 사셨던 거죠.”
팔자 센 어머니의 인생
“실은 제가 넷째인데 장남이 됐어요. 어머니는 저 위로 세 아들을 어린 나이에 하늘로 보냈죠. 어머니는 팔자 센 여자의 인상을 줄까 봐 신경을 무척 쓰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넷째 녀석까지 잃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셨다는 걸 어릴 때부터 알게 됐죠.”
어머니는 평생 많은 것을 잃고 살았다. 뱀띠 어머니는 범띠 아버지를 만나 무엇이건 재빠르게 완벽히 해내야 하는 긴장감으로 마음의 여유를 누리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살포시 웃으시고는 금방 무뚝뚝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서 무엇보다 강한 모성애를 느끼곤 했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 아버지가 싫어서 항상 어머니와 함께 안방에서 잠자는 아들을 살피느라 수면조차 부족했던 어머니는 이른 새벽녘, 동네 우물에서 그날의 ‘첫 물’을 길러오셨다. 부엌에 마련된 정화수 종지에 그 물을 채워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달 밝은 밤에는 앞마당 한가운데에 물동이를 놓고 절을 하며 가족의 평안을 기원했다. 초등학생 이만의의 눈에 어머니의 기도는 사랑, 그 자체였다.
중·고등학교는 광주에 있는 가난한 이모님 댁에서 머물며 다녔다. 한 달에 두 번쯤 집에 가면 어머니는 무거운 곡식자루를 머리에 이고 시오리길을 걸어 큰 길이 나오면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 태워주셨다.
“그때부터 ‘어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했죠. 열심히 이 악물고 공부하며 최대한 검약하게 지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차마 참고서 사게 돈 달라는 말을 못해 교과서로 고 2까지 견뎠던 것은 홀로서기에 방부제 같은 효과를 냈죠.”
어머니의 고생이 가중된 것은 아버지께서 50대 후반에 도랑을 건너다 대퇴골 골절상을 입었는데, 그때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 목발을 짚으신 이후였다. 거의 모든 일들을 홀로 해치우셔야 했다. 그야말로 과로에 지쳤을 텐데도 자식들 앞에서는 힘들다고 내색 한 번 안 하셨다.
“표현은 하지 않으셨지만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그래서였을까. 60대에 접어들면서 담배와 커피를 즐기셨어요. 전 아버지의 끽연에 반감을 가졌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의 담배에는 의미가 자연스럽게 부여되더라고요. 쓰레기 소각장에서 전기를 뽑아내고 분출하는 배기가스라고나 할까. 그렇게 힘에 부친 삶을 담배 연기에 실어 내보내셨던 거라고 느껴졌어요.”
심은 만큼만 거두고 불쌍한 사람 편에 서라
어느 날 청년 이만의는 시골 친구들이 화투 치는 데 구경 갔다가 집으로 불려가서 혼이 났다. 그때 어머니는 “농민들처럼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게 훌륭한 사람이다. 심은 만큼만 거두어라”라고 강조하셨다. 노력 없이 좋은 결실을 원하는 것은 허황된 생각이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지금의 이만의를 만든 중요한 지침이 됐다.
“돈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자세를 길렀던 것 같습니다. 내 힘으로 심어서 그만큼만 거두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죠. 명예나 지위를 통해 좋은 것을 원하거나 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던 건 어머니의 꾸지람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내부무 공무원으로 발령받았을 때도 평생 공직자로 가져야 할 자세를 강조했었다. “펜대를 굴려먹고 살아도, 항상 불쌍한 사람들의 편에 서라.” 당시 시골에서는 공무원들이 시골 사람들을 상대로 지도 단속을 했는데, 같은 내용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곤 했다. 친절하고 따듯한 사람, 오만하고 강압적인 사람 등 구분이 명확했다. 어머니는 이만의가 앞만 보고 출세 가도를 달리는 공직자보다는 따듯한 사람으로 살아 나가길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다.
“내 어머니는 평생 시골에서 사셨고 배움도 짧은 여인이셨죠. 하지만 몸소 가르쳐 주신 중요한 덕목은 잊힐 수가 없고 평생 가는 겁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자라났고, 어머니의 투박한 한마디에 교훈을 얻고 마음을 다잡고 살아가게 된 거죠.”
시장(市長) 어머니의 소박한 장례식장
어느덧 이만의의 직함은 시장으로 바뀐다. 전라남도 여천시 시장, 목포시 시장을 지내고 제주도 부시장, 광주시 부시장을 거쳤다. 그리고 국방대학교에 들어가 국장급 공무원 연수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79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시장 출신 공무원의 모친상이었다.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조용히 장례를 치렀다. 화환은 1개밖에 안 들어왔다.
“잘했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뜻이었고, 그래서 소박하지만 정성껏 모셨죠. 조문객을 많이 받아서 체면을 살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허세를 경계하라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의 소박함은 삶의 궤적과 동일했다. 아들이 잘돼서 잘난 척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환갑이나 칠순잔치도 마다했던 사람이다.
“제가 장관이 된 모습을 어머니가 못 보시고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 한편으로 아쉬운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물론 장관이 됐어도 ‘애썼다’라는 말과 엷은 미소로 화답하셨겠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고생하신 만큼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 것을. 한평생 가난에 찌들면서도 모정의 도를 실천하신 어머니의 생각과 말씀은 여전히 제게 존재하고 있으니, 어머니는 오늘도 제 곁에 여전히 살아계신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머니
이만의 전 환경부 장관, 현 로하스코리아포럼 이사장은 오늘날 어머니가 사라지고 있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다.
개인이든, 국가든 행복해지려면 어머니라는 존재가 전제돼야 하는데 이혼율 증가 등으로 인해 그 가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얼마 전 예비군 총기사고 문제가 생긴 것도 결손 가정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걱정은 더 많아졌다.
“어머니라는 존재의 위대함이 사라지게 되면, 가정의 문제로 시작해 여러 사회적 문제로 번지게 되죠. 결국은 국가적 문제로 자리 잡게 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건강한 사회에 나와서 행복한 꿈을 그리며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머니라는 이름이 무엇보다 강조돼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어머니의 소중함을 되찾는 것 아닐까요?”
여자는 등 뒤에서 두 손을 나의 양 어깨에 얹었다. 뭉친 어깨를 풀어주는 안마 포즈. 어깨를 몇 번 주무르더니… 어럽쇼, 흐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게 우는 소리인 줄 몰랐다. 어떤 여자가 안마를 하려다 말고 흐느끼겠는가. 그것도 처음 만난 여자가 등 뒤에서 말이다. 기분이 좀 ‘야시꾸리’해지는 사이에 흐느낌은 굵은 눈물방울이 되어 (뒤늦게 동석했던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긴데) 그녀는 눈물범벅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언제나처럼) 이미 꽐라(술에 만취한 상태를 이르는 말) 상태였으므로 사태를 파악할 힘이 없었지만 기분은 한껏 ‘야시꾸리’해졌다.
글·사진 윤동혁 PD
인사동 골목 중에서도 가장 으슥한 곳에 자리 잡은 한정식 술집에서 그 여자는 우리 방에 들어왔다. 마담 언니의 친구라고 했다. 그녀의 안마로 지병을 고친 사람도 있다고 마담이 말했다. 혈관에 피를 잘 통하게 해주고 있노라면 안마 받고 있는 사람의 전 생애가 보인다고 했다.
지금도 길 가다가 빨간 깃발, 흰 깃발이 기다란 대나무에 매달려 있는 걸 보면 똥개나 참새처럼 조급해지는 내가 아닌가. 아니 나의 추억이 엑스레이에 비친 내장처럼 훤히 보인다는데, 그냥 고맙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어깨를 맡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매우 서럽게, 격렬하게 울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불쌍한 인간이 다 있느냐. 어떻게 이런 슬픔의 덩어리들을 가슴 가득 품고 살아가느냐.” 그녀는 대충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불쌍하다고? 슬픔의 덩어리? 다른 사람의 엑스레이하고 바뀌었나. 혹시 슬픈 일들이 많았는데 워낙 인생의 깊이에 관해서는 멍청한지라 슬렁슬렁 흘리며 살아왔던 것일까.
나는 애써서 나의 지난날들 중에 정말 슬픈 요소들이 있었는지 치약 짜듯 과거를 저 밑에서부터 짜내기 시작했다. 음... 그러고 보니 그 여자가 울 만큼은 아니더라도 가슴 아린 일들이 줄줄이 엮이는 것이었다.
목포 유달산 기슭에서 나는 정자, 난자의 도킹에 성공했으나 엄마 뱃속에 들어 있는 상태로 주거지가 이동되었다. 절반은 목포에서, 나머지 절반은 제주에서 기다리다가 세상에 나왔다. 이른바 나의 사주에 낙인으로 찍혀 있는 ‘천고역마(天孤驛馬)’의 시작이다. 형을 형이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그 누구처럼 나는 제주도를 나의 고향이라고 말하지 못 한다. 다섯 살 때 제주도를 떠났다. 아무것도 모르고 (산 게 아니라) 살아졌지만 나의 몸에는 제주 4·3사건의 피비린내와 언제 징집될지 모르는 아버지의 불안, 그리고 고부(시어머니-며느리) 전쟁의 파편들이 무수히 박혀 버린 모양이다.
단지 다섯 해를 살고 태어난 곳을 떠났는데 당시에는 대양이나 다름없는 두 바다를 건넜다. 제주에서 부산까지 하루 종일 흔들리고 가서 하루인가 이틀 쉬고 또 배를 탔다. 포항까지 가서 바다가 잔잔하기를 기다려 세 번째 배를 타고 총 닷새 만에 도착한 곳이 울릉도.
그때도,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울릉도엔 ‘바퀴’가 없었다. 자동차는 물론이고 리어카나 자전거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징어는 많았다. 그러나 모두 팔 물건이어서 감시가 심했다. 집집마다 오징어를 쌓아둔 채 군대 천막 같은 것으로 덮어놓고 육지에서 값이 오르기를 기다렸다. 학교 앞 구멍가게에는 커다란 유리병 속에 ‘눈깔사탕’이 가득 들어 있었지만 우리들이 먹을 수 있는 간식은 오직 오징어, 그중에서도 다리밖에 없었다. 스무 마리를 한 축으로 정확히 묶어놓았기 때문에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한 마리를 통째로 훔친다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였다.
다리를 한 개씩 뽑아 먹었는데 영민한 부모들은 산만큼 쌓아놓은 오징어 다발들 속에서 단 한 개의 다리가 사라진 오징어를 귀신처럼 찾아냈다. 그 아이는 그날 죽는 날이었다. “육지에 나가서 제값 못 받는다”고, “이 오징어 잘 팔려야 느이 형 포항으로 학교 보낼 수 있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거나 매를 맞거나 했다.
그런데 오징어 다리는 우리 몸에 흔적을 남겼다. 그러면 부모들은 오징어 다발을 낱낱이 조사하지 않고도 ‘흠, 이 녀석이 또 훔쳐 먹었구나’ 하고 금방 알아차렸다. 바로 부스럼인데 오징어만 먹으면 팔뚝에 둥근 원이 몇 개씩 그려지는 부스럼병을 우리 모두 갖고 있었다. 울릉도에 살면서 오징어를 다리 말고 몸통까지 먹는 게 우리들의 꿈이었다.
우산국민학교에 들어가 2학년에 올라갔을 때, 무선전신국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는 강릉으로 발령 받았다. 두 번째로 포항 땅을 밟았는데 이때부터 컬처 쇼크(문화충격)가 생기기 시작했다. 수많은 ‘바퀴’들을 만났고 바퀴 수만큼 나는 어지러웠다. 게다가 합승이라고 쓴 차를 ‘합승’이라고 읽어야 할지 ‘승합’이라고 읽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나 ‘바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릉국민학교 2학년 몇 반에 전입한 나는 첫날부터 스스로 맴을 돌아야 하는 바퀴가 되어야 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이 그때 이미 있었다. 전쟁고아들이 반마다 몇 명씩 있었고 그들은 나로 인하여 색다른 기쁨을 얻었다.
“야, 너 일어나서 책 읽어!”
쉬는 시간에 그들은 나에게 책을 읽으라고 했다. 잘 아시다시피 제주도에서나 울릉도에서나 일어나서 책을 읽을 때는 표준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표준어로 읽으면 나를 괴롭혔다. 머리를 쥐어박고 발로 정강이를 걷어찼다.
“울릉도 말로 읽으란 말이다. 갱상도 말로.”
나는 맞는 것이 무섭고 싫었지만 그 보다는 억울했다. 그러나 억울함은 가슴 깊은 곳으로 쑤셔 넣고서 이 불합리하고도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면 좋을까 궁리했다.
당시 강릉은 전 지역에서 사람들이 공을 찬다고 할 만큼 축구 붐이었다. 어린아이들도 골목에서 공을 찼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 점심시간 할 것 없이 열정적으로 축구를 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도 점심을 굶어가면서 (고아원에서 도시락을 안 싸주니까) 공놀이를 했는데 밥도 굶는 녀석들이 변변한 축구공을 가졌을 리 만무했다.
아버지 주머니에서 돈을 꽤 훔쳤다. ‘정식’ 축구공을 사서 영웅들에게 주었다. 그날 그리고 며칠간은 내가 감히 센터포워드를 맡아서 영웅들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볐다. 단 며칠에 불과했지만 나는 이런 행복을 위해서라면 또 돈을 훔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부 전쟁은 이제 파편이 튀는 단계를 지나 집이 불타는 수준에 이르렀다.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에 낀 아버지는 어느 편도 들지 않고서 매일 술을 마시고 통금 사이렌과 함께 집에 들어오셨다. 그러던 와중에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여자(나는 그 여자가 우리 엄마보다 더 좋았다)까지 나타나자 어머니는 짐을 싸서 친정 식구들이 많이 사는 전라남도 송정리로 이사해 버렸고, 그 짐 보따리 속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첫 번째 땅 송정리. 그곳에서 나는 토끼를 키웠다. 열심히 전라도 말을 익혀서 금방 네이티브 발음이 되었기 때문에 매를 맞거나 하지는 않았다. 토끼는 새끼를 자주, 많이 나아서 금방 시장에 내다팔았다. 그 돈으로 필통이며 연필을 샀다. 여름엔 토끼풀을 뜯다가 괜스레 지나가는 뱀을 낫으로 찍어 죽이고, 보리가 한창 영글 땐 보리밭 속을 파고들어가 보리피리도 불었다. 가장 좋았던, 평화로웠던 그 세월은 단 1년 만에 끝나고 인천 송도로 이사 갔다. 아버지가 그리로 발령받았기 때문이었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바보천치’여서 ‘와이로(뇌물)’를 먹이면 될 것을 이리저리 떠다니며 돈을 모으기는커녕 생고생을 시킨다고 눈에 날을 세웠다.
1962년께 송도는 그냥 황무지 갯벌뿐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인가 뭔가를 열심히 외우며 갯벌에 나가 조개를 주웠다. 뒷동산엔 야생 부추(그땐 전부 야생이었지 뭐)가 풀처럼 자라고 있어서 부추조갯국을 끓여먹을 수 있었다. 우리 마을엔 낡은 권투 장갑이 두 짝 있었고 어른들이 심심하면 우리들을 풀밭 링에 올려서 ‘싸움질’을 시켰는데 그때 눈에서 불이 번쩍 튀는 경험을 많이 했다.
6학년은 인천 시내 학교(인천에서는 변두리)로 옮겨 공부를 좀 하다가 일류 중학교라고 하는 데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학교와 학교를 떠돌아다니는 긴 여정은 끝이 났다. 같은 운동장을 사용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6년이나 다녔으니 인천이 내 고향이 되고 말았다. 그 중학교를 졸업하고 역시 명문이라고 하는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나는 외갓집에 가서 놀고 오겠다고 말하고 호남선 완행열차를 탔다. 느린 뱀처럼 밤새 꿈틀꿈틀 기어간 기차가 송정리역에다 나를 내려놓았다. 역에서 외삼촌 집까지 걸어갈 때 여명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사단은 이때 났다.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앉아 있는데 둘째 외사촌 누나가 감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방으로 들어섰다. 나는 화살을 이마에 맞았다. 그 화살은 나를 사랑의 지옥으로 떨어뜨렸다. 이제껏 방황하던 나의 영혼이 전심전력하여 한 여인(?)을 사랑하게 만들었으니 슬프도다, 어찌하여 외사촌 누나를… 누가 듣기만 해도 해괴하고 망측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냥 마셨다. 막걸리, 소주 안 가리고 마셨다. “이런 미친놈이 있나.” 엄마가 도마 위에 내 손을 올려놓고 식칼로 내리치려 할 때도 얼른 손을 빼서 달아났고 또 마셨다. 예비고사 1기생인 나는 시험 보기 1주일 전에 ‘생누룩’ 막걸리 석 되를 마시고 한겨울 논바닥에서 잤다. 그리고 (오로지 막걸리 원 없이 마시려는 욕망 하나로) 고려대에 들어가서 마시고 또 마셨다.
‘마셔도 사내답게 막걸리만 마신다’라고 막걸리 찬가를 불렀지만 나는 마셔도 빚을 내서 마셨고, 전날 실수로 얼굴이 화끈거리면 그 창피를 덮기 위해 또 마셨다.
대충 여기까지 추억의 치약을 짜고 나니까 또 술발이 당기는구나. 그런데 그 여자는 나의 이런 생의 이력을 보고서도 눈물이 솟구쳤다는 말인가. 나는 단 한 번도 이념을 위해서 또는 노동자, 빈민을 위해서 나의 시간을 내거나 술잔을 든 적이 없다. 그냥 소소한 개인사, 남자들의 자잘한 일상사에 온몸 바쳐 술을 마셨을 뿐이다.
그러니 나의 어깨를 만지며 등 뒤에서 흐느꼈던 여인이여. 그대가 맥을 잘못 짚었던 게 틀림없소. 아니면 내가 꽐라 상태에서 헛것을 보았거나.
△ 윤동혁(尹東赫) PD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한국일보 MBC, SBS 등을 거쳐 강원도와 경기도 땅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집도 절도 없으므로) 프리랜서PD로 일하고 있다. 로 방송대상 최우수 작품상을 받는 등 한국방송대상을 3회 수상했다. 라는 책을 펴내는 등 집필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경로우대증’을 받는 내년 1월을 계기로 ‘나홀로 방송국’을 열 계획이다.
나른한 봄볕 아래 어머니를 생각하는 조창화(趙昌化·78) 대한언론인회 고문을 만나 담소를 나눴다. 그는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어머니의 값진 추억을 생생하게 그렸다. 흡사 계절마다 살아 돌아오는 장미꽃의 슬픈 아름다움처럼, 어머니의 모습은 그렇게 조 고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오직 1남 2녀 세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죠. 그중에서도 아들인 제게 몰두하셨어요. 그래서 저에게 어머니는 늘 애틋하고 각별한 존재죠. 이렇게 다시 회고하니 늘 혼자였던 어머니 모습에 목이 멥니다.”
조창화 대한언론인회 고문은 어머니 박신행(朴信行) 씨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없다며 가슴 아파했다. 어머니와 가족의 삶을 풀어내는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보태졌다.
그는 자신이 일곱살이었을 때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 나이 마흔을 훌쩍 넘어 낳은 아들이었던 그는 1945년 초, 어머니의 손에 끌려 서른 시간이 넘는 기차 여행 끝에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이라는 작은 포구에 닿았다. 그곳은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그 좋은 재산 다 놔두고 몸만 나왔으니 어떻게 하나”라는 어머니의 푸념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천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일제 치하였던지라 다마고(계란) 잇고(1개), 니고(2개)를 먼저 배워야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일본 학교를 다니다 온 두 누이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곤 했다.
해방이 된 그 해 8월 하순의 어느 날, 그는 아버지 조이선(趙利善) 씨와 함께 100여 리 떨어진 평양에 간 적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갔는데 연단에서 키 큰 남자 한 명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저 사람이 바로 김일성이다”라고 했다. 마치 불길한 전조 같은 기억이었다.
함경도로, 서울로, 그리고 부산으로
소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그의 가족은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함경남도 신고산이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 땅과 과수원, 광산 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고산 인민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아침마다 소년단 행진곡을 부르며 대열을 갖추어 등교할 때는 신바람이 났다. 그러나 역사의 비극이 그에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끌려 나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전갈이 왔다. 죄목은 ‘유산 계급’. 공산당의 ‘숙청’ 작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소년 조창화는 학급 위원 자리에서 내쫓기고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됐다. 부당한 처사들 속에서 학교에 나가는 둥 마는 둥 집에서 지내야 했던 그에게 아버지 소식을 갖고 왔다는 한 남자가 “어머니, 아버지는 안변 감옥을 탈출해 이미 월남을 했고, 나는 너희 3남매를 남쪽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다”면서 아버지의 편지를 내밀었다.
3남매는 1948년 8월의 어느 날, 부모님을 만나기 위한 2박 3일 동안의 월남 행군을 시작했다. 행군은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 고생 끝에 도착한 동두천에서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서울에서 아버지의 권유로 공옥소학교라는 사립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남대문시장 근처, 지금의 상동교회 뒤에 자리 잡은 이 학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 반씩밖에 없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소학교였다. 고된 경험 끝에 부모님과 함께하게 됐다는 것에서 그는 겨우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2주 남짓 지났을 시점인 1950년 7월 13일, 그의 나이 12세 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서울이 온통 인민군으로 뒤덮인 날, 그는 아버지를 모신 영구차에 탄 채 무악재를 넘어 꾸역꾸역 밀려오는 인민군을 헤치고 홍제동으로 향했다. 묘지였던 그곳에서 5일장으로 장사를 치렀다. 그리고 그 후 석 달 동안 방공호에서 살아야 했다.
얼마나 지난 다음일까? 어느 날 국군이 서울로 들어왔고, 그해 12월 하순에 그의 가족들은 다시 짐을 꾸려 부산으로 가는 피난 열차를 탔다. 무려 6일 동안의 거북걸음 끝에 부산역에 도착한 것이 12월 26일 즈음, 어머니와 2녀 1남의 3남매는 사고무친(四顧無親)한 부산역 한 귀퉁이에서 고달픈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홀어머니 슬픔 헤아리지 못한 불효자
“그때 어머니는 겨울 털모자를 팔고, 그 돈으로 쌀을 사고…. 그런데 뭔가를 팔려고 해도 살 사람은 별로 없고…. 그 와중에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이나 아버지의 빈자리를 제가 헤아려 본 적이 있는가 하면…. 그런 기억들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엄청 울 수밖에 없었죠.”
부산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학교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동네 아이들과 사귀던 그는 미군 부대에 들어가 미군의 구두를 닦아주는 ‘슈샤인 보이’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요즘의 우리들은 꽁트에서나 볼 수 있는 ‘기브 미 쪼꼬렛’이라는 어설픈 영어 뒤에 숨어 있는 건 시대가 만들어낸 고통이고 절박한 생존의 기술이었다. 조 고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슈샤인 보이’를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는 “이대로 뒀다가는 애가 큰일나겠다” 싶었다. 더군다나 애지중지 키운 집안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그를 미군 부대 대신 데려간 곳은 문래동 대선소주공장의 한 귀퉁이였다. 그곳은 미국인들에게 학교를 빼앗긴 성남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노천 수업을 받는 곳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인생에서 네 번째 초등학교가 시작된다. 졸업이 예정된 6학년 말까지는 한 달 정도 남았을 뿐이었고 다른 아이들은 연합고사를 준비한다고 야단법석인 가운데 그는 친구들의 노트와 책을 빌려 보기에 바빴다. 비록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달포 뒤에 성남초등학교 졸업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초등학교 4개를 거친 그의 남행만리(南行萬里)는 부산을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의대에 안 가 죄송합니다”
1953년, 이제 여드름꽃이 피는 나이가 되는 조 고문은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대열에 끼여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고등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 그는 당장 다가온 대학 입시 준비로 24시간이 모자랐다.
“제가 있던 3학년 4반 담임인 육인수(故육영수 여사의 오라버니) 선생님을 만난 어머니는 ‘창화는 무조건 서울대학교 의대에 가야 하니까 그리 지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의과가 싫어 정치학과에 서류를 제출했고 어머니와 육 선생은 제가 당연히 의대에 넣은 것으로 알고 있었죠.”
서울대 정치학과에 합격한 그는 마치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서울 등지의 대표 준재들이 모인 형세를 이루는 정치학과 내에 함경도 대표로 자리 잡았다. 1961년에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대한일보 기자로 들어가 국회, 청와대 출입을 시작했다. 1973년, KBS 정치부 차장으로 이직하면서 언론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보다 탄탄해진다.
“제가 KBS 부산방송 총국장이었던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나이 53세일 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이후 35년이란 세월을 우리 남매 세 명을 위해 개가하지 않고 홀로 살다가 88세에 세상을 떠나셨죠. 어머니는 아버지와 삶을 같이한 시간보다 홀로 산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카리스마 있는 여장부로 기억했다. 그의 기억 속의 어머니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막일도 거르지 않았고 늘 당당했다. 나이 들어 출석하는 노인회관에서는 화투도 잘 치고 보스 노릇도 곧잘 했다. 그는 어머니를 인정이 많고 시대를 앞서 갔다고 평했다. 지고는 못사는 성격에 일본어와 중국어도 유창했던 것도 어머니다운 점이었다.
어머니 묘지에 대동강 모래를 뿌리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는 언제일까.
“다들 비슷하겠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는 어려울 때, 힘들 때죠. 어머니는 언제나 제 편이셨으니까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영원한 제 편이니까요.”
어머니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땠을지는 미뤄 짐작이 간다. 어머니는 그에게 무한한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하지만 그 사랑에 그는 변변하게 보답 못한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저는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못 뜨더군요. 그래서 비행기로 못 움직이고, 새마을호를 겨우 타서 6시간 걸려서 집에 도착했죠.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애비는 어디 있냐’고 물으시며 ‘화장실에 좀 가자, 씻고 싶다’고 하셨답니다. 가시면서 저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묵묵히 보여준 것뿐이지만, 그 모습 자체가 그에게는 80세가 다 된 지금까지 ‘정신적 울림’으로 남아 있었다.
“청와대 출입 시절 잊지 못할 일이 한 가지 있지요. 1972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적십자회담 취재단으로 들어가 대동강을 산보하고 그 강변에서 모래를 채취할 수 있는 큰 행운을 얻었어요. 그래서 1985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고향 대동강의 모래를 뿌려드릴 수 있었죠.”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아버지 묘가 없어진 기억이 나서다.
“사실 아버지 묘지를 잃어버렸어요. 부산 피난살이에서 돌아와보니까 홍제동의 묘지 자리를 불도저로 확 밀어버렸더군요.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 영정만 가지고 합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어머니 유골을 파서 화장을 했어요. 그리고 용인공원묘지에 가로 60cm, 세로 40cm 사이즈의 와합, 즉 눕히는 비석으로 바꿨어요.”
비석에는 배천(白川) 조 씨 가족묘라고 쓰여 있고 뒤에는 사용 수칙을 적었다. ‘여기는 배천 조씨 묘지다, 화장을 해서 묻는다, 직계비속들은 만약 꽉 차면 맨 위부터 그대로 파서 거기에 다시 사용해라.’ 용인공원묘지가 상당히 큰데 그렇게 한 건 그가 처음이다.
“한 40구는 들어갈 것 같아요. 내가 죽고, 한 5대까지는 걱정하지 않을 것 같네요.(웃음)”
그는 어렵게 묘지개혁을 했다며 어머니 같은 여장부라면 좋아하실 일이라고 평했다.
그가 요즘 즐겨 말하는 ‘첫째는 남한테 피해 주지 말자이고, 둘째는 정리정돈’이란 말 또한 어머니에게서 배운 습관이다.
“요즘 이제 일곱살인 우리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뭐라 말했냐고 집적대면 ‘남 폐 끼치지 마라, 정리정돈이요’하고 냉큼 대답하죠. 그 재미에 삽니다.”
조 고문은 인터뷰 내내 진중하고 묵직하게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 손녀 얘기가 나오자 금방 함박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를 향한 추모의 정은 이제 유일한 손녀에 대한 짝사랑이 되어 삶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에게 손녀는 그의 어머니가 주신 축복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그녀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자 어머니 생각을 하며 3일 동안 고심하며 쓴 A4용지 4장 분량의 원고를 보내왔다.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었다. 영락없는 조선시대 어머니의 모습이다. 한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아내, 시부모님께 효도하는 며느리, 그리고 자애로운 어머니. 그래서 안영의 어머니는 신사임당을 닮았다. 이 글은 안 씨가 보낸 글을 바탕으로 했는데, 기자와의 인터뷰도 더해졌다.
그녀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밤, 어머니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철없는 그녀와 자매들은 동구 밖으로 은행을 주우러 갔다. 동구 밖 여러 그루의 은행나무에선 비바람 부는 날이면 은행이 후드득 떨어져 온 동네 사람들이 은행을 줍겠다고 모여들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모두 나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은행을 줍고 있었다. 그 속에 섞여 언니들과 신나게 주운 은행을 한 소쿠리에 채워 돌아오니, 어머니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곧 사랑채에 계시던 할아버지도 모셔오고, 온 가족이 어머니 주위에 둘러앉았다. 숨이 가빠 어쩔 줄 모르던 어머니는 막내인 그녀와 눈을 맞추며 안쓰러워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와 작별을 했다. 전쟁 통에 아버지를 보낸 지 5년 만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그때 그녀의 나이 16세, 여고 1학년이었다.
◇“모두들 어머니를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에겐 방문객이 정말 많았어요. 그때마다 모든 상차림은 어머니가 맡았죠. 손님뿐만이 아니었어요. 서울에 있을 때도 늘 고향 친척이 함께 묵었고 광주, 전주에 있을 때도 사촌 형제들이 함께 와서 학교를 다녔으니 언제나 대가족이었죠.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희생하며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 어머니를 친척들은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어머니의 음식 솜씨와 바느질 솜씨 그리고 바른 품행은 시부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시부모(안씨의 조부모)는 존중과 사랑으로 며느리를 지극히 아꼈다. 시아버지는 훗날 며느리의 병상이 깊어지자 온갖 한약을 지어다 손수 약탕관에 달이며 정성을 다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사랑을 받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안씨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집에 오는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한다며 예절을 가르치고 바삐 움직이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시부모의 입장에서는 흐뭇한 미소가 일어나는 건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안씨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가부장적인 남편이었다. 막내인 안씨를 끔찍하게 귀여워했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밉다는 안씨다. 아버지는 해방 후 군정 당시 중앙청 인사행정처 총무과장, 전라남도 도청 지방 행정 인사처장, 전주 도청 상공 국장, 초대 전주시장 등을 해 전근을 수도 없이 했다. 때문에 공직자들은 물론 이름 있는 예술인들, 안씨 종친들까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손님들이 오시면 어머니가 음식을 하셨어요. 손님들은 이 산골 벽지에 어찌 이토록 격식 있는 음식이 나오느냐고 놀란 적도 많아요. 큰 손님이 올 때면 아버지는 기생들도 데려다 가야금을 켜게 하셨는데, 어머니는 그때마다 불평 한마디 없이 온갖 음식을 만들어 밥상을 차리셨어요. 어머니의 그 인내와 음식 솜씨는 제가 평생 살아도 따라가지 못하겠더라고요.”
◇6·25,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는 꿈자리가 사납다고 했다. 공산군이 집을 차지하고 피난 간 아버지가 어디 숨었냐며 안씨 자매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얼마 후의 일이다. 그 고약한 꿈자리가 맞는지 확인하기 하기 위해 칠순이 넘은 할아버지는 괴나리봇짐을 등에 지고 50리를 걸었다. 한달음에 달려간 피난처에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동행했던 오빠가 어제 저녁 아버지가 붙잡혀 갔다면서 벌벌 떨고 있더란다. 마침 동네 아주머니로부터 산을 넘어오다가 시체를 여러 구 봤다는 제보를 받고 할아버지는 오빠를 데리고 산자락을 뒤졌다. 아버지의 몸은 차가웠다. 7월 25일, 전쟁이 난 지 꼭 한 달 만에 아버지는 그렇게 공산군에게 총살당했다.
“할아버지는 오빠와 둘이 아버지의 피 묻은 옷을 그대로 산자락에 묻었다고 해요.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만 알리고, 어머니는 오랫동안 감추셨어요. 우리들이 놀랄까 봐 울지도 못하고 슬픔을 삼키셨겠죠. 그때 제 나이 11살, 초등학교 5학년이었어요.”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다. 방마다 들어와 있던 공산당 무리도 나갔다. 정부는 동사무소 단위로 공안 위원을 뽑아 공산군 색출에 나섰다. 안씨의 오빠는 공안위원으로 뽑혀 공산군에게 복수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복수의 칼날이 시퍼렇게 서 있기는커녕 회의에 참석하는 아들에게 말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도량이 넓은 어머니였다.
“동네 사람들이 공산군과 합세해 우리에게 모질게 굴었지만 복수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어요. 혹여 오빠 말 한마디로 양민증을 못 얻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말이죠. 당시에는 위원 중 한 사람만 거부해도 양민증을 받을 수 없었는데, 그 양민증이 없으면 아무데도 못 가거든요.”
◇신앙과 가족 그리고 문학
“사춘기 소녀 시절 부모가 안 계신다는 상실감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어요. 할아버지께서는 걱정이 되셨는지 편지로 항상 ‘바르게 크거라’라고 말씀해 주시곤 했죠. 그래서 매일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형식의 일기를 쓰면서 고독을 달랬어요. 그리고 부모님 이름에 누가 될까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 준 것은 문학과 가족, 그리고 신앙이었다. 여고 시절 성당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에 이끌려 들어간 성당 안. 그 성당 한가운데 맨발로 팔 벌려 서 있는 성모상에서 버선발로 달려와 그녀를 반겨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봤다고 했다.
“그 이후에 대학을 졸업하고 천주교에 입교해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의지하며 마음의 안정을 얻었어요.”
때로는 헛헛한 마음을 채워주지 못할 때 신앙의 힘으로 버텨낸 그녀였다. 그녀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어머니지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할아버지라고 했다. 그녀의 소녀 시절 인성 교육에 올바른 길잡이가 돼 주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부모 없이 커가는 손녀에게 펜을 들어 편지를 썼다. 어머니의 베푸는 삶과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은 그녀가 문학소녀로 바르게 성장하는 초석이 됐다.
“제가 25세 때 황순원 선생님께서 등단 추천을 할지 말지 고민을 하셨어요. 그러시더니 집에 가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봐야겠다고 하시더군요. 정말로 저희 할아버지가 계신 광양 집에 오시더니 할아버지의 선비 정신에 매료되셨는지 흔쾌히 추천을 해주시더라고요.”
그 계기로 문학계에 등단한 지 올해로 50년, 천주교에 입교한 지도 50년이다. 등단 이후 수많은 수필과 소설 등의 글을 써 왔다. 특히, 그녀의 장편소설 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져있다. 신사임당을 닮은 어머니 말이다. 효도만 잘 가르쳐도 더불어 잘 사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녀다. 그런 확신을 펼쳐 보고자 효도로 극진한 신사임당 가정을 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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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쥐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하
오늘의 일진은 가을 초목이 서리를 만난 격이니 만사를 조심하라. 도모하고 자 하는 일이 있다면 시기를 잘못 선택하여 운기가 불량해 지니 잘 살펴봄이 길할 것이다.
84년생 : 억울한 일이 생기나 올바른 마음이 통하게 한다.
72년생 : 귀인이 도운다 도울 거리를 잘 제공하라.
60년생 : 서방이 불길하니 서쪽에서 오는 사람을 믿지마라.
48년생 : 감언이설은 조심하고 충고하는 말에 소득이 따른다.
◇ 소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매마른 가지에 한줄기 소나기라 갈증은 풀리나 충분치 못하다. 어려운 일이 있다면 다소 해갈은 될 것이나 해결을 보기는 어렵다. 좋은 시기가 올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림이 길하다.
85년생 : 생각지도 않던 이성운이 오나 오기 발동하면 없어진다.
73년생 : 팔도에서 다 모여도 마음이 드는 것이없다.
61년생 : 새로운 일은 청사진만 요한하다.투자는 조금 해보자.
49년생 : 한 건은 잘되고 나머지는 힘든다.
◇ 호랑이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상, 건강운 : 상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사람들이 합심하여 일은 성사되나 여흥을 조심하라. 오늘의 일진은 희노애락이 번갈아 일어 나니 이는 방심한 가운데 발해진느 것이다. 망동하지 말고 자중함이 길하다.
86년생 : 생각하던 것이 내게 닦아오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74년생 : 나의 말이 통하지 않고 억울한일이 발생하나 친구가 돕는다.
62년생 : 장하도다 노력의 대가가 이제야 나타나는구나.
50년생 : 매사 순탄하나 가짜가 진짜 행세하니 도둑을 조심하라.
◇ 토끼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오늘의 운수는 점점 열리나 친구를 조심하고 도적을 조심하라. 인간구설과 손재가 발하니 좋은 운기가 감할까 두렵다. 매사에 신중할 것이니 소지품을 잘 간수하기 바란다.
87년생 : 남을 돌보는 노력을 게을리 하자마라 돌보는 중에 이득이 있다.
75년생 : 고였든 물이 길을 만나 바다로 가니일이 술술 풀린다.
63년생 : 일시적인 도움은 있으나 영원하지가않다. 하루는 잘 넘긴다.
51년생 : 눈속의 송백이 그 절개를 변치 아니한다.
◇ 용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오늘의 일진은 천신이 나를 도우니 기쁜일이 많도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귀인의 도움도 있고 운기가 화통하여 만사가 여의해 진다. 그러나, 경거망동은 금물이니 좋은 운기에 겸손함이 필요하다.
76년생 : 재운이 좋으니 기회를 놓치지마라.
64년생 : 우연히 재물을 얻어 하루아침에 부자되는 운이다.
52년생 : 원기가 서로 생하니 백사가 유통하도다.
40년생 : 겁살이 침노하니 도둑을 조심하라.도둑은 안에서 발생한다.
◇ 뱀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선악을 잘가려 사람을 두면 만사가 형통하리라. 귀인과 악인이 주위에 있으니 어찌 구분하기 쉬울 것인가 하지만, 좋은말은 독이 되고 듣기 싫은 말은 약이 됨을 명심하고 행하길 바란다.
77년생 : 재운은 오는데 싸움으로 체면이 상한다.
65년생 : 명예에 뜻을두니 금전에 손해가 많다.
53년생 : 가믐에 비를 만나니 잊고 있든 것이 재물이된다.
41년생 : 백사에 흠이 없으나 화재를 조심하라
◇ 말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하, 건강운 : 상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도처에 영광이고 가는 곳마다 환영이다. 오늘의 일진은 뜰안에 만가지 꽃들이 봄을 만나 개화한 모습과도 같으니 모든 일들이 여의해지고 기분마저 화평하다.
78년생 : 새로운 일거리가 나선다. 잘 고르면 평생 일이다.
66년생 : 운수가 대통하니 재수가 여의 하도다.
54년생 : 한 집안이 평안하니 모든 일들이 다 이루어진다.
42년생 : 운이 서방에 있으니 범이 날개가 나도다.
◇ 양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오늘의 일진은 집안에 모두 한마음이니 꾀하는 일을 이룬다. 가화만사성이라 가정이 화평하면 모든 이루고자 하는 일들이 잘 이루어짐과도 같으니 가족간의 화목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79년생 : 혼미한 중에 후배가 도우니 나도 도움을 주라.
67년생 : 경쟁자가 도리어 나를 도우니 마음을 바로 씀이다.
55년생 : 처마밑에 신발도 신어야 내것이지 무엇이든 잘 보존하라.
43년생 : 그 동안 모르게 한일이 명예을 높이는 일이된다.
◇ 원숭이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좋은 것이 변하여 흉하게되니 망녕되이 움직이지마라. 길함에 액이 낄 우를 범할 수 있으니 가벼히 행하지 말라.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침착히 처리 할 것이니 꿔이 변하여 닭이 안되도록 주의하라.,
80년생 : 애정행로에 방해가 많으나 힘으로 밀어붙이니 성사된다.
68년생 : 뜻밖의 재물을 얻을수니 기회를 잃지마라.
56년생 : 손재수로 기분이 망가지나 잃은만큼 들어온다.
44년생 : 안들어 옴을 원망마라 나중에 다 들어온다.
◇ 닭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오늘의 일진은 마음을 맑게하고 욕심을 작게하면 자연히 몸이 편하도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과욕으로 인해 일을 그르칠수 있으니 지나친 욕심은 버리길 바란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힘이 필요하다.
81년생 : 내가 남을 속이면 남도 나를 속이는 일이 많다.
69년생 : 몸이 재운에 태워지니 동산이 환하도다.
57년생 : 나르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이롭게 대인을 만난다.
45년생 : 반드시 재물을 얻는다 아니면 집안에 좋은 일이라도 생긴다.
◇ 개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시운이 길함을 만났으나 마음이 바르고서 얻어진다.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이나 과욕으로 인해 길함을 잃을 우가 있으니 오늘의 일진은 망동하지 말고 은인자중함이 필요하다.
82년생 : 우연히 재물을 얻을 운이다.
70년생 : 걱정하지말고 꾸준히 노력하면 다시 일어선다.
58년생 : 자존심을 버리면 길성이 보인다.
46년생 : 투기심을 버리고 조용히 지내면 손재는 면한다.
◇ 돼지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어린 나무를 심으니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이룬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처음은 미약하나 후에는 많은 결실을 보게 됨을 의미한다. 노력하지 않은 가운데서는 기대하기 어려우니 열심히 매진하라.
83년생 : 나쁜 생각을 많이하면 나쁜일이 많이 일어난다.
71년생 : 동방에 길함이 있고 서방은 불길하다.
59년생 : 비가 순조롭고 바람이 알맞게 불어주니 재수가 대통이라.
47년생 : 몸가짐을 겸손히하니 여기저기서 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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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쥐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위태로운 기운이나 하늘이 외면하지 않는 운세이니 위기를 면하리라. 다소 어려움에 국면하였다 해도 노력하는 가운데 길함이 유하니 지혜를 발휘하여 난제를 해처나감이 좋은 괘다.
84년생 : 친구가 위기를 넘겨주는 지혜를 만드니 친구를 곁에 두라.
72년생 : 조용한 달밤에 잔에 가득한 술을 희롱하는 격이라 얻음이 크리라.
60년생 : 가슴을 졸이고 힘들게 하든 일이 서방 귀인의 출현으로 위기를 넘긴다.
48년생 : 구설 시비만 잘 피하면 늦게라도 힘든 일이 풀리는 기운이로다.
◇ 소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수 있다는 교훈을 거울 삼아 오늘의 일진은 맑은 정신만 가지면 어떠한 어려운 일도 열어나가는 힘이 될 것이다. 다소 불리하더라도 재갈공명의 지혜를 발휘함이 길한 일진이다.
85년생 : 상 받을 일이나 칭찬 듣는 일이 있어 즐겁고 재수도 길하리라.
73년생 : 이동 변동 수라 이사는 좋으나 직장 건은 불길하니 변동하지 마라.
61년생 : 일신에 영화가 없으면 큰 재물이 생기는 기운이니 준비하라.
49년생 : 새로운 일로 힘든 운세를 밟아가나 오후부터는 좋아지리라.
◇ 호랑이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오늘의 일진은 어둠에서 불을 만난 격이라 어려움에서 풀려 나오고 재운도 열린다. 그동안 쌓아 놓았던 실력과 공덕이 이제야 빛을 발할 것이니 운기가 좋을 수록 경거망동하지 말고 운맞이를 잘하라.
86년생 : 낙마수가 엿보이니 넘어져 다침을 조심하면 재수는 대길하리라.
74년생 : 새로운 계획이 초장부터 막힘이오나 기운은 상승하니 더 노력하라.
62년생 : 금전 문제는 돌다리도 두들기는 지혜가 필요한 날이로다.
50년생 : 토지 문제로 고통받든 일이 해결 기미를 보이니 잘 열어보면 좋으리라.
◇ 토끼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지 말라. 노력 없이는 되는 게 없는 것이라 크고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라.오늘의 일진은 노력하는 가운데 얻음도 클 것이니 안일한 생각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지어다.
87년생 : 매일 하든 것 외에 외출을 삼가라 얻는 것이 하나도 없으리라.
75년생 : 중요한 물건을 잃은 기운이라 정신을 다른 곳에 팔지 말 것이로다.
63년생 : 마음만 잘 먹으면 재운이 상승하니 들어오는 것이 많으리라.
51년생 : 밝은 기운이 내려오니 미루어오든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 좋으리라.
◇ 용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과묵하는 가운데 길함이 있을 것이니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라.소리 없는 조용한 시작이 많은 것을 열어 가는 길이 되리라. 운기가 좋을 수록 은인자중함이 길할 괘다.
76년생 : 어두운 곳에 밝음을 주는 마음을 가지면 즐거운 하루가 되리라.
64년생 : 서쪽에서 나타나는 사람을 조심하라 구설 시비를 가져온다.
52년생 : 재운이 상승하니 좋으나 투자는 안정 후에 생각함이 좋으리라.
40년생 : 오래된 문서에 매매 기운이 오나 그대로 지킴이 좋으리라.
◇ 뱀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자금유통이 잘되어 도모하는 일에 걸림이 없을 것이나 타인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재운은 열려오나 금전 문제가 불씨가 되어 사람을 힘들게 하리라. 타인을 둘러보는 자비를 가짐이 길한 일진이다.
77년생 : 금전 면에 욕심이 발동하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 조심하라.
65년생 : 자금 융통은 잘되나 하려든 일에 막힘이 있어 마음 고생이 심하리라.
53년생 : 서쪽에서 귀인이 나타나니 계약 건은 해결기미를 보이리라.
41년생 : 체통이 무너지는 수라 모든 자리에서 말조심을 하여야 하리라.
◇ 말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상
오늘의 일진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지 못하면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라. 세상을 삐뚤게만보면 모든것이 삐뚤어지니 맑은해안을 가지고 세상을 살핌이 길한 일진이다. 모든 것이 내 마음 먹기에 달렸으니 어찌, 모든것이 먼저 그르다 하겠는가.
78년생 : 잘 받아들이면 많은 것을 얻을 것이나 불평하면 모든 것이 어려우리라.
66년생 :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는 기운이나 과신하면 좋은 기운을 망치리라.
54년생 : 손재수가 문을 두드리니 돈주머니를 잘 간수함이 좋을 것이리라.
42년생 : 지출 문제에 조금만 신경 쓰면 금전 운은 아주 좋은 날이 되리라.
◇ 양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처음에는 서글프고 힘들 것 같으나 해보면 할만하고 도움도 받으리라.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도 역시 싫어하니 남에게 미루지 말것이니 스스로 행하는 가운데 길함이 있을 것이다.
79년생 : 자세히 관찰해보면 안 되는 일없을 것이니 미리 겁먹지 말도록 하라.
67년생 : 아래위를 잘 조율하면 어려운 일이 없고 재수도 열릴 것이로다.
55년생 : 사면초가로 막히든 일이 풀릴 기미가 보이니 힘을 가중해 보라.
43년생 : 기초가 흔들리는 격이라 모든 일을 면밀히 조사함이 좋으리라.
◇ 원숭이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인간구설로 인해 일신이 곤고해지니 미리알고 대처함이 길하게 작용할 것이다.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질투 경쟁으로 모든 일이 막힘을 보이니 대인관계에 전력을 다하라. 미운이 떡하나 더 준다는 속담을 거울 삼으라.
80년생 : 과대망상을 삼감이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니 안정하라.
68년생 : 큰 일이 눈앞에 다가오니 잘 처리하면 큰 소득이 있으리라.
56년생 : 신경성은 모든 기관을 나쁘게 하는 것이니 과한 과민성을 피함이 좋다.
44년생 : 힘 안 들이고 되는 게 없는 법이라 작은 것도 공을 드리면 좋으리라.
◇ 닭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순풍에 돛단 듯 모든 일들이 잘 풀려 나가나 아는 길도 물어가고, 돌다리도 두드리라는 속담을 거울 삼으라.모든일에는 경쟁과 질투의 눈이있으니 어찌 길함만을 얻으리요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려가나 걸림돌은 항상 도사리니 조심해야 한다.
81년생 : 막히든 금전 문제도 해결되고 애정 문제도 맺어지는 기운이다.
69년생 : 힘든 일로 동분서주하나 남쪽에서 귀인이 나타날 수라 잘 찾아 보라.
57년생 : 기발한 발상이 오늘의 어려움에서 탈피하는 원동력이 되리라.
45년생 : 역 마에 발동이 걸리니 움직일 일은 생기나 원 행은 곤란을 초래한다.
◇ 개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눈 속에서 자라는 생물이 있는 것이라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이 보인다.추운한파가 지나가면 새봄이 돌아 오듯 웅크렸던 새싹들이 새봄을 알리리라. 고통속에 피는 꽃이 더욱 아름답듯 인내하는 가운데 길함이 더욱 빛날 것이다.
82년생 : 무슨 일이든지 오늘은 양보하는 것이 재수를 열어 가는 길이 되리라.
70년생 : 투자에 길운이 비치나 여유가 없는 것이라면 어려움에 처하리라.
58년생 : 밖으로 내보일 때가 아니니 잘 덮어두고 키워야 성공하리라.
46년생 : 새로운 일에 사기성이 깃 들었음이라 전후 사정을 잘 살펴야 한다.
◇ 돼지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동분서주할 괘이니 피어오르는 기운이 무엇인지 갈피를 못 잡으니 길흉을 어찌하랴.들어오는 운이 길함인지 흉함인지 스스로 알지 못하니 이럴수록 정신을 가다듬고 역학인에게 상담해 보면 어떨런지.
83년생 : 참신한 아이디어로 많은 것을 얻을 상이라 머리를 잘 쓰면 좋으리라.
71년생 : 친구 동료가 힘이 되어 일을 풀어나가는 상이라 좋은 운세가 열리리라.
59년생 : 지나간 일을 가지고 상심만 한다면 뒷일이 걱정이로다.
47년생 : 허망함을 털지 못하면 다시 어려움을 만날 것이니 버릴 것은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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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쥐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어려움에 봉착하였다고 진리에 어긋난 일을 실행한다면 화가 나에게 미칠 것이니 분수에 맞게 행동할 것이며 경거망동은 피해야 할 일진이다. 경우에 어긋난 일을 하면 그 같은 일을 반드시 당하는 것이리라. 조심하라.
84년생 : 바쁜 만큼 소득은 없는 날이니 바라지 말고 일만 줄인다고 생각하라.
72년생 : 정리하는 시기라 마음도 업무도 차분한 마음으로 처리해야 한다.
60년생 : 금전 운이 불길이라 나가는 것만 많고 들어오는 것은 없으리라.
48년생 : 무리한 운영이나 많은 것을 바라면 힘들고 손재만 크리라.
◇ 소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운수가 불길하여 도모하는 일이 이룸이 적으니 일신상에 곤고함을 느끼게 되는 일진이다.자중하여 길한 운이 올 때까지 기다림이 좋은데 기분대로 움직이면 세상도 흔들리는 것이라 자제함이 좋으리라.
85년생 : 말을 잘 듣거나 말을 잘해보면 재수가 열려 얻는 것이 많으리라.
73년생 : 과음을 삼가고 건강을 돌봐야 일을 끝맺음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61년생 : 오랫동안 소식 없어 기다리던 곳에서 연락이오니 즐거운 하루가 된다.
49년생 : 오늘은 조용히 집안에서 가족들과 보냄이 손 재를 면하고 좋으리라.
◇ 호랑이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어렵고 귀찮은 일이라고 꺼리거나 미루지 말라.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도 하기 싫은거라는 생각으로 일을 처리하라.일의 결과가 났을때 뿌듯한 마음과 칭송의 소리가 자자할 것이니 인내하며 매진할 일진이다.
86년생 : 다들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해주면 내 마음도 뿌듯하고 이득이 생기리라.
74년생 : 여러 가지 바쁜 중에도 인사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편한 운세가 된다.
62년생 : 문서 문제는 뒤로 미룸이 손해를 덜 보는 것이 되리라.
50년생 : 사람 단속을 특히 집안 식구들을 잘 돌봐야 할 일이 생기리라.
◇ 토끼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하
순간적인 실수가 사람잡는 일을 만드는 것이라 실수를 조심해야한다. 오늘의 일진은 경거망동하여 자의나 타의에 손재를 입히기 쉬우니 경거망동을 필히 삼가하라. 혹여나 하는 마음이 역시나 하고 후회할 괘다.
87년생 : 좋은 기운이나 과신으로 망동함은 재수를 쫓는 것이 되리라.
75년생 : 계산착오가 많이 일어나는 일진이라 서두지 말고 처리하라.
63년생 : 투자 문서 계약 등은 모두 불길하니 조용히 관망함이 좋으리라.
51년생 : 금일은 낙천적인 사고방식으로 열어나가야 일이 풀릴 것이리라.
◇ 용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일진이 길하니 상을 받거나 작은 재물이라도 얻게 될 괘다. 이는 평소에 열심히 한 결과가 나타나는 운세이니 잘 받아들이면 이득이 클 것이다. 자만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을 잃지 말라.
76년생 : 재수가 열리니 상 받을 일들이 많이 생기고 금전운도 좋으리라.
64년생 : 금전 운은 약하여 나가는 것이 많으나 주위에서 인정해주니 즐겁다.
52년생 : 계획대로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 잘 열려 가는 기운이다.
40년생 : 가려던 길을 안 갈 수는 없으나 쉬어감이 손 재를 덜 하는 것이 된다.
◇ 뱀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다보면 놓치는 것도 많은 법이라 멀리 내다보라. 급하다고 눈앞의 이익만 취하다 멀리있는 큰 것을 취할 여력이 부족해 지니 그림에 떡이 될 우려가 많다. 모든일을 급하게만 하지 말라.
77년생 : 일을 만들면 어려움이 많은 기운이니 하던 일이나 열심히 하라.
65년생 : 금전 운이 상승되니 새로운 투자에 눈을 돌려봄이 좋으리라.
53년생 : 거래 관계에 특히 금전 이동에 많은 신경을 기우려야 잘 돌아가리라.
41년생 : 궂은 일에 나서지 않음이 건강에 좋고 아예 외출을 삼감이 좋으리라.
◇ 말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경쟁과 방해로 뜻하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는 힘든 운세이니 조심하라.마음을 비우는 가운데 채워짐이 많을 일진이니 운세의 흐름에 한탄하지 말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78년생 : 일은 찾아서 해야지 시켜서 하는 일은 힘이 많이 드는 것이다.
66년생 : 실물수가 찾아오니 주머니 조심을 해야하고 지출에 신경을 써야한다.
54년생 : 가벼이 보고 넘겼던 일이 마음 상하게 하고 체면을 상하게 하리라.
42년생 : 덕담을 내려주면 기분 좋은 일이 많이 생기리라.
◇ 양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노력 하는 가운데 득이 있을 것이니 열심히 매진하라. 그러나 일신에 곤고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되는 일과 안되는 일을 구분하라. 힘으로 되는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있으니 조율을 잘해야 한다.
79년생 : 지혜와 용기를 합하여 나아감은 어려운 일에도 막힘이 없을 것이다.
67년생 : 괴이한 일로 놀랠 수라 정신을 잃지 않아야 힘든 일을 처리하리라.
55년생 : 피곤한 하루가 예상되니 간단하게 처리하고 쉬어감이 좋으리라.
43년생 : 금전 운이 대길하니 문서를 움직여 보면 성사되고 이익 크리라.
◇ 원숭이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운기가 점차 좋아지니 노력하는 가운데에서 얻어짐도 많을 것이다. 밝은 태양을 보려면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라 열성을 다하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80년생 : 노력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니 힘을 기울여 보라.
68년생 :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기운이라 힘내서 전진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56년생 : 하강하는 기운을 되살려내는 힘이 필요한 때이니 정진하라.
44년생 : 미루어 오던 것을 결정해야 할 시기라 한쪽은 버리는 것이 좋으리라.
◇ 닭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귀인이 입성하여 나를 도와 일을 성사 시킬 것이다. 오늘의 일진은 노력하는 가운데 모든것이 순조로워 지는 괘다. 올바른 행동에 귀인의 원조가 가세되니 모든 것이 열려 가리라.
81년생 : 윗사람의 도움으로 침체의 늪에서 일어서고 사람과의 갈등도 풀린다.
69년생 : 금전으로 골머리를 앓던 일이 해결기미를 보이니 기회를 잘 잡아라.
57년생 : 오늘은 고집만 버리면 모든 일에 합의가 잘되어 편하게 열리리라.
45년생 : 경기 하강 세라 모든 경제 문제는 다음에 처리함이 길하리라.
◇ 개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참신한 아이디어가 일의 원동력이 되는 것. 새로운 지혜가 필요하다.예전의 방법으로는 일의 성사가 어려우니 좀 더 참신한 아이디어만이 성패를 가름하게 된다.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하라.
82년생 : 사랑도 건강해야 지키는 것이라 몸이 불편하면 이룰 수가 없으리라.
70년생 : 구태 의연함에서 벗어나야 새로운 일을 해나갈 수 있으리라.
58년생 : 현재의 기운을 잘 읽음이 재수를 열어가고 힘든 일은 해결하리라.
46년생 : 손자에게 배운다는 말이 있듯이 아랫사람에게 물어 일을 처리하라.
◇ 돼지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탁상공론이다. 이론만 내세워 곤란을 당할 수라. 실질적인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라. 운기가 불길하니 경험하지 않은 일로 인해 손재가 따를 우려가 있다. 직접 몸으로 부딪혀 실전의 경험을 쌓을 것이니 성패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83년생 : 바른 말이 통하지 않은 기운이니 말을 아끼고 시간을 벌어보자.
71년생 : 탁상공론만 내세우면 힘드는 운세라 현장을 확인하고 결정하라.
59년생 : 앉아서 되는 일은 없는 것이라 콩이든 팥이든 확실히 보고 처리하라.
47년생 : 모든 것이 침체되는 기운이니 억지로 처리하면 위기가 오리라.
※ '운수 좋은 날'은 운세 전문 사이트 '운세사랑'으로부터 띠별운세 자료를 제공받아 읽기 쉽고 보기 좋게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 쥐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위기가 곧 호기라 어려운 고비가 있으면 좋은 기운이 열리는 법이다.
84년생 : 어려운 시간을 통과하니 오후부터는 생각대로 열릴 것이로다.
72년생 : 아무리 재주를 부려도 통하지 않으니 시간을 보내야 일이 열린다.
60년생 : 금전 운은 멀리 가고 힘든 가슴만 쓰리니 투자는 금물이다.
48년생 : 지금의 위기를 지혜로 잘 버텨야 좋은 재운을 만나리라.
◇ 소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주위를 배신하는 행위는 미래가 없는 것이다.
85년생 : 친구와 감정은 훗날 다시 좋아지는 것이니 막말은 삼가라.
73년생 : 힘든다고 수월한 곳에만 눈을 두면 인정을 받지 못하리라.
61년생 : 혼자서 지켜온 보람이 나타나 동료들이 알아주어 재수 또한 열리리라.
49년생 : 금전 운은 불길하니 출구를 조심하고 상대와의 교분을 두터이 하라.
◇ 호랑이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이라 모든 일은 상대를 잘 돌보면 득이 있으리라.
86년생 : 막히고 어렵든 일이 열리니 금전 또한 약간 풀리니 조금은 들어온다.
74년생 : 약간의 재운은 열리나 큰 일은 뒤로 미루고 조용히 지나감이 좋으리라.
62년생 : 사석에서 공적인 일은 즉흥적으로 발설하면 구설을 일으키리라.
50년생 : 앞장 설 때가 아니니 뒤에서 관망함이 재수를 여는 길이 된다.
◇ 토끼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오늘의 좋은 기운을 미래까지 연장하려면 지금 겸손한 마음을 가져라.
87년생 : 안 되는 것 없이 잘 돌아가나 망동은 삼감이 뒤가 편하리라.
75년생 : 귀인이 나의 마음이라 마음 잘 움직이니 일이 풀리는 구나.
63년생 : 자금 문제는 해결되나 시원치 않으니 무리한 투자에는 눈을 감아라.
51년생 : 일이 꼬여 힘든 운이니 오늘은 구경만 하고 처리 결정은 뒤로 미뤄라.
◇ 용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집 없다해도 사방에 빈터라 없다 소리하지 말고 노력으로 이루자.
76년생 : 계획만 세워보는 날이지 실전으로 움직임은 미루는 것이 상책이다.
64년생 : 말이 씨가 되어 구설을 부르니 공 사석에서 특히 주석에서 조심하라.
52년생 : 큰 용기를 내어봄이 운세를 여는 길이니 움직임을 보일 때다.
40년생 : 잡아둔다고 내 것 되는 게 아니니 풀 때는 풀어야하는 것이다.
◇ 뱀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쓴 약이 몸에 좋다고 힘들게 한 것이 운세를 열어 가는 것이다.
77년생 : 귀는 길게 열어라 했으니 남의 좋은 충고를 잘 들으면 이득이 크리라.
65년생 : 변동수로 새로운 좋은 자리를 보여주는 운이라 잘 선택하라.
53년생 : 금전 운은 약하나 주변을 잘 돌아보면 들어오는 것은 있으리라.
41년생 : 우습게 생각했든 것이 지금 효자로 돌아오는 격이라 얻음이 크다.
◇ 말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상, 건강운 : 상
밭이 아무리 좋아도 종자가 좋지 않으면 잘 자라지 않는 것이다.
78년생 : 원초적인 일에 역점을 두면 좋은 결과를 얻고 재수도 풀리리라.
66년생 : 사행심이나 투기성을 띄는 운이라 꾀임에 조심해야 면하리라.
54년생 : 안전 운행이 관 재를 멀리하는 길이 되고 손재수도 물리치리라.
42년생 : 급할수록 돌아가는 것이 어려운 하루를 잘 넘기는 것이 된다.
◇ 양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개인 하늘에 아름다운 무지개는 잠시 빛나는 것이라 길지는 않다.
79년생 : 당장은 좋은 일로 날아갈 것 같으나 떨어질 때를 생각하고 겸손하라.
67년생 : 작은 고민은 풀리나 바라든 금전은 생각대로 안 되니 더 기다 리라.
55년생 : 좋은 시작이나 끝날 때에 문제가 많으니 뒤를 생각하고 결정하라.
43년생 : 용돈이 많이 생겨 좋으나 나가서 주석에서의 구설을 조심하라.
◇ 원숭이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인생 길이란 넘을수록 더 험한 길이 나서나 좋은 결과는 있는 것이다..
80년생 : 협력관계로 얻을 수 있는 운이니 친구를 찾아봄이 좋다.
68년생 : 말 안 통하는 상대가 기다리니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현명하다.
56년생 : 어렵게 생각한다고 잘 풀리는 것이 아니니 쉽게 생각하고 임하라.
44년생 : 성운이라 오랫동안 힘들게 하든 일이 풀리는 기운이라 놓치지 마라.
◇ 닭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두 가지를 쫓다 하나도 못 잡을 기운이라 하나만 취함이 좋으리라.
81년생 : 다른 생각하지 말고 한가지 일에만 전념하면 이루어지리라.
69년생 : 이성 문제가 불씨로 살아나 마음을 불편하게 하니 조심하라.
57년생 : 움직임이 변동수로 이어져 갈등을 자아내나 변동 않음이 좋으리라.
45년생 : 불길을 헤쳐온 인생이나 새로운 불은 무서우니 건드리지 말라.
◇ 개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많은 것을 원하나 많아지면 고대할 때가 좋은 것이지 허망하리라.
82년생 : 욕심을 부릴수록 정신이 혼미해지니 꾀임에 조심하라.
70년생 : 많이는 아니나 들어올 만큼은 들어오니 욕심을 삼가라.
58년생 : 인사할 곳에 제대로 하면 재수가 열려 엉뚱한 이득이 생긴다.
46년생 : 갓 끈과 치마끈이 풀리는 격이라 이성 망신을 두려워하라.
◇ 돼지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하
내 정신이 흐리면 남도 바보같이 보이니 바보 같은 자에게 속는다.
83년생 : 얻으려다 쪽박 깨는 격이라 욕심을 접는 것이 손 재를 이겨 나가리라.
71년생 : 윗사람에게 말실수로 힘든 일이 생길 것이니 주석에서 조심하라.
59년생 : 투자에 공들여 봄이 좋고 변동은 불가하니 지킴이 좋으리라.
47년생 : 자작 함정이 무서운 것이라 본인이 함정을 파는 일을 삼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