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나는 서예에 입문한 지 8년이 넘었다. 그런데 덧없고 가뭇없고 하염없다. 붓을 잡기 전에는 내가 그래도 좀 쓸 줄 알았더니 도무지 나아지는 게 없고, 지금 서예에 기울이는 열성과 공부시간은 시작 때보다 훨씬 못하다.
이틀 전 서예모임 겸수회(兼修會)가 가을 소풍을 다녀왔다. 1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하는 겸수회 소풍은 일반 단체의 나들이와 다르다. 그 계절에 맞는 시문을 선정한 다음 지필묵을 준비해 참가자들이 돌아가며 한 글자씩 써서 글을 완성하는 게 주 행사다.
이번 가을엔 단풍을 노래한 연산군(1476~1506)의 한시와, ‘가을’이라는 한글 가곡이 선정됐다. 연산군의 시는 이렇다. “단풍잎 서리에 취해 요란히도 곱고/ 국화는 이슬 젖어 향기가 난만하네/ 천지조화의 말없는 공 알고 싶으면/가을 산에 올라 그 경치 보면 되리”[楓葉醉霜濃亂艶 菊花含露爛繁香 欲知造化功成默 須上秋山賞景光] 연산군의 시를 쓴다는 데 놀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 진지하고 즐겁게 참여했다.
이렇게 함께 글씨를 쓰다 보니 내가 참 엉터리라는 걸 다시 알게 됐다. 스스로 한심 두심 세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붓의 소풍’은 나들이를 통해 우의를 도모하면서 각자의 자세와 내공을 점검하는 의미를 갖는데, 남들 앞에서 붓 잡고 글씨를 쓰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초창기에 덜덜 떨었던 나는 지금도 남들이 보는 데서 글씨를 쓰는 게 영 어색하고 서투르다.
나는 모든 서예 단체가 이런 형식의 소풍을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우리 서예 스승인 하석 박원규 선생님의 창안이었다. 글을 고르는 것, 지필묵을 준비하는 것, 막내부터 역순으로 글씨를 쓰는 것, 그리고 끝난 뒤 식사와 산책으로 마무리하는 전 과정이 소풍이면서 학습이다. 노는 듯하지만 간단없이 이어지는 공부인 것이다.
이런 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 벼루가 들어가는 말로는 세연례(洗硯禮)가 있는데, 글을 짓거나 책을 읽는 모임을 마칠 때 베푸는 잔치를 뜻하는 거라서 의미가 좀 다르다. 선비들이 글을 지으며 노니는 만남과 풍류의 모임을 아회(雅會)라고 하니 필아회(筆雅會) 또는 묵아회(墨雅會)라고 불러볼까. 붓을 모아 시문을 완성하니 합필(合筆)아회라고 해볼까. 그러나 찾아보니 합필은 여러 필의 토지를 합쳐 한 필로 만든다는 말이었다. 합필이 안 되면 거꾸로 필합(筆合)은 어때? 필합아회, 발음하기 쉽지 않다. 붓잔치, 즉 필연(筆宴)은 어떨까. 춘필연 추필연 식으로 쓰면? 그것도 좀 어색한 것 같다. 그러면 기초로 돌아가 그냥 알기 쉽게 필묵회(筆墨會)?
이렇게 이름을 궁리하느라 자료를 찾다가 영조~순조 연간의 문신 권상신(權常愼, 1759~1824)의 소풍 이야기를 읽게 됐다. 그는 1784년 3월(물론 음력) 어느 날 벗들에게 남산 꽃놀이를 제안한다. 비가 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에 제1조, 제2조 형식의 ‘남고춘약’(南皐春約, 남산 봄나들이 조약)을 정했다. 빗속에 노니는 것은 꽃을 씻어주니 세화역(洗花役), 안개 속에 노니는 것은 꽃에 윤기를 더해주니 윤화역(潤花役), 바람이 불면 꽃이 떨어지지 않게 지켜주는 것이니 호화역(護花役)이라고 했다. 간단히 말해 날씨 핑계 대지 말고 놀러 가자는 것이다.
꽃을 꺾으면 벌주, 잘 걷는다고 혼자만 가도 벌주, 규정시간이 지났는데 글을 못 짓고 끙끙거려도 벌주, 술잔을 잡고 가만있어도 벌주다. 재미있는 건 술이 약한 사람에 대한 배려다. 도저히 못 마시겠으면 술을 꽃 아래에 부으면서 머리를 조아려 “삼가 꽃의 신이시여. 주량을 살피소서. 주량이 정말 적어 술을 땅에 붓습니다” 하고 고해야 한다.
권상신의 소풍 규약은 봄나들이, 그러니까 구체적으로는 진달래꽃이 필 때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가을에 국화 필 때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음력 9월이며 음력 9월의 별칭은 국추(菊秋), 국월(菊月)이다. 가을은 곧 국화다. 계절은 23일 상강, 25일 중양절(음력 9월 9일)로 이어진다. 가을은 깊어지고 깊어져 어느덧 저물려 하고 있다.
“푸른 물가 한두 잎 낙엽이 지고/ 들리느니 개울물 소리뿐이네/ 타다 못해 지는 잎 내 어이하리.” 그날 우리가 함께 쓴 한글 시는 내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전범중)이 짓고 음악 선생님(박일환)이 작곡한 노래다. 50여 년 전에 배웠지만 여전히 새롭다.
이렇게 함께 어울려 글씨를 쓴 다음 즐겁게 점심을 먹고 우리 동연(同硯, 서예를 함께 배우는 동료 학우)들은 한강변을 거닐었다. 유쾌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햇살이 반갑고 바람이 시원했다. 한강변에 나온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가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붓을 가지고 놀았지만, 사실은 그날도 붓이 날 가지고 놀았다. 언제까지 이래야 되나? 언제나 붓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아니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건지. 강변을 거닐며 싱거운 소리를 연발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계속했다.
그런데 우리의 이런 소풍을 대체 뭐라고 해야 되지? 좋은 이름이 없나? 누가 좀 멋지고 적확한 말을 찾아내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말 후사할 텐데(후사=일이 다 끝난 뒤 고맙다고 말로 때우는 것).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아아, 잠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금지곡’을 먼저 발표합니다. 이 자리를 즐겁고 흥겹게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이니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선구자’ 부르지 마십시오. 일송정 푸른 솔이 혼자 늙어가거나 말거나 내비두세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실개천이 옛이야기 지줄대는 ‘향수’도 금지곡입니다. 이걸 눈치코치 없이 끝까지 다 불러 사람들 지겹게 하고 ‘꿈엔들 잊힐리야’ 하게 만드는 건 바보입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딴 디 가서 부르세요. 여기는 칠순, 팔순잔치 하는 곳 아닙니다. 또 엄정행처럼 부르든 다른 사람처럼 부르든 ‘오 내 사랑 목련화야’를 외치는 사람도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도 제발 참아주십시오. 10월만 되면 오나가나 이 노래 땜에 아주 지겹습니다. 이런 거 말고 차라리 ‘땡벌’, ‘아파트’ 이런 걸 부르세요. 요즘 유행하는 ‘테스형’도 좋습니다. 아니면 확 그냥 ‘인천에 성냥공장…’을 부르시거나.
내가 모임 사회를 볼 때 맨 먼저 한 말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말한 것도 있고 그렇게 말하려 한 것도 있다는 거지, 그렇게 다 말한 건 아니다. 어느 모임 무슨 행사든 여흥 순서가 되면 정말 눈치코치 없이 장황하고 지루하게 지 명곡을 너무도 진지/성실하게 불러 남들을 지겹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애국가는 죽어도 4절까지 다 안 부르면서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를 다섯 번이나 읊어대는 사람도 봤다.
위에서 발표한 ‘금지곡’ 중에서도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이야기해볼까. 지금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결혼식장에 가지 않고 돈만 부치는 경우가 많지만, 작년만 해도 10월이면 이 노래를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하루에 두 번 들은 날도 있다. 클래식계의 ‘잊혀진 계절’이라나 뭐라나 10월만 되면 꼭 듣게 되는 ‘제철 음악’이다. 어떤 피아니스트가 하루 세 곳에서 연주한 적이 있다고 쓴 글도 보았다. 앙코르로 무슨 곡을 원하느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이 곡을 꼽는다고 한다.
대충 흘려들어서 가사도 외우지 못하지만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라고 시작해서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이렇게 끝나는 노래다. 그런데, 들을 때마다 난 느끼하고 오글거리고 닭살이 돋는 기분이 든다. 가사 중 ‘바람[願望]’을 ‘바램’이라고 하는 것도 영 귀에 거슬린다(차라리 안 부르고 말지!).
난 왜 이 노래를 싫어할까. 사랑과 행복한 만남을 이야기하는 노래이고 축가인데. 난 왜 이렇게 사람이 못되고 비뚤어졌지? 그래서 어느 날 가만히 이 노래가 싫은 이유를 생각해봤다. 노래에는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가 나오지만, 난 이 노래가 싫은 이유를 알아야겠더라. 결론은 뭔가 박제된 감성, 획일화한 도시락 정서, 상투적인 사랑 표현, 곡의 단조로움과 되풀이, 그리고 강제된 반복 청취, 이런 거 때문인 거 같았다. ‘세상 살아가면서 이보다 더 좋은 게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알아?’ 가사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다.
알고 보니 이 노래의 원곡은 1995년 혼성 2인조 시크릿 가든이 발표한 ‘봄의 세레나데’(Serenade to Spring)였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봄노래를 가을노래로 싹 바꾼 건데, 그것 자체는 뭐라 할 수 없겠지만 나라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하기야 봄보다 가을이 더 좋을 수 있고, 결혼이나 만남에는 수확의 계절이 더 어울리겠지만.
나는 좌우간 인생에 도움이 되는 좋은 이야기, ‘차카게 살자’류의 미담이나 교훈이 되는 에피소드 이런 걸 누가 보내오면 카톡이든 메일이든 대부분 삭제하기 바쁘다. 그중엔 가짜뉴스나 왜곡된 것도 많다. 자기 글이 아니라 만들어진 기성품 인사(명절 때는 물론 입춘, 한로 이런 절기 때나 한 주일의 시작인 월요일에도 보내는 사람이 있다)도 받는 족족 삭제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싫어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기분인 것 같다.
그런데,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같은 노래는 왜 들어도 지겹지 않을까? 그 노래도 가사는 대충 뻔하고 교과서적인데, 나나 무스쿠리의 목소리로 들어서 그런 걸까? 부르는 사람에 따라 노래를 받아들이는 게 다를 수도 있겠다 싶다. 나는 ‘유 레이스 미 업’(You Raise Me Up)이라는 노래도 싫어했었다. 어떤 여성에게 전화를 걸면 이 노래가 나오곤 했는데, 전화할 때마다 좀 지겨웠다. 그런데 어느 날 네덜란드 가수 마틴 허킨스(67)의 목소리로 듣고부터 이 노래가 좋아졌다. 그의 살아온 이력까지 알게 되니 가사가 더 그럴듯했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도 어느 날 좋아지게 될까? 1년의 가장 좋은 계절, 내 생일이 들어 있는 달, 그중에서도 한복판인 요즘, 이 눈이 부시게 삽상(颯爽)한 날씨와 정밀(靜謐)한 풍경에는 무슨 노래든 다 좋아져야 할 텐데. 그게 정상일 텐데 말이다.
‘코로나19’ 사태로 국민들이 지켜야 할 행동지침 중 첫 번째가 마스크 쓰기다. 이제는 밥 먹을 때와 잘 때 말고는 마스크와 한 몸이다. 야외 테니스장이나 축구장 등 체육시설은 전면 폐쇄되었다. 한강 둔치에 나가 보면 답답함을 피해 나온 시민들이 모여서 음식을 먹고 마스크 쓰기와 거리두기를 제대로 지키지 않아 단속의 호루라기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면역력 증강이라는 거창한 목적을 갖다 붙이지 않아도 이제는 답답함을 피해 갈 곳은 산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마스크 쓰기는 지켜져야 한다. 등산길에서 2m 이내에 사람이 없으면 잠시 마스크를 벗어도 되지만 사람들이 옆으로 지나갈 때는 다시 마스크를 써야 한다. 그게 등산로에서의 행동지침이다.
보건당국의 지침에 절대적으로 순응하면서 북한산의 한 봉우리인 족두리봉(321m)을 셋이서 등산하기로 했다. 지하철역 ‘불광역’에서 오르는 코스와 ‘독바위’역에서 오르는 코스가 있는데 경사가 다소 완만한 ‘독바위역’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주말의 가을 하늘은 맑고 쾌청했고 기온도 산행하기에 아주 적절했다.
서울 시내의 등산로는 지하철역에서 내리면 상가나 아파트촌을 지나야 본격적인 등산로에 접어든다. 초행길 등산객은 바로 여기서 길을 헤매게 된다. 오늘도 족두리봉 진입로를 몇 번이나 물어서 겨우 찾았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전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제는 지갑을 집에 두고 나오는 사람은 있어도 마스크를 잊고 나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등산로는 제대로 정비되어 있었다. 계단이 필요한 곳은 계단이 있었고 미끄럽고 경사가 심한 곳은 잡고 올라갈 난간이 설치돼 있었다. 이런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토요일인데도 난간 설치를 하는 분들이 있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등산객이 많았다.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들도 이력이 나서 그런지 아주 잘 오르신다. 용불용설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 신체는 단련하고 쓰면 쓸수록 근육도 생기고 민첩해진다. 어르신이 그걸 몸소 증명하신다.
마스크를 쓰고 산행을 하니 숨쉬기가 불편하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마스크를 벗어본다. 그 얇은 천이 공기구멍을 이토록 막았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문득 과거 생각이 났다. 겨울에 마라톤대회에 참가했을 때다. 출발 전 영하의 날씨이면 주최 측에서 얇은 비닐 포대를 한 장씩 준다. 그 비닐이 찬바람을 상상 이상으로 막아준다. 출발해서 어느 정도 달리면 몸에서 서서히 열이 난다. 추위를 견딜 만하면 불편했던 비닐 포대는 벗어던지고 달린다. 마스크도 그렇다. 숨이 찰 때 마스크를 쓰는 것과 벗는 것의 차이는 컸다.
산행 중간중간 경치가 좋은 곳에서 인증숏도 하고 경치도 담았다. 이 중 잘 찍어서 호평받은 사진은 카톡방에 올려 공유를 한다. 시니어 친구들은 어디를 가든 인증 사진을 꼭 찍으라고 권한다. 개인적으로는 추억거리가 되고 서로 만나면 이야깃거리도 된다는 거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필름이 필요 없는 휴대폰 카메라는 인화 비용도 없고 편리함이 이만저만 아니다.
족두리봉 정상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난간도 없어 손을 짚으며 올라야 해서 위험하다. 여러 사람이 실족사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위험하다는 경고판만 붙어 있다. 자신 있는 사람만 올라 쾌감을 느껴보라는 의미일 거라고 좋게 해석해본다. 마스크를 쓰고 산행을 해보니 평소보다 숨은 더 차지만 그래도 해볼 만했다.
정상을 오르고 나서 조심조심 하산했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해장국집에 들렀다. 요즘은 어디를 가도 코로나19 영향으로 출입자 명부를 적어야 한다. 이름은 빼고 거주지 주소와 전화번호만 적으면 된다. 정부의 지시는 같을 텐데 음식점마다 대응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소규모 업소는 출입자의 체온을 재지도 않고 신분증 확인도 하지 않는다. 손님이 싫어해서 그렇다고 하지만 일손이 딸리는 것도 한 이유다. 손님들이 솔선해서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차단하려는 정부 의지에 공감하고 따라야 한다. 빨리 ‘코로나19’가 종식되어 마스크 없이 숨 한번 편하게 들이마시고 싶다.
바스락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와 사락사락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비슷하게 들려서일까. 아니면 쌀쌀한 날씨,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독서가 그 자체로 운치 있어서일까. 평소에는 바쁜 일상에 독서를 멀리하다가도 가을이 되니 괜히 먼지 쌓인 책장이 눈에 띈다. 한동안 책장 근처를 얼쩡대다 큰 맘 먹고 한 권을 집어 든다. 하지만 지적 욕구로 충만한 마음과는 달리 첫 장을 피는 순간 졸음이 쏟아지고, 하품이 난다. 평소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상황이다.
빼곡한 글자 앞에서도 잠들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책과 친해져야 한다. 그러려면 내용에 흥미를 붙여야 한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올 가을 마음의 양식을 쌓아볼 브라보 독자를 위해 도서를 원작으로 하는 넷플릭스 영화를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Eat Pray Love, 2010)
안정적인 직장과 번듯한 남편까지 모든 것을 가졌지만 어딘가 공허함을 느끼는 저널리스트 '리즈'(줄리아 로버츠)가 정해진 인생의 행로를 벗어나 계획 없는 여행을 떠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이탈리아와 인도, 발리로 이어지는 여정 동안 말 그대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며 내면을 풍요롭게 채워나가는 리즈의 모습을 통해 행복이 그리 복잡하고 거창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할리우드 배우 줄리아 로버츠의 매력적인 연기와 더불어 각기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세 여행지의 아름답고 찬란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2. 빅피쉬 (Big Fish, 2003)
다니엘 월러스의 원작 소설로, 아들 '윌'(빌리 크루덥)이 병상에 누워있는 노쇠한 아버지 '에드워드'(알버트 피니)의 허풍 가득한 영웅담을 듣고, 아버지가 떠나기 전 그의 진짜 모습을 찾아나가는 내용이다. 젊은 시절 에드워드(이완 맥그리거)의 모험담을 추적하는 윌의 또 다른 여정을 통해 가족 앞에서 영웅인 척 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가슴 찡한 진심을 그린다. 괴짜 감독 팀 버튼이 메가폰을 잡아 에드워드의 드라마틱한 모험 장면을 환상적이고 동화적으로 표현했다. 특히 촬영 당시 7000명에 달하는 엑스트라를 동원하고 6개의 서커스단, 150여 마리의 동물, 1만 송이의 수선화 등을 투입하는 등 시각적 요소를 극대화 했다.
3. 지니어스 (Genius, 2016)
유력 출판사의 편집자인 '맥스 퍼킨스'(콜린 퍼스)가 무명작가 '토머스 울프'(주드 로)의 원고를 보고 그의 가능성을 발견해 세기의 소설가로 키워낸 이야기를 담는다. 오늘날 미국에서 천재 작가로 평가 받는 토마스 울프의 실화 바탕으로, 울프의 4대 장편소설 중 첫 작품 '천사여, 고향을 보라'의 탄생 비화를 그려낸다. 스콧 버그의 책 '맥스 퍼킨스: 천재 편집자'를 원안으로 완성됐다. 연출가 겸 배우인 마이클 그랜디지가 감독을 맡아 1920~30년대 미국 뉴욕을 감각적인 미장센으로 재현했으며, 콜린 퍼스와 주드 로, 니콜 키드먼, 로라 리니 등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합류해 작품의 완성도를 더했다.
여름이 물러나면서 날씨가 선선해지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면 온몸으로 가을을 느끼게 된다. 지루했던 장마 이후 맞는 상쾌한 가을의 정취가 반가워 자칫 소홀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환절기 건강이다. 변덕스런 날씨가 반복되는 가을 환절기를 슬기롭게 넘기기 위해서는 더욱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특히 시니어들은 호흡기 질환을 조심해야 한다. 큰 일교차와 건조해진 환경으로 기관지 점막이 마르면 호흡기 기능이 악화되고 체내 면역력이 떨어져 감기, 천식 등 각종 질환이 발생할 위험이 높아진다. 늦여름과 초가을 시기에 기침이나 가래, 콧물 등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자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게다가 환절기가 되면 으레 찾아오는 미세먼지나 황사도 문제다. 미세먼지와 황사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면 기침과 재채기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또 기관지를 자극하면 세균이 쉽게 침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이는 혈관 내 염증 반응을 증가시켜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성도 크게 높인다.
결국 기관지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가을, 겨울을 건강하게 보낼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관지를 튼튼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염증 발생을 줄이며 피를 맑게 해주는 음식이 제격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로는 도라지, 오미자, 미나리 등이 있다.
먼저 도라지는 한방에서 폐, 기관지 질환을 치료하는 약재로 널리 쓰일 정도로 폐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데 제격이다. 폐뿐만 아니라 기도를 편안히 해주고 외부 자극으로 인한 기침이나 가래가 생기는 것을 막아준다. 또한 미나리는 피를 맑게 해주고 열과 염증을 가라앉히는 효능이 있다. 폐, 기관지 등 호흡기의 열을 내려 촉촉하게 만들어줌으로써 증상을 완화하는 데도 좋다. 도라지와 미나리는 양념에 무쳐서 먹기도 하고 각종 요리의 재료로 쓰이는 등 활용도가 높다는 장점이 있다.
요즘 제철을 맞은 오미자도 성질이 따뜻해 기침과 헐떡거림을 멈추게 하는 데 효과적이다. 실제로 오미자 추출물을 동물에게 정맥 주사하면 기침을 억제하고 호흡을 촉진한다는 연구 보고도 있다. 오미자는 대개 차로 마시는데, 500㎖ 물에 오미자 10~15g을 넣어 충분히 우러날 때까지 은근하게 달이면 된다.
잦은 기침과 재채기는 기관지를 손상시킬뿐더러 척추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기침과 재채기를 하면 복부의 압력이 상승하고 몸 앞과 뒤로 반동이 빠르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순간적으로 척추에 큰 부담을 주는데 허리가 약한 시니어의 경우 근육 수축과 인대 긴장으로 인해 허리 통증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별것 아닌 듯 보여도 기침은 요통을 발생시키는 주 요인 중 하나다. 심하면 척추 뼈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추간판(디스크)이 제자리를 벗어나는 요추추간판탈출증(허리디스크)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기침과 재채기는 자연스러운 면역 반응인 만큼 참기가 어렵다. 억지로 참으면 오히려 복부의 압력이 더 크게 척추에 전달될 수 있다. 따라서 기침과 재채기를 막으려 애쓰기보다는 입을 크게 벌려 시원하게 하는 편이 낫다.
기침과 재채기를 할 때 척추를 보호하는 몇 가지 요령이 있다. 먼저 기침이나 재채기가 나올 때 배에 힘을 주고 무릎을 약간 굽혀주면 척추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앉은 상태에서 기침이나 재채기가 나올 경우에는 양손으로 무릎을 잡는 것이 좋다. 주변에 벽이나 가구 등 의지할 수 있는 사물이 있다면 손으로 단단히 짚어 목과 허리가 구부러지지 않게 한다.
특히 시니어의 경우 노화로 의한 골다공증이 많이 나타나는데, 골밀도가 낮은 골다공증 환자들은 기침이나 재채기만으로도 척추 뼈가 주저앉거나 찌그러지는 ‘척추압박골절’이 생길 수 있다. 척추압박골절은 등에도 심한 통증을 유발하므로 더욱 조심해야 한다.
한방에서는 면역력을 높이고 기침과 재채기 증상을 완화시키는 치료법을 시행한다. 대표적인 게 침과 뜸이다. 이 치료법은 기혈 순환 및 경혈 흐름을 촉진하고 체내 노폐물의 배출을 도와 면역력을 상승시킨다. 또 뼈와 신경 재생 및 강화를 촉진하고 기력 회복에 좋은 청파전, 연골보강환 등 한약을 복용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몸도 큰 변화를 맞이한다. 이에 잘 적응하려면 건강한 생활 습관을 통해 면역력을 높여야 한다. 하루 30분 이상 걷기, 맨손체조 등 꾸준히 운동을 해주는 것이 좋다. 하루에 6시간 이상 수면을 취해 피로를 풀어주는 것도 필수적이다.
가을은 하늘에서 먼저 온다더니 며칠 전부터 부쩍 높고 푸르다. 바람도 제법 서늘하고 창밖 숲에 내리는 볕도 달라졌다. 어디든 내달리고 싶은 날씨다. 오후에 잠깐 인천에 다녀왔다. 오래전 살았던 곳이다. 인천을 갈 때는 늘 아는 이들이 살고 있는 이웃 마을 마실가는 듯한 기분이다. 내게 인천은 추억의 장소가 아니라 늘 내 주변에 있었던 것 같은 편안한 이웃 동네다.
이곳에 살았을 때만 해도 나는 한창 젊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빨빨거리며' 쏘다니던 때였다. 그렇게 인천 구석구석 내 발자국을 남겼다. 그러다 보니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절 한때를 보냈던 내 아이들도 마치 고향인 듯 생각한다. 아이들의 기억 속에도 자리 잡고 있는 모양이다. 서울로 떠나와서도 틈이 날 때마다 잠깐 다녀와야겠다 하면서 핸들을 돌리게 한 곳이다.
신포동 쪽에서 인성여고를 지나 전동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홍예문이 있다. 이 터널을 지나 제물포고등학교 쪽으로 자동차가 빠져나갈 때마다 어린 두 아들은 굴속을 지나가는 기분이 드는지 “와, 터널이다” 하며 좋아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아주 짧은 시간인데도 아이들은 함성을 질러댔다.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시절에 만들어진 홍예문은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다. 그래서 한자 무지개 ‘홍’ 자와 무지개 ‘예’ 자를 써서 홍예문, 또는 무지개 문이라 불렀다. 사실 일본인들은 구멍 ‘혈’ 자에 문 ‘문’ 자를 써 '혈문‘(穴門)이라고 했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산허리를 잘라 구멍을 뚫었지만 인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 무지개문이라고 했고 지금껏 홍예문은 무지개문으로도 불린다.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이곳에 지름길을 만들기 위해 응봉산 마루턱이 무지막지하게 폭파당했다. 1905년 일본 공병대가 착공했고, 중국의 유명 석수장이들까지 불렀다. 부족한 시공비용과 힘든 노동은 조선인들의 몫이었다. 결국 우리 국민들의 피땀으로 3년 만에 홍예문이 만들어졌다. 화강암 석축으로 쌓은 높이 약 13m, 폭 약 7m의 석문(石門)은 112년 전 일본인들이 물자 소송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광복 후엔 우리 시민들에게 유용한 공간이 되었다. 양옆으로 고급 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젊은 연인들에게는 멋진 데이트 코스가 되었다. 홍예문 석문 위로는 늘 영화 광고판이나 표어와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학생들이 졸업 앨범 사진을 찍던 인기 포인트이기도 했다. 지금은 많이 낡아 오랜 시간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래도 인기는 여전해서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활용되기도 하고 외부인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다.
홍예문 양옆으로 난 돌계단을 천천히 올라가 봤다. 담쟁이덩굴이 늘어진 화강암 석축에 세월의 더께가 묻어 있었다. 고즈넉한 언덕길을 걸어 석문 위로 올라서면 탁 트인 풍광이 펼쳐지고 멀리로는 인천항까지 보인다. 옆길은 자유공원과 송월동 벽화마을로 이어진다.
맞은편 계단을 이용해 내려오는데 몇 군데 예쁜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구조가 독특한 적산 가옥의 공정무역 찻집과 브런치 카페, 그리고 전통찻집의 독특한 외관이 멋지다. 그래서 이 부근이 홍예문 카페길이라 불리나보다. 담쟁이덩굴 담장 따라 이어지는 사계절의 운치 덕분에 제법 핫한 곳이다.
도심에서 이렇게 고풍스러운 멋과 함께 수수함을 간직한 곳이 있다는 게 좋다. 고갯마루에는 비록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지만 각자의 추억을 안고 홍예문을 찾는 발걸음은 의미 있다. 이날은 코로나19 여파 때문인지 온 동네가 숨죽인 듯 고요하다.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가는 세상에서 석문만은 그 자리에서 여전하다. 이럴 때 부쩍 조용해진 옛길을 호젓하게 돌아보는 여유로움을 누려본다.
◇홍예문(虹霓門):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 20번지 외 4필지 / 인천 유형문화재 제49호
코로나19의 재확산을 막겠다는 정부의 다양한 정책이 발표되면서 개인의 행동이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틈틈이 즐겨 찾던 헬스장과 테니스장도 문을 닫았다. 아니 모든 체육시설이 문을 닫았다. 9시 지나면 밥 먹을 곳도 마땅히 없다. 꼼짝달싹 못하게 울타리에 갇힌 기분이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일상사의 지루함을 피해 한강변에 돗자리를 들고 모여든다고 방송에 소개되었다. 문제는 마스크도 제대로 안 하고 옹기종기 모여 먹을거리를 먹는 모습이다.
‘코로나19’ 예방의 한 축인 면역력을 높이려면 운동이 필수라는 걸 아는데 딱히 운동할 곳이 없다.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충실히 따르면서 운동하려면 사람들이 없고 맑은 공기와 햇볕을 마음껏 받을 수 있는 데를 찾아야 한다. 그런 곳에서 등산도 하고 걷기를 할 수 있으면 딱이다.
걸을 때는 혼자 걷기보다는 두 세 명이 함께하면 좋다. 서로에게 동기부여도 되고 혹시 모를 사고가 발생해도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다. 얼마 전부터 평소 친하게 지내는 동네 친구 두 명과 ‘서울둘레길’ 157km을 함께 완주해보자며 의기투합해 실천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 9시에 출발지에서 만나 10km 정도 걷는 것으로 대략적인 얼개를 짰다. 이미 몇 개 코스는 실천했다. ‘서울둘레길’은 총 8개 구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시니어에게는 하루에 한 구간 걷기가 벅차다. 한 구간을 다시 세분해 각자 체력에 맞게 걸으면 된다. 주로 지하철을 이용해 접근하므로 지하철역을 기점으로 구분해 걷는다.
지난주에는 제7코스 첫 번째 구간인 가양역에서 출발해 증산역까지 7.7km를 걸었다. 오늘은 제7코스 두 번째 구간인 증산역에서 출발해 봉산(209m)과 앵봉산(235m)을 넘어 구파발역까지 갔다. 총 9.3km다. 중간에 앵봉산이 있어 힘든 구간이다. 안내도는 예상시간을 4시간 20분으로 잡고 있다. 이번 코스는 여성분 한 명이 우리 모임에 참가해 천천히 걷기로 했다.
계절의 변화는 정확하다. 불과 일주일 차이인데 8월과 9월의 날씨가 다르다. 바람이 선선해져서 반바지를 입었던 사람도 오늘은 전부 긴바지를 입고 왔다. 지나는 길에 있는 증산체육공원이 보였다. 평상시라면 족구하는 사람들로 붐볐을 텐데 ‘출입금지’라는 표찰이 붙어 있다. ‘코로나19’의 위력이 산 중턱 야외 체육시설까지 미쳤다.
산행 중에 말을 하면 숨이 가쁘다.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속도를 유지하는 게 좋다. 과욕하지 않는 시니어의 산행 기본이다. 역시 폐활량이 좋은 젊은이들은 걷는 속도가 빠르다. 빠른 걸음으로 잽싸게 치고 올라오는 젊은이에게 길을 비켜줬다. 빠르게 걷는 사람도 있고 좀 느리게 걷는 사람도 있어서 자연스럽게 거리두기 2m가 유지된다.
잠깐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는 먹을거리가 필요하다. 고구마, 감자, 토마토, 커피 등 각자 준비해온 음식물을 조금씩 먹는다. ‘코로나19’ 사태로 먹을거리를 푸짐하게 싸와 야유회 온 것처럼 즐기던 모습도 사라졌다. 이 또한 변화라면 변화다.
옛날에 나라가 위급할 때 봉홧불을 올리던 산을 올랐다. 209m의 봉산이다. 두 개의 봉수대가 등산객을 반겼다. 생각보다는 작다는 느낌을 받았다. 좀 더 앞으로 나아가자 서오릉고개의 ‘숲속무대’가 보였다. 세 사람이 거리를 두고 악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 또한 ‘코로나19’의 영향이다. 음정과 박자가 다소 불안했지만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냈다. 연주자들은 고맙다며 인사를 하곤 칭찬에 고무되었는지 더 큰 소리를 내며 연주를 했다.
길에서 입마개를 하지 않은 개와 산책을 하는 사람을 여럿 만났다. “사람을 물지 않는 개는 절대 없다”고 방송에서 개 전문가가 말했음에도 실천이 안 되고 있다. 개를 밖에 데리고 나올 때는 입마개를 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를 잘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서오릉고개에 차도를 가로지르는 녹지연결로가 있다. 동물들의 통로도 되고 사람들이 도로를 건너는 위험도 없앴다. 여기에 작은 북카페가 있다. 많지 않은 책이지만 가득하다. 산속 도서관이다.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도 있고 아름다운 시들이 눈길을 끈다.
이제부터 앵봉산(235m)을 넘어야 한다. 계단으로 이어진 길이 가파르다. 숨이 찬다. 숨이 목에 차서 깔딱거린다는 깔딱 고개가 맞다. 같이 간 여성분이 더 이상 못 걷겠다고 드러눕는다. “이제 다 왔다. 요기만 올라가면 끝이다”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쉬엄쉬엄 올랐다. 꾀꼬리가 많아 앵봉산이라 이름을 지었다는데 꾀꼬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앵봉산 주위에는 군사용 벙커가 많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는 관리가 잘 되었겠지만 남북화해 시대가 되면서 관리를 하지 않아 거의 폐허가 된 분위기에 흔적만 남아 있다. 그렇게 역사는 흐른다. 영원한 적도 없고 친구도 없다.
앵봉산을 넘으면 내리막길이다. 구파발역까지 무사히 도착해서 보니 점심시간이 훨씬 넘은 오후 2시였다, 무려 5시간이나 걸었다. 구파발역 주위에는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연신내역으로 갔다. 체력이 고갈되어 힘들어했던 여성분이 맛집을 안내했다. 음식이 맛있고 푸짐했다. 걷기를 포기하려 했던 여성분은 찬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브라보를 외치며 맥주 한 잔씩 하고 하루의 일정을 마쳤다.
역대 최장기간의 장마로 무릎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늘고 있다. 비가 오는 날 무릎의 통증은 저기압과 연관이 있는데, 무릎 관절 안쪽 공간의 압력이 높아져 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씨가 맑아졌는데도 통증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그 환자가 장년, 노년층이라면 퇴행성관절염을 의심해볼 수 있다. 약학정보원에 따르면 60세 이상 노년층의 약 3분의 1이 퇴행성관절염을 앓고 있다.
퇴행성관절염은 만성통증을 유발할 뿐더러 방치 시 증상이 악화돼 일상생활에 불편함을 야기 할 수 있다. 따라서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초기에는 도수치료, 약물치료 등으로 증세가 호전될 수 있으나 말기로 진행돼 증상이 악화되면 효과가 미미해져 인공관절수술을 고려해야 한다.
인공관절수술은 관절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닿은 연골 부분을 제거하고 인공관절로 교체하는 수술로, 관절의 운동 기능을 회복시키고 만성통증을 완화시켜주는 효과를 줄 수 있다.
안성성모병원 관절센터 김형준 과장(정형외과 전문의)은 “의료 선진국인 미국에서는 연간 100만 건 정도 시행될 만큼 보편화된 수술이지만, 좋은 결과를 위해서는 충분한 요건이 갖춰져야 한다”며 “그렇기에 수술 전 수술을 집도하는 병원의 시설, 전문의의 많은 경험과 숙련도, 재활프로그램 등을 꼼꼼히 따진 후 수술을 받을 정형외과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김형준 과장은 “인공관절수술의 경우 증상의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60세 이상 노년층에 적합한 수술로 수술 후 아주 길게는 3개월 정도의 적응 시간이 필요하다”며 “물리치료와 재활치료를 병행해야 하기에 충분히 해당 사항을 고려하고 수술을 진행하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요즘도 백일장(白日場)은 열리고 있다. 학교는 물론 각종 사회단체가 시민들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글짓기대회가 많다. 초등학생들이 엎드려 글을 쓰는 모습은 귀엽고, 한시백일장에 나온 갓과 도포 차림의 노인들이 붓을 놀리는 광경은 멋지다. 글과 글씨만이 아니라 그림 공모전에도 백일장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백일장을 써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써야 하나요?”라는 문의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일 나가는 백일장은 날씨백일장인데, 백일장을 써본 적이 없어요”라고 호소하는 학생의 글도 보았다. 백일장을 쓴다는 말이 우스운데, 요즘 학생들에겐 그만큼 생소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백일장은 조선조 때 각 지방의 유생들을 모아 글짓기를 겨루던 일을 말한다. 그런데 뜻이 두 가지인가보다. 하나는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달밤에 모여 시를 지으며 노는 망월장(望月場)과 대조적인 뜻으로 대낮[白日]에 시재(詩才)를 겨룬다 하여 생겨난 말이라 한다. 다른 하나는 유생들이 시재를 겨루던 장소[場]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게 벼슬과는 관계없이 열리기도 했나보다.
직접적인 기원은 1414년(태종 14년) 7월 태종이 성균관 유생 500명에게 시무책(時務策)을 지어내라고 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일자무식꾼까지 나와 남의 글을 빌려 시험지를 내고, 수령의 가족이나 기녀(妓女)까지 끼어들어 심사를 하는 등 비리가 많아 난장판이었다고 한다. 과거시험장에서 커닝하다 들켜 쫓겨난 사람도 많았다지 않나.
나도 고등학교 때 학교 대표로 대학교가 주최한 백일장에 두 번 나갔었다. 물론 다 입선도 못하고 미역국을 먹었다. 그 대학에 다니는 고교 선배들이 점심을 사주어 카레라이스라는 걸 난생처음 먹어본 게 큰 소득이자 즐거운 기억이다. 1960~70년대에는 대학이나 사회단체가 주최하는 백일장을 휩쓴 스타가 많은 부러움을 샀다. 지금도 활약 중인 문인들 중에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문명을 떨친 사람들이 있다. 장학금 받고 대학에 들어간 글짓기 장학생이 그때의 아이돌이었다.
백일장이라는 말을 나는 그 뒤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1998년 11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을 때 소설가 최인호(1945~2013)로부터 백일장이라는 말을 다시 들었다. 그때 신문사들은 저마다 문인들을 섭외해 금강산 관광기를 앞다투어 실었다. 한국일보 문화부장이던 나는 최인호에게 글을 쓰게 했다. 최인호야말로 1963년 고등학생일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했던 ‘백일장 스타’ 아닌가. 금강산을 다녀와 글을 써 달라는 청탁에 최인호는 “야, 이거 신문마다 백일장이 시작됐구나”라고 말하면서도 즐겁게 다녀와 즐겁게 글을 써주었다.
1998년 11월 18일 시작된 금강산관광은 남북 분단 50년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큰 사건이었다. 남북의 상황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다가 지금은 중단된 지 오래지만 갈 수 있다면 나도 다시 가보고 싶다. 최인호의 글은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가사(한상억 작사)를 원용해 “아아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 가본 지 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로 끝난다. 금강석은 모든 보석의 대명사 아닌가. 금강산도 거기서 나온 이름이다. 글을 읽은 신문사의 최고 선배가 “최인호의 글이 바로 금강”이라며 좋아해 나도 역시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백일장을 생각해본 건 초등학교 중학교 교문에 내걸린 격려·환영 문구 때문이다. 코로나19가 번진 이후 각 학교는 입학식과 개학을 늦추고 겨우겨우 1학기를 시작해 온라인 원격수업을 실시하거나 다시 쉬거나 하면서 학생들이 학교를 가는 것도 아니고 안 가는 것도 아닌 상태로 한 학기를 마쳤다. 지금은 수도권 지역 종교시설을 중심으로 코로나19가 확산돼 서울·경기·인천 지역 유·초·중학교는 2학기 개학 이후에도 당분간 3분의 1 이내만 등교시키도록 제한된 상황이다.
학생들이 학교에 오지 못하거나 뒤늦게 오게 되자 각 학교는 교문에 환영 펼침막을 저마다 내걸었다. 그런데 이게 내 눈에는 ‘교문 백일장’이 벌어진 걸로 보이는 것이다. “밝고 향기로워서 꽃이 핀 줄 알았는데 너희들이 온 거였구나”(남양주 미금중학교), “여름이 온 줄 알았는데 싱그러운 너희가 온 거였구나”(서울 대치중학교), “학교는 너희가 있을 때 비로소 아름답단다 환영한다 얘들아”(서울 신사(新沙)중학교)… 내가 봄부터 눈에 띄는 대로 사진 찍은 문구다. 지금도 이대로 붙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래된 것들 중에는 이미 색이 바랜 것도 있다.
환영·격려 문구를 써 붙이기까지 선생님들은 얼마나 고심했을까. 이런 걸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한다면 뭐라고 쓸까, 누가 문안을 만들까, 이런 문제로 그야말로 ‘백일장 쓰는 법’을 많이 연구했을 것이다. 당연히 그 학교의 국어 선생님, 글 잘 쓰는 선생님, 그리고 제일 젊은 후배 선생님이 맡았겠지. 교육부나 교육청이 이런 걸 내걸라고 지시한 것 같지는 않지만, 인근 학교가 내걸면 가만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지만 ‘교문 백일장’을 통해 선생님들의 글짓기 실력이 더 풍부해지고 세련돼진다면 그야 얼마나 좋은 일인가. 사실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교문백일장에 펼쳐내고 드러낸 마음 그대로 학교를 사랑하고 학생들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다. 어떤 방식으로 열리든 백일장은 입상을 하든 못하든 모두에게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이 돼야 한다.
인공지능(AI) 스피커 ‘아리아’가 위급상황에 처한 80대 고령자의 생명을 구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아리아는 간단한 말로 조명을 켜거나 음악, 날씨, 생활정보를 들을 수 있는 비대면 복지서비스다.
A 씨(82)는 지난달 28일 오전 경남 의령군 부림면의 자택에서 새벽부터 지속되는 고열과 답답함에 “아리아, 살려줘”를 외쳤다.
AI 스피커 아리아는 A 씨의 도움 요청에 즉시 부림면 센터와 보안업체, 통신사로 긴급문자를 발송했다.
이를 가장 먼저 확인한 보안업체는 A 씨에게 전화를 걸어 상태를 확인한 뒤 곧바로 119 구급대원을 출동시켰다.
덕분에 신속하게 병원으로 이송된 A씨는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현재 건강한 상태로 일상을 보내고 있다.
A씨는 스피커를 보급받던 당시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즉시 ‘아리아, 도와줘’를 외치도록 교육받았고, 급박한 순간에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AI 스피커 아리아는 경상남도의 인공지능 통합돌봄 서비스로,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비대면 복지의 효과를 입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