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자어에 부부(夫婦)라 함은 지아비 부(夫)와 지어미 부(婦)를 뜻한다.
부부의 날은 2007년 부부 관계의 소중함을 깨우치고 흔들리는 가정의 이탈 속에서 화목한 가정을 이끌어 가자는 취지로 여성가족부 주관으로 만들어진 법정기념일이다. 건전한 가족 문화의 정착과 가족 해체 예방을 위한 행사를 개최하는 의미를 담고 만들어진 특별한 날이다.
매년 5월 21일로, 5월은 가정의 달로 숫자 2는 두 사람이 1은 하나가 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
뜻 깊은 부부의 날을 맞이하여, 가정마다 이혼율은 높아지고 그것도 황혼이혼율이 늘고 있는 요즈음에, 바로 내 옆에 있는 동반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특별한 날이기를 소망하면서 설정스님의 인생법문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부부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5가지를 소개해 본다.
부부처럼 지중한 인연도 없으련만 서로 잘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함께 나이 들어 가는 방법은 왜 없을 까. 그 소중한 인연을 우리는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함부로 대하고 있다.
부부 관계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순리인데 우리는 그것을 역행하며 때로는 이용의 도구로 삼고 있기도 한다. 부부의 인연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더구나 어차피 맺어져 한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과 함께 지어미와 지아비로 천륜으로 맺어졌다면 더욱이 그 엉킴의 타래는 해결해야만 할 것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부부로 살기 위해서는
첫째 관심을 갖는 것이다.
상대방이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 어떤 마음인지 늘 사랑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둘째 존중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내 소유가 아니라 취향과 사생활을 존중하며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셋째 책임져야 한다.
배우자를 이용가치로 생각하지 말고 책임져야 할 대상으로 조건 없이 헌신해야 한다.
넷째 이해해야 한다.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며 배려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주기 이다.
희망을 주고 사랑과 위로를 주고 때로는 악연일수록 조건 없이 주어야 한다. 좋은 말을해 주고 따뜻한 표정으로 부드러운 언어로 좋은 마음을 보내주는 것은 중요하다. 좋은 에너지는 주면 줄수록 악연은 빨리 풀어진다고 한다.
부부의 날 첫 주창자인 권재도 목사는 “우리 엄마 아빠가 함께 사는 게 소원이에요.”라는 한 어린이의 TV인터뷰를 보면서 그 충격으로 부부의 날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필자는 가슴이 울컥해졌다. 우리가 살면서 부부의 인연으로 만나 한 가정을 이루면서 어찌 평탄하기만 했을까. 산 넘으면 고갯길이 또 한고비를 넘기면 다음 산마루가 그렇게 어느덧 인생 반 고비를 넘기며 이제, 저 산 꼭대기를 얼마 남기지 않고 있다.
어느 날인가 큰딸아이가 9살쯤 되었을 때인 것 같다. 남편과 안방 문을 걸어 잠그고 크게 싸우고 나오는데, 큰아이가 방문 앞에서 엎드려 절을 하다가 소스라 치게 놀라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필자는 다짜고짜로 뭐 하는 짓이냐고 다그쳤다. 아이는 울면서 말을 했다. 엄마 아빠가 싸우지 않게 해달라고 헤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열심히 문 앞에서 절을 했다고 했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필자는 그날 이후로는 힘이 들 때면 가정에 위기가 올 때면 그날을 가슴에 깊이 새기며 견뎌오곤 했다.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 갈 날이 멀지 않았다. 돌아서 앉아있는 남편의 머리 칼은 희끗희끗 처량하게 변색되어 있고 어깨는 축 처진 채로 지나온 날을 대변해준다. 미워하며 살아온 날도 더러는 사랑의 앙금이리라.
이제와 더 무엇을 찾을 것 인가. 이제 책 속에 무수히 써있는 보이는 글 보다는, 세상에 널려져 보이지 않는 우리 부부의 삶의 글을 되돌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특별한날, 필자 부부가 좋아하는 간짜장 해물짬뽕이나 먹으러 가자고 해야겠다.
세계적 경영컨설팅 업체 ‘머서’가 2016년 2월 발표한 도시별 ‘삶의 질’에서 오스트리아 빈(Wien)이 지난해에 이어 1위를 차지했다. 스위스 취리히, 뉴질랜드 오클랜드, 독일 뮌헨, 캐나다 밴쿠버가 2∼5위를 차지했고 서울은 73위였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는 합스부르크 왕족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 이 도시에 가면 허리 잘록한 드레스를 입고 모차르트 음악에 맞춰 매일 무도회에서 춤을 추고, 마차를 탄 귀족이 되어 사랑을 만들어 갈 것 같다.
누구나 왕족, 귀족이 되는 도시
합스부르크 왕조를 모르면 빈을 여행할 수 없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궁인 호프부르크(Hofburg)는 물론이고 도시 곳곳 웅장하고 화려한 왕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그 골목 사이로 영화 속에서 보았던 마차가 ‘따각따각’ 말굽 소리를 내며 다닌다. 골목을 걷고 있으면 가발과 옛 복장을 차려입고 티켓을 파는 사람들이 무수히 다가온다. 100년도 넘는 연륜을 자랑하는 카페에서는 모차르트의 선율을 들으며 왕족, 귀족들처럼 토르테와 멜랑쥐를 우아하게 마신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했던 가문이다. 루돌프 1세(1273년 즉위)를 시작으로 카를 1세(1918년 사퇴)에 이르기까지 무려 645년 동안 유럽의 절반을 지배했던 왕조다. 합스부르크 왕가도 우리나라 조선의 600년 역사처럼 긴 시간동안 사건, 사고가 무수히 많았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부터 그의 자식, 손자에 이르기까지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가 아주 많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비극(?) 스토리들
국내서도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던 황태자 루돌프(Rudolf Franz Karl Joseph, 1858~1889) 이야기를 이해하면 오스트리아 빈 여행이 수월해진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태자 루돌프의 할머니이다. 그녀는 카를 6세(Kaiser Karl VI)의 장녀로 왕가의 규정을 깨고 학교에서 만난, 잘생긴 유학생 프란츠 슈테판 로트링겐(1708~1765)과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을 왕(프란츠1세)으로 내세우고 섭정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능력이 탁월해 전쟁 등, 많은 것에서 업적을 이뤘고 16명(5남 11녀)의 자식을 두었다. 연애결혼을 해서인지 다행히 합스부르크의 ‘근친혼의 저주’ 인 ‘주걱 턱’은 없었다.
남편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아들 프란츠 요제프(1830~1916)가 18세에 왕위를 계승한다. 프란츠 요제프는 독일인 시시 공주(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1837~1898)와 연애 결혼한다. 프란츠 요제프의 장남이 바로 루돌프다. 루돌프는 어린 시절 늘 부모의 애정결핍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어나 공무를 처리하기 바빴다. 하루 10시간 집무는 기본이었다. 엄마는 일 년 중 대부분 여행을 떠나 있어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할머니 손에서 길러진 그는 어릴 적부터 군대식으로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게다가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다. 루돌프는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딸인 스테파니(Stephanie, 1864~1945)와 정략결혼을 했다. 당시 루돌프는 22세였고 스테파니는 16세였다. 결혼 2년 후, 스테파니는 딸 엘리자베트 마리를 낳았지만 사랑없는 결혼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이들은 끝내 별거를 하게 된다. 이 무렵, 30세의 루돌프는 17세밖에 안 된, 어린 마리아 폰 베체라를 소개받아 사랑에 빠진다. 이 사건으로 황태자 자격도 박탈 당하게 된다.
1889년 1월 말, 루돌프는 연인과 함께 황실 사냥용 별장 마이얼링(Mayerling)에서 동반자살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요제프 부인 시시 황후는 스위스 여행 중에 총에 맞아 비명횡사했다. 거기에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황태자인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는 아내와 함께 사라예보의 육군 훈련에 참관 차 갔다가 총격을 받아 죽었다. 또 남동생이었던 막시밀리아노 1세(1832~1867)는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갔다가 총살형 당했다. 요제프는 68년 동안이나 재위를 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볼 꼴 못 볼 꼴’ 다 본 비극의 황제였다.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
빈에는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Schoenbrunn)이 있다. 호프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웅장하고 드넓은 겨울 궁전이었다. 왕궁은 크게 16~18세기에 지어진 구 왕궁과 19~20세기에 지어진 신 왕궁으로 나누어진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가 사용하던 방은 공개된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살던 레오폴트 관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기 때문에 관람이 제한된다.
쇤브룬 궁전에는 여성적인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각종 용도의 1441개 방이 있다. 이 가운데 40개만 공개하고 있다. 6세 때 모차르트가 연주하고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구혼했다는 ‘거울의 방’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밀 만찬실인 ‘중국식 작은 방’ 등이 있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프랑스 왕가로 시집(15세)가기 전까지 이 궁전에서 지냈다. 그 외에도 여러 명화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이 궁전은 199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벨베데레 궁전
빈 시내에서 멀지 않은 남서쪽에 1721년에 지어진 벨베데르(Belvedere) 궁전이 있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 비해 크기는 작고, 정원도 아담하다. 이 왕궁의 주인은 오스만 투르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이겐 왕자였다. 오이겐 공이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곳에 미술품을 수집 보관해 두었다. 그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1914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특히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비롯해 중세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회화들을 소장하고 있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궁전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들이 걸려 있으며 클림트의 명작 ‘키스(1907~1908년 작품)’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많은 샵에서는 클림트의 그림을 활용해 기념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클림트를 알려면 BBC가 제작한 나 존 말코비치가 주연한 영화 를 보면 된다. 그 외 클림트 명화의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 도 있다. 빈의 제체시온(Secession)에서는 클림트가 만든 ‘베토벤 프리즈(the Beethoven Frieze)’가 볼거리다.
창의성 넘치는 훈데르트바서의 쿤스트 하우스
빈의 건축물 중 눈에 띄는 것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의 작품들이다. 그의 건축물 중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aus)다. 자연 친화적이고 창의성이 넘치는 그의 건축 기법은 차라리 경이롭다. 이 밖에도 훈데르트 바서의 미술품 등을 전시하고 있는 쿤스트하우스 빈(KunstHaus Wien)에서도 참신하고 자유로운 그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 훈데르트바서의 손길이 닿은 쓰레기 소각장도 관광명소가 됐다. 프라터 공원 가는 길목에서 볼 수 있다.
진귀한 작품들의 寶庫 ‘빈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은 빈 여행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이 미술관은 합스부르크 가의 방대한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다. 16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와 17세기 중엽 레오폴트 빌헬름이 수집한 방대한 소장품을 모체로 세계 미술사 전반에 걸친 진귀한 작품들이 있다. 티치아노, 틴토레토와 같은 16세기 베네치아 화파와, 루벤스, 반 다이크와 같은 플랑드르의 대가, 그리고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뒤러, 브뤼헐로 이어지는 거장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촬영이 가능한 곳으로 무작정 많은 작품을 찍는 것이 좋다.
의 촬영지인 프라터 공원
영화 애호가들은 달달한 로맨스 영화 의 촬영지를 방문할 목적으로 빈을 찾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같은 배우(에단 호크, 줄리 델피)를 출연시켜 비포 시리즈 영화를 완성해 냈다. 영화 속 두 여인이 밤을 새웠던 곳이 프라터 공원(Prater Park)이다. 이 공원은 1560년 막시밀리안 2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락장으로 개장했으며 1766년부터 일반에게 개방했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관람차(61m) 등의 놀이기구가 있다.
그 외에도 빈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 그라벤(게른트너) 거리, 시청사, 빈 대학 보티프 교회, 카를플라츠 역사, 앙커 시계, 암 슈타인 호프 교회 등 볼거리가 많고 모차르트,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요제프 라너 등의 음악가는 물론 프로이트 등 무수한 인물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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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Tip!
항공편 대한항공이 인천에서 오스트리아 빈까지 일주일에 3번(수, 금, 일) 운항한다. 오스트리아 빈까지는 10시간 30분~11시간이 소요된다.
시차 한국보다 8시간 늦다.
음식정보 수육 같은 타펠슈피츠, 돈가스나 비프가스와 거의 비슷한 슈니첼이 빈의 대표 요리. 그리스 거리(플라이슈마르크트)의 그리헨바이슬(griechenbeisl, 1447년에 개업)은 모차르트, 베토벤, 마크 트웨인, 채플린 등 유명인들이 찾은 곳이다. 또 카페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란트만(landtman), 젠트랄(gentral), 임페리얼 호텔(imperial), 자허 호텔, 할카(halka)가 유명하다. 데멜(Demel)은 초컬릿이 아주 맛있다. 워크 앤 모어(Wok & More, 칼스플라츠 지하철역 근처)에서는 아시아 음식을 뷔페로 즐길 수 있다.
주류 정보 와인마을로 유명한 그린칭(Grinzing)이 있다. 호이리거 와인(heuriger Wein)의 본 고장이다.
숙박 정보 최고급 호텔부터 아파트먼트 호텔, 게스트하우스, 유스호스텔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저렴한 유스호스텔도 많다.
교통 패스 빈 카드(Die Wien-Karte)로 3일 동안 버스, 지하철, 트램 등 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유람선, 음악회, 쇼핑,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여러 가지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단기 체류라도 여러 명소를 돌아보고 싶은 여행자에게 제격이다.
축제 빈은 음악의 도시답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 음악회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무도회 등이 열린다. 빈 축제는 매년 5월 중순~6월 중순에 열리며 7월 중순~9월 중순에는 뮤직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시니어 포인트 빈은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시니어 층이 여행하기에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몸이 불편해도 별로 어렵지 않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젊음의 거리 홍대. 개성 넘치는 오색 길을 따라가다 보면
유유자적 걷기 좋은 길을 만나게 된다. 최근 ‘핫’한 장소로 떠오른
서울 마포구 연남동이다. 그런데 겉만 보면 그냥 사람 사는 평범한 동네다.
왜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고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면
용기 내어 뒷골목에 발 디디라. 바로 그곳에 동진시장이 숨어 있다.
연남동 동진시장(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198)은 매주 토요일, 일요일에만 서는 7일장이다. 이곳에서는 각종 액세서리를 비롯해 생활한복, 디퓨저(방향제), 가죽 제품, 잼 등이 판매된다. 평일 내내 조용하던 공간은 주말이 되면 사람들이 와서 정을 나누는 다정한 장소로 변한다.
동진시장은 원래 연남동 주민들이 애용하던 작은 재래시장이었다. 채소를 비롯해 소소한 생활필수품을 팔던 곳. 대형 마트의 등장으로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췄다.
시간이 흘러 이웃하던 홍대 상권은 포화 상태가 됐고, 옆 동네로 상권이 번지다 연남동까지 카페와 술집들이 밀고 들어왔다. 그 사이에도 동진시장은 여전히 사람의 발길이 끊긴 채로 먼지만 쌓여갔다.
이곳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4년 전. 사회적 기업이 모여 만든 ‘모자란 협동조합’이 동진시장을 찾아냈다. 싸늘한 감은 있었지만,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따뜻한 시장 모습 그대로였다.
공정무역이나 농산물 유통, 재활용 사업을 하는 사회적 기업 협동체 ‘모자란 협동조합’은 애초에 자신들의 물건들을 팔기 위해 이 장소를 임차했다. 또한, 지역 예술가나 홍대에서 밀려난 작가들과 협업해 재미난 장터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도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각종 채소 재활용 물건을 판매하고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젊음의 거리 한편에서 농산물을 팔아 이익 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을 좀 달리했다. 시장에서 일할 판매자 이른바 ‘셀러’들을 모집했고 플리마켓(벼룩시장) 형태를 갖춘 지금의 동진시장으로 모습을 바꿨다. 대신 재래시장 원형을 그대로 두고 그 안에 젊은 취향의 제품을 채워 넣었다. 처음 취지처럼 예술가들의 전시도 꾸준히 하고 있다.
한동안 열지 않았던 농산물 판매는 4월 말 재개했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엔 ‘팜 페스트’라는 이름의 농산물 판매장이 선다. 문화와 사람이 어울려 매일이 즐겁고 재미있는 곳이 바로 이곳 아닐까.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 5월, 에코팩 하나 들고 동진시장으로 향해보라.
지난 5월 2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방로 372 여의도복지관에 어린이부터 중장년층, 어르신까지 모든 세대가 함께할 수 있는 통합 복지시설이 완공돼 개관했다.
이 시설엔 중장년층의 제2인생을 지원하는 ‘영등포50플러스센터’(3, 4층), 어르신들의 활기차고 건강한 삶을 지원하는 ‘구립여의도어르신복지센터’(2층), 꿈을 키우며 사랑을 나누는 ‘둥근마음어린이집’이 입주해 있다. 특히, 다른 복지관과 차별화를 둔 시설은 ‘영등포50플러스센터 다. 이 센터는 인생 이모작을 창조하고, 지원하는 지역 기반 거점으로서의 ‘미션’을 가지며, 장년층의 삶의 모델을 선도하고자 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핵심가치’는 존중, 연계와 협력, 도전이다. 이를 바탕으로 설정한 ‘전략 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사자들이 계획하고 만들어갈 수 있도록 지원한다.
둘째, 배움, 일, 여가, 관계를 함께하는 일상 공간을 지원한다.
셋째, 지역, 마을 기반 활동 지원을 한다.
이 모든 총체적 운영은 학교법인 원광학원이 맡고 있다.
한국의 국민 평균 수명은 1950년대에는 52.4세, 1980년대에는 65.8세, 2015년에는 83.5세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만간 한국은 백세 시대를 맞이한다. 그러나 한국 은퇴 연령은 50대부터여서 과연 은퇴 후 50년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센터는 이 문제에 답을 주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이 센터는 50플러스세대(이미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50~64세의 장년층)을 대상으로 성공적 인생 후반전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지낼 수 있도록 지지하고 지원하는 허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즉 은퇴 이후를 준비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에 있는 장년층들이 제2의 인생을 위한 새로운 비전을 창조하고 이루어갈 수 있도록 인생 재설계, 일자리, 사회공헌, 여가 등을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곳이다.
나는 대한장애인댄스스포츠서울연맹 소속 선수 겸 코치이다. 자원봉사자로서 시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댄스스포츠를 가르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은 혼자서는 댄스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나 같은 비장애인이 파트너로 같이 경기대회에 나간다. 올해가 4년째이다.
장애인들은 겨울철 빙판이 위험하기 때문에 겨울 동안에는 훈련을 쉰다. 그리고 대략 4월부터 새로 선수등록을 하고 연습에 들어간다. 그리고 6월부터 대회에 출전한다. 겨울 기간이 길기 때문에 그 사이에 신상의 변화도 생기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매년 4월이면 안무를 새로 짜고 5월부터는 파트너와 만나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4년 전 처음 만난 파트너는 60대 후반의 시각장애인 할머니였다. 선천적으로 전혀 앞을 못 보는 전맹이었다.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허약해 보였다. 나이를 물어 보니 수줍은 듯 자기 나이를 밝히며 너무 늙지 않았느냐며 미안해했다. 나이도 많지만, 몸이 너무 허약해 다른 시각장애인들처럼 자이브나 차차차 같은 격렬한 라틴댄스는 무리여서 다른 장애인들이 춤출 때 구경만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내가 택한 것이 왈츠, 탱고 같은 모던 댄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각장애인들에게는 공간의 이동이 많지 않은 라틴댄스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농구장에서 하는 경기대회에서 플로어 전체를 돌면서 추는 모던댄스는 무리라고 봤던 것이다. 그러나 한 손만 잡고 추는 라틴댄스보다 한손을 서로 손을 맞잡고 다른 한 손을 여성은 남자의 어깨에, 남성은 여성의 등을 잡아주는 모던댄스가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왈츠 교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왈츠에서 그네의 흔들리는 스윙을 설명하기 위해 그네를 타 봤느냐고 물었더니 그네 자체를 모르고 있었고 타본 적도 없다고 했다. 탱고의 동선을 가르치기 위해 게처럼 옆으로 가는 것을 설명하고자 했으나 역시 게를 본 적이 없어서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다른 시각장애인처럼 점자를 배운 것도 아니었다. 원래 학교를 전혀 다녀 보지 못한 무학이었기 때문에 점자도 배울 생각도 안 해봤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팔과 다리를 잡아 기본 동작을 가르치고 스텝을 외우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시작했으나 다행히 몸이 가벼워서 내가 리드해 나가기 쉬웠다. 스텝을 외우지 못 했어도 내가 힘으로 밀고 나가면 내게 몸을 맡기기 때문에 춤추는 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성격도 좋았다. 얼마 안 되는 장애연금으로 생활하는 형편이었으나 아침부터 복지회관에 나와 수영, 사물놀이 등 무료 강좌를 열성적으로 배웠다. 간식으로 주는 빵이나 떡, 과자 등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와중에도 받은 먹거리를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가 내게 줬다. “선생님! 선생님!”하며 따르는 모습도 귀여웠다. 그해 첫 대회는 6월에 열린 춘천 전국대회였다. 해마다 6월에는 장애인 대회가 시작된다. 전국 18개 시도에서 모인 선수들끼리 대회를 벌이는 것이다. 필자는 그와 왈츠로 출전했다. 그런데 당당히 3등을 한 것이다. 메달과 상장을 거머쥔 그는 너무나 감격해 했다. 그렇게 시작해 그해 왈츠와 탱고로 전국대회에 출전하며 상위권의 성적을 냈다. 가을 전국체전에서는 단체전 금메달까지 땄다. 그렇게 필자와 한 해를 보내고 그도 다른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고령으로 은퇴했다.
다음해에 만난 파트너는 30대의 젊고 아름다운 시작장애인이었다. 겉보기에도 시각장애인 같지 않았고 아주 가까운 거리는 어렴풋이 볼 수 있는 약시였다. 댄스에 소질이 있어서 가르치는 것을 쉽게 이해했다. 몸매도 예뻐서 같이 춤출 만했다. 장애인대회에서는 처음으로 모던 5종목으로 출전할 정도로 출중했다. 4월에 처음 만나 6월에 창동에서 열린 첫 대회에 나갔다.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장애인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오후에 같은 장소에서 열린 일반인대회에도 출전해 역시 좋은 성적을 올렸다. 시각장애인이 일반인대회까지 나간 것도 처음이지만, 좋은 성적까지 거둔 것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오전 장애인대회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이 전맹도 있고 약시도 있으므로 공평을 기하기 위해 안대를 착용한다. 그때는 스텝을 전혀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러나 오후에 일반인대회에 나가게 되자 안대를 벗자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방향 감각에 혼란이 왔는지 댄스를 시작하는 코너를 멀쩡하게 잘했던 오전과 달리 반대편에서 해야 한다며 우기기도 했다. 관중들을 의식하면서 스텝을 간혹 틀리기도 했다. 이 파트너와는 그해 장애인대회는 물론 일반인 대회도 나란히 출전하면서 자랑스러운 성적을 만들어 나갔다. 그해 여름,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전에 대중 무용부문으로 참가하여 댄스스포츠로 수상한 것이 그와의 마지막 출전이었다. 안타깝게도 안마사로서 주야간으로 몸을 혹사하다 보니 건강을 상한 것이다.
올해도 6월부터 장애인 댄스대회가 시작된다. 지난겨울 동안 역시 서울연맹 소속 선수들의 신상에 변화가 많았다. 주로 청소년부 선수로 활동하던 남자 비장애인 선수들이 군 입대한 사람이 많아 새로 파트너를 짜야 한다. 내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어쩌면 단일 파트너가 아닌 종목별로 따로 파트너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6월을 위해 지금부터 또 땀을 흘려야 한다.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경복궁 소주방에서 식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4월 29일부터 5월 8일까지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대장금이 나인 시절 근무했던 궁중의 부엌, 소주방에서 궁중음식을 체험할 수 있다. 비빔밥 도시락과 12가지 반찬이 나오는 수라상 등 왕과 왕비가 먹던 음식을 체험할 수 있는 수라간 ‘시식공감’을 사전예약해서 다녀왔다.
도슭 수라상은 왕과 왕비만 받을 수 있는 12첩 반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합에 조금씩 담아냈다. 육포장아찌, 더덕구이, 오이송송이, 탕평채 등 우리 전통음식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궁중음식을 1인 상차림으로 내니 귀하게 대접받는 느낌이 들었다.
골동반(비빔밥)은 궁중에서도 즐기던 전통 음식이다. 올리는 나물은 제철에 나는 신선한 것을 썼으며 흰색, 푸른색, 갈색 등 색색의 나물을 섞어 보기 좋게 냈다. 비빔 나물을 따로 담고 달걀지단 대신 달걀찜을 가운데 올려 부드럽게 비벼지도록 한 것이 이채로웠다.
음식 구성도 정갈하고 맛도 좋았다. 전국에서 진상한 식재료로 최고의 주방 상궁이 만든 특별한 음식만 임금님 상에 올랐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장아찌, 젓갈, 마른 찬 등 우리가 먹는 음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함께 간 가족들과 정다운 시간을 보내며 오랜 시간 전승돼 온 우리 음식의 맛과 멋을 체험하는 즐거운 자리였다.
문화재청의 2016 궁중문화축전의 다양한 프로그램 중 하나인 수라간 ‘시식공감’은 점심과 저녁, 1일 2회 차려지며 1회 60명 현장 접수할 수 있다.
크로아티아 흐바르(Hvar)는 유명 여행전문잡지에 ‘세계에서 아름다운 섬’으로 자주 손꼽힐 이유가 충분하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가 자주 찾았던 곳이란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인과 일반인의 여행 시각이 뭐가 다를까? 그저 살아생전 찾아가봐야 할 섬이 흐바르다.
이 섬의 아름다움은 그 어떠한 미사여구로도 표현해 낼 수 없다.
진한 라벤더 향기 머금은 스타리 그라드의 골목길
스플리트에서 배를 타고 2시간 거리. 여객선은 2008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흐바르 스타리 그라드(Stari Grad) 섬으로 다가선다.
한눈에도 볼 수 있는 작은 섬이 눈 앞으로 스르르 다가선다. 선착장에 멈춘 거대한 배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내린다.
하선한 관광객과 다시 배를 타고 이 섬을 나가려는 인파로 복잡한 선착장 주변에 라벤더 향기를 가득 담은 난전 두어 개가 펼쳐져 있다. 라벤더의 강한 향기가 코 끝을 ‘훅’ 자극한다. 즉석에서 갈아주는 주스 파는 곳으로 다가간다. 햇살 좋은 섬에서 자란 과일 주스는 맛이 참 좋다. 피자 한쪽을 사서 미처 먹지 못한 ‘아점’도 먹는다. 그러는 사이 북적대던 사람들은 섬 어디론가 흩어져 갔다. 돌아갈 배편을 미리 구입하고 천천히 섬 안으로 발을 옮긴다.
해안 길(riva)을 피해 일부러 민가가 있는 계단으로 올라선다. 해묵은 느낌이 가득한 골목길엔 치즈 빛 담 벽과 반질반질한 돌이 이어진다. 골목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좁은 골목길에서 앙증맞은 숍, 여행사, 호스텔 등의 간판들을 만난다.
강한 향내를 풍기며 유혹하는 라벤더 가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가게는 가슴골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금발 생머리의 날씬한 판매원을 닮은 듯 예쁘고 현혹적이다. 라벤더 오일, 건제품들은 예뻐서 꼭 사가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흐바르에 라벤더 가게가 많은 것은 이유가 있다. 이 섬은 ‘라벤더 섬’으로 불릴 만큼 라벤더 재배가 성행한다. 5월이면 온 섬은 라벤더 꽃과 향이 코끝을 간지를 것이다.
수녀가 만드는 알로에 레이스와 하니발 루치치 동상
골목길에서 11세기 베네딕트회 수도원(Benedictine Monastery)을 만난다. 그저 유럽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수도원이다.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지만 이 수도원은 ‘알로에 레이스(Aloe Lacemaking Skill)’를 만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알로에 화분 하나가 놓여 있고 건물에는 레이스 그림을 새긴 팻말이 있다. 유럽 마을마다 흔히 볼 수 있는 레이스 공예지만 흐바르는 색다르다.
크로아티아에는 3가지 서로 다른 레이스 공예 전통이 전해지고 있다. 아드리아해 연안의 파그(Pag) 마을에서 전하는 ‘니들포인트 레이스 공예(Needle Point Lacemaking Skill)’, 크로아티아 북부의 레포글라바(Lepoglava)에 전하는 ‘보빈 레이스 공예(Bobbin Lacemaking Skill)’, 그리고 달마티아(Dalamatia) 연안의 흐바르 섬에서 전승되는 ‘알로에 레이스 공예(Aloe Lacemaking Skill)’다.
‘알로에 레이스’는 흐바르에 거주하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수녀들만 만든다. 생 알로에 잎의 심에서 나오는 얇은 흰색 실을 이용해 보드지 뒤에서 망이나 다른 패턴을 짠다. 이렇게 완성된 레이스 작품은 흐바르 지방을 상징한다.
이 수도원 앞에는 르네상스기의 위대한 작가인 하니발 루치치(Hanibal Lucic)의 동상이 있다. 15~16세기 크로아티아의 대표적 작가인 하니발 루치치(1485~1553)는 ‘로비냐’ 라는 서사시를 썼다.
멀지 않은 곳에 르네상스의 시인 페타르 헤크토로비치(Petar Hektorovi?, 1487~1572)의 요새와 트브르달리(Tvrdalj) 성의 안내 팻말이 붙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그는 이곳에서 나고 죽었다. 그는 어부의 노래를 수집했고, 기행담 등을 친구와 서신으로 대화를 즐겼다. 그가 기록한 해상 및 동물원 용어들은 크로아티아어 표준 언어에 통합되었다. 요새와 성은 직접 설계했는데 현재는 숙소로 이용되고 있다.
스타리 그라드 랜드마크 스테판 광장엔 그리스 흔적이
골목을 비껴나면 흐바르 타운의 중심지인 넓은 스테판 광장이 얼굴을 내민다. ‘U’자 모양의 항구가 있는 이 광장에는 성 스테판(St. Stephen's) 대성당이 있고 1612년에 지어진 유럽 최초의 시민극장 등 유적지가 몰려 있다. 한눈에 봐도 스타리 그라드의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오래된 건물들에선 어김없이 레스토랑, 와인바 등이 성업 중이다. 이 광장은 흐바르에 그리스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으로 아드리아 해안 달마티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스타리 그라드에 처음 사람이 정착한 때는 그리스 시대다. 그리스가 아드리아해까지 영역을 확장한 시기는 고대 시칠리아 시라쿠사(Siracusa)의 독재자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세(재위 BC 405~BC 367)때부터다. 그는 384년, 일리리아인의 도움으로 비스(Vis) 섬을 정복해 첫 번째 식민지를 세웠다. 10년 뒤, 디오니시우스와 동맹을 맺은 에게해의 파로스 섬 거주민들이 섬을 정복해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현재 남은 요새, 고대 석담, 건물 골조, 돌로 만든 작은 대피소 등이 그리스 시대의 흔적들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토지 구획 체계인 ‘코라(chora)’는 24세기 동안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다 BC 4세기 중반, 시라쿠사 제국이 몰락했고 BC 5~BC 6세기 경 일리리아인의 독립 공국이 되었다. 일리리아인들은 요새를 재사용하고, 여기에 새로운 요새를 구축하면서 번성했다. 데메트리우스(Demetrius)가 왕이 되어 통치하면서 권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에 의해 식민지화한다. 그때 파리아(Pharia, Faria)라는 새 이름이 붙여졌고,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티베리우스(Tiberius) 통치 기간에는 자치도시(municipium)의 지위를 획득했다. 몇몇 로마식 무덤이 만들어지고, 물탱크가 축조되기도 했다. 파리아는 그리스 시대보다는 좀 더 작은 경계로 다시 요새화했다. 이후 12세기에는 기독교 주교의 관할권 아래 있었고, 13세기 중반부터는 베네치아인들에게 정복 당해 1797년까지 정치적인 통제를 당했다. 베네치아 왕국 시대(14~16세기) 때 교통, 군사상 요지로서 번영했다. 15세기부터 교역 중심지 항구로서의 부흥기를 맞이했는데, 당시의 지역명은 캄포 산 스테파니(Campo San Stephani)였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19세기 말, 포도나무 뿌리를 썩게 만드는 필록세라(phylloxera) 병이 돌면서 이 섬의 경제는 흔들거렸다. 많은 농부들이 농지를 포기했고 20세기에는 이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포도를 경작하던 남부 마을들은 부분적으로 사라지고, 토지와 도로 대장 체계도 관리 부족으로 명맥만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이후에는 새로운 위협에 맞닥뜨렸다. 집단농장과 농업의 기계화가 그 원인. 그래도 지금은 다시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조금씩 떠난 농부들이 돌아오고 있다고 한다.
흐바르 요새는 천국의 자리
흐바르 스타리 그라드의 백미는 흐바르 요새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전망이다. 스페인 요새, 베네치아 요새(Spanjola Fortica, Spanol Fortress)라고 불린다. 스테판 광장에서 북쪽의 산 언덕으로 오르면 된다. 오르는 길목의 모습은 타운과 엇비슷한 골목이다. 돌길을 따라 이어진 주변 화단에는 알로에와 사보텐 선인장이 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10여분 걸음 끝에 만나는 요새는 중세 때, 오스만 투르크 족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요새 안 박물관에는 부서진 유적들이 있지만 딱히 볼만한 것은 없다. 대신 앞이 환하게 트인 성벽에서 바라보는 발밑 풍경에 넋이 빠진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치를 누군들 반하지 않겠는가? 흐바르 타운과 쪽빛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 조망하면서 위치를 가늠해 본다. 흐바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브라치(Bra?)섬과, 비스(Vis) 해협을 사이에 두고 비스와, 코르출라(Kor?ula)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코르출라와, 네레트바(Neretva) 해협을 사이에 두고 펠제샤츠(Pelje?ac)섬과 마주 보고 있다. 풍광만으로 흐바르 사랑이 가슴 속 깊숙히 채워지는 곳. 더 이상 말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오를 때 무겁던 발걸음은 몇십 배 가벼워져 하산한다. 다시 선착장을 기점으로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물 속까지 들여다보이는, 맑은 쪽빛 바다에는 물놀이 즐기는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이 울려퍼진다. 생선 굽는 냄새에 코끝을 킁킁대며 굴 전문 식당, 와인숍을 한가하게 기웃거리다가 만난 프란체스코(Franciscan) 수도원. 15세기에 코르출라 출신의 유명 석공 가문이 건설했다고 한다. 바다를 정원 삼은 작은 수도원에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포인트를 주고 있다. 수도원 내부는 박물관으로 이용되는데, 특히 마테오 이그놀리의 ‘최후의 만찬’ 등이 눈여겨 볼 그림들이다. 겨우 하루였지만 흐바르의 눈 시리게 아름다운 풍광과 코끝을 파고드는 라벤더 향기는 아직도 가슴 속에 선연하게 박혀 있다.
TRAVEL TIP!
항공편 크로아티아로 바로 가는 직항 편은 없다. 일단 유럽의 주요 도시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크로아티아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독일 뮌헨, 오스트리아 잘츠부르그, 헝가리 부다페스트, 슬로베니아 루블라냐,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등의 국제선을 이용해 자그레브 공항으로 갈 수 있다. 근교 도시에서는 버스나 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필자는 슬로베니아에서 열차로 이동했다.
배편 스플리트에서 페리를 이용하면 된다. 페리는 스플리트 항구, 타운 버스 터미널 맞은편에서 일반 페리가 매일 3회 출발한다. 쾌속선은 1시간 5분 정도 소요되지만 보편적으로 2시간 정도 예상하면 된다. 단 시기에 따라서 페리 스케줄이 다를 수 있다. 정확한 스케줄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하는 게 좋다. 날씨에 따라 출발이 결정되므로 여유있게 여행 일정을 잡는 것이 좋다.
여행시기 라벤더가 피어나는 5월과 6월 가장 아름답고 한가롭다. 여름 피서철에는 사람이 많아져서 배편, 숙박 이용하기가 불편해진다.
와인 크로아티아의 2대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남쪽은 적포도주, 스타리 그라드와 젤사 사이 중앙 평원은 백포도주 산지다.
먹거리 해물 스파게티와 신선한 새우요리, 그릴에 구운 생선구이 등 바닷가라서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곳이 많다. 바닷가 옆이나 스테판 광장 쪽에 식당이 많으며 아시안 음식점도 있다. 또 골목 속에 박혀 있는, 작은 레스토랑이나 선술집(konoer)들도 많다.
특산물 흐바르는 라벤더의 섬이다. 난전은 물론 골목에 가게들이 있다.
화폐 쿠나(HRK) 전압 220V, 50Hz(공통)
크로아티아 추천 여행 코스 수도 자그레브를 시작해서 플리트비체-시베니크-자다르-트로기르-스플리트-흐바르-두브로브니크 순으로 여행을 즐기면 된다.
여행 유의점 크로아티아는 한국인이 가보고 싶은 여행지 1위란다. 현지에서도 한국인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일부에서는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짐 값은 당연히 받고 택시기사의 바가지 상흔도 아주 흔하다. 국내 여행사 상품이 여러 군데 나와 있으니 패키지를 이용해도 좋을 듯하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광복 이후 한국인을 설명하는 말은 ‘빠르게’다. 무조건 ‘빠르게’에만 집착한 우리는 너무 오래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놓치고 부수고 망가뜨렸다. 이제 우리는 걷기에 대해 물어봐야 할 때다. 신정일(辛正一·62) 우리땅걷기 이사장은 걷기를 하나의 문화로 정립하고 전파한 독보적인 인물이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동학을 복권시킨 황토현문화연구소 소장이었으며 현대 시각에 맞춰 다시 쓴 이중환의 고전 ‘택리지’를 포함한 78권의 책을 쓴 작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길 위에서의 사색을 전파하는 길 위의 인문학자 ‘자연대학 총장’, 신 이사장이 말하는 걷기의 힘, 걷기의 철학.
“강변의 모래가 아름답다고 쓴 걸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직접 본 것들, 걸으면서 본 것들이 굉장히 중요하죠.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은 우리가 감동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한 발 한 발 걸어가며 본 것들이 곧 내 살이 되고 정신의 활력소가 된다는 신정일 우리땅걷기 이사장의 말은 나이 들어서 천천히 바라보면서 걸어야 하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빨리 걸을 필요가 없어요. 마사이족은 팔을 힘차게 휘두르며 걷는데 그건 아프리카에나 맞지 우리에게는 맞지 않아요.”
우리나라 곳곳은 도서관이고 박물관이다
마사이족 얘기처럼, 요즘 걷기는 소위 건강을 추구하는 걷기가 유행이다. 이 시대에 신 이사장이 생각하는 걷기란 무엇일까?
“겨울에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만저우리(滿洲里)까지 갔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평야만 가고 어떤 때는 자작나무숲만 가고 했죠. 그 길을 가면서 ‘내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게 행운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골짜기도 많고 산도 많고, 땅은 넓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역사가 있어요. 그런데 거기는 그런 게 없었어요. 우리나라 곳곳은 어디나 도서관이고 박물관입니다. 허투루 볼 게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고 가는 게 걷기 문화예요. 그래서 어디 갔다 왔는지도 몰라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늙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해요.”
신 이사장은 많이 간다고 좋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차라리 정상까지 안 가도 된다. 중간쯤 가면서도 많은 걸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걷기에서는 멀리 바라본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나이가 들면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너도 나도 같이 쏠려서 일행이 함께 가는 것은 자기의 자아를 찾는다기보다는 그저 다른 사람에 휩쓸려 가는 것이지 않나요. 길을 걸으며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그러지만, 많은 시간은 나 자신을 생각하는 시간이 될 수 있어요. 칸트, 니체, 루소 등등 수많은 철학자들도 걸으면서 사상을 확립했습니다.”
해파랑길에서 케이프타운까지 걷고 싶다
한강 길만 네 번을 걸었고, 낙동강은 세 번, 관동대로를 두 번, 서해안, 임진강, 영산강 등등…. 신 이사장이 지금까지 걸은 길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길 것이다. 그러한 길들 중 어느 길은 모두의 길이 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는 해파랑길이 있다.
“2008년만 해도 길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제가 제안한 길이 거의 길이 됐어요. 변산마실길, 소백산자락길 등등.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답사길을 만들자, 해서 만들어진 게 해파랑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해파랑길처럼 아름다운 길은 없어요. 저는 해파랑길을 시작으로 해서 우리나라에서 북한을 거쳐 러시아, 스웨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까지 걸어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누가 그러더라고요. ‘너무 길어서 혼자선 못 걷겠는데요’라고. 그럼 3대가 걸으면 되죠(웃음).”
2014년 완공한 해파랑길은 선비들이 걸어가던 관동팔경길, 낙동강변에서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길을 모두 현대인들이 걸을 수 있게 재정비 했다.
신 이사장에게 좋은 길이란 무엇일까?
“잘 만들어지고 시설이 좋은 게 아니라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길인 게 좋아요. 경북 봉화군 석포면 소재지에서 명호면까지 이어지는 낙동강길을 특히 좋아합니다. 거기는 한나절을 걸어도 길 물을 사람조차도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아름다운 길이에요.”
여기저기를 보고 느끼며 빠져드는 즐거움
신 이사장은 ‘해찰’이란 말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해찰은 순우리말로 ‘쓸데없는 다른 짓’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신 이사장에게 해찰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빠져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걸으면서 유독 여기저기를 보고 확인하며 경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에게 길은 어떤 도달해야 할 목적이 아니다. 마치 도반(道伴)처럼, 그렇게 기억에 남는 길동무가 있냐는 질문에 그는 많다고 대답했다. 당연하다. 그에게는 인생 자체가 길과 같을 테니까.
“훈련소에서 첫눈에 반했던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서울대를 다니던 운동권이어서 강제징집을 당했는데, 신약성경 하나를 갖고 문답을 주고받으며 42일간 훈련을 함께 했었죠. 이후에 자대 배치를 받을 때 그 친구가 ‘신정일, 너 공부 많이 했다’라고 말해주더군요. 저는 고작 초등학교 졸업장 하나 있을 뿐이었는데 그 친구가 인정해주니 참 좋았어요. 이후로도 그 친구와 꾸준히 교류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군대를 간 게 행복이에요. 그 안에서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고 자유를 구속당하면서 나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신 이사장과 김지하 시인, 신영복 교수, 박경리 작가와의 인연도 길을 타고 만나게 된 기연이다. 신 이사장은 김지하 시인의 시를 즐겨 읽는 애독자 중 하나였다. 김지하 시인의 시는 신 이사장에게 동학을 알게 해주는 길이 됐다.
인생이라는 길에서 만난 인연들
“향토현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을 때부터 동학농민운동가인 김개남 장군의 추모비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결국 1993년 5월에 세우게 됐는데, 비문을 누가 쓸 것인가 싶었어요. 그때 만나던 김남주 시인이 신영복 선생을 소개해 주셔서, 신영복 선생이 비문을 쓰게 됐습니다. 4월에 연락이 왔죠. 글을 써놨으니 자택인 목동으로 와서 가져가라고. 그때 가서 비문을 받고자 하는데 김지하 시인 얘기가 나와요. 그날 볼 수도 있겠다 싶어서 기다리려고 파리공원을 갔는데 한 200m쯤 떨어진 자리에서 이상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있더군요. 지남철에 끌려가는 것처럼 갔더니 사진에서 보던 김지하 선생이었어요. 인사를 드리니 반가워하며 동학에 대해 두 시간 동안 얘기를 들려주셨어요.”
인연의 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지하는 장모님, 곧 박경리 작가가 김개남의 팬이라고, 오늘 자신이 전화할 것이니 전주에 가서 박경리 작가에게 전화하라고 말했다. 신 이사장은 그래서 그날 저녁에 박경리 작가도 만나 두 시간여 담소를 나눴다. 에서 나오는 김개주가 김개남을 모델로 했다는 것도 그날 알 수 있었다. 박경리 작가가 김개남을 세계적인 혁명가로 생각하고 후배들에게 그에 대한 글을 쓰라고 종용했지만 아무도 안 쓰더라는 작은 불평도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인연이 만들어낸 귀중한 경험들이었다.
길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고상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상하다는 것은 꾸미지 않는 것입니다. 별로 꾸밀 것이 없어요 인생 자체가. 인생은 자기 소신껏 사는 것이죠.” 도인의 말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로 적용하면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말이다. 신 이사장 또한 사람이다. 욕심도 생기고, 뭔가 해보고 싶다는 야심도 있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들은 정규 학교를 가고 부모 재력도 있었지만 저는 의지할 데가 없었어요.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책을 쓰기 전에는 변방에서 시인들 뒷바라지나 했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었고 작가가 되겠다고 시험을 본 적도 없으니까.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이 없으니 오로지 글을 쓰고 걷기만 한 거죠.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그것이 삶의 지표였었죠.”
말의 행간에서 조금씩 느껴지는 것처럼, 신 이사장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매일 두드려 맞고 책을 뺏기다가 결국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학교를 관뒀다. 그 후에 그는 14살에 가출을 했고 15살에는 출가를 했다. 출가한 지 두 달만에 스님이 ‘넌 여기 있는 것보다 세상에 나가 살아라’라고 말해서 절에서도 나와야 했다.
“그때 정말 많은 곳을 방랑했습니다.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 성질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했던 그지만, 역경은 그의 삶에 꾸준히 자리했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극복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을 이겨냈다.
“돌이켜보면 저는 인생 중에 한 달 남짓 행복했어요. 그런데 한번 헤아려 보세요. 행복한 날이 얼마나 있었는가. 헤아려보면 많지 않아요. 연암 박지원이 누나 제문을 쓴 걸 보면 ‘어찌 이리 짧더란 말이냐. 왜 슬프고 가난하고 곤궁했던 일들만 많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죠. 다 그래요. 인생 자체가 그래요.”
그걸 인정하고 사는 것이라고, 그게 삶이라고 그는 말했다. 마치 길을 걷는 것처럼.
“들뢰즈가 ‘창조란 불행한 것들 사이로 자신의 길을 금 그어 나가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좋아해요. 내가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문자조립공’의 나이 들지 않는 길
신 이사장은 태어나 최초로 군대에서 월급을 받는다. 690원. 그는 그 돈으로 200원짜리 삼중당 문고 세 권을 사고 나머지 90원으로는 라면 몇 개를 사서 한 달 동안 간식으로 먹었다. 제대할 때가 되자 2만원을 갖고 나오게 됐는데, 그 돈을 종로서적에 가서 책 사는 데 다 써버렸다. 그때 그는 종로서적에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책들을 보며 ‘과연 내가 쓴 책이 저 자리에 꽂힐 날이 있을까’ 되물었다고 한다. 물론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신 이사장은 교보문고에서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독자들과 함께 정선으로 열차를 타고 가기도 하고 에 출연하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표였던 시절에는 국회의원과 보좌관들을 데리고 섬진강을 걸으며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신기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항상 꿈을 꾸자. 꿈은 공짜다’라고 말한다.
그는 현재 자신의 직업을 ‘문자조립공’이라고 부른다.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 어느덧 일흔여덟 권에 이른다.
“글 쓰는 사람은 모두 ‘문자조립공’이에요. 한문은 몇 만 자를 다뤄야하는데 우린 스물네 자만 다루면 되니 얼마나 행복해요.”
요즘 부쩍 철학 자체에 관심을 가진다는 신 이사장은 카프카,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연암 박지원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제는 내 곁에 놓고 가끔씩 펼쳐볼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내용의 책을 만들고 싶어요. 에서 ‘우리는 수백만 금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을 금과옥조로 여겨요. 돈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과 명예도 사라지는 것인 만큼 부럽지 않아요.”
‘현자란 바라보는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다’라는 신 이사장의 마지막 말은 길과 인생에 대한 소회이자 해법으로 다가왔다.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 법이니, 길을 걷는 순간순간이 기적인데 깨닫지 못하면 기적이 아닐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이 그처럼 기적에 가까이 닿아 있는데, 마땅히 고개를 돌려 주시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 대한 예의 아니겠는가.
이태문 동경 통신원 gounsege@gmail.com
2020년 올림픽을 앞둔 도쿄( 東京)는 현재 변신 중이다. 여기저기 재개발이 추진중이며, 올림픽에 맞춰 새 경기장 건설과 거리 조성도 한창이다. 지금도 속속 새로운 명소가 등장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가운데 도쿄역 왼쪽에 새로 지은 JP타워는 도쿄중앙우체국과 각종 점포, 레스토랑 등이 가득 들어선 공공시설로 인기를 얻고 있다.
과거·현재·미래의 융합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우편주식회사와 도쿄대학 종합연구박물관이 협력해 2013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학술종합뮤지엄 인터미디어테크이다. 지상 2층과 3층을 연결해 2996m²의 널찍한 전시 공간과 강의 시설 등을 자랑하는 이곳은 산학협동의 롤모델로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곳에서는 도쿄대학이 1877년 개교한 이래 수집해온 각종 학술 표본과 연구 자료 등 ‘학술문화재’로 불리는 귀중한 자료들이 상설 전시중이다. 특별 전시와 기획 행사에서는 최첨단 과학의 성과와 각종 표현 미디어의 독특한 창조물도 선보이고 있다. 일본은 물론 지구촌 구석구석 다양한 장르의 학문 분야를 한자리에서 살필 수 있으며, 과거와 현재, 미래의 색다른 융합도 맛볼 수 있다.
특히 렉처 시어터로 불리는 ‘아카데미아(ACADEMIA)’의 공간에서는 귀중한 영상 및 음성 자료가 학예사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정기적으로 소개돼 많은 마니아층과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월 26일 오후 6시부터 1시간 가량 열린 그래모폰(Gramophone) 기획 26회차 행사는 재즈의 집대성으로 알토편이 진행됐다. 아카데미아에는 1925~1928년에 만들어진 빅토롤라(Victrola)사의 명품, 캐나다제 크레덴자(Credenza) VV8-30 과 일본의 악기 설계자 히라바야시 이사무(平林勇, 1904~1938)가 1931~1932년경 제작한 독자적인 음성 증폭 시스템이 달린 축음기 등 2대의 축음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날 행사에서는 빅토로라의 크레덴자로 1942년 데카(Decca)사에서 출시된 앨범 ‘알토 섹소로지(Alto Saxology)’에 수록된 지미 도시(Jimmy Dorsey)와 1939년 5월 26일 녹음한 ‘로망스(Romance)’를 비롯해서 도시 형제의 ‘테일스핀(Tailspin)’, 알 쿠퍼(Al Cooper)의 ‘(When I GrowToo Old to Dream’ 등 주옥 같은 재즈 명곡 10곡이 축음기를 통해 당시의 생생한 음을 되살려냈다.
도쿄의 야경과 추억을…
깔끔한 디지털 사운드가 아닌 인간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음역대에서 재현되는 축음기의 아날로그 사운드는 LP판의 굴곡과 함께 숨결처럼 떨리는 잡음 속에서 마치 이야기를 걸듯 귓속으로 다가왔다. 이날 주제인 알토에 걸맞은 색소폰이 이끄는 재즈 리듬이 70여 명의 참가자들로 가득 찬 아카데미아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때로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속 우울한 대도시의 그늘을 묵직하게 그려내기도 했으며, 경쾌한 스윙풍의 재즈로 흥을 돋우기도 했다.
이날 행사는 창밖의 도쿄역 야경과 함께 추억의 한 페이지를 수놓기에 충분한 시간 여행이었으며, 축음기가 지닌 소박한 휴머니즘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행사였다. 귀에 거슬리는 LP판의 잡음이 아니라 기억을 긁어 잠자던 감각을 일깨우는 느낌이라고 할까, 따뜻한 인정미마저 느껴지는 색다른 체험이었다.
현역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회사원 요시다 쇼타로 씨(62세)는 “대학 시절 재즈에 빠져 친구들과 밴드도 꾸려 연주 활동도 했지만, 직장 생활에 쫓겨 재즈와 거리를 두고 살았다. 재즈의 집대성 시리즈 행사로 모처럼 재즈의 매력에 젖을 수 있어 자주 이곳을 찾는다”며 “여기 설치된 축음기와 소장된 희귀 음반은 웬만한 집 한 채 값을 훨씬 넘을 텐데, 공짜로 매달 좋아하는 재즈와 해후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고 밝혔다.
인터미디어테크 전시 공간과 아카데미아의 기획 행사는 모두 입장 무료이다. 일본 도쿄를 출장 혹은 여행으로 찾는 기회가 있다면 한번쯤 JP타워를 방문해 색다른 추억을 만들어 봄직하다.
뉴욕 맨해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볼링그린공원과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돌진하는 황소 동상 바로 길 건너에 위치한 뉴욕시립대학교. 아침 10시 무렵이 되자 세련된 차림새의 신중년들이 삼삼오오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웅장한 대리석 건물 안으로 느긋하게 들어간다. 주변에 밀집해 있는 글로벌 금융기관의 고위직 인사들처럼 보이지만 평생교육원에 등교하는 학생이자 교수들이다. 배우, 심리학자, 엔지니어, 의사, 교수, 언론인, 관료, 금융전문가, 기업인, 음악가, 미술가 등 전문직업인으로 맹활약을 했던 은퇴자들이다. 틈틈이 일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유로우면서도 열정적인 은퇴생활을 누리고 있는 신중년들이다.
스스로 가르치며 배우는 평생교육원 ‘퀘스트(Quest)’. 학교명처럼 진리 탐구를 갈망하는 신중년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배움터이자 아지트다. 취미활동과 문화 탐방 여행과 친밀한 교우관계가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 커뮤니티 기능을 하고 있다. 안내서에 나열된 올해 봄 강좌가 얼른 봐도 30개를 넘었다. 고대 그리스, 마음과 뇌, 시 낭송, 클래식 록 앨범, 현대 오페라, 위대한 연극, 현대 단편소설 등 웬만한 대학 강좌보다 수준이 높지만 교수가 따로 없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교수’와 ‘학생’의 구분이 없고 모두 ‘회원’으로 통한다. 내로라하는 전문가 출신 회원들이 직접 강의를 하고 관심 있는 회원은 강의를 신청해 수강을 하는 자급자족 방식이다. 현역 때는 배우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부득이 접어야 했던 학업과 취미와 봉사활동으로 호사를 누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 눈에 많이 띈다. 2주에 한 번은 외부 특별 강사를 초빙하여 지적 탐구심을 더 높이곤 한다. 1년 3학기제로 운영되며 가끔 숙제는 있지만 시험이나 출석 점검은 없다. 한 과목만 수강하나 전 과목을 다 수강하나(물리적으로 불가능) 1년 회비는 500달러. 등록금은 물론 없다.
강좌 개설을 포함한 퀘스트 운영의 거의 모든 사항은 협의회와 분과위원회에서 결정된다. 협의회는 회원들 중에서 선출된 임원 7명과 재정담당관 등 4명의 교직원으로 구성되고 2년 임기의 회원 대표가 회의를 주재한다. 산하 4개 위원회는 회원들로만 구성돼 강좌 개설, 교육자재 관리 및 섭외, 회원 관리, 각종 행사 기획 및 일정 조정 등을 나눠 담당하고 있다. 뉴욕시립대학은 장소와 행정적 도움만 줄 뿐이다.
오는 5월이면 개원 21돌을 맞는 퀘스트의 출범 내력을 알고 나면 이런 자율적인 운영 시스템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명성 있는 뉴욕의 은퇴자 교육기관이 은퇴자들의 생각과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입학 절차와 학사 관리를 매우 까다롭게 하면서 등록금까지 높이 책정하자 40명이 함께 탈퇴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것이 1995년.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함께할 수 있는 교육기관을 백방으로 물색하던 차에 뉴욕시립대학과 뜻이 맞아 새로운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이 바라다보이는 아름다운 배터리파크를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맨해튼 최고의 위치에 자리한 퀘스트는 자율적인 평생교육을 갈망했던 40명의 결단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산물이다.
새로운 이념으로 퀘스트의 설립을 기초한 40명 가운데 로버트 하트만 회장을 비롯한 10명은 지금도 퀘스트의 열렬 회원이자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창립 회원인 샌디와 앨 고든 부부는 매년 발간하는 종합 문예지 20주년 기념 특별판 기고문에서 “퀘스트와 함께한 지난 20년은 결코 지루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우리 은퇴자의 꿈은 따뜻한 햇볕을 쬐고 놀이와 내기나 하면서 소일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이고 모험적인 사람들과 함께 지식을 넓혀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캐롤 아브람스, 스텔라 체이스, 베버리 프란쿠스, 에버린과 러셀 굿 부부, 조 나탄 등 다른 창립 회원들도 퀘스트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감이 대단하다.
멤버십 위원회의 에바 샤트킨 위원장은 퀘스트를 찾는 방문인을 일일이 안내하는 가이드 역할을 맡고 있다. 설립 때의 초심을 지키기 위해서다. 샤트킨 위원장은 한국인 학생을 수양딸로 맞이해 함께 살며 교육시켰을 정도로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다. 수양딸은 훌륭히 성장해 지금은 뉴욕대학(NYU)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교직생활을 한 국제적인 영어 교육자인 샤트킨 위원장은 구순을 훨씬 넘겼는데도 거의 매일 배우고 봉사하고 있다. 구순을 넘긴 회원은 보통이고 백세를 넘긴 회원도 지하철로 등교하기도 해 배움이 회춘의 비결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무급으로 봉사하고 있는 마이클 웰르너 원장은 “퀘스트의 평생교육에 참여하고 싶은 은퇴(예정)자가 인터넷이나 전화로 방문신청을 하면 하루 일정으로 강의도 듣고 회원들과 자연스럽게 교류도 하면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웰르너 원장은 자택을 방문한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시설과 운영방식을 친절하고 상세히 안내했다.
회원들이 가장 신나는 시간은 함께 창작활동을 할 때다. 한때 에미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유명배우인 도미니크 치아네스와 로이 클레어리 회원이 지도하는 연극 시간이면 모두 브로드웨이를 꿈꾸는 배우로 변신한다. 해마다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면 온 가족과 친지들이 관객으로 참석하면서 흥겨운 잔치판이 벌어지고 회원은 현실에서도 주인공이 된다. 연극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도나 루벤스 회원이 건강 악화로 정기 공연을 놓쳐 몹시 안타까워하자 집을 방문해 즉석 공연을 했던 일화는 어떤 연극보다 더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날씨가 나쁘지 않은 금요일이면 이스트강변 89번가의 콩츠마켓(Conte’s Market)에서 퀘스트 회원들이 연주하는 포크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문예지 발간은 소설가와 시인을 꿈꾸었던 회원들이 주도하고 있다.
퀘스트에서는 수학여행과 현장학습이 수시로 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익스플로러클럽 등 주변에 즐비한 미술관과 박물관은 언제 들러도 즐겁고 배울 게 많은 현장학습장이다. 나이아가라폭포, 재즈와 ‘욕망의 이름이란 전차’와 프렌치 쿼터의 도시 뉴올리언스와 미국 전통의 여름철 문화교육타운인 이리호 남단의 쇼토쿼(Chautauqua)는 단골 수학여행지다.
여행전문가인 캐롤린 맥과이어 회원은 5월로 다가온 런던 수학여행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으면서도 8월 수학여행지를 어디로 할지 고심하고 있다. 다채로운 여름축제가 벌어지는 캐나다와 기네스맥주를 즐길 수 있는 아일랜드를 놓고 회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있다. 물론 회원들이 좋다면 두 곳 모두 갈 수도 있다. 여름 내내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는 회원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회원들은 학창 시절처럼 수학여행을 고대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수학여행에는 가족도 참가할 수 있어 더 신나고 추억거리도 넘친다.
뉴욕시립대학교와 교육이념에서부터 학사와 재정 관리에 이르기까지 호흡이 척척 맞아 이제는 회원이 230명을 넘어섰다. 평생교육의 새 장을 열고 있다. 요즘 퀘스트에는 성공비결을 배우기 위해 방문하는 해외 귀빈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평생교육이 국가의 주요 이슈로 부각되면서 묘책과 대안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저 어울려 배우고 교류하는 커뮤니티일 뿐인데 해외에서까지 관심이 쏟아지니 회원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신이 난다.
지난해 9월에는 태국 총리 부인인 나라폰 찬오차 교수를 단장으로 한 태국 사절단이 방문했고 은퇴를 앞둔 캐나다의 리차드 솔터 변호사는 4년째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어 평생교육에서도 글로벌화가 진행되고 있는 분위기다.
‘놀면서 배우는 것(Play and Learn)’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만 적용되는 교육이념이 아니다. 배움의 열정은 나이와 무관하고 호기심은 나이가 들수록 커진다는 진리를 퀘스트에서 깨닫게 된다. “배움이 없는 자유는 언제나 위험하고 자유가 없는 배움은 언제나 헛되다(Liberty without learning is always in peril and learning without liberty is always in vain)”라는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인들에게 남긴 교훈을 퀘스트가 실천에 옮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