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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학자 노명우, 심정으로 들여다본 ‘그저 그런’ 사람들의 인생사
- 모든 부모가 처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자식들이 상상하지 못할 뿐, 그들에게도 감수성 예민한 10대 사춘기, 호기롭고 꿈 많던 20대 시절이 있었다. 노명우(盧明愚·52)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그런 부모의 삶을 대신해 기록하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원고를 완성하기 전 2015년과 2016년 아버지와 어머니는 연이어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부모를 잃는다는 건 ‘응석’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응석’을 비워내기 위해 잠시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호칭을 유예하고, ‘자연인 노병욱’과 ‘자연인 김완숙’의 삶을 ‘인생극장’에 담았다. 노명우 교수는 ‘인생극장’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생을 통해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동시대 평범한 이들의 삶을 재조명했다. 3년에 걸쳐 탄생한 이 책의 집필은 본래 대학생들에게 과거 대중영화를 매개로 한국 사회의 형성 과정을 이야기할 목적에서 ‘영상사회학’ 강의를 개설한 것이 계기가 됐다. 노 교수의 아이디어를 눈여겨본 ‘세상물정의 사회학’(노명우 저·사계절출판사)의 편집자가 이 강의를 캠퍼스 울타리를 넘어 세상 밖으로 꺼냈고, 고전영화를 감상하고 토론하는 ‘세상물정극장’을 만들었다. 일종의 확장된 거실처럼 작은 극장엔 많은 사람이 모여 영화를 보며 울고 웃었고, 그 자리엔 늘 노 교수의 어머니가 관객으로 함께했다. “세상물정극장이 열리는 날이 어머니에겐 일주일에 하루뿐인 소중한 외출 시간이었어요. 당시 아버지가 치매를 심하게 앓으셔서 어머니가 돌보고 계셨거든요. 그때 아버지의 삶과 고전영화를 연결해 ‘인생극장’의 초고를 쓰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죠. 그러고 7개월 후엔 어머니가 시한부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저도 어머니도 충격이 꽤 컸어요. 내가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뭘까? 하나는 어머니가 하루를 살더라도 열흘처럼 느끼게끔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삶을 대신 써드리는 것이더라고요. 그렇게 책의 주인공을 더블캐스팅으로 바꾸게 됐습니다.” ‘아버지이기도 했던’ 한 남자의 인생 어머니 생전 책을 완성하려 했지만, 간호를 병행하며 원고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았다. 책이 나오면 아들과 함께 출판기념회이든 강연회이든 다니고 싶다던 어머니의 바람은 안타깝게도 이뤄드릴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 남짓 만에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시면서 반년 정도는 원고를 한 자도 못 썼어요.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도 감정이 솟구치고 한이 생겨서 키보드 끌어안고 울고…. 또 아무리 아들이라고 해도 누군가의 인생을 쓴다는 게 쉽지 않았죠. 한 사람의 삶을 쓰다 보면 불가피하게 어떤 가치평가라는 게 들어가는데, 그런 것에 대한 고민과 감정의 소용돌이 때문에 주저하던 시간이 길었어요.” 마음을 잡고 글을 쓰려 해도 부모의 삶을 객관화해 바라보기는 어려웠다.태어날 때부터 내 아버지, 어머니였던 그들의 삶을 회고할 때마다 어떠한 한계에 부딪히는 답답함이 생기곤 했다. 그러던 그에게 돌파구처럼 한 단어가 떠올랐다. “부모님께 들은 이야기나 제가 가진 정보만으로 인생을 써내기엔 턱없이 부족했어요. 그러다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세상을 살다 간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생각을 전환하니 비로소 보이는 삶의 궤적들이 있더라고요. 그때 떠오른 단어가 ‘심정’이었어요. 아버지는 결혼할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설을까? 엄마를 사랑했을까? 첫아이를 낳았을 땐 어땠을까? 그런 심정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지기 시작했죠.”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수록 노 교수는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누구보다 평범했던, 그래서 그 스스로 ‘그저 그런’이라 표현할 정도로 보편적인 삶을 살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야말로 그 시대의 심정을 대변할 수 있는 역사였다. “아주 부자이거나 엘리트라서 시대가 주는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부모님의 이야기 속에 동시대인들이 공감하는 놀라운 삶의 공통분모가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들의 삶이 얼마만큼 우리 시대에 기록되고 전달되나 고민해보니 아들로서의 의무감을 넘어 사회학자로서의 책임감까지 생기더라고요. 어떤 형태로든 서둘러 이들의 삶을 남겨야겠다고 강하게 느꼈어요. 그때의 심정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들은 오늘도 한 분 두 분 돌아가시니까요.” 유예된 사춘기, 어머니의 삶을 추적하다 젊은 시절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려 노 교수는 직접 추억의 장소를 찾아갔다. 아버지의 청년기를 간접 경험하기 위해 만주 선양, 일본 나고야를 순회했고, 어머니의 사춘기를 엿보고자 서울 종로구 창신동 일대를 ‘소녀’의 심정으로 걸어보기도 했다. “엄마의 흔적을 따라서 창신동 꼭대기에서 출발해 효제초등학교까지 걸어갔어요. ‘나는 가난한 집에서 구박받는 한 소녀다’라고 감정이입을 하고 그 길에 서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모습이 허깨비처럼 나타나기 시작했죠. 당시 산동네에서 내려오면 고래 등처럼 으리으리해 보였을 이화장, 조금 지나면 눈에 들어오는 경성제국대학, 그 거리를 오가는 예쁜 여대생과 멋진 신여성들을 보며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저들과 같은 삶을 살겠지’ 라는 희망을 안고 학교에 가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끊어진 삶의 조각들을 이어갈 수 있었죠.” 소녀였던 어머니도 세월이 흘러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노 교수는 6·25전쟁이라는 사건과 겹쳐 볼 때 어머니는 ‘증발된 사춘기’를 보냈으리라고 짐작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저 역시 사춘기를 겪었지만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너무나 다른 경험을 했어요. 특히 어머니는 전쟁통에 사춘기를 보내셔야 했죠. 원래 사춘기는 자기 감정을 그대로 노출하고도 ‘사춘기’라는 핑계로 본인도 다른 사람들도 이해하고 넘어가잖아요. 그런데 그런 감정 표현을 허용하지 않는 전쟁을 겪으며 뭐든 꾹꾹 눌러 담고 숨기는 데 선수가 되어버리신 거죠. 유예된 사춘기를 보내셨다고 생각해요. 그 영향으로 어머니 또래 분들은 평생 하고 싶은 것, 필요한 것을 드러내지 않고 사셨고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파고들수록 절절히 전해지는 심정은 노 교수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는 ‘아프다’는 말로는 부족해 마음이 ‘아리다’고 표현했다. 두 단어가 주는 차이는 ‘부모의 부재’를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장례를 치를 때만 해도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다 마치고 집에 오니 슬픔이 확 밀려오더라고요. 힘든 일을 하고 집에 오면 엄마가 딱 ‘고생했네 우리 아들’이라고 하는 게 익숙한 경험인데,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는 허전함이 컸어요. 칼국수를 먹다가도 느닷없이 엄마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아리고…. 슬프고 힘든 건 남에게 설명이 돼요. 그런데 아린 감정은 말로 설명하려면 너무나 길고 복잡해서 표현이 안 되죠. 그전까지는 슬픔을 제어할 수 있는 게 어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진짜 성인은 부모를 잃고 나서 찾아오는 아린 감정을 느끼고, 그것과 마주했을 때 스스로 대처하는 방법까지 아는 사람인 것 같아요.” 부모님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 그는 아린 마음을 ‘인생극장’을 쓰면서 달랬다. 노 교수는 책을 엮는 동안이 극복의 과정이었고,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듯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만큼 내면의 성숙을 경험한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전에는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 ‘내가 이걸 성공했을 때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참 좋아하시겠다’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얻었어요. 그래서인지 역설적으로 슬픈 일보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더 마음이 아려요. 뭔가를 해냈을 때 ‘아이고 우리 아들 장하네’라는 환청까지 들리는데, 실제 전할 대상은 없잖아요. 그러면 앞으로 내 삶의 동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전까지는 부모의 칭찬을 기대하며 힘을 얻었다면, 요즘은 내 부모처럼 글로 전하지 못하는 삶을 산 이들과 이후 세대의 가교역할을 해내는 것을 새로운 동력으로 삼고 있어요. 그렇게 사회학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 2018-03-0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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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후에 가장 무서운 것은 ‘외로움’
- 노후에 가장 무서운 건 뭘까? 어렸을 땐 호랑이가 가장 무서웠고 이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귀신이 무서웠다. 사람이 만들어놓은 상상 속의 존재가 귀신이다. 구체적으로 누가 봤다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저 소설 속에서, 영화 속에서 본 것이 전부일 뿐이다. 실체가 없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시골집에 사셨다. 자식들은 다 나가 살아 곁에 있는 자식도 없었다. 자식이 여섯이나 되어도 함께 사는 자식이 없으니 시골 큰 집에 어머니 혼자 계셨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두 분이 계셔서 그런지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는 방을 세놓으라고 말씀드리면 “방이 몇 개는 있어야 자식들 오면 엉덩이 붙일 곳이라도 있지” 하셨다. 그런데 집이 오래되어 여기저기 낡아 기둥도 삭아 있었고 모서리의 아귀도 맞지 않았다. 창문 틀도 안 맞아 바람이 들어오기도 했다. 큰 고장이야 없었지만 자질구레하게 손볼 곳도 많았다. 낡은 집이라 바람이 세게 불면 창문도 흔들리고 가끔은 서까래도 삐걱거렸다. 두 분이 사셨을 때는 별일 아닌 거로 넘겨버렸을 일이지만 혼자 큰 집을 사신 뒤로는 별별 생각이 다 드셨으리라. 도둑이 들거나 외부 침입자가 들어와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를 일이다. 무슨 소리가 날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셨을 것이다. 누구든 생각이 한쪽으로 몰리면 걷잡을 수가 없게 되는 법. 예민하신 어머니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식들이 내려가면 어머니는 무섭다는 말씀을 늘 하셨다. 그러면서도 또 사람이 그립다고도 하셨다. 속수무책의 외로움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시골집을 떠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무서워 못 살겠다고 막내딸에게로 가셨다. 자식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렇다고 생업을 포기하고 내려가 같이 살아 드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기껏 드릴 수 있는 말은 “어머니 무섭긴 뭐가 무서워요”, “요새 귀신이 어디 있어요?”라는 말뿐이었다. 어쩌면 자식들의 무관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결국 시골집을 포기하셨다. 어머니가 시골집을 떠나시고 몇 해 시골집은 비어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으니 마당 가득 망초며 엉겅퀴 그리고 억새 등 각종 잡풀이 무성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풀씨들은 계단이며 처마 밑까지 빈틈없이 들어와 자랐다. 사람이 살던 집 같지 않았다. 썰렁해 보이고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시골집은 점점 황폐해져갔다. 그래도 넓은 시골에서 쾌적한 공기를 마시고 편히 사시기를 바랐는데 어머니는 불편하셨던 모양이다. 무엇보다도 하루 종일 대화할 상대가 없으니 그것이 가장 힘드셨던 것 같다. 무섭다는 말씀은 어쩌면 그립다는 말이었으리라. 그것을 자식들은 몰랐다. 자식들은 고향 시골집이 거의 폐허가 된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가 좁은 단칸방에서라도 자식들과 함께 지내고 싶으셨다는 것을….
- 2018-03-05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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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의 문화행사 한 눈에
-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보자! 지루함을 날려줄 이달의 문화행사를 소개한다. 에쿠우스 일정 3월 1일~4월 29일 장소 대학로 TOM 1관 출연 장두이, 안석환, 전박찬, 오승훈 등 라틴어로 말[馬]을 뜻하는 ‘에쿠우스’는 17세 소년이 자신이 사랑하던 말 여섯 마리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르고 법정에 선 엽기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이다. 기독교인 어머니와 사회주의자 아버지 사이에서 잘못된 사랑과 가치관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소년 ‘알런’과 그를 치료하는 정신과의사 ‘다이사트’의 이야기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과 함께 인간의 잠재된 욕망을 보여준다. 명성황후 일정 3월 6일~4월 15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출연 김소현, 최현주, 양준모, 손준호 등 1995년 대한민국 초연 이후 국내 최초로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에 진출한 뮤지컬 ‘명성황후’.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왕비이자 대한제국의 첫 황후였던 명성황후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2015년 ‘명성황후’ 20주년 공연에 처음 출연했던 김소현이 다시 ‘조선의 국모’로 분한다. 그의 남편 뮤지컬 배우 손준호가 극 중 명성황후 남편 ‘고종’ 역할로 출연해 기대를 모은다.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일정 3월 9~18일 장소 강원도 평창, 정선, 강릉 세 번의 도전 끝에 대한민국 평창이 동계올림픽 및 패럴림픽 개최지로 선정됐다. 3월 9일 오후 8시 평창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펼쳐지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18일까지 10일간 설상 4종목(알파인 스키, 바이애슬론, 크로스컨트리 스키, 스노보드), 빙상 2종목(아이스하키, 휠체어 컬링) 등 총 6종목을 두고 금빛 사냥을 펼친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개봉 3월 14일 장르 멜로, 로맨스 감독 이장훈 출연 소지섭, 손예진 등 1년 후 비가 내리는 날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세상을 떠난 아내. 기적처럼 1년 뒤 죽었던 아내가 기억을 모두 잃은 채 남편과 아들 앞에 나타나는데…. 판매 부수 100만 부를 기록한 이치카와 다쿠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소지섭이 남편 ‘우진’ 역을, 손예진이 아내 ‘수아’ 역을 맡았다. 마마 돈 크라이 일정 3월 23일~7월 1일 장소 아트원씨어터 1관 출연 송용진, 허규, 조형균 등 사랑을 얻기 위해 뱀파이어가 되고 싶은 인간vs불멸의 삶을 끝내고자 하는 뱀파이어. 서로 다른 욕망을 좇는 두 남자의 치밀하고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다뤘다. 다섯 번째 시즌 공연을 앞두고 공개한 뮤직비디오 4편은 온라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2018-03-0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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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순의 우제봉 씨, 패션디자이너의 꿈을 위해 대학원 입학
- 꿈에 대한 열망 하나로 89세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시 대학원을 또 입학하는 우제봉(禹濟鳳·89) 씨는 내친김에 박사까지 도전한다.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공부를 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서 삶의 관록이 묻어난다. 1남 2녀의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 어머니로서의 삶을 완성한 그녀가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민국 격동기를 지나온 여자의 삶과 그녀가 이루려 하는 꿈에 대해 들어봤다. “배움에는 때가 없어요.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해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또박또박 말한다. 89세. 적지 않은 나이라고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장수한 나이다. 우제봉 씨의 나이가 놀라운 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배움을 향한 뜨거운 열의가 있고 그것을 하나하나 이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2월 숙명여자대학교 원격대학원 실버비즈니스학과를 졸업하는 그녀는 우수논문상까지 탈 정도로, 젊은 사람들과의 공부 대결에서 전혀 뒤처지지 않는 열정과 결과를 보여줬다. 겸손하고 순종적인 여자 5년 전 우 씨는 남편을 먼저 보냈다. 그녀는 지금도 죄의식이 느껴진다고 했다. 마치 자신이 잘못해서 남편이 떠난 것 같아 부끄럽다 말한다. 부끄러움이라고? 젊은 세대라면 이 상황에서 왜 그런 죄의식을 느끼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살아온 시대는 지금과는 다르다. 누구 하나 떠나보내면 다 그런 마음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날카로운 자로 잰 듯 나누고 재단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섞이고 묶이던 예(禮)의 시대가 거기에 있었다. “시집살이할 적에도 잉꼬부부니 애처가니 공처가니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서로 참 사랑했죠. 남편은 절 존중해주고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시는 분이었어요.” 우제봉 씨의 기억은 남편을 처음 만났던 시절로 돌아갔다. 그녀의 집안은 소위 있는 집안이었다.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취직을 원했지만 부모님은 가문의 망신이라고 만류하며 어떻게든 결혼을 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와세다대학교 출신의 아버지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스로 시청 문화과에 이력서를 냈고 취직이 됐다. 그녀가 시청에서 근무하다 상사의 심부름으로 다방을 들렀을 때의 일이다. 친구 누나가 운영하는 그 다방에는 미래에 그녀의 남편이 될 남자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다 그녀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중 남편이 가장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대시를 했다. 어느 날 퇴근 후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더니 남편이 그녀를 막아서더란다. 그리고 자신과 교제하자고 했다. 요즘 같으면 스토킹으로 신고할 일이었다. 그 시절엔 여자에게 구애할 때 무데뽀로 밀어붙이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녀는 무시하고 문을 닫고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복학하기 전까지 만날 그 다방에 죽치고 있었다. 우제봉 씨는 심부름을 갈 때마다 그를 만났다. 솔직히 그렇게 다짜고짜 행동하는 남편이 무서웠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이 승낙하면 만나보겠다고 쪽지를 써서 그에게 전달했다. 설마 부모님까지 동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다짜고짜 시작된 연애, 그리고 결혼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상식을 넘어서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퇴근하는데, 남편의 고모와 가족들이 우르르 와서 그녀를 만났다. 남편만큼이나 기질이 화끈한 집안이었다. 다음 날에는 아예 시아버지가 만나자며 찾아왔다. 그리고 만나자마자 사주를 봐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주부터 보고 사귀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갑작스러운 연애, 더구나 처음 하는 연애였기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렵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의 관계를 망가뜨리지 않은 것은 그의 인상이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이순재를 닮았다는 남편은 이번에는 다짜고짜 그녀의 집까지 따라와서는 그녀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런데 의외로 남편의 그런 행동을 친정에서는 좋게 봤다. 패기 있고 자신 있는 모습이라는 평가였다. 이 또한 요즘 같으면 무단 침입으로 걸릴 일이었다. 과연 그 시절의 낭만이란 드라마틱한 사연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힘이었던 듯싶다. “제가 살던 시집이 정릉 기와집이었어요. 지금은 성북 구립 유치원이 됐어요. 거기서 남편과 70년을 살았죠.” 남편 이야기를 꺼내니 그녀의 얼굴에 금세 소녀 같은 미소가 번졌다. 성실하고 강인한 여자 “결혼하니 주위에서 쟤 뭣도 모르고 결혼했네, 사흘도 못 살고 달아날 거라고들 얘기했죠.” 그러나 작고 단아한 이미지이지만 그녀의 심지는 굳고 두터웠다. 스스로 고된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아니 힘들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그냥 견뎠던 것 같다. 집안일뿐만 아니라 시부모가 낳은 늦둥이인 시동생도 키워야 했다. 쉬운 일일 리가 없었다. 힘들 때마다 그녀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를 생각했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그녀를 많이 챙겨줬다. 사실 우 씨는 쌀도 씻을 줄 몰랐다. 요리하는 법도 시집에 와서 배워야 했다. 여느 시부모라면 그런 모습에 혀를 차며 한심해했을지도 모른다. 시아버지도 그녀가 마냥 예뻤던 듯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덕분에 새벽에 일어나면 밤 열두 시까지 방에 앉지 못하는 고달픈 생활이었어도 웃으면서 시집살이를 할 수 있었다. 우 씨의 이러한 태도는 그녀의 인성과 지성이 함께 어우러진 데서 나온 게 아닐까. 그녀는 자주 ‘내가 여기서 행동 잘못하면 타인에게 누가 될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 명문학교 출신에 덕망 있는 집안의 가풍이 그녀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강인한 태도야말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이제야 자신만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꿈, 패션디자이너 “내가 공부하기엔 진짜 고령이지.(웃음) 입학할 때도 시선들이 만만치 않았어. 방송국에서도 오고 신문에도 나오고.” 남편을 여의고 평창동 예능교회 봉사활동을 할 때만 가끔씩 밖에 나오던 우 씨를 부추긴 것은 자식들이었다. 자식들은 “엄마 좋아하는 일은 공부잖아”, “엄마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가장 보기 좋다”며 어머니가 늦게라도 공부하기를 종용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가 하고 싶은 공부였을까?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꿈, 그것은 바로 패션디자이너였다. 남편과 결혼하기 전부터 패션디자이너 꿈을 갖고 있었고 공부를 위해 미국에 갈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가서 공부하는 것을 남편도 반대했고 시댁 식구들도 반대했다. “그때 시댁에선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어요. 우리 딸들은 학원도 못 다니고 대학교를 갔죠.” 너무나도 이루고 싶었던 꿈을 갖고 있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여자. 경력 단절의 경험이 있는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었다. 벽은 높았고 그녀는 오를 힘이 없었다. TV에서 앙드레 김을 볼 때마다 ‘나도 할 수 있는데’ 하는 미련이 몰려오곤 했다. 시니어를 위한 패션은 필요 자신이 놓친 꿈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 숙명여대에 전화를 했을 때 그날이 마침 신청 마감날이었다. 그것조차 어떤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의 운명은 졸업을 위해 논문까지 쓰는 단계로까지 흘러갔다. “학기 중에 교통사고도 나고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이 나이에 논문을 쓸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 시험을 봐야겠다 싶어서 김숙응 교수님에게 말했더니 ‘아깝게 왜 시험을 보느냐, 논문을 써야지’ 해서 논문을 쓰기 시작했어요.” 논문을 쓰면서 그녀는 계속 자신을 재촉했고 교수에게도 재촉했다. 빨리 졸업한 후 다른 것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랜 후회들을 던져버리고 다시 출발선에 선 그녀에게 공부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힘을 마땅히 써야 하는 당위성 같았다. 평창동 예능교회에 가서도 열심히 기도했다. 그녀는 패션을 본격적으로 배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노리는 분야는 실버를 위한 패션 사업. 그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이론이 필요했고 체계적인 공부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고, 집에서 버리는 옷들을 리폼해 선물로 주던 사람이다. 이미 실전을 충분히 익히고 있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학문적 지식이었다. 그녀는 최근 이론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냈으며 운좋게 합격을 했다. 90대 패션디자이너의 꿈 패션디자이너가 되면 그녀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옷을 만들어서 팔아야죠. 돈을 벌어서 도와줘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요.” 돈을 버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촉’을 믿고 패션디자인 길을 걸어갈 의지로 불타고 있다. 자신이 번 돈으로 남을 돕는 일의 즐거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니어를 위한 패션이 필요해요. 젊은 사람들 것은 이미 많으니까요. 시니어가 젊은 사람 옷 입으면 안 어울리거든요. 나는 그런 옷을 사면 다 고쳐서 입어요. 입으면 제 몸에 안 맞으니까요.” 젊은 취향의 옷만 있지 시니어 몸의 특색을 살린 옷은 없다는 그녀의 진단은 정확하다. 90대 패션디자이너. 듣기만 해도 경이롭다. 어쩌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의상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그게 아직 홍보가 덜 됐어요. 그래서 내가 마음이 급할 수밖에요.(웃음) 그래도 늦으면 늦는 대로, 내 스타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실제로 입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말이죠. 나이에 맞는 패션은 없잖아요. 젊은 디자이너가 만든 시니어 옷이 아니라 몸매나 취향에 맞게 시니어가 좋아할 만한 옷을 만들고 싶어요.” 그녀의 야무진 꿈은 어떤 결실을 가져오게 될까?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을 현실로 만든 그녀이기에, 그 어떤 꿈보다도 젊게 빛나는 그녀의 꿈이 기대가 된다.
- 2018-03-02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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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뛰는 사람 위에 노는 사람, 노는 사람 당해낼 사람은 없지요”
- 삶에서 행복을 충전하는 최고의 방법은? 좋은 사람들과 여행을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 한다. 그것을 다하며 사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중견 여행사 ‘베스트래블’을 경영하는 음식·여행 칼럼니스트 주영욱 대표(57)가 그이다. 이외에도 사진가, 팟캐스트 DJ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노는 게 일이다. 그의 별명은 문화 유목민,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다. 한마디로 노는 사람이다. 마케팅 리서치 분야에서 25년을 일해온 그는 2013년 52세의 나이에 여행사를 창업, 인생 2막을 ‘문화유목민’으로 살고 있다. 뛰는 사람에서 ‘튀는 사람, 노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 그의 인생 2막 이야기를 들어보자. 주영욱 대표는 여행, 음식은 물론이고 미술, 음악, 사진 모두 전문가 수준의 취미를 갖고 있다. 57세, 보통 사람은 이제 버킷리스트를 쓰기 시작할 때다. 그는 하나씩 실행해나가며 지워나가느라 오히려 홀쭉하다. 고교 시절부터 꿈꿨던 DJ의 꿈은 팟캐스트 활동으로, 음식 칼럼을 쓰고 싶다는 꿈은 중앙일간지 연재를 통해 실현했다. 이외에도 가상역사소설, 공상과학소설로 저술을 준비하는 등, 그의 꿈은 산지사방 전 분야에 걸쳐 뻗쳐 있고 진행 중이다. 얼마 전 그는 왼쪽 팔목에 ‘매버릭’(Maverick, 개성이 강한 사람)이란 문신을 새겼다.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나이에 20대 젊은이들처럼 멋부리기 유행을 타서도, 폭력배처럼 위협을 주기 위해서도 아니다. 매버릭, 말 그대로 개성이 강한 사람으로 편견과 습관에 갇혀 살지 않겠다는 자기다짐이고 자유선언이다. 그는 “세상의 터부 내지 스스로의 금기를 깬 느낌 때문인지 시원했다”며 “세상에 길들여져 탈색되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겠다는 의미에서 했다”고 말했다. 그가 정기적으로 단식과 명상을 하며 몸과 마음을 함께 비우는 것도 본질과 개성을 찾기 위한 일환이다. 그는 비우고 내려놓고 편견의 곁가지를 쳐내야 핵심에 집중해 생생해진다고 말한다. 삶이나 몸이나 생각이나, 심지어 음식의 맛도…. 마케팅 리서치 분야에서 25년간 일하며 미국, 일본, 프랑스 글로벌리서치 사의 한국법인 CEO를 두루 역임하셨습니다. 52세의 나이에 이종 분야 창업을 하신 게 특이합니다. “경영상 이견으로 외국 회사 한국법인 CEO를 그만두고 됐어요. 20대 때부터 몸담아온 마케팅 리서치 일을 다시 할까도 생각했어요. 마케팅 리서치는 최적의 대안을 찾아내 본질에 집중하는 일이거든요. 제 성격의 완벽주의랑 맞아 신나게 일했어요. 25년 가까이 해오다 보니 스스로 타성이 느껴지더군요. 현재의 삶에 그럭저럭 안주하는 내 모습이 싫어졌습니다. 아직 젊은데 작은 성공에 취해서 한 달에 보름씩 골프를 쳐가며, 이렇게 살아도 되나 불안하기도 했고요. 재미가 제 삶의 중요 요소예요. 좋게 말하면 글로벌 마인드, 나쁘게 말하면 역마살이라고나 할까요. 익숙한 길보다 가지 않은 길, 새롭게 흥분할 수 있는 것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나를 던지고 싶었어요.” 주 대표께서 생각하는 여행의 재미와 의미는 무엇인가요. “여행의 가장 큰 의미는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사고를 유연하게 해줘요. 이분법적 사고에서 절로 벗어나게 한다고나 할까. 여행 가면 늘 낯선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룰을 따르고 새롭게 생각해야 하잖아요. 그런 게 제 성격에 맞아요. 철이 안 들어서 그런가봐요. 추하다vs아름답다, 옳다vs그르다의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게 해줘요. 편견을 깨야 한다는 걸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지요.” 그는 인도 여행을 갔을 때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초라한 행색의 인도인이 자기 배를 타달라고 호객 행위를 심하게 하더란 것. 다음 날 아침 숙소 앞에서 넘어져 잠깐 쉬고 있을 때였다. 그가 다가오기에 또 호객 행위를 하러 온다고 생각해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고. 알고 보니 약을 주려고 온 것이었다. 그는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여행지에서 매번 시시각각 깨닫는다고 털어놓았다. 여행을 좋아하는 것과 여행 사업을 하는 것은 별개인데요. 창업을 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첫 번째는 고품격 여행 상품을 개발하고 싶었어요.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 하잖아요. 저는 그게 여행 자체가 아니라 프로그램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400회 이상 해외 여행한 경험이 있으니 그런 기획을 잘할 거라고 생각했지요. 여행 계획을 짜면 모두들 즐거워하며 ‘이런 프로그램은 여행사도 못 짠다. 너, 나중에 여행사 차려라’ 하고 농담할 정도였거든요. 두 번째는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여행업은 미래 산업으로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나름 판단했지요. 세 번째는 인맥에 대한 자신감이었지요. 제가 온갖 모임의 총무, 회장을 맡아 마당발이었거든요. 아는 VIP들만 모객해도 걱정 없겠다 생각했지요. 금방 착각임을 깨달았습니다만….” 즐기던 여행을 막상 사업으로 해보니 어떻던가요. “일과 취미는 전혀 달라요. 지금까지 여행사를 하며 실제 고객은 모르는 분들을 개척한 거예요. 아는 사람과 도와주는 사람은 전혀 별개예요. 처음엔 섭섭하기도 했는데요. 그게 인지상정이에요. 나도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친분보다 전문성을 갖고 냉정하게 판단하거든요. 인생 2막, 새로 도전하면서 과거 인맥을 바탕으로 뭘 해보겠다는 사람을 보면 적극 말려요. 사업은 아는 사람 믿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준비와 자금력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기본인데도 잊기 쉬워요.” 그는 “내가 여행상품 기획은 잘하니 호텔, 항공료 절감 등 원가 관련 문제 같은 부족한 실무 요소는 남을 통해 보완하면 되겠지 하고 안이하게 생각한 것도 실수였다”며 “사장이 큰 그림 보며 해야 할 일을 직원이 대신 해줄 수는 없더라”고 말했다. 만일 창업 초기로 돌아간다면 여행 가이드를 하든, 자격증을 따든, 직원을 하든 현장에서 밑바닥 경험을 1~2년 반드시 해보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나마 자신은 충분한 투자금을 확보해놓고 시작해서 버틸 수 있어 다행이었다는 고백이었다. 그가 히트를 친 것은 고품격 테마여행 중국 장강삼협 크루즈 관광상품 출시다. 동종 상품의 3~4배 가격으로 고품격의 명품패키지를 기획한 게 먹힌 것이다. 2016년 그는 여행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해외여행자와 서비스 제공자(여행사/랜드사/가이드/해외교민/유학생 등)를 직접 연결시키는 맞춤형 여행 도움 플랫폼 ‘티비스켓’을 창업해 사업 영역을 넓혔다. 주 대표는 “얼핏 마케팅 리서치 경력이 여행업과 상관없어 보이지만 결국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마케팅 리서치의 본질은 옥석을 가려 최고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며 “이는 여행업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직관적으로 ‘좋다, 나쁘다’로 끌리기보다 호기심의 본질과 원인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주 대표와 대화를 하며 특이한 모습을 발견했다. 인생의 우선순위로 재미를 이야기하고, 본인도 재미있게 살지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거나 유머가 넘치는 편은 아니었다. 첫째, 둘째, 셋째 하는 식으로 정리를 해서 설명하고 단어의 정의를 내린 후 논리를 전개해나가는 방법으로 대화를 했다. 알고 보니 그는 우리나라 상위 2%의 지능지수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멘사 회장을 지냈다. 음식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시지요. 일간지에 연재도 하셨고 ‘이야기가 있는 맛집’이라는 책까지 내셨습니다. 일반 음식 칼럼과는 달리 식당 셰프, 사장의 인생 사연을 곁들이는 게 특색이더군요. 잘되는 식당의 비결은 무엇이던가요. 간단히 말하면 기본에 충실한 식당입니다. 말은 쉬운데 오래 유지하긴 어려워요. 이런저런 핑곗거리와 유혹 때문에 넘어가기 쉽거든요. 유명한 집과 맛 좋은 집은 달라요. 진정한 맛집의 음식에선 주인의 정성과 열정이 느껴져요. 손님을 지갑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 자체에 자부심을 가진… 결국 음식은 재료맛, 손맛, 칼맛의 조합이거든요. 주인의 정성이 깃든 음식은 첫맛, 중간맛, 끝맛이 일관되게 같아요. 단맛이나 자극적 조미료로 맛을 낸 음식은 첫입엔 당기지만 끝맛이 좋지 않아요.” 주 대표는 ‘맛집을 고르는 비결’로 2가지를 귀띔해줬다. 사장이 직접 요리하는 곳, 오랜 전통을 가진 곳, 이 두 기준으로 고르면 틀림없다는 것. 요즘 상(上)남자는 상(床)남자, 상 차리는 남자란 농담도 있더군요. 집에서 요리를 잘 하십니까. “한동안 열심히 배웠지요. 내 손으로 메뉴에 따라 음식을 만드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의욕이 넘쳐 비싼 칼이랑 파스타 냄비만 잔뜩 사놓고선 그만뒀어요. 손이 입을 못 따라가 중년 남자의 작심삼일 셰프놀이에 그쳤지요.(웃음) 애들이 먹지 않으니 요리할 마음이 없어지더군요. 그냥저냥 요리는 재미있는데 뒷정리 설거지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아내의 고마움을 뒤늦게 깨달았답니다. 요리를 배우겠다는 동년 친구들에게 충고해주는 게 있습니다. 음식 맛은 고가의 장비랑 상관없으니 비싼 그릇과 도구는 사지 말라고요. 고급 골프채를 새로 샀다고 골프 스코어가 바뀌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해주지요.” 음식 칼럼니스트가 꼽는 최고의 음식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하는 음식은 아내가 해준 김치찌개입니다. 힘들고 지쳤다가도 돼지고기 넉넉하게 넣고 끓인 김치찌개만 먹으면 마음이 순식간에 풀려요. 나의 소울 푸드라고나 할까요. 밖에서 일하느라 바쁘고 지친 와중에서 집밥 해주는 정성을 알기에 일절 불평 없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반찬투정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답니다. 음식은 입보다 마음으로 먹는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해주셨던 소박한 집밥 한 끼가 어느 산해진미보다 더 맛있게 기억되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최근 아프리카 여행 때는 가수 휘성 씨 뮤직비디오 촬영도 하셨다면서요. 산악자전거 타기, 사진가, 종횡무진 다양한 활동을 하시는데요.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여행 관련 콘텐츠를 만들어 여행 전문 케이블 TV를 만들고 싶어요. 경영자로서 저는 수치에 그렇게 밝은 편이 아닙니다. 선한 영향,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업이 자리가 잡히면 직원들을 소사장으로 만들어 파트너 관계로 경영하고 싶어요. 좋은 음식이 그렇듯 뒷맛이 좋고 오래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김치찌개같이 질리지 않고 따뜻한 사람으로요.”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그가 핸드폰을 꺼내 자신이 DJ로 활동하는 맛집탐방 팟캐스트를 들려주었다. 촉촉한 7080의 감성 어린 목소리로 사연을 곁들여 맛집을 소개하고 있었다. ‘꿈이 있는 자는 늙지 않는다’고 했던가. 다음에 만날 때 그가 얼마나 더 ‘홀쭉해진’ 버킷리스트를 갖고 나타날지 궁금해졌다. 그때 같이 먹을 추천 식당도….
- 2018-02-28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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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공으로 새인생 찾은 하먼치즈 황형연·이선자 부부
- “매일같이 쉬지 않고 놀러만 다녔어요.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가 숙제 같았어요.”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만난 황형연(黃炯淵·61) 대표의 이야기다. 그는 아내 이선자(李善子·58) 씨와 젖소를 키우기 시작한 지 30년이 넘은 베테랑 목장주이자 낙농인이다. 소를 키우는 것이 익숙해지면서 사소한 고민이 하나 생겼다. 새벽에 일어나 자식 같은 소들을 돌보고, 젖을 짜고, 집유 차량에 우유를 넘겨주고 나면 하루 일과는 끝. 저녁 먹기 전까지 4시간 동안 할 일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부부가 맨 처음 시작한 것은 주변 산들을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황 대표는 주변에 안 다녀본 곳이 없다고 말한다. “산이란 산은 다 찾아다녔죠. 주변 관광지도 웬만한 곳은 다 다녔고요. 좋다 싶은 곳은 두 번 세 번을 갔는데, 너무 자주 다니니 신물이 나더라고요.” 그러다 어느 날 황 대표 눈에 들어온 광고 한 줄. ‘순천대학교 목장유가공 교육과정’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거다 싶었다. “우리가 원유를 생산하니까 활용하면 좋겠다 싶었죠. 가족이나 지인들을 위해 만들어도 보람있겠다 생각했어요.” 황 대표가 먼저 시작했지만, 치즈 만드는 재미에 푹 빠진 것은 오히려 아내 이 씨였다. 농장을 하기 전 농협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제약회사도 다녔기에 이론을 배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전라도의 ‘어머니’로서 지니고 있는 ‘손맛’도 치즈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고 이 씨는 말한다. “교육을 받으니까 슬슬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원래 유제품을 잘 먹기도 했고요. 새벽같이 착유를 끝내고 8시까지 교실에 도착해야 해서 많이 바빴지만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똑같은 교육과정을 열 번이나 반복해서 수료했죠. 학교 연구원들이 왜 자꾸 오냐 핀잔을 줄 정도였어요.” 이 씨는 수업시간에 계량된 재료들을 꼭 손으로 한 번씩 쥐어봤다. 눈으로 보는 수치보다 손으로 느끼는 감각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나중엔 손대중으로도 정확하게 계량해낼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그렇게 재미 삼아 만들던 것을 사업화하기 시작한 것은 7년 전 부터다. 처음부터 거래처를 정해놓고 만든 것이 아니라, 주변에 나눠주던 치즈가 소문이 나면서 본격적인 허가를 받고 생산량을 늘렸다. 무항생제와 해썹(HACCP) 인증을 받고 가장 큰 거래처인 생활협동조합에 납품을 시작했다. 이후 부부의 제품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황 대표 부부의 유가공 회사명이 ‘하먼치즈’가 된 사연도 재미있다. 매일 저녁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저녁식사를 하는데 회사명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황 대표 어머니 입에서 ‘하먼’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하먼’은 ‘그렇지’라는 강한 긍정의 의미가 담긴 전라도 방언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누구 할 것 없이 사명을 ‘하먼치즈’로 하자는 데 동의했다. 하먼치즈는 모차렐라, 슈레드, 스트링, 고다 치즈, 구워 먹는 치즈까지 생산 중이다. 요구르트도 만드는데, 공산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맛을 자랑해 인기가 좋다. 단일 목장의 우유를 당일 착유해 당일 가공하는 제품이라 품질이 나쁠 수가 없다. 하먼치즈에는 황 대표 부부 외에 4명의 직원이 더 있다. 최근에는 며느리도 순천대학교에서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돕겠다고 나섰다. 농장일은 이제 아들이 도맡아 하고 있다. 이 씨는 치즈 사업을 시작한 뒤로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즐겁다고 말한다.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치즈를 만들기 시작해 오전 8시가 넘어야 일이 끝나요. 그렇게 작업을 해놔야 직원들이 치즈를 성형하고 제품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제는 농한기를 맞아 한가해진 주변 친구들이 같이 놀자고 해도 만날 틈이 없어요. 제 시간이 없어졌죠. 그래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 같아 늘 즐거워요.”
- 2018-02-18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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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울린 ‘황혼의 사랑’
- “젊어서의 사랑은 자신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고, 황혼의 사랑은 상대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미국 최초 여성 연방 대법관을 지낸 샌드라 데이 오코너의 남편 사랑입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좋으니, 다른 여성을 사랑해도 당신만 행복하다면 나는 기쁩니다.” 오코너 대법관은 1981년부터 24년간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중도의 여왕’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사심 없이 균형추 역할을 해낸 법관입니다.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느 날 샤워를 끝내고 보니 가슴에 이상한 혹이 만져지더랍니다. 그래서 오전 재판을 마치고 병원에 갔다가 유방암 3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주위에서 힘든 투병이니 장기휴가를 내고 치료를 받으라는 권유를 했지만 뿌리쳤습니다. 오코너 대법관은 그렇게 유방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꿋꿋하게 법관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유명 변호사인 남편까지 알츠하이머병 초기라는 진단을 받자 2005년 명예로운 종신직인 대법관의 자리를 내려놓습니다. 법조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터여서 고민이 컸을 텐데 과감히 사표를 던졌습니다. 남편의 기억력이 점점 나빠져 결국 그녀도 몰라보게 되자 남편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은퇴한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요양원에서 다른 환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다른 여자 손을 잡고 산책을 하고 키스를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남편을 미워하거나 애인을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코너는 행복해하는 남편을 기쁘게 바라봤습니다. 그녀의 아들도 한 방송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마치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 같아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정서적 안정을 되찾게 됐다며 좋아하셔요”라고 말하며 자살 얘기만 하던 아버지가 사랑에 빠져 행복해하는 모습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오코너의 친구인 심리학자 메리 파이퍼는 남편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녀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어서의 사랑은 자신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고, 황혼의 사랑은 상대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순의 나이에 만난 오코너의 숭고하고도 위대한 사랑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과 함께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눈시울을 적셔가며 이 이야기를 소개해주곤 했다. 물론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더 특별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편을 기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랑은 도대체 어느 만큼의 깊이를 가진 걸까? 얼마나 성숙해져야 그런 사랑이 가능할까!
- 2018-02-13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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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삶의 버팀목인 당신들
- 느닷없이 옛날 일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 기억의 편린들을 더듬어가다 보면 즐겁고 행복했던 날보다 아팠던 상처들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딸들을 향한 시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며느리인 필자가 극심한 차별을 당했을 때, 또 그때마다 단 한 번도 아내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던 남편. 눈앞의 억울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했던 시절이다. 이럴 때 여자들은 대부분 친구나 지인을 만나 수다로 그 상처를 달래고 스트레스를 푼다. 그들은 함께 화내고, 욕하고, 흥분하면서 한마음이 되어준다. 그렇게 한편이 되어주는 게 우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필자도 결혼 초에는 친구들과 이런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푼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러나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어가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런 방법은 품격만 떨어뜨릴 뿐이라는 것을. 그 후로는 절대로 친구나 지인 앞에서 가정사를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고통 속에서 힘겨운 날들을 보낼 때마다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지지해주면서 필자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필자의 두 언니들이다. 남편과 심하게 다투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언니들에게 당장 이혼하겠다고 하면, 큰언니도 작은언니도 이렇게 말했다. “네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선물로 준 사람이니 좀 봐주면 안 될까?” “하나님이 네 짝으로 맺어주셨잖니. 우리가 그 뜻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더 기다려보면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또 딸들의 잘못은 감싸주면서 며느리인 필자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워 나무라는 시어머님과는 억울해서 더는 같이 못 살겠다고 하면, 이렇게 말했다. “한 치 걸러 두 치라고, 며느리가 미워서가 아니라 딸들을 너무 사랑하다 보니 미처 며느리 입장을 헤아릴 여유가 없어서 그럴 거야. 시어머님보다 친정어머니에게 마음이 더 가는 우리들 입장과 같지 않겠니? 언니들 생각에는 네가 그렇게 이해하고 마음을 푸는 게 건강에도 좋고 네 마음도 평안해지지 않을까 한다.” 남편이 사업 실패를 해서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을 때도 다른 사람들 같으면, 제 가족도 못 지키는 무능한 남편과는 이혼하는 게 낫다고 말해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언니들은 그러지 않았다.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놓여 삶이 막막해도 너는 엄마니까, 네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어려울수록 부부가 힘을 합해야지. 네 남편이 고의로 사업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잘살아보려고 애쓰다가 그렇게 된 건데, 남편 심정은 지금 어떻겠니? 너도 힘들겠지만 이런 때일수록 네가 옆에서 위로하고 격려해주고 용기를 주면 좋겠다. 그런 게 부부가 아닐까?” 언니들은 단 한 번도 함께 화내고, 욕하고, 흥분한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늘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면서 필자를 한결같이 지켜줬다. 어릴 때는 언니들의 존재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언니들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세상의 모든 언니들이 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이 든 지금에서야 언니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되었으니 참 철이 없는 막내다. 그런데도 한 번도 언니들에게 고맙다는 말도 해본 적이 없다. 이제야 가슴 벅차게 마음을 전해본다. “몇십 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버팀목이 되어준 언니들! 고맙습니다~”
- 2018-02-06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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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나는 잊지 말아요’ 하윤재 영화감독
- ‘앞으로 10년만 엄마의 상태가 지금처럼 유지되도록 도와주세요.’ 2007년 겨울 엄마의 치매 판정이 내려진 날, 하윤재(河侖材·47) 감독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당시 일흔이 넘은 노모에게 10년은 막연히 긴 시간이라 여겼다. 그러나 만 10년이 지난 현재, 절망으로 휩싸였던 그날의 기억이 무색하리만큼 모녀는 여전히 인생의 희로애락을 나누며 알콩달콩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 감독은 엄마와 딸의 애틋한 일상을 추억하면서도 같은 처지의 치매 가족에게 작은 위안이 되길 바라며 에세이 ‘엄마, 나는 잊지 말아요’를 펴냈다. 엄마의 기억이 사라지는 순으로 구성한 책이지만,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모정은 결코 기억과 비례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 나는 잊지 말아요’라는 책 제목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직접 제목을 지은 하윤재 감독은 “엄마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손을 놓는다는 의미다”라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다섯 남매 중 막내인 하 감독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남다르다. 막내딸이 먹고 싶은 거라면 달나라에 가서라도 구해올 엄마인데, 언제부턴가 음식이 하기 싫다며 의아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반찬 투정을 하며 졸라 겨우 엄마의 요리를 맛보게 된 순간, 하 감독은 간이 맞지 않은 음식과 함께 두려운 기운을 한가득 머금었다.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무료 건강검진”이라 거짓말까지 하며 병원에 모시고 가면서도 내심 단순한 노화 현상이길 바랐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치매’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하 감독의 예민한 성격 덕분에 아주 초기 단계에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 그러나 당시에는 ‘치매’라는 말에 온 정신이 쏠려 절망감만 앞섰다. “우선 치매에 대해 알아야겠더라고요.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너무 많은 정보가 뒤섞여 있었는데, 결론은 하나였어요. ‘사람마다, 집안마다 다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엄마를 보살필 수 없잖아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며 공부도 하고, 나중에는 요양보호사 자격증까지 따게 됐죠. 대부분 치매 관련 책에는 환자를 어떻게 위로하고 보살펴야 하는지 잘 쓰여 있어요. 그러나 치매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어떻게 위로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글은 찾기 힘들더라고요.” 엄마의 치매가 가져온 선물 처음 치매 진단을 받고, 점차 뚜렷한 증상이 나타나긴 했지만 평범한 일상을 지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하 감독은 치매가 진행되는 속도를 살피다가 한 4~5년 정도 됐을 때 어머니에게 당신의 상태를 알려야겠다고 판단했다. 막상 시기가 되었지만 오히려 사실을 알고 나면 그 충격으로 후폭풍이 클 것만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9년 차에 접어들었고,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힘든 고백을 결심하며 말로만 하기보다는 그동안 잘 지내준 엄마에 대한 보답으로 작은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다. 엄마의 사진으로 만든 앨범과 용돈을 함께 드리며 치매라는 단어를 조심스레 끄집어냈다. “저희 친할머니, 외할머니께서도 치매를 앓으셨는데 엄마는 두 분을 보살피면서 치매를 굉장히 두려워하셨어요. 그런 엄마가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면 절망감에 빠지실까봐 걱정스러웠죠. 누군가는 어차피 잊어버릴 텐데 말하면 어떠냐고 하지만, 가끔 멀쩡하실 때 보면 기억이 돌아오기도 하고, 당신의 인생도 생각하곤 하거든요. 다행히 치매라는 사실을 아시고도 염려스러운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어쩌다 모든 걸 다 기억해낼 때 제게 ‘그동안 나를 지켜줘서 정말 고맙다’라는 말씀을 하세요. 엄마도 자신의 상태를 느끼고, 제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다 인식하고 계신 거죠.” 하 감독은 머리로는 기억 못할지라도 마음으로 나눈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매 순간 소홀하지 않고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리려 촉각을 곤두세우는 그다. 어머니를 향한 깊은 관심은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까지 따스하게 변화시켰다. “엄마의 치매가 아니었다면 굉장히 오만한 삶을 살았을 것 같아요. 잘나가는 또래 친구들이랑 백화점에 명품 보러 다니고 소위 상류층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삶의 만족도가 굉장히 낮았겠죠. 예전에 환자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때론 병이 감사하다’라고 하는 게 전혀 와 닿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말이 이해돼요. 얼마 전에는 공중화장실을 갔다가, 쓰레기통에 휴지를 던졌는데 안 들어갔어요. 예전의 나였다면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계시니 알아서 치우겠지 하고 휙 나갔을 텐데, 그날은 내가 버린 휴지랑 옆에 떨어진 것까지 다 주워서 넣고 나왔어요. 어떻게 보면 아주 작은 일이지만, 제겐 상징적인 변화라고 생각해요.” 잊히지 않는 엄마의 얼굴 하 감독은 단편영화 ‘봄날의 약속’으로 제33회 프랑스 클레르몽 페랑 단편영화제 국제경쟁 부문,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 단편 쇼케이스 등에 초청되었고 청룡영화상, 필름 카라반 단편영화제 등에 진출했다. 1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깊은 여운과 묵직한 감동을 선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삶’을 모티브로 한 시나리오의 힘이었다. 한편으로 보면 이 역시 어머니가 딸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았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담은 딸의 영화를 보고는 하 감독에게 “그래서 네가 뭘 했다는 건데?”라고 물었다. 무심한 듯한 어머니의 질문은 평소 막내딸을 향한 염려에서 비롯됐다. “엄마는 제가 언니들처럼 선생님이 되거나 월급 받는 직장에 다니시길 바라셨어요. ‘봄날의 약속’이 나오기 전까지는 영화 기획PD 일을 했는데,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느냐고 자주 물으셨죠. 카메라를 들고 영화를 찍는다거나, 연기를 한다거나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답답해했어요. 직접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한 이유는 엄마에게 ‘이거 다 내가 만든 거야’라고 속 시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어요. 그 뒤로는 뭘 하느냐고 잘 묻지 않으셔요. 최근에는 장편영화 시나리오가 영화진흥위원회 제작진흥사업에 채택돼서 촬영할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장하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이런저런 설명은 안 하셨지만, 그 한마디에도 막연히 내 딸이 원하는 바를 이뤘다고 인지하시는 것 같아 뿌듯했어요.” 준비 중인 차기작은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어머니와의 일상 중 시나리오에 쓰고 싶은 에피소드가 있는지 궁금했다. 하 감독은 어떠한 일화보다도 잊히지 않는 한 장면이 있다고 말했다. “자식은 부모에게 잘한 것보다는 못한 게 가슴에 남잖아요. 매일 밤 자기 전 기도를 하는데 그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요. 학창 시절 일인데, 전에 살던 방배동에 아주 가파른 언덕길이 있거든요. 하루는 엄마가 경동시장에 갔다가 찜통이랑 장바구니를 이고 그 언덕을 내려오고 계셨어요. 마침 언덕 아랫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엄마가 저를 보고는 반가워하며 부르셨죠. 아마 짐이 무거워서 그러셨을 텐데, 봤으면서도 모른 척 지나가고 말았어요. 그때 엄마의 얼굴이 정확하게 각인돼서 기도할 때마다 생각나요. 아무리 남들이 효녀라고 잘한다고 해도 그날 일이 자꾸만 채찍질하듯 떠올라서 죄스러운 마음이 커요.” 다음 생엔 엄마의 딸이 아닌 엄마로 어머니의 치매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간다는 하 감독은 소중한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지는 상황이 가장 두렵다고 했다. 물론 소중한 사람들에는 어머니가 가장 중심에 있다. 언제 맞이할지 모르는 상황을 떠올리며 그는 마지막 인사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고마웠어요”라는 과거형 인사나 “사랑합니다”라는 현재형 인사는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지막 인사이지만, 또 다른 시작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그가 찾은 인사말은 “다음 세상에서 또 만나자”였다. 하 감독은 언젠가 그 말을 해야 할 때쯤이면 어머니가 자기 의지대로 인사를 못하시리라는 생각에 미리 인사를 해두기로 했다. “엄마가 컨디션 좋은 날 미리 인사드렸어요. ‘엄마, 우리는 참 좋은 인연인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 다음 세상에서도 다시 꼭 만나자’라고 했는데, 엄마가 ‘만나지 말자’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야 꼭 만나고 싶지만 지금도 네게 짐이 되는데 싫다. 다음에는 좋은 부모 만나서 편히 살아라’ 하시는데, 순간 눈물이 확 쏟아지더라고요. 그동안 제게 해주신 게 얼마나 많은데, 어째서 당신이 짐이라고만 생각하시는지….” 그런 어머니의 반응은 하 감독의 바람을 더욱 간절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인사처럼 다음 생에 어머니를 만난다면 어떤 인연으로 마주하고 싶은지 궁금했다. 그는 단박에 “엄마의 자식이 아닌, 엄마의 엄마로 태어나고 싶다”고 대답했다. 평생 자식을 위해 헌신하신 어머니처럼 그 역시 많은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일 터였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해드리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일까? “엄마가 내 딸이 됐을 때 꼭 이야기해주고 싶은 건 ‘연애를 많이 해봐라’예요. 그 시절엔 거의 그랬지만, 연애도 제대로 못 해보고 결혼해서 맏며느리라 평생 고생만 하셨거든요. 엄마가 다시 태어나면 대학도 다니고, 예쁘게 화장도 하고, 해외여행도 가고, 운전도 하고, 편한 아파트에도 살아보면 좋겠어요. 그동안 나는 엄마 덕분에 그런 걸 다 누리고 살았잖아요. 다음 생에 가능하다면 엄마 덕분에 제가 경험한 모든 것을 다 해드리고 싶어요.”
- 2018-02-0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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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떤 남편으로 기억될까?
- “그래도 마지막엔 부부밖에 없어!” 나이 들어가면서 친구들에게서 자주 듣게 되는 말이다. 올해 69세가 되었다. 70대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니 예전과 또 다른 느낌이 든다. 나름으로는 신세대처럼 살아왔다고 여겼으나 전반적 생활을 되돌아볼 때 가부장적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중 하나가 아내에 대해 이렇다 할 만한 선물을 하지 못한 점이다. 돈을 아껴서가 아니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란 생각이 든다. 가난한 시골에서 자라 생일 같은 기쁜 날에도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고 다른 가족에게 선물해본 적도 없다. 설날이 되면 옷가지나 양말 등 설빔을 부모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 전부다. 그러한 삶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내에게 이렇다 할 선물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고 그것이 버릇이 되어 아내도 아예 그러려니 하며 살아왔다. 얼마 전 지인 한 사람이 자그마한 기념품 하나를 손에 쥐어준다. 포장지를 뜯어 보니 ‘결혼 35주년 산호혼식 기념’이란 글자가 새겨졌다. 부부가 좋은 날 지인들과 기쁨을 나누는 행복한 모습이 떠올라 필자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2년 전쯤 친구들과 칸막이가 되어 있는 서울의 한 한식점에서 저녁을 먹던 중 옆자리에서 들려온 여성 손님들의 수다 내용이 떠오른다. 두 여인이 있다. 두 여인 다 남편을 여의었다. 나이는 비슷한 50대 중반이다. 한 여인은 남편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유산으로 받아 돈 많은 과부가 됐다. 다른 여인은 재산은커녕 오히려 남편의 카드 빚까지 짊어졌다. 돈을 많이 남겨준 남편은 생전에 검소하고 알뜰해 낭비하지 않았고 재산을 늘리는 데에만 몰두했다. 그렇다 보니 부인에게 추억거리 하나 남겨주지 못했다. 받은 것이라고는 남겨준 재산뿐인 셈이다. 여인은 밤새 생각해봐도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남편 얼굴도 잊힐 듯하다. 지난 세월이 아쉽기만 했다. 다른 여인의 남편은 조금 달랐다. 돈은 잘 벌지 못했으나 필요할 때는 카드 빚을 지고서라도 생활을 즐겼다. 부인을 위해 그럴듯한 이벤트도 해주었고 함께 여행도 즐겼다. 남편이 갑자기 죽은 후 카드 빚을 짊어져야 했지만 함께 여러 가지 추억도 남겨주었다. 여인은 남편과의 즐거웠던 여행의 추억을 떠올리며 애통해했다. 남편이 마지막으로 준 생일 선물을 보면 남편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자기를 위해 최선을 다하던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멈추지 않았다. 필자는 과연 어떤 남편으로 남게 될까? 상상해본다. 필자의 아내도 추억거리를 찾지 못할 듯하다. 게다가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이도 저도 아닐 성싶다. 그냥저냥 세월 흐르는 대로 지낼 수도 있겠지만 너무 덤덤한 삶이 될 것 같다. 생각 날 때, 시간이 될 때 한두 가지 추억들을 만들어감도 좋지 않을까? 세월이 더 가기 전에 부부의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하지 싶다. 여느 해보다 심한 한파가 기승을 부린다.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줄 따사로운 마음의 온기가 필요하다. 화재 참사로 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처지의 마음만 아픈 사람도 주변에 생겨나고 있다. “있을 때 먹어라~“ 하시며 음식 그릇을 필자 앞으로 내미시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난다. ‘있을 때 잘해~’라는 가요도 정겨워지니 나이를 먹긴 먹었나보다. 아내는 1월 초에 친구들과 4박 5일 일정으로 베트남을 여행하고 왔다. 3일 뒤 다시 예전에 살던 동네의 부인들과 10일 여정으로 제주도 올레길 걷기 여행을 떠나 어제 돌아왔다. 여행 가방을 챙겨주는 필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한마디 한다. “여보~ 이제 눈치가 보이려 하네요.” “눈꺼풀만큼도 눈치 볼 필요 없어요. 당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세요! 돈 더 필요하지 않아요?” 그동안 남편의 도리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난해에는 추억거리 만들려고 아내와 중국 태항산을 다녀왔다.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어떤 남편으로 기억될까?” 한 번쯤 생각해볼 화두다.
- 2018-02-02 0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