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라이프@] 초록산책단 인형극단 ‘오늘’
-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노래와 함께 인형극이 시작된다. 거리를 걷다 멈춰 서다를 반복하다 간이의자에 자리 잡고 앉는 시민 관객들. 서울역 고가 보행길 ‘서울로 7017’ 개장과 함께 어린이들과의 교감을 담당하기 위해 탄생한 인형극단 ‘오늘’의 공연에 구름관객이 몰렸다. 활기차고 밝은 에너지로 중무장한 시니어들을 만나봤다. 시니어의 장점이라면 바로 노련함 아닐까? 인형극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이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린이 관객들 앞에 서서 웃고 눈높이를 맞추며 노래하는 모습이 전문배우 못지않다. 인형극단 ‘오늘’은 ‘서울로 7017’을 지원하는 자원봉사단 초록산책단의 동아리반 활동 중 하나다. 평균연령 65세, 시니어 파워를 자랑하는 인형극단 ‘오늘’은 올해 1월부터 6개월간 맹훈련을 거듭해 인형극 ‘오늘이’를 들고 서울로 7017 담쟁이 극장에 입성했다. 인형극단 ‘오늘’에는 왜 지원했나요? 이인웅 초록산책단 안에 전체 자원봉사 활동 외에 동아리 활동반이 있습니다. 각자가 원하고 좋아하는 모임에 지원한 것이죠. 서울시 후원으로 전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연구소 부소장인 유홍영 예술감독을 비롯해 많은 스태프가 도움을 줘서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배우가 하고 싶었어요. 끈을 놓지 않았어요(웃음). 장광자 저는 사실 인형극단보다는 야생화반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제가 여기서 나이가 제일 많아요. 인형극단은 대사 외우는 게 무서워서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오라고 하더라고요. 다행히 대사가 많이 없는 백주 할머니 배역을 주시더군요. 그래도 대사는 까먹고 또 까먹고 해요. 김정자 저는 손주들하고 하려고 시작했어요. 백남재인형극단이 처음 모이던 날 남자 배우가 없다고 빨리 들어 오라고 하더라고요. 첫 모임에는 일이 있어 못 갔는데 배역은 이미 주어졌고 빠지지도 못하겠고. 재밌게 지내고 있어요. 한 장면씩 지나갈 때마다 잘 넘어간다, 좋다 이렇게요. 잘 끝났으면 하죠 늘. 그런데 우리 여배우들 나이가 너무 많아서 불만이에요(웃음). 주인공인 오늘이는 어떻게 발탁됐나요? 양희선 제가 원래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고 있거든요. 인형극을 하면 꼬마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지원했어요. 주인공이 된 건 아무래도 제가 동화구연 경험이 있다 보니 목소리 흉내를 좀 냈던 것 같아요. 미모도 한 미모 할까요 ?(웃음) 이야기꾼은 특별히 연출가가 직접 뽑았다면서요? 목소리가 듣기 좋았어요. 김정자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아들 셋 키우면 나옵니다(웃음). 맨날 소리 지르다 보면요. 관객들이랑 호흡할 때 느낌이 어땠나요? 이숙경 저는 많이 설레던데요? 아이들이 아직 어리잖아요. 눈높이에 맞춰서 노래도 불러주고요. 구연동화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데 여기서 공연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또 아이들이 우리를 바라봐주니까 좋아요. 오늘 무대는 어땠나요? 강부형오늘까지 총 4회 공연을 했습니다. 오늘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나름 집중했고 관객 호응과 몰입도도 높았어요. 배우로 공연하는 느낌 어떤가요? 이인웅 아직은 좀 긴장된 상태예요. 공연을 시작하면 정말 얼마 안 있어 끝나는 거 같아요. 왜 인형극을 선택했나요? 조정자나이 들면서 다양한 것을 해봤어요. 인형극도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분야였어요. 사람도 만나고, 매일 대사 암기를 하면 치매도 안 걸릴 거고요. 날마다 신나요. 연습하러 와도 즐겁고요. 인형극으로 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강부형 지금 제가 라는 대본을 쓰고 있어요. 완성이 되면 인형극으로 무대에 꼭 올리고 싶어요. 줄거리는 어느 정도 나온 상태입니다. 일반봉사하면서 동아리 활동을 한다고요? 김정자인형만들기 체험학습이에요. 목요일 4시부터 인형 만들기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놀아주는 프로그램입니다. 늙을 시간이 없어요. 못 늙어요(웃음). 가족들은 뭐라고 하나요? 구경희 엄마가 어떻게 거기에서 그걸 하냐고 하더라고요. 저 어렸을 때 천 보자기 붙들고 연극하고 그런 시절을 보냈어요. 그때는 TV도 없었고요. 그런 게 항상 마음속에 있었는데 나이 먹고 기회가 있어서 하는 게 즐거워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인웅 거리에서 비보이가 춤을 추거나 가수들 노래하는 것들을 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런 연극은 많이 없는 거 같아요. ‘서울로 7017’에서만큼은 계속 다양한 공연을 하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지나다 우리 인형극을 보고 힐링을 할 수도 있잖아요?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2017-07-03 08:56
-
- 회춘 성형이 있다는데?
- 친구 모임에서 성형에 대한 이야기로 수다가 벌어졌다. 필자는 몸을 무척 아낀다. 너무 아껴서 필자를 아프게 하는 건 참지 못한다. 하나의 예로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웬만한 사람은 다 하는, 귀에 꼭 붙은 귀걸이를 참 예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귀를 뚫는 게 무서워서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성형외과를 경영하는 친구가 있다. 나이 들어가면서 그 친구는 모임에 나올 때마다 우리에게 너는 여기를 요렇게 하면 훨씬 예뻐지고, 너는 여기에 필러를 하면 좋겠다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들어도 필자는 초지일관 성형할 생각이 없다. 한번 손대고 끝나는 게 아니고 시작하면 평생 관리를 해줘야 하니까 귀찮기도 하지만 나이 들면 자연스럽게 노화 되는대로 살아야지 하는 필자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고 할까.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한심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점점 늙어 가는 모습을 확인하는 건 좀 슬픈 일이다. 거울 보기를 좋아하던 필자도 요즘엔 될 수 있는 대로 거울은 피하는데 너무 달라진 모습을 마주하는 게 싫기 때문이다. 그래도 순리를 어쩌겠느냐 하는 생각인데, 회춘 성형이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듣고 보니 가관이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걸까? 귓불 성형은 150만 원, 배꼽은 120만 원, 손금을 바꾸는데 100만 원, 손등은 160만 원, 무릎은 180만 원, 아파서 하는 수술이 아니고 예쁘게 만드는 수술이란다. 쇄골 뼈까지 새로 만든다는데 듣기만 해도 섬뜩하고 무섭다. 이렇게 회춘 전신성형에 드는 비용은 920만 원 이라고 한다. 그 외에 쌍꺼풀이나 코 높임, 목주름 제거, 치아미백, 턱을 깎아 버린다는 양악까지 한다면 그 비용은 얼마가 될는지.....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아프고 위험한 수술일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다. 물론 성형을 통해서 자신감도 얻고 자기만족을 하며 더욱 좋은 모습으로 바꾼다는 장점은 있을 것이며 예뻐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또한, 기형을 가진 사람이 보완하는 수술을 받아서 좋은 모습이 되는 것은 얼마든지 찬성이다. 다만 나이가 들어서 생긴 주름을 당겨서까지 얼굴을 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성형외과에 20대 아가씨와 70대 노인이 방문했는데 시술 상담자는 아가씨가 아니고 할머니셨단다. 이렇게 노인들도 외모에 큰 관심을 두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것도 순리가 되어버리는 세상일까? 각자의 판단에 맡길 일이지만 소신껏 잘 생각하며 살 일이다. 남들은 성형으로 다들 아름다워지는데 나만 늙은 모습으로 남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조금 걱정을 하며 실소를 머금는다.
- 2017-06-26 14:40
-
- 빨간 자전거
- 지인의 페이스 북에 만화계의 큰 별 신동헌 화백의 6월 6일 별세 소식이 올라왔다. 국내 최초의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으로 대종상을 받으신 분이라고 한다. 동생이신 신동우 화백의 만화는 어릴 적 많이 봐서 좀 더 친근하게 기억되고 있다. 어릴 때부터 필자는 만화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방학 때는 하루 종일 만화책 방에 틀어박혀 살아서 저녁밥 때가 되면 엄마가 필자를 찾으러 오기도 할 정도였다. 대전천 개천 옆의 판잣집이 단골 만화방이었는데 우중충한 그곳이 어찌나 아늑한지 온종일을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던 이상한 추억이 있다. 점심때가 되어도 집에 돌아가지 않는 아이들에게 만화방 아줌마가 나누어 주었던 찐 고구마는 참 달콤한 맛이었다. 그때 보았던 라이파이와 제비양, 김 박사는 지금도 기억나는 캐릭터이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던 라이파이는 매우 멋진 모습으로 필자 머릿속에 남아있다. 필자는 만화책 보는 것만을 좋아한 게 아니라 초등학교 시절엔 한 때 만화를 직접 그리기도 했었다. 반을 접은 도화지에 칸을 치고 그림을 그리고 말을 넣어서 가운데를 실로 꿰매어 서투른 만화책을 만들었다. 한창 예쁜 아이들이 발레를 하면서 벌어지는 스토리의 만화가 유행이어서 즐겨 보았는데 필자도 따라서 발레 하는 여자아이들의 질투와 우정에 관한 만화를 그렸으며 주인공 이름은 그때부터도 필자 마음에 쏙 드는 ‘마리’를 주로 썼다. 동네 아이들에게 스케치북 한 장씩을 받고 필자가 그린 만화를 보여주었다. 그냥 공짜로 보여주는 것보다 도화지를 한 장씩 받고 보여주는 게 더 권위 있고 품위가 있어 보이는 것 같았고 아이들이 서로 먼저 보겠다고 종이를 내밀 때 기분이 퍽 좋았던 기억이 있다. 받은 종이는 실제로 아무 쓸모가 없었다. 아버지가 선생님이셔서 우리 집엔 종이가 풍족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왜 그렇게 유치하냐는 말까지 들으면서도 필자는 만화영화를 즐겨보았다.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을 볼 때마다 그 아름다운 그림과 풍경묘사에 마음이 찡할 정도였다.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애니메이션은 장면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큰 감동을 받았다. TV 프로그램에 ‘빨간 자전거‘라는 만화영화가 있었다. 채널을 돌리다 이 애니메이션을 만나면 꼭 챙겨보게 되었다. 원래 한국만화의 전설이라 불리는 김동화 화백의 만화 ‘빨간 자전거’를 오랜 기획 끝에 애니메이션으로 완성한 작품이라 한다. 어느 시골 마을에 잘 생긴 우편배달부 아저씨가 있다. 이 아저씨는 꽁지머리를 하고 있고 멜빵 있는 바지와 모자를 눌러쓰고 다닌다. 집집마다 편지를 배달해주고 그 편지를 읽어주기도 하는데 요즘은 고지서 전달하는 일이 더 많다고 한다. 이 시골 마을은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남아 농사를 짓고 있는 ‘옛 동’과 이제 막 조성된 전원주택인 ‘새 동’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길 위를 빨간 자전거를 타고 소식을 전달하는 게 아저씨의 임무인 것이다. 집배원 아저씨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전달하며 슬픔, 기쁨, 아픔, 웃음 등 모든 소소한 작은 일상의 이야기를 배달하고 있다. 오늘 보았던 내용도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였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나는 ( )처럼 ( )이 되고 싶다’ 를 숙제로 내 주셨다. 많은 아이들이 신이 나서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 반에 다문화 가정의 아이가 한 명 있었다. 피부색이 달라 가끔 놀림을 받기도 했던 그 아이는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 아이의 엄마가 숙제를 보고는 미국 대통령 이야기를 해 주었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도 어릴 때 피부색이 남과 달라 놀림도 받았지만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으니 너도 걱정하지 말라는 격려를 받고 ‘나는 (오바마)처럼 훌륭한 (대통령)이 되고 싶다’라고 숙제를 마친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내용으로 가득한 ‘빨간자전거’라는 애니메이션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남들이 철없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나는 어른 동화인 ’빨간자전거‘ 를 계속 사랑할 것이다.
- 2017-06-13 11:04
-
- Remember seoul, 북정마을
- 사라져가는 서울의 풍경, 우리가 보존해야 할 서울의 사대문 안의 마지막 달동네가 몇 군데 있다. 우리의 역사문화지구로 과거의 시간을 떠올려볼 수 있는 곳을 찾아가보려고 한다. 이름하여 ‘Remember seoul’이다. 허름하고 빛바랜 동네이지만 시간을 거슬러 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는 북정마을, 김광섭 시인이 노래한 ‘성북동 비둘기’에 나오는 바로 그 마을이다.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廣場)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祝福)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중 첫 연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 6번 출구로 나와 초록색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북정마을 노인정 앞에서 내리면 눈앞으로 아주 오래된 마을이 펼쳐진다. 복잡하게 뒤엉킨 전봇대 위의 전깃줄이 먼저 이 마을의 인상을 알려주는 듯하다. 그리고 낡은 집들과 좁은 골목이 세월을 이야기하고 마을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전한다. 건너편으로는 성곽이 길게 보인다. 일단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서 꼭대기부터 내려오기로 한다. 가파른 계단과 좁은 골목길을 따라 숨차게 성곽까지 올라갔다. 성벽에 서서 내려다보니 오래된 북정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더 멀리 바라보니 서울 시내도 보인다. 흔히들 부자마을로 일컫는 성북구 동네가 옆에 있다. 성문 너머로는 아파트들이 빼곡하다. 마치 과거 속으로 사라져버린 듯한 옛 동네 북정마을과 개발된 빌딩과 아파트들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돌려 눈에 담은 북정마을에는 따뜻한 옛정이 느껴지는 아늑함이 있다. 한양 성곽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어서 든든하기까지 하다. 마을의 가장 높은 성곽에 올라 마을과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바람에 땀을 식혔다. 성곽 바깥쪽 길을 잠깐 걸어보았다. 이 길을 따라 한양 안쪽 또는 바깥쪽으로 오갔던 조상들을 잠시 상상하면서…. 현재 이 길은 이 지역 사람들의 걷기 코스로 잘 이용되고 있는 듯했다. 산책길이고 운동코스인 멋진 길이다. 성벽을 통해 북정마을을 들여다본다. 저 안에서 성북동 비둘기가 날았을 테고, 만해 한용운이 나라 걱정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제 천천히 북정마을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군데군데 방치된 폐가가 보였다. 집을 비우고 이사 나간 사람들이 남긴 살림살이와 돌담 벽에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길 옆 텃밭들에서는 채소가 자라고 자그마한 안마당엔 정갈한 장독들이 있었고 꽃을 피우는 나무가 우뚝 서 있기도 했다. 녹슨 대문 안에선 빨래가 뽀송뽀송 마르고 있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삶의 현장이다. 빠르게 변화해가는 문명 속에서 어서 빨리 변하자며 등 떠미는 세상과는 상관없이 무심한 시간을 살고 있는 마을이 의연해 보인다. 시간은 그렇게 간다. 마을 아래로 내려와 심우장으로 가는 골목에 들어섰다. 만해 한용운의 거처였던 곳. 집의 방향이 돌아앉은 모습이다. 이를테면 북향인 것이다. 조선총독부를 등지기 위해서 남향으로 짓지 않고 북향 터를 잡았다고 한다. 투철한 저항정신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한용운은 “조선 전체가 감옥인데 어찌 불 땐 방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는가”라며 볕이 들지 않는 이곳 북향 집에서 불도 때지 않고 겨울을 견뎠다고 한다. 심우장은 북정마을을 갈 때 빠트릴 수 없는 주요 장소다. 그러다보니 마루에 앉아 있거나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이곳에는 만해 선생의 ’님의 침묵‘을 비롯한 서적들이 진열되어 있다. 방이나 부엌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만해 한용운은 아쉽게도 해방되기 1년 전에 생을 마감했다. 심우장을 나와 주변의 조붓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길고양이들을 자주 본다. 이 동네에는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고 가끔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가게 앞에 나와 앉아 있다.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마을처럼 보인다. 저녁 무렵이 되니 시장을 다녀오는 어머니들이 힘들게 비탈길을 올라간다. 그 발걸음의 무게가 느껴진다. 한양 도성과 성곽이 인접해 있어 멋과 품위가 느껴지는 오래된 동네, 이런 성곽과 옛 향기가 스며 있는 문화재 보존을 위해 다행히도 재개발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마을 아래쪽에는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이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공방이 생겨나고 연극 포스터가 바람에 날린다. 이런 새 바람들이 다채로운 볼거리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새로운 변신에 기대가 된다. 서울의 옛 모습 속에서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북정마을이 변모하고 있다. 그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들이 현대 사회와 잘 어우러지면서도 푸근한 옛 모습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들이 할 일이다. 이제 내려와야 할 시간.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변화하며 느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동네. 그곳을 거닐면 유년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따스해진다. 좁은 골목을 걸으며 지친 가끔 하늘도 올려다본다. 변화해가는 마을 아래도 내려다본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디쯤에 필자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 2017-06-07 09:36
-
- 장수에도 퀄리티가 있다, 장수학자 박상철 교수 “하자, 주자, 배우자”
- 장수는 누릴 수 있으면 축복이고 누릴 수 없으면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장수하라는 말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은 나빠지고 삶의 질은 하락한다고 생각하기에, 차라리 병들기 전에 깔끔하게 죽는 게 좋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내 장수학계의 전문가인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뉴바이올로지 전공 석좌교수는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백세를 만나봤을 그가 밝히는 얘기는 충격적인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고령화시대 백세청풍(百世淸風)의 기운으로 장수하는 사람들의 패러다임을 박 교수의 시각으로 들여다봤다.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뉴바이올로지 전공 석좌교수는 2000년에서 2009년 사이에 국내 최초로 백세인구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해 장수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꾼 인물이다. 그가 백세인구를 조사하게 된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고 당연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됐다. “사람이 늙으면 신체기능이 점점 떨어지는데 아주 늙었을 때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가 되어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독립적으로 사는 게 가능할까? 저는 그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습니다.” ‘100세 정도 되면 생활이 형편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박 교수는 막상 조사를 하면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만나자마자 힘자랑하던 백세인 “전남 곡성에서 만난 홍순갑 어르신은 당시 102세였는데 만나자마자 힘자랑을 했습니다. 마당에서 팔굽혀펴기 100개를 하고 계시더군요. 구례 산동면에 사는 101세 임종철 어르신은 뵈러 갔는데 지게를 메고 오시더군요. 그리고 손자가 100세 어르신을 모시는 게 아니라, 100세인이 쉰 살 손자를 데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더 기가 막힌 분은 쇼지 사부라 박사입니다. 102세 때, 저녁에 식사를 하다가 이 양반이 갑자기 한국말로 ‘한국에서 왔습니까?’ 하고 묻더군요. ‘예’라고 대답하니 ‘그럼 우리 한국어로 이야기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65세 정년에 딱 퇴직하여 ‘한글을 배워야 한다’ 싶어 한글을 배웠고 80세에는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100세 때 러시아어를 배웠고 104세 때 브라질에서 이분을 초청했는데 그때부터 포루투칼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90대가 인터넷을 하는 마을 박 교수가 조사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난 국내 장수인들은 대략 250여 명에 이른다. 백세인들의 사례를 보니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새로운 깨달음이자 분명한 성공 좌표들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젊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공동체마저 만들고 있었다. “도쿠시마에 가미가쓰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농업학교를 막 졸업한 젊은 사람이 농협의 직원으로 들어갑니다. 가서 보니 마을 주민이 2000명인데 65세 이상이 1000명이 넘었던 겁니다. 50% 이상의 인구가 노인인 초고령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인들은 자주 티격태격 싸웠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손쉽게 얻으려고만 했습니다.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아 ‘우리 일을 합시다’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도쿠시마 산속 마을에 있는 재료들로 일본 요리 장식용 패키지를 만들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동네 어른들이 단번에 그런 일을 하겠다고 했을 리가 없다. 겨우 3명이 시작했는데 이게 팔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물건이 팔리자 할머니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주문을 뺏어가려고 했던 거죠. 젊은 사람이 70~80세 사람들의 싸움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이 꾀를 냈죠. ‘주문은 인터넷으로 받아가시오’라고. 그러자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무슨 인터넷이냐며 난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딱 버텼고, 2년이 지나니 70~90대 마을 주민들이 컴퓨터를 하게 됐어요. 세계 최고령 인터넷 마을이 돼버린 거죠. 그렇게 해서 마을이 발전한 지 30년 이상이 됐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흉내를 내려고 해도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 돈이 많이 든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걱정하고 있다. 박 교수는 반대로 생각한다. 저비용 장수사회를 만들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장수인이 건강하게 일하며 생산 인력으로 생활할 수 있으면 되는 일이다. 앞서 소개된 고령화 마을의 기업화가 그 좋은 모델이란다. 그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슈퍼 노인의 시대가 오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잘 살 수 있는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당당할 수 있는가?’ 있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생기는 많은 문제점들만을 생각했었는데 위에서 소개한 분들을 보면 안 그렇습니다. 그러니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온 거예요. ‘패러다임 시프트(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가 일어나야 합니다.” 박 교수는 ‘지금 놀라운 시대가 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슈퍼 노인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일본이나 유럽에는 100세인의 육상대회가 생겼습니다. 영국의 파우자 싱은 102세의 나이에 마라톤 풀코스를 8시간에 걸쳐 완주했습니다. 그는 단축 마라톤인 10km를 1시간 30분 만에 완주하기도 했습니다. 나가오카 미에코라는 100세 할머니는 수영 마라톤 1500m를 완주했습니다. 미국 돌푸드 사의 데이비드 머독 회장은 94세 때, 캘리포니아의 자기 목장에서 아침마다 한 시간씩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99세인데 아직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100세 장수가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은 여러 통계 지표로도 증명되고 있다. 제대로 장수하며 일하는 사람들 빠른 속도로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있다. 평균 수명이란 것은 어디까지 갈 것이냐. 실제 사람들이 많이 죽는 나이인 최빈사망연령은 0세부터 100세까지 중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사망하는 연령의 개념으로 평균수명보다 더 길다. 최빈사망연령은 1950년부터 계속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82세, 최빈사망연령은 90세가 넘었다. 이제 고령사회에서는 실제 사람들이 제일 많이 죽는 나이가 중요하다. “최빈사망연령 표준편차를 보면 옛날에는 10년 정도였는데 지금은 6년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 나이의 표준편차가 작아진다는 것은 죽는 사람들 나이의 차이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장수의 보편화’가 이뤄지고 있는 겁니다. 옛날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장수했는데 지금은 ‘somebody’가 아닌 ‘everybody’입니다.” 100세가 넘는 인구는 일본이 6만 명이지만 우리나라는 3000여 명이다. 미국은 7만 명, 중국은 5만 명 정도다.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건강한 노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지표다. “옛날에는 70이라는 나이는 죽어야 할 나이였죠, 지금 70이란 나이는 일을 못해서 안달 난 나이입니다, 저도 70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죠. 건강한 노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는 건강한 노인에게 ‘dependent Life(의존적인 삶)’를 가지게 하지 말고 ‘Independent(독립된)’할 수 있게끔 제도적인 문제를 바꾸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대로 장수시켜버리자.’ 그러면 병원비가 안 듭니다. ‘장수인은 일을 시켜버리자.’ 그러면 복지비용도 안 듭니다. 이게 제 주장입니다.” 무조건 부지런하라 박 교수는 사람이 아무리 늙어도 변하지 않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그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20대 때 헤어진 애인이라도 딱 들으면 ‘아, 그녀’라고 생각이 납니다. 그다음에 변하지 않는 것은 ‘성격’, 즉 마음 씀씀이입니다.” 박 교수가 제시한 사례들 덕분에 백세가 되어도 인생은 젊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방법을 들어봐야 할 때다. 건강하게 장수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법론을 묻자, 박 교수는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산 선생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때 만난 사람이 황상(黃裳, 1788~1870)이란 사람입니다. 이분이 글을 잘 쓰셨는데, 라는 문집에 다산 선생과의 일화가 나옵니다. 다산 선생이 이분에게 ‘공부하라’고 말해서, ‘내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 수 있습니까?’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산 선생이 한 말씀이 세 글자였습니다.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사실 장수라는 것도 이 3근계(勤戒)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장수도 그냥 이뤄지지 않습니다. 건강장수라는 것은 다 부지런해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많은 장수인들에 대해 연구할 때,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생활하느냐가 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 공통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장수는 성실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백세라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꿔라 부지런하라는 것은 무언가를 실행하라는 말과도 같다. 박 교수는 그 실행 부분을 간단하게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했다. “‘무엇이든 해버려라.’ 나이가 들었다고 핑계대지 마라. 못할 이유가 뭐 있냐. 그리고 나이가 들면 ‘받으려고 하지 마라, 줘라.’ 마지막으로 나이가 들면 ‘배워야 한다.’ 배워야 줄 것도 생기고 할 것도 생긴다.” ‘하자, 주자, 배우자. Do it, Give it, Prepare it. 行之 與之 習之.’ 그가 던지는 장수시대의 실천강령이다. 백세인들에게서 ‘움직이고(動), 적응하고(應), 머리를 쓰며(判), 느끼고(感), 절제(適)’라는 공통점이 발견됐다고 한다. 그는 “장수를 위해서는 유전자, 성격, 환경 등의 자연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운동, 영양, 관계, 배움, 참여 등의 생활습관이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중 ‘관계’가 가장 중요한 비결인 것 같다며 여기에는 부지런함이 포함된다고 했다. 결국 나이가 들수록 의존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스스로 독립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가 되는 게 중요하다. “백세인들 중 고혈압, 관절염, 위장병이 있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당뇨는 거의 없어요. 당뇨는 생활습관 질환인데, 결국 장수와 생활습관도 연관이 있다는 거죠.” “98세에 시집을 내서 100만 권이 팔렸다는 시바타 도요 할머니가 쓰신 시 중 ‘비밀’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99살이라도 사랑도 하는 거야, 꿈도 꿔, 구름도 타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100세가 돼도 연애하면 안 되겠습니까? 김형석 교수가 올해 한국 나이로 98세이신데, ‘뭐가 가장 하고 싶으냐?’ 물었더니 ‘연애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박상철 (朴相哲)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생화학 전공으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80년부터 2011년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과학기술부 우수 연구센터인 노화세포사멸연구센터와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가천의대, 이길여 암·당뇨연구원장을 거쳐 현재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고문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등이 있다.
- 2017-06-05 08:55
-
- 음식으로 소소한 삶을 다룬 영화 <심야식당2>
- 자정부터 아침 7까지 영업하는 심야식당. 메뉴는 돼지고기 된장국 정식 하나뿐이지만 주인장 ‘마스터’는 손님이 원한다면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낸다. 2015년 많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새로운 메뉴와 스토리로 2년 만에 돌아왔다. 1일 오후 서울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영화 언론시사회가 일본 중년배우 코바야시 카오루와 후와 만사쿠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는 도시 중심가의 바쁜 하루가 저물어가는 동안 뒷골목에서 피어나는 맛있는 음식 냄새와 따뜻한 위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3개의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하루의 스트레스를 불고기 정식으로 날려버리는 직장인 ‘노리코’, 엄마와의 갈등을 피해 볶음우동으로 허기를 달래는 ‘세이타’, 연락이 되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동안 돼지고기 된장국 정식으로 위로를 얻는 ‘유키코’ 할머니 등 에피소드마다 다른 사연을 지닌 손님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심야식당의 음식으로 하루의 고단함을 풀고 털어낸다. 심야식당의 주인장 ‘마스터’ 역의 코바야시 카오루는 “일본, 한국, 중국까지 많은 관객이 을 봐주시는데, 일본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던 상황이라 기쁘다”라며 “이번 작품에서는 덜렁거리고 실수도 하는 마스터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도록 연기했다”고 작품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다. 단골손님 역으로 9년간 과 함께해 온 후와 만사쿠는 “음식이 사람과 사람을 맺어주는 영화”라며 “영화 속 음식은 소박하지만 어딘가 그리운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는 8일 개봉한다.
- 2017-06-02 16:31
-
- 그래피티 아트(graffiti art )
- TV뉴스를 보던 중 그래피티(graffiti)에 관한 기사가 나왔다. 어떤 호주인이 우리 지하철에 들어가 전동차에 낙서를 하고는 사라졌다는 소식이다. 그래피티는 건물 벽이나 교각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려서 그리는 그림과 낙서를 말한다. 우리 동네 산책길의 다리 밑 한쪽 벽면에도 알록달록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필자는 몰랐는데 손녀와의 산책길에서 아기가 그 벽면의 그림을 보더니 “할머니 원더 볼즈에요!” 라고 해서 그 그림이 어린이용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이라는 걸 알았다. 그림이 있기 전보다 화사해진 다리 밑은 보기에 좋아서 이런 벽화라면 많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들의 미대 시절, 같은 과 친구들과 함께 회사 담장에 그림을 그려주는 아르바이트를 했다며 보여준 사진이 그래피티의 한 종류였을 것이다. 필자 눈에도 수준 높아 보이고 멋져서 그래피티를 예술의 한 장르라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래피티는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 한다. 밋밋한 담장에 예쁜 그림을 그리면 보기에도 좋을 것 같은데 아무 곳에나 그려놓으면 일종의 범죄라는 말이다. 그래피티를 하는 사람들은 번개처럼 스프레이로 그림이나 메시지를 쓰고는 재빨리 도망을 간다고 한다. 담장이나 평범한 벽면이 아닌 공공장소인 지하철이나 기차역 건물 벽에 낙서해 놓으니 범죄율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과거 뉴욕 지하철은 탈 게 못됐다고 한다. 강력 범죄가 발생하는 대표적인 우범지대로 역무원들이 부스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낼 정도였다는데 1980년대 뉴욕시 교통국장이 지하철을 가득 채운 낙서에 주목하고 계속 청소를 했더니 지하철 범죄가 75%나 줄었다고 한다. 아마 낙서가 그렇게 아름답거나 깨끗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피티는 60년대 뉴욕 빈민가에서 시작해 세계로 퍼져나갔고 갱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표시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는데 그 후로 차츰 사회, 정치적 비판메시지를 담기 시작했다. 낙서 예술가도 생겼다. 스물여덟 살에 타계한 뉴욕 바스키야의 작품은 경매에서 164억 원이나 호가했다니 그냥 낙서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피티는 원래 그리는 장면을 들키면 안 되는 작업이어서 그 세계에서는 무엇을 그리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어디에 낙서를 하는지도 중요하고 접근하기 힘든 곳일수록 가치를 높게 쳐준다고 하니 재미있다. 낙서꾼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은 지하철이라는데 한밤중에 몰래 숨어 들어가 객차 전체를 통째 낙서로 채운다는 영화도 나왔단다. 외국에서만 일어나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서울에서도 그래피티로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습격 받은 지하철이 17군데나 되었고 전담 수사관까지 생겼다고 하니 좀 걱정이다. 언젠가는 지하철역 세 군데에 그래피티 습격이 있었는데 이들은 힙합 모자와 후드 티셔츠 차림의 백인 4인조였다고 한다. 쇠톱과 절단기로 환풍구를 잘라내고 차고지에 들어가 낙서를 하고는 경찰이 손쓰기도 전에 유유히 호주로 돌아갔다는데 아마 우리나라 지하철이 깨끗하다는 소문이 나서 원정낙서까지 왔을 거라는 분석이 나왔다니 좋아해야 할 일인지 어떨지 모르겠다. 어떤 낙서를 하고 갔는지는 보도되지 않았으나 전담 수사관까지 동원되었다면 좋은 내용은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그래피티가 우리 눈에 멋지고 예쁘게 보인다면 굳이 막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다. 낙서한 내용이 반사회적이거나 공포를 조장한다면 당연히 막아야 하겠지만 우리 동네 산책길의 벽화처럼 즐겁게 바라볼 수 있다면 괜찮을 것 같다. 언젠가 지하철을 타려고 기다리던 중 들어오는 객차에 예쁜 그림이 그려있어 보기에 즐거웠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그래피티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나 아름다운 그림으로 승화시킨다면 범죄라 하지 않고 예술의 한 장르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동네 곳곳에 나쁜 그래피티가 아닌, 보면서 즐길 수 있는 벽 그림이 많아지면 좋겠다.
- 2017-05-19 10:09
-
- 감동적인 책 <무지개 가게>
- 침대 옆의 작은 책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손쉽게 꺼내 읽을 수 있도록 작은 책장을 두었는데 꺼내 읽은 후 아무렇게나 놓아 많지 않은 책들이 서로 뒤섞이고 무질서해서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필자가 좋아한 작가 최인호 님의 마지막 작품집 ‘인연’부터 매우 흥미롭게 읽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도 있고 전철 안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가 주셨던 할머니자서전도 보인다. 차곡차곡 정리하던 중 ‘무지개 가게’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이건 좀 의미가 있는 책으로 어떤 단체에 작은 후원인이 되었더니 보내온 예쁜 책이다. 무지개 가게라는 이름의 책은 제목만큼이나 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인사말을 김성수 주교님이 쓰셨다. 주교님의 성함만 보고도 매우 반가웠었던 느낌이 떠오른다. 몇 년 전에 강화도에 있는 지적 장애인 재활 시설인 ‘우리 마을’에 다녀왔는데 지적 장애인이 모여 사회성도 배우고 일도 배워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든 터전으로 성공회 신부이신 김성수 주교님이 설립하신 곳이었다. 주교님은 당시 80세가 넘으셨는데도 나이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동안이셨고 건강해 보였다. 좋은 일을 하시는 분들은 다 그렇게 온화하고 부드러운 모습인 것만 같다. 점심식사 후 주교님과 단둘이 사진 찍는 영광도 있었고 그곳이 매우 인상 깊게 남았다. 주교님은 무지개 가게 책 서두 인사말에서 희망을 담보로 기회를 빌려주는 은행이 있다며 이 특별한 은행이 한국에서 마이크로 크레디트사업을 하는 사회연대은행이라고 하셨다. 평범한 은행에서는 날씨가 좋을 때 우산을 빌려주고 궂을 때 걷어 가지만 이 은행은 비가 오면 우산을 내어 주고 함께 쓰기를 청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셨다. 무지개 가게 이야기는 절망의 끝자락에서 싹을 틔워 희망의 결실을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려는 사람, 먼저 간 남편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아내, 몸이 불편한 아내에게 희망이 되어 주고 싶은 남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 전통의 활을 이어가는 궁장의 꿈 이야기, 절망의 나락에 빠졌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손맛으로 가게를 일으킨 어머니들의 용기와 굳센 삶의 믿음이 사회연대은행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지는 과정이 진솔하게 담겨 있어 읽는 내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을 받았다. 다들 어떻게 그런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는지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모두들 고군분투하여 결국은 다들 성공하였다는 해피엔딩이다. 필자도 젊어 한때 무언가 일을 해보고 싶어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러나 이분들 같은 용기와 신념이 부족했는지 일이 잘못되어 자본금을 날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해보지도 않고 실패할 것이 두려워 그만 포기해 버렸었다. 이제 생각하면 용감하고 성실하게 한 번 도전해 보지 않았던 나약함이 안타깝고 후회가 된다. ‘언제나 우리는 삶의 한복판에 있다.’라는 주제로 글을 쓴 분도 더는 추락할 곳이 없을 정도로 밑바닥에 떨어졌지만, 아이들을 생각해 험한 노상 장사와 허드렛일을 마다치 않고 노력한 결과 지금은 어엿한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다고 한다. 무지개 가게 책에 이야기를 담은 분 20명이 다들 거친 고난의 과정이었다. 그 외에도 무지개 가게를 성공시키고 있는 사람이 아주 많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은행과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기적이 무지개 가게라 할 수 있다. 굴지의 많은 기업이 지원하고 있고 그보다 더 많은 풀뿌리 회원들의 지지도 있다니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며 아름다운 후원이 계속되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혼자가 아니라 서로 돕는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느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2017-05-18 14:55
-
- 고령사회, 더욱 조심해야 할 불조심
- 최근 한밤중에 우리 아파트 뒤편 동네에 화재가 났다. 드라마를 보던 중이었는데 베란다 밖으로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확성기가 요란해서 무슨 일인가 내다보았더니 바로 우리 집 건너편 숲 너머로 시뻘건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퍼지고 있었다. 그 동네로 들어가는 길은 구불거리고 좁아서 평소에도 차 두 대가 만나면 한쪽이 비켜줘야 하는 곳이었다. 드라마에 심취해 있어서 몰랐는데 그 좁은 길에 어느새 출동한 대여섯 대의 소방차와 경찰차가 요란한 사이렌과 함께 경광등을 번쩍이고 있다. 새까만 밤길에 빨갛고 파란 경광등이 선명했다. 우리 집까지 번져오지는 않겠지만 바로 코앞에서 시뻘건 불길이 타오르니 섬뜩하기도 했고 무서웠다. 그래도 필자는 그 와중에도 기자 정신을 발휘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 동네는 예전엔 무허가 집이 즐비했던 산동네였다. 이제는 무허가 집이라 해도 말끔하게 단장하고 옆 텃밭을 가꾸는 등 목가적이고 아늑한 풍경이어서 가끔은 일부러 산책하러 가기도 했다. 아직 옛 정취가 남아 있어 담장마다 넝쿨 꽃을 늘어뜨리고 집 앞을 꽃 화분으로 장식한 소박한 집들이 보기에 정겨운 곳이다. 이렇게 깨끗하고 소박한 마을이지만,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의 못살던 시절을 표현할 때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언젠가 인기 드라마를 보다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풍경이 나왔는데 바로 이 동네였다. 덩달아 우리 아파트도 한 컷 찍히기도 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알고 보니 주인공의 가난한 시절을 찍기 위해 이 동네에서 촬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도 못사는 동네를 촬영할 때 이곳을 찾는다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그런데 유난히 이 동네는 불이 자주 난다. 웽웽 사이렌 소리가 울려 내다보면 연기와 함께 시뻘건 불길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번 불은 재빠른 소방차의 대응으로 금세 불길이 잡혔다. 인명피해가 있었다는 말은 없어서 다행이지만 몇십 년 보아오던 무성한 숲의 나무들이 불타는 광경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불조심은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오늘의 화재도 누군가의 실수로 일어났을 것이다. 불이란 사소한 데서도 일어날 수 있으니 각자가 평소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나라른 최근 고령사회로 접어들어 시니어들이 늘어나고 있다. 시니어는 젊은 사람보다 기억력과 행동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불은 정말 조심해야 할 것 같다. 깜빡 잊는 바람에 큰일로 번질 수 있는 일이 많아 불안하고 걱정스럽다. 며칠 전에는 우리 아파트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8층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가스 불에 올려놓은 냄비를 잊고 마당에 나와 친구분과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아랫집에서 연기가 올라와 위층에 사는 사람이 관리실과 소방서에 연락해 출동했는데 정작 마당에서 놀고 계시던 할머니는 까맣게 몰랐단다. 다행히 불이 나지는 않았지만 실내엔 연기가 가득했고 타는 냄새가 심각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생기면 자신뿐 아니라 이웃에게도 큰 피해를 주게 된다. 많은 분이 할머니에게 조심하시라는 이야기를 했고 할머니도 미안한 마음에 무척 놀라셨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생판 남의 일만은 아니다. 필자도 가끔 가스레인지에 음식을 올려놓고 다른 일을 하다가 타는 냄새가 날 때쯤 겨우 알아차렸던 일이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우리 아파트는 각 집마다 외출 시 가스와 전열기구 점검하라는 빨간색 경고 스티커를 배부했다. 필자는 스티커를 현관문 안쪽에 붙여놓고 나갈 때마다 한 번씩 더 점검을 한다. 나만 조심해서 될 일이 아닌 이런 사고가 노인이 늘어가는 세상에서는 더 자주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럴수록 서로가 더 조심해야 할 것이다. 백번을 말해도 부족하지 않을 불조심!!이다.
- 2017-05-16 10:08
-
- 영화로 배우는 노년의 지혜 2
- 할머니가 주재하신 식사 모임 감독; 조지 틸만 주니어 주연; 바네사 윌리엄스, 이르마 피 홀 제작연도; 1997년 상영시간; 115분 흑인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영화로 가 빠질 수 없다. 할머니가 구심점이 된 삼대에 걸친 대가족 이야기. 여성의 희생과 헌신이 가정의 평안을 유지시킨다는 할머니의 교훈은 진부할지 모르지만 할머니의 딸들은 직업과 사랑, 자아실현을 위해 고분군투하고 손자에 의해 가정의 전통이 이어진다는 내용이다. 여성이 맡아왔던 화해, 안정의 역할을 손녀가 아닌 손자에게 맡겼음을 신선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성장해가는 아이들 모습을 담은 사진이 죽 나열된 후 소년 아마드(브랜드 하몬드)의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할머니 조(이르마 P. 홀)는 미시시피에서 시카고로 이주해온 후 도박사였던 할아버지가 전 재산을 날리자 홀로 집안을 일으켜 세워 온 가족의 존경을 받고 있다. 할머니가 40년째 주재해온 일요일 저녁식사 모임은 세 딸과 그들의 남편, 아이들이 모두 참석해야 하는 가문의 전통이다. 할머니는 여자가 참고 개척해나가면 집안은 잘 유지되며 인스턴트 대신 손수 만든 음식이 인간의 영혼을 살찌운다고 설교한다. 장녀 테리(바네사 윌리암스)는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변호사이며 남편 마일즈(마이클 비치) 역시 변호사여서 이들 가정은 경제적으로 가장 윤택하다. 테리는 성취욕과 자기주장이 강하며 변호사 일에 만족하고 있는 데 반해, 마일즈는 변호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취미로 즐겨온 음악가로 전업하고 싶어 한다. 아기가 없는 이들 가정은 이래저래 충돌이 잦다. 차녀 맥신(비비카 A. 폭스)은 전업주부로 이해심 많고 자상하며 노동자 계층인 남편 케니(제프리 D. 샘스)도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한 가장이다. 맥신 부부는 아마드 외에 딸 하나를 더 두었고, 맥신이 또 임신한 상태. 이들 부부의 문제라면 케니가 테리의 연인이었다는 사실, 자신의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테리는 맥신에게 시비를 걸어 가끔 다툰다. 미용사인 막내 딸 버드(니아 롱)는 램(메키 파이퍼)과 사랑에 빠져 임신부터 했는데, 램이 전과자여서 변변한 직장을 얻지 못해 속상해하고 있다. 버드는 옛 애인에게 도움을 청해 램을 취직시키는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램이 자존심을 건드렸다며 행패를 부린다. 램의 꼬락서니를 보다 못한 장녀 테리는 깡패 삼촌에게 램을 두들겨 패달라고 부탁하고, 램은 총으로 맞서다 다시 감옥으로 끌려간다. 이 때문에 테리와 버드는 으르렁거리게 된다. 할머니의 가치관은 시대 상황 등을 고려해볼 때 당연한 것이고, 음식을 통한 영혼 고양에 대한 설교는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향수를 자극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겐 세 딸의 성격이나 가치관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감독은 차녀 맥신, 그리고 그녀의 아들 아마드로 이어지는 할머니의 가치관 잇기를 기둥 줄거리로 삼고 있어서, 일견 시대착오적이며 안일한 선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맥신의 생각이나 행동은 여성만의 인내 운운하는 선이라기보다 보편적 선, 중용 정신, 전통 존중 등이므로 편협하게 볼 것이 아니다. 각박한 현대사회, 가족 이기주의, 흑인 사회의 모순을 염두에 둔 인물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가장 끌리는 여성상은 장녀 테리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묘사는 성취욕 강한 여성에 대한 묘사가 우리나라나 서양이나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그려지는 습성이 있어, 여성의 성취욕에 대한 몰이해와 한계를 드러냈다. 원만하고 너그러운 성격과 일에 대한 열정을 동시에 지닌 여성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도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이런 여성들에 대해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작가의 인물 분석이나 구현력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테리는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환 등 집안 대소사에 들어가는 돈 문제에 댛새서는 테리에게 의존하는 가족들이 테리의 이 같은 처리 방식에 불만을 품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테리에게 금전적 도움을 받는 이들이 “돈이면 다냐”라는 식으로 대드는 것은 경제력 없는 사람들의 비틀린 심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늘 머리를 써야 하고 시간에 쫓기는 테리는 맥신처럼 집안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과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다. 대신 자신의 노력으로 번 돈을 내놓는 것이다. 돈에 관한 인간의 이중적 태도는 테리의 남편과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테리의 남편은 성공과 돈을 위해 뛰는 테리를 인간미 없는 아내로 본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열망을 잘 이해해주는 테리의 사촌 훼이스(지나 라베라)와 관계를 맺는다. 이모할머니의 딸인 훼이스는 성인 비디오 배우로 집안의 골칫덩어리인데, 갑자기 나타나 온 가족을 불안하게 한다. 음악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반대를 하는 테리의 현실적인 태도와 즉흥적으로 아무 일이나 저지르는 훼이스의 유혹.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가. 어느 가정에서나 있을 수 있는 문제와 인간관계, 그리고 흑인 문제까지 얹어 아기자기하게 묘사하는 는 마지막까지 돈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0년째 방구석에 들어앉아 TV만 보던 할머니의 남동생 피트로 인해 찾게 된 돈이 이 가정의 분열을 잠재우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영혼을 살찌울 음식도 돈이 있어 가능한 것 아닌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이다. 영화 제목 는 ‘영혼의 음식’이라는 직역보다는 미국 남부지방의 아프로 아메리칸의 전통 음식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겠다. 1960년대 중반부터 ‘soul’은 아프로 아메리칸 문화를 수식하는 단어로 쓰였는데, ‘soul music’이 대표적이다. 에는 보이즈 투 맨의 ‘A Song for Mama’를 비롯해 ‘소울’ 가득 담긴 노래들, 재료의 풍미를 살린 푸짐한 흑인 가정 음식 등 들을 거리 볼거리가 풍성하다.
- 2017-05-11 1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