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두 번째는 보은 법주사이다.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에 위치한 법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로 사적 제503호이며, 속리산 천황봉과 관음봉을 연결한 그 일대는 명승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속리산은 해발 1057m의 천황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렀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 의신(義信)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이곳 산세의 웅장함과 험준함을 보고 불도(佛道)를 펼 곳이라 생각하고, 큰 절을 세워 이름 붙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의신 조사가 법주사를 창건하고 진표 율사가 7년을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하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전하는 바는 조금 다르다.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 그 후 진표 율사가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不思議房)으로 돌아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 그때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 하였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 법회를 열었다고 하니, 현재의 법주사는 진표 율사의 뜻에 따라 영심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진표 율사가 세운 금산사와 이곳 법주사는 모두 미륵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후 56억 7000만 년이 지나 미륵이 오면 용화수(龍華樹) 나무 아래서 세 번에 걸친 설법(龍華三會)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니 금산사가 제1도량, 법주사가 제2도량, 금강산 발연사가 제3도량으로 창건한 용화삼회(龍華三會) 설법도량인 것이다.
고려 문종의 아들 대각국사 의천의 동생 도생 승통(導生 僧統)이 절의 주지를 지냈으며 1363년(공민왕 12)에는 왕이 절에 들렸다가 양산 통도사에 칙사를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로 옮겨 봉인토록 하였으니 지금도 법주사 내에 모셔져 있다.
조선 세조 때에는 신미 대사가 주석하면서 크게 중창되어 이후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大刹)이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사명대사 유정 스님이 20년에 걸쳐 팔상전을 중건하였으며 벽암 각성 스님이 황폐화된 절을 중창하였고 그 뒤 수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려 인조 때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의 시가 실린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법주사가 보유한 문화유산으로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팔상전(국보 제55호)·석련지(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보물 제848호)·대웅보전(보물 제915호)·원통보전(보물 제916호)·법주괘불탱화(보물 제1259호)·소조삼불좌상(보물 제1360호)·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철확(보물 제1413호)·복천암 수암화상탑(보물 제1416호)·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복천암학조등곡화상탑(보물 제1418호)·보은 법주사 동종(보물 제1858호) 등이 있으며, 주변에는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이 있다.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속리산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에 걸쳐있는 명산으로 예로부터 우리나라 8대 경승지로 전해지며 해발 1058m 천황봉을 중심으로 관음봉·비로봉·경업대·문장대·입석대 등 해발 1000m 내외의 산봉우리들이 있다. 그중 문장대는 속리산의 빼어난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경승지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그 남쪽 수정봉 아래 좋은 자리에 법주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속리산 일대는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터널을 뚫어 보은에서 법주사까지 쉽게 갈 수 있지만 예전에는 꼬불꼬불 열두 굽이를 돌아 올라가는 말티재를 넘어야 했다. 이 고갯길은 고려 태조 왕건이 법주사에 행차할 때 닦은 길이라고 전해지며 조선 세조는 즉위하기 전 상환암에서 백일기도를 올렸으며, 즉위 후에는 복천암에서 사흘간 치병(治病)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개를 올라서면 세조에게 벼슬을 제수받은 정이품송이 있고 이어 옛 사하촌(寺下村)이었을 산채백반 식당들이 빼곡한데, 그 이후 일주문까지는 길 양쪽으로 떡갈나무 숲이 아름다운 오리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정이품송과 식당가를 지나 산사 7곳 중 가장 비싼 입장권(4000원)을 끊고 떡갈나무 우거진 맑은 계류(溪流)를 따라 오리 숲길을 걸어 들어가노라면 일주문이 나오는데 ‘호서제일가람(湖西弟一伽藍)’, 즉 호서(충청)지방 제일의 절집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그 아래 안쪽에는 ‘속리산대법주사(俗離山大法住寺)’라고 씌어 있어 대단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오리 숲길을 산책하듯 걸어 일주문을 지나면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와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가 나오는데 역사적인 의미가 있으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는 것이 좋다.
속리산사실기비는 1666년(현종 7)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썼는데 명산 속리산에 세조가 행차한 사실과 수정봉 위 거북바위를 당 태종이 자르게 했다는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비각 속에 보호되고 있으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이다.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는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중기 고승 벽암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1664년(현종 5)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정두경이 짓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 낭선군이 썼는데 커다란 암반 위에 홈을 파서 비석을 세웠다.
오리 숲길을 벗어나 계류에 걸쳐진 다리를 건너면 비로소 법주사 경내로 들어서는 사실상 첫 관문인 금강문이다. 마곡사가 해탈문이 첫 관문이듯 법주사는 금강문인데 그 안에 모셔진 분들은 문수, 보현보살과 금강역사로 똑같다.
다만 마곡사는 보현과 문수 모두 동자상을 모셨는데 법주사는 어린 동자상이 아닌 보살상을 모신 점과 해탈문이 아닌 금강문으로 부르는 점이 다르다. 금강문으로 들어서면 산중에 위치한 산사(山寺)지만 전체적으로 평지 지형에 크고 작은 당우(堂宇)들이 자리 잡고 있다.
금강문 오른쪽에 있는 쇠솥(鐵鑊, 보물 제1413호)은 신라 성덕왕 때 당시 승도(僧徒) 3000명을 먹일 쌀 40가마가 들어간다는 것인데, 반대편인 왼쪽 끝에는 우리나라 최대크기인 80가마가 들어가는 돌솥(석조(石槽),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이 있어 대조적이다.
철당간 옆에 있는 석련지(石蓮池)는 원래 용화보전 앞에 희견보살상, 사천왕석등과 한 줄로 서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용화보전이 없어지면서 본래의 자리를 잃고 그 축(軸)을 벗어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법주사의 중앙에는 팔상전(八相殿)이 있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은 사찰 창건 당시 의신 조사가 초창했다고 전하나, 정유재란 때 불탄 후 사명대사와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다고 하며 지난 1968년에는 완전 해체, 수리하였다.
팔상전에서 대웅보전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쌍사자 석등이 있다.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다. 디딤돌 위에 선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인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사자의 갈기와 다리 근육 등이 매우 사실적인 통일신라 석등의 대표작이다.
법주사 금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철확(쇠솥)이 있고 왼쪽으로 철당간과 석련지, 돌확(석조)이 있다. 금강문 정면으로는 두 그루 나무가 버티고 선 사천왕문이며 팔상전을 지나면 쌍사자 석등이 있고 이어서 대웅보전이다. 마침내 부처님이 계신 곳이다.
법주사는 법상종 사찰이며 미륵신앙 도량이기에 대웅보전과 미륵전(용화전) 양대 불전이 핵심이다. 미륵전은 조선 말기 대원군 때 훼손되었기에 천년고찰 법주사의 주불전은 바로 이 대웅보전이며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근래에 다시 지어 팔상전 왼쪽에 우뚝 서 있다.
그런데 석가모니가 주불이라면 대웅보전이 맞겠으나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다면 대적광전이나 대광명전으로 불러야 하는데 옛 기록에 대웅대광명전이 흥선대원군 시절 미륵장륙상을 헐어갈 무렵 대웅보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대웅보전에 오르는 중앙계단의 넓은 폭과 중앙의 답도(踏道)가 특이하며 좌우 소맷돌 위쪽에 새겨진 원숭이 석상도 눈길을 끈다.
이렇게 금강문을 들어서서 사천왕문, 팔상전을 지나 쌍사자 석등과 대웅보전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화엄 신앙축이라면 팔상전에서 왼쪽으로 사천왕 석등과 석연지, 희견보살상을 연결 후 용화보전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미륵 신앙축이었는데, 용화보전과 장륙상이 없어지는 통에 이 축선은 없어지고 중간에 있었던 석연지와 쌍사자 석등이 흩어져버렸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배치와 조화가 무너지고 산만해 보인다. 게다가 최근에 과거 용화보전 자리에서 남쪽으로 자리를 옮겨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우뚝 세우니 법주사의 상징 팔상전이 눌려 보이는 점이 다소 아쉽다.
대웅보전 앞 오른쪽으로는 네모꼴 모양의 원통보전이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모셔 관음전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창건 당시 의신조사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 된 후 1624년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으며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원통보전 옆에는 희견보살상이 세워져 있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옛 용화보전 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위치가 변경된 상태이다. 희견보살은 법화경의 소신(燒身)공양을 실천하는 모습을 세운 것인데 부처님께 최대의 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1200년 동안 자신의 몸에 향과 기름을 바르고 먹고 마신 후 스스로 불을 붙여 1200년 동안 태워서 공양하였다는 것이다.
금동미륵대불은 원래 용화보전에 미륵장륙상을 봉안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미륵장륙상이 사라지고 난 후 중건할 때 금동미륵장륙삼존상을 다시 모셨으나, 이도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시 당백전 만들려 헐어갔고 용화보전도 무너져 초석만 남았다는 것이다.
1939년에 미륵불상 조성이 다시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은 사람이 요절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재개되어 1964년 완공됐지만, 아쉽게도 시멘트로 만든 불상이었다. 1986년에 이를 헐고 25m 높이의 청동미륵상과 8m 높이의 기단부에 용화전 등을 준공한 것이 1990년이며 2002년에는 청동불에 개금불사를 완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법주사 경내는 대략 돌아보았다. 물론 대웅보전 앞 왼쪽으로 사대부 솟을대문과 담장을 두른 선희궁 원당이 있는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나중에 위패를 모셔가 조사당으로 쓰고 있다거나 금동미륵불 남쪽으로 통도사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모신 세존사리탑과 능인전 등이 있다.
또한 진영각, 삼성각, 명부전 및 선원을 포함한 스님들 요사채 등 당우들이 많지만 특별하게 눈길을 끄는 곳은 청동미륵대불 아래 바깥쪽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거기 새겨진 마애여래의좌상이다.
한국의 대표 산사(山寺)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속리산 법주사. 깊숙한 산속이지만 오붓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최근 세운 거대한 미륵불 외에는 옛 절집 모습 그대로 남아 천년고찰의 역사와 향기를 가득 품고 있는 호서제일 가람이다.
발은 거실 소파에 편히 앉아 있지만 눈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TV 화면 속 할배들과 동행하여 체코 프라하의 추억을 반추해 본다. 한국에서 동유럽 여행 코스는 대부분 독일에서 시작하여 체코 프라하, 체스키크룸로프를 경유하여 비엔나로 향한다.
프라하는 체코 공화국의 수도이며 프라하 구시가지에는 체코의 상징물인 프라하성이 있다. 남쪽 오스트리아 국경지대근처에는 아름다운 체스키크룸로프성과 중세의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체코 공화국은 지역적으로 10세기 이전부터 세계사를 끊임없이 움직인 강대국 사이에 위치해 우리나라 못지않게 역사의 부침이 심했다. 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이었지만 직접 전쟁에 가담한 나라는 아니기 때문에, 유적만은 찬란하게 보존되어 있다.
약 10세기를 전후해 이전 신성로마제국 영토 일부에 건설된 보헤미아 왕국이 체코공화국의 전신이다. 보헤미아는 프라하의 옛 명칭이기도 하다. 14세기 세계적인 유적지 프라하 블타바강의 카를대교를 건설하고 유럽 최초의 대학인 프라하대학을 세운 카를 4세는 보헤미아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16세기 체코는 바로 옆 나라이면서 유럽의 최강국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 속해 지배를 받다가 1918년 체코와 슬라브족의 슬로바키아를 합병한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명으로 독립한다. 하지만 다시 독일의 나치정권하에 속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후 독일로부터는 독립하지만 동유럽 공산국가로 옛 소련(소비에트 연방)의 영향권으로 편입하고 그 후 끊임없이 공산당과 비공산주의자들의 투쟁, 민주정권 수립을 갈망하던 중 개혁파가 정권을 잡기에 이른다. 이런 노력의 변화를 세계사에서는 ‘1968 프라하의 봄’이라고 부른다.
‘프라하의 봄’ 자유화 운동은 실패하여 다시 긴 겨울이 찾아오게 되지만 1989년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사회주의 체제 개혁에 힘입어 체코의 민주 시민 시위가 성공한다. 1993년 비공산주의자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 취임 후 바츨라프 광장에서 평화적인 무혈혁명을 연설했는데, 이를 상징적으로 ‘벨벳혁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는 분리됐다.
이후 체코 프라하는 세계인의 관광 여행 주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보고 싶어 하는 프라하성은 9세기 보헤미아 왕국 시절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기 시작하여 고딕, 르네상스를 거쳐 18세기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900년에 걸쳐 개축됐다. 그야말로 건축 역사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세계인은 그 아름다움에 놀라고 경탄을 금치 못한다. 프라하성에는 스테인드글라스창이 유명한 비투스 대성당과 대통령궁, 박물관, 유명한 야경 등 볼거리가 즐비하다.
역시 보헤미아왕국에 의해 13세기 고딕형식으로 건축되었던 체스키크룸로프성은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이 되어 르네상스풍의 둥근 지붕이 특징이다. 체스키크룸로프성 인근에는 중세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마을, 미로 같은 뒷골목과 상점들이 어우러져 아름답고 경이로운 풍경을 자랑한다.
관광객들은 활기찬 골목 쇼핑과 사진 찍기에 정신이 쏠려 언제 공산주의가 이곳에 있었는지 가늠해볼 겨를도 없다. 체스키크룸로프 마을은 ‘체스키크룸로프 역사지구’라 불리며,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됐다. 체코의 음악가로는 우리가 잘 아는 안토닌 드보르작이 있고, 교향시 ‘나의 조국’의 작곡자 베드르지흐 스메타나가 있다.
6월 13일, 강신영, 김종억 동년기자와 내가 백두산 트레킹 팀(총 33명)에 합류했다.
“백두산은 한민족의 발상지. 또 개국의 터전으로 숭배되어온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어떤 결의에 찬 출발이라기보다 막연히 뿌리를 보고 싶었다. 또 더 나이를 먹으면 백두산에 오르기 힘들 것 같은 불안감도 있었다. 일찌감치 4박 5일의 여행 일정표를 받았지만 비용과 둘러볼 장소만 보고 무심히 있다가 출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세히 보니 ‘오전 6시,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3층 집합’이라 씌어 있었다. 난감했다. 다른 사람들은 4시에 출발하는 공항버스를 이용할 수 있지만 경기도에 사는 나는 그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인천공항 근처의 호텔을 알아봤다. 아침에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까지 포함해 숙박료가 4만5000~5만5000원 정도였다. 인천 운서역 근처에 있는 호텔을 예약한 뒤 4만5000원을 지불했다.
다음 날 새벽 5시 40분까지 인천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를 받았다. 집에서 왔으면 잠도 설쳤을 텐데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비용으로 쓴 4만5000원은 그 가치가 충분했다.
짐을 꾸리면서 트레킹과 등산, 어디에 맞춰야 할지 좀 헷갈렸다. 그래서 트레킹 준비를 했고, 내 상태를 고려해 스틱까지 준비했다. 우산과 비옷, 따뜻한 옷도 집어넣었다.
허전한 코리아타운
드디어 1시간 30분 만에 심양국제공항에 도착,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버스에서 내려 코리아타운 ‘서탑가’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중국어와 한국어로 된 간판이 이어져 있었지만 한국어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마사지, 노래방, 술집, 음식점, 찻집, 미용외과, 횟집, 족도관, 한국당구장….
뭔가 허전했다. 거리에서 돈을 쫓아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느껴져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선의 문화가 배어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문화를 팔아야 돈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잘 보존된 고려의 옛 거리, 결기 있는 독립투사 후예들이 자신들의 혼을 녹여 만든 거리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고구려 유적지, 민족 성지 만주벌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러나 곧 이런 생각들을 후회했다. 먹고살기 팍팍하고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면 문화도 역사도 예절도 지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많은 고난 속에서도 조선족으로 남아 우리의 말과 풍습을 지켜오지 않았는가.
산 자와 죽은 자의 도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통화시에서 집안시로 두 시간에 걸쳐 이동했다. 광개토대왕비와 능,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을 관광하기 위해서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우리의 논, 밭, 산과 너무도 흡사했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인 국내성이 있었던 곳이다. 고구려 2대 왕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이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400여 년 이상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다.
지금도 땅을 파면 유적과 유물이 나오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도시다. 1570년간 땅속에 묻혔던 광개토대왕비는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장수왕은 높이 6.9m, 무게 37t의 비석에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해놓았다. 그러나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훼손되었고 일제가 기록 일부를 변조하는 일까지 벌였다고 한다. 우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수모의 공간, 빼앗긴 국토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광개토대왕비는 중국 공안 복장의 경비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사진촬영을 금했다. 인형처럼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에 박제가 된 채 서 있는 비석. 우리 조상의 업적을 다른 나라 사람이 지키면서 우리에게 입장료를 받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뒤를 돌아 광개토대왕릉으로 향했다. 마치 조그만 동산처럼 느껴지는 흙더미. 그 위에 초라한 나무 한 그루가 능임을 알게 해줬다. 내부 석실에는 한국 관광객이 던져놓은 듯한 1000원짜리 지폐 몇 장이 놓여 있었다. 먹먹한 마음을 그렇게라도 달래고 싶었던 모양이다. 좀 더 걸어가니 413~490년에 축조된 장군총이 나왔다. 거대한 화강암을 쌓아올리고 그 옆에 밀리지 않도록 지지석을 세운 피라미드식 축석묘다. 높이 12.4m, 길이 31.6m의 7단 계단식 동방의 피라미드는 아직도 탄탄해 보였다.
침묵, 그리고 안타까움
장수왕 무덤가에 머물며 안타까운 질문을 하고 싶었다. ‘거대한 만주 벌판을 버리고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안 그랬다면 아직도 만주는 우리 영토일 텐데요.’ 모두의 가슴으로 젖어드는 안타까움. 그것이 비가 되었는지 그칠 줄 모르고 따라다녔다. 아니면 아비를 박제화한 것을 통곡하는 장수왕의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웅장하고 거대한 무엇을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뿌리에 존재하는 의식을 일깨워준 여행이었다. 순간순간 가슴이 저려왔다. 잘 키운 딸을 강탈당한 부모의 심정이 이럴까. 가이드는 천지에 올라 태극기를 꽂았다가 벌금 물고 감옥까지 갈 뻔했던 한 한국인의 이야기를 해줬다.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괜히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화폐는 아직도 국제 시장에서 공식 환전이 안 되는 돈이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중국 여행지의 경우에는 한국 돈이 별 불편 없이 사용된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여행으로 많이 찾는다고 한다.
물론 호텔 숙박비나 식비 등 큰돈은 여행사에서 알아서 지급하므로 관여할 바 아니고 개인적으로 쇼핑에 사용할 돈을 말한다.
호텔 룸서비스 팁, 마사지 가게, 기념품점, 동네 행상, 기념품 판매점, 농산물 판매점, 공항 면세점에서도 한국 돈이 통한다.
한국 돈 1만 원은 중국 돈으로 약 60위안이다. 중국 돈 1위안은 우리 돈으로 약 167원이다. 미국 돈 1달러가 약 6.71 위안이다. 물건값이 중국 돈으로 되어 있으면 한국 돈으로 얼마인지 금방 계산이 어렵다.
그래서 한국 돈으로 지급 할 수 있으면 금액에 대한 감이 있으므로 계산이 편한 것이다. 우비 하나에 3000원, 좀 더 고급은 5000원, 삼단 우산은 5000원, 장뇌삼 10뿌리에 1만 원부터 굵은 뿌리는 하나에 5만 원도 부른다. 행상이 가지고 다니는 현지 교통지도가 1000원 식이다.
호텔 룸서비스 팁은 보통 1불을 놓고 나온다. 1불은 우리 돈 약 1120원 정도이지만, 1000원으로 간단하게 보면 된다. 그래서 테이블에 팁으로 1000원권 지폐를 놓고 나온다. 무거운 가방을 방까지 갖다 주는 팁도 마찬가지로 1000원이다. 1불은 우리 돈을 미국 돈으로 환전해야 하므로 환전 수수료가 붙는다. 환전한 미국 돈이 한정적이므로 우리 돈 1000원보다 귀하게 쓰인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중국 여행지에 갈 때는 우리 돈 1000원짜리를 많이 준비해 가면 좋다. 1만 원권도 그대로 사용하지만, 1000원 지폐가 더 용도가 많다. 굳이 수수료 내가며 위안화로 환전해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면세점에서도 가격을 미국 돈, 중국 돈, 한국 돈으로 따로 매겨놓았다. 역시 한국 돈으로 지급하면 편하다. 지갑이 불룩한 것이 싫어서 주머니에 대충 넣어둔 한국 돈을 꺼내 줬더니 구겨진 돈은 은행에서 환전해주지 않는다며 반드시 지갑에 넣어 다니라는 충고를 들었다.
동전은 걸어 다닐 때 짤랑거리고 무게도 있어 불편하다. 보안 검색 때도 금속이므로 여지없이 걸린다. 보안 검색은 공항뿐 아니라 중요 관광시설을 이용하기 전에 받는다. 백두산 산문에서 입산 절차를 밟을 때도 거쳐야 한다. 따로 가방에 넣어 두거나 아예 동전은 떠날 때부터 안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단, 유럽에서는 화장실이 대부분 유료이므로 유로 동전이 필요하다. 보통 한번 사용에 30센트, 50센트를 받는다. 동전이 없으면 지폐로 내면 팁으로 생각하고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 일도 있다. 여러 명이 함께 가면 합해서 지폐로 사용할 수도 있다.
대형마트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요즘. 빠르고 편리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장을 보는 맛’은 좀 떨어진다. 덤도 주고, 떨이도 하고, 옥신각신 흥정도 하면서 정이 쌓이는 건 장터만의 매력일 테다. 사진만 봐도 따뜻한 인심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한국의 장터’를 책방에서 만나봤다.
참고 도서 ‘한국의 장터’ 정영신 저 자료 제공 눈빛
전국 오일장을 한 권에
저자 정영신은 1987년부터 시골 장터를 기록해온 사진가이며 소설가다. 그동안 개인전 ‘정영신의 시골 장터’, ‘정영신의 장터’와 저서 ‘시골 장터 이야기’ 등을 통해 직접 발로 뛰며 포착한 우리 장터의 모습을 공개했다. 특히 ‘한국의 장터’에는 전국 오일장의 풍경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470여 페이지에 묵직하게 담겨 있다. 총 9개 도로 구분하고, 다시 군으로 분류해 정리한 전국 대표 오일장 82곳을 소개한다.
430여 장으로 만나는 시골 장터 풍경
경기도부터 제주도에 이르는 전국 오일장의 생생한 모습을 다양한 사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430여 장에 이르는 사진이 모두 흑백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컬러 사진보다 오히려 시골 장터 특유의 투박하고 정겨운 분위기가 잘 드러나는 듯하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국밥, 날개를 퍼덕이는 장닭, 반들반들 기름기가 도는 부침개, 가격을 흥정하는 사람들의 손짓 등 생동감 넘치는 장터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상인들의 애환에 귀를 기울이다
저자는 단순히 장터 정보와 사진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인들의 이야기까지 함께 담아냈다. 포천 적성장 무말랭이 할머니, 충남 금산장 붕어빵 아저씨, 음성 무극장 뻥튀기 할아버지 등 장터 상인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그들의 애환을 들려준다. 고단한 일상을 살면서도 순수한 미소를 잃지 않고 삶의 터전을 일궈가는 그들의 사연을 읽고 나면, 사진 속 상인들의 표정에 시선이 더 오래 머물게 된다.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훈훈해지는 마음이 어느새 우리의 발걸음을 장터로 옮겨놓는다.
책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즐거움
plus 01
장터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2012년에 출간된 책이기 때문에 가장 최근의 사진은 6년 전이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1980년대와 1990년대 사진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유행이 달라지며 사람들의 차림새만 조금 달라졌을 뿐, 사진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분위기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직접 때를 맞춰 오일장을 가보는 것도 좋겠다. 다만 몇몇 곳은 현재 장이 열리지 않을 수 있으니 미리 확인 후 방문하도록 하자.
plus 02
‘전통시장 통통’ 웹사이트를 이용하면 전국 오일장을 비롯한 전통시장을 찾아볼 수 있다. 시장 이름은 물론 지역별 또는 특정 품목명으로도 검색 가능하다. 점포수를 토대로 한 시장의 규모, 주소, 주요 취급 품목, 주차장·화장실 등 편의시설, 온누리상품권 가맹 여부 등을 알려준다. 이 밖에 외국인과 함께 가볼 만한 ‘글로벌 명품시장’, 상품·교육·문화를 동시에 소비 가능한 ‘지역선도 시장’, 관광·예술을 접목한 ‘문화관광형 시장’ 등 특성화 시장도 소개한다.
plus 03
일부 지역 관광지 할인, 온누리상품권(5000원권) 제공 등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팔도장터관광열차’를 이용해보자. 올해에는 문화체험을 즐길 수 있는 전통시장 20곳을 선정해 11월까지 총 65회 운영할 예정이다. 휴가철인 8월에는 3~4일 강릉중앙시장·강릉문화재야행, 11일 단양구경시장·고수동물, 26일 대전중앙시장·영동포도축제 일정이 마련돼 있다. 예약은 코레일관광개발 홈페이지와 콜센터, 스마트폰 앱을 통해 가능하다.
현재 한국 농업·농촌에 대해, 이동필(李桐弼·63)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간단하게 ‘전환기’라고 명명했다. 자신의 고향이자 농업 현장인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농부로 일하면서 느낀 솔직한 속내였다. 그러나 그는 전환기 속에서 맡은 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고자 한다.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후 스스로 돌아보는 ‘마음공부’ 뜨락에 씨앗을 뿌리고 일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농촌경제연구원에서 장관을 거쳐 귀향한 후 농부의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서 한국 농업과 농촌이 직면하게 된 현재와 미래의 활로에 대해 물어봤다.
경상북도 의성군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마늘로 친숙한 도시다. 그리고 지난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특별하게 유명해진 지역이기도 하다.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컬링 종목의 스타들이 모두 의성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다. 의성은 컬링 종목의 스타들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 컬링의 수도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아낌없는 지원도 이루어지고 있다.
30년 뒤면 사라질 수도 있는 도시
그러나 이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진 의성의 대외 이미지와는 달리,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걱정이 많았다. 그는 인터뷰를 하던 중 서산대사의 시를 읊었다. ‘환향’이라는 제목의 시다.
삼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니
사람은 죽고 집은 부서지고
마을은 황폐화됐는데
청산은 말이 없고 봄 하늘은 지는데
어디서 두견새 우는 소리만
들리는구나
그야말로 막막하다.
“이게 내 심정이에요.”
그의 먹먹한 기분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었다. 그가 장관 퇴임 후 한 명의 농부가 되어 귀향한 의성군은 2016년 ‘중앙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에 따르면, 30년 뒤 사라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러한 현실을 체감하고 있었다.
“고령화, 양극화, 그리고 예전 같은 공동체가 스러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죠. 연구소나 중앙부처에 있을 때는 망원경으로 세상을 봤지만 현장에서는 현미경 보듯 보이지요.”
장관, 농부가 되다
이 전 장관은 뼛속까지 농업인이다. 그의 경력을 보면 바로 드러나는 사실이다. 농촌지도자였던 아버지를 둔 그는 영남대학교 축산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와 미국 미주리주립대학교에서 농업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30여 년 넘게 근무하면서 농촌의 현실과 문제를 연구하고 대안을 내놓는 일을 했으며 2013년에는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 입각해 역대 최장수인 3년 6개월의 시간을 지냈다. 그리고 2016년 9월 5일 퇴임한 다음 날 고향으로 돌아와 2500평(8264㎡)의 땅을 관리하는 농부가 되었다.
“요즘은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동물들 밥 먹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해요. 온몸이 타박상과 상처투성이예요.(웃음) 며칠 전에는 경운기 사고가 나서 갈비뼈가 부러졌어요. 도처에 해야 할 일이죠. 옛날 방식으로 농사를 하면 힘만 들고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귀향할 때 나름 세운 ‘일이삼사 원칙’이 있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하루 두어 차례 텃밭을 돌보고, 삼시 세끼 어머니와 밥을 먹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말동무가 된다’는 것이었다. 3년간 보리·콩·팥·참깨·마늘·양파·옥수수 등 온갖 농사를 다 지어봤다.
그 과정에서 사모님은 반대 안 했느냐고 묻자 퇴직한 그날 밤에 어찌 내려가느냐며 딱 하루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로는 함께 고생하면서 도와주고 있다 한다.
“가끔 외롭고 답답할 때가 있는데 아내가 그걸 풀어줘요. 신세를 많이 지고 있죠.”
남는 농산물을 판매하는 수고로움은 모두 아내 이정숙 여사가 맡아서 하고 있다. 노모를 돌보고 남편 수발하고 농사일까지 거들며 집안 곳곳을 돌보는 1인 다역을 하고 있는 만큼 이 전 장관은 이런 아내를 인생 최고의 반려자라고 손꼽았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먼저 오래된 집을 손보면서 마당에 5평(16.5㎡)짜리 사랑채를 지어 사원재(思源齋)라 이름 붙였다. 농사일하며 이곳에서 책을 읽고 손님을 맞는다. 사원재라는 말은 조상과 부모, 그간 살아오며 도움을 줬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의리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는 또 40년이 다 된 부친의 생가 마당 한가운데에 작은 정자를 세우고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 지었다. 노모가 황반변성 때문에 눈이 불편하신데 남은 날 하루하루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뜻을 새겨 넣었다. 이 또한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아니겠는지.
‘故鄕創生’에 몰두하다
하지만 눈앞의 일을 두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종일 흙에 파묻혀 있다 들어오면 너무나 피곤해 바로 쓰러져 자는 현실. 그는 자신의 현재를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중 농가에 비유했다.
“이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게 세상 근본 이치란 주장을 했어요. 그런 주장을 갖고 등나라를 갔죠. 그 나라 임금이 너희들의 주장은 뭐냐 물어보니 첫째는 근면 검소해야 한다, 둘째로는 왕과 왕비도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대답했어요. 왕이 그 말을 듣고는 첫 번째는 공감할 수 있는데 두 번째는 못하겠다며 거절했죠.(웃음) 이 사람들은 농업인들과 함께 일만 열심히 하다 보니 자기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했어요. 당시 유가들은, 실천보다 말로 사는 사람들이니까 자신들의 주장을 다 책으로 만들었죠. 나도 이렇게 농사일만 하다가는 정작 농촌의 살길에 대해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마는 게 아닌가 걱정돼요.(웃음) 이제 좀 바꿔야겠어요.”
그렇다고 그가 다시 정치의 세계로 돌아올 것이라는 얘기인가 하면, 전혀 아니다. 이번 지방선거 때도 얘기들이 있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밖에 나가면 말이 많아 거의 두문불출하고 있어요. 무슨 운동을 하거나 당을 같이 해보자며 찾아오는 이도 있지만, 차나 한잔 먹고 가라며 돌려보내요. 한 눈 팔지 않고 텃밭 일구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평생의 과업인 희망찬 농업, 활기찬 농촌을 만드는 생각을 하기에도 바쁩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집에는 신문도 TV도 없었고 라디오 하나만 틀어놓고 있었다. 외부 활동이라면 가끔씩 강의를 나가는 정도다. 요즘 그의 주된 관심사는 ‘지방소멸과 고향창생’, ‘청년창업과 귀농귀촌’ 그리고 ‘농협의 역할’ 등이다. ‘늙고 지친 고향을 어떻게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화두와 관련한 고민거리인 것이다.
극장 하나 없는 곳, 젊은이들에게 와서 살라 말할 수 있나
“지역발전이라 하면 흔히 돈 버는 얘기만 하는데, 그에 못지 않게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너그러운 마음과 역량을 갖춘 인재양성, 그리고 생활환경 및 복지 서비스의 질적 개선도 중요하다고 봐요. 의성만 해도 극장 하나 없어요. 그런데 말로만 여기 와서 살라고 권유할 순 없죠.”
사실 농업·농촌 발전을 위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많은 예산과 인력을 동원해 노력을 하고 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전 장관은 지역활성화를 위해 일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앙정부는 지방 분권과 지원체제 정비를 하고 지방에 도전할 기회를 준 후에 결과에 책임지도록 해야 해요. 지역의 특성과 농가를 유형별로 구분하여 맞춤형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자원의 효율성을 높이는 길이거든요. 또한 조건불리지역 직불제도를 개선하여 개발 여건이 불리한 지역에 대해 지원을 차등화할 필요가 있어요.”
그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의 조속한 시행과 함께 고향기부금제를 도입할 것을 적극 주문했다.
“무역이득공유제의 대안으로 매년 1000억 원씩 10년간 모으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조성하기로 했는데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어요. 당시 한중 FTA 협약 비준을 전제로 여야가 합의한 약속입니다.”
아울러 지방의 역할을 강화하고 주민과 민간 부문의 참여를 촉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농촌에 젊은 사람들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스마트팜이나 공동경영체 등을 통해 고부가가치 있는 농산물을 생산하고 가공, 유통, 체험관광 등과 결합한 6차산업으로 매력적인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농교류를 하고 귀농·귀촌을 통해 외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책임있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지역 스스로 자기들의 문제와 가능성, 부존자원을 기초로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 완성해야
이는 그가 장관 시절에 핵심적으로 추진한 과제 중에서 못 다 이룬 숙원과도 관계가 깊다.
“농정의 새 틀을 짜고 싶었어요. 농업·농촌을 둘러 싼 대내외 여건이 다 바뀌어버린 지금은 그 변화에 걸맞게 정책 프레임도 달라져야 한다고 봤죠. 그중 하나가 농업경영체를 등록하고 이에 기초하여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을 추진하는 일이었어요.”
그는 경영주가 65세 미만이면서 소득이 연 5000만 원 이상인 농가는 규모 있는 농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장기저리 융자와 컨설팅, 경영안정대책 등 맞춤형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계자가 없는 영세고령농가는 농업 경영에서 은퇴를 유도하여 사회안전망으로 커버하고, 나머지 중간 규모 농가는 가공, 유통, 관광 등을 결합한 6차산업화를 통해 추가적인 소득원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농가를 한데 묶어놓고 획일적인 정책을 추진하니 돈은 돈대로 쓰고 손에 잡히는 효과를 못 볼 수밖에요. 이웃인 성주는 참외 하나만 갖고도 잘살아요. 참외 주산지로서 품목이 특화되어 전후방 관련 산업이 발달하고 6차산업으로 수급까지 안정되니 가능한 거죠. 이처럼 지역 및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을 완성해야 했는데, 끝장을 못 보고 나온 게 아쉬워요.”
지역의 농업·농촌 관련 사업이 중앙정부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해 특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도 같은 문제다. 농촌 중심 활성화 사업을 보면 지역 여건이나 부존자원에 대한 고려없이 주민 의사나 참여도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건물이나 지어놓고 활용을 못해 심지어 전기세도 안 나온다는 얘기를 듣는다는 것이다.
“지역이라는 공간 정책 위에 산업 정책을, 그 위에 사람을 대상으로 한 복지정책이 이루어져야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는데 제각기 따로 놀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사후관리는 안 되고 지자체는 책임 안 지려 하고…. 지역이 정책을 좀 더 주도하고 책임지도록 추진체계를 보강해야 해요.”
어쩌면 농협이 대안이 될 수도
그는 1·2·3차산업을 융복합해 농가에 높은 부가가치를 제공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6차산업을 주창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시아 몬순기후대의 영세소농이란 구조적 특징 때문이다. 여름에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논농사에 특화하다 보니 계절별 유휴인력이 발생하게 되고, 유휴노동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농외소득원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농업생산이란 1차산업과 가공이란 2차산업, 그리고 유통 및 관광서비스 등의 3차산업을 결합한 6차산업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렇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간단치 않았다. 그는 지난해 수확한 팥 서 말과 양파 100kg을 팔 곳이 없었던 것이다. “콩 750kg은 다행히 인근 농협에 판매하였으나 시중보다 낮은 가격으로 넘겼어요. 오죽하면 농민들이 농협에 바라는 소망이 수확한 농산물을 제값 받고 팔아달라는 것이겠어요. 농사짓는 것도 힘들지만 판매하는 것은 더 어렵습디다.”
정부는 농협 개혁을 통해 경제사업을 활성화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아직도 체감하는 성과는 얻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업장들도 적자 신세를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더구나 농업인의 고령화로 준조합원 수가 늘어나면서 신용사업에 매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은 농협 회원 중 농사를 짓지 않는 준조합원이 정조합원보다 30% 정도 많고, 농협 계통 매장의 농산물 책임판매율이 50%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농협이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2014년부터 개혁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농협은 정조합원이 준조합원보다 훨씬 더 많은데도 농산물 책임판매율은 25%에 불과해 농민들로부터 돈장사만 한다고 비판받는 거예요.”
그는 오랜 연구생활과 장관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감 없이 농협 유통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아울러 고령화로 인한 지방소멸 시대에 있어서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농협의 새로운 역할을 제시했다.
“농협이 지역 단위의 6차산업을 주도해야 한다고 봐요. 경제사업의 수지개선을 위해서는 경영 능력을 향상하고 규모화, 전문화해야 합니다. 인근 지역과 품목을 생산하는 농협과의 통합 또는 사업을 연계하거나 연합사업단을 운영할 수도 있겠지요.”
어째서 농협일까? 그는 지금처럼 개별 농가가 따로따로 로컬푸드니 직거래니 하는 식으로 장사를 하면 비용절감을 고사하고 소비자 신뢰를 얻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표준화, 규격화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개별 농가가 하기 힘든 그 작업을 농협이 해줬으면 하는 의견이다.
“고령화 사회에서 농협은 농기계를 구비하고 영세농들의 영농을 대행할 수도 있습니다. 농촌지역의 교육, 의료, 복지 등 서비스 전달 체계로서 농협의 새로운 역할도 생각해볼 수 있겠죠. 그것이 농협이 살길이에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농협이 대체 뭐하는 곳이냐는 정체성 논란이 심화될 겁니다. 농협이 당면한 현안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도록 스스로 혁신하고 노력해야 해요.”
귀농·귀촌, 국가 정책으로 시행해야
이 전 장관은 요즘 세상이 시끄럽다는데 다 잊고 산다고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씨 뿌리고 가꾸는 즐거움이 여간 아니라고 한다. 농업과 농촌에서 미래의 꿈을 키우는 젊은이들은 물론 은퇴 후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려는 사람들에게도 보람을 느끼는 새로운 삶이 가능함을 농촌이 가르쳐준다고 말했다. 지역의 균형발전은 물론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귀농·귀촌 정책은 어느 한 부처가 아니라 여러 부처가 협력해 국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농촌은 흡사 요양병원과 비슷해요. 우리 집 왼쪽으로 있는 집 세 채는 빈집이고, 오른쪽의 두 채는 독거노인이 살고 있어요. 소멸위험 지역에서 벗어나는 길은 외지 인구를 유입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이사비 몇 푼 보태주는 게 자랑이 아니라 이주자들이 필요한 것을 도와줘야죠. 여기서 태어나 20여 년 살았고, 지금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저도 적응이 쉽지 않은데 낯설고 물선 객지로 이사와서 얼마나 답답한 게 많겠어요? 지역을 찾아 온 외지인을 축복으로 여기고 따스하게 배려하는 너그러운 이웃이 있어야 이곳에 눌러 살고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답니다.”
그는 귀농·귀촌 통계확립과 관련 정책의 정비, 농촌지역에 대해 1가구 2주택에 추가적인 감세를 포함한 제도정비등과 함께 주민들의 귀농·귀촌자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제는 청복(淸福)을 위해 노력할 때
오로지 고향의 발전과 활기찬 농촌을 위한 생각에 둘러싸인 그에게서 못다한 책임감과 꺼지지 않은 열정이 보였다. 해야 할 일과 책임이 없다면 그렇게 힘들게 생활할 리가 없다. 그에게 견딤의 비법을 물었더니 정약용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산 정약용은 복을 열복(熱福)과 청복(淸福)으로 나눴어요. 열복은 출세해 권세를 누리는 것이고, 청복은 청빈한 삶을 통해 욕심과 번뇌를 지움으로써 얻는 복이죠. 다산은 열복보다는 청복을 얻기가 훨씬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이미 열복은 과분하게 누린 셈이죠. 이제 마음을 내려놓고 이웃과 더불어 즐겁게 사는 복이 남았습니다.”
청복을 누려보겠다고 다짐했다는 말에서 그가 유독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아직 풀어야 할 평생의 숙제, 희망찬 농업과 활기찬 농촌을 통해 국민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도전이 있다. 도전은 사람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준다. 그래서 마음의 가치를 알게 된 그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만들어내는 위대한 변화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향창생은 우리들 마음의 재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살아갈 지역의 미래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는 주민들의 염원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활력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한 해에만 외국 관광에 나서는 사람들이 13억 명이라고 한다. 비행기 등 여행 수단이 발달하고 소득도 늘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인들이 해외여행에 나서면서 어딜 가나 중국인들이 보인다.
필자가 처음 유럽에 갔을 때가 80년대 초반이었다. 그때만 해도 유럽에서 동양인들을 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인들을 비롯하여 중국인들까지 가세하면서 어딜 가나 동양인들이 많이 보인다.
독일의 백조 궁전으로 불리는 노이슈반스타인은 그 당시만 해도 느긋하게 궁전 안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몇 해 전에 가보니 중국인들이 몰려와서 멀리 다리 건너에서 아득하게 보이는 궁전 외관만 보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궁전 안에 들어가려면 한나절은 줄을 서야 했기 때문이다.
신문에 보니 베네치아광장,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 그림이 있는 방, 에펠탑, 노트르담 사원 등이 관광객들 등쌀에 몸살을 앓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는 여러 가지 제약 조건을 만들 조짐이라는 것이다.
백두산 관광을 할 때도 새벽 6시에 출발하는 일정이 너무 힘들어 좀 늦게 가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하루 2만 명 정도로 인원 제한을 해서 늦게 가면 입장도 못 할 뿐 아니라 들어가서도 줄 서다가 시간이 다 간다는 것이었다.
이화동 벽화 마을에도 처음엔 계단에 지자체에서 거금을 지원받아 미술대 학생들이 멋진 꽃 모양을 타일로 붙여 꾸몄다. 그러나 동네 주민들이 무참히 페인트 덧칠을 하는 바람에 명물이 사라졌다. 몰려드는 여행객들 때문에 시끄러워 못 살겠다며 주민들이 반발한 것이다. 북촌 마을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관광객들이 버리고 가는 쓰레기까지 골치라는 것이다. 서울 둘레길도 자주 코스를 바꾸는 이유가 동네 주민들의 민원 때문이라고 들었다. 조용하던 동네가 둘레길 걷는 사람들의 소음과 쓰레기에 몸살을 앓으니 동네 사람들이 반발할 만하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고 소득 수준이 어느 정도 되면 여행이 활성화된다고 한다. 지금 중국이 그렇다. 그래서 세계 어딜 가나 중국인들이 휩쓸고 다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렇다. 외화가 부족하던 시절에는 해외여행 자체가 어려웠었다. 봇물 터지듯 해외여행 붐이 일어난 것은 외화 부족으로 한동안 해외여행을 막았었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니 너도나도 해외여행 대열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국민 소득도 해외여행을 갈 만큼 올라갔다. 거기에 주 5일 근무제, 근로시간 단축 등으로 수요가 폭발했다. 고령 사회로 진행되면서 퇴직한 후 건강한 시니어들이 여행에 눈을 돌리게 된 것도 새로운 수요층으로 무시할 수 없다. 앞으로 점점 건강한 고령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속속 여행 행렬에 동참하게 될 추세이다.
앞으로는 유명 관광지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쪽으로 여행 수요가 늘어날 것이다. 유명 관광지들은 오버 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고 있어 가봐야 고생이다.
소풍 때만 되면 새벽같이 일어나 엄마와 함께 김밥을 말았다.
김밥 가게가 생겼을 때 ‘과연 이게 팔려?’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소풍날 아침이면 너도나도 김밥집으로 향한다. 흔하디흔한, 빠르고 간편한 먹거리 김밥. 일상 속에서 쉽게 집어 들던 김밥에 형형색색 특별함을 더해 세계 속에 화려한 모습으로 선보인 이가 있다. 바로 ‘김밥 셰프’로 불리는 김락훈(金樂勳·48) 셰프다. 김밥을 지구촌에 전하다 보니 요즘은 모든 재료의 중심이 되는 우리 농민과 함께 나아가는 일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김밥 세계화를 넘어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하며 소통의 물꼬를 트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국을 대표하는 요리를 꿈꾸는 김밥
김락훈 셰프를 만난 곳은 서울 종로구 청와대사랑채 한식홍보관. 미국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난 뒤 중국 상하이를 거쳐 전날 밤 한국에 도착했다고 했다. 현재 그는 청와대사랑채 한식홍보관 대표로서 한국 문화와 요리를 알리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오래전에 이미 약속된 시간이었어요. 대림중학교 다문화 학생들과 함께 불고기를 만들고 그것을 넣어 김밥을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외국 관광객 체험 프로그램인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에요. 한국 교육제도 아래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위해 예외 규정을 준 거죠.”
생소한 한국음식을 체험하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흥미롭게 시간을 이끌어가는 김락훈 셰프. 1시간여 진행된 요리교실은 자신들이 만든 김밥을 맛있게 먹는 것으로 끝이 났다.
김밥 세프라는 말이 일단은 생소하다.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가 초밥의 매력에 푹 빠져 결국에는 다다른 곳이 김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그는 김밥 셰프를 자처했을까?
김밥에서 가능성을 보다
“저는 혼자서도 잘 놀아요. 내 만족을 위해 살아왔고 사람들의 평가를 크게 받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내 잔재주를 적용시키기에는 너무나 좋은 콘텐츠가 김밥이더라고요. 누구 하나 접근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예쁘게만 잘 만들어서 사람들한테 보이면 되는 거고 완성도는 시간이 가면서 축적되는 거고요. 완벽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내가 하는 작업에 대해 물어보면 받아칠 수 있는 수준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일식이면 일식, 멕시칸이면 멕시칸대로 김밥 한 개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생긴 거예요. 멕시칸 푸드로 김밥을 만든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는 범위와 한계 내에서 그들의 관심을 긁어줄 수 있을 만한, 그 정도 지식만 쌓으면 되는 거잖아요.”
김밥 셰프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수준을 위해 공부하다 보니 국내외에서 딴 자격증만 해도 20여 개나 된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세계요리월드컵에서 개인전, 단체전 동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본 수준이 어느 정도이기에 이토록 끊임없이 매달리는 것일까.
“저는 세계 1호 김밥 셰프예요. 저도 저지만 김밥을 의인화해서 셰프란 말을 붙인 거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까요? 저는 레시피를 만들고 요리하는 세프와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시스템을 만들거나 조직하는 사람이라고 저를 설명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가령 시니어의 신규 직업층을 만들고 싶어요. 한식의 새로운 분야로 발돋움할 수 있는 하나의 성장 자료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김밥, 세계 속에서 ‘바람’나다
나라 밖에서 한국 김밥을 널리 알리고, 안으로는 농민들과 어떻게 하면 신나고 재미있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는 김락훈 셰프. 우연한 기회에 세계 무대에까지 김밤 셰프로서 얼굴을 알리게 됐다.
“스스로 더 성장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했는데 한국 문화를 알려야 하는 중요한 국제 행사에 저를 불러주시더라고요. 물론 김밥 셰프는 저 하나였고 김밥이라면 잘할 자신이 있었죠. 다만 그때의 저는 아직 그런 중요한 자리에 서기에는 검증이 되지 않은 패였습니다. ‘내가 잘못하면 큰일 나겠구나. 정말 잘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한 공식 행사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국제관광박람회(FITUR)였다. 규모 면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다양한 국내외 행사에 참여했지만 뭔지 모를 책임감이 밀려왔다.
“그때 결정했죠. 외국 행사에 집중하자. 처음 나간 박람회였는데 규모가 대단했다는 것을 3년 동안 국제박람회를 다니면서 알았죠. 처음에는 비교 대상이 없어서 몰랐고요. 우리나라 김으로 제대로 된 김밥을 만들어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저도 점점 성장했습니다.”
김락훈 셰프가 만드는 김밥은 일반 김밥이 아니다. 다양한 무늬가 돌돌 말린 김과 밥 사이에 표현되며 배색 또한 예술이다. 일명 ‘파티 김밥’. 곰돌이 모양, 꽃 모양 등이 동그란 김밥 안에 담겨 있다. 길게 김을 이어 붙여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과 김밥을 말기도 했다. 함께 화합해 만드는 의미와 재미도 있고 잘라 먹어보니 맛도 있는 김밥에 세계 각지에서 모인 관람객들이 흥분했다.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였습니다. 그 후에 독일 베를린 국제관광박람회(IBT), 한불수교 130주년, 영국 런던 국제관광박람회(WTM) 등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하는 자리에 참석해 ‘김밥 쇼’를 했습니다. 다행히도 가는 곳마다 성황이었어요.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작년 한 해는 평창동계올림픽 성공 유치를 위한 한국 문화 홍보대사 자격으로 전 세계를 누볐다. 안 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였다. 셰프로서는 유일하게 김락훈 셰프가 평창동계올림픽 성화 봉송에 참여했다.
“솔직히 성화 봉송은 하고 싶었어요. 인생에서 의미 있는 한 페이지잖아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최초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미국 선생님들에게도 김밥과 관련한 강의를 해주고 왔습니다. 미국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비빔밥집이 아주 많아요. 그런데 미국 선생님들에게 비빔밥이 아닌 김밥으로 한국 음식 관련 강의를 해온 지가 벌써 4년이나 됩니다. 미국 교육국에 정식으로 등록한 한국 요리 체험 교육도 바로 김밥입니다. 그 전에도 누군가 한국 음식을 가르쳤겠지만 미국 공식 기록에는 음식 체험으로 배운 한국의 첫 요리가 ‘김밥’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흠 잡히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다
놀라운 점은 우리나라 한식 분야에도 명망 있고 이름 있는 요리사가 있을 텐데 김락훈 셰프가 그들을 대신해 국가를 대표하고 신나는 한판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누구의 제자 혹은 정통성을 따져 묻기 좋아하는 한국 사회. 궁중 요리도 전통 한식도 아닌 김밥으로 세계 속에 한국 음식을 알리고 다닌 셈이다. 시기나 질투를 받지는 않았을까?
“저는 계파 같은 거 없잖아요. ‘넌 누구니? 쟤는 뭐야?’ 한마디로 이런 거였죠. 김밥 셰프라고는 저밖에 없고 이래라저래라 하기도 뭣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살펴만 봤는데 제가 자리를 지켜냈잖아요. 수면 아래에서 쭉 보고 있다가 지금은 응원도 해주시고, 잘하고 있다고도 말씀해주십니다. 한 3년 전부터인 거 같은데 이쪽 업계 분들은 처음에 제가 이러다가 말겠거니 생각했답니다. 지금은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도 해주십니다.”
사실 잘나간다는 말을 듣고 있을 때 자칫 큰 코를 다칠 뻔도 했다. 하나밖에 없는 김밥 셰프이니 김밥 체인 사업을 해보자는 제안도 있었다. 구체적인 가능성도 열려 있었지만 서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멈췄다. 주위 사람들도 말렸다. 섣불리 결정을 내렸다가는 낭패 볼 것이 뻔했다. 그 또한 제대로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다.
“잘 보고 길을 걸어온 걸까요? 원맨쇼만 하면서 온 건 아닌지. 망가지면 한순간에 무너지고 나쁜 평가를 받게 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사업적으로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 편입니다.”
팜파티로 농촌과 도시 유통망을 좁히다
김락훈 셰프는 김밥 안에 들어가는 식재료에 관심을 갖고 전국의 농작물과 농민을 연계하는 일을 벌이고 있다. 한국벤처농업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는 이유도 농민들과의 교류 목적 때문이다.
“김밥 안에 들어가는 식재료를 다양화하려면 현실적으로 농민과의 접점이 필요하잖아요. 식재료는 농민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김밥이든 건강한 음식을 대접하는 한식집이든 농촌에서 식탁까지 안전한 먹거리가 유통될 수 있는 매개체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 운동의 일환이 제가 4년 동안 우리 농민들과 함께하고 있는 ‘팜파티’인 것이죠. 여기에 참여하는 농민들은 팜파티 셰프가 되는 것이고요.”
지금까지 국내외 박람회와 각종 행사, 파티를 하면서 쌓아온 모든 노력을 농민의 자립과 건전한 먹거리 유통망을 다지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김락훈 셰프의 계획이자 바람이다. 올해는 외국 활동을 멈추고 한국에 머물면서 농민들과 함께할 사업과 관련해 진지하게 구상 해볼 생각이다.
“요리를 통해 농업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농민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매개체도 필요하고요. 말하자면 한국벤처농업대학교 같은 그림도 필요하고, 요리를 할 줄 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판로도 필요하죠. 김밥은 제 스타일로 콘텐츠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따라만 와주셨으면 합니다.”
자신을 농민 삐끼(?)라고 불러도 좋단다. 생산자로서 농민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장을 열어주고 싶다고 했다. 7cm 내외 동그란 김밥 안에서 마치 우주를 발견한 사람처럼 농민 이야기에 신이 난 김락훈 셰프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일을 벌이고 한식 세계화를 위해 뛰고 싶어요. 지금 저와 함께하는 농민, 그분들이면 됩니다.”
1박 2일 짧은 일정의 후쿠오카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놀이였다. SNS를 통해 ‘북앤베드’라는 호스텔을 처음 보았을 때 어릴 때 내가 꿈꾸던 다락방 같아 마음이 끌렸다. 서가로 둘러싸인 침대 공간은 책을 좋아하는 나의 로망이다. 궁금한데 한번 가볼까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여행을 계획했다. '북앤베드'에서의 하룻밤이 여행 목적이었다.
프로모션으로 저렴한 가격에 항공권을 샀다. 초저가 여행의 좋은 점은 본전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저렴한 항공권을 사면 관광을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다. 특색있는 카페에 앉아 창밖을 보기만 해도 즐겁고 맛있는 밥을 먹으면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어떤 경우든 여행이 만족스럽다. 여행의 기름기를 쫙 빼고 이웃 도시 놀러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올 수 있다.
‘푹신푹신한 매트리스도 없고 따뜻한 깃털 이불도 없다. 잠자기에 편한 환경은 없지만, 독서를 하다가 잠드는 행복한 ‘자는 순간’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북앤베드 홈페이지에 쓰여 있었다. 잠자는 서점이라니, 얼마나 멋지고 마음에 드는 콘셉트인지 보자마자 1박에 4300엔짜리 혼성 도미토리룸을 예약했다. 알고 보니 SNS에선 이미 뜨거운 곳이었다. 도쿄에서 첫선을 보인 후 교토에 문을 열었고 세 번째로 후쿠오카에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2층 침대는 오르내리기가 불편하다, 방음이 제대로 안 돼 소곤거리는 말소리까지 다 들린다, 너무 좁다 등의 후기를 보고 특별한 경험을 위해서 1박만 하자고 결정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1박 2일이다. 하룻밤이니 사다리로 2층을 오르내리거나 방음이 제대로 안 된다거나 하는 불편함은 즐겁게 감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진에서 본 것처럼 책장 속에 독립된 공간이 있다. 2층 침대가 배정되어서 사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는데 괜히 웃음이 났다. 커튼으로 문을 닫으니 그야말로 다락방처럼 아늑한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그 속에서 책을 읽다가 잠들 수 있다.
침실에 커튼이 쳐져 있으면 그곳에 사람이 들어있는지 아닌지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유심히 보면 보인다.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있으면 그 안에 사람이 없을 확률이 높다. 아무렇게나 벗어진 슬리퍼가 사람이 있다는 표시다. 또 사람이 있으면 커튼을 열어놓기도 한다. 그런데 커튼을 열어놓은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다. 이 호스텔엔 일본사람과 한국 사람이 반반인 것 같다. 하기야 서양사람이 이렇게 작은 숙소에 들어올 수 있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늦은 밤이 될 때까지 소파에서 책을 읽었다. 인테리어 잡지나 만화 에세이 같은 책들이 책장을 가득 채웠는데 일본어는 물론 한국어로 된 책도 보였다. 하루키의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와 '하루키 레시피'를 집어 들고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책으로 한껏 멋을 낸 세련된 실내에는 적당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작은 공간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잠자리를 둘 수 있는지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래층에 4개 위층에 네 개 총 8개의 침대가 있다. 이건 내가 보는 쪽만 생각할 때 그렇다. 반대편에도 똑같이 있으니 모두 16개다. 그리고 2인용 침대도 있으니 20개가 넘는 침대가 있다는 건데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들 정도다. 또, 그렇게 많은 사람이 투숙하고 있는데 도서관처럼 아주 조용하다는 점도 놀라웠다.
사람들 자취를 찾아보기 힘든 곳이지만 누군가 있음은 소리로 감지된다. 발소리에 이어 부스럭거리는 쇼핑봉투 소리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소곤대는 소리까지 정겹게 들린다. 침대로 들어가 '라오스엔 대체 뭐가 있는데요'를 마저 읽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이어폰을 깬 채 잠이 들었는 데도 불편한 지 모를 만큼 달게 잤다.
‘북앤베드’에 있는 동안 나이 든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래도 불편하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고 특별한 경험을 선호하는 여행자들이 모였을 뿐이니까. 시니어도 젊은이들처럼 SNS에서 인기 있는 힙한 장소를 찾아다닐 수 있다.
패키지 해외여행을 다니다 보면 효도 관광으로 온 사람들이 종종 있다. 자녀들이 부모들의 회갑이나 칠순, 결혼기념일 선물로 여행사 프로그램에 돈을 내는 것이다. 그중 중국 상품이 한 사람당 100만 원 내외로 저렴해 인기 있다. 비행기 탑승시간도 유럽이나 미국, 호주 등은 12시간 내외지만, 중국은 두세 시간이면 된다. 음식도 무난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체력이다. 노인들은 체력이 약하기 때문에 효도관광이 자칫 극기 훈련이 될 수 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여행의 즐거움보다 고생이 될 수도 있다.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러우면 낙상 사고도 일어날 수 있다. 이는 뼈가 약한 노인들에겐 큰 위험이다.
한국인에게 인기 있는 중국 여행상품으로 백두산 관광과 장자제(張家界) 여행이 있다. 실제로 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백두산은 고산이니 노인들에게는 힘든 코스라며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백두산 서쪽으로 올라가는 코스는 1442개 계단으로 다소 힘겨울 수 있으나 계단의 경사도가 낮아 비교적 쉽게 올라갈 수 있다. 정 힘들면 가마꾼에게 신세를 지는 방법도 있다. 북쪽 코스는 거의 천지 부근까지 봉고차가 올라간다. 그래서 힘들 것이 없다. 다만 공항에서 백두산까지 가는 길이 멀어 버스를 오래 타는 것이 고역이다. 어느 비행장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대련, 심양, 장춘비행장에서 가는 코스는 버스를 5시간 이상 타야 한다. 가장 먼 대련공항에서는 8시간가량 버스로 가야 한다. 그나마 연길이 3.5시간으로 가장 짧다. 그러므로 백두산 관광은 버스 타는 시간이 긴 것을 빼면 겁먹지 않아도 된다.
장자제도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가는 곳 중의 하나이다. 가이드 말로는 한 해에 한국인 30만 명이 다녀간다고 한다. 케이블카,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시설이 잘되어 있어 별로 걸을 일이 없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시내 한복판부터 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타면 올라가는 것은 문제가 없다. 그러나 정상에서부터 걸어서 내려오는 코스가 만만치 않다. 워낙 고산이라 계단이 많기 때문이다. 옵션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협곡부터 원가계(袁家界), 십리화랑(十里畵廊)을 가는 날은 자그마치 3만 보를 걷는다. 국내에서 평지를 걷기에도 어지간한 체력으로는 힘든 상당한 운동량이다. 비 오고 너무 덥거나 추우면 더 고역이다. 중간에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모노레일도 타지만, 걷는 코스도 많다. 체력이 약한 노인들은 다음 코스는 생략하자거나 쉬고 싶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관광지들은 다른 관광객들도 많이 몰려 부득이 새벽 6시부터 강행군을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전에 아침 식사를 끝내야 하므로 바쁘다. 무거운 짐을 끌고 거의 날마다 숙소를 이동하는 일도 쉽지 않다.
저가 여행 상품들은 비행기 출발 시간이나 도착 시간도 새벽 시간이거나 아주 늦은 시간인 경우가 많다. 정상적인 활동 시간이 아니므로 바이오리듬이 깨진다.
진정한 효도 관광이 되려면 자녀들이 동반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힘든 일을 도와주고 체력이 모자라 단체로 행동하기 어려우면 따로 조치를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인들에게 해외 관광은 어쨌든 만만치 않다. 여행도 다리 튼튼할 때 다녀야 한다는 말이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