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 이효석(可山 李孝石)의 단편소설 의 주 무대로 알려진 강원도 평창군 봉평. 이효석의 고향이기도 한 봉평은 매년 가을이 찾아오면 메밀꽃이 활짝 펴 수만 평의 메밀밭을 하얗게 물들인다. 한때 수입산 메밀에 밀려 사라질 위기도 있었지만 2002년 ‘이효석 문학관’이 개관되면서 다시 한 번 더 흐드러지게 그 꽃을 피우게 됐다.
소설가 이효석은 1907년 출생해 1942년 결핵성 뇌막염으로 36세의 나이로 단명했다.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경성농업학교에서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그는 30세가 되던 해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거취를 평양으로 옮겼다. 이때 이 탄생했다. 이후 , , 등을 발표하며 ‘우리 문단에서 가장 참신한 언어 감각과 기교를 겸비한 작가’라는 평을 받았다.
이효석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문학관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평창IC에서 빠져나와 약 10분간 달리다 보면 양옆으로 봉평에서 가장 맛있는 집이라며 현수막을 내건 음식점이 줄지어 있다. 맛집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효석을 기념하는 가산공원과 이효석 생가가 위치한 남안동을 이어주는 남안교를 건너자 오른쪽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효석 문학관이 어느 새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대표적 문학작품 제목이 새겨진 책 모양의 문학관 입구가 인상적이다.
들어서자마자 이효석의 연보가 펼쳐진다.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간략한 설명과 함께 놓인 사진 자료는 그의 생애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깔끔하게 교복을 차려입은 이효석의 학창 시절 사진과 단란한 가족사진이 인상적이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1930년대 이효석의 집필 공간을 재현한 코너가 눈길을 끈다. 피아노와 축음기도 놓여 있고 그 뒤로 보이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이 이국적이다. 그 시절에 커피를 즐겨 마시고 빵에 버터를 발라 먹었다고 하니 이효석이 서양문물에 얼마나 개방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생전 활약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육필 원고, 영화 의 대본 등 유족과 연구자들이 기증한 흥미로운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문학관 밖으로 나가면 산책길과 더불어 이효석의 좌상을 볼 수 있다. 비록 조각상이긴 하지만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여분의 의자도 마련되어 있다. 자세한 안내를 원하는 방문객을 위해 문화해설사가 들려주는 ‘이효석 문학관 해설’ 서비스도 제공한다. 문학관 홈페이지에 있는 이메일 주소로 신청서를 보내거나 전화로 예약 가능하다.
의 주인공이 되다
문학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봉평 읍내는 그야말로 의 배경 그 자체다. 봉평장터 주위로 큰 마트가 3개나 생겼지만, 아직도 2·7일이면 봉평장이 열린다. 문학관에서 장터까지는 걸어서 약 15분. 소설 속 주인공 허생원이 되어 메밀밭과 복원한 물레방앗간을 구경하며 장터까지 걸어가볼 것을 추천한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 中)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밭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면 9월에 방문하기를 권한다. 7월 초에 심은 메밀은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8월 하순쯤 꽃을 피우기 시작, 9월 중순까지 봉평 일대를 하얗게 수놓는다.
관람 정보
주소 강원 평창군 봉평면 효석문학길 73-25
전화 033-330-2700
관람 시간 09:00~17:30 (비수기)
휴관일 매주 월요일, 명절
입장료 성인 2000원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에서 올해 말까지 영국 테이트미술관 소장품인 누드 전시회를 한다고 해서 다녀왔다. 누드 전시회라 하니 조각같이 아름답고 풍만한 여인의 몸이 상상됐다. 즐거운 기대를 하며 삼총사 친구들과 만날 약속을 했다. 일교차가 심해 아침저녁으론 서늘하지만 한낮에는 아직 햇볕이 강렬했다.
테이트 명작전 ‘누드’는 영국을 대표하는 국립미술관인 테이트 미술관 소장품 중, 18세기 후반부터 현대까지 인간의 몸(누드)을 주제로 한 거장들의 회화, 조각, 드로잉, 사진 등 120여 점을 엄선해서 보여주는 전시회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피카소와 마티스, 르누아르, 드가 등 유명 거장들을 비롯해 초현실주의 및 현대미술 대표 작가인 만 레이, 막스 에른스트, 프랜시스 베이컨, 루시안 프로이드, 루이스 부르주아, 데이비드 호크니 등 영국이 자랑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특히 한 번도 유럽 대륙을 떠나 전시한 적이 없었다는 오귀스트 로댕의 대표작 ‘키스’는 대리석 원본 조각작품이 아시아에서 최초로 전시되었다는데 무게가 3톤이나 되어 1층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우리 삼총사는 입구부터 찬찬히 감상하기 시작했다. 작품 중엔 너무 사실적인 모습들도 있어 눈 두기가 부끄러운 그림도 있었지만 대부분 아름답고 탄탄한 몸을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같이 간 친구들은 풍만한 여성의 누드를 보며 동질성이 느껴진다며 웃기도 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모두 탄력적인 몸의 곡선을 자랑했으며 한 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중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작품을 모범으로 한 고전주의 작품 ‘프시케의 목욕’이 특히 필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자연미를 강조한 작품도 있었으며 물질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항하는 인간 내면의 세계, 상상력과 감각의 세계를 탐구한 신화와 전설, 불안과 공포, 꿈과 무의식 같은 주제를 표현한 작품도 있었다.
상징주의의 작품인 ‘이카루스를 위한 애도’는 한동안 필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탄력적인 근육을 가진 아름다운 청년이 활짝 펼쳐진 날개 위에 누워 있고 천사인 듯한 아가씨들이 슬픈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날개를 달고 태양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듣지 않은 채 하늘로 높이 비상하는 이카루스를 떠올려봤다. 그리고 태양의 뜨거운 열에 밀랍이 녹아 추락하는 이카루스의 모습도 상상해봤다. 작가가 날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꿈과 욕심, 떠오름과 추락이라는 매혹적인 소재로 만들어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상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사실주의, 표현주의의 작품이 나뉘어 우리 삼총사의 발걸음을 끌어당겼다. 뱀의 유혹에 빠져 아담에게 사과를 권하는 이브를 그린 작품 ‘유혹’도 멋졌다. 이 작품의 한쪽 편에는 이브의 자리를 남겨두고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 서면 누구든 아담을 유혹하는 이브가 된다. 매우 재미있는 팬서비스였다. 필자도 엉거주춤 앉아 아담을 유혹하는 이브가 되어봤다. 12월까지 전시하며 흥미로운 작품이 많으니 우리 시니어들도 햇볕 좋은 날 좋은 친구와 함께 아름다운 누드를 감상하러 가보시라 권하고 싶다.
‘세계여성문학관’은 2000년 11월 여성 문학 관련 연구 지원을 위해 숙명여자대학교 도서관 내에 설립됐다. 도서관 안에 문학관이라니 처음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도서관(Library), 기록관(Archives), 박물관(Museum)의 합성어 ‘라키비움’인 세계여성문확관은 ‘라키비움’의 독특한 특성을 살려 여성 문학 연구를 지원하며 다양한 기획전과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일명 ‘막장’ 드라마계의 3인방으로 불리는 작가 문영남, 작가 임성한, 작가 김순옥.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여성 작가라는 점이다. 여기에 , , 등 많은 드라마를 흥행시키며 드라마 작가로서 한 획을 그은 노희경도 있다. 그야말로 여성 작가의 전성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문학사의 주류에서 여성 작가들은 소외되어왔다. 엄청난 변화임이 분명하다. 여성 문학이 이렇게 발전 가능했던 이유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던 시절에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펜을 쥐었던 여성 문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여성문학관’은 바로 이들의 발자취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곳이다.
숙명여자대학교 도서관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으면 세계여성문학관으로 들어가는 문을 바로 찾을 수 있다. 그 문을 열면 약 10만3000권의 세계여성문학 작품으로 가득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2층에 마련된 갤러리는 상설 전시와 기획 전시로 꾸며져 있다.
여성 문인들의 문학작품이 한곳에
1층을 빼곡하게 메운 서가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장서(藏書)가 여성 문인의 이름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이다. 방문객이 관심이 있는 작가를 서가에서 찾으면 그 작가의 다양한 문학작품을 한꺼번에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서가 옆과 뒤쪽으로 마련된 책상을 이용하자. 이곳에 앉아 세계여성문학관 내에 진열된 도서를 얼마든지 꺼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문학작품으로 빼곡히 채워진 아래층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다 지루해질 쯤 2층으로 가보자.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성 문인들이 발표한 작품집의 초판본과 애장품을 상설 전시해놓은 갤러리를 만날 수 있다.
올라서자마자 벽면에 부착되어 있는 동판이 시선을 끈다.
선정위원회가 고심 끝에 선정한 23인의 세계 여성 문인의 사진과 명문구로 꾸민 것이다. 최명희, 박완서, 박경리 그리고 제인 오스틴 등 여성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들의 흔적을 감상할 수 있다. 동판 아래에는 한국 문학 초판본이 연도별로 구분, 전시되어 있고 바로 맞은편엔 외국 서적 초판본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이곳에서 1층을 내려다보면 특별한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서가 위로 쓰인 문학 작품의 글귀들이다. ‘주요 문인 기증코너’에선 의 소재가 된 남편의 모자, 즐겨 쓰던 서예도구, 찻잔 등 김남조, 박완서, 한무숙의 작품에 드러난 소재들과 작가들이 평소 아꼈던 애장품을 볼 수 있다.
교수들이 직접 추천하는 책
5월부터는 ‘내 인생의 행복한 책읽기’를 주제로 새롭게 기획 전시가 이뤄지고 있다.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들이 직접 참여해 내놓은 기증품, 애장품, 추천도서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이번 기획전은 내년 4월 말까지 이어된다.
숙명여자대학교 중앙도서관 학술정보서비스팀 박성희 부장은 “이번 전시를 마친 뒤 시인 기념전이나 학생들이 꼽은 ‘내 인생의 책’을 모아 전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관람 정보
주소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 47길 100
전화 02-710-9710
관람시간 학기 중 09:00~19:00 (평일) ~15:00 (주말) / 방학 중 09:00~17:00 (평일) ~12:00 (주말)
휴관일 일요일 및 법정 공휴일
입장료 무료
그녀들은 신인 걸그룹 같았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자기 장기를 펼쳐 보인다. 뭘 그리 보여주고 싶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사하기 바쁘다. 만화 그리기에 푹 빠져 결국 그룹을 결성해버렸다는 시니어 만화 창작단 ‘누나쓰’. 잠깐 동안의 취미거리로 잊혔을지 모를 노인복지관의 프로그램으로 알게 됐다는 만화. 이제는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한 부분으로 만화가 자리 잡았단다. 당돌, 저돌, 돌격 앞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시니어 걸크러시와 한바탕 떠들었다.
요즘 내가 제일 잘나가!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의 카툰캠퍼스 사무실. 만화를 매개로 한 교육 사업을 하는 이곳은 ‘누나쓰’가 만화를 배우고 창작활동을 하는 공간이다. 최근 ‘누나쓰’ 멤버의 활동상이 인터넷이나 매체를 통해 조금씩 알려지면서 미디어와의 접촉도 많아졌다. 취재가 있었던 8월 중순에도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팀이 다녀갔다. 카메라 앞이 낯설 법도 한데 곧바로 이어지는 인터뷰에 임하는 모습이 전문 만화작가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누나쓰’는 그럼 어떤 시니어가 모여 탄생했을까?
노영자 부천시오정노인복지관에서 ‘시니어 만화창작교실’이라는 수업을 받았어요. 기초반 3개월을 거쳐서 심화반 3개월, 총 6개월이요. 처음에는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너무 재미있었고 선생님들 열의가 대단하셨어요. 수업에 빠진 적도 없어요. 수업이 다 끝나고 나니까 너무 아쉬웠어요. 그림 좀 그릴 만하고 관심이 좀 싹트려 할 때쯤 과정이 끝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 맞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와서 사정을 했어요. 우리 버리시지 말라고요. 옷자락 붙잡고 사무실까지 쫓아갈 거라고 했어요(웃음). 만화는 아직 깊이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뭐든지 상상만 하면 꿈도 그릴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맘대로 할 수 있으니까 좋습니다.
2014년 서울문화재단 후원으로 카툰캠퍼스가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진행했던 만화 자서전 교육이 ‘누나쓰’가 생겨난 배경이 됐다. 기초과정과 심화과정으로 나눠 체계적인 만화 그리기 작업을 2년간 진행했다. 만화자서전을 넘어 창작 영역에도 재능을 보이는 시니어를 발굴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 후원으로 부천시오정노인복지관에 교육의 장을 옮겨와 6개월 과정의 교육을 이어갔다. 만화 교육을 다 마치고 못내 아쉬웠던 열혈 시니어가 카툰캠퍼스 사무실로 찾아와 만화를 배우고 싶다며 애원을 했다. 새로운 세상에 눈뜬 시니어를 외면할 수 없어 카툰캠퍼스는 자체적으로 만화에 관심 있는 시니어 7명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왁자지껄 개성 강한 시니어 카툰 걸크러시 ‘누나쓰’가 지난해 7월 15일 결성! 카툰캠퍼스도 ‘누나쓰’를 만나면서 시니어 교육에 보다 더 중점을 두고 있단다.
김경자 작년 10월에는 빼꼼공원(경기 부천시 역곡동)에서 ‘누나쓰가 간다’라고 쓰인 현수막을 걸고 주민들 캐리커처를 그려드리기도 했어요. 12월에는 작품집 을 냈고 한국만화박물관에서 전시회도 했어요. 아동센터, 복지관, 노동복지관 등에서도 캐리커처 봉사를 했어요. 다문화 가정 엄마들 얼굴을 그려줬는데 제 생각에는 타국에 와서 가족들이랑 떨어져 사니까 외롭잖아요. 일부러 입술도 빨갛게 그려주고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그려줬어요. 얼굴을 더 화사하고 밝게요.
‘누나쓰’ 인생에 색깔을 입히다
‘누나쓰’는 7명으로 구성됐다. 7명 구성원들은 저마다의 추억과 사연과 꿈을 담아 만화 작업을 한다. 퇴직 교사인 김옥순 작가는 만화를 통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억한다. 어머니는 결혼하고 오래오래 보면서 자식으로서 보답을 했지만 아버지께는 받기만 하고 드리지 못한 마음을 만화를 통해 풀어가고 있다. 취재 날 개인 사정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이춘자 작가는 천재성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만화작가로 성장했고 한 은행 사외보에 인터뷰도 실렸다. 서영희 작가는 만화를 통해 자신의 병을 알리고 힘든 시간을 꿋꿋하게 이겨나가고 있다.
서영희 파킨슨병을 앓고 있어요. 2010년도에 발병했는데 육십이 좀 넘어서 발견했어요. 어느 날 밥을 먹는데 떨리기 시작했어요. 이런 병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정말 머릿속이 하얗게 되더라고요. 고치지 못하는 병이구나 했어요. 제가 처음 파킨슨병 약을 먹으면서 겪었던 얘기를 만화로 그렸어요. 약을 3개월 먹으니까 얼굴이 커지더라고요. 너무 독해서요. 잠만 자고요. 그 이후 약을 또 먹어야 하는데 약만 받아놓고 먹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다리도 떨리고 가족들이 속상해 난리가 났어요. 우울증도 생겼고요. 그러다 큰 병원으로 옮겨 다시 검사하고 약을 바꿨더니 괜찮은 거예요. 어차피 치료받을 생각이면 마음을 바꾸자! 치료를 받으면서 감사의 씨앗을 찾고, 울고불고하면서 짜증내고 화내는 대신 도화지에 다시 그림을 그리자고 생각했어요.물론 재활을 염두에 두고 하는 활동은 만화 외에도 많아요. 합창, 핸드벨, 우쿨렐레, 난타 등이요.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만화를 그리는 동안 제 손이 떨리지 않아요. 밤 9시면 자던 사람이 새벽 2시고 3시고 책상 앞에 앉아 있기도 해요. 그림을 그릴 때마다 평온이 찾아오는 느낌이거든요. 요즘에는 음식 만화를 그리고 있어요. 제가 요리를 좋아하는데 제 레시피를 모아서 만화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조금 늦게 ‘누나쓰’ 멤버에 들어온 이영희 작가와 차영순 작가 또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차영순 작가의 경우 5년간 다져온 사진 촬영 실력으로 멤버들의 사진을 도맡고 있다. 누나쓰 멤버들은 처음 시작할 때의 작품과 지금 작품을 보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성장한 모습에 놀랍다고 입을 모은다. 앞으로 만화 박람회에도 나가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또 박람회에 온 관객들 얼굴도 그려주고 봉사도 많이 하고 무엇보다 남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 ‘누나쓰’는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 스토리펀딩을 하고 있다. ‘누나들의 밥상’이라는 사연이 있는 이야기를 담아 인터넷에 연재 중이다. 시니어가 살아온 옛 추억이 담긴 이야기도 실리고 있다. 격주로 누나쓰 멤버가 한 작품씩 쓰고 있고 10월에는 이 글들을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할 계획이다. 아직은 그저 색을 칠하고 자신의 얘기를 하는 정도라 말하지만 시니어 세대가 관심 가져볼 만한 무한의 장이 만화가 아닐까. 아이가 좋아하는 전래동화는 시니어의 입을 통해야만 그 맛이 나고 한결 담백하다. 아이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만화 영역에는 늘 시니어의 따뜻한 이야기도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었다. ‘누나쓰’라는 이름을 걸고 시니어 프로만화가로 제대로 거듭날 그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 exhibition
무민원화전:
Moomin Original Artworks
일정 9월 2일~11월 26일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핀란드 화가 토베 얀손(Tove Jansson, 1914~2001)의 손에서 탄생한 ‘무민(Moomin)’의 70여 년 연대기가 펼쳐진다. 무민은 1945년 얀손이 직접 글을 쓰고 삽화를 그린 라는 소설을 시작으로 만화,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전 세계 대중에게 알려졌다. 작가가 직접 그린 원화와 더불어 저작권자(얀손의 조카 소피아 얀손)가 소장한 미공개 작품과 오브제까지 총 35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무민캐릭터스, 핀란드 탐페레무민박물관, 헬싱키시립미술관, 헬싱키연극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던 주요 작품들이 이번 국내 첫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는다. 총 7개의 섹션으로 구성되며, 무민 라이브러리, 무민 상영관 등 관람객이 직접 작품을 체험해볼 수 있는 참여 공간도 함께 마련된다.
The Selby House:#즐거운 나의 집
일정 10월 29일까지 장소 대림미술관
세계적인 크리에이터들의 개성 넘치는 라이프스타일을 기록하는 아티스트 토드 셀비(Todd Selby, 1977~)의 작품 400여 점을 총망라한다. 이번 전시는 그의 대표 사진들뿐만 아니라, 일상 소재에 위트를 더한 일러스트레이션, 영상, 그리고 새롭게 창작한 대형 설치 작품까지 만나볼 수 있다. 입구부터 시작해 전시장 내부, 정원, 카페까지 미술관 전체가 즐거움으로 가득한 ‘셀비의 집(Selby’s House)’으로 꾸며졌다. 유명인들의 사적 공간을 담은 사진 작품이 주를 이룬다. 작가 특유의 라이프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거실, 침실, 작업실을 재구성한 ‘셀비의 방’과, 그의 유년기 시절 꿈과 기억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셀비의 정글’은 관객이 직접 체험하며 즐길 수 있다.
◇ book
세상과 이별하기 전에 하는 마지막 말들
재닛 웨어 저·인물과 사상사
간호사로서 호스피스 환자를 돌보는 데 헌신해온 저자가 임종 환자를 지켜보며 느낀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삶의 마지막 순간 그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등을 기록했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그 순간은 탄생 못지않은 기적임을 말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서울편
유홍준 저·창비
1993년부터 시작한 답사기가 남도, 제주, 북한, 일본 등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저자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서울의 문화유산과 역사, 인간사 등을 통찰력 있게 바라본다. 종묘와 더불어 창덕궁, 창경궁 구석구석을 살피며 조선시대 건축의 아름다움과 삶의 애환 등을 담았다.
◇ movie
안녕 히어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로, 오늘날의 노동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작품을 연출한 한영희 감독은 “쌍용자동차의 대규모 정리해고 이후 이에 대한 다양한 화두가 한국 사회에 등장했다. 그러나 노동자의 현실은 나아지지 못한 실정이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영화를 통해 우리가 사는 노동과 해고의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고 작품 의도를 밝혔다. 그는 영화의 영문 제목을 ‘굿바이 마이 히어로(Goodbye My Hero)’라고 지으며 “세상의 영웅(노동자)들이 더는 짓밟히지 않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
개봉 9월 7일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한영희 출연 소년 현우, 아빠 정운
치어댄스
일본 최고의 고교 치어 댄스팀 ‘제트’의 실화를 바탕으로, 팀의 탄생부터 이후 3년간의 도전기를 담았다. 인생에서 가장 고민하고 갈등하면서도 아름다웠던 고교 시절을 그린 성장 스토리로 중장년에게는 추억을, 청춘들에겐 용기를 북돋워준다. 한국에서는 로 잘 알려진 히로세 스즈가 몸치 소녀 ‘히카리’ 역을 맡았다. 또 로 익숙한 아마미 유키가 호랑이 선생님 ‘사오토메’ 분을 연기하며 훈훈한 사제지간의 모습을 담아냈다. 출연 배우들이 완벽한 동작을 연출하기 위해 반년 동안 특훈과 합숙 기간을 거친 것으로 알려지며 영화 속 치어리딩 장면이 기대를 모은다.
개봉 9월 21일 장르 드라마 감독 가와이 하야토 출연 히로세 스즈, 토미타 미우, 아마미 유키 등
◇ stage
쿵짝
지난해 초연에서 전 회차 매진 기록을 달성했던 뮤지컬 이 1년 만에 재연을 확정지었다. 주요섭 작가의 단편소설 의 옥희를 주인공으로,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메시지와 삶의 의미에 대해 재조명한다.
장소 동숭아트센터 일정 9월 30일까지 연출 우상욱 출연 윤여진, 권태진, 조현식 등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신념을 지키려는 선생님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 학생들 사이의 대립을 그렸다. 반전을 거듭하는 탄탄한 구성과 빠른 전개, 잘 짜인 논리로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하며 관객을 압도한다.
장소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일정 9월 8일~10월 15일 연출 이재준 출연 우미화, 박정복 등
틱틱붐
배우 이석준, 이건명, 배해선의 데뷔 20주년 기념 공연이다. 성기윤을 비롯해 의 원년 멤버들이 뭉쳤다. 의 극작가 조나단 라슨의 유작으로 작품을 향한 예술혼을 불태운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장소 대학로 TOM 일정 8월 29일~10월 15일 연출 박지혜 출연 이석준, 이건명, 배해선 등
서편제
소리꾼의 길을 찾아나서는 아버지 유봉과 그의 딸 송화, 의붓 남동생 동호의 50년을 넘나드는 소리 인생을 그린다. 판소리 가락과 함께 대중음악 작곡가 윤일상이 제작한 서정적인 록, 발라드 등이 독특한 앙상블을 이룬다.
장소 광림아트센터 BBCH홀 일정 8월 30일~11월 5일 연출 이지나 출연 이자람, 차지연 등
도심 속 공원, 게다가 미술관까지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으로 향하며 마음은 벌써 부자다. 그 푸르고 거대한 녹색 정원을 소유하지 않고도 즐길 수 있음에 만족스럽다.
전시회 NUDE는 영국을 대표하는 국립미술관 테이트 미술관 소장품 중 18C 후반부터 현대까지 “인간의 몸(누드)”을 주제로 한 거장들의 회화, 조각, 드로잉, 사진 등 총 120여 점을 엄선해 전시하고 있었다.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타스, 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드가 드가를 비롯해 테이트 모던이 자랑하는 초현실주의 및 현대미술 대표작가 만 레이, 막스 에론스트, 프랜시스 베이컨, 루시안 프로이드, 루이즈 부르주아 등 영국 현대미술의 대표작가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다.
총 8개의 테마로 나누어 시대에 따라 변화해온 수준 높은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역사적 누드’에는 주로 고대 신화, 성경 및 문학 등의 주제를 다루었고,
‘사적인 누드’에서는 고전과 신화적 주제에서 벗어나 실제의 여성을 그리기 시작했고 ‘모더니즘 누드’에서는 인체를 기하학적 요소로 간소화하며 추상적인 형태의 누드화를 선보이기 시작했고,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 누드’에서는 무의식과 꿈의 세계를 누드로 표현했다. ‘표현주의 누드’는 인간 신체의 물질성을 두터운 마티에르, 추상 페인팅 등의 방법을 통해 실제 살결처럼 나타내는 표현법을 탐구했다.
‘에로틱 누드’에서는 누드의 에로티시즘을 탐구했던 윌리암 터너(JMW Turner)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등의 드로잉이 전시되고 두 사람 이상의 이미지 속에서 누드의 에로티시즘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작품 중에는 공공전시를 위한 것도 있지만 개인의 은밀한 취미를 위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몸의 정치학’에서는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누드는 점점 성性의 정치학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주로 여성의 신체를 묘사하는 성의 권력 관계에 이의를 제기하는 페미니즘 예술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연약한 몸’은 1980년대 들어 대형크기의 사진들이 등장하면서 누드를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로 표현하는 작품들이 많아졌다. 인간 자아의 정체성, 노화 등 변해가는 인체를 현대의 사진예술을 통해 보여준다.
그림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아름답기만 한 누드에서 현실의 아프고 처지고 노화되어가는 자연스러운 누드로의 변천사를 보면서 비로소 본질을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거장들이 예술로 담아낸 인간의 몸은 아름다웠다. 누드를 보고 허리 위가 즐거우면 예술이고 아래가 흥분하면 외설이라는 정의를 일찍이 내려준 분이 있다. 그러나 모호한 흥분의 경계도 있었다. 그림 속의 암시나 여백을 통해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경우도 있지만, 사진을 찍듯 정확하게 묘사하여 들이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무게 때문에 1층에 전시된 오귀스트 로댕의 대표작 ‘키스( The Kiss)의 대리석 원본 조각 작품은 인체의 유연한 움직임을 느끼게 해서 금방이라도 손 하나를 빼어 악수라고 청할 듯했다. 연인들의 열정적인 포옹이 외설적이라 낙인찍혀 오랫동안 빛을 볼 수 없었던 작품이다. 절제할 수 없도록 폭발해버린 열정이 부드럽게 작품전체에서 느껴졌다. 이 작품의 다음 목적지는 일본이라고 한다. 소마미술관에서는 12월 25일까지 전시가 계속될 예정이다.
미술관을 관람할 때마다 느끼지만 마음에 와 닿는 작품 앞에서 머물며 여유롭게 감상하는 것이 작품을 소유한 듯 느낌을 오래 유지할 수 있어 좋다. 이런 걸작들을 내 것 인양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필자는 행복한 부르주아인 양 부유하다.
울란바토르 남쪽 톨 강 자이슨 지역의 복두한산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전형적인 동양 문양의 작은 구름 몇 조각이 떠 있다. 그리고 며칠 전 몽골의 바이칼–홉스굴 호수가 보고 싶다는 손님들과 30시간 여 오가는 길 내내 다양한 구름과 비를 만났다. 다시 말해도 몽골의 하늘은 보면 볼수록, 거기 떠 있는 구름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 멋과 풍이 깊어진다. 지금 차창 너머로 보이는 구름도 한눈에 담지 못할 정도로 웅장하며, 그 깊이 또한 여러 층이다. 색과 채도마저 없는 무채색의 농담만으로도 저토록 다양한 깊이를 보일 만큼 듬직하고 깊숙하다.
새벽 해뜨기 전 울란바토르를 출발, 구불렁 고불랑 울퉁불퉁 홉스굴에 닿으니 밤이다. 배정된 게르에 짐을 풀고 동이 트는 아침을 맞았다. 밤에 가늠되지 않던 호수가 하늘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잘못 보았을까? 호수가 아니다. 하늘이다. 위와 아래로 막연히 갈라진 두 하늘이 하나다. 차이가 있다면 아래 하늘빛이 더 짙고 깊다. 그 두 하늘이 한동안 갈리며 열리더니 위아래의 경계가 흐려지듯 서서히 한 덩이가 된다. 게르에 누워도 천장이 하늘이고, 문을 열어도 하늘이다. 경상남도 크기라는 홉스굴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피부로 느껴진다. 호숫가에 닿으니 온통 하늘이고 구름이니 어찌 하늘과 구름의 에스프리를 얘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하늘과 구름에 빠지지 않으리오? 특별히, 보이는 아름다움으로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얘기하는 사진가라면….
하늘 넓은 몽골에 산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구름 따라 흐르는 의식을 감당하기 어렵다. 차라리 나도 흐른다. 몽골국제대학교에서 사진 강의를 하면서 구름 얘기를 많이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몽골에 오기 전에도 내 사진 강의 목록에는 ‘구름은 언제나 완벽한 균형’, ‘구름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추상과 구름’, 그리고 ‘보들레르의 이방인’이 있었다.
내게 사진을 배운 아내는 미국에서 구름 사진만으로 개인전을 했다. 요즘 우리 부부의 몽골 생활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 창조주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위해 숨겨놓은 여러 장치 중 구름이 단연 최고다. 특별히 아름다움을 찾는 일을 제일로 하는 사람 예술가, 그중에서도 시각 예술가를 위한 최고의 교재는 구름이다. 아름다움에 빠져 아름다움을 탐닉했다는 보들레르는 자기의 부모나 친구… 세상 모든 것들과 비교하며 그의 시 ‘이방인(L′étranger)’에서 노래한다.
… 그래?
그럼 어디에 네 마음이 있니?
내가 사랑하는 것은 저 구름들이야
저 아름다운 구름을 흘러가는 저기 저 구름들을!
풍요로운 뭉게구름, 작은 구름덩이 보래구름, 빛이 닿아 투명해진 구름과 마구 색을 섞어버린 불꽃구름, 한 조각의 떠도는 구름, 쫓고 쫓기는 큰 짐승과 같은 구름, 숨 가쁘게 달려가 자취를 남기지 않는 구름, 밤하늘의 구름, 그림자 같은 구름….
꿈결 같은 청자구름 문양이 휘영청 달항아리 아우라로 떴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서 바라본 작은 피사체가 강하게 시선을 끈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세밀하게 만든 이야기가 있는 조각품이다. 신비롭다는 생각마저 든다. 다시 보아도 여지없는 조각품이다. 잔잔한 물결에 흔들리는 돛단배 위에 뒷머리를 동여맨 고운 아가씨가 수줍은 듯 이름 모를 동물과 속삭이고 있다. 인당수로 가는 심청이의 이야기도 그려진다. 용궁에서 올라온 사자가 심청을 안심시키는 모습이 연상되어서다. 동편에 아침 태양이 슬며시 고개를 내미니 조각의 윤곽은 더 뚜렷해진다.
누가 이 작품을 빚었을까? 봄 여름 가을이 채색한 나뭇잎 한 장에 바람이 드나들며 한 뜸 한 뜸 모양새를 만들었지 싶다. 대추 한 알이 숱한 태양을 먹고 빨갛게 익어가듯 밤낮을 보내며 둥근 선, 직선, 빗금을 따라 조각도를 날렵하게 놀렸다. 칼날이 무뎌지면 아침 이슬에 적셔 날을 세웠을 테다. 산새가 노래하며 힘을 실어 주었다. 간혹 벌레가 힘을 보탰다. 태양이 동에서 서편으로 지고 뜨기를 수십 번, 칠흑 같은 한밤중에도 바람은 쉴 사이 없이 작품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찬바람이 이는 늦가을 어느 저녁 무렵 조각품은 완성되었다. 숲속 갤러리에 전시했다. 지나가는 산새, 바람에 스치며 서로 속삭이는 주변의 나무들이, 동산을 떠오르는 태양이 잠시 발길을 멈춰 감상한다.
자연의 작은 모습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내기를 좋아하는 필자도 운 좋게 이 작품을 발견하였다. 관람객이 되었다. 혼자 보기 아깝다. 늘 함께 하는 카메라의 초점을 작품에 맞췄다. 사진은 일상의 피사체 ‘A’를 ‘B’로 바꾸어 볼 수 있는 시각이 종종 필요하다. 평범한 소재에서 나름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자유로운 영혼도 요구된다. 고정의 관념에서 벗어나는 일탈이 좋은 작품을 만드는 요소다. 낙엽 하나에서 재미난 이야기 한 편을 썼다. “낙엽”이라는 평범한 이름을 붙였다.
(사)한국미술협회가 주관하는 ‘AP21-한중교류 Viva Cruise Arte 2017전’에 이 작품을 출품한다. 한중 호화여객선 화동훼리의 “갤러리 크루즈’ 개관기념으로 100인 한국예술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다. 9월 6일부터 9월 11일까지 화동훼리 선내에 전시된다.
집에서 가까운 올림픽 공원 내 소마 미술관에서 세계적인 누드화 전시가 있다 하여 가봤다. 8월 11일부터 12월 25일까지란다. 모처럼 갔는데 휴관일이 아닐까 걱정되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10월30일까지는 휴관일이 없다고 되어 있어 안심하고 가봤다. 소마 미술관은 종종 가봤는데 휴관일 여부를 반드시 확인하고 가야 한다. 평소에는 여러 가지 기획전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제법 큰 전시회라고 홍보되어 있었다. 입장료가 성인 1만 3000원 청소년 9000원, 어린이 6000원으로 꽤 비싼 편이다. 경로할인이 6000원이다.
운 좋게 필자가 방문한 날에 이벤트가 열렸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카페에서 1만 3000원 어치 이상 음료를 팔아주면 1만 3000원짜리 무료 초대권을 받았다. 이와는 별도로 입장 티켓을 보여주면 구매한 음료 외 아메리카노 한잔을 무료로 받았다.
테이트 미술관은 영국의 국립 미술관이라고 한다. 거기 소장되어 있던 작품 중 누드화를 테마로 하여 피카소, 드가, 르누아르, 마티스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들이 한국에 나들이 왔다. 누드화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는데 누드는 19세기~20세기 작품 위주이다. 그전의 그림이나 조각품은 주로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심으로 누드를 등장시켰었다. 그러나 18세기에는 누드를 아카데미 교육의 일환으로 채택했고 테마는 역시 고대신화, 성경, 문학 작품 등의 상상의 주제를 사용했다. 이것을 역사적 누드라고 분류했다. 20세기 들어 사적인 누드라 하여 목욕하는 여인, 욕조 안의 여인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근대에 들어 모더니즘 누드라 하여 입체주의 표현주의 미래주위라 불리는 방식의 누드가 등장했다. 1920년대~1940년대까지를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 시대라고 하여 누드를 꿈의 세계와 연관시켜 표현했다. 1950년대는 더욱 발전하여 표현주의 시대라고 한다. 피카소가 등장하고 나서 에로틱 누드 시대가 등장한다. 20세기 중반에 들어 여성 화가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그동안 남성 화가가 그리는 여성의 몸에 대항하여 소년부터 시작하여 남성의 누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는 몸의 정치학 시대라 한다. 1980년대 들어서는 누드 장르에 사진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연약한 면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누드를 연약한 몸으로 보는 시대 조류이다. 이렇게 8가지로 구분하여 전시실을 배정했다.
테이트 미술전의 하이라이트는 3톤이 넘는 대리석 조각 ‘키스’이다. 로댕 작품이다. 특별 공간에 조명을 받으며 전시되어 있다. 한 부호의 요청으로 만들었는데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에로틱하다 하여 오랫동안 빛을 못 보던 작품이란다. 조각상의 모델도 불륜 사이라서 이 장면 때문에 죽음을 면치 못했다는 설명이 있다. 오늘날 이 작품은 여러 예술품의 모델이 되고 있지만, 초기에는 주요 부위를 천으로 가리고 전시하는 등, 우여 곡절이 많았던 작품이라고 한다.
누드라 하면 음탕한 시선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웬만한 누드화는 집에 걸어 놓기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화가들의 작품이라고 하니 예술적인 시선으로 보게 된다. 인간의 누드가 가장 아름다운 소재라 하지 않는가? 그렇게 보면 누드도 모두 숭고하게 보인다. 누드에서 발전하여 남녀의 성교 장면을 스케치 한 작품도 따로 있는데 그 전시실에는 미성년자들은 못 들어가게 통제한다. 인상적인 작품으로, 누드를 말로 풀어 단어를 나열한 작품도 있었다. 이카루스의 죽음을 표현한 작품도 좋았다. 누드 작품 100여점을 보고 났는데 성적인 욕망이 전혀 안 생긴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올림픽공원의 푸른 녹음을 보며 진정시켜야 한다.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화가인 엄정순(57) 디렉터는 오래전부터 이 질문이 화두였다. 보이는 것 이면에 무언가 있을 것 같은데 이해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답답함. 엄 디렉터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즐거움, 그 밖의 세상에 있는 진실과 본질 등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그 생각이 ‘눈을 쓰지 않는 세계’에 대한 관심과 탐험으로 이어졌고 ‘우리들의 눈’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탄생시킨 계기가 됐다.
“시각예술을 하는 작가로서 안 보이는 세계에 대한 탐구는 필연적이었어요. 그 과정에서 시각장애인들과의 미술 작업 또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이는 눈과 보이지 않는 눈이 만나서 다르게 보는 눈 ‘Another Way of Seeing’이 만들어지는 것을 상상했어요.”
엄정순 디렉터가 이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지는 벌써 20년이 됐다. ‘우리들의 눈’은 시각장애인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공유하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프로젝트 그룹이다.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는 눈, 보이지 않는 눈, 모두가 우리들의 눈이란 뜻이 담겨 있다. 미술에서 가장 멀리 있었던 시각장애인과 가장 가까이 있는 시각예술가들이 함께 미술 작업을 하고 서로 다른 눈을 존중하면서 서로의 세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시각장애인들이 미술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중심이 맹학교 미술 수업이다. 예술가들이 직접 맹학교로 찾아가 시각장애 학생들과 창의적인 융·복합 수업을 하는 것이다. 드로잉, 조소 등 미술 수업 외에도 사진작가와 함께하는 사진 수업, 요리연구가와 함께하는 미각 수업, 조향사와 함께하는 후각 수업 등 학생들과 함께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되묻는, 예술적 시도를 했다. 그리고 예술적 역량을 가진 아이들을 발굴해 미술대학에도 보내고, 작가 인큐베이팅 프로젝트로 시각장애인 예술가 성장도 지원하고 있다. 미술 수업에서 작가 데뷔까지 시각장애인들에게 열려 있는 미술 교육의 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시각장애와 미술을 주제로 한 전문 공간인 ‘우리들의 눈 갤러리’도 운영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정보와 도움을 주는 복지 차원만이 아닌 예술적 접근을 통해 서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전시, 교육, 출판, 워크숍 등을 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의 이미지 학습을 위한 점자촉각아트북도 제작한다.
“우리 주변에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이미지를 담고 있는 수많은 도서들이 있는데 시각장애 학생들은 그런 세계에서 너무 멀리 있어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들도 소통을 위해 공동으로 쓰는 이미지를 배우고 즐기는 다양한 통로가 필요해요.”
‘우리들의 눈’ 내의 보르헤스 도서관에서는 다양한 수작업 샘플북을 제작해 보급에 노력하고 있다.
미술 표현 중 시각은 작은 일부
‘우리들의 눈’이 만들어지던 초기에는 시각장애학교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친다는 엉뚱한 발상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있었다.
“생각의 차이는 ‘미술’이란 단어에서 나왔어요. 미술과 그림, 이미지는 보는 것과 연결되는 시각예술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어서 시각장애인은 못 보니까 시각적 표현이 불가능하고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 거죠. 저는 미술, 즉 이미지의 시작은 상상력과 오감의 산물이기 때문에 시각은 작은 일부라고 생각했어요.”
엄 디렉터에게 미술은 시력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였던 것. 여전히 미술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미술은 잠과 사랑처럼 인간의 삶에서 소중한 한 부분이라는 의견도 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미술 교육을 시킨 후 가장 큰 변화는 자신을 표현하면서 성취감, 자존감, 인간으로서의 품위 같은 것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처음에 ‘너를 표현해봐라’ 그리고 ‘그것을 이미지로 보여줘라’ 하고 주문했을 때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은 어려워했고 제대로 못했어요. 미술 세계에서 가장 많이 동떨어져 있던 시각장애인들은 미술은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했고, 또 콤플렉스를 가장 많이 느끼게 하는 과목이었던 거죠.”
그런데 시도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안 된다’고 하고 자신도 ‘못할 거야’라고 했던 무엇을 뛰어넘는 경험이 되었다.
“저는 그들이 느낀 것을 일본의 한 시각장애인이 말했던 ‘미술 수업은 인간으로 사는 품위를 알게 해주었다’는 고백으로 알 수 있었어요. 미술은 논리와 감성의 조화를 배우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게 하는 힘을 갖게 해줘요. 참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미술의 의미를 시각장애인들의 경험을 통해 재발견하고 있습니다.”
미술가들과 사람들의 생각과 표현이 다른 것처럼 시각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깜짝 놀랄 만한 작품을 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저 같은 경우도, 이 작업을 하며 그들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눈빛이 많이 생겼어요. 예술가로 또는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볼 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라며 놀랄 때가 많아요. 일반 예술가들과 달리 대상을 대하는 방식이 매우 적극적입니다.”
사물에 대한 선입견이 적고 촉각, 청각 등 다른 감각으로 사물을 접하다 보니 보이는 대로 이해하는 비장애인들보다 형태와 표현 면에서 창의적인 작품이 많다.
“저희는 창의적 표현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일을 한다고 보면 돼요. 맹학교 학생들이 만든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의 작품들도 그중 하나인데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전형적인 코끼리의 모습은 아니지만 누구라도 ‘코끼리스러움’을 알아차릴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변화를 몰고 온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는 시각장애인과 예술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코끼리를 만지고 표현하는 것을 통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창의적으로 풀어보자는 의도로 기획된 것이다. 2009년 6월, 33명의 인천혜광학교 학생들과 15명의 티칭 아티스트들이 인천에서 광주까지 311.5km 첫 번째 코끼리 로드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네 번 시각장애인들이 직접 코끼리를 만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2012년 7월에는 청주맹학교 학생 8명과 관계자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기 위해 태국 치앙마이에 다녀왔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은 우리의 일상에서 많이 쓰이는 비유잖아요.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보고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인간을 보고 ‘장님 코끼리 만지듯한다’고 하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눈뜬 사람이 사는 세상 어디에나 있는 메타포로 현재까지도 많이 사용되는 비유입니다.”
엄 디렉터는 이 메타포로 아트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지상에서 가장 큰 동물 코끼리를 경험하게 하면서 한눈에 파악이 안 되는 거대한 무엇에 다가가는 상상력과 시각장애 학생들의 부족한 스케일 감각에 도전해보는 한편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창의적으로 풀어보려고 했다.
이 프로젝트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참여했던 맹학교 학생들이 훌쩍 성숙해졌고 ‘우리들의 눈’ 활동도 각종 방송과 언론을 통해 보도되어 더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2009년 시작된 프로젝트가 2010년 7월 TEDxSeoul에서 발표됐고 이 발표를 계기로 2013년 EBS 다큐멘터리 가 방송됐다(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 TV부문 다큐상과 한국피디협회 PD상 수상). 이어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지학사) ‘작문과 화법’에 실리기도 했다. 동물원, 동물보호단체들과의 네트워크도 생겼고, 2015년 ‘코끼리 주름 펼치다 展’으로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 블루메미술관(파주 헤이리) 순회 전시도 했다. 미술 교육과 함께 진행되는 코끼리투어 프로젝트는 12개 맹학교 순회 투어를 계획중이다.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후원으로 운영
비영리 단체인 ‘우리들의 눈’은 소중한 가치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 덕에 운영되고 있다. 기업 후원을 중심으로 매월 소정의 금액을 후원하는 사람들, 매년 바자회를 열어 행사 수익금을 기부해주는 사람들 그리고 각 분야에서 재능기부를 하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20년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어려움이 생겼다. 운영비 지원이 줄어들어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도 잠정 중단 중에 있다. ‘우리들의 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는 의미에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북촌에 갤러리를 열었는데 임대료 때문에 고민이다.
“맹학교에서 진행되는 미술 교육 강사비, 재료비 등 비용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시각장애인들이 개안수술을 하거나 하면 봉사나 후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지만 시각장애인에 대한 미술 교육은 제대로 짐작되지 않아서 그런지 후원이 잘 안 되는 편이죠. 갤러리 장소 또는 후원금을 지원할 수 있는 기업들이 더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국내외적으로도 선례가 드문, 시각장애인과 미술 작업을 하는 ‘우리들의 눈’은 한국 사회에서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생활 정보를 주는 복지적 관점이 아닌 예술적 협업으로 의미를 만들어간다는 것이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어 오해도 많이 샀고 이해받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렸다.
“장애인을 돕겠다는 착한 마음만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수많은 편견과 척박한 물리적 환경을 넘어설 수 있는 예술적 해법이 필요한 일이었어요. 이런 시도에 즐겁게 사심 없이 동참하는 이들을 만날 때 엄청 신이 나죠.”
‘우리들의 눈’이 창설된 지 20년째인 2016년, 그간의 활동 자료들을 정리한 자료집을 만들었다. 이 자료집을 기점으로 20년간 펼쳐졌던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이 대중들과 만나고 우리 사회 속에서 쓸모 있는 문화 예술이 소비되는 방법들을 찾으려고 한다. 그 일환으로 ‘우리들의 눈’은 올해 두 권의 책 출판과 아트상품 제작을 계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