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화가인 엄정순(57) 디렉터는 오래전부터 이 질문이 화두였다. 보이는 것 이면에 무언가 있을 것 같은데 이해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답답함. 엄 디렉터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즐거움, 그 밖의 세상에 있는 진실과 본질 등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그 생각이 ‘눈을 쓰지 않는 세계’에 대한 관심과 탐험으로 이어졌고 ‘우리들의 눈’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탄생시킨 계기가 됐다.
“시각예술을 하는 작가로서 안 보이는 세계에 대한 탐구는 필연적이었어요. 그 과정에서 시각장애인들과의 미술 작업 또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이는 눈과 보이지 않는 눈이 만나서 다르게 보는 눈 ‘Another Way of Seeing’이 만들어지는 것을 상상했어요.”
엄정순 디렉터가 이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지는 벌써 20년이 됐다. ‘우리들의 눈’은 시각장애인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공유하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프로젝트 그룹이다.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는 눈, 보이지 않는 눈, 모두가 우리들의 눈이란 뜻이 담겨 있다. 미술에서 가장 멀리 있었던 시각장애인과 가장 가까이 있는 시각예술가들이 함께 미술 작업을 하고 서로 다른 눈을 존중하면서 서로의 세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시각장애인들이 미술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중심이 맹학교 미술 수업이다. 예술가들이 직접 맹학교로 찾아가 시각장애 학생들과 창의적인 융·복합 수업을 하는 것이다. 드로잉, 조소 등 미술 수업 외에도 사진작가와 함께하는 사진 수업, 요리연구가와 함께하는 미각 수업, 조향사와 함께하는 후각 수업 등 학생들과 함께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되묻는, 예술적 시도를 했다. 그리고 예술적 역량을 가진 아이들을 발굴해 미술대학에도 보내고, 작가 인큐베이팅 프로젝트로 시각장애인 예술가 성장도 지원하고 있다. 미술 수업에서 작가 데뷔까지 시각장애인들에게 열려 있는 미술 교육의 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시각장애와 미술을 주제로 한 전문 공간인 ‘우리들의 눈 갤러리’도 운영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정보와 도움을 주는 복지 차원만이 아닌 예술적 접근을 통해 서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전시, 교육, 출판, 워크숍 등을 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의 이미지 학습을 위한 점자촉각아트북도 제작한다.
“우리 주변에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이미지를 담고 있는 수많은 도서들이 있는데 시각장애 학생들은 그런 세계에서 너무 멀리 있어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들도 소통을 위해 공동으로 쓰는 이미지를 배우고 즐기는 다양한 통로가 필요해요.”
‘우리들의 눈’ 내의 보르헤스 도서관에서는 다양한 수작업 샘플북을 제작해 보급에 노력하고 있다.
미술 표현 중 시각은 작은 일부
‘우리들의 눈’이 만들어지던 초기에는 시각장애학교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친다는 엉뚱한 발상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있었다.
“생각의 차이는 ‘미술’이란 단어에서 나왔어요. 미술과 그림, 이미지는 보는 것과 연결되는 시각예술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어서 시각장애인은 못 보니까 시각적 표현이 불가능하고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 거죠. 저는 미술, 즉 이미지의 시작은 상상력과 오감의 산물이기 때문에 시각은 작은 일부라고 생각했어요.”
엄 디렉터에게 미술은 시력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였던 것. 여전히 미술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미술은 잠과 사랑처럼 인간의 삶에서 소중한 한 부분이라는 의견도 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미술 교육을 시킨 후 가장 큰 변화는 자신을 표현하면서 성취감, 자존감, 인간으로서의 품위 같은 것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처음에 ‘너를 표현해봐라’ 그리고 ‘그것을 이미지로 보여줘라’ 하고 주문했을 때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은 어려워했고 제대로 못했어요. 미술 세계에서 가장 많이 동떨어져 있던 시각장애인들은 미술은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했고, 또 콤플렉스를 가장 많이 느끼게 하는 과목이었던 거죠.”
그런데 시도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안 된다’고 하고 자신도 ‘못할 거야’라고 했던 무엇을 뛰어넘는 경험이 되었다.
“저는 그들이 느낀 것을 일본의 한 시각장애인이 말했던 ‘미술 수업은 인간으로 사는 품위를 알게 해주었다’는 고백으로 알 수 있었어요. 미술은 논리와 감성의 조화를 배우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게 하는 힘을 갖게 해줘요. 참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미술의 의미를 시각장애인들의 경험을 통해 재발견하고 있습니다.”
미술가들과 사람들의 생각과 표현이 다른 것처럼 시각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깜짝 놀랄 만한 작품을 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저 같은 경우도, 이 작업을 하며 그들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눈빛이 많이 생겼어요. 예술가로 또는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볼 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라며 놀랄 때가 많아요. 일반 예술가들과 달리 대상을 대하는 방식이 매우 적극적입니다.”
사물에 대한 선입견이 적고 촉각, 청각 등 다른 감각으로 사물을 접하다 보니 보이는 대로 이해하는 비장애인들보다 형태와 표현 면에서 창의적인 작품이 많다.
“저희는 창의적 표현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일을 한다고 보면 돼요. 맹학교 학생들이 만든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의 작품들도 그중 하나인데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전형적인 코끼리의 모습은 아니지만 누구라도 ‘코끼리스러움’을 알아차릴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변화를 몰고 온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는 시각장애인과 예술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코끼리를 만지고 표현하는 것을 통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창의적으로 풀어보자는 의도로 기획된 것이다. 2009년 6월, 33명의 인천혜광학교 학생들과 15명의 티칭 아티스트들이 인천에서 광주까지 311.5km 첫 번째 코끼리 로드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네 번 시각장애인들이 직접 코끼리를 만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2012년 7월에는 청주맹학교 학생 8명과 관계자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기 위해 태국 치앙마이에 다녀왔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은 우리의 일상에서 많이 쓰이는 비유잖아요.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보고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인간을 보고 ‘장님 코끼리 만지듯한다’고 하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눈뜬 사람이 사는 세상 어디에나 있는 메타포로 현재까지도 많이 사용되는 비유입니다.”
엄 디렉터는 이 메타포로 아트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지상에서 가장 큰 동물 코끼리를 경험하게 하면서 한눈에 파악이 안 되는 거대한 무엇에 다가가는 상상력과 시각장애 학생들의 부족한 스케일 감각에 도전해보는 한편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창의적으로 풀어보려고 했다.
이 프로젝트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참여했던 맹학교 학생들이 훌쩍 성숙해졌고 ‘우리들의 눈’ 활동도 각종 방송과 언론을 통해 보도되어 더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2009년 시작된 프로젝트가 2010년 7월 TEDxSeoul에서 발표됐고 이 발표를 계기로 2013년 EBS 다큐멘터리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가 방송됐다(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 TV부문 다큐상과 한국피디협회 PD상 수상). 이어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지학사) ‘작문과 화법’에 실리기도 했다. 동물원, 동물보호단체들과의 네트워크도 생겼고, 2015년 ‘코끼리 주름 펼치다 展’으로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 블루메미술관(파주 헤이리) 순회 전시도 했다. 미술 교육과 함께 진행되는 코끼리투어 프로젝트는 12개 맹학교 순회 투어를 계획중이다.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후원으로 운영
비영리 단체인 ‘우리들의 눈’은 소중한 가치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 덕에 운영되고 있다. 기업 후원을 중심으로 매월 소정의 금액을 후원하는 사람들, 매년 바자회를 열어 행사 수익금을 기부해주는 사람들 그리고 각 분야에서 재능기부를 하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20년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어려움이 생겼다. 운영비 지원이 줄어들어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도 잠정 중단 중에 있다. ‘우리들의 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는 의미에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북촌에 갤러리를 열었는데 임대료 때문에 고민이다.
“맹학교에서 진행되는 미술 교육 강사비, 재료비 등 비용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시각장애인들이 개안수술을 하거나 하면 봉사나 후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지만 시각장애인에 대한 미술 교육은 제대로 짐작되지 않아서 그런지 후원이 잘 안 되는 편이죠. 갤러리 장소 또는 후원금을 지원할 수 있는 기업들이 더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국내외적으로도 선례가 드문, 시각장애인과 미술 작업을 하는 ‘우리들의 눈’은 한국 사회에서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생활 정보를 주는 복지적 관점이 아닌 예술적 협업으로 의미를 만들어간다는 것이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어 오해도 많이 샀고 이해받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렸다.
“장애인을 돕겠다는 착한 마음만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수많은 편견과 척박한 물리적 환경을 넘어설 수 있는 예술적 해법이 필요한 일이었어요. 이런 시도에 즐겁게 사심 없이 동참하는 이들을 만날 때 엄청 신이 나죠.”
‘우리들의 눈’이 창설된 지 20년째인 2016년, 그간의 활동 자료들을 정리한 자료집을 만들었다. 이 자료집을 기점으로 20년간 펼쳐졌던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이 대중들과 만나고 우리 사회 속에서 쓸모 있는 문화 예술이 소비되는 방법들을 찾으려고 한다. 그 일환으로 ‘우리들의 눈’은 올해 두 권의 책 출판과 아트상품 제작을 계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