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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갈래 물결이 일렁이는 나루’ 삼랑진
- 세 개의 강이 만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삼랑진(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이다. 어린 시절 인근 지역에서 자랐어도 별생각 없이 다녔는데 삼랑진이라는 이름에 이런 아름다운 뜻이 있는 줄 몰랐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부산 구포역에서 대구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갈 때마다 삼랑진역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행정구역상 밀양 내에 있는 읍이지만 당시는 밀양역보다 더 크고 번성했던 곳이 삼랑진이었다. 삼랑진 옛이야기 일제강점기부터 경부고속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삼랑진은 매우 화려하고 번성한 곳이었다. 낙동강을 통해 일본 상선이 삼랑진 포구까지 왔다.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하다 보니, 삼랑진 지역 중심엔 일본인들 관사가 많이 지어져 현재에도 제법 남아 있다. 문화재보존정책 때문에 개·보수를 하지 못해 지금은 아주 초라하고 앙상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데 언젠가는 이 지역의 근대화 문물들은 보수·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삼랑진장에 가자! 삼랑진장은 4일과 9일에 들어선다. 삼랑진이 쇠퇴하면서 시장의 규모도 작아지고 사람 수도 줄었다. 최근엔 마트까지 생기면서 시골 장날의 분위기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삼랑진장은 인근의 김해시 생림면 사람들과 삼랑진 지역의 연세 많으신 분들이 주로 이용한다. 어릴 적부터 발길이 닿은 곳이라 마트를 이용하는 것보다 편해 장을 이용한단다. 어르신들은 마트의 물건보다 찬거리 등을 푼돈으로 흥정하며 살 수 있는 삼랑진장을 좋아한다. 가는 날이 장날 날씨가 매우 추웠다. 삼랑진에는 강바람과 산바람이 아주 매섭게 몰아친다. 도시처럼 바람을 막아줄 건물들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차에서 내려 삼랑진 장터를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장날의 분위기를 느껴봤다. 큰 카메라를 들고 외지인이 이리저리 다니니, 상인들 모두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본다. 오방떡을 구우시는 할머니가 “오늘 방송국에서 촬영하러 왔능교?” 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반갑고 기뻐서 “네~” 하면서 이런저런 말을 더 붙였다. 잡지에 넣을 사진 촬영을 한다고 설명하며 할머니 모습을 찍었다. “찍지 마!” 하면서도 포즈를 잘 잡아주셨다. 추운 날 꽁꽁 얼은 생선을 파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찍으려 하니 할머니가 욕을 하신다. 그래도 상부상조하는 의미에서 4마리에 1만 원 하는 고등어를 사니까, 덤으로 작은 놈 한 마리를 끼워주신다. 고등어를 팔아주니 사진을 찍어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장터에서 파는 생선들은 냉장 시설이 없기 때문에 사계절 내내 냉동 생선을 녹여 손질해 판다. 이 추운 날 장갑도 안 끼고 맨손으로 손질을 하신다. “할머니 장갑 좀 끼시죠?” 하니 “장갑 끼면 잘 안 된다” 하신다. 조용한 시골 장터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있다면 음악 테이프와 CD를 판매하는 트럭이다. 하루 종일 상인들과 손님들에게 최신 트로트를 들려준다. 시대가 변하면서 트로트 노래들도 USB용으로 나온다. 뭔가 하고 둘러보는 사람은 있지만 구입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보니, 물건 파는 사람도 차 안에 들어가 있다. 날씨도 춥고 사람들도 많이 안 다니니 일찌감치 포기한 모양이다. 장터 사람들 삼랑진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젊은 사람에게는 좀 생소한 것들이다. 주로 뜨거운 물에 우려먹는 뿌리 식품이나 보신용 식품이 많다. 우엉과 말린 연근, 둥굴레, 돼지감자 같은 뿌리 식품이 많다. 장날의 자리에는 권리금과 자릿세도 있다 한다. 보통 가게 앞에서 장사를 할 경우엔 상권의 성향과 위치에 따라 자릿세 차이가 있다. 삼랑진장에서 20년 동안 장사를 해온 한 분은 자릿세를 내기 싫어 장터 가장 끝 쪽에 자리를 펴고 물건을 판다. 추운 날이라 구멍 난 깡통 장작불에 손을 녹이며 요기를 하기 위해 고구마 몇 개를 넣어 굽고 있다. 그분에게 연근이랑 우엉, 돼지감자를 1만 원어치씩 구입하고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날씨도 춥고 심심했는데 20분 동안 말동무도 되어주셨다. 해는 점점 저물어가고, 오늘 펼친 물건들 재고가 많이 쌓였는지 상인들은 팔지 못한 물건들이 서로에게 필요하면 물물교환을 한다. 불과 몇십 분 전에 1만2000원에 팔던 김천촌닭을 5000원에 사가라고 한다. 삼랑진은 시내보다 더 빨리 어두워진다. 하루 동안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 사람들의 흔적이 아직도 잔영(殘影)첨럼 남아 있다.
- 2018-02-02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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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신 김금화와 소소한 일상을 나누다
- 예닐곱 어렸을 때부터 아는 소리를 입에 담았다. 열두 살부터 무병을 앓고 열일곱에 만신(萬神)이 됐다. 내림굿을 해준 이는 외할머니였다. 나라 만신으로 불리는 김금화(金錦花·87) 선생의 무당 인생 첫 장을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무당이 된 이후 세상 숱한 질문과 마주한다. 제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만사형통합니까? 크고 작은 인간사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신을 모신 지 올해로 71년. 오늘도 내일도, 어쩌면 죽는 날까지도 끊임없이 질문을 받게 될 만신. 그녀와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신의 목소리를 전해 듣는 거 말고 인간 김금화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2018년 대한민국에 대한 축원은 덤이었다. 너무 시간 많이 빼앗으면 안 돼 만신 김금화 선생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대충 낮 12시 이후다. 공연이 있거나 행사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 오후 12시쯤까지 한나절. 김금화 선생은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 자택이나 금화당(강화에 있는 김금화 선생의 굿당)에서 점(占)을 보러 오는 손님을 맞이한다. 구순을 바라보는 만신이지만 인기는 여전하다. 이른 아침부터 점 보러 온 손님이 집 안에 앉아 있다. 예약 문의전화도 꾸준히 걸려온다. 무복(巫服)에 다양한 무구(巫具, 굿에 사용되는 도구)를 들고 춤을 추거나 작두를 타는 모습만 머리에 그려왔다. 무복은 특별한 날만 입고 평소 편하게 입고 지낸다. 인터뷰가 있던 날은 무복 대신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었다. 인사를 나누고 잡지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대뜸 김금화 선생이 물어본다. “그런데 누가 나를 인터뷰하러 온 거야?” “저요.” 오전 내내 손님을 받아서인지 목소리에 힘이 없고 피곤해 보였다. 힘드니 시간 많이 빼앗지 말아 달라 기자에게 당부했다. “자, 갑시다!(웃음)” 만수대탁굿으로 첫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년 10월 말, 김금화 선생은 생애 일곱 번째로 만수대탁굿을 성황리에 마쳤다. 황해도 지방의 재수굿(집굿)인 만수대탁굿은 이 지역에서 전승되는 굿 중 가장 크다. 집안의 번창과 가족의 건강, 불로장생 등을 빌며 노인의 만수무강과 죽은 뒤 극락천도를 기원하는 굿이다. “만수대탁굿은 굉장히 큰 굿이에요. 소 잡고 돼지도 두어 마리 올리고 말이지…. 첫째 날은 상산부군맞이하고 칠성, 제석굿을 해요. 다음 날은 일월성신을 맞이해서 솔문(소나무를 휘어서 만든 문) 앞에서 대화가 이뤄져요. 세태를 풍자한 사또놀이를 하고, 소 바치고, 도령돌기를 해요. 도령을 돌면서 칠성님한테 아들 낳게 해달라고도 하고, 명공(名公) 많이 달라고도 빕니다. 그렇게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동참해서 돌지 뭐. 그리고 나중에 굿이 끝날 때쯤 작두 타고, 대감놀이도 하고. 굿거리(극에서 장의 개념)도 마흔 거리는 되나봐.” 만수대탁굿은 무당이라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굿은 아니다. 큰무당 중에서도 일정 수준과 경지에 이른 무당에게 허락된 굿이다. 마흔 거리가 넘기 때문에 하루에 다 할 수 없고 최소 3일에서 5일 정도 기간이 걸린다. 특히 10년에 한 번, 무당 평생 세 번만 해도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데 김금화 선생은 일곱 번의 만수대탁굿을 치러냈다. 10년에 한 번이란 말에 못 가 뵈어 죄송하다는 말이 기자 입에서 절로 나왔다. “왔으면 좋았을걸. 소 한마리 잡고, 막걸리도 많이 남았었는데. 굿을 크게 했어요. 소 잡는 것도 내가 삼지창으로 찍고 다 했어요. 제자들이 받쳐줘서 작두에도 올라가고. 사람의 힘으로는 못하는 거잖아.” 작년 치러진 만수대탁굿은 이제 마지마기라고 김금화 선생은 내내 얘기했다. 10년 후에도 꼭 다시 하셨으면 한다는 기자의 말에 고개를 흔든다. “만수대탁굿을 할 때는 젊어지는가 싶었는데 요즘 날씨가 추워서 운동을 못하니까 영 좋지가 않아요.(웃음)” 세상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운명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만신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온 얘기를 듣고 싶은 마음에 건넨 질문이었다. 너무 오랜 세월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아서일까? 자신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는 좀체로 꺼내지 않는다. 그래도 일제강점기 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14세 어린 나이에 시집간 이야기부터 호되게 시집살이하다 도망친 얘기, 장티푸스에 걸려 온 가족이 죽을 뻔한 일, 열일곱 살 신내림 받던 순간과 병에 걸린 한 사내를 낫게 해준 일화, 황해도 옹진군 동남면의 용호도라는 섬에서 했던 첫 대동굿의 감격에 대해서는 또렷이 들려줬다. 그 연세에 생생하게 당시 기분을 기억해내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얘기들은 차창 너머 풍경처럼 넘기려고 한다.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진 김금화 선생의 이야기다. 박찬경 감독의 영화 ‘만신’ 혹은 김금화 선생의 자서전 ‘만신 김금화’에 더 자세하게 나와 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녀의 일상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알고 싶은 건 만신 김금화가 아닌 자신의 걱정과 시름, 그리고 그것을 깨쳐내는 일이었다. 인터뷰가 시작되고 20여 분 지나자 김금화 선생이 시계를 봤다. “나 지금 계속 말하면 머리가 어지러워질 거 같은데…. 힘들다. 어제 맞은 영양제 오늘 이러고 다 쓰겠다.” 다음에 만나 좀 더 편한 얘기를 했으면 하는 바람에 이만 자리를 무르기로 했다.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다 첫 번째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후 다시 자택을 찾았다. 밥도 함께 먹고 편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또다시 약속은 낮 12시 이후. 오전 점사(占辭) 보는 일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두꺼운 바지 차림이 예전보다 편해 보였다. 목소리도 밝았다. 그런데 최근 부쩍 입안이 개운치 않고 입맛이 없다고 했다. “배가 고픈데 뭐 먹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 원래는 잘 먹었는데 요즘 입맛이 없어. 밥도 먹기 싫고, 식빵이나 구워 먹을까? 아침도 억지로 먹었어.” 이렇게 말해놓고 재차 방문한 기자가 맘에 걸리는지 숙성시켜놓은 감을 숟가락으로 퍼먹으라며 손에 쥐어준다. 날씨가 좋지 않아 통 못 나갔던 새벽 운동도 이날만큼은 다녀왔다고 했다. 그런데 미세먼지가 ‘나쁨’ 수준이라니. 운동하기도 쉽지가 않다고 했다. “아침에 마스크하고 밖에 다녀왔는데 더는 못 나가겠다, 그럼. 좀 나가면 좋겠는데 미세먼지 때문에 어떻게 걸어.” 김금화 선생의 손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류머티즘으로 손가락이 굽은 지 5년이 됐단다. 당시 속 썩을 일이 있어 스트레스가 쌓였는데 결국 류머티즘으로 왔다. 안마라도 해드릴 생각으로 손을 만지니 얼음장같이 차다. “손에 염증이 있어서 계속 좀 부어 있어. 어떨 때는 얼얼해, 이게. 류머티즘이 자가면역질환이잖아. 자기가 자기를 친다는 거 아니야. 자기 살이. 손이 못생겼지.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시간도 없고 병원이 또 2층이라 올라가기가 힘들어서 못 가. 물리치료 받으면 조금 나아지지.” 그 사이 사무장이 식빵에 블루베리 잼을 잔뜩 발라 김금화 선생 앞에 내주었다. 어려서부터 단 것을 좋아했다지만 입속은 여전히 불편해 보인다. “입안이 되게 아프다. 너무 달아서. 단거 먹어도 아프고, 뜨거운 거 먹어도 아프고.” 사무장이 계란을 권했지만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식사시간이 돼 음식이 한 상 차려졌는데도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러 가지 짧게라도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자신에 대한 소소한 질문이 어색한지 대답 이어나가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지만 말이다. 만신은 은퇴가 없나요. 드라마 ‘왕꽃녀님’처럼요? 은퇴하는 사람도 있더라. 나는 아니고. 외국에서도 점을 보러 오나요? 꽤 와요. 지난번엔 중국에서 사람이 왔어요. 한국 신이 몸에 들어왔다면서요. 오전에만 점사를 보시는 건가요? 네. 하루에 세 명도 보고 많으면 일곱 명도 보고 그래. 앞으로 하고 싶은 거 없으세요? 글쎄…? 이제 나이가 들어서 뭐… 그런 거 없어. 어렸을 때 꿈이 있었어요? 꿈 그런 거 몰라. 귀도 한번 안 뚫으셨네요. 그거 왜 뚫어 아픈데.(웃음) 젊은 여성들이 가끔은 부럽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짧게 대답했던 이전의 질문과는 달리 곰곰이 생각하다 기운을 내며 답했다. “으이, 부럽지 않아. 나도 하고 싶은 거 다 했는데 뭐. 돈 한 푼 안 내고 비행기 타고 외국을 오갔잖아. 그것도 비즈니스석에 타고, 대우받고, 돈도 많이 받아오고 말이지. 그때는 이렇게 문화재가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세월이 좋으니까 중요무형문화재지.” 집 안 벽면에 붙여놓은 사진을 찬찬히 보다 김금화 선생이 야자수 나무 아래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한복 차림의 모습만 보다 양장을 입은 모습을 보니 너무나 새로웠다. “35년 전인가 하와이에서 찍은 사진이야. 쉰세 살? 하와이대학교 초청을 받아 공연 갔을 때 찍은 사진이거든. 아무튼 사진들을 다 훔쳐가. 인터뷰하러 와서 가지고 갔다가 안 가지고 오기도 하고. 우리도 또 있다 보면 잊고.” 무당이 안 됐으면 뭐가 됐을 것 같은지도 물었다. 넘세(어린 시절의 김금화 선생의 이름)는 꽤 총명하던 아이였다. “무당이 안 되고 공부 많이 했으면. 의사 아니면 검사나… 그런 거 했을 거야. 공부했으면.” 만약 그랬다면 시대를 선도한 검사 김금화로, 의사 김금화로 만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곱고 당당한 얼굴이 꽤 어울렸을 것도 같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부름은 평생을 다른 이의 복을 대신 빌어주는 만신으로 살게 했다. 김금화가 신어머니라고 한 적 있어?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10여 년 전 연안부두에서 기자와 만나 사진을 같이 찍은 적이 있다고 했더니 뜻밖의 얘기를 꺼낸다. “나랑 같이 사진 찍고 우리 김금화 신어머니라고 안 했어?(웃음)”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금화 선생을 바라봤다. 최근 들어 김금화 선생이 자신의 신어머니라고 사칭하고 다니는 사람이 요즘 꽤 된다는 설명. “무속인들이 나하고 사진 찍고서는 김금화가 신어머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대요. 아침에도 어떤 여자가 왔는데 어떤 무속인이 김금화 만신이 자기 선생인데 무슨 큰 일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많은 돈을 보태라고 했답니다.” 사기 치는 사람이 많아져 이제는 사진 찍는 것도 잘 안 한다고 했다. 자기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일은 절대 없길 바란다면서 말이다. “우리나라가 괜찮지 그럼 어드래?” 끝으로 우리나라가 올해 잘될 수 있도록 축원의 메시지를 부탁했다. 김금화 선생은 매일 나라를 위해 축원한다고 했다. 나라가 편안하고 평화통일을 이루고 전쟁 없는 나라가 되게 해달라 기도드린다고 했다. “2018년에는 모든 백성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고, 밤늦도록 술 먹고 길에 넘어지고 싸우고 막 그렇게 하지 말고 착실하고 정말 아름답게 모두 하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고 또 서로 아끼고. 음식도 아끼고요. 너무 많이 해서 내버리지 말아요. 하늘이 내려다봅니다. 아이도 많이 낳으시기를 바랍니다. 한 가정에 3명, 4명 낳아서 나라에 좋은 일 하고, 아이 안 낳고 자기들 혼자서만 살면 어떻게 해. 늙어서도 외로울 거 아냐? 가정과 사회에서도 좋은 일 하시기를 바랍니다. 조상님,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도 효도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가 드리는 축원입니다.” 올해 우리나라가 어떤지 물었다. “괜찮지 그럼, 어드래? 안정도 되고….” 나라 만신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기를 바랐다. 안정된다는 말에 근심걱정 없는 한 해가 되기를 염원해본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헤치고 가녀린 노구가 지탱하고 섰다. 평소 조용히 행동하다가도 무대 위에 서면, 작두 위에 오르면 신빨(?) 날리는 젊은 만신으로 되살아난다. 올해도 7월이면 어김없이 서해안 배연신굿이 기다리고 있다. 각종 공연과 굿판이 만신 김금화 선생의 몸짓을 위해 준비될 것이다. 김금화 선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기자는 간절한 마음이다. 10년 후 그녀의 여덟 번째 만수대탁굿을 꼭 볼 수 있기를 말이다.
- 2018-01-31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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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내 아들이어서 든든해!”
- 축 늘어진 젖, 엉덩이는 뒤로 쑥 빠지고, 빠진 만큼 허리는 굽었다. 층층시하에 열 자식을 낳아 여덟을 건졌지만 그 많은 식솔들을 건사하느라 무명 저고리와 치마에 물 마를 날이 없었던 어머니. 마흔둘에 낳은 막냇동생이 불쌍하다고 늘 품에 끼고 고된 농사일과 집안 허드렛일을 했다. 단아하고 작은 체구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막내의 특권인 어리광은 어머니에게는 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젖을 떼지 못하고 어머니만 보면 젖을 먹겠다고 응석을 부리면 어머니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쭈그러진 젖을 덜렁 꺼내 물리시곤 했다. 어느 날 하루살이가 필자의 눈에 들어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어머니는 “아이구, 이를 어쩌나” 하시더니 주저 없이 머리를 뒤로 젖힌 다음 손으로 눈꺼풀을 열고 혀로 핥았다. 깊은 사랑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혀로 눈을 핥겠는가. 어린 시절, 유독 책읽기를 좋아하던 필자는 한때 만화책에 중독된 적이 있다. 하루라도 만화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칠 정도였는데 빌려볼 돈이 없었다. 그래서 닭장 안의 달걀에 몰래 손을 대기 시작했다. “꼬꼬댁~” 하는 소리가 들리면 살그머니 닭장 안으로 들어가 따끈따끈한 달걀 두 개를 들고 만화방으로 달려가곤 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더니 결국 어머니에게 들키고 말았다. 어머니에게 들켰기에 망정이지 아버지가 아시면 발가벗긴 채 내쫓길 판이었다. 어머니는 필자의 간절한 눈빛을 보시더니 따스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버지가 아시면 어쩌려고 그랬냐? 다시는 그러면 안 된다” 하시고는 달걀 두 개를 손에 꼭 쥐어주셨다. 그런 어머니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필자의 집안이 파산 직전까지 간 것이다. 그동안 농사는 물론이고 과수원을 크게 한 덕분에 호시절을 누렸는데 필자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시련이 닥쳐왔다.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미 군함에서 유효기간 지나 바다에 던져버린 강냉이 가루를 얻어다 먹던 시절이었다. 어렵게 얻은 강냉이 가루는 짭짤한 바닷물이 배어 있어 물에 몇 시간 우려내야 했다. 한참 어려웠던 시기의 어느 날 어머니도 강냉이 가루를 얻어다 양동이에 넣고 물을 부어놓았다. 그런데 밖에서 놀다가 들어온 필자를 보더니 “얘야, 돼지죽 좀 갖다 줘라” 하셨다. 필자는 “예” 하고 대답하자마자 양동이에 있던 강냉이 가루를 냉큼 들고 가 돼지 밥으로 줘버렸다. 그때 부엌에서 나오던 어머니가 그걸 보고는 엄청 당황해하셨다. 그렇게 놀라는 모습은 난생 처음 봤다. 당장 가족이 먹을 저녁 땟거리를 돼지죽통에 부어버렸으니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그때의 어머니 표정이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겨울방학이었다. 엄청난 눈이 쏟아져 버스가 못 다니는 바람에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구덩이를 밤새도록 걸어 자정 가까운 시간에 집에 도착했다. 연락도 없이 눈을 흠뻑 뒤집어쓴 채 불쑥 나타난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셨다. 그러면서도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아주셨다. 성인이 된 후 진급시험에 낙방해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할 때가 있었다. 어머니는 하얀 쌀밥에 된장찌개를 끓여서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네가 내 아들이어서 든든하고 행복해! 맛있게 먹고 기운차려야지.” 그 한마디에 힘든 마음이 봄눈 녹듯 녹아버렸다. 어머니는 3년 전 103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어머니가 안 계신 세상이 허전하다. “어머니, 당신은 언제나 제 편이었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 2018-01-2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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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화단이 주목하는 작가, 이세현
- 매혹적이다. 그러나 불편하다. 이 찰나의 간극 속에 그의 ‘붉은 산수’가 있다. 하고많은 색깔 다 놔두고 하필 붉은 풍경이라니… 어디서도 마주친 적 없는 역설이다. 사람들은 그의 ‘산수’에서 유토피아를 찾고 디스토피아를 본다. 그가 장치한 은유와 비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탐을 내는 작가 이세현(李世賢·51).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 페라가모가 러브콜을 보내고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 울리 지그가 그를 만나러 영국까지 날아갔다. 붉은색을 화두로 삼은 뒤의 이야기다. 그는 파주 출판단지에 자리한 로우 갤러리(Raw Gallery)에서 보자 했다.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작업실 한쪽에 마련한 비영리 문화공간.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냥 놀이터다. 오후의 햇살을 잔뜩 빨아들이고 있는 ‘RAW’라는 글자가 문패처럼 달려 있었으므로 헤맬 일은 없었다. 저 ‘날것(raw)’의 의미는 그의 ‘붉은색(red)’과 또 어떤 방식으로 한바탕 내통하는 걸까. 느닷없는 상상을 하며 갤러리 안으로 들어섰다. ‘붉은 산수’와 맞닥트렸을 때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지 꼼짝없이 포위당한 느낌이었다. 매혹적이었지만 속수무책의 버거움도 몰려왔다. 그것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이었다. 잠시라도 놓여나기를 바라는 사이 이세현 작가가 나타났다. 그를 따라 작업실로 들어갔다. 화가들이 붓질하는 공간이 대개 그러하듯 캔버스와 수백 장의 밑그림, 물감, 붓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가 데려온 자연이 ‘붉은 산수’로 다시 태어나는 방이었다. ‘비트윈 레드(Between Red)’라는 제목으로 ‘붉은 산수’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영국 유학 시절이다. 2004년, 서른아홉에 유학을 떠났다. 꽤 늦은 나이였다. 무엇이 그를 충동질했을까. “20대에는 학원 강사로 지냈고, 30대에는 계원예술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작업도 하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요. 회화, 설치미술, 조각 등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실험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작품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한 무명작가였죠. 그러다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고 싶은 건 그림인데, 그래서 하기 싫은 일도 하는데,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가혹하게 물었습니다. 예술가 흉내나 내면서 적당히 살고 있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결기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타성에 젖은 나날이었다고 표현했지만 그는 자신과 끊임없이 불화한 듯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청산하듯 전세금 뺀 돈 6000만 원을 쥐고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친 듯 그림만 그려보고 싶어서였다.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는 그림 영국에 도착해 런던 첼시디자인아트컬리지에 입학했다.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그만큼 간절했을 유학생활. 하지만 처음부터 녹록지 않았다. “입학하자마자 영국 학생들 앞에서 내 작품을 슬라이드로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눌한 영어로 들뢰즈의 철학을 들먹이고 라캉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내 모습에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부끄러웠어요. 반대로 생각해봐요. 서양 학생이 동양 학생들 앞에서 공자 왈, 맹자 왈 하면 제대로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릴 하는 건지 우습지 않겠어요? 순간 식은땀이 났고 더 이상 아무 말 못하겠더라고요. 그날을 계기로 제 그림들을 다시 들여다봤어요. 서양의 저 거대하고 찬란한 현대미술은 그동안 내 것이 아니었구나, 뼈저리게 느꼈죠.” 낯선 땅에서 사고방식이 다른 서양인들을 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들의 아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쭙잖게 흉내나 내지 말고 내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이후 작업 방식도 바뀌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그때만큼 고민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매일 묻고 또 물었죠. 결국 동서양의 차이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과 문화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그리고 내 뿌리가 되어준 것들을 새로운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잠자고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작업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우리의 전통음식, 제사상, 돼지머리 등을 소재로 삼아 변화를 모색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군 복무 시절 야간 투시경으로 바라본 비무장 지대의 풍경이 불현듯 떠올랐다. 충격적일 만큼 아름다웠지만 온통 붉어 두려움과 공포감마저 들게 했던 우리의 산하. 야간 투시경 속 산하는 그렇게 ‘비트윈 레드’ 시리즈로 재탄생했다. ‘붉은 산수’를 본 사람들은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런던에서 졸업을 앞두고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려대던 날. 하루는 스위스에서 온 여자가 우연히 그가 그리고 있던 붉은 산수를 보고 마음에 든다며 작품이 완성되면 자기가 꼭 구입하고 싶다 했다. ‘붉은 산수’ 첫 번째 작품을 손에 넣은 사람은 버거 컬렉션 대표 모니카 버거였다. 그 뒤 그의 이름은 유럽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졸업전시회 때 내놓은 작품도 평론가와 수집가들에게 모두 팔려나갔고 여기저기서 전시 제의도 들어왔다. 이후 미국 페이스 갤러리, 프랑스 페로탱 갤러리 등에서 손을 내밀었고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유명 기업들도 그의 작품을 사갔다.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 울리 지그는 런던으로 직접 찾아와 그림을 사갔다. 외국에서 인기가 더 많은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붉은색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요. 이데올로기적 트라우마도 있고요. 또 집에 걸어두고 감상하기 편한 그림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외국 사람들은 취향이 다양해요. 작품에서 드러나는 철학과 시대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객도 많아요. 울리 지그가 제게 그러더군요. ‘당신 그림은 분단과 같은 한국 문제를 다루고 있어 참 좋다, 메시지가 분명하다, 묵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름답다, 물론 다른 훌륭한 한국 작가들도 많지만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당신 작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림이다’라고요. 그의 말에서 큰 답을 얻었습니다.” 어머니, 다비화실, 12색 모나미물감 전통 산수화의 다시점과 서양화의 묘사 방식을 통해 그가 재해석해낸 자연의 풍경은 겸재 정선과 같은 진경산수화 대가들의 정신을 더듬으며 다양한 변주의 과정을 거친 듯 보인다. 자연은 눈에 보이는 풍경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의 체험과 만나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이세현 작가에게 자연은 삼라만상이다. 인간사, 세계사와 분리될 수 없는 풍경이다. 자연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한 사람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군 복무 시절 돌아가신 어머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짧은 생이었다. “어머니를 화장하는 동안 벌판에 앉아 있는데 들꽃 향기가 났어요. 그만 슬퍼하라고 어머니가 주시는 마지막 선물 같았어요. 순간, 지나온 시간들이 아득해지면서 자연이 다르게 보였어요. 아름다운 풍경 뒤로 삶과 죽음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더군요. 어머니의 유해는 원하신 대로 처녀 적 살았던 통영의 작은 마을 해안에 뿌려드렸어요. 그런데 유학을 떠나기 전 그곳을 다시 찾았다가 깜짝 놀랐어요. 제2거제대교가 생기면서 마을이 통째로 없어졌더라고요. 어머니를 한 번 더 잃은 것처럼 슬펐습니다.” 온 나라가 개발의 신열에 들떠 있던 시대였다. 통영에도 관광지 개발 바람이 불면서 어머니에게로 가는 길은 끊겨버리고 말았다. 어린 시절이 몽땅 추방당한 듯했다. 거제도에서 태어난 이세현 작가는 부모를 따라 부산, 통영, 울산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아버지의 나전칠기 사업이 망해 도시빈민이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는 허약한 몸이었지만 닥치는 대로 일했다. 결국 건강이 더 나빠진 어머니는 통영 이모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됐고 어린 그는 어머니를 만나러 갈 때마다 자신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어쩌다 용돈이 생기면 문제집을 사서 공부했어요. 대학을 가야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나봐요. 미대를 가고 싶어 고등학교는 전통공예학교로 들어갔어요. 회화반이 있었거든요. 학교에 가보니 미술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태반이었어요. 나는 그런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본 적도 없고, 그때까지 12색 모나미물감이 최고인 줄 알았어요. 어느 날 학교에 가져가 자랑스럽게 펼쳐놓았는데 다른 애들은 전문가용 물감을 내놓더라고요. 기가 팍 죽었죠.(웃음)” 그래도 그림 그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고1 때부터 운 좋게 미술반 청소를 담당하게 되어 선배들 그림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면서 매일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려댄 그림은 100장이 되고 수백 장이 되었다. 그만큼 실력도 늘었다. 고3이 되면서 대학 진학을 결정해야 했다. 집안 형편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무턱대고 학력고사를 봤다. 성적이 괜찮게 나왔지만 철없다는 소리나 들을 게 뻔해 몰래 홍대 미대에 입학원서를 내고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다른 학생들은 학원에서 특강을 받는 등 분주해 보였다. 학원은 꿈도 못 꾸는 상황에서 그들과 경쟁할 생각을 하니 초조했다. 가난한 아버지가 밉기도 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문득 후배가 다니던 다비화실이 생각났다. “어머니 몰래 쌀을 훔쳐 학원으로 들고 갔어요. 돈이 없으니 쌀이라도 받고 그림을 좀 봐달라고 했더니 학원 선생님이 어처구니없어 하더라고요. 기특하면서도 맹랑한 놈이라 생각했겠죠.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그래, 한번 해보자!’ 하더군요. 옛날이니까 그게 가능했지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죠. 당장 그날부터 차가운 평상에 스티로폼을 깔고 함께 먹고 자면서 실기시험 준비를 했어요.” 결과는 합격. 게다가 장학생으로 붙었다고 하니 집에서도 서울 유학(?)을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계속 이어질 캔버스 속 이야기 이스라엘의 유명 아트딜러인 세르주 티로시는 이세현 작가의 작품에 대해 “매우 독특하면서도 세계 미술시장에서 주목받을 만한 무언가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국내외에서 핫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동안 국내는 물론 스위스, 미국,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중국 등지의 유명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갖는 등 빡빡한 일정을 보냈고, 2015년에는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 페라가모가 협업을 요청해와 스카프, 머플러, 블랭킷 등을 제작해 선보이기도 했다. 1월에는 홍콩문화원 개관전 기획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 하루가 48시간이어도 모자란 듯 보인다. 지금까지 그린 대부분의 ‘붉은 산수’를 해외 컬렉터들이 구입해갔다니 놀랍다. 캔버스 속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나이 듦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술가는 뭔가 다르게 대답할 줄 알았다. “나이 드는 게 좋아요. 이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용기가 생겼어요. 오해받는 것도 불편하지 않고요. 아, 또 하나 있네요. 포기할 줄 아는 것.” 얼마나 명료한가. 아무런 기교도 필요치 않은 저 투명한 각성은.
- 2018-01-17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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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잉그리드 버그만의 사랑
- "키스할 때는 코를 어디에 둬야 하죠? 코를 어디에 둘까 늘 생각했어요." 여 주인공 마리아는 사랑하는 연인 로버트에게 이렇게 묻는다.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였다. 이 한마디로 잉그리드 버그만은 단번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었다. 또 이 장면은 최고의 키스신이 되었다. 마초이면서 멋진 남자 헤밍웨이가 한 일이었다. 그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스페인 내전을 다루고 있다.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에 직접 뛰어들어 겪은 일들을 글로 썼다. 전쟁 중 아름답고 청순한 그녀는 파시스트에게 험한 일을 당했다. 그러나 그녀의 맑고 아름다운 영혼은 망가지지 않았다. '기가 막혀! 정말 이렇게 사랑스러워도 되는 거야?' 필자는 그녀에게 폭 빠져버렸다. 여자인 필자도 이럴진대 남자들은 어떠할까? 주인공 역을 맡은 잉그리드는 그 시절 가장 인기 있었던 미녀 스타들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스웨덴이 낳은 세계적인 스타로 1960~1970년대에 온 지구촌 남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아니 그녀는 단지 대스타라고 하기에는 표현이 많이 부족했다. 175cm의 키에 너무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그녀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여신이었다. ‘가스등’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는 등 승승장구하며 대스타로 입지를 다져가던 중 세인이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 터진다. 치과 의사인 남편을 버리고 이탈리아의 명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동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불후의 명작인 그의 작품 '무방비 도시'를 본 그녀는 즉시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로 날아갔다 한다. '세상에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가슴속에 그런 용광로가 숨어 있었다니!' 두 사람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영화배우 이사벨라 로셀리니다. 이사벨라 로셀리니는 '백야', '블루 벨벳'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배우이며 특히 오랜 세월 랑콤 화장품 대표 모델로 활동했다. 그녀는 여신인 어머니와 지적이고 잘생긴 아버지의 우월한 유전자를 골고루 받고 태어났다. 그녀는 잉그리드가 우리에게 남겨준 선물이다. 잉그리드의 모습을 계속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녀를 보며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많은 영화를 통해 청순하면서도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준 정숙하고 아름다운 잉그리드의 불륜 소식에 세상 사람들은 경악했고 극도의 배신감으로 그녀를 비난했다. 그 일로 인해 그녀는 7년간을 할리우드에 입성할 수 없었다. 로베르토와의 사랑도 8년 만에 금이 가 두 사람은 결국 헤어졌다. 지금도 필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뿐인 영원한 내 사랑 피터!"라며 치과의사 남편 피터에게 영원한 사랑을 고백하던 잉그리드가 로베르토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딸은 훗날 묻는다. “그렇게 성실하고 좋은 남자인 아빠와 엄마는 왜 헤어졌을까?”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모습 뒤에 숨겨져 있던 그녀의 뜨거운 열정이 그녀를 대스타로 만든 것일까? 그녀는 끝까지 당당했다. "나는 배우다. 내 연기를 비평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내 사생활은 비난하지 말라“고.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스캔들만 알았을 때는 그녀의 열정에 열광했었는데 최근에 남편 피터가 아주 성실하고 좋은 사람인 것을 알게 된 뒤로는 그녀에게 실망했다. 로셀리니 말고도 다른 두 명의 남자를 더 만나 사랑하게 된 그녀를 두고 필자의 딸은 이렇게 말했다. "엄마 그건 열정이 아니라 난잡한 거거든!" 딸의 평가에 선뜻 그녀를 두둔하지 못했다. 필자의 젊은 날을 지배하고 매혹시켰던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을 이해하는 한계였다.
- 2018-01-10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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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책이 가득했던 명희네 집
- 초등학교 시절, 필자의 부모는 할머니 집에 필자와 남동생만 남겨둔 채 동생들을 데리고 직장 근처로 이사 가 살았다. 필자는 7형제의 맏딸이다. 우리까지 데려가면 박봉에 굶어 죽을 것 같아서 떼어놓고 간 것이다. 부모와 어린 동생들이 떠난 후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다행히 친구 명희가 있어 학교 공부가 끝나면 그 집에 가서 놀았다. 서로 시간이 어긋날 때는 혼자 마루 끝에 앉아 책을 읽곤 했다. 명희 아버지는 우리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집에 동화책이 가득했다. 명희네 집은 필자에게 유일한 안식처였으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는 장소였다. 그러나 명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좀 무서웠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책장 넘기는 소리조차 조심했다. 명희는 책에는 관심이 없었고 활짝 웃는 얼굴로 고무줄놀이를 아주 잘했다. 필자는 마루 끝에서 친구가 노는 모습을 힐끗거리면서 책에 빠졌다. 그러다 해가 서산에 기울면 명희 어머니가 “영희야 이제 집에 갈 시간이다” 하셨다. 그 소리를 듣고 뭉그적거리며 일어나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잡고 미루나무가 즐비한 신작로를 따라 걸었다. ‘알프스의 소녀’를 읽으며 어른이 되면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5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필자가 자서전을 냈다는 말에 명희가 “너는 우리 집 이야기를 빼놓으면 자서전 완성이 안 될걸”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린 시절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다. 또 그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며 마음을 읽어주는 친구가 있어 뿌듯했다. 명희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필자를 만나고 싶어 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뵙지 못했다. 아쉬움이 많다. 그 시절 외롭게 앉아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필자를 보며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걸 물어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중년이 되었을 때 필자의 골동품 가게로 자주 놀러오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상대의 말을 경청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오늘 마음이 좀 언짢다고 말하면 왜 그런지 꼭 물었다. 그냥 그렇다고 얼버무리면 그런 게 어디 있냐며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며 마음을 챙겨줬다. 코미디를 보고도 웃지 않는 필자를 보고 개그맨 김형곤 테이프를 사다 주며 들어보라고 했다. 재미없다고 하니까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어보라고 했다. 그 후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노년이 된 요즘은 필자를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친구가 있다. 그래서 수호천사라 부른다. 취미도 같아서 금상첨화다. 페이스북으로 서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주고받는다. 그림을 좋아해서 전시장도 같이 다니고 서로의 느낌을 공유한다. 설명하지 않아도 죽이 척척 맞는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그 친구는 ‘두 개의 의자’라는 수필집도 냈다. 반응이 좋아서 덩달아 기쁘다. 오랜만에 소식을 전해도 늘 만났던 친구처럼 다정다감하다. 사귄 지 20년이 훌쩍 넘었는데 단 한 번도 얼굴 붉힌 적 없다. 나이가 들면서 훈계하듯 말하는 사람이 싫어졌다. 정이 가지 않는다. 오늘날의 필자가 있기까지 많은 친구가 곁을 지켜주었다. 필자 마음을 잘 읽어주는 친구가 옆에 있을 때 가장 성장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필자도 요즘 만나는 친구들 이야기를 경청하려고 노력한다. 나이가 들면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친구가 최고다.
- 2018-01-08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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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앤’을 소개해주신 야학선생님
- 인아야 앞으로는 나를 '코델리어'하고 불러줘. 알았지." "알았어 엄마. 내가 엄마의 다이애나가 되어 줄게" 몇 달 전 나와 우리 딸의 대화 내용이다. 우리는 둘 다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고 있다. 나는 소설세대이고 딸애는 만화세대이다. 일본작가가 그린 빨강머리 앤의 그림들은 소녀들의 취향에 딱 맞기에 나와 우리 딸을 그 그림 속에 퐁당 빠트렸다. 소설 '빨강머리 앤' 은 캐나다의 몽고메리 여사 작품이다. '빨강머리 앤'은 고아이지만 감성이 풍부하고 씩씩한 소녀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인 '앤'이 아무래도 너무 평범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코델리어'로 불러주기를 주문했다. 다이애나는 그녀의 단짝친구 이름이었다. <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빨강머리 앤 귀여운 소녀 빨강머리 앤 우리의 친구 > 지금도 나는 고아소녀 빨강머리 앤의 주제곡을 가끔 부르며 추억에 젖어보곤 한다. 그녀는 내 10대를 행복하게 해준 행복의 아이콘이다. "와우! 빨강머리 앤이다!" 얼마나 좋았던지 지금도 50년전 그때의 감격을 잊지 못하겠다. 내가 빨강머리 앤을 만난 것은 서둔야학 3학년 시절인 1967년 봄이었다. 야학 운동장에 서있는 내게 조용민 선생님이 야학에 오시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손에 건네주셨다. 선생님께 인사를 하며 살펴보니 선생님 손에 책들이 있는 것이었다. 책을 광적으로 좋아하던 나였다. 금세 호기심으로 긴장됐다. 저게 무슨 책일까? 다섯 권으로 되어있는 소설 빨강머리 앤이었다. 아직도 잉크냄새가 가시지 않은 듯한 새 책이었다. 그때까지 거의 새 책을 만져보지 못했던 내게 그것은 엄청난 기쁨이었고 감동이었다. 야학생들을 위해서 새 책을 선물해 주신 조 선생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책 선물을 받아들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내게 조 선생님은 웃음이 얼굴 가득 환하게 웃으셨다. 나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순수한 앤이라는 캐릭터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단번에 다섯 권을 다 읽어버렸다. 그해에 서울대 농대 농교육과 신입생으로 입학하신 조용민 선생님은 야학생들에 대한 사랑이 유난히 깊으신 분이라서 우리들도 모두 그 선생님을 많이 따르고 좋아하고 있었다. 소풍날이었다. 한해 후배인 명희는 눈은 샛별 같이 빛났고 코가 오똑한 예쁜 소녀였다. 그러나 그 애는 골수염으로 다리를 절었다. 노래를 끝낸 그 애에게 선생님들과 우리들은 가엾어서, 동정심으로 ‘잘했다’고 칭찬 해주며 손바닥이 따갑도록 박수를 쳐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눈치 없게도 정말 자기가 잘해서 칭찬해 주는 줄 알고 거푸거푸 자기만 계속 노래를 부른다고 하여 그 애를 보기가 참으로 딱했고 선생님들 뵙기가 민망했다. 그날 명희가 소풍을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조용민 선생님 덕이었다. 가장 어린 축에 속하면서도 병마와 싸우느라고 가엾을 정도로 몸이 말라 있었던 명희는 힘이 들어서 쉬엄쉬엄 걸어야 했기에 소풍을 따라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안쓰럽게 생각하신 조 선생님이 야학교에서 칠보산까지의 20리가 넘는 왕복 길을 기꺼이 업어주셨다. 시간을 보시려면 늘 바지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서 보시던 조 선생님이었다. 당신 자신도 너무 마르셨던 조 선생님의 손목이 견디기에는 시계가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그리고 등가죽과 배가 거의 맞붙어버리다시피 했던 선생님은 허리가 너무 없었기에 수업 중에도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연신 추켜올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 선생님 몸 어디에 그런 힘이 숨어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국사 선생님이었던 조 선생님은 시에도 관심이 많으셔서 한용운 시인의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이나 신석정시인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와 변용로 시인의 '논개'등을 칠판에 적어주시곤 하셨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 논개 중 - 나는 강렬한 색채의 대비로 내 가슴에 깊게 각인되던 논개의 애국심이 눈 부시게 아름다웠다. 후에 조 선생님은 말하셨다. 야학생들의 수업이 끝날 때쯤에는 일부러 상록사에서 나와 야학에 가서 야학생들과 합류하곤 하셨다고. 우리들이 집에 갈 때는 연습림 골짜기에 노래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지곤 했다. 선생님들과 제자들이 같이 '바위고개' '가고파' '고향생각'등의 우리 가곡이나 '메기의 추억' '아름다운 꿈'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등의 미국민요를 부르며 연습림 오솔길을 걸어서 집에 가곤 했던 것이다. 조 선생님은 그 시간이 너무 좋으셨단다. 선생님의 야학수업이 없는 날도 우리들과 그 시간을 함께하고 싶어서 야학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야학에 가곤 하셨단다. 나도 그 시간들이 내 가슴에 가장 아름답게 회상되는 부분이다.
- 2018-01-03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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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터처블한 고전을 터처블하게 만든 강신장 대표
- 강신장(60) (주)모네상스 대표는 지식 디자이너이자 창조 프로듀서다. 지식 속에 숨겨진 창조의 씨앗을 찾아내고 가치를 재해석해 창조의 영감을 생산해낸다. 삼성경제연구소 근무 시절, 대한민국 인문학 열풍을 일으키고, 1만 개에 달하는 5분 동영상 콘텐츠로 1만 명이 넘는 CEO들을 매혹시켰던 그가 2014년 모네상스를 창업, 고전 전도사로 나섰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끝까지 읽지 않은 고전’을 세계 최초로 5분 동영상으로 시각화하는 무모한 작업에 팔을 걷어붙였기 때문이다. 문학뿐 아니라 역사, 철학, 정치 등 비문학에 이르기까지 총 500권의 고전을 5분 동영상으로 제작하는 작업 대장정을 마쳤다. “고전(古典) 보기, 더 이상 고전(苦戰)하지 마세요” 그가 만든 영상 고전의 가장 큰 장점은 쉽고 재미있다는 점. ‘읽기도 힘들지만 읽었어도 몰랐던 고전의 의미’를 손에 잡히게 해설해준다. 고전의 줄거리와 평론을 결합, 5분으로 간결하게 만들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 등 디지털 기기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강력한 그래픽 이미지와 텍스트를 결합해 ‘읽는 책’을 ‘보는 책’으로 구성한 게 특징이다. 강신장 대표는 요즘 고전과 노는 게 일이다. 5분 고전동영상(모네상스닷컴) 작업, 고전책(‘고전 결박을 풀다’) 집필, CEO를 위한 고전학교 ‘루첼라이 정원’ 운영 등 ‘고전 삼두마차’를 이끌며 고전의 바다에 풍덩 빠져 있다. 퇴직 후 창업 아이템(?)으로 ‘고전’을 선택하셨습니다. 고전을 5분 동영상화하는 작업에 도전한 특별한 동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창조는 ‘나다움’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에이티브’라기보다는 ‘오리지널’에 가까운 것이죠. 나다운 것을 만들려면 내가 왔던 곳 오리진(origin)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창조는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역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기업 임원생활을 해보았지만 책임이란 짐, 권위와 형식, 시키는 일을 해야만 하는 틀에 박힌 삶이었어요. 작은 변화도 두려웠고, 나다움을 살리는 생활은커녕 생각 자체가 퇴화되더군요. 그래서 나를 되돌아보고, 나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 고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전을 읽는다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겨우겨우 읽어도 그 뜻을 알기가 어려웠지요. 누구나 고전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고전을 외과수술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조는 전진이 아니라 역진이다.” 전진과 속도만 외치는 시대라 그 의미가 더 와 닿습니다. 창조력의 비밀을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창조력의 근원은 휴머니티(humanity)입니다. 창조력은 결국 사람을 보고 사람들 마음속에 충족되지 못하고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아픔과 결핍과 갈증을 보는 인문정신에서 출발하니까요. 그런데 휴머니티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오직 연민의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만 볼 수 있기에 최고의 창조기술은 ‘연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살펴보면 위대한 발견은 모두 연민의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파편화된 삶을 살다 보니, 모두가 아픕니다. 그래서 타인의 아픔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민의 눈을 뜰 수 있는 좋은 방법은 고전을 읽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상상력은 자신이 가진 레퍼런스에 비례하게 마련이지요.” “모든 혁신은 연민의 자식들이다.” 연민의 힘을 강조하셨는데요. 고전 공부를 통해 깨닫게 된 강 대표의 인생 모토는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수페르 아스트라(super astra)’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별보다 더 높이’인데요. 별보다 더 높은 곳은 고도가 아니라 흡수도입니다. 만약 우리가 철저히 상대방 입장에서 그 사람 마음을 봐줄 수 있다면 그곳이야말로 별보다 더 높은 곳이고, 또 만약 우리가 철저히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나를 보고 내가 하는 일을 볼 수만 있다면 그곳이야말로 별보다 더 높은 곳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고전을 통해 사람을 보고 나를 보는 성찰의 인문학을 비로소 만난 것 같습니다.” 고전 미니동영상의 부제가 ‘나를 만나는 5분의 기적’이더군요. 고전을 요약본으로 만든다, 특히 5분 동영상으로 고전의 맛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제기도 있는데요. 마치 사랑과 정성으로 만들어야 할 어머니의 손맛을 영양제 한 알로 해결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 같습니다. “무식해서 용감했다고나 할까요. 아마 제가 학자라면 절대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고전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로부터의 비판이 너무나 두려웠을 테니까요. 저는 고전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탓하기보다, 읽도록 만들어주는 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고전을 읽지 못하는 독자의 아픔을 공감했기에, 어떻게 하면 쉽고 재미있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만을 생각했습니다. 제 장점은 복잡한 지식을 말랑말랑 쉽고 재미있게 만들 줄 아는 데 있으니까 이것을 결합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때 저명한 영문학자이신 김욱동 교수를 만나게 되었고 김 교수님께서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용기를 주셨기에 다른 전문가와 본격적인 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영상을 보고, 고전을 읽지 않기보다는 고전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리라 생각해요.” 고전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끝까지 읽지 않는 책’이란 말이 있지요. 5분 동영상 500편 리스트를 살펴보니 저 역시 중도 포기한 책이 많더군요. “어려움, 두꺼움, 두려움의 결박을 풀고 언터처블(untouchable)을 터처블(touchable)로 만들자. 읽는 고전을 보는 고전으로 만들자. 이것이 저의 목표였습니다. 단지 축약이 아니라 에센스 농축 작업이라고나 할까요. 고전을 한눈에, 한 손에 잡을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습니다. 딱딱한 책을 오감을 자극하는 5분 영상으로 정리하는 작업은 고난도 외과수술이자 성형수술이었습니다.(웃음) 답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주인공보다 나를 만나게 하는 관점 전환에 초점을 뒀습니다. 고전은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도와주고, 다른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힘을 키워줍니다. 다 읽고서도 그 뜻을 몰랐던 고전의 의미를 동영상을 통해 알게 됐다는 독자 소감을 들을 때 행복합니다.” 고전이 좋긴 한데, 일각에선 ‘돈이 되나?’ 하면서 실용적 관점에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하하. 저는 고전, 나아가 인문학으로 팔자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접체험과 성찰을 통해 세상의 아픔을 볼 수 있으니까요. 다른 사람 마음속에 있는 고통을 보는 좋은 방법은 삶의 밑바닥으로 가보는 것입니다. 밑바닥에 내려가 보면 더 이상 남의 일이 남의 일로 보이지 않거든요. 모든 것이 나와 연결되지요. 초연결 시대에 그런 연결지능만큼 우수한 재능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전은 그걸 가능하게 하지요. 인생의 고전(苦戰)을 대리경험하게 해주니까요. 고전은 한마디로 고전(苦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아닐까요? 역지사지, 백번 강조하지만 상상만으론 한계가 있어요. 바닥을 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치고 올라왔는지 대리경험을 하고, 내 삶에 적용할 지혜를 얻지요. 운이 좋아지고, 운을 바꿀 수 있는 혁신과 창조력의 원천을 얻는 데 이 이상의 방법이 있나요?” 그의 입에서 ‘주홍 글씨’, ‘노인과 바다’ 등의 고전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인생반전의 포인트가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예컨대 ‘주홍 글씨’의 진정한 교훈은, 우리 모두가 의도하지 않았던 잘못으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혔을 때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그 낙인을 지울 수 있을까에 대한 방법을 성찰하도록 하는 것이 그 가치라고 설명한다. 주인공 헤스터 프린의 삶과 투쟁 속에 그 길이 있기에 주홍 글씨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또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허탕을 친 후에 몇 날을 싸워 어렵게 잡은 청새치를 상어에게 모두 뜯긴다. 즉 천신만고 끝에 겨우 한 가지를 이루었는데 그것마저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을 때 과연 나라면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성공이 아니라 과정 속에 있는 것이고, 비록 물질적 가치로는 파멸할 수 있지만, 정신적 가치로는 패배할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기에, 공평하지도 않고 선택할 수도 없는 운명의 비정하고 부당한 공격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성찰해보는 것이 진정한 문학작품의 가치라는 조언이다. 강 대표에게 가장 와 닿은 고전은 어떤 작품이었는지요. “‘이반 일리치의 죽음’입니다. 성공한 중견 판사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겪는 마음의 분노와 불안, 치유를 다루는 내용이지요. 우리가 살면서 중요하다 생각하고 매달렸던 것들이 죽음이란 거대한 필연 앞에서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성찰하도록 해주는 내용인데요. 이 작품은 저에게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하더군요.” 10년 전, 삼성경제연구소 상무 시절 만났을 때 창조학교에 대한 꿈을 그림까지 그려가며 야심차게 설명했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임원 시절의 그때와 지금의 늦깎이 고전 전도사가 되고 나서 달라진 점이 있는지요? “혁신과 창조는 제 커리어를 관통하는 키워드였어요. 재미있기도 했고 열심히 일한 결과 과분한 인정도 받았습니다. 큰 실패가 없는 삶을 살았죠. 하지만 돌아보니 일에 대한 집착이 하늘을 찔렀어요. 그것은 쥐어짜는 상상력이지, 따뜻한 상상력이 아니었습니다. 일만 보고 사람을 돌보지 못한 것을 뒤늦게 깨달았어요. 이제 인격의 바탕을 갈고 닦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지요. 잘난 리더보다 따뜻한 리더가 되고자 노력하는 것, 그게 가장 달라진 점입니다.” 58년 개띠이시지요. 개띠는 치열하게 살아온 베이비붐 세대 중에서도 첫 스타트 세대입니다. 올해 환갑이신데요. 인생의 뉴스타트 기점에서 되새기는 인생의 의미를 부탁드립니다. “한마디로 인간적으로 좀 더 성숙해져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형식에 갇히지 않고, 모든 것을 해체해보고 다르게 보려고 노력하고자 합니다. 환갑이 되었으니, 이제야말로 진정한 시작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찢어진 청바지에 빨간 운동화를 신어도 보고 자유롭게 살아보려 해요. 그 속에 행복이 있더군요. 원점에서 모든 것을 해체해 다르게 보려고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오는데 강 대표가 인용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한 구절이 귀를 맴돌았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삶, 살면 살수록 생기가 빠져나가는 삶, 나는 내가 산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실은 나도 모르게 조금씩 내려오고 있었던 거야. 그래, 맞아. 세상의 눈으로 보자면 산을 오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딱 그만큼씩 진짜 삶이 내 발 아래로 멀어져가고 있었어….” 2018년 한 해, 우리가 세우는 야심찬 계획은 산 정상을 향해 열심히 올라가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딱 그만큼 내려가면서도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계획인가. 혹시 우리는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진 않은가. 새해엔 별보다 더 높은 곳, 그곳에 이르는 사다리를 놓아보는 것 어떻겠는가.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성공하는 CEO의 습관’, ‘하이터치 리더’, ‘용인술, 사람을 쓰는 법’ 등이 있다.
- 2018-01-02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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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붙잡혀간 사람들
-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정유재란은 ‘노예 전쟁’이었다. 조선인 노예가 큰돈이 된다는 말에 혹한 일본인 중개상과 외국인 노예 상인들이 일찍이 노예사냥에 나섰다. 왜장들도 되도록 많은 포로를 붙잡아 돌아가서 노비로 종으로 부릴 욕심에 눈이 멀었다. 징병, 징용으로 일손을 잃어 피폐해진 농어촌이 제대로 돌아가게 할 보충 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정유재란은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린다. 우수한 조선 도공들을 납치해 꽃을 피운 도자기 문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쓰마 야키(薩摩燒) 같은 일본의 세계적 도자기 브랜드들은 예외 없이 조선에서 붙잡혀간 도공들을 시조로 하고 있지 않은가. 기술자 쟁탈전이기도 했다. 문화적으로 조선에 뒤졌던 일본은 각종 기술자와 의원, 제약사, 목공, 기와공, 미장공, 직조공, 철장, 야장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 해당 분야에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서울의 주자소에 있던 활자와 인쇄 기계를 약탈하고, 인쇄공을 납치해 인쇄 문화에 첫걸음을 뗀 일이 대표적 사례다. 그때 약탈해간 주자소 활자는 지금 도쿄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정유재란은 또한 ‘각시 전쟁’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여성을 일컬은 ‘가쿠세이’를 찾으려고 왜장들이 눈에 불을 켰다. 당시 야마구치 지방에 유통되었던 일조회화사전에 “고분 가쿠세이 더불어 오라”는 조선말이 미녀를 데리고 오라는 말이라고 해석돼 있다. 이 말은 출진장병을 보내는 인사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잡혀간 규수 중 영주의 첩이 된 사람도 있다. 최고 권력자 수청 들기를 거부하다가 태평양 외딴섬에 유폐되어 죽은 오타 줄리아도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다. 도망쳐 갈 때 빈 배로 항해하기가 위험하다고 선창을 채울 목적으로 양민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기도 했다. 임진·정유 양란(兩亂) 7년간 조선에 붙잡혀간 사람은 대체 얼마나 될까? 왜군이 오래 농성했던 경남 해안 지방과 호남 지방에 피해가 극심했지만, 그 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길이 없다. 전쟁 수행이 급했던 피해국 조선은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고, 일본은 각 지방 영주와 그 휘하 장수들의 개별적인 행위여서 조사도 통계도 불가능했다. 일본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2만~3만 명 또는 5만 명까지 보는 학자가 있다. 국내에서는 적게는 5만 명, 많게는 10만 명으로 보는데 최근에는 10만 명이 넘으리라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 근거의 하나는 사쓰마(薩摩·가고시마) 지역에만 3만700여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는 증언 등, 귀환자들이 남긴 글과 단편적인 일본 측 기록들이다. 경상도 사복(司僕·궁중 수레와 말을 관장하는 관직) 정신도(鄭信道)는 귀환포로 출신 전이생(全以生)의 증언을 인용해 가고시마 3만700명 조선인 거주설을 상소문에 인용했다. 광해군 9년 4월 계축일 ‘광해군일기’에 인용된 이 상소문은 광해군 시대가 되도록 피랍인 수조차 파악되지 않고 미귀환자가 많았던 실상을 보여주는 실록이다. 17세기 초 나가사키(長崎) 히라도(平戶) 지역 조선인 분포를 보여주는 자료(平戶町人數改帳)에는 당시 호수(戶數)로 27%, 인원수로는 11%의 조선인이 히라도에 거주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때 나가사키 지역에는 2300명의 기독교인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규슈의 한 지역에만 그렇게 많은 조선인 포로가 있었다면 일본 전국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끌려갔을까 하는 짐작이 가능하다. 일본 유학의 스승으로 불리는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에는 “전후(정유재란 이후) 이요슈(伊豫州) 오쓰(大津) 지방에 잡혀온 사람이 무려 1000여 명인데, 이들은 밤낮으로 마을 거리에서 떼 지어 울고 있으며, 먼저 잡혀온 사람들은 반쯤 왜인에 귀화하여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는 견문기록이 있다. 귀환포로 정희득(鄭希得)은 포로생활수기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에서 “신이 이르러 보니 우리나라 남녀로서 전후에 잡혀간 자가 아와슈(阿波州) 이야마(猪山)에만 무려 1000여 명인데, 모두 왜졸 하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유재란 포로가 임란 초기 포로의 10배가 넘는다는 견문도 기록으로 남겼다.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가 예수회 총장 신부에게 보낸 글에도 나온다. “이곳 나가사키에는 남자뿐 아니라 많은 여자와 어린아이도 포함된 조선인 포로들이 (기독교)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수는 1300여 명입니다.” 이들이 잡혀가는 모습도 생생한 기록으로 남았다. 마치 개돼지처럼 끌려가는 참상이 저들의 손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에서 수많은 (노예)상인이 왔는데, 그중에는 인신 매매자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포로를 사들여 새끼줄로 목을 줄줄이 엮어 묶은 후 빨리 걸으라고 몰아쳤다. 혹 꾸물대거나 발을 절면 몽둥이로 내리치며 몰아댔다. 그 모습이 마치 지옥의 무서운 귀신이 죄인을 다루는 것이 저럴까 싶었다. 마치 원숭이를 엮어 묶듯 해서는 우마를 끌고 짐을 지고 가도록 볶아대는 것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정유재란 종군 왜승 게이넨(慶念)의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 11월 9일자 일기 내용이다. 급거 귀국하려고 부산에 모여든 여러 부대 무장들에게서 조선인 양민 포로를 노예로 사들여 끌고 가는 정황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그렇게 끌려간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궁금증에는 기록으로 전해져오는 성공 스토리 말고는 대개가 고난과 순응으로 한평생을 마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통탄할 일은 그들 중 일부 젊은이가 왜병이 되어 정유재란 때 조국에 총을 쏜 일이다. “임진 계사년에 어린아이로 잡혀가 장성하여 정용하고 강하기가 왜놈보다 나은 젊은이들이 정유년 재침 때 적을 따라간 자가 무척 많지만 본국으로 도망쳐온 자는 적고 적국으로 돌아간 자가 많았습니다. 신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미 고국에 돌아갔으면 도망쳐 숨기가 쉬운데 다시 적국에 돌아왔으니 이것이 차마 할 짓인가?’ 했더니 ‘우리들이 약속을 맺고 빠져 달아나면 우리나라 복병들이 보고 쫓아오는데 우리는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사람들이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쳐도 더욱 빨리 달려오니 부득이 왜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우리 군사들이 수급을 바쳐 공을 세우려는 생각 때문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오.” 정희득의 ‘월봉해상록’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전쟁의 비극만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애달프다. 그의 가족사는 애달픔을 넘어 비극의 중첩이었다. 남원성이 떨어진 뒤 왜적이 함평으로 들이닥치자 정희득 일가는 급히 배를 구해 바다로 나갔다. 영광 칠산도 바다에서 적선과 조우하자 어머니는 “왜적에게 더러운 꼴을 당하느니 깨끗한 몸으로 죽겠다”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내와 형수, 누이동생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졌다. 남자들은 결박당하여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방도가 없었다. 함께 묶였던 일가 정절은 그렇지 않았다. 큰 소리로 왜적의 무도함을 꾸짖었다. 왜적이 그의 오른팔을 잘랐다. 그래도 멈추지 않아 왼팔마저 잘렸다. 저항하지 않은 정희득 형제는 일본으로 끌려갔다. 강항의 가족사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시기 같은 해역에서 왜적을 만난 강항 일가 여인들도 바다로 투신했다. 그러나 썰물 때라서 왜적의 갈고리에 건져 올려졌지만 두 아이는 물결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눈앞에서 어린 자식이 죽는 것을 뻔히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족과 헤어진 강항의 한이 조용필의 노래 ‘간양록’이 되었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로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허야 허야 허야 허야 어허허 허야 허야 허야 허야 어허허 노랫말과 곡조, 그리고 조용필의 목소리가 아무리 애달파도 어찌 그 한과 고통을 다 담으리! 이 노랫말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포로로 잡혀 끌려갔던 전라좌병영 우후 이엽(李曄)이 탈출을 시도할 때 썼다는 시에서 애절한 대목만 발췌한 것이다. 이엽의 시는 “삼한의 피를 받아 굵어진 이 뼈, 어찌타 짐승 놈들과 섞일 수 있으리(盡是三韓候閥骨 安能略城混牛羊)”로 끝난다. 그는 탈출에 실패하게 되자 “또 잡히느니 차라리 죽으리라” 하고 배에서 칼을 물고 바닷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다. 강항의 기개도 이에 못지않았다. 히데요시가 죽어 묘에 만금전이 세워지고 그 문루에 일세의 호걸로 떠받드는 글이 오르자 구경 갔던 그는 붓으로 그 글귀를 쭉쭉 그어버리고, 그 옆에 이렇게 써놓았다고 ‘간양록’에 썼다. “반생 동안 한 일이 흙 한 줌인데 십층금전은 울룩불룩 누구를 속이자는 거냐! 총알이 또한 남의 손에 쥐어지는 날 푸른 언덕 뒤엎고 내닫는 것쯤이야!(半生經營土一盃 十層金殿謾崔 彈丸亦落他人手 河事靑丘捲土來)” 굽히지 않는 절의와 의지를 가졌던 강항이나 정희득은 우여곡절 끝에 환국의 행운을 누렸지만 거개의 포로들은 이름 모를 땅에서 불귀의 고혼이 되고 말았다. 이탈리아 사제 카를레티(Carleti)가 남긴 ‘나의 세계일주기’에 외국인 노예상들에게 팔아넘겨지는 정경이 다음과 같이 기록됐다. “이 나라(Corea)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녀노소가 노예로 잡혀왔다. 그중에는 보기 딱할 만큼 불쌍한 어린이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주 헐값에 매매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도 12큐스티를 내고 5명을 샀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 인도 고야에 데려가 자유의 몸으로 놓아주었다. 그중 한 사람만은 플로렌스로 데려갔는데, 그는 지금 로마에 살고 있다. 그는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일보 김성우 특파원은 1979년 로마 현지 취재를 통해 안토니오의 선조가 한국인이었음을 밝혀냈었다. 노예로 팔린 사람들은 대개 마닐라, 홍콩, 마카오, 고야 등지를 경유해 아시아 지역의 유럽제국 식민지로 팔려가 사탕수수밭 바나나농장 등에서 혹독한 중노동에 시달렸다. 유럽으로 팔려가기도 했다. 외국인 노예 상인 거개가 포르투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규슈 곳곳에 지금도 당인정(唐人町) 또는 고려정(高麗町)이라는 마을 이름이 남아 있는 것도 조선인 포로가 그만큼 많았다는 반증이다. 당인정이란 글자 뜻으로는 중국인 거주 지역으로 이해되기 쉽지만, 그런 곳은 소수이고 거개는 조선 포로 집단 거주지였다. 일본 사람들은 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대륙을 동경한 나머지, 한반도나 중국을 ‘가라’라고 했다. 한(韓)도 가라요, 당(唐)도 가라로 읽는 것이 그 증거다. 당인정 또는 고려정이 있는 곳은 규슈의 크고 작은 도시 대다수로 보아도 좋다. 한반도와의 교통이 편리한 혼슈의 야마구치(山口) 현과 오카야마(岡山) 현, 시코쿠(四國) 등 서일본 지역 여러 도시에도 분포돼 있다. 그렇게 많이 붙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려는 조정의 노력은 한없이 굼뜨고 무책임하기만 했다. 포로쇄환은 정유재란이 끝나고도 7년이 지난 1605년이었다. 강화사로 갔던 사명대사 유정(惟政)은 새 권력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3000명의 쇄환 약속을 받아냈지만 실제로 데리고 돌아온 이는 훨씬 적었다. 1607년 회답사 겸 쇄환사로 갔던 여우길(呂祐吉)과 경섬(慶暹)이 그중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인원은 남녀 합쳐 1418명에 불과했다. 그 뒤로는 점차 감소해 1643년 쇄환사((刷還使) 때는 겨우 14명에 그쳤고, 그 뒤로는 흐지부지되었다. 수십 년 노력의 성과는 700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토록 성과가 부진한 이유는 첫째 일본이 빼돌리고 감춘 탓이고, 둘째는 일본 사회에 녹아든 사람들이 돌아가기를 망설인 탓이었다. 경섬의 보고서에는 “우리 일행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일본 지방관들이 피로인(被虜人)을 모조리 숨겨놓고 거짓으로 찾아내는 체만 하니, 장부에 있는 조선인 수와 실제 수가 달라 통분했다”고 썼다.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단념시키려는 심리전도 있었다. 이경직(李景稷)의 ‘부상록(扶桑錄)’에는 “쇄환된 자는 죽이거나 절해고도에 보내며, 또 사신이 각자 불러 모았다가 바다를 건너가서는 자신의 종으로 만들어 부려먹는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 소문에 현혹된 사람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어렵게 이룬 안정의 보금자리를 떠나기 싫은 사람이 다수였다. 일본인의 종이 되었거나 가정을 이룬 사람들은 나름대로 노력의 대가를 받는 생활에 그런대로 적응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어려서 잡혀간 사람들이 동화가 빨랐다. 지금 일본에서 조선 포로들의 자취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월봉해상록’에 “지나치는 사람의 반이 조선 포로들”이라던 나고야 성터 거리는 너무 조용하기만 했다. 그 많던 영주들의 진영 건물과 상업시설 주거시설 등은 간데없고, 찾는 이조차 뜸한 어촌마을이 되었다. 가라쓰(唐津) 시에서 버스로 40분을 달려 찾아간 요부코(呼子) 항에는 출어하는 배도 귀항하는 배도 안 보였다. 아침 일찍 귀항해 어획물을 부리고 출어를 준비하는 시간인 모양이었다. 부두 옆에 선 아침시장[朝市]만이 오전 10시인데도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후쿠오카 당인정은 시내 한가운데 있다. 지하철 오호리(大濠) 공원역에서 세 번째가 도진마치(唐人町)역이다. 역사를 빠져나오면 바로 도진마치 시장. 제법 큰 규모의 시장이라서 낮 시간에도 손님들로 붐볐다. 사가(佐賀) 시 당인정도 시내 중심가에 있다. 사가역을 빠져나와 일직선으로 뻗은 큰길에 도진마치 버스 정류장 팻말이 붙었고, 큰길가에 ‘도진마치 유래’ 안내판이 서 있다. “1591년 사가에 정착한 이종환(李宗歡)이 히데요시 조선 출병 당시 통사원(통역원)으로 종군, 도공들 ‘초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99년 영주 나베시마가 데려온 고려인들을 이곳에 모여 살게 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가 왜에 협력해 귀국하지 못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어 입맛이 더욱 개운치 않았다.
- 2017-12-28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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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무신 신고 달렸던 개띠들에게 축배를
- 2018년, 드디어 58년생 개띠들이 회갑을 맞이한다. 우리나라는 61세가 되면 회갑(回甲) 또는 환갑(還甲)이라 하여 특별히 생일잔치를 열었다. 요즘이야 식구들 모여 소박하게 밥 한 그릇 나누어 먹지만 말이다. 회(回)나 환(還)은 한 바퀴 돌아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는 뜻이라는데, ‘자리로 돌아왔다’는 그 말에서 알 수 없는 무게가 느껴진다. 어쨌든 회갑을 맞이하는 벗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다. 땡볕 내리쬐는 공사장에서, 시끄럽고 위험한 공장에서, 갑갑한 사무실에서, 긴장이 넘치는 병원에서, 영혼 없는 학교에서, 쓸쓸한 들녘에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든 삶터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벗들에게 인사를 전한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 잘 견뎌주어 고마우이.” 그리고 안타깝게도 다시 못 올 길로 먼저 떠난 벗들에게도 머리 숙여 인사를 전한다. “그대들 몫까지 살다가 곧 따라갈 테니 기다려주시게나.” 벗들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왜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까?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 나는 1958년 5월 5일 경남 마산시 월영동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말이 좋아서 ‘마산시’이지, 똥구멍 찢어지도록 가난한 마을이었다. 신발과 양말이 귀했던 때라 추운 겨울에도 고무신에 양말조차 신지 못하고 학교를 다니는 바람에, 내 발은 겨울철만 되면 동상에 걸려 붓고 가려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메주콩을 수건에 싸서 밤마다 내 발을 감싸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게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우리 마을은 거의 초가집이었다. 그때만 해도 집집마다 꽃이 피고, 마당에는 온갖 푸성귀들이 자랐다. 그래서 반찬거리를 돈 주고 사 먹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 집은 아주 작은 초가집이었지만 마당과 들머리에는 아침마다 맨드라미, 봉숭아, 접시꽃과 같은 수십 가지 꽃이 피었다. 채송화만 해도 여름 내내 하루 천 송이가 넘게 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옆집 친구랑 꽃송이를 헤아리다 학교에 지각한 적도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 집을 ‘석류나무 집’이라 불렀다. 마당가에 나보다 나이가 몇 배나 많은 석류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석류가 빨갛게 익으면 어머니는 제일여고 정문 앞에서 석류를 팔았고, 석류 판 돈으로 한 해 쓸 공책과 연필을 사주었다. 가끔 서리꾼이 나타나 석류를 도둑질해가는 바람에 아버지는 석류나무 가지 사이에 탱자나무 가지를 꺾어서 걸쳐놓곤 했다. 가끔 그 석류나무를 생각하면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온다. 가난은 전염병처럼 오래도록 우리 식구들을 못살게 굴었다. 형은 집을 나가 공장에서 돈을 벌어 스스로 고등학교를 다녔고, 누나 셋은 모두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뒤 부산 가발공장으로, 대구 섬유공장으로 돈 벌러 갔다. 나는 가난이 싫어서 스스로 학교를 포기하고 공장에 다녔다. 그때는 부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하루는 거나하게 술에 취한 아버지가 “사람은 배워야 사람이 된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낮에는 공장에 다니면서 내가 번 돈으로 뒤늦게 야간 중학교(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야간 중학교 수업을 마치고 걸어서 집으로 가면 거의 밤 열한 시가 넘었다. 몇 시간 겨우 자고 나면 아침 일찍 공장에 가야 했기 때문에 늘 잠이 모자랐다. 그때 내 나이 열네 살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야간 중학교 학생들은 모두 집안이 가난했다, 더구나 같은 학년인데도 나이 차이가 많았다. 서너 살 많은(1954~1957년생) 형들도 뒤늦게 공부하고 싶어 야간 중학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같은 또래들보다 ‘세상’을 일찍 배웠는지 모른다. 지금 돌이켜보면 가난하고 불편했지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코 내 삶을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으니까 말이다. 첫 시집 ‘58년 개띠’ 나는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58년생 개띠다. 쉽게 58년 개띠라 불러주어 고맙다. 왜냐하면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친근감이 드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1995년에 보리출판사에서 첫 시집 ‘58년 개띠’를 내고 세상에 이름이 조금 알려졌다. 시집을 내고 가톨릭여성회관 강당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100명이 넘는 손님들(거의 현장 노동자들이었다)이 찾아와 강당에 신문지를 깔고 여기저기 둘러앉아 막걸리에 파전을 먹으며 시를 읽거나 ‘민노래’를 불렀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행사를 하면 손님들이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다. 그때 손님들이 방명록에 적은 내용은 대부분 ‘띠’에 관한 글이었다. “70년생 개띠 왔다 갑니다. 저도 12년 뒤에 선배님처럼 꼭 시집을 내고 싶습니다.”, “58년 개띠 친구가 시집을 내다니, 내 시집처럼 기쁘네그려.”, “60년생 쥐띠인데요. 왜 58년생 개띠만 유명한가요?” 사람들은 ‘58년 개띠’에 실린 시들 중 ‘58년 개띠’라는 시를 좋아한다. 지면을 줄이기 위해 줄과 연을 조금 붙여서 옮긴다. 58년 개띠 해 오월 오일에 태어났다, 나는 양력으로는 어린이날 음력으로는 단옷날 마을 어르신들 너는 좋은 날 태어났으니 잘 살 거라고 출세할 거라고 했다. 말이 씨가 되어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 살고 있다. 이 세상 황금을 다 준다 해도 맞바꿀 수 없는 노동자가 되어 땀 흘리며 살고 있다. 갑근세 주민세 한 푼 깎거나 날짜 하루 어긴 일 없고 공짜 술 얻어먹거나 돈 떼어먹은 일 한 번 없고 어느 누구한테서도 노동의 대가 훔친 일 없고 바가지 씌워 배부르게 살지 않았으니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 살고 있다. 시집 ‘58년 개띠’는 20년 남짓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삶의 기록이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시집 제목과 표지를 의논하기 위해 서울에서 네 사람이 모였다. 보리출판사 차광주 대표, 편집부 강순옥 선생, 함께 편집 이야기를 나누었던 분과 나까지 모두 58년 개띠였다. 그래서 모두 시집 제목을 ‘58년 개띠’라 하자고 했다. 그때 그 자리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펄펄 살아서 빈 공간을 가득 메웠다. 58년생 개띠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한평생 옆집에서 살았던 친구처럼 반갑고 정겨웠다. 58년생 개띠들이 모여 ‘58년 개띠’ 시집을 내고 4년 뒤, 글을 써서 밥 먹고 살아가는(대부분 글만 써서는 밥을 못 먹고 산다) 58년 개띠 작가들 모임을 가졌다. 1999년 6월 4일, 첫 모임을 가진 곳이 서울 종로경찰서 맞은쪽 ‘동루골’이라는 조그만 술집이었는데 전국에서 서른 명쯤 모였다. ‘서울’이라는 먼 길을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버스 타고 올라온 58년생 개띠 작가들 모임은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개판은 엉망이라는 말이 아니고 ‘개띠’다운 술판이 벌어졌다는 말이다. 그날 모인 58년생 개띠 중 창비 김이구 평론가와 박영근 시인은 몹시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지만…. 회갑을 맞이하는 당신들에게 나는 13년 전에 복잡하고 어지러운 도시를 떠나 어릴 때 내가 살던 곳과 같은 작은 산골 마을에 뿌리를 내렸다. 이 나이에 13년째 마을 청년회장(?)을 맡고 있다. 도시에서 나를 돌아볼 새도 없이 바쁘게 살았으니, 이제 남은 삶은 작물을 가꾸듯 살고 싶다. 외로움을 벗 삼아 산골 이웃과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깨달으며 살아가는 맛이 아주 깊고 그윽하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숲을 떠나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산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다 보면 어느새 내 몸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 농부가 되고서야 내 몸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물려받은 땅 한 뙈기 없어 남의 논밭을 빌려 농사지으며 살아왔지만,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살아가는 벗들이 있어 든든하고 더없이 행복하다. 벗들이여, 이제 우리 나이 예순한 살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말은 받아들인다는 뜻이겠지. 몸을 쓴 만큼 섬겨야 한다는 것을. 머리 쓴 만큼 비워야 한다는 것을. 뱉은 말 만큼 들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 만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받은 만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떠나는 그날까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벗들이여,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허둥거리며 바쁘게 살지 마시기를! 사람으로 태어나 바쁘게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마음이 강물처럼 깊어져 미련도 원망도 욕심도 그냥 내려놓을 수 있기를! 살다 보면 어찌 눈물 마를 날이 있으랴마는, 그 눈물로 메마른 세상 흠뻑 적실 수 있기를.
- 2017-12-28 1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