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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민이야기 (1)이산가족의 만남
- 1998년 8월 남편은 왕복 비행기 표 1장과 이민 가방에 달랑 옷가지 몇 벌을 담아 김포국제공항으로 향했다. 6개월에 걸쳐 필자가 설득시키고 단행한 1차 이민이었다. 온 나라에 경제 위기와 그 도미노 현상으로 가정이 휘청거려 별다른 대책이 없어 무조건 단행한 모험이었다. 온 살림에 빨간 딱지가 붙고 집은 경매로 날아갔다. 게다가 여기저기 쏟아지는 빨간 독촉장들, 찾아오는 사람들과의 정신적 싸움에서 오는 고달픔은 차라리 휴식이 필요했다. 가장이라는 책임감으로 낯선 곳이지만 먼저 가서 여기저기 살펴보기 위한 작전이었다. 큰딸은 미국 고등학교 기숙사로 보내고 초등학교 작은딸만 데리고 가느라 졸지에 이산가족이 되었지만 무너져가는 가정을 직접 나서서 수습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떠나고 1년 후, 남편의 미국 생활은 그럭저럭 안정을 취해가는 것 같았다. 코리아타운에서 세탁소 일자리를 찾았고 얼마 안 되는 주급(주말마다 정산해줌)이었지만 혼자 생활하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수시로 국제전화로 연락하며 아이들 걱정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남편이 떠나고 난 그 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살림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태연하게 입술을 깨물며 다 살게 마련이라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나갔다. 막내로 태어났으나 큰아들 같은 남편은 힘든 것 다 견딜 수 있는 데 너무 외롭다고 전해 왔다. 서둘러서 작은아이 미국 비자를 만들어 이듬해 8월 이민 가방을 챙겼다. 작은 아이마저 보낸 그해 9월의 계절은 그림자들로 가득한 기나긴 방황의 몸서리치는 고독한 시간이었다. 방학이 시작되자 극적인 상봉을 위해 기숙사에 있는 큰딸과 서둘러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빠와 작은딸, 큰딸과 엄마, 눈물의 오작교 시간이었다. 남편은 캘리포니아의 태양에 까맣게 탄 노동자 얼굴로 덜덜대는 중고차를 끌고 나와 포옹하며 가족을 맞이했다. 온 가족은 만나자마자 코리아타운 한복판에 있는 북창동순두부 집으로 달려갔다. 값싸고 한국 정서가 담겨 있어 누구나 좋아하는 소박한 음식이었다. LA에서는 한 번씩 거쳐 가는 꽤나 이름난 곳이었다. 얼마나 맛나게 먹어대는지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를 정도였다. 남편은 부자 동네 아고라힐의 커다란 성 같은 집(방 5개짜리)에서 작은 방 하나를 한 달에 550달러에 렌트해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아이를 맞이하며 씨미벨리라는 시골 동네로 옮겨야 했다. 중학교 입학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한국 아이들이 없는 곳, 코리아타운에서 먼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왜냐하면 한국 아이들이 많은 코리아타운은 영어가 늘지 않기 때문이었다. 씨미벨리 집은 남편이 나가던 교회의 도움으로 한국 목사님 집의 방 두 개를 900달러에 얻어 마련했다. 남편은 불교 가정 출신이나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갔다. 교회만이 유일한 한국 사람들과 교류의 장소라며 주보 만드는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미국은 딸과 한방을 쓰는 것은 불법이어서 방 두 개짜리를 장만했다. 부엌은 없었으나 마당이 딸린 자그마한 예쁜 주택이었다. 가족은 큰방 옆에 붙어 있는 그라지(차량을 넣어두는 창고)에 조그마한 부엌을 만들었다. 온 가족이 함께하니 짧은 시간 안에 대충 그럴듯하게 아기자기한 부엌이 탄생했다. 누구나 처음 이민 오면 그렇듯이 이 사람 저 사람 살림을 가져다주었다. 짝 잃은 총천연색 그릇들이 부엌 풍경을 장관으로 만들어 주었다. 가족은 이사를 마친 후 코리아타운으로 달려가 삼겹살과 상추 등 각종 채소를 사와 파티를 벌였다. 미국 백인 동네에서 모처럼 만에 조우한 한국 이산가족은 한국 사람 사는 냄새와 삼겹살 내음이 넘실거리는 행복에 취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 2016-06-1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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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유재의 미술품 수집 이야기] 바다의 푸른 넋, 한 생애 젖어들고
- 이재준(아호 송유재) 봄 바다, 물이랑 위 바람이 너울질 때, 깊이 따라 색의 스펙트럼(spectrum)이 펼쳐진다. 더 깊은 곳의 쪽빛에서 옥빛으로, 얕은 모래톱 연두의 물빛까지 그 환상의 색 띠를 보노라면 아련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아쉽게 잃어버린 사람이 생각나고,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세월이 아프게 떠오른다. 바람 따라 물결은 끝없이 흘러가고 또 밀려오지만, 사념(思念)의 안개는 쉬이 걷히지 않는다. -밤하늘 별빛 바라보는/맑은 눈에 고이는/한 방울 눈물의 깊이에서/바다가 태어나듯- (허만하 시 ‘모래사장에 남는 물결무늬처럼’에서) 전혁림(全爀林 1916~2010) 화백은 남해의 통영에서 태어나 94세로 장서(長逝)할 때까지 바닷가를 떠난 일이 없었다. 통영수산학교 재학 시부터 그림 공부에 관심을 가졌다. 해방 후에는 유치진(희곡, 1905~1974), 유치환(시, 1908~1967), 윤이상(음악, 1917~1995), 김상옥(시조, 1920~2004), 김춘수(시, 1922~2004) 등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과 ‘통영문화협회’ 창립동인으로 활동하고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정물’ 입선을 계기로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해 1952년 그 유명한 ‘밀다원(蜜茶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연다. 1950년 부산지방 최초로 추상회화를 수용한 주인공이며 1955년까지 해마다 개인전을 열어 미술에 대한 열정을 꽃피웠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는 부산 대한도자기 공방에서 도자기 그림을 연구하여 훗날 도자화(陶瓷畵), 도조(陶彫), 채색테라코타의 내공을 쌓았다. 1976년대까지 부산에 주로 머물되 통영 일대와 바닷가 갯마을 풍경을 진한 청색조의 활달한 붓놀림으로 그리면서 추상화와 부감(俯瞰)의 구도를 과감히 활용하였다. 1977년 통영으로 귀향, 임종 시까지 통영을 떠나지 않았다. 2003년 5월 ‘전혁림 미술관’을 향리에 세웠으며 2005년에는 ‘구십 아직은 젊다’의 표제로 개인전을 여는 등 오방색의 평면, 입체오브제, 도자기, 목조(木彫) 등 만다라를 연상케 하는 다양한 장르의 미술활동으로 노익장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이 그림 ‘충무항’은 1980년대 통영 귀향 후의 작품으로, 반추상의 부감법이 나타난다. ‘김 과장 전시장 가는 날’이라는 타이틀로 열린, 아트페어 개막 날, 참여한 화랑에서 원로·중진미술가들의 작품을 한두 점씩 저렴하게 판매할 때 구입한 작품이다. 그 화랑 대표는 요즈음 만나도 이 작품의 안부를 묻곤 한다. 산자락은 노을에 설핏 물들고, 조감(鳥瞰)으로 된 구도 속 낮은 산과 바위로 나뉜 바다엔 고깃배 몇 척이 한가하다. 망망대해는 아니지만 어항의 실경이 반추상 기법의 꽉 찬 밀도로 그려져 안정감을 주고 있다. 바다가 이미 내 안으로 들어와 일상의 리듬을 같이 하고 있다. 이 화가는 정물이나 모판[木板] 위에 올린 채색화, 도자화 여타의 작품 속에서도 푸른 바다 이미지는 빠뜨리는 일이 없다. ‘장롱 깊숙이 보관되었던 한복에 저절로 바랜 색상이나, 건물에 칠한 단청의 미’가 있다고 평자는 말한다. 노상, 바다가 이 화가 의식에 잠재되어 있기에 부지불식간에도 계절 따라 변화무쌍한 바다 이미지가 여러 장르의 미술 작품으로 스며들게 된 것이리라.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외국 유학도 하지 않고 ‘고구려 벽화에서 우리나라 미술의 연원을 찾고자 한다.’는 이 화가의 부단한 노력이, 한때는 지방에 묻힌 채 저평가되었던 질곡의 시절을 넘어, 큰 예술인으로 꽃피우게 되었다. 바다를 주제로 미술활동을 하는 예술가가 어찌 한 둘일까마는, 온 생애를 푸른 바다에 넋을 적신 김한(1931~2013) 화백을 우선 꼽지 않을 수 없다. 함경북도 바닷가 명천포구의 ‘솔골마을’에서 태어나 조금 남쪽, 성진항의 외가에서 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졸업 시 발군의 그림 그리기로 특기상을 받으며 화가를 꿈꾸었다. 한 집안의 장손이 ‘환쟁이’가 될 수 없다는 부친의 결사반대로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는 의학전문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입학식만 마치고 가출하여 그림과 문학에 골몰하며 어려운 현실과 부딪쳐 나갔다. 6·25가 터지자 그 와중에도 화가가 되어야 한다는 열망만으로 단신 남하하였다. 네 해 뒤 천신만고 끝에 따로 남하한 부모와 동생들과 부산에서 상봉하였으나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던 조부모와 남동생 하나는 고향에 남은 채였다. 한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장남의 사명감과 냉혹한 삶의 괴리 속에서도 홍익대 미대에 입학하였지만 끝내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57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비로소 화가의 길에 입문하였다. 간판을 그리고, 무대장치를 돕거나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미군의 후의(厚意)로 베트남 전쟁 시 파월, 3년 여 동안 초상화 등을 그리며 경제적 기반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 주제는 두고 온 고향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고깃배 몇 척이 고작인 가난한 포구, 어민의 고단한 삶을 바다와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색으로 그려냈다. 특히 남편의 무사 귀가를 바라며 마음 졸이는 어부 아낙의 아픔을 멍 자국 같은 짙은 청회색으로 표현하였다. 화가 자신이 문학에 심취했던 깊은 소양이 화문집(畵文集)을 출간할 만큼 높은 수준이었기에, 그의 그림은 서사적이며 설화적이다. 이 그림 ‘회(懷)’도 열매 가득 달린 나무 아래 모자의 행복한 순간을 우화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좁은 화폭 속에서도 사랑과 풍요로움이 가득 넘친다. 푸른 이마에 어린 우수를 노란 꽃 한 송이가 달래주고 있다. 과장된 눈빛이나 부푼 손가락은 역설적임에 틀림없다. 가난하고 피곤한 아낙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려는 화가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인사동 화랑 경매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낙찰 받을 수 있었다. 1995년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하여 오로지 그림 그리기에 천착(穿鑿)한 공로를 공인 받았다. 이후 왕성한 작업으로 2013년 생애를 마칠 때까지도 줄곧 푸른색 고향바다를 화폭에 남겼다. “그의 그림은 온통 고향과 추억으로 물들어 있다. 그의 그림은 목젖을 메이게 하는 아릿함이 가득 고여 있는, 그림으로 그리는 애조 띤 서정시이다. 그의 푸른색은 공간을 알리는 색이 아니라 시간을 알리는 색”이라고 어느 평론가는 말한다. 전혁림이나 김한 화가에게 바다는 푸른 넋이었으며, 피돌기와 같은 숙명이었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 2016-06-12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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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의 유혹 Part 2. 희망] 희망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 한 인생 후반전은 더 넓게
- 김정숙 홍보컨설턴트 대학에 입학하던 해 아버지는 내게 나침반을 선물하셨다. 가죽 케이스에 들어 있었다. 그때는 나침반 선물의 의미를 잘 몰랐다. 나이 오십에 들어서고 나니 하고 싶었던 말씀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떨림을 멈춘 나침반은 아무 쓸모가 없다. 타오르는 불꽃은 항상 더 높이 오르려고 혀를 날름거리며 떤다. 사람이라면 심장의 떨림이 있으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방향 없이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압력이었다. 지금도 그 나침반은 떨림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나침반 바늘은 떨면서 묻는다. “떨림 없는 시간을 살고 있지 않나”라고. 선택의 순간마다 아버지의 나침반이 있었다. 지금도 심장이 떨리는 일을 찾아 공부하고 사람들을 만난다. 작은 모임을 꾸리고 그 모임이 또 다른 모임을 만든다. 느슨하지만 가느다란 연대의 끈은 놓지 않고 있다. 학교를 마친 이후에도 공부를 멈춘 적이 없지만 학위는 없다. 끊임없이 글을 쓰지만 작가 명함은 없다. 자격증 따는 일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온 듯하다. 학위를 바랐다면 대학원을 갔어야 했다. 작가 명함이 필요했다면 책을 냈어야 했다. 간절히 필요하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필요한 공부를 했고, 매일 글을 읽고 쓰는 생활이 즐거웠을 뿐이다. 떨림은 희망이다. 사막을 40년 동안 헤매면서도 유대인들이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가나안’이란 보이지 않는 희망 때문이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긴다. 목적지까지 길이 얼마나 험한지 알고 간다면 금방 지쳐버리거나 중간에서 포기할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것이 힘이 더 세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는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하는가. 오십을 넘기면서 성한 데보다 상한 데가 많아서인지 상처에 와 닿는 소금기가 자주 느껴진다. 그럴 때면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에 대해 생각한다. 희망을 희망하는 존재를 지켜주는 것은 서로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는 일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사실 입장을 바꿔 생각하기 어려운 존재다. 생각도 존재가 만든 집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아이들이 어릴 때 작은 케이크를 나눠 먹으라고 주면, 두 녀석은 서로 많이 먹겠다고 다툰다. 평소에도 다툼이 일상인 형제지만 먹는 것으로 다투는 것은 딱해 보였다. 솔로몬의 해결책을 고민했다. 아무리 어린애라도 둘 다 불만을 품을 수 없는 해결 방법이 필요했다. “네가 형이니까, 케이크를 두 조각으로 나누렴. 그런 다음에는 동생인 네가 먼저 고르렴” 이렇게 하니, 형은 기를 쓰고 똑같은 크기로 케이크를 잘랐다. 형은 자를 권리, 동생은 고를 권리를 가졌으니 불만이 있을 수 없다. 혹 불만이 있다 해도 겉으로 드러낼 수가 없다. 입장 바꿔 생각하기가 어렵다 보니 제도적으로 만든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일 것이다. 내 맘대로 하고 싶은 욕구가 통제되기 시작하니, 이 또한 나이 듦이 주는 선물이다. 인도 힌두교에서는 50세가 넘은 남자는 임서기(林棲期)라 하여 가정을 떠나 숲 속에서 혼자 사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동네 뒷산에 원두막을 치고 혼자 산다. 그동안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바쁘게 살았으니 자신을 돌아보고 수행하라는 종교적 의미가 있다. 물론 사바나의 수사자처럼 자손번식의 임무가 끝난 늙은 남자는 가정에 짐이 된다는 현실적 의미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평균수명 50세 사회에서 나온 종교적 관습이다. 백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인생 후반전을 보다 넓고 큰 세상에서 설계하라는 유혹의 관습으로 읽힌다. 가장 강한 유혹은 자신을 돌아보고 싶은 유혹일 것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에서 무사회 수장인 궁보삼이 숨을 거두기 전 수제자에게 일러준 마지막 수는 노원괘인(老猿掛印)이었다. 궁씨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무술 64수 중 최고 단계인 노원괘인은 바로 ‘돌아보는 것’이었다. 돌이킬 수는 없지만 돌아볼 수는 있다.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뒤돌아볼 수는 있다. 이것은 시간에 갇힌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한 수가 아닐까. 뒤돌아보니 눈앞의 숫자들과 코앞의 숙제에 발목 잡혀 허우적댔다. 절망하지 않으려고 희망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아니 내 절망이 더 커 보였다. 주먹을 더 불끈 움켜쥐었다. 움켜쥔 주먹을 펼치면 가진 것이 다 쏟아질까봐 두려웠다. 이제는 크게 다치지 않을 낙법도 익혔고, 좀 다친다 해도 별것 아니라는 배포도 늘었다. 펼친 주먹은 새로운 것을 쥘 수 있는 기회라는 것도 알았다. 나침반의 바늘은 아직도 떨림을 멈추지 않고 있다. 떨림의 유혹이 멈추지 않는 한 인생 후반전은 더 넓은 세상에서 시작할 수 있다.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살라는 유혹이다. 떨리는 나침반의 바늘은 느슨한 관계를 확장하라고 한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라고 한다. 그곳이 진북(眞北)이라고 알려준다. 후반전은 어릴 적에 던졌던 막막한 인생에 대한 질문의 답을 기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가.’ 이 질문의 답을 구해가는 여정, 또는 그 질문을 감당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주먹을 펼쳐 아픈 이들도 감싸면서 나간다면 전반전보다 공은 강하게 골문으로 돌진할 것이다. 백세인생 후반전의 휘슬 소리가 들린다. >> 김정숙 홍보컨설턴트 공공정책 컨설팅을 주로 하는 홍보컨설턴트이며 부천 놀라온 오케스트라 기획홍보이사
- 2016-06-0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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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고독력 키우기 조 왕 래
- 퇴직하고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지면 세상을 잘못 산 것처럼 자기비하에 빠져든다. 아내의 눈치도 보이고 아내도 친구들로부터 ‘요즘 너 남편 뭘 해?’ 하는 소리에 답변이 궁해진다. 아파트 경비도 나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이 시간에 이 사람이 왜?’ 하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불러서 함께 놀러 다닐 만만한 친구도 없다. 노인정이나 경로당에 가기는 죽기보다 싫다. 이것이 5,6십 세 퇴직자의 현실이다. 등산이나 낚시로 소일 해보려하지만 주말에 어렵게 시간 내서 가는 것이 취미생활이지 매일 직업처럼 등산이나 낚시 다니는 것은 낭만이 아니다. 어느 산에 가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 아무리 큰 물고기를 잡아도 어디 자랑할 곳도 없다 이내 이런 취미가 시들해진다. 무엇보다 나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퇴직이라는 형벌로 시베리아 벌판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다. 투명인간처럼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는 것이 서러움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대다수 직장 은퇴자들은 직장에서 누구와 더불어 사는 것에 익숙해져 왔다. 어려서는 가족의 관심과 사랑 속에 커왔고 학교, 직장생활도 사람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다. 그러나 50이 넘어 퇴직의 대열에 휩쓸리면 더 이상 나는 어디가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가족이 모이는 초대받는 자리에도 어른으로써 반짝 관심만 받다가 이내 손자손녀에게 주인공 자리를 물려줘야한다. 남자들이 가족을 부양하기위해서 곁눈질하지 않고 너무 직장에만 올인 해서 변변한 취미하나 만들지 못한 잘못이다. 이런 변화에 익숙하지 않아 견디기 어렵도록 외로워하고 속으로 눈물을 삼킨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비관하거나 신세 한탄을 하면서 술이나 도박에 빠져들고 외도나 낭비벽으로 심신이 타락의 늪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고독이 나를 강하게 키운다는 신념을 갖고 고독에 맞서야 한다. 고독에 당당히 맞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한다. 퇴직 후 젖은 낙엽처럼 아내에게 딱 달라붙어서 아내의 숨통을 조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혼자 무엇을 할 것인가를 키우는 것이 고독력이다. 고독력은 숨 오래참기처럼 가만히 오래 견디는 것이 아니다. 고독력은 혼자 잘 지내는 법이고 연습이 필요하다. 내 친구 한사람은 퇴직 후 자신의 적성은 고려하지 않고 막연히 사진을 찍겠다고 100만원이 훌쩍 넘는 카메라를 사고 동네 사진 강좌도 등록하여 열심히 배웠다. 찍은 사진을 편집도 하여 컴퓨터에 정리하는 실력까지는 도달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진을 보자는 사람이 없다. 보여줄 사람도 없고 당연히 평을 해주는 사람도 없다. 시간에 비례하여 열정이 식어버리고 카메라는 먼지만 덮어쓰고 있다. 친구는 사진을 이용하여 뭘 해보겠다는 청사진이 미흡했다. 중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려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생활에 필요한 기초 공부를 잘 해두어야 한다, 필연코 오는 퇴직이나 은퇴 후의 무었을 할 것인가 미리 준비해야한다. 고독력을 키우고 혼자 일하고 노는 법을 터득해야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과 같이 혼자여서 장점도 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공부하면 집중하기 어렵다. 남들과 대화하면서 사색에 빠져들지 못한다. 고독은 우리 자신이 집중해서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성철스님은 생전에 파계사에서 철조망을 치고 8년의 세월을 장좌불와(長坐不臥) 생활을 했다. 피아니스트는 화려한 무대를 위해 혼자서 수 만 번의 건반을 두드린다. 사진작가 변용도 선생은 4년간 무려 30만장의 사진을 혼자서 찍으면서 사진작가로 우뚝 섰다. 영어를 잘 하려면 수 백 번의 혼자 하는 반복 훈련이 필요하다. 이름난 선수는 남들이 모르는 혼자만의 피눈물 나는 고독한 연습이 있었다. 무엇이든 적성에 맞는 목표를 세우고 지속적으로 한다면 성공의 축배까지는 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는 있다. 새 출발을 하기위한 고독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하다. 첫째로 나는 법을 준수하고 평범하게 살아온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늘 주문한다. 과거 회사 대표를 했고 대학 수석 입학 따위는 다 흘러간 일이다.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내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면 할수록 주위에서 멀어질 뿐이고 자신의 지금 처지에 비관만 든다. 두 번째로 나는 건강해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수명100세 시대에 5,6십대는 이제 겨우 반환점을 돌았을 뿐이다. 현대는 근육질의 노동력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아직은 싱싱한 내 육체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셋째로 내 두뇌는 새로운 것을 받아드릴 여유가 있고 누구와도 대화가 가능한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다. 배우는데 나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좀 더 노력하면 뒤처질 이유가 없다는 자신감이있어야 한다. 넷째로 나는 남의 시선에 별로 개의치 않고 마이웨이를 외친다. 그렇다하여 남으로 부터 지탄을 받을 일을 할 사람은 아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다. 원칙대로 양심껏 사는 것이 행복이다. 은퇴 전에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살기위해 자신의 처지와 적성을 잘 알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빨리 찾아야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열 가지를 적고 가능한 것부터 실천에 옮긴다. 필자는 육체적인 활동이 좋다. 테니스도하고 마라톤도 한다. 일하는 젊은이들과 부딪히는 것이 좋아서 틈틈이 건설현장에서도 일한다. 현장은 언제나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여기서 나를 지키기 위한 긴장이 즐겁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내가 좋아 한다는 것도 발견했다. 독서마라톤 대회에도 출전하면서 일 년에 200여권의 책을 읽는 것이 즐거움이다. 읽고 느끼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글로서 재탄생을 시킨다. 남편의 밥 때문에 아내의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도 싫다. 혼자서 밥하고 빨래해야 할 때는 직접가 하면 된다. 고독이 사람을 강하게 키운다는 신념을 가지면 인생이 더 자유롭고 여유로워 진다.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적성을 발견하고 고독력으로 즐기며 발전시켜야 노후가 보람된다.
- 2016-06-03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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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촌뜨기가 국가품질명장이 되기까지
- 가뭄이 들어 세상이 모두 타들어 가더라도 마르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계곡이다. 계곡은 세상의 모든 것이 말라도 마르지 않는다.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낮은 곳으로 임하는 ‘계곡의 정신’은 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의 원천이다. 이 같은 계곡 정신을 그려 노자는 ‘도덕경’에서 곡신불사(谷神不死)라고 했다. 진정한 승자는 세월이 지나봐야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필자가 마음속 깊숙이 간직하면서 괴롭고 힘들 때 되뇌이는 생활신조다. 필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미 암소 1마리를 키우면서 새끼를 낳으면 가축시장에 팔아서 생활비와 교육비를 충당하고, 논과 밭을 소작해 먹을 것은 해결하며, 산 비탈길에서 잡목을 베서 집까지 지게지고 와서 말린 후 땔감으로 사용하는 그런 집이었다. 필자 집에선 여름철 더위는 볏짚으로 만든 멍석을 마당에 깔아 놓아 이기고, 모기와 벌레는 잡풀로 연기를 만들어서 퇴치했다. 또 부러진 소나무 옹이를 태워서 저녁 밤을 밝혔다. 이렇듯 옹색했으나 낭만도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저녁 밤하늘의 반짝이는 유난히도 많고 별들을 누나와 동생들이랑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하면서 별의 개수를 셌다. 부모님은 무척 지혜로운 분들이었다. 귀뚜라미와 여치, 소쩍새와 부엉이 소리를 들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으면 당시에는 시계도 없는데도 달그림자가 기울어진 정도와 대기 온도 차이로 시간을 말씀하시곤 했다. 아무리 시골이지만 초등학교 입학식 때나 어린이날, 각종 행사 때는 부유한 집안의 친구 부모들은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고, 돈 들여 파마까지 하고 온다. 특히 생전 처음 보고, 먹어보는 음식과 다과를 가지고 온다. 이런 음식을 필자는 내내 계속 얻어먹기만 했다. 필자는 이들의 이런 생활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목표로 삼았다.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할 기회를 줬다는 점에서 부자 친구와 부모들에 감사한다. 그 당시에는 하루하루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길게만 느껴졌으나 돌이켜보면 너무 짧은 추억의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흘러간 세월이 너무 아쉽기만 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시내 아이들은 학원 다니고 공부하는 동안 소 풀 먹이고, 소 풀 베면서 잠깐의 틈바구니 시간을 활용해 공부했다. 그래서 항상 손에 책을 들고 다녔다.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먹고 살기 힘든 집안에서 대학은 꿈도 꿀 수 없는 먼 나라 이야기 동화에 나오는 ‘상상의 우주선’이었다. 초등학교를 6살에 조기 입학해 고등학교 졸업반일 때는 공무원 시험을 볼 수 있는 최소 연령에 미달해 응시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바로 직업 전선에도 뛰어들 수 있는 실력도 없어 공학도가 되기로 했다. 관련 자격증을 취득해 기술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대학 전기과에 입학했다. 남들은 대학의 낭만을 즐기고 여행가는 사이 자격증 취득 공부와 취업준비에 매달린 결과 졸업반 여름에는 최연소 기사자격증 3개를 취득하고 국가공무원 및 한전 입사 시험까지 동시 합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필자는 두 가지 직장 가운데 국가공무원을 선택했다. 공무원으로서 첫 발령지는 연고도 없는 서울이었다. 덕분에 난생처음 서울에서의 직장 생활이 시작됐다. 하지만 호사다마라던가. 기대에 부풀어 첫 월급을 받았는데 숙박비와 식비도 충당도 못 하는 수준이었다. 공무원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면 계속 통장 잔액가 마이너스 되는데 이걸 누구에게 손 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고민만 쌓이는 사이 한국전력공사 신입사원 연수원 입교통지서가 날아왔고 미련 없이 공무원은 사직서를 내고 한전에 입사했다. 한전은 월급이 공무원의 3배가 넘었다. 그 당시엔 후회 없이 잘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전연수원 교육을 마치고 화력발전소에 처음 부임해 교대근무 37개월 후 원자력발전소 건설 현장으로 보직을 변경됐다. 그런데 우선 용어와 도면, 시방서, 서류가 모두 영어로 돼 있다. 우리나라가 원자력 건설 기술이 없어 외국인들이 같이 투입됐는데 이들과도 영어로 소통해야 했다. 영어와 사투하느라 힘들었으나 그래도 신기술 분야여서 정말 흥미로웠다. 하루 종일 보고, 배우고, 현장 쫓아다니고, 온통 정신없이 업무에 몰두하다 보면 하루해가 언제 가고 오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건설현장에는 외국인은 오전 9시 출근에 오후 5시 퇴근하게 돼 있었지만 한전 직원은 오전 8시 출근에 오후 퇴근 시간이 따로 없을 정도로 한마디로 일에 미친 미치광이처럼 업무에 몰두했다. 필자의 원자력 건설 처음 10년은 외국인들에게 배우는 시기였고, 그다음 10년은 국산원자력발전소 1호의 건설에 참여하는 성장기의 단계였으며, 이어 10년은 선행호기 문제점을 찾아 개선하고 품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립기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발전하기까지 기술자의 한사람으로서 이바지했다는 생각이다. 특히 이런 공로로 국가품질명장에 선정되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품질상은 말보르상이지만 국내에서는 품질경영상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기업이 아닌 개인이 도전할 수 있는 최고의 품질상은 국가품질명장이다. 제안 실적, 설비개선 건수 및 개선 실적, 꾸준한 품질 개선 활동 실적, 자격증 취득 건수, 품질교육 실적, 사회봉사활동 시간, 현장 경력, 품질경진대회 포상실적 등으로 1차 서류심사를 한 뒤 2차 필기시험, 3차 현장실사, 4차 면접시험을 거쳐서 최종합격자를 가린다. 선출된 품질명장은 매년 10월 정부주관 품질명장 및 뺏지 시상식이 부부 동반으로 거창하게 치러지고 있다. 국가품질명장이 되면 사내에서는 사장상 공로 1등급과 해외교육, 사내외 품질개선활동 심사위원, 품질교육 등 다양하게 후진을 양성하도록 기회가 주어진다.
- 2016-06-0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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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46년生, 결핍과 허기의 시대
- 문창재 내일신문 논설고문 집에서 지하철역에 가려면 백화점 두 곳을 지나게 된다. 하나는 주로 중소기업 제품을 취급하는 곳이고, 하나는 굴지의 재벌기업 소유다. 통행인이 많은 길옆 점포들은 고객을 유혹하려고 바리바리 물건을 쌓아놓고 늘 ‘세일’을 외친다. 60층이 넘는 주상복합 아파트 세 동의 하부를 이루는 재벌 백화점 지하에는, 지하철역과 통하는 무빙 워크가 있어 편리하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젊은 날 나를 괴롭힌 결핍의 시대가 떠오른다. 그 많은 의류와 잡화들이 그런 회억의 실마리다. ‘그때 저렇게 값싸고 질 좋은 방한복이 있었으면 그날 그렇게 떨지 않았을 텐데….’ 눈에 띄는 제품마다, 후각을 파고드는 음식과 향신료 냄새마다 지나간 결핍의 시대 영상을 내 기억의 창고에서 끌어낸다. 저런 신발이 있었으면 시린 발을 동동거리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저렇게 강렬하게 후각을 유혹하는 음식이 그 시절에 있었던가! 4·19 학생혁명이 일어난 1960년 제야에 나는 처음 서울에 왔다. 다음 해 3월의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위해서였다. 그날 아침 나는 지독한 추위에 떨었다. 아마도 영하 20도는 되었을 혹한의 미명이었다. 삭풍이 몰아치는 신작로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얼마나 제자리 뛰기를 했던지, 눈썹에 먼지가 허옇더라 하였다. 그 새벽 버스는 오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장터에 올라가 보았다. 운전사가 버스 밑에 엎드려 장작불을 피우고 있었다. 밤새 얼어 시동이 걸리지 않는 기관을 녹인다는 것이었다. 밤에 읍에서 올라와 다음 날 새벽에 떠나는 그 버스밖에는 교통편이 없었다. 도리 없이 서울행이 하루 늦어졌다. 구불구불 느릿느릿 달리는 그 버스 편으로 250리 밖 중앙선 철도역에 닿아, 귀성객으로 꽉 찬 열차에 결사적으로 올라탔다. 짐짝처럼 흔들리고 구겨진 열다섯 시간의 여행 끝에 청량리역에 도착한 그날 밤부터 나는 지독한 감기몸살로 앓아 누웠다. 그때 나의 입성은 초라하였다. 마직 검정색 교복 안에 목내의를 겹쳐 입었을 뿐이었다. 외투도 털목도리도 없이 얇은 명주 수건을 목에 두르고 세 시간 넘게 한데서 떨었으니, 얼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신발도 그랬다. 눈만 흘겨도 찢어질 것 같은 조잡한 운동화 차림이었다. 한겨울 백두대간 종주산행 때나 한라산 눈밭에서도 그렇게 발이 시려본 적이 없는 근래의 기억과 비교하면, 참 어이없는 시대였다. 우리는 ‘해방둥이’로 불린 축복의 세대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광복조국에 태어났으니 어른들 보기에 얼마나 복 받은 세대겠는가. 그렇지만 우리의 유소년 시대는 그 반대였다. 6·25 전쟁의 격류 속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전쟁 중에 입학한 학교생활의 하나부터 열까지가 없거나 모자랐다. 그러나 큰 불편을 몰랐다. 당연한 줄 알았다. 산골짜기여서 6·25 때는 피란을 가지 않았다. 광산 갱도 안에서 급박했던 며칠을 피하고, 인민군과 국군에게 번갈아 지배당한 몇 달이 지나간 1·4후퇴 때는 피란을 갔다. 모두 피란을 가라는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하였다. 태백준령 눈밭을 넘어 경상북도 봉화 땅에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다음 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국공 양측 군대의 본부로 쓰였던 교사는 불타고 없었다. 컴컴한 군용천막 안이 교실이었다.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책상도 없는 바닥에 앉아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가마니 바닥에 책과 공책을 펴놓고 ‘가갸거겨’를 배웠다. 칠판을 보고 글씨를 쓰려면 궁둥이를 높이 쳐들고 어깨를 낮추어야 하였다. 궁둥이 때문에 칠판이 안 보인다고 툭하면 싸움이 났다. 교과서가 부족하여 두 사람이 한 권을 같이 보았다. 그러다가 한두 아이가 작은 책상을 들고 와서 교과서와 공책을 올려놓았다. 그게 부러워 너도나도 그런 책상을 들고 다니게 되었다. 줄지어 들고 와서 하학 때 들고 나가는 모습이 교문 앞 풍경으로 굳어졌다. 날씨가 풀려 야외수업을 할 때가 제일 즐거웠다. 특히 벚꽃 그늘에서 공부할 때가 좋았다.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고학년이 되어 새로 지은 판잣집 교사에 들어갔을 때는 행복하였다. 소나무 판자의 향기가 그윽한 널따란 교실 벽을 트고 학예회를 할 때는 세상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몇 해가 지난 뒤 ‘사라호’로 불린 태풍에 학교 함석지붕이 날아가고, 벽면이 위태롭게 기울었을 때는 왜 우리 학교만 그런 신세가 되었는지 의아스러웠다. 그때는 너나없이 돈이 없었다. 돈을 본 일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님 따라 화전민 마을에 갔다가, 자두 한 되를 5환에 사먹은 일이 있다. 돈 구경을 못 해보았는지, 촌 아주머니는 선생님이 꺼내든 10환짜리와 5환짜리 돈 가운데 빨간색 5환짜리가 탐났던 모양이다. 10환짜리를 주려 하니 빨간 돈을 달라 하였다. 태풍 피해자 돕기 의연금 같은 돈 걷는 일에 현금을 낼 수 있는 아이는 드물었다. 새 학기가 되어 갈려 가는 선생님에게 주어야 한다고 전별금을 걷을 때도 그랬다. 돈을 낼 수 없는 아이들은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을 한 됫박씩 가져왔다. 팔아서 돈으로 주었던 모양이다. 6학년 수학여행 때도 쌀을 지고 갔다.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셨다는 정암사까지 80리 길을 쌀 두 되를 지고 종일 걸어서 갔다. 밤중에 도착하여 지고 간 쌀로 밥을 지어 먹고, 다음 날 수마노석으로 쌓았다는 돌탑을 보고, 또 종일 걸어서 돌아왔다. 객지에 공부하러 나간 학생들 하숙비도 쌀로 내던 시절이다. 식량의 결핍은 너무 슬퍼 되돌아보기 싫다. 그 시대 어느 고장 어느 마을이고 넉넉히 먹고 산 데가 없으니 특별한 이야기는 못 되리라. 그러나 미국에서 왔다는 우유가루 배급 이야기만은 빼놓을 수 없다. 쌀자루에 그걸 배급받는 날, 손으로 집어먹어 얼굴에 허연 가루를 묻히고 장난치던 일이 결핍의 시대 화제에서 빠질 수는 없다. 사료용이었다는 그 가루를 쪄서 과자처럼 만들어 먹은 날에는 어김없이 배탈이 났다. 그런 날 온종일 학교 변소가 붐비던 일은 비탄의 감정 없이는 돌아볼 수 없다. 사람 사는 세상에 꼭 있어야 할 것 가운데 책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을 파는 곳이 없어 낙망하였던 일은 나의 소년기에 큰 상처가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지 못하여 기가 죽어서 지낸 몇 달 동안, 나는 어린이 도벌꾼이었다. 중학교 참고서를 사다가 독학을 하리라는 장한 꿈으로 산에 올라 소나무를 베어 젖혔다. 그걸로 장작을 만들어 장에 지고 가면 “어린 것이 진학을 하지 못하고 나무꾼이 되었구나!” 하고 측은해 하며 사주었다. 그렇게 참고서 값은 마련되었으나 책을 살 길이 없었다. 빨간 딱지 이야기책이나 취급하는 잡화점에 부탁하여 ‘간추린 영어’ ‘간추린 수학’ 같은 참고서를 주문하여 책을 손에 넣고 나니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알파벳을 배워 본 일이 없는 영어 까막눈에게 영문법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수학도 그랬다. 1학년 2학기에 편입한 첫 수학시간부터 나는 그 과목과 멀어져야만 하였다. 그때 선생님들은 왜 그렇게도 질문을 싫어하셨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집안에도 이웃에도, 그 목마름을 풀어줄 사람이 없어 나의 영어와 수학은 점점 ‘불구’가 되어 갔다. 읽을거리에도 목말랐다. 교과서 말고는 책도, 신문도, 잡지도 없었다. 유일하게 책을 가진 동네 형 집에서 찾아낸 책들은 소용에 닿지 않았다. 서울에서 신문을 배달하며 야간대학에 다니던 그의 책꽂이에서 어느 날 눈에 번쩍 뜨이는 책을 발견하였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였다. 그 전 해였던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빌려다 읽어 보았으나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우리말로 된 책이었지만 그렇게 어려웠던 까닭을 이제는 알만하다. 노벨상 대목을 노려 급하게 이중삼중 번역판으로 내놓았을 책의 내용이 오죽하였으랴! 그나마도 얇은 축약판으로 나온 책이니 물어볼 나위도 없는 일 아닌가. 책에 대한 허기를 채우려고 나는 서울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도서반에 들어갔다. 방과 후 교내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책을 찾아주고 반납 받은 책을 정리하는 서비스의 대가로 도서반원에게는 관외대출 특전이 주어졌다. 그 혜택 덕분에 책과 가까이 하게 된 것이 내 인생행로의 나침반이 되었다. 서울생활에서는 겨우 책에 대한 갈증을 풀었을 뿐, 다른 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내 주머니는 텅 비어, 갖고픈 게 있어도 가질 수가 없었다. 물건은 많은데 돈이 없어 욕망을 채울 수 없는 고통이 더 크다는 걸 그때 알았다. 고등학교 3년간 통학로였던 서울역 염천교 길은 오사리 잡탕. 백화점이었다. 갖가지 먹을 것을 파는 노점상에서부터 입을 것, 신을 것, 지닐 것, 야바위판 등등 없는 게 없었다. 어떤 루트로 흘러나온 것인지, 시장골목보다 값싸고 멋진 물건으로 넘쳐났다. 그러나 한 달 치 전차회수권 60장이 유일한 유가증권이었던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내가 제일 갖고 싶었던 것은 멋진 학생 단화였다. 다른 아이들은 다 가진 그것을 나는 못 가졌다. 입학 때 내게 떨어진 것은 3년 넘게 신을 수 있다는 군화였다. 무게를 줄이려고 목을 잘라낸 그 신발을 꼬빡 3년을 신었다. 졸업 무렵에는 발등 부위에 두 군데씩 구멍이 뚫려 우리 반 아이들이 “박물관으로 가져가자”고 한 유명한 신발이다. 유소년 시절과 학생시절 나를 괴롭힌 유형무형의 결핍은 대학에 가서도 풀리지 않았다. 머리가 굵어질수록 욕망은 커지는데 여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가슴속에는 늘 욕구불만이 자꾸 쌓여갔다. 내 욕구를 눌러 꼼짝 못 하게 할, 쓰고 또 써도 넘쳐날 풍요를 찾아 헤맨 4년이었다. 그 허기는 직장생활을 시작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일하면 채워질 날이 있을 것 같았다. 밤을 낮처럼 지새우는 끝없는 일구더기를 벗어나, 세상의 주역이 될 나이가 되면 달라지지 않을까. 이런 기대에 속아 허겁지겁 달려왔다. 퇴직을 하고 인생의 종점이 보이는 곳에 당도하여서도 달라진 건 없다. 그래서 불행한가? 난 요즈음 이런 자문을 할 때가 있다.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누구도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원히 욕구를 채울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가득 채워본들 무엇 하리! 저 세상 갈 때 무얼 가져갈 수 있겠는가. 유형무형의 결핍 속에서 모자라고 빈 데를 채워보려고 허덕이는 과정 자체가 인생이라는 것을, 불유구(不踰矩)의 언덕에 올라서야 알았다. 아 아, 이 미욱함이여!
- 2016-06-0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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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지에서 생긴 일] 아주 특별한 여행
- 가정의 달 5월이 되면, 필자 집안에는 매년 아주 특별한 여행을 떠난다. 올해는 예년보다는 적은 규모이지만 30여 명의 많은 인원이 참가해 ‘경기도 가평군 소재 남이섬-청평 자연휴양림에서 숙박-아침 고요수목원’ 코스로 1박 2일간 진행됐다. 남쪽 지방이 고향인 필자 집안은 대가족이고 고유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집안으로, 화목을 최고의 덕목으로 하는 가풍이 있다. 필자는 본인 포함 사촌이 총 16명(배우자 포함 32명)인 대가족 집안의 장손으로, 돌아가신 아버님의 권유로 필자와 나이 많은 회원 몇 분이 주도해 1994년도에 ‘사촌회’를 결성해 올해로 22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해마다 나이에 따라 순번을 정하여 장소 예약 및 진행을 준비해야 하는데, 올해는 필자 차례로 예약 및 현지답사 등이 편리한 수도권으로 모임 장소를 정했다. 사는 곳이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기에, 해마다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맛도 있다. 모임 초기에는 미혼, 또는 나이가 적은 사촌 부부들의 미온적 자세로 참여율이 매우 저조하였다. 특히 IMF 사태와 2008년 금융위기 등 경제적 대형 사건들이 있을 때에 일부 회원의 미납회비를 면제해야 하는 힘든 시기가 있었다. 어려움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 회비가 쌓임에 따라 자녀들이 유치원부터 초, 중, 고등 및 대학교 입학 시에 약간의 장학금을 지급해 모두가 평등하게 혜택을 받게 하고, 모임 시에는 모두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바꾸는 등의 노력으로 이제는 불가피한 사정을 제외하고는 국내 거주 회원의 대다수가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대가족 축제’가 됐다. 아울러 삼촌 부부 해외여행 시 경비를 보조했고, 또한 나이 많은 회원들의 회갑 및 칠순 시에는 기념 케이크와 축의금을 전달하는 등으로 함께 동고동락하는 분위기가 됐다. 한국은 급격한 사회구조의 변화, 즉 핵가족화, 연령별ㆍ계층 간의 갈등 심화, 전통문화의 퇴색 및 경시 풍조 등 많은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또한 IMF 사태와 금융위기, 지속적 경기 불황, 수명연장과 고령화 등으로 경제적, 사회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가정의 해체와 이에 따르는 자녀들의 비정상적 성장, 정신적 질환자의 증가, 고령자의 경제적 어려움 및 외로움 등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 지속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촌회가 장기간 유지되면서 필자 집안에는 비교적 이러한 문제가 많이 해소되고 있다. 개성이 강하고 이질적 요소(연령 간의 문화적 차이, 다양한 종교, 출생 지역, 학력, 빈부의 차 등)가 매우 많은 점은 필자 집안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불협화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만남은 상호 간의 소통, 배려 및 공감을 만들어 주고, 가족의 중요성을 일깨워서 인간애를 느끼게 하고 있다. 모든 부부가 이혼 없이 화목하고, 자녀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며, 모두가 집안의 대소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함께 기뻐하고, 같이 아파한다. 부차적으로 각 직계 형제자매들의 소모임도 활성화하고 있다. 필자도 5남매 가족 중 회갑이 되면 함께 2박 3일 간 국내여행을 하면서 우애를 다져 왔는데, 올해는 청산도와 남도 일대를 즐겁게 여행했다. 우리 집안의 사촌회 모임이 시대에 안 맞고 거추장스럽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이해를 잘 해주고, 동반자가 될 수 있는 것이 가족이다. 또 대가족에서는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 등의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더욱더 배려하고, 소통하고, 인내하는 자세가 필수적이고, 이러한 힘든 것을 감내했기에 나름대로 긍지를 가진다.
- 2016-05-31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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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문화] 바둑과 인생
- 필자는 취미로 바둑을 아주 좋아하지만 워낙 둔재라 바둑과 50여년을 함께 했으면서도 실력은 겨우 인터넷 바득 7단의 기력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형님에게서 처음 바둑을 배우기 시작해서 취미란에 바둑이라는 글씨를 써넣기 시작했으니 참으로 오래고 질긴 인연이다. 예전에는 직장에서 또는 기원에서 주로 바둑을 뒀다면 요즘은 인터넷으로 접속하여 거리, 장소,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 밤 12시가 넘어도 함께할 대국희망자가 있고 중국 사람하고도 둔다. 바둑이 인생과 닮은꼴이 많음을 나이 들어가면서 느낀다. 얼마 전에 TV연속극으로 '미생'이 란 프로가 방영되었다. 직장생활의 애환을 그린 내용인데 시청자들로부터 아주 좋은 반응을 얻었다. 미생은 바둑용어로 완전히 살아있지 않은 바둑돌을 말한다. 바둑판에서 아무리 큰 대마라도 두 집을 완벽하게 내지 못하고 있으면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미생 상태다. 인생에 있어서도 앞날은 훤히 몰라서 점친다고 한다. 지금 하는 행동이 최선이라고 하지만 지나고 보면 자기 죽을 짓을 한 것도 있다. 미생과 같은 것이 인생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다고 우리의 삶이 언제나 반듯하게 일직선으로만 나아갈 수는 없다. 실수도하고 잘못도 한다. 바둑도 사람이 두다보니 패착이 있다. 상대의 아픈 패착이 나에게는 기쁨이요 횡재수가 된다. 지금까지 바둑을 두어온 수 천 만의 사람이 수 십 억판의 바둑을 두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똑 같은 바둑은 한판도 없다. 인생에 있어서도 수 백 억의 인구가 살다가 죽었지만 평생을 똑 같은 삶을 산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바둑을 두다보면 상대의 바둑돌을 잡는 묘수도 많고 죽어가는 내 바둑돌을 살리는 기발한 수도 많다. 지금 바둑판의 전세가 불리하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 참고 기회를 엿보면 상대도 실수를 할 수도 있고 내가 묘수를 찾을지도 모른다. 인생살이도 늘 꽃피는 봄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 부는 날도 있고 비 오는 날도 있다. 어려움을 참고 노력하다보면 운도 따르고 남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성공의 기적도 있다. 어렵다고 쉽게 자살을 택하는 사람에게는 바둑을 둬보라고 권하고 싶다. 사람이 두는 바둑이니까 실수가 있고 실수가 있어야 변화가 있다. 알파고와 알파고가 바둑을 둔다면 승부도 없고 스릴 넘치는 흥미도 없다. 사람이 두니까 좀 덜 실수하려고 하고 불리하면 변화의 무리수를 둬서라도 판을 흔들어 보려한다. 세상살이도 운명과 팔자대로만 간다면 그래서 점쟁이가 판치는 세상이라면 살맛이 없다. 알파고가 바둑의 신인 인간 이창호를 넘어섰다고 떠들썩했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다. 아무도 기계요 전자 장비인 알파고를 존경하지 않는다. 오히려 패한 이창호를 인간승리라고 추켜세운다. 인간 세상에는 금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 출발부터 거들먹거리며 갑질하는 사람이 있다. 바둑은 규칙으로 금 수저를 철저히 배격한다. 바둑은 흑이 먼저 둔다. 먼저 두면 유리하다. 흑의 유리함을 상쇄시켜주고 공평하게 하기위해 백에게 6.5집을 더해준다. 여기서 0.5집은 무승부를 방지 하기위해 만들어낸 고육지책이다. 6.5집으로 하는 근거는 이미 두어진 수많은 바둑판을 면밀히 검토해 보니 먼저 두는 흑의 기득권이 6.5집에 해당한다는 통계에서 산출했다. 흑이 이기려면 반상에서 7집은 남겨야 반집승이 되고 백은 바둑판에 6집이 부족해도 반집승이 된다. 금 수저로 태어나 흑을 잡았다면 백을 잡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작부터 베풀어야 정의가 넘실되는 사회다. 아마추어로서 서로 실력 차가 나는 경우에는 플러스알파가 더 있다. 하수에게 흑을 잡게 하고 실력 차 만큼 흑 돌을 몇 개 먼저 놓고 시작한다. 장기판에는 고수가 차(車)나 포(包)를 없앤 상태에서 출발한다. 즉 바둑은 하수가 자기의 군사를 늘린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하고 장기는 상수가 자기의 군사를 줄인 상태에서 불리함을 안고 시합에 등장한다. 인간세상에서도 부자가 더 많은 세금을 내야하고 책임과 능력 있는 사람이 노블리스 오블라제를 실천하는 것이 옳다. 인간세상은 부와 명예 사랑과 지혜의 복잡한 싸움이 있지만 바둑은 단순히 짓는 집의 싸움이다. 중간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려도 최종 계가에서 졌다면 진 것이다. 지고나면 국지전에 이긴 바둑돌도 전부 패잔병일 뿐이다. 인생은 노후가 행복한 사람이 최종 승리자다. 살아온 하루하루가 모여 노년을 만들어낸다. 노년이 행복하면 초년고생은 무용담으로 들린다. 성공한 사람은 과거가 아무리 비참하였어도 아름답다. 바둑이나 인생도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다. 최선을 다해 둔 바둑도 복기해보면 분명 나의 잘못이 있다. 노년이 불행한 사람도 과거를 회상하면 크고 작은 후회와 잘못이 있다. 바둑은 다음 판이 기다리지만 인생은 다음 판이 없다. 두 번 다시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이여서 바둑판보다 더 절박하고 가혹하다. 바둑이나 인생이나 지금이 중요함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미래는 오지 않아 불확실하다. 오직 오늘 지금 이 순간만이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유일한 현재다. 바둑판에서 최선의 수를 찾듯 오늘을 진실 되게 살아야 한다.
- 2016-05-3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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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家和만사성의 조건 Part 5] 父子에서 師弟로 그리고 同僚로 - 치과의사 유영규·준상 부자
- 어떤 의사들은 좋은 의료기관의 조건으로 ‘의사가 두 명 이상 근무하는 병원’을 꼽는다. 의료기술은 수시로 변화하고 발전하기 때문에, 서로 상의하고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가족이 같은 병원에서 근무한다면 어떨까? 환자를 치료하는 일을 가업으로 선택한 곳이 있다면. 그런 가족을 찾아 만난 이가 치과의사인 유영규(劉永奎·77), 유준상(劉準相·41) 부자(父子)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이들이 함께 근무하고 있는 곳은 경기도 성남시 판교에 있는 서울럭스 치과의원. 이곳에서 만난 아들 유준상 원장이 이야기하는 가업 탄생의 비밀은 다소 의외였다. “물론 아버지가 권하기도 하셨지만, 스스로 치과의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의료선교 때문이었어요. 아버지가 의사로서 봉사활동이나 선교활동을 다니시는 모습을 보면서 멋지다고 생각했거든요. 신앙생활을 하는 데 큰 보람이 되고요.”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입학한 곳이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이다. 그곳에 아버지 유영규 이사장이 교수로 있었으니, 아무래도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 이사장은 연세대 치대에서 학장과 병원장을 모두 지냈고, 대한치과교정학회 회장도 역임한 교정학계의 거목 중 한 명이다. “사실 좀 불편한 점도 있긴 했죠. 하지만 동기들이 배려해 준 덕분에 다른 학생들과 같이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부자(父子)지간도 모자라 사제(師弟)지간이라니. 각별한 점이 정말 없었을까? 이에 대해 유영규 이사장은 특별한 것 없었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가까운 곳에서 함께 지내니 마음이 편안한 것 말고는 별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교정과 교수였고, 아들은 보철 전공을 했으니 학문적으로도 거리가 먼 상태였으니까요. 그래도 아침에 함께 하니 출근길이 외롭지 않아 좋았습니다.(웃음)” 아버지를 따라 같은 전공을 선택할 법도 한데, 치의학 안에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권유가 있었다고 했다. “의료선교나 봉사활동을 하는 과정에 교정과 출신 아버지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 아쉬움이 많으셨다고 해요. 교정과는 일반진료와 거리가 있거든요. 제가 생각해도 선교활동을 위해 자리를 쉽게 비우려면 개원을 선택하는 것이 나아 보였고, 개원을 위해서라도 일반 진료에서 가장 비중이 큰 보철을 전공하는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유 이사장이 연세대 치대에서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아들 유준상 원장은 개원가에서 경험을 쌓았고 지난해 함께 치과를 열게 됐다. 이번엔 사제지간이 동료로 바뀐 것이다. 유 이사장은 함께 진료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상호간의 존중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전문분야가 다르고, 각자의 영역에서 열심히 해 온 사이이기 때문에 아들이나 제자가 아닌 동료로서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대학에서 오래 머물렀던 저에 비해 아들은 개원가에서 경험을 쌓았으니 되레 저보다 나은 부분도 많고요. 때문에 경영의 대부분은 맡겨놓고 제가 의지하고 있습니다. 노후에 아들과 같은 직장에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점은 큰 장점입니다.” 아들인 유준상 원장은 아버지의 존재만으로도 든든하고 했다. “치과계에서 존경받는 분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어려울 때, 모르는 부분이 있을 때 상의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은 치과를 운영하는 데 엄청난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그렇다면 치과의사라는 직업이 앞으로 유씨 가문의 가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부자 모두 그렇다고 입을 모았다. 단 똑같은 단서를 달았다. 유 원장의 쌍둥이 자매 중 하나라도 ‘본인이 원한다면’ 시키겠다는 것이다. 물론 부자 모두 치과의사를 추천하고픈 직업이라고 했다. 유 이사장은 “손주들이 만약 치과의사가 된다면 환자를 먼저 생각하고, 그들의 불편과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치과의사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것 말고 특별한 바람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 2016-05-23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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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家和만사성의 조건Part 4] 윤무부 경희대 명예교수·윤종민 박사 부자
- 윤무부(尹茂夫·75) 경희대 명예교수는 1990년대 TV 톱스타였다. 에 나와 조근조근 새 이야기를 해주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연예인도 아니고 스포츠 스타도 아닌데 지금도 ‘새 박사님’하면 떠오르니 대단한 인기인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런 그에게 최고의 팬은 아마 아들 윤종민(尹鍾旻·42) 박사가 아닐까? 다른 공부를 해도 됐을 텐데 아버지를 따라 굳이 ‘새 박사’가 됐다. 대를 이은 새 사랑 이야기,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들어봤다. 화창한 일요일 경희대 근처 윤무부 교수의 집을 찾았다. 대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평생 산과 바다를 함께 누볐을 카메라 삼각대가 신발장 한편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생물학 분야에서 이렇게 같은 공부를 하는 건 아마 우리 부자가 유일할 겁니다.” 아들 윤종민 박사가 조류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학자 선·후배로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부자지간이 됐다. 윤무부 교수는 아들이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모르는 것이 있으면 국제전화를 걸어 물어보기도 했단다. “제주KBS와 사수도에서 앨버트로스 20~30마리가 와서 관찰하고 있었어요. 아침 8시쯤 나갔다가 캄캄한 밤 12시가 다 돼서 둥지로 돌아오는데 어떻게 찾아오나 궁금했어요. 아들한테 전화를 했더니 ‘아빠, 새는 냄새가 중요해요’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걸 몰랐어요.” 가끔 아버지와 아들의 견해가 충돌하고 의견이 안 맞아 말다툼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서로를 버팀목처럼 의지하는 든든한 사이다. 윤무부 교수는 자신과 아들이 평생 공부하는 삶을 사는 것에 관해 ‘선비 집안의 내력’인 것 같다고 말한다. “6대조 할아버지가 고향 거제도 선비였어요. 충청도에서 거제도로 유배 갔다는데 옥씨, 신씨, 윤씨가 그곳에 많아요. 다 양반들이에요. 5대조 할아버지가 예언을 했대요. 우리 대에서 유명한 학자가 나올 거라고요. 옛날에 시골에 가면 꼭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젊은 시절 윤무부 교수는 전국 방방곡곡 새를 찾아다니며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연구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의 발이 닿는 곳에는 어린 윤종민 박사도 함께했다. “방학이 시작되면 산이고 섬이고 아버지를 따라 나섰습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생물학자들도 많이 만났고요. 혜택을 받은 거죠. 다 아버지 덕분입니다. 과학자가 꿈인 아이들도 많았을 때였어요. 저도 그게 아주 좋고,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다른 공부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윤종민 박사는 아버지가 재직하던 경희대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윤종민 박사가 새에 관한 공부를 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 김정애씨는 반대했다. 윤무부 교수가 어렵게 고생하는 모습을 평생 보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종민 박사가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윤무부 교수의 집은 부부가 함께 쓰는 안방과 주방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새 박사를 위한 공간이다. 각종 새를 촬영한 비디오테이프, 서재를 꽉 채운 기록들, 세월을 말해주는 낡은 사진기들. 집안 구석구석이 새 박물관이고 도서관이었다. 새 박사 씨앗을 뿌렸으니 새 박사 꽃이 피는 것 아닌가. 미국 콜로라도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윤종민 박사는 한국 새가 그리워서 돌아왔다. “유학생활 10년 중 5년을 산에서 살면서 그곳 새들을 봐왔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새가 그리워서 오래 못 있겠더라고요.” 아들 윤종민 박사는 현재 한국 교원대학교 황새생태연구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황새를 복원하고 방사하는 일뿐만 아니라 박새, 인공둥지에 관한 연구를 한다. 최근에는 검은머리갈매기에 대한 연구도 시작했다. “검은머리갈매기는 매립지에만 번식해요. 매립지가 개발되면 육식 포식자가 몰려드는데 이를 피해 검은머리갈매기가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이 최근 파악됐어요. 올해부터 소수지만 알을 가져다가 인공부화하고 새로운 서식지에 방사하는 연구를 할 겁니다.” 윤종민 박사는 멸종위기 야생생물의 증식·복원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2016년 환경부장관상을 받았다. 윤무부 교수는 자신도 못해낸 일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윤무부, 윤종민 부자는 인터넷에 새 박물관을 여는 것이 꿈이다. “새소리는 여름 철새와 텃새 100여 종. 비디오로 찍어놓고 사진이 있는 것이 300종이 넘습니다. 어렵겠지만 꼭 만들 겁니다.” 윤무부 교수는 10년 전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몸이 불편하지만 새를 찾고 찍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윤종민 박사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아버지가 얘기했던 것들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한다. “1,2세대 학자는 거의 물러나셨는데 그 세대의 것도 젊은 학자들이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2016-05-19 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