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기지개를 켜는 3월이다. 우리네 마음은 춘삼월(春三月)이어도 꽃봉오리들은 아직 몸을 웅크리고 있다. 봄꽃을 보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지만, 아산세계꽃식물원을 찾는다면 사시사철 언제나 향기로운 꽃들을 만날 수 있다.
아산세계꽃식물원은 3000여 종의 원예 관상식물을 볼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실내 온실 식물원이다. 각기 다른 테마로 꾸며진 18개의 실내 온실 정원과 3개의 야외 정원을 둘러보며 여유롭게 산책하기 좋다. 2004년 개관해 2014년부터는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의 고령자친화기업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리아프(LIAF, Life ia a Flower)라는 자회사를 설립해 운영 중이다.
3월은 봄이라고 해도 날씨가 제법 쌀쌀한 편인데, 이곳 온실 정원에서는 3월 말부터 4월 초순까지 꽃피우는 구근식물(球根植物)을 미리 만날 수 있다(1월부터 온실에 전시). 알뿌리식물이라고도 불리는 구근식물은 땅이 얼기 전 심어 추운 겨울을 보내야만 봄에 꽃을 피우는 것이 특징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구근에서 싹이 나고 싱싱한 꽃망울을 터뜨릴 때면 따뜻한 봄기운이 찾아왔음을 느낄 수 있다. 이번 봄에는 튤립, 히아신스, 수선화 등을 비롯해 네덜란드에서 지난가을 수입해 식재한 250여 종의 구근식물을 전시한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꽃길 산책
꽃구경을 위해 온실 정원(식물원)으로 향하기 전, ‘LIAF 가든 센터’를 지나게 된다. 원예와 정원 문화가 발달한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든 센터(garden center)처럼 다양한 원예 프로그램을 체험하고 관련 제품까지 구입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했다. 가든 센터의 외관은 지붕이 뾰족하고 벽이 유리로 되어 있어 마치 식물원을 보는 듯하다. 실내로 들어서면 안팎이 훤히 보이는 유리벽 덕분에 햇살이 곧 조명이 된다.
가든 센터를 지나 온실 정원에 들어서면 한층 더 따뜻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외투를 벗고 가벼운 차림으로 꽃을 즐기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햇볕이 잘 들고 실내 온도가 훈훈한 덕분에 계절에 상관없이 다양한 종의 꽃과 식물을 볼 수 있다. 산책 동선을 알려주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굳이 천천히 걷지 않아도 자주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올망졸망 피어난 꽃들을 바라보고 그윽한 향을 맡으려면 느긋하게 거닐 수밖에 없다. 관람객들은 예쁜 꽃을 담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꽃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 바쁘다. 연못 정원과 새 모이 정원, 미로 정원 등은 아이들도 좋아하는 공간이다.
식물원에서의 추억, 집에서 키워나가기
온실 정원 코스를 순서대로 관람하고 나면 다시 가든 센터에 도착하게 된다. 봄을 맞이하는 꽃과 구근식물 화분, 원예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 등을 구입할 수 있다. 가든 센터를 나서기 전까지 입장권을 잘 챙겨야 한다. 관람을 마친 후 입장권을 매표소에 보여주면 작은 다육 화분을 선물로 주기 때문이다. 식물원에서의 즐거웠던 추억이 집에서까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증정하기 시작한 다육 화분은 벌써 100만 개가 넘었다고 한다. 다육식물은 원예 초보자도 쉽게 키울 수 있어 집에서도 이곳에서의 추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다.
‘삶이 꽃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단순히 꽃을 구경하는 것 외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꽃잎으로 손수건에 물을 들이는 ‘꽃 손수건 천연 염색 체험’을 비롯해 화분 심기 등 다양한 원예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주말에 방문할 계획이라면 가든 센터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에도 들러보자. 다양한 식용 꽃과 신선한 나물로 만든 ‘꽃 비빔밥(8000원)’을 맛볼 수 있다(평일 10명 이상 예약 시 주문 가능).
>>LIAF·아산세계꽃식물원
위치 충남 아산시 도고면 아산만로 37-37
이용시간 (식물원) 09:00~18:00 (가든 센터) 09:00~19:00
관람요금 8000원(65세 이상 6000원)
언제 친구가 되었는가에 따라 서로간의 친밀도가 다릅니다. 초등학교 친구들과의 기억은 너무 멉니다. 그러나 몇몇 단편적인 상황은 의외로 또렷합니다. 예를 들자면 얘기를 나누던 표정과 쪼그려 앉아 있던 곳, 함께 맡던 공기 냄새와 햇살까지 분명합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갈라져야 했던 몇몇 아이의 이름과 얼굴도 또렷합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가며 친구들도 구체적으로 나뉘어 기억됩니다. 그렇게 중학교 때 만난 귀한 친구가 아내와 함께 지난여름 우리가 사는 몽골로 놀러왔습니다. 그 친구는 어렸을 적에 나에게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당시의 내 별명은 ‘용가리’, ‘하마’ 등 외모와 연결되었는데 의외의 ‘꿈쟁이’였습니다. 지금은 조금 이해되지만, 당시에는 부정적으로 들렸습니다. ‘꿈쟁이’라니 내가 그렇게 허무맹랑한가? 내가 그렇게 현실감각이 없나? 그렇지만 내 삶의 고비마다 ‘꿈쟁이’라는 그 친구의 말이 떠올랐으며 그럴 때마다 그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책에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쓰인 말대로, 나는 이제 행복한 꿈을 만들어내는 늙은이가 되고 싶습니다.
사진으로 예술과 꿈을 이해
꿈은 현실과 대비되지만 실제로 그 구분이 쉽지 않습니다. 꿈을 꾸기 위해선 먼저 잠이 들어야 합니다. 손자가 생기고 갑자기 아기를 안아 재울 일이 많아졌습니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잠잘 때가 예쁘다는 말을 합니다. 거기에는 잠재우기가 힘들다는 경험도 스며 있습니다. 갓난아기가 주위에 반응하고 웃기 시작하면서 차츰 잠드는 순간을 구분하게 됩니다. 잠이 오면 스르르 잠에 떨어질 때도 있지만, 대부분 깨어 있으려 뻐팅기기도 하고 갑자기 떼도 쓰고 울기도 합니다. 관성의 법칙이 잠에도 적용되나봅니다. 일단 잠들면 몸의 모든 긴장이 빠지고 전혀 다른 상태가 됩니다. 거기서 다시 꿈을 꿀 때는 또 다릅니다. 곁에서 봐도 그냥 자고 있는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꿈을 꿀 때는 놀라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현실과 잠이 다르듯이 현실과 꿈은 또 다릅니다. 그렇게 예술은 현실과 꿈처럼 또 다릅니다. 사진을 하면서 난 예술과 꿈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친구 말대로 내가 꿈쟁이라서 예술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난 사진으로 꿈을 꾸고 있습니다. 무의식에 끌려 다니는 꿈과는 조금 다릅니다. 내가 만들어가는 꿈입니다. 아내는 그 꿈이 무슨 가치가 있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난 열심히 아내에게 내 꿈을 설명합니다. 설명하다 아내에게 여러 번 망신당하고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난 지치지 않고 아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방법으로 꿈틀대며 반항을 해왔습니다. 난 꿈쟁이니까요.
인문학이 사람의 꿈
꿈보다 해몽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난 이제 꿈만 꾸는 게 아니라 해몽도 합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해몽을 합니다. 우선 아내에게서 살아나야 합니다. 그 꿈과 해몽이 이젠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립니다. 조금 있으면 그 꿈과 해몽이 실크로드를 타고 우리나라와 몽골을 거쳐 중앙아시아까지 이어지길 바랍니다. 꿈이 돈이 될 수 있고 더 큰 것도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또 한 발짝 들어가 예술뿐 아니라 역사도 그 테두리 속에 꿈의 원자재로 넣었습니다. 인문학이 사람의 꿈임을 눈치 챘기 때문입니다.
사진가로 나는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으로 몇 가지 프로젝트를 해왔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LA캠퍼스 Kerkhoff Hall Art Gallery에서 2003년 11월 초대받은 Forgotten Terror–I SAW YOU! 그리고 한국에서 개최된, 20개국이 참여하는 역사NGO세계대회에 초대받았습니다. 주제는 동남아시아 역사 화해를 위한 역사 교육이며 주최 단체는 세계NGO역사포럼과 동북아 역사재단이었습니다. 이어 일본군에게 성노예로 희생당한 필리핀 할머니 생존자들을 찾아 2009년 열린 역사NGO세계대회에서 필리핀 위안부 할머니들을 촬영한 사진을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발표했고, 일본국회의원회관, 노근리평화공원 설립을 위한 역사학자 모임 등에 초대받았고 문화체육관광부, 외교통상부, 지식경제경부와 중앙일보 주최로 2009년 5월에 ‘Gems of Central Asia’를 용산국립박물관에서 초대 전시를 가졌습니다.
그렇게 사진에 역사를 담다가 사건은 보는 시각에 따라 같은 내용도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는 것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마치 요리사들에게 같은 재료를 주고 다양한 음식을 기대하는 프로그램이 가능하듯 관심을 가져온 실크로드 국가들의 역사가 그렇게 보입니다. 역사는 특히 사실만을 찾는 학문인 줄 알았습니다. 학자들이 힘을 다해 사실을 찾듯, 좋은 재료를 찾는 일이 역사의 전부로 생각했는데, 그 후의 작업, 즉 찾아낸 역사적인 사실로 어떻게 좋은 요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먹이느냐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실크로드관련국에서 발표되고 있는 역사에서 우리 대한민국만이 독점한 사건이고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조상들에 대한 언급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받았던 역사 교육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남의 역사를 건드리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공통분모 찾기
생각을 멈추고, 같은 재료를 갖고 다른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해보았습니다. 나와 내 주위 나라들은 서로 다른 역사에 대한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닫힌 역사와 열린 역사관?
유목적인 이해와 농경적인 가치?
역사를 쪼개고 분열시켜 작게 방향을 잡는 방법과 합하고 어울려 크게 보는 대승적 관점.
다시 멈춰 주위 다른 민족과 분리해내었던 내 나라의 역사를, 그들과 서로 교차하며 만났던 공유된 역사로 짜보았습니다.
여행 중 만났던 중앙아시아인의 외모에서 우리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서로의 닮은 모습들이 드러납니다. 역사는 서로를 갈라내기도 하지만 서로의 공통분모가 찾아진다면 이제라도 반갑게 만날 수 있습니다. 유럽을 여행하며 국경을 초월한 유럽연합 국가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현실이 부러워 꿈을 꾸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서로의 묻힌 역사를 재료로 아시아와 유럽-유라시아에 대승적 실크로드 연합 공동체를 건설하고 그 멋진 나라의 주인으로 사는 꿈입니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랙션대회(NGO의 유엔총회)에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도시 숲을 헤치고 빠른 속도로 버스가 달린다. 희미하게 햇살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짙은 갈색 나무 끝이 파란 하늘 배경으로 흔들흔들, 구름의 속도로 움직인다. 작은 버스정류장에 내려 차갑고 신선한 공기와 마주하며 이정표를 따라 걷는다. 곧 다다른 곳은 김수영 문학관. 문체의 자유를 넘어 진정한 자유세계를 위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아파했던 순수시인 김수영의 세계가 구름이 가는 속도만큼 잔잔히 흐른다.
북한산 신선한 공기가 김수영과 어우러지다
중·고등학교 시절 김수영에 대해 그저 ‘한국문학의 대표적 자유시인’ 정도로만 밑줄을 치고 그대로 외운 기억이 있다. 시간이 흘러 다시금 김수영의 글을 읽어보니 자유라는 표현에 한계가 있음을 새삼 느낀다. 세련된 문장도 문장이지만 소재의 다양성과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우울한 시대를 희망차게 살아보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고나 할까? ‘진보’라는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을까 하는 궁금증마저 든다. 그런 김수영을 기리는 문학관이 북한산 둘레길이 이어지는 도봉구 한적한 길가에 자리하고 있다. 시를 쓰며 살았던 그의 본가와 묘, 시비 등이 있는 도봉구에 2013년 11월 김수영 문학관이 문을 연 것이다. 도봉구에서 운영하는 김수영 문학관은 개관 이후 한 달에 1500명, 연간 1만8000명이 다녀갈 정도로 도봉구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문화시설이 없던 동네에 사람들이 찾아들고 활력이 넘치는 곳을 만든 이가 시인 김수영이다.
김수영 문학관은 5층 건물에 1층과 2층이 전시관으로 꾸며졌다. 제1전시실(1층)은 김수영 연보를 시작으로 한국전쟁, 4·19혁명, 5·16 군사정변 등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경험하며 써낸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김수영의 삶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상영물을 관람할 수 있다. 또한 시를 낭독하고 녹음할 수 있는 작은 공간도 있다. 이외에 관람객이 참여해 만드는 시작 코너와 김수영에게 편지를 쓰는 공간으로 전시실을 알차게 구성했다. 무엇보다 김수영의 시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꾸며놓은 것이 이곳의 매력이다. 원문 전시와 함께 활자화시킨 시를 서랍장 형식으로 만들어놓았다. 원문을 본 뒤 서랍을 열면 희미하게 보이던 원문의 모든 글귀를 쉽게 읽을 수 있다.
제2전시실은 김수영의 산문과 번역서, 일상 유물 등이 전시돼 있다. 어느 한 집안의 벽면처럼 김수영의 어릴 적 모습에서부터 가족들과 찍은 사진 등 소소한 기록들이 펼쳐져 있다. 김수영의 서재도 이곳에 옮겨놓았다. 전시장에 소개된 글은 김수영이 서재에서 어떤 모습으로 생활했을지를 짐작하게 한다.
‘한 편의 시나 산문이 완성되면 김수영 시인은 항상 아내 김현경을 찾았다. 그러면 집안 살림을 하든 다른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하던 일손을 멈추고 달려가야만 했다고 한다. 서재에 들어서면 김수영 시인은 빽빽하게 쓴 시의 초고를 건넸고, 그 시를 정리해서 원고지에 깨끗하게 정서하는 것이 김현경의 못이었다고 한다. 김수영 시인은 시를 쓰는 작업을 마치면 ‘산고(産苦)’를 겪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서재 오른쪽으로는 김수영이 살아생전 남긴 번역서 등을 전시해놓았다. 왼쪽으로는 시인의 서적을 열람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아늑함을 더했다. 이외에도 3층은 구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작은 도서관과 아동열람실, 4층에 대강당, 5층은 휴게 공간이다.
김수영 유족이 함께하는 ‘김수영 문학관’
김수영 문학관은 도봉구에서 직접 관리를 하지만 유족들의 보살핌과 사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문학관에서 일하는 김은씨는 김수영 시인의 조카다. 수학선생으로 교편을 잡고 있다가 문학관의 명예관장이자 고모인 김수명(83)씨의 부름을 받고 문학관에 들어왔다. 김수명 명예관장은 김수영의 다섯째 동생이다. 문학관에 전시된 전시물 대부분을 기증했다. 40년 동안 두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도 김수영의 모든 육필원고 등을 싸들고 다닐 정도로 오빠와 작품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마침 취재를 갔던 날 김수명 명예관장을 만날 수 있었다. 여든셋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찬 목소리에 에너지가 넘쳤다. 그녀는 “김수영을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면서 특히 “아이들에게 자극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한 김수영 시인의 시 세계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날씨가 풀려가고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어느 날 문득 김수영 문학관을 찾아가보자. 자유 그 이상의 세상을 꿈꾸던 천상의 자유시인 김수영이 문학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관람 정보
휴관 매주 월요일, 설날 및 추석 당일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5시 40분
관람료 무료
주소 서울특별시 도봉구 해등로 32길 80
TEL 02-2091-5673
창덕궁 후원에 부용지라는 연못이 있다. 거기 갈 때마다 흐뭇한 추억에 잠긴다. 연못가에 큰 단풍나무가 한 그루 있다. 거기 올라가 찍은 사진이 필자 인생에서 큰 추억을 남기게 되었다.
1972년 대학교 사진반에서 활동할 때의 일이다. 창덕궁 후원에서 전국의 프로 아마추어가 모두 참가하는 ‘전국 사진 촬영대회’가 있었다. 필자의 집에서는 필자가 사진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술 사진을 찍을만한 카메라도 없었다. ‘미놀타 하이매틱’이라는 2안리플렉스 카메라로 기념사진이나 찍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술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주제를 제외한 배경은 흐리게 찍히게 하는 아웃 포커스 효과가 있는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는 필수였다. 후배가 일안리플렉스 니콘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필름을 한 통 사주고 절반씩 찍기로 했다. 오전에는 광선 조건이 안 좋기 때문에 오후 측광이 들어 올 때까지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윽고 측광이 되는 오후 4시쯤 되자 후배의 카메라를 들고 어슬렁어슬렁 연못가로 갔다. 마침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는 여인들이 있어 피사체로 잡았다. 한복도 아름답고 춤추는 모습은 더 아름다웠다. 사진은 물에 비친 모습이 있으면 더 아름답다. 이것을 모두 한 커트로 잡아 셔터를 눌렀는데 3장에서 멈췄다. 그 당시 필름은 100피트 필름을 암실에서 20장으로 잘라 파는 형식이었는데 간혹 자투리에 걸리면 그런 일이 있었다. 후배는 정확히 먼저 10장만 찍었다.
인화를 해보니 단 3장의 사진이었지만, 왠지 큰일을 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 유명 상업사진가로 이름을 떨치던 고문 선생님에게 보여드렸다. 그러나 하루 종일 술만 마시다가 겨우 3장밖에 못 찍었다는 것에 대해 큰 질책을 당했다. 사진 예술을 대하는 자세가 불량하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자신 있게 내 보인 사진도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상한 예감 같은 것이 느껴져 일단 사진을 대회 주최 측에 필자 임의대로 접수시켰다. 고문 선생님도 당연히 여러 작품을 접수시켰다.
심사 발표 며칠 전 다른 촬영대회 입상작을 전시한 사진전시회에 갔었다. 그때 대상작이 필자가 찍은 사진과 거의 유사했다. 장소와 모델, 그리고 화면 구성이 거의 비슷해서 놀랐다.
드디어 심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필자 작품이 당당히 입상한 것이다. 고문 선생님은 여러 작품을 냈는데 한 편도 입상을 못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입장이 ‘청출어람’이라 하기에는 난처했다.
이 작품은 1979년 미국은행(Bank of America) 재직 중에 다시 한 번 큰일을 냈다. 당시 미국은행 본사에서 월간으로 사내보가 나왔다. 전 세계 미국은행 직원들을 대상으로 사진 콘테스트가 있어 이 작품으로 응모했다. 꿈에 내 작품이 표지사진에 실린 것이 보였다. 출근하자마자 지점장이 불러 갔더니 잡지 표지사진에 내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이었다. 꿈과 현실이 딱 맞은 것이 처음이다. 이 일로 당시 사내 결혼을 목표로 연애 중이던 아내가 처가에 알리고 장인어른이 필자에게 당시 50만원을 주며 카메라를 사도록 했다. 그 돈으로 니콘 FM을 샀다. 꿈에 그리던 일안리플렉스 카메라를 갖게 된 것이다.
가르치는 재미를 몽골국제대학교에 와서 배우고 있다. 학생들과 만나는 강의명은 ‘Liberal arts through Photography-사진으로 만나는 인문학’이다. 국제대학교라 학생들뿐 아니라 교수들도 여러 나라에서 왔기에 모든 행정절차와 강의는 영어로 진행된다. 여러 나라란 몽골을 비롯한 러시아, 중국,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한국, 인도,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영국, 홍콩 등 다양하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는 다른 대학과 다른 독특한 분위기와 문화가 스며 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서로 배운다는 태도이다. 서로 호감을 갖되 존중하고 이해해야 하는 현대 국제사회에서 요구되는 자세이다. 그렇다고 이 지역 정서가 옅어지는 것은 아니다. 몽골이라는 지정학적 특징과 역사에서 우러나는 유목민적인 성격은 언제나 바닥에 녹아 있다.
지난 호에 내보낸 ‘낯선 이국에서 새 시대와 새 세대를 본다’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러한 환경에서 알게 된 시간적인 내용이었다면 이번에는 새 시대에 공간적인 새 지역을 얘기하고 싶다.
4년 전까지만 해도 난 한 번도 몽골에 들어와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다만 사진가로 몽골을 촬영할 일이 여러 번 있었을 뿐이다. 먼저 1990년대 초 세브란스병원에서 몽골에 연세친선병원을 세우는 과정에 우연히 참여하게 되는 행운으로 첫발을 딛게 되었다. 그리고 몽골 대통령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한 기업 총수의 국빈 초청 응답 선물로 몽골의 아름다움을 사진첩(Land of Lands Mongolia)으로 만들기 위해 아내와 방문하게 되었다. 그 사진첩은 국가원수의 격에 맞는 의전을 갖추어야 해서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원본 사진으로 만들어진 수제 책이다.
그리고 2005년에는 연세대학교 120주년 기념사업회로부터 ‘희석된 학교의 건학정신을 사진으로 되살려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 부합하는 기획을 준비하다가 세브란스 2회 졸업생인 이태준 열사를 찾게 되었는데 그의 활동무대가 몽골임을 어쩌랴! 그렇게 ‘이태준 선배는 왜 몽골로 갔는가’를 위해 다시 제자들과 몽골을 촬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미국 비정부기구유엔총회라 불리는 인터랙션대회에서 대상을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몽골 양로원에서 촬영한 사진 ‘Such wealth and such freedom’이다. 그리고 사람뿐 아니라 가축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몽골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낙타의 눈물’ 스틸을 촬영하게 되었으며, 미국 캘리포니아 어바인시 파인 아트 홀과 우리나라 안양시의 알바로 시자 홀에서 연 휴먼다큐 를 준비하기 위해 몽골과 또 인연이 생겼다. 이렇게 되짚어보면 몽골에 대한 인연이 특별히 많게 보이지만, 사실 몽골만 많이 다닌 건 아니다. 따져보면 어느 나란들 그렇게 안 다녔으랴! 사진가라는 직업이 그렇게 세상을 많이 다니는 게 일이다.
몽골이 중앙아시아의 시작 지역이란 얘기를 꺼내기 위한 얘기가 길어졌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나라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나라들이다. 그래서 그동안 나는 몽골보단 ‘스탄’으로 끝나는 실크로드 천산북로로 이어진 중앙아시아 나라들을 몽골만큼이나 많이 다녔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으로 연결되어 유럽과 닿는 아시아의 서쪽 끝 보스포루스 해협이 관통하는 이스탄불까지.
또 다른 길도 다녔다. 천산 아래 중국 시안(西安), 신장 위구르 자치지역 북서쪽 파미르 고원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가 카라코람 하이웨이, 훈자왕국을 지나 라호르와 이슬라마바드, 그리고 인도 중동 나라들과 만나는 옛 동로마제국 터키에 닿는 길에 만나게 되는 나라들. 그 중앙아시아 나라들을 생각하면 어렸을 때부터 왠지 가슴이 뛰었고 지금도 맥박이 빨라진다.
이 나라들을 꿈꾸고 가까이 보기 위해 난 몽골로 왔다. 대한민국 우리나라에서 보면 이 나라들이 시작되는 곳 중 하나가 몽골인 것이다. 오늘의 몽골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그리고 내몽골의 중국과 맞닿아 있다. 러시아를 부를 때는 시베리아라는 러시아 지역 이름이 난 더 좋다. 거기엔 몽골의 홉스굴 호수와 연결된 바이칼이 있고, 우리와 얼굴과 정서가 많이 닮은 민족들이 살고 있다.
길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관심으로 퍼지며 피어난다. 앞에서 얘기한 중앙아시아 나라들과 우리를 이어줬던 길들이 소위 실크로드란 이름으로 세상에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많고 어떤 길보다 큰 길이었던 실크로드는 근세 서양 문명의 휘황찬란한 빛에 오랫동안 가려졌었다. 근세 대서양과 태평양 길의 번성으로 사람들에게 잊혔다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여기 몽골에선 분명히 보인다. 그 길을 따라 큰 기운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를 떠나 있는 한국 사진가이기에 보이는 것이다.
새 시대는 공간도 시간과 함께 드러난다. 이제 가려졌던 길이 드러나면서 그 공간의 시간도 새롭게 조명될 것이다. 공간의 시간은 역사로 살아난다. 역사는 서로 다른 가치가 만나 각축하는 실질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덮였던 시간이 오랠수록, 드러나는 공간은 경이로울 수밖에 없다. 그 길과 연결된 나라들이 각자의 역사와 함께 깨어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새 세대는 그 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직까지 너와 나를 가르는 남의 역사에서 이제 우리를 아우르는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려고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혹여 잃어버린 것이 소리에 있나 하고 음악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연극을 하며, 각자 열심이듯 나도 잃은 것이 있나, 있다면 그것을 찾아보려고 여기에서 사진작업 중이다. 실크로드의 나라들이 깨어나듯이 나도 새롭게 깨어나고 있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랙션대회(NGO의 유엔총회)에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전시(exhibition)
1) 프랑스 국립 오르세미술관 이삭줍기 전: 밀레의 꿈, 고흐의 열정
일정 3월 5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세기 서양미술사를 빛낸 거장들의 명작 130여 점을 만날 기회다. 작품 보존을 위해 엄격하게 관리하는 고흐의 ‘정오의 휴식’은 오르세미술관 개관 이래 수십 년 동안 유럽 이외 지역으로 반출된 적이 없으나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대여를 허가했다.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아카데미즘과 사실주의, 인상주의와 자연주의, 상징주의와 절충주의, 20세기 예술의 다양한 원천 등 5개의 테마로 나누어 각 주제를 중심으로 작품 간의 대비와 유기성, 예술사의 흐름까지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2) 닉 나이트 사진전: 거침없이, 아름답게
일정 3월 26일까지 장소 대림미술관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진작가로 손꼽히는 닉 나이트(Nick Knight)의 국내 첫 사진전이다. 사진과 디지털 그래픽 기술의 결합이 돋보이는 닉 나이트 특유의 작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상 실험을 접목한 패션필름까지 폭넓게 마련돼 있다. 초상사진, 디자이너 모노그래프, 페인팅·폴리틱스, 정물화·케이트 등을 주제로 한 110여 점의 각양각색 작품을 한 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다. 매주 일요일에 열리는 ‘선데이 라이브 앤 클래스(SUNDAY LIVE & CLASS)’ 등 유익한 전시 연계 교육 프로그램들도 살펴볼 만하다.
◇도서(book)
1) 인생의 발견(시어도어 젤딘 저·어크로스)
21세기의 예언자라 불리는 영국의 철학자 시어도어 젤딘이 유명 인물들의 전기와 철학적 탐색을 통해 발견한 28가지 질문을 담았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인간과 삶에 관해 끊임없이 성찰해온 저자의 성숙한 지혜와 혜안을 엿볼 수 있다.
2) 브릿마리 여기 있다(프레드릭 배크만 저·다산책방)
로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 소설이다. 59세 중년 남성 오베와 얼핏 비슷하면서도 다른 성향을 지닌 63세 중년 여성 브릿마리. 누군가의 그늘에서만 살아온 그녀가 삶의 위기를 통해 온전한 자신을 찾아나가는 여정을 그렸다.
◇영화(movie)
1)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
희귀암에 걸린 26세 청년이 한국인 최초로 49일 만에 뚜르 드 프랑스 풀코스를 완주한 실화를 영화화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체육교사를 꿈꾸었을 정도로 건강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던 그는 뚜르 드 프랑스 완주라는 꿈을 키운다. 3500km 레이스의 마지막 지점인 파리 개선문을 통과하며 꿈을 이룬 순간의 가슴 벅찬 감동이 영화의 포스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개봉 1월 12일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이윤혁 출연 임정하, 전일우, 박형준 등
2) 내 어깨 위 고양이, 밥
떠돌이 음악가와 고양이 한 마리가 우연히 만나면서 인생의 희망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제목처럼 주인공 제임스는 어깨에 고양이 밥을 올리고 거리 이곳저곳에서 기타를 치고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따뜻한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두 주인공은 2007년에 만나 현재까지 뜨거운 우정을 나누고 있다. 데이비드 허슈펠더 음악 감독과 싱어송라이터 찰리 펑크 등 실력파 제작진이 대거 참여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개봉 1월 4일 장르 드라마 감독 로저 스포티스우드 출연 루크 트레더웨이, 루타 게드민타스 등
◇공연(stage)
1) 인간
프랑스의 천재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유일한 희곡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인류 마지막 생존자인 화장품 연구원 라울과 호랑이 조련사 사만타가 ‘인류는 이 우주에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재판을 벌이는 2인극이다.
일정 3월 5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연출 문삼화 출연 고명환, 오용, 박광현 등
2) 꽃의 비밀
네 명의 아줌마가 보험금을 타기 위해 각자의 남편으로 변장해 벌이는 사건들을 유쾌하게 그렸다. 장진 감독이 직접 쓰고 연출을 맡은 작품으로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코미디 장르의 연극이라는 점이 돋보인다.
일정 2월 5일까지 장소 대명문화공장 연출 장진 출연 배종옥, 소유진, 이청아 등
3)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중국 고전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를 각색한 작품이다. 원작의 비극성에 희극적 요소를 곁들여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2015년 이 작품의 무대에서 유명을 달리한 배우 고 임홍식의 공손저구 역은 중견 배우 정진각이 이어받았다.
일정 1월 18일~2월 12일 장소 명동예술극장 연출 고선웅 출연 장두이, 하성광, 정진각 등
4) 아이다(AIDA)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던 해 토니 상과 그래미상 등을 휩쓸었던 명작으로 한국에서는 2012년 이후 5년 만에 막이 오른다. 누비아의 공주 아이다와 이집트 파라오의 딸인 암네리스, 두 여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라다메스 장군의 사랑을 노래한다.
일정 3월 11일까지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키스 배튼, 박칼린 출연 윤공주, 아이비 등
파워 블로거이자 미국의 미술 잡지 기자인 조이스 리(Joyce Lee·70)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의 개인 전시회를 가졌다. 그녀는 블로그(‘커피 좋아하세요’)를 시작하면서 사진에 입문하여 미국 곳곳의 자연을 찾아다니며 찍은 사진들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블로거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60세에 본격적인 기자로 데뷔했다. 그런데 그녀의 전직은 패션 디자이너. 대체 그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강한 제스처와 자그마한 몸, 진한 눈 화장, 쭈뼛쭈뼛 서 있는 머리, 영혼을 빨아들이는 목소리에서는 쉬이 범접할 수 없는 인디언 추장 같으면서 천진스런 어린왕자를 보는 듯했다.
“내가 좀 말이 많아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쏟아내야 하는 강박관념 때문에 이렇게 돼버렸어요. 나를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웃음). 그냥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도 있어요.”
조이스 리와의 인터뷰는 꼭 숨바꼭질 같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여전사의 옷자락을 잡고 마냥 헤맸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멈추고 싶은 말들이 오갔다.
Art&Culture 매거진 기자로 세 번의 사진 전시회를 가진 조이스 리는 오래전 명동에서 ‘이동희 부틱’을 운영했던 디자이너였다. 나름대로 자리 잡은 전문 디자이너였던 그녀가 미국으로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서른두 살에 낳은 딸이 하나 있어요. 그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막 조기유학 붐이 불었죠. 그때 남편의 형님이 미국에서 살았고, 딸이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해서 보내기로 했어요. 아이를 먼저 보냈는데, 처음에는 나는 갈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하지만 운명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작용을 하기 마련인가보다. 딸의 친구 어머니가 딸에게 충고를 했단다.
“그분이 ‘네 엄마가 오든지, 네가 들어가는 게 좋겠다’라고 말씀하시더라는 거예요. 바른말을 한 거지. 사춘기를 겪고 있는 자식 문제인데, 가게 문 닫고 달려갔어요. 저는 재단사 자격증이 있었던 덕분에 영주권을 얻는 것은 쉬웠죠. 그래서 미국에서도 패션 디자인 일을 할 수 있었어요.”
미국에서 뿌리내리기 위해 조이스 리 부부와 딸은 비장한 각오로 견디며 버텼다.
60세에 시작한 기자로서의 삶
그녀는 2008년 기자로 입사했다. 그때 나이가 미국 나이로 60세였으니 좀 놀랍다.
“어느 날 남편의 신장이 멈췄어요. 신장 투석을 일주일에 세 번씩 하면서 남편은 직장을 관두게 됐죠. 그런데 미국에서는 둘이 벌어도 융자를 감당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작은 아파트로 옮겨서 살았죠. 그리고 힘든 시간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으려고 시작한 것이 블로그를 통한 세상과의 소통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컴퓨터를 배우고 사진을 시작했습니다. 블로그를 하기 위해서.”
그녀는 다음 블로그의 우수 블로거가 400명이었던 시절에 그 중 한 명으로 뽑힐 만큼 성공적인 블로그 운영을 했다. 하루에 2000명 정도가 다녀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녀의 글을 눈여겨보던 사장이 그녀를 사진기자로 캐스팅했다.
“경향신문에 연재되던 안의섭의 라는 만화가 있었어요. 그 네 컷짜리 만화가 정치, 경제, 사회를 다 다뤘잖아요? 그런 느낌으로 이 여자의 글도 실어보자는 게 잡지사 사장의 의도였다는군요. 그런데 그 의도보다 내가 좀 더 잘했다고 해요(웃음). 하긴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다녔어요. 기자생활을 위해 손톱도 안 기를 정도였거든요.”
그녀는 컴퓨터를 배우고 기자가 된 게 참 잘한 일이라고 거듭 말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써주는 데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다는 것이다.
“제 첫 번째 라는 책이 나온 게 2012년이었어요.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제 책을 들고 와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어요. ‘50이 되고 갱년기가 와서 인생이 너무 슬픈데 선생은 60부터 이걸 하셨다니 놀라워요. 제가 60이 되려면 앞으로 10년이 남았는데, 10년을 더 노력하면 무엇인들 안 되겠습니까’라고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정신심리학 박사인 김효숙 교수는 조이스 리의 사진을 수천 장 넘게 갖고 있다고 한다. 그녀가 찍은 사진이 심리치료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기자의 시선으로 왜곡되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조이스 리 사진의 힘일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5일은 일하고 주말에 홀로 미국 대륙의 수천 마일을 오가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연인이 된다. 작은 체구이지만 그녀의 눈빛과 몸짓에서 뜨거운 용트림이 느껴진다. 그 에너지가 견딤의 실체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얼마 안 걸린다.
20만 번의 셔터 누름, 결국 고장 난 카메라
“닷새 동안 3000마일이 넘는 먼 거리를 혼자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네 시간 정도 잔 후 새벽 3시에 일어나 다시 작업을 시작해 정오까지 마치고 시장을 다녀왔어요.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철인 3종 경기에 나가도 챔피언이 될 거라며 혀를 찼습니다.”
그녀는 다시 태어나면 꼭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 아내가 마음 놓고 여가를 즐기며 쉬엄쉬엄 여행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겠다고 수없이 다짐한다. 그녀가 사진을 배운 것은 철저히 필요에 의해서였다.
“기자는 본격적으로 사진을 다룰 줄 알아야 하니까요. 50대 후반의 나이에 컴퓨터를 배우는데 어찌나 어려운지. 봄여름 학기와 가을겨울 학기 중 네 명의 장학생을 선발해 포토샵을 무료로 가르친다더라고요. 그게 욕심이 나서 열심히 공부했죠. 대상포진이 두 번이나 올 정도로 무리를 했어요.”
카메라 셔터 수명은 대략 15만 번 누르면 고장이 난다고 한다. 그러나 조이스 리의 카메라는 5년 정도 사용하면서 20만 번을 찍었고 결국 셔터는 고장이 나고 말았다. 셔터의 감각을 익히고자 했던 그녀의 집중력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제가 싫어하는 게 왜곡이에요. 그래서 어안렌즈는 아예 구매를 안 했어요. 줌도 잘 안 써요. 그런데 작가라는 이름을 안 쓰는 이유는 아직 카메라를 못 다루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냥 지나가다가 좋으면 찍거든요. 그러니 작가라고 말하지 못하죠.”
그녀는 글쓰기에도 욕심을 부린다.
“현재 집필중인데, 2년 후에 소설을 발표할 거예요. 제가 미국 서부의 내셔널 공원을 다 가봤는데 가장 아름다운 곳이 그랜드 티톤이었어요. 그곳에 가면 엘크 떼 수백 마리를 아침에 만날 수 있어요. 저는 엘크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남성성을 좋아해요. 그리고 버펄로, 울창한 숲, 거대한 연못과 그리즐리, 스네이크 리버도 있죠. 그곳에 가면 대자연을 만날 수 있어요. 소설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서정적인 이야기들이에요. 세계에서 최초로 한국어와 영어로 쓰인 인터넷 소설이 될 거예요.”
나의 전생은 ‘인디언’
역마살을 타고난 여자, 조이스 리는 어느덧 9년차 기자가 됐다. 인터뷰 후 얼마 있다가 잡지가 나오는데 이번에 그녀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인디언 문화다.
“요즘 미국 사람들이 자기들 역사는 아니지만 본래 그 땅의 주인공들인 인디언들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어요. 저는 이전부터 인디언에 대해 관심이 굉장히 많았는데, 3~4년 후에는 기자의 눈으로 만난 인디언들 얘기를 책으로 쓸 거예요.”
원래 미국의 인디언들은 거의 서부에 있었다고 한다. 동부에는 체로키족이 있었는데 이들이 유럽인을 가장 먼저 만나 백인 중심 인텔리 사회로 편입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서부에는 아직 야생의 문화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녀의 인디언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남다르다. 심지어 과거에 열렸던 조이스 리의 사진전 이름도 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전생에 인디언이었다고 주장한다.
“난 믿어 의심치 않아요. 그들에 대한 알 수 없는 연민이 있거든요. 그리고 언덕에서 붉은 계곡을 내려다볼 때 느끼는 감동 같은, 마음으로 통하는 데자뷔를 느껴요. 그것은 굉장한 희열이에요.”
지금 당장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결국에는 인생을 아름답게 채색해준다면 누구라도 그 험한 세상을 향해 달려갈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손주 시후의 일기를 쓰는 여전사 할머니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조이스 리의 딸은 지니프러덕션 L.A. 전산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손주는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갔는데 공부를 진짜 못해요. ‘0점’만 받아와요. 그래도 자연에 대한 감수성은 굉장히 좋아요. 이 아이에 대한 이야기, 를 요즘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어요.”
는 할머니의 시선으로 손주의 마음을 그려내는 글이다. 독특한 관점이다.
“네가 이렇게 자랐다, 할머니는 네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정말 이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 현실을 바라보는 하나의 상상인 거죠. 제 딸이 사춘기에 방황을 했어요. 저는 딸이 형제가 없어서 그렇게 방황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손주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요. 손주가 엄마랑 비밀이 있겠지만 저랑도 비밀이 있으면 좋겠어요. 자기편이 있다고 생각하면 힘들지 않잖아요.”
손주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각은 항상 밝다. ‘빵점 맞으면 어때. 그리고 설마 영어를 못하겠어? 긍정적 시각으로 미래를 보라 이거야.’ 손주 시후에게 항상 희망을 심어주는 그녀만의 특별 도구다.
“손주의 자랑이라면 유머가 풍부한 편이에요. 지금 시대는 먹고사는 걱정이 크지 않기 때문에 즐겁게 사는 게 중요해졌잖아요. 이 아이는 그렇게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손자의 개구쟁이 짓을 절대로 야단 안 쳐요. 어른을 놀려먹으려고 하는 게 아닌 이상은.”
손주가 어렸을 때 밥을 먹다가 먹던 것들을 컵에다 붓고 손가락으로 주무르는 행위를 자주 했다고 한다. 다른 식구들은 “저걸 왜 내버려둬” 하면서 경악했지만 그녀는 “지금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거다, 2년만 지나면 안 한다”라고 말했단다. 그녀는 손주가 촉감을 익히는 중이니 내버려두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손주 시후에게는 언제라도 미소를 지어주는 할머니다.
틀에 갇히지만 않는다면 시니어와 젊은이의 삶은 다르지 않다
이미 제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는 조이스 리는 멋진 인생을 살고자 하는 시니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야 이놈아 네 나이가 몇이냐?’ 하는 말이에요. 그 말을 해서 얻는 건 경멸밖에 없어요. 안 그래도 요즘 젊은이들은 노인네를 인류의 한 부족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어렵지만 앞으로 함께 나아가면 좋겠어요. 대화를 통해 지혜를 나눠주되 절대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하고, 나이 같은 건 의식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본능처럼 여겨온 삶의 철학, 느낌과 경험을 축적해 체득한 깊은 진심이 묻어났다. 조이스 리는 틀에 갇히는 것을 거부한다. 간절함을 미끼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한숨 쉬어갈 수 있는 삶의 여유를 찾았으면 하는 프레임, 그리고 그 안에는 세상 그 무엇보다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녀의 사진처럼 말이다. 그녀가 세상 사람들에게 간절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 by 조이스 리
몬순기에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대지가 거의 바위로 이어져 있는 계곡 때문에 물이 그대로 강물이 되어 내달린다. 이 물의 힘이 수수만년 이어지면서 협곡이 생기고 겹겹의 층 사이를 깎아내어 아름다운 속살을 드러낸 골짜기가 형성되었다.
산타페의 대표적인 건물은 어도비(Adobe)식 흙집으로, 해발 2200미터가 넘는 고지대인 이 지역의 혹독한 겨울과 뜨거운 여름을 잘 견뎌내도록 지어졌다. 두께가 50센티미터가 넘는 두꺼운 벽이 외부의 온도를 차단해주기 때문이다.
모래언덕 데스밸리. 여름 5월부터 9월까지는 날씨가 섭씨 50-60도를 웃돌므로 피하고 가을 한철 또는 이른 봄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이와 같은 척박한 사막의 땅에도 봄이면 야생화가 만발하고 동물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어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혜화역 4번 출구를 나와 혜화동 로터리에서 길을 건너 3분가량을 걸었다. 한무숙 문학관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심히 걷고 뛰던 대학로 길 옆. 이 익숙한 거리를 수없이 지나다니면서도 문학관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니. 조용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문학관 입구가 보였다. 긴 숨을 내쉬고, 무거운 나무 대문을 열고. 그녀와 첫인사를 나눴다.
한무숙(1918~1993)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소설가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학교보다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중이염, 폐결핵 등을 앓아 어렸을 때 어른들이 ‘서른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한다. 서른까지만이라도 살아달라는 당부였다. 뇌막염으로 왼쪽 청력을 잃었지만 삶에 대한 의지와 탐구는 끊임없었다. 그림 재능이 있어 초등학교 2학년 때 독일 베를린 만국 아동 전시회에서 입상했다. 언어 능력도 뛰어났다. 독학으로 영어와 프랑스어를 익혀 쓰고 읽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화가를 꿈꿨지만 1940년 결혼 이후 그림 그리는 것이 쉽지 않아 펜과 종이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글쓰기로 전업했다. 1941년 잡지 장편소설 현상 공모에서 ‘등불 드는 여인’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대표 소설로는 , 등이 있다. 은 폴란드어, 영어, 프랑스어, 에스토니아어, 체코어, 중국어로 번역됐다. 대표적인 기념사업으로 1995년부터 한무숙문학상을 재정해 1년 중 활약이 돋보인 중견 소설가에게 상을 주고 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한무숙 소설 독후감 쓰기 대회’도 2011년부터 진행하고 있다.
작가의 흔적, 문학관에 담다
한무숙 문학관은 작가가 40년 동안 살았던 종로구 명륜 1가의 한옥집에 세워졌다. 대청마루에 꾸민 1전시실과 2전시실인 응접실, 집필실, 한무숙 작가의 사진과 다양한 소품 등을 전시해놓은 3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입구로 들어가 바로 앞에 보이는 널찍한 대청마루가 1전시실이다.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한무숙 작가의 대표 소설 에서부터 단행본, 평소 썼던 메모지, 여권, 여행을 하면서 가지고 다녔던 주사기 등 한무숙 작가의 대표 소장품들이 전시돼 있다.
2전시실은 응접실이다. 한무숙 작가가 살았을 때보다 집안 내부 규모를 넓혔다. 2006년 공사를 진행했는데 응접실 중앙에 있는 기둥을 기점으로 왼쪽이 원래는 뒷마당이었다고 한다. 펄벅 여사를 비롯해 국내외 유명 인사들이 다녀간 이곳에는 작가의 소품과 유명 문인과 화가들이 직접 선물한 족자 등이 전시돼 있다.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곳
한무숙 문학관의 백미는 집필실이다. 작가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살아생전에는 책이 더 많았는데 수천 권에 이르는 책을 숙명여대에 기증했다고 한다. 전시를 위해 책상의 방향을 관람객 쪽으로 돌려놓은 것 말고는 옛 모습 그대로다. 책상 위에는 작가가 쓰던 만년필과 잉크, 손녀가 그린 그림 등이 놓여 있어 따뜻함을 더해준다. 평소 사용했던 오래된 양산과 우산도 방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3전시실에 들어가면 작가가 시집갈 때 만들었던 수공예품을 비롯해 초기작 영인본을 감상할 수 있다. 드라마로 제작됐던 소설 의 비디오 등도 전시돼 있다.
한무숙 문학관은 사립박물관이지만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박물관보다 작다. 관람료는 받지 않지만 박물관 측은 방문 전에 꼭! 예약을 해달라고 당부한다. 예약을 하면 상주하는 문학사가 관람객들과 전시실을 함께 다니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한무숙 작가의 아들인 김호기 관장은 어머니의 소설을 이해하는 관람객을 소중히 모시고 설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매일 관람객이 꾸준히 찾고 있다.
관람 정보
관람시간 평일 9:30~5:00 (전화 예약 후 관람 가능), 주말 및 공휴일 휴관 (토요일 오전 관람 가능) 입장료 무료 문의 및 예약 02-762-3093 위치 서울시 종로구 명륜1가 33-100(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 혜화초등학교 방향 약 200m) 홈페이지 www.hahnmoosook.com
지난 6월호에서 손주의 잉태 소식을 ‘생명은 기계가 아닙니다’라는 제목으로 전해드렸습니다. 이제 그 아기를 만나보고 몽골로 돌아왔습니다. 드디어 세상에 태어난 아기를 만나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따로 따로 버스를 타고 비행기를 갈아타며 다시 빨리 달린다는 열차와 자동차로 이름도 생소한 독일 에어랑엔(Erlangen)의 헤르초게나우라흐(Herzogenaurach)에 밤늦게 도착했습니다.
제 아내, 즉 아기의 할머니는 나보다 먼저 출발했고 할아버지인 나는 한 달 후에 닿은 것입니다. 세 살과 네 살인 아기 오빠는 아직 동생이 생소합니다. 언제라도 뛰어가 안길 수 있었던 엄마의 품안엔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아기가 있습니다. 자기들과 항상 놀아주던 엄마와 아빠가 새 아기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한편으론 이해가 될 듯도 합니다. 자기들과 비교할 수도 없는 너무나 어리고 여린 생명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예 경쟁을 포기하고 자기들끼리 눈치껏 알아서 노는 데 익숙해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도 어른들이 보기에 착하게만 굴 수 없는 나이라서 어른들이 챙겨줘야 할 일들은 끊이지 않고 터집니다. 두 녀석의 활기찬 에너지는 언제나 생기가 넘쳐 어른 한두 명이 감당하기가 벅차다는 것은 현장에 도착하기 전 이미 아내의 카톡을 통해 내 머리에 입력되었습니다.
밤늦게 도착해 자고 나서 현장에 투입되니, 역시 내 주된 일이 그 두 녀석과 노는 것입니다. 내가 도착하기 전 아내는 어떻게 혼자서 이 일들을 감당하고 있었는지 존경스럽습니다. 나 혼자서도 만만치 않은 개구쟁이 두 녀석을 돌보는 일을 아내는 짬짬이 하는 곁다리 일로 담당했다니!
몸을 추스르고 있는 며느리가 행여 나중에라도 뒤탈이 있을까봐 아내는 모든 빨래와 집안 정리와 청소, 거기에 세끼의 식사를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단독주택이라 지하층부터 3층 다락방까지 오르내리기를 쉬지 않습니다. 두 녀석 유치원엘 자동차로 데려다주고 데려옵니다. 장을 봅니다. 그 와중에 아이들과 친분이 있는 가족들을 초대해 칭찬받을 대접도 하였습니다. 한국 아줌마의 놀라운 힘을 곁에서 직접 보니 정말 여러 번 혀를 내둘러야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드디어 늦게 일어나도 되는 토요일 새벽입니다. 다 쉬고 있는 새벽입니다. 깊이 자고 있는 저를 깨워 보여줄 게 있다며 아내가 조용히 문을 열고 골목골목을 돌아 데려간 곳은 새벽안개가 피어나고 있는 벌판이었습니다. 삶의 현장을 떠나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것입니다. 공간적으로의 이동뿐 아니라 시간의 공백도 느껴졌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읽은 헤르만 헤세의 시가 정확히 떠올랐습니다. ‘Im Nebel(안개 속에서)’였습니다. 전혀 내 머릿속에는 이미 없을 거라고 당연히 치부하고 있었던 독일어 수업시간이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되었습니다. 정말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며 꿈에도 생각 못했던 독일의 안개 속에 오십 년의 시간적 공백을 느끼며 바라보았습니다.
Im Nebel
Seltsam, im Nebel zu wandern!
Einsam ist jeder Busch und Stein,
Kein Baum sieht den andern,
Jeder ist allein.
Voll von Freunden war mir die Welt,
Als noch mein Leben licht war;
Nun, da der Nebel fallt,
Ist keiner mehr sichtbar.
Wahrlich, keiner ist weise,
Der nicht das Dunkel kennt,
Das unentrinnbar und leise
Von allem ihn trennt.
Seltsam, im Nebel zu wandern!
Leben ist Einsamsein.
Kein Mensch kennt den andern,
Jeder ist allein.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숲과 돌은 저마다 외로움에 잠기고
나무도 서로 보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다.
내 삶이 아직 밝던 시절엔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건만
이제 안개 내려
아무도 보이지 않는구나.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모든 것에서
사람을 떼어놓는 그 어둠을
조금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하다 할 수 없다.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인생이란 고독한 것.
사람들은 서로 모르고 산다.
모두가 다 혼자다.
그렇게 그 시를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나이를 헤아려보며 아내의 손을 조금 더 느껴보았습니다. 조금 더 넓게 보기 위해 구릉에도 올라가 보았습니다. 풀에 맺힌 안개 이슬로 신발과 바지 섶이 젖었습니다. 마을로 되돌아와 아들 집에 이를 때 안개 속에 뿌옇게 떠오르는 해를 보며 조금 더 굽어진 나의 등을 실감하였습니다. 아직 오십 년의 시간을 되돌리고 있는 중이었나봅니다. 아내의 한마디에 정신이 확 깨었습니다.
뭐해? 셀라 트림시키지 않고.
셀라: 지금 독일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둘째 아들의 셋째 아이 이름입니다. 성경 시편에 나오는 ‘멈춰서 들으라, 내용을 묵상하라’는 뜻의 후렴구, 추임새. 셀라! 제 입에 넣고 굴릴수록 너무나 마음에 드는 이름입니다. 셀라.
개인적인 생각을 안개로 전하면서, 우리 대한민국이 자꾸 보고 싶어집니다. 이럴 때 이런 기회에 사랑하는 나의 대한민국에 전하고 싶은 믿음이 제게 하나 자라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겪을 수 있었던 우리의 놀라운 힘입니다.
전 한국전쟁의 비참한 문제들 가운데 자랐습니다. 철이 들면서 4·19를 보았고, 돈벌이를 위해 중동과 해외를 다녀야 했습니다. 6·29선언을 거쳐 IMF를 맞을 때, 세계는 우리 대한민국을 비웃으며 놀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놀림이 놀람으로 바뀌는 사건을 현장에서 겪었습니다. 이번에 당면한 놀림거리로도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여기 몽골에서는 고려가 몽골의 속국이었다는 징기스칸제국의 지도를 자주 만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큰 사랑과 진정으로 몽골이 잘되도록 도와주고 있음을 서로 간에 알고 있습니다.
역사를 배우며 우리는 세상의 비웃음에 처했을 때마다 언제나 그들의 놀림을 딛고 일어나 그들을 놀라게 해왔던 자랑스러운 민족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국가적 부끄러움을 만났지만 이 안개가 걷히면 우리 대한민국의 저력으로 오히려 세계가 놀라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소용돌이치는 우리의 힘이 드디어 응집되고 있습니다. 고요히 흐르던 물이 지금 바로 깊고 좁은 계곡을 만났습니다. 급변할수록 우린 서로 끌어안는 힘! 대동단결, 두레의 에너지가 분출되는 한민족이기 때문입니다.
>>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사진으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뿌리가 명나라에서 시작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뿌리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우리의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우뚝 선 장르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것이 바로 초상화다.
명나라 왕조 376년(1368~1644), 청나라 왕조 275년(1636~1911) 도합 51년을 거치면서 초상화 제작과 관련한 중국의 화풍(畵風)도 많이 바뀌었다. 중국이라는 나라의 규모가 너무나 광대해 문화적 통일성을 간직하고 유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시대와 왕조에 따라 각기 다른 화풍이 나타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화가가 너무 작고 사소한 것에 급급하면 크고 중요한 것을 잃는다[畵者謹毛而失貌]’라는 생각이다. 이는 당시 초상화 제작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중국 초상화의 뛰어난 필력(筆力)과 무관하게 시대와 왕조에 따른 화풍은 결과적으로 ‘질의 들쑥날쑥한 현상’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우리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지켜온 무변(無變)의 원칙과 사뭇 다르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피사체의 부(富)나 권력의 고하와 무관하게 많은 경우 조정에서 신하에게 내린 하사품의 성격을 띠었다. 더불어 조정의 도화서(圖畵署) 출신 화인(畵人)의 손품이 묻어 있어 높은 질적 수준을 유지함과 동시에 ‘균일성’도 간직할 수 있었다.
2012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개최한 ‘조선공신(朝鮮功臣)’ 전을 둘러본 적이 있다. 왕을 헌신적으로 섬긴 공을 인정해 조정에서 신하에게 하사한 초상화를 모은 전시회였다. 작품 중 조선시대 후기 숙종(肅宗)과 영조(英祖)시대를 산 오명항(吳命恒, 1673~1728)의 분무공신상(奮武功臣像)을 보며 몇 가지 단상이 떠올랐다.
필자가 오명항의 초상화를 처음 본 것은 1980년대 초다. ‘초상화’ 하면 피사체의 모습이 화려하지 않아도 우아한 것을 기대하는 ‘관습’에 젖어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오명항의 초상화는 안면이 온통 천연두(天然痘, 媽媽) 자국으로 덮여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간(肝) 질환 증상과 비슷한 흑달(黑疸)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사진 1).
지금은 거의 볼 수 없지만 1950년대만 해도 거리에서 천연두를 앓은 흔적의 얼굴을 보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 시절의 기억을 공유한 필자로서는 흔히 일컫던 ‘곰보 자국’이 그다지 생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명항의 초상화를 보는 순간, 무서울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천연두 자국이 있는 조선시대 초상화가 드물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얼굴까지 아주 검게 그린 초상화를 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만성 간경화증(肝硬化症)에서는 먼저 황달(黃疸)이 나타나고, 말기가 되면 흑달로 이어진다. 초상화에서 오명항의 사인이 무엇일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오명항의 다른 초상화(사진 2), 즉 ‘분무공신상’을 보면서 필자는 또다시 놀랐다. 두 개의 초상화를 제작한 연도는 똑같이 오명항이 사망한 해인 1728년이었다. 그런데 ‘분무공신상’에 나타난 안면 피부 색깔에는 ‘황달기’가 여실히 보이지만 ‘흑달’까지는 진행이 안 된 상태였다. 그에 반해 다른 초상화에서는 안면을 검게 그린 점이 두드러졌다. 요컨대 ‘분무공신상’ 제작 이후 간경화증이 급격하게 진행되었다는 얘기다. 생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의 임상 증상인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우리 초상화의 ‘별난 특징’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다.
>>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