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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거리, 쇠막, 씨부게, 애기구덕, 남태...”
- 제주도 옛날 농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제주전통농가전시실.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현장이다. 제주감귤박물관 본관 2층에 설치되어 있다. 제주도 전통농가의 옛 모습과 삶의 지혜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요즘 제주도 젊은이들도 잘 모르는 특이한 명칭들이 많다. 제주전통농가의 옛 모습 제주민속자료 제3호인 제주전통 초가 세 채와 정낭, 통시(전통화장실), 우영밭(텃밭) 등 제주농가 전체를 복원해 놓은 곳이다. 옛 농가 전체를 실내에 조성했다. 제주 농업과 제주전통농가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용어 자체가 제주도의 전통과 특성에 맞게 붙여진 것이 많다. 사람들이 주로 살았던 집을 "안거리"라고 한다. 안채의 방언이다. 안거리 옆에 별도로 지은 작은 집을 “밖거리”라고 한다. 바깥채의 방언이다. 안거리와 밖거리는 모두 진흙을 발라 지은 초가집으로 안거리는 살림을 하고 손님들을 맞이하는 집으로 사용하였다. 밖거리는 주로 부엌으로 이용하여 부엌에서 밥을 지어 먹을 때는 안거리에서 먹었으며 남은 공간은 마늘과 고추 등 농산물을 걸어놓고 말리고 그 외에 농산물과 농기계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활용하였다. '쇠막'은 외양간의 방언으로 소와 말을 기르는 곳이다. 옛날에는 말이나 소가 농사를 지을 때 매우 중요한 일을 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에 집 가까이 두고 정성껏 보살폈다. 말은 수레를 끌거나 직접 타는 교통수단이었고 소는 쟁기를 매어 밭을 가는 역할을 했다. '통시'는 대소변을 보는 곳과 돼지를 가두어 기르는 곳을 하나로 합쳐서 돌담을 쌓아 만든 주거공간이다. 옛날 제주의 민가들이 사는 입구의 올레에는 '정주석'을 세우고 '정낭'을 걸쳐서 대문 역할을 했다. 정낭은 인적 정보를 이웃에게 알리는 제주가 갖고 있는 특유의 생활 풍습이었다. 정주석에 3개의 구멍을 뚫어 나무로 만든 정낭을 걸쳐서 소나 말의 출입을 막고 집주인의 외출을 이웃에게 알렸다. '장항'은 장을 담는 항아리이고 '장독대'에는 늘 여러 개의 장항이 놓여 있었다. 제주에서는 탈곡하기 전의 농작물을 단으로 묶어 쌓아두거나 탈곡하고 난 짚을 낟가리로 씌워 쌓아 놓은 것을 "눌"이라고 하고 눌을 쌓기 위한 공간을 “눌굽” 또는 “눌왓”이라고 했다. '우엉'은 텃밭을 말하고 '물허벅'은 물을 길러 나르는 물항아리다. '물구덕'은 물을 길어 다닐 때 등에 지고 다녔던 정방형 모양의 대바구니다. '물팡'은 물허벅을 지고 다니다 내려놓는 곳을 말한다. 제주전통농가의 삶의 지혜 농사를 지을 때 다양한 도구를 이용하여 효율적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노력한 모습을 전통 농기구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애기구덕'은 아기를 좌우로 흔들면서 재우는 데 사용하였던 구덕이다. 말과 되는 곡식을 측정하던 기구이며 '도고리'는 가축의 먹이를 주는 그릇으로 모두 나무로 만들었다. '대패랭이'는 대나무로 만든 패랭이이다. 갓과 비슷한 형태로 '이대'라는 대나무의 한종류로 만들어지는 데 '이대'는 제주지역 어디에서나 군락을 지어 자생하며 바닷가에서 소금바람을 견뎌내며 자라서 좀이 슬지 않고 잘 썩지도 않는 장점이 있다. 농부들이 무더운 여름날 밭에서 더위를 피하려고 사용하였다. 덩드렁마께'는 나무 방망이이다. 나무 토막으로 만든 투박한 방망이로 짚이나 칡을 두드려 부드럽게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다. 빨래를 할 때 두들겨 물을 뺄 때도 쓰인다. '남방애'는 남방아라고도 하며 제주도에만 있는 것으로 큰 나무를 파고 그 안에서 곡식을 찍는 부분인 돌로 만든 절구다. 나무로 만든 방아라는 뜻이다. '맷방석'은 고래방석이라고도 하며 고래할 때 밑에 깔아서 이용했다. '고래'는 맷돌을 돌리는 기구로 맷돌을 돌리는 것을 고래곤다라고 한다. 메밀 등 마른 곡식을 가는 데 쓰는 기구이다. '푸는 체'는 곡식에 섞인 겨 따위를 걸러내는 도구이다. 바람을 일으켜 죽정이나 겨를 내쫓는 데 사용했다. '도깨'는 도리깨의 방언으로 콩, 보리 등 곡식을 두둘겨서 알갱이를 털어 내는 데 쓰이는 연장이다. '홀태'는 촘촘한 날 사이에 벼, 보리, 밀 따위의 이삭을 넣고 훓어내어 낱알을 터는 농기구다. “골갱이”는 제주의 농기구 중 가장 작으면서도 대표적인 도구이다. 손에 쉽게 휴대하여 잡초 등을 제거하고 종자를 심을 때 사용한다. '호미'는 풀, 나무, 곡식의 대 등을 베어내는 데 쓰는 낫이다. '남태'는 흙덩이를 고르거나 씨가 날리지 않도록 땅을 다지는 데 쓰는 나무로 만든 기구다. '씨부게'와 씨부게기는 짚으로 만들어 씨앗을 보관하는 주머니로 주둥이를 좁게 만들어 쥐나 벌레로부터 피해를 막는 씨앗주머니다. '곰배'는 곰방애라고도 하며 흙덩이를 깨뜨리거나 골을 다듬으며 씨를 뿌린 뒤에 흙을 고르는 데 쓰는 기구다. '쇠멍에'는 말이나 소가 달구지나 쟁기를 끌 때 목에 거는 막대를 말한다. 지금 사용하는 현대식 농기구는 대부분 과거 전통농가에서 사용했던 기구들을 발전시킨 것들이다. 전통 농기구들이 잘 보관되어 더욱 잘 활용되길 기원한다.
- 2020-02-27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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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가을이 왔을까?
- 언제 가을이 왔을까? 계절이 소리 소문 없이 변하며 찾아왔다. 세월과 함께 서서히 잊혀가던 추억을 찾아 월출산으로 떠났다. 넓디넓은 평야에 불쑥 솟아오른 해발 809m 화강암의 국립공원이 아니라 어느 천국 같은 가을날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경포대 탐방지원 센터에서 시작하는 탐방로를 따라 산을 올랐다. 숲속 산길을 걷기 시작하니 달아나는 시간이나 그 시간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막연한 불안감은 사라졌다. 진정한 여행자는 풀잎을 보고도 우주를 상상할 수 있다고 한다. 사물 그 너머의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여행자는 모래알 하나로도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오르는 산길 곳곳에서 나는 작은 우주들을 보았다. 행복했다. 하지만 추억 속 가을의 길은 만나지를 못했다. 산행 내내 가을을 찾았으나 가을을 보지 못했다. 천황봉 구름 덮인 곳까지 눈길로 찾아보았다. ‘너무 이른 가을인가?’ 바람재 삼거리에 도착하니 그곳에 가을의 내음이 있었다. 추억 속 가을의 단편 하나가 튀어나왔다. 삼거리의 무성한 갈대는 바람보다 먼저 누워있었다. 은빛 갈대밭은 잘 익은 성숙한 생명의 벌판이다. 누워있는 갈대는 머리가 무거워 숙인 것이 아니다. 지나온 시간의 길이가 고개를 숙이게 한 것이다.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돌아 구정봉에 올랐다. 누렇게 변해가는 나주평야와 굽이져 흐르는 영산강 줄기가 한눈에 보였다. 뜨거운 가을 햇살이 벼 이삭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남도 가락의 노랫소리가 실려 왔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 이 욕심을 어찌할까!’ 구정봉에서 500여m 떨어진 곳에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마애석불이 있다. 벼랑 아래 큰 바위에 총 길이 8.6m 크기로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이다. 벽면에 새겨진 불상은 눈이 옆으로 길고 끝이 올라가 있어 미소를 짓는 것 같기도 하고, 안 짓는 것 같기도 하다. 벼랑길을 힘들게 내려와 불상과 마주친 순간 그렇게 찾던 가을도, 추억의 가을도 모두 내려놓게 되었다. 알 듯 모를 듯한 불상의 얼굴 표정이 번뇌를 멈추게 했다. 가을날 오후의 햇살이 석불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 가을 햇살을 쫓아 석불이 바라보고 있는 쪽을 보니 삼층석탑이 우두커니 서서 하염없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삼층석탑의 투박하고 단순한 선이 온 감각을 깨웠다. 그렇게 찾았던 가을이 그곳에 있었다. 이번 떠남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나와 만나고 싶었다. 이른 가을의 월출산에서 나는 나와 세계를 대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나와 세계를 함께 깨달을 수 있었다. 강진으로의 가을여행은 울림이 있는 여행이 되었다. 또 하나의 기억이 쌓였다. 무엇보다 내 삶이 풍요로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2019-10-29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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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면은 ‘오리무중’이다
-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냉면이 뜨겁다. 2018년 봄,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냉면을 대접하면서 열기가 폭발했다. 그날, 서울의 냉면집들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북한 ‘옥류관’ 냉면 때문에 평양냉면 붐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 이전부터 평양냉면은 음식, 맛집을 넘어서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고 있었다.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이라는 표현이 여러 미디어와 개인 블로그, 유튜브 등에 떠돌아다녔다. ‘평양의 옥류관 냉면’은 불타는 장작더미에 기름을 얹은 격이었다. 냉면은 ‘오리무중’이다. 정체를 알기 힘들다. 의견도 분분하다. 정의를 내리기 힘들다. ‘면스플레인’이라는 표현이 있다. ‘면(麵)’+‘익스플레인(explain)’이다. 면, 냉면, 평양냉면에 대해 아는 체하며, 맛집 순위를 매기고, 남을 가르치려 드는 것을 이른 표현이다. ‘맨스플레인(man′s +explain)’에서 시작된 조어다. 이 글도 ‘면스플레인’의 일종이다. 냉면에 관해서 설명한다. ‘면스플레인’인지 냉면에 대한 올바른 지적질인지는 읽는 분들이 판단하시길. 국수, 냉면은 귀한 음식이었다 냉면도 ‘차가운 면’ 국수다. 냉면의 주재료는 메밀이다. 메밀은 ‘메[山]’+‘밀[小麥]’이라고 여긴다. 모가 났다고 해서 모난 밀, 모밀, 메밀이라는 설도 있다. 보리는 대맥, 밀은 소맥, 메밀은 교맥(蕎麥) 혹은 목맥(木麥)이다. 교맥, 메밀을 흔히 구황작물(救荒作物)이라 부른다. 구황작물은 곡식이 부족할 때 대체 작물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메밀은 구황작물이라기보다 상용작물(常用作物)이었다. 초여름 무렵 비가 부족해도 메밀을 대파했다. 다행히 메밀은 짧은 생육기간, 60~90일이면 수확할 수 있었다. 지질이 좋지 않아 농사를 짓기 힘든 땅에는 처음부터 메밀을 심었다. “곡식이 부족하니 메밀을 먹어라”가 아니다. 애당초 벼농사, 곡물 농사 짓기 힘든 땅에는 메밀을 심었다. 메밀은 주요 상용작물이었다. 메밀이 좋아서 메밀로 국수를 만든 것도 아니다. ‘메밀국수+동치미’의 조합은 좋아서, 먹고 싶어서 선택한 조합이 아니다. 비교적 편하고 쉬워서 등 떠밀려서 선택한 조합이다. 깊은 밤, 배가 출출하다. 입 다실 게 있으면 좋겠다. 메밀국수를 내린다. 한민족은 탕반(湯飯) 음식을 즐긴다. 국물 없는 밥상은 목이 멘다. 국물을 만들기 힘든 시간, 동치미 한 사발이면 국수를 말아 먹을 수 있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안동에는 지금도 ‘국수 제사’가 남아 있다. 강원도 출신들 중 결혼식 때 막국수를 먹었다는 이가 많다. 경조사에만 사용했던 귀한 음식, 국수. 국수의 대중화 역사는 길지 않다. 냉면과 막국수는 크게 다르지 않다. 냉면과 국수, 막국수는 모두 국수다. 메밀 함량 묻지 마라 조선시대에는 메밀 함량이 어느 정도였을까? 추정컨대, 50%를 넘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분기술이 낮아 디딜방아, 절구질, 물레방아를 이용해 제분했다. 절구질한 후, 고운 천 혹은 체 등으로 메밀가루를 내린다. 고운 가루는 아래로 떨어지고 깨진 껍질, 나머지 거친 입자는 그대로 남는다. 찌꺼기와 거친 입자를 다시 빻는다. 같은 방식으로 고운 가루를 내린다. 이 힘든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고운 메밀가루를 모은다. 가루 입자가 고우면 국수 만들기 좋다. 거친 입자는 국수 만들기 힘들다. 만들어도 면발이 고르지 않고 잘 끊어진다. 메밀국수 만들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불행히도 메밀은 점도가 약하다. 국수 만들기가 간단치 않다. 점도가 약한 거친 입자. 기껏 국수를 만들어도 툭툭 끊어진다. 방법은 전분(澱粉)을 넣어 반죽하는 것이다. 전분은 녹말가루다. 전분을 넣으면 점도가 높아진다. 그나마 낫다. 막국수 노포에서는 대부분 ‘여름철에는 메밀 40%, 겨울에는 메밀 60%’를 고집한다. 나머지는 밀가루 혹은 전분이다. 전분이 많으면 국수는 반들반들 윤기가 난다. 냉면이나 막국수 모두 같다. 국수의 검은 점은 메밀껍질이다. 요즘은 메밀껍질이나 보리 태운 가루 혹은 색소로 검은 색깔을 낸다. 메밀껍질이 남아 있던 예전의 거친 냉면, 막국수처럼 보이려는 것이다. 메밀 함량이 몇 퍼센트이면 가장 좋은 냉면 혹은 막국수일까? 우문(愚問)이다. 시쳇말로 ‘개취(개인의 취향)’다. 어느 정도의 메밀 함량이 맛있는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다. 각자 개성에 맞춰서 고를 일이다. 메밀 함량이 낮고 높은 것은 ‘다르다’고 표현해야 한다. 어느 쪽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게 맛있고 저게 맛없다는 표현은 틀렸다. 1980년대 이전에는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 냉면, 막국수를 내렸다. 조선시대 말기, 대한제국 시기를 화가로 살았던 기산(箕山) 김준근(생몰년 미상)은 ‘국수 누르는 모양’이라는 풍속화를 남겼다. 사내가 벽의 높은 곳에 발을 딛고 온몸으로 국수를 내리고 있다. 유압식 제면기가 나오기 전에는 “국수 뽑는 사람치고 앞니 성한 사람 없다”는 말이 있었다. 국수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에 국수나 한 그릇”도 쉽지 않았다. 예전에는 메밀 함량을 따지기 힘들었다. 귀한 음식, 국수, 냉면, 막국수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맛봤던 음식이었고 주방, 부엌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있는 집에서나 먹었던 음식이다. 해방 후, 깊은 산골에서 잔치 때 나왔던 음식이 대중화했다. 메밀 함량을 따질 일이 없었다. 함량? 중요치 않았다. 그저 ‘국수를 내릴 수 있을 정도’면 됐다. 지금도 마찬가지. 자신이 원하는 면을 고르면 될 일이다. 계곡 장유의 ‘자장냉면’ 언제부터 냉면, 막국수를 먹었을까? 막국수도 냉면과 다르지 않다. ‘막국수’라는 이름은 1960년대 이후 생겼다. 강원도의 메밀국수를 상업화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막국수와 달리 냉면은 뚜렷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계곡(谿谷) 장유(1587~1638년)의 ‘계곡집(谿谷集)’에 나오는 냉면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 이른바 ‘자장냉면(紫漿冷麪)’이다. 계곡은 이 시에서 “자줏빛 육수가 노을처럼 영롱하고, 옥가루가 마치 눈꽃처럼 내렸다”고 표현했다. 제목이 이미 ‘냉면’이다. 냉면에 대해 처음 언급한 문장으로 친다. 계곡이 ‘처음’ 냉면을 먹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기록으로는’ 처음이라는 뜻이다. 이전에도 냉면은 있었다. 계곡이 먹었던 냉면의 정체는 불확실하다. 자줏빛 육수가 무엇인지, 눈꽃처럼 내린 옥가루가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계곡은 광해군, 인조 시대에 높은 벼슬을 지낸 유학자다. 딸이 효종비 인선왕후다. 계곡은 우의정까지 지냈다. 지체 높은 집안이었으니 냉면을 먹었을 것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고, 냉면은 반가의 음식이었다. 2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18세기 후반, 냉면이 다시 문헌에 등장한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년)이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서 냉면을 언급한다. 시의 제목은 ‘서흥도호부사 임성운에게 장난삼아 지어준 시’다. 이 시에 ‘납조냉면숭저벽(拉條冷麪菘菹碧)’이라는 문구가 또렷이 나온다. “가지런히 당겨 만든 냉면이며, 배추김치는 푸르다.” 냉면과 배추김치[菘菹, 숭저]가 등장한다. 냉면 육수는 배추김치 국물이다. 이 시의 계절은 한겨울이다. 이불을 겹겹이 덮고 냉면과 노루고기 등으로 손님을 접대한다. 다산은 벼슬살이를 할 때 이 시를 남겼다. 냉면을 먹었던 곳은 황해도 서흥도호부로 대도시였다. ‘임성운’ 집안도 쟁쟁하다. 큰 도시의 행정관리 책임자, 권력자와 같이 냉면을 먹었다. 18세기를 넘기면서 냉면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먹는 이들도 다양하다. 서민들도 먹었다. 조선시대 말기의 문신 이유원(1814~1888년)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순조 즉위 초기 궁궐에서 냉면을 테이크아웃했다는 내용이 있다. 깊은 밤 달구경을 나왔던 순조가 냉면을 구해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이 내용에는 돼지고기도 등장한다. 냉면과 돼지고기를 같이 먹었다. 순조의 냉면은 궁궐 밖 가게에서 구해온 것이다. 19세기 초반, 한양 도성에는 늦은 밤 냉면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냉면은 히트 메뉴였다 영재(泠齋) 유득공(1748~1807년)의 ‘서경잡절(西京雜絶)’에 나오는 냉면도 길거리 가게에서 파는 냉면이다. 영재는 음력 4월의 평양 거리 풍경을 그리면서 “냉면과 찐 돼지고기 값이 오르기 시작한다(冷麪蒸豚價始騰)”고 표현했다. 음력 4월이면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고 냉면 값이 오른다. 냉면은 길거리 주막 등에서 잘 팔리는 히트 상품이었다. 조선시대 후기 문신 이인행(1758~ 1833년)도 냉면에 대해 기록했다. 이인행은 순조 2년(1802년)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를 떠난다. 유배 과정을 기록한 ‘서천록(西遷錄)’에 동치미(?) 냉면이 등장한다. “6월 초 이틀. 냉면을 즐기는 것이 이 지방(위원)의 풍습이다. 교맥으로 (국수를) 만든 후, 김치[沈葅, 침저] 국물로 (맛을) 조절한다. 눈, 얼음이 흩날리는 깊은 겨울에 쭉 마시면 시원하다”고 표현했다. 이미 냉면은 민간의 풍습이 되었다. 냉면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진 음식이었다. ‘평양냉면’은 조선시대 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대규모 상업화에 성공한다. 오늘날의 평양냉면이다. 계곡 장유(한양 혹은 경기도 안산/자줏빛 육수), 다산 정약용(황해도 서흥도호부/김칫국물), 순조의 냉면(한양/돼지고기), 영재 유득공(평양/돼지고기), 이인행(평안도 위원/김칫국물)의 냉면은 장소와 내용물이 모두 다르다. 메밀 함량을 짐작할 수도 없다. 1930년대 소설가 이무영이 남긴 기록에는 “경남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장소는 머나먼 경남이다. 메밀 함량은커녕 어떤 색깔의 냉면인지도 불확실하다.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냉면, 막국수, 평양냉면 요리는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불확실하다. 메밀 함량도 달라지고 있다. 어떤 것이 ‘전통, 정통 냉면, 평양냉면’인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함부로 ‘면스플레인’ 할 일이 아니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 2019-07-0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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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개구리는 ‘경칩’의 상징이 됐을까
- 24절기 중 세 번째 절기이자 완연한 봄의 시작을 알리는 경칩(驚蟄)이 돌아왔다. 본격적으로 농사를 준비하는 경칩은 농경사회를 이루며 살았던 우리 선조들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특히 이날엔 개구리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개구리가 경칩에 빠지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경칩의 의미를 풀어보면 ‘겨울잠을 자는 벌레(蟄)’들이 ‘놀라서 깨어나는(驚)’ 날을 의미한다. 양서류인 개구리는 온도 변화에 아주 민감하기 때문에 동면에서 깨어나 활동하는 시기를 통해 향후 기후와 온도를 대략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척도가 되었다. 조선중기의 학자 이수광이 쓴 백과사전인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는 경칩 때 개구리 울음소리로 한 해의 풍흉을 점치던 풍속을 소개하기도 했다. “상사일(上巳日)에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수해(水害)와 한재(旱災)를 점치는데, 개구리[田鷄]가 울기는 하나 벙어리가 되면 논에서는 좋은 벼를 거둘 수 있고, 개구리가 울부짖어 음향이 나면 논 안에서 노[槳]를 끌어당기기 좋다.” - 지봉유설 中 민간전승에 의하면 경칩을 즈음하여 개구리 울음소리를 서서 들으면 그 해는 일이 많아서 바쁘고 누워서 들으면 편안하게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다고 한다. 한편 경기도 광주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누워서 들으면 일년 내내 몸이 아프고 앉아서 들으면 건강하고 좋다고 전해진다. 경칩에 먹는 특별한 음식도 있다. 바로 개구리 알이다. 과거 일부 지역에선 건강과 행운을 빌기 위해 동면에서 깨어난 개구리나 도롱뇽 등의 양서류 알을 먹는 풍습이 있었다. 경칩에 먹는 양서류의 알이 아픈 허리를 낫게 하고 몸을 보호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2019-03-06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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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의 기본소득 개념이 부활한다
-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1840년에 발표한 ‘독일 이데올로기’에 이렇게 썼다. “사냥꾼, 어부, 목동, 비평가가 되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이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물고기를 잡고 저녁에는 가축을 기르면서 하루를 마치며 비평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경제 이론이 있다. 때로는 그 이론이 바뀌고 사라진다. 또한, 그 적용이 세계적으로 일반화하며 관심 밖에 있기도 하다. 환경의 변화가 큰 요인이다. 최근에 이르러 마르크스의 경제학 메시지의 하나인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 개념이 관심을 끌고 있다. ‘TECH TREND 2018’(조선비즈)에 따르면 자본주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실리콘밸리에서 기본소득 적용을 위한 실험이 한창이라고 한다. 스웨덴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도 같은 정책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이는 그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며, 멀지 않은 시기에 기본소득 개념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올지 모른다. 기본소득이란 정부가 국민에게 매달 조건을 달지 않고 인간으로서 기본적 생활을 할 수 있는 돈을 지급하는 제도다. 수입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에게 일정한 금액을 주고 그 돈의 사용도 간섭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생산을 비롯한 생활의 전반에서 사람의 힘과 역할이 그 주요 바탕이었다. 농경사회에는 가축의 힘을 활용했으나 그 중심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한 톨의 벼를 수확하는 데도 그랬고 한 켤레의 운동화를 만드는 데도 그랬다. 산업화 시대에 들면서 그 일손 일부를 기계가 도왔다. 근래엔 4차 산업혁명으로 인공지능의 로봇이나 3D프린터, 사물인터넷 등이 사람을 대신하고 있다. 일자리나 일하는 시간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이 경우 소득 창출의 바탕인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의 생계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린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이루는 부(富)를 재분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이유다. 최소한의 소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60세에 배우기 시작하였다. 조기 퇴직 후 금융위기 등으로 일자리를 얻지 못해 고정 소득이 없던 시기였다. 다행히 예순이 되던 해에 국민연금을 받게 되어 취미생활로 사진을 배울 수 있었다. 수령액은 80만 원 내외로, 충분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기본 생활은 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기본소득이 된 셈이다. 만약 연금을 받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사진작가로 활동할 수 있었을까? 특히 감성과 시간이 많이 필요한 사진의 특성상 그 가능성은 더더욱 적었지 싶다. 최소한의 생계수단인 기본 소득과 같은 연금을 매달 받은 덕분에 사진을 취미로 둘 수 있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다. 먹고사는 일이 최우선이 된다는 이야기다. 4차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으나 전문가들이 예측한 대로 기대에 미치지 못하지 싶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본소득을 인공지능 로봇에 의해 발생한 경제적 가치를 나눠주는 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겠다. 어느 순간 급속하게 다가올지 모르는 기본소득 제도에 대해 자세히 검토해보아야 할 시점 아닐까? 유비무환이라 했다. 미리 준비하면 우환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 2018-08-3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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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엽서도 주고받을 수 없는 그리운 친구에게
- 충주 땅 변두리 후미진 동네에 사는 너를 찾아간 것은 들판에 황금빛 물결이 일기 시작하는 어느 해 가을이었지. 논에는 벼농사, 밭에는 주로 사과 농사를 짓는 마을. 사과 과수원에는 누런 잎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나뭇가지마다 매달린 사과들은 태양의 후예들인 양 붉은 빛깔로 여물어가고 있었어. 모처럼 찾아온 나를 위해 너는 한 과수원으로 데려가 사과 한 상자를 사서 선물이라며 안겨준 뒤, 손수 차를 몰아 마을 변두리에 있는 큰 저수지 부근으로 데려갔지.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늘 혼자 가서 머물다 오곤 한다는 너만의 성소(聖所)로! 네가 말한 성소는 저수지를 둘러싼 울창한 숲속 무덤 몇 기가 있는 아늑한 장소였어. 한낮인데도 도래솔 몇 그루가 무덤 둘레를 감싸고 있어 자연스레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적요한 품에 들자 성소라는 네 말이 실감으로 다가왔지.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명상에 들기에 안성맞춤인 곳.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 내면으로 잠수할 수 있는 곳. 우리는 마른 잔디 위에 앉아, 깊고 푸른 저수지 물결을 내려다보며 한가로움을 즐겼고, 잠시 눈을 감고 명상에 들기도 했지. 그렇게 너를 만나고 온 후 보름쯤 지났을까. 후배를 통해 너의 갑작스런 부고를 들었지. 청천벽력이었어! 우리는 이제 쉰 살을 막 넘은 나이였고 정신적, 영적으로 토실토실 여물어가는 때였지. 평생을 목회자로 살아온 너는 자발적 가난을 택해 남들이 가려 하지 않는 시골 오지로 스며들어, 노인들이 대부분인 교우들을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살았어. 예수의 거룩한 종지(宗旨)를 따라 살려는 이들은 점차 줄어들고, 천민자본의 코뚜레에 코가 꿴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세상을 직시하며 너는 마지막까지 올곧게 살려고 몸부림쳤지. 네가 세상을 떠난 뒤에, 매스컴에서는 너의 아름다운 삶을 기리는 보도가 줄을 이었지. 죽기 1년 전에 네가 작성해놓은 유서도 공개됐어. 그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유서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너의 갑작스런 죽음을 더욱 안타까워했지. 그때 네가 남긴 유서의 일부야. 나는 오늘까지 주변인으로 살게 된 것을 감사하고/모아 놓은 재산 하나 없는 것을 감사하고/목회를 하면서 호의호식하지 않으면서도 모자라지 않게/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이 땅에서 다른 무슨 배경 하나 없이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고/앞으로도 더 얻을 것도 없고 더 누릴 것도 없다는 것에/또한 감사하노라.//사람들의 탐욕은 하늘 높은 줄 모르며 치솟고/사람들의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내달리며/세상의 마음은 흉흉하기 그지없는 때에/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음에 참으로 감사하노라. 이쯤에서 내가 너를 만나게 된 사연을 잠깐 얘기해볼까 해. 우리가 만난 건 강릉 땅에서였지. 서울에서 ‘기독교사상’이란 잡지 일을 하던 나는 필화사건이 터져 회사에서 쫓겨났지. 나는 부득이 홍천 땅으로 가서 잠시 목회를 하다가 네가 사는 강릉의 해변가에 있는 농촌 교회로 부임했어. 너는 강릉 시내에서 아주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었고, 민주화운동을 위해서도 헌신하고 있었지. 그렇게 사회운동에 열정을 쏟으면서도 여린 감성을 지닌 너는 시를 사랑하는 문학도였고, 어린 시절 조부에게 한문을 배운 터라 동양 경전에도 해박했어. 서로의 공통된 관심이 우리를 가깝게 했고, 우린 자주 붙어 다녔지. 주위에선 그렇게 붙어 다니는 우리를 보고 놀리곤 했어. “전생수는 고진하의 보디가드 같다”고. 나는 60kg이 채 나가지 않는 홀쭉이였고, 너는 내 몸무게의 두 배나 되는 뚱보였으니까. 물론 남들의 그런 놀림도 너는 개의치 않았어. 우리는 그렇게 친했지만, 어쩌다 객지에서 만나 여관 같은 데서 함께 잠을 자게 될 때는 좀 힘들었어. “내가 코를 좀 심하게 고니까 너 먼저 자!”라고 늘 말하곤 했지만, 내가 잠을 청하려 애쓰다 보면 너는 항상 먼저 잠에 떨어져 천장이 들썩거릴 정도로 심하게 코를 골았으니까. 그렇게 잠을 설치고 난 어느 날 아침에 국밥을 먹으며 너는 병든 후배가 입원하고 있었던 병상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함께 킬킬대며 웃었지. 후배가 입원한 병원에서 불편한 쪽잠을 자고 나오는데, 같은 병실에 있던 이들이 이렇게 쑥덕거리더라는 거야. “코 고는 소리가 어찌 큰지 시골 경운기 가는 소리 같았어!” 너무 미안한 너는 병실을 나오며 이렇게 대꾸했다고 했어. “죄송합니다. 시끄러운 경운기는 이만 물러갑니다!” 하여간 그렇게 네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나는 시골로 솔가해 잡초를 키우며 살고 있어. 너 역시 목회생활을 마치고 자유로워지면 네 고향에 돌아가 소나 몇 마리 기르며 살고 싶다고 했지. 그처럼 소박한 바람을 왜 하느님은 들어주지 않고 일찍 데려가셨는지? 네가 살던 충주 땅 부근을 지날 때나 촉촉이 비가 내려 문득 네가 그리워질 때면 원망을 담은 이런 물음을 하늘에 던져보기도 하지. 그리고 네가 남겨둔 시 몇 구절을 혼자 읊조리며 위로를 받아.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도/본디 제 맘이 아닌/우주의 움직임//사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낙담하지 말라/그대 속에 그대보다 더 큰 숨이/물결치고 있나니/그 숨결 속에 그대 삶을 묻으라. 나뭇잎 한 잎 떨어지는 것도 ‘우주의 움직임’이라는 겸허한 네 통찰 앞에서 나는 절로 옷깃을 여미게 돼. 그리고 작은 우리 속에 ‘더 큰 숨이 물결’친다는 너의 시구를 보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넌 이미 우주의 비의(秘意)를 깨친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곤 해. 네가 이승에 있을 적에 가끔씩 꽃엽서를 주고받곤 했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네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쓸 줄은 몰랐어. 그래도 너의 이름에 기대어 편지 몇 줄을 쓰면서 꽃보다 향기롭게 살았던 너의 삶을 조금이나마 드러내고 싶었어. 물론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네가 사랑했던 불우한 이 땅의 민초들, 저 산과 들의 이름 없는 풀꽃들이 네 아름다운 삶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지만 말이야. 고진하(高鎭河) 시인·목사 강원 영월생.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얼음수도원’, ‘거룩한 낭비’, ‘명랑의 둘레’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시 읽어주는 예수’, ‘잡초치유밥상’, ‘조금 불편하지만 제법 행복합니다’가 있다. 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수상. 현재 한살림교회 목사.
- 2018-08-06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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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농·귀촌이 아니라 ‘이도(離都)’
- 도시에 살다 농촌으로 삶터를 옮기는 것을 귀농 또는 귀촌이라고 한다. 농촌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농사를 지으러 가는 것은 ‘귀농’이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귀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시골을 찾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가는 것보다 여유를 즐기기 위해 이동하는 경우가 더 많다. 또한 자신이 살던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는 사람이 늘었다. 전원생활이 목적인 사람들은 연고는 없지만 새로운 삶의 터를 마련하기 위해 시골을 찾는다. 1960~70년대 산업화의 바람이 불어왔을 때, 농촌에서 지내던 많은 사람이 도시의 새로운 일자리와 희망을 찾아 자신이 살던 곳을 버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도시로 떠났다. 이것을 ‘이농(離農)’이라 했다. 이농의 사전적 의미는 ‘농민이 다른 산업에 취업할 기회를 갖기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기 싫어 떠나는 것, 즉 희망을 찾기 위해 터전을 새로 마련하는 것은 ‘이도(離都)’라 표현해야 맞다. 귀농이나 귀촌처럼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 도시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시에서 가까워 교통 여건이 좋고 경치가 빼어난 곳에는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도’해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이들로 인해 마을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강원도나 충청도처럼 수도권과 경계하는 지역을 둘러보면, 화전민이 살다 버리고 간 땅을 개발해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사람이 많다. 도시생활로 넉넉해진 사람들은 먹고살기 힘들어 버리고 갔던 땅을 개발해 집을 짓고 여유롭게 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귀농·귀촌자가 아니라 새로운 삶과 희망을 찾아 농촌으로 오는 사람들, 즉 이도해온 사람들이다. 작고 소박해진 전원생활 이렇게 도시에서 살다 시골에서 살고 싶어 내려오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움직임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전원생활의 목표가 작고 소박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예전과 같이 별장형 전원주택을 짓는 대신 노후생활의 대안으로 귀농·귀촌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품도 많이 빠졌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서 노후를 어디서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가 매우 중요해졌다. 또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 필요한 노후자금 규모도 달라진다. 노후생활비를 줄이려면 아무래도 도시보다는 시골에서의 삶이 유리하다. 하지만 경치나 감상하고 좋은 공기, 맑은 물이나 마시며 살겠다는 꿈은 없다. 폼 잡고 사는 게 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현실적인 투자를 하게 되고 그 결과 화려한 정원이 있는 집이 아니라 작고 소박한 집을 찾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도시를 버리지 않는 귀농·귀촌자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도시를 영원히 떠나 농촌에 정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마음이 있어도 대다수 사람은 도시를 떠날 입장이 못 된다. 아직 현역으로 활동하거나 은퇴할 나이가 아니어서 가족의 반대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살 자신이 없고 두려운 사람도 있다. 그동안 살아왔던 도시를 떠나는 것이 이래저래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절반 살고 시골에서 절반 사는 반쪽 전원생활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 시골생활에 자신이 붙거나 기회가 만들어지면 그때 도시를 떠나도 늦지 않은 것이다. 최근 주말주택, 세컨드하우스가 유행처럼 번지는 이유다. 도시를 떠나지 않고 시골생활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다 보니 무리한 투자를 하지 않는다. 다랭이논 한 뙈기, 컨테이너 박스 하나로도 좋은 집과 정원이 될 수 있다. 수익형 전원생활 단순히 자연이나 즐기자는 목가적 귀농·귀촌도 많이 줄었다. 농촌으로 내려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귀농·귀촌 창업이 그것이다. 앞으로 ‘수익형 전원생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질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생활비가 넉넉하다면 주말형 또는 별장형 구조의 집을 짓고 유유자적 사는 게 큰 부담이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한다. 은퇴는 빨라지고 수명은 점점 늘고 있다. 직장에서 퇴직을 한 후에도 3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하는데, 이 시간을 도시에서 보내든 시골에서 살든 수입이 있어야 한다. 은퇴자들의 가장 큰 화두다. 수익 없이 살 수 있는 은퇴자들은 별로 없다. 은퇴자가 늘고 귀촌자가 많아지면 수익형 전원주택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미 펜션에서 증명됐다. 시골에서 살며 민박집을 운영해 수익을 내는 것이 펜션이다. 지금이야 시들해졌지만 불과 5년여 전만 해도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펜션은 인기 창업 아이템이었다. 전원주택도 짓고 수익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장을 하든 펜션을 하든 전원카페를 운영하든 전원생활을 통해 수익을 낼 수 있어야 시골로 이주한 은퇴자들의 노후가 윤택해질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시니어에게 최근 전원주택 시장에 나타난 수익 모델을 하나 추천할 수 있다. 바로 ‘임대형 전원주택’이다. 펜션처럼 단기 임대의 형태는 이미 큰 시장이 됐다. 하지만 월 단위나 연 단위로 임대하는 전원주택 시장은 아직 없다. 작업, 힐링, 요양을 위해 전원주택을 장기 임대하려는 수요가 점점 늘고 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다. 개인들끼리 알음알음 전원주택 임대가 행해지고 있는데 도심의 원룸이나 아파트 임대와 비교해볼 때 수익률이 매우 높다. 특히 놀리는 땅이 있다면 시도해볼 만하다. 물론 토지부터 구입해야 한다면 투자비가 크겠지만 토지가 있다면 가볍게 접근해볼 수 있다. ‘시골 체질’인지 고민해볼 것 마음은 귀농·귀촌하고 싶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해야 할 것도 두려운 것도 많다. 하지만 마음이 있다면 지금이 바로 결정할 때다. 당장 실행해야 한다. 서둘다 금전적인 손해를 본다 해도 전원생활을 통해 얻는 것이 더 많다. 좋은 땅을 고를 수 있는 기회의 폭이 먼저 결정한 사람에게 더 넓다. 하루라도 일찍 시작하면 정착도 빠르다. 정원에 나무를 하나 심어도 시작이 빨랐으니 그만큼 더 자라 꽃도 빨리 보게 되고 텃밭의 작물도 먼저 여문다. 실제로 귀농·귀촌해서 사는 사람들 중 ‘더 빨리 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 어차피 시골에서 살 마음이 있다면 서두르는 게 좋다. “산속에서 심심하게 사는 것은 아닐까? 자녀들 혹은 친구들이 자주 올까? 아프면 병원이 멀어 위험할 텐데, 시장 다니기도 힘들고, 교통도 불편하고, 뱀이나 벌레도 많고, 또 시골 사람들 텃세가 만만치 않다는데 왕따 당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들은 살다 보면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바로 “내가 시골에서 살 수 있는 체질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딱 내 체질이야!” 하는 답이 나와줘야 한다. ‘강남 스타일’이 시골에서 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만약 마당의 풀을 뽑고 화단을 가꾸고 나무를 심고 집 고치는 일이 재미있다면 ‘시골 체질’이다. 당장 시골생활을 해도 문제없다. 그러나 별장 같은 집을 짓고 잔디 위에 파라솔 펼치고 친구들 불러 바비큐 파티나 하고 커피 마시는 상상이 좋으면 얼마 못 가 다시 도시로 올라와야 한다. 이런 사람은 ‘도시 체질’이다. 어떤 시골생활을 꿈꾸는지를 잘 고려해봐야 한다. ◆ 성공적인 시골 정착을 위한 8가지 단계 ◆ 01 결심 | 귀농·귀촌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결심이다. 농촌으로 이주해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농업에 종사하겠다는 생각으로 귀농을 준비한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농촌과 농업에 대한 충분한 이해다. 도시 회피식, 목가적인 생각만으로 결정을 내린다면 위험하다. 스스로 농촌에서의 삶을 상상해보고 즐겁겠다는 생각이 들 때 옮겨도 후회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농촌을 동경하고 좋아하는 마음만 갖고 귀농·귀촌을 시작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02 가족 동의 | 귀농·귀촌해 사는 남자들이 이주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아내 설득이다. 가족의 동의를 얻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가족들과 함께하는 귀농·귀촌이라야 성공할 수 있다. 특히 귀농은 배우자의 동의가 필수다. 정신적인 동료이고 노동력 도움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은퇴 후 귀촌하는 사람들은 터를 잡을 때도 자식들 잘 올 수 있는 곳, 집을 짓더라도 자식들이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방을 만들고 집을 키운다. 그러나 이 경우 대부분 후회를 한다. 자녀들이 부모의 생각만큼 자주 찾아와주지 않기 때문에 계획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큰 방도 비게 된다. 이를 명심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03 자금 계획 | 빠듯한 예산으로 귀농·귀촌 계획을 세우면 실패하기 쉽다. 농업시설을 마련하고 기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예상했던 비용을 훨씬 초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때 자금이 모자라면 그동안 진행했던 것들마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특히 땅을 사고 집을 짓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비용들이 발생한다. 토지 인허가 및 공사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고 변수도 많다. 04 할 일 선택 | 귀농·귀촌한 후 할 일을 정하는 것은 진행 단계 전반에서 가장 중요하다. 귀촌일 경우에는 꼭 수익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귀농자라면 어떤 작목을 선택할까를 정해야 한다. 작목은 가족의 노동력과 자본능력, 기술수준 등에 따라 결정한다. 어떤 농사를 짓느냐에 따라 준비해야 할 토지의 규모가 다르고 거기에 알맞은 농기계도 필요하다. 또 작목 종류에 따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작목을 선택할 때는 지역별 특산품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다. 각 도의 농업기술원이나 시군 농업기술센터를 이용해보자. 작목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05 기술 습득 | 작목을 선택했다면 재배, 가공, 홍보 마케팅 등에 대한 기술과 노하우도 필요하다. 영농기술은 다양한 귀농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받을 수 있고 선진 농가를 견학, 체험, 연수할 수도 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농어촌 지역에 정착한 귀농인에게 현재 재배 작목 등의 심층 연수 또는 이주 초기 관심 있는 분야의 작목 재배기술 등을 지원한다. 선도농업인(농업법인) 또는 성공 귀농인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영농 분야 등에 대한 기술 습득, 정착 과정, 상담 멘토 등이 그것이다. 06 정착지 결정 | 정착지는 자신이 선호하는 지역이나 정해진 지역이 있다면 문제가 없다. 할 수 있는 일, 작목을 찾는 일은 그다음의 일이다. 하지만 정해진 지역이 없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택한 후 정착지를 결정해야 한다. 귀촌이라면 선택의 폭이 넓겠지만 귀농의 경우 선택한 작목에 맞는 지역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시설원예와 같은 일은 도시 근교가 적당할 것이다. 벼농사, 채소, 밭농사는 평야 지역이 유리하다. 과수, 약초, 축산을 한다면 당연히 준산간 지역을 선택해야 좋다. 정착하기 위해서는 생활할 주택의 인허가를 비롯해 교통 여건, 생활 여건, 이웃 등도 검토해야 한다. 07 농지 및 주택 마련 | 농지는 영농 형태에 따라 규모나 토질, 물 사용 여건 등을 고려해서 구입한다. 농업용으로 구입할 때는 ‘국토의 계획과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농림지역’ 농지법 상의 ‘농업진흥지역’의 농지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만약 주택용, 펜션, 전원카페, 식당, 숙박시설 등 다른 용도로 사용할 때는 ‘국토의 계획과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관리지역’이라야 한다. 주택을 마련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기존 주택을 구입 또는 여유자금이 부족하다면 임대를 고려한다. 땅을 사서 신축하거나 빈집을 수리해 사용할 수도 있다. 이때 과도한 욕심은 금물. 주택에 무리하게 투자해 후회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농촌의 빈집은 대체로 간단한 수리만 해서는 사용하기 어렵다. 예상보다 비용이 많이 들기도 하니 잘 점검해야 한다. 아울러 집이 들어서 있는 땅이 대지인지, 땅 주인과 집주인은 같은지 등도 꼼꼼히 확인해보자. 08 운영 및 생활 |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이주를 했다면 드디어 전원생활의 시작이다. 이때 여유자금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면 수익을 위한 경제활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장 농사를 지어도 적게는 6개월에서부터 몇 년을 투자해야 돈을 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귀농·귀촌에 성공하려면 기술, 여유자금,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 2018-07-2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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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52시간 근로 시대, 중요해진 여가활용
- 주 52시간 근로 제도가 시행됐다. 다양한 의견과 논란이 나오고 있다. 그 바탕에는 4차 산업혁명이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삶에 대한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다가올 미래엔 어떻게 변할지도 예측이 어려울 정도다. 산업혁명이 삶의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여러 가지 변화 중에서 급격히 늘어날 여가 관리가 크게 주목받고 있다. 여가 혁명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지금 살고있는 마을은 벼농사를 짓는 논으로 둘러싸여 있다. 모내기 철이면 농기계를 이용하여 논의 써레질과 모내기를 혼자서 손쉽게 마친다. 과거에 논을 고르는 일은 소를 이용했고 모내기는 사람 손으로 했다. 농사철이면 귀신도 일손을 돕는다고 했을 정도였다. 기계화에 따라 소나 사람의 역할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기계화에 이어지는 4차 산업혁명은 더욱더 사람의 노동력을 크게 줄여 한가한 시간, 즉 여가는 많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여가의 개념을 은퇴한 후의 분야로 생각했다. 여가 관리나 여가 설계는 노후 생활의 한 방편으로 취급하여 노후설계 강좌엔 필수 항목으로 들어간 이유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여가는 직장인이나 사업가, 정년퇴직한 사람에게 적용이 다를 수 없다. 사람이 하던 많은 부분을 인공지능 로봇이나 사물인터넷, 3D프린터 등으로 대체해 가고 있다. 당연히 그 시간이 여가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늘어나는 여가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가장 큰 고민거리로 등장한다. 국내 어느 대학의 한 교수는 “4차 산업혁명으로 인류가 임금을 받는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일주일에 50~60시간 일하던 것을 10시간 내외로 줄일 수 있을 것”이라 내다봤다. 여가가 넘쳐나는 미래가 오고 있음이다. 이런 예측은 어제오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1930년쯤에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2030년이 되면 인류는 주 15시간 일할 것이고 무한한 여가를 보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 했다. 4차 산업혁명으로 그동안 인간이 하던 모든 작업을 대신하게 되고 그 시간을 사람들은 예술과 드라마, 춤, 상상이 만들어낸 삶에 몰입함으로써 여가를 풍부하게 즐길 기회가 많이 늘어날 것이다. 그야말로 여가 혁명 시대가 오고 있다. 단순한 시간 보내기가 아닌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행복 추구를 위하여 접근해야 한다. 개인이나 회사, 기관이나 정부 차원에서도 여가 혁명 시대를 슬기롭게 대응해 나갈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언론 매체에도 구체 대안을 끌어내고 방향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그 시기는 상상 이상으로 빨리 올 수 있다.
- 2018-07-03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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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렁이, 이렇게 알 낳아요!
- 우렁이는 우리에게 친근하다. 어릴 때 읽었던 우렁이 각시의 밥상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 있다. 논이나 작은 연못에 사는데, 모내기한 벼포기가 진초록으로 바뀌는 5, 6월이면 짝짓기하는 우렁이를 발견할 수 있다. 짝짓기 시기가 지나면 논두렁의 풀이나 벼의 줄기에 선명한 분홍빛 알을 무더기로 낳는다. 농약살포를 비롯한 환경오염으로 그 수가 줄어들고 있어 간혹 우렁이 알 무더기는 볼 수 있어도 직접 알을 낳는 장면을 관찰하기란 쉽지 않다. 그나마 집 주변 들판에는 띄엄띄엄 친환경 벼농사를 짓는 곳이 있어 우렁이를 보곤 한다. 우렁이의 모습을 담기 위해 아침마다 카메라를 들고 마을 들길을 걷던 중 드디어 알을 낳는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현상을 마주하며 2시간 동안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우렁이 몸 안쪽에서 양수에 덮여 불그스레해진 알이 바깥으로 쏙 밀려 나와 알 무더기에 달라붙는다. 4, 5초 간격으로 수수 알갱이 크기의 알을 하나씩 낳아 무더기를 만드는 광경은 신비로웠다. 우렁이는 체내 수정 후 알을 외부 풀줄기나 벼줄기에 1년 동안 40~80개씩 무더기로 낳는다. 생후 1년이면 생식능력을 가지며 수명은 7~8년이다. 동의보감에는 전라(田螺)를 ‘우롱이’라 하고 “논에 살며 모양은 원형이고 복숭아나 오얏(자두)과 같다”라고 기록한다. 한의학에서 우렁이는 찬 기운을 가진 것으로 분류하며 독성은 없다. 고둥 맛과 비슷하며 목마른 증세를 멈추게 하는 효능을 갖는다. 대소변을 잘 통하게 하고 술을 깨게 한다. 여름이나 가을에 잡아서 쌀뜨물에 담가 진흙을 제거한 후 달여서 먹으면 된다. 술을 깨게 하는 성분이 들어 있으니 제약회사에서 우렁이 각시가 건네는 숙취해소제 광고가 뜨지는 않을까? ‘우렁이도 두렁 넘을 꾀가 있다’는 속담도 있다. 미련하고 못난 사람도 제 요량은 있고 한 가지 재주는 다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세상을 사는 나름의 역할이 있음을 이른다. 우렁이를 보며 느끼는 삶의 지혜다. 건강한 삶이 우리의 바람이다. 좋은 환경이 그 바탕이 된다. 내년에는 다른 논에서도 우렁이가 시집 장가를 가고 고운 알을 낳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도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리라.
- 2018-06-28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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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중한 '쌀[米]'의 의미와 중요성
- 나는 매일 쌀밥을 먹으며 조상의 은덕과 농부의 수고에 고마움을 느낀다. 쌀에 영혼이 있다는 도령(稻靈)께 무언의 기도를 올리며, 쌀밥을 맛있게 먹고 소중한 쌀 한 톨도 버리지 않고 귀중하게 여기려 한다. 이렇듯 소중한 쌀과 인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우리는 매일 쌀밥을 먹고 성장하였으며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쌀’에 대한 고마움이나 그 의미에 대해 잘 인식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쌀은 벼의 열매껍질을 벗긴 알맹이다. 쌀겨는 쌀을 씻을 때 나오는 고운 속겨이며, 쌀을 씻은 뜨물이 쌀뜨물인 것을 누가 모르랴? 그러나 도시 학생들에게 벼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쌀을 얻는 농작물로 익은 열매를 '벼'라 하고 그것을 찧은 것을 '쌀'이라고 해야 알게 된다. 쌀나무(?)라고 일러줘야 할까? 벼를 재배하여 거두는 일을 벼농사라 하는데, 도심에서는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곡식을 익힌 음식을 끼니때마다 먹는다. 하루에도 세끼씩 꼬박꼬박 먹으며 생활하지 아니하는가? 아침밥을 시작으로 음식을 차려 놓은 소반인 밥상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다. 그렇다면, 세계 3대 곡물은 무엇일까? 바로 쌀, 밀, 옥수수다. 세계 5대 주에서 쌀을 재배하여 식용으로 쓴다. 쌀이 서양에 전해진 것은 실크로드의 아랍인에 의해서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쌀은 의식주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나는 쌀의 기원에 대한 문헌을 찾아보았다. 학명은 '오리자(oryza)'로 라틴어이고 'riso'는 이탈리아에서 쓴다. 영국에서는 'rys'에서 'rice'로 됐다. 고대 인도어 'sari'가 곧 우리말의 '쌀'의 어원이다. 즉 살[肉]에서 왔으며, 식물의 살(쌀)과 동물의 살(고기)을 먹고 사는 게 '살암'(사람)이란 속설도 있다. 이러한 뜻을 알면 참 흥미롭다. 쌀미(米)자는 농부가 팔십팔(八十八)번 손이 닿아야 할 만큼 수고해야만 수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매일 밥을 먹으며 건강을 지키고 행복한 마음으로 인생을 즐기며, 쌀처럼 가치 있는 인간으로서 미수(米壽)인 88세까지 잘 살아야겠다.
- 2018-06-27 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