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 하늘은 푸르고 높다. 코스모스가 바람에 하늘거리고 고추잠자리는 높게 떠서 난다. 시원한 대청마루에 다리 쭉 뻗고 책을 읽으면 좋을 계절이다. 밤이면 풀벌레 소리가 크게 들린다. 그러다 나뭇잎이 하나둘 뚝뚝 떨어지면 왠지 모를 쓸쓸함과 우수가 밀려오기도 한다. 그래서 가을에는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인생을 논하고, 삶을 논하고,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요 사색의 계절이다.
오랜만에 책꽂이에서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를 꺼내 봤다. ‘가을은’이란 제목이 눈에 띈다. 스님은 가을을 어떻게 느꼈을까?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 잡힐 듯하면서도 막막한 물음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은, 태어난 것은 언젠가 한 번은 죽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생사필멸(生死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 그런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노상 아쉽고 서운하게 들리는 말이다. 내 차례는 언제 어디서일까 하고 생각하면 순간순간을 아무렇게나 허투루 살고 싶지 않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두고 싶다. 이다음 세상 어느 길목에선가 우연히 마주칠 때, 오 아무개 아닌가 하고 정답게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익혀두고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스님 말씀대로 정말 가을은 이상한 계절인가보다. 평소보다 뭔가를 더 생각하게 되고 느낌도 풍부해진다. UN 세계인구전망 자료에 의하면, 2020년 세계 인구는 총 77억9500만 명이다. 그중 한국인은 5178만 명이라 한다. 지구촌을 하나의 가족으로 본다면 누군가와의 만남은 78억 명 중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이 중 몇 사람이 나와 인연을 맺고 살까? 얼마 전 전라도 지리산으로 며칠 여행을 했다. 내가 아는 사람도 없지만,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도 없었다. 육십 평생을 이 좁은 땅에서 한국인으로 살았는데 다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한 번이라도 눈웃음을 건넨 사람이라면 참 대단한 인연인 셈이다. 스님 말씀이 무리는 아닌 듯싶다. 이 가을엔 가까운 사람들에게라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소중히 생각해야겠다.
법정 스님의 글이 따뜻하게 다가왔다면, 윤동주 시인의 시 ‘가을이 오면’은 살아가는 데 이정표로 삼고 싶을 만큼 큰 울림을 준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고 인생의 가을이 오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자문자답하듯 말한다. 그러고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법정 스님이나 윤동주 시인의 마음이 하나의 물줄기가 되어 가슴으로 다가온다. 가을은 이렇게 마음을 돌아보게 한다. 내가 살아 숨 쉬는 이 공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함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깊은 인연인지 알게 한다. 이 가을에는 풀벌레 소리도 더 귀 기울여 듣고, 모든 이웃에게 따뜻한 눈길을 나눠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