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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진이 삶을 꿈꾸는 전직 광고쟁이 신강균
- 오래전 재미있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시험에서 “다음 중 가구가 아닌 것은?”이란 질문에 많은 아이들이 ‘침대’라고 답한 것. ‘침대가 가구가 아닌 과학’이라고 강조했던 인기 광고 영향이었다. 아이들의 이유 있는 오답에 어른들 또한 웃으면서 수긍하고 말았다는 미담이었다. 이 희대의 사건(?)을 빚어낸 주인공을 만났다. 걸어온 길이 한국 광고계의 역사였다고 말해도 아깝지 않은 이 사람, 신강균(申橿均·67). 은퇴했다는데 매일 시간을 쪼개야 하는 연예인급 스케줄에 인터뷰 시간 맞추느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속내 먼저 털고 인터뷰로 들어갔다. 60대 과즙미가 뿜뿜 터지는 사람 사진에서 느껴지는 저 중후함을 보라. 이제 막 은퇴 3년 차에 접어든 사람. 산책을 하고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사색을 즐길 것만 같은가? 오산이다. 인생 뭐 있나. 생기발랄 여기저기 안 걸친 데가 없다. 그래서 별명이 걸침이다. 시낭송은 기본이요, 판소리도 모자라 남도와 경기민요를 오간 지도 7, 8년쯤. 요리하는 요시남(요리하는 시니어 남자), 가야금, 대금, 피리, 댄스, 캘리그래피 등이 취미이자 요즘 하는 일이다. 카카오톡 프로필은 자화상, 배경화면은 길게 뻗은 고속도로 중앙선에서 발랄하게(?) 뛰어오른 모습이다. ‘지금이 좋다’는 문구도 함께 적혀 있기에 물었다. 그래서 지금이 좋으십니까? “벨기에 학자 말에 인생의 행복 곡선이 U자 모양으로 됐답디다. U자에서 제일 밑이 30, 40대래요. 밥벌이도 해야 하고 자식들도 키워야 하니까. 행복감이 다시 회복되는 게 60대 이후라던데 김형석 교수님도 ‘백년을 살아보니’에 쓰셨더군요. 나도 지나고 보니까 지금이 딱 좋아요. 왜? 일의 터널에 있다가 빠져나와 나만의 시절을 사니까요. 지금 내 시간이 온전하게 딱 생긴 겁니다. 그렇죠?” 거절 받을 용기, No는 Yes의 신호 신강균 씨의 공식적인 이력은 광고대행사 오리콤에 입사해 기획이사까지 지낸 22년, 그리고 한세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수 생활 18년이 전부다. 얘기를 듣다 보니 번외 이력 하나가 더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힘들다는, 영어로 된 백과사전 영업사원을 했어요. 경영대학원 다닐 때 스스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다짜고짜 팔아야 했다. 당시 영업지역장이 웅진그룹의 윤석금 회장. 그가 지역을 정해주면 청계천이든 탄광촌이든 사람이 있는 곳이면 달려가 영업을 했다. “무조건 일대일이었어요. 영어 새카맣게 모르는 노동자들에게도 팔았어요.(웃음) 영어로 된 명함 주고 가면 ‘뭐야 이게?’ 하는 반응이었죠. 열 번째 가면 ‘고생하쇼’, 스무 번째 가면 ‘물이나 한잔 들고 가슈’ 했죠. 거절당하는 훈련을 했던 거예요. 세일즈의 기본은 거절. 그러나 ‘노’는 ‘예스’의 또 다른 신호입니다.” 못 팔면 버스비가 없어 영등포에서 청량리까지 걸어서 귀가했다. 두 군데만 더 가보자 하고 약국에 들렀다가 백과사전을 팔기도 했다. 그때의 경험이 광고계에 입문해서도 큰 자산이 됐단다. 어떻게 하면 상대가 지갑을 열 것인가 고민하고 설득의 방법을 배우던 시간이었다. 광고계를 들었다 놨다 하던 시절 “광고회사도 내 발로 찾아 들어갔어요. 그때 광고계 대가이셨던 신인섭 씨를 찾아가 광고일을 하고 싶은데 어디가 좋겠냐고 물었죠. 학구적인 곳이라면서 오리콤을 추천해주시더군요. 그래서 오리콤으로 갔죠. 안내데스크에서 내가 여기 들어와야 하는데 누구를 만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차장급을 만나게 해줬어요. 결국 국장까지 대면했습니다. 마침 두 달 후에 경력 사원을 뽑는다기에 응시했죠. 대학원 졸업을 경력으로 인정해주던 때였거든요.” 광고계에 발을 들인 신강균은 신나고 강렬하게, 균형 잡힌 광고를 쏟아냈다. 유한킴벌리의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OB라거의 ‘라라라’, 대우전자 ‘봉세탁기’ CF 등 한국 광고계에 길이 남을 작업을 했다. 특히 침대를 가구의 영역을 넘어 과학과 건강으로 해석해낸 에이스침대 광고는 사회적 인식 전환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 “당시 가구회사에서 침대를 생산하다 보니 침대 전문회사가 하향세를 타고 있었습니다. 이사할 때 가구 바꾸면서 침대를 세트로 바꾸는 거지. 침대 회사에서 봤을 때 환장할 일이죠.” 에이스의 침대공학연구소에 가보니 엄청난 무게가 나가는 쇠공을 침대 스프링 위에 8만 번 떨어뜨리며 연구를 하고 있었다. 매트리스 스프링이 몇 mm가 줄어도 폐기처분했다. 이 모습을 보고 난 뒤 ‘침대는 과학이다’라는 광고 카피가 탄생했다. 말 그대로 광고계를 휘젓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칸 광고제 동사자상을 받은 것은 물론 런던광고페스티벌에서도 그의 이름이 불렸다. 한국광고대상은 안방 드나들 듯하며 받았다. 인생은 3·7제다 지금도 광고주 앞에서 발표한 뒤 깨지는 꿈을 종종 꾼다는 신강균. 일에만 미쳐 살았으니 어디 소홀한 데도 있지 않았을까? “내 신조가 3·7제입니다. 인생의 70%는 열심히 일하면서 조직에 충실하고 30%는 자기계발하자. 회사로 치면 자기만의 기획실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 사람이 조직이 필요로 하는 인재가 되는 겁니다.” 출근 전 시간을 활용해 영어학원에도 다녔다. 전날 술을 새벽까지 마셨어도 어김없이 일어나 영어학원에서 공부하고 회사에 갔다. “8시 반에 시간 맞춰 출근하면 끌려가는 기분인데 내가 하고 싶은 걸 앞서 하고 가면 자발적으로 나가는 거죠. 아침에 일어나는 게 다를 수밖에 없어요. 오늘 가서 뭔가 배워야지. 설득에 있어서도 자발성이 중요하거든요. 자발성 욕구를 자극하는 거요. 저를 위한 취미도 많이 했어요. 사물놀이도 하고 말이죠.” 주말이 되면 회사 일은 접고 무조건 가족들과 함께하는 아빠였다. 텐트를 가지고 홍도로 선유도로 해외로 이곳저곳 참 많이도 다녔다. 대학교수 시절에도 제자들과 각종 연수를 함께하면서 눈높이 교육을 했다. 취업률 성과 말고 제대로 성장하고 자생할 수 있는 제자 양성에 집중했다. 가르쳤던 학생의 70%는 광고계에서 일하고 있을 정도이니 나름 제자 농사는 잘 지은 셈. “제자들이 지금도 술 사달라며 연락하는데 내가 바빠서 스케줄을 못 잡아요.(웃음)” 맞벌이 부부의 진정한 은퇴식 세계일주 작년 2월 교직에서 물러난 아내와 7개월여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온 신강균. 정년퇴임한 아내가 쓸쓸해하지는 않을까 걱정돼 먼저 퇴임한 신강균이 다양한 취미생활에 매진하면서도 여행 준비를 해놓았다. “작년 3월 9일에 딱 출발했어요. 캠핑 텐트 가지고요. 프랑스 파리에서 120일 정도 차를 빌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전역을 돌았어요. 그다음엔 배로 건너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스위스에서 트레킹하고요. 주로 산으로 들로 걸어 다녔어요.” 매일 5시간 이상 산을 오르고 캠핑장에서 텐트치고 밥 해먹어가며 여행했다. “호텔에서 거의 자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호텔은 100달러 이상 비용이 드는데 캠핑장은 20달러면 샤워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호텔에 가면 손님인데 캠핑장에서는 우리가 주인입니다. 왜 비싼 돈 주고 손님 노릇을 해요.” 인생 목표는 황진이처럼 살기 신강균이 부부 세계일주 여행을 마치고 도전한 것은 바로 영화다. 서울대학교 총연극회 후배인 배우 정진영이 직접 쓰고 연출한 독립영화에 캐스팅돼 꽤 많은 분량을 소화하며 영화 연기에 도전했다. 이번 기회에 영화판에도 기웃거려볼까 생각한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황진이가 제 목표예요. 시·서·화·창(詩·書·畵·唱) 그리고 악기, 무용까지 다 하는 것이죠. 인생은 한 번뿐이고 아침에 눈을 뜨는 자체가 늘 고마운 일이죠. 그런데 까닥 잘못하면 너무 오래 살 수도 있어요.(웃음) 일본에서 100세 노인한테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게 뭔지 물었대요.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다면 일흔 살에 30년 계획을 세웠을 텐데’라고 했답니다. 저는요, 30년 계획은 욕심인 것 같고 20년 계획은 세워뒀습니다.”
- 2019-01-1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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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의 여신’은 왜 ‘눈가리개’를 하고 있을까
- 유럽의 마을이나 도시를 방문하면 그곳 중심에 광장과 함께 고풍스러운 건물이 우뚝 자리하고 있다. 지금으로 치면 대부분 ‘시청 청사’다. 그리고 그 청사 건물 중앙 높은 곳에 있는 한 여인의 조각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劒]을 거머쥐고 있는 모습의 조각상이다. 바로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다. 라틴어 Justitia는 영어 ‘Justice’의 어원이기도 하다. 문헌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 die Göttin der Gerechtigkeit)’는 손에 칼만 쥐고 있다. 그런데 로마시대에 들어와 ‘정의의 여신(Justitia)’상에 ‘칼과 저울’이 등장했고, 이런 형상의 조형물이 유럽 관공서 건축의 외장 조형물로 크게 자리매김했다. 요컨대 정의를 구현하는 데 엄한 힘[權勢]인 칼만 갖고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공정성과 공평성을 상징하는 ‘저울’을 여신에게 준 것이다. 아울러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조금이라도 오해를 받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듯 ‘눈가리개[眼帶]’도 등장한다(사진 1). 얼마 전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청 광장인 ‘뢰머 플라츠(Römer Platz)’는 1년여의 보수작업을 마치고 새롭게 ‘정의의 여신상’을 세웠다. 일견 다른 ‘여신상’과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조각상이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눈가리개’가 없는 ‘정의의 여신’임을 특별히 강조하면서, ‘여신’이 시 의회 건물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은 시 의회가 공정하면서도 공평하게 의무를 다하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도했다(사진 2). 사실 유럽 고도(古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의의 여신’ 중에는 ‘눈가리개’를 하지 않은 여신상이 더러 있다. 국내 법원이나 법조계 관련 건물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도 대부분 ‘눈가리개’가 없는, 눈을 뜬 여신상이 주종을 이룬다. 대표적인 예가 대법원 건물에 있는 한국적 ‘정의의 여신’이다. 여기서 ‘한국적’이라 함은 여신이 무엇보다 우리 한복 차림에 강한 집행력을 상징하는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또한 그 ‘여신’은 ‘눈가리개’ 없이 눈을 멀쩡히 뜨고 있다. “법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조형물이 갖는 상징성을 생각할 때, 국내의 높고 낮은 법정의 판례와 관련해 종종 회자되는 ‘무전유죄 유전무죄’, ‘전관예우’ 같은 표현은 민망하기 그지없다.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공평성이라는 잣대가 ‘눈 뜨고 내리는 판단’과 ‘눈 감고 내리는 판단’에 따라 다를 수는 없는 법이기에 우리 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이 갖고 있는 상징성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 2018-11-26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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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도 사랑도 모두 잡은 스포츠 부부
- 이들을 회사원으로 따지자면… 사내 커플…? 동료에서 애인으로, 애인에서 부부로! 같은 일을 하기에 더욱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이들. 함께 땀 흘리며 사랑을 키워온 스포츠 선수 부부를 알아봤다. 원정식 ♥ 윤진희 2008년 베이징올림픽 여자 역도 53kg급에서 값진 은메달의 성적을 거둔 윤진희(33) 선수. 시상대에서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보는 사람의 기분까지 행복하게 만들었던 그가 8년 만에 복귀해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기에는 그의 남편의 권유와 응원이 한몫했다고.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바벨을 들어올리다 무릎힘줄이 끊어지는 부상을 겪은 원정식(29) 선수는 두 딸을 낳아 기르고 있는 윤진희 선수에게 “우리 같이 처음부터 시작해서 최정상까지 올라가 보지 않을래?”라며 다시 바벨을 잡을 것을 권유했다. 남편은 부상을 이겨내야 했고 부인은 오랜 공백을 이겨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낮엔 서로 코치 역할을 해주고 밤엔 격려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같은 종목을 하는 부부로서 가지는 장단점은 무엇일까? 윤진희 선수는 “서로 힘든 점을 이해할 수 있고 조언도 주고받을 수 있어서 좋다. 반면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운동할 땐 어쩔 수 없이 제일 보여주기 싫은 모습을 보여줘야 해 안 좋다”고 말했다. 안재형 ♥ 자오즈민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탁구 남자 단체전 금메달, 1988년 서울올림픽 탁구 남자 복식에서 동메달을 따며 이름을 떨쳤던 안재형(54)과 중국의 탁구선수 자오즈민(56)의 결혼 소식은 1989년 큰 화제로 떠올랐다. 특히 그 당시 미수교국이었던 한국과 중국 간의 국제결혼이란 점에서 더욱 놀라웠다. 둘의 첫 만남은 1984년 파키스탄에서 열린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뤄졌다. 서로를 알게 된 후 편지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비밀연애를 이어나갔다는데! 중간에 둘 사이를 폭로하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몇 차례 결별 위기가 있었지만 1989년 스웨덴 스톡홀름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혼인신고를 마침으로써 법적 부부가 됐다. 아들 안병훈 씨는 현재 PGA투어(미국프로골프), 유러피언투어에서 골프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김동문 ♥ 라경민 적에서 동반자가 된 커플도 있다. 바로 한국 배드민턴을 대표하는 최강 혼합복식조 김동문(44)-라경민(43) 선수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배드민턴 혼합복식 결승전에서 만난 박주봉-라경민 조와 김동문-길영아 조. 당시 사람들은 박주봉-라경민 선수의 우승을 점쳤지만 김동문-길영아 조가 역전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후에 박주봉 선수는 “김동문 선수가 아내 될 사람한테 엄청 공격을 퍼붓더라”며 그날의 경기를 회상했다. 애틀랜타올림픽 이후 박주봉, 길영아 선수가 은퇴하면서 김동문, 라경민 선수는 자연스럽게 혼합복식 파트너가 되었고 14개 대회 연속 우승, 국제대회 70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김동문 선수는 “같은 팀이 되어 운동을 하다 보니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사이가 됐다. 서로 의지하다 애정이 생겼다”고 말했다. 2003년에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두 사람은 당시 김동문의 절친이자 룸메이트였던 하태권 선수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비밀리에 연애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일화 중 하나로 김중수 대표팀 감독이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앞두고 두 사람이 진짜 연인관계가 되면 조직력이 더 좋아질까 싶어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줬지만 별다른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남녀관계는 인력으로 안 되는 것 같다”며 포기했다고 한다. 현재 김동문 선수는 원광대학교 교수로, 라경민 선수는 배드민턴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동 중이다. 공병민 ♥ 이신혜 선수촌에서 레슬링 유니폼을 입고 웨딩 촬영을? 이 특별한 웨딩 사진의 주인공은 레슬링 국가대표 부부 공병민(27)-이신혜(26) 선수다. 부산체육고등학교 레슬링부 선후배로 만난 두 사람은 고교 시절부터 연애를 시작해 2014년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일명 ‘쫄쫄이’ 레슬링 유니폼을 입고 웨딩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이신혜 선수는 “처음에는 너무 과격해 보일까봐 걱정했지만 레슬링 부부로서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마침 남편도 같은 생각이라 진행하게 됐다”고 전했다. “결혼 전에는 서로를 응원하면 ‘자기 운동은 열심히 하지 않고 연애만 한다’는 안 좋은 시선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며 누구보다 남편을 열심히 응원한다는 그녀다. 국가대표 선수인 두 부부에게 선수촌은 그야말로 신혼집과도 같은 곳. 이신혜 선수가 꼽은 태릉선수촌 베스트 데이트 장소는 바로 크로스컨트리 연습장! 산악코스와 산책로로 이루어져 있어 연습시간이 아닐 땐 거의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특히 저녁의 크로스컨트리 연습장은 데이트하기에 아주 딱이라고.
- 2018-05-1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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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를 풍미한 복싱 챔피언 ‘짱구’ 장정구
- 5년 동안 15번의 방어전을 치르면서 단 한 번도 챔피언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장정구(張正九·56). 사각 링 위에 올라서면 그는 한 마리의 야수로 변했다. 상대가 주먹을 맞고 쓰러지면 장내는 “장정구! 장정구!” 그의 이름을 외치는 관중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체육관 입관비로 1500원을 겨우 냈던 그가 대전료로 7000만 원을 받는 복싱 스타로 거듭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980년대 복싱 인기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십니더. 그때만큼의 인기를 되찾긴 힘들 거라 봅니더. 그래서 기분이 좀 그렇십니더.” 강렬한 사투리 뒤로 오늘날의 복싱을 생각하는 그의 목소리에선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 야구선수의 연봉이 2000만 원이었던 시절, 장정구의 대전료는 한 경기당 7000만 원, 방어전 후반에는 1억 원까지 올랐으니 말이다. 그 액수만 봐도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당시의 복싱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복싱 중계가 있는 날이면 길거리는 한산했다. 대신 TV가 있는 전파상과 다방에는 경기 중계방송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린 시절의 장정구도 그중 한 명이었다. TV 앞에 서서 주먹을 뻗으며 복싱선수를 흉내 내던 그는 그렇게 복싱선수의 꿈을 키워갔다. 나의 은인, 심영자 사모님 그를 항상 따라다니던 별명 ‘짱구’는 그의 이름 ‘정구’를 빨리 부르다 보니 생긴 호칭이었다. 천방지축이었던 그에게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별명이 또 있었을까. 어릴 때부터 싸움이라면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던 그가 복싱에 흥미를 느낀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열두 살 짱구는 어머님께 조르고 졸라 1500원을 얻어 부산 극동체육관에 입문했다. 그는 “나에겐 공부가 아니라 복싱이 적성에 맞았다”고 말했다. 열네 살 때에는 아마추어 복싱선수로 데뷔해 부산 아마추어 최고 선수권 모스키토급 준우승, 부산 신인선수권 동급 우승이라는 성적을 거뒀다. 꼬맹이치고는 제법이었다. 하루는 체육관에 ‘소매치기 복서’로 불리던 故 김성준 선수가 방문했다. 스파링 상대를 찾던 도중 장정구가 파트너로 지목됐고 이 사건은 장정구가 프로로 전향하는 데 물꼬를 틀어준 계기가 됐다. “당시 정풍물산 문덕만 회장님의 부인인 심영자 사모님이 김성준 선수를 후원하고 계셨어요. 그날 사모님의 오빠인 심준섭 씨가 구경하러 오셨는데 스파링을 하는 제 모습을 보고 추천을 한 거죠. ‘부산에 짱구라는 놈이 있는데 눈여겨봐라’ 하고 말이죠.” 이후 문덕만 내외는 장정구의 두 주먹을 믿었고 그가 복싱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자택으로 불러들여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장정구는 마치 친아들처럼 자신을 돌봐준 그녀를 ‘어머니’, ‘은인’이라고 표현했다. 스무 살 장정구, 정상에 오르다 장정구가 프로로 전향한 뒤 드디어 첫 번째 타이틀전이 잡혔다. 상대는 8차 방어를 기록했던 파나마의 일라리오 사파다(Hilario Zapata). 쉽지 않은 상대였다. 경기를 12라운드까지 끌고 갔지만 결과는 판정패. 프로 데뷔 2년 만에 처음으로 당한 패배이자 18전 18승 무패 행진이 깨진 날이기도 했다. 분할 만도 했지만 오히려 그는 그날의 패배가 이후 15차 방어까지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전에는 시합 올라가기 전에 대충 어떻게 어떻게 해야겠다 생각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싸웠거든요. 근데 한 번 지고 나서 그게 틀렸다는 걸 깨달은 거죠. 지고 난 이후론 상대방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했어요.” 운이 좋게도 사파다와의 재대결이 성사됐다. 1983년 3월 26일 대전 충무체육관은 4000명이 넘는 관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마치 그가 이길 것을 예상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심이 장정구에게 다가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3라운드 만에 KO승이었다. “챔피언이 되던 그 순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죠. 우연히 위를 올려다봤는데 뿌옇게 보이는 게 마치 꿈결 같았어요.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는데 귀는 윙윙거리고, 당시에는 실감이 잘 안 났어요.(웃음) 벌써 30년도 더 지난 일이네요. 세월 참 빠르죠.” 열다섯 번을 지켜낸 챔피언 벨트 타이틀 방어전만 15차까지 치른 그다. 분명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을 터. 챔피언이 되던 순간이 최고였다면 최악의 상황은 언제였을까. 그는 일본 도카시키 가쓰오(渡嘉敷勝男)와의 4차 방어전을 꼽았다. 이 경기는 복싱 팬들이 꼽은 가장 박진감 넘치는 경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포항에서 경기가 열렸는데 기온이 35℃까지 올라간 날이었어요. 게다가 몸무게는 14kg이나 뺐지, 날씨는 너무 덥지, 상대는 쓰러지지도 않지… 경기 후반엔 냅다 도망가고 싶었죠.” 1라운드부터 수십 번의 주먹이 오고 갔다. 1라운드 종료 직전엔 다운을 얻어냈지만 도카시키는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맞으면 맞을수록 지독하게 더 달라붙었다. 경기 후반엔 때리다 지쳐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정도였다. “정말 징그러운 선수였어요. 마음 같아선 주저앉고 싶었는데 하필 광복절이 지난 지 3일밖에 안 된 날이었거든요. 일본인하고 겨룰 때는 가위바위보도 이겨야 하잖아요.(웃음) 이렇게 포기하면 국민한테 맞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온힘을 다해 싸웠죠. 이기고 나서 엎드려 우는데 탈진돼서 눈물도 안 나오더라고요.”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힘을 쏟고 나면 그는 항상 혈뇨를 봤다. 경기가 힘든 건 참을 수 있었지만 경기 전까지 이어지는 체중 관리는 정말 고통스러웠다.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는 고통이 가장 컸죠. 특히 갈증과의 싸움. 물을 한 모금만 마셔도 체중이 변하니깐요. 공부할 때 여자를 돌같이 보라고 하잖아요. 복싱선수들은 물을 돌같이 봐야 합니다.” 일명 ‘김밥 세 조각’ 사건이 있다. 그가 스파링을 준비하고 있는데 트레이너가 먹고 있는 김밥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결국 사정사정해서 세 조각을 얻었다. 스파링이 끝나면 먹으려고 고이 모셔놨는데 김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였다. 범인(?)은 체육관 동료. 동료고 뭐고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불같이 성질을 내고 그대로 체육관을 뛰쳐나왔다고 한다. “김밥 세 조각이 뭐라고… 그런 제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했죠. 못 먹어봐서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의 김밥 세 조각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이 아니었을까요?(웃음)” 체중과의 싸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여름에도 내복에 땀복을 입고 뛰어야 했다. “반바지에 반팔을 입고 뛰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또 비 오는 날이라고 운동을 쉴 순 없잖아요. 그럼 반포터미널로 가는 거예요. 그곳 지하에서 뛰는데 먼지가 엄청나단 말이에요. 집에 와서 가래를 뱉으면 시커맸어요. 그렇게 고생하면서 운동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짠합니다.” 은퇴 그리고 복귀 16차 방어전을 앞두고 장정구는 챔피언 타이틀을 자진 반납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복합적인 이유에서였다. 챔피언 벨트를 지켜야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과 각종 개인사가 겹치면서 복싱을 계속하기엔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싱을 그만두니 경제적인 문제가 찾아왔다. 어쩔 수 없이 1989년 다시 링으로 복귀한 장정구. 그러나 움베르토 곤살레스(Humberto Gonzalez)와의 재기 전에서 판정패를 당하고 1990년과 1991년 연달아 패배하며 42전 38승 4패의 전적에 3패의 오점을 보태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경기에선 KO패를 당하며 사실상 복서생활을 마감했다. “복싱선수에게 가장 창피한 일은 지는 겁니다. 사실 그렇게 복귀하는 게 아니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복싱뿐이었으니깐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저는 복싱밖에 몰랐어요. 장정구에게 복싱은 삶 그 자체였습니다.” 현재 그는 ‘장정구복싱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운동이라면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말하지만 점점 뒤안길로 밀려나는 듯한 복싱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어려웠을 때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옛날 시합 때 찍은 사진, 시상식 때 찍은 사진, 그 수만 해도 엄청나거든요. 그런 자료들을 모아서 1980년대 복싱 열기를 느낄 수 있는 장정구 박물관을 세우면 어떨까 생각해봤어요. 물론 입장료는 받아야죠. 비싸진 않을 거예요. 대신 모든 수익은 불우이웃에게 쓰이는 걸로.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정말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꽤 괜찮은 계획 아닌가요?”
- 2018-05-01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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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을 구한 조선 도공의 후예 박무덕(朴茂德)
-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조선 도공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0년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 외상으로서, 전쟁 회피와 종전 교섭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이 조선인 후예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름은 박무덕(朴茂德). 조선인 피를 받은 그가 어떻게 그런 높은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걸까? 의문을 풀기 위해 애썼지만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철저한 일본인으로 살았던 우수한 관료였다. 그러나 그가 외무성 관료로 활동한 시기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극심했던 시절이어서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찰로 악명 높았던 일제 경찰이 까다로운 외교관 임용 신원조사를 왜 그토록 허술하게 했을까. 이것이 제일 큰 의문이었다. 그의 출신지와 가계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조선 도공의 후예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일본 제국의 마지막 각료로 패전을 맞을 때까지 그에게는 ‘조선인 후예’라는 천형 같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조선인 피를 가진 사람이 대신이 되어 폐하를 모시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가 두 번째로 외상이 되었을 때 이 같은 괴문서가 정부와 시가지에 뿌려진 일이 있었다. 극우세력이 저지른 일이었다. 군 내부에 동조 세력이 나타나 술렁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옥에 갇히게 되자 사람들은 더 흥분했다. 그의 고향 가고시마(鹿兒島) 현 미야마(美山) 옛집에 돌팔매까지 했다.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이 떨어졌을 때 ‘전범이므로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을 민족 절멸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사람’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의 옛집에 세운 공덕비 비문에는 “종전(終戰) 공작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성하고 일본국과 국민을 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비문은 당시 일본 관방장관 사코미즈 히사쓰네(迫水久常)가 썼다. 그 뒤 그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들어섰고, 그를 연구하는 모임까지 생겨났다. 이러한 현실은 시대 조류의 급격한 역류를 의미하고 있다. 도고 시게노리에 관한 이야기는 도예가 ‘14대 심수관’으로부터 들었다. 1990년 7월 미야마에 있는 그의 가마를 찾아갔을 때였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옛 이름으로 유명한 ‘사쓰마 야키(薩摩燒)’ 발상지 취재차 찾아간 특파원에게 그는 고향 자랑을 하면서 ‘도고 센빠이(선배)’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외무성 관료가 되어 금의환향한 그가 모교에 찾아왔을 때 “심수관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심수관이 손을 들고 나가자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도공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을 입구에 “거짓말하지 말라, 지지 말라, 약한 자를 괴롭히지 말라, 도고 선배를 본받자”는 내용이 쓰인 팻말이 세워져 있었던 때라 그는 어깨가 으쓱해졌다고 한다. 평생을 시게노리 현창(顯彰) 사업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은 그가 발의해 사업 추진까지 도맡았다.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의 도자기 작품을 수집해 미술관에 기증한 사람도 그였다. 시게노리의 아버지가 뛰어난 도공이자 유능한 사업가였다는 사실도 세상에 알렸다. 시게노리는 1882년 나에시로가와 심수관의 이웃집에서 박수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수승은 세상을 읽는 눈이 뛰어난 사업가였다. 메이지 정부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로 사족(士族) 신분을 박탈당하고 관요(官窯)가 폐지되어 나에시로가와 도공 마을에 찬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각자도생의 길을 헤쳐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역경이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도쿄 요코하마를 무대로 외국인들에게 도자기를 팔고 수출하는 사업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재력을 바탕으로 가고시마 시내로 이주, 명문 도고(東鄕) 가문의 족보를 사들여 도고 성(姓)을 취득한 그는 당당한 일본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박수승은 ‘도고 주카쓰(東鄕壽勝)가 되었고, 네 살배기 무덕은 ‘시게노리(茂德)’가 되었다. 시게노리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이였다. 사족 가문 성을 가진 데다 뛰어난 두뇌와 아버지의 재력 덕에 사족 출신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교 가고시마 제일중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족 출신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폐번치현 이후 나에시로가와는 ‘옹기마을’로 불리며 급속히 ‘천민부락’으로 전락했다. 그가 옹기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급우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사족 대접을 받았겠는가. 대접은커녕 ‘가짜 사족’ 놀림까지 받았다. 도고시게노리기념사업회가 펴낸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그는 입학 후 점점 말없는 소년이 되어갔다. 사정을 알아주는 친구 하나를 제외하고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다. 그는 무섭게 공부에만 매달렸다. 영어사전의 단어를 다 외우고 그 페이지를 찢어 씹어 삼켰다는 일화는 가고시마의 전설이 되었다. 손자 도고 시게히코(東鄕茂彦)가 쓴 ‘할아버지 도고 시게노리의 생애’에 나오는 일화는 그의 치밀하고 느긋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소학교 시절 하굣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친구들은 다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비를 피하는데 시게노리만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게노리, 뭐하는 거야? 빨리 뛰어와!” 하고 소리쳤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쪽에도 비가 오는걸요.” 그렇게 말하고는 집까지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1901년 제일중학을 졸업한 뒤 그는 가고시마 7고에 입학한다. 문부성 직할 구제 고등학교였다. 학교 이름에 번호가 붙었다 해서 ‘넘버 스쿨’로 불리던 일본의 명문고교였다(1고는 도쿄, 2고는 센다이, 3고는 교토, 4고는 가나자와, 5고는 구마모토, 6고는 오카야마, 8고는 나고야에 있었다). 그해 개교한 7고에는 각 넘버 스쿨 입시에 낙방한 학생들이 몰려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재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투리가 심해 학교 측은 고심 끝에 가고시마 방언과 표준어로 된 두 가지 안내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시게노리는 7고를 졸업하고 도쿄대학교 문학부 독문학과에 진학한다. 아버지는 법대를 나와 내무성 관리가 되기를 원했지만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던 시게노리는 아버지 염원을 배반했다. 그러나 끝까지 아버지의 소원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졸업 후 외교관 시험에 도전, 3수 끝에 합격의 영광을 얻는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외교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를 의식한 탓도 있지만, 고향 선배 외교관의 영향이 컸다. 독일 문학에 몰입했던 대학교 시절의 이상이었던 ‘동서양 문화의 조화’를 실현할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첫 부임지는 만주였다. ‘펑톈(奉天) 일본국 영사관 영사관보’가 공식 직함이었다. 펑톈은 지금의 선양(瀋陽)이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그는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열차로 만주에 부임했다. 뒷날 발견된 당시의 메모에는 열차로 한반도를 종주하면서 느낀 감회는 한 구절도 없었다. ‘경복궁’과 ‘한강’. 아무 감상 없이 언급한 고유명사만이 조선과 관련한 메모의 전부였다. 아마도 그의 의식을 지배하던 ‘조선 트라우마’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고 부임을 준비하던 무렵,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수모를 겪는다. 결혼을 약속한 도쿄의 명문가 규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해온 것이다. 이유는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출신성분 조사에서 조선 도공의 후예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게 일본 외교가의 정설이다. 그 뒤로 그는 결혼을 포기하고 살다가 37세 노총각 시절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독일인 이혼녀 에디 드 라론드와 결혼, 뒤늦게 가정을 이룬다. 그가 트라우마를 가졌다 해서 조선인의 피를 부끄럽게 여긴 흔적은 없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금의환향했을 때 옥산궁(玉山宮)을 참배한 일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옥산궁이란 나에시로가와에 있는 단군 사당이다. 비록 일본 관복 차림이었지만, 마을 수호신을 찾아 고마움을 표하며 합장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단군의 후예라는 뿌리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외교관 시절의 일화도 있다. 외무성 본부 국장 시절, 퇴근길에 조선인 과장 장철수를 허름한 술집으로 데리고 가 “사실은 내게도 조선인 피가 흐른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게, 인내라는 말을 소중히 하고!” 하면서 동족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독일대사, 소련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거치며 ‘외교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들어온 그는 마침내 외무대신 자리에 오른다. 미국과의 사이에 전운이 감돌던 1941년 대미 교섭 임무를 짊어졌던 첫 외상, 종전 교섭의 사명을 띤 두 번째 외상 직무의 하이라이트는 1945년 8·15 광복 직전의 무조건 항복 결정이었다. 연합국 수뇌들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지만, 전쟁광 집단인 일본 군부는 결사항전 태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덩달아 언론도 연일 군부의 ‘1억 옥쇄론’을 부채질하는 사설을 내보내던 때였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까지 참전한 상황에서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수상을 필두로 한 군부는 미치광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원자폭탄 피해의 심각성을 파악한 시게노리는 천황을 찾아가 전쟁 종결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각료들에게도 같은 주장을 거듭했지만 군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또 하나의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그날부터 일본 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무조건 항복이냐, 결사항전이냐를 앞에 둔 운명의 갈림길에서 시게노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쿠데타설과 암살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종전 결정의 불가피성을 설득해나갔다. 군부의 위세에 눌려 입을 닫고 있던 각료들은 13일 각료회의에서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라”는 수상의 요구에 12명은 ‘포츠담선언 수락’ 또는 ‘수상 결정에 위임’, 3명은 반대 의견을 냈다. 14일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외무대신의 전쟁 종결 의견에 각료 다수가 찬성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나는 연합국의 포츠담회담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만주 침략으로 시작된 길고 긴 15년 전쟁의 종결 선언이었다. 전후 시게노리는 연합국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을 선고받고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50년 7월 23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68세. 도쿄재판 도중 그에게 조선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아사히신문은 “도고는 꼭 외국인이 일본어를 말하는 것 같은 억양으로 진술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보도했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에둘러 강조한 것이다. 한 신문은 ‘과거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지역 출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인 출신이라는 낙인이 천형처럼 그의 이마에 찍혀 있었던 셈이다. 1990년 미야마에 처음 갔을 때 시게노리 생가는 폐가처럼 버려져 있었다. ‘A급 전범’이라는 멍에 탓이었다. 마당에는 잡초가 키 높이로 자라 있었고, 대문에는 각목을 X자로 못 박아놔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가 일전되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경제번영의 격양가 속에 자연스레 ‘민족 절멸의 위기에서 일본을 구출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2010년 남규슈 여행길에 들렀을 때 가 보니 생가 터에 아담한 기념관이 들어서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사코미즈 히사쓰네의 비문이 선명하게 보이는 송덕비, 그 오른편으로는 시게노리의 동상이 서 있다. 기념관 안에는 도쿄대학교 시절 시게노리의 모습과 외상으로 지냈을 때의 초상화, 복역 중일 때 가족과 면회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말과 일본말로 나에시로가와 마을과 조선 도공을 설명하는 안내서도 걸려 있다. “나에시로가와에서는 메이지 시대가 끝날 무렵까지 조선의 풍속과 언어가 남겨져 있었다. 조선 도공의 수호신이 된 옥산궁 신사에서는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제사가 행해졌다.” 안내문의 한 줄 내용에 이 마을의 400년 역사가 함축되어 있었다. 도공 박문(朴門)의 업적을 소개하는 안내문에는 “박정관이 제작한 백 사쓰마 도자기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사쓰마 도자기 이름을 유럽까지 알렸다”고 씌어 있다. 안내문에 나오는 박정관(朴正官)은 근세 사쓰마 야키를 일으켜 세운 사람으로 추앙되는 인물. 정유재란 당시 사쓰마에 끌려온 도공들의 리더 박평의(朴平意)의 후손이다. 시게노리의 손자는 할아버지 일대기에 “할아버지 가문이 박평의 후손이라는 근거는 없지만, 그때 끌려온 도공 가운데 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고, 같은 도공이었다는 점에서 할아버지와 피가 통하는 관계로 본다”고 썼다. 시게노리와 에디 사이에는 이세(いせ)라는 이름의 딸이 유일한 혈육이다. 시게노리는 외동딸을 자신의 비서관 출신 외교관과 결혼시킨 뒤 사위를 양자로 삼았다. 그는 훗날 주미대사를 역임한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다. 사위 겸 양아들 후미히코와 딸 이세 사이에는 아들 쌍둥이가 있다. 1945년생인 손자 시게히코는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나와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아사히신문 기자를 거쳐 워싱턴포스트로 옮겨 오랜 기간 도쿄 특파원으로 지냈다. 동생 가즈히코(東鄕和彦)는 도쿄대학교를 나와 3대 외교관이 되었다. 북미국장 주미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두루 거쳤고 퇴직 후에는 미국, 대만 등지의 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2007년에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강의한 적도 있다. 그는 역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외교관으로 유명하다. 현역 시절 김대중 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등 한일 현안 문제에 관여한 경력이 있으며, 2006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중단을 요구하는 회견으로 일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018-01-2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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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광석화 같았던 나고야 성의 축성과 폐성
-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임진·정유 국란의 왜군 출진기지는 규슈(九州) 서북 해안 나고야(名護屋) 성이다. 일본 중부의 중심도시 나고야(名古屋)와 구별하려고 히젠(肥前)이란 옛 지명을 붙여 ‘히젠 나고야’라 불리는 곳이다.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에서 버스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40여 분 달리면 닿는 요부코(呼子) 포구 언덕 위에 있다. 굴곡이 심한 해안선 깊숙한 만(灣)에 얼마든지 배를 숨길 수 있고, 조선과의 거리가 제일 가까운 지리(地利)를 고루 갖추어 옛날부터 왜구의 소굴로 유명했던 곳이다. 26년 만에 다시 찾아본 나고야 성은 그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흘러간 옛 노래 ‘황성옛터’를 연상시키는 무너진 성벽이 옛날 그대로였다. 일본이 군신으로 떠받드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글씨로 ‘名護屋城址’라고 쓴 비석도 같은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헛꿈을 조롱한 쇼와(昭和) 시대 하이쿠 시인 아오키 겟토(靑木月斗)의 시비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수십 년이 걸린 성터 발굴·복원사업이 끝났다지만 겉보기에 변한 것은 없었다. 주말 낮인데도 탐방객 발길이 뜸해 적막하기만 했다. 성터 입구에 자리 잡은 박물관과 그 앞에 조성된 상가만이 옛날에 없었던 건물이다. 도고 헤이하치로 글씨로 된 성적(城跡·성터) 비는 1930년, 겟토의 시비는 1940년에 세워졌다. 그러나 두 돌의 언어는 사뭇 다르다. 도고의 비에는 옛 성터라는 글자뿐이지만, 그것이 세워진 시대와 세운 자의 뜻에 히데요시의 대륙 정복 야망을 그리는 마음이 오롯이 드러나 보인다. 1930년이라면 일본의 만주 침략 야욕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다. 내무성이 그 돌을 세우면서 러일전쟁 영웅에게 글씨를 부탁한 가슴 밑바닥에는 일본인들이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존숭하는 뜻이 꿈틀거렸으리라. 1940년에 세워진 겟토 시비는 히데요시의 망상을 비웃는 것 같다. “다이코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지만 바다에는 안개만 자욱해.” ‘다이코(太閤)’란 천황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관백(關白) 자리를 아랫사람에게 물려주고 상왕처럼 물러앉은 이를 말한다. 히데요시는 조카(秀次·히데쓰구)에게 양위한 뒤에도 만사를 제멋대로 한 사람이다. 그런 권력자가 아무리 대륙 진출 야망으로 용을 써도 그 꿈은 안갯속에 가물가물하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는가. 실제로 성터에서 바라본 현해탄 바다에는 쓰시마의(對馬島) 모습조차 어렴풋했다. 26년 만의 탐방객을 놀라게 한 것은 성터에 우거진 고목나무 가지에 달려 있는 올레길 리본이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천수각 가는 길가 나뭇가지에 달린 것이었다. 반가워 카메라를 들이대니 일본인 탐방객이 “그게 무엇이기에 사진을 찍느냐”고 물었다. 한국 제주도 올레길 표시라는 말에 그들은 “천수대 터에도 많다”고 알려줬다. ‘제주 올레가 일본과 몽골에 수출되었다더니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너무 반가웠다. 그의 말이 맞았다. 금빛 찬란한 천수각이 있었다는 천수대 터에는 쇠막대기로 만들어 세운 올레 표지물도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가라쓰에서 규슈 서북단 히라도(平戶) 섬에 이르는 해안선 구간에 올레길이 조성되어 한국인 여행객에게 인기가 있다 한다. 나고야 성을 찾아가는 도로표지판마다 한글이 병기된 것도 그래서구나 싶었다. 7년 동안 나라를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했던 왜란 출진기지가 평화의 길이 된 것을 400여 년 세월의 작용이라고만 보아 넘기기에는 좀 미진한 뒷맛이 남았다. 임진왜란 400주년 기획 시리즈 취재 차 나고야 성에 갔던 1991년에는 유적지 발굴사업이 한창이었다. 옛 성터를 정비해 관광자원으로 삼기 시작한 때여서 일본인 관광객 발길이 잦았다. 그 르포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차츰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 규슈 관광의 인기 코스가 되었으니, 세월의 두께를 새삼 음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모습 그대로 두는 것이 역사의 참뜻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무너진 성을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특파원을 안내해준 진제이(鎭西) 초(町·일본의 행정구역 단위) 직원은 복원사업이 현상을 그대로 두고 발굴만 하는 것이라 했다. 히데요시 이후 염전·반전사상의 결과로 폐허가 된 성을 그대로 두는 것도 역사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정작 옛 자취를 찾게 된 것은 나고야 성 주변에 촘촘히 자리 잡았던 130여 개 번국(藩國)의 진터다. 독재자 히데요시는 휘하 영주[大名]들에게 전쟁기간 중 출진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 아래 대기하도록 요구했다. 출진 후의 병력보충 병참 등 임무를 강제했기 때문에 전국의 영주들은 수많은 예비 병력을 거느리고 눌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진터들은 전후 폐허가 되었다가 사유지로 바뀌어 흔적마저 감추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복원사업의 큰 틀은 그 땅을 사들여 옛 모습의 윤곽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물관을 지어 전쟁의 배경과 경과, 그리고 양국 평화의 지향점을 모색하고 홍보하자는 것이었다. 나고야 성은 축성과 폐성이 모두 전광석화 같았다. 인구 20~30만 명의 거대한 병영도시 나고야 성은 번개같이 건설되어, 또 그렇게 해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최고 권력자가 사라지고 세상이 바뀌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건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처럼 철저하게 무참하게 파괴된 일은 흔하지 않으리라. 일본 통일의 꿈을 이룬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를 손아귀에 넣어 동아시아 패권을 잡겠다는 망상으로 1590년부터 대륙 침략을 꿈꾸기 시작한다.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영토를 넓혀 부하들에게 봉토를 나눠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 계획에 비판적이던 동생 히데나가(秀長)가 죽고, 천금보다 귀히 여기던 외아들 쓰루마쓰(鶴松)마저 잃어 심신이 극도로 피폐했던 1591년 8월, 그는 규슈 지방 영주들에게 ‘대륙 경영 사업’ 개시를 선언하고 적지에 출진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한다. 당시 일본에 와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에는 그때 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관백(히데요시)이 조선으로 가장 쉽게 건너갈 수 있는 항구가 어디인지를 묻자 가신들은 나고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가 있는데, 수천 척의 선박이 안전하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전국의 영주들을 나고야에 집결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각자의 부담으로 궁전과 해자와 저택으로 꾸려진 화려하고 넓은 성채들을 조속히 축조하되, 교토에 지은 것보다 뒤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문장에서 주목할 것은 교토에 뒤지지 않는 화려한 궁전과 성채를 영주들 각자의 부담으로 건설하라는 ‘후신(普請) 명령’이다. 후신이란 불교에서 민간에 널리 시주를 청해 불당이나 탑을 짓거나 수선하는 사업이란 뜻이지만, 절대 권력자가 영주들에게 갖가지 토목·건축사업을 시킨 일을 뜻했다. 나랏돈은 10원도 쓰지 않고 국책사업의 돈과 인력을 영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아무리 봉건시대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횡포와 전제가 있었는지 흥미롭다. 프로이스는 영주들이 꼼짝 못하고 명령을 수행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다른 영주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이었다. 작업 중 사소한 부주의를 저지르면 감독들에게 공개적으로 질책을 당하게 되고, 그것이 관백에게 무능력자로 낙인찍혀 추방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축성 책임자는 히데요시의 오른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공사 책임자는 뒷날 이 지역 영주가 된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澤廣高)였다. 원래 있었던 가키조에(垣添) 성을 헐어 규모를 크게 확장하고, 사방 3km 이내에 130여 번국 영주들의 진영(陣營)을 건설하는 일본 역사상 초유의 대토목 공사였다. 성 공사는 착공 6개월 만에 완공되었고, 영주들의 진영이 완성되는 데는 8개월이 걸렸다니 얼마나 공사를 서둘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본성 공사는 규슈 지역 20여 명의 영주들이 비용과 공력을 분담했고, 나머지 공사는 각 영주들 책임 아래 시행되었다. 해발 89m 나지막한 구릉 꼭대기에 혼마루(本丸)를 짓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5층 규모의 천수각을 세웠다. 그 아래로 니노마루, 산노마루 등 부속시설과 병사를 배치하고, 주변에 견고한 석축을 쌓아올려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외성은 주변에 해자를 둘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전형적인 왜성이었다. 성의 총면적 50만 평은 일본 최대의 오사카 성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성의 크기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시대 인구 30만을 가진 도시는 오사카 말고는 없었다. 성내에는 히데요시의 측실(廁室)을 위한 사찰과 다실, 전통 가무극 ‘노(能)’ 공연장까지 있었다. 그 시대에 그려진 병풍도에는 성내의 건물 약 70여 동, 그 아래 조카마치(城下町)의 일반 백성 주택과 점포 260여 동, 진영 시설 70여 동 등 400여 동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나고야는 외국인 왕래가 잦은 국제도시이기도 했다. 병풍도에는 명나라 사절단 40여 명과 포르투갈인 등 260여 명의 통행인이 그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는 조선에서 잡혀온 포로들을 사들여 해외로 팔아넘기는 노예 상인들도 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정희득(鄭希得)은 실기(實記) 에 “나고야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의 반 이상이 조선인”이라고 썼다. 그들 대다수가 붙잡혀간 사람들이었다. 통행인 가운데는 남자들 소매를 잡아끄는 유녀(遊女)의 모습도 보인다. 해안 거리에는 유곽과 술집이 줄지어 있고, 각 번의 진에서는 수많은 사졸이 할 일 없이 소일하고 있었다. 노예장사로 재미를 본 외국인들도 돈을 풀어 즐거움을 샀을 것이다. 발굴 작업 중 천수각 주변에서는 금박기와편이 많이 출토되었다. 벽면뿐 아니라 기와에도 금박을 입혀 금빛으로 번쩍이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성의 건설과 전쟁 수행에 시달린 일본 민중의 고난이 기록으로 남았다. 병력 1만5000명을 할당받은 사쓰마(薩摩) 번(藩·제후가 통치하는 영지)의 경우 7000명이 넘는 아시가루(足輕·보병)와 6000명이 넘는 인부를 징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모두 농·어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었다. 갖가지 무기와 장비, 병량과 말먹이, 군수품 및 병선 조달과 운용도 백성들 몫이었다. 백성들 고난은 그것으로도 모자랐다. 히데요시는 곧 조선으로 건너가겠다면서 중간에 머물 이키(壹岐) 섬과 쓰시마(對馬島)에도 성을 쌓고 궁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려 부하들과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키 섬에는 아직도 그때의 성터가 뚜렷이 남아 있다. 백성들의 피땀을 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아방궁’을 지은 것이다. 침략군 출진은 1592년 3월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 대부터 하시바 히데카쓰(羽柴秀勝)의 9번 대까지 총출진 병력 15만8800명, 출진을 도운 예비부대와 병참요원 등을 합친 총인원은 30만5300명으로 기록돼 있다(역사군상 시리즈 ). 비탈진 구릉 도시에 인파가 북적거렸을 날에 비해 오늘의 정적(靜寂)과 정일(靜逸)은 너무 대조적이다. 히데요시는 침략군이 떠난 3월 26일 교토를 떠나 4월 25일 나고야에 착진(着陣), 1년을 머물며 전쟁을 지휘했다. 그 기간 협상 사절로 온 명나라 유격 심유경(沈維敬)을 접견하기도 하고, 여러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내오는 보고서와 진귀한 전리품을 받아들고 천하를 얻은 듯 기고만장했다. 심유경의 거소는 명군 유격이 머물던 곳이라 ‘유게키마루(遊撃丸)’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런 영화의 무대였던 나고야 성은 전후 곧바로 참담하게 해체되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가스미가세키 패권 전쟁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전투에 공을 세운 데라자와 히로타카에게 히젠 나고야 땅을 영지로 주었다. 성을 축조할 때 공사 총감독으로 기여하고 조선에 출병한 공로까지 인정한 것이다. 데라자와는 1602년 나고야 성을 허물고 가라쓰 해변에 자신의 성을 축조했다. 조선 침략의 상징물인 그 성을 허문 것은 일개 영주의 결정이 아니었다. 조선과의 무역 재개와 친선관계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이에야스는 성을 허물어 전쟁에 반대했던 자신의 뜻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전쟁 기간에 아버지와 남편을 잃었거나 오래 빼앗겼던 민중은 전쟁에 치를 떨었다. 7년 동안 헐벗고 굶주린 것이 모두 전쟁 탓이라 여겼던 민중의 염전사상(厭戰思想)은 하늘을 찔렀다. 반전사상과 염전사상은 지금 허물어진 성터 위에 아기 불상의 모습으로 남았다. 데라자와는 그렇게 허문 성석과 건물의 자재를 고스란히 자신의 성 쌓기에 사용했다. 마쓰우라(松浦)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나지막한 구릉 위에 한껏 멋을 부려 쌓아올린 가라쓰 성은 멀리서 보면 학이 나래를 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무학성(舞鶴城)이라 불린다. 그렇게 헐린 나고야 성은 얼마 후 일반 민중의 공격으로 또 한 번 상처를 입는다. 163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독교 탄압과 가혹한 조세가 원인이었던 시마바라(島原) 민란 때였다. 성터 입구 ‘나고야 성 박물관’ 현관 앞에는 제주도 돌하르방 부자가 서서 탐방객을 맞아준다. 일본인들은 이 낯선 ‘수문장’ 앞에서 반드시 발길을 멈추고, 더러는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 박물관의 성격이 ‘일본열도와 조선반도의 교류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전시물이 한국 고미술의 상징인 반가사유상 복제품이다. 7세기 중국과 조선반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 처음 율령 국가가 세워졌다는 설명문이 그 아래 붙어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이 거북선 모형이다. 실물보다 많이 축소된 것이지만 여수나 통영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다. 문을 들어서 처음 맞닥뜨리는 공간에 자리한 거북선 옆에는 당시의 일본 전함 아타케부네(安宅船) 모형과 두 나라 병기, 무복, 전황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전쟁을 조명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 2017-12-0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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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나라에도 우체통이 있어요?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김형석 교수님께서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애들이 커가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빠르다는 얘기를 하곤 했는데, 요사이는 내가 늙어가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2018년에는 내 나이가 우리 관례에 따르면 99세가 됩니다. 10년 전에는 미수(米壽)의 나이라고 해서 미국에 다녀왔어요. 같이 가기로 했던 둘째 딸네는 집 일 때문에 못 가고 혼자이지만 가서 ○혜, ○애, ○순 세 딸들과 여행도 했어요. 막내인 ○순이가 벌써 대학 교단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세월이 많이 지났네요. 애들과 당신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때마다 엄마와 같이 고생하던 옛날이 가장 행복했다 말하며 다들 공감했어요. 가난한 세월에 전쟁까지 겪었으니까 우리들의 생애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었지요. 그래도 사랑이 있는 고생이어서 행복했어요. 사랑이 깊을수록 행복은 더욱 커지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그 시절이 제일 좋았을 것입니다. 내가 구십이 되던 해에는 미국의 애들도 한국에서 다같이 모여 5일간 제주도 여행을 했고요. 여행을 끝내면서 당신이 잠들어 있는 산소에도 다녀왔고요. 막내가 “이다음에 나도 한국에 와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누우면 안 돼?”라고 해서 내가 “신랑과 애들이 허락해줄까?”라고 했어요. 막내는 큰애들보다 부모와 머문 기간이 짧아서 그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지요? 못했던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내가 2011년 봄에 ○진이가 교수로 있던 한림대학교에서 주는 일송(一松)상을 받았어요. 그때 여러 사람이 주는 꽃다발을 받았는데, 강원도 양구의 군수님이 주는 꽃다발도 받았어요. 뜻밖이라고 생각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까, 양구의 뜻있는 분들이 나와 안병욱 교수가 50여 년 가까이 사회를 위해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실향민이어서 갈 곳이 없으니까 휴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양구로 모시자는 협의를 본 것입니다. 둘 다 구십 고개를 넘기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고마운 뜻을 전달하기 위해 군수가 직접 수상식에 와 꽃다발을 주었던 것입니다. 양구는 북녘땅과 가장 가깝고 우리나라 국토의 정중앙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파로호를 둘러싸고 있는 풍치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그 호숫가에 있는 공원에 나와 안 선생을 위한 기념관을 건설하고 우리 둘을 모시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안 선생은 93세에 세상을 떠나 기념관 옆에 잠들고 계십니다. 부인께서도 세상을 떠나면 안 선생과 함께 잠들도록 되어 있습니다. 안 선생의 안식처 옆자리에는 내가 당신과 함께 잠들 자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공원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숫가이기 때문에 기념관에 온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고 가족들도 찾아오기 편한 곳입니다. 기념관 안에는 나에 관한 사진들과 기념품이 진열되어 있고 가족사진들도 전시되어 있어요. 당신에게 보여주지는 못했으나 나보다 더 고맙게 만족할 것입니다. 서울에 사는 가족과 친지, 제자들은 물론이고 캐나다나 미국에 있는 이들도 한국에 오면 들러보곤 합니다. 다행히 내 건강이 허락하기 때문에 벌써 4~5년 동안 그 기념관에서 양구의 여러분을 위해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인문학 강좌를 개최해 3년간 직접 강의도 하고 후배와 제자 교수들이 도와주기도 합니다. ○진과 ○우도 다른 강사들과 함께 강의를 돕고 있습니다. 2017년에는 두 과정을 진행해왔는데, 내가 마지막 특강을 맡아주기도 했어요. 둘이 같이 잠들 곳이고 옆의 기념관에는 많은 사람이 참관해주겠기에 감사한 마음을 함께해줄 것으로 압니다. 또 한 가지 약간 놀라워할 사실을 얘기해야겠네요. 내가 당신과 함께 지내는 동안 1960년 초부터 30여 년간 많은 일을 했지요. 그중에서도 라는 책이 나온 후부터 10여 년은 전국적으로 나와 내 책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관심을 받기도 했지요. 그 후부터는 비교적 조용히 일하면서 꾸준히 저서도 남기고 강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015년 정초에 KBS1 프로그램 에 나가 한 시간 동안 행복에 관한 강의를 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큰 반응을 일으킬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같은 방송국에서 한 시간씩 두 차례에 걸쳐 이 방영되었습니다. 내 생애에 관한 기록 다큐멘터리였지요. 그렇게 알려지기 시작하니까 다른 TV 방송에서도 여러 차례 초청을 해와 내가 사양할 정도로 바빴습니다. 마치 행복을 알려주는 멘토 같은 대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또 그 방송들을 계기로 조선일보에서 두 차례, 동아일보에서도 두세 차례 내 얘기가 보도되었고 문화일보와 매일경제신문에서도 큰 비중으로 소개되는 기사가 실리곤 했습니다. 그 때문에 김 교수가 아직 살아 있고 여전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국내는 물론 미국과 캐나다의 교포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의사 방군은 옛날부터 잘 아는 제자였지요? 한국까지 찾아와 큰절로 인사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 간접적인 영향으로 과거에 썼던 책들 와 가 다시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 종교 분야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가 다시 출간되었고 몇 권의 수필·수상집이 새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새로 나온 책들 가운데서 라는 책은 널리 알려진 출판사에서 나온 것도 아닌데 말년에 다시 한 번 장·노년층을 상대로 한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애독자가 생겼습니다. 그 책 때문에 청탁이 들어와 강연회도 몇 해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2017년에도 한 달에 평균 15~16회의 강연에 임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애가 전화를 걸어서, “아들과 사위들이 다 정년으로 쉬고 있는데 아버지 혼자서 일하시네요?”라면서 다른 애들과 같이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내 남편이 최고!’라면서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함께 지낼 때는 내가 교만해질 것 같아 “당신보다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했지만 지금의 내 나이를 보면 당신도 감탄할 것입니다. 어머니와 당신이 있다면 내놓고 칭찬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자랑하고 칭찬해줄 사람이 옆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까 한 가지 더 추가할까요? 내가 2016년 말에는 ‘도산인상 교육상’ 받았고요, 금년에는 유한양행에서 주는 ‘유일한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가을에는 동아일보에서 주는 ‘인촌상’까지 받았습니다. 내가 존경하는 세 분을 기리는 상을 다 받았습니다. 상금도 당신은 상상 못할 정도로 많았고요. 이제는 더 준다고 해도 사양할 정도로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수상식 때 ○예가 당신 대신 자리를 채우곤 했는데 모르는 사람들은 ○예를 보고 사모님이 젊고 아주 미인이라고 부러워했어요. 사실은 당신이 더 아름다웠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랬어요. 어제도 지방에 강연을 갔는데, 사람들이 김 교수가 얼마나 늙었는가 보러 가자고 해서 왔는데 이전보다 강연이 더 좋았다며 감사하다는 겁니다. 여보!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대놓고 자기자랑을 하네…. 그러지 마세요. 다른 누구보다도 당신에게는 얘기하고 싶은 것을 참았어요. 믿기 어려우면 주어지는 시간에 우리 함께 갈 양구의 기념관 ‘철학의 집’에서 내가 다 설명해줄게요. 무어라고 끝을 맺을지 모르겠네요. 보고 싶어요! 왜 눈물이 나지요? 많이 사랑했는데….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 - 평남 대동에서 태어나 일본 조치(上智)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 년간 후학을 길렀고 지금은 글쓰기와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30년 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수영을 하고 아침식사로 계란, 사과를 먹는 게 건강 비결이다. 후배들과 신촌 카페에서 담소를 즐기는 따뜻하고 다감한 한국 철학계의 아버지다.
- 2017-12-0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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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와서
- 지난 10월 약 한 주(13일~20일) 동안 해운대에서 열리는 부산 영화제에 다녀왔다. 부산 영화제는 크게 두 분야로 거행되었다. 벡스코 A동에서는 영화기기관련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벡스코 B동(Asian Project Market-APM )에서는 75개 국가에서 298편의 영화를 출품하여 선보인 영화사 담당자들을 만나서 영화를 수출입하기 위한 상담 업무가 진행되었다. 영화분야는 필자가 잘 아는 분야는 아니나 담당하고 있는 일이 국제계약분야이다 보니 한 주 동안 영화 수출입 관련 상담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한 주를 보냈다. 주간에는 APM 부스에서 상담을 하고 빈 시간에는 출품된 영화 시사회( P&I Screening)에 참석하느라 분주했고 야간에는 영화제 개막식 파티, 홍콩, 필리핀, 타이완 등의 영화사 초대로 Standing buffet 파티에 참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파티에 가면 유명 연예인들을 만나 대화도 나누고 기념사진도 함께 촬영하는 행운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이번에 필자는 릭키 김 및 차 인표 씨와 팬으로 만나 기념사진을 찍어서 간직하는 기회가 있었다. 통상 영화제 기간 동안에 상영되는 영화는 영화의 전당, 롯데 시네마 센텀시티, CGV 센텀시티, 메가박스 장산 해운대 그리고 소향극장 센텀시티에 분산되어 일반 영화처럼 상영된다. 인기 있는 영화는 미리 인터넷을 예약을 하지 않으면 보기 힘들 정도로 영화 동호인이 많은 것 같다.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미리 회원증을 매입해두면 아주 편하다. 하루에 5편씩 영화를 관람할 수 있으며 행사장에 가려고 하면 자가용 및 버스를 제공하여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 되어 있다. 회원증 구입비는 초기에 구입하면 10만원, 중기 15만원, 말기 20만원으로 차별화 되어 있어 영화 애호가들은 매년 7월 쯤 미리 구매하여 두면 경제적인 영화 관람을 즐길 수 있다. 영화제작을 하시는 제작자나 감독하시는 분들은 출품하여 영화제 상연 작품으로 선정되면 감독 및 회사 대표에게 항공권과 호텔 숙박권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물론 국내 언론사와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된다. APM 부스는 사전 신청하면 개설을 할 수 있고 회원증을 갖고 있는 사람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어 영화 수출입 상담을 위해서는 회원증을 발급 받는 것이 필수다. 부스에서 상담은 영화제 시작 전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여 상담일정이 정해지면 약 30분씩 오전 10시 부터 오후 6시까지 계속하여 상담을 할 수 있다. 필자도 사전 예약으로 많은 수출상들과 상담을 하였으며 상담했던 영화 수출 담당자들이 수상자로 선정되는 순간은 마치 내가 수상자가 된 것처럼 기뻤다. 벡스코에서 거행된 APM 마켓은 화요일까지만 진행했다. 대부분의 주요 담당자들은 바쁜 일정으로 주말인 14일 부터 17일까지 상담을 끝내고 대부분 다음 행선지로 가거나 귀국하였다. 아직 개봉되기 전 작품인 ‘유리정원’이 개봉작으로 선정되었으며 폐막작은 중국 영화인 상애상친이었다. ‘유리정원’은 한 차원 높은 예술영화로 한 여인의 사랑과 아픔을 환상과 현실사이에서 신수원 감독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보여주는 영화다. 문근영이 박사과정의 학생 장애인으로 등장하여 나무에서 추출한 녹색의 피로 죽은 애인에게 주입하여 살아있는 나무로 살리려는 연구를 시도하였다. 연구 내용이 한 소설가의 문학작품으로 보도되어 인기를 얻자 실화임이 입증되어 경찰에 쫒기는 내용으로 스토리가 구성되어 있었다. 폐막작 ‘상애상친 (Love Education)은 딸이 아버지 산소 이장 문제로 고향에 살고 있는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과 갈등을 소재로 다룬 영화로 그 배경음악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이번 부산 영화제의 수상자는 아래와 같다. 1.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 수상자 : 스즈키 세이준 (감독/일본) 2. 한국영화공로상 수상자 : 크리스토프 테레히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집행위원장/독일) 3. APM 프로젝트 시상결과 1) 부산상. 부 탁 추옌 (베트남) 2) 브라이트이스트필름어워드: 리샤오펑 (중국) 3) CJ엔터테인먼트어워드 : 리리 리자 (인도네시아) 4) 로데 어워드 : 오승욱 (대한민국) 5) 한국콘텐츠진흥위원장상: 윤가은 (대한민국) 6) 아르떼상: < 비영한,까칠한, 위험한> 비삼 샤리프 ( 프랑스, 레바논) 7) 노르웨이사우스필름펀드상 : 민 바하드르밤 (네팔, 프랑스, 독일) 8) 모네프상 : 오승욱 (대한민국) E-IP 마켓 시상 결과 New 크리에이터상 (북투필름): 이정연/고즈넉이엔티 New 크리에터상 ( E-IP 피칭) : 이수아 (주) 위즈덤 하우스 금년 부산 영화제 기간에는 문재인 대통령께서 부산을 깜짝 방문하여 영화인을 격려하고 향후 부산 영화제의 발전을 위해 영화인들과 함께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서 영화인들과 동호인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나날이 발전해 가는 부산 영화제 23회 2018 BIFF가 우리나라 및 세계영화산업 발전의 큰 도약의 전기가 되길 고대해 본다.
- 2017-11-22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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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과의 마지막 눈인사, 영정사진 찍으셨나요?
- 우리의 근대사 속 중요한 장면에서 등장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영정사진이다. 부산의 이태춘 열사의 사진을 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옆에 나란히 선 문재인 대통령의 사진이나, 이한열 열사의 영정사진을 든 이상호 의원의 사진은 그 장면만으로 아직까지도 상징성을 인정받고 회자된다. 영정사진은 고인이 누구였는가 설명하는 생의 마지막 수단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정사진을 마련하는 일을 꺼려하고 좀 더 뒤로 미뤄놓고 싶어 한다. ‘장수사진’이라는 선의가 느껴지는 명칭으로 바뀌어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영정사진이 언제부터 우리의 장례 문화에 자리 잡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가장 오래된 기록을 꼽자면 1934년 11월 일본 총독부에 의해 발표된 의례준칙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의례준칙 전문 중 기제(忌祭)의 서(序) 첫 번째 항목에 ‘제주지방(祭主紙榜) 또는 사진(寫眞)을 제위(祭位)에 봉안(奉安)함’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전까지 영정(초상화)은 지금의 용도와는 조금 달랐다. 조선시대까지는 장례나 상례 때 등장하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에서 조상을 기리기 위해 신주나 지방 대신 사용했다. 사당을 이전에 영당(影堂)이라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일제에 의해 영정사진 탄생 실제로 일본에서는 훨씬 더 이전에 영정사진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개항을 통해 사진이란 문물이 수입된 이후 일본에선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했다. 또 세이난전쟁(1877년) 때 난을 진압하기 위해 파병되는 군인들에게 사진을 한 장씩 찍어줬다는 기록도 나오는데 이때의 사진을 일본의 최초 영정사진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 전통은 청일전쟁(1894년)에도 이어졌다. 국내에 사진이 본격적으로 들어 온 것은 1883년. 한성순보에 촬영국이라는 사진관에 대한 보도가 나오는데, 황철이란 사람이 세운 사설 사진관이다. 이후 지운영은 1884년 고종의 어진을 찍었다. 이들을 통해 많은 인물사진이 촬영된 것으로 전해지나 남은 기록은 거의 없는 상태다. 일제강점기 시절 영정사진 자료 역시 찾기가 쉽지 않다. 일제강점기의 고종 황제나 순종 황제 장례식에도 영정사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완용의 매일신보 부고 기사에는 그의 초상사진이 쓰였지만, 경성일보에 게재된 그의 장례식 보도사진 속 제위에도 영정사진의 모습은 없다. 광복 후인 1945년 7월 5일 당시 주한미국공보원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이 촬영한 백범 김구 선생의 장례식 영상자료에는 백범의 영정사진이 등장한다. 그의 사진은 운구행렬과 효창공원까지 함께했다. 을지대학교 장례지도학과 이철영 교수는 “과거 국내에선 장례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데 인색해 영정사진의 기록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발견되는 오래된 사진도 대부분 1960년대 이후의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일제의 의례준칙에 기록이 남아 있는 만큼 일본의 영향을 받아 장례 때 영정사진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장의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1982년을 기준으로 영정사진의 대중화가 이뤄졌을 것이라는 추론도 있다. 당시 부산에서 일본식 장례 상품을 그대로 들여온 상조회사가 영업을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의 영정사진 문화가 함께 들어왔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일본에서 영정사진이 장례식에 대중적으로 사용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라는 의견이 있다. 인식 바뀌어 웃는 사진 쓰기도 불과 얼마 전까지 영정사진 제작은 남겨진 자녀나 가족의 몫이었다. 따로 영정사진을 찍어두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 그러나 정작 가족이 사망했을 때 준비되는 영정사진은 증명사진이나 주민등록증 사진을 확대해 인화한 조악한 수준의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사전 준비의 필요성이 점차 커져갔다. 그러다 사진 장비와 기술 보급으로 사진관이 많아지고, 영정사진 촬영을 일종의 봉사활동 수단으로 삼는 사진가들이 늘면서 사진에 대한 걱정은 줄어들게 됐다. 또 이를 통해 영정사진에 대한 인식도 상당히 개선됐다. 영정사진 촬영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 한 동호인은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정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노인이 많았다”며 “그러나 최근에는 영정사진이 장수사진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사진찍기를 즐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심지어 2~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촬영해두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이제는 동네 노인정 등을 통해 영정사진을 파일 형태로 공동 보관하는 문화까지 생겼을 정도라고. 그렇다면 영정사진은 어디에서 준비하는 게 좋을까. 제일 만만한 곳은 역시 사진관이다. 영정사진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가족사진을 찍는 날 영정사진까지 함께 찍어두는 사람들도 있다. 또 최근에는 아날로그 감성을 느끼기 위한 인물사진 전문의 흑백사진관도 서울 북촌이나 연남동 등 일부 지역에서 생겨나고 있다. 가장 대중화된 사진 크기는 28×36㎝다. 현직 사진사들은 아직까지도 본인이 직접 와서 찍는 영정사진보다 생전 사진을 바탕으로 합성해 만드는 게 많다고 말한다. 물론 요즘은 자신의 장례식에 쓸 영정사진을 미리 준비해두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솜사탕 사진관 고용주 실장은 “영정사진을 찍으러 오시는 분들의 태도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져 치아가 보이게 웃거나 심지어 선글라스를 쓰고 측면 모습을 촬영하는 사람도 있다”면서 “만약 의상이 문제라면 평상복을 입고 촬영한 뒤 한복이나 양복으로 간단히 합성할 수 있고 비용도 6~7만원 선으로 장례식장에서 만드는 비용보다 저렴하니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 2017-10-27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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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로 쓴 가을 이야기
- 모두가 세상을 바쁘게 산다. 읽어야 할 이야기와 들어야 할 정보가 많다. 젊은이들 사이에 축약된 신조어가 유행하는 이유도 시간을 줄이는 방편이다. 많은 책을 읽기 위한 속독법도 같은 이유이지 싶다. 정성을 기울여 쓴 글이어도 길면 잘 읽지 않게 된다. 시간이 없어서다. 이럴 때 가장 효과적인 소통 수단의 하나가 사진이다. 영상 언어로 둔갑한다. 필자는 빛을 이용하여 카메라로 그린 그림을 사진이라 정의한다. 기자가 찍은 한 장의 보도 사진이 세계인의 관심을 들어 올렸다 내려 놓았다 한다. 사진의 매력이다. 장문의 글보다 한 장의 사진이 효과적이다. 탱글탱글 익어가는 가을 이야기를 카메라로 썼다. 황금 들판, 밤송이, 코스모스, 해바라기를 주제로 모았다. 비가 내려앉고 바람이 스치며 들려준 이야기를 곁들였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가 울 듯, 한 알의 열매를 만들기 위해 낮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밤이면 서쪽에서 다시 동쪽으로 돌고 돌며 들려준 태양의 손길도 이야기 속에 넣었다. 이른 봄부터 흘린 농부의 땀방울도 담았다. 알찬 결실에 미소 짓는 농부의 마음을 보이지 않는 뒤쪽에 슬쩍 숨겼다. 사진 밖의 이야기다. 사진에는 화면에 직접 보여주는 이야기도 있고 화면 밖의 숨겨진 이야기도 있다. 상상력을 끄집어 낸다. 드높은 하늘을 배경으로 익어가는 가을 이야기를 네 컷에 담았다.
- 2017-10-08 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