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KBS1 TV에서 ‘noodle road’라는 다큐메터리를 제작 방영한적이 있었다. 세계 각처에서 공통으로 먹는 음식으로 조리법과 굵기의 차이가 다소 있지만 noodle의 모양은 한결같이 몸에 비해서 그 길이가 길게 만들어 진다는게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칼국수를 비롯하여 파스타, 소바, 면 등등의 많은 이름이 있지만 우리식으로 쉽게 표현하자면 그들은 다 국수의 모양이고 세계 공통으로 noodle 이라고 부른다.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서 하나의 음식을 각자 다른 이름으로 즐기는 현상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말지만 왜? 어떻게? 의 시선을 가지고 보면 꽤 흥미롭다.
취재기자가 마치 실크로드를 찾아가듯이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한 noodle의 근원을 파헤치고 찾아갔을 때 그 진원지가 아시아 하고도 음식의 대국 ‘차이나’에 도달했다는게 재미있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징키스칸의 유럽정복과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의 역사가 인간의 복잡한 속성으로 존재하는한 음식뿐만 아니라 인간이 누리는 모든 문화를 너와 나만의 것으로만 분명히 구분할수 없다는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원칙일수도 있겠다.
음식을 담는 그릇을 어떠할까?
세계의 3대 도자기는 헝가리의 헤렌드, 덴마크의 로얄 코펜하겐 그리도 독일의 ‘마이센’ 이렇게 불리워지고 있다. 그중 마이센도자기는 세계적인 마니아층을 가지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강남구 논현동에 대표 전시매장이 있다.
마이센 (MEISSEN)은 1709년에 독일 '작센'주에 위치한 한 성(castle)의 명칭이었다. 이 성의 요업장에서 유럽최초의 백자를 구워내는데 성공하게 되면서 마이센은 시작된 이름이다. 도자기와 차, 비단 등 멀리 아시아의 나라 중국, 일본등지로부터 건너오던 물건이 18세기 해양 무역의 발달로 대량수입이 시작되고 사치품에 목말라하는 유럽 귀족들이 아시아의 물건에 물쓰듯 돈을 쓰는것을 보면서 작센주의 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는 백자를 구워낼 생각에 몰두하게 된다. 귀족들은 백자를 하얀금이라고 부를만큼 백색과 투명함에 매료된다. 처음에 이곳에서는 유럽의 토질상 백자에 비해 품위와 강도가 떨어지는 적갈색 도자기를 구워낼 수밖에 없었으나 아우구스트 2세의 집념으로 1710년에 유럽최초로 백자도자기를 굽는데 성공을 하게 된다. 백자를 굽는 열쇄인 고령토의 비율과 흙을 굽는 가마의 고온 기술을 마침내 당시의 연금술사 뵈거트로 하여금 백자를 구워내는데 성공, 개발시키기에 이른다. 이 성공으로 인하여 당시 '작센'주의 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궁정공방으로 이 설립이 되고 17,8세기 로코코시대 특유의 디자인이 개발되면서 합스부르그를 비롯한 유럽전역에 보급이 되기에 이른다. 사전에도 마이센 자기는 유럽 도자기의 역사라고 기록되고 있다.
마이센도자기 백자는 이런경로를 거쳐 중국 청나라 '오채자기'에 유전인자를 두고 모방에서 시작하여 그 탄생이 출발 되었다. 오채자기는 명, 청시대에 유행했던 백색바탕으로 구운 자기에다 나중에 다섯색 채색으로 무늬를 넣어 장식, 완성하는 자기를 말한다.
위의 사진중 좌측 마이센 도자기는 현재 영국 로얄 알버트 홀 소장으로 18세기초에 제작이 되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자기의 하단부에는 일본도자기 문양이 흉내내어 그려져 있다. 당시 유행했던 일본도자기 문양의 '짝퉁‘ 이 아니었을까..?를 짐작케 한다는 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짝퉁‘이라는 우아하지 못한 표현은 기자의 표현이다.
서양사람들의 그릇 '커피잔'이라고하는 그릇은 동서양 문화의 교류로 지금의 모양이 되었고 잔의 손잡이는 뜨거운 차를 마시는 중국의 찻잔에서 모방되었고 'saucer'라고 하는 잔받침은 일본의 차문화와 도기에서 흉내내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도자기의 영어 표기가 China Ware인 것이 그냥 붙여진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좌측 사진속 자기 하단부의 문양보다 상단부의 그림을 보는 순간부터 나올때까지 내내 여운이 남아 혼자 생각하다가 마침내 우리나라 조선시대 유행했던 민속화 ‘초충도’를 기억해내고 나는 가슴이 뛰었었다.가슴이 뛴 이유는 는 ‘초충도’가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민속화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충도'는 풀, 작은 곤충, 동물을 배합하는 그림의 구도로 중국 원나라 시대의 화조작가 '여 경보'의 작품이 언제인가 일본으로 전래되었고 따라서 이 같은 구도가 우리나라에도 고려시대이후에 전해졌다고 추정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에서는 16세기(조선시대)에 이런 버전의 그림들이 주로 여성들에 의해서 유행하였고 민속화로 분류되고 있고 사임당의 초충도가 대표적이고 '초충도'의 대부분은 사임당의 화첩그림과 비슷한 풍으로 전해질뿐 작품들의 진위도 가리기 어렵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초충도'가 종이에 그려진 채색화에 비해 일본의 ‘초충도'는 주로 자수를 위해서 그려졌다고 한다. 위 좌측 도자기의 상단 그림 역시 들쥐가 무슨 덩쿨식물의 열매를 먹고 있는 그림이다. 따라서 기자는 저 윗부분의 그림 역시 아시아 그것도 한국에서 건너간 그림의 흉내일것이라고 혼자 생각하고 우습게도 가슴이 뛰었었던 재미있는 기억이 있다.
멀고 가까운 세계 문화교류의 역사가 재미있지 않나요?원초적으로 나만의것 이라는게 존재하기나 했을까요?
아주 어렸을 적, 사건 하나. 어머니가 새로 사다 놓은 값비싼 크림을 얼굴에 찍어본 것도 모자라 온몸에 남김없이 발라 버렸다. 당시 어머니는 기가 막혔는지 혼내지 않고 예쁜 척 화장대 위에 앉아 있는 어린 딸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기록했다. 어린 것이 예쁜 것은 알아서. 그런데 나이가 들어도 사람 마음은 다 똑같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예쁘네”란 소리에 미소 짓고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산다. 예뻐지는 놀이터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가고 싶지 않을까? 여전히 아름다움을 찾고 싶은 당신을 위해 준비한 공간, ‘설화수 플래그십 스토어’(이하 플래그십 스토어)다.
주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산대로 45길 18(도산공원 정문, 대리주차 가능) 운영 시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 (*둘째 주 월요일, 설·추석 당일 휴무)
도슨트 투어 서비스(02-541-9270) 오후 3시, 6시 2회(소요시간 약 30분) 스파 예약안내 설화수 스파(지하1) 02-541-9272, 설화수 발란스 스파(4층) 02-541-9273
1층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설화수 브랜드의 역사,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는 ‘헤리티지 룸’이 있다.
동양의 귀한 원료를 담은 약재함을 형상화한 이곳에서는 설화수 브랜드의 가치를 느끼고 경험할 수 있다.
입구 오른쪽으로는 설화수 브랜드 매장이 있다. 계절별 인기 상품과 신상품을 가장 먼저 공개하는 곳이다.
특히 플래그십 스토어에서만 판매하는 제품들이 전시돼 있다. 플래그십 스토어 한정 제품에는 궁중비누,
향(포프리, 향초)제품, 옛 입술연지 통을 형상화한 립밤 등이 있다.
2층이야말로 플래그십 스토어의 인기 장소이다.
곳곳에 배치된 소파 앞 테이블에는
설화수의 스킨케어와 메이크업 제품이 가득 차 있다.
뭐든 발라 보고 경험해 볼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
이곳에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전문상담사에게 제품과 관련한 자세한 문의도 가능하다.
선물 포장을 해주는 ‘기프트 서비스 존’에서는
우리 고유의 느낌이 나는 보자기 포장을 주로 한다.
기본 포장 외에도 예물이나 어르신을 위한 포장 등
고급 선물 포장 서비스를 하고 있다.
3층 ‘컬처 라운지’는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 문화공간이다. 문화 수업이나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강의형 공간과 VIP 고객들의 휴식 공간인 ‘VIP 라운지’가 마련돼 있다. 3층에서는 뷰티 클래스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 클래스를 정기적으로 열어 많은 사람과 소통할 계획이다.
지하 1층의 설화수 스파는
설화수 화장품에 쓰이는 한방성분을 이용해 몸과 마음의 안정적인 조화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안티에이징 고급 한방 스파준다.
옥, 백자 등을 사용해 최적의 안티에이징 효능을 느낄 수 있다.
영업시간 10:00~21:00
공간 룸 5개 (VIP룸 1개, 커플룸 1개, 싱글룸 3개)
이용가격 170분 / 65만원, 90분 / 23만원
4층 설화수 밸런스 스파는
한방 요소들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했다. 흐트러진 심신의 균형을 맞추고
부위별 차별화된 집중 케어를 통해 빠른 시간 내 깊은 활력을 불어넣는다.
도산공원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스파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이곳의 매력이다.
영업시간 10:00~21:00
공간 룸7개 (VIP룸 1개, 싱글룸 4개, 풋룸 2개) 이용가격 60분 / 12만원
‘플래그십 스토어’ 옥상라운지
도산대로의 평화로운 정취와 푸른 도산공원의 풍광을 한눈에 담으며 일상의 재충전을 할 수 있는 힐링 공간이다. 브라이덜 샤워, 패밀리 이벤트 등 VIP 고객의 이벤트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다. 친구와 연인,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멋진 공간이다.
“팔다리는 물론 얼굴에까지 뜨듯한 오줌이 그대로 튀어요. 얼굴은 똥, 오줌 범벅이 돼도 ‘똥은 흙, 오줌은 물’이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이때가 사진 찍기 가장 좋은 때거든요.” 7개월 동안 돼지의 생활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박찬원(朴贊元·72) 사진작가가 겪은 일이다. 그는 돼지만 사진을 찍어서 ‘사진작가는 미친놈이다, 아니면 내가 전생에 돼지였는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단다. 확실한 것은, 그가 사진에 미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제2 인생의 즐거움과 사진예술 인생의 새로운 가치를 들어본다. 글 사진 김영순 기자 kys0701@
이제는 사진작가라고 불러야 한다. 과거에는 사장, 한때는 교수라고 불렸던 이다. 바로 박찬원 사진작가의 이야기다. 1944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전자 대표, 삼성그룹 부사장을 지내면서 전 세계로 뻗은 거대한 재벌 기업의 의사결정권자로 일했고, 코리아나화장품 사장을 끝으로 기업에서 은퇴한 후에는 성균관대 석좌교수로 교육자로서의 삶도 겪어 봤다. 그러나 40년을 직장인으로 산 그가 인생 후반전에 도착한 곳은 사진이라는 예술이었다. 그는 지난 6, 7월에 걸쳐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이포’와 은평구 녹번동 ‘서울혁신파크’에서 두 번의 ‘돼지’ 테마 전시회를 마친 뒤였다. 지난 8월에는 12일간 종로구 사진위주 류가헌에서 ‘숨 젖 잠’이라는 초대전도 열었다.
“원래 초대전을 여는 걸 사진 배우기 시작한 10년째인 2018년에 계획했는데 기회가 일찍 왔어요. 문래동에 위치한 대안공간 이포가 원래 실험적인 젊은 작품들을 전시하는 곳인데 내 작품을 보고 좋다고 해서 열게 됐죠.”
‘예술은 돈이다’라고 이야기한 피카소의 말이 생각났다. 박 작가한테 전시 작품에 ‘빨간딱지’ 가 붙어 있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물었다.
“전문 사진가라면 작품이 판매되어야 하죠. 처음 판매되었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2011년 코엑스 CEO 특별전으로 기성 작가들과 호주에서 사진전을 열었을 때에요. 가슴이 쿵쾅거렸어요. 구매한 그분께 정말 감사했고 부담도 느꼈어요. 아마추어는 전시만 하면 되지만 프로는 팔려야 하죠. 작가와의 친분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좋아야 사는 거잖아요. 나중에 누가 샀는지 알아보지 말 걸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작품이 팔리고 보니 진짜 작가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웃음)”
작가는 작품이 판매될 때 비로소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누드 사진을 계기로 사진예술에 눈 뜨다
박 작가와 사진과의 인연은 올해로 8년째다. 2008년에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강연을 듣다가 미술과 사진을 배우면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미술과 사진 둘 다 지금도 꾸준히 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시 ‘본업’은 사진이다.
“처음부터 사진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사진작가 조세현 선생이 가르쳤는데 하루에 인물, 풍경, 누드, 종합으로 테마 하나씩을 세 시간에 걸쳐 네 번 찍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세 번째 날인 누드 사진을 찍은 날, 내가 대상을 받았어요. 그때 썼던 카메라들이 모두 삼성 카메라였는데, 조세현 작가가 제 걸 보더니 ‘이건 카메라 광고로 써도 손색이 없겠다’라고 말하더군요. 그 사진이 누드의 실루엣만 찍은 건데, 저는 마케팅 쪽을 했기 때문에 보는 눈은 좀 있다고 자부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곳에 가서 엎드려서 찍었는데 성공적이었던 거죠. 그때 ‘야, 이거 할 만하네’라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박 작가는 이때 때로는 초보도 프로 못지않은 명작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인생 자체가 작품 같은 박찬원
박 작가는 코리아나화장품에서 은퇴하고 성균관대에 석좌교수로 초빙되어 마케팅을 강의하게 됐다. 그런데 하다 보니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젊은 박사들은 경력을 위해서 강의를 맡는 게 중요한데 나는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아, 내가 할 자리가 아니구나’ 싶어서 한 3년 하고 나서 그만두었어요. 그리고 사진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2010년에 상명대 예술디자인 대학원에 멋모르고 지원했죠. 그러면서 고생 엄청 했어요.”
사진을 배우러 들어갔는데, 정작 대학원에선 사진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기술은 이미 대학교에서 배웠다고 생각하고 예술가가 되는 훈련을 시켰기 때문이다. 여전히 초보였던 그로서는 많이 힘들었지만 그러한 훈련 덕분에 예술, 예술가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다고 말한다. 인생 후반기의 보람을 느끼는 힘,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 쓰는 언어, 노는 물도 달라졌다. 그리고 그간 고생한 것이 아까워 졸업하자마자 라는 책도 썼다. 이제 박 작가의 목표는 영원한 현역이다.
“사진작가를 업으로 가는 건 정해졌습니다. 제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는 게 목표예요.”
작품의 진정성을 추구하기 위한 100일 촬영
박 작가는 하나의 주제에 100일 촬영을 목표로 작업하는 순수 사진가로 ‘생명의 의미’를 담았다. 현재 작품 세계의 주요 테마는 ‘돼지’와 ‘염전’이다. 얼마 전에 쟁쟁한 기성 작가들과 함께 전시했던 테마도 ‘돼지’를 소재로 한 ‘꿀 젖 잠’이라는 제목이었다. 각각 ‘꿀’은 돼지가 내는 소리, ‘젖’은 돼지의 젖, ‘잠’은 돼지의 영혼을 사진으로 잡아내고자 한 시도다.
‘돼지’ 테마는 결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촬영할 수 있는 곳을 섭외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그것도 운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겨우 섭외한 양돈장에서 지난해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매주 2박3일씩을 현장에서 먹고 자며 촬영했다.
“똥 냄새 엄청나죠. 지금도 자동차 트렁크를 열면 그 냄새가 날 정도예요. 젖 사진을 찍을 때는 얼굴에 똥이 다 묻어요. 그리고 돼지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긴장해서 오줌을 싸고요. 그런데 돼지가 오줌을 싸면 움직이지 않아서, 좋은 사진이 나올 수 있어요. 상황이 이런데 막상 사진을 찍을 때면 냄새가 안 납니다. 의식을 못하는 거죠.”
100일 촬영하기를 한다고 했을 때, 2주에 한 번 간다고 하면 2년이 걸리고 1주에 한 번 가면 1년이 걸리는 긴 시간이다. 당연히 사진 촬영 때문에 다른 모임은 일절 참석할 수 없게 된다. 얼마나 사진에 올인하여 새로운 즐거움을 갖게 됐는지를 알 수 있다.
“막상 셔터를 누르는 시간은 얼마 안 걸려요. 나머지는 다 생각하는 시간이죠. 그 시간이 주제가 구체화되는 지점입니다.”
3년 동안 염전 사진을 찍었다 소금밭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염전 안에는 삶과 죽음이 모두 담겨 있더라고요. 처음으로 빛을 느낀 곳이기도 합니다. 바닷물이 노구(老軀)를 끌고 찾아와 햇볕에 몸을 맡기면 육신은 소금으로 남아 생명의 물질이 되고, 영혼은 수증기가 돼 다른 세상으로 날아갑니다. 죽음과 탄생이 공존하는 공간이죠. 나비, 하루살이, 거미 등을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어요. 눈을 뜨고 마음을 여니 새로운 세상이 보이는 듯했어요.”
박 작가에게 염전은 성지와도 같다. 처음으로 사진다운 사진을 찍었고 많은 고민을, 많은 생각을 했던 곳이다.
날것 그대로, ‘생명’을 사진에 담는다
어디를 가나 그는 연장자다. 전문작가도 사진을 정리할 나이 65세에 사진을 시작했다. 아랫사람보다 10년 이상 차이가 난다. 나이가 많다고 대접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체력의 한계, 감각의 한계가 핸디캡이 될까 봐 그래서 항상 조심스럽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과 마음이 따라 주지 않는다. 최근 사진들은 리터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이다. 그런 기술적인 부분까지 직접 다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박 작가는 리터치(보정)를 잘 못하고, 가급적 안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어쩌면 그러니 제 작품을 어설프지만 인정해 주는 것일 수도 있어요. 리터치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보면 다 알거든요.”
가공이 거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사진. 그래서인지 박 작가의 사진에는 유난히 담백한 맛이 있다. 그것은 다큐로서의 시선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게 그냥 찍는 게 아니고 사람과 사귀어야 하고 동물하고도 사귀어야 하고 그런 것들을 해야만 개념도 잡히는 거죠.”
박 작가가 추구하는 작품세계의 궁극적인 지점은 ‘생명’이다. 다음 테마는 비밀이지만 역시 그가 추구하는 ‘생명’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이미 결정됐다고 하며 10월 부터 착수한다.
“작품 사진이 좋을 때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답은 간결했다.
“즐기면서 찍을 때 좋은 사진이 나오고, 힘을 빼고 작업할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것은 진리예요.”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
“우리 집사람은 수채화를 그려요. 그러니 호흡이 딱 맞아요. 저도 처음에 대학원을 갈 적에 그림으로 가느냐 사진으로 가느냐 고민이 많았는데, 그림은 앉아서 하니까 건강에 도움이 안 될 것처럼 보였어요. 반면 사진은 움직이면서 찍으니까 활동적이어서 그쪽을 선택한 것도 있죠. 지금은 더 건강해진 느낌이에요.”
상당수의 시니어들은 뭔가를 새롭게 하려고 해도 늦게 시작하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있다. 그래서 감히 못하는 경우 많다. 그러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의외로 나이든 예술가들이 자기 명성만 가지고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요. 반면 젊은 친구들은 장래가 두려워서 방향을 잘 못 잡고 몰입을 잘 못하죠. 난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됐고 다른 일이 없으니까 필요한 건 용기였죠.(웃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기에 박 작가 혼자 히죽 웃는다. 제2 인생도 용감한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영원한 현역을 다짐하다
그는 나이를 먹어서 가져야 할 것은 용기를 내는 것이라는 걸 재차 강조했다. 자신도 주변에 추천은 많이 해줬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기를 못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해야 하는데 취미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나이 들어 자기 자신의 역량이나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관점도 거기에 있었다.
“호기심, 그리고 노력인 거 같아요. 그림도 사진도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재능 없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제가 찍는 정도의 사진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시도를 안 하는 거라고 봅니다.”
다소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인생에서 가장 흥분되는 때가 언제인지 물어 봤다. 그의 대답은 즉각적이고, 예상한 그대로였다.
“바로 지금이지! 즐거워!”
자기만의 인생을 사는 사람, 박찬원 작가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다.
“2018년은 사진을 시작한 지 10년째 되는 해예요. 10년간 사진 공부를 하고, 10년간 사진가로 활동하겠다는 계획을 잡았어요. 우리 나이 65세에 사진 공부를 시작했고, 75세에 나만의 작품으로 데뷔전을 하고 85세에 마지막 사진전과 사진 책을 발간할 작정입니다.”
서울역사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인현동 인쇄 골목’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요즘은 성수동, 파주 출판단지 등으로 분산되어 있지만, 그래도 인현동은 인근 필동, 을지로동, 광희동과 함께 전통의 인쇄골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인현동 인쇄골목은 충무로역을 중심으로 중부세무서, 대한 극장 맞은편의 작은 한 구역이다. 원래 인현동이라는 지명은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의 집터가 있던 곳으로 인현동이 되었으며 인쇄 골목이 된 이유는 금속활자를 만들어낸 관청인 주자소와 책자 인쇄를 관할한 교서관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 시내 인쇄소가 총 2,400개 정도 되는데 그중에 60%인 1,500여개소가 인현동 일대에 몰려 있다고 한다.
인현동이 인쇄골목으로 유명해진 것은 여기 오면 인쇄의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점 때문이다. 디자인과 편집에서 시작해서 출력, 인쇄, 후가공까지 다 처리가 가능한 것이다. 원래 영세한 업체들이라 한 공장에서 모든 과정을 처리하기 어렵다 보니 협력체제로 컨베이어 벨트 흘러가듯이 일이 진행되는 것이다. 오프 셋 인쇄과정만 봐도 인쇄전 공정부터 인쇄 공정, 인쇄 후 공정까지 세부적으로 나눠져 있는 것을 마치 한 회사가 해내듯이 처리해 내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이다 보니 밀집된 인쇄 골목은 각 가공 공정에 맞게 건물을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도로 폭도 3.5톤 트럭이 들어갈 수 있는 도로 폭 10m가 있는가 하면 도로 폭에 따라 트럭도 1톤, 다마스, 삼발이, 오토바이, 손수레 등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좁은 골목도 있다.
인쇄업에 사람들이 매달리는 이유는 우리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각종 출판물과 홍보물을 비롯하여 문화국가에서는 인쇄업이 발달한다. 소자본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이 많으며 부가가치도 높은 편이라고 한다.
지금은 사라진 업종이지만, 인쇄와 관련된 직업들이 있었다. 근대 활판 인쇄에서는 활자를 일일이 뽑아서 인쇄 활판을 만들어서 인쇄에 들어갔으므로 여러 직종이 있었다. 조각공, 문선공, 식자공, 그리고 청타수 등인데 컴퓨터 조판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일반 직장인들보다 월급이 3~4배 높았다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들 숙련공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전에는 잡지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회사가 설립되고 그 안에 편집기자, 사진 기자, 그리고 출판, 영업을 따로 두고 했다. 그러나 요즘은 기자는 외부 용역을 쓰고 잡지 만드는 일은 여기 인쇄 골목에 맡기면 알아서 잡지를 만들어줄 정도로 정 직원 한 명 없어도 잡지 하나가 버젓이 만들어진다.
여기 인쇄 골목이 현재 기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강북 재개발로 인근 땅값이 뛰자 여기도 땅 주인들이 집값을 올려 받게 되고 아예 옮겨달라는 요청도 나오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소음에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민원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대형업체들은 준 공업지역인 성수동, 파주 출판단지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다고 인현동이 일시에 무너지지는 않을 거라는 예상이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종사하고 있고 인프라가 탄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풍류-이스탄불, 풍류-베이징, 풍류-밀라노, 풍류-홍콩에 이어 풍류-서울 전시회(7월 13일~8월 9일)를 포스코미술관으로부터 초대받았다. 자랑스러운 조상 덕이었다. 그중 이탈리아 밀라노에서는 유럽을 대표해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유럽 예술과 패션의 중심지로 알려진 밀라노는 사진이 태동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도시가 2012년 9월 24일부터 말일까지를 ‘한국문화주일’로 선포했다. 우리 영화 등을 밀라노 상영관에서 개봉하고, 밀라노 광장에서 케이팝 공연과 한글을 소개하는 문화행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풍류-밀라노 사진전이 밀라노 사진학교(FORMA) 전시실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유럽 최초로 우리 문화주일을 선포하는 이탈리아 대한민국 총영사관과 밀라노시의 공동 축제였다.
전시 관람객은 날이 거듭될수록 늘었고, 전시작품에 대한 진지한 질문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 부부는 행복했다. 특히 전시 마지막 날에는 한 관람객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았다. 마감 시간이 임박한 저녁 7시경 관람객 무리에서 한 부인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부인은 작품 아래 붙여진 설명을 우리말로 읽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녀에게 한국어를 공부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설명서에 이탈리아어로 쓰여 있어 작품의 콘셉트는 이해했지만, 그 내용을 직접 한국 발음으로 듣고 싶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관람객들이 둥그렇게 작품 앞에 모였다. 난 그들을 바라보며 작품 설명을 우리말로 천천히 읽어주었다.
“사진도 청각 예술의 소리처럼 증발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록 말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의 정서를 이해하려는 관람객들의 열정에 나는 놀랐고,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관람객이 감상을 전해주었다.
“당신의 말을 듣고 작품을 보니 한국은 참 아름답고 고상한 나라란 것을 알겠어요.”
그때 느낀 벅찬 감동은 아직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젊은 날 뜻도 모르고 겉멋에 흥얼거리던 칸초네 가락이 언뜻 떠올랐다.
풍류를 사랑했던 조상의 멋을 우린 사진기 뷰파인더 안에서 만날 수 있었다.
바람과 물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쉽게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특별한 장치가 필요했다. 시간이라는 날줄과 공간이라는 씨줄이었다. 그렇게 그 바람과 물에 맞는 그물을 엮으면서도 그 간격의 밀도가 또한 관건이었다.
내 사진기는 수많은 조합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내가 볼 수 없었던 세상을 사진기는 열어 주었다. 또한 바람과 물은 나라와 민족을 넘어서는 공통의 언어였으며, 창조의 숨결, 흐르는 생명이었다. 이렇게 준비된 사진을 통해, 관객의 내면 깊이 침잠해 있던 낯설음과 낯익음이 되살아나 새로운 이야기 길이 열리길 바랐다. 전시회가 나의 독백이 아니라 관객이 전시회를 완성시키는 주체이길 원했다. 관객과 작가 사이의 바람직한 긴장감.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는 호숫가 살얼음판 위를 걸을 때 전해지는 얼음의 울림을 기대했다.
스틸에는 동영상처럼 프레임마다 이어지는 스토리가 없다. 그래서 전시 중에 우리의 잠재의식 깊이 숨어 있는 이야기가 열렸으면 했다. 더 나아가 우리 조상들이 유언으로 후손들에게 남기고자 유전인자에 새겨놓은 우리 어른들의 오랜 이야기 말이다. 그 새로운 지혜의 이야기 길을 빛으로 나누고 싶었다.
포스코미술관 전시 중에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방문이 있었다.
어른과 함께한 의젓한 아이들이었지만, 나는 당황했고 긴장했다. 아이들에게도 너무나 커다란 전시장이라 먼저 그 규모에 지루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먼저 전시장 안을 한껏 달려보게 했다. 여러 아이들의 달리기 소리에 당번 큐레이터가 질겁하여 뛰어 나왔지만 곧 상황을 이해했다. 그렇게 아이들과 아름다움에 대한 얘기를 시작해야 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일하는 바람, 낮은 데로 흐르며 아낌없이 자신을 주는 물…. 그 나이 아이들이 듣기만 해도 웃음이 터지는 ‘똥’ 이 아름다울까? 등으로 족히 한 시간을 넘어, 어느 투어 못지않게 진지한 풍류를 나눌 수 있었다.
특히 이번 포스코미술관 전시에서는 그동안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연재하였던 18편을 가로 50cm로 디자인하여 작품 사이에 진열하였다. 그리고 다큐영상실에서는 예멘의 딸들(daughters of Yemen), 몽골의 색(color of Mongolia), 우리들…(about us…) 세 영상이 각각의 모니터로 상영되어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인해 생겨나고 있는 난민들과 전쟁으로 파괴되어 이젠 사진으로만 남게 된 문화재들을 알리는 사진의 힘을 얘기했다.
대전의 보문산(寶文山) 사정(沙亭)공원에는 시비(詩碑)들이 있어, 언제 가도 느리고 깊은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1879~1944)의 이란 시가 발길을 붙잡는다. ‘출세의 해탈도 꿈입니다.’ 가슴에 꽂히는 구절을 새기며 추수 김관식(秋水 金冠植·1934~1980)의 를 읽는다. ‘저는 항상 꽃잎처럼 겹겹이 에워싸인 마음의 푸른 창문을 열어 놓고,’ 하늘을 바라본다.
다시는 못 올 눈물의 서정시인 박용래(朴龍來·1925~1980)의 ,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시비를 어루만지며 시혼(詩魂)에 젖어든다. 멧새의 울음 따라 후드득 아침이슬이 떨어진다. 화강석이나 오석(烏石)을 잘 다듬고 깎아 예인(藝人)들의 글씨로 새긴 전아(典雅)한 시비는 눈을 트이게 하고 마음까지 맑게 한다.
“박용래 시인의 시비 위에는 선생님의 브론즈 소녀상이 있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워낙 순진무구한 시인인지라, 항상 하늘을 바라보는 순수한 소녀상을 빗돌에 더하고 싶었어요.” 대전시립미술관 찻집에서 최종태(崔鍾泰·1932~ )조각가와 나눈 대화였다. 전에도 전시장에서 여러 번 뵙고 인사는 드렸으나 그날은 선생 부부와 우리 부부가 전화로 약속을 하고 만난 뜻 깊은 자리였다. 마침 그해(2005년) 7월 20일부터 9월 7일까지 그곳에서 전작전(全作展) 형식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초기작부터 나무 돌 브론즈의 조각들은 물론 파스텔화, 드로잉, 매직화(magic pen으로 그린 그림), 조각의 구상 단계의 연필 스케치까지 미술관 전체에서 한 예술가의 모든 숨결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선생의 조각 작품은 수집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현대나 가나화랑에 부탁해도 일이년 기다리기가 다반사였다. 작품이 완성도에 이르기까지 오래 걸리고 과작(寡作)일 뿐더러 미술품 경매시장에도 작품이 나오지 않아 몇 년에 한 번 열리는 전시회만 기다려야 비로소 선생의 작품을 소장할 수가 있다. 선생의 작품을 수집하려 돈을 모으다가 다른 미술품을 수집하곤 하였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판화, 드로잉, 매직그림들부터 사 모았다. 지금 생각해도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뜻을 세우고 기다린 끝에 지금은 몇 점의 조각 작품도 수집하게 되었다. 이 파스텔화는 인사동 노화랑에서 을 열 때 오백만원을 주고 바로 구입한 작품이다. 이 그림이 큰 사진으로 일간지에 소개되는 바람에 예서제서 구입하고자 해서 오픈 날 바로 떼어왔다. 선생은 수상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 아주 깜깜한 지경에, 파스텔로 그림그리기를 하므로 그 어려움을 견디어냈다.”고 술회한 바 있다. 1984년에는 파스텔화만으로 전시회를 열어 국내외의 큰 호평을 받았다.
“나는 남자 그림은 네 명만 그렸다. 예수, 아기예수, 요셉, 그리고 내 손자뿐이다.”고 한 걸 보면 이 그림은 아기예수와 성모일 테지만, 성화(聖畵)가 아닌 여느 엄마가 아들을 기꺼워하는 모습으로도 읽힌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애수와 명상에 잠긴 눈망울에서 깊은 고요와 환희를 감지하게 된다.
조치원 인근 야산 기슭, 허름한 작업장에서 유영교(劉永敎·1946~2006) 조각가를 만났다. 잔설 위로 햇빛이 부서지고 바람이 제법 맵게 불었다. 40kg짜리 LP가스 빈 통으로 만든 난로에서는 장작불이 이글거리고 여기저기 색을 달리하는 대리석덩이가 흩어져 있었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대리석 산지 카라라(Carara)에서 수입했다고 했다. 오전 작업을 끝내고 티 타임이라며 녹차를 따라 주었다. 흙에 뒹구는 저 돌덩이를 보며 얼마나 많은 사색과 명상으로 형상을 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고뇌의 흔적으로 가득 찬 밑그림들이 벽에 빼곡하게 붙어 문풍지처럼 나부꼈다.
유영교 조각가는 1976년 홍익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78년 이탈리아로 유학하여 2년간 국립미술아카데미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조각가 에밀리오 그레코(Emillio Greco·1913~1995)와 페리클레 파치니(Pericle Fazzini ·1913~1983)를 사사했으며 그 후는 대리석 산지인 카라라 지역으로 옮겨 6,7년간 조각 작업을 하며 돌의 성격을 파악하고 국제적 미술 감각을 익혔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의 명작들도 카라라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유서 깊은 그곳에서의 작품 활동이 우리나라 많은 후학들의 카라라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다.
1986년 귀국하고 대학에도 출강하면서 열정적으로 빼어난 대리석 작품을 탄생시켰다. 1996년 개인전에서는 초기의 소박한 여인상, 모자상 가족상에서 합(合)형태의 반추상과 구도자(求道者) 선승(禪僧) 등 심오한 인간 내면의 정신을 표출하고자 노력하였다.
“나의 작품들의 모티브는 자연에서 찾는다. 자연을 볼 때 바쁜 우리 눈으로 보지 말고 매우 느리게 돌아가는 자연의 시간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의 얼굴이 나타나는데, 그 고운 형상은 침잠의 미소를 짓게 한다.”고 작가노트에 쓰고 있다. 50세 이후로는 조각을 환경의 매체라 인식, 건축공간과 하나 되는 움직이는 조각을 시도하여 등의 역작을 남겼다.
이 천재 조각가의 서거 소식을 듣고는 먹먹한 가슴으로 하늘만 바라보았다. 아 아 무심한 하늘이시여!
이 은 대리석 작업이 무르익던 1992년 작으로, ‘이 애가 내 아들이에요!’ 엄마의 대견해하는 표정만으로 더없는 기쁨을 준다. 엄마의 풍만한 미소가 잔뜩 찌푸린 아들의 얼굴과 대조되어 웃음을 자아낸다.
여름의 한가운데, 배롱꽃을 바라볼 수 있음은 크나큰 축복이다. 긴 꽃타래에 꽃망울이 다투어 터지며 백 일간 피고 지고 한다 하여 나무 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 담홍색, 보라, 흰색의 꽃은 그 기품 또한 맑고 깊다. 고창의 선운사나 안동 병산서원에 가시거든 수백 년 한자리에서 꿋꿋이 풍상을 견디어 온 배롱나무 꽃그늘에 서서, 굽은 둥지에 살며시 귀를 대고 영겁의 소리를 들어보시라.
“얘야, 나는 저 나무 백일홍이 활짝 필 때, 저승 가는 등불로 삼았으면 좋겠구나.” 하시던 어머니가 엄동의 눈꽃 속에 저승으로 가셨기에 더욱 안타까운 꽃, 긴긴 여름을 애틋하게 한다.
어머니에게 과연 나는 기껍고 대견한 아들인 적이 있었을까.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사진은 필름이나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져 있어서 언제나 컴퓨터나 스마트폰, SNS를 통하여 열어 볼 수 있다. 또한 필요한 경우 인화할 수 있다. 판화도 마찬가지다. 원판이 있어서 언제고 희망하는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해당 원판을 이용하여 한없이 찍어내거나 만든다면 작품의 희소가치는 떨어진다. 작가가 죽은 후에 그 값어치가 더 올라가는 이유는 해당 작가의 작품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 가치에 희소가치가 더해진다.
사진의 경우도 작가 자신이 보관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모르지만, 상품으로 판매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작품을 구입한 사람은 작품 자체가 좋아서 집이나 사무실에 걸어두고 그 의미를 되새기지만, 아울러 가치가 올라간다면 금상첨화이지 싶다. 판화와 마찬가지로 사진도 어떻게 보면 멀티플 아트(Multiple Arts)라 할 수 있다. 한 장의 필름이나 파일로 같은 작품을 수없이 만들어낼 수 있어서다. 마냥 끝도 수도 없이 같은 작품을 만들어 판매할 것인가? 아니면 작품성에 희소 가치를 더할 것인가? 작품의 매수가 적을수록 희소가치가 높아져 가격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사진작가도 판매 작품에 대하여 판화와 같이 “에디션 넘버”를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작품을 구입한 사람과 맺은 판매 계약의 한 조항으로 볼 수 있다.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같은 작품을 원하는 매수로 연속하여 찍어내는 것을 “에디션”이라고 한다. 판화에서 비롯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작가가 시험 프린팅을 마치고 나면 에디션 넘버를 정하여 정식 프린팅을 한다. 판화 한 판에 50장 찍었다고 가정했을 때, 각 장마다 50장 중에 몇 번째인가를 숫자로 밝히도록 되어있는데 이것이 “에디션 넘버”다.. 첫 번째 찍은 것은 1/50, 두 번째 찍은 것은 2/50로 기록한다. 판화는 일반적으로 50∼100매 정도로 제작한다. 많을 때는 500매, 적게는 20매를 찍기도 한다. 에디션 넘버는 작품 제목, 제작 년도, 서명과 함께 작품 아래쪽 좌우에 적는다. 손으로 직접 그린 그림은 원본이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진은 필름, 파일이 별도 있어서 언제고 똑 같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필자는 2016년 7월 25일 서울시청 다목적 홀에서 열린 “The Senior 2016”(사단법인 은퇴연금협회.머니투데이 방송 주최)의 초대로 사진전시회를 열었다. “카메라로 그린 수채화 10선” 주제로 10 작품을 선보였고 전시작품 모두가 팔리는 기쁨을 맛보았다. 어떤 작품은 소장 희망자가 여럿이어서 추가 제작하였다. 나는 이번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 모두에 작품 당 5점을 한계로 하였다. 다시 말해 전시된 작품은 5점 이상을 팔지 않기로 정하였다. 다음의 작품은 3점이 팔렸다.
그렇다면 에디션 넘버가 1/5와 4/5 중에 어느 작품이 더 가격이 높을까? 다시 말해 번호가 빠른 것과 늦은 것의 차이는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지 싶다. 대부분의 판화는 에디션 넘버가 가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한 판에 찍어내는 매수가 많기 때문이지 싶다. 그러나 사진은 작품 매수를 많이 하지 않는다. 작품의 희소성이 높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5점 중에 첫 번째 작품 보다 네 번째 작품이 희소성이 더 높아지게 된다. 같은 작품을 살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든다. 첫 번째 작품을 100만 원에 샀다면 두 번째 작품은 110만 원, 세 번째 것은 130만 원 정도로 구입가가 높아지게 된다. 마지막 한 점은 작가의 마음에 달렸다 하기도 한다. 더 이상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 외국의 판화작가들이 매수를 5∼10매 정도로 아주 적게 찍고 넘버링이 늦을수록 따라 가격을 올리는 추세를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사진을 찍는다고 말한다. “찍는다”는 말의 의미는 붕어빵 구워내듯 한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 같은 크기의 벽돌을 만들어낼 때도 찍어낸다 한다. 현실의 물체, 즉 피사체를 그대로 담아낸다고 하여 사진을 찍는다고 말하는지 모른다. 복사하듯 한다 하여 서양에서 출발한 사진이 한자어를 사용하는 동양에 들어오면서 사물을 그대로 베낀다고 여겨 寫眞이라고 이름 붙여지지 않았을까? 사진은 찍는 것으로 각인되었다.
과연 사진은 찍는 것일까?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화가가 붓과 물감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듯이 사진 역시 붓 대신에 카메라를 손에 들고 물감 대신에 빛을 활용하여 그리는 그림이 아닐까? 우리가 사진이라고 번역한 영어는 “Photograph”로 빛의 의미인 “Photo’와 그린다는 의미의 “Graph”의 합성어다. 빛그림이 사진인 셈이다. 판박이처럼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듯 작품을 만들어 내는 예술의 한 분야다. “Picture”라 하여 사진을 그림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광의의 그림으로 볼 수 있다.
사진을 카메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정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다. 2016년 7월 25일 서울시청 다목적 홀에서 열린 “The Senior 2016”(사단법인 은퇴연금협회, 머니투데이 방송 주최)에 초대받아 전시한 나의 사진전시회 주제를 “카메라로 그린 수채화 10선”으로 정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사진에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고 보기에 “사진은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라 부르고 나를 포토스토리텔러라고 자칭한다. 대체로 우리는 카메라와 빛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사진을 찍고 있다. 카메라 사용자의 편의를 위하여 제조사에서 손쉬운 촬영법을 장착하고 있다. 셔터만 누르면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침팬지도 사진을 찍는다. 특히 스마트폰에 카메라 기능이 장착되고 그 기능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진을 찍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사진의 대중화를 열었다. 필름을 사용할 때에는 필름 값이 만만치 않아 쉽사리 셔터를 누르지 못하였다. 디지털화한 오늘날에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찍었다 삭제하면 되기에 예전보다 사진이 양산되고 있다. 한 장 한 장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생각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셔터를 누른다.
지금은 전쟁터에서 자동기관총을 쏘아대듯이 카메라나 스마트폰의 카메라 장치의 셔터를 쉴 새 없이 눌러댄다. 오래전에 “존 시스템”이라는 노출 농도 10단계를 창안한 미국 근대 사진작가 안셀 아담스(Ansel Adams 1902~1984)가 이렇게 경고했는지 모른다.
“멋진 사진을 얻게 되리라는 기대 아래 수많은 네거티브를 만들어내며 자동기관총을 쏘아대듯이 사진을 찍어댄다면 심각한 결과가 빚어질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작품을 위해서는 찍는다(Take)는 생각을 하지 말고 항상 만든다(Make)는 생각을 해라.”
사진작가들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에 이런 대목이 자주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한 장 건졌어!” “대충 여러 장을 찍다 보니 운 좋게 작품 한 장이 찍혔지 뭐야!”라 풀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림을 그리듯 신중하지 못하게 촬영을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찍은 셈이다. 안셀 아담스의 이야기는 새겨들어야 할 금언이라 할 수 있다. 寫眞을 “빛그림”으로 이해하고 그림을 그리듯 접근한다면 사진은 달라질 것이다. 셔터를 누르기 전에 구도, 배경, 주제와 부제의 배치, 조리개의 선택, 없애야 할 부분 등을 생각한다면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지 싶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2012년 화실 모노그라프에 한 신사가 문을 두드렸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그가 한 말은 “저도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였다. 환갑의 나이에 붓이라곤 평생 제대로 잡아본 적 없던 윤성호(尹性浩·64)씨. 그에게 그림에 대한 자신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화실까지 찾아올 용기가 생겼던 이유는 바로 그림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아마 우리 세대는 다 비슷할 거예요. 먹고사는 문제가 급해 그림은 꿈도 못 꿨으니까.”
졸업 후 시작한 사업에서 그림에 대한 그의 재능은 예기치 않게 그를 도왔다.
“한복이나 침구, 혼수 등을 직접 만들고 유통하는 일까지 함께 했었죠. 꽃무늬며, 체크무늬 같은 이불에 들어가는 원단 디자인을 제가 직접 하기도 했는데, 웬만한 직원보다 솜씨가 나았죠. 덕분에 사업도 잘됐고. 나중엔 직원 등쌀에 결국 손을 놨지만, 아직도 그 부분은 자신 있어요.”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자 욕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완성도 있는 그림에 대한 욕심. 하루에 3~4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예삿일이 됐다. 그 무아지경의 시간 속에서 그가 터득한 것은 ‘심미안’이 아니라 인생이었다.
“그림에 쏟는 시간이 늘면서 성격이 많이 차분해졌어요. 예전에는 친구들과 음주가무에 많은 시간을 쏟고, 당구나 스키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죠. 그림을 하면서 술, 담배는 물론이고 친구들과도 멀어지게 됐지만 전 이게 싫지 않아요. 나이 들수록 친구와 만나야 한다는데, 아마 그건 취미가 없는 사람들 이야기일 거예요. 이제 이 나이쯤 되면 외롭게 사는 방법, 슬기롭게 외로울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할 텐데, 전 그 방법이 그림인 셈이죠.”
그림을 배운 시기도, 과정도 확연하게 차이가 나 미대생인 딸과는 화풍도 다르고 그림에 대한 의견도 엇갈린다. 그래도 확실한 건 딸아이에게는 친구들 ‘카톡방’에 작품을 소개할 수 있는 ‘그림 그리는 아빠’라는 점이다.
4년간 화실을 열심히 다니다 보니, 작품 수도 늘고 전시회 참여도 많아졌다. 그렇게 자연스레 ‘작가’ 호칭이 생겼다. 화실의 추천으로 한국전업미술가협회 회원 가입에 도전해 정식 작가가 된 것.
“부끄럽죠. 처음엔 ‘윤 작가’라는 호칭에 붕뜬 기분이었지만, 열심히 해야겠다는 책임감만 남더라고요. 그림을 다른 이에게 보여주거나 선물할 수 있다는 점은 무척 매력적입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미술에 대한 선망이 있었던 분이라면 꼭 시작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영화 같은 삶’이란 말이 가장 어울리는 예술인, 변종곤(67세). 극사실화의 대가인 변종곤은 사물(오브제)을 활용한 아상블라주와 조각의 영역을 넘나들며 독보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그를 만난 브루클린 코블 힐의 스튜디오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그의 삶과 예술이 고스란히 담긴 박물관이었다.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영화 이 인기를 끌면서 가장 뉴욕스러운 곳으로 자리매김한 코블 힐에서 울고 웃으며 변종곤의 삶과 작품 세계를 이야기했다.
그는 1978년 나이 스물아홉 최초의 민전인 제1회 동아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신예 화가로 급부상했다. 고교시절부터 신문사 후원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대학 졸업 후에는 현대미술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에콜 드 서울’의 일원으로 활동을 했던 그로서는 어쩌면 때늦은 수상이었다. 그는 “당시 유일한 미술인 등용문이었던 국전은 시대정신을 담은 작품을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아 아예 출품을 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동아미술대전은 그에게 구세주였던 동시에 파란만장한 삶의 신호탄이었다. 미군 철수 후 황폐화된 대구 앞산 비행장을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린 대상작품이 문제였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그 시절, 용납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미군이 버리고 간 혼혈아들이 거리를 방황하는 모습에 분노해 그린 작품이었다.
굶주리고 헐벗던 시절, 그의 할머니는 대문을 항상 열어 두셨다. 밤낮으로 몰려오는 거지와 한센인을 귀한 손님처럼 맞이하고 밥상을 차려냈던 할머니. 부처님과 예수님은 물론이고 달과 해와 별, 그리고 서낭당의 고목과 바위에도 두 손 모아 절을 했던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에 촉망받는 화가로 성장한 그에게 내팽개쳐진 아이들의 상황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그의 시선은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과 사물, 그리고 사회 부조리에 고정되어 버렸다.
그 당시 북한은 그의 작품을 칭송하면서 우리 정부와 미국을 비판하는 대남방송을 계속해댔다. 표현의 자유는 고사하고 장발과 미니스커트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언론 탄압에 맞서 언더우드 타자기를 초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을 비롯해 사회·정치적 이슈가 담긴 작품을 연이어 발표하자 정보기관의 압력과 사회의 불편한 시선이 쏟아졌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1981년, 배낭 하나에 1인용 전기밥솥과 화구, 그리고 작품 몇 점을 챙겨 야반도주를 하듯 예술적 망명을 했습니다. 미군은 싫었지만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그린 앤드루 와이어스와 히피문화에 끌려 미국을 택했지요.” 그는 긴박했던 상황을 회상했다. “그때는 여권 발급받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이문희 대주교께서 위험을 감수하시면서 도와주신 덕분에 가능했던 미국행이었습니다.”
미국의 삶은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그를 아꼈던 변종하 화백(전 국전 심사위원)의 도움으로 비가 새는 할렘의 다락방이었지만 숙소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때 만난 한대수(가수·사진작가) 부부는 미국생활의 안내자였다.
지하철 비용을 아끼면서 걸출한 화가들을 배출한 아트 스튜던트 리그(ASL)를 다녔다. 체류 비자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물감 사는 것도 부담되자 거리에 버려진 물건들이 작품의 소재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탄재조차 재사용했던 가난한 나라에서 온 예술인에게 깨어진 바이올린은 아름다운 인체였고 고장 난 시계의 톱니바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주인 잃은 인형에서는 못내 그리운 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오브제를 서로 결합하고 극사실적인 그림을 그려 넣은 변종곤의 아상블라주는 이때 시작됐다.
아트 스튜던트 리그의 교수와 작가들은 그의 실력과 경력을 높이 평가해 줬다. 하지만 그가 굶주리는 것을 알아채지는 못했다. 결국 영양실조와 과로로 쓰러졌다.
“의식을 되찾으니 호주머니에 작가들이 몰래 넣어 둔 수백달러가 있었어요. 호의는 고마웠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 돈을 되돌려주려 했지만 아무도 받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 돈을 테이블 위에 던져 놓고 뛰쳐나왔습니다.” 변 화백은 30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가누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후 학교에 나가지 않고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화가는 먹고살려고 고귀한 손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접어야 했던 순간이었다.
그는 “한대수 부부가 애써 생선가게에 일자리를 찾아줬지만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하는 나에게 펄떡이는 생선을 자르는 일은 지옥 그 자체였다”고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난방도 수도도 없는 싸늘한 할렘의 다락방에서 소리를 질렀다. “신이시여, 저를 얼마나 위대한 작가로 키우시려고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그림을 그렸다. 유일한 낙이었다. 밤새 그린 그림을 생선가게 벽에 걸어 놓고 보면서 현실을 잊으려 애썼다.
3개월 쯤 지난 어느 날, 가게를 찾은 한 신사가 벽에 걸린 ‘할렘가 풍경’을 보고는 가게 주인에게 누가 그린 것인지 물었다. 그의 작품인 것을 알고는 가게 주인도, 신사도 놀랐다. 그 신사는 리버데일 갤러리의 헬무트 지츠위츠 대표로 미술계의 마당발이었다. 비린내 나는 작업복을 당장 벗고 따라 오라고 했다. 그날부터 갤러리에서 일을 돕고 그림도 그리면서 망가진 몸과 생활을 추스를 수 있었다.
지츠위츠 대표는 그의 작품을 눈 높은 미술 애호가들에게 선보였다. 언더우드 타자기 그림 등 몇 작품이 거래되면서 3만달러를 손에 쥐게 됐다. 뉴욕의 웬만한 아파트를 사고도 남을 큰돈이었다. 리버데일신문은 ‘한국에서 사라진 화가, 미국에서 성공하다’라고 대서특필했다. 드디어 미국에서 새로운 별로 떠올랐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기념 재외작가 초청 전시회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던 백남준 비디오아티스트와 함께 초대됐다. 금의환향이었다. 그는 이때 인형의 몸통에 섬뜩한 소리를 내는 시계를 얼굴로 결합한 아상블라주 등 상상을 뛰어넘는 작품을 선보이면서 국내 미술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
명성이 높아지면서 든든한 후원자가 생겼고 귀족생활이 시작됐다. 최고급 백화점인 버그도프굿맨 미용실의 VIP고객이 되었고 휴가는 프랑스의 아름다운 고성(古城)에서 보냈다.
하지만 귀족생활은 시작부터 파탄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센트럴파크가 아니라 쓰레기 나뒹구는 할렘을 고집스레 그리니 후원자도 수집가도 몇 년간 참다가 결별을 선언했다. 변 화백도 라면조차 눈치가 보여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었던 생활에 동화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예견했던 지츠위츠 대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를 반겼다.
그는 괴로움과 외로움이 극에 달할 때면 여행을 하고 극사실화를 그렸다. 10여 년 전 그는 미국 서부 사막을 미친 듯 돌아다녔다. 버림받은 인디언 원주민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때의 영감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굿모닝 아메리카’이다. 흑백기념사진 같은 침울한 인디언 군상과 황금빛의 샤넬 향수병을 대비해 그린 이 작품은 미국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낸 걸작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샤넬의 회장이 스튜디오에 찾아와 값에 관계없이 사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팔지 않았다. 분신을 팔 수는 없었다.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작품은 포스코가 소장하고 있는 고 박태준(朴泰俊. 1927~2011) 명예회장의 초상화다. 인물이 화면의 왼쪽 가장자리에 그려져 박 회장의 겸손함을 저절로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철의 정밀성과 전진을 상징하는 18세기 독일 시계가 가운데 더 크게 그려진 이 작품은 초상화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은 물론 미국의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세계 주요 언론을 통해 수시로 소개되고 프랑스의 마리 로지에 감독이 제작한 그의 다큐멘터리가 MoMA(뉴욕현대미술관)에서 상영되는 등 국내보다는 미국과 프랑스에서 명성이 더 높다. 2011년 프랑스문화원과 브루클린의 인비지블 독 아트센터가 공동 주최한 ‘30주년 개인전’은 관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경찰이 교통정리에 나서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변 화백의 스튜디오에는 그의 영혼이 담긴 작품과 억대를 호가하는 귀한 책을 비롯한 수만 가지 오브제가 발 디딜 틈 없이 진열되어 있다. “이 오브제를 보면 심장이 뜁니다. 오브제는 고유한 기운이 있고 이야기도 합니다. 나 자신도 하나의 오브제이기 때문에 같은 공간에 사는 동료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독창적인 작품과 진귀한 오브제를 보다 널찍한 공간에서 세계인들이 온전히 공유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