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1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국민 앞에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는 “나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있습니다. 앞으로 나는 나의 친구, 내 가족을 몰라볼지도 모릅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인생의 황혼(黃昏)으로 가는 여행을 떠난다”는 말과 함께 10여 년간 치매와 싸우다 2004년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옆을 지켰던 부인 낸시 레이건은 치매 환자 가족의 고통을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천천히 분해되어 무너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괴로움”이라고 표현했다. 병이 깊어졌을 때 레이건 대통령은 낸시 여사를 알아보지 못했고 자신이 미국 대통령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며칠 전 필자는 초등학교 가을 체육대회에 참석했다. 열두 살 꼬맹이였던 친구들은 60대 환갑이 넘은 초로의 모습이었다. 주름진 얼굴, 서릿발 내린 흰머리 등 세월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학창 시절을 추억하고 웃고 떠들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부모님 안부로 이어졌다. 우리 나이가 육십이 넘었으니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도 많고 살아 계신다 해도 90세 전후라서 어르신들 건강이 좋지 않다. 집에서 치매로 고생하시거나 요양원에 계신 분도 꽤 있다.
자연스러운 치매 얘기에 경험담이 하나둘 터져 나왔다. 치매 환자가 있으면 가족은 비상이다.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주방에 가스레인지를 켜놓는 등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치매 치료제는 없고 지연시키는 약만 있으나 그 효능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한다. 최선책은 조기진단과 예방법 실천이다. 알려져 있는 예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햇볕을 많이 쬔다. 오메가-3 지방산과 비타민D 섭취량을 높인다. 둘째, 오메가-3가 풍부한 등 푸른 생선을 많이 먹는다. 셋째, 숫자나 퍼즐 게임, 낱말 맞히기, 산·강 이름 암기 등 두뇌를 쓰는 게임을 한다. 넷째, 당분 섭취를 줄인다. 다섯째, 잠을 7시간 이상 충분히 잔다. 여섯째, 항산화제가 풍부한 커피를 하루 3~5잔 마신다. 일곱째, 스트레스를 낮추고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는 명상을 생활화한다. 끝으로 취미, 모임 등에 자주 나가 사회활동을 한다.
이미 치매가 시작되었다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신청해 등급 판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구체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지원 내용에는 방문 간호, 주간 보호, 단기 보호, 복지 용구 지원 등이 있다. 경증 환자를 위한 주간 보호 시설도 어린이집처럼 운영된다. 중증 환자는 24시간 방문 요양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요양원 입주가 가능하다. 현재 중증 환자의 경우 본인 부담금이 20%인데 ‘치매 국가 책임제’로 정책이 전환되면서 10%만 부담하면 된다.
필자의 장모님도 등급을 받아 주간 보호센터에 다니신다. 요양원이 싫은 사람은 간병인을 구하면 되지만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된다. 요양원이라고 해서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각종 프로그램과 전문가들의 도움이 있어 집에서 갇혀 있거나 누워만 있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
치매는 본인뿐 아니라 돌보는 가족도 환자로 만드는 가족병이라 한다. 평소 예방법 등을 실천해 치매가 오지 않도록 하고, 주기적인 검진으로 치매 진행 속도를 늦추고, 치매 관련 제도를 활용해 경제적인 부담을 줄여야 한다. 또한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도 환자가 한 생애를 끝내고 황혼 여행을 잘 떠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 돌봐야 한다.
돈 걱정 없이 사는 방법은 번만큼만 쓰면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 시니어의 사회은퇴 전후의 생활은 전혀 딴판입니다. 은퇴 전에는 돈이 부족하더라도 나중에 보충해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수입은 줄고 늘리기 매우 어렵습니다. 소비지출은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생활주변에서 지나치기 쉬운 낭비를 줄여야 해답이 나옵니다.
건강관리비
누구든지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소망합니다. 건강하면 병원이나 약국을 찾을 필요가 없고 건강식품을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건강관리비를 확 줄일 수 있습니다. 건강하려면 섭생도 중요하지만 운동을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상쾌한 바람이 부는 운동하기 딱 좋은 때입니다. 산행·마라톤·수영·골프 등 체력과 취미에 맞는 운동을 하면 됩니다. 운동을 쉬지 않고 하여야 효과가 나타납니다. 마음을 다잡이야 운동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고 비가 오는지 눈이 내리는지 걱정하면 운동하러가기 싫어집니다. 아침에 창문을 열지 말아야 합니다. 비오면 우산을 들고, 눈이 쏟아지면 털모자 하나 머리에 쓰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먼동이 트면 집을 나서 아침 산책을 하면 하루가 상쾌합니다. 아침 산책길은 맑은 날도 이슬이 내려서 평지보다 미끄럽습니다. 산에서 넘어지면 대형 골절사고가 납니다. 넘어지지 않도록 안전에 주의하여야 합니다.
동호인을 즐겁게 사귀면 운동을 지속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친구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운동에 빠질 수 없습니다. 산악회에 참여하여 산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 봄과 가을에는 지방 원거리를 찾고 가끔 해외원정 산행을 하면 효과는 더욱 높아집니다. 산행이 어려우면 걷기 쉬운 둘레길을 찾고, 더 낮은 자락길을 걸어도 좋습니다. 신체조건에 맞춰 무리하지 않도록 걸으면 건강에 유익합니다. 햇볕 쪼이고 맑은 공기 마시면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으면 됩니다. 누구나 만보를 걷을 수 있습니다.
자원봉사에 동참하면 건강유지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재산기부·재능기부·노력봉사 중 자기처지에 맞는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사회에서 터득한 귀중한 체험을 후세대에 전하는 숭고한 일입니다. 참가자들과 함께 어울려서 마음의 평온을 얻고 나눔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회교육에 참여하여 새로운 배움을 익히고, 남녀노소 세대들과 어울리는 일도 건강유지에 큰 보탬이 됩니다. 자기완성을 위한 자존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차량유지비
자동차는 편리한 교통수단입니다. 하지만 차량유지비를 깊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차를 구입할 때나 유류가격이 상승할 때 잠깐 고민하다가 금방 잊고 생활합니다. 사회은퇴자는 차를 사용할 필요가 많이 줄어듭니다. 가끔 운전석에 앉으면 차운전이 낯설게 느껴지고 행동이 굼떠져 사고를 내기 쉽습니다. 차는 주차장에서 먼지만 쌓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운전을 그만 둬야하는 이유입니다. 차가 보이면 차를 사용하고 싶고 걷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집니다. 차가 눈앞에 보이지 않아야 대책이 나옵니다.
자원봉사활동과 사회교육에 참여하면서 굳이 자동차를 이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도로혼잡에 고생하지 않고 약속시간을 잘 지킬 수 있는 전철과 버스 대중교통 이용이 최선입니다. ‘건강하려면 불필요한 차를 없애자.’ 차 없애기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주위의 눈을 의식하고 차의 편리함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어서입니다. 차는 편리하게 이용하되 불필요한 경우에는 과감하게 없애야 합니다. 이를 실행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자동차를 없애면 유류비·수리비·세금·보험료 등 차량유지비가 모두 없어집니다. 새 차 구입하는 목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도로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도 없어집니다. 비가 오나 눈이 내리거나 교통사고 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온이 옵니다. 몸이 건강해지면 건강관리비도 확 줄어듭니다. 한가한 때 전철에 앉아서 책을 읽고, 버스 차창 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전철역까지 왕복 걷기를 자주 하고 운동량이 부족하면 다음 날 꼭 보충하는 습관을 기르면 더욱 좋습니다.
허망한 투자
세상에 공짜가 없는 줄 알면서도 고수익·고배당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섣불리 투자하였다가 재산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전보다 판단력이 떨어지고 체력이 쇠퇴하였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화려했던 젊은 날을 하루속히 잊어야 합니다. 자랑해서도 아니 됩니다. 후세대에 자리를 비켜주고 물러나야 합니다. 유능한 후계자를 도우면서 여유를 가져야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환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현재의 소비를 희생하면서 장기투자를 헤서도 아니 됩니다. 설령 성공하더라도 이미 자신의 관리할 수 없습니다. ‘현금만이 나의 것’ 입니다. 높은 이자를 지불하는 차입금이 있으면 빨리 정리하여야 합니다. 현금수입이 없는 부동산 담보 대출이라면 당장 큰 부담입니다. 이른바 흑자도산입니다. 부동산이 커지면 나중에 자식들의 상속분쟁만 키웁니다. 부동산·장기채권 대신 현금을 확보하여 지기의 소비를 희생하지 않아야 합니다.
후세대 관리
시니어 살림살이는 ‘현금흐름 수지균형’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현금이 부족하지 않아야 합니다. 인생 전반부는 증기기관차처럼 자신을 불태우며 앞만 보고 열심히 살면서 수입을 늘려 재산을 키웠습니다.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에 들어선 후반부는 빈손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부족해서도 아니 되지만 남길 수도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신은 알뜰하게 살았으나 자식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주위에 많습니다. 단호하게 뿌리치지 못하면 자신과 자식 모두에게 큰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이를 거절하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먹는 것보다 먹이를 구하는 훈련을 시키라’라고 흔히 말합니다. 자식들에게는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무조건 자식을 도와주는 것보다 교훈도 함께 전수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빨리 늙어가고 있는 우리나라가 ‘고령사회’로 진입했다. 지난 2000년 ‘고령화사회’로 진입한 지 불과 17년 만의 일이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주민등록인구는 약 5175만 명으로 이 중 65세 이상 어르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의 14.02%인 725만 명으로 기록됐다. UN에서는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사회’, 14% 이상은 ‘고령사회’, 20%를 넘으면 ‘초고령사회’로 구분하고 있다. 이처럼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늘어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상속 문제’다. 고도성장기 때 젊은 층은 자산을 축적할 기회가 많았다. 그런데 이들이 나이 들어가면서 유산을 가지고 친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자매끼리 벌이는 분쟁이 해마다 늘어가고 있다. 또한 자식들에게 자산을 효과적으로 이전해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깊어가고 있다.
특히 초고령 국가 일본에서는 ‘老老상속’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노인이 된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더라도 자신을 부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일본 노인들이 죽을 때까지 자산을 자식에게 증여하지 않으면서 생겨난 신조어라는 점에서 씁쓸하기만 하다. 상속 시 발생하는 큰 문제는 ‘세금 줄이기’와 ‘상속인들 간 분쟁 방지’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5070세대가 앞으로 다가올 유산 분배와 관련해 자녀분쟁을 방지하고 효과적으로 세금을 줄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자.
상속인들 분쟁 방지를 최소화하는 방법
상속권 문제
상속이나 증여 관련 문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문제로 인식하고 관심 없어 하는 경우가 많다. “가진 재산도 별로 없는데 무슨 상속, 증여?”라며 반문할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속과 증여는 평생에 한두 번 정도 발생하고, 증여의 경우는 당장 세금 문제가 생기다 보니 무관심하거나 준비 소홀로 이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이러한 준비 소홀은 가족 간의 분쟁은 물론이거니와 평생 일궈온 사업체가 없어지는 경우(가업상속) 또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재산이 분배됨으로써 분쟁 방지와 절세(節稅)의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상속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내용은 ‘상속권’ 문제다. 상속인은 누가 되고 상속재산을 얼마를 분배받을 수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나라 민법은 상속의 방법을 ‘유언상속⇒협의상속⇒법정상속’의 순서로 정하고 있다. 피상속인의 유언이 있는 경우 유언대로 상속재산을 집행하면 된다. 하지만 유언이 없는 경우라면 상속인들끼리 협의를 하게 되고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법정지분대로 상속받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유언, 협의 상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법정상속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속순위는 어떻게 될까? 배우자와 자녀(직계비속)가 1순위로 상속재산을 균등분할하되 배우자에게는 50%를 가산하게 된다. 가령 배우자와 아들, 딸을 두고 있는 홍길동씨가 10억원의 재산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고 가정하자. 남겨진 아내는 4억2000만원(10억원×1.5/3.5), 아들과 딸은 각각 2억8000만원(10억원×1/3.5)을 분배받게 된다. 다만 배우자가 없는 경우는 자녀가 동일하게(각각 5억원씩) 분배받게 된다. 2순위는 배우자와 직계존속, 3순위는 형제자매, 4순위는 4촌 이내 방계혈족으로 순위가 순차적으로 정해진다. 다만 상속순위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배우자는 1순위와 2순위 상속인이 있을 경우엔 단독이 아니라 공동 상속인이 되고, 직계비속과 존속이 없을 경우에만 단독 상속인이 된다는 점이다.
상속인의 ‘유류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유언의 자유가 존재하기 때문에 살아생전에 피상속인은 자신의 뜻에 따라 재산을 특정인에게 증여하거나 처분할 수 있다. 그럴 경우 남은 유가족은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때 유류분을 잘 챙겨야 하는데, 유류분은 상속재산 중 상속인에게 돌아가야 하는 최소한의 법정비율의 몫을 말한다.
유류분은 법정지분을 기준으로 배우자/직계비속의 경우는 1/2, 직계존속과 형제자매는 1/3이다. 그럼 간단하게 유류분을 계산해보자.
예를 들어 배우자가 없는 홍길동씨가 자신의 재산 6억원을 남기고 사망하였다고 가정해보자. 유가족으로는 아들1, 2와 딸이 있다. 그런데 홍길동은 아들1, 2에게는 각각 3억원을 남겨주고 딸은 출가외인이라며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이런 경우 유류분은 어떻게 계산하고 딸은 누구에게 유류분을 청구할 수 있을까?
① 먼저 6억원이 상속재산인 경우 아들1, 아들2, 딸의 법정상속지분은 2억원이다.
② 유류분은 법정상속지분의 1/2이기 때문에 1억원
③ 따라서 딸은 아들1, 2에게 ‘1억원×3억원/6억원=5000만원’을 각각 유류분 반환청구할 수 있다. 참고로 유류분 반환청구는 만법상 상속개시일로부터 10년 이내, 상속개시 사실 및 증여나 유증 사실을 안 때로부터 1년 안에 청구하면 된다(민법 제1117조 소멸시효).
위의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유류분 계산 방법을 제시했지만, 실제의 유류분 계산은 복잡하다. 유류분 부족액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피상속인의 재산이 상속인과 그 외의 사람에게 어떻게 분배(증여, 유증)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또한 유류분 반환청구 소송은 경우에 따라서 복잡한 재산관계가 얽히거나 부수적인 쟁점사항(세금 등)들이 많기 때문에 반드시 변호사와 세무사의 도움을 받아 충분한 검토를 거쳐야 한다.
현명하게 유언장 작성하는 방법
유언을 통해 유가족의 ‘유류분’을 고려만 한다면 피상속인의 의사대로 재산을 분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유언은 민법에서 정하고 있는 5가지 방식(유언의 방식 참조)에 의해서만 유효하기 때문에 작성 시 신중을 기해야 한다.
특히 자필증서의 경우 유언서 전문, 연월일, 주소, 성명을 자서, 날인하지 않으면 무효가 된다.
과거 사회복지사업을 했던 A씨의 경우다. 2003년 11월에 세상을 떠났고 그 후 A씨의 금고에서 자필로 작성된 유언장이 발견되었다. 유언장에는 ‘유고 시 본인 명의의 부동산 및 금전신탁, 예금 전부를 B대학에 기부한다’고 적혀 있었다. A씨의 유족들은 유언장에 날인이 없으니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B대학은 자필로 작성된 만큼 날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고인의 의사를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사례에서 120억원은 누구에게 귀속되었을까? 법원은 고인의 자필증서가 분명하지만 자필증서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유언장은 무효이고, 학교가 아닌 유족들이 상속재산 전부에 대해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이는 유언장은 엄격한 형식에 따라 작성되어야 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자필증서에서 날인의 경우는 유언자의 인감도장뿐만 아니라 막도장도 무방하지만 사인은 안 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처럼 유언의 까다로운 요건 때문에 최근에는 유언대용신탁을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유언대용신탁은 가입자가 살아 있을 때는 자산을 운용해 수익을 돌려주고, 사후에는 상속인에게 재산을 이전하는 신탁상품이다. 그리고 살아생전에 재산을 분할함으로써 상속재산의 원만한 분배로 사망 후 재산분할에 관한 분쟁을 방지하고, 미성년자나 장애를 가진 상속인의 상속재산도 보존이 가능하며, 유언서 작성 및 복잡한 법적상속 절차를 생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 폭이 점점 커지고 있다.
상속·증여세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법
2017년 국세통계 1차 공개자료에 따르면, 2016년 상속세 신고세액은 2조3000억원, 상속세 신고 건수는 6217건으로 상속인 1인당 평균 신고세액은 3억7000만원으로 나타났다. 상속세는 6개월 안에 신고하고 납부해야 하기 때문에 당장 부담스러운 금액일 수밖에 없다. 상속세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상속세 기일(6개월)을 넘기지 마라
상속이 발생하면 고인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인해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재산분할이 원활하지 않아 상속분쟁이 장기화되는 경우 상속세 납부기일을 넘기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하지만 재산분배 등이 확정되지 않더라도 신고기한 내에 상속세를 신고해야 가산세 불이익(무신고 가산세 20%)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신고기한 내에 상속세를 납부할 경우 세금의 7%를 공제해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기한(6개월)을 넘길 경우 세금을 27% 이상 더 내 낭패를 보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기한 내 미신고 시 불이익 (상속 개시월의 말일로부터 6개월 이내)
-세액공제 불가 : 6개월 내 신고 시 산출세액의 7% 공제
-미신고 가산세 : 기한 내 미신고 시 산출세액의 20% 가산세
-납부 불성실 가산세 : 고지기한 내 납부 못할 경우 매년 10.95% 가산세
결국 1년만 늦어도 추가적인 부담이 약 37.95% 늘어나는 것이다.
줄 거면 빨리 줘라
상속세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평소에 피상속인의 재산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10년 단위로 자녀, 배우자에게 증여하는 방법을 활용하기도 한다. 배우자에게는 6억원, 성인 자녀에게는 5000만원까지 증여세가 부과되지 않는다. 특히 소득이 없는 자녀에게 사전증여를 한다면 향후 자금출처를 만들어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배우자와 자녀가 있는 상태에서 피상속인이 사망하면 최소 10억원은 상속공제(배우자공제 5억원, 일괄공제 5억원)가 되기 때문에 그 이하의 금액은 상속세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세대생략 이전(移轉)’ 고려해볼 만하다
부모가 자식에게 정상적으로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할아버지나 증조부가 세대를 건너뛰어 손자나 증손자에게 재산을 증여 또는 이전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들에게 물려준 증여재산의 과세표준이 1억원이면, 증여세의 세율은 10%가 적용되어 증여세 산출세액은 1000만원이 된다. 반면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증여한 경우에는 증여세의 세율이 13%(30%가산)가 되어 산출세액은 1300만원이 되기 때문에 아버지가 증여하는 경우보다 세금이 많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증여하고, 아버지가 다시 아들에게 증여하는 경우에는 증여세 산출세액이 2000만원이 되지만, 할아버지가 직접 손자에게 증여할 때는 1300만원이 되어 총액으로 볼 때는 세대생략 이전의 경우가 세금이 더 적다. 또한 피상속인(조부모)의 사망으로 상속세를 계산해야 할 경우에도 상속인(부모)에게 증여한 재산을 상속개시일 전 10년 내에 증여한 재산 모두 포함하지만 비상속인(손주)에게 증여한 재산은 5년 내에 증여한 재산만 포함하기 때문에 상속세 계산 시에도 유리하다.
생명보험을 활용하라
강남의 부자들이 거액의 상속세 납부재원을 준비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생명(종신)보험이다. 생명보험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상속세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 폭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계약구조(표 참조)에 따라 생명보험금이 상속재산에 포함되는 경우와 포함되지 않은 경우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병원비는 고인의 계좌에서 인출하라
고인의 병원비나 공과금, 장례비용, 채무 등은 상속세 계산 시 총 상속재산에서 빼도록 돼 있다. 장례비용의 경우 증빙이 없더라도 500만원을 공제해주며, 500만원을 초과하면 증빙에 의해 지출 사실이 확인되는 경우 공제해준다. 다만 장례비용이 1000만원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1000만원까지만 공제해준다.
“국가와 사회 발전에 기여한 어르신이 건강하고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입니다.” 9월 18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치매 국가책임제 대국민 보고대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 이렇게 강조했다. 치매 환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 개인과 가족이 떠안았던 고통을 국가가 나눠지겠다고 약속했다. 이와 같은 정부의 전폭적인 관심이 치매 치료에 대한 생태계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실제로 의료계 안팎에서는 벌써 정부의 ‘동기부여’가 효과를 내고 있는 듯하다.
먼저 지난 9월 발표된 정부의 ‘치매 국가책임제 추진계획’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전국에 47곳밖에 되지 않았던 치매지원센터의 확대다. 그동안은 서울과 수도권에만 설치가 집중됐지만, 다음 달부터는 전국 252곳에 ‘치매안심센터’가 설립될 예정이다. 센터에서는 치매 환자와 가족들이 상담과 조기 검진부터 관리, 의료·요양 서비스 연계까지 통합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센터에서 받은 상담 내용은 ‘치매노인등록관리시스템’에 등록돼 환자와 가족들이 이사를 하더라도 전국 어디서든 연속적으로 관리된다. 센터 안에는 치매 환자 가족의 정서적 안정을 도울 카페와 인지·신체 활동 프로그램으로 환자의 증세가 악화되는 것을 막을 단기 쉼터도 만들어진다.
기저귀 구매비용도 지원
중증 치매로 인해 이상행동 증상이 심해 가족이나 일반 시설에서 돌보기 어려운 환자는 ‘치매안심요양병원’을 통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다. 현재 전국 34개소에서 1898병상이 치매병동으로 운영되고 있는 공립요양병원은 다음 달부터 79개 병원 3700개 병상으로 확대될 계획이다. 치매안심센터와 치매안심요양병원, 요양시설 등 치매국가책임제 실행을 위해 정부는 올해 추경에서 2023억원을 이미 집행했으며, 내년 예산안에도 3500억원을 배정한 상태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으로 인해 지난 10월부터 중증 치매 환자도 산정 특례 적용을 받게 됐다. 의료비 본인 부담률은 4대 중증질환과 같은 수준인 10%로 경감됐다. 복지부 계산에 따르면 연간 200만원의 자기부담금을 지불했던 입·내원일 수 52일 정도의 환자는 앞으로 77만원만 내면 된다.
그동안 신체기능이 양호하다는 이유로 배제됐던 경증 치매 환자도 장기요양서비스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장기요양 5등급을 확대하거나 6등급을 신설해 경증 치매 노인에게도 장기요양서비스를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또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을 위해 시설의 식재료비나 기저귀 구매비용을 장기요양보험에서 지원할 계획이다.
이외 전국 노인복지관에서 치매 예방을 위한 미술, 음악, 원예 등을 이용한 치매 예방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66세 이후 4년마다 받는 인지기능검사 주기도 2년으로 짧아진다. 치매안심마을 조성 사업과 치매 파트너즈 양성 사업도 확대된다.
한의학계, 치매 분야에 높은 관심
치매 치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의학계도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한방 치매 치료의 과학적 효과를 입증하는 데 애쓰고 있다. 최근 부산시 한의사회는 초기 치매 증상인 경도인지장애로 판정된 환자 200명을 대상으로 6개월간 한방 치료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전체 환자 중 80.5%(161명)이 인지기능개선 효과를 보였고, 환자 중 82%가 치료 재참여를 희망했다.
또 강동경희대학교 한방신경정신과는 ‘한방 치매 예방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치매 예방뿐만 아니라 노년기 생활습관 교정을 통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주는 것이 목표다. 강동경희대학교 한방신경과는 서울시와 함께 ‘어르신 한의학 건강증진사업’을 통해 한방 치매 사업도 진행 중이다.
이런 한의학계의 노력에 화답이라도 하듯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박능후 보건복지부장관은 “(치매 국가책임제에) 한의사도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치매 치료에 대한 관심 증가는 치과계도 예외는 아니다. 대한치과의사협회는 치매 구강건강정책 테스크포스팀을 통해 치매 예방과 관리를 위한 정책 제안서 제작을 결정하는 등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인공지능과 가상현실도 치매 다뤄
최신 IT 기술도 치매 진단과 치료에 나서고 있다. 류호경 한양대 아트앤테크놀로지학과 교수팀은 최근 국내 최초로 가상현실(VR)을 이용해 노화와 치매의 중간단계인 경도인지장애 여부를 판단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이 기술은 은행 ATM, 대중교통 이용 등과 같이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상황을 가상현실 속에 구현하고, 참가자의 움직임 분석을 통해 치매 증상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방식은 진단 과정에서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것이 큰 장점 중 하나로 꼽힌다. 기존 진단 방법은 설문 문항을 시험지처럼 작성하는 방식인데, 질문에 대해 반발하는 환자도 적지 않았다.
암 치료 방법을 제안하는 인공지능 ‘왓슨’과 유사한, 치매를 치료하는 인공지능의 등장도 멀지 않았다.
가천대 길병원은 뇌 질환 진료지침 정밀의료 플랫폼을 개발 중이다. 일종의 뇌 전문 인공지능 의사로 디지털 뇌 영상 빅데이터를 구축해 암 치료에만 적용됐던 개인 맞춤형 정밀의학을 뇌 질환 치료에도 실현시키겠다는 계획이다. 치매의 조기진단이나 치료에도 활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가천대 길병원은 지능형 뇌과학연구센터·뇌과학연구원·가천뇌건강센터를 설립해놓고 기술 개발에 대한 역할 분담과 협업을 하도록 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도 조선대학교 치매예측기술국책연구단 등과 함께 딥러닝 기술과 컴퓨팅 인프라, 뇌 영상 빅데이터를 활용해 뇌 영상 분석 인공지능기술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필자는 스트레스가 별로 없는 편이다. 스트레스가 생길 것 같으면 의도적으로 미리 피하기 때문이다. 만나서 스트레스를 줄 사람은 아예 피한다. 그래서 비교적 편안한 마음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한다. 금방 알 수 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화도 안 되고 머리도 무겁다고 느낀다. 그러니 신진대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자다가도 꿈자리가 좀 뒤숭숭하면 바로 깬다. 그대로 비몽사몽간에 누워있다가는 잠이 깨고 그 다음날 하루 종일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해진다. 그러나 바로 깨서 꿈이라고 정의하고 잊어버리고자 하면 금방 잊게 된다.
필자는 여기저기 사회 활동이 많은 편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 만나는 스케줄이 겹칠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런 스케줄은 다음에 또 보면 되기 때문에 하나만 집중한다. 그전에는 스케줄이 겹치면 앞 스케줄 사람들에게는 양해를 구하고 먼저 일어나서 뒷 스케줄 후반부에 참석하는 부지런을 떨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몸에 무리가 온다. 앞 스케줄 사람도 먼저 간다고 섭섭해 하고 뒷 스케줄 사람들은 자기네들끼리 이미 분위기가 무르익어 분위기 적응이 어렵다. 그래서 요즘은 선약 위주로 스케줄 우선순위를 정한다. 이런 스트레스를 안 받기 위해서 사회 활동을 많이 줄였다.
그런데 사회 활동을 줄인 대신 문화 활동이 늘었다. 음악회, 오페라 등 공연 초대를 자주 받는다. 이런 공연은 한번 지나가면 다음에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른다. 사람들과의 만남 스케줄과 다르다. 그런데, 선약이 사람 만나는 스케줄이었을 경우 공연 관람 기회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스트레스가 온다. 두고두고 공연 관람 기회를 놓친 것을 후회한다.
이럴 때 사람들과 만나는 선약을 깨고 공연을 가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모처럼 만날 약속을 했는데 공연 관람 때문에 선약을 깬다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다른 핑계를 대더라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므로 찜찜한 것이다.
묘하게 스케줄은 한꺼번에 몰린다. 요즘 같으면 미국에 이민 갔던 친구들이 줄줄이 들어온다. 이맘 때 쯤이면 치과 치료도 받으러 오고 건강검진도 받으러 온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아 미국에 비해 치료비나 검진비가 훨씬 싸기 때문이다.
가을철이라 음악회, 오페라 등 공연도 많다. 공식적으로 무료 공연도 많고 유료지만, 초대권을 보내주는 경우도 많다. 하나 같이 놓치기 아까운 것들이다. 여행 가자는 사람도 많다. 날씨 좋고 단풍까지 들어 행락 철이기 때문이다. 자기네들 스케줄 다 소화하고 나니 남는 스케줄은 주말에 몰리기 십상이다.
사회 활동을 줄이고 나니 아무 스케줄이 없는 날도 있다. 워낙 스케줄이 많을 때는 이런 날이 쉴 수 있어 좋았다. 밤늦게까지 영화도 보고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날 수 있어서였다. 그런데 아무 스케줄이 없는 날이 며칠 계속되면 그것도 스트레스가 된다. 그래서 우울증이 오는 모양이다. 너무 쉬어도 곤란하고 너무 바빠도 문제이니 어느 정도 리듬을 유지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
‘누군가를 돕는 것은 스스로를 돕는 것이다’. 취약계층, 사회적 패자들의 자활을 돕고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디자인하는 이종수(63) 한국사회투자재단 이사장 겸 임팩트금융 추진위원회 단장, 남들이 ‘문제없다’를 외칠 때 그는 ‘문제 있다’를 외치며 우리 사회의 궁벽한 문제를 드러내고 찾아낸다. 그리고 해결을 도모한다. 철거민촌 소년이 글로벌 금융인을 거쳐 사회운동가가 되기까지의 진솔한 패자부활전 이야기를 들어봤다.
별명이 소셜 디자이너입니다. 왜 그런 별명이 붙었나요.
“패자부활전을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격차와 갈등을 해소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디자인한다고 해서 언론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빈곤의 사전 예방, 차단을 위해서는 단순히 퍼주기 식의 복지 지원이 아니라 한 사회 생태계 구성이란 전향적-종합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고기를 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젠 고기 잡는 도구를 빌려주는 것까지 함께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장을 만들고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는 환경 조성까지 해야 합니다. 취약 계층 자활도 단순한 지원을 넘어 융자의 시대를 지나 이젠 사회투자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게 제 일입니다. 빈곤도 커다란 흐름 속에서 이해해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착한 금융 2.0은 복지 측면에서 개인 대상 직접 자금 지원이었다. 3.0은 사업 지원, 사업 아이디어 사전 자문과 사후 사업 멘토링까지 종합관리 시스템으로 패키지 지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4.0은 투자 생태계 마련, 즉 사회투자 방식으로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기업과 프로젝트를 발굴해 투자하고 이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다. 개인도 종합검진을 미리 하면 중병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이처럼 사회 빈곤, 취약 계층 발생도 사후 대책을 넘어 문제 요인을 사전에 진단, 예방하는 사회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취지다. 이 이사장은 사회투자금융 활동의 선구자로서 늘 앞장서 각 단계마다 진화를 주도해왔다.
사회투자라는 용어가 아직은 낯선데요. 사회와 투자라는 용어가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만.
“사회 문제가 점점 많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합니다. 그러나 그 예산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문제는 너무 복잡해 주는 복지 방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많습니다. 많은 사회 문제가 경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해결 방식도 전통적인 복지에 금융경영 등과 같이 시장적인 방법을 융합해 해결해야 합니다. 사회투자는 재원의 선순환을 이루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주는 복지를 넘어 구조와 예방의 사회 인프라를 깔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사회간접자본과 같습니다. 다리, 항만 부두 등을 건설하는 데는 당장 비용이 발생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사회 발전의 근간을 마련하지 않습니까?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취약 계층을 지원하는 대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패자부활을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이고 예방적인 차원에서 지속가능하게 문제를 풀어가는 사업에도 투자하는 등 다층적 접근을 해야 합니다.”
사회금융기관은 일반 은행과 어떤 점이 다른가요?
“일반 은행이 돈을 빌려줄 때 수익과 담보를 본다면 사회투자를 지원하는 사회 금융기관들은 그 기업과 프로젝트가 어떤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가, 그리고 그것을 추진하는 사람과 기업의 철학을 본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재무적 수치나 성과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즉 장애인, 노숙자, 저출산, 고령화, 청년 일자리, 주거 문제, 환경 문제, 자살률 등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가를 우선적으로 판단해 투융자를 결정합니다. 돈의 회수 가능성을 본다는 점은 같지요. 공익적 개념이더라도 지속가능하게 사업을 진행하려면 재원의 선순환이 필수이니까요.”
은퇴자들과 매칭 포인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설립한 사회연대은행에서는 시니어브리지라는 프로그램을 수년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은퇴하였거나 은퇴를 앞둔 시니어들이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교육하고 논의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벌써 400명 이상의 시니어들이 교육을 받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전문성을 갖고 사회적 기업에 컨설팅을 하는 등 다양한 경로로 봉사가 가능합니다. 일정 교육을 받고 커뮤니티를 구성,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인생에는 두 가지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돈을 벌어 재무적 성과를 내는 재무적 가치, 사회적 의미를 두고 봉사하는 사회적 가치. 이 중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 가치에 점점 더 무게중심을 두게 되더군요.”
당면한 사회 문제 중 심각한 게 양극화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끝났다고들 말합니다.
“부모의 가난이 새로운 연좌제가 되고 있는 것이죠. 요즘은 개천의 용을 보기가 힘듭니다. 개천에선 욕만 나오는 세태이지요. 싹수 있는 지렁이들의 신분상승 희망조차 개천 바닥 아래로 봉인돼버린 것입니다. 어느 나라이든 명문대 인재들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존재해요. 영국의 이튼스쿨 출신, 미국의 아이비리그 출신 등. 우리 사회의 문제는 갈등과 적대감이지요. 리더들이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제도 개선 등 따뜻한 개천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이사장은 “실업, 저출산, 주거난, 장애인 문제 등이 곪아 터지면 결국 빈곤의 문제로 수렴된다. 이들이 벼랑에서 떨어져 사회적 비용이 더 크게 발생하기 전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이라는 책에서 “가난이 자존심에 미치는 영향은 공동체가 가난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며 “경제적 능력주의 사고는 가난한 사람을 불운한 게 아니라 실패자로 묘사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체제에선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고, 자선-복지-재분배-동정의 필요성은 갈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과연 빈곤을 그들만의 인과응보에 의한 책임으로 볼 것인가.
한 부모가 아이를 서울역으로 데려가 노숙자를 가리키며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산교육(?)을 했다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으로 다뤄진 적도 있지요.
“가난의 책임을 개인에게 물을 수만은 없습니다. 현대사회는 복잡해서 여러 가지 사회적인 상황이 개인을 빈곤으로 몰아넣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국민총생산이 성장하는 것만으로는 그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국민총생산이 늘어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소외되고 낙오되는 사람들을 보듬고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장입니다. 이를 위해선 공동체 정신, 커뮤니티 정신이 기본적으로 중요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온통 효율만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자본주의가 실현돼야 합니다.”
개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이사장님도 흙수저 출신의 개천룡이십니다. 어떻게 글로벌 금융인이 되셨는지요?
“사당동 달동네의 철거민촌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서강대 경영학과)에 들어갔어요. 민주화운동을 하다 민청학련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게 됐습니다. 이게 빨간 줄이 돼 국내 일반 직장에 취업이 안 되는 겁니다. 신원조회를 하지 않는 외국계 기업 직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친구가 권해줘서 우연히 응시한 미국 은행 체이스맨해튼은행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참, 인생이란 알 수 없더군요.”
민청학련 경력(?)이 인생의 장애물이자, 도약대, 두 가지 역할을 했군요.
“20대 때 세상의 불공평,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질풍노도 같았어요. 독재 정권에 대한 불만이기도 하고, 제 가난에 대한 불만이기도 하고, 화가 꾹꾹 쌓여 폭발 직전이었지요. 처음엔 독방에 수감됐는데 매일 고함을 치고 벽을 쳤어요. 3개월 후 잡범들과 합방을 하면서 비로소 제 마음속 억눌린 화가 풀리더군요.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가난이라고 불만을 가졌던 게 사치였던 겁니다. 비교도 안 되게 별별 힘든 사연이 다 있더군요. 그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자’는 생각을 했지요. 책으로 배운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그 결심으로 대학생활 내내 구로동 공단에서 야학을 열심히 했어요.”
그 후에도 초심을 잘 유지하셨나요. 젊은 시절의 결심은 계속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요.
“하하. 웬걸요. 몇 번의 초심 재생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레드카펫 깔린 외국 직장에서 고연봉의 좋은 대우 받고,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7명이나 딸린 해외생활을 하면서 ‘그때 그 마음’이 바래버렸어요. 꿈은 이루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힘들어요. 내 삶은 우연찮게 사건이 ‘사연’을 상기하게 만들어요.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돌아보게 되었지요. 1996년 캄보디아에서 은행을 설립할 때인데요. 가난을 한탄할 틈마저 주지 않는 매정한 세상에 지친 서민들의 우울한 눈동자를 봤어요. 까맣게 잊고 있던, 감옥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과 예전 결심이 떠오른 겁니다. 내 삶을 돌아보게 됐고 사표를 냈지요.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이라고 하지만, 가슴에서 발까지의 결심이 더 힘들더군요. 이후 캄보디아 농촌 빈민을 위한 자활 프로젝트, 인도네시아 농촌 빈민 직업 훈련 프로젝트 등 ‘가슴이 시키는 일’에 연달아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캄보디아 내전 등 내부 문제 때문에 아쉽게도 끝까지 추진하지 못하고 접어야 했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에겐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이때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에 영감을 받아 귀국해 사회연대은행을 설립하게 된다. 당시 국내에선 개념조차 없는 때라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한국형 사회연대은행을 기초부터 공부해가며 시작해 실행까지 도맡아서 했다.
세계 최대 보험중개사인 에이온코리아 사장으로 계시다 비정부 시민사회 단체인 사회연대은행 대표로 옮기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10년간 양다리 기간이 있었습니다. 두 곳이 인근 건물이어서 상호 양해 하에 두 곳의 장(長) 역할을 왔다 갔다 병행했지요. 그러다 사회연대은행 운영이 어려워져 직원 급여도 못 주는 상황에 직면했어요. 3개월 월급 못 줄 땐 가시방석이었어요. 웬만한 직장에서 그랬다면 야단이 났을 텐데, 마이너스통장 쓰면서도 견디는 모습을 보며, 나 혼자 편하게 지내도 되나 갈등이 생기고, 인간적으로 모순 상황을 못 견디겠더라고요. 고민 끝에 에이온에 사표를 냈고 마음이 가는 바를 좇고 나니 편해지더군요. 온전한 헌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진정한 이익과 불이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니 결정이 오히려 쉬웠습니다. 버는 거야 옛날과 비교할 수 없게 줄었지만요. 막상 살아보니 상상했던 것보다는 불편하지 않아요. 밥값 내던 시절은 잊고 빈대가 되고, 기사 딸린 승용차를 타는 대신 대중교통 이용하고…. 많이 벌면 많이 쓰고, 조금 벌면 조금 쓰게 되는 게 사람 사는 이치더군요(웃음).”
사표를 쓴 당일에 스페인 산티아고로 직행, 혼자 도보순례를 하셨다면서요.
“모양만 좋은 ‘데코레이션 나’가 아닌 진짜 ‘내 안의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만나기 힘든 게 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살면서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나이기도 하고요. 자신만이 답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 사람들 눈에 보이는 나는 내 참모습과 일치하는가.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보는 시간이었어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 지지 말자고 결심했지요.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 하는 매일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니 이사장님의 삶 자체가 끊임없는 패자부활전, 초심 회복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 그런가요. 격렬한 희망과 내려놓기, 그것이 제 나름의 인생 지혜입니다. 격렬한 희망이란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긍정적 기회로 볼 수 있는 것, 그것이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하나하나 보면 실패였지만 돌아보니 그게 저수지가 됐어요. 감옥에 들어간 일이나, 젊은 시절의 방황이나 해외 돌아다니면서 은행을 설립한 일이나…. 또 하나는 내려놓기입니다. 돈뿐 아니라 일에 대한 욕심도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따라오더군요.”
이 이사장은 인터뷰 중 일어나더니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을 펼쳐 한 대목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읽어주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출발이다. 과거를 지움으로써 현재를, 지금을 버림으로써 미래를 들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다른 것을 쥘 수 없는 것처럼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다. 내려놓음은 익숙함에 찍는 단정한 마침표다. 나를 타성, 관성, 습성에 젖게 했던 세상의 기준과도 이별이다.
그는 자신이 지은 집에서 80대 노부모를 모시고 산다. 소셜 디자이너란 별칭처럼 ‘남이 디자인해준 집’에서 사는 것은 재미없기 때문이란다. 아버님(86)은 시력을 상실하시고, 어머님(85)은 치매이시지만 그는 이 역시도 문제로 보지 않는다. ‘노인의 문제는 곧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인 병환, 공양 문제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풀 것인가, 노인들이 어떻게 존엄한 삶을 살게 할 것인가, 양질의 서비스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기회로 받아들인단다. 타고난 소셜 디자이너 이종수 이사장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자녀 결혼식에 신경을 써야 할 일 중 하나가 주례이지 싶다. 주례를 모시기가 녹록지 않아서다. 그래서 필자는 결혼 주례 부탁을 받으면 특별한 일이 겹치지 않으면 들어주는 편이다. 40대 중반부터 주례를 해왔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점도 한몫을 한다. 보람 있는 일이고 베푸는 일이라 여긴다. 주례는 대체로 신랑의 은사나 혼주의 지인 중에서 덕망이 있는 분을 모시게 된다.
그런데 큰아들이 결혼할 때 은퇴 후 일거리로 주례하는 직업 주례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주례를 맡아주기로 했던 지인이 결혼식 전날 갑작스럽게 해외 출장을 가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져 본인의 의사와 달리 주례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당사자의 연락을 받고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난감했다. 다른 주례를 찾았으나 날짜가 촉박해 쉽지 않았다. 주례가 식장으로 오는 도중 변고가 생겨 하객이 대타로 나서는 경우를 보기도 했다. 주례 경험이 있는 필자가 직접 하라는 의견도 있었고 주례 없는 결혼식을 진행할 생각도 해보았으나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과 상의 끝에 직업 결혼 주례를 세우기로 했다. 당시 은퇴 후 용돈벌이를 겸해 소일거리로 주례로 나서는 분들이 결혼식장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필자도 주례를 구하기 힘든 젊은이를 위해 은퇴 후 봉사 차원으로 한 예식장에서 주례를 여러 번 선 경험이 있다. 예식장 담당자와 상담해 직업 주례를 선택해 진행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주례의 필요성에 의문점을 많이 갖기도 하던 시대였고 주례가 없는 결혼식에 젊은이들이 관심을 두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마냥 늘어지는 주례사로 축하 분위기를 다소 감소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다. 그뿐만 아니라 귀한 주례 선생을 모셨을 경우 이에 따른 인사치레 등 번거로움이 있기도 했다. 필자는 1996년 부산광역시에서 손해보험사 본부장으로 근무할 때 직원 결혼 주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꽤 많이 했다. 모두 잘 살고 있어 보람도 느낀다. 신입사원 시절엔 직장 동료의 결혼식 사회를 도맡다시피 했고 주례를 처음으로 하는 분의 주례사를 대필하기도 했다. 뛰어난 재능은 갖지 못했으나 초등학교 때부터 해왔던 웅변이 뒷받침을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결혼 주례 부탁을 받아들이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새로운 부부 인연을 맺고 한 가정을 시작하는 신랑 신부에게 귀감이 되어야 하기에 자신의 결혼생활이 문제가 없어야 하고 결혼식 분위기를 잘 이끌어가는 말솜씨도 필요해서다. 필자 부부는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살기에 주례를 해도 부끄럽지 않은 마음이다.
애초에 주례를 맡기로 했던 그분은 출장 간 일이 잘되어 더 좋은 일을 맡게 되었다. 대타로 모신 직업 주례의 집전으로 결혼식을 치른 아들 내외도 큰 탈 없이 잘 살고 있다. 세월이 흘러 손자가 둘이나 태어났고 큰손자가 내년에 초등학교 입학을 한다. 존경하고 덕망이 있는 그분을 아들 결혼 주례로 모시지 못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삶에는 나름으로 정해진 인연이 있듯 아들 녀석의 결혼 주례 인연은 아니었음을 세월 속에서 깨닫기도 했다. 황혼을 바라보는 그분과의 인연은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그때 주례를 하지 못한 일이 더 가까운 인연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세상일은 인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있음을 실감했다. 그동안 밝히지 않았던 아들 결혼에 얽힌 뒷이야기를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나이를 산다.
㈜글로벌금융판매는 지난 12일, 구로구청 생활복지국장실에서 ‘사랑의 백미 전달식’을 갖고 저소득 구민을 지원하기 위해 백미 4200kg(10kg/420포)을 기탁했다.
기탁받은 백미는 구로희망푸드마켓 및 15개 주민센터를 통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에게 배분될 예정이다.
㈜글로벌금융판매 공동대표(최의식, 한재균, 김민규)는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구로구청과 함께 실천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전했다.
글로벌금융판매는 생명보험, 손해보험, 자동차보험, 연금보험 등을 판매관리하는 기업으로 2015년부터 기부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얼마 전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봄에 받은 생애전환기건강진단결과에 대한 상담이었다.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였다.”면서 경계선을 넘나든 두어 가지 건강지표를 지적하였다. 보관하고 있는 지난 몇 년 동안의
국가건강검진결과를 살폈다. 세월이 흘러도 보험공단의 건강목표가 변동되지 않았음을 발견하였다.
학계에서는 건강목표의 개선을 위한 논의가 활발하다. ‘우리의 실정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오래 되었다. 사회에서는 지표기준을 병원ㆍ의사마다 다르게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관심이 많은 체질량지수를 비롯하여 혈압ㆍ당뇨ㆍ고지혈증 대사증후군도 건강목표가 변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날씬했던 몸매는 나이가 들면서 풍만해진다. 장년을 지나 노년기에 들면 다시 야위어 간다. ‘만물이 생성ㆍ소멸하는 우주의 이치’다.
힘은 사그라지고 키도 점점 줄어든다. 몸도 가벼워지지만 그 속도가 키의 그것을 따르지 못할 뿐이다. 몸 상태는 나빠지지 않았는데도 결과적으로 체질량지수는 수치상으로는 조금씩 오른 상태다. 국민은 자신의 건강을 지나치게 걱정하게 되는 지점이다. 국가검진을 신뢰하기 위하여 나이에 따라 건강지표를 바꿔야 하는 이유다.
나이가 들면서 누구나 건강 걱정이 앞선다. 날마다 체중계에 오르고 피를 뽑아서 당뇨 체크를 하고 혈압을 잰다. 이제는 심근경색, 뇌졸중 등 돌연사도 혈압과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는 연구결과를 접한다.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고정관념은 무너지고 있다. 국가적 차원 연구개발로 돌연사 원인을 찾아야 한다. 변화하는 세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야 한다.
최근에는 위암환자에게 한두 잔의 막걸리가 좋다는 소식도 들었다. 암환자에게 금기시 되었던 음주문제다. 필자가 대장암 확진을 받았을 때다. “친구들과 모임에서 술 한 잔도 못한다면 너무 삭막할 것 같다‘고 의사에 말했었다. ”적당한 음주는 괜찮다.“는 답변을 들었다.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막걸리 한사발로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얼마 전 암학교 5년을 졸업하였다.
국가검진에서 흡연과 음주는 공공의 감시대상이다. 필자는 20년 전에 금연에 성공하였다. 그후로 담배를 한 개비도 피우지 않지만 지금까지도 과거흡연을 문제로 지적한고 있다. 금연하고 몇 년을 지나야 하는가. 음주를 보자. 알콜 분해 능력에 따라 개인별 음주량 차이가 많다. 맥주 한모금도 못하는 사람이 있고 상당량을 들이켜도 까딱없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평가기준은 같다.
보험공단은 국민건강을 관리하면서 데이터도 많이 축적하였다. 건강지표를 나이에 따라 20ㆍ50ㆍ60대 등 세대별로 세분화하거나 소년ㆍ청년ㆍ장년으로 구분하여 설정할 필요가 있다. 자기 몸에 맞는 목표가 필요하다. 보험공단이 정한 획일적인 목표가 아닌 적어도 나이별 건강지표가 마련되어야 한다. 우리국민은 그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 최고수준의 국민건강복지에 감사한다. 대한국민의 긍지를 갖는 대목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건강지표 나이에 맞게 바꾸라’고 촉구하면 지나칠까.
“안식년인데 안식을 못하고 있어요. 일이 많아서(웃음).”
주빌리은행장이자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인 유종일(柳鍾一·59) 교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근황을 얘기했다. 그러나 그 인간미 넘치는 모습은 한국사의 거친 부침 속에서 단련된 표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경제민주화 개념을 적극적으로 현실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오피니언 리더로서 지금의 시대정신에 누구보다도 가까이 닿아 있는 인물이다. 자존감 높은 유 교수의 상식적인 세상에서의 깨달음을 들여다봤다.
“학교 다닐 때 굉장히 많이 맞았어요. 덤볐으니까.”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반골이다. 그것도 철저하게 확신에 찬 합리적 반골이다.
“천성적으로 정의감이 과도했죠(웃음).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공부를 잘해서 특권층에 속했거든. 그러나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노골적인 차별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어요. 공부 못하고 가난한 학생은 사람 취급을 못 받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선생님들과 많이 싸웠지.”
아직 유교사상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던 시절, 스승의 그림자를 밟는 것도 안 되었던 세상에서 그는 스승과 대거리를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단 한 사람의 멘토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오만이라기보다는 삶의 흐름 속에서 체득한 겸손에 가까운 의미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배울 게 있습니다. 다만 내가 어리석고 오만해서 잘 배우지 못할 뿐이죠.”
천성적으로 정의감이 넘쳤던 사람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 중 중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있다.
“굉장히 정의로운 분이었어요. 칼같이 단정하게 하고 다녔죠. 얼핏 내비치는 걸 보면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심도 있었고. 그리고 아주 무섭기로 소문났었습니다. 굉장히 엄격해서 누가 촌지라도 건네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셨죠.”
그가 중학교 2학년 때는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학교에서 갑자기 ‘10월 유신’이라고 써진 리본을 가슴에 달고 오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당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재야인사들의 강연을 듣고 다녔던 유 교수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 지시를 무시했다. 그랬더니 담임선생님은 그를 매우 심하게 체벌했다. 아마 시대에 대한 분노를 다소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한 게 아닐까, 그는 담임선생님의 마음을 그렇게 짐작한다. 그 짐작을 증명해주듯, 담임선생님은 이후에 그에게 함석헌이 쓴 를 선물했다. 운동권의 필독서였던 이 책과 함께 유 교수는 차차 유신시대의 금서들과 접하게 된다.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던 책은 리영희의 와 황석영의 였어요. 그리고 을 정기적으로 구독했죠.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했는데, 이런 책들을 접하다 보니 이 사회의 모순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이과 공부를 한다는 게 사치처럼 느껴졌죠.”
그는 학교에서는 이과 공부를 하고 대학 시험은 문과로 봤다. 학원도 다니지 않고 과외도 받지 않고 서울대학교 사회 계열에 입학한 그는 2학년 때 경제학과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담당하는 형사가 따로 있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라는, 한국 사회에서 최고의 경제 엘리트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유종일 교수는 기득권에 안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의 대학 생활은 학생운동과 수사기관을 들락거리는 일상으로 채워지게 된다.
“제일교회에서 전태일 열사의 남동생과 청계피복노조 노동자들과 함께 단식농성을 했고, 서울대 사회학과 심포지엄 사건으로 경찰서에 잡혀간 적도 있었고. 긴급조치 9호 위반 마지막 사건의 주동자로 구속된 적도 있었죠. 나를 담당하는 형사가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
이때 그가 잊지 못하는 또 한 명의 인물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등장한다. 유종일처럼 철저한 운동권 학생의 지도교수는 당국의 감시와 압박을 받았으므로 현실적으로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새내기 교수였던 정 전 총리는 선배 교수들에게 골치 아픈 관리 대상으로 낙인찍힌 유 교수를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 전 총리는 유 교수를 타박하지 않았다.
“정운찬 선생님께서 제게 ‘네가 말하는 것에 백 퍼센트 동의한다’고 말씀하셨죠. ‘학교에서 뭐라고 하건 지도교수로서 널 통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도 하셨고요. 그러나 대신 한 가지만 자신의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바로 학점관리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언제 도움이 될지 모르니 시험 때 한 이틀만이라도 신경을 쓰라는 게 정 전 총리의 주문이었다. 유 교수는 그렇게까지 자신을 배려해주는데 그 조언을 안 따를 수가 없었다. 비록 강의실에는 개강할 때 한 번, 종강할 때 한 번 들어가는 수준이었지만 시험 때가 되면 점수를 받기 위해 신경 써서 준비를 하곤 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 전 총리의 혜안은 유 교수가 하버드대학을 가게 되는 발판이 됐다.
운동권 문제아, 하버드대학 장학생 되다
‘민주화운동’ 때문에 제적을 두 번이나 당하고 군대도 다녀오느라 나이가 훌쩍 들어버린 그는 좀 더 깊이 있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날 지도교수였던 정운찬 전 총리에게 자문을 했다. 그러자 정 전 총리는 하버드대학을 가라고 권유했다. 하버드대학은 학풍이 자유로우니 유 교수의 기질과 잘 맞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토플과 GRE가 뭔지도 몰랐던 유 교수는 이 무모한 도전에 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도전에 성공하면서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박사과정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장학생은 내가 공부를 잘해서 된 게 아니고 ‘니드 블라인드 정책(Need-blind policy)’이라는 하버드대학 입학사정 정책 덕분에 가능했던 겁니다. 이 정책은 우리도 본받아야 할 정책인데, 입학사정을 할 때 학생의 경제적 여건은 일절 고려하지 않고 능력과 잠재력만 보고 뽑은 후에, 경제적으로 지원이 필요하면 장학금을 주고 필요가 없으면 안 주는 것입니다.”
물론 하버드대학에 들어가서도 반골 기질은 전혀 죽지 않았다. 그는 보스턴의 한인 민주화운동 단체와 접촉해 일원으로 활동했고 하버드대학을 떠나기 전에는 학교 안에서 ‘광주항쟁 10주년 기념행사’를 기획해 치르기도 했다. 이후 미국 노트르담대학 조교수가 되어 미국 사회에서 교수로서 살아가게 된다.
용기와 신념 그리고 확고한 가치관
미국 사회에서 경제학 교수라는 직함을 갖고 주류사회의 일원으로서 평온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교수로서의 삶이 안온한 자신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들이 소수인종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받을 차별이 걱정돼서였다.
하버드대학 경제학 박사인 유 교수를 찾는 러브콜은 많았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수석 제의를 받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던 시기에는 경제 공약을 총괄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때 신자유주의 정책을 반대하고 재벌 개혁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만족할 만한 액션이 취해지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때는 한미 FTA를 반대했으며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화되자 반발하며 정부와 각을 세웠다. 이 완고한 경제학 교수는 냉혹한 정치세계의 격랑 속에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해야 했다.
“지금도 그러고 살잖아요(웃음). 옛날보다야 너그러워졌지만, 천성이 그렇기 때문에.”
확실히 과거보다야 너그러워졌다. 그가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스님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2004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고 여러 가지로 실망했던 때였어요. 그때 안식년을 받아 북경대학에서 강의하고 가을 학기는 미국에서 강의하게 되었죠. 그런데 미국을 가야 하는데 담배가 안 끊어지는 거예요. 미국 가서 처마 밑에서 담배 필 일을 생각하니 한심하더군요. 그런데 우연히 어떤 스님을 만나면 백 퍼센트 담배를 끊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겁니다. 산속 암자에서 혼자 수행하는 스님이었는데 수소문해서 만날 수 있었죠.”
폐부를 찌른 한마디, 인생을 바꾸다
스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앉자마자 스님은 유종일 교수에게 “인생에서 원하는 게 뭡니까?”라고 물었다. 아무리 유 교수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눌리고 싶지 않았던 유 교수는 “스님, 초면에 질문을 세게 하십니다” 하며 잠시 여백을 두고 싶었다. 그러나 스님은 그를 쳐다보면서 “시시껄렁한 얘기 말고 진짜 원하는 걸 말하라”며 강압적으로 물어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도망갈 수 없더라고. 꾸밀 수도 없고. 그래서 대답했죠.”
“세상 한 번 뒤집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 교수는 자신의 행동을 직설적인 답변으로 응수했다. 그러자 스님이 말했다.
“인생을 왜 그리 어리석게 사십니까.”
유 교수는 그 말이 이해가 안 되어 무슨 의미냐고 물어봤다.
“인생은 진지하게 살아야 하는데 당신은 치열하게 산다. 개혁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지 머리 갖다 박고 깨지면 되느냐.”
유 교수는 스님의 말이 자신의 폐부를 찔렀다고 말했다. 그런 문답이 오간 후 스님은 기 치료를 해줬고 유 교수는 그 후 담배를 완전히 끊게 됐다. 희한한 일의 연속이었다.
“가장 놀랐던 것은 하룻밤을 새고 그다음 날 아침에 밥을 해먹자고 한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그 전날 점심에 식사를 하고 오후 세 시쯤에 물 한 모금 마신 이후로는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그런데 스님이 그 말을 할 때까지 전혀 공복을 못 느꼈습니다. 신기한 만남이었죠. 그 스님은 티베트로 가셨다고 소식만 들었습니다.”
신우암은 몸을 존중하라는 시그널
“스님이 해준 말씀 중 ‘숨을 들이마실 때 지혜를 생각하고 내쉴 때 자비를 생각하라. 들어오는 모든 것은 지혜, 나가는 것은 자비여야 한다’는 말은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실천하고 있습니다. 워낙에 제가 지혜롭지 못하고 자비롭지 못한 사람이라(웃음). 스님이 제 지난 삶을 알아본 거죠. 그렇다고 지난 삶이 가치 없다고 여기진 않습니다. 제가 중심을 잡도록 만들어준 말이죠.”
변화가 시작됐다. 과거처럼 ‘이건 아니야’ 싶으면 무조건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가려가면서 싸워야 함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좋은 쪽으로만 오지 않고 나쁜 쪽으로도 왔다. 낙천주의자이자 긍정의 화신과도 같았던 그가 신우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암에 안 걸린다 여기고 살았죠. 속에 쌓아놓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CT 촬영을 하고 나서 예후가 좋지 않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신우암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내용을 찾아보니까 곧 죽겠더라고.”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멋있게 맞이하자’
2015년 1월 신우암 판정을 받았을 때 유종일 교수가 한 생각은 ‘사람은 어차피 다 죽는다. 나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훨씬 일찍 죽음이 찾아온 건데 여기서 당당하게 멋있게 죽음을 맞이해야겠다. 두려워하거나 너무 억울해 하거나 소심한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겠다’였다.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더라고요.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나름대로 이 정도면 잘살았다, 잘 정리하고 가면 되겠다 싶었죠.”
죽음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었던 유 교수의 그런 기질이 운명을 바꾼 걸까? 수술 후 회복하는 중 삶을 돌아보고 죽음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됐다. 삶의 질이 아닌 죽음의 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가 수술하고 처음으로 한 일은 유서와 장기기증,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의 서약이었다. 죽음 앞에 바짝 다가갔던 경험은 그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는 2년 반이 지난 지금 건강은 회복했지만 그때 얻은 깨달음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이 기회에 정책 제안을 하나 할게요.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에게 건강보험료를 할인해야 한다고 봐요. 이는 의료비 절약에 굉장히 도움이 될 겁니다. 환자에게는 무의미한 연명이고, 그렇다고 주변 사람이 치료를 끊으라고 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죠. 그래서 본인이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스스로 미리 해놔야 하는데, 사실 닥치기 전에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런데 보험료를 깎아준다고 하면 많은 관심이 생기겠죠. 사전의료의향서는 환자에게도 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얻은 삶의 평온
삶의 수라장을 거쳐 암 투병을 겪고도 여전히 일복 많은 유종일 교수에게선 긴 사이클을 거치고 나온 사람 특유의 편안함이 있었다.
“원로학자들 중에서 김경동 선생님 등은 연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여전히 건강하시죠. ‘어떻게 그렇게 유지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드리니 ‘욕심을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대답들을 하셨어요. 젊었을 때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 못했죠. 이제 좀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불교의 가르침 중 핵심적인 것이기도 하고요.”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과거에 비해 편안해진 것은 내려놓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유 교수의 얼굴은 굉장히 밝았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말은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 해도 과도하게 집착하면 굴레가 됩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감수성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기자도 유종일이라는 ‘자존감 강한’ 남자가 좋아졌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사과할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오피니언 리더가 절실한 시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