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모인 지는 딱 1년. 봄바람 불던 2017년 3월 어느 날. SNS로 ‘외롭다, 외롭다’를 외치다 처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였다. 1년도 안 돼 기막힌(?) 사고를 쳤다. 또 어떤 일을 벌여볼까 머리를 맞대기 위해 매달 얼굴을 마주한다. 아! 그 이름도 곱디곱다. 이름하야 ‘미미클럽’! 이름 때문에 예쁜 언니 모임인 줄 알았더니 중년 신사의 웃음소리
1960~70년대 신민요의 기수로 불리며 가요계의 정상에서 활동했던 가수가 있다.
바로 김부자(金富子·70)다. 그 시절은 어느덧 이미 반세기 전의 얘기이지만, ‘달타령’을 비롯한 그녀의 대표곡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고 있다. 이번에 만난 김부자는 과거에 묻힌 가수가 아니라 현재를 개척하는 가수로서의 모습이
지하철을 탔다. 별로 붐비지는 않았지만, 슬쩍 둘러보니 빈자리는 없다.
필자는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을 탔을 때 빈자리에 그리 연연해 하는 편은 아니다.
바로 필자 앞에 빈자리가 생기지 않는 한 서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가 나도 그쪽으로 가지 않는다. 안 우아해 보일 것 같아서다. 이번에도 빈자리가 없으니 서서 갈 요량을 하고 손잡이를 잡
새봄잔치는 시작됐다. 일흔 잔치다. 69세로 10년을 그냥 살고 싶다. 돌이켜보니 10년 전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학생시절에 읽은 어느 여류작가의 ‘29세 10년’이라는 글귀가 실감나게 다가왔다. ‘25세부터 노숙미를 자랑하려고 29세 행세하였으나, 막상 그 때가 되니 불효하는 노처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부터는 나이가 겁나서 35세까지 29세
백년 안짝에 이 세상을 지나가는 덧없는 나그네. 그게 인생길. 이제 남은 생을 들판에서 일하며 만족을 구가하리라, 하득용(52) 씨는 그런 생각으로 산골에 입문했다. 산촌 노장들이 보기엔 짠했던 모양이다. “멀쩡하게 서울에서 그냥 살지 어쩌자고 내려와 생고생이오?” 오나가나 듣는 소리가 늘 그 소리였단다. 그러나 하 씨의 귀엔 맺히는 게 없는 관전평에 불과
‘영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37년의 삶 동안 극한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며 끝내 자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879점의 그림을 남겼다. 그런 고흐의 영원한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는 궁핍하지만 숭고한 예술혼을 지닌 형에게 금전적,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흐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동생에
춤꾼에게는 몸이 최고의 의상이라 말하는 손관중(孫官中·58) 교수. 10여 년 전 언더 하나만 걸치고 무대 위에 섰던 무용수는 이순(耳順)이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군살 하나 없다. 자기관리의 혹독함이 미루어 짐작됐다. 남자가 무용을 한다면 다들 괴이하게 바라보던 시절, 그는 운명처럼 춤에 이끌렸다. 그리고 무용학과 교수가 됐다. 남자 무용수로는 국내 최초
지난 가을에 도시여행 해설가과정 교육을 받았는데, 그 교육에서 필자가 우리 조를 대표해서 해설을 맡게 되었다. 평소에 성북동에 대해,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터라, 성북동을 해설하기로 정하고 답사를 갔다.
평소에 아담하고 아름답다고 입소문난 길상사엘 갔다. 경내를 둘러보다가 ‘길상화 보살’의 사당과 공덕비 앞에서 그만, 넋을 잃고
남자들이 퇴직 하면서 꾸는 꿈이 있다. 그동안 일벌레처럼 직장에 충성하며 소홀히 했던 가정에 이제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거다. 새벽같이 출근하고 별을 보고 퇴근하느라 아내에게도 자녀들에게도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다. 그래서 남은 인생은 적어도 아내에게만은 그 역할을 다하겠다고 다짐한다. 아내와 많은 시간도 갖고 시장도 보고 여행도 하면서
사람이 많이 몰리는 관광지나 명승고적지를 가면 가파른 바위에 이름을 페인트로 쓰거나 심하게는 큰 바위에 이름이나 글자를 파서 새긴다. ‘000을 사랑해!’, ‘우리사랑 영원히’ 라는 글이다. 이런 글자를 본 애인이 감동해주길 바란다.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는 용감하고 멋있는 사람으로 알아주길 바란다. 여러 사람들에게 이름을 공개해 변하지 않을 대못을 박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