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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미남 시아버지, 북으로 납치되다
- 해마다 6월이 되면 우리 가족은 60년 전 납북된 시아버지를 떠올리며 착잡한 마음에 휩싸이게 된다. 한국전쟁 발발 뒤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지는 북으로 납치됐다. 여태껏 한 번도 시아버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살아 계셨다면 지금 아마 100세는 넘기셨을 텐데. 살아계실 거라는 기대를 뒤로하고 5년 전 향년 95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시어머니 기일에 맞춰 시아버지 제사도 지내고 있다. 시부모님은 일제 강점기 동경에서 유학하던 중에 만났다. 당시로써 보기 드물게 자유연애하고 결혼한 신식 커플이었다. 시어머니는 조선말 높은 벼슬에 재력까지 겸비한 외할아버지 덕분에 일본 음악대학에서 공부하셨다. 많은 여성이 한글 한 자 못 깨우치고 까막눈으로 살던 시절, 만석꾼의 막내 외손녀였던 시어머니는 몸종 하나 데리고 오빠가 유학 중인 동경으로 쫓아간 것이다. 그리고 일본 어느 전철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시아버지, 그리고 떠들썩한(?) 연애! 결국 자살 소동까지 벌이며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골인한 당찬 개화기 신여성이었다. 소문난 잉꼬부부로 서로 다른 부분을 인정하며 현명한 사랑을 하셨다. 외출해 나갔다가도 식성이 다른 탓에 서로 좋아하는 식당에서 각자 먹고 다시 만났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두 분 다 개성 강하고 깨어있던 연인이자 부부였다. 이쯤해서 시아버지의 외모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봐도 보기 드물다 싶을 정도로 미남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 시아버지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설명을 못 하지만, 시어머니 친구들 증언에 의하면 유명한 꽃미남이란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신혼 초 이화여자대학교 근처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는데 미남 사는 집으로 소문이 났었단다. 지나가던 이대생들이 열린 대문 사이로 빠끔히 들여다보았다는 등의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3남 1녀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가 싶었더니 한국전쟁이 터졌다. 처음에는 원래 시아버지가 아닌 시어머니가 인민군에게 잡혀 당시 서울 국립도서관에 갇혔다. 이 소식을 듣고 시아버지가 찾아가셨다가 그 자리에서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셨다고 했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 공무원 계급 납치 작전으로 시아버지가 인민군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시아버님은 당시 통계청에서 일하시고 계셨다. 당시 시어머니 나이 서른여섯. 부잣집 딸로 태어나 이 땅의 전형적인 양반가 부인이었던 시어머니는 젊은 나이 남편을 빼앗겨 혼자되시고 말았다. 요즘 같았으면 결혼도 하지 않았을 나이에 4남매를 혼자 키우고 교육하느라 고생 많이 하셨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살아생전 말씀하셨다. 그렇게 힘든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시어머니의 자존심을 세워준 것은 아버지를 닮아 인물 좋고 똑똑한 자식들이었다. 언젠가 통일이 돼서 시아버지를 만나면 ‘당신 없어도 내가 이렇게 애들을 잘 키웠어’ 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도 시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납북자 가족은 심적인 고통 이외에도 또 다른 것이 있었다.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신원조회를 당해야 했다. 특히 1970년대 언론계에서 직장 생활을 했던 남편은 해외 출장 때마다 출국 절차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혹시라도 외국 출장에서 납북된 아버지와 연락을 할까 봐서 정부 당국에서 의심을 했다. 우리나라의 해외여행 자유화되기 전이라 일반인의 해외 방문 힘든 마당에 납북자 가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머님은 “납북된 것도 억울한데 나라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의심까지 해야 하냐?”며 무척 억울해하셨던 기억이 난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이후 속속 낭보가 전해진다. 815 이산가족 상봉이 추진되고 있고, 한국전쟁 당시 미국 전사자 유해 송환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국내외적인 훈풍과 함께 납북 피해 가족에 대한 정부로부터 합당한 위로나 배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은근히 기대해 본다.
- 2018-06-22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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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궁남지’ 여행 어때요?
-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토요일,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부여를 여행했다. 부추겉절이를 넣어 먹는 독특한 곰탕으로 따뜻하게 점심을 먹은 뒤 궁남지를 찾았다. 가늘게 내리는 빗속의 궁남지 분위기는 그윽하다. 궁남지는 백제 무왕(634년) 때 만든 왕궁의 정원이라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만든 연못으로 삼국 중, 백제의 정원 기술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10여 년 전, 궁남지를 찾았을 때는 초여름이었다. 남편의 직장 따라 대전에 와서 살 때였고 서울에서 놀러 온 두 친구에게 충청 지역의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마침 궁남지 연꽃에 관한 신문기사를 읽었던 터라 함께 갔다. 엄청나게 큰 연못 가득히 피어 있는 연꽃도 놀라웠지만 세숫대야만한 연잎과 연꽃으로 눈이 동그래졌다. 연잎은 우산으로 삼을 만큼 정말 컸다. 사진작가들이 떼 지어 몰려와 연못 곳곳에서 사진 찍느라 몰입해 있었는데 충분히 가치 있어 보였다. 친구들이 궁남지에 만족한 것은 물론이다. 그 뒤 한강 두물머리 세미원의 연꽃을 보면서도 감탄하였지만 내 기억 속에 ‘연꽃 1번지’는 여전히 '궁남지'이다. 그런 연꽃을 기대하기는 이른 오늘, 뜻밖에 연못 가득히 수련이 피어있다. 흰색, 붉은색, 노랑어리연까지. 연못 주변을 천천히 산책한다. 이 고즈넉한 풍경을 가리기 싫어 우산을 접고 비옷만 입고서. 자연의 생동 발랄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낀다. 문득 스치는 달콤하고 익숙한 향기가 있다. 찔레꽃이다. 며칠 전 다녀온 북한산에도 찔레꽃이 많지만, 아직 피기 전이었다. 빗속에 깨끗하게 핀 찔레꽃에 코를 가까이 대어본다. 역시 매혹적인 냄새다. 마치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반가운 친구 같다.
- 2018-06-07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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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혜란 박사, 가수로 제2의 인생을 살면서 신바람 나게 노는 행복전도사
- 71세라니? 전혀 믿기지 않는다. 주혜란 박사의 몸매와 패션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자칭 타칭 한량인 이봉규가 그동안 수많은 여인을 만나봤지만 70세가 넘은 섹시한 여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누나인데 딱 달라붙는 원피스에 망사스타킹을 입고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은 언뜻 스치듯 보면 40대로 보인다. 아무리 자세히 관찰해도 스테이지에 선 그녀의 모습은 최소한 스무 살은 젊어 보인다. 한량의 잣대로 좀 더 솔직하게 외모를 분석한다면 몸매는 30대이고 얼굴은 50대, 목소리는 60대로 보인다. 71세에 신인 가수로 활동하면서 제2의 인생을 만끽하고 있는 그녀는 인생은 70부터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에너지가 넘친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와 레이 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를 멋들어지게 부르면서 흑인들이나 취할 수 있는 몸짓을 한다. 얼마 전 그녀의 하우스콘서트에서 라운지를 꽉 메운 100여 명의 관객들은 그녀의 노래와 춤과 섹시한 모습에 흠뻑 취했다. 주혜란 박사의 과거가 얼마나 화려했고 집안이 대단하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지금 주혜란의 70대 가수 인생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습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콘서트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재능도 대단하고 용기도 높이 평가하고 즐길 줄 아는 철학도 존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무대에서 마치 ‘Bravo My Life!’를 온몸으로 토해내는 것 같다. 사실 그녀가 살아온 이력과 집안 내력을 알면 지금 스테이지에서 열창하는 모습은 조금 생소하고 과하게 보일 수도 있다. 1975년 고려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에 충북 청원군에 있는 작은 마을 보건소에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보건소장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 후 UN과 워싱턴 정가에서 에이즈 퇴치운동 등 각종 국제적인 사회활동을 하면서 특유의 친화력과 유창한 영어 소통 능력으로 이름을 알렸다. 힐러리 클린턴, 카터 전 대통령 부부와도 인연이 깊다. 김대중 대통령을 오빠라고 부르는 누나 1984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만나 친해졌다. ‘오빠’라는 호칭으로 스스럼없이 지낼 정도였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임창렬(전 경기지사) 씨와 데이트를 하면서 결혼을 망설일 때도 DJ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똑똑한 사람 같다”는 DJ의 말에 결혼을 결심했다. 임창렬 전 지사와는 산전수전 다 겪고 살다가 이혼하고 지금은 친구처럼 지낸다고 한다. 임창렬 전 지사와 부부 관계일 때 정치적으로 성공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유명해진 탓에 불필요한 오해도 많이 받고 살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천당과 지옥을 한꺼번에 오간다. 그 당시 구속도 당하면서 “이것이 정치구나!” 통감했다고 회상한다. 세월이 지난 지금 또다시 그때의 일을 자세하게 묻는 것은 실례가 될 수도 있고 행복한 그녀의 지금 삶을 방해하기 싫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당시 노래가 아니었다면 아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서 진작 죽었을지도 모른다. 양평 강가에서 스트레스 풀려고 목이 터져라 노래하면서 돌아다녔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주혜란의 모습에서 처음 어두운 표정이 묻어나온다. 부친 주인호 박사 그리고 100세 모친 주혜란이라는 이름과 ‘Helen Chu’라는 영문 이름은 이승만 박사가 지어줬다고 한다. 예방의학계의 개척자이자 주혜란 박사의 부친인 주인호 박사는 27세 때인 미군정 시기 의정국장(醫政局長, Medical Police) 자리에 있었는데 인연이 된 이승만 박사가 딸(주혜란)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주인호 박사는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보건’이라는 단어를 한국에서 처음 사용했고 한국에 노인대학을 최초로 설립한 분이다(2000년 80세로 타계). 아프리카 대륙을 돌본 한국의 슈바이처로 알려진 분이기도 하다. 그는 1996년부터 17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세계보건기구(WHO) 수석고문관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전염병 퇴치에도 앞장섰다. 세계 최초로 일본뇌염바이러스 분리에 성공한 의학자로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이 정도로 세계가 알아주는 의사였는데도 “아버지는 평생 자가용보다는 버스나 전철을 이용하시고 검소한 삶을 사신 분이었다”고 딸 주혜란은 말한다. 아버지 생각만 하면 존경심이 저절로 묻어나온다. 주인호 박사의 제자 중 한 명은 2000년 8월 9일 중앙일보 홍혜걸 의학전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3남 4녀 모두 해외로 유학을 보냈기 때문에 일부에선 재력가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왕십리에 있는 허름한 18평 자택에서 살고 있다. 무소유의 철학을 평생 실천하고 사신 분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녀의 어머니도 신여성 엘리트로서 아버지 못지않았다.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고 서울여자의대(현 고려대 의대 전신) 출신의 의사였으며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일어, 이탈리아어 등 6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올해 100세인데 작년까지만 해도 아침에 피아노와 가야금을 연주할 정도로 총명했고 혼자 미국 여행을 할 만큼 건강했다. 그런데 3월 초에 갑자기 치매 판정을 받아 지금은 병원에서 요양 중이다. 갑자기 치매가 발명한 이유는 올해 미국을 방문하려니까 작년까지 요구하지 않던 진단서를 갑자기 가져오라 하더라는 것. 어머니는 “내가 의사인데… 내가 건강하게 여행을 할 수 있다는데… 100세가 되었다고 작년까지 요구하지 않던 진단서를 요구하다니… 나도 이젠 죽을 때가 되었구나!” 하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치매로 이어진 게 아닌가 하고 주혜란 박사는 추정하고 있다. 71세 된 딸이 100세 어머니가 조만간 자기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어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병원을 찾는다 한다. “70년 동안 ‘엄마’를 부르며 살다가 엄마의 삶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슬프다”고 말하며 그녀의 눈은 어느새 충혈된다. “너무 바빠서 늙을 시간도 없다” 분위기를 바꿀 겸 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100세나 되시고 작년까지 미국 여행도 다니실 정도로 건강했으면 어머님이나 딸인 주 박사도 여한이 없는 것 아닙니까? 욕심이 크신 것 아닙니까?”라는 이봉규의 우문(愚問)에 주혜란의 현답(賢答)이 돌아왔다. “어머님이 몇 년 만이라도 더 건강하게 살아주셔서 행복한 시간을 같이 보내주길 바라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라고 말하며 살짝 미소를 띠웠기 때문에 분위기가 다소 진정되었다. 사실 그녀의 어머니는 아프리카 지역 5개 나라 대통령의 주치의를 하셨고, 불과 몇 년 전까지 연천 통증의학과에서 90대 중후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열심히 환자를 돌보셨기 때문에, 비록 100세라고는 하지만 갑자기 치매 판정을 받은 사실을 어머니나 주혜란 박사도 믿지 못하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100세 직전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셨기 때문일까. 주혜란은 늘 “노인들이여, 움직여라, 행복할 때까지!”를 주창하고 다닌다. 대한노인회에서 의료봉사단장을 비롯해 문화, 예술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면서 최근 서울시노인회의 행복건강이사를 맡아 ‘노인행복전도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본인도 71세의 노인이지만 “너무 바빠서 늙을 시간도 없다. 신바람 나게 생활하면 젊어진다”고 힘을 주어 강조한다. 유식하고 에너지 넘치고 늙음을 거부하는 주혜란은 어느 인터뷰에서 멋진 말을 남긴 적이 있다. “If I rest, I rust!(쉬면 녹슨다). 이 말은 플라시도 도밍고가 인생의 모토로 삼고 있는 문구입니다. 저 역시 이 말에 100% 동감합니다. 노년이라는 상황을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봉규가 아무리 평론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주혜란의 과거 사교계와 정치계의 경력을 이제 와서 가타부타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71세의 나이에 가수로 제2의 인생을 신바람 나게 한바탕 놀고 있는 그녀가 지금은 무척 존경스럽다.
- 2018-06-04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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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카가와 히데코의 폭신 달달하고 왁자지껄한 요리 이야기
- 구르메 레브쿠헨(Gourmet Lebkuchen). 나카가와 히데코(中川秀子·51)의 요리교실 이름이다. 연희동 주택가 골목을 헤매다 한참을 헉헉대며 올라가다 보면 2층 집 파란 대문이 보인다. 요리 스튜디오가 있는 그녀의 집이다. 이곳에 드나드는 수강생만 한 달에 200여 명, 대기자도 수백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일본에서 셰프의 딸로 태어나 독일과 스페인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산 지 20여 년. 일본어 강사, 번역가, 기자로 활동했던 그녀가 지금은 요리를 가르친다. 순전히 사람들과 만나 음식을 나누고 대화하는 게 좋아서 시작한 일이다. 두서없는 수다와 한숨, 투정까지 레시피가 되는 요리교실이 있다. 교실 주인은 나카가와 히데코. 우리말 독음이 ‘중천수자’라서 종종 ‘수자 언니’로 불리기도 하는 그녀는 연희동 자택에서 10여 년째 요리교실 ‘구르메 레브쿠헨’을 운영하고 있다. ‘Gourmet’는 프랑스어로 ‘미식가·식도락가’라는 의미이고, ‘Lebkuchen’은 세상에 다양한 맛과 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준 독일 과자 이름이다. 발음하면 구름이 연상되는 이 폭신 달달한 간판을 달고 그녀는 거의 매일 파티를 하듯 수강생들과 만난다. 무슨 비장의 무기라도 있는 걸까. 1, 2년을 기다려가면서까지 그녀의 요리교실을 탐내는 사람도 많다. 첫 연락이 됐을 때 그녀는 영국에 있다 했다. 너무 바빠 보여 거의 포기 상태로 그녀가 출판한 책들을 읽으며 귀국 날짜를 기다렸다. 요리교실을 통해 만난 수강생들과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다 보니 사람들이 왜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먹방 시대, TV만 켜면 수만 가지 레시피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카가오 히데코, 아니 수자 언니의 요리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바로 ‘식탁 위의 이야기’. 그녀는 각국의 특별한 요리를 가르칠 때마다 그날 참석한 사람들의 스페셜(?)한 인생 이야기도 식탁 위에 올린다. 모두의 스토리가 요리의 가장 빛나는 레시피가 되는 시간이다. 요리 배우러 와서 위로받고 마음 치유까지 하고 간다는 입소문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요리의 고수일 뿐만 아니라 마음을 녹이고 흔들어놓는 재주도 있었던 것이다. 영국에서 돌아오기 전 다행히 시간을 비워보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약속한 날 그녀 집으로 가는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얼마쯤 헤매어도 좋을, 옛 정취가 살아 있는 길이었다. 도자기에 문어가 그려진, 그녀의 작은아들이 만들어줬다는 요리교실 간판은 2층 집 파란 대문 기둥 위에 앙증맞게 달려 있었다. 연희동의 ‘킨포크’ 구르메 레브쿠헨 수강생들은 요리를 배우러 왔다가 그녀의 음식 철학에 반해 아예 친구가 되어버리곤 한다. 요리도 요리이지만 그녀에게 푹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교실은 어느새 연희동의 킨포크(kinfolk)로 불리고 있다. “저는 셰프라는 호칭보다는 요리 연구가로 불러주는 게 좋아요. 푸드 디렉터, 연구라는 말에는 문화적, 인문학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잖아요. 요리 기술만 가르쳤으면 힘들어서 벌써 그만뒀을 거예요. 스토리가 있는 음식을 좋아해서 사람들과 만나 요리하고, 먹고, 마시고, 수다 떨고, 웃고, 눈물 콧물 빼는 시간을 사랑해요. 그 시간 속에 우리가 귀하게 여겨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까요.” 그녀는 식재료를 사러 자주 들르는 ‘사러가 쇼핑센터’, 빵집, 도자기 공방, 한의원 등 동네를 오가며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오래 기억한다. 궁금해서 기웃거리고, 고마워서 감동하고, “밥 먹었어? 우리 밥 먹자!”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 지인이 운영하는 화랑에도 괜히 들러보곤 한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도무지 사는 재미를 못 느끼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요리는 사랑이고 우주다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 요리 셰프였던 아버지를 따라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지냈던 그녀는 코즈모폴리턴으로 살기를 원했다. 1994년 연세대 대학원 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뒤 한국 남자를 만나 두 아이를 낳고 벌써 24년째 한국에서 지내고 있지만, 그녀만의 철학을 실천하는 ‘구르메 레브쿠헨’ 안에서 여전히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살고 있다. 지금은 요리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지만 어렸을 때 그녀는 아버지의 직업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현재 85세인 아버지는 프랑스 요리계의 대부 무라카미 노부오(村上信夫)의 제자가 된 후 78세까지 주방에서 일했다. “부모님은 제가 대학에서 요리 관련 공부를 하길 바라셨어요. 하지만 저는 아버지 일이 싫었어요. 가족과 함께할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뜨거운 불 앞에서 힘들게 일하시는 모습만 봤거든요. 일본대사관 전속 요리장으로 있던 아버지가 독일에서 돌아와 고향 사도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셨는데 갑갑하게 섬에 갇혀 사는 이유가 다 아버지 직업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린 마음에 어느 날은 화가 나서 ‘나는 정장을 입고 매일 출근하는 사람과 결혼할 거야!’ 하며 대들기도 했죠. 지금 생각하면 참 철이 없었어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그녀는 그러나 20대에 동독과 스페인에서 지내면서 요리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이방인의 심정을 헤아려 요리를 해주고 같이 나눠 먹는 친구들에게서 따뜻한 마음을 느꼈고, 음식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그 관계가 점점 넓어지고 깊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로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친구들 생각이 났다. 사랑하는 사람도 보고 싶었다. 좋아하는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도 그때 알았다. 그리고 그 마음에 점점 중독(?)되어갔다. 결혼해서 살던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한 이유 중 하나가 언제든 바비큐 파티를 하고 싶어서였다니 참 대책 없이 귀여운 여인이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비큐 파티를 할 때 경비실 인터폰이 울린 적도 있어요.(웃음)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죠. 마침내 단독주택을 샀을 때 마치 신한테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뻤어요. 자그마한 정원과 별이 있는 밤하늘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몰라요. 지인들을 불러 주말마다 파티를 열었어요. ‘그렇게 파티를 자주 하면 돈이 많이 들 텐데’ 하면서 걱정을 해주는 지인도 있었어요. 요리는 문화예요. 그리고 우주예요. 문화를 나누고 서로의 우주를 들여다보는 그 신비스러운 시간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남편도 그녀 못지않게 파티를 즐기고 요리를 좋아하는 남자다. 일본어 강의를 하던 시절 한 수강생을 통해 알게 됐는데 첫눈에 미각도 있어 보였고 술을 좋아하는 남자라 금세 친해졌다. “제 인생이 시원하게 펼쳐지지 않았던 시절이었어요. 이런저런 지루함도 밀려와 그만 일본으로 돌아가자 마음을 먹었어요. 가서 학위도 따고 그동안 못한 효도도 좀 하자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때 운명처럼 남편이 나타난 거예요. 서로 술을 좋아하다 보니 처음부터 만나는 게 어색하지 않았어요. 자주 자리를 함께하며 음식을 즐기고 대화를 나눴죠. 자연스럽게 이성의 감정이 싹트더군요. 그래서 함께 같은 음식을 즐기는 것은 중요한 일 같아요. 이유도 모른 채 애인과 헤어진 사람은 그(그녀)와 즐겁게 먹었던 음식이 뭐였는지 한번 검토해볼 일이에요.(웃음) 남편은 제가 하는 일을 적극 지지해주고 때로는 가혹한 조언도 해줍니다. 물론 제 지인들과도 잘 어울리고요.” 한국 음식 세계에 알리고 싶어 한국에 사는 일본인 친구들에게 스페인 요리 파에야를 가르쳐준 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된 그녀의 요리교실. 수강생 연령은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여자 수강생이 대부분이지만 남자도 꽤 있다. 4년째 요리를 배우는 60대 교수님도 있고, 한 치과의사는 캠핑을 다니다가 요리에 관심이 생겨 그녀의 교실을 찾았다. “남자분들이 요리 배우는 걸 그렇게 좋아하실 줄 몰랐어요. 그분들은 특별한 요리를 배우러 오시는 게 아니에요. 꽈리고추멸치볶음 같은 아주 소박한 가정식 요리를 원해요. 나이가 드니까 뭘 먹고 싶다고 아내에게 말하기가 점점 구차하다는 거예요. 괜스레 아내 눈치를 보시는 거죠.(웃음) 간단한 안주 요리에 대한 관심이야 다들 뜨겁죠.” 최근, 은퇴 후 혼자 지내는 남자들을 위한 요리교실을 기획하고 있다는 그녀는 한국의 내림 음식들은 매우 훌륭한데 제대로 된 레시피가 없어 국제화하지 못한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매력적인 한국 음식은 양념장이에요. 간장에 마늘과 참기름과 고춧가루를 넣어 맛을 낸 양념장은 어느 나라에서도 맛보지 못한 음식이에요. 결혼 후 시어머님에게 한 수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이거 조금 넣고 저거 조금 넣으면 된다’ 하시는 거예요. 답답한 마음에 한국 궁중음식연구원에 가서 공부도 했어요. 기회가 된다면 한국 음식을 알리는 데 힘을 보태고 싶어요.” 때로는 프랑스 요리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인간관계. 나카가와 히데코, 아니 수자 언니답게 ‘요리의 관계학’을 펼쳐나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 2018-06-0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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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순간에 닥친 슬픈 불행
- 몸이 불편한 나를 돕기 위해 우리 집에 오는 가사 도우미 이야기다. 우리 가족은 그분을 ‘이모’라고 편히 부른다. 이모의 큰아들은 30대 후반 한의사라고 했다. 며느리는 아들과 동갑으로 아주대학 수간호사 출신이었다. 7년 전, 아들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경쟁 심한 서울을 떠나 청주에서 한의원을 열었다. 서울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며느리는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지방으로 갔고 경력이 단절됐다. 두 딸 아이 낳아서 어느 정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나니 며느리는 취업이 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청주에는 일할 만한 큰 병원이 없었다. 간호사 면허가 아까웠던 며느리는 병원 대신 양호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2년여 피나는 노력 끝에 이모의 며느리가 올 초 그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도 “소 한 마리라도 잡아야 한다!”며 축하하는 마음으로 환호성 쳤다. 교사 임명장을 받자마자 며느리는 출근할 때 쓰겠다며 빨간 폭스바겐 중고차부터 샀단다. 평소 가지고 싶었던 차라고 했다. 호사다마라고 며느리가 출근 첫날부터 아프다고 했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단순한 병이 아니었다. 폐암이었다. 본인이 간호사고 남편은 한의사인데 어떻게 증상을 모를 수가 있을까?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아들 가족은 청주에 있는 한의원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살기로 했다. 병원 치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모는 사정상 우리 집 일을 못 하겠다고 했다. 나 또한 이모 도움이 없으면 안 되는 처지다. 남편 혼자 나를 돌보기도 힘들다. 나는 이모가 편한 시간 아무 때나 와달라고 떼를 썼다. 하는 수 없이 새벽이건 밤이건 시간 나는 대로 와서 날 도와주었다. 며칠 전, 이모의 며느리는 결국 하늘나라로 떠났다. 발병한 지 3달 만이었다. 암이 증상 없이 오는 경우가 많다고는 하지만 건강에 관한 한 전문가 부부에게 이런 일이 생겼다니 믿기 어려웠다. 증상을 발견하자마자 그렇게 허망하게 갔다는 얘기 또한 들어보지 못했다.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젊어서 암세포가 빨리 퍼진 건가? 간호사 출신 양호 선생님, 두 딸아이 엄마의 죽음에 할 말을 잃었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아무것도 못 느꼈다니 말이다. 정말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 인생 아닌가 싶다.
- 2018-06-01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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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투포환의 기록을 새로 쓴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
- 1970년대, 육상 투척 종목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깜짝 스타가 등장했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투포환 종목에서 금메달을 휩쓴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68)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어쩌다 그에게 마녀라는 수식어가 붙었을까? 현재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으로 있는 그를 만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부모님 몰래 시작한 투포환 남들보다 큰 키와 순발력,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운동신경과 체격을 갖춘 백옥자는 중학생 때부터 농구와 배구를 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구기 종목도 꾸준히 했으면 좋은 성적을 거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농구와 배구에서 손을 떼고 투포환을 시작했을까. 그 이유가 궁금했다. “처음에는 투포환이 뭔지도 몰랐어요. 어린 마음에 올림픽에는 나가고 싶은데 팀 운동보단 개인 운동을 해서 나가는 게 빠르겠다 싶어서 도전한 거죠. 때마침 인천 지역 신인발굴대회가 있었는데 체육 선생님이 투포환을 해보라며 권유하더라고요.” 그렇게 중학생 소녀의 손에 4kg의 둥근 쇳덩이가 쥐어졌다. 첫 만남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필 해도 괴팍해 보이는 종목이라니… 집에서도 ‘이상한 운동’ 하지 말라며 반대했다. “처음엔 도시락도 안 싸줬어요. 그래서 용돈으로 자장면, 우동을 사 먹으며 끼니를 해결했죠. 또 훈련하느라 늦는 날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집으로 전력 질주했어요. 1분이라도 일찍 들어가서 운동 안 했다고 거짓말하려고요.” 몰래 운동을 이어가던 그는 중학교 3학년, 신인발굴대회에서 신인선수로 발탁됐다. 한국신기록이었다. 언론은 그를 육상 유망주로 소개하며 보도하기 바빴다. 다행히도 이 사건은 부모님의 마음을 돌려놓는 계기가 됐다. 부모의 인정을 받은 그는 곧바로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출전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다. 별다른 성과 없이 귀국했지만, 육상연맹은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또다시 선수촌행이었다. “집이 인천이었기 때문에 태릉선수촌이 곧 제 집이었죠. 그 당시만 해도 교통이 안 좋아서 왔다 갔다 하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경기가 잡히면 전화로 ‘엄마 나 지금 중국 가’, ‘지금 싱가포르 가’ 하면서 당일 통보했죠.” 아시안게임 2연패, 전성기를 맞이하다 1970년대는 그야말로 백옥자의 전성기였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땐 14m 57cm를 던져 금메달을 땄다. 이뿐만 아니라 재미 삼아 출전했던 투원반 종목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동인천역 광장에서 인천시장의 영접을 받았어요. 검은 지프를 타고 시청(현 중구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했죠.” 매번 경신되는 기록과 메달 행진에 세계도 그를 주목했다. 하지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을 땐 ‘연애 중이라 성적이 안 좋다’, ‘백옥자의 시대는 지났다’ 등 그에게 쏠린 기대만큼 억측성 보도도 함께 쏟아졌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백옥자는 그동안의 설움을 떨쳐내듯 또 한 번 신기록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당시 그는 신우염을 앓고 있었고 무릎 부상으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현 중국)이 출전을 알리면서 체격이 좋은 선수들을 대거 내보냈다. 자연스럽게 언론도 백옥자의 2연패냐, 처음 출전한 중국의 메달이냐를 놓고 저울질을 했다. “다들 180cm가 넘었어요. 거기에 체격까지 엄청나니까 거인 같았죠. 안 그래도 긴장해 있는데 더 무서운 소문까지 돌았어요. 북한도 그 당시 처음 출전했는데 잘하는 남한 선수들을 납치해가니 조심하라고요.(웃음)” ‘삐빅’ 하는 호각소리에 백옥자가 있는 힘껏 포환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지점은 16m 28cm. 아시아 신기록이었다.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다는 점에서도 특별하지만, 자신의 별명 ‘아시아의 마녀’가 탄생한 대회이기 때문에 더욱 각별하다고 그는 말한다. “싱가포르 기자가 처음 쓰기 시작한 단어예요. 경기 끝나고 저한테 오더니 ‘마녀’라고 써도 되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마녀는 좀 그렇지 않나… 했더니 자기 나라에선 마녀가 무서운 이미지가 아니라 마법을 부리는, 멋있는 존재라고 괜찮다는 거예요.(웃음) 에라 모르겠다, 그래라 한 거죠. 그렇게 ‘아시아의 마녀’가 탄생했어요.” 그에게 ‘아시아의 마녀’라는 호칭이 마음에 드는지 물어봤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차라리 여신이니 미녀니 하는 것보단 마녀가 나은 것 같아요.(웃음) 그 기자 덕분에 지금까지 불리는 멋있는 호칭이 생겼으니 오히려 고맙죠.” 2연패를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청와대 초청을 받았다. 만찬회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결혼은 한국 남자와 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지 말고 꼭 한국에 살라’고 당부했단다. 당시 잘나가던 스포츠 스타는 거의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추세였기 때문에 한국 투척 종목의 일인자이던 백옥자마저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꿈의 광장이자 지옥이었던 선수촌 아시안게임 2연패는 그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태릉선수촌에서도 그는 이미 유명한 연습벌레였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쌓인 날에도 쉬지 않았다. 그가 연습했던 자리엔 포탄을 맞은 것처럼 움푹 패인 자국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자리를 ‘백옥자 자리’라고 불렀다 한다. “겨울엔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투포환이라는 게 포환을 턱 아래에 대고 던져야 하거든요. 꽁꽁 언 모래들이 포환에 묻어서 던질 때마다 턱을 쓸고 갔죠. 그럼 턱이 다 찢어져서 피가 나고 그랬어요.” 인터뷰 도중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손이 엄청 크기도 했지만, 오른손과 왼손이 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손 한번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전 누가 손 보여 달라 그러면 왼쪽 손을 보여줘요. 오른손은 못생겼으니깐.(웃음)” 그의 오른손엔 당시 노력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검지, 중지, 약지는 4kg 포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듯 옆으로 휘어져 있었다. 말 못할 고통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맞기도 많이 맞았다. 체벌을 받아 엉덩이엔 피멍이 들었고 뺨도 맞아가며 연습했다. “지금은 인권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누구한테 말해야겠다’, ‘신고해야겠다’ 이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그냥 더 좋은 성적을 거두라고 그러나보다 이렇게 생각했죠.” 힘들 땐 몰래 선수촌을 탈출하기도 했다. 들어오는 길엔 후배를 위해 쭈쭈바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외출하려면 도장으로 허락을 받아야 했어요. 근데 못 받았을 땐 경비 아저씨한테 살짝 윙크 한번 날리는 거죠. 그럼 아저씨가 이해해주시고 슬쩍 내보내주셨어요.(웃음) 지금은 선수촌 안에서도 아이스크림이니 우유니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데 그때만 해도 그럴 수 없었거든요. 우유 하나 더 먹으려면 아주머니께 인사를 100번은 해야 얻을 수 있었어요.” 선수촌의 규율은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있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점심시간이 달랐고 휴게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볼 때도 함께 있을 수 없었다. 만약 같이 있는 장면이 목격되는 날에는 풍기문란이라는 명목하에 퇴촌이라는 무시무시한 벌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감시가 빡빡한 일상생활에서도 그의 유일한 해방구가 있었으니, 바로 국제대회를 나가는 날이었다. “국제대회를 나가면 경기장 주변에 항상 클럽이 있었어요. 경기가 끝나면 할 것도 없고 혼자 심심하니까 클럽에 가서 노래도 듣고 했죠. 같이 대회 나간 선배들이 ‘백옥자 어디 있냐’ 하면서 찾으면 후배들이 ‘시끄러운 곳 가면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곤 했대요.” 인생 3막은 지금부터 20대 중반 건국대학교 체육과 동기인 김진도 씨와 결혼한 그는 은퇴 이후 남편을 따라 교직생활을 했다. 더불어 여자 농구선수인 딸 김계령 씨를 돌보느라 여러모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근데 이제는 더 바빠졌단다. 얼마 전 부천대학교에서 은퇴한 그는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으로 선출돼 새로운 출발을 했다. “옛날 아시안게임 때 만났던 선수들도 이제는 임원이 돼서 한국을 방문하는데 감회가 색다르더라고요. 저도 더 늙기 전에 연맹에 보탬이 되는 부분은 돕고 그래야지요. 또 새로운 육상 인재를 발굴하는 게 목표예요. 우리나라 육상도 어서 부흥기를 맞이했으면 좋겠어요.”
- 2018-05-2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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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세에 요절한 천재작가 김유정을 기리다
- 5월에 계속 내리는 비를 맞으며 경춘선을 타고 춘천에 있는 ‘김유정 문학촌’을 찾아갔다. 예정에 전혀 없던 춘천행이었다. 사실은 이날 여럿이 모여 야외운동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당일 오전에 세찬 비가 내리자 일정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2주 전에 한 약속이라 아쉬웠다. 그렇다고 날씨 탓만 하며 그냥 집에 있기에는 새벽부터 서두른 시간이 아까웠다. 다른 계획이라도 세워야 했다. 일단 운동 도구를 빼놓고 카메라와 가방을 들고 나섰다. 걸으며 순간 생각난 곳이 바로 김유정을 만날 수 있는 실레마을이다. 그곳은 몇 번 가봤기에 두렵지 않았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어디를 가든 그곳을 빠짐없이 살펴보려면 여럿보다는 혼자가 훨씬 도움이 된다. 그전에 두 번이나 갔지만, 일행과 정해진 시간에 맞춰 움직였기 때문에 마음대로 깊이 있게 반복해서 볼 수 없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경춘선을 타고 김유정역에서 내렸다. 대중교통으로는 처음이었지만, 안내판이 잘 되어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역에서 목적지까지 도보로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예전에는 신남역이었는데 2004년 12월 1일 김유정역으로 변경하였다고 한다. 한국철도 역사상 최초로 사람 이름을 사용한 역이다. 걸어가며 보니 전철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보이는 모든 곳이 김유정에 관한 지역이었다. 상점이나 식당이나 온통 김유정 작품의 제목을 따서 점순네 닭갈비, 중화요리 만무방, 봄봄 닭갈비, 카페 산골나그네 등이다. 마치 마을 길을 걸으며 책을 읽는 느낌이라 새로웠다. 비록 날씨는 언짢았지만, 그가 나고 자란 생가와 ‘김유정기념전시관’을 여유롭게 둘러보았다. 천재작가의 안타까운 생애와 작품에 관한 것에 대해 샅샅이 공부할 수 있었다. 그다음에는 여러 작품의 산실이었던 실레마을로 향했다. 그의 발자국이 남아있으리라는 상상을 하며 걷는 기분을 아마 다른 이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봄봄’의 점순이가 된 듯 설레기도 하면서도 김유정의 허망한 생을 생각하면 슬퍼졌다. 한국 문학사에 토속적인 언어와 자신의 고향을 바탕으로 길지 않았던 작품 활동 기간에 금쪽보다 더 귀한 작품들을 남긴 그를 떠올리며 마음이 벅차오른 날이었다. 김유정, 실레마을 곳곳을 작품 속에 등장시키다 실레마을, 김유정 작가의 고향이며 그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와 인물들이 허구가 아닌 실제했다는 것을 이번 방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봄봄’의 점순 아버지 봉필영감이 마을 가운데 잣나무 숲에서 살았던 마름집이 있다. 주인공 나(머슴)와 점순이의 혼인 약속은 지키지 않으며 일만 부려먹던 봉필영감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백꽃’의 배경은 금병산자락 아래 잣나무 숲 뒤쪽이다. 기념관 맞은편 언덕에는 김유정이 세운 ‘금병의숙’ 터가 있다. 움막을 짓고 마을 아이들에게 열정을 다해 야학을 가르친 곳이었다. 그 옆에는 김유정이 심은 느티나무가 지금도 있다. 마을지도를 보니 유정이 술을 마시던 주막 한들의 팔미천에는 ‘산골나그네’(들병이)가 남편을 숨겨두었던 물레방앗간 자리가 있다. 이와 같이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노다지’, ‘금 따는 콩밭’, ‘만무방’ 등 12편이 실레마을을 무대로 한 작품들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점순이, 덕돌이, 덕만이, 뭉태, 춘호, 근식이 등 인물들을 지금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실레마을이다. 29세 짧은 생 동안 자신의 고향을 통틀어 작품 속에 등장시킨 작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참 행복한 실레마을이다. 김유정은 1936년 잡지 ‘조광’ 5월호에 수필 ‘오월의 산골짜기’를 기고했다. 글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 읍에서 이십 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닿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 호밖에 못 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 2018-05-24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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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의 저녁 식탁
- 대전 유성 5일장이 서는 날이다. 오후 늦게 장바구니 하나 들고 가볍게 집을 나섰다. 한 시간 후면 남편 퇴근시간과 얼추 맞아 떨어지니 만날 시간과 장소를 카톡으로 보냈다. 무엇을 살지 작정하진 않았지만 내 눈에 푸성귀 하나가 자꾸 들어왔다. 미나리다. 저녁엔 미나리 전과 막걸리를 식탁에 올려볼까 싶었다. 모처럼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린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스스로 기특(?)했다. 나는 밭에서 자라는 손가락 한 뼘 길이의 향이 진한 돌미나리를 골랐다. 내 옆에서는 다른 손님이 무장아찌를 비닐에 대여섯 개 정도 담아 값을 흥정하는 중이었다. “하나 더 줘요. 단골로 오는데.” “큰 건 안돼, 쩌~기 째깐한 거 하나만 가져가.” 무장아찌를 놓고 두 사람의 오가는 얘기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얼마나 맛있기에 장아찌를 저렇게 많이 살까싶어 손님한테 내가 넌지시 물었다. “그게 그렇게 맛있어요?” “입맛 없을 때 괜찮지. 매운 고추 쫑쫑 썰어서 깨소금하구 참기름 살짝 둘러 먹으면 맛있어~.” 평소엔 보이지도 않던 무장아찌다. 나는 5천원을 내고 돌미나리 한 봉지와 손바닥만한 무장아찌 한 개를 받았다. 물건을 파는 아주머니가 돌아서는 내게 당부하듯 말한다. “장아찌 간이 삼삼한 께 짠기(짠맛)를 따로 빼지 말구, 한 번 씻어서 먹기만 하면 되야.” 미나리와 무장아찌라니. 두 가지 다 먹고 싶어 산 건 아니다. 사 놓고 보니 남편 식성에 맞춰 산 게 되었다. 파장 분위기가 되면서 여기저기 떨이로 내놓는 물건들 값이 반 이상으로 내려간다. 혹시나 무거운 짐을 들었을까 싶어 남편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집으로 가면서 저녁엔 미나리전과 막걸리를 먹을 거라고 하니 남편은 그렇잖아도 장에서 미나리를 사고 싶었는데 마누라 번거롭게 할까봐 말을 안했단다. 미나리를 물에 담그니 점점 생기가 돈다. 부침개를 하기엔 양이 너무 많아 반은 데쳐서 새콤달콤 무치기로 한다. 지글지글 부친 미나리전과 막걸리로 입가심을 하는 남편의 입이 귀에 걸린다. 술은 딱 한모금만 맛나게 먹을 수 있는 나. 그 뒤에 오는 맛은 맛있게 받아들일 수 없는 구조라 술 한모금 뒤에는 물잔으로 술을 대신한다. 데친 미나리를 무치려고 다진 파와 찧은 마늘, 매실청을 넣었다. 주방에 서서 오른손이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씽크대 선반 문을 열었다. 소금, 설탕, 고춧가루 등 양념통들이 올망졸망 모인 칸에 깨소금이 들어있는 유리병이 보였다. 그 병을 꺼내려면 병 위에 올려놓은 또 다른 병을 치워야 했다. 그 순간 병 하나가 손쓸 새도 없이 떨어졌다. 바닥에 부딪치며 뚜껑이 열렸다. 아마 지난번에 뚜껑이 덜 닫힌 것 같았다. 병은 주방 씽크대와 남편이 앉아있는 식탁, 그리고 냉장고를 둥글게 구르며 깨소금이 몽땅 쏟아졌다. 남편이 안 됐다는 듯 말했다. “병을 층층이 쌓으면 위험하다고 지난번에도 얘기했는데...” 할 말이 없었다. 그때도 치워야지 했다가 그만 잊어버리고 오늘 드디어 사단이 났다. 남편은 막걸리를 먹다 말고, 나는 미나리 초무침을 하다 말고 바닥에 깔린 깨를 쓸고 정리했다. 친정어머니가 국산 참깨 볶은 거라고 따로 챙겨준 건데, 그 깨를 쓰레기통에 넣는 마음이 쓰렸다. 미나리 초무침은 깨소금 없이 식탁에 올렸다. 무장아찌를 잘 씻어 채를 썰었다. 한 개 집어먹으니 오독오독 씹는 맛이 정말 괜찮다. 아주머니 말대로 짜지 않고 삼삼하다. 고추를 쫑쫑 썰어 참기름을 두르고 나니 깨 없는 아쉬움이 더 크다. 남편이 웃으면서 말했다. “와, 당신 이런 거 별로잖아. 어찌 장아찌가 눈에 들어왔담?” 누가 ‘촌놈’아니랄까봐. 남편은 어릴 때 자주 먹던 장아찌라며 반색했다. 하긴 나도 이제 그 짭짜름하고 쉽게 변하지 않는 은근한 ‘촌맛’이 좋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막걸리와 미나리전, 거기에 무장아찌가 있는 식탁에서 기분이 업 되면 나오는 남편의 흥얼거림이 집 안으로 번진다. 덩달아 나도 상승되는 기분이다. 깨소금이 가 다 쏟아져 한 톨도 넣지 못했지만 또 다른 깨가 쏟아지는 저녁이었다.
- 2018-05-16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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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갱년기 잘 극복하려면, 액티브 시니어가 돼야
- 노화가 중년에게 무서운 이유는 신체적인 변화가 눈에 보여서가 아니다. 단지 주름이 늘고 흰머리가 늘어서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가능했던 것들이 쉽지 않게 되면서 ‘늙는다’는 공포와 맞닥뜨리게 된다. 더 이상 높은 선반의 물건을 꺼내기 어려워지고, 달려가는 손주를 들어올리기도 버겁다. 숙면 후 아침의 개운한 기상은 젊은 날의 추억처럼 여겨진다. 여성들에게 이런 두려움이 극대화되는 시기가 있다. 바로 ‘갱년기’다. 이 시기를 힘들게 겪어낸 여성들은 한꺼번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고 이야기한다. 피할 수 없는 갱년기를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한방부인과 전문의인 이윤재(李侖哉·37) 자생한방병원 원장을 통해 들어봤다. “신수(腎水)가 부족해서 그렇죠.” 이윤재 원장은 한방에서 바라보는 갱년기 증상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양방에서는 여성호르몬 부족에 의한 질환으로 해석하지만, 한방에서는 폐경과 함께 몸의 ‘정기(精氣)’라고도 불리는 신수의 부족이 이러한 증상을 초래하는 것으로 해석한다고. “한방에서는 신체의 변화가 숫자 7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데, 여성의 경우 14(7×2)세에 첫 생리가 시작되고 49(7×7)세에 천수가 다 돼 폐경을 겪게 된다고 하죠. 그런데 최근에는 아이들의 영양상태가 좋아지고 성조숙증도 발생하면서 초경 나이가 점점 어려지고 있습니다. 폐경 시기는 큰 변화가 없거든요. 결국 갖고 태어나는 몸의 정기를 사용해야 하는 기간이 늘어난 셈이니 몸에 무리가 될 수밖에 없어요.” 여성 노화 증상의 ‘종합세트’ 이 원장은 여성에게 나타나는 갱년기 증상은 발현되는 기간에 따라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먼저 갑작스레 나타나는 갱년기 급성 증상이 있다. 얼굴이 붉어지거나 울긋불긋한 반점이 나타나는 안면홍조 질환, 땀이 많이 나는 발한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증상들은 대인관계에도 영향을 준다. 급성과 구분되는 갱년기 아급성 증상은 여성의 생식기와 관련이 깊다. 질 점막이 건조해져 위축되거나, 성관계 시 통증이 발생한다. 또 자꾸 가려운 소양증도 나타난다. 만성 증상은 이와는 또 다르다. 근골격계에 통증이 나타나다 퇴행성관절염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심하면 손가락 관절에도 결절이 나타난다. 골다공증도 주요 만성 증상이다. 기억력 감퇴와 우울증이 나타나다 심해지면 치매로 확대된다. “이렇게 구분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증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스무 가지가 넘는 증상을 호소하시는 분도 있어요. 또 한두 가지 증상 때문에 병원을 찾았다가 인지하지 못했던 다른 갱년기 증상을 찾아내기도 하죠. 증상을 방치하면 병이 심해집니다. 안면홍조를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에 문제가 생깁니다. 우울증으로 발전하기도 하고요. 관절통을 다스리지 못하면 퇴행성관절염으로 질환이 확대됩니다.” 갱년기 증상이 나타났을 때, 당사자가 겪게 되는 심리적 충격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도 치료의 중요한 과정이라고 이 원장은 말한다. 노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그 과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환자는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심리적 변화는 화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간기울결(肝氣鬱結)로 인한 간화(肝火)가 대표적이다. 평생을 참으며 살아온 여성의 쌓인 스트레스가 뭉친 기운을 만들고 간 쪽으로 쌓이면서 갱년기와 함께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화가 쌓이면 안면홍조나 발한과 같은, 눈에 보이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참지 못하고 쉽게 화를 내는 심리적 변화를 보이기도 합니다. 손주를 보다가 이 나이까지 왜 애를 봐야 하냐며 느닷없이 화를 내기도 하고, 가족에게 갑자기 전화해 소리를 지르기도 하죠. 실제로 진료실에서는 상담하다 눈물을 쏟는 환자가 비일비재합니다.” 치료 방법 다양, 맞춤치료 필요 양방에서 여성의 갱년기를 치료하는 기본적인 방법은 부족해진 여성호르몬의 보충이다. 그러나 여성호르몬 보충이 쉽지 않을 때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유방암과 난소암을 유발하는 BRCA 유전자 돌연변이를 부모로 물려받은 경우다. 유방암을 예방하기 위해 가슴 절제를 선택한 할리우드의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와 같이 유전자 검사결과 변이가 발견돼 암 발병이 우려되거나 가족력이 있을 때 여성호르몬 치료에 주의가 요구된다고 이 원장은 설명한다. “여성호르몬 보충제 사용에 특별한 관리가 필요할 때는 한방 치료가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한방에선 부족한 여성호르몬을 직접적으로 보충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현재의 상태에서 건강을 영위하도록 노력하죠. 즉 갱년기로 인해 발생하는 증상들을 별도로 관리하면서 극복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질환별로 한약이나 약침, 뜸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증상을 완화시킵니다.” 무작정 이러다 말겠지 하며 증상을 방치했다가는 오래 고생할 수도 있다. 증상이 10년 이상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활동적인 삶, 갱년기에 도움 치료 방법에 대한 조언을 듣다가 바보 같은 질문을 해봤다. 갱년기를 피할 순 없는 것일까. 당연한 답이 돌아왔다. 노화를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노화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갱년기 역시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방법들은 몇 가지 있죠. 먼저 갱년기 증상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고 예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갱년기를 겪기 전에 발생할 수 있는 질환들에 대해 미리 공부해두면 상황에 처했을 때 겪을 수 있는 심리적 충격을 예방할 수 있어요. 기본적으로 40대 중반 전후면 갱년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때 노화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겪는 현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죠.” 갱년기를 극복하려면 육체적으로 ‘액티브 시니어’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 원장은 말한다. 운동과 활발한 생활 등을 통해 기본 체력을 잘 유지하면 골다공증 등 갱년기 증상의 발병 가능성도 낮아진다. 또 근육량이 많으면 기초대사량이 높아져 갱년기 증상으로 인한 급격한 체중 증가도 예방할 수 있다. 스트레스나 화도 잘 관리해야 한다. 명상, 요가와 같은 활동은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고 체력에도 도움이 된다. 갱년기를 겪는 아내에 대한 남편들의 ‘외조’도 질환 관리에 많은 영향을 주는 요소 중 하나다. 자녀를 떠나보낸 빈 둥지에서 갱년기를 겪는 여성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배우자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부여된 역할에 비해 한국 남성들의 기여도는 높지 않다는 것이 이 원장의 설명이다. “환자들의 상당수는 남편의 이해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고, 애들도 무탈하고, 특별히 힘든 상황도 없는데 왜 유난스럽게 구냐고 하죠. 아내가 아파도 그런가보다 하다가, 감정기복이 심해지면 되레 화를 내요. 감싸줘야 한다는 생각은 못하는 것이죠. 이 고비를 지나 노년기로 접어들면 감정기복은 줄어들게 되어 있어요. 계속되는 것이 아니므로 슬기롭게 갱년기를 보내는 지혜가 필요해요. 위기를 잘 넘으면 함께 건강하게 살면서 아름다운 노년을 보낼 수 있어요. 하지만 갱년기를 겪을 때 배우자와 갈등이 깊어지면 회복되기 어려워요.”
- 2018-05-16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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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도 사랑도 모두 잡은 스포츠 부부
- 이들을 회사원으로 따지자면… 사내 커플…? 동료에서 애인으로, 애인에서 부부로! 같은 일을 하기에 더욱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이들. 함께 땀 흘리며 사랑을 키워온 스포츠 선수 부부를 알아봤다. 원정식 ♥ 윤진희 2008년 베이징올림픽 여자 역도 53kg급에서 값진 은메달의 성적을 거둔 윤진희(33) 선수. 시상대에서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보는 사람의 기분까지 행복하게 만들었던 그가 8년 만에 복귀해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기에는 그의 남편의 권유와 응원이 한몫했다고.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바벨을 들어올리다 무릎힘줄이 끊어지는 부상을 겪은 원정식(29) 선수는 두 딸을 낳아 기르고 있는 윤진희 선수에게 “우리 같이 처음부터 시작해서 최정상까지 올라가 보지 않을래?”라며 다시 바벨을 잡을 것을 권유했다. 남편은 부상을 이겨내야 했고 부인은 오랜 공백을 이겨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낮엔 서로 코치 역할을 해주고 밤엔 격려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같은 종목을 하는 부부로서 가지는 장단점은 무엇일까? 윤진희 선수는 “서로 힘든 점을 이해할 수 있고 조언도 주고받을 수 있어서 좋다. 반면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운동할 땐 어쩔 수 없이 제일 보여주기 싫은 모습을 보여줘야 해 안 좋다”고 말했다. 안재형 ♥ 자오즈민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탁구 남자 단체전 금메달, 1988년 서울올림픽 탁구 남자 복식에서 동메달을 따며 이름을 떨쳤던 안재형(54)과 중국의 탁구선수 자오즈민(56)의 결혼 소식은 1989년 큰 화제로 떠올랐다. 특히 그 당시 미수교국이었던 한국과 중국 간의 국제결혼이란 점에서 더욱 놀라웠다. 둘의 첫 만남은 1984년 파키스탄에서 열린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뤄졌다. 서로를 알게 된 후 편지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비밀연애를 이어나갔다는데! 중간에 둘 사이를 폭로하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몇 차례 결별 위기가 있었지만 1989년 스웨덴 스톡홀름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혼인신고를 마침으로써 법적 부부가 됐다. 아들 안병훈 씨는 현재 PGA투어(미국프로골프), 유러피언투어에서 골프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김동문 ♥ 라경민 적에서 동반자가 된 커플도 있다. 바로 한국 배드민턴을 대표하는 최강 혼합복식조 김동문(44)-라경민(43) 선수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배드민턴 혼합복식 결승전에서 만난 박주봉-라경민 조와 김동문-길영아 조. 당시 사람들은 박주봉-라경민 선수의 우승을 점쳤지만 김동문-길영아 조가 역전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후에 박주봉 선수는 “김동문 선수가 아내 될 사람한테 엄청 공격을 퍼붓더라”며 그날의 경기를 회상했다. 애틀랜타올림픽 이후 박주봉, 길영아 선수가 은퇴하면서 김동문, 라경민 선수는 자연스럽게 혼합복식 파트너가 되었고 14개 대회 연속 우승, 국제대회 70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김동문 선수는 “같은 팀이 되어 운동을 하다 보니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사이가 됐다. 서로 의지하다 애정이 생겼다”고 말했다. 2003년에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두 사람은 당시 김동문의 절친이자 룸메이트였던 하태권 선수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비밀리에 연애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일화 중 하나로 김중수 대표팀 감독이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앞두고 두 사람이 진짜 연인관계가 되면 조직력이 더 좋아질까 싶어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줬지만 별다른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남녀관계는 인력으로 안 되는 것 같다”며 포기했다고 한다. 현재 김동문 선수는 원광대학교 교수로, 라경민 선수는 배드민턴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동 중이다. 공병민 ♥ 이신혜 선수촌에서 레슬링 유니폼을 입고 웨딩 촬영을? 이 특별한 웨딩 사진의 주인공은 레슬링 국가대표 부부 공병민(27)-이신혜(26) 선수다. 부산체육고등학교 레슬링부 선후배로 만난 두 사람은 고교 시절부터 연애를 시작해 2014년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일명 ‘쫄쫄이’ 레슬링 유니폼을 입고 웨딩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이신혜 선수는 “처음에는 너무 과격해 보일까봐 걱정했지만 레슬링 부부로서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마침 남편도 같은 생각이라 진행하게 됐다”고 전했다. “결혼 전에는 서로를 응원하면 ‘자기 운동은 열심히 하지 않고 연애만 한다’는 안 좋은 시선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며 누구보다 남편을 열심히 응원한다는 그녀다. 국가대표 선수인 두 부부에게 선수촌은 그야말로 신혼집과도 같은 곳. 이신혜 선수가 꼽은 태릉선수촌 베스트 데이트 장소는 바로 크로스컨트리 연습장! 산악코스와 산책로로 이루어져 있어 연습시간이 아닐 땐 거의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특히 저녁의 크로스컨트리 연습장은 데이트하기에 아주 딱이라고.
- 2018-05-14 11:11